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저축생활

[창세기 41장 25절~36절]
25절 - 요셉이 바로에게 아뢰되 바로의 꿈은 하나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
26절 -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니 그 꿈은 하나라
27절 -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28절 - 내가 바로에게 이르기를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신다 함이 이것이라
29절 - 온 애굽 땅에 일곱 해 큰 풍년이 있겠고
30절 - 후에 일곱 해 흉년이 들므로 애굽 땅에 있던 풍년을 다 잊어버리게 되고 이 땅이 그 기근으로 망하리니
31절 - 후에 든 그 흉년이 너무 심하므로 이전 풍년을 이 땅에서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이다
32절 -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니
33절 -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시고
34절 - 바로께서는 또 이같이 행하사 나라 안에 감독관들을 두어 그 일곱 해 풍년에 애굽 땅의 오분의 일을 거두되
35절 - 그들로 장차 올 풍년의 모든 곡물을 거두고 그 곡물을 바로의 손에 돌려 양식을 위하여 각 성읍에 쌓아 두게 하소서
36절 -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일곱 해 흉년에 대비하시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애굽의 바로 왕이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하수에서 올라와 풀을 뜯어 먹고 이어 파리하고 흉칙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더니 먼저 있던 일곱 살찐 소를 다 잡아먹는 꿈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또 잠이 들었는데 한 곡식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뒤를 따라서 쇠약하고 바싹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서 충실한 일곱 이삭을 다 삼켜버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심상치 않는 꿈을 꾸고난 바로 왕은 애굽의 온 술객과 박사들을 불러서 그 꿈을 해석하라고 했더니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을 때 바로의 술맡은 관원이 전에 옥에 갇혔을 때 요셉의 꿈 해몽대로 자기가 풀려 나온 것을 기억하고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에 바로 왕이 요셉을 불렀을 때 요셉은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즉,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나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은 앞으로 7년동안 전례없는 큰 풍년이 들 것을 의미하고, 파리하고 흉칙한 암소 일곱 마리와 쇠약하고 바싹 마른 일곱 이삭은 7년 풍년이 든 후에 올 7년 대흉년을 보여준 것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로에게 말하기를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을 택하여 매해 풍년이 들 때마다 수확의 5분의 1씩 거두어 '각 성에 적치(積置)하고 저장(貯藏)하여 일곱 해 흉년을 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바로 왕이 요셉에게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하면서 요셉을 대애굽의 총리 대신으로 삼아 흉년을 위하여 곡식을 저축하게 해서 흉년을 무사히 넘긴 사실이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풍년의 기회가 왔을 때 흉년을 위하여 저축해 둔 것과 같이 신앙생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믿음을 저축해 두는 사람이 지헤있고 명철한 사람입니다. 육신적으로 잘 사는 사람도 잘 저축할 줄 아는 사람인 것과 같이 영적으로 잘 살고 축복받는 사람도 믿음을 저축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믿음의 저축 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드려서 여러분도 지혜있고 명철한 신자가 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풍년이 들 때가 있고 흉년이 들 때가 있는 것처럼 신앙 생활도 항상 믿음이 강건하고, 성령이 충만하고 기도를 잘 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떨어지고 믿음이 약해지고 혼란의 날이 올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저축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저축생활이란 과연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1. 영적인 저축생활
첫째, 기도의 저축생활이 필요합니다.
제가 시골 작은 교회에서 목회할 때 책 살 돈도 없고, 서울 구경 나올 돈도 없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심방도 많이 못합니다. 농번기에는 집에 가야 사람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때 만 4년간 기도하고 성경보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후 깨달은 것은 그때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무릎 꿇는 연습을 많이 시켜서 영력을 얻게 한 후에 더 크게 쓰시고자 하는 섭리가 계셨던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해두지 않았다면 결코 오늘날의 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의 모친께서는 평생 새벽기도, 철야기도, 혹은 금식기도를 하시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좌우간 무슨 문제가 생겼다 하면 하나님께 더욱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 7남매가 다 신앙 생활 잘하고 어머니가 기도를 많이 저축해 두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비교적 큰 어려움 없이 목회를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저축하십시오. 기도는 지금 통장에 저축하는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그 효과가 나타납니다. 할 수 있을 때 기도하고 오래 기도하고 광법위하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병들거나 영력이 떨어지거나 환난이 오면 할 수 없는 때도 옵니다.
지금은 큰 교회의 목사님이되신 차관식 목사님이 목사가 되기 전 저의 교회에 다니던 때의 일입니다. 그분은 참 착하신 분으로 기도도 열심히 하고, 새벽기도도 잘하고, 성령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또한 십일조도 잘 하는데 복을 못받고, 장사하는 것마다 잘 안되고 망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람 기도하는 소리를 듣는 가운데 그 사람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목사가 되라고 했더니 처음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명을 부인하다가 얼마후 시골 교회를 하며 신학을 해서 지금은 큰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 어머니가 그 아들을 위해서 목사가 되게 해달라고 30년이나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하는 사람이 지혜있는 신자입니다.
둘째, 말씀의 저축을 해야 합니다.
북쪽에 사는 우리의 동포들은 지금도 성경을 마음대로 구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불행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평안하고 복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마음대로 성경볼 수 있고, 마음껏 예배드리고 설교를 듣고, 그것도 부족할까봐 부흥회를 열어서 천국 잔치를 통해 실컷 먹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늙어서 눈이 어둡고 기억력이 쇠퇴하면 성경을 읽을 수가 없는 때가 옵니다. 말씀을 많이 기억하고 많이 외워두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라'고 했는데 새기는 법은 말씀을 기억하고 암송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심령에 많이 저축해 두면 두고두고 많은 축복을 받고 필요할 때 기억해 두었던 말씀으로 하나님이 계시하고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2. 시간의 저축생활
우리의 시간을 육신만을 위해서 쓸 때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위해 바치는 시간, 주님의 일을 위해 쓰는 시간은 영원히 남는 것이요 자신에게 참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7일 중 6일은 우리를 위해 쓰되 최소한 하루 주일만은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독일과 일본이 이 주일을 없애버렸더니 결국 망했었고, 미국은 그 선조들부터 이 주일을 잘 지켰더니 복을 받았습니다.
사 58:13, 14절에 보면 "주일을 거룩하고 존귀하게 잘 지키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얻고 땅의 높은 곳에 올려주고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이 죽고 사는 문제, 국가의 생사가 달린 군인들의 전략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신자가 주일을 범하고 놀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죽고, 등산 갔다가 죽고, 수영 갔다가 익사해 죽음으로써 삶의 시간을 빼앗겨 버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진정 시간을 하나님께 많이 저축해 두어야 내 시간이 유익하게 쓰여집니다.

3. 물질의 저축생활
물질을 세상에만 쌓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믿음으로 하늘에 쌓아두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 6:19, 20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하늘에 저축하는 자야말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물질을 세상에 저축한 사람보다 천배 만배 나은 보상을 받게 됩니다.
첫째, 십일조와 헌금으로 저축하십시오.
하늘에 저축하는 가장 중요하고 첫째되는 비결이 바로 온전한 십일조 생활입니다. 이 십일조를 성실히 실천하여 자손과 후손이 수백 수천배로 받아 쓴 체험을 한 사람은 수백만 수천만도 넘을 것입니다.
말 3:10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문을 열고 너희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강력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로 물질을 하늘에 저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고 세상에 저축한 것보다 수천배 더 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은행 적금은 못들어도 계는 못해도 십일조로 하늘에 쌓아둔 저축은 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감사헌금이나 특별헌금, 주일헌금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모두 하늘 은행에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기회있을 때마다, 힘껏 저축해 두면 하나님께서 그 이자를 몇 백배로 갚아주실지 모르는 것입니다.
시 50:14절에서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한 말씀대로 물질로 감사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저축을 많이 해둔 사람은 환난의 날이 올 때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구원해 주시고 부르짖을 때 건져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회있을 때마다 십일조와 헌금을 통해 물질을 정성껏 하늘에 저축해 둔 사람은 자손 대대에 물려가며 하나님의 갚아주시는 축복을 받게 되고 영원한 하늘 나라의 축복을 소유케 되는 것입니다.
둘째, 구제로 저축하십시오.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에게 물질로 구제하는 것도 믿음으로 저축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잠 19:17절에 보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구제해 두는 것은 하나님께 저축해 두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많은 보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잠 11:24, 25절에도 보면 "흩어 구제하여야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부부는 세상 저금통장은 하나도 가진 것이 없지마는 어려운 사람, 부모 형제, 친척, 교인에게 최대한 저축하는 마음으로 힘껏 도우려고 합니다. 솔직히 어떤 때는 어렵고 귀찮을 때가 있으나 그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으로 저축할 기회를 주시는 줄 알고 감사한 마음으로 저축합니다.
전 11:1, 2절에서는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도울 수 있는 것, 돕는 생활을 하면 여러날 후에 여러 배로 도로 찾게 해주십니다.
셋째, 복음 사업 협력을 통해 저축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들을 돕든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해 돕든지 선교사업을 돕든지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직접, 간접으로 돕는 일은 모두 믿음으로 하늘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믿는 순간 받을 수 있지만 축복이나 상급은 많이 쌓아둬야 쌓은 만큼 받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사업에 물심 양면으로 협력할 때 얻는 축복과 상급은 실로 크다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달아보시는 분이며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아무쪼록 생활 전체가 저축하시는 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영적 경건 생활의 저축, 기도의 저축, 물질, 시간의 저축 생활을 하셔서 끝내 크고 영원한 축복과 상급을 차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아 멘 -

탈 규범의 시대와 사단의 역사

[창세기 3장 1절~7절]
1절 -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절 -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절 -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절 -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절 -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절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절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오늘의 시대를 일컬어 '탈규범화(脫規範化)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모든 면에서 전통적인 권위나 가치를 무시하고 모든 규범이나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무조건 전통적인 가치관이나 규범은 싫고 제멋대로 행동하며 제멋대로 살겠다는 것인데,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면 자유로울 것 같지만 도리어 파멸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삶의 규범이나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할 윤리 규범에서 이탈할 때 인류는 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탈규범화의 조류는 하나님의 심판에 다가오는 인류 종말의 징조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규범이란 말은 영어로 캐논(Canon)이라고 하는데 권위, 법전, 교회법이란 뜻이 있고 노름( Norm)이라고도 하는 것은 성경이 표준, 규범, 기준이란 뜻이 있습니다. 성경을 캐논(Canon)이라고도 하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고 모든 가치와 행위의 표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노름(Norm)의 반대는 앱노멀(Abnoral)인데 이것은 비정상이란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람들이 어떤 권위나 질서도 무시하고 삶의 규범이나 기준이 없이 비정상적으로 사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만연한 탈규범의 형태들을 살펴보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얼마나 악한 것인가와 함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탈규범의 형태들
첫째, 우리 시대는 윤리적으로 탈규범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학생이 교수의 머리를 깍고, 학생이 교수의 빰을 때리고, 가장 규범을 잘 지켜야 할 학생들이 국무총리의 얼굴에 계란과 밀가루를 덮어 씌우기도 합니다. 또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갖다 버리거나 죽이기도 합니다. 모든 전통적인 윤리나 도덕의 규범은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많은 광장에서 눈을 감고 차를 몰고 가면서 십수명을 끔찍하게 깔아 죽이기도 합니다.
둘째, 성적으로 탈규범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며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인데, 그런 규범을 무시하고 자기 아내 외에 수많은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거나,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맺는 동성연애가 그렇게 성행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다 못해 에이즈(AIDS)라고 하는 고칠 수 없는 병으로 부분적인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의 규범을 떠날 때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 결과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에 불행을 가져오고 마는 것입니다.
셋째, 머리나 옷의 형태도 전통적인 규범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머리 형태도 균형잡힌 것은 싫고 삐딱하게 불균형이 되어야 멋이 있고 게다가 남자가 여자처럼 길게 기르는 히피 머리가 되고, 여자는 남자처럼 하고 양 옆을 쥐뜯어 먹은 것처럼 하고 다니면서 멋있다고들 합니다. 남자가 여자처럼 목걸이 귀걸이를 하고 여자가 남자옷 입고 남자가 여자처럼 차리고 다니기도 하고 새 옷을 일부러 찢어서 입기도 합니다. 모두 탈규범화 되어가고 불균형(unbalance)해지고 있는 세상입니다.
넷째, 음악도 전통적인 규범을 벗어나서 머리와 얼굴을 귀신처럼 꾸미고 발악하는 소리를 내거나 성행위하는 소리를 지르거나 'Satan, Satan'하면서 마귀를 부르고 찬양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한 소녀는 스스로 가장 파괴적이고 음란한 락엔롤 밴드(Rock and Roll Band)라고 하는 모틀리 클루(Motley Crue)에 도취한 다음에 자신의 변한 모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모틀리 클루의 팬이 된 뒤로 나의 삶은 귀신들린 자로 바뀌었다. 나는 엄마에게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엄마가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부탁하면 나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엄마가 하지 말라면 나는 더욱 했다. 나는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밤에는 늦도록 디스코텍에서 보내고 남자들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짓들을 했다. 내가 작년까지만 해도 얌전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과 교제하고 있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이다. 모틀리 클루의 덕분으로 나는 아주 새로운 삶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런 음악에 빠진 사람들은 마약 중독자가 되거나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거나 자살을 하게 됩니다.
다섯째, 심지어 신학까지도 수천년 내려오며 믿어오던 진리를 왜곡시켜서 예수님의 피의 구속도 안믿고, '부활도 없다 모든 종교는 다 같다'느니 심지어 예수님을 '술주정뱅이', '더러운 놈'이라고까지 합니다. 나아가서 '결코 신은 없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상을 가르치는 교수들이 척결되지 않고 있으니 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넓고 깊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Post Modernism)이니 다원주의니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진리의 규범을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이렇듯 전반적으로 이 시대는 탈규범의 시대입니다.

2. 탈규범의 본질
첫째, 탈규범화는 사단의 역사입니다.
사단 마귀는 인류의 시조를 거짓말로 속이고 하나님의 규범을 어기게 하고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유하는 자가 되면 더 행복해지고 더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규범을 떠난 결과는 오직 수치와 불행과 죽음의 실낙원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맛있는 온갖 열매를 먹으며 자유롭게 살게 하면서 하나의 규범을 정해 주셨습니다. 나라의 질서를 위해 규범이 있듯이 인간에게 한 법을 주셨습니다. 곧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고 했는데, 사단이 간교한 뱀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에게 바짝 다가가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하며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이간질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미혹을 받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래서 하와가 따먹고 아담에게 주어서 먹게 했습니다. 그 결과 행복할 줄 알았는데 수치가 오고 불행이 오고 죽음이 왔습니다. 결국 낙원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단은 오늘날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워 보이는 것을 가지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도와 규범을 어기고 벗어나게 만듭니다. 그러면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규범과 표준을 벗어날 때에는 도리어 좌절과 불행과 파멸이 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날 예수님의 심판의 날이 가까워 오고 사단이 저주를 받아 불못에 던지울 날이 멀지 않았으므로 사단은 최고도로 발악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도와 규범에서 벗어나게 하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원래의 규범이나 가치관에서 역행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10대 청소년들까지 살인, 강도짓을 하고 성폭행, 강간을 일삼고 마약이나 본드, 가스를 흡입하기까지 합니다.
둘째, 탈규범화는 불행과 사망을 초래합니다.
사단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제약이나 통제를 받지 말고 과감히 탈출하라고, 그러면 눈도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 행복해진다고 유혹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규범을 벗어난 결과는 불안과 수치와 멸망, 실낙원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사단의 영에 미혹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규범에서 벗어난 결과는 불안과 수치와 파멸밖에 없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거짓말쟁이요, 행복과 건강과 생명을 도적질하는 놈이요 살인자일 뿐입니다(요 8:44).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탈규범을 인권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수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제와 간섭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살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같지만, 그 결과는 불행과 고통과 영원한 파멸일 뿐입니다.

3. 탈규범의 극복
장마철에 보면 생명이 없는 나무나 물건들은 집채만한 것도 물결을 따라 흐르지만 생명을 가진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흘러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가진 거듭난 신자들은 세상 물결이나 유행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온 세상이 다 사단적인 문화의 물결을 따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안에 살아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본주의(Homocentrism)에서 신본주의(Theocentrism)로 돌아서야 합니다. 사단은 언제나 에덴 동산에서와 똑같은 수법으로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바꾸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율적 인본주의(Autonomic Humanism)의 사상을 신본주의적 사고방식(Theocentric Thought Patten)으로 바꾸는 것이 사단의 역사로 생겨나는 탈규범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시급한 일입니다.
이를 위해서 첫째, 말씀 중심의 규범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기차가 철로를 벗어나면 파멸이 오는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의 규범을 떠날 때 인간은 멸망합니다. 미국이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렇게 부강한 나라가 되었던 것은 청교도들이 철두 철미하게 성경의 규범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십일조를 철저히 하고 죄악을 멀리하며 경건한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자본주의(Capitalism)의 근원을 청교도들이 근검 절약하며 믿음으로 산 데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성경책을 집어던지고 주일이면 모두 놀러가기에 바쁘고 십일조 신앙도 거의 다 없어졌습니다. 그 결과 미국도 걷잡을 수 없이 쓰러져가고 있습니다. 소련을 비롯한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종교는 아편이다', '신은 인간이 만든 허구'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찢어버리더니 73년만에 비참하게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규범에서 탈피하는 것은 사단의 역사요 파멸과 불행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4:33-40절에 보면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며(Cosmos) 사단은 혼돈케 하는(Chaos) 존재입니다. 롬 13:1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권위의 하나님이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권위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권위가 없어지면 혼돈이 오고 파멸이 오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기의 의나 힘을 믿고 자율적 존재가 되려고 할 때 불행과 멸망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사람이 하나도 없고, 오직 우리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겸손히 믿고 의지할 때만 참 평안을 얻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탈규범적 이단 사상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피나 짐승의 피나 다를 바가 없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 외에도 모든 종교에 다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탈규범적 사단의 신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만을 믿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셋째,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아야 합니다. 사단 마귀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육체적 욕망을 자극하여 탈선하게 하고 범죄케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적 욕망을 절제하며 영을 따라 살라고 하십니다. 벧전 2: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규범안에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하나님의 통제와 간섭을 받으며 살 때 부자유한 것 같지만 참 기쁨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멸망에 이르게 하는 탈규범화를 조장하는 마귀에게 속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문화적 규범을 이루며 삽시다. 영적으로 건전한 문화 생활은 여러분의 영혼을 강건케 하고 복되게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아 멘 - 

죄는 쌓아두면 반드시 만난다

[창세기 42장 18절~25절]
18절 - 사흘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너희는 이같이 하여 생명을 보전하라
19절 - 너희가 확실한 자들이면 너희 형제 중 한 사람만 그 옥에 갇히게 하고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안의 굶주림을 구하고
20절 - 너희 막내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러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니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21절 -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절 -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그 아이에 대하여 죄를 짓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더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핏값을 치르게 되었도다 하니
23절 - 그들 사이에 통역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듣는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24절 -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끌어내어 그들의 눈 앞에서 결박하고
25절 -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 사람의 돈은 그의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 하나님께 저축하는 생활을 많이 해두면 언젠가는 큰 보상이 자신에게나 후손에게 임합니다. 그래서 착한 행실을 저축하고, 기도를 저축하고, 우리 마음에 말씀을 저축하고, 헌금이나 구제같은 것으로 물질을 저축하고, 경건한 생활로 저축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저축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죄를 쌓아두면 그것도 언젠가는 무서운 고통과 형벌로 보응을 받는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범하면 언제든지 그 죄를 다시 대면해 만나는 때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농부가 신문 편집자에게 편지를 써서 '나는 주일날 심고 주일날 거두어 들였습니다. 그러나 내 수확은 주일날 교회에 나가는 사람만큼 좋고 훌륭합니다. 자,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하고 질문해 왔을 때 그리스도인인 그 편집자는 대답하기를 '하나님은 항상 가을에만 지불하시지 않습니다.' 즉 이 말은 '언젠가는 우리가 지은 죄를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죄를 쌓아두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야곱은 12아들 중에 요셉을 제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색동옷을 입혀서 형들이 양치는 곳에 가보라고 했습니다. 늘 요셉을 시기하던 형들이 저 꿈쟁이 잘 왔다고 웅덩이에 쳐넣어 죽이려하다 말고 지나가던 애굽 상인들에게 은20냥을 받고 팔아 먹고 그 입었던 옷을 양의 피에 묻혀 가지고 가서 야곱에게 보이면서 요셉이 맹수에 잡혀 먹혔다고 속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늙은 야곱이 심히 슬퍼하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요셉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옥살이를 하고 갖은 고생을 다 하다가 애굽의 총리 대신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형들이 가나안 땅에서부터 양식을 구하러 요셉 앞에 와서 무릎을 꿇게 되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못알아 보았지만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고 정탐꾼들이라고 호통을 친 다음에 만일 정탐꾼이 아니라면 집에 있다는 막내동생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요셉을 20여년전 전에 팔아 먹었던 죄를 생각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하고 후회했던 것입니다.
<민 32:23>에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범한 죄는 회개하고 사함받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맙니다.

1. 죄는 반드시 대면하게 된다.
모세가 어느 날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분을 참지 못하여 애굽 사람을 쳐죽였습니다. 그리고 얼른 묻어버렸습니다. 이튿날 같은 히브리 동족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말리려고 하니까 그들이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느냐'하고 말했습니다. 이에 그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거기서 40년간 고생하며 연단을 받았습니다.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해 오다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서 한가지 불순종한 죄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아가는 특권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에 모세는 자기 죄와 다시 대면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또 다른 구약의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 왕입니다. 그는 어느 날 늦잠을 자고 기지개를 하며 옥상을 거닐다 젊은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정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데려다가 범죄하였습니다. 하필이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욱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죄를 위장하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며 충실한 부하 장수를 일선에서 데려다가 그 아내와 동침하게 했으나 그럴 수 없다고 고집하자 일선에 나가 싸우다가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들을 낳았는데 다윗이 무척 사랑했습니다. 후에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금식하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 아들과 딸 중에 이복 남매간에 간음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그 암논을 쳐죽였습니다. 나중에는 제일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왕위를 빼앗으려고 하다가 그마저 죽었습니다(삼하 18:33). 다윗의 마음은 가슴을 찢는 듯이 아팠습니다. 다윗은 죄는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는 진리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삼손도 하나님의 큰 능력을 받은 위대한 사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의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기생 들릴라와 범죄하고 힘의 근원이 되는 비밀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원수에 붙잡혀 가서 온갖 조롱을 다 받고 두 눈이 뽑히고 발에 쇠고랑을 차고 맷돌질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삼손도 "죄는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는구나"하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헤롯 왕이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옥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연설을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그는 신이다'하고 외칠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이 치시매 즉시 충이 먹어서 창자가 썩어 죽었습니다(행 12:22). 헤롯 왕은 그의 죄를 대면했습니다.
죄는 이처럼 그 지은 사람을 졸졸 따라다니다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못만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라도 반드시 만나는 때가 옵니다.

2. 죄를 대면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가?
첫째, 범한 죄를 생생하게 느끼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옥에 갇혔을 때 옛날에 지은 죄가 생생하게 기억났습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릴 때 산도 그리고, 강도 그리고, 나무도 그립니다. 아무리 잘 그렸어도 시간이 흐르면 그림이 퇴색하고 망가지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죄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마음에 그립니다. 위기에 처할 때 기억력이 그것을 다시 끌어옵니다.
어느 정신병원에서 환자 한 명이 도망쳤습니다. 찾아다니다가 그 정신병자가 어느 광산의 갱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웅덩이를 내려다 보면서 '저기 사람이 내려간다'고 소리질렀습니다. 사람들은 미쳐서 헛소리하는거려니 했는데 그 굴속에서 사람의 해골이 발견되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사람이 몇 해 전에 어떤 사람을 죽여서 그곳에다 던져 넣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죄 때문에 고민하다 미친 것이었습니다.
둘째, 양심이 죄를 책망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 죄를 자꾸 우리 앞에 가져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역사중에 나오는 수양대군의 얘기를 잘 아실 줄 압니다. 수양대군은 자기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다음에 마음과 양심이 괴로워서 결국은 고민하다가 죽었습니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맥버드(Macbeth)가 하수인을 시켜서 사람을 죽인 다음에 고민하다가 백합처럼 흰 손을 쳐다보면서 부르짖기를 '아직도 피 냄새가 나는구나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를 가지고도 이 작은 손을 깨끗이 할 수가 없구나'하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손에 피가 남아 있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것은 그녀의 양심이었습니다.
한때 교회 잘 다니고 일도 많이 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만 두고 죄와 세속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왜 안나오느냐고 물어보면 목사나 어떤 교인들을 탓합니다.
목사나 우리 교인들이 사소한 잘못이나 다른 영혼을 범죄케 할 수도 있습니다. 나로 인해 실족한 자가 있다면 반드시 우리의 양심이 그 죄를 책망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이성를 통하여 책망합니다.
여러분의 과거를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어떤 죄가 생각날 것입니다. 환난과 고통이 왔을 때 '이 고통이 왜 왔는지 나는 안다'고 스스로 말할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달려 죽던 한 강도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다'고 정직하게 말한 것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죄는 다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우리의 이성도 말합니다.
범죄하고도 요행히 벌을 받지 않고 도망다니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영원히 피할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되 영원히는 참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약방하는 사람이 독약병에 극약이라고 써 있는 표지를 떼어버리고 대신 박하사탕이라고 표지를 달아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더욱 위험한 일입니다. 죄는 죄라고 책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형벌을 피하고 죄를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3. 죄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엎드려 자기들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 죄를 다 버려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를 진찰해 보고 이 병은 못고치는 병이니 치료할 수 없다고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경우가 있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고쳐주시기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신다'고 했으며 '내게 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과 같이 씻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씻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보혈 샘에 나와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는 씻지 못할 죄가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여러분의 생활에 그리스도와 성경과 교회가 차지할 자리가 없지는 않습니까?
마침내 여러분의 죄를 심판대 앞에서 다시 만나는 시간이 오게 됩니다. 그때는 영원한 저주와 멸망만이 있게 됩니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회개하고 나와서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승리의 생활을 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 

포기할 때 더 큰 것으로

[창세기 12장 1절~4절]
1절 -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절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절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절 -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먼저 버리는 용기가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를 하십니다. 그 결단이 위대하면 위대할수록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셨던 것을 거두어 가기도 하시고, 또 버리라고도 하시고, 주셨던 것을 다시 달라고도 해 보십니다. 그때는 우리는 '아멘'으로 용기있게 우리의 것을 포기해야 하나님이 더 큰 것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게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은 성령의 생수를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귀하고 요긴하게 생각하는 것을 때로는 버리라고도 하시고 포기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기의 결단을 보일 때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높은 차원의 복을 반드시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친구라는 칭호까지 받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가 우상(偶像) 장사하던 고향 하란을 미련없이 떠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야 이러한 복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인정, 애정, 욕심에 이끌리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남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아 정말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를 통하여 만민이 구원받고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한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여종 가운데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도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갈도 아내의 역할을 했고 더구나 아들인 이스마엘을 내보낸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결단을 내려서 순종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외아들, 가장 사랑하는 외아들을 번제로 잡아 바치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을때도 아브라함은 용감하게 결단을 내려 실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제야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시면서 아들도 살려주고 큰 복을 주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버리라고 할 때 버리고, 떠나라고 할 때 떠나고, 바치라고 할 때 바치는 그런 결단을 가진 자에게 하나님은 마음 놓고 복을 부어 주십니다.
어느 여객선이 항해를 하다 큰 풍랑을 만나서 배가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지나가던 선박이 와서 구조하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짐을 버리고 목숨만이라도 건지려고 줄을 잡고 구조선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그 중 한사람이 금덩어리를 많이 가지고 가다가 그것을 주머니에 가득히 집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밧줄을 붙잡고 구조선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 밧줄을 놓쳐 바다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혹시 떨어져도 물위로 다시 뜨지만 이 사람은 금덩이를 몸에 가득히 갖고 있었기 때문에 빠진 다음에는 영영 다시 뜨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포기의 결단은 큰 축복의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버리는 훈련을 통해서 복을 쏟아 부어 주십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버리는 훈련을 시키는가? 이것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만이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것을 더 의지하면 그것을 더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때로는 하나님이 주셨던 복이라도 다시 거두어 가시고 포기의 결단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신랑이 결혼 선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샀는데 신부가 그 반지를 받은 뒤에 신랑보다 다이아 반지가 더 중하다고 한다면 그 신부는 어리석은 신부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물질, 명예, 지식 등 세상적인 것만 좋다고 하나님을 멀리 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라고 하시며 때로는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이때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거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을 우리가 또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던 아브라함도 백세가 되어서 귀한 아들을 얻은 다음부터는 이삭 제일주의가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거나 우상 숭배하는 것을 가장 미워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은 곧 우상인 것입니다. 물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할 때 그 사람에게는 그 물질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2.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또한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포기의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늘 모든 것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께 있고 영원한 본향 하늘 나라를 사모해야 할터인데 아침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명예와 정욕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하지 않기 위하여 주셨던 물건도, 권세도, 자식도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지금까지 의지하고 있던 것이 헛된 것이었구나'하고 깨닫고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영원한 본향 천국을 찾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가리' 이 찬송가와 같이 우리는 세상의 모든 풍파가 일어날 때마다 세상 줄을 끊는 주님의 손길임을 알고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렘 2: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했습니다.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터진 웅덩이를 파면서 헛 것에 헛 고생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직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영원한 천국을 본향으로 삼고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육신보다 영혼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돈 벌이가 잘 되고, 권세가 있고, 몸이 건강하면 그것으로 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고 더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잠들고 병들어 죽어가게 됩니다. 그것을 볼 때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세상 것을 빼앗아 갑니다.
그것을 거두어 가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쓰리고 고통스럽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아파하는 것을 모르시는 바가 아니지만 우리 육신이 편안한 것보다도 영혼이 먼저 잘 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축복이기 때문에 세상 것을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이 먼저 잘되고 강건한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가장 귀한 영혼이 바로 서지 못할 때는 육신의 생활에 고난과 손해를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보다 영혼을 더 귀히 보시고 현세의 복보다 내세의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멧오리(물오리)가 무리와 함께 날아가다가 혼자서 어느 지붕 위에 내려 앉았습니다. 지붕 위에서 쉬며 내려다 보니 자기하고 비슷한 집오리들이 앉아서 날지도 않고 주인이 갖다 주는 사료를 맛있게 먹으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멧오리가 '나라고 저기서 못살 것 있나'하고 거기서 뛰어내려 집오리들과 섞여 살았습니다. 얼마간을 그렇게 살다가 '이러다간 안되지 내 갈 곳을 가야지'하고 그제야 날개를 펴고 날으려고 했더니 날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에는 기름이 졌고 날개 운동을 안했기 때문에 아무리 날으려고 해도 간신히 지붕 위에까지 올라갔다가는 떨어지고 맙니다. 얼마 후 집 주인이 그 멧오리를 잡아서 요리를 해 먹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안주할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날개, 믿음의 날개를 펴서 날마다 저 천국을 향해 날아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것에 기름이 지고 믿음이 약해지면 영의 눈이 다 어두워지고 결국엔 세상 사람과 더불어 멸망하게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것을 때로는 빼앗아 가기도 하시고 내놓으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4. 이기심과 자기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서운 것은 자기 중심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주의는 사단이 침투하는 길이 되고 참된 신앙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격을 비열하게 만드는 것이 이기주의이며 이것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뿐 아니라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면 영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불안과 염려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자기 것을 사랑하면 불안에 빠집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떤 사람이 유산을 나누는 문제로 형제와 싸우다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그것을 나누어 달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라고 하시면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근본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원해서 하나님께 바쳐야 할 때 바치고, 구제할 때 구제해야 우리의 이기심 병을 예방하고 자기 중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처방책이 되는 것입니다.

5.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나 권세로 인하여 교만해질 때는 하나님께서 겸손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주셨던 것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러나 늘 겸손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또 회개하고 겸손하면 거두신 복을 다시 주시기도 합니다.
신 8:17, 18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남보다 넉넉한 재물을 가졌거나 높은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갖고 있을 때 얼마나 쉽게 교만해집니까? 그러나 내가 소유한 재물과 권세와 학식과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주신 것임을 우리는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재산도, 권세도, 생명도 용감히 포기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는 보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세상 아무 것에도 붙들려 매이지 않는 자가 참으로 자유한 자요, 행복한 자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놔야 할 때 놓지 않고,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고, 떠나야 할 때 떠나지 않고 축복만 받으려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심도 포기하고, 하늘 나라도 포기하고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으며 왕관도 포기하고 가시관을 쓰셨고 생명마저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진정 포기의 생활이었습니다. 우리가 삽으로 퍼내면 하나님은 언제나 더 큰 삽으로 퍼넣어 주십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 포기할 때 하나님은 더 큰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아브라함의 결단

[창세기 22장 9절~19절]
9절 -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절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절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절 -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절 -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15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16절 -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절 -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18절 -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19절 -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매일매일 순간순간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읽고 계신 것도 결단을 잘 내렸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만나자고 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낚시질 가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요, 산으로 등산가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결단을 내렸던 까닭에 이 책을 읽으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도 받게 된 줄로 압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를 봐도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몇몇 차례의 어려운 결단을 내린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는 이렇게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육신의 정욕과 생각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가 없고 마귀를 이기고 성령을 따르는 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세 가지 큰 결단만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결단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창 12:1>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앗수르 족속에 속한 사람으로 우상(偶像) 장사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달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의 지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데라가 죽은 후에 하란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상 숭배의 죄악된 상황에서 떠나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어 팔던 죄악의 장소, 죄만 짓는 사람들과 친교를 끊어 버리고 떠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고향과 친척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떠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동행하기 위하여 온갓 것을 다 저버릴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축복받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창 19:17 >말씀을 보면 "급히 도망하여 생명을 보전하라"고 롯에게 명령했습니다. 거기서 우물쭈물하던 사람은 다 불에 타 죽고 가면서도 남겨둔 재산이 아까워 뒤를 돌아보던 롯의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지만 인정사정 욕심 다 끊어버리고 소알성을 향한 롯은 살아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눅 14:26>에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든다면 추석같은 명절날에 믿지 않는 식구나 친척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사밥을 해 놓고 우상 숭배하고 마귀에게 절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친척들의 눈치와 비난의 소리가 두려워서 그런 죄를 범한 사람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떠한 핍박과 조롱과 모욕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는 없다고 한 분은 용감히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 1:1>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죄를 따르지 아니하는 그 눈, 그 손, 그 발, 그 자리가 복되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시 119:115>에 보면 "너희 행악자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인정사정 보지 말고 죄악된 상황에서 과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애굽을 떠나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려면 돌감람나무에서 끊어져야 됩니다. 세상을 초월해야 천국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대번에 모든 일이 잘 되는 줄로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옛 생각을 끊어버려야 할 사람에게는 먼저 망하는 일이 있어 죄를 청산한 다음에 새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개밥을 담던 더러운 그릇에 사람이 먹는 음식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거기에 음식을 담아 준다면 바보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어리석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릇을 깨끗이 씻어야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떠나야 할 곳에서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머뭇머뭇 하시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떠나야 됩니다. 용감하게 떠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용감하게 떠났습니다.
<히 11:8>을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그것입니다.

2.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결단입니다.
<창 21:10>에 보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명령하셨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죄악된 상황을 떠나는 것이라면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는 것은 죄악된 정욕의 정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하여 깊이 근심이 되었으나 마침내 여종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았습니다.
이것은 어려운 결단입니다. 왜 이런 비극이 생겼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백세가 되도록 주시지 않으므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조급해서 인간적인 생각과 수단으로 하나님의 뜻을 대신하여 자기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품에 들여보내 자식을 보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갈이 아들 아스마엘을 낳자 사라를 멸시하고 또 아들 아스마엘이 참 아들 이삭을 희롱하고 괴롭혔습니다. 이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정에 평안이 없고 늘 불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과 생활에 불안과 슬픔과 근심이 있다면 무엇인가 끊어버릴 것은 끊어 버리지 못하고 청산해야 될 것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중동전쟁이 무섭게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과 아랍과의 싸움으로 바로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인 것입니다. 여기 이스마엘은 육(育)을 의미하고 이삭은 영(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이 육을 지배하면 육신의 정욕을 쫓아내야 합니다. 죄악된 정욕을 끊어 버려야 참 평안과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심정을 생각해 보면 보통 어려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끊을 것은 끊고 쫓을 것은 내어쫓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죄악된 길에 들어갔다 생각되면 딱 끊고 돌이킬 수 있는 결단의 용기를 가지시기를 부탁합니다.
회개하여 죄를 끊어버리고 돌이키는 결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구원이냐 멸망이냐 저주냐 축복이냐를 판가름하는 것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잘못으로 일생을 망치고 불행가운데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경건한 생활을 해치고 죄악된 길로 떨어지게 하는 요소는 용감하게 끊고 신앙생활로 나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결단입니다.
이것은 헌신의 결단입니다. 백세가 되어 낳은 아들, 애지중지 키워서 장성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마음에는 이삭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이삭을 더 많이 생각하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던 아브라함이 아들 제일주의로 타락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창 22:2>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리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소나 양이 아니요, 서자도 아니요, 바로 독자 가장 사랑하는 이삭을 잡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마음이 떨렸고 번민이 많았겠습니까? 또 핑계를 댄다면 얼마든지 댔을 겁니다. 살인을 금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잡아 제사를 드리라고 하십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네 자식을 통해서 번성하게 하고 만민이 복을 받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무슨 말씀입니까? 이렇게 핑계를 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인간의 생각으로 핑계 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음으로 이 모순을 극복하고 바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아브라함이 제사 드리러 가면서도 아침에 일찍 떠났다고 했습니다. 일찍 나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데 지연시키지 아니하고 단호하게 결단을 내렸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준비를 차근차근 다했습니다. 칼과 불과 장작을 단에 묶어 가지고 나귀에 싣고 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릴 때는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헌금을 준비하고 또한 무명옷이라도 잘 빨아서 다려 입고 나오는 그러한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제사준비를 잘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리아 산에 가서 아들을 묶어 놓고 칼을 들어서 내려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을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가장 어려운 시험에 통과한 헌신의 결단이었습니다. 가장 귀하고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도 아끼지 않고 드리는 헌신적 결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창 22:16-18>에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의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이 어렵더라도 순종하면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가 성의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한 것은 목이 말라서만이 아니라 성령의 생수를 주시고자 물을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시는 것은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희생하고 포기하는 헌신이 크면 클수록 큰 축복과 상급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그러한 각오와 결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헌신의 결단을 가지시고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어 놀라운 기적과 축복을 체험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하나님이 함께한 요셉

[창세기 39장 19절~23절]
19절 -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절 -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절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절 -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절 -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오늘은 요셉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시험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이 동행하셔서 시험을 이긴 비결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보면 아브라함이나 야곱에게 관한 말씀보다는 요셉에 관한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요셉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과 축복을 받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지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는지 형제가 다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며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그는 17세에 형들의 시기로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했다가 은 20냥에 애굽 상인들에게 팔려가 보디발의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애굽 카라반들의 약대의 끈에 묶여서 형들을 뒤고 두고 멀리 멀리 끌려 갈 때에 얼마나 많이 울었겠습니까? 앞이 안보이고 얼굴이 붓도록 울었을 것입니다. 보디발 장군의 집에 끌려가서 종살이를 할 때 얼마나 멸시 천대를 받았겠습니까? 인간으로서 받을 수 없는 설움은 다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진실하고 성실하니까 주인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창고의 모든 열쇠를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소년 요셉이 청년이 되어 인물이 준수하고 씩씩하게 보이니까 그만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유혹을 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못본 체 했습니다. 어느날 주인은 출근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옷깃을 부여잡고 노골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애원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당신은 내 주인의 아내인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고 뿌리치고 그 다음부터는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다시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을 요청할 때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쳐 나가자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여 남편이 들어오자 '저 히브리 사람이 나를 희롱하여 겁간하고자 할 때 내가 소리질렀더니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자 이 옷을 보시오'하자 그 남편은 요셉을 옥게 가두어 버렸습니다. 요셉은 변명의 말 한마디하지 않고 묵묵히 감옥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사실을 밝혔다면 장군의 아내는 죽었을 것이요, 요셉도 국무총리가 못되었을 것입니다.
또 감옥 생활하는 중에 왕의 떡 맡은 관원과 술 맡은 관원은 감옥에 들어왔는데 꿈을 꾼 것을 요셉이 해몽해 주었습니다. 떡 맡은 관원은 3일 후에 사형 당하고 술 맡은 관원은 누명이 풀려서 전직을 회복하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술 맡은 관원이 요셉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에게 말씀드려서 풀려나게 해준다고 했는데 옥에서 나가자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후 2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가장 많이 받은 요셉이지만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식으로 아주 재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만큼 고난과 시련을 참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어떻게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이기고 승리했겠습니까? 여기서 시련과 시험을 이기는 비결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낙심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신앙을 가졌습니다. 이런 신앙이야말로 고귀한 신앙인 것입니다. 창 39:23절에 보면 종으로 팔려가 머슴살이 할 때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더라"고 했고,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으며 창 39:21절에도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요셉은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신다'는 신앙을 가졌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보셨으니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을 가지면 못견딜 시련이 없고 못이길 시험이 없습니다. 요 13:32, 33절에도 보면 예수께서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도 고난과 시련을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당치 못할 시험을 당하게 하는 법이 없고 시험 당할 즈음 피할 길을 주시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지면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임마누엘의 신앙을 모두 소유하여 승리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2. 사랑과 용서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 속에서라도 복수심이나 완력, 폭력을 쓰면 그것은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롬 12: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갇히게 했으나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참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먹은 형들이 먼 훗날 총리대신이 된 자기 앞에 나타났을 때도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창 50:19-21절에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하고 간곡히 위로했습니다.
복수심이나 폭력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결코 난관을 극복하는 길이 아니며 시련을 이기는 방법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을 내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3. 유혹을 물리치는 결단이 있었습니다.
마귀의 유혹과 시험을 받을 자리에는 가지를 말아야 하고 그런 자리를 피해야 합니다. 요셉도 인간의 본능과 성정을 가진 사람이므로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접근할 때 육신의 감정으로 싫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할 때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고 그 자리를 피했고, 그 여인이 옷깃을 붙잡고 늘어질 때 그 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쳐 나갔습니다. 마귀의 유혹을 이기려면 시험받을 자리에는 아예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도박을 끊기로 결심했으면 아예 그 자리엘 가지 말아야지 '난 도박은 안하지만 거기 가서 개평이나 얻어먹어야지'하거나, 술을 끊기로 했으면 아예 술자리도 가지도 말며 술친구를 만나지 말아야지 '난 안주나 얻어먹어야지' 하며 술자리에 참석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그 남자나 여자와 결혼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으면 만나지를 말아야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데이트나 해보자'하는 따위의 죄악된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음과 생각에 죄악된 생각을 품지 말고 그런 유혹을 물리치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4. 기도하는 생활이 있었습니다.
창 39:9절에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죄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한 말씀을 보거나 창 40:8절에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한 것을 보면 요셉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기도의 생활 때문에 늘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 어떤 고난과 시련도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기도로 해결해야 됩니다.
시 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시련이나 시험을 이기는 중요한 비결은 기도밖에 없습니다. 늘 기도해야 되겠지만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는 더욱 힘써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 해결 못한 문제도 해결되게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서 우리는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칭찬을 많이 듣고 부모나 상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람은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요셉도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살았으니 자기도 모르게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고 교만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창 37:2절에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였더라"한 것을 보면 요셉도 조금은 잘난 체하고 고자질도 하는 교만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자기의 죄와 교만을 회개하고 죄성과 육성이 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깨어지지 않는 사람은 귀한 그릇으로 쓰시지를 않습니다. 바로의 궁중에서 살았던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이나 고난을 겪은 후에 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련을 통하여 깨어지고 바스러지면 시험과 시련이 물러갑니다.
요나가 폭풍을 만났을 때에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은 내 까닭이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면서 자기의 불순종의 죄를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던질 때 풍랑도 잔잔해졌고 요나도 다시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시 119:67절에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고 71절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가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환난과 시련을 당할 때 교만하지 않았나, 십일조 생활 잘했나, 하나님의 물질을 가로채지 않았나, 육신의 정욕으로 범죄하지 않았나 등 빨리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깨어지고 바스러지는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이래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어 고난과 시련을 이기게 하시는 비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오늘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살펴본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며 기도하며 남을 용서하는 생활을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럴때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 아 멘 -

절망을 복받는 기회로

[창세기 32장 22절~32절]
22절 -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절 -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절 -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절 -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절 -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절 -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절 -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절 -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절 -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절 -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절 -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사는 사람은 반드시 한번쯤 절망에 부딪쳐 본 사람입니다.
물질로 실패하여 궁지에 처해 있거나, 질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살아났거나, 가정 생활에 실패하거나, 사업에 파탄을 가져왔거나, 어떤 모양으로든지 패배와 절망에 부딪쳐 하나님께 항복하고 무릎 꿇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축복을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야곱이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노력으로 많은 재물을 얻어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얍복 강 나루터에 왔을 때에 전에 자기에게 속은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칼을 번쩍이며 달려온다는 것이었습니다. 20여년 애써 모든 재산과 귀여운 처자식들도 다 잃고 자기도 죽에 되었습니다.
그때 약삭빠른 야곱은 좋은 꾀를 생각해 냈는데 그 생각은 많은 선물을 보내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형을 대면하자 하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암염소 200마리, 수염소 20마리, 젖나는 약대 10마리, 그 새끼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그 새끼 10마리를 각각 세 때로 나눠서 먼저 보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남은 모든 짐승과 처자식을 보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자기는 강을 건너지 않고 만약의 경우에 처자식과 종과 많은 재산을 다 빼앗긴다해도 자기 자신만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강 이편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이 불안한 야곱은 밤에 일어나 하나님께 간절히 살려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가 나타나 야곱이 마지막 의지하던 환도뼈를 쳐서 절름발이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제 완전히 절망입니다. 형은 자기를 죽이려 달려오고 있고 자기는 도망칠 수도 없이 환도뼈가 위골 되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야곱은 하나님께 항복하면서 간절히 매달려 간구하여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과 더불어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형 에서도 불구가 된 야곱을 보고 죽일 마음을 버리고 목을 안으며 반가워했습니다.
우리 자신도 절망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고 매어 달리면 모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저런 문제 어려운 역경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야곱을 축복하시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축복하고 계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완전한 패배와 절망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된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능력을 늘 유지하는 방법도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일분 일초라도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패배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야 축복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를 패배와 고통과 슬픔의 방망이로 깨뜨리신 다음에 영원하고 참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속히 깨어지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내 자신의 건강이나 물질이나 학식이나 세상적인 모든 것이 다 쓸데없는 것임을 빨리 깨닫고 주님께 항복하고 무릎을 꿇는 사람이 빨리 축복 받고 문제의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도 자기의 지혜와 무술의 능력을 믿고 의지했을 때는 축복하시지 않았습니다. 겨우 애굽인 한 사람 쳐죽이고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광야로 도망하게 만들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면서 완전히 절망에 이르렀을 때 불꽃 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모세를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어 이스라엘의 귀한 영도자로 군림하게 했습니다.


사울이 바울이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장 옳은 사람이요 의인인줄 알고 의기양양했던 사울은 하늘의 강한 빛으로 눈까지 멀게 한 후에 위대한 사도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사울이란 이름에는 '큰 자'라는 뜻이 있는 반면 바울이란 이름에는 '작은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큰 자'라는 뜻이 있는 사울이란 이름을 집어치우고 '작은 자'라는 뜻이 있는 바울이란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자기가 크고 잘난 줄 알면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의 잘난 체 하는 것, 고집, 욕심, 교만, 아집이 철저하게 깨지고 부스러져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 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망은 축복의 기회,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기회, 하늘 문이 열리는 기회입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인 것입니다.


저희 형님 친구 중에 정신과 박사로 병원을 하고 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청년 시절에는 성가대로 하고 또 집사도 지낸 분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님께서 그분을 만날 때마다 교회에 나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때마다 '내가 조금 있으면 자가용을 곧 살텐데 그때 나가지' 또 '지금 병원을 몇층으로 짓고 있는데 이것 완공하면 나가지'하며 이런 식으로 계속 미루며 돈버는 데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집사가 교회도 나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후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 형님께서 그분을 만났는데 혈색이 안 좋고 피곤해 보여 웬일이냐 물었더니 요즘 소화가 안되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와서 형님께서 달려가 보니 그분의 상태는 배가 점점 불러와 수술을 해보니 벌써 간이 울퉁불퉁 불거져 수술도 못하고 코로 입으로 피를 토하며 죽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회개를 하면서 '내가 집사인데 돈만 알아 주일도 안 지키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에 도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하면서 애통해 하며 뉘우치더랍니다.
그가 죽은 후 시체실 앞에 가보니 그가 지니고 있던 박사 학위증, 의사 면허증 등이 즐비하게 놓여 있더랍니다. 죽을 때 그가 박사 학위를 갖고 갑니까? 빌딩을 가져갑니까? 다 소용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평소 사업이 잘될 때 하나님을 잘 섬기지 왜 그렇게 된 후에 항복합니까? 우리는 미리미리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하겠습니다.


또 한가지 예를 들자면 어떤 가난한 사람이 믿음으로 기도를 하면서 조그만 가계를 운영하였습니다. 그 가게가 점점 잘 되고 사업으로 확장되어 큰 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가난할 때는 교회에 잘 나오더니 큰 부자가 되니 바쁘다고 하면서 교회는 안 나오고 골프장에 간다, 쉬어야 겠다고 핑계만 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였습니다. 소방차들이 줄을 이어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디서 불이 났나 하고 걱정하고 있는데 웬 속옷 차림인 사람이 뛰어와서 교회 문을 두드리는데 나가 보니 그 사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큰 회사 사장이 됐는데 하나님을 멀리한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화재로 알거지처럼 되니까 그제야 회개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달여온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미련합니까? 지혜로운 자는 무슨 일이 잘되고, 건강하고, 돈을 잘 벌 때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면 못산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에 대한 절망과 패배 의식을 가지는 자입니다.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소망으로 삼게 하기 위하여 굶주리며 목마르며 고생하게 하시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하시면서 8:12절에 말씀하시길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어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하였습니다.
8:17, 18절에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제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고후 3: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만 났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고후 1:8, 9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비극의 원인은 인간이 연약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의뢰하는 데 있습니다.
저도 설교가 제일 잘 되고 은혜스런 때가 언젠가 하면 준비는 많이 못했어도 내 힘으로는 못한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매달릴 때 그 설교는 매우 은혜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개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멋있고 유창하게 하려고 하면 아무 감동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죄악의 시초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탄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 지배를 받지 말고 너도 저 선악과를 따먹고 지혜로워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독립해서 살라는 것이 마귀의 유혹이었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을 다시 복되게 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패배와 절망을 겪게 한 후에 완전히 무릎꿇고 항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절망을 복받는 기회로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 다시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아무리 펄떡거리는 큰 물고기라도 물 떠나서는 꼼짝 못하고 죽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명예와 물질과 부귀와 아무리 좋은 것이 와도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늘 가져야 합니다. 이렇게 패배와 절망을 통해서 참된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 사람을 깨뜨리고 영원한 속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이며, 거짓된 소망에서 벗어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만 소망케 하기 위하심이며, 자신을 의뢰하지 말고 하나님만 신뢰케 하기 위해서이며, 늘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게 하심인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괴롭고 고통스런 일들이 있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축복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은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여 큰 축복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롯의 선택

[창세기 13장 1절~13절]
1절 -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2절 -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3절 -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절 -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5절 -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절 -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절 -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는지라
8절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9절 -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절 -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절 -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절 -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절 -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두 청년이 있었는데 그들은 늘 함께 먹고 함께 놀러다니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요즘처럼 아침 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어느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그 날도 술먹고 춤추고 도박하려고 가는 길이었는데 우연히 예배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무심코 그날 저녁 설교 제목이 게시판에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청년이 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으니 그만 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한 청년은 놀러가자고 고집을 부리다가 둘이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한 청년은 집에 가는 척 하다가 예배당에 찾아가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설교를 들으며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마침내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취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문이 대통령 취임식 기사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 어느 감옥에서 한 죄수가 그 신문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감방에 있는 죄수들에게 하는 말이 '이 사람이 30년 전에는 내 절친한 친구였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와 헤어지고는 별로 만나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나는 일생을 교도소에서 감옥 생활하다가 죽게 되었으니 이런 분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울더랍니다. 이 대통령이 바로 클리브랜드(Cleveland Grover) 대통령인데, 그 이름을 따서 미국 오하이오주에 클리브랜드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저도 그곳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일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성공자가 될 수도 있고, 실패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좁은 길, 넓은 길, 선한 길, 악한 길, 복된 길, 저주의 길 등 여러 갈래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은 선택을 잘못해서 결국 비참한 실패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롯이 어떻게 선택을 했길래 패배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 성도들은 신앙적인 선택, 올바른 선택을 해서 롯의 전철을 밟지 말고 성공적인 삶, 복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물질을 앞세워 선택했습니다.
롯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숙부인 아브라함을 따라다니다가 부자가 되어서 가축도 많아지고 부리는 목자도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간에 자리다툼을 하며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제안하기를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게 우하면 나는 죄하리라'면서 눈앞에 보이는 넓은 땅을 보이면서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이 때에 롯이 눈을 들어보니 기름지고 푸른 땅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소돔과 고모라 성을 선택해서 떠났습니다.
자기의 믿음을 염려하거나,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의 은덕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선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내 양과 염소가 굶어 죽더라도 나는 숙부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주님을 믿는 사람이 숙부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숙부님의 믿음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 어떻게 숙부님을 떠나겠습니까? 내 사람들이 다 없어지고 내 우양이 다 굶어 죽더라도 나는 떠나지 않겠습니다'하고 신앙적인 선택을 했어야 하는데, 롯은 신앙이나 하나님의 축복보다 당장에 수지 맞는 물질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롯은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그 많던 재산이 불타고, 신앙으로 본을 보이지 못한 사위들도 코웃음치며 피난 나가지 않았다가 불타죽고, 롯의 처는 천사의 당부를 무시하고 남겨 두고 오는 재산이 아까와서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렸고, 경건한 훈련을 못 받은 딸들은 아버지 롯을 술취하게 만든 뒤 동침하여 큰 딸에게서는 모압을 낳고, 작은 딸에게는 암몬을 낳아,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물질을 택한 롯의 가정은 패륜지가 되어 망했습니다.
우리는 물질보다 먼저 신앙을 앞세우며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진정한 축복의 길을 갈 수가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바로 가다보면 물질이나 명예는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2. 정욕을 앞세워 선택했습니다.
롯은 숙부인 아브라함이 아무리 마음대로 선택하라고 했어도 숙부 때문에 부자가 되었으니 숙부에게 선택의 우선권을 양보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당장 눈으로 보기에 비옥하고 아름다운 땅을 자기가 먼저 선택해서 가졌습니다. 자기 욕심만 채웠지 신앙이나 숙부 아브라함의 은덕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하고 믿음으로 선택해야지, 욕심과 정욕을 앞세우면 안됩니다. 일시적으로는 잘될지 모르나 결국은 실패와 멸망이 오고 맙니다. 하찮은 개도 훈련을 잘 받은 개는 정욕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눈앞에 맛있는 고기 덩어리를 던져 주어도 주인이 먹으라 할 때만 먹지 아무 때에나 먹지 않습니다.
삼손은 그 많은 은사와 축복을 받은 나실인이었으나 정욕대로 행하다가 생을 비참한 종말로 끝내고 만 사람입니다.
마귀는 정욕의 줄을 타고 들어와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믿음으로 조심조심 선택해야지 당장 수지 맞는다고 욕심대로 선택하면 안됩니다.
솔로몬은 젊은 나이로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 장수, 부귀영화, 원수의 생명 멸함을 달라고 간구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잘 다스리는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셨습니다.
에서는 순간의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붉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겨주고 평생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탐심, 성욕, 물욕, 이 모든 정욕은 우리 자신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들입니다. 정욕이 이끄는 대로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3. 눈에 보이는 것을 앞세워 선택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선택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선택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눈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그대로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무서운 패배와 비극을 가져 왔습니다.
<고후 5:7>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 흔히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실수를 하기 쉽습니다. 그 상대자의 속 마음이나 믿음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우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만 선택하려 듭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그것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밤에 달을 보면 달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구름이 지나가는 것이지, 달이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는 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것은 무지한 처사입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전파나 공기같은 것은 눈에 안보입니다. 하나님도 영이심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고 말씀했습니다. 사단은 우리 앞에 보이는 것으로 유혹하고 넘어뜨리려 합니다. 보이는 대로 선택하는 사람은 속기 쉽습니다.
또한 보이는 것은 변하기 쉬운 것입니다. 책상이나, 나무나 꽃도 다 변질되어 없어지는 때가 옵니다. 보이는 육신은 늙고 병들고 흙으로 돌아가는 날이 오지만 우리의 속 사람, 즉 영혼은 늙거나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회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낮에는 눈이 잘 보이지만, 빛이 없는 밤에는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보이는 대로만 선택하고 행동하던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은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러나 보이는 대로 행치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햇빛이 없는 캄캄한 밤에도 대낮 같이 담대히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왜일까요? 올바른 선택을 해서 올바른 길을 갈 때에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믿음 좋은 광부가 광산에서 일을 하다가 머리에 달고 있는 등불이 고장나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등불이 꺼졌으니 너무 어두워서 일도 할 수가 없고 나갈 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하고 절망에 빠져서 다른 사람이 구해 주러 오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죽기만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던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이 어리석은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울부짖으며 기도를 드릴 때 그는 문득 다른 길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이렇게 죽기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죽더라도 다른 길을 선택해 보자!'하며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신발을 벗어들고 더듬더듬 길을 찾아 나아가는데 석탄을 나르는 레일이 손에 잡혔습니다. 아! 내가 이 레일을 따라가면 나갈 수 있겠구나 하고 그 어둠 속에서 한발 한발 앞으로 나와서 마침내 광명한 태양을 볼 수가 있었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항상 믿음으로 선택해야지 인간적으로 보이는 대로 선택하면 실패하여 영원한 어둠만 있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신 30:19>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올바른 선택을 하여 모두 천국 백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모순을 극복하자

[창세기 22장 1절~12절]
1절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절 -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절 -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절 -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절 -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절 -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절 -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절 -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절 -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절 -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절 -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모순이란, 앞뒤가 맞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이치에 맞지 않는 많은 일에 직면합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고난을 겪기도 하고, 악인이 번창하기도 하는 등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일에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때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신앙은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는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날지라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입니다.

1. 훌륭한 신앙은 모순을 극복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졌을 때는, 인스턴트(instant) 식품을 먹듯이 기도 응답도 잘 받고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을 즉각 즉각 잘 받고 체험하지만, 신앙이 성숙해 갈수록 믿고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되는 모순된 일을 만나게 되고 내 이성과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참된 신앙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느냐?' '예수 믿어봤자 소용없는 일이다'하고 낙심하고 믿음을 포기하지만 훌륭한 신앙의 사람은 모순된 일이 나타나도 더욱 굳세게 믿고 의지하면서 이를 극복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참으로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이를 믿고 순종하여 모순을 극복하고 축복을 받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에 있는대로 그는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한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하는 청천벽력 같은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사상 최대의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는 언약과 더불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창하게 하겠다는 축복으로 받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낳을 수 없을 때, 100세나 되어 기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인데, 이제와서 그를 번제(태워드리는 제사)로 드리라니, 살인을 금하고 악을 미워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잔인한 명령을 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고 순종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브라함은 이런 큰 모순을 극복하고 순종하여 승리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참으로 훌률한 순종이었습니다. 신속한 순종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성경에 보면 주저하지 않고 아침 일찍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또 타협하지 않는 순종입니다. 혈육과 의논하지 않고 부인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또 겸손한 순종입니다. 사환을 데리고 가서는 밑에 남겨 두고 단 둘이 산으로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 완전한 순종입니다. 성경에 3일 길을 가서 제사를 드렸다고 했는데,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지만 그는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고 3일 길을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으로 믿을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것까지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위대한 신앙인입니다. 결국 칼을 들어 치려고 할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는 줄을 아노라" 하는 인정을 받고 엄청난 복을 받고 역사 위에 길이 빛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욥이 훌륭한 것은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다 불타고 도적맞고 없어졌을 뿐 아니라, 열 자녀가 태풍에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어버렸는데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던 것 때문입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믿음을 굳세게 지켰을 뿐 아니라, 온 몸에 악창이 나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는데도 욥은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의지하겠노라'(영문성경)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실패를 당하는 모순된 현실에 직면했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켰기 때문에 결국 갑절의 복을 받고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사르밧 땅의 과부는 그 무서운 흉년 기간에 마지막 한끼 먹고 죽으려고 했던 대단히 귀한 양식을 내놓으라고 하는 엘리야 선지자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밀가루 통이 마르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는 특별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된 일을 믿고 순종한 결과입니다.
수제자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어도 잡지 못하고 허탕치고 돌아왔을 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불합리한 명령에 순종했기 때문에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히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밤에도 안 잡혔는데 대낮에 어느 정도 얕아야지 고기가 잘 잡히고 그물질하기도 쉬운 법인데 자기 지식과 경험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런 기적을 체험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까지 제 생각과 이성에 맞는 말씀만 믿고, 그렇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참된 마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은 모순 속에서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앙은 내 생각과 계산대로 안되는 것을 믿는 것이요, 내 기도한 것과는 반대 현상이 나타나도 끝까지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순 속에서도 믿는 신앙입니다.
불란서의 마르땡(Jaegues martain)이란 사람은 '믿음이란 자기의 전 생명을 완전히 부속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카프카(Cafka)는 '믿음은 단두대의 칼'이라 했으며, 마틴부버(Martin Buber)란 위대한 철학자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신을 바치기로 맹세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다운 신앙의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요, 이런 모순 속에서 신앙을 지킬 때, 병 고침도 축복도 기적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2. 성도는 언제 모순을 느낍니까?
신앙이 성장하려면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 모순을 느낄 때, 이를 잘 극복해야 됩니다.
첫째, 악인이 의인보다 잘 될 때 모순을 느낍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악한 일을 자행하는 사람은 잘 되고,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살아보려고 한 사람이 더 고생하고 못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이럴까?'하고 신앙에 모순과 회의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시편 37:1, 2절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7~10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옳습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연자맷돌은 천천히 돌지만 그러나 골고루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악독한 히틀러가 승리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의가 최후 승리를 거두고 그는 멸망했습니다. 일본이 전쟁에 다 이긴듯 했지만 결국 멸망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나타날 때가 반드시 있음을 믿고 신앙이 흔들려서는 안되겠습니다.
둘째, 축복 대신 손실이 올 때 모순을 느낍니다. 축복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도리어 망하고 손실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믿고, 회의에 빠져서 실망해선 안됩니다.
시 37:5, 6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중국에 송전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이 참 좋고 전도를 잘 해서 송전도라는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아야할 사람이 젊은 나이에 3남매를 남겨놓고 죽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그럴 수가 있을까?' 하고 모순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후에 그의 자녀들이 축복을 받아 큰 딸 송경령은 중국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손문위 아내가 되었고, 아들 송자문은 하버드, 콜롬비아 두 대학을 나와 중국의 재정 장관이 되었고, 막내딸인 송미령은 장개석 총통의 아내가 되어 한 때 그 삼남매가 전 중국을 다스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좁은 인간의 생각과 기대에 어긋난다고 해서 모순을 느끼고 불신앙에 빠져선 안되겠습니다. 십일조를 하고 복받을 일을 했는데, 손해가 올 때는 다음에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해 흔들어 보시는 때로 믿어야 합니다.

3. 왜 모순을 극복해야 합니까? 
첫째, 협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어떤 갈등과 모순 속에서도 의심하지 말고 끝까지 믿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단을 위하여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주실 때가 있지만, 결국은 좋으신 하나님께서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해 주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모순에 직면해도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마 7: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보다 훨씬 좋으신 우리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셋째, 내세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한다고 해도 죽음 후의 내세의 심판과 천국의 소망을 믿기 때문에 어떤 모순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억울할 때는 '종점가서 보자' 하는 믿음을 가지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다 보면 종점 가기 전에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게"(시 37:6)해 주실 때가 오는 것입니다.
히 11:13-16절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어떤 모순과 불합리한 환경속에서도 끝까지 믿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아 멘 -

6.25를 통해 기억해야 할 것

[창세기 35장 1절~8절]
1절 -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절 -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절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절 -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절 -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절 -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절 -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8절 -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그를 벧엘 아래에 있는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하고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불렀더라
[신명기 32장 7절]
7절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6.25를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벧엘이 어떤 곳이기에 신앙이 해이해진 야곱에게 그곳에 가서 제단을 쌓으라고 했습니까? 벧엘은, 야곱이 팥죽 한 그릇에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축복 기도를 받은 뒤 에서가 죽이려고 들자 부모 형제 고향을 떠나 야밤 도주하여 이르게 된 곳으로,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하늘을 지붕삼고 잠을 자다가 하늘에서 사닥다리가 내려와 땅 끝에 닿고 수많은 천사들이 그리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입니다. 신앙의 놀라운 체험을 한 곳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야곱의 신앙이 해이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잊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야곱이 세겜 땅에 거할 때에 그의 딸 디나가 세겜족의 추장에게 요새말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추장이 디나와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졸라대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그렇다면 당신 부족의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으십시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결혼하지 않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세겜족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고, 그로 인해 그들이 끙끙 앓고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야곱의 아들들이 전부 쳐들어가 세겜족의 모든 남자를 다 죽여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들은 야곱이 생각해보니 큰일났습니다. 그 주위의 부족들이 쳐들어와 복수할까봐 무서워 떨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가서 이방 신상과 귀고리 등을 다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밑에 묻고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범죄하고 해이해졌던 신앙이 다시 소생하고 영적으로 재무장했더니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 35:5)고 했습니다.
오늘 6.25 사변일을 맞이하면서 우리 민족, 아니 우리 성도들도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기회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6.25를 통하여 받았던 은혜와 체험을 되새기는 기회를 삼아야 되겠습니다.
신 32:7절에 보면 "옛날 일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6.25를 상기하고 기억함으로써 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을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1. 죄의 값은 무서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6.25사변은 한국 교회의 죄 때문에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들어오고 큰 교회들이 세워져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 다 북한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기독교를 탄압하고 억압책을 쓰니까 하나님이 가장 가증히 여기는 다른 신을 섬기는 일과 우상 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즉 신사참배, 궁성요배를 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자진해서 거룩한 성전의 종과 거룩한 기구들을 떼어다 바쳐서 무기를 만드는데 쓰게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 연맹'에 가입하라고 강요하니까 거기에 가담하여 타락한 목사도 많은데 그 중에 부수상까지 지낸 사람이 '강량욱' 목사가 아닙니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공산당이라는 몽둥이를 들어 다 치시고 만 것입니다.
타협할 수밖에 없어서 타협하고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범죄하지만 죄의 값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히 12:6, 8, 11).
야곱은 큰 재난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야 회개했습니다. '이방신을 버리라'고 했는데 야곱은 신앙이 해이해져서 가족들이 이방신 우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묵인했으므로 그 죄를 회개했던 것입니다. 또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했는데 전에 아버지와 형과 외삼촌을 속이고 잘못한 죄를 회개했던 것입니다. '의복을 바꾸라'고 했는데 거짓된 행위 이방인의 풍속, 습관 등 더러운 행위를 끊고 돌아서지 못했으므로 그 죄를 회개했던 것입니다.
죄의 값으로 무서운 재난과 위기가 닥친다고 할 때, 제 2의 6.25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이 나라의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먼저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북한에서는 핵무기를 개발하여 6개월 안에 완성한답니다. 세균 무기를 250톤이나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붉은 용의 사자들이 언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습니까? 실로 우리는 항상 회개하고 정신차리며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2. 극심했던 고난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창 35:3)고 하면서 옛날에 다급하게 도망하다가 인적이 없는 광야에서 돌베개 베고 잠자던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 주시고 은혜 베푸시던 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팡이만 가지고 괴나리 봇짐 하나 걸머지고 도망가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큰 부자가 되고 많은 처자식들을 거느리게 되었지만, 위기를 만나 이전의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그것을 다시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각오로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편안하고 잘 살게 되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한다는 말대로 비천하고 가난했던 때를 잊어버리고 교만해지고 세속화되고 사치하고 음란 방탕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편안할 때 오히려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더욱 겸손하고 경성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상 낙원이라고 할만큼 부요한 나라 덴마크에서는 청년들이 호화스런 파티에 들어가기 전에 옛날 선조들이 먹던 까만 호밀빵과 맹물을 마시고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때를 기억하며 선조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고 그 고난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자신들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지요. 이렇게 우리도 6.25의 불행을 되새기며 기억함으로써 더욱 경성할 때 6.25와 같은 불행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만나던 때를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창 35:1)고 했습니다. 위기와 고난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구출받던 때를 항상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후 돌아서서는 '우연이겠지, 뭐'라고 말합니다.
전언에 의하면 삭개오가 가끔 말없이 나가곤 해서 그의 아내가 뒤를 밟아보니까 전에 예수님을 만났던 그 뽕나무를 찾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쓰다듬고 또 물을 주더랍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은 처음 기도하다가 성령세례 받고 은사받던 그 기도원을 찾아가 해마다 기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계 2:4, 5절에 보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 1:3, 4절에서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흘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은혜받던 때와, 구원받던 때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항상 자기의 비천하고 가난하고 죽을뻔 했던 때를 기억하고 겸손하게 그때에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할 때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4. 하나님의 축복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지금 이만큼 번창하고 잘 살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임을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축복의 보장을 받았던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부자가 되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잘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지 제가 잘나서 된 것이 아닙니다. 고후 3: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옷을 입어도, 음식을 먹어도, 아이들이 잘 자라는 것을 보아도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축복임을 깨달아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감사와 감격이 사라지고 신앙의 열정이 식어지면 언제부터인가 시험에 든 것입니다.
성군 다윗 왕은 나라가 부강해지고 명성이 높아져도 늘 자기는 비천한 목동 출신이며 이새의 말째 아들이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자신의 부와 명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삼하 7:8,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 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라고 하나님 마음에 쏙 들도록 대답하였습니다.
신 8:12-14절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 신 8:17, 18절에서는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25를 기념하는 오늘 죄의 대가를 받던 극심했던 고난의 때와, 그때에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받던 것과, 그때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축복받은 것을 기억하여 개인적으로 국가적으로 6.25와 같은 비극이 다시 오지 않도록 겸손하고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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