기적의 시작

[요한복음 6장 1절~15절]
1절 -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절 -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절 -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절 -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절 -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절 -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절 -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리이다
8절 -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절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절 -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절 -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절 -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절 -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절 -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1.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생긴 문제는 무엇이며,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습니까?(5절)
예수님과 제자들은 많은 무리를 먹여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이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옴으로써 발생했습니다.
* 예수님과 제자들이 직면한 문제는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그것을 보고 들은 많은 무리가 몰려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몰려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여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몰려왔기에 문제도 커지고 힘들어졌습니다. 때로 부흥은 문제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싫어서 부흥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작은 식당을 열었는데 손님이 많이 와서 부흥되었다면 일하는 사람도 두어야 하고, 식당과 주차장을 넓혀야 하는 문제도 생길 것입니다. 부흥이 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싫어서 차라리 장사가 안 되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도 부흥하면 신경 쓸 일이 많아집니다. 시설도 늘어나야 합니다. 주차장 문제도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부흥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가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는 부흥을 꿈꿔야 합니다.

2. 빌립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합니까?(7, 9절)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 와도 부족할 것이라고 했고, 안드레는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습니다. 빌립은 떡을 밖에서 사 오려고 했고, 안드레는 현재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서 떡을 찾았습니다.
* 빌립의 생각은 떡을 사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이미 ‘우리 안에는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일 만한 것이 없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를 타인 의존적으로 만들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신에 대해 열등감까지 품게 만듭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문제의 현장에서 해결의 열쇠를 찾고자 했습니다. 그는 한 아이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것을 해결할 열쇠를 함께 주십니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의 남편은 많은 빚을 지고 죽었고, 남편이 진 빚을 갚지 못하자 여인의 두 아들은 종으로 팔려야 할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여인은 엘리사가 무엇으로든 자신을 도와주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녀에게 돈을 주는 대신에 그녀의 시각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엘리사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아직 많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한 병의 기름, 그릇을 빌려 줄 많은 이웃, 그리고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3. 안드레가 가져온 떡과 물고기는 누구의 손에 드려졌습니까?(11절)
떡과 물고기는 예수님께 드려졌습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떡과 물고기는 예수님께 드려졌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모여 있는 들판은 문제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해결의 열쇠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가지고 있던 떡과 물고기가 문제 해결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떡과 물고기만으로 많은 무리가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현장에 떡과 그 떡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곳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가 있는 그 현장을 다시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게 될 때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신 것을 깨달은 자가 해야 할 일은 그 문제를 주님 앞으로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과부의 경우 한 병 기름과 많은 빈 그릇과 두 아들만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문제 많은 그녀의 가정에 하나님이 함께하셨습니다. 그녀가 기름병을 기울여 기름을 따를 때 하나님은 기름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오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4. 한 아이가 가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묵상하면서, 내게 어려운 문제가 닥쳤을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많은 무리를 먹이는 데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그것을 가진 아이는 문제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아이는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라는 말씀처럼 오늘날도 문제가 많은 가정에, 교회에, 직장에 ‘여기 한 남자가 있어’, ‘여기 한 집사가 있어’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 자신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만히 살펴보면 떡과 물고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바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됩니다. 다윗이 좋은 예입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골리앗을 물리치는 일에 자신을 던졌습니다. 아무도 나서지 않았던 그때 다윗은 용기 있게 나아가 골리앗을 무찔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 또한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헌신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5. 나의 능력과 소유로는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님은 문제투성이 현장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고 형통할 때만 함께 계시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삶의 문제로 신음할 때, 괴로워할 때, 바로 그곳에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떡과 물고기를 드리고, 생명까지 문제 해결을 위해 내놓는다 하더라도 우리 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셔서 도우셔야 합니다. 한 아이가 내놓은 떡과 물고기는 사실 한 사람의 식사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하실 때, 그 떡과 물고기가 주님의 두 손에 올려질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저를 써 주옵소서. 주님의 능력과 은혜로 문제를 넉넉히 해결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을 던지지 않고 뒤로 피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함께 계신 주님을 모르거나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치유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5장 1절~9절]
1절 -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절 -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절 -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절 -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절 -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절 -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절 -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절 -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 예수님과 병자가 만난 장소는 어디이며, 그 병자의 병은 얼마나 오래되었습니까?(2, 5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병자를 만나셨습니다. 그는 무려 38년째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 예수님이 병자를 만나신 곳은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였습니다. 그곳은 늘 많은 환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많은 환자가 모인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에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간 사람은 병 고침을 받는다는 전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는 ‘은혜(자비)의 집’이란 뜻입니다. 병자들은 베데스다 연못이 자신들의 은혜(자비)의 집이 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나신 38년 된 병자에게 베데스다는 은혜(자비)의 집이 되지 못했습니다. 38년은 정말 긴 세월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가 베데스다에 찾아온 이유는 연못에 전해 내려오는 전승 때문일 것입니다. 그가 연못가에 온 것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그는 많은 좌절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연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병자를 치유하시기 전에 하신 질문은 무엇입니까?(6절)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딱한 형편을 아셨습니다. 병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 왔는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치유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그의 병이 오랜 줄 아시고 먼저 말을 건네신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질문 한 가지를 먼저 하셨습니다. 그 질문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였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병 고침에 대한 그의 의지를 확인해 보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느냐? 38년 정도 앓았으면 인생을 포기할 만도 한데, 아직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았느냐? 지금도 낫고 싶은 의지가 있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는 자신은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단지 돕는 사람이 없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병자에게 중요한 것은 의지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굳센 의지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은 병자에게 무엇을 명하셨습니까?(8절) 그 병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9절)
예수님은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병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치유자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치유 역사는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은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라고 말씀하셨고, ‘치유의 광선을 비추리니’(말 4:2)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병자가 예수님께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나를 불쌍히 여긴다면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 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연못에 넣어 주는 정도의 도움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바로 그를 치유하셨습니다. 연못에 들어가는 과정 없이 치유하셨습니다. 그는 즉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주님은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병자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38년이나 누워 있었기에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가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는 일어났을 때 자신의 온몸에 힘이 생기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연약한 다리에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 모든 연약함을 맡기기만 하면 주님은 힘과 새로운 의지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4. 벌써 떠났어야 할 자리인데, 연약함을 핑계로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까?
병자는 38년 동안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38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는 마비된 삶을 살았습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육체적 질고는 그에게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풍요로운 삶을 빼앗아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침상에 누운 채로 인생을 허비하는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주일 성수조차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능력 있게 복음을 전하고 힘 있게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성격적인 연약함 때문에 교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대인관계를 잘하지 못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축도가 끝나기 무섭게 눈인사도 하지 않고 총알같이 나가 버립니다. 여러 해가 지나도 변화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이제라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곳이 어딘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치유하시는 주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5. 주님께 고백하고 맡겨야 할 나의 연약함은 무엇입니까? 주님만 의지할 때 주님이 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실 것을 확신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하시고 회복시키는 분입니다. 그분보다 우리를 더 잘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오장육부와 사지백체를 주님처럼 알고 계신 분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십니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단은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맡겨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의 치유의 능력을 부인하기도 합니다. 일부에서는 그런 능력은 성경 시대로 종결되었으며, 더 이상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적 태도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창조 때나 구약시대 혹은 신약시대 이후 지금까지 주님의 능력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치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픔과 고통과 문제를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도 믿음으로 주님 앞에 아뢰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생수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4장 1절~10절]
1절 -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절 -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절 -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절 -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절 -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절 -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절 -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절 -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절 -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구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한 곳은 어디입니까?(5~6절)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수가에 있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였으나 르호보암 시대에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했는데, 앗수르는 북 이스라엘에 자신들이 정복한 여러 민족의 사람들을 이주시켰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 이스라엘 안에는 다양한 민족이 섞여 신앙과 혈통이 혼합되었습니다. 주전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했는데, 그들은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훗날 바사 왕 고레스는 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은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타락한 것을 보고 그들을 멸시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그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는 것조차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으로 가셨고,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셨습니다. 이는 죄인들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2.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을 때, 여인은 어떻게 반문합니까?(9절)
여인은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반문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극도로 멸시하는 상황인데도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여인은 유대인이 자기 동네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랐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하게 여겨 가급적이면 그들의 땅조차 밟지 않으려 하는 상황인데, 유대인이 자기 동네 우물가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남자였고, 자신은 여자였습니다. 당시 여자들은 인구조사에서 제외될 정도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인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니, 여인은 무척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은혜였습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반문한 것은 자신이 놀라운 은총을 입고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물가에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물을 요구하시는 장면은, 이 땅에 성육신하실 때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낮고 천한 모습을 취하시는 구세주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세상에 오신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 사실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3. 여인의 반문에 대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10절)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유대인 남자’로만 생각했고, 유대인 남자가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 때문에 당황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들을 위해서도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유대인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요청하셨지만 사실 예수님이야말로 여인에게 진정한 생수를 주실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드리는 물은 마시고 돌아서면 다시 목이 마르게 되지만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수는 바로 그분 자신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4. 우리는 평소에 무엇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지 나눠 보십시오.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나름대로 인생의 만족을 추구하면서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은 벌거벗은 듯한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라고 말씀하셨고, 여인은 당황하며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둘러댔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동안 다섯 명의 남자들과 살았지만, 그중 어느 남자도 자신의 남편이었던 적이 없었고, 그 누구에게서도 만족을 누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갈증을 안고 살아온 불쌍한 여인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여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누리는 것 같지만, 그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늘 공허합니다. 이것은 마치 물을 찾아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사람과 같습니다. 물 한복판에 있지만 갈증으로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마실 만한 물은 없습니다. 물에 에워싸여 있을지라도 한 모금의 물이 없어 죽어 간다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이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5. 내 영혼을 예수님으로 채우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며, 예수님으로 채우기 위해 내 안에 버려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나눠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모두 알고 계신 예수님께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것에 관해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배드리는 내용이 중요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소망하는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6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에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자신이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거했습니다.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는 행동은 상징적입니다. ‘버린다’라는 것은 ‘얻기 위한’ 행동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사람들은 모두 버리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자랑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여인은 일시적인 물이 아닌 영원한 물을 얻기 위해 물동이를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적인 물동이를 버려야 합니다. 그 물동이로 길어 올리고자 했던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한꺼번에 버릴 수 없다면 작은 것부터 버리십시오. 지금 우리에게는 버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

[요한복음 3장 16절~21절]
16절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절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절 -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19절 -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절 -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절 -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1.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어떤 대가라도 지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실제로 행한 가장 큰 희생은 무엇입니까?
희생은 물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희생은 덜 귀한 것을 구하기 위해 더 귀한 것을 버릴 때 깊은 의미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희생은 때로 맹목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희생은 언제나 사랑의 관계를 전제로 이뤄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가치로 매울 수 없는 간격을 사랑이 메워 주기 때문입니다. 희생은 가치와 사랑을 더해야 매길 수 있는 값입니다. 그리고 가치보다 사랑이 더 클 때 지불될 수 있습니다. 사랑할 때 무가치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희생할 수 있습니다.
각 지체들의 사랑에 희생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희생이 없었더라도 서로 섬기겠다는 마음만이라도 표현할 수 있으면 충분한 나눔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던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16절 상반절)
아마 요한복음 3:16보다 유명한 성경 구절은 없을 것입니다. 이 구절이 그토록 유명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이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속죄 제물로 최고의 제물인 자신의 아들을 선택하신 이유이기도 하고, 그 사랑의 대상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처럼)이라는 말 안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처럼)이라는 표현 안에 하나님의 최고 사랑이 녹아 있습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을 주시며 그분의 전부를 주시는 사랑입니다. 게다가 그 사랑을 받을 사람은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격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세상 사람을 향해 나아갑니다. 선택된 몇몇 사람들에게만 전해지는 사랑이 아니라 시대, 인종, 성품 등을 초월해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데에는 (이처럼)이라는 깊고 넓은 사랑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도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3.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선물은 무엇입니까?(16절 하반절)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십니다. 아담 이후로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속성인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 합니다. 하지만 이 선물은 자동으로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자동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불신앙과 거부로 그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영생의 삶을 대신해 멸망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영생과 멸망이라는 두 가지는 영원히 계속 된다는 측면에서 일치하지만, 삶의 질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납니다. 믿음으로 영생을 선택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열락이 기다리지만, 멸망을 선택하면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는 영원한 고통을 선택한 적이 없다’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 바로 멸망을 선택한 것이고 그분을 믿지 않은 것이 바로 고통을 선택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은 모든 사람 앞에 주어졌지만, 그 선물을 믿음으로 여는 사람만이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그 선택이 결국 영생을 결정하고 영원히 살 장소를 결정하게 됩니다.

4.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습니까, 심판을 받습니까?(17절)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물론 마지막 때가 되면 예수님은 친히 심판주가 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을 심판하기만 원하셨다면 세상에 오시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세상을 아무리 둘러봐도 의인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그런 세상을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기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해 지시고 겸손하게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제사를 받으시고 누구든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죄에 대해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분의 아들이 사람들을 대신해 죽어서 사람들의 죄를 덮어 버렸다고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 중에 심판받을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영생을 얻은 사람들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입니다.

5. 나는 언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까? 또 예수님이 나와 함께하심으로써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사람들마다 예수님을 영접한 계기와 시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또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고, 우리의 처소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변해야 하는 것은 삶입니다. 신분이 바뀌고 사는 곳이 바뀌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자녀들도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6. 하나님은 가장 귀한 아들을 세상을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은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다양한 헌신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섬깁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예배와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찬송하고 높이는 자녀들에 대해 즐거워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올 때 기뻐서 춤을 추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구원의 감격으로 뜨겁게 예배하고, 그 감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됩니다. 뜨거운 예배와 영혼 구원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십시오.



출처 : 생명의 삶

말씀이신 하나님 

 

[요한복음 1장 1절~8절]

1절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절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절 -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절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절 -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절 -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절 -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절 -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1. 태초에 계셨던 말씀은 곧 누구이십니까?(1절)
태초에 계셨던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로고스’(lo,goj)입니다. 로고스는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우주의 근본 원리요, 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로고스라는 개념을 예수님께 적용했습니다. 로고스를 예수님께 적용한 시도는 순교자 저스틴 등이 중심이 된 로고스 기독론에서 두드러집니다. 당시 로마 세계는 예수님의 신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사생아라고 비난하는 등 비하를 일삼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할 때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로고스가 신적 존재인 것처럼 예수님도 신적 존재로서 신앙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의 로고스 개념은 신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부보다 열등한 존재로 인식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은 신이지만 처음부터 신이었던 것은 아니라든지, 혹은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종속론’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이 곧 하나님임을 명백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2.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3절)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만물 중 말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로고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선언하면서, 그 증거로 그분이 모든 창조의 주체임을 밝혔습니다. 또한 모든 피조물 중에 로고스 없이 지어진 것은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로고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성경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창조는 성부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예수님은 구속 사역에만 관계하셨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제2위이시며, 창조 사역부터 현재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창조하셨고, 성자 예수님이 나머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은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 분이며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신 분입니다.

3. 그 말씀 안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4절)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이 창조자 하나님이라는 것은 그분 안에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는 가장 위대한 생명의 역사입니다. 창조로 인해 이 세상에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늘에는 새가 날고, 바다에는 물고기가 살고, 땅에는 온갖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과목들이 살게 되었고, 후에는 동물과 사람까지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고, 그분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오늘날도 생명과 관련된 인간의 노력이 대단하지만, 결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능력에 미칠 수는 없습니다. 생명과학들, 유전과학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도전하지만, 이는 하나님께 대한 교만한 도전이요, 무익한 도전일 뿐입니다. 이것들이 결코 참된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또한 말씀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능력은 육체적 생명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육체적 생명은 죄로 인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한계를 극복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안에는 육체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모두 있습니다.

4.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7절).
하나님은 말씀이신 예수님, 곧 하나님 자신을 증거할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세상에 태어났고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은 세례 요한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증거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을 증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성경을 읽고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 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삶의 모델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한때 남미를 중심으로 유행했던 해방신학은 행동 모델로서의 예수님을 강조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의 행동 모델이시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구주임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육체적으로 생명을 주시고 강화(强化)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우리 육체에 건강을 주시고, 삶에 복을 주시는 분 정도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복적인 기독교가 됩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만족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적, 영적 생명 모두를 축복하시고 강화하시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5. 생명이며 빛이신 말씀에 대해 증언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 보십시오(8절).
우리가 최선을 다해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증거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 외에 그 어디에도 생명을 얻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생명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분명했습니다. 그의 사명은 메시아의 오심을 ‘증언하러 왔으니’(7절)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생명에 대해 증거하는 증인일 뿐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은 그가 오실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많은 바리새인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요한은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며,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쇠해야 하고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자신은 신랑이 아니고 신랑 옆에서 기뻐하는 신랑의 친구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생명도 아니요, 빛도 아니요, 단지 생명과 빛에 대해 증거하는 증인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이 부분에서 넘어집니다. 위대한 목회자는 있을 수 있지만, 결코 그가 구주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라’라고 해야지 ‘나를 보라’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때는 오직 그분만 높이고 돋보이게 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제목 : 복음의 기쁨을 회복합시다 (오정현 목사)

[요한복음 16장 16절~22절]
16절 - 조그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절 -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절 - 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절 -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절 -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절 - 지금은 너흭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복음에는 세상의 흐름을 압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사상이나 정치를 초월합니다. 따라서 사회가 아무리 부정적으로 흐르더라도 교회는 이 복음의 능력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약한 존재인 우리들을 향하여 확실한 보증을 해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붙잡히시기 전날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돌아가신 것 자체는 슬픈 일이지만 부활하심으로 기쁨이 되어주신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게 될 때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는 두 가지의 근거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입니다. 이 두 가지 근거에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의 독특한 기쁨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기쁨의 특징 첫 번째는, 십자가의 피의 복음을 통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일시적이 아닌 영원한 기쁨입니다. 그리스도 피의 복음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기쁨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님의 피 값만큼 귀한 존재로 보아주시는 것입니다.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죽음의 천사의 칼날이 임하지 않고 넘어갔던 것처럼, 우리의 도덕이나 성실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피의 능력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이 보혈의 능력이 확인될 때, 삶의 무거운 짐들은 벗어지고 진정한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를 통한 기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살아계시고 지금도 우리와 동행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임재 하신다는 사실을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차원이 다른 기쁨이 샘솟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원히 죽지 않으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붙잡고 계심에서 오는 기쁨도 영원히 사라자지 않습니다. 또한 그 주님의 임재가 나와 함께 하실 때에 분리할 수 없는 기쁨이 됨으로,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이 주님과의 동행에 대한 의식이 새로워지고 각인되고 재확인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놀라운 기쁨이 우리 안에서 넘치는 것입니다.

이런 피의 복음과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두 가지로 기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땅의 것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답답해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열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이 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순간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형벌이 아니라 최고의 선물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형벌이지만 우리에게는 영원한 치유가 되므로, 현재 어렵더라도 멀리 내다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영광에 눈이 열리면 더 큰 생의 목적에 사로잡히는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람들의 칭찬,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주님이 더 영광 받으시는 것에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거두는 통로로서 그 나라의 확장을 위해 살아가는 큰 목적에 사로잡혀 기쁨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기쁨은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이 기쁨을 삶의 태도로 가질 때 우리는 환경과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그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피 묻은 복음과 부활하신 예수님의 임재를 통한 변치 않는 영원한 기쁨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요한복음 1장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본문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충만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본질적인 신성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골 2:8). 그 안에는 또 완전한 인간의 충만함이 있습니다. 이는 육체로 나타나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피 안에는 대속의 효력이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이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요일 1:7).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는 의롭게 하는 의의 충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롬 8:1). 그의 간구 속에는 하나님의 능력의 충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히 7:25). 그의 죽으심 속에는 정복의 충만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죽음을 통해 사망의 권세 가진 자, 즉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의 부활 속에는 유효성의 충만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산 소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벧전 1:3). 그리스도의 승천 속에는 기쁜 승리감이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이는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엡 4:8). 그 속에는 온갖 종류와 형태의 축복들이 충만히 있으며, 용서의 은혜, 중생의 은혜, 성화의 은혜, 보존의 은혜, 온전케 하시는 은혜가 충만히 들어 있습니다. 그 속에는 또한 모든 때를 위한 충만이 있으니, 불행이나 재난의 때에는 위로의 충만이, 번영의 때에는 인도의 충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모든 속성, 즉 지혜와 능력과 사랑의 충만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은 우리가 다 알기는커녕 그것을 다 조사하기조차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두 받게 될 충만이 얼마나 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시내가 항상 흐르고 있을 때는 그곳에 틀림없이 충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샘은 영원토록 충만하고 풍부하며 자유롭게 솟아오르는 샘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와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다 받아 가십시오. 구하되 크게 구하십시오. 그러면 크게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충만”은 절대로 다함이 없는 충만이요 궁핍한 자들이 모두 닿을 수 있는 곳에 쌓여 있는 충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임마누엘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그 샘에 닿을 수 있습니다.


출처 : 스펄전의 아침묵상

제목 : 불안은 극복할 수 있다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14장 27절]
27절 -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다 겉으로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구석에는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고 있으며, 그 가운데 또 얼마는 불안의 장애를 가지고 밤낮없이 시달리면서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고, 다루고 해결해야 될 문제 대부분이 우리의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할 때에는 불안을 느끼죠.

어떻게 하면 이 불안을 처리하면서 살 수 있을까? 본문에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제 십자가에 죽으실지 모른다고 하는 불안이 감돌고 있는 아주 험악한 분위기입니다. 제자들이 볼 때에는 예수님이 이번에는 무사할 수가 없다고 하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듭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신 주님께서는 자기 마음에 있는 평안, 즉 ‘나의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이 ‘나의 평안’은 좀 다른 데가 있습니다. 이 평안은 달라고만 하면 금방 얻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나의 평안’은 우리가 어떤 합당한 조건들을 갖출 때 뒤따라오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아버지라고 불러도 그저 막연히 어떤 격식을 차려서 부르는 호칭이 아니었어요. 아빠라고 불렀어요. 예수님도 세상에 사시면서 하나님을 어린아이가 자기 아빠를 보듯이 보면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주님이 가지신 그 평안을 우리의 것으로 늘 마음에 간직하고 살 수 있다고 말씀을 합니다.

둘째, 철저한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생명보다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불안을 느끼지 않으려면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불화는 우리에게 불안의 씨앗을 심습니다. 공포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평안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셋째, 간절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기도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기도가 불안을 극복하는 비결이었습니다. 주님이 드리신 기도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기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였습니다. 더할 수 없는 약함, 더할 수 없는 슬픔, 더할 수 없는 고뇌가 그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은 사탄의 시간이었고, 어두움의 시간이었는데, 주님은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피 땀을 쏟으며 전력을 다해 하나님 앞에 ‘아바 아버지여’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평안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험한 세상, 무서운 세상을 사시면서 항상 그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평안을 마음에 담고 사는 아름다운 주의 백성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을 그리고 내가 기도할 때마다 들으시는 아버지 되심을 믿고 순종하며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2003.3.30)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21장 15절~25절]

15절 -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절 -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절 -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절 -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절 -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절 -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스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절 -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절 -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절 -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세상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답을 듣는 자리에 일어나는 놀라운 이적들을 아시나요? 사랑의 고백 한 마디로 병석에서 툴툴 털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새 출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만큼 사랑은 대단한 것입니다.

아침 햇살에 따스하게 비치는 해변가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받자마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 숨을 돌리고 나서 주님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불안이 생기고 근심이 생겼습니다. ‘왜 이렇게 두번, 세번 반복해서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실까? 나를 못 믿어해서 그럴까? 아니면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지금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

예수께서 왜 이렇게 같은 질문을 세번이나 물으셨을까?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를 영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고 줄행랑을 쳤던 베드로는 그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다 구멍나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처절하게 병들고, 지쳐 있는 그를 향해서 3번이나 반복하신 것은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대답을 3번하면서 베드로는 치유받고 있었습니다. 세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로부터 그는 아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여러분, 베드로의 남은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둘째로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한평생 두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요, 또 하나는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야 되는 사역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맡기는 교회를 일컬어서 내 양이라고 말합니다. 내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양이 누굽니까?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이 양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맡겼습니다.

셋째로 베드로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사랑은 진정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래를 놓고 대단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언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18절).

이 자리에 성령이 임하여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젊음이 주님의 교회와 양들을 돌보는데 쓰임받는 멋지고 영광스러운 젊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1999.5.16)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제목 :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옥한흠 목사)

[요한복음 13장 36절~38절]
36절 -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절 -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절 - 예수께서 대다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잠깐 너희와 함께 있다가 떠나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주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하는 이 질문은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는 길을 나도 따라가겠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 생활입니다. 제자가 뭡니까? 선생 가는 데로 따라가는게 제자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까? 예수님뿐입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주님은 순종하셨고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 뜻을 위해 희생하기를 원하는 자가 걸어가는 길에는 꼭 중요한 요건이 하나 필요합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큰소리쳤던 베드로는 자아가 깨어지는 처참한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한 실패를 거친후에야 자기를 찾아오셔서 나를 따르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은혜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아가 깨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자아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배우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시간이 걸리더라도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내 자아가 하나하나 깨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여러분이 은혜를 맛보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끝까지 내 자아를 깨트리기를 거부하면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우리 자아를 깨트릴 것입니다.

C.S.루이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의 모습은 아직 하나의 모형에 지나지 아니할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참 아들이 당신 곁에 계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변화시켜서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삶, 사상을 당신에게 주입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모형이 실물로 점점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겉모양만 갖고 있던 우리가 작은 예수로 점점 변해간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을 따라갑시다. 여러분 가운데는 지금은 안돼 하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후에는 반드시 따라오도록 할 것입니다. 주님에게 순종하세요. 그래서 우리 남은 인생을 멋지게 삽시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신나게 한번 웃읍시다.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 말씀은 옥한흠 목사의 주일설교(1999.3.8)를 요약,정리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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