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의 위험성
[누가복음 12장 16절~21절]
16절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절 -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절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절 -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절 -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성경 전체를 상고해 볼 때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가증히 여기시는 단어 중에 하나가 '내가'라는 단어, 일인칭 단수 대명사입니다. 영어로는 대문자 'I'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내가'라는 말은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마귀는 우리 속에서 '내가'라는 말이 나오도록 역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기원이 '내가'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천사들을 창조하셨는데, 그 천사들 가운데 천사장 루시퍼가 하나님의 보좌를 탐내서 하나님을 그 보좌에서 몰아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다가 그만 저주를 받아 쫓겨나 사단이 되고 그 사단이 공중 권세 잡은 이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 14:12-14절에 보면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하며 사단의 기원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능력있고 아름답고 빛나는 존재였던 천사장 루시퍼는 '내가 가장 높아지겠다'하고 하다가 쫓겨나 저주받은 사단이 된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다 당신의 형상대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셔서 살게 하였는데, 사단이 뱀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라 따 먹는 날에는 너도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고 하는 말로 유혹해서 인간을 타락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라는 말을 가증히 여기시고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면 '내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징계의 말씀을 하셨고 더 나아가 저주의 대상이 되기까지 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를 앞세우고 '내가'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얼마나 위험하고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는지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몇 가지 경우에 있어서 '내가'라는 말을 앞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1. 물질 소유에 있어서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16절부터 19절까지 '내가'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곡식이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하리라"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이 부자를 향하여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하고 그 어리석은 부자의 생명을 불러 가셨습니다.
천지 만물과 모든 물질, 내 영혼 내 생명까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와 같이 '내 것'인 줄로만 아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맡겨 주신 청지기이지 무엇 하나 '내 것'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유물들이 내게 맡겨져 있는 동안 부지런히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는 자가 참으로 지혜로운 자요, 또한 그 물질을 영원한 내 것으로 소유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타난 청지기 비유 중에서 청지기 사표를 내라는 주인의 말을 들은 청지기가 그때부터 사표낸 뒤의 일을 생각해서 부지런히 인심 써 둔 것이 지혜롭다고 칭찬하신 것은 주인 몰래 허비한 것을 잘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질을 맡아 관리하는 동안에 나를 위해 쓰거나 쌓아 두지 말고 내세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써두는 자가 정말 지혜롭다는 것을 비유로써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언젠가는 인생 사표를 낼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날에는 우리 물질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돌려 드리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청지기처럼 인생 사표를 내기 전 내세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써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맡아 관리하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다른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써 두는 자가 정말로 그 물질을 영원히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벌었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려면 하룻밤 사이에도 화재나 여러 가지 재난을 통해 송두리채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신 8:17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눈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을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돈은 죽을 때에 가져가지 못하나 미리 보내둘 수는 있다'는 말은 참으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것, 물질에 대한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영원한 내 것이 됩니다.
2. 선을 행할 때에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마 6:3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구제할 때는 크게 나팔을 불어서 널리 광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구제가 아니라 나를 나타내려고만 선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적은 칭찬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상급을 잃고마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은 내가 하고도 나를 잊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하더라도 '내가' 앞서면 헛수고가 되고 위선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기도할 때에도 금식할 때에도 나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순수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나 기도할 때 나를 나타내려고 하면 벌써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고 사람들에게 참으로 은혜를 끼칠 수 없는 것입니다.
3. 봉사와 수고에 대해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 15:9, 10절에서 바울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니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사도 바울은 '내가' 나타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고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 4:11절에서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눅 17: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마땅히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수고와 봉사를 할 때에도 '내가'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힘주시고 은혜도 주시니까 봉사도 수고도 하는 것이지 내 힘으로는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집사가 되던 안 되던, 회장이던 아니던 꾸준히 봉사하는 것이 참된 봉사이지 '내가' 나타날 때에만 봉사하고 '내가' 나타나지 아니할 때 봉사 안하는 것은 참된 봉사라 할 수 없습니다.
4. 만족과 행복이 있을 때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고후 3:5절에 보면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존 번연(John Bunyan)이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올 때 어느 교인이 '오늘 설교는 참 매혹적이었습니다'하고 칭찬했더니 '당신은 늦었습니다. 내가 강단에서 내려오기 전에 마귀가 먼저 얘기를 하였습니다'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적은 일에나 큰 일에나 만족할 일이 생기고 행복을 느낄 때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됐거니 하는 생각은 꿈에라도 하지 말고, 이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자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만족과 행복이 오래 지속될 수 있게 됩니다
5. 구원의 공로에 있어서 '내가'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엡 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후사가 된 것은 전혀 나의 공적이나 공로의 대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선물인 것입니다.
구원받은 데 있어서 내 행위의 공로가 10%라도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10%로 감소되고 우리 인간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결과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구원의 공로에 있어 '내가' 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시 115:1절에 보면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을 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영광이 돌아오려고 할 때에 재빨리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내가' 취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내가' 행위의 주체가 되어서도 안되고 삶의 방법이 되어서도 안되고 오직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하는 것이 인생 행로의 목표와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영원히 놓치지 않고 받는 비결도 이것이요 인생 행로에 있어 가장 안전한 길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길입니다.
사실 은혜와 축복이 올 때 내 안에서는 교만의 잡초가 함께 자라기 마련입니다. 이에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라는 잡초를 뽑아 버리며 살아야 합니다.
어느 논바닥에 황새 한 마리가 앉았다가 날아갈 때 개구리 한 마리가 황새 발가락을 꽉 물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며 신나게 구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논바닥에 있던 개구리들이 부러워하고 칭찬하면서 '그런 비결을 누구한테서 배웠니 좀 가르쳐다오' 하고 와글와글 떠들어대니까 황새 발에 매달린 개구리가 으시대면서 입을 열고 '내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라고 대답한 몇 초 후에 그 개구리는 그만 저 아래 땅으로 떨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 예화는 '내가'라는 말을 사용한 우리 생활의 결과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이 넉넉한 때나 선을 행할 때나 봉사와 수고를 할 때나 만족과 행복이 있을 때나 구원의 공로를 말함에 있어서도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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