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 책망함 3:1-5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율법의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1절에서 '누가 너희를 꾀더냐'고 물으며 그들을 책망했다. 그들은 칭의의 수단으로써 그들이 배워 온 복음을 고수하지 않았다. 진리를 알고 또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 진리에 복종까지 해야만 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입증할만한 사실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1절). 그들은 십자가의 교리에 대해 배웠다. 주님께서 베푸신 성만찬이 그들 가운데서 행해졌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통해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밝히 보았다.

(2) 바울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호소하고 있다(2절). 그는 그들이 어떻게 이 은사와 은혜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별하기를 원하였다. 그렇게 된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이 사실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후자를 인정해야만 한다.

(3) 그는 그들에게 지난 과거의 행위와 현재의 행위에 대해 생각하도록 촉구한다(3,4절). 그들은 시작은 잘했으나 이제는 율법에다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칭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율법의 준수를 더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의 완전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복음의 진보 대신에 그 반대 현상을 일으킨다. 그들은 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는커녕 완전한 비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리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하여 고통까지도 감당했다. 만일 그들이 지금 복음을 버리게 되면 더욱더 어리석은 자가 될 것이다.

(4) 그는 사역자들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고 기적을 행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즉 그는 그 사역자들이 율법의 행위로 그렇게 했나 아니면 듣고 믿음으로 그렇게 하였나에 대해서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들은 사역자들의 행동이 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자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주 확실한 인정을 받을 뿐 아니라 입증까지 되었던 교리를 버릴 경우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Ⅱ.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교리 3:6-18

 

그는 주로 그들이 거절하였기 때문에 책망받았던 교리에 대해 입증한다.

(1)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사실에 관해 언급함(6절) :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확고하게 붙잡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의해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찌어다(7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그들 역시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8절). 하나님은 믿음에 의한 방법으로써 이방 세계를 의롭게 하실 것이다. 아브라함 안에서 즉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이 축복받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 특권을 받게 되는 것 역시 아브라함과 똑같은 방식에 의한다.

(2)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만 의로워짐 : 복음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을 경우 의롭게 되지 못하는 이유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 율법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되면 분명 추방을 당하고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10절). 율법에 의하면 우리의 생활 상태는 완전해야 하고 인격적이어야 하며 영원히 복종해야 한다. 이에 대한 용어는 12절에서와 같다. 우리의 순종이 보편적이고, 계속적이지 않는 한 우리는 율법의 저주아래 놓이게 된다. 만일 우리가 율법의 범법자로서 그 율법의 저주아래 있게 된다면 율법으로 의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후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13절) 이 저주를 피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리스도가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시는 방법은 아주 특이하다. 즉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것이다. 이 의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다 아브라함의 축복 특히 성령의 놀라운 약속에 대한 상속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것은 자신들을 율법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3)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구약의 특별한 증언들 :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11절). 즉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과 행복을 얻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다'는 말의 의미는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는 뜻이다. 율법은 생명의 조건으로서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제 율법은 우리의 칭의를 위한 규범이 결코 될 수 없다.

(4)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불변성을 주장하는 사도 바울 : 이 언약은 모세의 율법이 주어졌을 때에도 결코 폐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8절). 이 언약의 본래의 뜻은 언약과 유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비록 유언의 권리를 주장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유언이 폐기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16절), 바울은 그런 염려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아브라함도 선지자들도 다 죽고 없다. 그러나 이 언약은 아브라함 및 그의 자손과 맺은 언약이다. 사도 바울은 '자손은 그리스도 한 사람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거하시기 때문에 이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율법은 먼저 있었던 언약이나 약속을 폐기할 수 없다(18절). 만일 유업이 약속에 의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취소하시지 않으리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후회하실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Ⅲ. 율법을 주신 목적 3:19-29

 

하나님은 어째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셨나?

(1) 율법은…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19-20절). 이스라엘 백성도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죄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확신시켜 주었다. 율법은 또한 그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그리고 율법은 이처럼 때가 차기까지의 범죄로 인하여 주어졌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속된 자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나타났을 때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은 폐기되는 것이다. 비록 자연법으로서의 율법은 언제나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법적 언약의 구속과 그 공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율법은 인간들에게 그들의 죄가 많음을 보여줌으로써 약속의 필요성을 알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인도할 뿐이다. 약속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직접 주어지는데 반하여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주어졌다. 그러므로 율법은 약속을 폐기하려고 의도되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20절).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보다 오래 전에 한 약속을 폐기하신다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약속을 폐기하신다는 사실은 그의 진리와 신실함에 모순되는 일이다. 모세는 단지 중재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에 의하여 주어진 율법은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2) 율법은 사람들에게 구세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주어졌다(21-23절). 율법은 결코 약속과 모순되지 않는다. 율법의 의도는 인간들의 범죄를 드러내게 하고 그들에게 율법의 의보다 더좋은 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다(22절). 율법은 죄인들의 상처를 드러내었을 뿐이지 결코 그들의 상처를 치료하지는 못했다. 율법의 큰 의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믿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려 함'이었으며, 그들을 위한 의의 성취에 있어서 율법의 불충분성을 깨닫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어서 약속의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도록 의도 되어졌다(24-28절). 그들은 감금 상태에 있는 죄인처럼 율법의 공포와 규율아래 감금되어 있었다. 이 결과로 인하여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더 용이하게 그를 영접할 수 있게 되었다. 율법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길을 잃어버린 바 되어있는 것을 깨닫게 하며 또 그들이 의를 지키기에 연약하고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하기에 적당하다. 이와 같은 율법은 그들의 몽학선생이 되어 미성숙의 상태에 있는 그들을 훈계하고 다스리게 되었고 그들의 종이 되어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그들의 후견인의 인도하에 학교로 가듯이)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몽학선생인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칭의와 구원의 참된 길로 인도되도록 훈련받았다. 사도 바울은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다고 덧붙여 말한다. 즉 우리는 이전과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율법이 더이상 필요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옛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사실은 그의 옛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낸다. 율법은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갖도록 격려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2) 유대인들이 율법의 의도를 잘못 생각한 점에서 그들의 큰 과오와 어리석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여 의롭게 되기를 기대한 반면에 율법은 그들을 의롭다고 규정하기 위함이 아니고 그들에게 그 자신의 죄와 구세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수단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3) 율법보다 우월한 복음의 유익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미성숙 단계에 있는 어린아이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성숙한 아들로 대우를 받고 있다. 이 사실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계속 설명하고 있다.

   ①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26절). 참 그리스도인이 복음아래서 누릴 놀라운 특권은 그들이 더이상 종으로 간주되지 않고 아들로 간주된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녀의 일원이 되도록 허용되었으며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도록 인정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27절)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그들이 세례를 받을 때 고백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예속된 자가 된 후에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았다. 세례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정을 받는 엄숙한 의식이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27절). 복음아래에서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로 세례 받은 우리는 그의 죽음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즉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자주 기억할수록 그것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될 것이다.

   ②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모든 참 그리스도인이 공통으로 누리고 있다. 율법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별하였고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두 같은 입장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어떤 민족이든 또 남자와 여자 할 것 없이 또 그들의 신분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 용납되며 그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③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하였으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고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었다. 즉 우리는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이 되며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가 되고 그 결과로 큰 축복과 특권을 가질 자격을 가지게 되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들로부터 진리와 복음의 자유를 탈취하려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처사는 이치에 맞지 않으며 현명치 못한 처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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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2:1-10

 

그리스도교가 처음 전파되던 때부터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과 이방인으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 사이에는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였으나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여행한 2차 전도 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다(갈 2:1-10).

(1) 그는 1차 전도여행(갈 1:18)을 한 후 14년이 지난 뒤에야 2차 전도여행을 했다(행 2:1,2). 이곳에서 14년이란 대체로 1차 전도여행 후 14년을 말하지만 일부의 학자들은 그의 회심 이후 14년 혹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후 14년을 말하기도 한다. 그가 다른 사도들에게 의존하지 않았다는데 대해서 몇 가지 증거가 있는데 그것은 곧 그가 다른 사도들과 오랫동안 떨어져서 복음에 대해 그들에게 묻는 일이 없이 순수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는 것이다. 14년 후에 내가 …올라갔나니. 만일 이곳에서 언급한 여행이 사도행전 15장에서 기록된 것과 같은 여행이라면 우리는 왜 바나바가 그와 동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즉 그는 안디옥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바울의 동료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디도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자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이방태생이며 무할례자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그와 동행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의 교리와 그 의식은 지엽적인 것임을 나타내주려는 것이다. '그는 계시로 인하여 올라갔다.' 사도 바울이 종종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받는 은총을 입은 것은 그의 특권이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우리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에 따라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2)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었을 때의 행동에 대한 설명(2-10절)

  1)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사사로이 한 것은(2절).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의 신실하고도 신중한 모습을 보게 된다.

   ① 그는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해왔고 또 계속해서 전파하고 있는 교리에 대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신실한 태도로 설명을 해주었다.

   ② 그는 분별있고 조심스럽게 설명하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사로이 이야기하려고 했다. 그가 이와 같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한 이유는 그의 반대자들을 동요시킬 경우 지난날의 노력으로 이룩한 성과가 삭감되거나 장차의 노력이 방해를 받지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의 목적은 그의 교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인정을 받던 받지 않던 상관없이 가장 권위있는 사람들에 의해 인정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2) 그는 자신이 전했던 교리를 확고하게 고수하였다. 그는 비록 헬라인인 디도와 동행했으나 그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도륵 강요하지 않았다. 사도들은 전혀 할례를 주장한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이 누렸던 자유를 시기하여 몰래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있었다. 만일 그들이 바울을 설득시켜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도록 하였다면 그들은 다른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 용이하였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모세율법의 멍에에 예속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그들 가운데 항상 있게 하기 위해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다. 그는 모세의 의식을 찬성하는 자들에게 굴복하려 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 그 자유를 굳건히 지키고자 했다.

  3) 바울은 비록 다른 사도들와 친교를 가졌으나 그들로부터 어떤 지식이나 권위를 받은 것은 아니다(6절). 그들이 먼저 사도가 되었다고 해서 그가 그들과 동등한 사도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그가 전에 계시에 의해 알았던 것외에는 아무 것도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그가 그들에게 전한 교리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4) 다른 사도들은 바울의 신적 사명과 권위를 충분히 확신했으며, 따라서 그를 그들의 동료 사도로 인정했다(7-10절).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처럼 바울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자로'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들과 동등한 자격을 부여했으며 그들이 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나라로 가야한다는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그 회의는 완전한 조화와 일치 속에서 끝났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교리와 행위를 모두 인정했으며, 바울도 본래 힘써 행하였던 가난한 자를 생각하도록 권하는 것외에는 아무 말도 더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비에 대한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에게만 그 자비를 한정해서는 결코 안되며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각오하고 있어야 한다.


Ⅱ.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2:11-21

 

(1) 바울은 안디옥에서 사도 베드로와 나누었던 또다른 대화와 그곳에서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갈라디아인들에게 알린다(11-14절). 다른 곳에서는 그들 사이에 좋은 조화와 일치가 있었으나 이곳에서는 바울이 베드로를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 베드로의 실수 : 베드로는 이방 교회에 왔을 때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한 유대인 몇 명이 예루살렘에서 그곳으로 오자 그는 그곳을 떠나 물러갔다. 이곳에서의 그의 실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들 중의 한 사람인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회식에 유혹되었다. 다음의 사실을 유의하라.

   ①훌륭한 사람에게도 나약함과 변덕스러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들도 인간을 기쁘게 하려는 지나친 염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망설이는 경향이 있다.

   ②나쁜 본보기, 특히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들의 나쁜 본보기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된다.

  2)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책망 : 바울은 베드로의 처사를 보고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해 주저하지 않고 책망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가 죽어 머뭇거리고 있었으나 그는 그의 소신대로 단호하게 행동했다.

(2) 그는 여기서 복음의 근본 교리를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칭의가 율법의 행위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이 교리는 바울이 이방인 가운데서 전파하였던 교리이며 지금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교리인데 이 교리를 확증하는 것이 이 서신의 주요 목적이다. 이에 대한 바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처사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곧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가 의로워진다는 말이 거짓인가? 만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면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 아닌가?" 바울은 이 사실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부인을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17절). 즉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한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였으나 우리는 그 교리에 의해 의롭게 되기는커녕 계속적으로 죄인으로 남아 있게 된다면 그는 죄를 짓게 하는 자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히 그 말을 부인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완전하고 효험이 없는 칭의의 길로 인도하셨다는 생각을 금하신다"고 바울은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18절)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죄 아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2) 바울은 그 자신의 판단과 행한 바를 우리에게 알린다.

   ①'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는 칭의는 율법을 행함으로써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또한 희생제물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음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그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모든 희생제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필요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비록 '율법에 대하여 죽었지만' 그 자신을 율법없는 자로 생각지는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복음의 교리는 의무에 대한 멍에를 약화시킨 것이 아니다. 그것을 더욱 강화시키고 확고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비록 율법에 대하여 죽었지만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함이었다.

   ②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살았다(20절). 그는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새 사람은 살아 있다. 죄는 억제되고 은혜는 소생된 것이다. 나는 살았으나 산 것은 내가 아니다. 그는 은혜를 통하여 위로와 승리를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은혜는 그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부터 왔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그는 죄에 대해 죽으려고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여하였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여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 그는 외형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것과 같이 살았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법칙 즉 그를 지지해 주는 높고 고귀한 원칙을 가지고 살았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는 그 믿음으로 살게 된다.

  3) 그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를 통하여 두 가지 큰 난제를 해결했다.

   ①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았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행위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더 이상 필요없게 된다.

   ②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소용없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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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론 1:1-5

 

1. 이 서신의 발신인(1,2)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첫째, 바울은 그의 직책과 그 직책을 얻게된 입장에 대해 일반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울은 사도의 직책을 가졌다. 그는 어떻게 하여 그 직책을 얻게 되었는지를 그들에게 알리며 또한 그 직책을 위임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사도된 자이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의 직책을 위임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사도로 위임받은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사도로 불리움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였다. 즉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실 때 그로부터 불리움을 받은 것이다.

  둘째, 바울은 이 서신을 쓸 때 그와 함께 있었던 모든 형제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가 가르쳐서 이제 그들이 확신을 얻으려는 교리에 대해서 그들도 그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2. 이 서신의 수신인(2)

이 수신인들은 모두 그들 가운데 몰래 들어온 유혹하는 자들의 술수에 의하여 다소 타락하였던 것같다.

3. 사도의 기도(3-5)

은혜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를 위한 그의 선하신 행위를 내포하며 평강은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내적 위로와 외적 번영을 모두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원하고 있다. 첫째는 은혜요 그 다음은 평강이다. 왜냐하면 은혜 없이는 참 평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결코 지나쳐 버릴 수 없었다(4절). 이 현실적인 세상은 악한 세상인데 이것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악한 현실의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셨다. 이것은 그의 백성을 이 악한 세상으로부터 옮기신다는 말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의 권세로부터 그들을 구원한다는 말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행하신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의 아버지이신 것과 같이 주 예수 안에서 주 예수로 말미암아 모든 신실한 신자들의 아버지이시기도 한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진지한 찬양과 영광을 드리면서 서론을 끝마친다(5절).

 

Ⅱ.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책망 1:6-9

 

(1) 바울은 그들의 신앙이 변질된 것에 대해 크게 염려하고 있다(6-9절). 그들의 신앙적 변질이 크게 책망을 받아야 하는 이유들은 이러하다.

  1) 그들은 '그들을 부르신 이를 떠났다.' 그들은 사도 바울을 떠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떠난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친절과 자비를 크게 남용한 죄를 범하였다.

  2) 그들은 비할 때 없는 큰 축복과 은혜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이 누렸던 큰 특권에 비례하여 그 특권을 포기한 죄와 어리석음이 컸던 것이다.

  3) 그들은 속히 복음에서 떠났다. 그들은 그들이 가졌다고 생각하였던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존경을 아주 빨리 버렸다. 이것은 그들의 연합을 보여주는 실례인 동시에 그들의 죄를 더욱 심화시킨 것이다.

  4) 그들은 다른 복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을 좇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지 않는 한 다른 복음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제시한 길 외에 다른 길로 천국에 이르려는 자들은 그들 자신의 큰 과오를 깨닫게 될 것이다.

(2) 바울이 전파한 복음은 유일하고도 참된 복음이었다(8,9절). 그리하여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파하려는 자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8절). "만일 너희가 우리의 이름을 빙자하거나 천사로부터 복음을 받은체 하여 너희에게 전파된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너희는 속은 것이다. 그리고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가 누구든 상관없이 저주를 받게 된다."

 

Ⅲ. 사도직에 대한 바울 자신의 변명 1:10-24

 

바울은 이 서신의 서두에서 이야기 한 것을 이제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앞에서는 그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사도라 선언하였으나 이제 이곳에서는 앞에서 이야기 한 그 자신의 인격과 직책에 대한 주장을 더욱 직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1) 자신의 사역의 범위와 계획으로부터 입증한다(10절).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행동한다고 고백했듯이 이곳에서 그가 우선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죄인들을 다시 하나님께 복종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찬양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하나님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을 회생시키면서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이와 같이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도임을 입증하고 있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목적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데려가는 것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임을 입증하고자 한다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 열심을 내어서는 안 된다.

(2) 그들에게 전한 그 복음을 그가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입증한다(11,12절). 사도의 특성 가운데 특별한 한 가지 사실은 그가 부름을 받고 교훈을 받아야하며 그리스도 자신으로부터 직접 그 직책을 부여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그의 지식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가르치는 권한도 직접 주 예수로부터 받았다. 이 사실에 대한 바울 자신의 입증은 다음과 같다.

  1) 자신이 회심하기 이전에 체험한 사실을 그들에게 이야기한다(13,14절). 그 자신이 아주 큰 변화를 일으켜 전에는 매우 심하게 반대하던 교리에 대해 신앙고백을 할뿐만 아니라 그 교리를 전파하게 된 이면에는 그에게 매우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2)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가지게 된 것과 사도의 직책에 임명된 놀라운 방법에 대해 그들에게 이야기 한다(15,16절). 바울의 경우 그에게 일어날 갑작스럽고도 엄청난 변화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오게 한 방법 속에는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다. 즉 그는 그 만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체험하였다. 만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나타나시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단지 외적으로만 나타나신다면 큰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 가운데 그리스도를 전파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바울 안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계시에 의한 그리스도인이며 또한 사도이기도 한 것이다.

  3) 그 이후 그가 어떻게 처신하였는지에 대해 그들에게 이야기한다(16-24절). 그는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당연히 복음에 대한 그의 지식과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한 권위를 위해 어떤 다른 사람들에게 신세질 필요가 없었다. 바울은 그의 직책에 대해 확고한 주장을 하기 위하여 엄숙한 맹세로써 그의 설명을(20절) 확실하게 만들고 있다.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맹세하는 것이 정당하지는 않지만 중대하고 결정적인 일에 있어서는 맹세가 때때로 합법적일 뿐 아니라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곳에서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그 당시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과 친교가 없었으며 그들 역시 바울의 얼굴을 본 사람이 많지 않았다. 바울 안에서 이와 같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에 대한 보고는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기쁨으로 충만케 했으며 그것은 또한 그들을 감동시켜서 그 일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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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0절)
실천적 명령 - 전장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비시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울은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두 가지 실제적인 권면 또는 행동 지침을 주고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의 대인 관계이며(1~5절), 둘째는 재물의 올바른 사용(6~10절)이다. 한편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논한 후 곧바로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하는 바울의 가르침은 성령의 역사는 고매(高邁)한 사상이나 정서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동적 상황 가운데서 나타나며, 성도의 신앙 인격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온전해진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1~5절)
성도들간의 관계 - 본문에서 바울은 교회 안에서의 대인 관계 곧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구체적인 권면을 주고 있다. 이 권면은 범죄한 성도에 대한 태도, 일반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의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1절]
범죄(헬, 파랍토마). 고의적인 범죄가 아니라 실수로 범한 과오를 의미한다. 본절에서 바울은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과오를 범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둘째, 형제의 과오를 바로잡아 주는 일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숙한 신앙인에 의해 실행되어야 한다. 셋째, 범죄자에 대한 권면은 온유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아무리 성숙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과오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2절]
짐을 서로 지라. 본절에 나오는 '짐'(헬, 바레)은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과중한 시련이나 고통, 어려움을 의미한다. 한편 인간에게는 다음의 세 가지 짐이 다가온다.
1) 불필요한 짐 : 인간의 과오와 시행 착오로 말미암는 고통
2) 불가피한 짐 :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짐
3) 자발적인 짐 :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나누어 지는 것(요 13:34)이다.
[3~4절]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성도들의 내적 성찰(省察)이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방해하는 성도들의 잘못된 내적 태도는 자기 기만과 언제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려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5절]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본문에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모든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보응받을 것이라는 경고가 암시되어 있다(전 3:17; 계 22:12).
(6~10절)
물질 사용에 대한 권면 - 금전 또는 물질의 구체적인 사용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금전을 사용해야 할 경우는 주의 사역자들의 생계를 돌보기 위해서(마 10:10), 육체의 요구가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가난한 형제를 구제하고 사회적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이다(고후 9:1).
[6절]
주의 사역자들이 교회로부터 생계비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고전 9:11; 딤전 5:17, 18).
[7절]
하나님은 만홀(慢忽)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와 숨은 생각을 아시며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속이거나 비웃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을 가장한 모든 외식과 이기적인 삶은 비록 인간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을 수 있다(롬 7:5).
[8절]
그리스도인의 경제 생활에 대한 지침이자 진리이다. 즉 사람이 돈을 자신의 육체로 만족시키는 데 쓴다면 육신이 죽을 때 그 결과는 허무와 소멸로 끝나지만, 재물을 영적 목적과 사랑의 실천을 위해 쓴다면 그 결실은 영속(永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생활 원칙은 비단 돈의 사용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나 마음 등의 사용에도 적용될 수 있다.
(11~18절)
결론적 경고 - 본서의 결론부로 본서를 마감하면서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은 외면적이거나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한편 본서 전체의 결론부인 본문에서 새삼 할례의 무익성을 반복 강조한 것은 본 서신의 핵심 주제 곧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 위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11절]
내 손으로...큰 글자로 쓴 것.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여기서는 첫째, 본 서신의 진실성을 증명하고 자신의 주요 논점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견해와 둘째, 바울의 시력이 나쁘거나 눈의 질병 때문이라는 견해가 가장 보편 타당하다(고후 12:7).
[12~13절]
본문에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의 특징이 언급되어 있다. 그들은 인간적인 겉치레만 일삼는 외식자들이며(딤후 3:5),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유대주의자들이며,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현실주의자들이다(딤전 1:6, 7).

[15절]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 새사람이 된 자를 가리킨다(요 3:3, 5).

[17절]

예수의 흔적(痕迹). '흔적'(헬, 스티그마타)은 종이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낙인(烙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말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당한 핍박의 흔적을 가리킨다.

 

# 해설

실천 명령 (1~10절)

먼저 신앙의 원리를 말하고 후에 그에 합당한 실천을 추구하는 것은 바울 서신의 기본 형식이다. 성도는 바른 교리 위에서 선한 실천에 힘쓰는 자이다(롬 15:2; 빌2:14, 15; 벧후 3:14).

마지막 강조의 끝맺는 말 (11~18절)

당시 율법주의자들에게 가장 큰 빌미가 되던 할례 문제에 대한 마지막 경계(11~13절)와 그에 대응된 복음의 실천 강조(14~17절)와 공식 인사(18절)이다.

 

# 핵심

1~10절

본서를 마감하기에 앞서 믿음에 합당한 성도의 실천적 생활을 거듭 촉구하는 내용이다.

 

# 묵상

사랑의 방해 요소 (3~4절)

자기 기만과 자신을 남과 비교하려는 심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는 내적인 성찰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음 (7절)

하나님은 결코 인간에게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조롱을 당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또한 인간의 모든 행위를 아시는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간이 결코 속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요 21:7).

거짓 교사들의 특징 (12~13절)

거짓 교사들이란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외식주의자이고,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고 하는 유대주의적인 율법주의자이고,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육체만 자랑하려는 자이며, 신앙이 복음적이지 아니하고 세상과 타협하려는 자입니다(딤전 1:6, 7).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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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5:1~6:10절)
이신 득의의 적용 - 본서 전체의 셋째 단락으로 복음의 실천에 관한 내용이다. 바울은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비난과 왜곡에 대해 복음을 변명하고(1:1~2:21), 율법과 비교하여 복음의 기본 진리(교리)를 설명한 후(3:1~4:31) 이제 그에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제시하고 있다. 본문의 핵심적인 주제는 복음을 통해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굳게 지키라는 것이다(5:1). 여기서 자유는 단순히 방종이나 이기적인 자유가 아니라 죄와 사망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근원적인 해방인 동시에 참된 인간성의 회복이며 사회 도처에 산재(散在)해 있는 모든 굴종과 정치적 억압, 비인간화하는 힘에 대항하는 진정한 용기와 자기 희생을 내포하는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그리스도인의 자유(5:1), 할례의 무익성과 율법주의에 대한 경계(5:2~12), 자유의 바른 사용(5:13~15),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5:16~26), 성도의 바른 교제 및 태도(6:1~10) 등으로 나누어진다.
(1~12절)
할례의 무익성 - 앞에서 믿음(복음)의 우월성을 논증한 바울은 그 논증의 결론으로 할례의 무익성을 선포한다. 교리에서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이루는 본문은 인간의 거룩성은 인간이나 하나님이 만든 법규의 단순한 준행을 고집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윤리적 삶과 도덕성도 율법주의가 아닌 믿음을 통한 은혜라는 사실의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부각시킨다<창 17:9~14, 할례와 세례>.
[1절]
본서의 주제를 집약(集約)시킨 구절이다. 본절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전제된 것으로 추상적이거나 관념상의 자유가 아니라 율법과 죄의 멍에로부터의 구체적인 해방이다. 또한 이 자유는 내재하시는 성령의 권능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책임과 거룩으로 이어지는 자유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자유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은 우리를 구속하고 속박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신적 자유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
[2~4절]
할례의 무익성에 대한 논증 - 당시 율법주의자들은 예수를 믿든 안 믿든 간에 할례를 받아야만 의롭게 되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2:3). 이에 대해 바울은 첫째, 인간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으며 둘째, 할례를 행하는 것은 율법주의로 되돌아가 죄의 멍에를 다시 메는 것이며, 셋째, 할례로 구원 얻으려는 자는 도리어 믿음과 은혜에서 분리되어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넷째, 성도들에게 있어서 할례는 구원과 하등 상관없으며 경건에도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한다.
[5절]
의(義)의 소망. 의로워지기를 바라는 소망을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의 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에 근거한 것으로서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장차 임할 세계에서 완성된다(딤후 4:7, 8).
[6절]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바울이 여태껏 강조한 복음 진리의 핵심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으로서 구원은 율법의 준수나 종교 의식의 집행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을 동반한 믿음에 의해 가능케 된다는 진리를 선포한 것이다.
[8절]
너희를 부르신 이. 하나님을 가리킨다(롬 8:29, 30).
[9절]
적은 누룩.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을 의미한다. 한편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누룩에 비유한 이유는 첫째, 거짓된 이단 사설은 그 성장하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가볍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되며 둘째, 접촉하는 모든 것을 감염시키고 결국에는 교회 전체를 미혹에 빠뜨리기 때문에 사전에 성도들로부터 분리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1절]
십자가의 거치는 것. 여기서 '거치는 것'에 해당하는 헬, '스칸달론'은 '덫', '올가미' 또는 '시험'을 의미한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십자가의 도'(고전 1:18)는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나 불신자들에게는 '걸림돌'이나 '미련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고전 2:14).
[12절]
본문에서 바울은 당시 갈라디아 일부 지역의 여신 '아티스 시벨레' 숭배 의식 때 성행하던 이교 제사장들의 거세 풍습을 비유로 들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뜻은 거세한 사람이 생식 능력을 상실해 버리는 것처럼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도 그들의 잘못된 교리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완전히 무력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이다.
(13~15절)
행위와 사랑 - 본문은 구체적인 실천 강령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육체적 방종의 기회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지킬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 율법의 참된 정신 또한 사랑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는 성문화(成文化)되거나 관습화된 도덕 규정을 초월하며, 기독교의 자유는 인간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윤리 의식과 하나님과 인간, 사회에 대한 참된 봉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고전 10:31~33). 
[13절]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규정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할 것을 전제함으로써 은혜와 자유를 빙자하여 육체적 향략과 이기적인 삶에 빠질 수 있는 소지를 미연에 방지한다(고전 8:7~13).

[14절]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의 근본 정신이 사랑임을 밝힌다. 율법은 결코 복음과 대치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랑의 정신을 무시하고 형식적인 율법 조문에 집착하게 될 때 개인은 죄와 사망에 처하게 되고 교회 공동체는 분열과 파멸로 치닫게 된다. 이러한 잘못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외식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마 23:1~36).

(16~24절)

영과 육의 생활 - 본문은 육체의 일 열다섯 가지와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대조시켜 놓은 것이다. 율법의 행위를 따르는 자들은 입으로는 의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죄악으로 점철된 삶을 살고 있다. 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할 뿐만 아니라 삶 속에서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선한 증거를 나타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마 7:15~21).

[22절]

희락(헬, 카라). 구원받은 자의 거룩한 기쁨을 의미한다. 양선(헬, 아가도쉬네).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으로 행하는 '선행'을 의미한다(롬 15:14; 엡 5:9). 이러한 선행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다.

[25절]

성령으로 행할찌니. 그리스도인의 포괄적인 생활 규범을 한마디로 압축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적인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현실적인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마 3:8).

 

# 해설

할례와 시대 착오 (1~12절)

그리스도 이전의 율법 시대에 요구되던 할례가 새삼 신약 교회에서 요구되는 시대 착오적 모순에 대한 통박이다. 신약 시대에서도 할례를 주장하는 것은 율법을 더욱 잘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폐기된 율법에 편집광적으로 집착하는 우를 범하는 것일 뿐이다.

율법이 아니라 성령으로 (13~26절)

지금까지는 부정적 측면에서 율법주의의 부당함을 지적했으나 이 단락은 긍정적으로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성도의 가슴 속에 내주하게 되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사는 삶의 본질을 그려 보이고 있다(요 14:17; 요 16:13; 고전 3:16). 13~18절은 이제 성도는 필연적으로 성령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19~21절은 성령이 금하는 것을, 22~26절은 성령으로 행한 자들의 열매를 보여 준다.

 

# 핵심

1~26절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방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 교훈이다.

 

# 묵상

영적인 자유가 상실될 경우 (2~24절)

거짓 선생들, 즉 할례를 필수적으로 행해야 하며 반드시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는 생각이나(2~12절), 이기적인 삶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얻은 영적인 자유를 잃게 할 수도 있는 것들이기에 성도들은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자유의 본질 (13~15절)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세상 사람들처럼 방종만을 추구하는 자유가 아닌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선을 행하는 거룩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령을 좇아 육체의 욕심을 버리고 사회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또한 죄와 죄책감으로 인도하는 율법의 속박과 죄에 대한 형벌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적극적인 자유, 즉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참된 자유입니다. 이 자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고(13절), 서로 존경하고(13, 14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승리의 삶의 비밀 (16~25절)

삶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 말씀과 그의 영의 계시에 복종할 때 성령을 통하여 우리 삶에 주어지는 완전한 능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의 비밀은 육신의 것들을 제어할 것이고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삶의 열매들을 우리 안에 생산하게 할 것입니다(요 15:26~16:15; 엡 5:3~6:9).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19~24절)

육체의 일은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술수,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리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등인데 이러한 행위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은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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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7절)
율법과 복음 안에서의 삶 - 전장의 내용과 연결된 것으로 바울은 어린 유산 상속자의 비유를 들어 율법 아래 속한 삶과 복음 안에서의 자유한 삶을 대조시키고 있다. 즉 어린 상속자는 그가 실제 모든 것의 주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서 유업을 이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종과 마찬가지로 후견인과 청지기의 보호와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린 상속사가 장성하여 성인이 되면 자신의 모든 권리를 회복하게 되고 후견인과 청지기의 모든 권리는 종결된다. 바울은 이 비유를 통해 율법의 권한 및 기능은 시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장성한 자는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케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 아래 예속된 자는 하나님의 자녀라 할지라도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는 점을 교훈해 준다<서론, 두 언약의 비유>.
[2절]
후견인과 청지기. 이 둘은 모두 율법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다. '후견인'(헬, 에피트로푸스)은 '가정 교사' 혹은 '보호자'란 의미이며, '청지기'(헬, 오이코노모스)는 주인의 뜻을 받들어 주인의 재산과 노예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자란 의미이다. 이 비유는 특히 어린 상속자가 후견인과 청지기의 보호와 관리 아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자유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율법의 요구와 저주 아래 있었음을 적절히 설명하고 있다<마 5:17, 18,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
[3절]
초등 학문(헬, 스토이케이아). 문자적으로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어떤 분야에 있어서의 초보적인 지식이나 천체를 움직이게 하며 우주 모든 공간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모든 영과 천사와 마귀들 곧 종교적으로 미숙한 지식과 천체 숭배 사상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이방인의 천체 숭배 및 우상 숭배, 그 밖의 기독교 신앙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의식과 사상을 초등 학문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골 2:8).
[4절]

때가 차매. '만세 전에 예정되었던 그리스도의 성육신(초림)의 때가 되매'란 뜻이다. 한편 역사적으로 볼 때도 당시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전파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던 시기였다. 그 요인으로는 로마의 지배로 인한 세계적인 교통망(도로망)의 건설, 헬라어 공용화에 의한 언어의 통일, 극도의 도덕적 타락과 혼란으로 말미암은 영적 기갈 상태의 만연 등을 들 수 있다.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 이것은 예수께서 인성(人性)을 지니신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음을 특별히 강조한 말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율법의 예속하에 있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신 이유는 첫째, 율법을 극복하고 성취, 완성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함이며 둘째, 율법에 예속되어 신음하고 있는 모든 인간들의 질고(疾苦)를 친히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사 53:4~6)<막 10:45, 성육신의 이중목적>.
[6절]
아들의 영. 성령을 가리킨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본질상 하나이며(마 28:19) 오순절 이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성도들 속에 영원히 내주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인치시고 증거하신다(요 14:16; 롬 8:9). 아바 아버지란 뜻의 아람어로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용어이다. 한편 성도들이 하나님을 아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을 받을 때 가능한 것이다. 성령은 구원의 보증이 되시는 동시에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자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롬 8:15).
(8~11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복음과 율법을 대조시켜 복음의 우월성을 논증한 바울은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들에게 구체적인 권면과 더불어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본문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꾐에 빠져 복음 안에서의 자유와 구원을 버리고 율법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려는 것에 대해 심히 우려하고 있다. 이 유대주의자들은 율법 곧 절기를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왜곡된 주장을 함으로써 성일과 속일을 구별하여 성일에 하나님을 섬기기만하면 속일에는 방종해도 좋다는 모순된 삶을 초래했으며, 절기 지키는 것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의무와 인간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10절]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한 율법의 규례에 대한 언급이다. 날(헬, 헤메라스). 주로 안식일을 가리키며 특별히 금식하는 날도 포함된다(눅 18:12). 달(헬, 메나스). 매월 초하루에 지키는 월삭과 중요한 절기로 지키는 달들(아빕월, 에다님월 등)을 가리킨다. 절기(헬, 카이루스). 유월절(레 23:5), 오순절(대하 8:13), 장막절(요 7:2)의 삼대 절기 외에도 많은 절기가 있다(에 9:24~32). 해(헬, 예니아우투스). 매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출 23:11)과 희년(禧年)을 가리킨다(레 25:8~55).

(12~20절)

개인적 간증 - 지금까지 논리적 문장과 견책의 태도로 일관해 오던 바울은 이제 태도를 바꾸어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자신의 심정과 깊은 관심, 따뜻한 애정을 그대로 토로한다. 바울은 그가 갈라디아 지역에서 선교할 때 그들이 보여 준 따뜻한 사랑을 상기시키고 자신의 현재 심정을 진솔하게 토로한 후 믿음에 바로 서 줄 것을 간곡하게 당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애착과 양들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대(大)사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2절]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사도 바울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유대인으로서의 특권과 자부심을 버리고 이방인과 같이 된 사실을 뜻한다. 이처럼 바울이 이방인처럼 된 것은 첫째,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며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를 교훈하고 진정한 겸손의 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고전 9:20~22; 벧전 5:2~5).

[13~15절]

당시의 상황 -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이 전파한 복음을 처음 받아들일 당시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중 심한 질병으로 인해 요양차 갈라디아 지역을 방문했으며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고린도 교인들이나 유대인 적대자들과는 달리(고후 10:17) 바울을 무시하지 않고 사도로서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즉시 받아 들였다.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 깊이 결속되어 있었다.

[16절]

본절의 내용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복음에서 떠난 것을 역설적으로 책망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는 복음을 열렬하게 받아들였지만 얼마 못 가서 거짓 교사들의 유혹을 받아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17절]

저희가.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한 율법주의 거짓 교사를 가리킨다.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사모함을 받음은. 이것은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공동 번역)라는 뜻이다.

[19절]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다시 받아들여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는 바울의 엄숙한 선언을 통해 우리는 주의 사역자는 성도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고 하거나 그들을 자신의 이익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점,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에 대해 지속적이고도 헌신적인 사랑을 나타내야 한다는 점(요 10:11; 벧전 5:2, 3), 목회자의 주된 관심은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참된 삶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겔 33:6, 종교 지도자의 책임>.

(21~31절)

율법과 복음의 비교 -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바울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하갈의 비유를 통해 복음(은혜)과 율법을 구체적으로 비교 설명한다<서론, 두 언약의 비유>. 율법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 종속되게 하는 반면 복음은 구원과 영생을 주는 참된 자유의 삶으로 인도하며, 이는 성령의 역사를 통한 믿음과 하나님이 은혜의 결과이다.

[27절]

본절은 사 54:1절의 인용문으로 율법을 따르는 유대교인들에 비해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수가 훨씬 많아질 것을 예견한 것이다. 잉태치 못한 자, 구로치 못한 자, 홀로 사는 자 모두 같은 뜻으로 90세까지 자식을 낳지 못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가리킨다(창 17:17). 남편 있는 자. 아브라함의 첩으로서 이스마엘을 낳은 하갈을 가리킨다. 따라서 '홀로 사는 자의 자녀'는 이삭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상징한다. 반면 '남편 있는 자의 자녀'는 율법의 예속하에 있는 유대인을 상징한다.

 

# 해설

개인적 책망 (12~20절)

지금까지 논리적으로 율법주의를 질타한 바울은 19절에서 보듯이 사도 대 성도의 인간적 관계로 돌아가 책망을 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가 단순히 추상적 의견을 같이하는 모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나눈 영적 가족임을 새삼 깨닫는다(고전 6:15; 히 2:11).

종의 아들과 자유자의 아들 비유 (21~31절)

율법과 이신 득의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즉 율법이나 복음이나 인간 입장에서 보면 구원의 길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 취지 또는 결과론적 측면에서 보면 율법은 인간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행동을 그 조건으로 요구하여 결국 모든 사람에게 죄를 시인하게 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복음은 인간 자체를 자유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른 것임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 핵심

1~31절

바울은 지금까지의 설명에 입각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더 이상 율법의 종노릇을 하지 말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자유할 것을 권면한다.

 

# 묵상

아들의 영의 의미 (6절)

아들의 영이란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성부, 성자와 본질상 하나이며 오순절 이후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성도들 속에 내주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해 주시며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바울의 이방인 됨 (12절)

바울이 이방인과 같이 된 이유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구원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의 참된 의미를 교훈하며 진정한 겸손의 도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그 사람과 같이 될 때 가능합니다.

바울의 목자상 (12~20절)

바울은 애절한 목자의 심정으로 저들에게 구원의 진리에 굳게 설 것을 권면했습니다. 성도들이 서로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고 열심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할 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를 이루도록 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주의 사역자는 섬김을 요구하거나 성도를 자신의 이익 대상으로 삼지 않아야 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 대해 지속적이며 헌신적인 사랑을 주어야 하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참된 삶에 항상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바울을 갈라디아 교회는 무시하지 않고 사도로서 영접했으며 그가 전하는 복음을 즉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바울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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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3:1~4:31절)
복음과 율법 - 전장까지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유대주의(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의 비난과 왜곡으로부터 복음을 지키고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던 바울은 이제 본 서신의 본론에 해당하는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의 배교를 꾸짖고 복음과 율법의 관련성 및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설명한다. 본문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는 한마디로 '복음과 율법'이다. 여기서 바울은 소극적인 변명의 태도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복음과 율법을 대조시켜 복음의 진의를 밝히는 동시에 율법주의자들의 거짓된 흉계를 폭로한다. 본문의 내용은 크게 율법과 복음(3:1~14), 언약과 율법(3:15~4:7),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와 복음으로 말미암은 축복(4:8~31)의 세 단락으로 구분된다.
(1~5절)
이신 득의에 대한 성경의 근거 -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을 용납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과 영적 무지를 책망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십자가의 확실성, 성령 임재의 근거, 성령 소멸의 원인, 복음을 위한 자신의 고난, 하나님의 은혜의 근거 등을 설의법(設疑法)적 표현으로 제시하여 율법주의에 대한 복음의 절대 우월성과 은혜를 받고도 율법을 추종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어리석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한편 바울이 열거한 이 다섯 가지 관점 속에서 이신 칭의(以信稱義)의 교리가 총체적으로 내포되어 있다<서론, 이신 득의 이해>.
[1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여기서 '어리석도다'에 해당하는 헬, '아노에토스'는 생각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자의 처신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눅 24:25; 딤전 6:9). 한편 갈라디아 교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율법주의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둘째, 바울이 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분명히 증거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의지하기보다 율법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고 형식적인 율례를 따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3절]
성령으로...육체로 마치겠느냐. 성령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가능케 하는 복음의 진리를 떠나 율법주의를 따름으로써 죄와 사망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느냐는 뜻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행위와 순종, 율법과 믿음, 육과 영을 대립시켜 자신의 강조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특히 육과 영의 대립은 본서 중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비시키고 있는 부분(5:16~24)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롬 8:3~13).
[4절]
많은 괴로움(헬, 토사우타). 문자적으로는 '많은 것들'(so many things)이란 뜻이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유대인들로부터 받은 고난과 핍박을 가리킨다는 견해 등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여기서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갈라디아 교인들이 겪은 영적 체험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5절).
(6~9절)
이신 득의의 구약적 실례 - 바울이 구약의 율법을 파괴한다는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의 비난에 대해 그는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실례를 들어 자신의 이신 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확인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 사역은 만세 전에 이미 예정된 것이며,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는 신.구약을 망라하여 일관된 맥을 형성하는 성경의 핵심 사상임을 깨달을 수 있다(합 2:4).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근거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바로 믿음이다(창 15:6).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은 아브라함의 사후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 산에서 주어진 것으로,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믿음으로 순종할 당시에는 율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독자 이삭을 바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구절이 있는데(약 2:20~23), 이 행위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전적 신뢰와 순종의 정신에서 기인된 '믿음의 행위'이다(롬 6:17). 여기서 우리는 믿음은 선한 행위를 수반하며, 실천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율법의 의로 구원 얻으려는 것과 똑같이 무의미한 것임(약 2:26)을 깨달을 수 있다<약 서론, 행함과 믿음>.
[8~9절]
복(헬, 율로기아). 구약에 나타난 복(히, 베라카)은 건강, 장수, 부 등의 다분히 현세적이며 물질 중심적인 반면<신 28:6, 성경에 나타난 복의 의미> 여기서의 복은 영적인 의미가 강조된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의미한다(벧전 3:9). 따라서 하나님의 축복은 어느 개인이나 민족의 특권, 독점물이 아니라 만인에게 개방된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막 16:15; 행 13:38, 39).
(10~14절)
저주의 기준인 율법 - 바울은 유대주의 거짓 교사들과 대결하면서 복음을 목적과 기능적인 측면에서 율법과 분명히 구분한다<롬 서론, 율법과 복음의 비교>. 그가 대항하고 반박했던 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유대주의(율법주의) 사상이었다.
[13절]

속량하셨으니(헬, 엑사고라조). 문자적으로는 대가를 지불하고 노예를 사서 그 노예를 풀어 준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성도들을 율법의 저주 곧 죄와 사망의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신 사실을 의미한다(행 20:28; 벧전 1:18, 19).

[14절]

성령의 약속. 구체적으로는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성도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가리킨다(요 14:16~18; 행 1:4). 이 성령의 약속은 오순절(Pentecost) 날 성취되었으며 그 이후로 우리 가운데 내재하셔서 우리들의 삶을 인도하시고 붙드신다(행 2:1~4). 한편 구약 시대에도 성령의 역사는 있었으나 특별한 경우 택함을 받은 몇몇 사람에게만 임했으며 일시적인 것으로서 신약 시대 성령의 역사의 그림자에 불과했다(삿 6:34; 삼상 10:9)<행 서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의>.

(15~22절)

율법과 언약의 관계 - 율법과 언약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바울은 사람이 행하는 유언과 언약의 보편적 특성을 예로 들어 모세의 율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믿음에 의한 칭의의 약속은 변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특히 그는 율법에 대한 약속의 우월성과 율법이 약속의 성취를 위한 일시적 방편임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은 인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의 표명이며, 율법은 일시적인 반면 언약은 영속적인 성격을 띠며, 하나님의 구원 약속은 구약 시대 아브라함에게 이미 주어졌으며,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17절]

모세의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선재성과 우월성에 대한 강조이다. 사백삼십 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신 때부터 모세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은 때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출 12:40).

[19~20절]

본문의 내용은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공동 번역)란 뜻이다.

(23~29절)

율법의 참 목적 - 앞절까지 율법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로 일관하던 바울은 이제 율법의 적극적인 기능, 즉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참 목적을 밝히고 있다.

[24절]

몽학선생(夢學先生). 헬, '파이다고고스'는 '어린아이를 보호하거나 시중드는 사람'이란 뜻으로 실제 이 말은 어린아이가 학교에 안전하게 도착하도록 하는 일을 책임진 노예를 가리켰다. 따라서 몽학선생으로 비유된 율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만 유효한 것으로 사람들을 참된 스승이자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엡 2:15; 히 7:19).

(26~29절)

믿음의 결과 -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질 영적 축복이 3단계로 언급된다. 모든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종이나 사회적 신분, 성별의 구분이 없이 모두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의 약속을 유업으로 상속받는다.

[27절]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 단순한 물 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를 가리킨다(마 3:6). 이 성령 세례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게 한다<행 서론, 성령 세례>.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흠 없고 순전한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롬 13:13, 14).

 

# 해설

성령과 성경의 증거 (1~9절)

본문은 이신 득의 교리에 대한 증거로서 성도 각자가 체험한 성령 체험과 율법의 무관성, 또는 당시 성도가 갖고 있던 구약의 이방인의 구원 기록(창 12:3)을 제시한다.

율법의 제한성 (3:10~4:11절)

본문에서 10~14절은 율법의 객관적 기준 그 자체가 구원의 도구는 아니며 누구도 그 율법의 요구를 다 채울 수 없으니 결과적으로 율법은 저주의 기준임을, 15~18절은 시기적으로 율법은 복음의 언약, 즉 그리스도의 언약 이후에나 주어진 것임을, 3:19~4:11절은 율법은 그 시효상 모세 시대(출 12:40)부터 예수 탄생까지 밖에 영향력을 갖지 못함을 보여 준다.

 

# 핵심

1~29절

율법은 인간의 죄를 깨닫게 하며, 복음에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음을 설명한다.

몽학 선생 (24절)

주인의 어린 자녀를 맡아 그 아이가 14~16세 정도 될 때까지 등하교 길에 동행하면서 나쁜 아이들과 어울려 악에 물들지 않도록 보살피는 일을 하는 종을 가리킨다. 따라서 역할상 '도덕 교사'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처음에 이런 종을 성가시게 여겨 원망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차 그의 역할을 이해하고 좋아하며 고맙게 여긴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장이 되었을 때에는 그 종을 자유인으로 방면하기도 했다.

 

# 묵상

어리석은 갈라디아 교인 (1~5절)

갈라디아 교인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 임재의 근거와 성령 소멸의 원인을 몰라 복음을 위한 자신의 괴로움을 헛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바울의 책망은 연약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의심하지 말고 오직 성령에 힘입어 살아야 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복의 개념 (8~9절)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복은 건강, 장수 등으로 물질 중심적이고 현세적이었지만 신약의 복은 영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복이란 인간의 공적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으로 얻은 구원을 말합니다(창 12:1~3).

성령의 약속 (14절)

성령의 약속이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약속을 가리킵니다. 이 약속은 오순절에 성취되었으며 오늘날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내재하셔서 성도의 삶을 인도하십니다(요 14:16).

율법의 목적 (15~29절)

율법이란 인간들은 죄인이므로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는 수단입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기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고, 성령을 받으며 영원한 하늘 나라의 유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율법은 친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도들의 영적 복 (26~29절)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영적 복은 믿음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여 완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종이나, 사회적 신분, 성별의 구분이 없이 모두 그리스도의 형제 자매가 되며,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복의 약속을 유업으로 상속받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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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1절)
이신 득의에 대한 객관적 변호 - 전장에서 자신이 전파한 복음과 그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역설한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의 최고 지도자들도 자신의 사도권과 복음 사역을 공적으로 인정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정당성을 증거하는 동시에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됨을 폭로한다. 본장의 핵심적인 주제는 이신 득의(以信得義)이다<서론, 이신 득의 이해>.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극구 변호한 것도 결국은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으로부터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본장의 내용은 바울의 사도권<행 6:6, 사도직에 대하여>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공인(1~10절), 베드로의 외식에 대한 책망(11~14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15~21절)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10절)
사도직의 인적 승인 - 바울의 제2차 예루살렘 방문과 예루살렘 공의회(A.D. 49년)에서 결정된 사항이 언급된다(행 15:1~29). 이 방문의 목적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복음과 율법 준수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여기서 할례의 무효성과 이방인들에 대한 율법 강요의 부당함이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1절]
십사 년 후에. 이 기간은 바울이 1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베드로를 만난 때부터 계산한 기간이다. 따라서 주요 행적의 연대를 추정해보면 바울의 회심은 A.D. 32년, 1차 방문은 A.D. 35년, 이번2차 방문은 A.D.49년, 즉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린 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바울이 14년이라는 기간을 말한 것을 정확한 연대를 밝히려는 의도보다는 회심 후 그의 복음 전도 사역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는 점과 그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2절]
계시를 인하여. 바울의 제2차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안디옥 교회의 결정이라고 기록한 반면(행 15:2) 바울은 여기서 '계시를 인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의 기록에는 모순이 없다. 왜냐하면 누가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상황을 설명한 반면, 바울은 기도의 응답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자들.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지칭한다. 사사로이 한 것은. 바울이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내용을 예루살렘 공의회에 제출한 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예루살렘 교회와의 불일치에서 오는 혼란과 잡음을 사전에 없애며, 그의 복음 전도 활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모든 것을 고려하는 바울의 신중함을 배울 수 있다(딤전 6:11).
[3절]
할례. 할례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즉 교회 안에 있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 준수와 더불어 할례의 시행을 구원의 조건이라고 주장하여 이방인 성도들에게까지 이를 강요하였다. 이에 바울은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으며 할례나 기타 율법적인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재천명하고 이를 공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여하였다. 또한 예루살렘에서 유대주의자들의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동행한 디도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창 17:9~14, 할례와 세례>.
[4절]
거짓 형제.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유대인 신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신자인 것처럼 가장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복음의 진리를 배격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자들이다(고후 11:26; 벧후 2:1). 뿐만 아니라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와 속박으로부터 해방된 성도들을 다시 율법의 멍에로 옭아매어 죄와 사망의 종 노릇하도록 만든다.
[6절]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울이 자신이 전파한 복음을 사도들에게 제시했을 때 그들이 자신의 메시지에 더해준 것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은 신적 계시에 의한 것으로 완전 무결하며, 율법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추켜 올린 예루살렘의 사도들도 자기와 같은 사람인 동시에 반드시 완전한 것은 아니며, 그가 정신적인 면에서나 교리적인 면에서 사도들과 일치한다는 점을 특별히 강조한다.
(7~9절)
사도직에 대한 교회의 공적 승인 -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과 전파한 복음의 진실성이 공적으로 인정되고 베드로가 유대인의 사도로, 자신은 이방인의 사도로 결정된 사실을 밝힌다.
[9절]
야고보. 예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가 아니라 주의 형제 야고보를 가리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바울의 제2차 예루살렘 방문 때 이미 헤롯의 의해 죽임을 당한 후였다. 당시 주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공의회의 의장이자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활약하고 있었다(행 15장). 교제의 악수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직 및 그들과 같은 동역자임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그를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도자로 삼는 것을 합당하게 여긴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10절]

가난한 자들.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유대인 성도들을 가리킨다(롬 15:26).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유대 지방에는 심한 흉년이 들어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행 11:28).

(11~14절)

베드로의 외식 책망 - 복음의 진수인 이신 득의를 논증하기에 앞서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外飾) 행위에 대한 자신의 면책을 예로 들어 자신의 사도권이 베드로의 그것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음과 그의 사도권의 신적 권위를 다시 한번 확증한다. 또한 바울은 베드로의 외식을 책망함으로써 율법의 무용성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케 되는 진리를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롬 서론, 율법과 복음의 비교>.

[13절]

외식하므로. 베드로의 외식적 행위란 그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주의 형제 야고보가 보낸 율법주의적 경향을 띤 유대인들이 도착하자 그 자리를 피한 사실을 가리킨다. 한편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의 자유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초대 교회의 상황에서 베드로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개인적인 외식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외식적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거가 되며, 예루살렘 공의회(A.D. 49)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율법주의에 대한 굴복의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우리는 지도자의 중요성과 공적 책임성을 절실히 느낄 수 있으며, 외식적 행동은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결국 오염시킨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막 7:1~23, 외식에 대하여>.

(15~21절)

이신 득의 교리의 요약 -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파한 복음의 진수이자 본서 전체의 핵심 주제인 이신 득의(以信得義)의 교리를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 스스로 속죄양이 되셨으며, 구원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에 대한 믿음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다(요 14:6).

[15절]

이방 죄인. 유대인처럼 모세의 율법이나 기타 유대교적인 유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란 뜻이다. 이 말은 단순히 이방인에 대한 유대인들의 우월감이나 절대적 선민의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어적으로 유대인 신자들의 잘못된 율법주의를 비난하고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죄인이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점을 뜻하고 있다(롬 3:22).

[16절]

본절의 내용은 본서의 대강령인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 진리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특히 본절은 롬 1:17절과 함께 종교 개혁 당시 루터가 내세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란 주제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3:11; 5:4). 의롭게 되는 것(칭의, Justification). 법정 용어로서 무죄의 선포를 의미한다. 이 같은 칭의는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무능력이 전제된 것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주권적인 은총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득의(得義)의 수단인 율법의 행위와는 반대적 위치(Antithetic position)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칭의의 수단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뿐이다.

[17절]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 신학의 핵심이자 진수로 그리스도만이 그의 전부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신앙 고백이다<엡 2: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18절]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자가 어리석게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 그 율법을 구원의 기초로 삼는다는 뜻이다.

[19~20절]

율법으로...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인간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으며 죄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단지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악과 무능력,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필요성을 깨닫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믿음을 통해,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율법에 대하여 죽고 의와 진리와 영원한 생명 가운데 거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의 삶은 죄와 사망 권세로부터 분리된 삶이며(롬 6:6),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전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며, 부활의 새 생명으로 덧입게 될 영원한 삶임을 깨달을 수 있다.

 

# 해설

이신 득의에 대한 객관적 변호 (1~14절)

예루살렘 자체 내에서도 율법주의를 극복한 이신 득의의 교리가 신봉된다는 것은 사실 이방인들 또는 이방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이방인의 사도인 바울로부터만 복음을 들었던 자들에게는 매우 강력한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있었다. 그중 1~10절은 바울 등의 가르침이 피동적으로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에게 인정되었음을, 11~14절은 오히려 바울이 이신 득의의 교리로써 유대 사도의 수장격인 베드로를 책망하는 데에서 능동적으로 입증됨을 보여 준다.

이신 득의 교리의 요약 (15~21절)

질풍 노도와 같은 질타를 잠시 멈추고 차분히 원점으로 돌아와 이신 득의 교리 자체를 재삼 요약,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 단락은 이전까지의 꾸중과 이후부터의 이 교리의 확대 해석, 분석 비판 등의 내용을 이어주는 중간 단락 역할을 한다. 모든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의 범죄 결과 모든 인간이 원죄의 영향을 입게 되었다. 반면 인류 역사상 유일한 흠 없는 사람인 예수님이 희생됨으로써 모든 사람의 죄가 해결되었다. 이때 예수님과 아담은 단순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전인류에게 미치는 행동을 만인을 대표해서 각각 한 것인데, 이에 두 사람에게 적용된 원리가 바로 대표의 원리이다. 그렇다면 그런 대표가 한 행동의 결과가 나에게까지 적용되려면 내가 법적으로 그 대표와 연합되어 있어야만 할 것이다. 한 나라의 원수가 다른 나라의 원수와 수교 조약을 맺었을 때 그 두 대표는 세상 법적으로 그 백성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두 나라의 백성이 결국 수교 조약을 맺은 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연합의 원리는 아담의 경우 모든 인간이 혈통적으로 그의 후손이란 점에서, 예수님의 경우는 성령 세례를 통하여 성도가 주의 죽음과 부활에 법적으로 동참한다는 점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표로서, 믿음 즉 성령 세례를 통한 중생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영적으로 연합하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구원을 얻고 의인의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 핵심

1~14절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변호하기 위해 자신의 이방 전도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인정한 정당한 사역임을 밝힌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 (21절)

넓은 의미에서 '율법'은 모세 율법뿐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든 행위 규범을 가리킨다. 그리고 '복음'은 율법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킨다. 율법은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절대기준에 미치지 못함과 죄의 대가인 형벌을 깨닫게 한다. 반면 복음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값을 대신 치르셨으므로 죄인이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음을 선포한다. 따라서 둘 다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주신 계시인 셈이다.

 

# 묵상

제1차 예루살렘 총회 (1~10절)

주후 49년 예루살렘 총회의 주요 안건은 이방인의 할례 문제를 중심으로 한 구약 의식법 준수 문제였습니다. 이 총회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말고 복음을 믿게 하자는, 율법적 형식주의의 부당성을 지적한 바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회의였습니다.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위 (13절)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위는 다른 사람들의 외식적인 행동을 유발시키는 근거가 되었으며, 예루살렘 공의회(주후 49년)의 율법 무용론에 대한 결정을 무효화시켰습니다. 이는 율법주의에 굴복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에게는 공적 책임을 담당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 (15~21절)

구원은 인간의 계획이나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거저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됨 (16절)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무능력이 전제가 된 것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의한 것으로써 율법의 행위와는 반대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그는 구원의 유일한 길이요,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19~20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주어진 삶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분리된 삶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전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삶인 동시에 부활의 새 생명으로 덧입게 될 영원한 삶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 study
(1~10절)
바울 사도직의 근거 - 본문은 본서 전체의 서론 부분으로 문안 인사와 더불어 집필 동기를 담고 있다. 저자인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명(1, 10절)에 있어 매우 강경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거짓 복음을 좇기 시작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태도에 관해서도 준엄한 책망을 퍼붓고 있다(6~9절). 순수한 복음을 파수하기 위한 바울의 열정적인 외침이 우리의 귀에 와 닿는 듯하다.
(1~5절)
은혜의 근거 - 본문에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문안 인사가 언급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의 인사말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비교할 때 구분되는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이 있다. 첫째, 다른 서신서에 으레 있는 교회에 대한 칭찬이 전혀 없다(롬 1:8; 고전 1:4~7; 고후 1:7; 엡 1:15; 빌 1:3~5; 살전 1:6~8). 둘째, 다른 서신서에 비해 바울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셋째, 초두부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이 악한 세대를 특별히 대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 속에는 유대주의자들의 꼬임에 빠져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그릇된 길로 나간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서운한 마음과 경고가 아울러 내포되어 있다.
[1절]
사람들에게서...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님을 천명함으로써 자신을 거짓 사도들과 구별함과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받은 열두 사도와 동일한 위치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 같은 점은 오늘날 주의 사역자들도 자신의 사역의 기원을 안수나 외적 형식, 사람의 인정 등에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과 예수 그리스도에 두어야 함을 교훈해 준다<살후 서론, 서신서의 인사말과 사도권의 주장>.
[4절]
본절에는 바울이 자신의 전생애를 바쳐 전한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가 간결하게 압축되어 있다. 이처럼 바울이 서두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강조한 것은 구원이 인간의 뜻이나 공로에 의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보여 주고, 갈라디아 교인들의 잘못된 생각, 즉 믿음과 더불어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 받는다는 그릇된 구원관을 지적하기 위함이다(딛 1:9). 이 악한 세대 '오는 세상'(마 12:32), '저 세상'(눅 20:35)과 대조되는 것으로 저주와 죄악과 사탄의 속박 아래 있는 현재의 세상을 의미한다(고후 4:4; 엡 6:12).
(6~10절)
집필동기 - 문안에 이어 본문에서 바울은 본서의 저작 동기, 즉 갈라디아 교회 내의 배교 현상을 밝히고 있다<요일 4:1~6, 이단의 정체>.
[6절]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한 중요한 이유가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이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복음을 좇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대치되는 것으로 율법의 준수와 할례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이라고 여기는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8~9절]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처럼 바울이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은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왜곡시키며 교회를 분열과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자체를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0절]
복음 사역자 및 성도의 참된 자세에 대해 천명하고 있는 본절은 복음 전파 사역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 헌신이 선행되어야 하며, 성도는 세상(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으며(마 6:24), 참된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힐 때 가능케 된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11~24절)
이신 득의에 대한 주관적 변호-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전파한 복음과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기원을 변호하고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회심 과정(11~17절)과 초기 행적(18~24절)에 대해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원래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음을 환기시키면서 자신의 사도권은 복음 전파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독자적인 것이며 철저히 신적 기원을 갖는 것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것은 복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복음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1~12절]
바울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이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왔다는 점을 단언함으로써(행 26:12~18; 고전 11:23), 바울이 사도 된 근거가 불충분하며 전파하는 복음 역시 거짓되다는 유대주의자들의 비난을 일축한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복음 사역에 관한 참된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13~14절]
여기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이전(행 9:1~19) 기독교를 가혹하게 핍박했던 자신의 모습을 밝히 드러냄으로써 그의 복음 사역과 사도직이 온전히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에 의한 것임을 간증한다(빌 3:4~9). 조상의 유전. 유대교에서 전해 내려온 구전 율법 또는 전승을 가리킨다.
[15~16절]

바울의 회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개 과정을 3단계로 서술하였다. 첫째, 하나님께서 바울을 그의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擇定)하셨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사건을 통해 그를 은혜와 구원으로 부르셨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을 위한 복음 전도자로 삼으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만세 전에 예정된 것이며, 그분의 계획과 섭리는 반드시 성취된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17절]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여기서 아라비아는 다메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광야 지대를 가리킨다. 한편 바울이 회심한 후 사도들을 만나지 않고 곧바로 아라비아의 광야 지대로 나간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신학을 재정립하여 복음 전파 사역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8~24절)

사도직의 변호 -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 전도 자체가 하나님의 소명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서도 인정된 것임을 증거하기 위해, 1차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사도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사건과 그의 전도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18절]

심방(헬, 히스토레오). '교제하기 위해 방문하다'란 뜻 외에 '대화를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의 일차적인 목적은 사도들에게서 예수의 행적에 관한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21절]

수리아. 팔레스타인 북쪽 지방을 가리킨다. 길리기아(Cilicia). 소아시아 동남부 연안 지대로 바울의 고향 다소도 길리기아 지역에 포함되어 있다.

 

# 해설

머리말 (1~5절)

본서의 특징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복음의 신약 시대를 부인 또는 축소시키는 교회 내의 유대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전투적 논박이다.

다른 복음에 대한 책망 (6~10절)

사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전날 직접 이신 득의의 복음을 전하였고 또 갈라디아 교회들도 이를 알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이신 득의의 내용을 재론하기보다는 먼저 다른 복음 -또 하나의 다른 복음이 아니라, 바른 복음이 아닌 변질된 복음 - 즉 율법주의를 허용 또는 방조한 교회들을 향해 꾸지람을 주고 있다.

이신 득의에 대한 주관적 변호 (11~24절)

2:16절에 극명하게 축약된 이신 득의의 교리를 우선적으로 바울 자신에게 적용시켜 간증한다. 그 내용은 교리의 기원이 갖는 신적 권위(11, 12절)와 교리를 깨닫고 사도가 되기 전에 자신은 남보다 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음(13~17절)과 자신이 체득한 교리와 사도권은 인간인 여타 사도로부터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 받은 것(18~24절)으로 나누어진다. 결국 이 부분은 교리의 신적 권위라는 직접적 변호, 또 그 교리를 증거하는 자신의 사도권의 신적 권위라는 간접적 변호를 모두 동원하여 이신 득의 교리의 권위를 증거하고자 한 것이다.

 

# 핵심

1~10절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인사와 본서의 기록 목적이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미혹된 교인들에게 복음의 진리 안에 굳게 거할 것을 촉구한다.

 

# 묵상

배교 현상을 가진 갈라디아 교회 (6~10절)

갈라디아 교회는 긍휼과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을 배반했고,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이와 같은 배교 현상은 죄인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불완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릴 때 생겨납니다(히 6:1~8).

참된 종의 자세 (10절)

그리스도의 참된 종은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이 선행되어야 하며 세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온 정성을 기울이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마6:24). 즉,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기 유익, 영웅성, 정치적 야망, 성적 욕망 등을 버림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회심 경위 (11~24절)

바울은 이스라엘의 으뜸가는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었고 행실에 있어서 교회의 박해자였던 자신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후 이방의 전도자가 되었다고 회심 경위를 밝혔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 즉 이신 득의의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온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라

[갈라디아서 6장 11절~18절]
11절 -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절 -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절 -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절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절 -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절 -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절 -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절 -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함은 십자가로 말미암은 박해를 면하고 육체로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새로 지으심 받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1. 할례의 무익함 (11~13절)
실체가 드러나면 그림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형은 원형이 오기 전까지만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할례는 언약 백성의 표시로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의 본성을 죽이고 잘라 내는 것은 인간의 각오나 결심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악하고 더러운 본성을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할례는 이미 효력을 상실했습니다. 그런데도 할례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의식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것이 경건의 본질입니다.
* 묵상 질문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본질을 잊은 채 행하고 있는 종교적 행위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십자가만 자랑하라 (14~18절)
십자가는 죄에 대한 용서뿐 아니라 전인격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육체와 죄악을 멀리하게 되고,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할례와 율법은 단지 죄를 알게 하고 미래에 일어날 용서에 대해 확신을 줄 뿐이지만, 십자가는 용서를 실제화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공급합니다. 바울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는 십자가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롬 1:16)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랑하며 기회 있는 대로 선포합니다. 아울러 십자가를 전하다가 받은 고난의 흔적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모든 유혹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옛사람의 유혹에서 벗어나 의와 사랑과 거룩함을 추구할 힘을 줍니다.
* 묵상 질문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의미하나요?
* 적용 질문
내게 있는 '예수의 흔적'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신앙의 형식과 관습만을 지키려고 애쓰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매일매일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존재가 새로워지는 은혜를 덧입게 하소서. 화려한 세상 성공의 흔적보다 예수님을 위한 고난의 흔적을 자랑하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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