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고창병 들린 사람을 고치심 14:1-6
(1) 인자는 먹고 마시러 오셨다. 즉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친하게 사귀러 오셨다. 본문에서 그는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셨다(1절). 그 자신의 날에도 연약한 육체를 고쳐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간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우리는 여기서 그와 같은 자를 오용하지 않기위해 매우 주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안식일에 꼭 필요한만큼의 음식을 드시기위해 떡 잡수시러 가셨다. 우리의 안식일 식사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과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2) 그는 선을 행하시러 들어가셨다. 주의 앞에 고창병든 한사람이 있는지라(2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하신 축복으로 고창병든 사람의 소망을 앞지르셨다. 즉, 그가 부르기도 전에 그에게 응답하셨던 것이다. 주의 앞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이 사람은 추측컨데 상당히 심하게 고창병을 앓고 있었던것 같다.
(3) 그는 자신을 대적하는 죄인들의 배척을 참으셨다.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1절). 그리스도를 초대한 바리새인은 그에게서 어떤 구실을 찾기위해 그를 초대한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냐'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으셨을때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도 또는 그르다고도 대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의도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비난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수치스러워 그것이 합당하지않다고 말할수도 없었다. 선한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박해자들까지도 합당하고 선하다고 인정할수밖에 없는 일을 행함으로 오히려 박해를 받게된다. 그리스도께서 수많은 선행을 베푸신 바로 그 사실때문에 그들은 그와 그의 이름에 돌을 던졌다.
(4) 죄인들이 아무리 반대와 방해를 한다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선을 행하시는 것을 막을수는 없었다(4절).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보내시고(4절). 그 사람을 데려다가 즉, 그에게 안수하시어 그를 치료하셨다. 또는 그를 안고서 치료하셨을지도 모른다. 다루기 힘든 정도로 몸이 부어있었지만(고창병에 걸린 사람들은 보통 그 몸이 붓는다) 그를 껴안으시고 온전하게 고쳐주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리 심한 그와 같은 병일지라도 고치셨다. 그것도 한순간에 완전히 고치셨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그를 보내셨다. 이는 치료받은 그 사실로 인해서 바리새인들이 그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무리 불합리해도 자기들이 의도한 자에 대해 정죄하는 자들이 아닌가?
(5)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다만 자신은 정당한 일을 했을뿐이라고 말씀하셨다(5,6절). 그는 여전히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시고, 그들 자신의 관습에 호소함으로 전에는 음흉하게 침묵을 지키던 자들을 이제는 수치로 인해 침묵할수밖에 없도록 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5절).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릴 자가 있겠느냐? 그러면 그것이 죽지 않겠느냐?" 그들의 자신들의 가축에 대해 이와같이 하는 것은 그 불쌍한 가축에 대한 연민이 그처럼 많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돈의 가치고 있는 그들 소유의 소나 나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구해내는 일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안식일의 율법을 적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들 이웃의 선을 위해서는 면제시킬수 없는 율법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쉽게 면제시키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스도의 이 질문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잠잠케 만들었던 것이다.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하지 못하니라(6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면 그 정당함이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어느누구도 입을 열지못할 것이다.
Ⅱ. 청함받은 자의 마땅한 자세 14:7-14
본문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가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 있을때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유익한 한가르침을 제시하시고 계신다. 그는 낯선 자들, 아니 그를 지켜보는 적들과 함께 있을때 그가 본 그들의 잘못된 점을 꾸짖으시고 그들을 가르칠 기회를 가지셨다. 우리는 우리의 식탁에서 순수하지 못한 어떤 교제가 용납되지않도록 할뿐만 아니라 악의 없는 그 이상의 대화를 해야하며, 우리의 식탁에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기회를 가지고 일상적인 일들을 통해 영적인 교훈을 얻을수 있어야 한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 중에 계셨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전혀 염두에 두시지 않으셨다.
1. 상좌에 앉으려는 자들을 꾸짖으심(7-11)
(1) 예수께서는 이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상좌에 집착하는지를 주목하셨다(7절). 그는 이미, 대체적으로 이러한 사람들을 책망하신 적이 있었다(11:43). 본문에서 그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그 죄를 절실히 느끼게 하신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높은 자리를 고르는가를 지적하셨다. 누구든지 들어오는대로 할수 있는한 가장 좋은 자리 가까이 다가갔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의 일거일동을 주목하신다.
(2) 예수께서는 이와같이 야심을 가진 자들이 종종 수치를 당하고 밀려나는 대신 겸손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있던 자들이 그 겸손으로 존경을 받게된 사실을 주목하셨다.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은 강등되었을 것이며, 훨씬 고귀한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 내려오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8,9절). 세상적인 지위에 관한것뿐 아니라 개인의 장점과 재능에 있어서도 우리보다 훨씬더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고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자제해야 한다. 잔치의 주인이 자기의 손님들을 안내하면서, 더높은 사람이 마땅히 앉아야할 자리에 앉지 못한 것을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인은 상좌를 차지한 더 낮은 자에게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라고 말할 것이다. 자존심은 수치를 당할 것이며, 결국 낮아지고 말 것이다. 스스로 가장 낮은 자리를 만족해하는 사람들이 발탁될 것이다(10절). 가서 말석에 앉으라. 당신을 초대한 친구의 손님들은 당연히 당신보다 더높은 지위와 신분을 가진 분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당신은 벗이여 올라 앉으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높이 올라가는 길은 낮게 시작하는 것이다. 함께 앉은 모든 사람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그들은 당신을 존귀한 자로 여길 것이다. 영광은 어둠에서 비칠때 도리어 더 빛난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당신을 겸손한 자로 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큰 명예이다. 랍비중에 어떤사람이 이와같은 어떤 비유를 들고 있다. "세사람이 잔치에 청함을 받았다. 한사람이 가장 높은 자리에 앉으며 나는 제후이니까 하였다. 다른 사람이 그 다음에 앉으며 나는 현자이니까 하였다. 또다른 사람은 가장 낮은 곳에 앉으며 나는 비천한 자이니까 하였다. 왕은 비천한 자를 가장 높은 자리에 앉히고 제후를 가장 낮은 자리에 앉혔다."
(3)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여 우리 모두에게 높은 것에 마음을 두지말라는 교훈을 하시고 계신다. 자존심과 야심은 사람들 앞에 명예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겸손과 자기 부정은 정말로 명예로운 것이다. 이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11절).
2. 잔치의 주인에 대한 책망(12-14)
예수께서는 잔치의 주인이 부자를 그렇게 많이 청한 것에 대해 책망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가난한 자를 초대했어야 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화려한 집안 치장에 사용하기보다는 자선행위에 쓰는 것이 더 귀중하다는 것을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계신다.
(1) "부유한 자를 대접하려고 하지마라. 즉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12절). 이 말은 친척과 이웃들간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하는 대접을 금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초청이 습관이 되어서는 안된다. 부자를 위한 어떤 잔치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많은 식량이 될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자랑하지 마라. 단지 나타내기위하여 잔치를 베푸는 사람들이 있다. 이와같이 하는 것은 자기의 가족을 희생시켜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것이다. 다시 보상받을 것을 생각하지 마라. 우리 구주께서 부자를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신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즉 "너희는 보통 대접해 준 자들에게 다시 초청받을 기대를 가지고 대접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너희에게 갚음이 될 것이다."
(2) 먼저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13, 14절). 너희가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 그러한 자들은 끼니를 이을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생계를 위해 일할수도 없다. 이 사람들은 자선의 대상이다. 그들은 생활필수품이 없다. 그것들을 공급해 주라. 그러면 그들은 너희에게 기도로 보답할 것이다. 그들은 떠나서도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에게 갚을수 없다하여 손해 보았다고 말하지 마라. 이는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게되기 때문이다. "자선 행위는 이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할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보상을 결코 잃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오랜 항해자가 가장 부유한 자가 되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Ⅲ. 관대한 초청 14:15-24
(1) 손님 중에 한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예수께 말함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15절).
1)그러나 이 사람이 본문에서 그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일까? ①이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으로 인해 모인 무리들이 기분이 상할까 두려워 화제를 다른 어떤 것으로 바꾸려 한 것이거나, 아니면 ②그리스도께서 당시 제시하셨던 좋은 규범에 감탄을 금치 못하나 그들이 살고있는 상태를 보고 실망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여 그 나라에 처소를 가질 자는 복이 있다고 그들에게 선언한 것이거나, 또 ③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의 부활을 언급하시자 그 말씀하신 것을 여기서 확인하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주님, 의로운 자의 부활에서 보상을 받을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게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④그리스도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침묵을 지키시는 것을 목격하고 훨씬 깊은 대화로 다시 예수를 이끌어 들이려고하여 이와같이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로 하여금 대화를 이끌게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언급하는 것보다 더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좋은 대화를 이끌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때로 한마디 던져서 대화를 진행하도록 도와야한다.
2)그때 이 사람이 말한 것은 분명하고도 인정된 진리로써, 그들이 앉아서 식사할 당시 이 말이 인용된 것은 매우 적절했다. 우리가 음식물을 나눌때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시기상으로 매우 적절하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①은혜의 나라에서 :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그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리라는 것을 약속하셨다.
②영광의 나라에서 : 그 식탁에 앉게될 자들은 복 있다. 그들은 거기서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될 것이다.
(2) 우리 주 예수께서 이때에 비유를 말씀하신다(16절 이하). "그러나 그 특권 누릴 자들은 누구일까? 너희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 특전을 거절할 것이며, 오히려 이방인들이 그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제 그 비유에 담긴 내용을 고찰해 보자.
1)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자비가 그리스도의 복음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①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영혼들을 위하여 진수성찬을 차려놓으셨다(16절). 어떤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영역본에는 대개 잔치가 벌어지는 시간이 저녁때이었기 때문이다.
②하나님께서는 이 잔치에 와서 참여하라는 은혜로운 초대를 우리에게 베풀어주셨다. 먼저 일반적인 초대가 있었다.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민족과 유대인들을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초청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안에서 좋은 집을 마련하셨을뿐 아니라 개방해 놓으셨다. 청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주어지고 있다. 잔치를 배설한 사람은 초대한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종들을 모든 사람에게 보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절). 이것은 지금 바로 우리를 향한 초청이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지금이 받아들일 때이다. 그러므로 지금 오라. 지체하지 마라. 초청을 받아들여라. 너희를 환영할 것을 믿으라.
2)복음의 은혜는 냉대에 부딪친다. 초청받은 손님들은 오기를 거절했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18절). 그들은 모두 참석을 피할 이러저러한 구실을 찾았다. 이것은 유대민족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을 일반적으로 무시한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의 초청에 응하는데 있어서 역행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수치로인해 초청을 거절한다고 공표할수 없었기에 사양하였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양하였다. 여기에 두사람의 상인이 등장하였다. 한사람은 싸게 흥정한 밭을 샀다. 그래서 그 땅이 과연 좋은지 아닌지를 가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그는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시시한 변명인가! 그는 밭을 보러가는 일을 다음날로 미룰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이 자리를 옮길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은 궁색한 변명이었다. 다른 상인은 자기의 토지를 위하여 가축을 샀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19절). 전자가 이 세상에서의 지나친 자기 만족을 암시하고 있다면, 후자는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관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서 떨어지게 한다. 우리가 어떤 의무로 부름 받았을때 그 의무를 소홀히 한것에 대해 우리로 변명하게 하는 주범이 이것들이다. 변명한다는 것은 그것이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려고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본문에 나타난 변명들을 살펴보자.
①그것들은 하찮은 변명들이었다. 그들은 오히려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도록 초대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땅이나 소를 보러가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②그것들은 정당한 변명일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에 너무 많이 마음을 둘 경우, 그 자체로는 정당한 것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 여기에 새로 결혼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20절). 그는 갈수 없다고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가지않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의무들에 대해 싫증을 느낄때면 할수 없다고 핑계를 둘러댄다. 우리와 이성교제를 하고있는 자들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를 행하는데 종종 우리에게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아내를 같이 데리고 갈수도 있었다. 그러면 그들은 모두 환영받았을 것이다.
3)종들이 잔치 주인에게 가지고 온 보도는 초대받은 친구들의 무례한 행동에 대한 것이었다. 이때 그들이 얼마나 그 주인을 업수이 여겼는가를 보여주었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21절). 종은 혼자서 식사해야 될것 같다고 뜻밖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그 종은 사실을 과장하거나 숨기지않고, 있었던 그대로 전말을 보고하였다. 사역자들은 자기 목회의 보좌앞에서 그렇게 하지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들이 자기 영혼을 위한 수고의 결과를 보게된다면 그들은 감사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 틀림없다. 또한 만일 그들이 헛되이 수고하였다고 생각한다면 불평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것이다. 그러한 이유때문에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을 통하여 주신 말씀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기 때문이다(히 13:17).
4)이러한 모욕에 대한 주인의 의로운 분노. 집주인이 노하여(21절). 복음을 업수이 여기는 자들의 배은망덕함과 하늘의 하나님께 대한 모독은 그에 대한 매우 큰 도전이며 또한 사실이 그러하였다. 자비를 악용하면 그 자비는 가장 큰 진노로 변한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절). 에서의 장자 명분처럼 은혜를 멸시하면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다. 기회가 주어졌을때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자들은 나중엔 원한다하더라도 그를 영접할수 없을 것이다.
5)식탁에 음식뿐 아니라 손님으로 채워야하는 걱정. 주인이 종들에게 이르되 "가라,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21절). 일반 거지들을 찾아오라. 그리하여 오기를 기뻐하는 자들만 초청하도록 하라." 그들은 곧 그러한 손님들을 가득 채웠다.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22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인 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많은 손님을 맞이할 자리가 있었다. "길과 산을 가로 가라(23절). 시골로 가서 방랑자들, 또는 일터에서 이제 저녁이 되어 돌아오는 사람들을 찾아오라. 그리고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집을 채우라. 그러나 완력으로 하지말고 설득하여 하라. 그들에게 신중하게 하라. 왜냐하면 이 경우에 초대가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확신시킬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환영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거의 믿지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들을 설득할때까지 떠나지 마라." 이것은 이방인들의 초청을 가리키며, 그들로 교회가 가득 채워진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①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소중한 영혼들을 위하여 마련된 잔치 배설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있다해도 그 복음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②세상에서 가난하고 낮은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부유하고 가장 귀중한 자로서 환영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서 그가 바로 직전에 말씀하셨던바, 즉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13절)고 말씀하신 것을 여기서 분명하게 하고 계신다. 그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자비와 동정은 우리에게 보증이 된다.
③복음은 복음의 혜택을 받으리라고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세리와 창기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갔다. 따라서 '나중된 자가 먼저되고 먼저된 자가 나중된다.' 가장 앞서있는 자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지도 말고 또한 가장 소망이 없는 자들에 대해 실망하지도 말자.
④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복음 잔치에 초대하는데 매우 신속하고 끈기있어야 한다. 빨리…나가서(21절). 즉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이는 모든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⑤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해 들어왔지만 그러나 아직도 오히려 자리가 있다. 그의 안에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각사람을 위하여 충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한 아무도 거절하지 않는다.
⑥그리스도의 집이 비록 크다고 하지만 마침내 채워질 것이다.
Ⅳ. 제자가 되는 길의 어려움 14:25-35
그리스도께서는 이 구절에서 자기를 따라 모인 무리들에게 직접적인 강론을 하시며, 제자직이 무엇인지를 알게하기 위해 권고하신다.
(1)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던 무리들은 상당한 열성을 갖고 있었다(25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사교상 모인 것이다. 여기에서 혼합된 군중들을 볼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열심을 보시고 그들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시고자 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약속한 자들은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어야하며, 따라서 그에 대한 채비를 차리고 있어야 한다.
1)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닥칠 최악의 사태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제자가 될 생각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계신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 "만일 누구든지 내게 나아와 나의 제자가 되면 그는 풍성한 부와 명예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①그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그들의 이익을 바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을 기꺼이 버려야만 한다(26절).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와…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수 없다. 만일 그가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더 그리스도를 사랑함이 없다면 그는 신실한 제자가 아니며, 견실하고 변함없는 제자가 될수 없을 것이다. 본문에는 집이나 땅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철학은 이러한 것들을 경멸하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더높은 차원에서 다룬다. 선한 사람이라면 모두 자기 친척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상대적으로 그들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들의 친척을 어느정도 미워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만족이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잠긴바 되고 삼킨바 되어야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의무와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의무가 서로 앞을 다툴때, 우리는 우선권을 그리스도에게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든가 아니면 우리의 가족과 친척들로부터 배척받게 된다면(초대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잃는것 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사회를 잃는 길을 택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사랑한다. 일찍이 어느 누구나 자신의 생명을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보다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지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수 없다. 영적 생명에 대한 기쁨의 체험과 영생에 대해 믿는 소망과 기대는 이 어려운 고백을 쉽게 하게할 것이다. 시련과 박해가 그 고백때문에 일어날때 주로 그 시험이 있게 된다. 평온한 시기일지라도 이 문제는 종종 시험을 일으킨다. 친척이나 친구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때문에 그리스도를 고백하기를 주저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혐의를 벗을수 없을 것이다.
②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기꺼이 져야만 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27절).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두 십자가 형을 받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모두 자기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모욕받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수형보다 더 수치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가야 한다. 즉 그는 그리스도를 좇는 중에 십자가가 놓여있을때는 언제든지 의무로써 그것을 짊어져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자기를 부를때 그것을 져야하며, 그에게 있을 보상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
2)그리스도께서는 따르고자하는 자들에게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라고 명하신다. 계속하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좋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작하기전에 계속할 것인가를 고려하여야 한다. 이것이 이성적인 행동이며, 성숙된 인간에 어울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의는 아무리 세심히 살펴도 한결같다. 반면에 사단은 가장 좋은 것은 나타내어 보여주나 가장 나쁜 것은 숨긴다. 이와같이 먼저 생각하는 일은 인내에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우리 구세주는 두가지 비유로써 그것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신다.
①우리는 망대를 세울 임무를 맡은 어떤 사람과 같다. 그러므로 그 공사에 대한 비용은 예산하지 않으면 안된다(28-30절).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28절). 끝마칠수 없는 일을 시작하여 스스로 비웃음을 사지않도록 재정 사정과 비교해 보라. 신앙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을 내린 자들은 망대를 세울 임무를 맡은 것과 같다. 낮게 시작하여 기초를 깊이 파고, 반석위에 기초를 세운다. 그리고 계속적인 공사를 통하여 마침내 하늘만큼 높이 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 망대를 세우려고 하는 자들은 앉아서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과 깨어있는 생활을 위한 대가를 치룰수 있을 것인가를 예산해 보아야 한다. 사람들가운데 쌓아올린 자신의 명예와 이 세상에서 그들에게 소중한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생명까지도 어쩌면 지불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지불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지불하신 것에 비교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적은 것이다. 이 망대를 세우기 시작한 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계속하지 못하고 또한 인내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분수에 넘치는 예산을 세웠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들가운데 스스로의 힘으로 이 망대를 마치기에 충분한 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나의 은혜가 너희에게 족하다'고 말씀하셨다. 신앙생활을 잘 시작한 자들이 중도에 중지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런 일은 없다.
②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약속한 자는 싸우러가는 사람과 같다. 따라서 그 싸움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31,32절). 이웃나라 임금에게 선전포고하는 임금은 자기 편이 이길수 있는 무슨 대책이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일 이길 능력이 없다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피할 것이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일종의 전쟁이 아닐까? 우리가 가는 매 발걸음마다 싸움이 있다. 우리의 영적인 적들은 반대편에서 매우 끊일사이 없이 달려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우리 이름을 기입하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에게 마땅히 기대되고 예상된 어려움을 견딜수 있을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상의 두가지 비유를 통해서 볼때 세상을 포기한 것처럼 꾸몄다가 후에 세상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할수 있는한 세상과 최선의 관계를 갖는 것이 더좋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내어놓을 마음이 없었던 부자 청년은 자기를 숨긴채 머물러 있기보다 근심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떠나가는 것이 더 잘한 것이었다. 이 비유는 다른 방법으로 적용할수 있다. 즉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시작하기 보다는 오히려 빨리 시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으로 받아들일수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 5:25절의 '급히 사화하라'와 같은 의미로 볼수 있다. 죄를 고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아무리 도도하고 겁없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적수는 될수 없다. 이점을 생각할때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우리의 이익이다.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강화조건을 사신을 통해 보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으며 훌륭한 것이다. 그 조건들을 잘알고 화해하도록 하라. 저가 아직 멀리있을 동안에(32절3). 시간이 있을때 화해하라. 그러나 본문(33절)에 나타난 이 비유의 적용을 보면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하려 할때 행하지 아니하면 안될 문제를 가르치고 있다. 이와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배교에 대해 경고하신다. 왜냐하면 배교는 그들을 완전히 무익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34,35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다. 특히 선한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마 5:13). 소금은 좋은 것이며 크게 소용되는 것이다. 타락한 그리스도인들, 즉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있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앙을 내 팽개친 자들은 그 맛을 잃은 소금이며, 세상에서 가장 무익하고 무가치한 것이다. 즉 그 안에 어떤 미덕이나 선한 자질도 찾아볼수 없는 자들이다. 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절대로 다시 회복할수 없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34절). 너희가 그것을 짜게 할수 없다. 이것은 배교자를 회복시키는 일이 극히 어렵고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암시하는 것이다(히 6:4-6).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쓸모가 없다. 똥처럼 땅을 위하여 거름이 되기에도 적합치 않을뿐 아니라 또한 거름더미에 버려둔다 할지라도 썩지않는다. 정신과 태도가 타락한 신앙인은 맛을 잃을대로 잃어버린 육욕적인 자이다. 그것은 버려지게 된다. 사람들이 그것을 내어버리는 것이다(35절). 사람들은 더이상 그것과 아무런 관계를 갖지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이름을 더럽히는 신앙인들은 교회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 의해 영향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구세주는 모두에게 이것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계신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 해설
제자의 길 ( 14 )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무대는 안식일날 바리새인의 식탁에서 베푸신 말씀으로 천국 시민의 자격에 대한 내용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그리스도 사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자 제자의 길에 관해 말씀하신 교훈입니다.
1. 거짓된 무리들을 책망하심
1) 거짓된 영접
예수님께서는 각성과 각촌에 두루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안식일날 바리새인 중 한사람이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위해 기꺼이 그의 초청에 응하셔서 그의 집에 가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의 집에는 한사람의 고창병자가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이 고창병자를 고칠 것인지를 시험해보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시험하기위한 거짓 영접을 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앞에서 진솔하게 정직하며 거짓을 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보화입니다.
a.함께 식사하기를 청함받음(눅7:36)
b.고소할 틈을 얻기위하여(단6:4)
2) 고창병자를 치유하심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여 그의 집에 영접하였을때 예수님은 이미 그들의 궤계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고창병자를 세워서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면 안식일을 범한 죄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안식일에 고창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은 그들의 악함을 드러나게 했습니다. 항상 진리는 옳다고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a.선을 행하는 것(마12:12-13).
b.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함(마22:46)
3) 자기를 낮추라
청함을 받은 자들이 상좌 택함을 보신 예수님은 저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상좌는 그 좌중에서 가장 홀륭한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상좌에 앉으려고 애쓰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말석에 앉을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모범을 보여주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자신을 인간의 형체로 낮추어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그의 제자되는 우리도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a.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짐(눅18:14)
b.겸손은 성도의 행동 규범임(롬12:16)
2. 천국 잔치
1) 은밀한 보상
예수님은 대접받고자 하는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참조, 마7:12). 예수님께서는 부한 자보다 가난한 자들을 대접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떠한 목적을 위해 남에게 호의를 베풀고 대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에서 나오는 대접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외되고 가난한 자들에게 대접한 것을 갚아주십니다.
a.분깃없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신14:29)
b.병든 거지(눅16:20)
2) 배설된 큰 잔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 중 하나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천국을 큰잔치 혹은 혼인잔치에 비유한 예가 많습니다(참조, 사61:10;사62:5;마9:15;요3:29).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습에서는 잔치를 계획하고서 바로 손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종을 통해서 1차 통보를 하고 잔치 준비가 끝난후 2차 통보를 하여 잔치에 초대합니다.
a.혼인 잔치(눅14:8)
3) 초청에 응한 사람들
첫번째 초청에 응하였던 사람들은 잔치 준비가 끝난후 2차 초청에는 모두 약속이나 한듯 거절하였습니다. 초청을 받았던 자들의 거부는 단순한 약속 위반이 아니라 중대한 인격모독이었기에 주인은 진노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잔치 자리가 아직도 비자 주인은 종에게 길과 산으로 가서 강권하여 사람을 데려다가 집을 채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처럼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a.이생의 재리는 말씀을 막음(눅8:14)
3.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
1) 헐연과 목숨까지 미워하라
예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부모와 처자, 그리고 형제, 심지어 목숨까지도 미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해야 될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 죄인들을 위해 생명을 포기하셨던 것입니다. 육신의 혈연으로 인해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이나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소한것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a.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림(요12:25)
b.세상 생명은 헛된 것(욥7:15-16)
2) 자기 십자가를 지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원하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난을 각오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우리에게 맡겨진 각자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한다면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지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를 담당하셨듯이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a.고난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함(딤후1:12)
b.모든 것을 해로 여김(빌3:8)
3) 모든 소유를 버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자는 소유도 또한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소유를 포기하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지식, 가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에는 우리의 생명과 영혼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은 완전한 희생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를때 희생을 염두에 두지않으면 마치 망대를 건축하다가 도중에 그만두는 것과 같습니다. 순교자 야고보와 스데반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희생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a.그리스도를 최우선으로 사랑해야 함(마10:37-38)
b.과실을 많이 맺어야 함(요15:8).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희생을 기피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과 희생의 길을 자청하여 주님의 의를 드러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4:1-14
유대교 지도자들의 외식과 교만에 대해 경계하시며 겸손과 구제를 가르치신 내용이다.
안식일 식탁 교제(14:1)
유대인들은 평상시에 비해 안식일에는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거나 식탁을 풍성하게 차린다. 그런 다음 손님이나 랍비를 초대해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한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식사하러 가셨음은 이런 풍습에 따른 것이다. 한편, 당시에는 자신의 경건을 과시하기 위해 식탁 교제를 일삼는 외식자들도 많았다.
맛을 잃은 소금(14:34,35)
나트륨과 염소의 화합물인 소금은 맛을 내는 조미료로 쓰일뿐 아니라 방부제로도 사용된다. 소금이 인체에 필수불가결한 이유는 혈액이나 기타 체액의 삼투압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한편 흙이나 불순물이 많이 섞인 소금은 고열에 변질되기 쉽고, 곧 맛을 잃게 되고 만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선 소금을 비료 삼아 밭에 뿌리기도 하는데 맛을 잃은 소금은 땅을 황폐하게 하므로 그냥 길바닥에 버려질 뿐이다.
# 묵상
지혜로운 자의 자세 ( 14:7-11 )
지혜로운 자는 잔칫집에 갔을때 자기를 겸손히 낮추어야 합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은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것이 영광을 얻는 방법입니다. 보통 잔칫집의 상좌는 ㄷ자형의 배열에서 세 면의 중앙 부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바리새인들은 상좌에 앉아 섬김을 받았습니다. 이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복된 잔치 ( 14:12-14 )
갚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잔치를 베푸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벗이나 친척, 이웃 등에게 잔치를 베풀면 그들이 갚기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갚음을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혜택이나 갚음을 얻으려하지 말고 하나님으로부터 갚음을 얻도록 행해야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청 ( 14:16-24 )
이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주어진 구원을 받도록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를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포하고 사죄와 영생의 길을 가르쳐주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들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 초청은 민족이나 신분의 차이를 초월하여 선포되었고,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간절히 권고합니다.
잔치에 초청된 자들 ( 14:16-21 )
처음에 초청된 자들은 밭을 사고, 소를 사고, 장가들었기 때문에 사양을 했습니다. 이들의 이유는 모두 그럴듯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이유때문에 주님이 베푼 구원의 잔치를 사양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세속의 일이 아니라 천국의 일이요, 영생의 일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결과 큰 잔치에 대신 참석한 사람들은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다리를 저는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천국 잔치는 자격없는 자들에게 베풀어졌고, 이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 14:26-33 )
가족과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는 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지않는 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않는 자는 주님의 제자가 될수 없습니다. 요컨대 세상의 모든 것을 분토와 같이 여겨야 주님께 합당한 제자가 될수 있습니다.
소금의 교훈 ( 14:34, 35 )
소금은 좋은 것이나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쓸모가 없어지게 됩니다. 소금은 맛을 내는 양념이나 소독, 방부제, 제물용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됩니다. 본문은 특히 ‘맛’에 대해 말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맛이 나게’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못할때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게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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