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고창병 들린 사람을 고치심 14:1-6

(1) 인자는 먹고 마시러 오셨다. 즉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러 오셨다. 본문에서 그는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1절). 그 자신의 날에도 연약한 육체를 고쳐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간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여기서 그와 같은 자를 오용하지 않기위해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안식일에 꼭 필요한만큼의 음식을 드시기위해 떡 잡수시러 가셨다. 우리의 안식일 식사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과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 그는 선을 행하시러 들어가셨다. 주의 앞에 고창병든 한사람이 있는지라(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고창병든 사람의 소망을 앞지르셨다. 즉, 그가 부르기도 전에 그에게 응답하셨던 것이다. 주의 앞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 사람은 추측컨데 상당히 심하게 고창병을 앓고 있었던것 같다.

(3)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배척을 참으셨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1절). 그리스도를 초대한 바리새인은 그에게서 어떤 구실을 찾기위해 그를 초대한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으셨을때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도 또는 그르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도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수치스러워 그것이 합당하지않다고 말할수도 없었다. 선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박해자들까지도 합당하고 선하다고 인정할수밖에 없는 일을 행함으로 오히려 박해를 받게된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선행을 베푸신 바로 그 사실때문에 그들은 그와 그의 이름에 돌을 던졌다.

(4) 죄인들이 아무리 반대와 방해를 한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시는 것을 막을수는 없었다(4절).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보내시고(4절). 그 사람을 데려다가 즉, 그에게 안수하시어 그를 치료하셨다. 또는 그를 안고서 치료하셨을지도 모른다. 다루기 힘든 정도로 몸이 부어있었지만(고창병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그 몸이 붓는다) 그를 껴안으시고 온전하게 고쳐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심한 그와 같은 병일지라도 고치셨다. 그것도 한순간에 완전히 고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를 보내셨다. 이는 치료받은 그 사실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이 그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무리 불합리해도 자기들이 의도한 자에 대해 정죄하는 자들이 아닌가?

(5)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다만 자신은 정당한 일을 했을뿐이라고 말씀하셨다(5,6절). 그는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시고, 그들 자신의 관습에 호소함으로 전에는 음흉하게 침묵을 지키던 자들을 이제는 수치로 인해 침묵할수밖에 없도록 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릴 자가 있겠느냐? 그러면 그것이 죽지 않겠느냐?" 그들의 자신들의 가축에 대해 이와같이 하는 것은 그 불쌍한 가축에 대한 연민이 그처럼 많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돈의 가치고 있는 그들 소유의 소나 나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구해내는 일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안식일의 율법을 적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이웃의 선을 위해서는 면제시킬수 없는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쉽게 면제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이 질문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잠잠케 만들었던 것이다.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그 정당함이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어느누구도 입을 열지못할 것이다.

 

Ⅱ. 청함받은 자의 마땅한 자세 14:7-14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있을때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유익한 한가르침을 제시하시고 계신다. 그는 낯선 자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적들과 함께 있을때 그가 본 그들의 잘못된 점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가르칠 기회를 가지셨다. 우리는 우리의 식탁에서 순수하지 못한 어떤 교제가 용납되지않도록 할뿐만 아니라 악의 없는 그 이상의 대화를 해야하며, 우리의 식탁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기회를 가지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얻을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 계셨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전혀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

1. 상좌에 앉으려는 자들을 꾸짖으심(7-11)

(1) 예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상좌에 집착하는지를 주목하셨다(7절). 그는 이미, 대체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11:43). 본문에서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죄를 절실히 느끼게 하신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높은 자리를 고르는가를 지적하셨다. 누구든지 들어오는대로 할수 있는한 가장 좋은 자리 가까이 다가갔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의 일거일동을 주목하신다.

(2) 예수께서는 이와같이 야심을 가진 자들이 종종 수치를 당하고 밀려나는 대신 겸손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있던 자들이 그 겸손으로 존경을 받게된 사실을 주목하셨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강등되었을 것이며, 훨씬 고귀한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8,9절). 세상적인 지위에 관한것뿐 아니라 개인의 장점과 재능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훨씬더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고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자제해야 한다. 잔치의 주인이 자기의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더높은 사람이 마땅히 앉아야할 자리에 앉지 못한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상좌를 차지한 더 낮은 자에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라고 말할 것이다. 자존심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결국 낮아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발탁될 것이다(10절). 가서 말석에 앉으라. 당신을 초대한 친구의 손님들은 당연히 당신보다 더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당신은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길은 낮게 시작하는 것이다. 함께 앉은 모든 사람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그들은 당신을 존귀한 자로 여길 것이다. 영광은 어둠에서 비칠때 도리어 더 빛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당신을 겸손한 자로 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큰 명예이다. 랍비중에 어떤사람이 이와같은 어떤 비유를 들고 있다. "세사람이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한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제후이니까 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다음에 앉으며 나는 현자이니까 하였다. 또다른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앉으며 나는 비천한 자이니까 하였다. 왕은 비천한 자를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고 제후를 가장 낮은 자리에 앉혔다."

(3)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우리 모두에게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말라는 교훈을 하시고 계신다. 자존심과 야심은 사람들 앞에 명예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 부정은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다. 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11절).

2. 잔치의 주인에 대한 책망(12-14)

예수께서는 잔치의 주인이 부자를 그렇게 많이 청한 것에 대해 책망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자를 초대했어야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화려한 집안 치장에 사용하기보다는 자선행위에 쓰는 것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1) "부유한 자를 대접하려고 하지마라. 즉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12절). 이 말은 친척과 이웃들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하는 대접을 금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초청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자를 위한 어떤 잔치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많은 식량이 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단지 나타내기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같이 하는 것은 자기의 가족을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다시 보상받을 것을 생각하지 마라. 우리 구주께서 부자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너희는 보통 대접해 준 자들에게 다시 초청받을 기대를 가지고 대접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희에게 갚음이 될 것이다."

(2) 먼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13, 14절). 너희가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 그러한 자들은 끼니를 이을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생계를 위해 일할수도 없다. 이 사람들은 자선의 대상이다. 그들은 생활필수품이 없다. 그것들을 공급해 주라. 그러면 그들은 너희에게 기도로 보답할 것이다. 그들은 떠나서도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갚을수 없다하여 손해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이는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게되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할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보상을 결코 잃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오랜 항해자가 가장 부유한 자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Ⅲ. 관대한 초청 14:15-24

(1) 손님 중에 한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예수께 말함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15절).

1)그러나 이 사람이 본문에서 그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일까? ①이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인해 모인 무리들이 기분이 상할까 두려워 화제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려 한 것이거나, 아니면 ②그리스도께서 당시 제시하셨던 좋은 규범에 감탄을 금치 못하나 그들이 살고있는 상태를 보고 실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여 그 나라에 처소를 가질 자는 복이 있다고 그들에게 선언한 것이거나, 또 ③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의 부활을 언급하시자 그 말씀하신 것을 여기서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주님, 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상을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게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④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침묵을 지키시는 것을 목격하고 훨씬 깊은 대화로 다시 예수를 이끌어 들이려고하여 이와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로 하여금 대화를 이끌게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는 것보다 더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좋은 대화를 이끌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한마디 던져서 대화를 진행하도록 도와야한다.

2)그때 이 사람이 말한 것은 분명하고도 인정된 진리로써, 그들이 앉아서 식사할 당시 이 말이 인용된 것은 매우 적절했다. 우리가 음식물을 나눌때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시기상으로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①은혜의 나라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리라는 것을 약속하셨다.

②영광의 나라에서 : 그 식탁에 앉게될 자들은 복 있다. 그들은 거기서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우리 주 예수께서 이때에 비유를 말씀하신다(16절 이하). "그러나 그 특권 누릴 자들은 누구일까? 너희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 특전을 거절할 것이며,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제 그 비유에 담긴 내용을 고찰해 보자.

1)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자비가 그리스도의 복음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①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영혼들을 위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으셨다(16절). 어떤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영역본에는 대개 잔치가 벌어지는 시간이 저녁때이었기 때문이다.

②하나님께서는 이 잔치에 와서 참여하라는 은혜로운 초대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다. 먼저 일반적인 초대가 있었다.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과 유대인들을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안에서 좋은 집을 마련하셨을뿐 아니라 개방해 놓으셨다. 청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주어지고 있다. 잔치를 배설한 사람은 초대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종들을 모든 사람에게 보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절). 이것은 지금 바로 우리를 향한 초청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지금이 받아들일 때이다. 그러므로 지금 오라. 지체하지 마라. 초청을 받아들여라. 너희를 환영할 것을 믿으라.

2)복음의 은혜는 냉대에 부딪친다. 초청받은 손님들은 오기를 거절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18절). 그들은 모두 참석을 피할 이러저러한 구실을 찾았다. 이것은 유대민족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일반적으로 무시한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의 초청에 응하는데 있어서 역행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수치로인해 초청을 거절한다고 공표할수 없었기에 사양하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양하였다. 여기에 두사람의 상인이 등장하였다. 한사람은 싸게 흥정한 밭을 샀다. 그래서 그 땅이 과연 좋은지 아닌지를 가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시시한 변명인가! 그는 밭을 보러가는 일을 다음날로 미룰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이 자리를 옮길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궁색한 변명이었다. 다른 상인은 자기의 토지를 위하여 가축을 샀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19절). 전자가 이 세상에서의 지나친 자기 만족을 암시하고 있다면, 후자는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한다. 우리가 어떤 의무로 부름 받았을때 그 의무를 소홀히 한것에 대해 우리로 변명하게 하는 주범이 이것들이다. 변명한다는 것은 그것이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려고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본문에 나타난 변명들을 살펴보자.

①그것들은 하찮은 변명들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땅이나 소를 보러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②그것들은 정당한 변명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에 너무 많이 마음을 둘 경우, 그 자체로는 정당한 것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 여기에 새로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20절). 그는 갈수 없다고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가지않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의무들에 대해 싫증을 느낄때면 할수 없다고 핑계를 둘러댄다. 우리와 이성교제를 하고있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데 종종 우리에게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같이 데리고 갈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환영받았을 것이다.

3)종들이 잔치 주인에게 가지고 온 보도는 초대받은 친구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들이 얼마나 그 주인을 업수이 여겼는가를 보여주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21절). 종은 혼자서 식사해야 될것 같다고 뜻밖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그 종은 사실을 과장하거나 숨기지않고, 있었던 그대로 전말을 보고하였다. 사역자들은 자기 목회의 보좌앞에서 그렇게 하지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들이 자기 영혼을 위한 수고의 결과를 보게된다면 그들은 감사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 틀림없다. 또한 만일 그들이 헛되이 수고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불평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기 때문이다(히 13:17).

4)이러한 모욕에 대한 주인의 의로운 분노. 집주인이 노하여(21절). 복음을 업수이 여기는 자들의 배은망덕함과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모독은 그에 대한 매우 큰 도전이며 또한 사실이 그러하였다. 자비를 악용하면 그 자비는 가장 큰 진노로 변한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절). 에서의 장자 명분처럼 은혜를 멸시하면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을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나중엔 원한다하더라도 그를 영접할수 없을 것이다.

5)식탁에 음식뿐 아니라 손님으로 채워야하는 걱정. 주인이 종들에게 이르되 "가라,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21절). 일반 거지들을 찾아오라. 그리하여 오기를 기뻐하는 자들만 초청하도록 하라." 그들은 곧 그러한 손님들을 가득 채웠다.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인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손님을 맞이할 자리가 있었다. "길과 산을 가로 가라(23절). 시골로 가서 방랑자들, 또는 일터에서 이제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들을 찾아오라. 그리고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집을 채우라. 그러나 완력으로 하지말고 설득하여 하라. 그들에게 신중하게 하라. 왜냐하면 이 경우에 초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영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믿지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을 설득할때까지 떠나지 마라." 이것은 이방인들의 초청을 가리키며, 그들로 교회가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①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소중한 영혼들을 위하여 마련된 잔치 배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해도 그 복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②세상에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부유하고 가장 귀중한 자로서 환영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그가 바로 직전에 말씀하셨던바, 즉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고 말씀하신 것을 여기서 분명하게 하고 계신다.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비와 동정은 우리에게 보증이 된다.

③복음은 복음의 혜택을 받으리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세리와 창기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따라서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 가장 앞서있는 자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지도 말고 또한 가장 소망이 없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지도 말자.

④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복음 잔치에 초대하는데 매우 신속하고 끈기있어야 한다. 빨리…나가서(21절). 즉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이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⑤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그러나 아직도 오히려 자리가 있다. 그의 안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각사람을 위하여 충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한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

⑥그리스도의 집이 비록 크다고 하지만 마침내 채워질 것이다.

 

Ⅳ. 제자가 되는 길의 어려움 14:25-35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자기를 따라 모인 무리들에게 직접적인 강론을 하시며, 제자직이 무엇인지를 알게하기 위해 권고하신다.

(1)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던 무리들은 상당한 열성을 갖고 있었다(25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사교상 모인 것이다. 여기에서 혼합된 군중들을 볼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보시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약속한 자들은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어야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채비를 차리고 있어야 한다.

1)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닥칠 최악의 사태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제자가 될 생각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계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 "만일 누구든지 내게 나아와 나의 제자가 되면 그는 풍성한 부와 명예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①그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들의 이익을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을 기꺼이 버려야만 한다(26절).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수 없다. 만일 그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다면 그는 신실한 제자가 아니며, 견실하고 변함없는 제자가 될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는 집이나 땅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철학은 이러한 것들을 경멸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더높은 차원에서 다룬다. 선한 사람이라면 모두 자기 친척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상대적으로 그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들의 친척을 어느정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만족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잠긴바 되고 삼킨바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의무가 서로 앞을 다툴때, 우리는 우선권을 그리스도에게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든가 아니면 우리의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배척받게 된다면(초대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잃는것 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사회를 잃는 길을 택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한다. 일찍이 어느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지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수 없다. 영적 생명에 대한 기쁨의 체험과 영생에 대해 믿는 소망과 기대는 이 어려운 고백을 쉽게 하게할 것이다. 시련과 박해가 그 고백때문에 일어날때 주로 그 시험이 있게 된다. 평온한 시기일지라도 이 문제는 종종 시험을 일으킨다. 친척이나 친구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때문에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를 주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혐의를 벗을수 없을 것이다.

②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기꺼이 져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 형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모두 자기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모욕받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수형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좇는 중에 십자가가 놓여있을때는 언제든지 의무로써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자기를 부를때 그것을 져야하며, 그에게 있을 보상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2)그리스도께서는 따르고자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라고 명하신다. 계속하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좋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하기전에 계속할 것인가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성적인 행동이며, 성숙된 인간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의는 아무리 세심히 살펴도 한결같다. 반면에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은 나타내어 보여주나 가장 나쁜 것은 숨긴다. 이와같이 먼저 생각하는 일은 인내에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 구세주는 두가지 비유로써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신다.

①우리는 망대를 세울 임무를 맡은 어떤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그 공사에 대한 비용은 예산하지 않으면 안된다(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28절). 끝마칠수 없는 일을 시작하여 스스로 비웃음을 사지않도록 재정 사정과 비교해 보라. 신앙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을 내린 자들은 망대를 세울 임무를 맡은 것과 같다. 낮게 시작하여 기초를 깊이 파고, 반석위에 기초를 세운다. 그리고 계속적인 공사를 통하여 마침내 하늘만큼 높이 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자들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깨어있는 생활을 위한 대가를 치룰수 있을 것인가를 예산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가운데 쌓아올린 자신의 명예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소중한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어쩌면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것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다. 이 망대를 세우기 시작한 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계속하지 못하고 또한 인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수에 넘치는 예산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이 망대를 마치기에 충분한 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을 잘 시작한 자들이 중도에 중지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런 일은 없다.

②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약속한 자는 싸우러가는 사람과 같다. 따라서 그 싸움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31,32절). 이웃나라 임금에게 선전포고하는 임금은 자기 편이 이길수 있는 무슨 대책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일 이길 능력이 없다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피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일종의 전쟁이 아닐까? 우리가 가는 매 발걸음마다 싸움이 있다. 우리의 영적인 적들은 반대편에서 매우 끊일사이 없이 달려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우리 이름을 기입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에게 마땅히 기대되고 예상된 어려움을 견딜수 있을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상의 두가지 비유를 통해서 볼때 세상을 포기한 것처럼 꾸몄다가 후에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할수 있는한 세상과 최선의 관계를 갖는 것이 더좋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내어놓을 마음이 없었던 부자 청년은 자기를 숨긴채 머물러 있기보다 근심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가는 것이 더 잘한 것이었다. 이 비유는 다른 방법으로 적용할수 있다. 즉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빨리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일수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5:25절의 '급히 사화하라'와 같은 의미로 볼수 있다. 죄를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리 도도하고 겁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적수는 될수 없다. 이점을 생각할때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강화조건을 사신을 통해 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으며 훌륭한 것이다. 그 조건들을 잘알고 화해하도록 하라. 저가 아직 멀리있을 동안에(32절3). 시간이 있을때 화해하라. 그러나 본문(33절)에 나타난 이 비유의 적용을 보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려 할때 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배교에 대해 경고하신다. 왜냐하면 배교는 그들을 완전히 무익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34,35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특히 선한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마 5:13). 소금은 좋은 것이며 크게 소용되는 것이다. 타락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있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앙을 내 팽개친 자들은 그 맛을 잃은 소금이며, 세상에서 가장 무익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즉 그 안에 어떤 미덕이나 선한 자질도 찾아볼수 없는 자들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절대로 다시 회복할수 없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4절). 너희가 그것을 짜게 할수 없다. 이것은 배교자를 회복시키는 일이 극히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히 6:4-6).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쓸모가 없다. 똥처럼 땅을 위하여 거름이 되기에도 적합치 않을뿐 아니라 또한 거름더미에 버려둔다 할지라도 썩지않는다. 정신과 태도가 타락한 신앙인은 맛을 잃을대로 잃어버린 육욕적인 자이다. 그것은 버려지게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내어버리는 것이다(35절). 사람들은 더이상 그것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이름을 더럽히는 신앙인들은 교회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영향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구세주는 모두에게 이것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계신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 해설

제자의 길 ( 14 )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무대는 안식일날 바리새인의 식탁에서 베푸신 말씀으로 천국 시민의 자격에 대한 내용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자 제자의 길에 관해 말씀하신 교훈입니다.

 

1. 거짓된 무리들을 책망하심

1) 거짓된 영접

예수님께서는 각성과 각촌에 두루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날 바리새인 중 한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기꺼이 그의 초청에 응하셔서 그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집에는 한사람의 고창병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이 고창병자를 고칠 것인지를 시험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한 거짓 영접을 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앞에서 진솔하게 정직하며 거짓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보화입니다.

a.함께 식사하기를 청함받음(눅7:36)

b.고소할 틈을 얻기위하여(단6:4)

2) 고창병자를 치유하심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그의 집에 영접하였을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궤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고창병자를 세워서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범한 죄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은 그들의 악함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항상 진리는 옳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a.선을 행하는 것(마12:12-13).

b.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함(마22:46)

3) 자기를 낮추라

청함을 받은 자들이 상좌 택함을 보신 예수님은 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상좌는 그 좌중에서 가장 홀륭한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상좌에 앉으려고 애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말석에 앉을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자신을 인간의 형체로 낮추어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그의 제자되는 우리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a.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짐(눅18:14)

b.겸손은 성도의 행동 규범임(롬12:16)

 

2. 천국 잔치

1) 은밀한 보상

예수님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마7:12). 예수님께서는 부한 자보다 가난한 자들을 대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대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접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대접한 것을 갚아주십니다.

a.분깃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신14:29)

b.병든 거지(눅16:20)

2) 배설된 큰 잔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천국을 큰잔치 혹은 혼인잔치에 비유한 예가 많습니다(참조, 사61:10;사62:5;마9:15;요3:29).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습에서는 잔치를 계획하고서 바로 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종을 통해서 1차 통보를 하고 잔치 준비가 끝난후 2차 통보를 하여 잔치에 초대합니다.

a.혼인 잔치(눅14:8)

3) 초청에 응한 사람들

첫번째 초청에 응하였던 사람들은 잔치 준비가 끝난후 2차 초청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듯 거절하였습니다. 초청을 받았던 자들의 거부는 단순한 약속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인격모독이었기에 주인은 진노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잔치 자리가 아직도 비자 주인은 종에게 길과 산으로 가서 강권하여 사람을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처럼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a.이생의 재리는 말씀을 막음(눅8:14)

 

3.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

1) 헐연과 목숨까지 미워하라

예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 심지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혈연으로 인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나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a.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림(요12:25)

b.세상 생명은 헛된 것(욥7:15-16)

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한다면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지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담당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a.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함(딤후1:12)

b.모든 것을 해로 여김(빌3:8)

3) 모든 소유를 버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소유도 또한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지식, 가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에는 우리의 생명과 영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희생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를때 희생을 염두에 두지않으면 마치 망대를 건축하다가 도중에 그만두는 것과 같습니다. 순교자 야고보와 스데반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희생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a.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함(마10:37-38)

b.과실을 많이 맺어야 함(요15:8).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희생을 기피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과 희생의 길을 자청하여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4:1-14

유대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교만에 대해 경계하시며 겸손과 구제를 가르치신 내용이다.

안식일 식탁 교제(14:1)

유대인들은 평상시에 비해 안식일에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거나 식탁을 풍성하게 차린다. 그런 다음 손님이나 랍비를 초대해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가셨음은 이런 풍습에 따른 것이다. 한편, 당시에는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해 식탁 교제를 일삼는 외식자들도 많았다.

맛을 잃은 소금(14:34,35)

나트륨과 염소의 화합물인 소금은 맛을 내는 조미료로 쓰일뿐 아니라 방부제로도 사용된다. 소금이 인체에 필수불가결한 이유는 혈액이나 기타 체액의 삼투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한편 흙이나 불순물이 많이 섞인 소금은 고열에 변질되기 쉽고, 곧 맛을 잃게 되고 만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선 소금을 비료 삼아 밭에 뿌리기도 하는데 맛을 잃은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하므로 그냥 길바닥에 버려질 뿐이다.

 

# 묵상

지혜로운 자의 자세 ( 14:7-11 )

지혜로운 자는 잔칫집에 갔을때 자기를 겸손히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영광을 얻는 방법입니다. 보통 잔칫집의 상좌는 ㄷ자형의 배열에서 세 면의 중앙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상좌에 앉아 섬김을 받았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복된 잔치 ( 14:12-14 )

갚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벗이나 친척, 이웃 등에게 잔치를 베풀면 그들이 갚기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갚음을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혜택이나 갚음을 얻으려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갚음을 얻도록 행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 ( 14:16-24 )

이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사죄와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초청은 민족이나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선포되었고,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간절히 권고합니다.

잔치에 초청된 자들 ( 14:16-21 )

처음에 초청된 자들은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들었기 때문에 사양을 했습니다. 이들의 이유는 모두 그럴듯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이유때문에 주님이 베푼 구원의 잔치를 사양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속의 일이 아니라 천국의 일이요, 영생의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결과 큰 잔치에 대신 참석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다리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천국 잔치는 자격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졌고,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 14:26-33 )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 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지않는 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수 없습니다. 요컨대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겨야 주님께 합당한 제자가 될수 있습니다.

소금의 교훈 ( 14:34, 35 )

소금은 좋은 것이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양념이나 소독, 방부제, 제물용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본문은 특히 ‘맛’에 대해 말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맛이 나게’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못할때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게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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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갈릴리인의 죽음과 회개의 부르심 13:1-5

(1) 최근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소식이 그리스도에게 고해졌다(1절).

1)이것은 실로 비통한 소식이었다. 이 사실은 이곳에 간단하게 언급되었을뿐 그 당시의 어떠한 역사 기록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갈릴리는 헤롯의 통치구역이었으므로, 빌라도에 의하여 저질러진 이 불법 살인으로 인해 누가복음 23:12절에서 볼수 있는 빌라도와 헤롯사이의 분쟁이 일어났음을 추측할수 있다. 살해된 갈릴리인들의 수는 얼마인지 기록이 없고 다만 '어떤'이란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주목할 상황은 빌라도가 그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빌라도의 학살을 두려워할만한 이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율법은 그들에게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을 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이나 제사의 성스러움 그 어떤것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인간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관의 광포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줄수 없었다. 성역이고 안식처였던 제단이 이제 함정이 되고 위험과 살육의 장소로 변하였다.

2)왜 지금 "이 시각에" 그 이야기가 우리 주 예수께 보고되었는가. 아마도 단순히 그가 전에 이 사건을 듣지못했으며 그들이 애통해하는 일이었으므로 그 역시 애통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적당한 시간에 하나님과 화해할 필요성에 관해 앞장 끝부분에서 말씀하셨던 것의 한 증거로써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즉, "선생님 갑자기 '관속에 넘겨져' 전혀 예기치 못한 죽임을 당한 산증거가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준비할 필요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그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봄으로 우리 자신이 힘을 얻게됨은 참으로 유익하다. 혹은 그 자신이 갈릴리인이고 예언자인고로 그를 충동시켜, 이 갈릴리인들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보복할 방법을 찾기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혹은 빌라도가 앞서 그들 갈릴리인들에게 했듯이 그리스도를 해하지 않도록,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예배하러 올라가시는 것을 막기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누그러진 빌라도가 더이상 진노를 일으키지 않게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잠깐동안 그 길에서 피하시는 것이 현명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답은 그들이 마음속으로 악의에 차서 빗대어 이것을 그에게 말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살해된 갈릴리인들은 남모르게 죄를 지은 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혹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빌라도가 그들을 그처럼 잔인하게 죽이도록 허락하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들을 순교자로 인정하는 대신 뚜렷한 증거없이 행악자라고 낙인찍어 버렸던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이러한 운명은 아름다울뿐 아니라 영광스러운 본이었다.

(2) 이 보고를 들으신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답하신다(2-5절).

1)그는 이 사건과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또다른 사건을 말씀하셨다. 당시는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치어 죽은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였다. 이 사건 역시 슬픈 것으로 우리는 종종 이와같이 침울한 얘기를 듣는다. 안전을 위해 세운 망대가 때로는 인간의 파멸을 가져오는 것이다.

2)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이와 유사한 사건들을 악용하지 말 것을, 그리하여 마치 그들이 받는 큰 고통으로 보아 그들을 흉악한 죄를 지은 자들로 단정하여 그러한 큰 고통받는 저들을 비난할 기회로 삼지말 것을 경고하셨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2,3절). 아마도 그리스도께 갈릴리인들의 이야기를 한 자들은 유대인으로 그들은 이처럼 갈릴리인들을 비난할 그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아닌 결말을 가져온 예루살렘 사람들의 이야기로 응수하셨던 것이다. "이제 너희는 실로암 연못가에서 치료받기를 기다리고 있는동안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죽임을 당한 그들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하나님께 더빚진 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들이 받는 고난으로 그 사람들의 죄를 판단할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불에 타서 없어질 가치없는 찌꺼기나 쓰레기로써가 아니라 불에 단련되어지는 정금으로써 용광로에 던지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슬픔에 슬픔을 더하지않도록, 이웃보다 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만일 우리가 심판할 능력이 있다면 바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것으로 충분하게 여겨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을 소유한 박해자들과 성공한 자들을 훌륭한 성인으로, 반면 박해받는 자들을 흉악한 죄인들로 단정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바로 그 비난으로 우리 자신도 비난받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3)이 이야기를 근거로 다음과 같은 각성의 말씀을 더하여 회개의 부름을 선포하셨다.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3-5절).

①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그들이 당했던만큼 당연히 멸망하여야함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도 죄인일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더나을 것도 없는 큰 죄인으로 그들이 고난받은것 못지않게 회개해야할 큰 죄를 지은 자들이기에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누그러뜨릴수 있어야 한다.

②따라서 우리는 회개하기를 힘써 잘못했던 모든 것을 뉘우치고 더이상 죄를 범하지않도록 해야한다. 다른 사람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큰 소리로 우리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③이 회개만이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수 있는 길이며 가장 확실한 길이다.

④만일 우리가 회개치 않으면 우리 전에 당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멸망당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죽은 것처럼 우리도 영원히 죽을수밖에 없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으로 회개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바로 그 예수께서 또한 우리에게 멸망하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명하시고 계신다. 이처럼 그는 우리앞에 죽음과 생명, 선과 악을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요구하신다.

 

Ⅱ.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13:6-9

이 비유는 바로 앞서하신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강조하시려는 의도로 행해졌다.

(1) 이 비유는 본래 유대 민족과 백성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의 소유로 택하시어 자기 백성으로 삼아 곁에 가까이 두셨으며 그들로부터 의무와 순종이라는 합당한 보답을 기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여기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그들의 이러한 의무를 다하는 대신 오히려 책망을 들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들을 포기하시려고 작정하셨으나 그리스도의 중재로 인해 그들에게 더 크신 자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시간적 여유를 은혜롭게 베푸셨다. 말하자면 또다른 유예기간을 그들에게 주어 그들가운데 자신의 사도들을 보내어 회개하도록 권고하시고 더나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하시려고 그들을 찾으셨던 것이다. 그들가운데 얼마는 회개하고 돌아와 열매를 맺었으며 이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축복이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다수는 계속해서 뉘우치지 않고 열매맺지 못한고로 그들에게는 돌이킬수 없는 파멸만이 있었던 것이다.

(2) 그러나 이 비유는 다음과 더 중요한 교훈을 담고있다. 즉 은혜의 덕을 누리는 모든 자들을 깨우쳐 그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에 합당한 마음의 온유함과 삶의 방향을 알게하기 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요구되는 '열매'이기 때문이다.

1)이 무화과 나무는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보다 비옥한 땅인, 그리고 보통 길가에서 자라는 다른 무화과 나무들(마 21:19)과는 달리 알뜰한 보살핌을 받는 포도원의 심겨진 것이었다(6절). 이 무화과나무는 어떤 '한사람'의 소유였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의 '포도원'이다 우리는 이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들인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2)무화과나무로부터 주인의 기대는 어떠했나.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을 보내지않고 자신이 직접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으로 열매를 구하려 그 자신의 백성에게 직접 오셨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포도원에 심겨진 그들로부터 '열매'를 요구하시며 기대하고 계신다. "주여, 주여"라고 울부짖는 잎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처음이 좋고 장래 유망해 보이는 꽃들로도 안된다. 열매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이 복음과 빛과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3)주인의 기대에 대한 실망은 어떠했나. 얻지 못한지라. 단 한개도 없었다. 복음의 특권을 누리는 그 많은 사람들가운데 어느누구도 전혀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함을 생각할때 참으로 슬픈 일이다.

①주인은 여기서 포도원지기에게 열매없음을 책망하고 있다. "열매를 구하러 내가 왔지만 그러나 실망하고 말았다. 즉 하나도 얻지 못했다."

②주인은 두가지 이유로 열매없음을 더욱 책망하고 있다.

첫째, 오랫동안 기다렸으나 그것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열매를 구한 것이 아니라 다만 열매 맺기만을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그처럼 크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매년 '삼년'을 급하게 오지않았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이 말씀은 복음을 받았지만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못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참으시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하나님께서 삼년동안 우리를 찾아오시어 열매를 구하셨으나 하나도 얻지 못하신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둘째, 이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못할뿐만 아니라 손해를 끼쳤다. 즉 그것은 '땅만 버렸던' 것이다(7절). 그것은 과실을 맺는 나무가 들어설 자리를 차지하고 그 주위에 있는 모든 나무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었다. 선을 행하지않는 자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나쁜 행실로 영향을 끼쳐 해를 입힌다. 그러한 나무가 높고 크며 넓게 퍼져있을수록 그리고 그 나무의 수명이 길수록 손해는 커지며 땅은 더욱 버려지는 것이다.

4)그 무화과나무에 대한 판결은 내려졌다. 찍어버리라.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가 기대할 것은 찍혀버림을 당하는 것밖에는 없다.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는 마땅한바로 아무 목적없이 포도원 안에 자리해야할 이유가 없다.

5)이에 대해 과원지기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리스도께서는 크신 중보자이시다. 목회자들도 중보자들이다. 우리 또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①그가 기도한 것은 집행유예이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8절). 이것은 "주인이여 결코 찍어버려서는 안됩니다"라는 기도가 아니라 "주인이여, 지금 찍어버리지 마소서"라는 기도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는 잠시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스럽다. 아직 회개의 은총을 입지못한 자들에게 회개할 여유를 주는 것이 자비롭다.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된 우리가 즉시 찍혀버리우지 않는 것은 위대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덕택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들을 다시 얼마동안 유예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는 기도할수 있다. "주인이여 그들을 그대로 두소서. 조금만 더 그들을 참으시고 그들이 은혜를 입기까지 기다리소서." 이와같이 우리는 진노를 돌이키도록 몸소 막아야 한다. 그러나 자비의 집행유예도 잠간뿐이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가 조금더 참으실 것과 그가 항상 참으시리라고는 기대할수 없다. 우리를 위하여 다른 사람이 기도해줌으로 유예는 가능할지 모르나 용서만은 얻을수가 없다. 우리 자신의 믿음과 회개 그리고 기도로써만 용서함 받을수 있는 것이다.

②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유예를 개선시키기 위해 무엇을 약속하셨나. 내가 두루파고 거름을 주리니. 간단히 말해 우리의 기도는 항상 우리의 수고한바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처럼 최선을 다하겠다는 겸허한 결심으로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며 또한 우리가 간구한 자비를 스스로 정당하게 받을가치가 없음을 보이는 것이 된다. 포도원의 과원지기는 자기의 본분에 충실한 것을 약속하였고 이점에서 목회자들 또한 각자 맡은바 임무에 충성해야할 것을 배운다. 그는 나무 주위를 파고 그곳에 거름을 줄 것이다. 열매맺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묵힌 땅을 파서 일으키는 율법의 엄중함에 의해 각성되어져야 하며 그리고나서 나무에 거름을 주듯이 따뜻하게 하고 기름지게 감싸주는 복음의 약속들에 의해 힘을 얻어야 한다. 이 두가지 방법은 모두 시도되어야 한다. 전자는 후자를 위한 준비이며 둘로써 모두 충분하다.

③유예후에 남겨진 조건은 무엇인가. "일년만 더 우리가 할수 있는한 모든 것을 해보도록 하지요(9절)." '이어니와'라는 단어는 원본에는 없으나 그 표현은 뜻밖이다. '만일 실과가 열면.' 이 말은 주인과 과원지기가 얼마나 기뻐할 것인지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열매맺지 못하던 신앙인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후 열매없음을 회개하고 치유받아 열매를 맺게된다면 모든 것이 잘되었다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고 목회자들의 손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뿐만아니라 그로인해 하늘에서는 즐거워할 것이고 땅도 더이상 버려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옥토가 되어 포도원은 아름다워지고 좋은 나무들로 가득차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나무 그 자신으로도 참으로 잘된 일이다. 그 나무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히 6:7)될 것이며 깨끗해져서 더많은 열매를 맺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에 덧붙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렇지않으면 찍어버리소서. 비록 하나님께서는 오래 기다리시면 기다릴수록 그들이 당할 멸망도 더욱 클 것이다. '이 후에' 찍혀버림을 당하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일 것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직접 찍어버린다 하실지라도 그일 자체는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지금 열매맺지 못하는 나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도 그들이 끝까지 열매를 맺지못해 결국 찍혀버림을 당할 그때에는 오히려 그들의 찍힘을 보고 만족해할 것이다. 그들의 가장 친한 친구들조차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묵묵히 따를 것이다.

 

Ⅲ. 안식일에 한여자을 고치심 13:10-17

1. 한여인을 고치심(10-1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오랫동안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있던 한여인을 치료하시는 기적을 베푸셨다. 그는 그의 안식일을 회당에서 보내고 계셨다(10절). 우리도 이와같이 하도록 명심해야 하며 집에서 성경을 읽음으로 마찬가지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는 안식일에 회당에 계시면서 거기서 가르치셨다. 가르치시는 것이 그의 본분이었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바를 확증시키기 위해 이제 하나의 이적, 자비 이적을 행하셨다.

(1) 이 자비의 대상은 회당안에 있던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던' 한여인이었다(11절). 그 여인은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못할'만큼 병약했으며 따라서 바로 설수가 없었다. 비록 그 여인은 이런 질병에 걸려있었지만 안식일마다 회당에 갔다. 육체적인 질병조차도 그렇게 심하지 않는한 안식일에 공중 예배를 빠지게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대이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수 있기 때문이다.

(2) 치유를 구하지도 않은 자에게 이처럼 치유해 주심은 항상 인간들의 소망에 앞서시는 그리스도의 자비와 은혜를 잘 나타내준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20절). 그녀가 호소하기 전에 그가 대답하셨던 것이다. 그 여인은 가르침을 받기위해 그리고 영혼에 유익을 얻기위해 그에게 갔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가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 놓임받는 것을 허락하셨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관심을 두고있는 자들에게는 이와같이 그들의 육체에 대해서도 진정한 보살핌이 따르게 된다.

(3) 완전하고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그 치유는 그의 전능하신 권세를 말해준다. 그는 '안수하시고'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하셨다(13절). 비록 그녀는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못하였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셔서 그녀 스스로 설수 있도록 하실수 있었다. 꼬부라져 있던 여인이 곧 펼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치유는 죄인들의 회개에서 볼수 있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사역을 나타내고 있다 죄를 씻음받지 못한 마음은 이러한 사단의 영의 지배를 받아 왜곡된다. 그들은 하나님이나 하늘을 향해 전혀 스스로 설수 없는 자들이다. 영혼의 구부러짐은 전혀 어긋난 길을 낳는다. 이처럼 뒤틀린 영혼은 그리스도를 찾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자기에게 부르시고 치유의 말씀을 들려주시어 그들이 그들의 병에서 놓임을 얻게하시고 그들의 영혼을 바르게 하신다. 인간의 죄로 구부러졌던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바르게 할수 있다. 또한 선한 백성들에게 내리시는 위안으로, 그의 사역을 말해주고 있다. 대단히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랫동안 노예의 영인 사단의 영에 사로잡혀 왔다. 그러나 때가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양자의 영으로 이러한 질병에서 그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4) 이 치유의 효과는 그녀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에도 나타났다. 그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절). 구부러진 영혼들이 바르게 될때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그것을 드러낼 것이다.

2. 회당장의 공격(14)

그는 이것을 보고 '분내었다.' 그 날이 안식일이기 때문이었다(14절). 그는 그리스도를 비난하면서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것이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그 일이 일상적인 일이듯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 엿새 중 어느날이라도 와서 치료받으라고 하였다. 그의 눈에는 그리스도의 치유가 값싸고 평범한 것으로 비춰졌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를 풀어주셨는데 그가 스스로 묶을수 있겠는가? 히브리어에서는 경건함과 자비로움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한단어에 같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자비와 자선 행위가 어느 의미에서는 경건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으로 따라서 그와 같은 일은 안식일에 매우 알맞는 일인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 그 정당성을 변호하심(15,16)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15절). 우리는 관대하게 심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의해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회당장이 그와 그의 복음에 대해 적의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안식일의 거짓 열심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이러한 속마음을 지적하실수도 있었으나 굳이 그와 논쟁하여 주셨다.

(1)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인정되지 않으나 유대인들 사이에 보통 행하고 있는 일, 즉 안식일에 가축에게 물을 먹이는 사실에 호소하고 계신다. 우리안에 가두어 두었던 가축들을 안식일에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고는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지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짓일 것이다. 만일 그날이 안식일이라고해서 가축을 굶겨야한다면, 가축을 쉬도록 가두어 두는 것이 차라리 일을 시키는 것보다 더욱 못할 짓일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실례를 바로 지금의 상황에 적용시키고 계신다(16절). "소나 나귀같은 짐승에게도 안식일에 자비를 베풀어야하거늘, 하물며 이 여인을 훨씬더 큰 고통에서 풀어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로서 너희의 누이라. 그러한 딸에게 너희가 소나 나귀에게도 당연히 베푸는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인 것이다. 그러므로 메시야의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 이 여인은 사단에 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야말로 그 불쌍한 여인에게 자비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여인은 이와같이 비참한 상태에 무려 십팔년이나 매여있었다. 이제 그녀를 풀어줄 기회가 왔는데 다시 하루라도 그 일을 연기시키겠는가. 십팔년간의 고통으로 이미 충분하다고 너희는 생각지 않는가?"

4. 무리의 서로 다른 반응(17)

(1) 이 말씀은 그를 박해하는 자들의 적의를 당황하게 했는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17절). 그러나 이 부끄러움은 회개로 인함이 아니라 오히려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2) 이 말씀은 또한 그를 따르는 자들의 믿음을 얼마나 굳게 하였는가.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그의 적들의 부끄러움은 그를 따르는 자들의 기쁨이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므로 우리는 그로인해 기뻐하는 것이다.

 

Ⅳ. 하나님나라의 비유 13:18-22

(1) 우리가 이미 마태복음 13:31-34절에서 보았던 두가지 비유안에 복음이 점진적으로 진척되어 가는 것이 예언되어져 있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은지'를 보이기위해 시도하신다(18절).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20절). 그 나라는 너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리라. 너희는 그 나라가 굉장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불시에 완성될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마치…겨자씨 한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즉 아주 작은 것으로 보잘것없고 거의 기대할만한 것이 없으나 그것이 뿌려졌을때 큰 나무로 자라리라(19절). 많은 사람들은 복음의 시작이 너무 보잘것없기 때문에 아마도 복음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그 시작은 보잘것없이 작으나 나중은 엄청나게 큰 것이 되어, 많은 새들이 날아와 그 가지에 깃들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증함으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없애려하셨다. "너희는 그나라가 외형적인 방법에 의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나 그 나라는 누룩과 같아서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어떠한 힘이나 격력함없이 임할 것이다(21절). " 누룩 조금이 가루덩어리 전부를 부풀게 하듯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기하게도 그 향기를 전인류에 퍼뜨릴 것이다. 그러나 기다려야만 한다. 그리하면 그것이 즉 복음이 기적을 이루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 점점 '전부 부풀게' 되리라.

(2)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22절). 여기서 우리는 그 길이 내키지는 않았으나 겨울에 있을 자신의 희생제를 치르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그리스도를 본다.

 

Ⅴ. 구원얻는 수효에 대해서 13:23-30

(1) 하나의 질문이 우리 주 예수께 던져졌다. 이 질문을 한 자가 누구인지 즉 그리스도의 친구인지 혹은 적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나타나있지 않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23절). 아마 이것은 흠을 잡으려는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구원을 얻는 자가 많다고 대답한다면 그가 너무 무르다고 비난할 것이며, 적다고 대답한다면 엄격하고 딱딱한 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스스로 판결을 내리는 것만큼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은 없다. 혹은 이것은 호기심에 연유한 질문 즉 교묘한 투기일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구원을 얻기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구원을 얻고 누가 구원을 받지못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더 관심이 있다. 혹은 칭찬받을 질문일수도 있다. 그리스도의 율법이 얼마나 엄한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악한지 깨달아 이들을 서로 비교해보면 당연히 "구원받을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하고 외칠수밖에 없게 된다. 구원의 말씀을 들은 자들은 많으나 그 말씀을 진정 구원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자들이 심히 적음은 매우 놀랄만하다. 또는 참으로 알고 싶어하는 질문인지도 모른다.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면, 그 뒤는 어떻게 됩니까? 이 말씀은 저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까?"

(2) 그리스도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셨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이와같은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하지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려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을 이끄시려 오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 누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할 것이 아니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야할 것이다.

1)그들을 깨우치시는 권고와 지시 :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 이 말씀은 질문을 한 그 사람에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 즉 모든 사람에게 하신 것이다. 구원을 얻고자하는 자들은 모두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하며 또한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은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하늘에 다다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로써 굉장한 열심과 주의 그리고 수고없이 그것을 얻을수는 없을 것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하라. 상을 바라고 뛰는 자들처럼 힘쓰라. 끝까지 자신을 채찍질하고 노력해야 한다."

2)이에 대해 여러 예를들어 그들을 각성시키시고 계신다.

①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위해 수고하였으나 그 수고가 충분하지 못하여 멸망하고 말았는가 생각해 보라. 그들은 구하기는 하나 힘쓰지는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영광을 입지못하는 이유는 게으르게 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행복을 원하고 성결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것들을 위하여 어느 정도 좋은 진전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약하다. 즉 의욕은 식고 노력은 미약해지며 결국 그들의 결심을 붙들어줄 힘과 끈기가 사라지고 만다. 따라서 그들은 그르치게 되는 것이다.

②다가오고 있는 구별의 날과 그날에 있을 판결을 생각하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을'것이다(25절). 지금은 아주 시간이 많은듯이 보이나 그가 일어나 문을 닫을 그날은 오고있다. 과연 그것은 어떠한 문인가? 바로 구별의 문이다. 지금은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는 육에 속한 신앙인들과 진정을 다해 예배드리는 영적인 신앙인이 교회의 성전안에 함께있다. 지금 이들 사이에는 문이 열려있다. 그러나 그 집주인이 일어나면 그들 사이에 있던 자들은 들어오지 못하게될 것이다. 또한 부정한 자들에게도 그 문은 닫히게될 것이다. 안에 있는 자들은 언제까지나 안에 있게될 것이고 거룩한 자들은 계속해서 거룩하게될 것이다. 그 문은 진실한 자와 악한 자를 갈라놓기 위해 이들 사이에 닫히게 된다. 또한 그 문은 거절과 배척의 문이다. 자비와 은혜의 문은 오랫동안 열린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그들은 그 문으로 들어오려 하지않았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공로로 하늘에 오르기를 바랐으므로 그 집주인이 일어나면 그는 당연히 그 문을 닫을 것이다.

③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자신하였다가 정작 심판날에 이르러 거절을 당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그러면 당연히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다"라고 고백하며 전혀 힘쓰기를 바랄 것이다. 다음 사실을 고찰해 보자.

㉠바로 천국 문앞까지 온 그들의 기대는 얼마나 컸는가. 거기서 그들은 '서서 문을 두드렸다'(25절). 마치 자기집에 온듯이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두드렸던 것이다. '주여, 주여, 열어주소서. 우리는 들어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그릇된 기대에 의해 망한다. 그들은 그 기대 즉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한번도 의문을 제기해 본적이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주여'라고 부르며, 그들이 전에는 가볍게 여겼던 그 문으로 들어가기를 지금은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들은 무슨 근거로 이러한 자신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들의 변명이 무엇인지 보자(26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손님으로서 그의 사랑을 함께받았던 자들이었다. 즉 "우리는 당신의 식탁에서, 당신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이었다.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당신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구하지 않으실수가 있습니까?"

㉢그들의 자신감은 얼마나 그들을 실망시킬 것인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25절)'라고 대답하실 것이다. 뿐만아니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가라(27절)"고 하실 것이다.

첫째, 그는 그들을 부인하신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너희는 나의 가족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아신다. 그러나 그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은 알지못하시며 그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시다.

둘째, 그는 그들을 버리신다. 나를 떠나가라. "나의 문에서 떠나가라. 이곳은 너와 전혀 관계가 없다."

셋째, 그는 그들의 이러한 운명에 합당한 명칭을 붙이셨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경건의 탈을 쓰고 은밀히 행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사단의 일을 한 이것이 바로 그들의 파멸이다.

㉣그들이 받을 형벌은 얼마나 엄청날 것인가. 거기서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8절). 즉 극도의 슬픔과 분노가 있게될 것이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때. 구약의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있음을 본다. 즉 그들은 상당히 멀리서 그리스도의 날을 보고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신약시대의 죄인들은 하나님나라 밖으로 쫓겨날 것이다. 그들은 그일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때문에 부끄러움으로 밖으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성도들의 영광을 봄으로 죄인들의 비참함은 더욱더 심하게 여겨질 것이다.

④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얻을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된 자로서 먼저될 자도 있고(29,30절).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보아, 오히려 구원을 얻을 자가 적을 것임을 알수 있다. 그렇다고 복음이 헛되이 전파되었다고 성급하게 말해서는 안된다. 이방인들의 세계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때 전혀 그곳에서 만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될 것이며 반면에 그곳에서 꼭 보게되리라고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앉아있는 자들은 거기에 이르기위해 많은 수고를 했음을 알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먼 곳으로부터 즉 '동서남북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들은 그들처럼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자신했던 많은 자들이 끝까지 이르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뒤로 밀려나 보였던 자들이 이겨서 이 상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가장 먼저 출발해 누구보다 하늘나라에 가깝게 서있던 내가, 나보다 못한듯한 자들이 모두 그 나라에 들어가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말 것인가? 노력해서 될 것이라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Ⅵ. 헤롯을 무시하심과 예루살렘을 저주하심 13:31-35

(1) 헤롯이 그리스도를 해하려한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헤롯의 통치 구역인 갈릴리에 계셨다(31절).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혹자는 이 바리새인들이 아무 근거없이 그리스도를 갈릴리에서 유대땅으로 쫓아낼 양으로 이러한 거짓말을 꾸몄다고 생각한다. 유대땅, 바로 그곳에는 정말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 바리새인들은 알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답이 헤롯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이 근거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즉, 헤롯은 그리스도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해하려 계획하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헤롯은 기꺼이 그리스도를 없애려하였다. 그렇지 못할경우 이러한 위협의 말을 전함으로 그를 쫓아버릴 심산이었다.

(2) 그리스께서는 이러한 헤롯의 격노를 무시하셨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32절). 헤롯을 '여우'라 불러 그의 본성을 폭로하셨다. 왜냐하면 그의 술책과 배신, 그리고 비열함으로 보아 그는 여우같이 교활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이 지독하고 추악한 말임에도 그리스도께서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이 전혀 잘못된 것일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예언자이시고 예언자는 항상 제왕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책망할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만한 왕을 그에 합당한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가서 저 여우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라. 나는 내가 죽어야 하리라는 것을, 그것도 곧 죽어야 하리라는 것을 안다. 오히려 나는 내가 죽어야할 그 삼일째 되는 날을 기대하고 있다." 즉 "곧 나의 때가 온다. 헤롯이 나를 죽이려할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말하기를 나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라. 나는 죽음으로 완전해질 것이며 그때 비로소 나의 일을 다 마치게될 것이다." " 나는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 자신이 거룩하게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드려 그 자신의 피로 제사장적 직무를 수행하셨다. "나는 그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내가 내 일을 다 마치기 전에는 나를 죽일수 없음을 안다. 그와 그의 모든 위협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리라'. 그의 힘으로 나의 길을 막을수는 없다. 나는 오늘과 내일 그리고 그 다음날도 말씀을 전하며 병을 고치며 두루다녀야 한다." 그날의 일을 그날에 하도록 자극받기위해서 우리는 우리앞에 허락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좋다. 그리고 우리의 적들의 힘과 적의에 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남아있는한 그들이 우리를 전혀 어찌할수 없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헤롯이 나를 해할수 없음을 안다. 이는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을뿐 아니라 내가 죽어야할 곳은 그의 지배하에 있지않은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그 당시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던 대공의회외에는 선지자를 심판할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만일 선지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곳은 바로 예루살렘이어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애도하셨으며 또한 그 도시에 대해 분노에 찬 저주의 예언을 하셨다(34,35절). 이 말씀은 마태복음 23:37-39절에서도 볼수 있다.

1) 특별한 은혜로 다른 어떠한 곳보다 더 잘 하나님에 관해 신앙을 고백해야할 그 장소와 그 사람들이 오히려 악한 것에 대해 주 예수께서는 몹시 분노하셨고 슬퍼하셨다. 그 거룩한 도성의 죄와 이로인한 파멸을 말씀하시는 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34절).

2) 보다 많은 은혜의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그 축복을 선용하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그들에게 해가 된다. 인간들의 타락이 정복되지 않는한 그들은 항상 자극받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오는 불쌍한 영혼들을 기꺼이 기쁨으로 영접하심을 보이셨다.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아래 모음같이, 그러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4) 나는 몇번이라도 하려했으나 너희는 하지않으려 하였다. 그리스도의 기꺼움은 오히려 죄인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5) 그리스도께서 떠난 그 집은 '황폐하여 버린바' 될 것이다(35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버리신다면 성전은 황폐하여지고 만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집을 그들에게 버려두신다. 그들 스스로 그것을 섬기고 최고의 것으로 만들도록 내버려두시며 그는 더이상 그 집에 관해 상관하시지 않을 것이다.

6)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몰아낸 그들로부터 당연히 물러서신다.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모이려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는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7) 마지막날의 심판이 임하면 지금 믿지못했던 자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충분히 믿게될 것이다. 너희는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즉 "이미 너무 늦었을 그때서야 너희는 내가 메시야임을 보게될 것이다."

 

# 해설

회개를 촉구하심 ( 13 )

본장은 다섯개의 작은 단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얼핏보기에 이들 소단락들은 서로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나 나름대로 짜임새가 있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본장의 전개는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1. 죄를 회개하라

1) 회개하라

예수님 당시 로마 총독인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고 있는 몇몇 갈릴리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죽은 갈릴리 사람들이 그들의 죄악때문에 당연히 죽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 사건을 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갈릴리인이 다른 갈릴리인보다 더악한 죄인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며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결국 멸망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a.각양 더러운 악(고후12:21)

b.화를 당함(마11:21)

2)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예수님은 빌라도가 제물에 피를 섞은 사건 및 실로암의 망대 사건 등 두가지 실화를 들어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이어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본서의 독특한 자료에 의한 것으로, 마21:18-22절과 막11:12-14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과 병행합니다. 그 내용은 전혀 다르나 취지는 같습니다. 주인이 관심을 갖고 사랑했던 무화과나무는 삼년 동안이나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열매를 맺지못하고 땅만 버리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에 과원지기는 1년만 더 기회를 주도록 간청했습니다. 과원지기의 간청을 들은 주인은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더 주신다는 뜻이었습니다.

a.과실을 있게 하려고 성도를 택하신 주님을 교훈해 줌(요15:16)

b.심판을 유보시킴(출34:9)

3) 안식일의 치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그곳에는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못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율법주의적 선입관에 얽매여있는 회당장은 안식일에 치유하신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분을 내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과 그를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해주셨습니다.

a.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임(막2:27-28)

b.선행으로 무식한 말을 막음(벧전2:15)

 

2. 예수의 교훈

1) 겨자씨 비유

예수님께서는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하나님나라를 가르치는데 있어서 겨자씨를 비유로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앗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작은 겨자씨에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한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 나라는 보잘것없지만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데 그 강점이 있습니다. 겨자씨는 크게 자라서 나중에는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a.사람이 밭에 심은 씨(마13:31-32)

b.거할 곳은 전능자의 그늘임(시91:1)

2) 누룩 비유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누룩 비유 역시 겨자씨 비유에서와 같이 큰 결과를 대조하는 의미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누룩은 대체로 나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누룩은 그 급속한 활동력으로 음식을 빨리 부패하게 하므로 악의 전염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급속한 활동력이 선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적은 누룩이 가루 서말을 부풀리듯이 그와 같은 역동적인 힘을 성도들이 발휘해야 합니다.

a.잘못된 교훈(갈5:7-9)

b.하나님의 나라(마13:33)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께서 각성과 각촌을 돌아다니시면서 전도 여행을 할때 어떤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얻는 자의 수에 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좁은 문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게되면 그 문은 절대로 다시 열리지않기 때문입니다.

a.문이 좁고 길이 협착함(마7:14)

b.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가야 함(창7:15-16)

 

3. 탄식하시는 그리스도

1) 행악자들

예수님은 슬피울며 이를 갈 자들은 행악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행악은 단순한 윤리적 차원의 악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않는 것이 행악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를 통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특권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언약 백성으로 일찍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받은 자였지만 교만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a.불의한 자는 하나님나라를 얻지못함(고전6:9)

b.구원 축복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었음(롬11:11)

2) 고난을 각오하심

예수님께서 심판에 관하여 가르치시고 있을때 한바리새인이 나아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하므로 여기를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전언 내용을 들으신 주님은 헤롯을 가리켜 '여우'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헤롯을 통렬하게 경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께서 헤롯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유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죽을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역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죄인의 손에 죽음당함(마17:22-23).

b.미리 예언된 사실임(행3:18)

3) 탄식하시는 예수

주께서 예루살렘을 반복하여 부르신 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며 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극의 성읍인 예루살렘에 대한 탄식이십니다. 더나아가서는 전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의 탄식이십니다. 예루살렘 거민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파송된 자들을 돌로 쳤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간절한 초청과 호소를 거절한채 의로운 피를 흘린 죄의 대가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하였습니다.

a.선지자를 죽인 성(마23:37)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들이라도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구원받는 일을 하는데 힘써야 하겠습니다.

 

# 핵심

13:1-9

예수님은 누구든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당할 것임을 강조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무화과나무 비유를 드셨다.

 

# 묵상

회개 촉구를 위한 예 ( 13:4, 5 )

예수님은 회개의 촉구를 위해 빌라도의 갈릴리 사람 학살 사건과 실로암 망대 붕괴 사건을 그 예로 드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죽음이나 병, 과부됨, 무자식 등의 모든 불행을 죄의 결과로 보았기 때문에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죄에 대한 진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아무런 불행도 당하지 않은 우리들 역시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강조하며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회당장과 안식일 ( 13:10-16 )

한회당장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십팔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신 것으로 인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귀신과 질병에서 놓임받는 일이 안식일 준수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법조문에 사로잡혀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을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회당장이 안식일에 자기 육축은 돌보면서 그보다 중한 사람돌보는 일은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자신들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데만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나라 ( 13:18-21 )

겨자씨와 누룩은 하나님나라를 상징합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이로되 땅에 심기워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누룩도 적은 양이 가루속에 넣어진 후에는 모든 가루를 부풀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미약해 보이지만 나중에는 크게 창대해짐을 교훈합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좁습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은 혈과 육으로 들어가거나 인간의 노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만 들어갈수 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천국을 구하는 자는 많으나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적은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충고 ( 13:31-33 )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하니 유다 지방으로 도망치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충고뒤에는 교활한 음모, 즉 예루살렘에서 연합하여 예수님을 처치할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통치권 안에서 문제를 야기시키지 않기를 바랐기때문에 이러한 충고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정하신대로 주님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그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귀신과 병과 죄악의 추방,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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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외식하지 말 것과 두려워하지 말 것을 말씀하심 12:1-12

1. 많은 무리가 모임(1)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할 증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무리들은 아직 그를 따라다니며 그를 찬미하고 존귀히 여겼다. 그 동안에(1절), 즉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있는동안에 백성들은 오후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과 식사하신 후에 설교를 하셨다. 그는 모여든 무리들을 실망시키고 싶지않으셨던 것이다. 비록 아침 설교에서 무리가 모였을때에(눅 11:29), 악한 세대라고 심하게 그들을 꾸짖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그리스도를 찾아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 무리들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더 그러한 책망을 잘 참을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무리들을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놓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많은 무리가 그에게 모여들었다. 본문에는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라고 묘사되어 있다. 무리들이 말씀을 듣기위해 앞으로 다가가려는 것을 보여주는 흐뭇한 광경이다. 그러한 고기떼가 있는 곳에 그물을 던진다면 얼마라도 잡히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제자들에게 교훈하심 (1-12)

(1) 그는 외식을 경계하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는 이 말씀을 누구보다도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하셨다. 이들은 그의 보다 특수한 보호아래 있었으므로 그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하듯이 특별히 그들을 경계시키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신앙고백을 하였는데, 신앙에서의 외식은 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죄이었다. 외식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다도 그들에게 있어서 더악한 것이었다. 자세히는 알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 당시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사람들이었을 것이지만 여전히 외식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무리가 듣는 가운데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경고에 대해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하고자 함이었으며, 세상 사람에게 알게하시기 위함이었다.

1)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경계시킨 죄에 대한 묘사 :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했다(1절). 그것은 누룩이다. 즉 누룩처럼 퍼져나가 온전한 사람속으로 그리고 그가 행하는 모든것 속으로 교묘하게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그것은 누룩처럼 부풀며 시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을 자만심으로 우쭐대게 하고 악의로 몹시 상하게 하며, 그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그것은 그들 대부분에게서 발견되는 죄이다. 그들을 닮지않도록 주의하라. 그들이 유대교로 가장하듯이 너희들도 그리스도교로 위장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2)그것을 경계해야 하는 합당한 이유(2,3절)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2절). 조만간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만일 너희가 공중앞에서 행한 너희의 신앙고백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어두운데서' 말한다면 그것은 '광명한데서' 들릴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은 알려질 것이며 따라서 너희의 어리석음과 허위가 밝히 드러날 것이다. 사람의 신앙이 자기 마음의 악을 치유하고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언제까지나 가면으로 덮인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위선자들이 스스로 자신의 무화과 잎을 벗기게될 그날은 오고 있다.

(2) 이에 덧붙여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할 것과 비겁함이나 천박한 불안으로 인해 그 의무를 배신하지 말 것을 교훈하셨다.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든지 말든지, 용납하든지 않든지 간에 그들에게 진리, 곧 온전한 진리를 말하며 진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 너희에게 은밀히 전해졌던 그것을 전파하되 누가 성을 내든 안내든 너희는 그것을 널리 전파하라."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결코 타락의 원인은 되지않는다 할지라도 고난을 받게하는 원인은 될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용기로 자기 자신을 무장해야 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그들의 일에 대해 거룩한 결의로 강하게 하시기위해 여러가지 설명을 들려주신다.

1)너희 원수들의 권세는 제한된 권세이다(4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두려워하지 말라(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의 친구이다. 그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며 그들에게 이 우정어린 충고를 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친구로 인정하는 자들은 어떠한 적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몸을 죽이고 그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육신을 죽이는 것 이외에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어떠한 근본적인 해를 결코 가할수 없다. 그들은 다만 육신을 보다 빨리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돌아가게 하며, 영혼 또한 그의 영원한 희락으로 돌아가게할 뿐인 것이다.

2)하나님은 세상의 지극히 권세있는 사람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이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5절). "너희는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분노를 살 것이나 그를 부인하고 거절함으로 말미암아서는 너희를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분노를 사게될 것이다. 그런고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축복받은 순교자인 후퍼 감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실로 생명은 달고 죽음은 쓰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더욱 달고 영원한 죽음은 더욱 쓰다."

3)선한 그리스도인과 선한 사역자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각별하신 보호아래 있다(6,7절). 하나님은 참새와 같은 지극히 하찮은 미물조차도 인식하고 계신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릴 정도로 그것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는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그런고로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잊혀진바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라."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속한 제자들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인식하고 계신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7절). 하물며 너희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흘리는 그 땀방울임이랴!

4)"너희가 현재 그리스도를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따라 저 큰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시인하심이나 부인하심을 받게될 것이다"(8,9절). 그리스도를 지금 시인하는 자들이 저 큰 날에 얻을 것을 우리가 확신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이 그들을 위해 고난받으셨을뿐만 아니라 그들 역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당했음을 시인하실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영예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은 그들이 비록 그를 부인함으로 생명 그 자체를 구한다할지라도, 그리고 천하를 얻는다할지라도 결국은 대실패자가 될것을 확신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확신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부인하는 그들을 알지 못하시며 그들을 시인하지 않으실 것이다.

5)그들이 곧 보내심을 받게될 사명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귀중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었다(10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전파에 담대하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당시 그리스도를 배척했던 자들보다(회개의 최후 수단인 성령이 제자들에게 부은바 된 후) 이들을 배척하는 자들에게 더 한층 쓰리고 엄중한 심판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그럴경우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변명이라도 할수 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죄사함의 특권이 거부되어질 것이다. 그런 자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의한 혜택을 입지 못할 것이다."비록 처음에 그들을 통해 진리를 확신하지 못한다할지라도 그들을 기뻐하는 자는 소망이 있으나 거스려 말하는 자는 완전히 내버림을 당했다.

6)그들은 어떠한 시험에 부름을 당할지라도 이를 충분히 감당할 힘을 공급받을 것이며 명예롭게 그 시험들을 극복할 것이다(11,12절). 그리스도의 충성된 순교자는 겪어야할 고난뿐만 아니라 전해야할 증거 곧 증거를 위한 선한 고백을 가지고 있는 자이며 이를 잘해내려 힘쓰는 자이다. 따라서 그가 비록 그리스도의 증거를 위해 고난 받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대의는 손상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그의 맡은 일이라면 그는 그것을 하나님께 의탁할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있는 이 앞에 끌고가서, 너희 믿는바 교리에 대하여 심문하려 하거든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지에 대해 염려치 말라"

①너희 자신을 구하기위해 염려치 말라. 너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너희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그일을 효과적으로 이루실 것이다.

②너희 주인을 섬기는 것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이것을 의중에 두되 당황하지 말라. 지혜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명예와 그의 대의를 위하여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하며 어떻게 대답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Ⅱ. 탐심을 물리칠 것을 교훈하심 12:13-21

1. 어떤 사람의 청(13)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던 무리 중 한사람이 그리스도께 청을 하기를 그리스도께서 유업에 관한 일에 대해 그와 그 형 사이를 중재하여 주시기를 청했다.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13절). 혹자는 그의 형이 그에게 부당하게 했기에 그가 그리스도께 이의 시정을 호소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와같이 혈육간의 당연한 공평함이나 우애 따위는 생각조차도 하지않는 형제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부당함을 당한 자들에게는 찾아갈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압제받는 자들을 위해 공평과 정의로 심판하실 것이다. 또다른 자들은 이 사람이 자기 형에게 부당한 짓을 하려는 마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도우시기를 원하고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실 율법은 장자에게 두배 몫의 유산을 주도록 되어있으므로 이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율법을 변개하사 어쩔수 없이 자기 형으로 하여금 그와 유산을 똑같이 나눌수밖에 없도록 하시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소유를 얻고자하는 합법적인 소망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 이상의 것을 얻고자하는 탐심 즉 죄에 물든 욕망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 거절하심(14)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에 개입하기를 거절하신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일에 있어 입법권이나 사법권 그 어느쪽도 행사하려 하시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의 잘못을 시정하실뿐 그의 호소를 용납하려고 하시지 않으신다. 만일 그 사람이 하늘의 유업을 추구함으로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원하여 그에게 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최상의 도움을 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재산 나누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떤일을 행하시든지 그가 무슨 권리로 그 일을 행하며, 누가 그 권세를 그에게 주었는지 말씀하실수 있으셨다. 여기서 이것은 그리스도 왕국의 속성과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영적인 나라이다.

1) 그 나라는 세속의 권력에 간섭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세속의 권력에 대한 사항을 있는그대로 내버려둔다.

2) 그 나라는 세속의 권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 나라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정해진 공평의 법에 따라 정직하게 행하게 한다.

3) 그 나라는 신앙을 수단으로 한세상 이익에의 우리의 기대를 고무시키지 않는다.

4) 그 나라는 형제와의 경쟁이나 엄격하고 고자세의 권리주장을 고무시키지 않는다.

3. 필요한 주의를 주심(15-21)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기회로 그의 말씀을 듣는 무리들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신다.

(1) 주의의 내용(15절) :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즉 탐욕의 본질이 너희 마음에 몰래 스며들지 않도록 너희 마음을 경계시키고, 탐욕의 원리가 너희 마음을 지배하고 복종시키지 않도록 네 마음을 굳게 지켜라.

(2) 이 주의를 강력히 주장해 주는 논지 :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15절). 즉, 우리의 행복과 안락은 이 세상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데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혼의 생명이 재물에 의존하지 않음은 의심할바 없는 사실이다. 세상의 어떠한 것도 영혼의 본질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것은 필요를 채우지도 못하고 그것의 욕구를 충족시키지도 못한다. 뿐만 아니라 육신의 생명과 행복까지도 세상 재물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적은 재물을 가지고서도 매우 만족스럽고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자도 많기 때문이다(거룩한 사랑을 가지고 채소를 먹는 것이 기름진 것이 가득한 잔치상을 대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반면에 이 세상 재물을 굉장히 많이 소유하고서 매우 불행하게 사는 자들도 많이 있다.

(3) 비유로 이 말씀을 설명하시는데 이는 우리 모두에게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필요한 경계를 강조해 주기 위해서이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부자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고 나서 과연 그가 행복한 자이었는지는 우리 스스로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1)여기에는 부자의 재산과 소유의 넉넉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16절). 그의 재물은 대부분 땅의 소출에 있었다. 그는 매우 많은 밭을 소유했고 그의 밭은 소출이 풍성했다. 부는 부를 가져오기 마련이어서 그는 상당한 부를 소유했다.

2)여기에는 부자의 마음의 움직임이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심중에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된다(17절).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중에 무엇을 생각하든지 알고 지켜보시며 하나님 앞에 그 생각에 대한 책임을 진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①부자의 유일한 관심은 무엇이었는가. 그는 자기 밭의 소출이 굉장함을 보자 이로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보다 선한 일을 행할수 있게된 기회를 기뻐하기는커녕 '내가 곡식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라는 생각으로 고민한다. 그는 큰 혼란에 빠져 어찌할바를 모르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 어찌할꼬?" 한끼의 끼니를 어디서 때워야할지 모르는 그 지방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조차도 이보다 더 걱정스러운 말을 할수 없었을 것이다. 부자의 소유가 아무리 넉넉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 넉넉함이 그들을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고심하기 때문이다. 부자는 "내가 어찌할꼬"라는 말을 한탄하듯이 말하고 있다. 만일 당신이 "왜, 무슨 일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실로 그는 재물이 넉넉하여 그것을 쌓을 장소를 원하는것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②그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이었는가(18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절). 그러면 내가 안심하리라. 이제 그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자.

첫째, 그가 땅의 소산을 '내 곡식', '내 물건'이라고 부른 것이 어리석은 점이었다. 우리가 가지고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소용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이므로 그 소유권은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물건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한 것이다.

둘째,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쌓아두고' 그리고 나서 잘 보관해 두었다고 생각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나는 거기에다 모든 것을 쌓아놓겠다". 즉 한치도 가난한 자나 이방인, 아비없는 자나 과부를 위해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신만을 위해 저 거대한 창고안에 쌓아두려했던 그의 생각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셋째, 이러한 조건으로 그의 마음이 드높아진 것이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었다. 마치 내년에도 올해만큼의 많은 소출을, 아니 훨씬더 풍성한 수확을 걷으리라 여겨 더 큰 창고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창고는 틀림없이 내년에 소출이 너무 적음으로 인해 너무나 큰 것이 될 것이다.

넷째, 새창고를 지음으로 자신의 근심이 가벼워질줄 생각한 것이 또한 어리석었다. 왜냐하면 창고를 지음으로 오히려 그의 걱정이 늘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영적인 집을 알고있는 자들은 이 사실을 안다.

다섯째,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결정하는데 자제하지 않고 무조건 한것이 어리석은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하리라. 즉 '주의 뜻이면 내가 살리라'(약 4:13-15) 함과 같은 필연적인 단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않고 내가 하리라는 것이다. 인간의 독단적인 계획은 어리석은 것일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간이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으로 우리 자신이 어쩔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우리는 내일 일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아닌가.

③그의 즐거운 희망과 기대는 무엇이었는가.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19절). 여기에 또한 그의 어리석음이 드러나 있다.

첫째, 그가 풍요로인해 얻은 위안을 그 풍요와 관련된 계획을 이루기까지 뒤로 미룬 것이 어리석은 점이었다. 더 큰 곡간을 짓고서야 그는 마음을 놓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 전에 위안을 가질수는 없었던가?

둘째, 자기 재물이 여러해 동안 비축될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 어리석은 짓이었다. 사실은 번갯불같이 사람의 힘으로 막을수 없는 것에 의해 곡간과 그 안에 쌓아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순식간에 타서 없어질수도 있는 것이다. 수년 동안이라면 많은 변화가 있을수 있는 기간이다. 즉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할 것이다.

셋째, 세상의 풍성한 재물을 쌓아두고 이에 안심한 것이 어리석었다. 사실은 세상의 엄청난 풍요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불안을 느끼는 많은 요인을 지니고 있다. 한마리의 죽은 파리가 한 단지나 되는 값비싼 향수를 상하게도 하며, 불씨 하나로 인해 깃털 이불 전체를 버릴수도 있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질병, 친척간의 불화, 특히 양심의 가책 등으로 사람들은 불안에 빠지며 이런 자들은 항상 이 세상의 재물을 탐하며 사는 것이다.

넷째,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외엔 자신의 재물의 용도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 또한 그의 어리석은 점이었다. 그 재물로 남에게 선을 행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이 그저 육체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즐기려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마치 살기위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먹기위해 사는 것과도 같았다고 하겠다.

다섯째, 자기 영혼에게 이 모든 것을 말한 것이 무엇보다 가장 어리석은 점이었다. 만일 그가 "내 몸아, 편안히 쉬자. 너는 수년 동안 재물을 쌓느라 수고하였다"라고 했다면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창고에 아무리 곡식이 가득차있거나 또는 황금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전혀 이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가 차라리 돼지의 영혼을 지녔다면, 먹고 마시는 만족감으로 그것을 마음껏 기뻐했을 것이리라. 이 세상의 자식들이 범하는 가장 큰 어리석음이 바로 세상의 부와 감각의 향락 등으로 그들의 영혼을 분할하는 것이다.

3)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판정이 뒤따르고 있다. 부자는 스스로에게 이르되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고 하였다. 만일 하나님께서도 그와같이 말씀하셨더라면 그 사람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신다. 그가 스스로를 해쳤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20절). 즉 그에 관하여 죽음을 선고하셨다. 이 말씀은 그가 충만감에 사로잡혀 있을때, 즉 곡간을 늘릴 걱정과 계획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때 들려졌다. 이 모든 것을 마음속에 그리고 앞으로 수년간 누릴 풍요에 대한 즐거운 기대로 다시 잠들려할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 선고를 하신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자.

①하나님께서는 그를 어리석은 자로 판정하셨다. 어리석었던 나발의 이야기를 암시하시면서 "너 나발같은 자여"라고 부르신 것이다(즉 나발이 그의 이름이 되고 따라서 어리석음이 그와 함께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들 자신의 이름인 "너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실 날이, 그리고 그들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게 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

②그에게 내린 판결 : 그것은 죽음의 선고였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는 수년 동안은 마땅히 그의 것인 많은 재물을 소유했다고 생각했으나 오늘밤 그것들을 잃어야만 한다. 그는 그 재물로 인해 즐거움을 누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이제 자기도 모르는 그 어떤 자에게 이를 남기고 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고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의 선고는 강제이고 체포이다. 즉 그것은 영혼을 거두어가는 것이다. "더좋은 것을 위해 사용할수도 있었는데 너는 영혼으로 무엇을 했느냐? 네 영혼을 거두어 가리라." 선한 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기꺼이 자기 영혼을 맡기고 복종한다. 그러나 세상에 속한 자들은 강제로 거두어 가기까지 복종하지 않는다. "그들이 너희 영혼을 거두어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그 영혼의 업적을 거두실 것이다. "인간들아, 너희 영혼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그 한 일을 내보이라."

둘째, 그것은 불시의 전혀 예기치 않던 강제 집행이다. 그것은 밤에 일어난다. 선한 사람에게는 죽음의 시간이 낮시간이다. 그 시간이 그의 새아침인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밤, 아주 캄캄한 밤이다. 바로 오늘밤이라고 했다. 즉 연기되지 않는 지금 이 밤인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수년을 약속하던 바로 이 밤에 그대는 죽어야만 한다." 즉 모든 것 가운데에 바로 모든 것의 종말이 있게된 것이다.

셋째, 예비하였던 모든 것을 뒤에 두고 떠나는 것이다. 그들의 행복을 심었고, 희망을 걸었던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나야만 한다.

넷째, 알지도 못하는 자에게 남겨주어야 한다.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더이상 네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들이 네가 원하는 자들, 네 자녀나 친척들을 위하여 쓰여지게 될지 그것도 알수 없다. 그들이 슬기로운지 어리석은지 알수 없으며(전 2:18,19), 그 재물로 너를 기억하며 축복할지 오히려 저주할지, 네 가족에게 유익이 될지 해가 될지도, 그리고 그들에게 남겨준 그 재물로 선을 행할지 악을 행할지도 알수 없다." 사람들이 만일 자신이 죽은후 자기의 집이 누구의 소유가 될지를 알수 있다면 그 집을 아름답게 장식하기보다는 차라리 태워버리려 할 것이다.

다섯째, 하나님의 선고는 그의 어리석음을 밝히 드러냈다.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왜냐하면 죽고나면 그가 허둥지둥 떠나야만 했던 이 세상에서 그토록 애써가며 쌓은 재물들이 이제 그가 서둘러가야할 그 세상에서는 전혀 소중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③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통한 교훈이 있다(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것이 그와 같은 자의 길이며 종말이다. 여기서 고찰해 볼수 있는 것으로써 하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에 대한 묘사이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가운데서 자기를 위하여, 즉 부정되어야만 하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자이다. 몸이 곧 인간의 전부인양 육체를 자기의 모든 것으로 생각한 것이 그의 과오인 것이다. 또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다하면서 실제로는 육체만을 위하여 쌓는데 전념한 것이 그의 과오이다. 더나아가 이와같이 세상과 육체와 현재의 생활을 위하여 쌓아둔 것들을 자기의 보화로 여긴 것이 그의 과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과오는 그가 전혀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치 못한 자'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부요치 못한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재물을 탐하는 자들은 그들의 영혼을 부요케하고,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고 영원한 세계에 대하여 부요케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 속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불행이 '이와 같으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자의 종말이 어떻게 되는지를 여기서 말씀하셨다. 영혼이나 영원한 세계보다도 단지 육체와 이 세상에서의 시간만을 염려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Ⅲ. 하나님께만 모든 관심을 둘 것을 권고하심 12:22-40

그러므로 즉 탐욕으로 인해 파멸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즉 나의 제자들아 이것을 주의하라. 세상의 사람뿐 아니라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라'(딤전 6:11).

(1)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목숨을 위해 필요한 것들로 인한 근심으로 그들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염려하지 말라(22절). 앞서 행한 비유를 통하여 그는 우리에게 부자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탐욕의 형상인 육적인 만족에 대하여 경고하셨다. 그는 여기서 또 이 세상 제물이라고는 거의 가진바 없는 제자들이 빠지기 쉬운 탐욕의 또다른 형상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그것은 필요한 것들에 대해 걱정하는 근심이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마태복음 6:25절이하에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셨던 경계이다. 본문의 논지는 그와 매우 유사하다.

1)우리를 위하여 더 큰일도 하셨던 하나님께서 보다 작은일 또한 당연히 담당하여 주실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목숨과 몸을 주신고로 우리는 그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과 그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을 기꺼이 그에게 의지할수 있다.

2)보잘것없는 피조물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 또한 당연히 돌보아주실 것이다. 먹을 것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까마귀조차 기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4절). 까마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되' 하나님께서 기르신다. 이제 너희는 새보다, 까마귀보다 얼마나 더 귀한가 생각해 보라. 의복을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라. 그는 들의 백합화도 입히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27,28절).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나 꽃이 되매 참으로 아름답게 입히신다.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28절). 그러므로 믿음이 적은 자처럼 되지않도록 하자. 우리의 무절제한 근심은 우리의 믿음이 약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넉넉하신 하나님께 대한 강하고 실질적인 믿음은 이들 마음의 안정을 깨뜨리는 불안의 장벽들을 하나님을 통해 무너뜨릴수 있을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3)우리의 염려는 쓸모없고, 헛되고 그리고 의미없는 하찮은 것이다. 염려함으로 우리의 소망하는 것을 얻을수 없기에 오히려 우리 마음의 평정을 잃지않도록 해야한다(25절). 또 너희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수 있느냐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즉 너희 키도 바꿀 능력이 네게 없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그것들은 너희 능력 밖의 것이 아니냐? 우리의 키뿐만 아니라 우리의 처지에 대해서도 있는그대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지혜이다. 후회나 조바심, 걱정과 근심으로 그것을 변경시킬수는 없기 때문이다.

4)아무리 필수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 재물에의 무절제한 열망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해롭다(29,30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 즉 번거로운 걱정으로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양식을 그렇게 구하지 말고 다만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여야 한다.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불려다니는 의심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된다. "고요하고 흔들리지 않게 네 마음을 굳게 지키라. 마음을 졸이는 초조함으로 살지 말라. 괴로운때가 닥칠지라도 희망과 절망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들은 불안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 이유는

①그렇게 하면 이 세상의 자녀들과 같아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30절). 그들은 오직 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고 다른 세상에는 눈도 돌리지 않으며, 먹고 마시는 것외에는 전혀 구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너희에게 마땅한 바가 아니다. 무절제한 근심이 우리를 덮칠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과연 이방인들과 같이 되어 그들이 구하는 것에 함께 참여해서야 되겠는가?"

②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먹고살 필요한 것들에 대한 근심으로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줄을 아시느니라. 그리고 영광중에 있는 그의 부요하신 은혜에 따라서 너희 필요한 것을 채우시리라. 왜냐하면 그는 너희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너희가 좋은 것으로 구하지 않음에 근심하시리라.

③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염두에 두고 추구해야할 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제자들아,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라.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자들이다. 영혼을 지닌 자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라. 그곳에서만이 쉼을 얻을수 있으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부지런히 그리고 신중하게 너희 영혼의 문제를 생각하라. 그리고나서 너희의 다른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의뢰하라.

④하나님의 제자들에게는 기대하고 소망할 더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32절). 나쁜 것이 닥쳐올것 같은 염려로 두려워질때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피할수 있을까라는 근심 걱정에 빠진다. 결국 그 모든 것이 우리 인간의 상상에 불과한 염려였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걱정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신 것이야말로 너희 아버지의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는 이와같은 위안의 말씀이 없었다. 이 사실을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무리는 적은 무리이다. 이 세상의 황야와 비교해 볼때 교회는 포도원이며 동산이며 작은 정원이다.

둘째, 수적으로 아주 많은 그의 적에 비해 비록 적은 무리라 할지라도 그 적은 무리가 두려워하지 않게되는 것이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뜻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가 위대하고 선하신 목자의 보호와 인도아래 안전히 거함을 보라."

셋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고자 한나라를 예비해 놓으셨다(벧전 5:4).

넷째, 그 나라는 아버지의 기뻐하심에 따라 주어진다. 너희 아버지께서…기뻐하시느니라. 그것은 빚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주시는 것이다.

다섯째, 그 나라를 믿는 소망과 기대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적은 무리가 가지는 두려움을 침묵하게 하고 막아준다. "아무걱정도 말아라. 근심이 생길지라도 그 근심이 너희와 그 나라사이에 서지 못하리라."(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떼어놓을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 떠는 그것은 악이 아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그들의 보화를 쌓음으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일을 할것을 가르치셨다.(33,34절).

1)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33절). 즉 "진짜로 너희에게 꼭 있어야할 것으로 구제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는 여분의 것을 팔아 가난한 이에게 주라. 그리스도를 섬기는데 방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네 가진 것을 팔아라. 돈을 쌓아두기 위해서나 이자로 그것을 더하기 위해서 소유를 파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 팔아라. 옳은 방법으로 구제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보장으로 최선의 저축을 하는 것이다."

2)너희의 마음을 저 세상에 두라.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은혜는 영혼과 같이 짜여져 있으므로 저 세상까지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선한 행위도 우리를 부요하게할 하늘나라의 보화이리라.

①그것은 소멸해 없어지지 아니할 보화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사용할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닥이 드러날 염려가 없다.

②그것은 도둑맞을 위험이 없는 보화이다. 하늘에 쌓아지는 것은 적들이 어찌할수 없다.

③그것은 쌓아둠으로 상할 것이 아니고, 더욱이 쓴다고 없어질 것이 아닌 보화이다. 좀도 그것을 해하지 못한다. 비록 이곳에 살지만 우리의 마음을 그곳에 둠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고있는 것이다(34절). 그러나 만일 너희 마음이 세상과 세상의 재물에 있다면 세상에서의 재물과 지위로 마음이 두려워지며 또한 이 세상을 떠날때 너희는 파멸케될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해 깨어있을 것을, 즉 준비하고 있을 것을 가르치신다(35절 이하).

1)그리스도는 우리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의 종이다. 단순히 일하는 종일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기다리는 종이다. 우리는 마치 아무리 밤이 늦었다할지라도 자지않고 주인을 맞기위해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2)그리스도는 비록 지금은 우리를 떠나셨으나 다시 돌아오실 우리의 주인이시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지금 자기의 주인이 영광중에 나타나시기를 고대하며 기대속에 있다. 그는 오셔서 자기 종들을 살필 것이므로 그들은 그날에 나타난바에 따라 그와 함께 머물거나 혹은 문밖으로 내쫓김을 당할 것이다.

3)우리의 주인이 돌아오시는 그 시간은 확실하지 않다. 혹 자정 바로 전인 이경이나 혹 자정 바로후인 삼경일 것이다(38절). 너희가 '생각지 않은때에 인자가 오리라'함과 같다(40절). 이 말씀은 그가 언제오실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력한 증거이다. 즉 그것은 그들이 생각지않은 때일수밖에 없다.

4)그가 종들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바는 그가 언제 오더라도 곧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것이다(36절). 즉 주인은 자기 종들이 그들의 긴옷을 잘라(사실 거추장스럽게 늘어져 그들을 방해하므로) 띠를 띠고, 주인을 집으로 맞아들일수 있도록 그들의 등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기대한다.

5)주님이 오셨을때 준비를 갖추고 있던 종들은 행복한 것이다(37절).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그가 처음 두드릴때 이를 알고 맞이하는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그리고 다시 38절에서도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제 주인이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신부가 신랑을 식탁에서 기다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나 주인이 종들의 시중을 드는 것은 인간사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일찍이 그의 겸손을 보이사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듯이(요 13:4,5) 띠를 띠고 그들을 수종하리라.

6)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언제오실지 정확한 시간을 모른다 할지라도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가 아무리 부주의한 자라 할지라도 깨어있다가 물리칠 것이다(39절). 그러나 우리는 언제 경고의 시간이 우리에게 임할지 알지 못하는고로 긴장을 풀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말씀은 이 큰일에 대해 부주의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임할 불행을 암시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님의 다시 오실 날이 밤중에 도적처럼 임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자기의 집에 대해 이렇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을 위해 이처럼 하는 것이 또한 현명하지 않은가. 집주인이 도적이 어느때에 이를줄 알고 대비하듯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40절).'

 

Ⅳ. 종들과의 회계와 세상 분쟁이 되심 12:41-53

1. 베드로와 질문(41)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까. 베드로는 자주 그래왔듯이 여기서도 제자들의 대변인이었다. 이렇게 자진하여 의문을 밝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스스로 교만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금 베드로는 그리스도께 그가 직접하신 말씀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다. "주여, 이 말씀은 우리를 의미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사람을 의미하신 것입니까"하고 베드로는 질문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한 답을 주셨다(막 13: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그런데 여기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선 제자들이 그 말씀에 깊게 관계하기를 지시하시려는것 같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바로 제게 하심이니이까? 내 심중에 말씀하소서."

2.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심(42-48)

이 질문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나머지 제자들에게 대답하셨다. 뒤따르는 이 말씀은 특히 그리스도의 집에서 '청지기'인 사역자들에게 적용되어 진다.

(1) '청지기'로서 그들의 의무와 그들에게 맡겨진 임무는 무엇인가(42절). 그들은 집주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님의 가속들을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사역자들의 그 권위는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그들의 일은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에게 적합한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이며 저마다의 분수에 맞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 자신들이 지혜있고 진실함을 증명해보여야 한다. 즉 그들의 주인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진실하고 지혜로와야하는 것이다. 사역자는 이 일에 숙련되어야 하며 진실해야할 것이다.

(2) 그들이 진실하고 지혜롭다면 그들의 행복은 무엇인가.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43절).

1) 그 종은 게으르지 않고 행하는 종이다.

2) 그 종은 공중 설교와 개별적인 적용에 의해 마땅히 해야할 바대로 그렇게 행하는 종이다.

3) 그 종은 주님이 오셨을때에 그렇게 행하고 있음을 보여주게 된다. 이제 그의 행복은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 충성한 종이 승진하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보다 크고 보다 높은 자리로 승진하게될 것이다.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44절). 주님의 은혜로 충성한 사역자들은 마지막 주님의 날에 그들의 충성의 대가로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을 것이다.

(3) 그들이 악하고 신실하지 못했을때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벌은 무엇인가(45,46절).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에서 이 모든 것을 살펴보았으므로 여기서는 다음 몇가지 사실만 지적해 보고자 한다.

1)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오리라(45절). 그리스도의 참으심은 매우 종종 더디오시는 것으로 오해되어 그의 백성들에게는 낙담이 되고 그의 적들에게는 힘을 더해주는 것이 되곤 한다.

2)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은 보통 방심과 환락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들 자신의 죄나 이웃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없이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한다.'

3) 모든 악한 자들에게 임할 죽음과 심판은 참으로 무시무시할 것이다. 악한 사역자에게는 특히 더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불시에 임할 것이다. 생각지 않은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46절).

(4) 자기의 할일을 알고도 이를 행하지 않은 죄와 이에 따르는 벌은 얼마나 심할 것인가(47,48절).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47절). 즉 보다 지독한 형벌을 받게될 것이고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즉 그의 형벌은 앞의 종에 비해 경감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무지로 인해 지은 죄와 의도적인 죄를 구분해서 벌하는 율법(민 15:29,30)을 암시하는 듯하다.

1) 할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면 죄가 경감된다. 그러나 이들도 즉 주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자로 맞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잘알도록 노력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다만 적게 맞을뿐인 것이다. 몰랐다는 것은 어느 정도 변명은 되나 전체적으로 죄를 탕감받을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무지함으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였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지를 이유로 그들을 변호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2) 할일이 무엇인지 알고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죄를 더 무겁게 만든다. 주인의 뜻을 안 종은 많이 맞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을 더 무섭게 심판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할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앎으로 인해 죄에 대해 극단의 고의성과 업신여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점에서 다음의 말씀이 부가되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무릇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할 것이니라(48절).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정신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 즉 보다많은 지식과 학식을 지닌 자, 그리고 보다 성경 말씀에 친숙하고 이와 대화하는 자들에게 더많이 주어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의 책임 또한 클 것이다.

3. 앞으로 맞게될 고난을 말씀하심(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49절). 혹자는 이 말씀을 복음 전파, 성령 강림, 거룩한 불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이미 그 불은 붙은 것이다. 그러나 다음에 연결되는 말씀으로 보아 이 불은 오히려 박해의 불로 이해되어지는 것이 좋을듯하다. 이 불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동자, 박해자들의 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는 그 불이 붙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다. 박해받는 이들의 시련을 통해 그들을 단련시키는 불로써 허락하실 뿐인 것이다.

(1) 그리스도 자신도 많은 수난을 당해야만 한다. 이미 붙은 이 불속으로 통과해야만 한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50절). 고난은 불과 물로 비유되어 진다(시 66:12).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고난을 모두 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세례라 칭하시는데(마 20:22) 이는 이스라엘이 바다속에서 세례받았듯이 그 자신도 고난에 뿌림을 당하거나 적셔지고 또한 고난속에 잠겨져야 했기 때문이다(고전 10:2).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예견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는 받게될 고난을 이와같이 부름으로 그 고난을 완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홍수가 아니라 세례인 것이다. "나는 결코 박해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속에 살짝 잠기려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받게될 고난을 이와같이 부름으로 고난을 성스럽게 만들고 있다. 세례는 성스러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고난을 향한 그리스도의 발걸음이 어떠한가 보라.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그는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어야할때를, 그리하여 자신의 고난으로 이루어진 영광스러운 자취를 보게될때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가 참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영혼의 산고였다. 이처럼 그의 마음은 인간의 구원과 구속을 바라고 있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 또한 이러한 고난을 감당해야할 것을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51절).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러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넌즈시 비춰주고 있다. 즉, 복음이 전세계적으로 환영을 받게되고, 온 민족이 너나없이 이구동성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적어도 그들에게 화평을 주실 것이라는 상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기대는 어긋날 것이며 결과는 정반대로 판명될 것이니 부질없는 기대로 기뻐하지 마라. 너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1)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일 것이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주고 거룩한 사랑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방인들의 세계에서는 강력한 통치자가 정국을 지배하면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게 된다. 각 파의 철학자들도,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들도 모두 매우 잘 화합한다. 그러나 복음이 전파되고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권세를 떠나 하나님께로 향함에 따라 소동이 일어났다. 즉 어떤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자신을 구별하게 되었고 다른이들은 그렇게 되는 것에 대해 분노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에도 분쟁이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상호 관용을 배우고 행하게 하기위하여 이를 허용하셨다.

2)이러한 분쟁은 개인의 가정에까지 미칠 것이다.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분쟁하리라(53절). 한가정 내에서 한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다른 사람은 이를 거부하였을때 당연히 이러한 일이 일어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열심으로 설득하고 사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앙속에 계속 머무르는 사람들은 믿음과 순종으로 자신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을 책망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신앙의 사람들로 인해 자극되어 이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다. 심지어 어미와 딸들까지도 종교로 인해 갈라설 것이며 믿지않는 자들은 아무리 친하고 사랑하는 자라 할지라도 믿는 자를 박해자의 손에 기꺼이 넘겨주려할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박해의 불길이 야기되는 것을 본다. 즉 죄를 책망하는 말씀이 들려지는 곳마다 박해가 일어났으며 복음의 길에는 늘 적지않은 소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된 자들은 자신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평화를 약속할수가 없는 것이다.

 

Ⅴ. 때를 분변할 것을 가르치심 12:54-59

그리스도께서는 앞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필요한 교훈을 말씀하신후 이제 무리를 향하여 필요한 교훈을 말씀하신다(54절). 간단히말해 그리스도께서 무리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육적인 삶에 지혜롭듯이 그들의 영적인 삶에도 지혜로울 것을 말씀하셨다.

(1) 무리들은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길을 분별하고 이에따라 준비해야 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54-57절). 그들은 날씨에는 민감한 자들이어서 바람이나 구름을 보고서도 소나기가 오리라는 것을, 혹은 심히 더우리라는 것을 미리 알수 있었다(54,55절). 이렇게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것을 경고해 주신다. 그리고 자연의 징후를 예견하는 인간의 기술은 날로 발달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되어진 것을 보고서 앞으로 되어질 것을 추측할수 있는 것이다. 경험의 유익함을 보라. 즉 눈여겨 봄으로써 예견할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고 배우는 자는 현명하다.

1)경험으로 미리 예견할수 있는 사실을 자연의 기후를 예로들어 설명하고 계신다.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아마도 그것이 처음에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왕상 18:44)이라면 소나기가 오리라고 말할 것이며 또한 과연 그러할 것이다. 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55절). 그러나 자연 그 자체는 그러한 틀에 매여있는 것이 아니므로 때때로 우리의 예측은 어긋난다.

2)이 예로부터 당연히 추론되어져야할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신다(56절). "외식하는 자여 스스로 지혜있는 척하나 실지로는 그러하지 못하다. 어찌 이 시대는 분별치 못하느냐. 즉 어찌하여 너희는 지금 바로 그 기회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느냐? 지금 주어진 이 기회는 너희가 결코 열망하지 않았음에도 너희 앞에 주어진, 그리고 결코 다시는 주어지지 않을 그 기회인 것이다. 즉 지금이야말로 받아들여야할 때이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그때는 없을 것이다. 인간이 자기의 때를 알지 못함이 인간의 비극이며 어리석음이다.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함'(눅 19:44)이 그 세대 사람들의 멸망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57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이 옳은가 분별할수 있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한다면 곧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이 옳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따르는 본질적으로 더 공평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2) 무리들은 너무 늦기전에 아직 시간이 있을때에 하나님과 '화해하기'를 서둘러야 한다(58,59절). 이와는 다른 경우로 마태복음 5:25,26절에서 같은 말씀을 하시고 계신다.

1)세상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대적할수 없는 자와는 화해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겨진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때에(58절). 만일 네가 감옥에 던지울 위험에 처해있음을 알면 너희 스스로 서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이다.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현명한 자들은 자기들의 분쟁을 끝까지 몰고가지 않으며 적절한 때에 그 분쟁을 화해시킨다.

2)우리 영혼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와같이 처리해야 한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우리의 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정의와 힘을 모두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모든 심판의 권한을 위임받으신 그리스도는 재판관이 되신 분으로 우리는 그 앞에 속히 나아가게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재판은 분명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되어 재판장은 우리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그가 우리를 지옥이라는 옥에 던져넣어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을때까지'가두어 둘 것이다. 그러나 영원히 갚지 못하리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짧았으나 그 고난의 대가는 인간들의 죄를 속죄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이것을 돌이켜볼때 우리는 적대자로서의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손안으로 들어가기에 힘써야 하며, 이것은 길에서 해야하는 지금 눈앞에 놓여진 가장 긴급한 일이다. 살아있는 동안이 바로 '길에서'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써 지금까지 행해온 싸움을 더 늦기전에 종식시켜야할 그때인 것이다. 이와같은 은혜에 넘치는 선물을 주시려 뻗치신 그리스도의 손을 붙잡자. 그때 우리에게 평화가 있게될 것이다.

 

# 해설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다 ( 12 )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고 제자들에게 준비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미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나라가 곧 임하리라는 확신과 기대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도 이러한 기다림과 확신의 연장선상에서 매일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임박한 예수의 재림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며 기쁨과 희망에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

1) 외식을 주의하라

바라새인들의 외식은 그들이 마치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그들의 감추인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온 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속이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낱낱이 드러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바르게 살려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사랑과 칭찬을 듣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솔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람직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a.예수를 시험한 자들(마22:18)

b.사람에게 보이려고 함(마6:5)

2)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며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어서 우리를 주관하려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하시면 우리의 일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도 자기의 뜻대로 이끌고 가십니다.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에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a.생명의 구속(시49:8)

b.시온의 아들들(애4:2)

3) 나를 시인하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시인하면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속에서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어도 당황하지 말것은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때에 따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약속은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가 함께하십니다.

a.구원을 얻음(롬10:9)

b.하나님께 영광을 돌림(빌2:11).

 

2.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라

1)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이 거둔 많은 재물로 인해서 행복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시고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취하시면 부자의 노력은 헛것이 됩니다. 또한 그의 생명을 취하시면 그의 일한 것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의뢰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a.재물을 사랑함(딤전6:9)

b.방자하여 스스로 믿음(잠14:16)

2)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사람들은 일상의 생활에서 겪게되는 어려움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무엇을 먹으며 무엇을 입어야 하는가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을 내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밀히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고 인도하시는 것에 충분히 발휘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러한 것에도 보장을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고 그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으로 풍족히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풍성함이 진정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a.하나님 나라를 구함(마6:33)

b.전파함(행8:12)

3)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

예수께서 그의 나라와 함께 다시 임하시는 것은 도적이 몰래 임하는 것같이 예상하지 못한때에 임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라를 구하고 바라는 사람들은 그의 나라가 임하는 순간까지 항상 깨어있어서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간마다 반응하고 순종하는 것이 준비된 사람의 자세입니다. 감각이 살아있고 반응할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a.복음 전도(롬1:15)

b.혼인 잔치(마22:8).

 

3. 마지막에 대한 말씀

1) 충성된 종과 불충한 종

충성된 종은 주인이 돌아옴을 생각하여 항상 성실하게 일을 감당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착실히 수행합니다. 그러나 불충한 종은 주인이 돌아옴을 생각지도 않고 자기의 원하는대로 임의로 행합니다. 이들은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누가 현명한지를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돌아오면 이들의 차이는 현격하게 벌어집니다. 충성된 종에게는 주인의 사랑과 상급이 주어지고 불충한 종에게는 주인의 진노와 형벌이 주어집니다. 우리도 이와같은 상황에 있습니다. 주께서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신후에 우리가 어떠한 판단을 받을지에 대해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a.일반적인 복종(롬13:1-2)

b.맹세에 대한 충성(삼하21:7)

2) 불을 던지러 왔노니

예수께서 전하신 복음은 그것을 받는 사람들가운데 심각한 구분을 불러옵니다.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그 결말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대립과 분쟁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 분쟁과 불이 되어 두세력으로 크게 구분할 것입니다. 어디에 서느냐가 중요합니다.

a.분쟁케하려고 오심(마10:34-35)

b.하나님의 뜻을 행하심(히10:7)

3) 시대를 분별하라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구원과 멸망의 복음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일이 일어날 것이지만, 복음을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멸망과 진노의 불이 임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상의 변화는 짐작하면서도 시대의 징조는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 자신을 멸망케 만듭니다. 시대를 분별할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알게될 것입니다.

a.도적같이 오심(벧후3:10)

b.속히 오심(계22:7)

 

결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사는 주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 이끌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구원할수 있는 길을 선택해야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 나아오며 의뢰하는 것이 자신을 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핵심

12:1-21

하나님만이 만물의 생사화복을 주장하는 분이시므로, 어떤 핍박에도 굴복하지 말고 믿음을 지키며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는 교훈이다.

탐심(12:15)

헬라어 ‘플레오넥시아’는 ‘플레오’(더많은)와 ‘넥시아’(소유하다)의 합성어이다. 자신의 현상태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많은 것을 가지려고 끊임없이 욕심부리는 것이 바로 ‘탐심’이다. 사람들이 물질과 명예, 쾌락에 탐닉하는 이유는 인생의 참된 가치가 일시적인 것에 있지않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데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탐심을 우상 숭배와 동일시하며(골 3:5), 일만 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딤전 6:10). 탐심을 물리치지 않고선 영적 축복과 신령한 삶을 추구할수 없다.

청지기(12:42)

청지기(헬, 오이코노모스)는 주인의 집과 재산, 종들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이다. 청지기는 일반인 중에서 고용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종들가운데서 가장 오래되고, 성실하며, 믿을만한 자가 발탁되었다. 아브라함 집의 엘리에셀(창 15:2)과 보디발의 청지기가 되었던 요셉(창 39:4-6)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런 청지기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과 지혜였다.

 

# 묵상

바리새인들의 누룩 ( 12:1 )

바리새인의 의식을 가리킵니다. 의식이란 겉으로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본심은 감춘채 겉으로 다르게 보이도록 꾸미지만 감추인 것은 결국 드러나 만민앞에 공개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십니다. 즉 죽은후에 지옥에 던져넣는 권세를 지닌 분, 눈에 보이는 육체뿐만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능히 마음대로 하시는 분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성도 ( 12:6-9 )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속속들이 아시고 보호하심으로 가능하고 또 확신할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참새조차도 잊지않으시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십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임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람들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사적이고 은밀한 것이 아니라 공개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 모독죄 ( 12:10 )

그리스도인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성령 모독이란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므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을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사하심을 받을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비유 ( 12:16-21 )

이 비유를 통해서 탐심은 끝없는 물욕을 일으키고(17, 18절), 물질은 영혼을 풍요롭게 하지 못함을 알수 있습니다(19절). 또한 인생은 잠시뿐으로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취하실때가 반드시 오며(20절), 물질의 풍요가 하나님의 복주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할줄 모르는 자는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21절).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구한다는 것은 결핍되어 있는 것을 얻기위해 꾸준히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결핍 사항은 영원한 생명이요, 영원한 진리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께서 능히 채워주십니다.

의식주 문제 ( 12:22-32 )

우리의 생활에서 의식주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주님은 의식주 문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염려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노력할때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동물처럼 먹을 것만 추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셨고, 더나아가서는 영혼을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는 육신보다 먼저 영혼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신 의식주 문제는 영원한 삶의 준비와 연습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썩지않는 보물 ( 12:33 )

하늘에 쌓아둔 보물은 영원히 썩지않는 보물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방법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종의 자세와 지혜로운 청지기 ( 12:35-48 )

하나님의 종은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므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와같이 주인을 수종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종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며, 이러한 삶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의 삶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청지기는 주인의 뜻을 헤아려 그 뜻대로 행합니다. 청지기는 주인대신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청지기는 주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늘 생각하며 신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 ( 12:49-53 )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습니다. 불이란 심판의 불이요, 성령의 불입니다. 또한 진리의 횃불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것은 모두 태우고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기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이고 가시적인 화평을 주려고 죄악이 관영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속으로 곪아터지고 불의한 구조 자체를 고치기위해 오셨습니다. 이는 진리의 빛으로 세상에 분쟁을 일으키신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화평은 거짓 화평이요, 많은 사람의 희생을 토대로한 형식적인 안정일 뿐이므로 이를 고치기 위해서는 영적인 투쟁이 필요합니다.

질책당한 외식자들 ( 12:54-57 )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천기, 즉 기상은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는 분별치 못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는 시대의 징조를 보고 미래의 일들을 예견해야 하는 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타락과 배도로 인하여 곧 닥쳐올 멸망을 깨닫지 못한채 종교적 형식주의에 빠져있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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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기도에 대한 가르침 11:1-13

기도는 자연 종교의 가장 큰 원칙 중의 하나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돕고 의무에 복종케하며, 기도속에서 가르침을 받고 그로써 믿음의 진보를 가지도록 북돋아주는 것이다.

(1)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볼수 있다(1절). 누가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보다 자주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셨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즉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께서는 세례받으실때(3:21) 기도하셨고,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으며(5:16),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다(6:12). 또 예수께서는 따로 기도하셨고(9:18),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기도하실때에' 변화하셨다(9:28,29). 본문에서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2) 제자들은 예수께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기도하고 계실때 그들은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요청하였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때 그와같이 여쭈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때 제자 중 하나가 '주여…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늘 가르치시는 분이셨으나 특별히 여기서는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계신다.

1)제자들의 요청은 이러했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1절). 제자들이 그리스도께 기도를 가르쳐달라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다운 태도라고 할수 있는 것이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는 그것 자체로는 하나의 좋은 기도이며 필요한 기도이다. 왜냐하면 기도를 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리스도만이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실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꼭 필요한 기도를 할수 있도록 기도할수 있는 입과 지혜를 주옵소서. 즉 우리가 말해야할 것을 가르쳐 주옵소서."

2)그들은 또한 이렇게 탄원하였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가르쳐 주옵소서. "요한은 이러한 필요한 의무를 그의 제자들에게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처럼 배우고 싶습니다." 유대인의 기도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송영이었지만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간구와 청원의 기도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요청은 이런 것이라고 하겠다. "주여, 이제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찬양과 송영에 덧붙여야할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그리스도는 완전히 간구로 된 기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기도에는 송영과 아멘이 생략되어 있었다.

(3) 그리스도는 전에 산상설교에서 가르쳤던 것과 똑같은 기도를 가르쳤다(마 6:9-13). 그들은 그들이 요구했던 모든 것이 이 몇마디 말씀에 나타나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며, 자신의 말로 부연시키거나 더 상세하게 기도했을 것이다.

1)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몇가지 차이가 있다. 그 하나가 네번째 기원이다. 마태복음에는 네번째 기원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있지만, 본문에는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있다. 즉 "우리에게 우리 몸에 필요한 양식을 날마다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필요한 양식은 오늘, 내일 필요한 양식은 내일 있기를 위해서 간구해야 하겠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의지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날 그날의 필요에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므로 그날 그날 해야할 의무에 새롭게 복종할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기원에도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는 그것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있고, 본문에는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용서에 필요한 자격을 말하는 것으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자격을 주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또 한가지 덧붙여진 것이 있다. 즉 일반적으로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할뿐만 아니라 특별히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끝부분에 송영과 아멘이 생략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이 부분을 비워두어서 기독교의 원리에 따리 성부 성자 성령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채우도록 했던것 같다.

2)그러나 두 기도문은 본질적으로 같다. 본문에는 몇가지 일반적인 교훈들이 들어있다.

①기도할때 우리는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나아가듯이 우리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②자신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그리고 그 기도속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원리인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철저히 계속해서 그 원리에 맞게 이러한 기도를 드릴수 있어야 한다.

③경건한 습성을 확고히 하기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수 있어야 한다.

④기도할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에 권세를 돌림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⑤보이지않는 세계의 원리와 실제는 매우 본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의 원리와 실제가 그 본래적인 것에 일치하기를 기대해야 한다.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라는 말은 기도문의 처음 세가지 간구에 대한 언급이다.

⑥믿음으로 진실되게 하나님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다른 모든 일들이 더해질 것을 겸허하게 소망하며 그것들을 위해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첫번째 소원과 관심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그의 나라가 임하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담대히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야할 것이다.

⑦현세적인 축복을 위해 기도할때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절제하며 우리의 능력에 맞게 한정시킬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날마다'라는 표현은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과 아주 같은 것이다.

⑧죄는 우리가 매일 지고있는 빚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해야한다. 우리 죄는 날마다 쌓인다. 그런데 자비의 기적으로 우리는 날마다 은혜의 보좌앞에 나아가 매일 매일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기도할 용기를 갖게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흔번씩 일곱번보다 더많이 용서해 주신다.

⑨만일 우리가 언제고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에게 해를 입힌 자들을 진실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해주시지 않을 것이다.

⑩우리는 죄에 대한 유혹을 죄로 인해서 파멸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는 유혹을 받아 죄에 빠지고, 그 죄로 말미암아 멸망에 이르지않도록 열심히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⑪우리는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을 받기위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악에 빠지지않고 악을 가져오는 사단의 유혹을 받지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4) 그리스도께서는 다음 내용을 보이심으로 기도할때 강청할 것과 열심과 끈기를 가질 것을 역설하신다.

1)강청은 사람들을 대할때 효과를 가져다 준다(5-8절). 어떤사람이 때아닌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자기 자신이 아니라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 이웃에 떡 한두덩이를 빌리러 갔다고 생각해 보자. 그 이웃은 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려고 하지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문을 두드려 잠을 깨움으로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많은 사과를 했을것이나 그의 이웃은 그 사람의 청을 거절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며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그러면 그 이웃은 그 사람에게 떡을 주어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8절). 사람들은 강청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들어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청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우리는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①우리는 어떤사람이 자기를 사랑하고 친절히 대해주는 이웃이나 친구의 집에 가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기위해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②우리는 양식을 위해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양식은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③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떡을 구하러 갔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갈때, 선행을 베풀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사고 구하는것 이상의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④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부주의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서 곤란을 당하는 것이라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욱더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갈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친구가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떡을 구하러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배려해주신 것을 기꺼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수 있어야 한다. 강청함으로써 화가 난 사람을 이처럼 설복시킬수 있다면, 무한히 관대하시며 강청함에 화내시지 않고 받아주시는 하나님께 강청할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다하더라도 쉬지않고 기도한다면 합당한때에 응답해 주실 것이다.

2)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선하심뿐 아니라 그의 말씀도 가지고 있다(9,10절).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9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구할뿐만 아니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 것에 대해 노력할수 있어야 한다. 구하고 찾을때는 계속해서 강청하고 똑같은 문을 두드려야 마침내 응답을 듣게될 것이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10절). 아무리 미천한 자라도 믿음으로 구하면 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구하라고 지시하신 것들 즉, 그의 이름이 거룩하여지고 나라가 임하며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하나님께 구하는 일에 있어 우리는 강청해야 한다.

(5)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생각하게 하심으로 교훈과 용기를 주신다.

1)세상에서의 아버지의 인자함을 상기시킴 :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는 너희 자녀에게 그렇게 몰인정할수 없음을 잘알고 있다"(11,12절).

2)이 말씀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축복에 적용시킴(13절)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복음에도 그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①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해야할 것에 대해 가르쳐 주신다. 우리가 성령을 구해야하는 까닭은 성령께서 기도를 잘하게 하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하게 될 모든 선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②그리스도는 이 기도가 곧 이루어질 것을 소망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신다. 너희 천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그는 그의 권세로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좋은 것 일체를 가지고 계시며 그것들은 성령에 싸여있다. 그러나 그것이 약속된 전부는 아니다. 이 세상의 부모들이 악할지라도 친절하며 빈약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줄뿐만 아니라 식별하여 가장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

 

Ⅱ. 예수와 바알세불 11:14-26

본문은 마태복음 12:22절이하에도 나온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특별히 사단을 다스리는 권세를 증명해 보임으로써 신적인 사명에 대한 일반적인 증거를 보여주고 계신다. 본문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사역의 성취를 위한 열심을 보여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벙어리 귀신을 내어쫓으셨다. 마태복음에는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귀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쫓겨나와 그 벙어리는 즉시 말하게 되었다.

(1)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적을 보고 감동받았다. 무리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였다.

(2) 또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을 보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냈다고 하였다(15절). 이들은 이러한 생각을 확증하고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능력의 증거에 맞서기위해서 그리스도에게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보여주어 그리스도의 말씀을 확신시켜 달라고 도전하였다. 그들은 하늘로써 오는 표적이라면 공중의 권세잡은 자와 손을 잡아 귀신을 쫓아내는 것처럼 행할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지독한 불신자들은 어떤일을 꾸미든지 절대로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트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답변하신다.

1)사단처럼 교묘한 왕이 자신을 파멸시킬 일을 하리라고는 결코 생각할수 없다(17,18절). 예수께서는 그들이 흉증을 감추려고 생각할때에도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이러한 비난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알수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 분쟁하는 자가 결코 서지 못한다는 것은 공인된 격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나 가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떤 자든지 스스로 분쟁한다면 자신의 파멸을 재촉하는 것이 될 것이다."

2)그들이 그리스도가 사단과 협약을 맺었다고 비난한 것은 매우 편파적이고 심술궂은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면 그들은 박수갈채를 보내고 찬미했을 것이다(19절).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너희 동족인 유대인이나 너희의 제자인 바리새인 중 어떤 자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당한 것같이 가증하게 사단과 용납하면서 책망하는 자를 정죄한다는 것은 크나큰 위선이다.

3)이러한 기적을 확신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원수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나라를 밀쳐냈기 때문이다(20절).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따라서 만일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면 멸망할 것이다." 본문의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가 마태복음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라고 되어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광대하신 팔을 다 뻗지않으셔도 된다. 원하신다면 울부짖는 사자도 나방처럼 손가락 하나로 죽이실수 있다.

4)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신 것은 귀신과 그들의 힘을 파괴하는 것이었다(21,22절). 그리스도께서 귀신을 내어쫓으셨을때 그는 귀신보다 강했으며, 권능으로 그 일을 하실수 있었으므로 사단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해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서나 개별적인 인간의 마음에서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지배하시고 이기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볼수가 있다.

①회개하지 않는 죄인의 비참한 상태 :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야할 그의 마음이 귀신의 소굴이 되어있다. 그리고 영혼의 모든 힘과 능력은 귀신의 재물이 되어버렸다. 거룩한 심령은 거룩한 것의 거처이지만 성화되지 않은 심령은 귀신의 소굴이다. 강하게 무장된 귀신은 이 소굴을 지키며 그리스도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할수 있는 무장을 다한다. 마귀는 온갖 그릇된 생각으로 인간의 마음을 완고하게하여 진리와 거룩함을 대적하게 하는데 이 그릇된 생각들은 곧 마귀가 자기의 소굴을 지키기 위한 요새이다. 강하게 무장된 마귀가 지키고 있는동안 회개치 않은 영혼의 소굴에는 평안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죄인은 자신을 좋게 평가하여 매우 안일해하며 즐거워한다. 그는 자신만만하며 편안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전까지는 모든 것이 무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한길만 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이 선포되면 마귀의 소굴의 평안은 소란케될 것이다.

②회개함으로써 오는 놀라운 변화 : 사단은 강하게 무장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보다 훨씬더 강하다. 그가 승리하신 방식을 보라. 예수께서는 사단이 자기의 소유가 안전하고 그것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생각할때 갑자기 오신다. 이러한 승리의 증거를 보라. 그리스도께서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아버리신다(22절). 즉 예수께서 친히 그 재물을 소유하신다. 이제까지 사단을 위해 사용되었던 마음과 육체의 재산이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쓰여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것들을 분배해 주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승리의 축복을 베풀어주신다.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기적의 목적은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와 함께하고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며 진심으로 그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지않으면 적과 한패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23절).

5)계약에 의해서 귀신이 나가는 것과 강제적으로 쫓겨나가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내어쫓김을 당한 귀신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이는 그렇게 하는것이 그리스도의 책임이기 때문이다(막 9:25). 반면에 귀신은 스스로 나가면 언제든지 다시 들어오곤 한다(24-26절). 그리스도께서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적을 패배시키신다.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 사실을 알수 있다.

①위선자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 : 그의 마음은 여전히 귀신의 집이다.

㉠그러나 더러운 귀신은 나갔다. 그는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동안 나가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은 겉으로는 사단의 지배를 받고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 집은 부분적인 회개로 어느정도 소제되었다. 그러나 집은 소제되었지만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 집이 깨끗하지 않다면 그리스도의 집이 될수 없다. 소제함으로 더러운 쓰레기는 치워지지만 죄인을 따라다니던 죄는 그대로 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소제되지만 구석구석에서 눈에 띄지않는 쓰레기는 치워지지 않은채로 있게 된다. 집은 청소되어도 더러운 것은 벽속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집은 일반적인 은사와 은혜를 닮은 것들로 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허식이요 눈가림이며 진실된 것도 영구적인 것도 아니다. 집은 수리되어도 소유물은 그대로 있는 상태이다. 그 집은 그리스도께 복종한 것이 아니다.

②배교자의 최후의 상태는 귀신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26절). 그들은 아무런 어려움없이 들어간다. 그들은 환영받으며 거기서 거한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심하게 되느니라. 위선은 배교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죄의 은밀한 장소가 외적인 신앙고백의 가면속에 감추어지고 양심이 타락한 곳에 배교의 길이 있다. 그러한 자의 나중의 죄와 형벌은 전보다 더심하게 된다. 배교는 인간의 최악의 상태이다.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죄는 극도에 달할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서 그들은 더 큰 저주를 받게될 것이다.

 

Ⅲ.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11:27-28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구절이다.

(1) 한 다정하고 정직한 여인이 예수의 훌륭한 말씀을 듣고 찬사를 보냈다. 이 선한 여인은 그의 말씀을 찬미하였다. 이 말씀하실때에 무리 중에서 한여자가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당신을 밴 태가 복이 있도소이다(27절). "즉 당신을 아들로 나은 여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 땅에 매우 복된 자가 되며, 결코 인간의 말로 표현할수 없는 크신 자의 어머니였다면 나는 참으로 복된 자가 되었을텐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인격은 귀중한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낳고 길러준 자보다 그의 신실하고 순종적인 제자들이 더 복된 자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28절). 예수께서는 한편으로는 육신의 모습에 지나치게 찬사를 보내는 그녀를 견제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만일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된다면 그의 어머니처럼 행복해질수 있다고 격려해 주기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다. 즉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만이 진정으로 복된 자이다.

 

Ⅳ. 선지자 요나의 표적 11:29-36

(1) 우리가 우리 믿음을 확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대할수 있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는 유력한 증거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다.

1)예수께서 이미 많은 표적을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을 책망하셨다. 무리가 모였다(29절). 많은 무리가 모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많은 무리가 왜 모였는지를 아셨다. 즉 그들은 표적을 구하기 위해서 왔고 구경하기 위해서 왔으며 집에 돌아가서 할 이야기거리를 얻기위해서 왔던 것이다.

2)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이제까지 본 표적과는 다른 한가지 표적을 보여줄 것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곧 선지자 요나의 표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들은 극도의 파멸외에 아무것도 기대할수 없게될 것이다. 인자는 이 세대의 표적이니라(30절).

3)예수께서는 이러한 표적을 믿으라고 경고하셨다. 심판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1절). 남방의 스바 여왕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 생소했으나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다. 그녀는 자기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예수께서 유대인들가운데 있었음에도 그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에 조금도 관심을 두려고하지 않았다. 심판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32절).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설교는 요나의 설교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듣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니느웨 백성처럼 자기들의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도 않았다.

(2)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씀을 확증하시기 위해 우리에게서 기대하시는 표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내용을 진지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1)그들은 등불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복음의 등불을 켜서 말아래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다시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석에서 전파하지 않으셨다. 복음의 빛이 등경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큰 특혜이다. 그러므로 들어오는 자마다 그것을 볼수 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볼수 있다.

2)등불을 가졌기때문에 그들의 관심을 보는 것이었다. 사물을 아주 분명하게 보는 것이다. 만약 몸의 기관이 건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건강한 것이 아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라(34절). 영혼의 등불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능력이다. 이렇게 볼때에 하나님의 계시의 등불이 우리에게 비치면 그것이 곧 축복이다.

①만일 영혼의 눈이 성실하고 분명하게 보며 오로지 진리만을 목적으로하여 자체를 추구한다면, 온몸 즉 온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충만한 빛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영혼을 채운다. 우리의 영혼이 복음의 빛으로 채워져서 어두운 부분이 없다면 모든 영혼은 빛으로 충만할 것이다. 영혼은 어두움 그 자체였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빛이 되었다.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36절). 복음은 그것을 받기위해 대문과 창문을 열어놓은 자의 영혼으로 들어올 것이다.

②영혼의 눈이 약하다면 온몸, 온영혼이 어두움으로 가득찰 것이다(34절). 그러므로 네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35절). 성실함과 진리를 탐구하고 거기서 사랑, 빛, 능력을 받을 준비를 하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않거나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않았던 이 세대의 사람들처럼 되지말라. 그들이 어둠속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Ⅴ.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11:37-54

그리스도께서는 본문과 한 바리새인과 그의 손님에게 식사중에 사적인 대화로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후에 이 말씀을 성전에서 공적인 설교룰 통해서 하셨다(마 23장). 예수께서 공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사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일치한다.

1. 바리새인 집에 식사하러 가심(37)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정중하게 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한 한 바리새인과 함께 식사하러 갔다.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37절). 우리는 이 바리새인의 마음을 알지못하나 그리스도께서는 아셨다. 만일 그가 좋지못한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선한 의도를 품었다면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선을 베풀어 주시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에게서 무뚝뚝하지 않고 사교적인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든지 조심해야 되지만 경직될 필요는 없다.

2. 바리새인의 범죄(38)

그 바리새인은 그리스도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보고 좋지않게 여겼다. 그는 거룩한 분이신 그리스도께서 식사하시기 위해 앉으시고서 먼저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상하게 여겼다. 바리새인과 다른 손님들은 물론 손을 씻었다. 의식법에는 씻는 것에 대해 여러가지가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손을 씻는 규정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손을 씻지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으셨다.

3. 그리스도의 책망(39-44)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였다.

(1)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신앙을 의식적이며 사람의 눈에 잘보이는 것으로 대치하고, 반면에 영혼에 관한 것이나 하나님의 눈에 잘보이는 일은 미루거나 아주 잊어버리는데 대해 책망하셨다(39,40절).

1) 그들은 어리석음을 범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39절). "너희는 물로 손은 씻지만 너희 마음의 사악함은 씻지 않는다." 잔이나 대접의 겉만 깨끗이 하고 속은 깨끗이 하지않는 자는 결코 청결한 종이 될수 없다. 모든 신앙적인 헌신에 있어서 마음의 상태는 잔과 대접의 속과 같다. 마음이 더러우면 예배를 더럽힌다. 영적인 죄악의 지배하에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큰 모욕이다. 그것은 마치 종이 잔 겉의 먼지는 씻었으나 속은 거미집과 거미로 찬 잔을 그의 주인의 손에 쥐어주는 것과 같다. 원한과 사악은 더크고 더럽고 용서받을수 없는 음란의 죄등을 잔의 겉에서 씻어낸 자들이 빠지기 쉬운 위험한 죄이다.

2) 어리석음의 구체적인 예가 본문에 나와있다.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 즉 모세의 율법에 여러가지 씻는 일들을 지시해 주신 하나님께서 너희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정화시키지 아니하시겠느냐. 밖을 위해서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속을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것을 만들지 않았겠는가. 이 육체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더욱 놀랍고도 기이하게 만들어진 이 영혼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겠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이 두가지를 다 만드셨다면, 그는 당연히 우리가 그 둘다 돌보기를 바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을 씻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영혼도 씻어 마음의 문둥병을 치유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다 우리 음식물이 우리를 깨끗케하는 규정을 추가하고 있다(41절). "먹기 전에 너희 손을 씻는 대신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여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몫을 가지게 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할 것이며 너희도 그것들을 안전하게 쓸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의 분명한 의미이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그들의 소산물의 일정한 양을 레위인, 나그네, 고아, 과부에게 주어야 한다. 이렇게해서 그들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깨끗한 것이 되었다(신 26:12-15). 우리가 예비치 못한 자들에게 나누어 줄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편안히 누릴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을 취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가진것 역시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풂으로써 음식을 사용할 우리의 자유를 우리 자신에게 분명히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사소한 일에는 관심을 두면서 율법의 중요한 부분은 소홀히 하는데 대해 책망하셨다(42절).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수단에 관계되는 율법은 아주 정확하게 지켰다.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즉 종류대로 완전하게 드렸다는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리는 일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그들의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데 대한 보상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신앙에 관계되는 율법을 무시하였다. 너희가…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몫을 주면서도 하나님께는 너희 마음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허영을 책망하셨다.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높은 자리에 앉거나 문안받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런 일들을 기뻐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고 계시는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책망하셨다.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이 바리새인들의 내부는 부패한 무덤처럼 혐오, 교만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예배라는 미명하에 교묘하게 그것을 감춘다. 그러므로 그들과 얘기하고 그들의 교리를 따르는 자들은 죄로 더럽혀지고, 그들의 부패상과 악한 교훈에 감염되게 된다. 전염병은 서서히 침투하여 모르는 사이에 감염되고 만다. 그러나 병에 걸린 자들은 결코 자신이 악화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4. 율법사와 서기관들에 대한 책망(45-54)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율법사와 서기관들을 책망하셨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만, 율법사와 서기관들의 임무는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에 대해 분개한 율법사 한사람이 있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45절). 충실하고 우정깊은 충고를 악용하는 것은 죄와 영합하여 거기서 떠나지않으려는 자들의 어리석은 소행이다. 그들은 충고자들이 자기들을 비난하려한다며 화를 내고 자신들을 합리화시킨다. 이 율법사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지지하면서 그의 죄에 동참하는 자가 되었다.

(2)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화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46절). 그리고 또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라고 말씀하셨다(52절).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좋은 평판을 받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보는 것처럼 보시지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는 일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들에 대한 것이 아닌가 항의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단지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화를 자초할 뿐이다.

1)율법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시키신 것보다 더 부담이되게 신앙의 봉사를 하게하고 자신들에게는 더 가벼운 짐이 되게 한것에 대해 책망받았다.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46절). 다시말해서, ①"너희는 그들과 함께 짐을 지지도 않을 것이며 너희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그 속박에 구속받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②"너희는 너희가 다스리는 자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지 않을 것이며 손을 대지도 않을 것이다. 즉 너희는 무겁고 어려운 짐을 진 사람을 보았을때 그 짐을 없애주거나 덜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위하여 두손을 가지고 나오나 장로들의 엄격한 전통을 완화시키는 일에는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으려 했다.

2)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죽였던 선지자들을 존경하는척 했기때문에 책망을 받았다. 그들의 조상들은 똑같은 임무를 띠고 그들에게 보내진 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하였다(47-49절).

①이 위선자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았다'(47절). 즉 그들은 선지자들을 찬양하며 그들의 무덤에 비문을 세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유물을 무덤속에 넣거나 순교자들의 무덤을 경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열납하실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선지자들의 자손인양 그들의 경건을 추모하고자 그 무덤들을 수선하고 아름답게 꾸며 신성하게 하였다.

②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선지자들의 영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온 당시의 사람들에 대해 철저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에게 보내진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죽이고 핍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죄를 책망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할 것이다. "내가 선지자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저희는 선지자들을 모함하고 반대할뿐만 아니라 죽이고 핍박할 것이다."

③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을 아주 다르게 해석하실 것이다. 즉 그 일은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행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다(45절). 그들의 조상들이 이곳에 매장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일은 그렇게밖에 해석할수 없다.

④그들의 박해가 다하면 그들은 심판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50,51절).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박해한 죄는 그들의 조상들이 지은 어떤 죄보다 더한 것이므로 진노가 그들에게 가장 심하게 내려질 것이다. 사실 로마인에 의한 그들의 멸망은 너무 가공할만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선지자들을 박해한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보복으로 여겨졌다.

3)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한 것에 대한 책망을 받았다(52절). 그들은 자기들의 임무에 따라, 메시야를 예언한 구약성경을 사람들에게 충실하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성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사람들을 혼돈시켰다. 다시말해서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위해 그 열쇠를 사용하거나 그들로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도와주는 대신에 그것을 그들에게서 감추었다. 이러한 일을 마태복음에서는 사람들 앞에서 천국문을 닫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마 23:14). 그들은 구약의 지식을 통해 때가찼으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안내나 도움을 받지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을 쫓아내겠다고 위협하는 등 할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방해하고 좌절시켰다.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나쁘지만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더 나쁘다.

(3) 본장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그리스도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했는가를 볼수 있다(53,54절).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것들을 책망하는 것에 대해서 참을수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책망이 심하기 때문에 그를 저지시키기 위해 격분하여 대든다는듯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가지 일로 힐문하고' 또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밉게 보거나 정부가 그를 불쾌하게 생각하도록 만들만한 것을 책잡고자 '목을 지켰다.' 죄를 충실하게 책하는 자는 많은 대적들을 예상해야 한다. 인내로써 이러한 종류의 시험을 견디고 신중하게 극복해 나가기 위해서 죄인들의 반대를 견디셨던 그리스도를 생각하자.

 

# 해설

기도에 관한 교훈 ( 11 )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그에게 도전을 합니다.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함하려고 시도합니다. 메시야가 자기의 나라에 왔으나 그의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지못하는 것은 정말 모순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또다른 놀라운 구원의 일들을 위해서 준비된 것임을 알게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워서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수 없습니다.

 

1. 기도를 가르치시다

1)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모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르게 기도하고 바르게 간구할수 있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의 마음에 합당한 기도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에게는 행복과 즐거움이 됩니다. 기도를 모르고 우리의 영혼이 윤택할수 없으며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가 없이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바랄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우리가 성장하는 길이며, 영혼이 윤택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a. 기도에 관한 첫 기록(창4:26).

b. 기도의 필요성(시65:2).

2) 기도에 대한 가르침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간구하는 것을 모른체 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간구하는 것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따라서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누릴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에게 와서 함께있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하며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진실된 마음과 간절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의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입게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향해서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입니다.

a. 하나님과의 대화이자 영교임(시91:14).

b. 영혼의 호흡(롬12:12).

 

2. 유대인들과의 논쟁

1) 바알세불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자 이에 시기하며 음해하기 시작합니다. 그의 능력 행하시는 것이 귀신의 힘을 입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모함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심각하게 해하려는 박한 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 알고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이 귀신의 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귀신을 쫓아내고 그들의 일을 없애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며 사단과의 싸움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제 공중 권세잡은 자와 메시야와의 결전이 이루어집니다. 메시야의 승리와 사단의 멸망은 정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일도 예상할수 있습니다. 이제 메시야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a. 하나님 앞에서 양방이 같이 섬(신19:17).

b.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쟁변하심(호4:1).

2) 참된 행복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안에 거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사람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의 모든 것이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래에 대한 보장이 없습니다. 오직 불안과 어려움가운데 생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은 미래가 보장되어 있기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따르며 지키는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의 사랑을 받는 비결은 바로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열려있으며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선택하는 것이며 단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a. 여호와의 규례를 지킴(신10:13).

b.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심(롬4:6).

3) 요나의 표적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합니다. 예수가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여서 믿을수 있게하라는 것입이다. 그러나 다른 표적은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메시야를 정치적인 왕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가르침이 필요할 뿐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그들에게 메시야가 어떠한 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지고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그를 따를때 그로부터 구원을 받게 됩니다.

a. 그리스도 부활의 예표(마12:39-40).

b. 회개케 함(욘3:9-10).

 

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

1) 몸의 등불은 눈

사람들이 자신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여러가지 외식을 행하지만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과 행동을 통해서 이웃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 마음속에서 빛이 비추어 다른 사람에게 비추이는 등불같이, 선한 사람은 그의 선함으로 이웃에게 선을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이요, 의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른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온전한 모습을 갖추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a. 근면(잠31:18).

b. 사람 앞에 비춤(마5:15).

2) 외식하는 자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마음의 모든 것까지 깨끗해야 합니다. 외식으로 모습을 꾸미고 위장한다고해서 그 마음의 악독한 것을 감출수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 본성이 변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형식에 매여서 본질을 왜곡시키고 다른 이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될 것입니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입니다. 내용이 없어지면 형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릇에는 내용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여러 형식들은 내용을 전하기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진정한 마음으로 형식에 우리의 내용을 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a.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함(막7:6)

b. 예수가 정죄하심(마23:15)

3) 다른 이의 길도 막는 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알고있는 짧은 지식으로 예수를 평가하고 판단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치명적인 저주를 가져왔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저주하시되 의로운 피에 대한 값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죽음과 멸망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더이상 돌이킬수 없고 완전히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멸망에 이르게 하는 자들이라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a. 망령된 행위(삿20:10)

b. 허물과 죄악(렘30:14)

 

결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말과 규례를 지키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복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의 인도하심이 항상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그에게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향하여 복주실 것입니다.

 

# 핵심

11:1-13

예수님이 기도의 모범을 제시하면서 올바른 기도 자세에 대해 교훈하신 내용이다.

모범적인 기도(11:1-4)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의 모범이다. 마태복음에 수록된 내용(마 6:9-13)에 비해 누가의 기록이 간결하지만, 주된 내용은 일치한다. 성도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적 자녀로 거듭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여야 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려야 한다. 또한 기도 내용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가운데 그 도우심을 간구하되, 이기적 욕구 충족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추구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 묵상

예수님의 기도 모범 ( 11:2-10 )

‘아버지여’는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나타내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최고의 경외심의 표현이며,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대망한 것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우리의 필요를 위해 끊임없이 간구하는 것이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는 자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태도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는 항상 경성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를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바른 기도의 원리를 볼수 있는데 이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구한다는 것은 결핍을 알고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즉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끊임없이 구하는 것은 살아있는 신앙의 증거입니다.

구하는 자의 축복 ( 11:11-13 )

천부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불순한 동기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성도들이 잘못 구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더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좋은 것, 즉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 준수의 중요성 ( 11:27, 28 )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주님을 밴 태와 먹인 젖보다 복되다는 말은 육신적으로 예수님을 낳은 모친 마리아보다 영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가 더 주님과 가깝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영적 관계임을 가르칩니다.

악한 세대의 표적 ( 11:29-32 )

예수님께서는 악한 세대에게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유대인이라는 혈통을 중시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맞아주시는 사랑의 주이십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몸의 등불인 눈을 성하게 가져야 합니다. 눈은 마음의 창입니다. 그 눈의 초점이 어디에 맞추어지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격과 영혼이 밝거나 어두워지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음의 눈을 생명되신 예수님께 모으도록해야 합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점 ( 11:37-52 )

정결법에 따르면 바깥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를 매우 중히 여겼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형식적인 의식보다 속이 깨끗해야함을 더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죄성은 전도된 가치관, 교만, 외식, 책임 전가, 무자비, 배타성 등이었습니다.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 ( 11:42 )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눈에 보이는 계율과 행위는 중시했지만 보이지 않는 의(義)나 인(仁), 신(信)은 무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꾸중하며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비난받은 율법사 ( 11:45-52 )

이들이 예수님께 비난받은 까닭은 지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우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남도 못들어가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형식적인 위선, 허세와 교만, 외식, 율법주의 그리고 진리를 핍박하며, 독선적이고도 배타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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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칠십인의 사명 10:1-16

본문을 보면 70인의 제자들이 둘씩 둘씩 복음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하도록 보냄을 받았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 기사를 다루지 않았다. 여기서 70인의 제자들은 열두 제자와 똑같은 지시를 받는다.

1. 그들의 수(1)

그들은 칠십인이었다. 그리스도는 열두명의 제자들을 선택하실때 열두 족장, 열두 지파, 그리고 열두 지파의 왕을 염두에 두었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칠십 장로들을 생각하셨던것같다.

(1)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파송하기에 적합한 추종자들이 많았음을 보고 기쁨을 느낀다. 그리스도는 비록 많은 반대에 부딪혔지만, 그의 수고는 모두 헛되지 않았다. 이들 칠십인은 열두 제자들처럼 항상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그의 가르침을 듣고 기적을 목격하고 그를 믿었다. 이 칠십인들은 베드로가 말한대로 '주께서 우리가운데 출입하실때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었으며, 백이십명 중에 포함된 자들이었다(행 1:15,21).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에 나오는 사도들의 동행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 칠십인의 제자들에 속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2) 많은 사역자들에게 수행할 임무가 있고 설교자들에게 청중이 있었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기서 겨자씨가 자라기 시작하였으며 누룩의 향기는 가루속에서 발하기 시작하였다.

2. 그들의 활동과 사업(1)

그리스도는 그들을 둘씩 보내어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도록 했다. 그는 이들을 열두 제자들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고을에 다 보내시지는 않고 그의 선구자로서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만 보내셨다(1절). 그들은 그리스도가 가시는 곳마다 행하셨던 것과 같은 두가지 일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 그들은 병자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야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보기를 갈망하고 자기 이름으로 그토록 권능을 나타내는 자를 영접하게 되도록해야 했다.

(2) 그들은 하나님나라가 임박했음을 알려야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우리의 이익과 기회를 알게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것들을 얻을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왔을때 우리는 나가서 맞아야 한다.

3. 그리스도의 지시(2-16)

(1) 그들은 기도로 일을 시작해야 한다(2절). 그들은 사람들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충분히 알아야 한다. 그들은 둘러보아 추수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한다. 거두어 들이는 일손이 모자라면 버리고 잃는 곡식이 많은 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일꾼이 매우 적다는 것을 염려해야 한다. 장사꾼이 손님이 적은 것이 곤란한 문제임을 그의 포도원의 일꾼들로 하여금 인식하게 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사명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추수할 일꾼으로 보내셨으며 다른 사람들도 앞서 보내셨다. 하나님이 그들도 보내셨기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고 그들을 성공으로 이끄실 것을 기대하게 된다.

(2) 그들은 고통과 박해를 예상하고 출발해야 한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3절). "그러나 가라 너의 적은 이리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비록 그들의 먹이가 된다해도 평온하고 참을성 있는 양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성령과 용기를 그들에게 주시지 않으셨다면 이리가운데 양을 보내는 일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3) 그들은 장거리 여행을 할것처럼 많은 준비를 할 필요가 없고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과 친구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4절).

1) 그들은 바쁜 사람처럼 가야한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의식이나 인사로 방해받거나 늦어져서는 안된다.

2) 그들은 사업가로서 가야한다. 그들의 사업은 저 세상에 관계된 것이므로 세속적인 일에 얽혀들지 말아야 한다.

3) 그들은 엄숙한 모습으로 가야한다.

(4) 그들은 가는 곳에서마다 자신들의 호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5,6절).

1)그들의 임무는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5절).

①그들은 개인의 집에 들어갔던것 같다. 즉 그들은 회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전도할수 있는 곳으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과 같이 집에서 말씀을 전파하였다. 상당수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에는 가정 교회에서 시작했다.

②그들은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이는 곧 "의례적으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인사하지 말고 너희가 들어간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평안할지어다라고 진실한 마음으로 문안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온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안할지어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평안을 빌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평안, 즉 지상의 평안을 전파하고 사람들에게 와서 그 은혜를 받도록 초청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평안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2)사역의 성공여부는 그들이 전파하고 기도해준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그 집의 거주자들이 평안의 자녀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 집의 평안을 기대할수 있기도 하고 기대할수 없기도 한 것이다. "너희는 평안의 자녀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복음의 말씀을 빛과 사랑속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다. 너희의 평안으로 그들을 찾아내게될 것이며 그들에게 희망을 걸게될 것이다. 너희 기도는 응답될 것이며 복음의 약속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게될 것이다. 또한 너희는 너희가 전하는 말을 도무지 들으려고도 마음을 쓰려고도 하지않는 자들, 따라서 그들의 집에는 평안의 자녀가 하나도 없는 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평안은 분명히 그들에게 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다시말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고 책임을 다함으로써 위로를 받게될 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평안이 되돌아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일뿐만 아니라 평안의 자녀들에게 그것을 전달할수 있기 위해서이다.

(5) 그들은 자기들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자들의 친절을 받아야 한다(7,8절). "복음을 영접하는 자들은 그것을 전파하는 너희를 영접하고 환대할 것이다."

1) "부끄러워하지 말라. 너희를 환영하는 것을 의심치 말고 폐가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들이 주는 것들을 진심으로 먹고 마셔라. 너희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일꾼은 그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배운 자들이 그것을 가르쳐준 사람들에게 삯을 주는 것은 자선이 아니라 정당한 일이다."

2) "너희에게 준 음식을 꺼리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7,8절). "그것이 일류요리가 아닌 간소한 음식이라 할지라도 불평하지 말고 감사하라." 좋은 음식을 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답지 못한 일이다. 아마도 그리스도는 본문에서 장로들의 식사 관습에 대하여 언급하신것 같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장로들의 식사 관습 같은 것에는 상관하지 말고 그들에게 준 것을 가리지말고 먹으라고 하셨다.

(6) 그들은 그들과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거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공포해야 한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10절). "그들이 너희를 집으로 영접지 아니하면 그 거리로 나와서 그들에게 경고하라."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에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해야할 일을 지시하셨다(참조. 눅 4:5). "이렇게 그들에게 말하라.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11절). 그들에게서 어떠한 친절도 받지말고 그들을 쳐다보지도 말라." 그들이 선생님의 명령에 따라 거기에 갔었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자라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는 그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여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라. 여기에 분명한 은혜가 너희에게 주어졌다. 너희가 만일 그 은혜를 받지못하면 그것은 너희의 잘못이다. 하나님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너희가 하나님 나라에 이르러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너희 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은혜와 생명을 분명히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그만큼 훗날을 책임져야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받은 것들을 소홀히 여긴다면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12절). 소돔 사람들은 사실 롯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더욱 큰 죄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복음서 기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1)그리스도가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푼 고을의 특별한 운명(마 11:20-24).

①그 마을 사람들은 큰 특전을 누렸다. 이 일로 그 사람들은 하늘나라로 오라간 것처럼 의기양양해졌다. 그들은 외적인 수단으로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통하여 하늘나라와 가까워졌던 것이다.

②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회개하고 삶을 개혁하며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있게 하는 것이었다.

③그들은 이러한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였다. 즉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누린 특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④만약 그리스도가 두로와 시돈 그리고 이방 도시에 가서 전파하고 이적을 행했었다면 그곳 사람들은 오래전에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그들은 즉시 회개하고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았을 것이며, 그만큼 깊이 회개했을 것이다.

⑤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한 자들의 운명은 매우 암담할 것이다. 이렇게 높임을 받은 자들은 높아지는 것을 이용하지 못하면 지옥에 떨어지게될 것이다.

⑥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이 도시들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의 사자들에게 하는 것이 곧 그에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16절). 그리스도의 충실한 사자를 저버리고 그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Ⅱ. 칠십인의 보고 10:17-24

1. 전도여행의 성공을 보고함(17)

그들은 전도여행의 성공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보고하였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그들은 여행으로 인한 피곤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자기들의 성공을 기뻐하였다.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들은 이 모든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돌렸다. 그 일은 '주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사단에 대한 우리의 모든 승리는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영적 대적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어떤일이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면 그 영광은 그의 이름에 돌려야 한다. 그들은 기쁨에 넘쳐서 말했다.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귀신이 우리에게 항복한다면 우리앞에 무엇이 설수 있겠는가?

2. 그리스도께서 이 보고를 인정하심(18-24)

(1) 그리스도는 그들이 말한 것이 그가 본것과 일치하고 있음을 확증하셨다. 사단이 하늘로써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18절).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사단과 그의 나라는 멸망한다. 그때 사단은 졸지에 회복할수 없을정도로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진다. 즉, 인간 마음속에 있는 그의 왕좌에서 떨어질 그때 사단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어디든지 사단의 왕국이 멸망할 것을 예견하였다. "이제 이 세상의 왕이 쫓겨날 것이다."

(2) 그리스도는 그들의 사명을 다시 인정하고 확장시켜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19절). 그들은 그들의 능력을 사단에 대적하여 힘있게 사용하였고, 이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더 큰 능력을 주신다.

1) 공격적인 능력 : 즉 뱀과 전갈을 밟고, 마귀와 극악한 귀신 그리고 그 옛 뱀을 제어할 힘을 주셨다. 귀신이 지금 너희에게 항복했듯이 저들도 항복할 것이다.

2) 방어할 능력을 주셨다.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뱀도 전갈도 너희를 해하지 못하리라. 만일 사악한 자가 너희에게 뱀같이 굴고 전갈같이 너희를 해하려 할지라도 너희는 그들의 포악함을 제어하고 밟을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겁을 줄지는 모르나 너희를 해칠수는 없을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기쁨의 동기를 올바른 것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20절). "너희는 이런 일만으로 값없이 기뻐하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 그리스도는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실수 있었다. 왜냐하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세보다 더 가치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은 자일지라도 마지막날에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인될 경우가 있을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은 결코 죽지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거룩한 사랑은 방언을 말하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다.

(4)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렸다(21,22절). 이와같은 감사기도는 전에도 하신 적이 있었다(마 11:25,27). 그러나 본문에는 '이때에 예수께서 기뻐하사'라는 말이 앞에 덧붙여져 있다. 사단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때 그리스도는 기뻐하셨다. 그리스도의 기쁨은 참으로 본질적인 기쁨이요 내적인 기쁨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기뻐하였다. 그 이유는 감사에 넘치는 찬양은 거룩한 기쁨의 순수한 언어이며, 거룩한 기쁨은 감사 찬양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다음 두가지 사실에 대해 감사드렸다.

1)아들을 통해 아버지께서 계시하신 것을 감사하였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감사하나이다(21절). 그가 감사한 내용은 이러하다.

①하나님 자신과 인간의 화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기에 적합한 몇몇 사람들에게 계시된 것을 감사하였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감추어져 왔던 비밀을 드러내셨다.

②그것들을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신 것에 대해 감사하셨다. 그 어린아이들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들의 능력을 끌어올려 주기 전에는 그러한 사실들을 이해할수 없는 자들이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과 같은 그러한 자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도록하는 명예를 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약한 자를 강하게 해주셨다는 사실 때문인 것이다.

③하나님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이 사실을 나타내셨으면서 지혜롭고 지식있는 자들, 즉 이방 철학자와 유대의 랍비들에게는 숨기신 것에 대해 감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의 사건을 나타내시지도 않으셨으며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는 일을 맡기시지도 않았다. 바울은 사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 가운데서 교육받은 자였다. 그러나 그가 사도가 되었을때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또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어떠한 지식도 나타내보이지도 사용하지도 않았다(고전 2:2,4).

④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신 것에 대해 감사하셨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와 그의 아들에 관한 지식을 보다 합당치 않다고 생각되는 자들에게 주시고 유효하게 전도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에게는 주시지 않는다할지라도 그것은 만족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기술로 미화하려는 자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파하려는 자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기셨던 것이다.

2)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비밀에 대해서 감사했다(22절).

①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큰 확신을 주셨다.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한 것이 있으며 그에게서 모든 관리하는 가장 신임받는 자이다.

②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알고 있다. 아버지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성령의 계시를 받은 자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다.

(5)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일이 그들에게 나타난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말해주셨다(23,24절). 제자들을 돌아보시며(23절). 그것은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게된 것과 사람들에게 이 비밀을 알리는 일을 맡게된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 그들은 얼마나 복을 받았나? 비록 이러한 사건에 대한 단순한 지식이 구원은 아니지만 그것은 구원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 그들은 그들보다 앞서간 자들보다 얼마나 높아졌나? "많은 선지자와 의인(마 13:17), 많은 선지자와 임금(24절)이 너희가 매일 계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듣고자 했으나 보지도 못하였고 듣지도 못하였다." 신약의 성도들의 명예와 행복은 구약의 선지자나 왕의 명예와 행복을 훨씬 능가했다. 구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은혜와 영광에 대해서 가졌던 일반적인 관념들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 희미하게 가려져있었던 것들의 실체를 봤으면하는 바램을 오랫동안 가지게 하였다.

 

Ⅲ. 우리의 이웃 10:25-37

본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양심의 문제에 대하여 한 율법사와 대화하는 것을 볼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분명한 대답을 듣게된다.

(1) 우리는 영생을 얻기위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선을 행해야 되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율법사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려고 그리스도께 질문을 던졌다(25절). 율법사는 일어나서 물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만일 그리스도에게 이에 대해 지시할 특별한 처방이 있다면, 율법사는 이 질문으로 그것을 얻어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특별히 지시할 사항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의 가르침이 무용한 것이라고 헐뜯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 율법사는 그리스도에 대해 아무런 악의가 없었고 사람들이 목사의 설교를 듣기위해 교회에 가듯이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가 한 질문은 훌륭한 것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나쁜 의도로 그러한 질문을 했을때 그 질문의 가치는 전적으로 상실되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질문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올바른 관심을 가지고 말하고 질문해야 한다.

1)그리스도는 그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아셨지만 그의 질문의 어리석은 면에 의거하여 대답하지 않고 지혜롭고 선한 면에 대하여 대답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그리스도는 그를 문답식으로 가르쳐 그 스스로 깨달을수 있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의 직업을 알고 계셨으므로 그에게 잘 가르쳐 주실수 있었다. 그의 지식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영생을 얻지못할 것이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를 생각해보는 것은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는데에 매우 유용할 것이다. 성경과 율법은 그리스도의 수중에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들에 의지하고 거기에 나타난 길로 가야한다. 기록된 것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이해하면서 읽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래서 어떤일이 있을때 그것에 관해 율법에 기록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말할수 있어야 한다.

2)그는 율법, 즉 율법의 중요한 명령에 대해 훌륭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처럼 장로들의 전통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율법의 명령 중 첫째가는 중요한 두가지 율법에 대하여 말하였던 것이다. 이 두가지 명령은 나머지 모든 율법을 포함하는 것이었다(27절).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장 온화하고 완전하며 뛰어난 최상의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되고 열렬하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최고의 사랑 즉 죽을만큼 강한 사랑이면서도 지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우리는 온 영혼을 다하여 그를 사랑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쉽게 이웃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해야 하며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3)그리스도가 그의 대답에 대하여 칭찬하셨다(28절). 그리스도는 그가 한 말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네 대답이 옳도다. 그리스도 자신도 이것을 율법의 가장 큰 두가지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 대답은 옳았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일이 남아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즉 "너는 영생을 얻을 것이다."

4)그는 지금 막 자기에게 지시될 일을 피하려 했다. 그리스도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셨을때 그는 자기가 이 일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스도가 시인하게 하려한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하려 했으므로 그 이야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보다는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 속에 있는 그릇된 점을 겸손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보다는 자기들의 선행을 교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훌륭한 질문을 한다.

(2)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아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이 율법사의 또다른 질문이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 그는 더이상 말하고 싶지않았으나 이웃에 대해서라면 계율을 잘 지켰다고 확신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항상 매우 친절하였고 공손하였기 때문이다.

1)여기서 율법사의 그릇된 생각은 무엇인가. 그는 "너는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나 모든 이방인은 제외시켜라.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이웃이 아니고 우리 민족과 우리 신앙을 가진 자들만 우리 이웃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죽어가는 이방인을 보고도 그의 생명을 구하기위하여 도와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2)그리스도는 이 비인간적인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으며, 비유로써 우리가 친절을 베풀어야할 사람들과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누구든지 우리 이웃으로 간주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①이 비유의 내용 : 이 비유는 곤경에 처한 유대인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구원받는 것을 보여준다.

㉠그 유대인은 강도에게 무슨 일을 당했다. 이 정직한 사람은 볼일이 있어 평화롭게 길을 가고 있었다. 그 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큰 길이었다(30절). 아마도 이 일은 본문에 기록된대로 그 당시 최근에 일어났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강도들을 만났다. 그들은 매우 잔인하였다. 그들은 그의 돈을 빼앗았을뿐만 아니라 옷도 벗겨갔다. 또한 강도들은 그를 때려 상처를 입혔고 거의 죽을 지경으로 만들어놓고는 가버렸다. 우리는 강도의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의 친구라고 할수 있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일을 보고 냉담했다. 그들은 거룩한 직업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야할 자들이었다. 많은 제사장들이 여리고에 살면서 직무를 수행하기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다시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그 길을 많이 오르내렸으며 레위인들은 그들의 수행원이었다. 그들은 그 길에서 강도를 만나 부상당한 사람을 보았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는 한 낯선 사람 즉 사마리아인에 의해 구출되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멸시할뿐만 아니라 상대도 하지않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그 사마리아인은 인정이 있었다(33절). 제사장은 자기 백성인 그 사람에게 마음을 닫았으나 사마리아인은 다른 민족인 그 사람에게 마음문을 열었다. 이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 비록 그가 유대인이었지만, 한 인간 그것도 불행을 당한 인간이었다. 이 사마리아인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고 배워왔으므로 그를 불쌍히 여겼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와 같은 처지에서 동정을 받고있는 듯했다. 이 사마리아인의 동정은 값싼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음이 동하여 이 불쌍한 사람에게 손을 뻗쳤다. 이 사마리아인은 얼마나 친절한가. 그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 지나갔던 그 불쌍한 사람에게로 갔다. 그는 그 이상의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 자신이 외과 의사의 일을 했다. 그는 그의 상처를 싸매기 위해 자신의 옷을 찢었을 것이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 포도주는 상처를 아물게 하려고 사용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자기가 상처를 당한 것처럼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그 불쌍한 사람을 자기 짐승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주막이 있는 곳을 향해 갔다. 이 사마리아인도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일이나 하나님의 제자가 이와같은 자비로운 행동에 우선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주막에서 그를 돌보아 주었다. 그는 사람을 침대에 눕히고 적당한 음식을 주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기도를 했을 것이다. 그 불쌍한 사람이 자기 자식이나 되는 것처럼, 다음날 아침 주막을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돈을 내어주고 더필요하면 돌아와서 갚겠다고 말하였다. 그 당시 돈으로 두데나리온이 필요한 모든 액수에 대한 계약금임을 알수 있다. 이 모든 일은 친구나 형제에게 기대할수 있는 친절과 관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는 낯선 이방인이 그 일을 행하고 있다. 이 비유는 본래의 의도와 다른 목적에도 적용된다. 그중에도 특히 죄많고 불행한 인간에 대한 우리 구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준다. 우리는 곤경에 빠진 이 불쌍한 여행자와 같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돕기위한 동정심도 능력도 갖고있지 않았으므로 곤경에 빠진 우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러나 축복의 예수 즉 선한 사마리아인이 오셨다. 그는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돌보신다. 이것은 그의 사랑의 풍성함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할 것을 촉구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빚을 졌으며 어떻게 이것을 갚을 것인가?"

②이 비유의 의미

㉠그 속에 포함된 진리를 율법사는 시인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물으셨다(36절). 즉 "이들 중 누가 이웃이 할일을 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율법사는 "분명히 사마리아인입니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가 선한 이웃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의무가 율법사의 양심을 찔렀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만일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도운 것이 잘한 일이라면, 유대인이 곤경에 빠진 사마리아인을 그와 같이 구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므로 가서 어떤일이 있을때마다 사마리아인처럼 행동하라.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라. 그들이 비록 너희 민족이 아니라해도 관심과 동정심을 가지고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어라." 이 율법사는 자신의 질문으로 그리스도를 당황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마리아인에게서 그의 의무를 배우라고 그를 보냈다. "가서 그와 같이 행하라".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도와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며 특히 율법사의 의무이다.

 

Ⅳ. 마르다와 마리아 10:38-42

(1) 마르다가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그녀의 집에서 대접하였다(38절).

1)그리스도는 마르다가 사는 동네에 가고 있었다. 저희가 길 갈때에 예수께서는 한 촌에 들어가시매. 이 마을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베다니였다. 그리스도는 크고 사람이 많은 도시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에도 가서 은혜를 베풀었다. 그 이유는 그가 은밀한 곳에 때로 가셨듯이 가난을 동정하였기 때문이다.

2)그는 마르다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르다는 그리스도를 환영하였다. 그리스도는 특별한 친구들이 있었다. 그는 다른 친구들보다 그들을 더 사랑하여 자주 방문하였다. 그는 마르다의 가족을 사랑하였으며(요 11:5) 그들에게서 자주 초대를 받았다. 그 집은 마르다의 집이라고 불리고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마르다가 과부였고 그 집 주부였기 때문이었던것 같다. 이 즈음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예루살렘과 가까운 곳에서는 더욱 위험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위험을 당하는 것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이 그를 반대하고 영접하지 않았지만, 그를 환영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

(2)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39절). 마리아는 그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집에서 좋은 설교를 하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일이다. 그리스도가 말할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들어야 한다. 마리아는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 이 말은 그녀가 매우 주의를 집중했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리스도가 전하는 말을 어쩌다 한마디만 이해하려 하지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했다. 우리가 그의 발앞에 앉아있다면 머지않아 그의 보좌에 그와 함께 앉게될 것이다.

(3) 마르다는 가사를 돌보았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40절). 이것이 바로 그녀가 마리아와 한자리에 있지 않게된 이유였다. 주부는 큰 손님 접대를 하려면 얼마나 마음을 쓰고 부산을 떨어야하는지를 잘안다. 여기서 다음을 살펴보자.

1)마르다에게도 칭찬할만한 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녀는 우리 주 예수에 대해 칭찬받을만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러한 대접은 겉치레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여기서 또한 그녀의 가사에 대한 칭찬할만한 보살핌을 볼수 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든가 편안한 것을 좋아하면 가족들을 등한시하게 된다.

2)마르다에게는 책망받아야할 점이 있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았다. 그녀는 정성을 다하여 호화찬란하게 대접하려 했다. 그녀는 많은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많은 준비를 하는 티를 내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답지 못한 행동이다. 도움도 되지않는데 많은 준비를 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마르다는 준비하느라 분주하였다. 그녀는 그 일에만 매달려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맡기시든지 우리는 그것때문에 부산스럽게 행동해서는 안된다. 일은 선한 의무이지만 분주함은 죄요 어리석음이다. 마르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위해 그의 발앞에 앉아있는 마리아와 함께있어야 할때에 준비하는 일이 많아 분주하였다.

(4) 마르다는 그녀의 동생 마리아에 대해 그리스도에게 불평하였다(40절).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1)이러한 마르다의 불평은 그녀의 속된 마음가짐을 드러내 준다. 그것은 그녀의 지나친 염려와 분주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세속적인 일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고 추구하다보면 가족간의 불안과 친지간의 분쟁을 야기시키게 된다. 동생에 대해 화가난 마르다는 그리스도에게 간청하였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나이까. 마르다는 자기가 근심하며 마리아도 그리스도도 그리고 모두가 같이 걱정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기분이 좋지않을 것이다. 하나님께 열렬하게 간청하는 자들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부당하고 근거없는 불평을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맡긴 일은 즐겁게해야 하지만 어리석게 자신을 의지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2)마르다의 불평은 마리아의 경건과 헌신에 대한 방해로 생각할수 있다. 마르다는 마리아의 경건과 헌신에 대해 격려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지않고 오히려 마리아가 할일을 하지않는다고 불평하였다. 신앙심이 많은 사람들이 대적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친구들의 비난과 모욕을 받게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5) 그리스도는 마르다의 지나친 염려에 대하여 책망하였다(41절).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으로 족하니라.

1)그리스도는 손님이었지만 그녀를 책망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랑하는만큼 책망도 하고 벌도 준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도 잘못을 하면 책망을 들어야 한다.

2)그리스도는 그녀를 책망하실때 '마르다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그리스도는 그녀의 평안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진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생활에 대한 염려에 빠진 자들은 쉽게 헤어나지 못한다.

3)그리스도는 그녀가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한다고 책망하였다. 그는 그녀가 일에 골몰하는 것과(너는 일때문에 염려하고 근심하며, 망설이고 혼란을 겪고 있구나) 일이 많은 것에 대해(많은 일로) 책망하였다. "가엾은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화를 내고 있구나. 그것이 너에게서 웃음을 빼앗아갔으니 적게 일하는 것이 좋겠구나." 이 세상 일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근심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도 흔히 볼수 있는 결함이다. 정당한 이유없이 화를 낸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 때문이다.

4)그녀의 염려의 어리석음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가지 부족한 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일, 즉 그리스도의 발앞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는 일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한가지 일에 진력해야 할때에 마르다는 많은 일로 근심하였다. 세상이 분열시킨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결합시켜 주신다. 마르다가 근심한 많은 일들은 불필요한 것이었고 그녀가 소홀히한 한가지 일은 필요한 것이었다. 마르다의 염려와 봉사는 적당한 때와 장소에서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는 뭔가 다른 일을 해야했고 그것은 분명히 더욱 필요한 일이었다. 마르다는 그리스도가 그녀처럼 일하지 않는 마리아를 책망하기를 바랐지만, 그리스도는 마리아와 같이있지 않은 마르다를 책망하였다. 마르다도 마리아와 같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때가 올 것이다.

(6)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진실된 신앙을 칭찬해 주었다. 그러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42절).

1)마리아는 가장 가치있는 일을 올바르게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행한 이 한가지 일은 가장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가장 필요한 일이다. 이것외에 우리를 하늘나라로 이끌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2)마리아는 스스로 현명하게 행동하였다. 그리스도는 마르다의 비난에 대해 오히려 마리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조만간 마리아의 선택은 옳다고 인정받게될 것이다. 또한 그러한 선택을 하고 그것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옳다고 인정받게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이 전부는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녀의 지혜를 칭찬하였다.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 이유는 그녀가 그리스도와 함께있는 편을 택하였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속에 받아들임으로써 마르다같이 자기 집에서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일보다 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다.

①그리스도의 편은 좋은 편이다.

②그리스도의 편은 그것을 택한 자들에게서 결코 떠나지않는 편이다. 어느것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의 편에서 우리를 분리시킬수 없을 것이다. 인간과 악마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에서 떼어내지 못할 것이다.

③이 좋은 편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들 각자의 지혜요 의무이다. 마리아는 염려하는 마르다와 일을 같이하여 좋은 주부라는 칭찬을 받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발앞에 앉아서 열성적인 제자임을 증명해 보이든지 둘 중의 한가지를 택해야 했다. 이 특별한 경우에 마리아가 선택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는 그녀가 평상시 어떤 선택을 하는지 판단할 것이다.

 

해설

복된 삶 ( 10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진정한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하는 사람이 그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릴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이 이끄는 곳에는 저주와 심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구분하고 판단할수 있어야 행복이 이를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참행복을 찾아서 인생의 여정을 바르게 걸어가야 합니다.

 

1. 칠십인의 제자들을 보내시다

1) 칠십인을 파송하다

주님은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과 함께 칠십인의 제자들을 여러동네에 보내십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서 예수께서 명하신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들에게 이 나라에 들어오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전하는 종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다른 것을 가지고 가지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전도자의 희망이요, 보장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준행하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a.복음을 널리 전함(롬10:14).

b.복음을 전함(엡4:11).

2) 저주받은 도시

예수께서 보내신 제자들과 무엇보다도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하신 도시들이 오히려 복음을 받지않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이 임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일들이 일어납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말씀이 선포되었다면 그곳에는 이제 선택의 일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것과 하나님을 대적하고 멸망을 길을 가든가 자신이 선택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도시들은 이미 예수를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서 멸망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a.의도적인 불순종(렘44:17-18).

b.마음이 완고함(요12:37-40).

3) 칠십인의 보고

칠십인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명을 감당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은 그들이 한 일을 보고하는 것이 아나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이루신 일들에 대한 감사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사단이 권세를 잃고 멸망당하는 것을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더이상 사단에게 세상 권세를 주지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기뻐할 것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받아야할 것은 외적인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신분이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멸망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명의 자리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a.만물을 다스리심(암4:13).

b.원하시는 것을 다 행하심(시115:3).

 

2. 진정한 행복

1)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은혜는 진정으로 겸손한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교만으로 인해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예수께 나아와서 자신의 모든 죄된 본성을 내어놓고 용서함받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철저히 의뢰하는 사람들이 그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게됩니다. 이것이 비밀이며 감추어진 것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나타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받지않는 사람들에게는 메시야의 오심이 아직도 기다려야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겸손한 전적인 의뢰로 하나님의 이루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a.기묘하고 광대함(사28:29)

b.위대함(렘32:19)

2) 제자들의 복

제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볼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보며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의 사랑을 받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고 원했던 일입니다. 선지자들이 원했고 믿음의 선진들이 바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볼수 있는 제자들은 진정 복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것들을 설명하시고 감추어진 일들을 밝히 드러내시는 말씀을 들을수 있는 제자들은 진정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그 무엇으로도 그들의 행복을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행복을 누릴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초대에 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a.하나님의 나라 백성된 자(시33:12)

b.지혜를 얻은 자(잠3:13-14)

 

3. 올바른 삶

1)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허무한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 질문을 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을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율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요 삶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것은 바로 율법의 실천입니다.

a.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됨(신8:3)

b.믿음으로 얻음(요5:24)

2) 사마리아인의 비유

강도를 만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있을때 그를 도와준 사람은 외적인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멸시를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진정한 이웃이 누구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말뿐인 사람보다 실천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일은 마찬가지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말로 베푸는 선행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실천으로 보여지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며 의미있는 행동이 됩니다. 우리의 이웃에게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a.믿음이 있어야 함(딛1:15)

b.바르게 행해야 함(행24:12-13)

3) 마르다와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신이 선택한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나무랄데 없었습니다. 누구도 잘못했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선택은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작용한 것입니다. 일상의 여러가지 일들이 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다른 것들보다도 중요하고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예수의 말씀을 듣기위해서 그의 곁에 있게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인지 돌아봐야할 것입니다.

a.생명의 말씀(요6:68)

b.간구함(마15:27)

 

결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말하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 거의 맹목적으로 따라다니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뒤로하고 자신의 판단에 의해서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우리의 길은 언제 어떻게 잘못될지 모릅니다. 항상 주님께 나아와 우리의 모습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돌보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 핵심

10:1-24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전도하러 보내신데 이어(9:1-6) 다시금 70인의 제자를 파송하셨다. 이는 복음을 온세상에 두루 전파하는 것이 바로 제자의 근본 사명임을 시사한다.

의약용 기름과 포도주(10:34)

상처 부위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감싸는 것은 고대의 일반적 치료법 중 하나였다. 이때 포도주는 소독제로 사용되었고, 기름은 통증을 가라앉히는 역할을 했다. 근동 지역에서 의약용으로 주로 사용된 기름은 감람유이다.

 

# 묵상

70인의 파송 ( 10:1-9 )

이는 임박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회개를 촉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가운데로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는 정신을 차리고 해야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인이면 반드시 감당해야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개개인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개인적인 훈련에도 참여를 해야합니다. 여기의 70인 파송은 열두 사도와는 별도로 특별히 조직되어 짝을 지어 파송하는 것으로써 오늘날의 전도에 많은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앞의 사건들에서 볼수 있듯이 여러가지 일로 핑계를 대고 전도하는 일과 따르는 일에 대하여 회피하는 것과는 많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미래의 가버나움 ( 10:15, 16 )

예수님은 미래의 가버나움은 음부에까지 낮아진다고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주님이 많은 이적을 베풀었던 곳이지만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치 않고 이적에만 관심을 두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구원이 진실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달려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정말 기뻐해야 할 일 ( 10:20, 21 )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의 가장 놀라운 이적은 육신의 질병이나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 아니라 한영혼이 구원을 얻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리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겨지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란 세상의 지혜자를 말하며, 어린아이들이란 복음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어린아이들은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질문 ( 10:25-28 )

예수님께 율법사는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러한 생각은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공적(功績) 신앙이 짙게 깔려있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 10:30-37 )

이 비유는 영생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졌으므로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영생과 관련된 것으로 교훈합니다. 즉 강도 만난 자를 멀리하지 않고 그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자비심을 보여준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에 들어가게 됨과 위선에 가득찬 제사장과 레위인은 영벌받게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마25:45, 46).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은 한사마리아 사람, 즉 자비를 베푼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여러면에서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을 제치고 그들이 개처럼 여기던 사마리아 사람을 의로운 사람의 모델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주님은 형식적 종교인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를 베푼 자가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 구원얻을 것임을 역설하셨습니다.

마르다의 봉사 ( 10:40-42 )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가지만 하든지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는 분주한 봉사로 인해 말씀듣는 일을 소홀히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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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제자들의 사명과 헤롯의 공포 9:1-9

1.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택하신 방법(1-6)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두루 여행을 다니셨다. 그러나 그는 한번에 한곳에만 있을수밖에 없었으므로 그의 제자들을 내어보내셨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되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확고히 할수 있도록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기적을 행할 능력과 권세를 주셨다(1,2절). 그는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할 권세를 주어' 귀신들의 소유를 빼앗고 그들을 내쫓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병고치는 능력을 주었고, 그러한 일들을 하도록 그들을 임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들이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하였으며 그들의 호의를 얻게 하였다. 이것이 곧 제자들의 임무였다. 이 일에 대하여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 이 임무의 수행을 위하여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지시하신 일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외모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려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 가야하며 옷을 바꿔 입어서도 새신을 신어서도 안된다.

2) 그들은 하나님께 의존해야하며 그들의 친구들의 돈을 가져서도 안된다.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사람들의 친절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말고 오히려 그것을 기대하라고 하셨다.

3) 그들은 자기들을 받아들인 자들이 그들을 지겨워하지나 않을까해서 숙소를 옮겨서도 안된다. 즉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야 한다(4절). 사람들이 그들의 있는 곳을 알수 있도록 어느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고, 그들에게 익숙해진 자들과 함께있으라는 것이었다.

4) 그들은 권위를 가져야되며, 그들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고 그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경고의 말을 해야한다(5절). 만약 너희를 영접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들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버려라. 그리고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2) 이 임무를 수행하기위하여 그들은 무엇을 하였나(6절). 그들은 주의 곁을 떠나갔다. 그들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각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쳤다. 제자들의 행할 일은 그들의 주가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써 영혼과 육체에 대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2. 제자들의 복음 전파를 전해들은 헤롯의 놀라움(7-9)

우리는 여기서 헤롯이 이 일을 듣고 당황하고 고민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내진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메시야라는 놀랍고도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기적들을 행하셨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기적을 행할 능력을 부여하셨다. 그리고 이 일은 다른 어떠한 일보다도 그리스도의 명성을 널리 퍼뜨렸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있었었다'(행 4:13). 각 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을 보고 놀랐다.

(1) 사람들은 여러가지 추측을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잘 알수는 없지만, 우리 주 예수님을 존귀한 자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고 생각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고 옛 선지자의 하나가 다시 살아났다고도 하였다. 혹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7,8절).

(2) 헤롯의 마음에 큰 고민이 생겼다. 그리스도가 행한 이 모든 일을 듣고 헤롯은 요한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하였다. "어찌 하여야 할까?" 헤롯이 말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거늘 이 사람은 누군고." "그는 요한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하여 왔는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점점더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헤롯은 그를 보고자 하였다(9절). 그런데 왜 가서 그를 만나지 않았을까? 헤롯은 그리스도를 보고자하였으나, 법정에서 만나기 전에 그를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수가 없다.

 

Ⅱ. 제자들이 돌아온 일과 오천명을 먹이신 일 9:10-17

(1) 제자들은 그들의 사역의 결과를 예수께 고하였다. 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의 모든 행한 것을 예수께 고한대(10절).

(2) 그들은 잠깐동안 은거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떠나가셨다. 우리의 남종과 여종을 쉬게하라고 명하셨던 그리스도는 그의 종에게도 쉬게하셨다. 지극히 공적인 자리에 있는 자들은 육체의 휴식을 취하기위하여 그리고 명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채워 더나은 일을 하기위하여 때때로 은밀하게 은거해야 한다.

(3)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리스도는 그들을 영접하셨다. 그리스도는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무리들이 그를 따라왔다. 그는 그들을 영접하셨다(11절).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열성을 품은 자들이 그 열성으로 인하여 다소 무례를 범한다해도 용납받는다는 사실을 볼수 있다. 이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랬으며 우리 또한 이러한 자들을 허용하여야할 것이다. 그들은 때 아니게 찾아왔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와서 구하는 것을 주셨다. 곧 그는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야기 하셨다.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그리스도는 육체적인 질병을 지배하는 권세를 가지셨으므로 치유를 필요로하는 그의 백성들을 치료해 주신다. 우리에게 있어서 때때로 육체의 편안을 위한 치유보다는 영혼의 유익을 위한 질병이 더필요하다는 것을 그리스도는 알고계셨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종이므로, 그는 성도들의 모든 질병을 치유할수 있는 것이다.

(4) 그리스도는 그를 따라온 무리를 충분히 먹이셨다. 곧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 오천명을 먹이셨다. 이 기사는 앞에서 두번 나왔는데, 여기서 다시 대하게 된다. 우리 구주의 기적들 중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것은 오로지 이 사건뿐이다. 이 기사를 세밀히 살펴보자.

1) 열심히 그리스도를 쫓아 임무를 행하며 그러기위하여 자기를 부정하기도, 드러내기도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보살핌을 받는다. 그는 그를 두려워하고 충실하게 섬기며 어떠한 선한 것을 바라는 자들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2) 우리 주 예수님은 아낌없이 주시는 관대한 분이시다. 그의 제자들은 '무리를 보내어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라고 말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줄수 있는데까지 주어서 그들이 자유로이 먹도록 하여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그의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할것'을 가르치셨다. 적게 가진 자들은 적은 것으로 할수 있는 일을 하자.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많게하는 방법이다.

3) 예수 그리스도는 병든 자를 치유하실뿐 아니라 음식이 필요한 자에게 음식도 주신다. 그리스도는 영혼의 질병으로 인한 죽음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구해주실뿐 아니라 영혼을 살찌게하여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힘을 주신다.

4) 그리스도의 모든 선물은 정해진 격식에 따라 받아들여져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떼를 지어 한 오십명씩 앉히라'(14절)고 말하고 계신다.

5) 우리는 우리에게 안락을 주는 것들(음식, 등등)을 받을때 하늘을 우러러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렇게하셨으며 우리에게도 그렇게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러한 것들을 받고 그것들을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의지하며 또한 그 축복을 간구한다.

6) 그리스도의 축복은 작은 것을 크게 만든다.

7) 그리스도가 먹인 자들은 '다 배가 불렀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실수 있을만큼 부요한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족함을 느끼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먹을 것이 먹고 남을 정도로 풍부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해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궁핍하지 않다.

 

Ⅲ.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예고 9:18-27

우리는 본문에서 다른 복음서들에는 기록되어 있지않은 특수한 상황을 볼수 있다. 즉 그리스도가 '따로 기도했다'는 것과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의 물음이 시작된다(18절).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과 그의 아버지와 그리고 제자들과 대화하시기 위해서 은밀하게 따로 계실 필요를 느끼셨다. 따로 계실때 그리스도는 기도하셨다. 기도하기 위해 혼자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따로 있을때 혼자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있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때에는' 제자들이 같이 기도하고자 '주와 함께' 있었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질문하시기 전에 그들과 함께 기도하셨다. 우리도 우리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또한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이어서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담화하셨다.

(1) 그리스도는 자신에 관하여 질문하셨다.

1)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는가?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그들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들었던 예수에 대한 여러 추측들을 말했다. 사역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보다 자주 그리고 친밀하게 대화를 할때 더욱 그들의 상황에 알맞게 가르치고 책망하며 조언을 해줄수 있을 것이다. 의사도 환자와 많이 대화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환자를 위해 해줄수 있는 일을 잘 알게 된다. 어떤이들은 그가 죽은 세례 요한이라고 하였다. 또한 엘리야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옛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리스도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었다.

2)제자들은 예수에 대하여 어떻게 말했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그들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표하라고 명하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볼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렇게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이 말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명하였다. 그가 부활하신후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완전히 증거되자 베드로는 이 사실을 성전이 울리도록 외쳤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그러나 본문에서는 아직 증거가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은 감추어져야 했다.

(2)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믿게되었고 또한 증거할수 있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다(22절).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아직 말해서는 안되는 이유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놀라운 사건이야말로 그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해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3) 그리스도는 자신때문에 제자들이 받을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1)우리는 자기부정과 인내에 익숙해져야 한다(23절). 또한 안일과 욕심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러한 것들에 빠지면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나 궁핍, 피곤 등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는 동안 자주 십자가를 대하게 된다. 그러한 십자가를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는 없지만 그러한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지면 그것을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며 그것에 굴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2)우리는 어떤 세속적인 일보다 우리의 영혼의 구원과 행복에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이 점에 대해 숙고해 보자.

①자기 멋대로의 생활이나 재산을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수 없을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말할수 없는 상실자가 될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24절). 훨씬더 무한한 가치가 있는 자신의 영혼을 잃을 것이다.

②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잃는다면 말할수 없는 축복을 받게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다시 얻게될 것이다.

③온 천하를 얻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버린다면, 결코 그것에 비할수 없을 정도로 영혼의 끝없는 상실과 파멸을 피하지 못하게될 것이다(25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부, 명예, 즐거움 등을 획득했다고 생각된다하더라도, 그렇게하여 영원히 자기를 잃고 마침내 파멸해 버린다면 그렇듯 세상적으로 얻은 것들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가장 두려운 일은 자기 영혼의 상실이라고 되어있으며, 여기 본문에서는 그것을 자기를 잃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 영혼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시사해 준다. 다시말해서 영혼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잘됨과 못됨에 따라 우리 자신도 잘되거나 못되거나 하는 것이다. 영혼이 저 세상에서 비참한 상태에 있다면 몸도 편안할수 없다. 그러나 몸이 이 세상에서 많은 고통과 억압을 받아도 영혼은 행복할수 있다.

3)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이며(26절).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한 자는 최후의 심판날에 그를 위해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기다릴때, 그리스도가 그렇게 비겁하고 속되며 비열한 자를 인정하시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그는 내 백성이 아니며 내게 속하지 않았다'고 말씀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할때 기꺼이 함께 수난을 받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그가 통치할때 그와 더불어 통치하게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가 현재 수치를 당하고 있는 그 자신과 그의 따르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가 재림할때의 영광의 찬란함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자.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구절이 없다. 그리스도는 그의 아버지의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그날 영광중에 오실 복된 예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우리는 그가 그렇게 오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이제 그리스도와 그의 말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4)그를 위해 고난당하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제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다(27절). "여기 섰는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능력으로 현세대에 임할 것이다." 성령이 확산되고 복음이 온세상에 전파되었을때, 그리고 모든 나라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왔을때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았다. 즉 그들은 이방나라가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때 하나님나라의 승리를 목격하였다.

 

Ⅳ. 예수님의 변모 9:28-36

본문은 그리스도의 변모에 대한 기사이다. 그리스도의 변모는 얼마전에 이야기했던대로 그의 영광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결과적으로 그를 위해 고난당하면서 결코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와있다.

(1) 그런데 본문에는 상황이 위의 두복음서의 것과는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두복음서에는 이 말씀을 하신지 6일후로 되어있는데, 누가복음에는 말씀하신후 8일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그날은 말씀하신후 일곱밤 다시말해서 만 엿새가 지난후인 여덟째 날이었다.

(2) 본문에는 여러가지 상황이 덧붙여져 설명되고 있다.

1)본문을 보면 그리스도가 이 영광을 기도할때 받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28절). 그리고 '기도하실때에 용모가 변화되었다'(29절). 그리스도는 겸비해져서 기도하였을때 이렇게 존귀하게 되셨다. 그리스도는 그를 위하여 준비되고 약속된 은혜를 스스로 구하여 받으셔야 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려하셨으며 우리도 또한 그렇게하라고 권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바로 변모되고 변화되는 일이다. 기도함으로써 우리는 지혜와 은혜 그리고 기쁨을 얻게되며, 그로인해 얼굴에 광채가 날 것이다.

2)누가는 변형되었다라는 말을 쓰지않는다(마태와 마가는 이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뜻을 가진 어구로 표현하고 있다.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즉, 빛이 비치는 것처럼 환했다. 그리하여 그는 빛으로 온몸을 치장하고 옷을 해입은 것처럼 보였다.

3)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났다고 되어있다. 본문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계시므로, 그들도 예수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난 것이다.

4)여기서 그리스도와 구약의 두 선지자가 나눈 대화의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 그들은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의 떠남 곧 죽음을 이야기하였다.

①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문에서는 그의 퇴거, 나감, 세상을 떠나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성도의 죽음은 출애굽, 즉 이 세상이라는 애굽에서의 떠남이요 속박의 집으로부터의 해방이다.

②그리스도는 죽어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으로 결정되었으므로 변경될수 없었다.

③그는 예루살렘에서 죽어야했다.

④모세와 엘리야는 그리스도가 수난을 받고 그후에 영광 가운데로 들어가게될 것을 알리기 위하여 이와같이 이야기했다(참조. 눅24:26,27).

⑤우리 주 예수께서는 변화하신 후에도 그의 죽음과 수난에 관해 기꺼이 이야기하셨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게 되었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영원한 도성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5)본문에서 우리는 전에 없었던 일, 즉 제자들이 조는 모습을 볼수 있다(32절). 아마도 죄된 무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졸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기도할때 그들은 그의 기도에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계속 잠자고 있었으므로 이 놀라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세사람은 그리스도가 영광중에 있을때 잠자고 있었다. 이들은 후에 그리스도가 고뇌할때에도 똑같이 잠을 잤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주님의 영광과 고뇌보다 더 관심있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뇌중에 그들은 깨어있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있을뿐만 아니라 생동력있게 되기위하여 소생시키는 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은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후 그들은 정신을 차려 모든 영광의 장면들을 정확히 볼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때 일어났던 모든 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록할수 있었다(벧후 1:18). 우리는 지금 그들 중 한사람이 쓴 기사를 대하고 있는 것이다.

6)본문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가 막 떠날때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게 하소서. 이와같이 우리는 축복을 잃고나서야 그 가치를 알게된다. 그리고 축복이 떠난후에야 그것이 계속되었으면 하고 갈망하고 구한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는 말을 알지못한채 그렇게 말하였다.

7)그들은 뒤덮인 구름에 대한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구름속으로 들어갈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34절). 이 구름은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시였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구름속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구름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안전하게 구름속을 지나갈수 있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8)하늘로부터 들려온 소리에 대한 누가복음과 마가복음의 기사는 마태복음의 기사만큼 자세하지 않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35절). 여기에는 마태복음과 베드로서에 있는 '내 기뻐하는 자니'라는 구절이 없지만, 그것은 '택함을 받은 자니'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3) 본문을 보면 제자들이 그 본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아야 한다고 되어있다. 그들은 당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시기가 있는가 하면 침묵을 지켜야할때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은 때가차야 아름답고 쓸모있게 된다.

 

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9:37-42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변모와 변모후 그리스도와 제자들과의 대화에 이어서 곧바로 나온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튿날 산에서 내려온' 다음에 있었던 일로 되어있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그들은 '산에서 내려왔으며' 그때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아셨다.

(1) 그리스도가 돌아오자 큰 무리가 그를 맞기위해 나아왔다. 평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듯이 이날도 큰 무리가 그를 맞았다.

(2)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가 도와달라고 예수께 간청하였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아보아 주옵소서. 이것이 그의 요청이었다. 그리스도의 동정적인 보살핌은 모든 일을 올바르게 해놓기에 족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라고 호소하였다. 많은 자녀에게서 받는 위안으로 무마시킬수도 있지만, 외아들뿐일 때는 사정이 아주 다르다.

(3) 그 아이는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39절). 그는 '그를 잡고 있는' 귀신의 지배하에 있었다. 발작이 시작되면 그는 '졸지에 부르짖었으며' 그의 비명은 그의 온화한 아버지의 심정을 찔렀다. 이 악한 귀신은 그를 괴롭혔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였다. 사단은 자기가 들어간 곳에 얼마나 해를 입히는가! 반대로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4) 제자들의 신앙은 불완전하였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더러운 영을 지배할 능력을 주었지만, 그들은 이 사악한 영을 내쫒지 못하였다(40절). 그들은 능력이 힘을 발휘할수 있다는 것을 믿지않았거니와 마땅히 해야할 기도로써 자신을 단련시키지도 않았다. 그리스도가 그들을 책망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

(5) 그리스도가 이 아이에게 행한 치유는 매우 효과적이었다(42절).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할수 없는 일도 우리를 위해 하실수 있다.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셨다. 귀신은 그 아이를 산산조각이라도 낼것처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그 아이를 낫게 했으며, 귀신이 그에게 입힌 손상을 보상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아이를 그 아비에게 도로 주셨다. 우리 자녀가 질병에서 회복되면 그들이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으로,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을 돌려받는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다. "자 이 아이를 데려가라. 그리고 감사해라.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해 양육하라. 왜냐하면 이 아이는 나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유념하여 부모들은 그리스도의 손에서 자녀들을 받아야 한다. 그런 다음 그들을 다시 그리스도의 손에 넘겨주어야 한다.

 

Ⅵ. 그리스도의 수난 예고와 제자들의 변론 9:43-50

1.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것을 본 사람들에게 준 영향(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그들의 놀라움은 보편적인 것이었다. 그들 각자가 모두 놀랐다. 각자가 놀란 원인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에 놀랐다. 그의 행하는 모든 일에는 특이하고도 놀랄만한 것이 내포되어 있었다.

2. 그리스도가 다가올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예고(43-45)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우리라. 여기에는 다른 복음기자들이 기록한 "그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본문에는 특이한 점이 몇가지 있다.

(1) 여기 본문의 구절은 바로앞에 있었던 사건, 즉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찬양한 일과 관계가 있다.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43절).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세속적인 권위와 권세로 다스릴 현세적인 왕국에 대해 강한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전능하신 힘으로 그 일을 쉽게 이루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의 손에 넘기워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질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게 되었다.

(2) 그리스도는 근엄하게 말문을 여셨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두라. "내가 말한 것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라". 시리아어와 아랍어로는 "이 말을 너희 심령에 담아두라"라고 되어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 머리와 심령에 담아두지 않는다면 유익이 없다.

(3) 제자들은 말할수 없이 어리석었다. 마가복음은 저희가 이 말씀을 알지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말씀은 아주 간단한 것이었는데도 제자들은 실제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것을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할수 없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잘못을 깨달으려고도 또한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려고도 하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에는 '저희가 깨닫지 못하게 숨김이 되었음이라'고 부언되어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상하여 너무 슬퍼하지않도록 그 말씀이 자비로써 숨겨졌다고 생각할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의 역설이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가장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심(45-48)

이 구절은 앞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이런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일을 다시 본문에서 대하게 되었다.

(1) 명예에 대한 야망, 그리고 우위에 대한 자리다툼은 걸핏하면 우리 주 예수의 제자들에게 찾아드는 죄였다. 그들은 그토록 극복해야 하며 부끄럽게 생각해야 했던 부패에 물들게 되었다(46절). 이 세상에서 크고자 하는 자들은 높은 자리를 노린다. 그러나 그들을 높여주는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많은 유혹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작아지는 것, 가장 작아지는 것,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아지는 것을 기뻐하는 자들은 그러한 고통과 유혹을 받지 않는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완전히 알고 계신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47절). 그에게 있어 생각은 말이고 속삭임은 큰 외침이다.

(3)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묵묵히 겸손해짐으로써 얻게될 명예를 구하고 끊임없이 치솟는 야망에 의해서 얻어질 명예는 구하지말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셨다(47절). 왜냐하면 그는 항상 어린아이들을 애정과 친절로 대하셨기 때문이다.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이 어린아이의 품성처럼 겸손하고 조용하고 평온하라고 하셨다. 만일 그렇게 됨으로써 유익을 끼칠수만 있다면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즐거워하라.

2) 이것이 바로 높아지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케 하셨다. 그들(제자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닮은 자들이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그의 이름으로 그들을 영접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가 사랑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사랑을 받게하고자 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48절).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그들을 영접하고 환영하는 것보다 더 큰 명예가 어디 있겠는가?

4.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편협됨을 책망하심(49,50)

그리스도는 그를 존경하고 섬겼던 한사람을 실망시킨데 대해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그 사람은 제자들의 동료는 아니었지만, 우연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를 믿었으며, 진실한 태도로 믿고 기도하면서 그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쫒은 자였다. 제자들은 그를 비난하고 견제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전파하는 일을 못하게 하였다. 그것은 그가 제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았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행한 일을 꾸짖으셨다. 금하지 말라(50절). "오히려 그를 격려해 주라. 그도 너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느니라. 그는 똑같은 길에서 너희와 동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똑같은 목적지에서 너희와 만나게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이다. 그러니 그를 격려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친구는 적고, 적은 많으므로 우리는 친구를 잃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은 비록 우리와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 인정받게될 것이다.

 

Ⅶ. 제자들의 그릇된 열심 9:51-56

이 본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비신자들을 죽이고 싶어한다. 이에 대해 그리스도는 그들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독단과 박해정신은 그리스도의 정신에 정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 예수께서 예루살렘행을 결심하심(51)

속죄와 구원을 위해 고난받을때가 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준비하시고 결심하셨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때는 정해져 있었다. 예수께서도 그때를 잘 알고계셨다. 그는 모든 사람들앞에 공공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으며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매우 분주하게 일하셨다. 그는 자기의 죽음과 고난이 다가왔음을 알고, 그것들을 통해 뒤따라올 영광을 바라보셨다. 그때가 되면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심을' 받게될 것이다(딤전 3:16).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죽음은 올리움을 받는 것이요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서 그와 함께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가올 기쁨을 예상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단념하지 않으시고 즉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 그는 기쁨을 가지고 용기있게 그곳에 가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의롭다 인정받을뿐만 아니라 영광도 받을 것이며, 수치를 당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올리우심을 받을' 것임을 아셨으므로 실망하지도 낙담하지도 않으셨다. 이 일을 볼때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꺼리는 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2.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들의 무례함(52,53)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예의를 지켰다. 그는 쉴곳을 정하고 자기와 제자들이 쉴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사자들을 앞서 보내셨다(52절). 그는 그들이 그가 오는 것을 보고 놀라지않도록 몇사람을 보내 준비하게 하셨다.

(2)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께 무례하게 대했다(53절). 그들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을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만일 그들이 예수를 영접했다면 그는 가장 큰 축복을 베푸셨을 것이지만, 그들은 예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과 사라미아인들 간의 논쟁은 예배장소에 관한 것이었다. 즉 예루살렘이냐 시갈 근처의 그리심산이냐 하는 문제였다(눅 4:20). 그들사이의 반목이 극심하였으므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했으며 사마리아인도 마찬가지였다(요 4:9). 사마리아인들은 특히 세상에 잘 알려진 그리스도를 환영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고 그것을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전의 전도여행때 그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예의를 베풀지않았던 것이다.

3. 이러한 모욕에 대해 야곱과 요한이 분개함(54)

이 두제자는 이 소식을 듣고 화를 냈다. 그리고 이 마을에 소돔의 저주를 내리도록 그리스도께 청했다.

(1) 여기서 제자들에게 몇가지 칭찬할만한 점이 있음을 알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능력에 대한 큰 확신을 볼수 있다. 그들은 말로써 하늘에서 물을 내려오게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말을 우리가 하기를 원하신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2) 그들은 선생님의 명예를 위해 열심이었다. 가는 곳에서 마다 선을 베풀었고 환영을 받았던 그들의 선생에게 하찮은 사마리아인들이 마음대로 통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의 선의를 따랐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을 하려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4) 그들에 앞서 간 선지자들의 예를 언급하였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할까요"라고 물었다(개역한글 성경에는 이 말이 없다-역주). 그들은 이러한 전례가 오늘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우리도 훌륭한 사람들의 본보기를 잘못 적용하기가 쉽다.

(2) 그들의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지만, 잘못된 점이 더 많았다.

1) 우리 주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처럼 모욕을 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모욕을 끝까지 참으셨다.

2) 사마리아 사람들에게서는 더좋은 대우를 기대할수 없었다. 그들은 아마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마 10:5)고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 잘알고 있었던 다른 사람보다 나쁜 것은 아니다.

3) 그 마을에서 단지 몇사람만이 그리스도에게 무례하게 대했을 것이다. 제자들은 자세히 알지못했지만, 그리스도가 그 마을에 가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러 나와서 그를 환영했을 것이다.

4) 그들의 선생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늘로써 불을 좇아내리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그리스도가 보아너게(우리의 아들 막 3:17)라고 불렀던 제자들이었다. 그 이름처럼 그들은 행동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그들 역시 빛의 아들이 아닌가?

5) 엘리야의 예는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 엘리야는 율법의 두려움을 알리도록 보내졌지만,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은혜의 법이다. 그토록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는 여기에 전혀 맞지않는다.

4. 그리스도가 야고보와 요한을 책망하심(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을 몹시 사랑하는만큼 꾸짖고 벌하신다. 특히 그리스도에 대해 열심히라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어울리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일을 했을때 그렇게 하신다.

(1) 그리스도는 특별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해 준다. "너희는 너희에게 어떠한 영이 있는지 모른다"

1) "너희는 너희 주님에 대한 열성이라는 구실속에 감추어진 자만, 분노, 원한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선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부패가 숨어있다. 아니 그것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은 그것을 알지못하고 있다.

2) "너희는 선한 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무엇인지 확실히 배워야 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늘로부터 불이 아닌 은혜가 그들에게 내려오기를 구하라고 배우지 않았느냐? 너희는 사랑, 자유, 은혜의 법아래 있다." 그것은 땅에는 평화요 사람에게는 축복이다라는 선포속에 잘 나타나 있다.

(2) 그리스도는 그의 종교의 일반적인 뜻과 취지를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56절). '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개역한글 성경에는 난외에 기록되어 있음-역주). 그리스도는 그의 거룩한 종교를 불과 검으로가 아니라 사랑과 친절,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끌고 애정을 느끼게 하는 모든 방법으로 전파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때처럼 천벌과 파괴의 기적으로가 아니라 치유의 기적을 행함으로써 전파하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적의를 제거하고 그것을 마음에 품지못하게 하기위해서 오셨다. 그는 사람의 영혼을 구하러 오셨을뿐만 아니라 생명도 구하러 오셨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며, 인간적인 유대나 사랑의 끈으로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라고 가르치셨다.

5. 그리스도가 이 마을을 떠나가심(56)

그리스도는 그들의 무례함을 벌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평화스럽게 다른 촌으로 가셨다. 즉 그다지 완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례히 행동한다면 우리는 복수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그와 마찬가지로 대우받지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Ⅷ. 주님을 따르려는 세부류의 사람들 9:57-62

본문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세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 한사람은 그리스도를 즉각적으로 따르고자 나서는 자이다. 그는 너무 성급한 나머지 생각도 하지않고 앞일을 내다보지도 못하는것 같다.

1)그는 그리스도에게 큰 약속을 하였다(57절). 길 가실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서 볼수 있는 결심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라간다.

2)그리스도는 그에게 필요한 주의를 주었다. 즉 그를 따르는 자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에게 큰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자는 머리 둘곳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생각할수 있다.

①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주 비천한 상태로 계셨다. 그는 훌륭한 왕자들이 으레껏 가지고 있는 장식품은 물론 여우나 공중의 새에게 있는 것조차 가지고 있지 않으셨다. 그는 모든 것을 만드셨지만 자기를 위한 거처, 즉 머리 둘곳은 만들지 않으셨다. 본문에서 그는 자신을 인자, 곧 육과 피를 가진 아담의 아들로 부르고 계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있는 곳에도 낮아지는 것을 기뻐하시며, 이로써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이 세상에 대한 거룩한 경멸과 저 세상에 대한 계속적인 소망을 가르쳐주신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비천해져서 가난한 그의 백성들에게 가난을 견디기 쉽게 해주셨으며 정당화 해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대접을 받는 것에 당연히 만족해야 한다.

②이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심사숙고해야될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한다면 다른 어떤 것도 우리가 믿는 하늘나라보다 더 중시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는 이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춥고 불편하게 되며 푸대접을 받고 모욕을 당하면서 살게된다는 것을 염두해 두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이 일에 복종할수 없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려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그 사람은 돌아갔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는 이와 반대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실망하지 않는다.

(2)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심한 또 한사람이 있다. 그는 하루만 기다려 달라고 청하였다(59절).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먼저 이 사람을 부르셨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나를 좇으라'고 하셨다. 그리스도가 부르셨던 이 사람은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나중에는 복종했던것 같다. 원하는 것도 그가 아니고 행하는 것도 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고 불러주시는 것이다.

1)그의 변명 : 나로 먼저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나에게는 집에 늙은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오래 살지못할 것이며 살아있는 동안 나를 필요로 합니다. 가서 아버지가 죽을때까지 보살피게 하옵소서. 그러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가지 유혹을 볼수 있다.

①일반적으로 제자직을 수행할때 우리는 쉬고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그 일을 미해결인채로 내버려두게 된다.

②우리의 의무로 알고있는 일을 연기하라는 유혹을 받게되어 그 일을 어떤 다른때로 연기한다.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신앙적인 일을 생각하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시간에 속음으로써 모든 시간에 속게되는 것이다.

③우리는 우리 친척에 대한 의무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지 못할것 같이 생각하도록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과 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2)그리스도의 대답 :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60절).

"너에겐 해야할 다른 일이 있다. 가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를 따르는 자들이나 사역자들에게 몰인정하게 되라고 하신 것은 아니다. 기독교는 가족 하나하나에 대하여 친절하게 대하고 선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님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데 대한 변명거리로 삼아서는 안된다. 만약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자들인 사랑하는 가족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멀어지도록 방해한다면 차라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잊을 정도로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하지않는 일은 어떠한 변명으로도 용납될수 없다.

(3) 본문에는 기꺼이 주를 따르고자 하는 또 한사람이 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친구들과 잠깐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1)그는 간청했다.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61절). 이 말을 "가서 가사를 정리하게 하소서"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기에서 잘못된 점을 찾아보자.

①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서글프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로 생각하였다. 그 일이 그에게는 마치 죽으러가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해야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를때, 그는 그들과 계속해서 함께있을 때보다 더 큰 위안과 축복을 얻을수 있을 것이다.

②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철저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적인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것 같다. 그는 가족과 친척에 대해 관심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그를 주저하게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작별인사를 한번 했었을 것이다. 떠나기가 싫어서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의 집에서 편하게 있었기 때문이다.

③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고자하는 그의 계획이 유혹받도록 하는데에 자진해서 뛰어들고 있다. 집에 편히있는 자들에게 가서 작별인사를 하는 것은 그의 결심을 바꾸게할 정도로 강한 유혹을 받게끔 자신을 유도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집에 있는 사람들은 그에게 자기들을 떠나지말라고 간청할 것이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들을 유혹하는 것들을 가까이 하지않도록 애써야 한다.

2)그리스도는 그의 간청을 듣고 다음과 같이 책망하신다(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 그렇게되면 쟁기질을 잘못하여 쟁기질한 땅에 씨를 뿌리지 못하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하면서도 세상적인 생활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갈망한다면,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다. 만일 네가 무성의하게 쟁기질을 한다면 너는 하나님나라의 좋은 씨를 뿌리기에 적합한 땅이 되지 못한다."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위해 하는 것이다. 묵혀진 땅을 경작하는 법을 모르는 자들은 씨뿌리는 일에 적합하지 못한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쟁기를 잡고서도 수시로 뒤를 돌아보고 그 일을 그만둘 생각을 하게된다. 뒤를 돌아보다가는 후퇴하게 되며 후퇴는 곧 파멸이다. 얼굴을 하늘로 향하였다가 뒤돌아보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적합하지 않다. 끝까지 견디는 자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 해설

그리스도의 사역 ( 9 )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실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고 우리를 위한 최종적인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자기에게 정해진 길로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에게 친밀히 말씀하시고 메시야의 놀라운 일들을 자세히 보여주십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길이 그의 앞에 놓여있기에 그는 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가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의 방식도 정리해야할 것입니다.

 

1. 무리를 배불리 먹이심

1) 열두 제자의 파송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위임할 사역을 실천하도록 여행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고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하기 위해서 내어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에 의해서 그들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믿고 능력을 과신하고 있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이 우리에게 있어야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a.열두 제자(마10:1-4).

b.복음 전파(눅4:43).

2) 오천명을 먹이심

예수께서 많은 무리들이 광야에서 주리고 있을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시는데,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남자가 오천명쯤 되는 무리를 먹이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를 예수께서 해결하신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하시고 풍족하게 해주신 것은 그의 나라에서 누릴 것을 미리 맛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를 바라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모든 것을 해결하시고 풍족히 베풀어주신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드리고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예수의 약속과 인도하심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워주십니다.

a.하나님의 은혜(행14:17).

b.선한 열매(약3:17).

3) 베드로의 고백

예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의 칭찬을 듣게 됩니다.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은 이제 예수께서 어떠한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밝히는 계기가 됩니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교정하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길을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를 구원하실 구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예수는 그대로 수용하셨습니다. 참 신앙의 고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a.주를 섬김(롬12:11).

b.사명 완수(눅12:50).

 

2. 수난 예고

1) 첫번째 수난 예고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와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먼저 그 길을 걸어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는 길 같지만 예수와 함께 걸어가는 그 길이 생명과 영광의 길입니다. 이 길은 찾는 이가 적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위한 성도들의 발걸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직 그곳에만 생명이 있고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난을 무서워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a. 예언(벧전1:11).

b.영광에 이르는 길(히2:9-10).

2) 영광스러운 변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잠시 보여준 것은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영광에 대한 보장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임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광채는 제자들에게 황홀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알수 없는 경험을 하고서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확실함입니다. 이것을 보고도 믿지않는 자들은 그들의 보응을 받게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일을 인도하실뿐 아니라 그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바라볼 뿐입니다.

a.사람에게 나타내심(요2:11).

b.영원한 것임(히13:21).

3)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심

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을때 예수께서 그 아이를 고치시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다시 알리셨습니다. 메시야로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시기 위해서 감당하시는 사역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기신 권세를 물려받은 사람들이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마음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권세와 능력을 주셨는데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있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하는 것입니다.

a.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요6:39).

b.생명을 주심(요10:10).

 

3. 예수를 따르려면

1) 두번째 수난 예고

예수께서 자신이 당할 일에 대해서 두번째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모든 일을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이 먼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의 일이 먼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을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난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않는 것입니다.

a.고난에 동참함(빌3:10).

b.신자들에게 위로가 됨(고후1:5-6).

2) 누가 제일 큰 자인가

제자들에게 관심이 되는 것은 예수께서 이루실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큰 자로서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는지에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들의 관심과 다르기때문에 그들은 다른 일에 열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가장 작은 이가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철저히 낮아지셨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이 높아지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를 본받는 자들은 예수를 따라서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a.신자들의 행동 규범(롬12:16).

b.그리스도의 모범(요13:4-5).

3) 예수를 좇으라

인간의 모든 일이 허무한 것이지만 예수를 따르는 길은 복되고 가치있는 일입니다. 그 길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으며 영광이 있고 기쁨과 희락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걷기위해서는 그가 제시하신 방법대로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께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그를 향해서 힘차게 달려가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초대에 응하는 사람에게 그의 구원의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합당한 자에게 합당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a.그리스도를 본받음(빌3:10).

b.복된 특권(행5:41).

 

결론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실 길을 걸어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초대는 지금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면서 예수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따라서 그와 함께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루시는 일을 바라는 전적인 의뢰만이 그를 기쁘시게 합니다.

 

# 핵심

9:1-9

지금까지 혼자 사역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전도하러 보내셨다. 그 결과 분봉왕 헤롯도 듣고서 당황할 정도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쟁기질(9:62)

쟁기는 주로 소에 매어 논밭을 가는데 사용한다. 따라서 쟁기질하는 사람은 한손으로 쟁기를 잡고, 또 한손으로는 소를 부린다. 이때 앞을 보면서 똑바로 나가야지 자꾸 뒤를 돌아보면 밭고랑을 곧게 팔수 없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에 착안하여 누구든지 세상 것에 집착하는한 주의 일에 힘쓰기 어렵다는 교훈을 베푸셨다.

 

# 묵상

열두 제자 파송 ( 9:1, 2 )

갈릴리 사역을 위하여 주님은 제자들을 짝지어 파송하셨습니다. 교회는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가 있는데, 여기서는 흩어지는 교회로써의 파송인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열두 제자를 불러모으시고,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게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교회가 모이면 주님의 능력과 권세로 무장하고, 세상에 나가면 구원사역에 힘써야 합니다.

따라오는 무리들을 향한 예수님의 행동 ( 9:11-17 )

그들을 친히 영접하셨고 하나님나라의 일을 이야기해 주셨으며 병자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처세술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윤리를 가르치심으로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배우고 따를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특히 오천명을 먹이실때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모든 사람을 먹이는 놀라운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이적에 쓰인 오병이어는 한 어린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이었습니다(요6:9). 이와같이 주님의 놀라운 역사에는 우리의 작지만 정성어린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헌신이 있을때 오천명이 먹은 증산(增産)의 이적과 모두 골고루 배불리 먹은 분배(分配)의 이적이 일어납니다. 오늘날 증산의 이적은 많이 일어나지만 분배의 이적이 일어나지 않아 사회와 교회가 주름잡혀 있습니다. 교회는 분배의 이적에도 관심을 기울여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는 풍요한 역사를 이루어야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단계 ( 9:18-27 )

구원 얻은 후의 신앙의 성숙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을 인간으로 아는 단계로써(18-19), 이는 신앙을 갖기 이전 단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단계(20-21)요, 더나아가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는 단계입니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 ( 9:28-31 )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의논을 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들을 대표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은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에 부합되며 이를 완성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죽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별세(엑소더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출애굽을 의미하며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삶을 의미합니다.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의 제안 ( 9:33 )

베드로는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자고 했습니다. 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용모가 변화되는 것을 보고는 그 영광스런 모습에 사로잡혀 산을 내려가야 한다는 현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현실도피의 수단이 아닙니다.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도 않지만,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현실과 함께 미래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무력함 ( 9:37-40 )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왔을때 제자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는 무력함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셨으나(1절) 제자들은 믿음이 없어 귀신들린 아이하나 치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영광스런 일만 추구하고 마땅히 해야할 섬기는 일을 등한시한 결과였습니다.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 9:44, 45 )

예수님께서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져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묻기마저 두려워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깨닫지못한 까닭은 그런 상황이 오는것 자체를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큰 자 ( 9:46-48 )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속에 교만과 자만심이 자리잡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모든 죄악 중에 교만처럼 물리치기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냉정해질때만이 교만을 물리칠수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에서의 가치관과 질서는 세상의 것과 다릅니다. 세상의 우두머리는 만민위에 군림하지만,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 ( 9:57-62 )

예수님을 좇겠다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좇는 일은 일순간의 감정으로 덤빌 낭만적인 일이 아닌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이를 알지못하고 쉽게 덤벼들었다가는 좌절과 포기에 직면하기 쉽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가족을 돌보는 의무를 무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자가 취해야할 마음가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부름을 받고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5:11).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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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감격으로 맞을 구세주 예수님의 성탄

[누가복음 2장 25절~38절]
25절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절 -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절 -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절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절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절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절 -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절 -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절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절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절 -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절 -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아기 예수를 만납니다. 그가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만민 앞에 예비하신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성전에서 주야로 금식하던 안나도 그때에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아기에 대해 말합니다.

1. 주의 구원을 본 시므온 (25~35절)
주님을 만나는 것은 생애 최대의 감격입니다. 의롭고 경건한 시므온은 죽기 전에 메시아를 볼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관례대로 결례(정결 의식)를 행하러 성전에 왔을 때,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는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장차 이스라엘의 영광이자 이방인을 구원하는 계시의 빛이 되실 것을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희망찬 미래만 예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게 구원을 베풀고 심판을 선언하는 일을 하실 것이고, 그로 인해 비방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자기 백성에게 오셨지만 배척받으실 것입니다(요 1:11). 이로 인해 그분의 가족은 칼이 마음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아무리 메시아를 고대하던 사람들이라도, 모두가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이 하시는 사역을 수긍하며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 목적이 기준이 되어 거기에 맞는 구세주를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자신을 그분께 기쁘게 드리는 사람은 최고의 복, 곧 구원의 복을 누립니다.
* 지금까지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왜 비난의 대상이 되어 왔을까요? 나는 비난도 기꺼이 감수하는 주님의 제자인가요?

2. 메시아를 만난 선지자 안나 (36~38절)
날마다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납니다. 안나는 오랜 세월 과부로 지내 온 선지자입니다. 그녀는 84세가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고대하던 메시아를 만나는 복을 누립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립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이 있습니다.
* 아기 예수님을 만나던 때 안나의 경건 생활은 어떠했나요? 나는 성탄 예배를 어떠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는지 살펴보세요.

오늘의 기도
더딘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결코 너무 늦은 법 없이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시는 주님! 성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고난 속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빛을 비추어 주소서. 믿음을 잃지 않고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참된 위로를 얻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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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수를 돕는 여인들 8:1-3

(1) 그리스도의 필생의 사업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함에 있어서 그는 지칠줄 몰랐으며, 선을 행하면서 두루다니셨다(1절).

1)그가 전파한 장소 : 그는 두루다니셨다. 그는 순회 설교자이셨으므로 한 장소에서만 설교하지 않고 그의 빛을 사방에 퍼뜨리셨다. 그는 각 성에 두루다니셨으므로, 그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모든 성과 촌을 다니셨듯이, 제자들도 이 땅의 모든 나라에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그는 성(도시)에만 간 것이 아니라, 시골 주민들이 사는 촌에도 가셨다.

2)그가 전파한 내용 : 그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반포하셨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식은 기쁜 소식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것을 전하러오신 것이다. 구제와 화해에 대한 소망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게는 기쁜 소식이었다.

3)그를 따르던 자들 : 후에 어떻게 전파할 것이며 무엇을 전파할 것인지를 배우고자 열두 제자가 함께하였다.

(2) 그는 생활필수품을 어떻게 조달하셨나 : 그는 그의 친구들의 호의에 힘입어 살아가셨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를 섬긴 여인들이 있었다(2,3절). 그들 중 몇몇의 이름은 나와있지만,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1)그들 대부분은 그의 능력과 자비의 기념비같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고침을 받은 자들이었다. 우리는 관심을 가지고 그를 섬겨야하며, 그렇게하여 우리가 곤경에 빠질때 그에게 도움을 청할수 있도록해야 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분을 섬겨야하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그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2)그들가운데 한사람이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 마리아였다. 어떤 학자들은 그녀가 매우 사악했던 자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녀가 바로 앞에서(7:37) 언급된 죄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수도 있다. 그녀는 회개와 개심으로 자비를 얻었으며 그리스도의 열심있는 제자가 되었다. 개심하기 전에 사악했던 자일수록 개심한 후에는 더욱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자 애쓰게 된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실때와 무덤에 들어가실때 함께있었던 여인이었다.

3)또다른 한사람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였다. 그녀의 남편은 비록 헤롯의 궁정에 기용되어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였으며, 그의 아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를 섬기도록 기꺼이 허락하였다.

4)자기들의 소유로 그리스도를 섬긴 자들이 많았다. 그는 부요했지만 우리를 위하여 가난해지셨으며 그에게 주어지는 자선금으로 살아가셨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과 제자들의 생계를 낯선 자들에게 부담지우기보다는 잘아는 친구들에게 신세지고자 하셨다. '모든 좋은 것들로 가르쳐준 자에게 자기 소유를 나누어 주는 것'은 말씀을 배운 자들의 의무이다.

 

Ⅱ. 씨뿌림의 비유 8:4-21

앞부분의 단락은 그리스도가 열성으로 말씀을 전파하시는데 대한 설명으로 시작되었다(1절).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열심히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4절). 그리스도는 말씀을 전파하기 위해 각 성에 가셨지만, 여기서는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왔다.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오실때까지 기다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로 오시면 그를 만났고 그가 그들에게서 떠나시면 그를 쫓았다. 큰 무리를 이루니. 그가 그물을 던져 잡을 고기가 많아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가르침을 받으려하자, 즉각적으로 그리고 기꺼이 그들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는 말씀을 듣는데 필요하고도 훌륭한 법칙과 주의사항이 들어있다.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그 비유의 의미에 관하여 물었다(9절).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듣는 말씀의 내연과 외연을 알도록 애써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비밀과 의미를 알게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없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느니라(10절). 만약 똑같은 말씀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그침으로써 그들이 그저 흥미를 가질뿐인데 반해, 우리는 진실로 알기 쉬운 진리로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진실로 행복한 자들이며 무상의 은혜에 영원토록 빚진 자들이다. 이제 그 비유의 내용과 설명을 살펴보자.

1)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에 대해서 토양과 같다. 인간의 마음은 능히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뿌려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날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토양에 씨를 뿌리는 일에 마음을 써야한다.

2)씨뿌림의 성공의 여부는 토양의 성질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됨됨이에 따라 우리에게 생명의 향기도 되고 죽음의 냄새도 된다.

3)마귀는 교활하고 악의에 찬 원수이다. 마귀는 부주의한 자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감으로써 그들이 믿어 구원받지 못하도록 만든다(12절). 믿지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기위해 이러한 설명이 본문에 부연되어 있다. 그러므로 마귀는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들을때 그것을 믿지못하게 하려고 믿음을 방해할만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따라서 비록 우리가 당장은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할지라도 그것을 잊어버리게 하거나 흘러 떠나가게 한다(히 2:1). 또한 우리가 그것을 기억할때 조차도 우리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나쁜 편견을 갖게하거나 다른 것에 마음을 돌리게끔 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믿어 구원받지 못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4)하나님의 말씀을 부주의하게 듣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것을 경멸하기도 한다. 이 비유를 보면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밟힌다고 덧붙이고 있다(5절).

5)말씀에 어느 정도 감명은 받으나 그것들을 깊고 지속적으로 간직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한 자들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과 같아서 뿌리가 없다(13절). 이들은 잠깐동안은 믿으며 그들의 고백을 통하여 뭔가를 약속하지만 시험의 때가 오면 처음에 했던 선한 약속을 배반하게 된다.

6)이생의 쾌락은 위험하고 해로운 가시와 같아서 말씀의 선한 씨앗이 결실치 못하게 방해한다. 여기 덧붙여진 이 말씀은(14절) 다른 복음에서는 없는 것이다. 감각의 쾌락은 아무리 적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깊이 빠지면 영혼을 파멸시킨다.

7)단지 열매를 맺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온전한 결실을 맺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완전히 성숙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렇지않다면 전혀 열매를 맺지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결실치 못한'이라고 한 것을 여기서는 '온전히 결실치 못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8)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은 곧 착하고 좋은 마음이다(15절). 하나님과 자신의 의무에 열중하는 마음, 정직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 등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이다. 그러한 마음은 말씀을 들은후 그것을 깨닫고 받아들일뿐만 아니라 간직하기도 하는 것과 같다.

9)말씀을 잘 지키는 자는 인내로써 결실하게 된다. 이 말씀도 여기 누가복음에서만 덧붙여져 있다. 이는 끊임없이 인내하여 좋은 결실을 맺어야한다는 뜻이다.

10)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야 한다'(18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에서 유익을 얻지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들을 삼가야하며, 부주의하거나 가볍게 듣지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다음 우리가 얻은 것들을 잃지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 말씀을 전파하도록 임명된 자들과 그것을 듣는 자들은 다음의 교훈을 명심하여야 한다.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만큼 베풀어야 한다. 말씀으로 유익을 얻은 자들은 자신이 켜진 등불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등불은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아래 두어서는 안된다(16절).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하며 그 등불은 사람들앞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 지금 은밀하게 행한 일이 머지않아 '알려지고 나타나게될 것이다'(17절). 우리 자신은 밝히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재능을 묻어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느냐 사용하지않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지속되든지 떠나든지 한다. 즉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게되는 것이다(18절). 은사를 받아 그것을 가지고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많은 것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자기의 재능을 묻어두는 자는 그것을 잃게될 것이다. 가지지않은 자는 '그 가진 것'까지도 빼앗기게될 것이다(마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즉, '가진 줄로 알고있는'(누가복음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것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버려지는 은총은 단지 은총으로 보일뿐 참된 은총은 아니다. 사람들은 단지 소용없는 것을 가진 것으로 알고있는 것이다.

(3) 그리스도는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보다 그의 제자들을 더가까이 하며, 그들을 귀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19-21절). 이것은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말씀을 충실하게 듣는 자임을 스스로 입증하는 자들에게 크나큰 격려가 되었다. 얼마나 많은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쫓았는지를 살펴보자.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그에게 가까이 갈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가까운 친지들은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다지 애쓰지 않았다. 그들은 그의 말을 듣고자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그를 보려고 밖에 서있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친지들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의 일을 하는데 더 분주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 곧 자기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척들이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

 

Ⅲ. 풍랑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권능 8:22-39

우리는 여기서 우리 주 예수님의 권능을 입증해 주는 두가지의 예-바람을 지배하는 권능과 마귀를 지배하는 권능-을 보게된다(참조. 막4,5장).

1. 바람을 지배하는 권능(22-25)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바다로 나가자고 명하셨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다'(22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보내실때 그들과 함께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동행하는 자들은 어디든지 안전하고 담대하게 갈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그들은 바다가 고요할때,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쫓아 바다에 나아갔지만 풍랑을 대비해야 했다. 바다로 나갔을때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23절) 순식간에 배가 요동하여 물이 배에 가득찼고 그들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다.

(3) 그리스도는 폭풍속에서 잠들어 계셨다(23절). 그는 다소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과 바다에서 그리고 폭풍속에서 은혜롭게 함께 계셨지만, 마치 주무시는 것처럼 보였으므로 당장 그들을 구해주지 못할것 같았다. 그렇게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시고자 하셨으며, 그들이 마침내 구원을 받게되었을때 더욱 기쁘게 맞아들일수 있게 하셨다.

(4) 우리가 위험할때 그리스도께 호소하는 길은 그를 깨워서 우리앞에 나서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24절). 그들은 소리쳤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두려움을 잠잠케하는 길은 그 두려움을 그리스도에게로 가져가는 것이다. 충심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자들은 그리스도가 자기들을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할수 있을 것이다.

(5) 사단이 하는 일은 광풍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광풍을 잔잔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일을 하기를 기뻐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땅위에 평화를 선포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그가 바람과 물결을 꾸짖자 곧 그치고 갑자기 잠잠해졌다(24절).

(6) 위험이 지나가면 우리가 두려워했던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의 권능에 대해서 영광을 그리스도께 돌려야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을 책망하셨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5절).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 중에서도 그들이 정작 그 믿음을 사용해야할 때가 오면 다시금 믿음을 구하려고 애쓰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하찮은 것으로 낙심하게 되는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그의 권능에 대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들은 두려워하며 기이히 여겼다. 풍랑을 무서워했던 자들은 이제 풍랑을 잠잠케한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저가 누구인가'하고 서로 말하였다.

2. 마귀를 지배하는 권능(26-39)

풍랑이 잠잠해지자 곧 그들은 그들이 가고자했던 항구로 가서 '거라사인의 땅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해변으로 나아갔다(26,27절).

(1) 이 악령들은 대단히 많았다. 이 한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자들은 자칭 군대라고 하였다(30절). 왜냐하면 그 한사람에게 많은 귀신이 들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오랫동안 귀신들려 있었던 자였다(27절). 그 많은 귀신들은 실제로 군대였거나 아니면 적어도 군대로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2) 그들은 사람들에 대해 뿌리깊은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 귀신들려 있던 자는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않았다'(27절). 귀신들이 이 사람에게 '무덤 사이에 거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 자신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3) 귀신들은 대단히 강하고 흉포하여 제어하기가 어렵다. 또한 그들은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것을 끊고(29절). 어떤 다른 힘으로도 제어할수 없는 자들은 그 자체로써 그들이 사단의 지배하에 있음을 보여주는게 된다. 그는 귀신에게 몰려나간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사랑의 유대로 부드럽게 이끌림을 받지만 마귀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은 광포하게 몰려나간다.

(4) 귀신들은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격노하며 그를 두려워한다. 그 사람은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여'라고 시인하였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무한히 높고 어려운 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려하지도, 그에게서 은혜를 받으려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권능과 진노를 무서워 하였다. 그들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 하였다. 그들은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라고만 했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만 있을뿐 하늘나라를 성결과 사랑의 장소로써 소망하지 않는 자들이 어떠한 말을 하는지를 주목하자.

(5) 그들은 완전히 우리 주 예수님의 명령과 지배하에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였다'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오, 흑암의 모든 권세들이 주 예수의 저지와 지배를 받고있다는 사실은 주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가! 그리스도는 원하시기만 하면 그들을 그들의 본거지로 보낼수 있으시다.

(6) 귀신들은 남을 해하는 것을 즐긴다. 그들은 별 도리없이 이 불쌍한 사람에게서 떠나야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돼지 떼에게로 들어가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였다(32절). 귀신은 그 사람을 해할수 없게되자 돼지를 해하고자 하였다. 귀신은 사람들의 몸을 해할수 없게되면 사람들의 재산을 해치려하는데, 본문에서처럼 때때로 그것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귀신들에게 그 돼지에게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귀신들은 돼지에게로 들어갔다. 그러자마자 돼지떼는 광포하게 비탈로 내리달아 호수에 들어가 몰사하였다.

(7) 귀신의 권세가 파멸하면 귀신들렸던 자는 회복된다. 귀신 나간 사람은 예수의 발아래 앉았다(35절). 그는 귀신의 권세하에 있을때 예수앞에서 도망하려던 자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수의 발아래 앉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고 계실때 우리가 스스로를 제어하고 향유하도록 하시겠지만, 우리는 건강하고 유쾌하게 지낼수 있다. 그러나 사단이 우리를 점령한다면 그는 우리에게서 그러한 것들을 앗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고해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기적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첫째, 이 사건을 보고 그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나? 치던 자들이 그 된것을 보고 도망하여 성내와 촌에 고했다(34절). 그들은 귀신들렸던 자가 어떻게 치유되었는지를 보고하였다(36절). 즉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가 돼지를 귀신의 손에 넘겨주지 않고는 그 사람을 귀신에게서 구할수 없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귀신을 돼지에게로 보냈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된것을 보러 나와서 두려워하였다(35절). 그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37절). 그들은 고통받는 이웃의 구원보다는 돼지의 죽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이 예수께서 떠나시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기꺼이 자신의 죄된 생활을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자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말대로 하셨다. '예수께서는 배에 올라 돌아가셨다.' 돼지를 더 사랑하는 자들은 그들의 구주와 그에 대한 소망을 잃게 되었다.

둘째, 이 사건과 결과가 그 불쌍한 사람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나?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두려워한만큼 그리스도의 일행이 되고싶어 했다. 그리스도께 악령과 병을 치유받았던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그리스도에게 함께있기를 구하였다(2절). 그는 그리스도가 떠나주기를 바라는 그 거칠고 잔인한 거라사인들과 같이 살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어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위대한 일을 그를 아는 자들에게 알리도록 하셨다. 그렇게하심으로써 이제까지 그 마을의 짐이 되어왔던 그를 이제부터는 축복이 되게 하셨다. 때때로 우리는 다음 사람에게 유익을 줄만한 기회를 얻기위하여 영적인 은혜와 위안에서 오는 만족을 거부해야할 경우가 있다.

 

Ⅳ. 고침받은 혈루증 앓은 여인과 야이로의 딸의 소생 8:40-56

그리스도는 거라사인들에게 쫓겨나셨다. 그러나 그가 갈릴리 사람들에게 돌아오자, 그들은 그를 기쁘게 영접하였다. 그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고 그를 진정으로 환영하였다(40절). 그는 돌아오시자 그가 돌아온 곳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셨다. 우리 곁에는 언제나 도움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두가지 기적이 얽혀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러한 사실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볼수 있다.

(1) 한 회당장이 그리스도에게 공개적으로 간구하였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였는데, 그는 죽어가는 어린딸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간청하였던 것이다. 야이로는 회당장이었지만 예수의 발아래 엎드렸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기 집에 와달라고 간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멀리서 나으리라는 말 한마디만 해주셔도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부장의 믿음에는 못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의 요청을 들어주셨다. 그는 야이로와 함께 가셨다. 강한 믿음이야말로 칭찬할만한 것이지만, 약한 믿음이라도 거부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 가실때에 무리가 옹위하더라(42절). 우리가 의무를 행하며 선을 행하고 있을때 무리가 몰려들어 법석을 떤다하여 불평하지 말자.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가능한한 그런 일을 피할 것이다.

(2)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그리스도에게 은밀히 손을 대었다. 혈루증은 그녀의 몸과 재산을 좀먹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생활비를 모두 병치료에 써버렸으며, 그런데도 조금도 낫지않았기 때문이다(43절). 그녀의 질병은 공공연하게 말할수도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무리 중에 끼여서 그리스도에게로 다가갈수 있는 이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 그녀의 믿음은 대단히 강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고침받을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으며, 그를 넘치는 자비의 샘으로 생각하여 은밀하게 치유하는 힘을 얻어내어도 그가 부족함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많은 불쌍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치유받고 도움을 얻었으며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군중속에서 잃어버린바 된 자들이었다. 그 여인은 곧 자신의 건강이 좋아지고 질병이 고쳐졌음을 알았다(44절).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은밀하게 평안한 교제를 나눌수 있다.

(3) 은밀한 치유가 발각되었다.

1)그리스도는 누군가가 치유되었음을 알았다. 내게서 능력이 나갔도다(46절).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능력으로 치유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시인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가 그 사실을 알고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능력이 나가 뭔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시어 결코 아까워하시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들은 마치 태양의 빛과 열처럼 사람들을 기쁘게하기 때문이다.

2)그 불쌍한 환자는 자기가 치유를 얻고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47절). 그녀는 두려워하였지만 그녀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48절). 이렇듯 구원하는 믿음이 있다해도 두려움은 있을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그에게 손을 댄 연고로 일어난 일을 사람들앞에서 고하였다. 그녀는 한번만 손을 대도 치유받게 되리라고 믿었으므로 그렇게 했던 것이다.

3)주님은 그녀가 나았다는 것을 확증해 주었고, 그녀를 평안히 돌려보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48절). 그 치유는 은밀하고 떳떳치 못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안심하게 되었으며 분명하게 나았다는 확증을 받았다. 그녀는 치유를 받았으며, 치유되리라는 선언을 들었다.

(4) 그의 딸이 죽었으며 그에게 그 소식을 전해준 자들이 이 일로 선생을 더 괴롭게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능을 믿으라고 야이로에게 격려하였다.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그 아이는 죽었지만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5) 그리스도는 그녀의 생명을 소생시킬 준비를 하셨다.

1)그리스도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될 증인을 선정하셨다. 무리가 그를 따랐지만 아마도 그들은 무례하고 소란스러운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슬픔에 잠겨있는 사람의 집에 많은 무리를 들어오게 한다는 것은 도무지 탐탁치않은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을 돌려보내셨다. 그는 그 기적의 목격자들로 삼기위해 예정하셨던대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선정하여 부모와 함께 데리고 들어가셨다.

2)그는 통곡을 저지시키셨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해 울며 통곡하였지만 그리스도는 "울지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는 이 아이의 경우는 영원히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그녀의 친척들에게는 그녀가 잠간동안 자고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은 주 안에서 죽은 모든 자에게 적용될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자들을 희망이 없는 자들로 생각하여 슬퍼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죽음은 잠에 지나지않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이 통곡하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위로에 넘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사악하게도 그 말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여 비웃었다. 그들은 그 아이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있었으며 그것을 확신하였으므로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그 아이를 소생시킬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 모두를 나가게 하셨다(54절). 그들은 이 놀라운 사건의 목격자가 될 자격이 없었다.

(6) 그녀는 생명을 되찾았다.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마치 우리가 잠을 깨울때 하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아이야 일어나라(55절). 본문에는 다른 복음기자들이 단지 암시하기만 했던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즉 그 영이 돌아왔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때까지 이 아이의 영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않다. 그것은 영들의 아버지의 손안에 있었다. 그녀의 영이 돌아왔을때 아이는 곧 일어났으며 움직임으로써 살아있다는 것이 분명하여졌다. 또한 그녀의 식욕을 보아서도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녀가 식욕이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한 것에서 드러난다. 마지막 구절에서 '그 부모가 놀랐다'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 해설

메시야의 권세를 행하신 예수 ( 8 )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해 주십니다. 들을 귀있는 자들은 그의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로 말씀하셔서 귀한 말씀을 돼지에게 주는 일이 없도록 하십니다. 메시야로서 천국의 비밀을 점차적으로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들을 말씀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수 있도록 하십니다.

 

1. 비유로 말씀하심

1) 예수를 섬기는 사람들

예수의 행하시는 일이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듣게되면서 예수의 주변에는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손수 택하신 제자들이 있었고 그들과 함께 예수의 일을 돕고 섬기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헌신적으로 예수의 하시는 일들을 섬기며 봉사하였는데, 이들은 올바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과 봉사는 예수님의 칭찬을 듣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 그들에게 상급을 내리십니다.

a.많은 사람이 섬김(마27:55).

b.유업의 상을 받음(골3:24).

2)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예수께서 천국의 귀한 말씀을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심으로 들을 귀없는 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도 무슨 말씀인지 알지못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이 많지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가운데 복음의 길로 나아온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씨가 여기저기에 뿌려졌지만 결실하는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진 씨뿐입니다. 좋은 땅이 되지 못한 자들에게는 결실의 기쁨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준비됨은 결실의 기쁨과 연결됩니다.

a.믿지않는 자들에게 진리를 감추기 위함(마13:10-11).

b.예언을 성취하기 위함(마13:34-35).

3) 비유의 설명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의 진정한 뜻을 밝히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아시기때문에 비유의 말씀을 해석해 주시는 것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 씨를 받은 좋은 땅의 자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있으되 그 말씀에 반응하고 말씀을 잘 지켜서 그대로 이루는 결실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땅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 됩니다. 그 누구도 빼앗을수 없는 확실한 상급을 받게 됩니다.

a.요점을 설명함(눅10:27-28).

 

2.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1) 등불의 비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행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빛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어두움에 비추지않으면 필요가 없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용할수 있도록 자신을 주어야합니다. 자신을 내어놓지 않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될수 없습니다. 철저한 헌신이 훌륭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적당히 타협하려는 마음은 모든 것을 망치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아 진정한 헌신의 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a.근면(잠31:18).

b.사람 앞에 비춤(마5:15).

2)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

예수께서 자신의 모친이며 동생으로 말씀하신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이토록 많은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 있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은 재물과 학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질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만이 이 권세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a.흠 없이 행함(살전2:10).

b.성령을 좇아 행함(롬8:4).

3) 잔잔해진 풍랑

예수의 권능은 자연의 풍랑까지 잠잠케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분임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닙니다. 만물을 만드신 이가 바람을 잠잠케했다고 대수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에 이 일로 매우 놀랐습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는 창조주이시며 섭리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a.만물을 창조하심(사40:26).

b.만물을 주재하심(대상29:12).

 

3. 권세있는 예수

1) 마귀와 돼지 떼

예수께서 각종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고 예수께 나아와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어리석은 인간들은 예수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거부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예수의 신분을 알고 그에게 엎드리어 굴복합니다.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어리석고 답답한 존재인지 알수 있습니다. 귀신이 나가서 온전케 된 사람은 이제 그에게 일어난 일을 온 성내에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일어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전도의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a.하나님이 주신 권세(요17:2).

b.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 되심(골2:10).

2) 혈루증 앓는 여인

예수의 능력을 알고있는 사람이 예수의 고치심을 바라는 마음과 그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아올때 그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혈루증 앓는 여인을 보고 하시는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믿음임을 알게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인도하는 능력이 되어줍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구원이 일어난 것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아야할 때입니다.

a.불구자를 고치심(마9:28).

b.만물을 복종케 하심(빌3:21).

3) 야이로의 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메시야의 권세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계에 부딪쳐 있을때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 알수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의 이적은 사람들의 모든 절망을 없애버리시고 우리에게 참 희망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어둠과 죽음의 권세에 눌려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밝은 빛과 희망의 나라를 바라보고 힘차게 달려가야할 때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를 바라보고 그에게 나아가는 발걸음이 복되고 즐거운 일이 되어질 것입니다.

a.부활의 권능(롬1:4).

b.무한한 권능(마28:18).

 

결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많은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신실한 신앙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다른 것으로 요구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실천하며 많은 열매를 맺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말씀을 생활의 법으로 여기며 실천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그분이 원하시는 실천의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8:1-21

씨뿌리는 비유와 등불 비유, 참된 혈육 관계에 대한 교훈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전하며 실천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임을 가르친다.

막달라 마리아(8:2)

갈릴리바다 서쪽 연안에 위치한 막달라 출신. 흉악한 일곱 귀신에 시달리다가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고침받은 이후로 그분을 믿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물질적으로 공궤했을뿐 아니라,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그분이 십자가에 달릴때와 무덤에 장사되실때에 쭉 지켜보았다(마 27:56,61).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서 맨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전한 사람들 중 한명이기도 하다.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7:36-50)과 동일 인물로 보는 전승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베드로(8:45)

‘요한의 아들’, ‘바요나’로도 불렸다. 예수님이 그에게 아람어로 ‘바위’, ‘반석’을 뜻하는 ‘게바’란 이름을 주셨는데, 헬라어로 번역하면 ‘베드로’이다.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어부로 지내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는 수제자가 되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시던 날 밤에는 그분을 세차례나 부인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체험한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활약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로 가서 전도하다가 네로 통치때 순교했다고 한다.

 

# 묵상

예수님의 협력자 ( 8:1-3 )

예수님의 전도여행에 동참한 여인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등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만남으로 자신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받고 올바른 헌신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씨뿌리는 비유 ( 8:5-15 )

길가에 떨어진 씨는 공중의 새들이 먹었습니다. 이는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버렸음을 의미합니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는 싹이 났다가 곧 죽어 버렸습니다. 이는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곧 시험에 든다는 의미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가시떨기에 기운이 막혀 자라지 못했습니다. 이는 이생의 염려와 재리, 일락에 기운이 막혀 결실을 맺지못함을 의미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옥토에 떨어진 씨가 땅속에서 죽고 썩어야 싹이 돋고 많은 결실을 맺듯이 참된 신앙인은 늘 자신을 말씀에 쳐서 복종시키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때 온전히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 8:10 )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보아도 보지못하고 들어도 깨닫지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복음이 차별적으로 선포된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깨닫는데에는 전인격적인 결단이 필요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등경 위에 두는 등불 ( 8:16, 17 )

이는 누구나 그 빛을 보게하기 위함입니다. 등불은 어둠을 비추기위한 것으로 평상아래 두지 아니하고 높은 곳에 걸어둡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등불입니다. 따라서 그 빛을 비추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살때 그리스도의 빛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비출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들은 자 ( 8:16-25 )

말씀을 가슴에 담고있는 자는 그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등불은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아래 두면 등불의 역할을 제대로 할수 없듯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새사람이 된 사람은 이 말씀을 이웃에게 전해야하며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님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은 자는 강하고도 담대한 믿음의 생활을 해야합니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인생의 모든 풍랑을 극복하는 열쇠가 됩니다. 강하고 능력있는 삶만이 승리할수 있습니다.

광풍을 두려워한 제자들 ( 8:22-25 )

제자들은 예수님께로부터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광풍이 몰아칠때 예수님을 깨우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깨우지않는 것보다는 깨우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꾸중하셨습니다. 참믿음은 세상의 광풍을 스스로 물리치는 능력이 있게 합니다.

귀신들린 거라사인 ( 8:26-37 )

거라사인에게 들어간 귀신의 이름은 군대(레기온)입니다. 레기온은 로마의 군단을 가리키는 말로써, 매우 강한 군대를 뜻합니다. 이처럼 강한 힘을 가진 귀신도 예수님 앞에서는 물러갈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능력의 주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담대히 세상의 악귀들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이때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바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영혼을 건지는 것보다 잃어버린 돼지떼에 더욱 마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또다른 재산상의 손해가 있을까봐 예수님께서 떠나시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에 마음쓰기보다 예수님과 함께 이루는 구원 사역에 더 우선을 두어야 합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 8:41-50 )

회당장은 외동딸이 죽어가므로 예수님을 찾아야했습니다. 회당장은 유대교 사회의 중요한 지도급 인사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으나, 그는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예수님만이 의지할 분이라고 결단하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죽음이 끝이지만 하나님께는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넘어선 삶을 보여주심에 감사하고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자 ( 8:42-48 )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댐으로 병고침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피흘리는 여자를 부정하게 보아 사회로부터 격리시켰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종교의식에도 참여할수 없었고 사람들과 만날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와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옴으로써 치유함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 Study

 

Ⅰ. 백부장의 종을 고치심 7:1-10

여기 기록된 백부장의 종의 치유에 대한 기사와 마태복음 8:5절이하의 기사 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는 백부장이 그리스도에게 온 것으로 되어있으나, 여기 본문에는 백부장이 처음에는 유대인 장로 몇을(3절), 그리고 다음으로 벗들을 그리스도에게로(6절) 보냈다고 되어있다. 이 기적은 본문에 우리 주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행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1절). 그리스도는 공개적으로 말씀하셨다. '내가…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다'(요 18:20).

(1) 백부장의 병든 종은 주인에게 사랑받는 자였다(2절). 그가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그의 주인에게서 존중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칭찬할만하다. 종은 자기 주인에게 사랑을 받도록 애써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한 종을 둔 주인이 그 종을 소중게 여길줄 안다면 그것또한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많은 주인들이 가장 훌륭한 종을 나무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충분한 호의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에게 친절하고 부드럽게 하며, 그들의 복지와 안락을 누릴수 있게 해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2) 그 주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종을 구해줄 것을 청하였다(3절).

(3) 그는 유대인의 장로 몇을 그리스도에게 보냈다.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자신이 가는 것보다 그리스도에게 더 큰 경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보낸 유대인들은 보통의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의 장로들이었다. 그는 권위있는 사자들을 보냄으로써 그들을 맞는 그리스도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4) 유대인의 장로들은 백부장의 충실한 중재자들이었다.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그를 위해 '간절히 구하였다'(4절). 백부장은 결코 스스로 구하지는 않았지만 '이 일을 하시는 것이 그 사람에게 합당하니이다'라는 말을 듣는 자격이 있는 자였다. 백부장은 '나는 주의 방문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지만(마8:8), 유대인의 장로들은 그가 치료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히 주장한 것은 백부장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유대민족과 그들의 종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사실이었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5절).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이방인은 거의 없었다.) 정복자들과 권세를 잡은 자들이라도 피정복자들과 지배를 받는 자들에게 호의를 가져야 한다. 백부장은 유대인들의 예배에 대해 호의를 가졌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가버나움에 새로운 회당을 지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숭배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한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경건한 예배를 드릴 집회소를 짓는 것은 매우 선한 사업이며, 그러한 종류의 선한 사업을 하는 자들은 배로 존경받을만한 자들이다.

(5) 예수 그리스도는 백부장에게 기꺼이 자비를 베풀고자 하였다. 백부장은 이방인이었는데도 그리스도는 곧 그들과 함께 가셨다(6절). 백부장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다(7절)'.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가 자기의 방문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다.

(6) 백부장은 그외에도 자기의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었다. 그리스도께서 그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오시자 백부장은 벗들을 보내 기이한 말로써 그를 영접하였다.

1) 그의 겸손의 말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6절). "나는 그러한 영광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이말은 그가 권세가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낮게 생각했으며 그리스도의 신분이 이 세상에서 비천하였는데도 그를 높이 생각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2) 그의 믿음의 말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당신께서는 제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도 제 종을 고칠수 있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7절). 그는 자기 직업에서 한가지 비유를 들어보임으로써 자신의 이러한 믿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가 자신의 군병들에게 명령할수도 있으며 심부름을 보낼수도 있듯이 그리스도도 이와같이 질병을 물러가라고 쉽사리 명령하실수 있음을 확신하였다(8절).

(7) 우리 주 예수께서는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여 매우 기뻐하셨으며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사실때문에 더욱 기이히 여기셨다. 백부장의 믿음이 이처럼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했을때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얼마나 존귀하게 여기셨는지 살펴보자. 예수께서…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9절). 그리스도는 그를 좇는 자들로 하여금 훌륭한 믿음의 본보기를 관찰하고 주목하게 하신다. 특히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처럼 가까이 그리스도를 따르지않는 자들가운데서 그렇게 훌륭한 믿음을 가진 자를 보게 될때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의 깊이를 보고 부끄러워져서 우리의 믿음의 나약함과 불안정함을 고치게 하신다.

(8) 치유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행해졌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10절). 그리스도는 불쌍한 종들이 당하는 처지를 인정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차별대우하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Ⅱ.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7:11-18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기사를 읽게 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내용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1) 이 기적은 언제 어디서 행해졌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한 다음날이었다(11절). 이 일은 가버나움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나인이라는 작은 성 또는 마을의 성문에서 행해졌다.

(2) 누가 그 기적을 목격하였나? 그 일은 성문안, 혹은 가까이에서 마주친 두무리들이 보는 앞에서 행해졌다. 한무리는 그리스도와 동행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었으며(11절), 또 한무리는 청년의 장례에 참석한 친척들과 이웃들이었다(12절).

(3) 우리 주 예수께서는 어떻게 그 기적을 행하셨나? 생명을 되찾은 사람은 청년이었다. 그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였다. 그녀는 노년의 지팡이로서 아들을 의지하였으나 그는 꺾인 갈대가 되었다. 독자에 대한 이 불쌍한 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과부였으므로 슬픔은 더욱 깊었을 것이다.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녀와 함께 나와 그녀가 아들을 잃은데 대해 애도를 표하고 그녀를 위로하였다. 그리스도는 청년을 살리시면서 긍휼과 권세를 보여주셨다. 고통당하는 자들에 대한 그 동정이 얼마나 애틋한가를 보라.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말라 하시고(13절). 주께서는 장례 행렬을 따라 묘지로 가는 가련한 과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다. 여기서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어떠한 요청도 하지않았다. 주께서는 오로지 그의 타고난 인정으로 그녀를 염려하셨다. 사정은 딱하였으며, 그리스도는 그것을 연민의 눈으로 보셨다. 그리스도는 그녀에게 울지말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연민과 그의 무한한 자비에 대해 얼마나 만족스러운 생각을 하도록 해주는가? 그리스도는 울지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다른 어느 누구도 제시할수 없는 그 이유를 설명해 줄수 있었다. "죽은 아들때문에 울지말라. 그는 곧 산 자가 될 것이다." 이것은 특별히 그 과부의 경우에 해당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모든 자에게 공통되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영광되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안된다'(살전 4:13). 그런즉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심을 생각하여 그런때 우리의 격정을 억제하고 진정시키자. 그의 명령은 죽음조차 이긴다는 것을 유념하라.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14절). 그렇게 하심으로써 죽은 자를 멘 자들에게 나아가지 말것을 암시하셨다. 그러자 멘 자들은 섰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권능을 가진 자답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엄숙하게 말씀하셨다. 그 말씀에 능력이 함께하여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리스도가 죽음을 지배한다는 사실은 그의 말씀이 즉각적으로 효력을 나타냄으로써 입증되었다. 죽었던 자가 일어나고(15절).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입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나타내 보이자. 생명을 얻었다는 또다른 증거는 청년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적 생명을 주실때는 언제나 기도하고 찬양하도록 입을 열어 주신다. 그리스도는 청년을 어미에게 주어 어미를 섬기며 충실한 아들이 되게 하셨다. 이제 그 과부는 고통을 받았던 시간에 뒤따라오는 위로를 받았다.

(4) 이 기적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16절). 그들은 모두 이 기적을 보고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우리는 주님의 위대하심뿐만 아니라 자비하심도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이 그 기적을 보고 얻은 결론은 '큰 선지자가 우리가운데 일어나셨다'는 것과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는 것이었다. 이 일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모든 자들에게 참으로 죽음에서 살아나는 일이 될 것이었다. 기적에 대한 소문은 온나라에 다퍼졌다(17절).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멀리 떨어져있던 온유대와 그 사방인 갈릴리에 두루퍼졌다. 많은 사람들은 그 맛과 향기를 그들의 영혼속에 지닐수 없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특히 감옥에 있던 세례 요한에게도 그 소문은 조심스럽게 전달되었다(18절). 그의 제사들이 와서 이 모든 일들을 그에게 고하였다. 그래서 그는 비록 자신은 매여있었지만, 주의 말씀은 매여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록 일을 못하였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Ⅲ. 예수께 보낸 세례 요한의 메시지 7:19-35

(1)우리는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께 보낸 메시지와 그리스도가 보내신 답변을 보게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하여 묻게되는 가장 큰 질문은 그가 오실 그이인지,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의 여부이다(19, 20절). 하나님께서 구주가 오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한다. 그런만큼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일을 수행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는 것도 믿는다. 만약 이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라면 우리는 그를 영접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않다면 우리는 계속 기대를 가지고 메시야를 기다릴 것이다. 세례 요한 자신은 이 문제에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받고 싶었다. 유대교의 높은 자들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메시야는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그에게는 그러한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당신이 오실 메시야이니까"라고 묻는 것은 행한 일에 맡겼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와 함께있었을 마침 그시에 그는 많은 기적적인 치료를 행하셨다.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21절). 그는 많은 치료를 행하셨으며, 거기에는 속일만하다고 생각되는 의심할만한 어떠한 근거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나서 그리스도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명령하셨다(22절).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일반 사람들조차 그러했듯이(요 7:31),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고 어렵지않게 주장할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의 몸에다 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알고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영혼에 그 일을 행하기위해 오실 자도 이 사람이라고 결론지어야 하며,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그는 육체에 행한 이 기적에다가 은혜의 왕국에서 행해지는 기적을 첨가시킨다(22절). 그들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메시야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메시야의 특성에 더욱 안전하게 부합될 다른 사람을 기다릴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해야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그에 대해 좋지않은 편견을 가질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암시해 주셨다(23절). 그리스도가 나사렛에서 자라난 것, 갈릴리에서 거주한 것, 그의 가족과 친족의 빈천한 신분, 그의 가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천박함, 이와같은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이러한 편견들을 극복하는 자는 지혜롭고 겸손하며 성품이 좋은 자이므로 복을 받는다.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시며,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복될 것이라는 표시이다.

(2) 우리는 본문에서 그리스도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신 지극히 높은 찬사를 대하게 된다(24절). 그들은 이제 광야에 나가서 본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오라,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리라".

1)세례 요한은 확고부동하고 지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다. 그는 갈대처럼 변덕스럽지 않고 반석처럼 확고한 사람이었다.

2)그는 비할데 없는 자기부인의 사람이었다. 그는 부드러운 옷을 입지도 사치하게 지내지도 않는 자였다(25절). 반대로 그는 광야에서 지냈으며 입는 것과 먹는 것도 거기에 어울리게 하였다.

3)그는 선지자였다. 아니 그는 구약의 다른 어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였다(26절). 이전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를 멀리있는 자라고 말했지만, 요한은 그를 문앞에 있는 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4)요한은 메시야의 선구자요, 그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된 자였다(27절).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27절).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보내시기 전에 그의 오심을 알리기위하여 사자를 보내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앞서 그의 길을 예비하시고자 보내신 사자가 회개와 회심을 선포함으로써 그 일을 완수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적 특성에 대한 매우 뚜렷한 전조였다. 이처럼 예고된 나라는 분명히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니었다.

5)그는 지극히 위대하여 실로 그보다 위대한 자가 없었다. 선지자들은 여자에게서 난 자들가운데 가장 위대한 자들이었지만, 요한은 그러한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28절). 어린양을 따르는 자는 지극히 비천한 자라 하더라도, 그보다 앞서 간 지극히 큰 자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러므로 복음시대에 사는 자들이 책임져야할 일은 그만큼 더많은 것이다.

(3) 우리는 본문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에 대한 정당한 책망을 보게된다.

1)그리스도는 여기서 세례 요한이 설교하고 세례를 베풀면서 받은 모욕에 대해서 설명해 주신다. 요한에게 존경을 표한 자들은 일반 백성들뿐이었다(29절). 이들은 참으로 속된 무리로서 '율법을 알지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받은 자로다'라고 칭하여진 자들이었다(요7:49). 그리고 요한의 세례를 받은 세리들도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들은 회개하고 회심함으로써, 세례 요한 같은 자를 메시야의 선구자로 임명하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해주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헛된 일이었다하더라도 그들에게는 그렇지않았기 때문이다. 교회와 나라의 큰 자들은 실로 세례 요한의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30절).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에 응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고, 그것은 스스로를 거스르는 일이었으며, 그들을 파멸시키는 일이었다.

2)그리스도는 본문에서 그 당시 사람들의 사악함을 설명하고 계신다. 그들은 편견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익을 주기위하여 택하신 방법을 단지 조롱거리로 삼았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31절). 그들은 장터에 앉은 아이들처럼 심각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않고 놀고싶은 마음으로 가득해 있다. 마치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처럼 하나님께서 그들과 장난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일을 웃음거리로 돌려버렸다.(32절) 이로인해 그들은 파멸한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의 일이 중대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오! 눈멀고 사악한 세상의 헛됨과 어리석음이여! 주께서는 그들을 안일함에서 깨우신다. 그들은 여전히 트집잡을 일을 이모저모로 찾았다. 세례 요한은 과묵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상가이며 명상가였던 그의 말을 마땅히 경청했어야 했다. 그러나 칭찬받아야할 이러한 사실이 오히려 비난거리가 되어버렸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하더니(33절). 즉, 그는 침울하고 귀신들린 자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이셨다. 그는 '오셔서 먹고 마시셨다'(34절). 그는 바리새인들과 세리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하셨다. 그는 이들에게 선을 베풀고자 하셨으므로 그들과 친하게 사귀셨다. 이일로써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매우 다양한 기질과 성향 그리고 가지가지의 전도방법과 생활방식을 가질수 있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들이 선하고 유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모든 다른 사람들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자기들과 똑같이 행하지않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판해서도 안된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그리스도는 세례 요한을 칭찬하셨다. 그들 각자의 생활방식이 서로 달랐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이 두사람 공동의 적들은 그들을 모두 비난하였다. 요한을 미쳤다라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이 우리 주 예수를 품행이 타락한 자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악의를 품은 자들은 결코 좋게 말하는 법이 없다.

3)이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선택된 남은 자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리라는 것을 보여주신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함을 얻느니라(35절). 지혜의 자녀들은 이점에 있어서 이의가 없으며, 하나님이 지혜로써 택하신 은혜의 방법에 만족해 한다. 또한 어떤 사람들에게 조소를 당한다고해서 그 방법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Ⅳ. 바리새인의 집에 계신 그리스도의 발에 한 여인이 향유를 부음 7:36-50

이 본문에 나오는 사건이 언제 어디서 일어난 일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리스도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난받으시던 때를 즈음하여 본문의 기사가 나온다.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극진한 사랑을 보여준 이 여인이 누구인지는 나타나있지 않다.

(1) 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를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36절). 이 바리새인은 그리스도를 믿지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 바리새인은 그를 선지자로 인정하려 하지않았기 때문이다(39절). 그런데도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그의 초대에 응하여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다'. 그리스도에 대해 편견을 가진 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담대하게 그러한 사람들과 교제할수 있을 것이다.

(2) 불쌍한 죄인이 그리스도에게 큰 경의를 표하였다. 그 동네에 사는 그 여인은 '죄인이요 창기로' 불명예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식사하시기 위해) 앉으셨음을 알고(37절) 그의 은혜에 감사하기위해 왔다.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는 감사를 드릴 기회가 없었으므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기고, 가지고 온 향유를 그 발에 부었다. 여기서 이 여인은 그리스도를 정면에서 보지않고 그 뒤로 가서 여종의 일을 감당하였다. 이 선한 여인이 행한 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수 있다.

1)그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몹시 부끄러워함 : 그녀는 울며 그리스도의 뒤에 서있었다. 그녀의 눈은 죄가 들고나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눈물의 샘이 되었다. 아마도 과거에는 화장되어 있었을 그녀의 얼굴은 지금 눈물로 얼룩져 있다. 전에는 예쁘게 땋아 치장되었던 그녀의 머리털은 이제 수건이 되었다. 그녀가 전에는 죄때문에 슬퍼했지만 이제 그리스도에게로 올 기회를 얻어 그 슬픔을 이기게 되었다고 우리는 당연히 생각하게 된다.

2)주 예수에 대한 그녀의 강한 애정 : 그녀가 사랑이 많다는 사실은 주 예수께서 주목하신 점이었다(42,47절). 그녀는 그의 발을 씻겼다. 눈물 곧 기쁨의 눈물로 씻겼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이 사모하는 구주와 그토록 가깝게있다는 것을 느끼며 도취경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사랑의 입맞춤인 동시에 경모의 입맞춤이었다. 그녀는 그의 발을 자기의 머리털로 닦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그 발을 씻길 물이 나왔으며 그녀의 머리털은 그것을 닦을 수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주 예수에 대한 진한 사랑이 있다.

(3) 그리스도가 이 불쌍한 여인이 표하는 경의를 받아들인데 대해 그 바리새인들은 화가 났다(39절). 그는 그 마음에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만큼 지식이 있고, 성결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가 자기에게 그토록 가까이 가게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교만하고 편협한 마음을 가진 자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거만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는 것에 주목하자.

(4) 그리스도는 그 여인이 자기에게 행한 일과 자신이 그 일을 받아들였던 것이 정당하다고 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말한 것을 알고 그에 대해 답변하였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말이 있다(40절). 시몬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였다.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이제 그리스도는 그 바리새인에게 답변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이 이치를 따져 설득하셨다. 이 여인이 죄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도 그것을 알고있다. 그러나 그녀는 용서받은 죄인이며, 이러한 사실은 그녀가 회개한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그에게 행한 일은 구세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만약 그토록 큰 죄인이었던 그녀가 용서받았다면 그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신의 구주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녀의 사랑의 결실이고 그녀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그리스도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며 바리새인이 그 일에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1)그리스도는 하나의 이유를 들어 이 여인의 죄가 크면 클수록 그녀가 죄사함을 받았을때 그리스도에게 보여주는 사랑도 그만큼 커야 마땅하다는 것을 시몬이 인정하도록 설득하셨다(41-43절). 어떤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 있었는데 두사람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그중 한사람은 다른 한사람의 열배를 빚지고 있었다. 빚을 준 사람은 아주 너그럽게 그 두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며, 그들을 대상으로 소송하지도 않았다. 이제 그 두사람은 자기들이 받은 큰 호의를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들 중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는가? 그 바리새인은 분명히 대답하였다.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여기서 우리는 빚진 자와 빚을 준 자 간의 도리를 배우게 된다.

①빚진 자는 갚을 것이 있으면 배상해야 한다.

②하나님의 섭리로 빚진 자가 그의 빚을 갚을수 없게 되었을때, 빚을 준 자는 빚진 자를 혹독하게 대하지 말고 너그럽게 그를 용서해야 한다.

③채권자가 자비롭다는 것을 깨닫은 채무자는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마땅히 그를 사랑해야 한다. 빚을 갚을수 없게된 채무자들 중에는 자기들때문에 손해를 입은 채권자들에게 감사하기는 커녕 원한을 품고, 그들을 좋게 대하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채권자로(또는 주 예수 자신을 채권자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탕감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인은 채무자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들을 배우게 된다.

㉠죄는 빚이요 죄인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빚진 자이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빚, 곧 순종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임대료를 지불하지 않았다. 아니 우리는 우리 주의 소유물을 허비하였고, 그럼으로써 채무자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님께 더많은 빚을 지고 있다.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41절). 그 바리새인은 보다 조금 빚진 자였지만, 그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빚진 자였다. 이 여인은 많이 빚진 자였다. 어떤 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많은 빚을 짊어지고 있다.

㉢우리의 빚이 많건 적건 간에 그것은 우리가 지불할수 있는 이상의 것이다. 그들은 갚을 것이 없었으며 타협할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우리 자신이 행한 의로도 우리의 빚을 갚을수는 없다. 아니 앞으로 회개하고 복종한다해도 갚지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빚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죄인들을 숨김없이 용서하시고자 하신다. 우리가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저지른 죄악은 우리의 책임이 되지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으로서, 그리고 기꺼이 죄를 사해 주시는 분으로서 선포하셨다.

㉤죄를 용서받은 자들은 그들을 사해주신 분을 사랑해야 한다. 많이 용서받은 자일수록 그를 많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다. 회개하기 전에 죄가 많았던 자일수록 나중에 더 훌륭한 성도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핍박하던 사울이 전도하는 바울이 되었을때, 그는 더욱 많은 수고를 담당하였다.

2)그는 이 비유를 그 바리새인과 그 죄인의 상이한 태도와 행동에 적용하였다. 그리스도는 그가 적게 탕감받기는 했지만 탕감받은 자라는 것을 인정케 하시려는것 같다. 물론 그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었지만 이 불쌍한 여인이 보여준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살펴보라"고 그리스도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많이 탕감받은 자이기 때문에 너보다 더많이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또 그 사랑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이 여자를 보느냐(44절). "이 여자가 내게는 너보다 얼마나 더 친절한 친구인지를 보라. 내가 너의 친절은 받아들이고 그녀의 친절은 거절해야 하겠느냐? 너는 내 발을 씻을 물대야조차 가져오라고 명하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더많은 일을 하였다. 이 여자는 나를 크게 사랑한다는 표시로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다. 너는 나에게 입맞추지 않았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너는 평소 머리에 바르는 보통의 기름조차 내게 주지않았지만 이 여인은 옥합에 든 값진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몇몇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수고하고 많은 비용을 들이는 것을 비난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은 그런데까지 도달하기를 원치않으며 값싸고 안일한 신앙생활에 안주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3)그리스도는 바리새인이 트집잡는 것을 잠잠하게 하셨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47절). 그리스도는 그 여인이 죄많은 자라는 것을 시인하셨다. 그러나 저의 사랑이 많으므로 그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는 말은 '그러므로 저가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로 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사랑이 많음은 죄사함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은 아니다. "사함받은 일이 너처럼 적은 자는 네가 하듯이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큰 죄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자비를 얻는 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들의 본보기를 보면서 자극을 받아 우리도 진정으로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4)그리스도는 그녀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다. 그는 그 여인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48절). 그녀는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더불어 사죄를 받은 것이다. 이 말은 그녀가 다시 죄짓지 않게하는 얼마나 효과적인 예방책인가. 그 자리에는 그리스도가 죄를 사해주고 죄인들을 용서한다고 선언한데 대해 마음속으로 비난하는 자들도 있었지만(49절),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신 말씀을 고수하셨다. 이제 그는 기쁨을 가지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는 참회하는 자들에게 즐겨 용서와 평안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50절). 죄에 대한 슬픔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모든 표현들은 믿음의 결과요 그 소산물이었다. 모든 은혜에 대한 믿음이 하나님을 지극히 영예롭게 하듯이 그리스도도 그 믿음을 지극히 존귀하게 여긴다.

 

# 해설

구원이 이루어지는 모습 ( 7 )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구원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듣고 응답하는 사람들은 이 길을 걸을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의 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의 사역은 이제 절정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자신이 이루어 놓을 구원의 일을 미리 선포하시고 맛보시는 것입니다.

 

1. 기적을 행하심

1) 백부장의 청원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지극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혈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신앙의 혈통을 이은 믿음의 자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이야기는 예수께서 이방인들에게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를 알게 합니다. 백부장이 자기 종을 위해서 예수께 간구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에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믿는 믿음이 혈통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그 사람의 처지와 상관없이 그를 구원의 반열에 이르게 합니다.

a.거룩함(유1:20).

b.보배로움(벧후1:1).

2) 예수님의 칭찬

백부장의 청원을 들은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진정한 믿음의 소유자요, 이스라엘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의 칭찬은 그를 많은 사람들보다 뛰어난 믿음의 소유자로 부각시킵니다. 유대인의 자부심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이제 새로운 믿음의 백성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인도하시는 그의 백성들이 구분되는 시점입니다. 예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점은 신실한 믿음의 소유 여부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나라를 바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a.구원에 이르는 것(롬10:9-10).

b.승리의 보증(대하20:20).

3)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인간의 한계를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이 죽음입니다. 누구나 겪어야 하고 누구도 피할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말할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 사건은 그의 능력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을 부여하시는 분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인간의 문제는 그에 의해서 해결되어질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진실로 예수를 구주요 하나님으로서 섬기고 경배해야할 것입니다. 메시야의 승리가 선포되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에게 보장되었습니다. 이것을 받아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a.믿음으로 삶(롬1:17).

b.믿음을 따라 죽음(히11:13).

 

2. 요한의 증언과 예수의 말씀

1) 세례 요한의 질문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선포한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행하시는 일들이 그에게 전해지자 그는 예수께 질문을 합니다. 메시야이심을 자신이 선언하시는지 알고싶은 것입니다. 그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야가 하시는 일이 이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흉내낼수 없는 해방과 구원의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하는 일을 보고 메시야임을 깨달아 알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말씀으로 하지않고 직접 삶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십니다. 말보다는 실천을 중시해야할 것입니다.

a.언약된 씨(갈3:16).

b.평화를 가져오심(사9:6).

2) 요한에 대한 예수의 말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선포는 세례 요한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죄를 지시고 해방과 구원의 복된 일을 이루실 분이 오실것임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이 감당할수 없는 중요한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구원이 임박한 사실을 널리 알린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요한을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하는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누릴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보장받는 길입니다.

a.다윗의 자손(마1:1).

b.복음을 선포하심(사61:1-3).

3) 세대에 대한 말씀

예수께서 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하시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구원의 길에 기쁨으로 걸어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화인맞은 사람들과 같아서 감각을 잃어버렸고 반응하지않는 사람들입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예수께서 직접 많은 일들로 증거하고 계시는데도 이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도 일어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말씀으로 교훈하시고 명령하시는데도 우리는 그 말씀에 귀기울이지 아니하고 자신이 원하는 욕심에 이끌려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나아가야할 때입니다.

a.조롱당하심(시22:6-8).

b.침 뱉음을 당하심(사50:6).

 

3.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

1)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부음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의 칭찬을 듣습니다. 마리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죄인임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을 보시는 예수의 능력을 알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 기준으로 판단해서 절대적인 진리인양 착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범한 판단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실로 겸손히 나아갈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능력을 자랑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전적인 의뢰를 해야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긍휼을 입는 길입니다.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겸손히 주님앞에 무릎을 꿇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a.유일한 구주(행4:12).

b.완전한 은혜(행l5:11).

2) 빚진 자의 비유

자신이 감당할수 없는 일을 해결받았을때 그의 기쁨과 감사는 배로 더할 것입니다. 자신이 죄로 인해서 해결할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깨달은 사람과 자신이 어느 정도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이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이며, 우리의 공로는 하나도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한 일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 일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로 겸손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a.죄에서의 구원(마1:21).

b.하늘에서 구원을 찬양함(계7:10).

 

결론

예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많은 기적과 이사를 통해서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주십니다. 이것을 보고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께서 이루어주신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쁨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과 그의 하신 일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으로 영광을 드려야 합니다.

 

# 핵심

7:1-17

예수님이 로마 백부장의 종을 치유해 주심으로써, 이방인도 구원 대상에 포함시키셨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소생시키신 것은 그분이 ‘생명의 주’요, 영생의 수여자이심을 증거한다.

이적(7:11-16)

일반적인 자연 현상과 법칙을 초월해 일어나는 진기한 사건. 일명 기사(奇事)라고도 한다. 성경에선 대개 하나님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는 증거, 즉 표적(sign)으로써 언급되고 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임을 증거하기위해 여러 이적을 행하셨다. 곧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내쫓고, 풍랑을 제어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셨다. 그런데 사단과 거짓 선지자들도 갖가지 이적을 행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진리를 도외시한채 이적만 중요시하다 보면 미혹될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마 24:24).

 

# 묵상

로마 백부장의 믿음 ( 7:2-10 )

백부장은 자기 종의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백부장은 1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로마 장교로서, 그가 친히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통해 그가 부하를 얼마나 사랑했으며, 그 종이 얼마나 주인을 정성껏 섬겼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하 관계에서도 적용되어야할 본보기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은 이방인인 자신의 처지를 알았고, 지극히 크신 예수님을 감당치 못한다고 고백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 앞에서 자신이 비천한 존재임을 고백했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 ( 7:11-17 )

예수님은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하여 ‘청년아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금기시하던 시체의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고, 그러자 죽었던 자가 살아났습니다. 이에 사람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큰 선지자가 일어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죽음과 삶의 한계를 극복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장차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고 부활하셔서 모든 죽은 자의 산 소망이 되실 것을 예표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 7:18-28 )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에 예언된 메시야의 이적들이 성취되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선지자보다 나은 자,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장터의 아이들 ( 7:32-35 )

바리새인들이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귀신들렸다고 비난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기를 탐한다고 비난하는 것을 지적하는 비유입니다. 또한 이는 상대방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를 외면하며 비난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모든 자녀로 인해서 옳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혜란 그리스도를 뜻하고, 자녀란 성도들을 뜻합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주님을 비방하지만 복음의 진리는 성도들에게 큰 기쁨이 되며 만방에 선포되어 옳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몬의 시각과 예수님의 시각 ( 7:36-50 )

시몬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금 회복해야할 구원의 대상으로 보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십니다. 특히 시몬의 집에서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긴 사람은 죄지은 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공적으로 선포하셨고, 그래서 주변에는 죄인이나 소외된 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받는 죄인도 자신의 죄를 주님께 고백하고 용서받은 기쁨으로 주님을 성심껏 섬긴 것입니다. 이를 바라보고 바른 생각을 가지지 못한 시몬에게 예수님은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사실 시몬은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사함 받은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죄인이므로 많이 탕감받은 자의 심정을 늘 지녀야 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하나님 약속을 따라 낮은 곳에 오신 구세주

[누가복음 2장 1절~14절]
1절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절 -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절 -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절 -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절 -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절 -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절 -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절 -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절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절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절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절 -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절 -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절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다윗의 자손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 하러 유대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거기 있을 때에 마리아가 해산하고 아들을 낳아 구유에 눕힙니다. 그 지역에 있던 목자들이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소식을 천사로부터 듣습니다. 수많은 천군 천사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찬송합니다.

1. 예수님 탄생의 역사적 증거 (1~7절)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나신 메시아입니다. 본문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며 예수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합니다. 표면적으로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이는 가이사 아구스도지만, 실상 우주 만물의 통치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윗 계보의 영원한 왕으로 태어나신 것은 약속의 성취입니다(삼하 7:16; 겔 37:25).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지에 대한 미가 선지자의 예언까지(미 5:2) 이루시고자 당시 웬만해서는 거주지를 떠나지 않던 요셉과 마리아를 호적 일로 베들레헴에 가게 하십니다. 이로써 나사렛 사람인 예수님이 다윗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입니다.
* 구약의 미가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하나님이 최근에 내게 이루신 약속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2. 목자들에게 전해진 탄생 소식 (8~14절)
메시아 탄생의 의미를 모르고는 그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두 잠든 밤에 구주 탄생의 기쁜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입니다. 가난과 억압 속에서 소망이 없던 그들에게 메시아가 오셨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이사야는 메시아를 가난한 자와 겸손한 자를 공정하게 판단하실 의로운 왕이라고 예언했습니다(사 11:2~4). 누구든 성탄절을 환영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주 탄생의 복은 아무나 누리는 것이 아니고, 그 의미를 아는 하나님 백성이 누립니다. 구주 탄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즉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에게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평화의 왕입니다.
* 양 치던 목자들에게 구주 탄생 소식이 먼저 전해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게 구주 탄생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분 때문에 누리는 복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흥청망청하는 연말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마구간에 작은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더 많이 더 멀리 전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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