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에 매인 자가 많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가 없었다. 율법의 역할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였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이제는 육체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한눈에 보기

본문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요점

참사도

참믿음

참자유

참사도

이방인의 사도

어리석은 사람들

하갈과 사라

성령의 열매

십자가를 자랑함

저자 · 수신자

저자는 바울이며 수신자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이다. 갈라디아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소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지역 이름이다. 아마도 바울이 첫 번째 선교 여행 중에 방문한 더베, 루스드라,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등이 포함된 지역일 것이다.

기록 시기

학자에 따라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친 후인 48~50년 혹은 3차 전도 여행(53~58년) 중인 54~56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분류

서신서

목적

최초의 예루살렘 공의회는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지 여부를 심의한 끝에, 유대인의 조상들도 능히 메지 못한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는 것이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행 15:10). 하지만 예루살렘 교회를 근거지로 한 율법주의자들의 방자함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제어하기 어려웠다. 야고보는 이들을 묵인했고, 베드로도 이들의 눈치를 살폈다.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지역까지 와서 그릇된 주장을 펼치며 성도들을 현혹했다. 무엇보다 바울이 참사도가 아니라고 깎아내렸다. 바울이 정당한 사도가 아니라면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맞서 격렬하고 공격적인 어조로 편지를 쓴다.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고, 사랑과 은혜에 따른 참믿음을 설파하며, 율법과 규정에서 벗어나 참자유를 누리라고 권면한다.


참사도 (1~2장)
바울의 어조는 격렬하고 몹시 서두르는 듯하다. 간단한 인사말에 이어 곧장 핵심으로 달려간다. 그것은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이다. 또 자신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도가 맞다고 강조한다. 바울이 이토록 공격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짓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 때문에 바울이 전한 모든 것이 무효하고, 바울을 통해 성령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자들의 말대로라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모호한 분파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바울은 에두르지 않고 급소를 공격한다. 천사라 할지라도 거짓 복음을 전하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합당한 사도가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은 말도 안 된다.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이 주셨고, 예수님이 계시하신 바며,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증한 것이다. 바울이야말로 율법주의자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훨씬 더 유대적이다. 율법의 구석구석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유대인다운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굴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알고 있다. 율법이 아무도 구할 수 없음을 익히 알고 있다. 따라서 그는 성도의 믿음이 뒷걸음치도록 놔둘 수 없는 것이다.

참믿음 (3~4장)
바울은 공손한 신학 논쟁에는 관심이 없다. 상대방을 '어리석다'라는 말로 강하게 공격한다. 율법은 임시방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때까지만 유효하다. 율법의 임무는 우리를 인도해 더 나은 선생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다.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 학문의 노예가 되겠다는 뜻이다. 기껏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왜 다시 노예가 되려 하는지 바울은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사라와 하갈을 통한 복음과 율법의 비교(4장)

성경 구절

옛 언약 (율법)

새 언약 (복음)

내용

22, 24절

하갈 (여종)

사라 (자유 있는 여자)

율법의 기원은 종의 위치에 있는 모세지만, 복음은 본부인과 같은 그리스도를 기원으로 한다.

25, 28절

이스마엘

이삭

율법은 율법에 속한 자를 생산하나, 복음은 약속의 자녀요 자유로운 자를 낳는다.

23절

여종

자유 있는 여자

율법은 복음을 섬기는 위치에 머물며, 복음은 언약의 본질이다.

육체를 따라

약속을 따라

25~26절

종노릇

자유

율법은 인간을 영원히 속박하나, 복음은 자유롭게 한다.

29절

육체

생명

율법은 인간적인 노력을 요구하나, 복음은 생명의 감동하심에 기인한다.

30절

추방

유업 상속

율법으로는 구원을 이룰 수 없으나, 복음은 구원을 이룬다.


참자유 (5~6장)
바울은 할례를 강조하는 사람들에게 몹시 화를 낸다. 할례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차라리 그들 스스로 거세해 버리면 되겠다고까지 말한다(5:1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었다. 할례를 받으나 받지 않으나 그것으로 차별받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물론 자유를 남용해서는 안 된다. 자유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같이 하라"하신 말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바울은 올바른 행위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른 일을 행하고 부도덕한 일을 피하라고 줄기차게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돕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 (5:19~23)
육체의 소욕과 성령은 서로 거스르며 대적한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따라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육체의 일 vs 성령의 열매


육체의 일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 숭배, 주술,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 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제목 : 하갈의 비극을 제거하라 (피종진 목사님)

[갈라디아서 4장 28절~31절]
28절 -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절 -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절 -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절 -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인 ‘세상’이란 말씀 속에는 모든 창조하신 만물을 포함하여 사랑하시고 더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을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크게 쓰임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갈의 비극’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주신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행. 불행이 좌우되고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며 보람과 후회가 좌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기회와 자유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했을 때 많은 언약을 해주셨습니다. ① 복의 근원(창12:2)이 되고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반드시 내가 네게 자녀를 주시겠다(창 12:4)고 약속하셨고 ② 그 자손의 번성함과 만민의 아버지 (창17:4~8)가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사라가 나이가 많아 임신하지 못하자 인위적인 방법으로 몸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 약속하신 이삭을 주셨습니다.
지금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중동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에 아마겟돈 전쟁에 대하여 예언하신 말씀이 바로 중동 지역입니다. 이는 하갈이 낳은 이스마엘의 후손과 사라가 낳은 이삭의 후손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적인 전쟁으로 성경에서 예언한 마지막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생애에 반드시 ‘하갈의 비극을 제거’하여 하나님 언약의 축복이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해야 ‘하갈의 비극을 제거’할 수 있는지 말씀을 통해 상고하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첫째, 인위적인 방법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크고 작은 비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극은 인간의 인위적인 방법에 의해 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세상의 방법으로 환경 여건에 맞추고, 민심의 풍조에 맞추지만 하나님의 뜻은 따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항상 살피며 그 중심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지도자가 되고 참목자가 되어 많은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진실한 자세입니다.
그렇게 흔들림이 없이 항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여 인위적인 방법으로 애굽의 여인 하갈(도망녀)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애굽은 어떤 나라입니까? 애굽은 아프리카의 동남부에 위치하고 나일강이 흐르는 비옥하고 아주 큰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택한 선민들을 괴롭히고 학대를 했으며 또한 온갖 우상들이 난무하고 세상의 방법인 무력으로 착취하고 약탈하며 사탄의 역사가 강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약속한 선민의 계율을 완전히 파괴한 인위적인 방법은 절대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역사가(歷史家) ‘베어드’는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공의의 맷돌이 돌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는 선한 일을 할 때 선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은총과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려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약 4:4)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지배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의 비극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할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께 응답받고 확신을 얻었을 때 그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인위적인 방법으로 애굽 여인 하갈을 선택하여 화목한 가정에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85세 때 하갈이 이스마엘을 출산하여 주인인 사라를 무시하는 망령된 행동을 하여 그의 가정에 비극이 왔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4,15)라고 말씀했습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공존할 수 없듯이 우리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고 불신앙인과 멍에를 메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바른 신앙 안에서 바른 복음과 성령의 지배로 항상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말세에는 거짓선지자나 이단세력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미혹하여 타락하게 합니다. 무서운 이단과 세속화가 지금 전 세계의 교회를 향하여 물결치듯 덮쳐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승리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가야 합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17:1,2)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그는 그 약속을 믿지 않고 마음속에 인간적인 고민이 생기게 되어 하갈로부터 이스마엘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다시 언약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즉 번성케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완전히 행해야 합니다. 찬송가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라는 찬양과 같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그리고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창 17:4)고 말씀했고,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창 17:6)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약속하셨고 그 혈통에서 왕이 나오게 했고 그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그대로 이루어주십니다.
이처럼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나 수단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 안에서 믿음으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면 응답 받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에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으리라 나는 부족해도 나는 약해도 주님 도와주시니 의심 말고 두려워 말라 기적이 일어난다 말씀 안에서 믿음 안에서 할 수 있다 해 보자♪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진한다면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 모두가 잘 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악한 것을 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갈처럼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악한 것을 심으면 안 됩니다. 악을 심으면 그대로 악을 거두는 것입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잠 14:32)고 말씀했습니다. 즉 악인은 소망이 없으므로 환난에 엎드러지지만 의인은 죽음에서도 천국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아멘.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썩어져 가는 것을 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하나님께 심을 때 그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쓰나미같은 고난의 태풍이나 수많은 비극이 모두 제거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위적인 방법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야 하며 악한 것을 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승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을 거쳐 부활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
20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로마서 6장 4절]
4절 -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언젠가 제가 부흥회 인도 기간 중에 저녁에 빨간 이불을 덮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빨간 미등을 켜 놓고 기도하고 나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방금 빨간 이불이 하얀 이불로 변해 있었습니다. 하도 이상해서 불을 켜 보니 분명히 빨간 이불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빨간 등을 켜고 빨간 색을 보면 하얗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빨간 색을 통해 빨간 색을 볼 때 희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정복하는 길은 죽음인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들어온 죽음은 인생의 제일 큰 원수요, 마지막 원수인데 이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과 부활을 주시기 위해 죄없는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음을 이기고 영생을 얻고 부활의 승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사망의 종이 되었던 우리가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고 말씀하셨습니다.

곡식이 죽기 싫다고 그대로 있으면 실상 죽은 것이요,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어 다시 사는 것처럼 죽음은 죽음으로 정복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태복음 10:39)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 속에 들어갔는데 산불이 났습니다. 사방에서 불타고 있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산불에 포위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자기가 있던 그 자리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에서부터 새롭게 사방으로 불이 퍼지고 자기는 불타버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은 죽음으로 정복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역설적인 진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두가지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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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어야 다시 살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영광의 부활을 얻게 됩니다. 죽지 않고는 결단코 부활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거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가 물속에 들어가는 순간 죽었다가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새롭게 되어 부활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죽은 것처럼 믿고 살아야 하고 또한 예수와 함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처럼 믿고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마치 과거에 죽어서 천국에 갔다가 지금 부활해서 돌아온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2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후부터 바울은 죽었다가 산 자처럼 모든 사물을 전과는 달리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분토와 같이 여기며 살 수 있었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복음만을 전파하다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만을 위해 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분토는 원어 성경에 보면 똥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 죽고 난 후에 세상 것을 똥과 같이 여긴다고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존전에 서게 될 때 세상 것은 도무지 사모하고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와 행복은 하늘나라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산 자라는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의 생활에서 죽었다가 다시 산 자같이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6:11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언젠가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한 청년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생각납니다. 그는 훈련이 얼마나 힘든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목사님 설교 중에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라는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나서 고된 훈련에 임할 때마다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고 훈련에 임하고부터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훈련일지라도 능히 감당해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관후보생을 줄여 사후생이라고 부르는데 자기는 그 의미를 바꾸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아십시오. 우리 성도들은 모두 과거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믿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 수가 없고, 죽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소용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죽지 않은 옛 사람은 아무리 잘나고 지식 많고 착하고 재주가 많아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 속해 있던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몸을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새 사람의 생활은 순간순간 믿음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것처럼 살아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칭의와 구원은 단번에 순간적으로 이루어져 변함이 없지만 이 새 사람의 생활, 즉 성화된 생활은 순간순간 믿음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화된 성도라도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자라는 믿음의 긴장이 풀어지면 죄악된 옛성품이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죠지 뮬러 씨는 말하기를 "나는 어느날 죽었다. 죠지 뮬러에 대해서 죽고, 세상이나 친구들의 칭찬이나 책망에 대해서도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욕을 해도 꼬집어도 모르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옛 사람이 죽었다는 믿음으로 살 때에 불평하고 실망할 것도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또한 칭찬을 듣는다고 우쭐하고 교만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죽고 오직 예수로 사는 몸이 됨으로써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불쾌한 일이나 근심스러운 일이 있으면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말씀을 명심하고 믿음의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것으로 그치는 소극적인 포기가 아니라 죽은 후에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다시 산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로마서 6:13절에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특히 여기서 '드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날마다의 삶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맡김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2. 많이 죽어야 남을 많이 살립니다.

"죽으면 한 번 죽는 것이지 많이 죽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 줄 압니다. 내가 많이 죽으면 남을 많이 살린다는 말은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내가 희생되고 죽어지는 범위가 넓고 시간이 길면 그만큼 나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2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위해 우리가 많이 희생하는 삶을 살 때 다른 많은 사람이 예수의 복음으로 구원받아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에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음으로 인해 물이 갈라졌고 그들이 요단강 한복판에 굳게 버티고 서 있을 때에 많은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강에서 올라오자마자 요단강이 합쳐져서 더 이상 아무도 건너올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상징입니다. 제사장들이 죽음 한가운데 굳게 버티고 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교역자들이 많은 사람을 구원시키려면 우선 자신의 존재가 희생되고 죽어지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역자들이 부흥되는 교회 목사의 설교를 흉내도 내고 꿈도 크게는 가지는데,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어지는 생활은 닮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될 것 같으면서도 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거쳐야 나도 살고 남도 살립니다. 죽음을 거쳐야 부활이 있습니다. 또한 내가 많이 죽을수록 남을 많이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쪼록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한 자로 자신을 여기고 생활하여 자신도 온전히 살고 남도 많이 살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못 박읍시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20절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노력이나 수양으로 신앙 생활에 승리하는 줄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의 승리나 성공은 내 육신의 노력이나 수양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도록 사는 데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아는데, 살아 있는 사도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고, 옛사람의 생활이 죽고, 옛 사람의 정욕이 죽고, 옛 자아가 죽고, 옛 욕망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죽은 시체에다 대고 누가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바늘로 찔러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내가 죽었다는 것은 죄의 세력이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한 것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니라 육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날마다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길고 오랜 투쟁이지만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시던 주님께서 우리와도 함께 하셔서 도와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우리도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우리의 발을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당시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십자가 형틀에다 대고 크고 긴 쇠못을 박았습니다. 그 녹슨 쇠못은 예수님의 살과 뼈를 뚫고 들어가 붉은 피를 쏟아 내게 했습니다. 그 고통을 상상해 보십시오. 참혹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발 역시 이렇게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발을 못 박는다는 것은 대체 무슨 뜻일까요? 우리의 발이 예수님을 욕되게 하는 곳으로 데려 가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받은 발자욱을 따라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발이 깨끗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옛 사람의 길을 걷지 말고, 주님을 따라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은 불쌍한 자, 가난한 자, 멸망해 가는 자들을 찾아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쓰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발은 봉사하고 도와주고 이웃을 구원하는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전도하고 선교하는 발이 되어야 합니다.
롬 10:15절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내 발로 갈 수 없으면 이 구원의 복음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할 것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머큐리(Murcury)는 신의 사자로서 그 발에 날개가 달렸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자들로서 속히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결코 옛 사람의 생활을 따라 죄짓는 장소에 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의 발을 철저히 못 박아야 합니다.


2. 우리의 손을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잔인한 십자가 형틀 위에 두 팔을 벌리고 누운 채로 양손이 못에 박혀 고통을 받으며 피흘리셨습니다. 한편 도마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못자국 난 두 손을 펴 보이셨을 때 그 못자국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쳤습니다.
만일 우리의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이 손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 손을 죄와 더러운 것으로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죄없는 예수님께서는 손을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간을 구원하시고 축복하는 데 내어 주셨으므로, 우리들의 손도 죄악된 것이나 부정한 것을 만져서는 안되겠습니다.
또한 죄짓고 그릇된 일을 하는데서도 죽어져야 하겠습니다. 정직하게 수고한 열매로 돈을 벌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외롭고 쓸쓸한 이웃의 손을 잡아주며 상한 심령을 어루만지며 남을 위해 수고하고 봉사하는 데 우리의 손을 부지런히 사용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데 우리 손을 힘써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3. 우리의 귀를 못 박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귀가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 귀기울이는 대상부터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귀가 주님의 것이라면 이런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귀가 유혹하는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타락했습니다. 오늘날도 유혹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일주일 내내 피곤하게 일했는데 교회에 나가지 말고 놀면서 푹 쉬어라', 혹은 '교회 가느라고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돈을 더 벌어야 한다. 환경에 적응하며 적당히 사는 거다. 목사가 뭐라고 하든, 그런 소리는 잊어버리고 네 자신부터 살피라'고 하며 유혹합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들은 이런 소리에 귀를 막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마귀로부터 오는 소리이며 우리를 지옥문으로 끌어 넣는 유혹의 소리입니다.
또한 십자가에 못 박힌 귀는 다른 사람을 헤치는 험담이나 중상 모략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쁜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남을 험담하고 악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 사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세상 유혹의 말과 악한 말에 대하여 '나는 잘못되고 해롭히는 말을 듣는 귀가 없습니다. 나는 내 귀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4. 우리의 눈을 못 박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얼굴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다"(사 52:14)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의 얼굴은 탱자 나무같은 가시로 엮은 관에 눌러 씌워졌습니다. 그래서 가시들이 이마를 찔러서 흘러나온 피가 눈을 덮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도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입니다.
우리의 눈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은 우리를 타락시키며 저급한 본능적인 욕망를 자극시키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 가운데로 끌어 내리는 데 모든 색깔과 빛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화·잡지·각종 선전들이 사람을 타락시키는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눈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이런 것들을 보는 데서 멀리해야 합니다.
또 어떤 목사님은 '항상 위를 쳐다 보라'는 것을 자기 신앙 생활의 대전제로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오심을 바라보며 살자는 뜻입니다. 히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연약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신도 또한 나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이 연약한 다른 사람도, 환경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신자가 꿈을 꾸었는데 깊은 우물에 빠져서 위를 쳐다보니 별이 하나 보이는데 자세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은빛 줄이 하나 내려와 자기를 들어 올리더랍니다. 들어올려지던 중에, 언뜻 밑을 내려다 보는 순간 다시 가라앉기 시작하더랍니다. 크리스챤에게 밝고 빛난 새벽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눈은 항상 이 별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들어 올려지게 됩니다.

5. 우리의 혀를 못 박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혀에 대해서 실제적인 교훈을 말씀했습니다. 말은 재갈을 물려서 제어할 수 있지만 사람의 혀는 다스릴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큰 배를 작은 키로 방향을 돌리듯이 사람의 혀는 그 온 몸을 제어합니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파괴하는 힘을 가졌지만 사람의 혀는 더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짐승은 다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혀를 쓰기 원한다면 혀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시편 기자와 같이 '주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이 혀를 잘못 내둘러 갈라지고 쪼개져서 큰 손상을 입는 것을 봅니다. 그 결과 초신자들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 세상에서 타락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마귀는 이런 모습을 보며 기뻐하고 웃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관하여 나쁜 말을 들을 때 기뻐해서는 안되겠고 또 그것을 되풀이하여 말해도 안되겠습니다. 이런 말은 결국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말을 한 사람을 더욱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혀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은 날카롭고 독이 든 말을 못합니다. 남에 대하여 비판하고 빈정거리기 좋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직 우리의 혀를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또한 진실만을 말하고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만 기쁘게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6. 우리의 마음을 못 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슴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은 심장이 파열되어서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가 그의 백성에게 오시매 그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빠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기 백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 참혹한 십자가 형벌을 기꺼이 당하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당신의 마음도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죄악에 대해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생활에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과 세상으로 갈라져 있지는 않습니까.

영국의 한 용감한 장군이 예수를 믿어 물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목사님께 요청하기를 '내 몸이 다 물에 잠기어도 내 팔 하나만은 안 넣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온 몸이 예수님께 함께 장사되어야 된다고 했더니, 장군이 한사코 안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이 손만은 자유롭게 놔 두었다가 원수와 싸울 때 써야겠습니다. 이 팔만은 예수님께 드리기 원치 않습니다'라고 했답니다.

우리도 가끔 이럴 때가 있습니다. 생활의 어느 일부분만 주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우리의 온 마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즉 우리의 전 생활이 예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죽은 사람이기 때문에 감정이 없습니다. 나를 해치고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에게 복수할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모두를 사랑해야 됩니다. 우리의 생활은 주님을 위해 쓰여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피흘리신 대가를 치르고 우리의 머리를, 눈을, 귀를, 혀를, 가슴을 사셨습니다. 손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의 손을 샀습니다. 발에 못 박히시면서 우리의 발도 샀습니다. 가슴이 파열되면서 우리의 마음도 샀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부분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주님의 보혈에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철저히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죄와 세상을 이겨 나가십시오. 그리하여 옛사람을 벗어버려서 죄악에 끌려가는 지체가 되지 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께 온전히 맡겨 주께 쓰여지는 거룩한 지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낙심하지 맙시다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6절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절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절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절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서양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어느날 마귀가 자기가 쓰던 모든 도구를 다 경매 처분한다고 광고를 내서 많은 구매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하나에만 '이것은 팔지 않음'하고 써 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낙심'(discourage)이라는 도구였습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도구는 다 없어져도 좋지만 이것만은 결코 없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낙심'이란 도구만 가지면 마귀는 무슨 일이나 원하는대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이 '낙심'만 집어 넣으면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낙심이라는 도구는 마귀가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도구이며 따라서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어떤 이유에서건 낙심한 사람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경은 "선은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낙심은 불신앙의 결과요,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떨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까요?

1. 선행의 결과가 없을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하게 살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하고 축복된 결과가 없을 때 우리는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행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복된 결과가 이루어집니다. 복 받을 씨를 심으면 10년 후에건 20년 후에건, 자식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온다는 것을 믿고 길이 참고 나아가야 합니다. 반드시 심는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고, 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가 기진맥진하여 좌절하여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반드시 선행의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절대 인내가 필요합니다.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 참지 못하고 낙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을 받을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고전 15: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히 10:35,36절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담대함과 인내가 없이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히 10:38,39절에 보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신자에게 낙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한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낙심하고 있는데 밤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큰 화강암 바위를 정을 가지고 쪼아 깨뜨리려고 하는데 아무리 두드려도 깨지기는 커녕 두들긴 자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몇시간 후에 '소용 없는 일이다. 그만 두자' 하고 망치를 놓으려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옆에 나타나더니 '왜 맡겨진 일을 하지 않느냐, 왜 하던 일을 그만두려고 하느냐?' 하자 그 목사님이 '제가 아무리 힘들여 두들겨도 이 바위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니까 다시 엄숙히 말하기를 '그것은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네 책임은 바위를 정으로 두들기는 일이다. 바위가 깨지든 안깨지든 너는 일만 하면 된다. 결과는 다른 분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일을 계속해라' 하고 없어지더랍니다. 그 후에 새 힘을 얻고 다시 치니까 그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깨어지더랍니다. 선을 행하다가 결과가 속히 눈에 안보인다고 조급히 굴다가 낙심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2.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위배된 것이 아닌 이상 이루어질 것을 믿고 끈질기게 계속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이 옵니다. 그런데 기도한 즉시로 응답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에 낙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18:1절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고 하시면서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서 끈질기게 매어 달리며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더니 귀찮고 번거로워서 그 원한을 들어주었다고 하시며,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낙심지 않고 조금만 더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터인데, 도중에 낙심하고 그만두기 때문에 응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참된 기도란 저금 통장에 저금해 두는 것보다 더 확실한 것입니다. 언제 찾느냐가 문제이지 언젠가는 반드시 찾게 됩니다.
기도란 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응답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하고 기도한 것과는 다른 결과로 응답이 오며 또한 더디게도 응답이 옵니다. 더 나아가서는 불응답의 응답도 있습니다. 불응답으로 응답된 기도는 실은 더 좋게 되도록 하나님께서 다르게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한 것은 어떤 모양으로든, 언제이든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것을 믿고 계속해야지 결코 낙심하고 중단해서는 안됩니다. 기도 생활에 낙심은 금물입니다.

3. 악인이 흥하고 잘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는 그런대로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느라고 하는데 잘되는 노릇이 없고 다른 사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된 짓을 하며 사는데도 잘 사는 것을 볼 때 낙심하기 쉽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을까…'하고.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투기하거나 분을 품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잠시 뿐이고 장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잠 24:19절에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잠시 뿐입니다. 시편 37편에도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야 어떻든간에 오직 성도들은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잠 37:5, 6절에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정오의 빛과 같이 빛나게 될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시 37:7-10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파죽지세로 세계를 정복해 들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행악자를 보고만 계실까 하고 회의를 가졌지만 때가 되니 그도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야 말지 않았습니까?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한 말씀이 그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근시안적으로 판단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수레바퀴는 비록 천천히 돌기는 해도 반드시 불의를 골고루 부수고 깨뜨리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부활과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믿고 있기 때문에 결코 낙심해선 안됩니다. 정말 속상할 때는 '종점 가서 보자' 하고 꿀꺽 참아야 합니다. 히 9:27절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최후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쉽게 낙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낙심하지 않습니다.

4. 이유 모를 고난이 올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을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저주 받을만한 일을 한 일이 없이 인간으로서는 최악의 재난과 고통을 당하면서도 조금도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욕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킨 데 있습니다.
당대의 의인 욥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위인으로 살인이나 간음이나 도적질이나 그 어느 죄도 범한 적이 없었습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주일 성수도 잘하고 십일조 생활도 잘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그 많던 재난이 도적맞고 불타버려서 싹 다 없어졌습니다. 게다가 태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지면서 7남 3녀의 자녀가 모두 깔려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노라"(영어성경)까지 했습니다. 그런 욥이 마침내 연단과 시련이 지난후 갑절의 축복을 받았던 것은 어떤 고난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믿음을 지킨 것의 당연한 축복의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이유 모를 재난과 고통이 올지라도 낙심하면 안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큰 축복을 못받습니다.
약 5:7,8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하셨고 이어서 약 5:10, 11절에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금방 죽을 것 같고 하나님이 버리신 것 같아도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심을 믿고 끝까지 참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낙심은 절대 금물입니다. 낙심은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큰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끝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

[갈라디아서 6장 14절]
14절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오늘은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편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은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별 이의가 없는 줄 압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며, 가장 위대한 설교자이며, 기독교 역사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많이 받은 은혜의 최고봉을 이룬 사람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크리스챤이며 훌륭한 설교가이며 커다란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날이 가까웠을 때 그의 전 생애를 되돌아보며 고백한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에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의 훌륭한 가문도 자랑할 수 있었고 그의 많은 학문과 지식, 혹은 각처에 오르내리며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과 많은 교회를 세운 것 등을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는 위대한 문필가로서 신약성경의 삼분의 이 이상이나 기록하여 다가오는 후대의 많은 사람을 감동하여 은혜를 받게 했으므로 이것도 자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내세울 수 있었던 이 세상 모든 것 중에 어느 하나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바울은 물론 믿었지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자랑하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의 기적 행하심을 자랑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훌륭한 설교를 자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중심 사건에다 마음을 두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노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그러면 우리가 왜 그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하며, 왜 십자가를 설교해야 하며, 왜 십자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그때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다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가장 영광스러운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후 십자가는 전인류의 구원과 영생을 이룬 최대 영광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능력은 실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이 되었고 그날 갈보리 산상에서 태우신 작은 빛이 온 세상의 빛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의 그 십자가 사랑 아래 겸손히 무릎을 끓고 마음 깊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하며 우리가 항상 십자가를 자랑할 이유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십자가는 인간의 죄의 깊이를 나타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죄를 조금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으로 보도되는 끔찍한 사건들이나 우리 주변에서 보게되는 사람들의 비도덕적이며 비양심적인 행위들로부터 인간의 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비난하며 죄인 취급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가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이 근본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인간의 죄의 깊이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 전까지는 죄의 흉악함과 그 깊이를 결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분을 바라보고 '이 분이 누구며, 왜 죽느냐?'고 묻는다면 하늘에서 대답이 들려 오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외아들이요, 자기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을 겁니다. 바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그 아버지의 품에서 빼앗아 이 세상으로 끌어내려 잔혹한 로마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했다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이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죄의 크기와 깊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죄는 결코 가볍고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생명을 대가로 지불하실 만큼 크고 심각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전에 시카고에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의 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켜 많은 의사의 치료를 받으며 애를 썼지만 별로 진전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가 최후로 20,000불짜리 수표를 끊어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의사 로렌스씨를 초청해 그분에게 수술을 부탁했습니다. 그 결과 그 의사의 치료가 성공해서 그의 어린 딸이 회복되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그 아버지가 얼마나 그 딸을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지불하신 엄청난 대가를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죄는 크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죄보다 얼마나 더 큰 것인가를 깨달을 줄 믿습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의 가장 귀중한 독생자를 희생시켰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죄가 어마나 크고 깊은가를 알게 해 줍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의 깊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놓으심으로써 그 깊고 큰 인간의 죄를 도말하여 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는 천지간에 최고의 사랑을 나타내 줍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우리가 십자가를 대할 때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될 뿐 아니라 그것을 해결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가도 깨닫게 됩니다.
요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은과 금을 주신 것이 아니라, 지상의 모든 다이아몬드를 주신 것이 아니라, 많은 육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의 독생자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희생적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옛날 말수레를 타고 다닐 때, 미국의 어느 청년이 약혼자를 태우고 가다가 어떤 언덕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말이 그의 애인을 태운 채 언덕 밑으로 달려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 청년은 쏜살같이 달려가 말고삐를 붙잡고 매달려 수레를 멈추고 애인을 구출했으나 그는 말발굽에 밟히고 수레 바퀴에 깔려서 죽게 되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간 그 애인이 피투성이가 되어 버린 청년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일으키려 했더니 그는 '내가 너를 무척 사랑했어, 그렇지'하고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저와 여러분이 죄악의 검은 말을 탄 채 죽음의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려 내려와 갈보리 산상에서 우리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확실히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나는 너희를 무척 사랑했지, 그렇지'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의 영광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셔서 고독한 길을 걸으시다가 마침내 갈보리 산상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피흘리시고 죽어주신 것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주님의 그 한없는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십자가의 메시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목사님들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여러 측면에서 그 신앙의 사상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십자가가 우리 목회의 중심이라고 하는 데는 다 일치합니다. 십자가가 모든 설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도 일치합니다. 모든 제자들의 설교의 중심도 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바울도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이룬 주님의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우리 기독교의 속죄와 부활의 복음에 있어서 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메시지야말로 구원과 영생에 이르는 유일한 진리의 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전 영국 해군이 사용하는 모든 로프에는 전부 그 가운데 붉은 실이 들어 있어서 그 밧줄이 힘이 있고 일치성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목사의 모든 목회와 설교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의 붉은 실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름받고 보내심을 받은 모든 전도자의 복음적 메시지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이어야 합니다.

4. 십자가는 전 인류에게 참된 만족을 줍니다.
여러분, 큰 슬픔을 당하거나 마음이 상하는 비극을 당한 때가 있습니까? 권하노니, 그때는 십자가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오! 주님 당신께서는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고통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나를 이 환난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면 주님은 분명히 여러분의 상한 심령을 피묻은 손으로 어루만지시며 평안과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리 커다란 고난과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시골에서 목회하면서 치아가 상해 치과에 가서 이를 뽑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는 전기로 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발로 밟아 가면서 재봉틀 밟듯이 어떤 기구를 사용해서 이를 뽑았는데 그만 뽑다가 이가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그 속의 뿌리를 뽑아 내려고 칼로 마구 째어서 집게로 뽑다가 그래도 안되겠던지 그 다음에는 구멍을 뚫는데 어찌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파했던지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30분 동안 피를 흘리게 하고 갖가지 방법을 다 쓰고도 못뽑겠는지 여기서는 못뽑겠으니 서울의 큰 병원에 가서 뽑으라고 했습니다. 그래 어찌나 화가 나던지, 온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기진맥진해 있는 터라 어떻게 해서든 여기서 뽑으라고 했더니 그 다음에는 망치와 정을 가져다가 입 안에 정을 탁 갔다가 대고 망치로 톡톡 두드리는데 얼마나 고통이 심했든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한 번씩 칠 때마다 눈에서는 북두칠성이 번쩍번쩍 했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어금니 하나를 뽑는데도 이렇게 아프거늘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양손과 양발에 못이 꽝꽝 박히고 옆구리엔 창이 들어 갔으니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우셨을까'하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고통의 십자가를 마음 속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어떤 고통과 시험이 와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믿음으로 바라보면 능히 감당할 위로와 힘과 용기가 솟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내가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도 아니하며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힘과 위로와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리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마음 속에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의문의 해답이 되시면 모든 문제의 해결이 됩니다.
그 전에 한 젊은 부부가 어린 딸을 하나 두고 결혼 생활을 하다가 뜻이 맞지 않아서 결국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어린 딸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린 딸의 장례식에 아빠도 엄마도 함께 한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맞지 않아도 그 딸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일치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그들 부부의 사랑의 공통 지점이었습니다. 그때 이혼했던 부부는 모든 차이점을 버리고 서로 재결합하기로 결심하고 새출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미워서 보기 싫은 사람이 있습니까? 생각만 해도 기분 나쁜 사람이 있습니까? 의견이 맞지 않아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습니까? 이 모든 차이점을 갈보리 십자가의 사랑 아래로 가져 오십시오. 그러면 모든 다툼과 미움이 다 사라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약함을, 모든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사 그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5. 십자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전에 런던 거리에서 점자 성경을 읽으며 구걸해 먹던 소경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사도행전을 읽다가 읽던 곳을 잊어버렸습니다. 손가락으로 짚으면서 다시 찾으려고 오르락 내리락 손가락을 옮겼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읽던 한 부분이 생각나서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나니, 천하에 다른 이름이 없나니'를 반복해서 읽으며 찾노라니 지나가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지나갔습니다. 그때 한 청년은 웃지 않고 그 소경이 외우는 말을 유심히 들으면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는 구절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소경은 그 말씀을 듣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 침대 옆에 무릎을 끓고 앉아 그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요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얻을 수 없습니다. 구제 사업을 많이 했다고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산상수훈이나 그밖에 어떤 훌륭한 말씀을 따라 산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길,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그분 앞에서 철저히 회개할 때 구원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대서양 한가운데서 배가 한 척 파선하여 침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엔 구명대가 충분하지 못해서 죽을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젊은 아버지가 구명대를 자기 아내와 어린 아들에게 하나씩 채워 주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나는 물속 무덤으로 들어가오. 그러나 당신과 아들은 구조받기 바라오. 그리고 이 다음에 내 아들이 커서 알아들을만 하거든 아빠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었다고 말해 주구려'하고 물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여러해 지나서 아빠의 사랑으로 구조되어 건강하게 성장한 그 아들이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면서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아빠에 대해서 좀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그때 엄마는 배가 파선되던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면서 '아버지는 너를 살리기 위해 대신 돌아가셨다'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바로 당신과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냐, 안 믿느냐에 따라 우리들 자신이 구원받아 영생에 이르느냐 아니면 구원받지 못해 영원한 멸망에 이르느냐 하는 영원한 운명이 결정됩니다.
요 3:36절에 보면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부부가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 딸을 데리고 대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어린 딸이 기도할 때 가만히 눈을 뜨고 쳐다보니까 강대상 뒤에 커다란 더하기 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에게 왜 저렇게 큰 더하기 표를 세워 놓았느냐고 물으니까 엄마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얘야, 저것은 십자가라는 것인데 영원한 더하기 표란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사랑을 더해 주시고, 축복을 더해 주시고, 믿음을 더해 주시고, 소망을 더해 주시고, 영생을 더해 주시는 우리의 더하기 표란다'라고 딸에게 설명해 주었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십자가는 예수님의 피값이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십니다. 이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영생의 구원을 주시므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중요성을 꼭 깨닫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제목 : 감사할 수 있는 자리 (공재영 목사님)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6절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절 -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절 -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절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절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유대인들의 지혜서「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해 봅니다.「임금님이 어떤 사람을 호출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나하고 두려워서 혼자 갈 수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친구에게 찾아갔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는 같이 가 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이유도 말하지 않고 한 마디로 거절해 버렸습니다. 두 번째 친구에게 갔더니 궁궐 대문 앞까지만 따라가고 그 이상은 못 간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친구에게 갔더니 그 친구는 말하기를 “자네는 나쁜 짓을 안 했으니 내가 가서 임금님에게 너를 변호하겠다고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해석하기를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나와 함께 가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가족이나 친척이라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나의 무덤까지는 갈 수 있어도 그 이상은 못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친구는 나 자신이 살아오면서 삶 속에 뿌려놓은 선한 흔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친구는 천국까지 함께 간다는 것입니다.」현대 과학의 위력은 인간 세계를 최첨단의 자리에 세워 놓았고 인간의 삶 속에 엄청난 속도의 변화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과학의 위력도 결코 바꿔놓지 못하는 것은 가장 평범한 진리인 심는 대로 거둔다는 법칙입니다. 이것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체에게 적용되어지는 기본적인 원리인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반드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가진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가진 것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 고백해 봅시다. 이것이 감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본문은 그 자리를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7절).
인간의 자리에는 살아온 자리에 후회할 것이 많은 것입니다. 안타까운 자리는 후회하는 그 자리에서 좋은 해답을 얻지 못하므로 또 다시 반복하면서 자신의 삶 속에 다른 이유를 들어 원망하는 자리에 자신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땅은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심든지 그것과 똑같은 것을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뿌려놓고 알곡을 기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리는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우리를 향하여 지적하기를「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는 법칙을 하나님이 만드셨기에 어떤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복되게 열어가는 자리는 자신이 심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를 가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후회하는 자리에서 좋은 해답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는 통찰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무지함이요 연약함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자리를 행복하게 열어가게 하시려고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여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요14:16). 그 보혜사가 곧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성경은 증거하기를「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연약함을 성령님이 도와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무엇을 심어야 하는 것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좋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우리가 행복해야 하는 자리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령님을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구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셔들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우리 속에서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내가 구하지 않는 것까지도 열려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으로 우리의 삶이 세워지게 되면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않고 기쁘게 좋은 것을 심게 되고 감사해야 하는 자리가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2. 인내하며 기다렸다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9절).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의 비밀을 열어주지 아니하시는 것입니까? 두 가지 큰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는 인간의 자리를 지극히 공정하게 세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자리가 복된 것임을 알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을 사람이 조종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자리를 열어주시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라고 한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자리에서 우리를 세우시는 것은 어떤 사람도 쉬운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예수님이 확인하신 자리가「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마16:24)」고 했습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이 해석하기를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반론을 제기하는 자들은 십자가 없이 쉽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을 주시는 자리가「기쁨으로 거두리라」는 약속의 자리입니다.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자리는 자신을 감격하게 하는 기쁨의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리는 행복한 자리가 있어야 좋게 세워지는 법입니다. 그 행복한 자리는 성취감의 기쁨이 아니고 내가 나를 좋게 세우는 기쁨이 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는 것은 앞의 행복한 자리와 분명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가지게 된 행복을 지켜주는 자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자신이 뿌렸던 씨의 열매의 곡식단을 가지고 다시 행복의 자리를 새롭게 세워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자리에서 낙심하게 되어 세상을 닫아버리고 싶은 것은 삶이 힘들어서도 그렇게 되지만 자신에게 있었던 행복이 사라지고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행복을 기다리며 인내했는데 결과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없는 자리에서의 결론이기에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면서 인내했다면 낙심하려고 하지 말고 시간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거두게 되는 때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사가 있습니다. 인간은 낙심할 수밖에 없는 약함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를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인내의 자리가 가능하게 하여 감사하는 자로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3. 믿음을 따라 살았으면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10절).
성경에서 말씀하기를「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19:30)」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자리를 예수님께서 한 마디로 요약한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고 처음되는 자리를 싫어하고 나중된 자리 곧 남에게 끌려 다니면서 눈치만 보는 자리를 좋아하겠습니까. 인간의 자리에 세워지는 모습은 감사다운 감사를 할 수 없고 자신의 삶 속에 누리고 사는 복을 가지고 행복하다고 말 한번 하기도 힘든 자리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사람이 성경 속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입니다. 부자인데도 그 부자의 자리가 불만과 부족함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가르쳐 준 것이 더 큰 창고를 짓고 그 곳에 쌓을 것이 없도록 가득 채워진 자리에 세워졌을 때에 비로소 평안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의 눈치만을 보는 나중된 자리입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정도로 살아가려면 어떤 자리에 세워져야만 가능한 것입니까? 인간 삶의 현장에는 그런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복되게 세워져서 자신의 삶 속에 행복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이 정도만 되어도 만족스러워하는 자리가 열려진다면 그 사람은 온 세상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감사할 수 있는 자리를 열어가는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그 자리에 세워진 사람의 자리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회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자신의 삶을 열어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받고 사는 은혜의 자리의 중심은 나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삶을 복되게 세우는 것은 은혜의 자리를 점점 크게 열어가는 지혜가 열려지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받은 은혜를 보게 되면서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관계된 믿음의 자리를 더 크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의 자리가 가정을 일으키게 되고 교회를 자랑스럽게 세우며 나라를 부강하게 열어가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즉 성도가 믿음을 따라 살았다면 감사할 수 있는 복된 사람으로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세상적 구조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다보니 이 은혜의 자리가 닫혀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복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아무리 복잡해도 하나님의 은혜는 열어주는 자리가 있습니다. 믿음을 나중으로 세우지 말고 우선하는 처음의 자리에 세워서 하나님이 세워주시는 자리에서 감사하며 사는 복을 누립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만 보려고 하다보니 세상을 감당하기가 버겁게만 보이게 됩니다. 어린 아이의 눈을 가져 봅시다. 어린 아이는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있으면 모든 것을 믿지만 부모가 없으면 매일 매일의 삶이 두려움과 눈물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성도라면 그 어떤 사람보다도 힘 있게 다시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염려부터 하지 말고 그 짐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자리는 자신의 자리에 있는 최상의 삶을 그것보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더 열심히 열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복을 알고 최상의 자리에서 감사하는 성도로 살아갑시다.  


Ⅰ. 성도의 교제 6:1-10

 

1. 범죄한 사람을 관대하게 대하라는 권고(1)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의미는 돌발적인 유혹에 의하여 죄를 범하게 된다는 뜻이다. 계획적이고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는 것과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범죄한 일이 드러난 자에 대해서는 관대해야 한다.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에서 다음의 사실들을 유의해 보자.

  (1) 범죄한 일이 드러난 자들을 바로 잡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다. '바로 잡다'라는 본래의 의미는 어긋한 뼈를 제자리에 맞춘다는 뜻이다. 우리는 용서를 함으로써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증시키면서 그들을 바로 잡도록 노력해야 한다.

  (2) 우리는 '온유한 심령'으로 이와 같은 일을 수행해야 한다. 형제의 실패를 보고 의기양양해 해서도 안되고 분노의 감정으로 대해서도 안된다. 매우 필요한 책망도 분노로써 할 때는 그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러나 관용을 가지고 책망을 받는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 진심으로 염려하면서 책망을 하게 될 때는 그들도 당연히 감명을 받게 된다.

  (3)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는 말씀이 온유함으로 책망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는 우연히 죄를 범한 사람들에 대해서 관용으로 대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들도 그와 같은 처지를 당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에 의하여 책망 받게 될 것을 깨닫게 된다.

2. 서로의 짐을 지라는 교훈(2,3)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2절). 이것은 앞절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이것은 서로에 대해 자제하고 동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은 또 더 일반적인 교훈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이것은 우리가 여러 가지 시련이나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동정하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인 그리스도의 교훈과 일치하는 행동이며 또한 우리 때문에 율법의 지배를 받게 된 그의 모범적인 행동과 일치하는 행위이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율법에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는 대신 서로의 짐을 지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 바울은 그가 칭찬했던 성도간의 겸손이 교만 때문에 상당히 큰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교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3절). 바울은 실상 그 자신이 보잘 것 없으면서 상당히 대단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람은 그 자신을 속일뿐이다. 그 자신은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있는 척 가장하여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그 자신을 가장 기만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자들은 과오를 범할 염려가 있으며 또한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 자들이다. 그들은 오히려 과오를 범하고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들이다. 왜냐하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고전 10:12)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기만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기만보다 더 큰 속임수는 없다.

3. 자기 자신의 일을 살피라는 권고(4,5)

우리는 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따라 우리의 행동을 계획한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은 이런 행동들을 살피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이런 행동들을 하나님 말씀의 규칙에 따라 진지하게 음미하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시험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어울릴 것이다. 우리의 이 일은 다른 사람에게보다도 우리에게 더 편안함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자만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은 자기 자신을 살피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과 습관을 더 잘 알수록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더욱 동정하여 도와주게 된다.

  (1) 자신을 살피는 것은 바로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음을 기뻐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아주 열심히 우리 자신의 일을 살필 경우 이것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평가했거나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얻은 좋은 평판을 통해 기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그분께 입증시킬 수가 있다. 비록 우리 자신 가운데 자랑할 만한 것을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 속에 기뻐할 만한 것을(한글 개역 성경에는 '자랑할 것'으로 되어 있음-역주)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에 대해 증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충분한 근거로 기뻐하게 될 것이다. '기뻐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게'하는 참된 방법은 '자기의 일을 살피는데'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건 뭐라고 말하건 그리 크게 신경쓸 필요가 없다.

  (2) 바울의 또다른 논지는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것이다(5절).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 자신에 대해 낱낱히 진술해야 할 날이 올 것이다. 또한 바울은 그 날에 심판이 있게 될 거소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참으로 어떻게 행했는가에 따라 선고가 있게 될 것을 선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장차 진술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면 우리는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정해 주실지 어떨지를 알기 위해서 종종 스스로 진술하는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4. 아무 값없이 자유롭게 사역자를 섬기라는 권고(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가르침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듯이 그런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명령을 받은 사람들도 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서 가르치는 자들과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구별하게 되지만 성경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충분하게 표명하고 있다. 사역자들은 신앙과 생활의 규범에 따라 말을 하는 사람들이다. 말씀에 대해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그들을 가르치는 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자들이 가르침을 받는 자들에게 영적인 것으로 뿌리는 동안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육신의 것을 거두는 것이 서로 공정한 것이다.

5. 하나님을 조종하거나 우리 자신을 기만하지 말라는 경계(7,8)

이런 잘못은 하나님이 단순한 신앙 고백으로 기만당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7절).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인 허세를 보이면서도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자기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기 쉽다. 그들이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속일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만당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만흘히 여김을 받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우리의 현 시대는 씨가 뿌려진 시대와 같다. 그러므로 저 세상에선 큰 수확을 거두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때에 우리가 지금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거두게 될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준다. 즉 씨를 뿌리는 데 있어서 두 가지로 분류되듯 그 수확도 이에 따라 거두어질 것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8절). 다시 말해 현세에선 소박하고 순간적인 만족을 얻는 데 불과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파멸과 불행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로 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들은 현재의 삶 속에서 참된 위로를 받을 것이며 또 세상 끝 날에는 영생의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분명 우리가 관계해야 할 하나님은 장차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 고백이 아니라 우리가 실천한 것에 따라 보상을 해 주실 것이다.

6.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는 경계(9)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일에 너무 큰 상처를 받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의무를 지키는 일에 피곤하여 싫증을 내기가 쉽기 때문이다.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열심히 선을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보상을 받게 된다. 비록 우리가 받아야 할 보상이 지연된다 해도 우리는 분명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7. 모든 성도들에게 선을 행할 것을 권고함(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우리가 선하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우리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해야만 한다.

  (1) 이 의무의 대상은 일반적인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우리의 관용과 자비를 너무 협소한 범위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에게 관용과 자비를 베풀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믿음의 가정들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도 제외시켜서는 안되겠지만 믿음의 가정들에게는 더욱더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이다.

  (2) '기회있는 대로' 선을 행하는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법칙

   1)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또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선을 행하여야 한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것을 무시해서도 안되며 우리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 이러한 일을 하겠다는 핑계로 그것을 죽을 때까지 연기해서도 안 된다. 그 때엔 다른 사람들에게 행할 선한 일들이 우리의 뒷전에 남게 됨으로써 더이상 우리 스스로가 그 일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선을 행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 이것은 우리의 일생사업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다.

   2)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 모든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기회를 주실 때마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그것을 선용할 것을 기대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게 되는 것이다.

 

Ⅱ. 거짓 선생들의 정체 6:11-18

 

사도 바울은 여기서 본 서신을 마무리 지으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는 그들에 대한 그의 관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대필을 하지 않고 친히 큰 글자로 썼다. 그러나 그가 그들에게 재차 거짓 선생들의 정체를 밝히기 전에 편지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던 이유는 순전히 그들에 대한 바울 자신의 애정 때문이었다.

(1) 거짓 선생들의 정체 : 육체의 모양을 내려하는 자들(12절). 그들은 종교의 형식에는 매우 열성적이었지만 참된 경건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조차 없었으며 스스로 율법도 지키지 아니하였다. 때때로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는 가장 문외한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억지로 이방인 개종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도록 하였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그들은 안일한 생활을 하고 또 세상적인 재물을 구하고자 하면서도 자기 자신들의 믿음과 양심이 파탄된 것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율법에 열심을 품기보다 세상적인 목적을 더 사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할례 받기를 원했던 이유는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육체를 자랑하려 함'이었다.

(2) 반면 바울은 우리에게 그의 성품과 행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1) 그의 유일한 자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요,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 유대화된 선생들 자신은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일과 구원에 필요한 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혼합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였으며, 십자가 외엔 그 어떤 사상이라도 혐오하고 거부하였다.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1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지니고 있는 소망의 근거를 나타낸다. 그가 십자가를 자랑한다 함으로 그 어떤 시련이 그에게 올지라도 그는 그 시련을 받아들이며 그 시련 가운데서 기뻐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우리가 십자가를 기뻐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모든 기쁨과 소망이 그 십자가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2)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14절). 그는 위에서 십자가의 웃음과 고통을 둘다 취하였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처럼 무관심하였다. 우리의 사랑하는 구세주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식어 버리게 된다.

  3) 바울은 그리스도교의 중점을 할례나 무할례에 두지 아니하고 오직 그리스도인에게 두었다(15절). 그들이 큰 관심을 기울인 것에 바울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할례와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참 종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참 종교의 본질은 그리스도들의 여러 종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존재하는 데 있다. 즉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자리를 잡게 되는 곳에 참 종교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변화에 의해 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헌신하여 살아갈 수 있다. 그로 말미암아 주 예수를 믿을 수 있으며 그러므로 어떤 외적인 신앙 고백이나 특별한 명성으로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에게 우리를 천거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이 참된 신앙을 직접 경험하고 또다른 사람들도 그런 경험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일에 제대로 관심을 쏟았다면 할례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해도 전과 같이 할례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바울이 바랬거나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소망과 기대를 갖게 한 축복은 '평강과 긍휼'이었다(여기서 소망과 기대란 말은 기도와 언약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러한 축복은 그들 속에서 역사된 은혜로운 변화에 근거한다. 바울은 이 은혜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즉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될 것으로 선포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유대적인 선생들은 할례 받은 사람들이 이 축복들을 받는 것으로 한정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이 규칙은 그들이 직접 고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 진정 이 규칙에 따라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평강과 긍휼을 얻게 될 것으로 확신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최선의 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할 수 있는 것처럼 장차 하나님의 긍휼을 받게 되리라는 것도 확신할 수 있다.

(3)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위하여 기꺼이 핍박을 받았다(17절). 그는 이미 그리스도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가 가진 흔적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견고히 붙잡았기 때문에 그의 대적들로부터 계속적으로 받았던 핍박들을 나타낸다. 바울은 사도로서의 권위와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을 쏟기에 어울리는 온정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로 그의 교회와 권위를 반대하거나 그를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괴롭혀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람들이 기꺼이 고난을 견뎌내는 가운데 그 진리들을 완전히 확신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한 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매우 불의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고백에 어긋나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도 고통이 되는 것이다.

(4) 사도는 그의 사도적 축복으로 서신을 맺는다(18절). 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애정어린 기도로써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이것은 사도의 소원을 나타내는 고별사로 자주 쓰여지는 표현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견고히 서고 또 인생의 모든 시련을 겪으며 죽음을 대하게 될 때 용기와 위로를 얻는 데 필요한 모든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갈라디아에 있는 이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잃어버릴 정도로 행동하였지만 그는 그 교회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하여 그 은혜를 열심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있고 또 그들은 그 은혜를 통해 계속적으로 영적인 감화를 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우리는 더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없다. 바울은 그들과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를 바라도록 용기를 주기 위하여 아멘이란 말을 덧붙인다.


Ⅰ. 갈라디아교인에 대한 권고 5:1-12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은 이제 더이상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이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1절). 우리는 복음 아래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롭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된 것이다. 즉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 자유 안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1) 그들이 의를 위하여 할례에 복종하고 율법에 의지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모든 유익을 상실하게 된다(2-4절). 사도 바울은 엄숙하게 이점을 선포하고 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2절). 그는 3절에서 되풀이하여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할례에 복종하지 않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 점에 대한 바울의 의도는 4절부터 나오는데 여기서 그는 그들이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한다고 표현했다. 그리스도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은혜가 떨어진 자들에게 아무 효력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공의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제 그들은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 자들이 되었다. 그런데 율법 전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복종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스도를 저버리고 그들의 소망을 율법 위에 둔다면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유일한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고 또 의지하지 않는 자들의 구세주가 되려하지 않으신다.

(2) 바울은 그들을 확고하게 설득하고자 그 자신의 실례를 들어 그들의 소망에 대해 알려 준다. 성령으로 믿음을 쫓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5절).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려야 하는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의의 소망'이다. 우리들은 이 의의 소망으로써 죽은 후의 다른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 이 의의 소망은 그들이 바라는 가장 큰 대상이며 그 어떤 것도 이 의의 소망보다 크지 않다. 그런데 이 의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얻게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그 의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2) 그들은 이 행복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곧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야 한다.

  3) 그들은 무엇을 통해서 이 의의 소망을 기다려야 하는가? 그것은 곧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것은 바로 성령의 인도와 지시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3)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다고 그들에게 말한다(6절).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므로 이제는 어디에서도 할례자나 무할례자의 구별이 없어졌다.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더 유익하거나 더 악하지 않으며 또 어느 한쪽에 의해 하나님에게 천거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한다. 즉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어떤 것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참된 믿음은 실제로 유효한 은혜이다. 믿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며 사랑에 의하여 역사하는 믿음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된다.

(4) 바울은 그들의 신앙적 퇴보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믿음을 갖기 시작했을 때의 신실성을 상기시킨다(7절).

  1) 그들은 달음질을 잘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경주와 같다. 그들이 상급을 얻기 위하여는 잘달려야 할 뿐 아니라 계속 끝까지 달려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이 경주를 함에 있어서 단지 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잘달려야 한다. 갈라디아인들은 잠시 동안은 그렇게 하였으나 도중에서 이탈하거나 힘이 빠져 비틀거리게 되었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누가 너희를 막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이 직접 대답하게 했다. 물론 바울은 그들을 방해한 자들이 누구며 무엇이 그들을 방해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스스로 이 문제에 대해 자문자답하기를 원했다. 신앙 생활을 올바르게 시작하여 잠시 동안 잘달렸던 사람들이 이제 그들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하여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잘 달리다가 그 길에서 벗어나거나 그 길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초신자들은 사단이 그들의 진로를 변경시키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복음에 순종해야만 하며 또 그들의 삶과 소망이 이 복음의 지시에 따라 인도되어야 한다. 진리는 믿어야 할뿐만 아니라 복종해야 하며 또 진리의 빛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랑과 능력도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올바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진리를 끝까지 지킬 수 없는 것이다.

(5) 바울은 유익하지 못한 설득으로부터 그들이 벗어나도록 다음과 같이 권유하고 있다(8절).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이 말은 하나님으로부터나 사도 자신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칭의와 구원의 길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 권면은 또한 사도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할례를 반대해왔고 또한 할례를 주장하는 설교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할례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가르침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 할례에 대한 가르침이 그의 매개자에게서 기인된 것임이 틀림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갈라디아인들은 그 가르침을 거절하고 또 그들이 이전에 깨달았던 진리 안에서 모든 진리를 확고부동하게 지켜야 할 이유가 있었다.

(6) 사도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나쁜 영향이 파급시키는 위험을 논증함으로써 거짓 교사들을 추종하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바울은 그 교훈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이 있음을 그들에게 확산시키기 위하여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말한다(9절). 전 기독교 사회가 한 사람에 의하여 오염될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사이에서 이러한 오염을 제거하는데 유념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열심으로 전염시켰으며 갈라디아 교인들 중 몇 명이 유혹되었던 그 교리는 기독교 자체를 전복시키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치명적인 영향을 생각한 그는 그것들을 가볍게 그리고 무관심하게 넘겨버릴 수가 없었다.

(7)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10절).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이 그와 같은 마음을 품게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그들이 인정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원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대단히 우려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최대의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는 갈라디아인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더 비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죄와 실책을 훈계함에 있어서 우리들은 지도자와 지도받는 사이를 항상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을 책망하면서도 그들의 잘못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졌던 반면 그들을 어지럽히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리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행에 따라 심판하실 것이라는데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심지어 제하여지기까지'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구원의 모든 소망으로부터 제하여지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교회의 훈계하는 사람에 의하여 제하여지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복음의 순수성을 침식시키는 거짓교사들에 대해 증거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8)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이러하다. 그는 이 갈라디아인들이 유대교적 경향을 띈 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표현한다. 이 거짓교사들은 바울 자신도 할례를 전하는 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거짓교사들이 그를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한 사실은 그가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11절) 이라는 그의 말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을 할례를 전하는 자라고 했던 그들의 말에 전적으로 반박한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파하였더라면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라고 말한다. 이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만일 그가 그들의 말에 동의하였다면 그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그들의 호의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들의 뜻대로 하기보다는 그가 비난받게 된 그 교리를 전파해왔으며 그로써 비롯된 모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해왔던 것이다. 만일 그가 유대인들에게 굴복하였더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을 것이다.' 그는 진리를 부패케하고 복음의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 자신의 안일과 명예와 생명 자체까지라도 포기하기를 원했다.

 

Ⅱ. 경건 생활의 실천에 대한 강조 5:13-26

 

바울 사도는 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지하고 실제적인 경건을 권고하기에 이른다.

(1)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13-16절).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투어서는 안되며 서로 사랑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하지만,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그들을 주의 깊게 경계시키고 있다(13절). 그는 그들에게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리는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신 것이지 율법의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하신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유 안에서 굳게 서야 하지만, 그것을 그리스도의 자비를 깨뜨리는 것으로 고집해서는 안되며 서로를 향하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려고 하는 성품을 항상 지녀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이 두 가지 있다.

  1)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14절). 사랑은 모든 율법을 총괄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할 때, 우리가 과연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이 분명해진다(요 13:35).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있는 불행한 알력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을 경우 적어도 그 당사자들에게는 중대한 파국이 임하게 될 것이다.

  2) 서로 다투는 것은 위험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15절). 만일 형제 가운데 서로 분쟁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함께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분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그 자신들의 손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짐승과 같이 서로 물고 먹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은혜를 거절하시고 사랑의 성령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시며, 또한 악령이 지배하리라는 것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2) 가장 위험한 대상인 죄악에 대항해야 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경고한다(17-26절).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모든 싸움을 멈추고 죄에 대항하여 싸운다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축복이 될 것이다. 죄야말로 우리 모두가 대항하여 싸워야 할 대상이다.

  1) 모든 사람에게는 영육간의 투쟁이 있다(17절).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느린다. 반면에 성령(우리 안에서 새로워진 부분)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심지어 자연인들에게도 이와 같은 투쟁이 있는 것과 같이(양심의 확신과 타락한 마음 사이의 투쟁) 거듭된 사람에게도 옛 본성과 거듭난 본성 사이에는 투쟁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이와 같은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

  2) 우리는 더 옳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편에 서서 우리의 욕망에 대항하여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의 유익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우리에게 이 일방적인 법칙 즉 성령을 좇아 행하는 법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16절). 바울이 이곳에서 우리에게 명한 이 의무는 복되신 성령의 인도와 영향하에서 행동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들의 타락한 본성의 세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지 못할지라도, 또 그 타락한 본성이 우리 가운데 남아있을지라도 우리가 성령을 의지한다면 그 본성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이다. 죄의 독성을 없애는 가장 좋은 해독제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가장 좋은 증거는 성령을 좇아 행하는 일이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로서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하고 있다(18절). 만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활 경향과 방향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면 비록 지금도 여전히 죄의 명령과 세력 가운데 있을지라도 율법으로 정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3) 바울은 육체의 일과 소중히 생각하여 결실을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에 대해 자세히 열거하고 있다(19절). 그는 먼저 육체의 일에 대해서 쓰고 있다. 이 육체의 일은 다양하면서도 분명하다. 어떤 죄는 '음행 간음 더러운 것 호색' 등과 같은 제 7계명에 대한 죄가 있다. 그런가 하면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새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같이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죄도 있다. 이와 같은 죄는 때때로 명성과 평판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까지도 해치는 죄를 범하게 된다. 또다른 죄로서는 술취함과 방탕함과 같이 우리 자신에 대한 죄가 있다. 이와 같은 죄에 대해서 바울은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과 같이 경계하노니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와 같은 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죄들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열매를 맺어야 할 성령의 열매를 상술하고 있다(22,23절). 육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주요 원인이기 때문에 죄를 육의 일이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성령의 열매라고 한다. 그 이유는 열매가 뿌리에서 기인된 것과 같이 은혜는 전적으로 성령에 기인되기 때문이다. 그는 특별히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명령한다.

  첫째로 사랑과 희락을 명하는데 우리들은 이것에 의하여 하나님 안에서의 변함없는 기쁨을 이해하게 된다.

  둘째로 화평을 명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화평 혹은 다른 삶에 대한 평화로움을 의미한다.

  셋째로 오래 참음과 자비를 명하는데 이는 친절함과 부당한 취급을 받았을 때의 너그러운 태도를 뜻한다.

  넷째로 양선을 명하는데 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려는 태도이다.

  여섯째로 온유를 명하는데 이는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이며 설사 화가 났다해도 곧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리고 절제를 명한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했다. 그들은 율법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아래에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열매가 있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그는 성령에 의하여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이것이야말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진실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24절). 그리스도인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직도 죄에 대하여 완전한 승리를 얻지 못하였다. 즉 성령이 그들 가운데 거하는 동시에 그들이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욕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와 같은 것으로 적지 않은 방해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완전히 파멸을 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만일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에 변함없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을 죄의 종으로 굴복시키는 그런 자들을 결코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배워야 한다. 기독교의 진리에 따라 우리들은 육의 일을 거부해야 할뿐만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일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중대한 관심거리이며 노력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 육의 일을 거부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이 바울이 나타내고자 한 의도임은 다음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그리스도의 영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임을 바울은 4:6절에서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다운 행실을 보여야 하며 선한 행실로써 우리의 선한 행동 원리를 증명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육신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좇아 살아야만 한다. 우리는 진심으로 육체의 일을 억제하고 새 생명에 따라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4) 사도는 교만과 시기를 경고함으로써 5장을 결론 짓는다. 그는 여기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도록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헛된 영광은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서로를 시기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헛된 영광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 대해서 가져야 할 사랑과 모순되는 불화와 싸움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일을 경계시키고자 한다. 다음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한다.

  첫째, 사람으로부터 오는 영광은 헛된 영광이다. 그 영광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죽게 하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지나친 관심은 불행한 투쟁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존재하는 다툼의 큰 요인이 된다.


Ⅰ. 복음의 우월성 4:1-7

 

사도 바울은 유대인 교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 구약 교회의 상태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1-3절). 그 상태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한 상태이다. 구약 교회에서도 진정으로 은혜가 베풀어졌으나 비교적 모호하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상속을 이을 자라도 성숙되지 않았을 때는 아버지가 지명한 때가 되기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약 교회도 그러한 상태에 있었다. 구약 교회에서 은혜가 모호하게 베풀어졌던 것처럼 속박도 이루어졌다. 구약 교회는 종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정하신 때가 도래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더 큰 빛과 자유의 섭리하에 거하게 된 것이다.

(2) 복음의 섭리하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상태임을 알려 준다(4-7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4절). 그 아들은 자신이 착수한 큰 뜻을 수행하기 위하여 '여자에게 나게 하심'으로써 성육신이 되었고 '율법아래 나게 하심'으로써 얽매인 바 되셨다.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 가장 큰 목적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를 구속하셔서 아들의 명분을 얻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바 되셨다. 즉 더이상 종으로 취급받지 않고 성숙한 아들로써 취급받도록 하기 위하여 보낸 바 된 것이다. 복음 아래에서는 믿는 자들 개개인이 양자됨을 얻는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그 양자의 영은 그들로 하여금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라볼 수 있게 하셨다.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그의 논증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7절). 더이상 우리는 율법의 노예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자들이 되었다.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자비는 우리를 구속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특별하게 나타난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으신 성자 하나님과 매우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고자 자신을 낮추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의해서도 그 사랑과 자비가 나타난다.

  2) 그리스도인들이 복음 아래에서 누리게 될 놀랍고 가치있는 유익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우리가 아들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본래 진노와 불순종의 자식이었던 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는 자식들이 되었다.

   둘째로는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점이다.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을 받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이 그를 닮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아들의 특성을 받은 자들은 아들의 유업을 잇게 된다.

 

Ⅱ. 그리스도의 구원 4:8-11

 

(1)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의 상태를 상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그때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가장 심한 노예상태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섬기는 것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들을 수도 없으며 또한 그들을 도울 수도 없었다. 참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자들은 거짓 신에게 귀를 기울이게 마련이다.

(2)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그들이 복된 변화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모든 사귐은 그리스도와 함께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되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3) 바울은 그들이 다시 종의 상태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불합리한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그는 그들에게 '어찌하여 돌아가려고 하는가?'라고 묻는다. 이것은 곧 다음과 같은 뜻으로 한 질문이다. "복음에서 제시하는 대로 하나님을 경배하도록 배운 너희들이 어찌하여 의식적인 예배 방법을 따르는 일에 설득 당하는가?" 그들은 그들의 잘못에 대해 유대인 자신들보다 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지켜져 왔던 의식적인 예배를 상당히 맹신하고 있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들이 스스로 예속되고자 하는 것은 영혼을 정결케 하는 능력이 없는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거짓 교사들에게 복종하고 각종 절기 즉 '날과 달리 절기와 해'를 지킴으로써 더움 심화되었다. 고상하게 신앙을 고백한 사람이라도 나중에는 그 순수한 신앙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 바울이 여기에서 특별히 강조하여 책망하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았고 또한 하나님께 알려진 바 된 후에 율법의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예속되려는 어리석음이다.

(4) 바울은 그들에 대한 그의 염려를 표명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크게 수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들 가운데 뿌리 내린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하려고 하였다. 바울은 이 일을 생각하니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Ⅲ.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애정 4:12-16

 

1. 그들을 향한 애정 어린 호소(12)

바울은 그들의 마음이 그에게서 크게 떠나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리켜 형제라 부르고 있다. 바울은 그 자신이 그들과 같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는 그 자신의 유익때문에 그들과 다툰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이 그의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에 대한 그들의 심정을 진정시키고자 애쓰고 있다.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책망이 개인적인 불쾌감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의 참다운 안녕에 기인한다는 것을 확신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그들의 이전 애정에 대한 칭찬(13,14)

그는 자신이 처음 그들 가운데 와서 겪었던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3절). 여기서 '육체의 약함'은 그 다음 절의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확실한 뜻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그의 불리한 사정으로 인하여 그들을 감명시키지 못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은 바울의 그 불리한 사정 때문에 그를 멸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 그는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사자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눈이라도 빼서 그에게 줄 수 있을 정도였다.' 이것을 볼 때, 사람들의 존경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이며 또한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변하기 쉬운 것인가! 그러므로 그들이 전에는 그 자신들의 눈이라도 빼어주려고 했던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의 눈을 빼려고 하였던 것이 아닌가!

3. 그들에 대한 훈계(15,16)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질문한 것이다. "너희들이 전에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행복을 느꼈는데 이제 그렇게 생각지 않으니 무슨 이유가 있느냐?" 처음 사랑을 버린 자들은 그들이 말하였던 그 축복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 바울은 다시 묻는다.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함으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지금까지 너희의 사랑을 받았던 내가 어찌하여 너희의 원수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그들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그들에게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그 친구를 원수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사역자들은 때때로 그들의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기 때문에 스스로 적을 만드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역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일을 두려워하여 진리를 말하는 일에 주저하여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 사역자들의 적이 된다면 그것은 단지 그 사역자들이 진리를 말하였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Ⅳ. 거짓교사의 특징 4:17-18

 

사도 바울은 이곳에서 갈라디아인들에게 거짓교사의 특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며, 그들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는 자들이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너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며 너희를 심히 사랑하는 것 같으나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너희에 대하여 열심내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17절). 그들이 의도하는 주된 목적은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려는 것이다. 진리와 성실함이 거의 없을지라도 대단한 열심을 낼 수는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좋은 규정을 제시하면서 말하기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히 사모함은 언제든지 좋다'고 했다. 좋은 일을 어떤 사람들은 흠정역에 기록된 좋은 사람으로 번역하여 바울이 그 자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 뿐 아니라'라는 구절이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일을 하는데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규칙이다. 왜냐하면 열심은 그 행위가 좋은일 일때 훌륭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에 대해 언제나 열심을 내는 것이 훌륭한 것이다. 단 한번만 혹은 학질걸린 사람처럼 가끔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몸의 체온처럼 변함없이 열심을 내어야 한다. 만일 이 규칙이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잘 지켜진다면 그리스도 교회는 얼마나 복을 누리겠는가!

 

Ⅴ.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애정 4:19-20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 대한 그의 큰 애정을 이곳에서 표현했다. 바울은 자기가 옆에 있을 때는 좋게 대하다가도 없으면 험담을 하는 그들과는 달랐다. 또한 그는 그 자신의 유익만을 추구하면서 그들에 대해 매우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체하는 거짓교사들과도 달랐다. 그는 정당한 권리를 가진 자로써 그들을 가리켜 그의 자녀들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그는 그들을 그의 어린 자녀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현재 행위를 생각해 볼 때 가능한 일이며 또한 그들이 어린 자녀와 같은 행동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에 대해 염려를 표명하고 있다. 그는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또한 그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였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 신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 대해 다정다감한 애정을 가져야 한다. 그 애정은 어린 자식에 대한 부모의 헌신적인 애정과 같은 것이다.

(2) 신실한 사역자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에 주로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역자들을 버리거나 싫어하도록 설득을 당하는 사람들의 행위야말로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그는 계속하여(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이 '그들에 대하여 의심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하여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할 기회를 찾고자 함이었다. 그는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옳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상태가 그가 염려했던 것보다 건전함을 보고 기뻐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책망하고 잔소리하는 대신 그들을 칭찬할 수 있기를 원했다.

 

Ⅵ. 이삭과 이스마엘의 생애 4:21-32

 

사도 바울은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비교함으로써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신자들과 율법을 신뢰하는 유대교 신봉자들과의 차이를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는 '내게 말하라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말한다(21절). 그는 갈라디아인들에게 역사 그 자체를 제시한다(22,23절). 즉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이요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난 이삭이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고' 즉 자연의 일반 법칙에 의하여 났지만 이삭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라가 아들을 낳을 수 없을 때에 '약속을 따라 났다.' 그는 이 역사의 의미를 그들에게 알려준다(24-27절). 사도 바울은 '이것은 비유니'라고 말한다. 하갈과 사라 이 둘은 두 언약을 의미한다. 전자의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다. 왜냐하면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현재의 유대인들의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즉 현재의 유대인들은 그 언약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들의 자손들도 그 언약에 예속되어 있다. 그러나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예시하는데 그녀는 도덕법과 의식적인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자로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자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인정을 받는 상태이다. 사도는 이와 같이 보다 큰 자유에 대하여 이사야 54:1절의 말씀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그렇지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27절). 사도 바울은 역사적 사실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의와 구원을 얻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약속된 유업을 받을 자격이 있다. 바울은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그들도 지금 그와 같은 핍박을 각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로 하여금 성경에서 '계집 종과 그의 아들을 내어 좇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창 21:10) 한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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