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의 위험성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절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절 -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절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절 -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절 -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성경 전체를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단어 중에 하나가 '내가'라는 단어, 일인칭 단수 대명사입니다. 영어로는 대문자 'I'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내가'라는 말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마귀는 우리 속에서 '내가'라는 말이 나오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기원이 '내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천사들 가운데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서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몰아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그만 저주를 받아 쫓겨나 사단이 되고 그 사단이 공중 권세 잡은 이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 14:12-14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하며 사단의 기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능력있고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였던 천사장 루시퍼는 '내가 가장 높아지겠다'하고 하다가 쫓겨나 저주받은 사단이 된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다 당신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살게 하였는데, 사단이 뱀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라 따 먹는 날에는 너도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고 하는 말로 유혹해서 인간을 타락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라는 말을 가증히 여기시고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내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징계의 말씀을 하셨고 더 나아가 저주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를 앞세우고 '내가'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는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몇 가지 경우에 있어서 '내가'라는 말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1. 물질 소유에 있어서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6절부터 19절까지 '내가'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곡식이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하리라"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하고 그 어리석은 부자의 생명을 불러 가셨습니다.
천지 만물과 모든 물질, 내 영혼 내 생명까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와 같이 '내 것'인 줄로만 아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맡겨 주신 청지기이지 무엇 하나 '내 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물들이 내게 맡겨져 있는 동안 부지런히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는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요, 또한 그 물질을 영원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청지기 비유 중에서 청지기 사표를 내라는 주인의 말을 들은 청지기가 그때부터 사표낸 뒤의 일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인심 써 둔 것이 지혜롭다고 칭찬하신 것은 주인 몰래 허비한 것을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질을 맡아 관리하는 동안에 나를 위해 쓰거나 쌓아 두지 말고 내세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써두는 자가 정말 지혜롭다는 것을 비유로써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언젠가는 인생 사표를 낼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에는 우리 물질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청지기처럼 인생 사표를 내기 전 내세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맡아 관리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써 두는 자가 정말로 그 물질을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벌었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려면 하룻밤 사이에도 화재나 여러 가지 재난을 통해 송두리채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신 8:17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눈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돈은 죽을 때에 가져가지 못하나 미리 보내둘 수는 있다'는 말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 물질에 대한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영원한 내 것이 됩니다.

2. 선을 행할 때에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마 6: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구제할 때는 크게 나팔을 불어서 널리 광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구제가 아니라 나를 나타내려고만 선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적은 칭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잃고마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내가 하고도 나를 잊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내가' 앞서면 헛수고가 되고 위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에도 금식할 때에도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 나를 나타내려고 하면 벌써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참으로 은혜를 끼칠 수 없는 것입니다.

3. 봉사와 수고에 대해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5:9, 10절에서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내가' 나타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고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 4:11절에서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눅 17: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마땅히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수고와 봉사를 할 때에도 '내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힘주시고 은혜도 주시니까 봉사도 수고도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집사가 되던 안 되던, 회장이던 아니던 꾸준히 봉사하는 것이 참된 봉사이지 '내가' 나타날 때에만 봉사하고 '내가' 나타나지 아니할 때 봉사 안하는 것은 참된 봉사라 할 수 없습니다.

4. 만족과 행복이 있을 때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고후 3: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이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올 때 어느 교인이 '오늘 설교는 참 매혹적이었습니다'하고 칭찬했더니 '당신은 늦었습니다. 내가 강단에서 내려오기 전에 마귀가 먼저 얘기를 하였습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적은 일에나 큰 일에나 만족할 일이 생기고 행복을 느낄 때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됐거니 하는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말고,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만족과 행복이 오래 지속될 수 있게 됩니다

5. 구원의 공로에 있어서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엡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된 것은 전혀 나의 공적이나 공로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선물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데 있어서 내 행위의 공로가 10%라도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10%로 감소되고 우리 인간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구원의 공로에 있어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시 115:1절에 보면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을 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오려고 할 때에 재빨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내가' 취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되어서도 안되고 삶의 방법이 되어서도 안되고 오직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는 것이 인생 행로의 목표와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놓치지 않고 받는 비결도 이것이요 인생 행로에 있어 가장 안전한 길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길입니다.
사실 은혜와 축복이 올 때 내 안에서는 교만의 잡초가 함께 자라기 마련입니다. 이에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라는 잡초를 뽑아 버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논바닥에 황새 한 마리가 앉았다가 날아갈 때 개구리 한 마리가 황새 발가락을 꽉 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신나게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논바닥에 있던 개구리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하면서 '그런 비결을 누구한테서 배웠니 좀 가르쳐다오' 하고 와글와글 떠들어대니까 황새 발에 매달린 개구리가 으시대면서 입을 열고 '내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라고 대답한 몇 초 후에 그 개구리는 그만 저 아래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예화는 '내가'라는 말을 사용한 우리 생활의 결과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이 넉넉한 때나 선을 행할 때나 봉사와 수고를 할 때나 만족과 행복이 있을 때나 구원의 공로를 말함에 있어서도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 멘- 

예비하는 지혜

[누가복음 21장 34~36절]
34절 -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절 -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절 -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오늘은 '예비하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그가 몇 수 앞을 내다보느냐에 따라 급수와 단수가 결정되고 가장 멀리 내다보고 바둑을 두는 사람이 바둑계의 거성이 되는 것입니다. 대학입시를 공부하는 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시험 준비하는 학생은 어리석은 학생이고, 고1때부터 준비하는 학생은 지혜로운 학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준비하는 학생일수록 지혜로운 학생이며 남이 다 슬퍼하며 울 때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가장 멀리 내다보는 사람일수록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요, 당장 눈 앞의 것만 내다보며 임기웅변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장 멀리 내다보며 준비하는 사람을 '지혜있는 사람'이라 했고 눈 앞에 있는 것만 보고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혜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1. 재림을 예비하는 사람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너희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뜻밖에 임할터인데 음란하고 술취하면서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거나 먹고, 입고, 사는 일, 돈을 버는데만 신경을 쓰느라고 심령이 둔하여진 상태에 있다가 그 날을 맞이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주님께서 간절히 부탁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육신의 일이나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지 말고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을 예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열 처녀 비유로 말씀되었는데 다섯 처녀는 등을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꾸벅 꾸벅 졸고만 있었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등도 준비하고 기름도 준비하고 항상 신랑을 맞이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비하고 있던 지혜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온다'할 때 얼른 등불을 켜고 나가 신랑을 맞이했고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의 육신 생활에만 얽매이지 말고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바라보며 예비하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2. 천국을 예비하는 사람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기를 잘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높은 벼슬을 하고 부요하게 잘 살았다 해도 내세에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지 못하고 살다가 죽어서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질 짧은 육신만 위해 준비하다가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부자가 종을 데리고 살았는데 그 종이 하도 바보짓을 해서 지팡이를 하나 주면서 '바보 지팡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인이 아파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종이 와서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으니 '머나먼 황천을 떠난다'고 했습니다. 하인이 '그러면 떠날 준비는 다 되었습니까?' 할 때 '준비는 무슨 준비냐? 그냥 가는 거지'하고 말할 때 그 종이 '며칠 동한 여행을 떠나도 준비가 필요한 법인데 돌아오지 못할 머나먼 황천 길을 가면서 준비를 안하다니요, 주인님이야말로 나보다 더 큰 바보입니다. 옛소! 도로 받으십시오. 이 바보 지팡이" 하고 도로 안겨 주었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는 죽은 후에 들어갈 영원한 천국을 예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우리를 천국에 들여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요 14: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도 다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어 천국으로 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요 3:16절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과 마 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일에 먼저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을 준비하고 천국의 의를 구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현세만 보는 근시안의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무덤 저편 천국을 바라보는 원시안의 사람은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3. 죽음을 예비하는 사람
앞서 말했듯이 살 준비를 잘 하는 사람도 똑똑하다 하겠지만 죽을 준비를 잘 하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는 죽음과 상관이 없는 줄 알고 삽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미국 L.A에 있는 교민의 이야기입니다. 이민을 가서 고생 고생 끝에 돈을 좀 벌어서 음식점을 인수 받아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내년 독립 기념일에는 온 가족이 한국으로 휴가를 가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물기가 있는 손으로 전기 플러그를 꽂다가 그만 감전이 되어서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전혀 죽을 준비도 없었는데 갑자기 죽게 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 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거나 미루는 위선적인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눅 16:1절 이하에 보면 칭찬받은 지혜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주인의 재물을 허비한다는 말을 듣고 주인의 청지기직을 빼앗겠다는 말을 하자 '자! 노동을 하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하고 고민하다가 한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자기가 아직 청지기로 있을 때 장래를 위해 선심이나 써두자고 생각하고 빚진 자들을 불러다가 기름 100말을 50말로 탕감해 주고 밀 100석은 80석으로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 주인이 청지기의 지혜를 칭찬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며 모든 물질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생명을 거두어 가시기 전에, 내게 물질을 맡겨 주신 동안에 미리 미리 선한 것으로 하늘 나라에 보화를 쌓아두라는 말씀입니다. 물질도, 생명도, 자식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내세를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써둘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죽음 이후를 위해 예비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곡식 종자 한 알이 있다면 그것을 삶아 먹어 버리는 것보다 밭에 심어서 수 십배 수 백배로 수확해 들이는 것이 지혜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둡니다. 그러므로 기회 있는대로 하늘 나라에 심어두면 훗날 이 세상에서도 크게 거두고 하늘 나라에서도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미래를 예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4. 심판을 예비하는 사람
오늘날 세태는 말세가 되어 극도로 악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결과가 장차 얼마나 무섭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당장 기분나는 대로 방탕하고 음란하고 마약까지 복용합니다. 그 결과 가정이 파괴되고 불치의 성병인 AIDS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여 일시적인 기분에 도취되다가 마약 중독자가 되어 결국에는 피가 마르고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고 눈도 제대로 못뜨고 부들 부들 떨다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눈을 가리워 미리 죄의 결과를 바라보지 못하게 합니다. 당장 기분좋은대로 행동하게 만들어서 폐인이 되게 하고 결국 피할 수 없는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지옥불로 툭 차넣고 마는 것입니다. 마귀는 처음에 달콤한 맛을 줍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수 천, 수 만배 쓴 고통을 갖다 줍니다. 죄의 결국을 알고 항상 절제하고 조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자살을 합니다. 자기 목숨을 자기가 끊는 사람은 하나님이 구원하시지 않고 마귀가 끌어다가 지옥으로 던집니다. 조그만 고통과 불안도 이기지 못하게 하고 '너는 소망이 없다. 골치 아픈데 끝내 버려라. 간단히 끝장 내라'는 마귀의 소리에 속아서 자살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자살은 100%가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우리는 장차 있을 심판을 예비하여 함부로 경거망동하는 일이 없어야 되겠습니다.

5. 기도로 예비하는 사람
미리 예비하는 또 하나의 지혜가 있는 데 모든 일을 미리 기도로 예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모든 일을 기도로 미리 준비하셨습니다.
공생애로 들어가시기 전에 40일 금식 기도로 준비하셨고 제자를 선택하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온 밤을 새워 철야기도로 준비하셨고 십자가를 지는 큰 고통을 앞두고는 온 밤을 새우며 피땀을 흘리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매일 새벽 미명한 시간에 한적한 곳에 나가 그 날의 생활을 위해 미리 준비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생애는 승리의 생애였고 마귀를 이기는 생활이었고 완전한 생애였습니다.
하물며 우리 연약한 인간이 준비 기도 없이 어떻게 마귀를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겠습니까? 기도로 항상 준비하는 생활에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무슨 일에나 미리 기도로 준비하는 일에는 실패가 없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옵니다. 기도로 준비하는 생활이 가장 지혜로운 삶인 것입니다. 결코 우리의 생각이 기도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예비하고 천국을 예비하고 죽음을 예비하고 심판을 예비하여 절제하며 모든 일에 기도로 예비하는 생활이 참 지혜입니다. 할렐루야!
-아 멘-

올바른 습관을 갖자

[누가복음 4장 16절]
16절 -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22절 -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절 -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절 -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 사람의 습관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그 사람이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훌륭하고 복된 인생을 살 수가 있고 습관이 나쁘면 아무리 인물이 좋아도 그 사람은 복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가 없고 또 남에게 존경받는 생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한 가정에서 그 가장의 나쁜 습관 하나 때문에 그에게 딸린 여러 식구가 불행에 빠지고 고생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몇 년전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것을 여러분도 보신 줄 압니다. 경북 상주에서 열 살난 정재수군이 아버지와 함께 40리 떨어진 큰 아버지 집에 갔다가 아버지가 술에 만취되어서 산을 넘어오다가 눈길 위에 쓰러졌습니다. 열 살난 아들 정재수군이 쓰러진 아버지를 일으켜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눈 위에 잠든 아버지 곁을 떠나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 아버지를 지켜보고 아버지가 추울까봐 자기가 입고 있던 잠바까지 다 벗어서 아버지를 덮어주고 함께 그 밤을 지내다가 자기도 얼어 죽고 아버지도 동사한 기사입니다. 그 아버지의 술먹는 주벽, 그 나쁜 습관 때문에 훌륭한 아들까지 죽이고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고 남은 자녀들은 불쌍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식과 재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투전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해 평생 자기도 고생하고 그에게 딸린 식구들까지도 비참한 고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느 곳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는 중에 중풍으로 쓰러진 어느 집사님이 부흥 강사의 기도를 꼭 받고 싶다고 해서 가 보았더니 그는 한 사십 밖에 안되어 보이는 빼어난 미남이었습니다. 그는 내 손을 꼭 붙잡고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죄를 자복하면서 울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집사까지 되었으면서도 교회는 형식적으로 다니고 몰래 술도 많이 먹고 외도도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쓰러지던 전날도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외도하고 나서 대낮에 선풍기를 틀어 놓고 바람을 쏘이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자기의 나쁜 습관이 자신과 가정을 망쳐 버리고 말았다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먼 일가의 형님되는 분은 중국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분이요, 글씨도 잘 쓰고, 중국말도 일제시대 때 통역관으로 지낼 만큼 유창하게 잘했고 외모는 키가 크고, 코는 우뚝하고, 시커먼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나쁜 습관은 제 마음에 안 맞고 틀리면 윗 사람이나 아랫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화를 내고 덤벼들고 들이받는 습관입니다. 그래서 어느 직장이나 들어가서 1년이 못되어 쫓겨나곤 합니다. 결국 몇 해 전에 보니까 모처에서 번데기 장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많은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또 좋은 인물도 있으면서 그런 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식도 있고 진실성도 있고 기도도 잘 하시는데, 한 가지 틀린 것을 보면 막 화를 내고 욕하는 버릇 때문에 존경을 받지 못하고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른 것 다 좋아도 치명적인 한 가지 습관 때문에 그의 운명이 기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임금님 밥상에 올라갈만한 그릇이 강아지 밥그릇 밖에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이는 술 담배 먹는 버릇, 어떤 이는 바람피우는 음란한 버릇, 어떤 이는 돈만 보면 제 주머니에 넣고 부정하는 버릇, 어떤 이는 거짓말하는 버릇, 어떤 이는 악담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다 좋은데 너무 제 자랑를 늘어놓는 버릇 때문에 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또 어떤 이는 툭하면 자기 부인을 때리고 밥상을 걷어 차는 버릇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 번 반성해 보십시다. 내게 있어서 가장 나쁜 습관이 무엇인지를.
반면에 훌륭한 위인들은 모두 남다른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남이 하지 못하는 그 어떤 지조가 있는 습관이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도 자기 규례를 따라 안식일에 회당에 나가셔서 성경 말씀을 읽으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만 되면 예배당에 꼭 나오셔서 말씀을 읽으셨다고 했듯이 여러분은 어떤 습관이 있습니까?
일본의 성자 가가와 도요히꼬씨는 여러 가지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잠든 밤에 홀로 앉아서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시간을 꼭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일 이 기도하는 한 시간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는 또 독서를 많이 하기 위해서 늘 그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답니다.
훌륭한 인물이 되려면 무엇인가 남다른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큰 나라의 재상으로서 바쁜 생활 중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 창문을 열어 놓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사자굴 속에 들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서도 여전히 목숨 걸고 기도하다가 사자들의 입을 봉하기까지 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왕조가 몇 번씩 바뀌면서도 훌륭한 생애를 보낸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교 개혁을 한 마틴 루터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성경보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고 또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오후 3시에 한끼씩만 먹고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목회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목요일에는 꼭 철야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카메론 페디(Cameron Pady)라고 하는 사람은 30살에 목사가 되었는데 60이 되도록 성령도 모르고 은사도 몰랐었는데 자기 부인이 병이 나서 고치려고 돌아다니다가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2/3가 병고친 사실이 기록된 것을 보고 자기도 병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매일 밤 그는 꼭 한 시간 이상씩 기도를 하곤했는데 어느 곳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시간만은 꼭 기도를 했답니다. 이것을 일 이년도 아니고 4년 동안이나 계속했다고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과 훌륭한 업적을 남긴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가 남다른 습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남다른 훌륭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치명적인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반복하여 습관이 되고, 습관은 그 사람의 성품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의 성품이 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말은 정말 옳습니다. 특별히 신앙 생활에 있어서 좋지 못한 습관은 어떤 것이든 버려야 되겠습니다. 기도하는 습관, 성경 읽는 습관, 십일조 드리는 습관 이런 것들은 우리의 일생을 복되게 하는 습관인 것입니다. 그 대신에 나쁜 습관은 버려야 되겠습니다.

엡 4:22-24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유혹의 욕심에 끌려가는 옛 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려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엡 4:23절에 보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속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여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지지 아니하고서는 겉사람이 좋아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의 생명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갈 5: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갈 2:20절에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롬 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음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습관을 갖게 됩니다.

둘째, 계속해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습관이 형성되려면 어떤 행동이 반복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의 흉내를 내느라고 눈을 깜박거리다가 자신도 눈깜박이가 되고, 말 더듬는 흉내를 내다가 결국 말더듬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좋은 습관이나 나쁜 습관은 행위를 반복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나쁜 습관을 떼어버리려면 그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자꾸 반복해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키우려면 인색한 사람이라도 자꾸 남을 주어 버릇하면 주기 좋아하는 사람이 됩니다. 교회 봉사도 마찬가지로 억지로라도 반복할 때에 성실한 봉사 생활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새벽 기도회나 밤 예배에 한 두 번 빠져 버릇하면 안나가는 습관이 생겨 버리고, 억지로라도 나가면 나가는 습관이 몸에 배어 버리고 맙니다. 나쁜 습관, 치명적인 악습은 눈을 뽑고 손발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어도 끊어버리고 안하는 버릇을 키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눈이 실족케 하면 눈을 빼 버리고 손이 실족케 하면 손을 찍어내어 버리라고 온 몸이 지옥 불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꼭 성취하고야 말겠다고 하는 불타는 소원을 가지고 자꾸 행동을 반복하면 그런 습관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마치 처음에 물을 땅에 부으면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것 같지만 또 붓고 부으면 홈이 파이고 도랑이 되고 개울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행동을 반복해 두면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행동의 반복으로 그 사람의 신앙이 훌륭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과 온전하신 뜻과 그 행동을 반복해서 해나가야 합니다.

셋째,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약 4:2, 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얻지 못하는 것은 구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타는 소원으로 기도하십시오. 예를 들어 술, 담배를 끊어야겠는데 끊을 수가 없다고 하면 지금은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더라도 끊어야 되겠다고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언젠가는 끊게 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표를 정하고 불타는 소원으로 간구하면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렘 29:12, 13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렘 33:2, 3절에도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브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간절히 불타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마음에 다 이루어주실 줄을 믿으며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죄악의 습관을 가지고 있지만 거룩하고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그리면서 자꾸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렇게 될 때가 옵니다.
나쁜 습관 한두 가지를 버리면 훌륭하고 축복받는 생활을 누릴텐데 그것 때문에 자기를 망치고 가족과 국가에 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꼭 해야할 일을 하는 올바른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형식주의가 되어서는 안되지만 좋은 것은 내 몸에 배어서 습관처럼 되어야 합니다.
막 11: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기도하며 나가십시오. 그러면 언젠가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옵니다. 마음에 내가 바라고 목표하는 좋은 습관을 가지고 다 된 모습을 그리며 바라고 기도하면 꼭 되는 때가 오고야 맙니다. 올바른 습관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 멘-

예수님을 갈망하는 삭개오

[누가복음 19장 1절~10절]
1절 -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절 -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절 -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절 -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절 -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절 -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절 -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절 -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절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동신 교회에서 목회 하시다가 은퇴하신 김세진 목사님의 말씀 가운데 '생각마다 주님 사모하고, 말마다 주님 증거하고, 걸음마다 주와 동행하는 것'이 그의 일생 생활의 표어란 말을 들었습니다. 과연 그는 은혜롭게 목회를 잘 하시다가 은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삭개오란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세무서장쯤 되는 높은 관직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 나라에 상납할 세금 액수보다 더 많은 액수를 맘대로 거두어다가 자기의 이익을 채웠기 때문에 돈은 많지만 모든 사람들한테 개, 돼지처럼 취급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직은 가지고 있고 돈은 많으나 마음에 평안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삭개오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꼭 만나고 싶은 마음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키와 작아서 잘 볼 수 없는 형편인데다가 물밀 듯이 사람들이 모여 들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삭개오는 낙심하지 않고 예수님을 꼭 만나보아야 하겠다는 일념하에 체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처럼 뽕나무에 기어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그 앞에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를 쳐다보시며 점점 가까이 오시더니 뜻밖에 자기 이름을 부르시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만 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자기 이름까지 부르시고 게다가 자기 집에 와서 주무시고 가시겠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얼른 내려와 집으로 모시고 가서 잔치 음식을 만들어 잘 대접했을 뿐만 아니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기 때문에 부자의 체면, 세무서장의 권위를 다 버리고 뽕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났을 뿐아니라 온 가족이 구원받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 즉 키가 작은 것과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부터 절망하지 않고 뽕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날도 잘났건 못났건, 죄가 많거나 적거나 간에 그것들을 극복하고 간절히 갈망하는 자를 만나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 8:17절에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야곱이 왜 축복을 받았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보면 외모로 보나 성격상으로 보나 에서가 훨씬 야곱보다 남자답고 훌륭했습니다. 그렇지만 장차 축복받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장자권을 배고프다고 팥죽 한그릇에 팔아 먹는 그런 마음을 가진 에서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눈을 속이고 형을 골려 먹기는 했으나 그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환도뼈가 위골되기까지 천사에게 얻어 맞으면서도 붙들고 매달리며 하나님의 축복을 갈망하여 결국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이 고침 받은 것도, 지붕을 뜯고 올라가 중풍병자를 달아내려 고침받은 것도,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끝까지 부르짖어 고침받은 사실도 모두 그들이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했기 때문에 응답받은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를 이렇게 기뻐하시고 축복하실까요? 가령 애인을 사모하고 갈망한다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은혜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시 119:2절에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했고, 시 119:131절에는 "내가 주의 계명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삭개오와 같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에게는 어떤 복을 주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자기의 체면이나 권위를 생각지 않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갔을 때 예수님이 찾아와 이름을 불러 주시고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유하기까지 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갈망하는 자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렘 29:12,13절에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고 너희가 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나는 큰 축복을 받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찾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운명이 바뀌고 사상이 변하고 모든 것이 선하게 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간절히 바라는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믿고 영접하고 나서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리면 어떤 면으로든지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잠언 8:17절에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2.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 45:22절에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신대로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결국 멸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영혼이 구원받아 영생을 얻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간절히 하나님을 믿고 찾을 때 기적적인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주변을 살펴보더라도 질병이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애타게 기도하면서 주님을 갈망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 구출해 주시는 체험은 수없이 많습니다.
시 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3. 새 힘과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 40:30,31절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신대로 갈망하는 자에게 어떤 역경이나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저는 목사요, 부흥회도 다니는 사람이지만 어떤 때는 기도의 힘을 잃고 설교도 할수 없이 맥이 쭉 빠질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런 때는 며칠 혹은 하루라도 금식을 하거나 문을 닫고 들어가 앉아서 한시간 두시간 무릎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주여, 주여!' 하며 주님을 부릅니다. 그러면 어느새 주님이 새 힘을 주시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잘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여러분 간절한 마음이나 뜨거운 소원도 없이 기도하는 사람은 응답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떡 세덩어리 빌리러 갔던 친구가 하도 물러갈 줄 모르고 요청하는 것을 듣고는 줄 생각 안했던 친구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갖다 주면서 '비록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그 요구대로 준다'고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다운 기도, 참다운 찬송, 참다운 헌금은 얼마나 뜨거운 정성과 간절함이 들어 있느냐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자나 깨나 그 뜨거운 소원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정욕이 아닌 이상 반드시 응답을 받습니다.

4.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시 25:3절에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너를 보호하겠노라'하신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하고 찾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들어 쳐서 수치를 당케 하셨습니다. 수치를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징계요, 채찍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하는 자는 모든 사람 앞에 높이 들어주시고 존귀와 명예를 얻게 해 주십니다.
다윗은 목동 시절에나 임금 시절에나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사 백전백승의 은혜를 주시고 오른손으로 높이 들어 주셨습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찾고 다른 신을 찾으며 신앙이 해이해질 때 렘 2: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탄식하며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고 해이해질 때 터진 웅덩이에 물을 붓듯이 헛수고만 하게 되고 수치를 당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지거나 하나님을 갈망하거나 의지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면 무엇보다 큰 시험에 든 증거입니다. 머지않아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받으려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더 사모하고 갈망해야 됩니다.
대하 7:14절에 보면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악한 길을 가다가 하나님께 얻어맞아 온 땅이 병들고 상하고 터지고 고통을 당할 때 '겸비하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죄를 용서해주고 병든 것 상처받은 것을 치료해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갈망한다는 것이 이렇게 귀중한 일입니다.
부흥회를 인도하다 보면 간절히 은혜를 사모하며 갈망하며 매달리는 사람은 불치의 병도 고침받고 문제의 해결을 받기도 하고 성령 충만과 은사도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만 의지하지 않고 교만하다가 죽을 병이 걸렸을 때 '너는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는 말을 듣고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세상의 의사나 약이나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얼굴을 향했다는 뜻인데 심히 통곡하며 부르짖었더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켜서 '내가 네 기도를,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며 15년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거기다 앗수르 군대도 다 물리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은혜를 갈망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가 보십시오. 아무쪼록 우리의 신앙 생활이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가듯 늘 주님을 앙모하며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가 예수님을 갈망하므로 받은 축복을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들도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멘-

하나님의 부르심

[누가복음 6장 12절~19절]
12절 -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절 -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14절 -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5절 -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16절 -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17절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절 -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절 -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 사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주님의 사역에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과, 주님이 승천하신 후에도 복음 사역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것을 아시고 밤새워 기도하시고 나서 열 두 제사를 택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훈련을 시키고 나서 곧 헤어져 추수하게 된 영혼의 밭에 그들을 일하러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부르셨으며, 왜 부르셨는지 그 목적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
첫째, 노아를 부르셨습니다(창 6:1-9:29).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인간을 가장 아름다은 곳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고 온 세상을 타락시켰습니다. 죄는 이제 잠잠하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마침내 죄악이 온 세상에 관영해서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인간을 지었음을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세상을 진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진멸하시는 가운데서도 세상을 굽어 보시고 신뢰할 만한 의인 한 사람 노아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시기를 홍수로 온 인류를 진멸하고 노아와 그 가정만 구원할터이니 방주를 하나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자 노아는 곧 가서 믿음과 순종함으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노아야 너는 네 가족과 각 짐승들을 한 쌍씩 데리고 들어가라 곧 홍수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지만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곧 노아와 그의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 그리고 짐승들은 방주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큰 손이 그 방주의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깊은 샘들이 터져 올라오자 곧 온 땅은 물로 뒤덮혔습니다. 노아를 비웃던 사람들은 다 수장되고 노아와 그의 가족만 안전하게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면 곧 가서 하라는 대로 순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만 하면 곧 크게 기뻐할 날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분들이여, 심판의 홍수가 당신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방주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 방주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지금이라도 예수께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면 홍수의 물결이 범람할 때 안전할 수가 있습니다. 문이 닫히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와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둘째,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창 12:1-25: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방 종교의 친척들과 이방 종교의 땅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지만 부르시는대로 따라 나섰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위대한 족장으로,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를 위한 계획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잘못된 사람들을 따라가고 인생과 모든 정력을 세속적인 것에만 허비한다면 우리는 아무 쓸모가 없고 참 행복도 발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더 위대하고 더 유용한 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따라나선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 6:33)고 했습니다.
셋째, 모세를 부르셨습니다(출 1:1-40:38, 민 11:1-33:56, 신 32:1-34장).
하나님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모세를 불러서 "너는 애굽 땅으로 내려가서 내 백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라"고 말씀했습니다. 모세는 못한다고 핑계를 댔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 핑계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함께하셔서 발걸음마다 매일 매시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하나님의 임재가 그의 생애에 가장 좋은 축복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큰 일을 했고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우리와 함께하시고 홀로 두시지 않는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는 그 음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흑암의 아프리카에서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거기서 백인이라고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상한 말을 했고, 이상한 풍습을 가졌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열병에 결렸었고 사자에게 한 번 물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지탱하게 한 것은 "볼지어다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한 예수님의 약속이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따르는 모든 자와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되었고 유용한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넷째, 예레미야를 부르셨습니다(렘 1:1-43:7).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을 위해 선택했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상한 마음을 가지고 그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이처럼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리 택하시고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믿는 자들 모두를 하나님의 일에 쓰시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에 들어간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무릎 꿇고 이렇게 기도해 보셨습니까?
'주여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재 생애에 특별한 계획이 있으십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구원받고 교인 명부에 이름 올린 것만으로 다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주를 위해 할 일이 있고 사명이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다면 전적으로 그의 부르심에 나아가야 합니다.
다섯째, 요나를 부르셨습니다(욘 1:1-4:11).
요나에게 어느날 하나님께서 "너는 모든 것 다 그만 두고 나를 위해 니느웨로 가라"고 명하셨습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멸시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에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그 배에 큰 폭풍을 보내서 그 배의 선원들과 함께 모두 물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기의 죄를 고백했고 물 속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을 물에 빠져 죽게 하겠습니까? 큰 고기를 준비했다가 요나를 삼일 밤낮 지내고 있게 하여 결국 구원해 주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니느웨 바닷가에 토해 내게 했습니다. 그 후 다시스가 아니라 니느웨로 달려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서 온 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불순종했을 때 폭풍을 보낸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면 폭풍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원해서 폭풍을 내리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을 부르셨습니다(행 6:1-28:31).
예수님 다음으로 바울만큼 이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마음이 좁고, 고집 세고, 편견을 가진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다 틀린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강한 빛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주 예수의 열심있는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많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했으며, 예배당을 짓게 했으며, 많은 책도 썼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 사람 보기에 바울 같이 못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나 브라우닝(Browning)은 말하기를 '모든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다'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성경 시대에만 인간을 부르시지 않고 오늘날도 부르십니다.

2.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
구원하시려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모든 사람을 다 부르고 계십니다.
첫째, 그의 말씀을 통해 부르십니다.
성경에는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습니다.
사 55:1절에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셨고 또 사 55:7절에는 "악인은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마 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고, 요 6:37절에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구원과 영생을 손에 들고 '오라'고 간절히 부르고 계십니다.
둘째, 복음 전파를 통하여 부르십니다.
왜 하나님은 목사를 세우셨습니까? 왜 신학교를 세웁니까? 왜 교역자를 두고 왜 예배당을 건축합니까? 왜 때를 따라 부흥회를 합니까? 그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모두 멸망받게 되어 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암만 떠들어 봐라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자세로 앉아 있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물에 빠져 죽게 된 사람에게 구명대를 던져주는 데도 밀어 버리면서 '나는 여기서 죽겠습니다'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복음을 통하여 부르실 때 그리스도께로 나와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셋째, 고난을 통하여 부르십니다.
평안할 때 불러도 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슬픔과 고통을 우리 앞 길에 놓아서 상한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을 찾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지 않으면 안되게 만듭니다.
그런 방법이 때로는 잔인하고 비참해 보이지만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가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일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종하라고 부르십니다.
요 14:16절에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충성 봉사하라고 부르십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처음 얼마 동안은 충성하는 듯하다가 곧 그만두는 이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주일과 교회 일에 충성 봉사하라고 하십니다. 각자 받은 은사와 재능대로 주님의 일에 충성 봉사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의 모든 일에 충성스럽게 출석하는데 어떤 분은 주일 낮에도 잘 안나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가 있으며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여러가지 모양으로 부르시는 사랑의 부르심을 배웠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도 주님의 사랑의 부르심에 동참하여 승리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표현할 줄 알아야 하는 감사

[누가복음 17장 11절~19절]
11절 -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절 -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절 -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절 -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절 -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절 -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절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절 -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절 -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

영국에 어느 무뚝뚝한 남편과 살다가 병이 나서 죽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이 남편은 도무지 자기 부인에 대해서 사랑한다는 말도 하는 법이 없고, 무엇을 '잘 한다'는 말도 없고, '음식을 잘 한다'거나, '살림을 잘 한다'거나, '고맙다'거나 하는 칭찬이나 인사를 전혀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하는 일이 남편 마음에 안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서 칭찬들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노력이 헛수고로 끝나고 몇 년이 지나도록 반응이 없자 그녀는 실망하여 고민하던 나머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살 가망이 없어지고 죽을 날이 임박했을 때에야 남편이 부인 침대 옆에 가까이 오더니 '여보 당신이 죽으면 난 어떻게 해 당신은 참으로 훌륭한 아내였는데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죽어가던 아내가 얼굴이 환해지면서 미소를 띄우고 말하기를 '여보, 왜 그 말을 진작하지 못했어요? 나는 지금까지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듣고 싶었는데 도무지 칭찬 한마디도 없기에 나는 당신 마음에 들지 못하는 아내라고 생각하고 고민하다가 이렇게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그 남자는 속으로만 자기 아내가 좋은 아내요 고마운 아내라고 생각했지 그것을 표현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 칭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속으로만 가지고 있지 말고 겉으로 충분히 표현할 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때 우리는 속마음으로 감사하고 마음속으로 사랑하면 되지 뭐 그렇게 겉으로 나타내야 하느냐고 생각할 때가 있으나 그것은 결코 잘못된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한 것 같이 '표현이 없는 감사는 죽은 감사'나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열 문둥이 가운데 오직 한 문둥이만 예수님께 찾아와 엎드려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는데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예수님께서 섭섭해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 다른 아홉명의 마음에 문둥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 고마운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분명코 그들도 역시 감사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찾아와 감사하다는 표현이 없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를 섭섭해 하셨던 것입니다.

1. 감사를 표현할 줄 모를 때
첫째, 그것은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2절에 여러 가지 죄목을 쓰는 가운데 감사치 않는 것도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될 사람이 감사의 표현이 없으면 그것은 상대방의 가슴에 기쁨을 빼앗아 가고 행복을 빼앗아 가는 약탈행위이며 곧 죄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명에 대해서 얼마나 섭섭해 하셨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무례한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무례히 행치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예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례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자기 중심주의로 살고 이기주의로 사는 사람은 무례하여서 인사를 받으려고만 하지 인사할 줄은 모르고 감사할 줄은 모르게 됩니다. 만가지 죄악이 이런 생활에서 나옵니다.
셋째, 교만으로 인해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모두 제가 잘나서 잘 되는 줄 알지 하나님의 은혜나 타인의 은덕에 대해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축복과 은혜가 중단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고 했습니다.

2. 올바른 감사의 표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 같이 표현이 없는 감사는 감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감사의 행위를 바로 나타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먼저 마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 중에 먼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하나만 생각해도 지금 죽어도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지난 일년 동안에도 먹여주시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금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특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고비를 여러번 겪으면서도 특별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무사히 지나온 것에 대해서도 감사할 일이 많이 있을 줄 압니다. 합 3:17-1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성도라면 감사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님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감사한 마음을 말로나, 기도로나, 찬송으로나, 물질로 제때에 올바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감사의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속하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감사해야 할 때에 감사해야지 사이다를 가스가 다 빠진 다음에 마시는 것처럼 지난 다음에 감사하는 것은 진정한 감사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 119:60절에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감사나 인사를 해야 할 때에 하지 못하고 책망을 받고 난 다음에 하는 행위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본문에 고침받는 열 문둥이 중에 즉시로 달려와 감사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아홉 명도 나중에 예수님 만나면 인사하지 뭐 하고 생각은 했을 것입니다. 신속하게 먼저 와서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생길 때는 즉시 기도로 감사하고 또 물질로 감사할 때도 미루지 말고 신속히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56:33)고 했습니다. 이 '먼저'라는 이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차리리 세상 일 좀 못해도, 물건을 못사도, 김장은 못해도, 사르밧 과부와 같이 굶어도 하나님께 먼저 감사할 줄 알아야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겸손히 감사해야 합니다.
본문에 한 문둥이는 예수님께 달려와서 땅에 엎드려 겸손히 절하면서 감사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감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교만한 사람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교만해지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감사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신 8:12-14절에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범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고 말씀하셨으며 17절에서는 "또 두렵건데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드릴 때 먼저 겸손해야 합니다. 많이 바칠 수 있게 되었다면 적게 바치는 사람보다 은혜를 더 많이 받았으므로 더 겸손해야 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드리면 드리고도 복을 받지 못합니다.
셋째, 희생적인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본문의 열 문둥이가 다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으나 감사하러 온 이 사람은 자기 육신의 쾌락이나 감정을 다 희생하고 제일 먼저 예수님께 달려와서 감사했던 이것이 바로 희생적인 감사입니다. 자기 쾌락을 다 취하고 자기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나서는 인사를 제때에 하거나 감사를 바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 50: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는데 이 제사의 말은 원래 희생(sacrifice)이란 뜻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양을 잡아 제사드릴 때 목을 자르고 각을 뜨고 피를 뽑아내고 내를 갈라 내장을 긁어 내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희생이 없이 진정한 감사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할 일 다하고 나서 쓰다 남은 것으로 감사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희생의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무성의하게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감사해야 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흠향하시고 또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 아 멘 -

성경에 나타난 돈에 대한 교훈

[누가복음 12장 13절~21절]
13절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절 -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절 -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절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절 -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절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절 -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절 -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많은 사람들이 돈만 손에 가득 쥐면 뭔가 다 될 줄로 알고 돈만 버는 데에 자기 인생을 전부 투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편 '그에게 돈을 맡겨 보라. 그리하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가 있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돈에 대한 태도나 돈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돈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지느냐 못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돈과 신앙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돈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신앙 생활을 잘 할 수도 있고 잘 못할 수도 있고,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못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돈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배우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돈에 대한 생각들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이 말하는 돈
첫째, 돈 자체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돈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돈이라면 무조건 악하고 나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실상 돈은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돈은 선한 도구도 될 수 있고 악한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잘 쓰여지면 책상, 걸상을 만들고 집을 짓는데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으나 잘못 박히면 지나가는 사람 옷을 찢어 놓고 찔러서 피가 나게 하는 해로운 물건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면 영혼을 구원하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돈이 마귀의 도구로 쓰여지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불행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 자체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쓰여지느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가 한번은 어느 곳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그 마을에 유명한 구두쇠 부자가 참석을 했는데, 요한 웨슬레가 '돈을 벌 수 있는대로 많이 버십시오.'하니까 '야! 그사람 참 설교 잘한다'라고 기뻐했습니다. 그 다음 '저축할 수 있는대로 많이 하십시오'하니까, 손을 싹싹 비비면서 '이렇게 잘 하는 설교 처음 들어 본다'하면서 좋아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대한 쓰십시오'라고 결론을 말하자 그 구두쇠는 '아이구 좋은 설교 잡쳤다'라고 말하고는 실망하며 나가더랍니다.
돈을 열심히 벌고 열심히 저축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령 사업, 선한 사업을 위해서 아낌없이 쓸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최대한 벌어서 최대한 선하게 써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잘못 쓰면 쓰는 그사람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됩니다.
둘째, 돈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돈을 내가 소유하고 있는 동안은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내게 들어온 돈을 선하게 쓸 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돈의 주인은 하니님이요, 우리는 관리자일 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청지기'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의 재산을 맡아 쓰는 청지기가 허비한다는 말을 듣고 주인이 청지기직을 그만 두라고 하니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고 해서 한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내가 아직 청지기로 있을 때 사표내기 전에 인심이나 써두자 생각하고 빚진 자들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성경은 이 청지기직을 그만 둔 다음을 위해서 써두는 청지기를 지혜있는 청지기라고 했습니다. 청지기를 원어로 '오이코노모스'(Oikonomos)라고 하는 뜻은 '짐'(Oikos)이라는 말과 '관리하다'(nomos)란 말을 합쳐서 된 단어로, 여기서 '경제' 즉 '에코노미'(economy)란 말이 나왔습니다.
욥이 한 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한 것이 진리의 말씀입니다. 시 49:17절에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한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청지기, 즉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동안 관리할 뿐입니다. 관리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써야할 책임이 있고 그때에 비로소 영원히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돈이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만 있으면 행복해 지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많으면 도리어 근심이 많고 위험이 많이 따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재산 분배 문제로 형제가 싸우다가 예수님께 와서 공평한 분배를 부탁할 때,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핀잔을 주듯 말씀하시고 나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리라"고 진정한 해결을 말씀하셨습니다.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고 적게 사는 것도 아닙니다.
서양의 격언 가운데 '돈이 침대는 살 수 있으나 잠은 살 수 없고, 돈이 책은 살수 있으나 지식은 살 수 없고, 돈이 음식은 살 수 있으나 입맛을 살 수 없고, 돈이 화려한 옷은 살 수 있으나 아름다움을 살 수 없고, 돈이 집을 살 수 있으나 교양은 살 수 없고, 돈이 오락을 살 수 있으나 기쁨은 살 수 없고, 돈이 십자가를 살 수 있으나 구세주는 살 수 없고, 돈이 교회를 살 수 있으나 천국은 살 수 없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참으로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만 많으면 행복할 줄 아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돈이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넷째, 돈이 소망을 주지 못합니다.
돈이 결코 우리의 최후의 소망이 될 수 없고,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돈 자체가 곧 소망이 될 수 있는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딤전 6:17-19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도 당부하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 되시고 후히 주어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장래를 위하여 선한 사업에 써두라고 말씀했습니다.
잠언 11:28절에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재물이 결코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으므로 돈을 의지해선 안됩니다.

2. 돈에 대한 경고의 말씀
첫째, 탐심을 버리라.
딤전 6:7-10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시험과 올무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고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고 했으며, 믿음에서 떠나게도 된다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가지 죄악의 원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 때문에 남을 속이기도 하며, 죽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돈 때문에 양심도 팔고 신앙도 팔고 정조도 팝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고 하시면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욕심을 채워서 만족을 얻을 수는 없고 내 욕심을 줄여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눅 12:15)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탐심은 우상숭배"(골 3:5)라고 했습니다.
둘째, 집착하지 말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하신 말씀대로, 돈을 너무 사랑하고 사모하여 돈에 집착하면 결국 불행에 빠지고 맙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돈을 좋아하면 돈이 도망가고, 돈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돈이 따라온다고 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물이 없으면 배가 뜨지 못하고 운행도 못합니다. 배에는 물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이 배 안으로 들아와 점령하면 그 배는 침몰되고 죽습니다. '돈이 주인이 되면 폭군이 되고 부리면 착한 종이 된다'는 명언이 있습니다.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배가 침몰하기 직전에 구조선이 와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짐을 다 버리고 밧줄을 붙잡고 구조선에 올라타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주머니에 금덩이를 가득 넣은 채 줄을 잡고 건너다가 바다에 텀벙 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빠져도 건질 수가 있는데 이 사람은 꼬르륵 가라 앉아서 죽고 말았습니다.
집착을 버리고 포기할 때 포기하고, 줄 때 주고, 단념할 때 단념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도 있습니다.
셋째,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마 6:19). 왜냐하면 땅에 쌓아둔 것은 언젠가는 도적이 가져가고 좀과 동록이 나서 못쓰게 되는 때가 오지만 하늘에 쌓아두면 도적 맞는 일도 없고 좀먹거나 동록이 나서 못쓰게 되는 일도 없이 영원히 내 것이 된다는 귀중한 교훈입니다.
또 보물이 있는 곳은 마음도 따라 가는 법이라, 하늘에 쌓아두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게 되고 땅에 쌓아두면 우리 마음을 땅에 빼앗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쌓아두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사업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써두고 바쳐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두면 현세에도 백배나 받고(막 10:29, 30), 내세에 영원한 상급을 반드시 받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부모가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면 자식대에 가서라도 크게 축복을 받고 나아가서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고 평안히 먹고 즐거워하자고 기뻐하는 부자에게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면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0, 21)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지기로 삼아 재물을 맡겨 주시면, 적든 많든 기회있을 때마다 하늘에 쌓아두어야 합니다.
글론디케 지방에서 한 탐사단이 들여주는 스릴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탐사단이 어느 오두막집에 들어갔더니 두 사람의 해골이 앙상하게 놓여있고 그 옆에는 금덩이리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편지가 놓여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금을 발견하려고 북쪽 땅에 찾아가서 많은 황금을 발견했으나 그곳에는 추운 겨울이 빨리 온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눈보라와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얼마간의 양식도 다 떨어졌습니다. 결국 많은 금덩어리 사이에서 굶고 얼어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금을 찾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조만간에 닥쳐올 추운 겨울을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죽을 때는 결코 가져가지 못합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입히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도 못가져 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지혜있는 사람인가 하면 기회있을 때 보다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의 일에 물질을 써두고 바쳐두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하는 일이요, 축복의 열매를 많이 거두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고후 9:6, 7절에 "이것이 곧 적에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축복의 열매를 많이 거두고 싶습니까? 기회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손에 많이 심으십시오. 펌프에 물이 안나오면 다른 곳에서 길어다가라도 물을 부어야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습니까? 기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 아 멘 -

누가복음 ④
하나님 뜻으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구약 예언의 성취이자 하나님 뜻이다. 이는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하나님 아들의 핵심 사역이요 온전한 복종과 헌신의 모델이다. 생명으로 생명을 살리신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박해와 순교의 위협 속에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뿐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위로의 용기를 주고 승리를 소망하게 한다.

예루살렘 사역 (19:28~23:56)
성전과 환난에 관한 예언 (21:1~38)
예수님은 생애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셨다. 서기관의 죄를 질책하시던 예수님은 가나안 과부가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그 헌금이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귀하다고 칭찬하신다(1~4절). 이어서 세상의 마지막에 관해 예언하신다. 여기에는 가까운 앞날과 먼 미래에 있을 일이 순서 없이 뒤섞여 있다. 특히 주후 70년경 로마 군대에 의해 벌어진 성전 파괴가 묘사된다. 멸망의 징조가 나타나면 제자들은 환난을 받을 것이나, 그리스도가 영광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직접 보게 될 것이다. 믿는 자들은 그때까지 스스로 삼가며 깨어 있어야 한다.
유다의 배반 (22:1~6)
유월절을 앞두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궁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사람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게 한다.
유월절 만찬과 체포 (22:7~65)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큰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식사가 준비된다. 공관복음은 최후의 만찬을 유월절(금요일) 식사로 보지만, 요한복음은 유월절 하루 전날 밤(목요일) 식사로 본다. 이 식사가 언제 이루어졌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식사를 기념하라고 명하셨기에 초대교회는 '성만찬'을 제정해 지켰다(고전 11:23~29). 즉,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서 하신 일과, 그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되새기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여 성만찬을 행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만 해도 제자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제자들 중 하나가 자신을 팔게 된다고 예고하시고 나서, 제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서로 묻다가 나중에는 누가 크냐는 다툼을 벌인다. 예수님은 서로 섬기는 자가 되라 하시며, 베드로에게 시험에 들지 말라고 하신다. 믿음을 자신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는 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는 경고를 듣는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고 나서, 배신한 제자 유다가 데리고 온 사람들에게 붙잡히신다. 실랑이하며 저항하는 제자 하나가 대제사장 종의 귀를 칼로 쳤지만 예수님이 낫게 해 주신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신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기는 했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을 때 주님이 그를 돌이켜 보신다. 비로소 자기 믿음의 수준을 깨닫게 된 베드로는 나가서 통곡한다.
심문과 처형 (22:66~23:5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회로 끌고 가 심문한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이 신성 모독이라며 분노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임을 알고 당시 예루살렘에 와 있던 분봉 왕 헤롯에게 먼저 보낸다. 헤롯은 별 소득 없이 예수님을 희롱한 후 다시 빌라도에게 압송한다. 이 과정을 거쳐 공회와 헤롯과 로마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 합의한다. 빌라도는 무리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한 채 바라바는 풀어 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다. 예수님은 해골이라는 곳에서 두 행악자 사이에 못 박히셨다. 그중 한 사람은 예수님을 끝까지 비방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이 무죄하심을 알아보고 구원을 약속받는다.
예수님이 절명하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도 찢어진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지켜 선 가운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시고 돌아가신다. 한편 공회 의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발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신을 내달라고 해서 장사를 지낸다. 갈릴리에서 온 여인들이 따라와 예수님의 시신이 놓인 곳을 지켜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한다.

부활과 승천 (24:1~53)
부활 (24:1~12)

안식일이 지나고 난 다음 날 갈릴리 여인들이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이른다. 입구를 막았던 돌은 옮겨져 있고 천사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알려 준다.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세부 사항은 복음서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핵심 내용은 모두 일치한다. 바로 무덤은 비었고, 운명하셨던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엠마오 제자들 (24:13~35)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이야기다. 글로바와 그의 친구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향하는 길에 동행자를 만나 자신들이 정치적 구원자로 여겼던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맥없이 죽어 버린 나사렛 예수가 살아났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는 대신 본연의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을 것이다. 그들 내면의 허전함은 슬픈 빛으로 나타났다. 이에 그들과 동행하시던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신다. 성경을 풀어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직접 가르쳐 주신다. 이스라엘을 속량할 왕을 기다리던 이들에게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설명하신다. 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그들은 날이 저물자 숙소로 들어간다. 이제까지 손님으로 동행하시던 예수님이 그들의 주인이 되어 떡을 떼어 주신다. 마침내 두 사람의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본다.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고, 재앙이 아니라 성취였다. 부활하신 구주 예수님을 만난 두 사람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이 일을 알린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24:36~49)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반신반의하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혼돈과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여 주신다. 그래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자, 이번에는 생선 한 토막을 받아 드신다.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하셨던 말씀을 되풀이해 설명하신다. 왜냐하면 이들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회개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할 증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며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다.

승천 (24:50~53)

49절과 50절 사이에 40일의 시간이 지난다(행 1:3). 예수님이 직접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치고 전파하신 시간이다. 때가 되자 예수님은 베다니 앞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하늘로 올려지시니'라고 강조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도망쳤던 제자들은 큰 기쁨에 취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성령을 기다린다.

누가복음의 마지막은 '다음 편에 계속' 같은 느낌을 준다. 누가복음이 저자 누가가 복음의 내력에 관해 데오빌로에게 차례대로 써서 보낸 내용으로 전편에 해당한다면, 후편은 사도행전이다(행 1:1).



누가복음 ③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얻은 명성과 인기를 뒤로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나아가신다. 구원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자들에게 허락된 것처럼, 예수님의 사역은 예루살렘의 고난을 통과해야 완성되기 때문이다. 요단 강을 따라 사마리아를 지나 여리고에 이르는 여정에서도 예수님은 쉼 없이 사람들을 고치시고 가르치시며 복음을 선포하신다.

유대 사역 (9:51~13:21)
예수님의 경고 (12:1~5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의 말씀을 주신다. 먼저, 사람에 대한 경고다(1~12절).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언젠가 모든 게 드러날 것이다. 제자들을 죽이려 드는 자들이 있겠지만 하나님이 보호하시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을 것이다. 사람 앞에 끌려갈 때 성령께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둘째, 탐심에 대한 경고다(13~34절). 무리 중에 형제와 재산을 다투는 자가 와서 중재를 요청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그들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또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들어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는 헛되다고 지적하신다. 우리의 염려는 믿음이 부족해서 생긴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나라를 먼저 구하면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실 것이다.
셋째,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언제나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신다(35~53절). 예수님은 이것이 사명을 맡은 모든 종의 자세라고 밝히신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세상을 화평이 아니라 분쟁에 돌입했다. 인간의 죄악 된 본성과 복음의 진리가 투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시대를 분별하며 화해하기를 힘쓰라고 하신다.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것이 제자의 삶이다.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길에서'(58절) 화해할 때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수직적인 관계에서도 영원한 심판에 이르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지혜다.
회개의 촉구 (13:1~21)
예수님은 회개의 필요성과 관련해 두 가지 국가적 재난을 언급하신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죽은 사건이다. 이들이 더 큰 죄가 있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재앙이 닥치는 이유는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처럼 좀처럼 회개하지 않는 백성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주어질 것이다. 예수님이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느라 꼬부라진 여자를 고쳐 주시자,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며 분을 낸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외식하는 자'라고 부르시며 책망하신다. 또 무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겨자씨 한 알이나 가루 속 누룩과 같다고 가르치신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13:22~19:27)
좁은 문과 예루살렘 (13:22~35)
한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예수님께 구원받는 사람이 적은지를 질문하자,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명하신다. 구원이 전혀 다른 차원,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얻는 것임을 일깨우신 것이다. 이 은혜에는 시간적 제약이 있다. 한편 바리새인들이 나아와 예수님께 헤롯의 음모를 알리며 몸을 피하시라고 알린다. 예수님은 동요하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 암시하신다. 이어서 선지자와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며 반역하는 악한 도성을 위해 한탄하신다.

예수님 시대 각 계층과 예수님과의 견해 비교

계층

특징

예수님과 같은 점

예수님과 다른 점

바리새인

유대의 전승과 율법을 가장

엄격하게 지킴.

율법을 준수함. 부활을 믿음.

하나님 뜻에 순종함.

그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부정하다 여기는 자들과 사귀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음.

사두개인

부유함, 상류 계층, 제사장 그룹. 모세 오경 외의 성경을

인정안 함.

모세 오경을 존중하고 성전의 신성함을

인정함.

부활을 부인함.

성전에서 장사할 수 있다고 생각함.

서기관

직업적 율법 해석자. 율법을

해석할 때 전통을 중시함.

율법을 중시하고 하나님께 복종함.

예수님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음.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음.

열심당

로마 압제에 대항하는

애국 무장 독립투사.

이스라엘의 장래를 걱정함. 메시아를 믿음.

메시아는 유대를 정치적으로 해방시켜 줄

자라고 여김.

에세네마

정결 의식과 거룩함을

강조하는 은둔자.

정의, 정직, 헌신을 강조함.

정결 의식이 그들을 거룩하게 한다고 믿음.

출처 : 「통 큰 통독」주해홍(두란노, 2012)

안식일에 바리새인에게 주신 교훈 (14:1~24)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가 예수님을 식탁에 청한다. 끊임없는 염탐과 책잡기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 수종병 환자가 있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고 예수님이 물으시자 아무도 답하지 못한다.

상석에 앉아 위세를 과시하려는 명예욕을 피하라고 예수님은 경고하신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서로 상석에 앉으려는 탐색전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예수님은 이를 보시고 겸손하게 상석 대신 말석에 앉고, 부유한 이웃 대신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하며, 하나님 나라에 청함을 받았다면 지체하지 말라고 교훈하신다.

제자가 되는 길 (14:25~35)

진정한 제자는 가족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망대를 세우거나 전쟁에 나갈 때 미리 계산해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제자도 무엇을 버리고 따를 것인지 계산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중단한 제자라면 아무 쓸 데가 없다.

잃은 자에 관한 비유들 (15:1~32)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는데, 이는 권위 있다고 인정받은 교사를 뜻한다. 예수님은 비유들을 통해 질문을 유도하며 토론을 이끄셨고, 이론을 나열하는 대신 삶으로 말씀을 보여 주시며 변화된 반응을 요구하셨다. 그 말씀은 자주 논란을 야기했고, 생각지도 못한 관점을 갖게 했으며,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주셨다.

예수님은 모여드는 세리와 죄인들에 관해 수군거리는 사람들을 겨냥해 세 가지 비유를 들려주신다. 첫째, 100마리 양 중 1마리를 잃고 최선을 다해 그 양을 찾아온 목자 이야기다. 둘째, 10드라크마 중 1드라크마를 잃고 이를 찾기 위해 온 집을 뒤진 여자 이야기다. 셋째, 재산을 낭비하고 돌아온 탕자를 맞이하는 아버지 이야기다. 아버지는 배은망덕한 둘째 아들을 내내 기다렸고 마침내 아들이 돌아오자 뛰어나가 맞는다. 그런데 맏아들은 동생을 반기지 않고 불만을 터트린다. 창녀나 세리와 어울리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처럼, 맏아들은 죄인이 하나님 나라에 마땅하지 않다고 믿었다. 아버지의 해명과 타이름에도 불구하고 맏아들이 마음을 돌이켰다는 내용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불의한 청지기와 부자 비유 (16:1~31)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불의한 재물도 지혜롭게 사용하라고 당부하신다.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기에 이 교훈을 비웃었다.

또 예수님은 율법의 한 획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를 드신다. 한 부자가 죽은 뒤 음부에서 고통당하던 중, 죽어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나사로를 본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구원을 청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생전에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부자는 살아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나사로를 보내 음부를 피하도록 증언하게 해 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또한 거절한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않는 자들은 죽은 자가 살아온다 해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 (17:1~18:34)

예수님은 먼저 제자는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할 행실을 피하고 용서할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한다. 이에 예수님은 믿음은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임을 상기시키시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기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둘째,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나병환자 10명을 고치신 일이 있는데 이 중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명만 돌아와 감사를 표했다. 셋째, 하나님 나라로 인한 고난을 견뎌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하는지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공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실체라고 답하신다. 또 제자들에게는 이를 위해 먼저 고난을 받게 된다고 경고하신다. 노아의 때, 롯의 때와 같이 인자가 오시면 세상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사람들 중 일부만 생명을 보전하게 될 것이다. 넷째, 기도의 자세에 대해서는 끈질긴 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재판장에게 자꾸 조른다면, 불의한 재판장조차 괴롭힘받지 않기 위해 이를 들어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원한을 반드시 풀어 주신다. 다섯째, 제자는 자기 의에 가득 찬 종교인이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여섯째,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의 것이다. 일곱째, 영생을 얻으려면 가난한 자에게 자기 소유를 나눠 주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에 가기가 어렵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희생한 것이 있는 자들은 현세는 물론 내세에도 보상이 따를 것이다. 끝으로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에 오르시며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과 죽음을 당하시나 3일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한다.


여리고에서 (18:35~19:27)

예수님이 여리고에 들어가실 때 한 맹인이 소리친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고 탄원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응답하신다.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만나신 두 번째 인물은 세리장 삭개오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간다.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께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다른 사람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은 네 갑절로 갚겠다고 다짐한다. 삭개오의 집에 머물고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지만, 예수님은 이날 삭개오와 그의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신다.

이어서 10므나 비유가 나온다. 타국으로 떠나는 주인이 종 10명에게 1므나씩 주며 장사하라고 했다. 주인이 돌아와 보니 10므나와 5므나를 남긴 종들이 있었던 반면, 그대로 한 므나를 수건에 싸 둔 종이 있었다. 주인을 무서워해서 그랬다는 종의 변명에, 주인은 책망하며 1므나를 빼앗아 10므나 있는 자에게 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자는 더 풍성한 열매를 얻지만, 메시아를 거절한 자는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다.


예루살렘 사역 (19:28~23:56)

예루살렘 입성 (19:28~44)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서 제자 둘을 보내 나귀 새끼를 끌고 오게 하신다. 이 나귀 새끼를 타고 감람산 내리막 길을 거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다. 제자들은 자기 옷을 길에 펴고 온 무리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맞이했다. 이에 바리새인들은 불만을 표출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다가가 성을 보시고 우시며, 언젠가 무너질 성의 운명을 예언하신다.

성전 정화 (19:45~48)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다.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려면 공식 지정 판매소에서 희생 제물을 사야 했다. 또 로마 통화를 소지한 사람들이 성전세를 내려면 반드시 성전에서만 환전할 수 있었다. 상인들은 대제사장의 용인 아래 폭리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자기 배를 채우는 사기꾼들에게 보기 드물게 물리적인 행동으로 화를 내셨다. 이 사건은 성전에서의 매매 행위를 시스템화했던 사람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찾아 나선다.

성전에서 벌어진 논쟁 (20:1~47)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며 첫째 논쟁을 시작한다.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반문하시자,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곤란해질까봐 모른다고 물러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신다. 포도원 주인은 소출을 걷기 위해 세 번이나 종들을 보내지만 농부들은 무시한다. 이어 상속자의 말은 들으리라 기대하고 자기 아들을 보낸다. 하지만 농부들은 도리어 상속자를 죽여 버린다. 주인은 이 농부들을 진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포도원을 주기로 결정한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기에, 이 돌에 거침이 된 자들은 깨지고 흩어질 것이다. 둘째 논쟁은 가이사에게 바치는 세금 문제였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놀라운 답변을 하신다. 셋째 논쟁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의 질문으로, 한 여자가 차례로 일곱 형제와 결혼하면 부활 때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부활 때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답하신다.

예수님은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는데 어떻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느냐고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신다. 끝으로 예수님은 서기관을 삼가라고 경고하신다. 서기관들은 겉치장에 몰두하고 대접받기를 좋아하며 외식하는 자이므로 더 엄중히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길라잡이 ②

부유한 자들에게 주는 내려놓음의 메시지 - 신현우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누가복음의 수신자는 '데오빌로 각하'다(눅 1:1~3), 저술 목적은 데오빌로가 들은 바를 더 분명히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눅 1:4). 여기서 데오빌로가 이미 복음을 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은 데오빌로 같은 당시 고위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더 확실히 알게 하려고 쓰여진 것이다.

누가복음을 읽다가 6장 24~25절에서 그들은 소름 끼치는 경고를 듣게 된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당시 로마 고위 관직에 앉은 데오빌로 같은 사람들은 이 말씀의 대상이 자신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다 6장 27~28절을 읽으며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자신과 같은 자를 사랑하라고 예수님이 가난한 식민지 백성에게 가르치셨다는 사실에서 자신들도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소망을 보았을 것이다. 10장 29~37절에서 이웃의 범위를 민족의 경계 밖으로 넓힌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자신들도 하나님의 사랑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데오빌로 같은 부자 그리스도인들이 누가복음의 날카로운 메시지를 적당히 벗어날 길은 없다. 12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재물을 처분해 가난한 백성을 도우라는 명령이 로마 제국의 한가운데서 권력과 재물을 누리는 고위직 그리스도인에게 내려진다. 이 명령을 따르면 영원한 곳에 재물을 투자하게 된다. 영생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제는 가장 현명한 투자다.

이 말씀을 간신히 넘어 전진하다가 14장 33절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듣는다. "너의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제자'는 누가의 글 속에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 소유를 모두 버려야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특히 부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틀렸구나.'하며 낙심하던 독자들은 15장에서 죄인들과 가난한 자들이 장애물 없이 환영받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며 부러움을 느끼다가 누가복음 16장에서 다시 도전에 직면한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9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13절). 불의하게 축적한 재물이라도 하나님 뜻대로 좋은 일에 잘 사용해 하나님과 화해하라는 가르침이다. 이로 인해 번민하는 데오빌로에게 지옥에 간 부자 비유가 펼쳐진다(16:19~31). 영생과 재물 둘 중에서 선택하라는 강력한 경고라 할 수 있다.

누가복음을 읽을 때 부자 독자들이 빠져나갈 길은 없다. 적당히 예수 믿는 타협의 길은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18장 22절은 강력한 최후 일격이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근심하는 독자들에게 또 한 번 부러움의 대상이 등장한다. 세리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겠다고 예수님께 약속하고 칭찬받는 장면이 그것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19:8). 식민지 백성을 약탈하는 세리가 재산의 대부분을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로마의 고위 관원 데오빌로는 무엇을 느꼈을까요? 쉽지 않은 결단을 쉽게 해 낸 삭개오의 모습은 부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누가복음은 식민지 백성의 무력 투쟁의 의지를 물거품이 되게 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제국의 지배층에게도 그들이 쉽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멀리 사라지게 한다. 재물과 영생을 함께 추구하려는 그들의 소망도 물거품이 되고 만다. 식민지 백성에게나 제국의 백성에게나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한쪽은 칼을 내려놓아야 했고, 다른 한쪽은 재물을 내려놓아야 했다.


누가복음은 로마의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재물이 아닌 하늘의 영원한 상급을 차지하라는 도전과 약속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누가복음 ②
권능으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고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신 후 갈릴리로 가셔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안식일마다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말씀에 권위가 있어 듣는 이들이 놀랐다. 또한 온갖 병자를 고쳐 주시니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임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파하셨다.

사역의 시작 (3:1~4:13)
시험 (4:1~13)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3:21~22)은 성령 충만한 채 돌아오셔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다(히 4:15).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시험을 받고 죄를 짓느냐 마느냐는 우리 반응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마귀는 예수님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하려고 했다. 이것이 시험의 본질이다. 삶을 더 안락하게 만들고, 자신을 더 드러내며, 유익을 더 추구할 수 있는, 저항하기 어려운 유혹이 찾아올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다. 이런 시험에 맞서 성경 말씀(신 8:3; 6:13, 16)으로 대응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

갈릴리 사역 (4:14~9:50)
나사렛과 가버나움 회당 (4:14~44)
예수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회당 두 곳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이 기록되는데, 한 곳은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회당이고, 다른 한 곳은 가버나움 회당이다. 회당 예배에는 순서가 있다. 몇 번의 기도가 이어진 후에 구약성경 낭독이 있고 설교가 이어진다. 명망 있는 유대인 남성은 누구나 성경을 읽을 자격이 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프타라(예언서)를 받으시고 설교하셨다. 선입견 때문에 예언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자, 화가 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동네 밖 낭떠러지까지 끌고 갔다.
가버나움 회당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놀라움으로 받아들이며, 귀신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알아보고 쫓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열병에 걸려 죽어 가는 시몬의 장모와 수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다. 무리는 떠나지 못하시게 예수님을 만류했지만, 예수님은 다른 동네에도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 떠나셨다.
제자와 병자 (5:1~39)
게네사렛 호수(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은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들을 부르셨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한편 예수님은 나병 걸린 사람과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또 세리 레위도 제자로 부르셨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비난하자, 주님은 자신이 죄인을 위해서 왔다고 말씀하신다.
안식일 논쟁 (6:1~11)
유대교의 핵심은 안식일에 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보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서 먹은 제자들을 비난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도록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린다. 예수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며 생명을 구해야 함을 분명히 하신다.
열두 사도 선택 (6:12~16)
예수님은 산에 가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 제자 중 열둘을 택해 사도라 칭하셨다.
놀라운 가르침 (6:17~49)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이끌고 평지에 서신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 앞에서 네 가지 복과 네 가지 화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팔복을 다룬 마태복음의 산상 설교(마 5:1~12)와 비슷하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꺼번에 모아 놓기보다 복음서 전체에 걸쳐 고루 분배하는 데 신경을 쓴 것 같다. 하지만 두 설교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는데, 누가복음은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한다. 마태복음이 가난의 영적 의미를 강조한다면, 누가복음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가난에 강조점을 둔다.
이어서 원수 사랑, 형제 사랑,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한 가르침이 나온다.
예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 (7:1~50)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죽어 가는 종을 살리신다. 그 후 나인 성으로 가셔서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다. 온 유대와 사방에 예수님의 소문이 퍼진다. 요단 강 주변에서 사역하던 세례 요한에게도 이 소문이 들린다.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맞는지 묻는다. 예수님은 병든 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실상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신다. 세례 요한은 칭찬받을 만한 자이지만 불신으로 가득한 세대에 영향을 받아 믿음이 흔들린 것이다.
한편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사랑한 여인도 있었다. 누가복음은 이 여인이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지적한다. 이여인을 귀신 들렸다가 치유된 막달라 마리아(눅 8:2)로 여기는 견해도 있지만, 평소 세부사항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누가복음의 저자가 알면서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 같지는 않다.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자기 눈물과 머리털로 닦고 향유 붓는 것을 본 바리새인은 충격을 받는다. 유대교는 남녀의 신체적 접촉을 엄격히 금하는 데다가, 여인은 죄인이었다. 저자가 그녀를 죄지은 여자라고 했을 정도면 당시 사람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근거로 정죄부터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사랑과 헌신을 받아 주시고 이를 칭찬하셨으며, 여인의 믿음이 그를 구원했다고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여제자들 (8:1~3)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복음 여정에 열두 제자외에 여성들도 함께했다고 밝힌다.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라는 이름도 기록되었다. 요안나는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로, 이방인이었을 것이다. 존경받는 유대인 남자라면 이런 여인들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여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하심을 알았고, 이에 깊은 섬김으로 반응했다.

계속되는 가르침과 이적과 치유 (8:4~56)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비유로 가르치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에게 비유의 의미를 다시 설명해 주시곤 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갈릴리 마을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셨는데, 호수를 건너시다 광풍을 만나자 잠잠하게 하셨다. 맞은편 거라사인 땅에서는 귀신들린 자를 고쳐 주셨다. 또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회장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주셨다.

첫 번째 제자 파송 (9:1~27)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고 보내셨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말고 어느 집에든 머물다가 떠나야 했다. 영접하지 않는 곳은 곧 떠나되 각 마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야 했다. 헤롯 왕도 예수님에 관해 듣게 되었고,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온 게 아닌지 두려워했다.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과 함께 벳새다로 향하자 소문을 들은 무리가 따라온다. 무리는 날이 저물 때까지 먹지 못하고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이들을 배불리 먹이셨고, 남은 조간은 열두 바구니에 거두었다. 이렇게 무리 가운데 사역이 확대되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 여기는지 물으신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에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예고하시며, 죽을 각오로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변형과 제자들의 무지 (9:28~50)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다. 용모가 변화하신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말씀하신다.

한편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큰 무리가 찾아와 귀신을 쫓아 달라고 청한다. 남아 있던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이미 귀신 쫓는 권능을 받았는데도 그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들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앞으로 닥칠 수난을 다시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오히려 서로 누가 큰지를 변론한다. 또 요한은 다른 이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 쫓는 것을 금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금하지 말라고 타이르신다.


유대 사역 (9:51~13:21)

나를 따르라 (9:51~62)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하시고 사마리아를 통과하신다. 이에 예루살렘과 척을 지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 화가 난 제자들은 이들에게 불을 내리겠다고 나선다. 예수님은 이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향하신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가 치러야 할 대가를 암시하는 듯하다. 제자의 삶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하고, 이 땅에 머리 둘 곳도 둘 수 없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우선순위로 인해 아버지의 장사나 가족과의 작별도 미뤄야 하는 삶이다. 또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에 작별을 고해야 한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담대한 발걸음을 뗄 수 없다.

두번째 제자 파송 (10:1~24)

예수님은 열두 제자 외에 칠십 인을 제자로 세워 보내셨다. 칠십 인에게 주신 사명은 열두 제자에게 주신 것과 비슷하지만, 그 사안이 훨씬 절박하다. 길에서 사람과 마주쳤을 때 인사도 하지 말아야 할 정도다. 이들은 성공적으로 선교를 수행했고, 이로 인해 예수님은 기뻐하시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교만을 엄히 꾸짖기도 하셨다. 이 본문은 악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세상에는 사탄의 영역이 존재하지만 사탄은 하나님의 적수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을 건드리지 못한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탄과 전쟁 중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모든 악을 멸해 버리실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영생을 얻는 법 (10:25~42)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영생을 얻는 법을 묻는다. 예수님이 율법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되물으시자, 율법 교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답한다. 이에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그를 피해 간다.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핵심은 유대인이 미워하고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 나서서 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가장 고상한 바람인 영생을 거론하며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언급하신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어서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자매는 주로 요한복음에 등장하고, 공관복음에는 여기에서만 나온다. 이는 우선순위에 관한 가르침이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위해 여러 가지를 완벽하게 준비하려고 했지만,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단순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면서 수많은 일을 만들어 내는 게 능사가 아니다. 주님이 무엇보다 기뻐하시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기도하는 법 (11:1~13)

유대교에서 기도란, 랍비가 가르쳐 준 대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행위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는다. 이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가 '주기도문'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마태복음보다 짧고 간단하다. 이어서 예수님은 인내하며 절실히 간구하는 기도에 관한 예를 드신다. 간절히 바라고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응답을 얻어 낼 것이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 (11:14~54)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보고, 이것은 귀신 왕의 힘을 빌려 행하신 거라며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다. 사탄과 분쟁하는 이가 같은 편일 수 없으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 사탄은 절대로 순순히 자기 세력을 내주는 존재가 아니므로 예수님이 사탄을 제압하신다는 것은 그보다 강하시다는 증거다. 이때 한 여자가 예수님을 낳고 키운 태와 젖이 복 있다고 외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 있다고 하신다.

이어서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세대에게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요나의 전도에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보다 크신 이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다. 한편 예수님이 식사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겉은 깨끗이 하면서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다. 또 자신들도 지지 못할 어려운 율법의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는 율법 교사들을 비판하신다. 이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몰려들어 어떻게든 책잡고자 예수님께 여러 일을 따져 묻기 시작한다.


누가복음 길라잡이 ①

나라 잃은 백성에게 주는 회복의 메시지 - 신현우 총신대학교 신약학 교수

누가복음은 나라 잃은 백성이 한 맺힌 회복의 소망을 품고 있을 때 메시아가 찾아와 구원하신 이야기다. 마리아의 찬양은 이런 애절한 소망을 전해 준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눅 1:47~48). 여기서 '비천함'은 마리아의 개인적 비천함이 아닌, 나라 잃은 백성의 '비천함'을 가리킨다. 이러한 비천함은 이사야서를 배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1~2).

마리아가 언급한 비참함은 로마 제국에 주권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유대 민족의 비참함이다. 로마 제국의 손에 분봉 왕들과 대제사장들이 세워지고, 모든 유대인이 1년에 1데나리온을 로마에 조공세로 내는 수모를 겪고, 로마 총독에게 감독을 받는 비참함이다. 이것은 국토 대부분이 헤롯 가문에 넘어가고, 그나마 남은 것은 대제사장들과 예루살렘에 있는 산헤드린 의원들을 비롯한 귀족들이 가져가고, 대부분의 서민은 춥고 배고프게 살아야 하는 비참함이다.

이렇게 비참한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마리아는 찬양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51~53). 나라 잃은 백성의 입장에서 이 노래는 민족 해방의 소망을 담은 독립 찬가다.

여기서 '팔'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신 하나님의 팔을 연상시킨다.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신 26:8). 마리아는 하나님의 팔을 언급하며 과거에 조상들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같이 자신들로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을 소망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분의 팔로 내리치시는 대상인 '교만한 자', '권세 있는 자', '부자'는 로마를 가리킨다. 이러한 해석은 마리아 찬가의 이어지는 문맥이 지지해 준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눅 1:54). 여기서 '이스라엘'은 앞에 언급된 '비천한 자'(비참한 자), '주리는 자'에 해당하는 자가 누구인지 밝힘으로써 이와 대조되는 '부자'는 로마임을 알려 준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의 예언도 유사하다. 그는 유대인의 주권 회복을 기대한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눅 1:68). 여기서 '속량'은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해석은 이어지는 사가랴의 예언 속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눅 1:71).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눅 1:74). 여기서 '원수'는 민족의 원수인 로마가 된다. 이 예언에서 구원받는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방의 기대를 가진 백성에게 메시아가 오셨고 그들을 해방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로마 제국으로부터가 아니라 사탄 왕국으로부터의 해방이었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기대한 해방보다 더 크고 위대한 해방이었지만, 나라 잃은 백성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여전히 유대인의 나라를 회복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행 1:6). 나라 잃은 백성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유대 민족이 주권을 회복하는 것으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 잃은 백성의 절망과 소망 속에 복음의 씨앗은 뿌려졌고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도 복음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상처받고 짓눌린 사람들에게 소망이 된다. 그들은 겸손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교만하고 부유한 자들에게 복음은 종종 거부당한다. 그들이 영원한 생명의 열매를 못 맺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심판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면 무한한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비참한 백성을 돌보신다. 그들은 세상에서 잃은 나라가 회복되기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더 크고 위대한 나라를 그들에게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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