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부활 24:1-12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들이 우리와 우리 자손들에게 밝히 드러나 있다. 그 증거들을 여기서 찾아볼수 있다.

(1)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를 따르던 선한 여자들이 그리스도가 죽고 장사지낸바 뒤에도 그리스도께 사랑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볼수 있다(1절). 그들은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서둘러 무덤에 갔다. 그들은 시체에 향료를 뿌리고, 얼굴과 머리 그리고 아마 상처난 손과 발에도 향유를 바르며 우리가 흔히 시체나 무덤 주위에 꽃을 뿌리는 것과 같이 시체나 그 주위에 향료를 뿌리려고 했다. 그리스도를 위한 이들 착한 여자들의 열심은 식지 않았다. 그 여자들은 안식일 전날 저녁에 예비해 놓은 향품을 가지고 안식일이 지난 새벽 일찍 무덤에 갔다. 그리스도를 위해 준비한 것은 그분을 위해 쓰라. 이 여자들의 이름이 주목을 받고 있다. 즉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또한 이들과 함께있던 다른 여자들도 주목을 받고있다(1,10절). 그들은 향품을 준비하는데는 동참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따라 무덤에 갔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후 그를 아는 자들이 더 늘어난 것처럼.

(2) 그들은 돌이 굴려 옮겨지고 무덤이 빈 것을 보자 놀랐다(2,3절).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지고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매우 근심했다(4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가끔 자기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일을 가지고 근심할때가 있다.

(3) 찬란한 옷을 입은 두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잘 설명해 준다. 천사들을 보자 그 여자들은 두려웠다. 그들은 무덤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보려고 얼굴을 땅에 대었다. 그들은 찬란한 옷을 입은 천사가 아니라 수의를 입은 주님을 찾고 싶었다. 천사들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있는 여자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로써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것을 증거한다. "구주께서 살아계심을 압니다." 이 사실은 성도들 모두의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그분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또한 우리를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책망을 받았다(6절).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그분은 무덤을 떠나셨다." 천사들은 그 여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을 환기시킨다. 갈릴리에 계실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6절). 그들이 부활의 예언을 믿고 명심했더라면 그 일이 발생했을때 쉽게 부활을 믿었을 것이다.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전에 하신 말씀을 그 여자들이 들을수 있도록 다시 한번 반복한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7절). 예수께서는 자기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항상 이 말씀 뒤에 따라나오는 말씀 즉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명심하지 못한 것일까? 하늘에서 내려온 이 천사들은 새복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며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준다.

(4) 이 말씀을 듣고 여자들은 만족했다(8절).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기억했다. 그 말씀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면 더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적절한때에 기억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깨닫는데 도움이 된다.

(5) 그들은 사도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무덤에서 돌아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9절). 잠시후 그날 아침에 그들 모두 이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말하고 있다. 사도들이 저희 말이 허탄한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11절). 그들은 그 말을 단지 여자들이 환상을 보고 하는 말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상상력으로 돌리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들도 또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잊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몇번씩이나 고백했던 그들은 사신후 영광의 자리로 들어가신다는 말을 수차례나 들었던 그들 아닌가? 그런데도 그 사실을 믿지못하고 주저하는 제자들의 어리석음에 놀라지 않을수가 없다.

(6) 베드로는 이 사실에 대해 조사를 했다(12절). 베드로가 무덤으로 달려간 이야기와 특별히 관련된 요20:1,2절을 보면 이 소식을 베드로에게 전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다.

1) 그 소식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서둘러 무덤으로 갔다. 만약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에게 파숫꾼이 도망갔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리로 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험하지 않을때는 발이 빠른 많은 사람들이 위험할때는 황소걸음이 된다.

2) 무덤을 살펴보고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시체를 쌌던 세마포가 벗겨져 곱게 개어있고 시체는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베드로는 마치 천사들의 증언보다도 자기 눈을 더 믿는 것처럼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3) 베드로는 그 된일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다. 베드로는 그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바로 알기만 하면 우리에게 아주 유익한 일들도 그렇지 못하기때문에 우리를 당황케하는 일이 많다.

 

Ⅱ.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 24:13-35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사실을 앞에서도 나왔다. 그러나 앞에서는 언급만 했을뿐이며(막 16:12) 여기서 비로소 자세히 말하고 있다. 그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첫달 즉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그날 일어났다. 두제자 중의 한사람은 글로바였으며 나머지 한사람은 확실하지 않다. 9절 말씀으로 보아 그는 열한 사도와 함께있던 자였다.

(1) 두제자의 목적지와 대화 내용 :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약 2시간쯤 걸리는 엠마오라하는 촌으로 갔다(13절). 주님이 부활하신 그날 아침에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들은 허탄한 말로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면서 이 모든 된일을 서로 이야기했다(14절).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해 의견을 주고 받았다.

(2)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매 그들은 좋은 동료를 만나게 되었다.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15절). 예수께서는 낯선 사람인양 우연히 같은 길로 가게된 것처럼 꾸며 함께 동행하고 싶다고 말했다. 두사람이 그러한 일에 열중하고 있는 곳에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오셔서 그들 중의 하나가 되신다. 이같이 신앙과 사랑이 잘못된 두사람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삽겹줄"이 된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문의하면서 그리스도를 찾고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그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절). 어쨌든 그들은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은 훨씬더 자유롭게 그리스도와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으며 그리스도도 그들에게 자유롭게 이야기할수 있었다.

(3) 그리스도는 그들을 알고 계셨으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주고받은 대화 : 친구들이 신분을 감추거나 변장을 하고 만났을때처럼 그들도 여기서 질문을 주고받고 있다.

1)그리스도께서 처음하신 질문은 그들이 슬퍼하고 있는데 대한 것이었다. 너희가 길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①그들은 슬펐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잃었으며, 주님께 걸었던 기대가 무너져서 실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근본을 포기했다. 그래서 무슨 수로 그것을 보충해야 할지 몰랐다. 그분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거나 믿지않았다. 그리고는 여전히 슬퍼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기뻐해야할 때인데도 슬퍼할때가 종종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하는것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해서 이야기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좋은 친구와 좋은 대화는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있다. 슬픔을 밖으로 표현함으로써 평정을 되찾게 된다. 같이 울어줌으로써 서로 위로를 받는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 때로는 가장 큰 위로가 된다.

②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대해 물으셨다.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승귀의 상태로 들어가셨지만 자기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다정하셨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슬픔을 아시며 그들이 당하는 괴로움을 보고 괴로워하신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사교적이 되라고 가르쳐주신다. 지나치게 소심한 것보다는 건전하나 사고를 즐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다. 또한 우리에게 동정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슬픔가운데 있는 친구를 발견하면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하신것 같이 그들의 슬픔을 알아주도록 하자.

2)그 일을 알지 못하는데 대해서 그들은 물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18절). 글로바가 그리스도께 정중하게 답변했다. 우리에게 정중한 자들에게 우리는 정중해야만 한다. 그때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글로바는 이 낯선 사람이 자기들을 해치려고 접근한 것이 아닌가하고 경계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렇지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의아했다. "아니! 당신이 예루살렘에 살면서 예루살렘에서 우리 주님이 당하신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는 이 낯선 사람에게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주고 싶어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라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걸 보고는 그냥 두지 못했던것 같다. 낯선 사람에게 가르쳐주려고 했던 자들이 예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리스도는 가진 자와 가진 것을 쓰는 자에게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글로바의 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이 소란해졌으며, 거기 살면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던 일이었음을 알수 있다.

3)대답하는 대신 그리스도는 그들이 아는바에 대해 물으셨다.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19절). 이렇게해서 자신을 더 낯선 사람처럼 꾸미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앞에 예비되어 있는 기쁨에 비하여 자기가 받으신 고통을 가볍게 여기셨다. 그가 얼마나 태평하게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뒤돌아보는지 살펴보라. 그분에게는 무슨 일인지 알아야할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고통이 그분에게는 너무나 쓰라리고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무슨 일이뇨'하고 묻는다. 그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는바를 말해줄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그 신비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4)그러자 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특별한 이야기를 하였다. 19절 이하에서 그들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잘 살펴보라.

①그들의 말속에는 그리스도의 생애가 요약되어 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것은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선지자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선생이셨다. 그는 영광스러운 이적 곧 자비의 이적을 많이 베푸심으로써 이를 확증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분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능하신 분이었다. 예루살렘에 살면서 이 사실을 모르는 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②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다(20절).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그들이 그리스도를 비난하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

③그들이 슬퍼하는 이유가 그분께 대한 실망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 그에게 이스라엘의 구속과 위로를 기대하였다. 바라는 것이 늦어지면 실망하게 되지만 바라던 것이 무너지면 절망하게 된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러나 그 사람이 바로 이스라엘을 구속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죽음으로써 가장 어려운 임무를 마치셨으므로 그들은 어느때보다 그가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믿어야하는 것이다.

④그들이 지금 놀라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다시 살아나셔서 사흘전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이셨던것 같이 영광 중에 모습을 드러내시리라고 기대했던 날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잠잠하기만 합니다." 그가 살아나셨다는 소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으나 대단찮게 말하고 있다(22,23절).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단지 그들이 환상을 보았을 뿐인것 같습니다. 왜 흔히 여자들은 그런데 쉽게 빠지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도들 중 몇사람도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24절).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가 살으셨다면 분명히 그들에게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생각할 이유가 더이상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모두 그의 십자가에 못박혔으며 그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⑤주님은 얼굴로 그들에게 알리시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자신을 알리셨다.

㉠그는 구약을 잘 믿지못하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미련하고 마음에 더디믿는 자들이여(25절). 그리스도는 그들을 미련하다고 하셨다. 악한 자라는 뜻이 아니고 연약한 자라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이 미련하다고 책망을 받은 이유는 첫째로 그들이 더디믿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더디믿으며 한번도 공정하게 판단하지 않고 선입견으로 멀리하는 자들은 미련한 자들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둘째로 선지자의 말을 더디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성경에 좀더 정통하고 성경에 나와있는 만큼만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정통하다면 가끔씩 우리를 사로잡는 당혹함에서 자유를 얻게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고난이야말로 그가 영광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다른 길로는 그 영광에 도달할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할 것이 아니냐(26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만족할수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오해를 벗겨주는 두가지 사실을 보여주신다.

첫째, 메시야는 이런 고난을 당하셔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가 받으신 고난은 그가 메시야되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닐뿐만 아니라 그가 메시야됨을 실제로 증거하는 것이다. 고난을 받지않으셨다면 결코 구세주가 되실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이런 고난을 당하신 다음 그는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그는 부활하실때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셨다. 그것을 자기의 영광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세상이 생기기전 그에게 있었던바로 그 영광이다. 그는 먼저 고난을 당하시고 그런 다음에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셔야 한다. 우리에게도 먼저는 가시 면류관을 그 다음에는 영광의 면류관을 기대하라고 명하신다.

㉢그는 구약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며 그 말씀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셨다(27절).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면서 자기가 받은 고난을 통해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가르쳐 주셨다. 모든 성경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산재해 있다. 예언이든지 약속이든지 기도든지 또는 다른 형식으로든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얻지못하고서는 성경 어느 부분도 통달할수가 없다. 복음의 은혜라는 황금실이 구약이라는 천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섭리에 따라 그때는 막연했지만 지금은 장막이 벗겨지고 신약이 구약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훌륭한 성경 주석가이시다. 특히 자기에 관한 성경에 있어서 성경을 연구할때는 조직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구약의 빛은 점차 밝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빈번하게 그리고 얼마나 다양한 방법으로 족장들에게 아들에 관해서 말씀하셨으며 또 그 족장들을 통하여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4)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나 성경 강해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았어야 했다.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설교와 강해가 퍽 마음에 들어서 여행이 빨리 끝난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한 사실이 그러했다.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28절).

1)그들은 예수께서 함께 머무시기를 바랬다. 예수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하시니(8절). 예수께서 더 가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더 가려하는것 같이 보였다. 만약 그들이 함께 머물러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예수께서는 더 가셨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시기를 원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초청하며 끈질기게 졸라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끈질기게 졸라대는 일을 멀리한 것일 뿐이다. 그들은 아주 간절한 목소리로 강권하여 말했다. 함께 유하사이다.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기쁨을 맛본 자들은 더욱더 그것을 열망하게 되며, 하루종일이라도 함께 동행해 주실뿐만 아니라 밤중에도 함께계셔 주시기를 간청하게 된다. 예수는 그들이 조르는 바대로 들어주셨다. 이에 저희와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29절).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문을 열고 들어오라고 간청하면 그에게로 들어가리라"고 약속하셨다(계 3:20).

2)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30,31절). 그는 길에서 시작한 이야기를 계속하신것 같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식사 준비는 곧 끝났을 것이며, 그 식사는 빈약했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을 즐겁게 해주셨다. 마침내 그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들과 내내 이야기를 나눈 분이 예수이심을 알게 되었다. 음식을 먹을때 즉 그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자 비로소 그분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보리떡 다섯개와 같은 "이적적인" 음식도 아니며 성만찬에서와 같은 "성례적인" 음식도 아니다. 단지 보통 음식일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와 같은 행동을 취하심으로써 특별한 의식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섭리 가운데서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라고 가르치신다. 음식을 대할때마다 그리스도를 식탁의 상좌에 모시며, 음식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신 것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먹고 마시자. 그가 떼어주신 음식이 아무리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감사함으로 받도록 하자.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가 누구인줄 보게 되었으며 그를 알아보았다. 안개는 걷히고 장막은 벗겨졌으며 그분이 주님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분은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실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그분의 모습을 할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모습은 틀림없이 그분에게만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과 은혜로 자신을 알리신 방법에 주목하라. 그는 그들의 마음의 눈을 여심으로써 그 일을 완전히 이루신다. 계시를 주신 그분이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가운데 있게 된다.

3)그리스도는 저희에게 얼핏 보이신후 가버리셨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순간적으로 보게된다. 즉 우리가 그를 보지만 잠시후에는 다시 그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다.

(5)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나누던 대화를 생각하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1)그리스도와 대화하면서 받았던 느낌을 각자 돌이켜 본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우리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이처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설교를 돌이켜보면서 의견을 나눈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누었다. 그들이 비록 설교하시는 분을 보지못했다 할지라도 그 설교가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설교는 매우 단순했다. 게다가 그 설교로 인해 그들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빛"과 "거룩한 열정"이 생겨났다. 내내 자기들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셨던 분이 바로 자기들이 본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게되자 비로소 이 사실에 주목한다. 그러면 어떤 설교가 유익한 설교일까? 그리스도께서 하신 설교와 같이 단순한 설교이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또한 성경적인 설교여야 한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때.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성경에 있는 신앙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또한 성경으로 자기들의 지식과 신앙의 원천을 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를 들어야만 유익한가?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하나님의 일 특히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며, 그로인해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생겨나며, 거룩한 소원에 사로잡힐때 우리 마음은 뜨거워진다.

2)그들은 이 소식을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전했다(33절). 그들은 곧 그 즉시로 일어났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알리시자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식사를 마칠때까지 기다릴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이었지만 그들은 전속력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난 그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어 그들의 흔들리는 신앙을 강건케하며 그들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 주어야만 안심할수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혼을 위해 이루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 주신바 된 사람들이 당연해 해야할 의무이다. 제자들의 마음은 이 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형제들에게 가서 그 기쁨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①그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증거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열한 사도와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자들이 밤늦게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이 두사람이 들어가자 기쁨과 환희에 차서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내셨다"고 말해주었다(34절).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본 사실은 고전15:5절에 나타난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천사는 여자들에게 그 사실을 특별히 베드로에게 전해서 그를 위로하라고 명령했다(막16:7). 또한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바로 그날 주님께서 친히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할 것은 베드로가 그 사실을 전하며 자랑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이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고 기뻐하며 말한 사실이다. 주님은 여자들에게 나타나셨을뿐만 아니라 시몬에게도 나타나셨다.

②그들이 본 것을 말함으로써 부활의 증거를 더 확실히 했다(35절). 두사람도 길에서 된일을 말하였다. 그리스도가 길에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을 여기서는 길에서 된일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 말씀으로 인해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마침내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

 

Ⅲ.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그리스도 24:36-49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날에 다섯번 나타나셨다. 그리스도는 동산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요 20:14),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한 여자들에게(마 28:9), 베드로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에게, 그리고 밤에 열한 사도에게 나타나셨다.

(1)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시자 그들은 대단히 놀랐다. 그는 아주 적절한때에 그들가운데 나타나셨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대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 말을 할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가운데 서심으로써 그 증거를 확실히 하셨다.

1)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36절). 이 말씀으로 보아 지금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우정의 표시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음을 알수 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않았다. 그래서 친히 찾아오신 것이다. 전에 그는 부활하신후 갈릴리에서 그들을 보게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는 제자들이 너무나 보고싶어서 그 약속을 앞당겨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보게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가끔 자기가 말씀하신 것보다 못하신 적은 없다. 그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씀이었다. 이런 말씀을 먼저 하심으로써 그는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한 것이나 나머지 다른 제자들이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것을 책망하려고 오신 것이 아님을 평화스럽게 오셔서 그들을 이미 용서하셨음을 나타내셨다.

2)그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심히 놀랐다(37절). 그들은 영을 보는 것처럼 생각해서 무서워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가 자기들가운데 계셨기 때문이다. 그들이 "유령이라"고 말했을때 사용한 단어는 허깨비, 귀신이란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기 쓰인 단어는 영혼이란 뜻이다. 육체를 입지않은 영으로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2)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은 대단히 만족했다.

1)그들이 이유없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책망하셨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38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잘 살펴보라.

①두려워할때는 언제나 마음속에 해로운 의심들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때로는 마음에 일어나는 의심때문에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두려워하기때문에 의심이 일어나기도 한다. 겉으로는 당당하지만 속으로는 두려워한다.

②그리스도를 오해하는데서 마음을 동요시키는 의심이 생겨난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는 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깨우치시며 겸손케하실때, 그리스도께서 섭리를 통하여 우리를 연단하시며 우리로 회개하게 만드실때 우리는 마치 그분이 우리를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게 된다.

③마음속에 어지럽게 의심이 일어날때 주님은 언제나 그것을 눈치채신다. 그는 의심하였다고 제자들을 책망하심으로써 의심하면 우리도 책망받는다는 것을 가르쳐주신다.

2)제자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심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이 사라지게 하셨으며 그들의 신앙을 굳건하게 만드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두가지 증거를 보여주셨다.

①그는 자기의 몸 특히 손과 발을 보여주신다. "내 손과 발을 보라. 나에게 손과 발 즉 실제 육체가 있는 것을 보라. 못자국 난 손과 발이 보이지 않느냐? 이것은 다른 사람의 육체를 빌린 것이 아니고 너희가 보았던바대로 십자가에 못박혔던 나의 몸이다." 그는 영은 살과 뼈가 없다는 원리를 말씀하신다. "너희가 그렇게 친하게 지내고 그렇게도 가깝게 대화를 나누던 바로 나다. 두려워 말고 기뻐해야할 바로 나란 말이다." 우선 그는 그들의 시각에 호소하면서 못에 찔린 손과 발을 보이신다. 그리스도의 영화된 몸에는 못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 못자국으로 자기임을 증명할수 있었다. 그는 그 못자국을 보이셨다. 후에 그는 도마에게도 그 못자국을 보이셨는데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신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부끄러워하거나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의 고난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다음에 그는 그들의 감각에 호소하신다. 만져보라. 그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만져보지 못하게 하셨었다(요 20:17) 그런데 여기서 제자들에게는 만져보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고 그로인해 고난을 받게될 그들인지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충분히 납득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자기를 만져보게 하심으로써 자기가 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하셨다. 기독교 초기에는 그리스도가 실체적인 육신을 입지않으셨으며 실제로 탄생하거나 수난을 당한 적이 없다고하는 이단들이 많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이런 이단들은 벌써 오래전에 매장당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이나 유령이 아니라 부활하신 후에도 실제 육신을 입으신 분임을 알고 또한 확신한다.

②자기의 몸이 실체임을 보여주시려고 함께 잡수셨다. 베드로는 이 사실을 대단히 강조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행 10:41).

첫째,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못하고 기이히 여길때에(41절). 그들이 약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부활에 대해 믿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은 도리어 그리스도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한다. 대제사장들이 주장한 것처럼 그들은 그의 시체를 숨겨놓고는 그가 살아나셨다고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나셨는데도 계속해서 그는 살아나지 않았다고 말하려 한다. 후에 그들이 그것을 믿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게 되었을때 부활은 무엇보다도 완벽한 증거를 갖게된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약점이기는 했지만 용서받을수 있는 약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들 앞에 드러난 증거들을 무시하고 믿지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너무 기뻐서 믿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도 좋은 소식이라 사실로 생각할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기이히 여겼다. 그것은 너무나 좋고 엄청난 일이어서 사실로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둘째, 그들에게 더 확신을 갖게하고 용기를 주시려고 주님은 먹을 것을 청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실제로 그들과 함께 잡수심으로써 그의 육체가 다시 살아난 사실을 증명하셨다. 그들은 주님에게 구운 생선 한토막을 드렸다(42절). 이것은 간소한 식사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것을 먹는다면 주님께서도 같은 것을 잡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제자들은 주님과 같이 먹기 때문이다.

3)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다.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을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키셨다. "이 말씀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때 내가 너희에게 들려주었던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만 잘 기억한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도 잘 깨닫게 된다. 주님은 구약에서 읽었던 말씀을 인용하신다.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44절). 메시야에 대해서 구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곧 그의 나라에 관한 것뿐 아니라 그의 수난에 대해 기록된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어야 한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라도 다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그와 관련된 구약성경을 몇가지 언급하셨다. 즉 모세의 율법과 선지서와 시편,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 것을 살펴보라. 곧 주님은 그들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리스도에 대해 구약에서 예언된 말씀의 의미와 참뜻을 깨닫게 하셨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45절). 두제자와 이야기하시면서 주님은 마음을 여심으로써 성경 본문을 가리운 장막을 걷어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영에 접근하셔서 즉시로 그것을 지배하실수 있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마음을 열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어두움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어두운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신앙을 심는 방법은 바로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문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마음을 여는 의도는 우리로 성경을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로 성경에 기록된 것을 좀더 잘 깨닫게 한다는 뜻이 아니고 성경에 기록된 것은 좀더 잘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결코 성경 이상을 배울수가 없다. 즉 그들은 성경으로부터 계속해서 배워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주님은 사도의 신분을 지닌 그들에게 교훈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48절). 너희의 본바를 온세상에 전하여야 하리라. 너희는 이 모든 일을 확실히 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목격자다. 가라 가서 세상에 이 모든 일을 확실히 증거하라.

①그들이 전파해야할 내용 : 그들은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서 메시야에 대해서 그리고 그의 나라의 영광과 은혜에 대해서 옛적에 어떻게 기록되었는가를 보여주며 그 모든 것이 주 예수 안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말해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위대한 복음 진리를 사람들에게 알려야만 한다(46절).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할 것이 기록되었으니. 가서 기록된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것을 세상에 말하라. 가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라. 그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지 말며 고난받는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만 했던 것과 세상의 죄를 없이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필수적이었던 사실을 전하라. 또한 그리스도가 삼일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실을 전하라.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또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느니라. 가서 말하라. 죽었던 그리스도가 지금 살아계시다고. 또한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며 죽음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고. 복음이 요구하는 회개의 의무가 인류에게 강조되어야 한다. 죄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로 전파되어야 한다(47절).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라. 돌이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그들의 심령과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죄사함이라는 엄청난 복음의 특권이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을 확실히 말해주어야 한다. 가서 죄악된 세상에 희망이 있음을 말해주라.

②그들이 전파해야할 대상 : 그들은 모든 죄인에게 이를 전파해야 한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가는 곳마다 이 빛을 전하여야 한다. 선지자들은 유대인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전파했지만 사도들은 온 세상에 이를 전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회개하라는 복음의 의무에서 면제될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측량할수 없는 복음의 은혜에서 제외될수 없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의 날이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면 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일까?

첫째,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들은 이 방법을 취해야만 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3).

둘째, 복음의 기초가 된 사건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먼저 그 사실들이 입증되어야 한다. 부활하신 구세주의 영광을 비추는 최초의 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그를 대적하는 대담한 원수들을 대항해서 무색하게 만든다.

셋째,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용서하는 본을 보여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의 은혜가 제일 먼저 예루살렘에 베풀어진다. 그리고 거기서 잠시후에 수천명이 그 은혜를 공유하게 된다.

③복음을 전파할때 그들에게 주어질 능력 :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우리라(49절). 주님은 여기에서 잠시후면 그들에게 성령을 전에 없이 충만하게 부어주실 것이며 그로인해 그들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은사와 은혜를 완전히 갖추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령을 받는 자는 그로인해 능력을 입게 된다. 만약 사도들이 그런 능력을 입지 못했더라면 그들이 행한바 주의 복음을 심고 이 세상에 주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결코 할수 없었을 것이다. 위로부터 온 능력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이 틀림없는 것이며 약속된 것은 말할수 없이 귀중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사자들은 능력을 갖게될 때까지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복음 전파가 시급하다고 여겨지더라도 전도자들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Ⅳ. 그리스도의 승천 24:50-53

그리스도의 승천에 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1) 그리스도는 매우 엄숙하게 제자들을 떠나셨다. 주님에게는 양쪽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으셨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로부터 땅에 오심으로써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을 온전히 마치셨다. 그리고 그 일을 다 이루신후에는 하늘로 돌아가셔서 그곳에 거하고 계신 것이다.

1)주님이 승천하신 곳 :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과 인접한 베다니에서였다. 그곳에는 주님의 수난이 시작된 동산이 있으며 거기서 주님은 매우 고민하고 계셨다. 베다니는 "슬픔의 집"이란 뜻이다. 천국에 가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고난과 슬픔의 집에서 천국에 오르게 된다. 또한 여기서 주님은 얼마전에 당당한 예루살렘 입성을 시작하셨었다(눅 19:20).

2)주님께서 승천하실때 목격한 사람들 :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를 볼수 있게 하셨다. 제자들은 주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주님이 부활하신후에 살아계신 주님을 본 것만으로도 주님의 부활을 증명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이 승천하시는 것을 보았다. 왜냐하면 달리는 주님의 승천을 증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3)주님의 작별 인사 : 주님은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셨다. 주님은 기분 나쁘게 떠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기쁘게 떠나셨다. 주님은 축복을 남기셨다. 주님은 그들을 축복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셨던 것처럼 끝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것을 보여주셨다.

4)주님이 떠나신 방법 : 축복하실때에 저희를 떠나(51절). 그렇게 하심으로써 주님은 그들을 떠나신다고해서 그들을 축복하는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님을 암시하셨다. 주님은 지상에 계실때 그들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으며 하늘에 가셔서도 그것을 계속하고 계신다.

5)주님의 승천에 대한 표현

①주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반드시 우리를 떠날 날이 있다. 세상적으로 그를 알던 자들도 이제부터는 더이상 그를 그렇게 알지 않는다.

②주님은 하늘로 올리우셨다. 불병거나 불말이 필요없었다. 주님은 그 길을 아시기 때문이다.

(2) 제자들은 계속해서 명랑하게 주님을 섬겼다. 주님이 떠나실때 그들은 주님께 대한 경의를 표했다. 즉 그들은 주님께 경배했다(52절). 주님이 그들을 축복하자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들은 주님께 경배했다. 그들이 보지못하도록 구름이 주님을 가리웠지만 그렇다고해서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의 예배를 보지못하신 것은 아니다. 그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큰 기쁨으로 그곳에 머물렀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변화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떠나야한다고 말씀하셨을때는 슬픔이 마음에 가득하던 그들이었건만 그분이 떠나는 것을 본 지금은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을 기대하는 동안 신앙심에 가득차 있었다(53절). 그들은 기도 시간에 성전 예배에 참석했다. 그들은 주님이 예루살렘에 계실때 그러셨던 것처럼 계속해서 성전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대신한 것을 알았지만 그들은 성전에서 부르는 찬양을 함께 드렸다. 거룩한 기쁨과 찬양보다 더 성령받을 마음의 준비를 훌륭히 시키는 것은 없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슬픔은 가라앉으며 소망만이 남는다. 아멘. 계속해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 해설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 24 )

본장은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으로 생을 마감하자 실망하여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은 부활 소식을 듣고는 다시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본장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1. 예수의 부활

1) 빈무덤

안식후 첫날 새벽 미명에 큰 지진이 나며 예수님의 시체를 넣어둔 무덤 돌문이 굴려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마침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께서 묻혀있던 무덤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무덤의 돌문이 옮겨진 것을 보고 무덤안에 들어가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은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간 줄 알고 근심했습니다.

a.여인들이 무덤을 찾음(요20:1)

b.돌로 막은 유대인의 무덤(요11:38)

2) 부활을 증거하는 천사들

여인들이 주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근심하고 슬퍼할때 천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여인들은 그들의 찬란한 모습을 보고 놀라서 두려움때문에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천사들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고 여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천사들의 이 말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입니다. 천사들은 이 세여인들에게 생전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즉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천사의 말을 통해 여인들은 주님께서 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하고 부활을 믿었습니다.

a.성도의 길을 인도하는 천사(행8:26)

b.산 자에 대해 증언함(히7:8)

3) 부활을 증거하는 여인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은 여인들은 빈무덤과 천사의 말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그 말이 허탄한듯이 보여 믿지 않았습니다. 여인들의 말을 들은 제자 중 베드로만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는 무덤에 가서 빈무덤을 확인하고 신비감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한다면 신앙의 성장을 도모하도록해야 합니다.

a.부름받은 자들(마4:19-20)

b.부활 예수를 처음 본 사도(눅24:34)

 

2. 부활하신 예수의 출현

1)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날 그 동안 주님을 따라다녔던 두사람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지못하고 커다란 실망가운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사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동행하시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글로바는 저희와 동행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분을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a.그 중에 한명은 글로바였음(눅24:18)

b.제자들이 말을 할때에 그 가운데 서계신 예수(눅24:36)

2) 깨닫는 두사람

엠마오로 가는 두사람과 동행하신 부활의 주님께서는 성경에 근거하여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고난을 받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시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리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사람은 자신들의 목적지에 이르렀을때 머물지않고 더 가시려는 예수님께 날이 저물어가므로 머무르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은 머무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후 떼어 그들에게 주시매 그들은 그제서야 눈이 밝아져 예수님이신줄 알아보았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의 가르침을 받았던 두제자는 예수님이 사라지시자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때에 자신들의 마음이 뜨거웠던 사실을 기억하였습니다.

a.성경은 곧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임(요5:39)

b.마음이 청결한 자만이 하나님을 봄(마5:8)

3) 사도들에게 나타나심

엠마오의 두제자들은 즉시 예루살렘에 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사도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먹을 것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구운 생선 한토막을 드리자 받으시고는 그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육체로 부활하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a.보고도 의심함(마28:17)

b.음식물의 요구는 육체를 지니셨음을 증거함(눅24:39)

 

3. 마지막 사역과 승천

1) 성경을 해석하심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선자자의 글과 시편에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해석하시며 당신의 모든 사역은 구약 예언의 성취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은 구약에 흐르는 예언이었습니다. 고난은 이면적으로, 영광은 표면적으로 구약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가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주의 고난(시22:1)

b.주의 부활(시16:10)

2) 성령을 약속하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낼터이니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선지자 요엘을 통해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참조, 욜2:28-29).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성령 강림을 여러번 예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은 주님께서 승천하신후 열흘만인 오순절에 모인 제자들 가운데 임했습니다.

a.그리스도를 잉태케 하셨음(눅1:35)

b.성도들을 권능있는 증인들로 만드심(행1:8)

3) 승천하심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주님께서는 40일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사역을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승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모두 끝났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육적으로 떠나가셨지만 영으로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승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한 제자들은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a.큰 대제사장이 되기 위함(히4:14)

b.때를 따라 성도를 도우심(히4:16)

 

결론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건을 통해 우리 성도들의 신앙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부활은 성도의 신앙을 좌절하지 않도록 하며, 이 세상의 모든 죄악에 대해 담대하게 맞설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힘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이겨야 하겠습니다.

 

# 핵심

24:1-12

대속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보여주는 빈무덤 사건과 천사의 증거이다. 주님은 영원히 죽지않고 마침내 부활하시어 만백성의 참소망이 되신 것이다.

구속(redemption, 24:21)

대가를 지불하고서 속박 상태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 대표적 용례로는 율법 규정에 따라 사람과 가축을 막론하고 초태생을 대속하는 것, 가난한 친족이 판 땅을 되사는 것, 속전을 지불하고 죄수나 노예를 해방시키는 것, 하나님이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내신 일 등을 들수 있다. 예수님을 가리켜 ‘구속주’라 함은 그분이 죄인들이 당해야할 저주와 죄짐을 대신 걸머지고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 주님의 대속 공로를 믿는 자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자유케 된다.

 

# 묵상

최초의 부활 소식 ( 24:1-10 )

최초로 부활 소식을 전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여 갈릴리에서부터 물심양면으로 도우며 따라온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러 갔다가 부활의 첫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 소식에 대한 사도들의 반응 ( 24:11, 12 )

믿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빈무덤을 확인하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못하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후에는 믿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부활의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요20:27, 29).

엠마오의 두제자 ( 24:13-35 )

이들은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수 없었습니다. 이는 육신의 눈이 가리워진 것이 아니라 주님을 알아볼수 있는 영의 눈이 가리워진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며 그분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직접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말과 일에 능한 자로밖에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와같이 영의 일은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제대로 깨달을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실때에 그 마음이 감동되었고, 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주실때 영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말씀과 나눔은 그리스도를 깨닫게하는 두가지 기본 요소입니다. 한편 예수님의 부활을 깨달은 제자들은 즉시 다른 제자들에게로 가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행1:8). 그러므로 성도는 죄짐으로 불안하고 괴로운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예수님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여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주님께로 인도해야할 것입니다.

부활의 증거 ( 24:36-43 )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분명하게 자신의 부활을 믿지못하는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당신의 손과 발을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육체적 증거를 넘어선 인격적 증거로써,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그 손과 발의 상처를 직접 만져봄으로써 예수님의 인격을 가까이서 경험할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심으로써 자신이 십자가 죽음 이전의 바로 그 예수님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명 ( 24:44-49 )

성도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부활의 주님을 믿고, 예언의 성취이신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참예하며, 죄사함을 얻을수 있도록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승천이 주는 의미 ( 24:50-53 )

예수님의 승천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일부분으로써 성자 예수님의 임무와 보혜사 성령의 분수령이 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가견적인 승천으로 재림때도 모든 자들이 볼수 있도록 재림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승천은 성도에게 부활의 확증으로써 의미가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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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빌라도와 헤롯 앞에 서신 그리스도 23:1-12

종교적인 법정에서 주 예수에게 신성모독 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예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으나 사형에 처할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다른 방도를 취했다.

1. 빌라도에게 고소함(1-5)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갔다. 그리고는 예수를 처벌해달라고 하였다. 그때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고발하지 않고(왜냐하면 빌라도는 그런 것을 범죄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로 고발했다. 그들은 속으로는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죄는 전혀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예수에 대한 고소 내용 : 그들은 예수에 대해 허위진술을 했다.

①백성들로 하여금 가이사를 반역하게 했다. 로마 통치하에 있는 백성들에게 불만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며 빌라도도 그것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빌라도로 하여금 이 예수가 백성들의 불만을 조장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2절).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백성들에게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지금 그를 가이사에게 세바치는 것을 금했다고 거짓 고발한 것이다. 깨끗한 양심은 중상모략에 대항하지 않는다.

②가이사에게 대적했다. 그들이 예수를 배척한 이유는 바로 그가 가이사에게 대적하는 일을 하지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예수가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한다는 사실을 고발한 것이다.

2)고소 내용에 대한 변호 : 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다(3절). 그 질문에 대해 "네 말이 옳다"고 답변하셨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전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가이사의 통치에 관여하지 않는다. 예수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가이사의 권위에 도전하면서 유대인의 왕노릇 한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3)빌라도의 무죄 선언 :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4절).

4)고발한 사람들의 계속되는 소란 : 빌라도가 무죄를 선언하자 그들은 누구러지지 않고 더욱 흥분해서 굳세게 말했다. 그들에게는 내세울만한 특별한 근거가 없었던것 같다. 하지만 그들은 소란을 피우고 계속 우김으로써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저가 온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케 하나이다(5절). 그는 백성을 소동케 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칭찬할만한 일을 위한 것뿐이었다. 그는 백성을 가르쳤다. 그러나 공공질서를 해치는 교훈을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그를 고발할수는 없었다.

2. 헤롯에게 고소함(6-12)

1)빌라도는 예수와 그의 소송을 헤롯에게 넘겼다. 그를 고소한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라는 말을 했기때문이다. "그가 어느 지방 사람이냐?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고 빌라도가 물었다(6절). 그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헤롯 관할이니 헤롯에게로 보내자"고 빌라도가 말했다. 빌라도는 그 사건때문에 골치가 아팠으며 그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

2)헤롯은 기꺼이 예수를 심문했다(8절). 헤롯은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했다. 그는 갈릴리에서 예수의 소문을 들었으며 예수를 보고 싶어한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것은 호기심때문이었으며 또한 이적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것도 호기심때문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여러말로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말도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뿐 아니라 이적을 행하심으로써 헤롯을 만족시키지도 않으셨을 것이다. 고난에서 건짐받기 위해 이적을 바랐던 자는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결코 거절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거만한 왕은 거절당한 것이다. 그는 갈릴리에서 그리스도와 그가 베푸시는 이적들을 볼수도 있었다. 이제 이적들을 보려고 하지만 보여주시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헤롯은 자기가 청함받은 날을 몰랐기 때문이다. 주님은 값싸게 기적을 행하시지는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군주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대로 할수는 없는 것이다.

3)예수를 고소한 자들이 헤롯앞에 등장했다. 그들은 서서 예수를 힘써 고소했다(10절). 그 말에는 뻔뻔하다는 뜻이 들어있다.

4)헤롯은 예수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그는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겼다. 그 말은 예수를 멸시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예수를 힘을 다 잃고 이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무력해진 사람처럼 취급하며 비웃었다. 헤롯은 빌라도보다 훨씬더 그리스도를 모욕했다. 헤롯은 왕이라고 조롱하려고 빛난 옷을 예수에게 입혔으며 나중에 빌라도의 군사들도 같은 모욕을 주도록 가르쳤다.

5) 헤롯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으며 이로써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되었다. 헤롯은 예수에게 유죄 판결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도로 보낸 것이다(11절). 그렇게 함으로써 빌라도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다. 이같이 서로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12절). 전에 그들은 서로 원수였다.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는 자들이 예수를 대적하는데는 하나가 되는 방법을 잘 살펴보라. 그리스도는 위대한 화해자시다. 빌라도와 헤롯은 둘다 예수의 무죄를 인정했다. 여기서 의견의 일치를 봄으로써 다른 곳에서 가졌던 불화를 해결하게 된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십자가형 23:13-25

여기서 복되신 예수는 군중들의 소요에 휘말려 십자가에 달리게 된다.

(1) 빌라도는 예수가 사형을 받거나 구속당할만한 일을 전혀 하지않았음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가 그렇게 믿었다면 그는 곧 예수를 석방해야만 했다. 하지만 빌라도는 악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전혀 친절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화가날까봐 염려했다. 그러므로 완전을 기하려고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았다. 그리고는 그들이 말하는바를 듣고자 하였다(14절). "너희가 이 사람을 내게 끌어왔도다.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 심문하였으며 너희 모두 이 사람에 대해서 주장하는바를 들었으나 나는 도저히 그것을 납득할수가 없다. 즉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다."

(2) 빌라도는 헤롯도 같은 생각임을 백성들에게 호소한다(16절). "내가 너희를 헤롯에게로 보냈으며 헤롯은 예수를 도로 보냈다. 헤롯은 예수가 사형받을만한 죄는 짓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이다. 헤롯은 예수를 무력한 자라고 비웃었으나 위험 인물이라는 낙인을 찍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사형장보다 정신병원이 더 어울린다고 빌라도는 생각했다.

(3) 빌라도는 백성들이 찬성하기만 하면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다. 백성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이 일을 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 올무에 빠지게 된다. 그들은 소란이 생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불의를 행하려고 한다.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기위해 빌라도는 첫째로 죄수 한명을 부득이 놓아주어야 하므로 죄수라는 명목으로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다(17절). 둘째로 빌라도는 예수를 때려서 놓으려고 했다.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한다면서 왜 그를 때려야만 하는가?

(4) 백성들은 차라리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한다. 바라바는 성 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때문에 옥에 갇힌 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보다 이 범죄자에게 우선권을 준 것이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주소서(18,19절).

(5) 빌라도가 두번째 그리스도를 놓아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그들은 소리쳤다.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20,21절).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고는 어쩔수가 없게 되었다. "저를 십자가게 못박게 하소서."

(6) 빌라도가 세번째 말하자 그들은 더욱 포악해졌다(22절). "무엇때문인가?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는가? 그의 죄목을 대라. 나는 그를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그러나 그들은 큰 소리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들에게 죄인을 놓아주고 결백한 자를 십자가에 못박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7) 빌라도는 마침내 포기한다. 백성과 대제사장들의 소리가 이긴 것이다. 빌라도는 그들이 원하는대로 하도록 언도했다(24절). 바라바를 놓아주는 악한 상황과 함께 이 내용이 다시 한번 나온다. 민란과 살인을 위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25절). 저희 뜻대로 하게 예수를 넘겨준 것보다 더 잔인하게 예수를 다룰수는 없었다.

 

Ⅲ. 십자가의 형장으로 가는 도중의 사건 23:26-31

그들이 어떻게해서 예수의 재판을 마쳤는지 이상하다. 날이 새자 예수는 대제사장들에게 끌려갔다(눅 2:66). 그 다음에는 빌라도에게 끌려갔다가 헤롯에게로 끌려가고 다시 빌라도에게 끌려왔다. 그리고 오랫동안 빌라도와 백성들 사이에 예수를 놓고 의견 차이가 있었던것 같다.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고 가시관을 씌우며 무례한 짓을 자행했다. 이런 일은 네 다섯시, 기껏해야 여섯시까지 모두 끝났다. 왜냐하면 9시에서 12시 사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당했던 것처럼 세상밖으로 쫓겨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제 그들이 예수를 죽이는 광경을 보게 된다.

1. 십자가를 진 한사람(26)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갔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시몬에게 지우고 예수를 좇게하였다(26절).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 밑에 쓰러졌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이같이 편하게 해준 것은 동정심, 잔인한 동정심에서였다.

2. 슬피우는 무리(27-31)

보통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부당하게 고난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형 집행시 흔히있는 것처럼 이로인해 많은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라갔다. 백성 특히 여자의 무리가 그를 따라갔다(27절). 그들은 또한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다. 예수를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를 존중하며 동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를 믿지않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가슴을 쳤으며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많은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울었다. 그리스도에게는 그들의 눈물을 인식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슬퍼서 죽을것 같았다. 그리스도는 돌이켜 그들을 향해 자기를 위하여 울지말고 자신들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28절).

1)예수는 그들에게 우는데 대해 지시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말라." 그들이 예수를 위해 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기들과 자녀들을 위해서는 울라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에 대한 승리였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를 대신해 영생을 획득할 것이다. 그러니 그를 위해 울지말고 그를 죽게한 우리의 죄와 우리 자녀들의 죄를 위해서 울자.

2)그들이 그들 자신과 자녀를 위해 울어야하는 특별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보라 너희 성읍에 슬픔의 날이 곧 오리라." 얼마전에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위해 울라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눈물은 우리로 꼼짝없이 울게 만든다. 두 잠언이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데 둘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참으로 끔찍할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자식없이 산 후에 죽어 묻히고 싶었을 것이다.

①무자한 자가 되고 싶을 것이다. 가족이 없는 자를 부러워하며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가 복이 있다할 것이다.

②살아서 묻히고 싶어할 것이다.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절). 이러한 재난의 소리가 들리지않는 어두운 동굴에 숨고 싶을 것이다. 가루가 될 위험이 있다고하더라도 어쨋든 숨으려고 할 것이다.

3)그리스도가 받으시는 고난에서 이러한 황폐함을 생각해 내는 것은 당연하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31절).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이시다. 그것도 아주 무성한 푸른 나무이다. 그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 것을 볼때 그가 중재하시지 않았다면 전체 인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또한 그들이 번성하도록 모든 것이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른 나무로 남아있는 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짐작할수 있다. 예수께서 당하신 혹독한 고난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아무리 거룩한 성도라도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마른 나무이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면 그들이라고 어찌 고난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겠는가?

 

Ⅳ. 십자가 처형 23:32-43

1. 마태 마가복음과의 공통된 내용 32-38

(1) 다른 두행악자도 사형을 받게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가니라(32절).

(2) 해골이라는 곳 갈보리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3) 예수를 두행악자 사이에 못박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예수를 범죄자처럼 취급했을뿐만 아니라 완전히 범죄자로 여겼다.

(4) 사형을 집행했던 군병들이 그 대가로 예수의 옷을 취하여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졌다.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34절).

(5) 사람들은 예수를 조롱했다.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그들 사이에 서서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그가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었을때 사람들은 그에게 십자가에서 자신을 구원하라고 독촉했다.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거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35절). 그들은 예수를 희롱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37절).

(6) 예수의 죄목을 밝혀 머리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붙였다. 유대인의 왕노릇을 했기때문에 예수는 죽음을 당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가 실제 유대인의 왕임을 선언하고자 하셨다. 즉 그는 유대인의 왕이시며 그의 십자가는 면류관을 향하는 길이다. 이 말을 고등언어인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로 기록했다. 모든 사람이 읽을수 있도록 이 세언어로 기록한 것이다. 이 세언어로 예수가 왕이심을 선포한다.

2. 누가복음의 고유한 내용(34,39-43)

두 구절이 여기 해당하는데 이 구절의 내용은 매우 놀랍다.

1)원수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도(34절)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34절).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뒤 돌아가실때까지 일곱가지의 유명한 말씀을 남기셨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 중 최초로 하신 말씀이다. 그는 십자가에 묶이자마자 혹은 그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을때 이 기도를 하셨다.

①그들을 위한 간구 :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저지르고 있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셨다. 예수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중보를 하셨다. 그런데 예수의 수난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말씀도 곁에 보이는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는 자기 죽음의 의도와 의미를 설명하셨다. 즉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뿐만이 아니라 회개하며 복음을 믿게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해 죄사함이라는 놀라운 것을 획득하셨다. 예수의 피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한다. 그들이 자기를 박해하며 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②그들을 위한 청원 :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얼마간 용서받을수 있는 종류의 무지가 있다. 즉 교육받을 길이 없거나 교훈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지도자들때문에 무지했으며 그에 대해서 잘못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가 선포하는 교리에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들은 동정해야 하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자. 우리 자신과 남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해야할 가장 중요한 것은 죄사함이다. 원수들 그리고 우리를 미워하며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자. 우리는 대적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자. 이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자기가 세우신 원칙에 따라 본을 보이셨다(마 5:4,45 네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그런 원수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는데 우리에게 사랑하고 기도하지 못할 원수가 있을수 있을까?

2)십자가에 달린 강도의 회개 : 그리스도는 두강도 사이에 달리셨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인류에 미친 상이한 결과들을 볼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강도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전조가 되었으며 다른 한강도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조가 되었다.

①두행악자 중의 한사람은 끝까지 완악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가까운 곳에 달린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비방했다(39절).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39절). 그 강도도 지금 상당히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 교만한 마음을 낮추지 못했으며 자기와 같이 고통받는 자에게까지도 착하게 말하지 못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독촉한다. 뻔뻔하게 그리스도를 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②나머지 한강도는 마침내 마음이 녹아졌다. 이 강도는 불속에서 타는 나무 조각을 건져내듯 간신히 구원받았으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인한 불후의 작품이 되었다. 그렇다고해서 회개를 자꾸 미루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회개라면 아무리 늦어도 괜찮지만 막판에 하는 회개치고 진정한 회개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는 그를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특별한 예로써 택하신 것이다. 유다를 파멸시키고 베드로를 견고케 하심으로써 이미 사단을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승리의 트로피를 하나 더 마련하신다. 이 사건을 잘 살펴보면 이 사건이 예외적인 사건임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하나님 은혜의 예외적인 역사 : 그것은 그가 한 말에 나타난다. 우선 나머지 한강도에게 한 말을 참조하라(40,41절)

㉠그는 그리스도를 비방하는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꾸짖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40절). 이 말은 그가 이같은 악을 행하는 무리를 따르지 않게된 것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었음을 의미한다. "네게 인정이란 것이 있다면 너와 같이 고통을 받는자를 모욕하지 않을 것이다. 너도 동일한 정죄를 받았으며 같이 죽어가고 있지 않느냐."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이 마땅함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41절). 진실하게 회개한 자는 죄의 대가를 받는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의를 행하셨으나 우리는 악을 행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부당하게 고난당하셨다고 생각한다. 회개한 이 강도는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을 보고 그가 행한 것은 옳지않은 것이 없다고 확신한다. 대제사장은 그리스도를 행악자 중의 하나로 간주하여 두행악자 사이에 못박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강도는 대제사장들이 깨닫지못한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주 예수께 한 말을 보라.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 이는 죽어가는 죄인이 죽어가는 구세주에게 드린 기도이다.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영광을 받으셨다. 또한 이렇게 기도함으로써 그 강도에게는 복이 되었다. 아마 전에는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마지막 순간에 구원해 주셨다. 이 기도에 나타난 그의 신앙을 잘 살펴보라. 죄를 고백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임을 깨달았다. 이렇게 간구하면서 그는 주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의 나라가 있으며, 곧 그 나라에 들어가실 것이며, 그가 사랑하는 자들은 복되리라는 것을 고백한다. 그 당시 이 모든 것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후에 또하나의 세상이 있으리라고 믿었으며 그 세상에서는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나머지 한강도와는 달리 십자가에서 구원받고 싶어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이 다 끝났을때를 잘 예비하였다. 이 기도에 나타난 겸손을 보라. 그가 청한 것이라곤 단지 자기를 기억해달라는 것이었다. 자기를 어떻게 기억하시든 그것은 주님께 맡겼다. 그리스도는 이 강도를 기억하셨다. 이 기도속에는 끈질긴 열의가 들어있다. 즉 그는 이 기도속에 온마음을 쏟았다. "주여 나를 생각하소서. 나는 더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당신의 손에 맡기나이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기도해야할 것은 바로 그의 나라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생각해주시는 것이다.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는 것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둘째, 그에게 베푸신 그리스도의 예외적 사랑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 기도에 내가 응답하리라. 네가 구한 이상을 네게 줄것이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셨는가? 회개한 강도에게 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은 지금 말할수 없는 고통중에 계시지만 불쌍한 회개자에게 위로의 말씀을 잊지않으셨다. 아무리 악한 죄인일지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사함을 얻게될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낙원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게될 것이다. 누가 이 말씀을 하셨는가?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중보의 말씀으로 그가 받으시는 고난의 의미를 깊이 설명하고 있다. 즉 그는 우리를 대신해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돌아가셨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며 순종하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천국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우리에게 그가 낙원에 들어갈 것임을 알려 주신다.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면류관에 이르셨다. 우리도 다른 길로 갈 생각을 하지말자.

㉡그리스도는 회개한 모든 신자들에게 그들이 죽으면 그 낙원에 자기와 함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려주신다. 여기서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는 천국이 얼마나 복된 곳인가를 살펴보라. 그곳은 기쁨의 낙원이며 하나님의 낙원이다(계 2:7). 그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함께하신다. 이것이야말로 하늘나라의 행복이다. 우리는 죽자마자 그곳으로 가게 된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내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밤 우리는 낙원에 있을 것이다.

 

Ⅴ. 십자가 처형 23:44-49

1. 그리스도께서 운명하실때 일어난 기이한 현상들(44,45)

(1) 해가 빛을 잃음 : 때는 제 육시 즉 정오쯤이었다. 그런데 제 구시까지 온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2)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먼저 말한 것은 하늘에서 일어났으며 이것은 성전에서 생긴 일이다. 하늘도 성전도 다 하나님의 집이다. 휘장이 찢어짐으로써 의식적인 율법이 폐기됨을 암시하였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던 모든 장애물이 사라짐으로써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수 있게 되었다.

2. 그리스도께서 힘을 다하여 하신 말씀(46)

예수께서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그렇게 나와있다. 또한 여기서도 큰 소리로 말씀하신것 같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절). 그는 이 말씀을 조상 다윗에게서 빌어왔다(시 31:5). 그리스도는 성경 말씀대로 죽으셨다. 하나님께 호소하는 이 말씀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버림받은 것을 하소연할때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짖었으나 이제 끔찍한 영혼의 고통이 끝났음을 보여주려고 여기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그리스도는 이 말씀을 특별한 의미에서 중보자이신 자신에게 사용하셨다. 그는 지금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며"(사 53:10)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이다"(마 20:28). 이렇게 말씀함으로써 그는 제물을 드리셨다. 즉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으셨다가 떼셨다. "이것을 바칩니다. 이것을 당신 손에 모두 드립니다." "아버지여 내가 위하여 죽는 죄인들의 생명과 영혼대신에 내 생명과 영혼을 받으소서." 제물을 바치는 자의 뜻이 선할때에는 하나님은 그 제물을 흠향하신다. 그는 자기 영혼을 낙원에 들이시며 사흘후에 되돌아가게 해달라고 아버지 손에 자기 영혼을 맡긴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이 한 이 말을 유용하게 만드신 것이다. 우리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기꺼이 죽을 준비를 하고 있으며 내세를 믿는 굳건한 믿음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도록 하자.

3.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47-49)

(1) 군병들을 지휘했던 백부장은 일어난 일들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47절). 그 백부장은 로마인 즉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그는 참을성 있게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던 자에 대해 증언하셨다.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더나아가 "진실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2) 무관심하게 구경만 하던 자들에게도 관심이 생기지 않을수 없었다. 누가만 이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48절).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일을 보고 심각해져서 돌아갔다. 그들은 다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이 일은 당분간 그들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바로 이 사람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소리질렀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을때 예수를 희롱하며 욕하던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입을 열지못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양심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감동은 곧 사라진것 같다. 즉 그들은 가슴을 두드리며 돌아갔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경의의 표시를 더이상 하지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잠시후에 이 사건을 잊어버린 것을 염려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마찬가지로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그들가운데 못박히신 사실을 알게된 많은 사람들이 잠시동안은 감격하지만 그 감격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고 어째서 그를 사랑해야만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3) 예수를 아는 자들과 제자들은 멀리 떨어져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할수 있는한 가까이 다가와서 그 된일을 보았다(49절). 예수를 아는 자들이 다 멀리 서있었다. 이 사실은 예수의 괴로움 중의 하나였다.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이 이 일을 보고 있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시므온이 예언한대로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위하여 그리고 여러사람의 생각을 드러내려고 세움을 입으신 것이다(눅 2:34,35).

 

Ⅵ. 그리스도를 장사지냄 23:50-56

1. 장사를 치른 사람(50,51)

예수를 아는 자들은 멀리 서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이라 하는 사람'을 일으키셨다(50절). 요셉은 선하고 의로운 자요, 덕행이나 경건이 있어서 흠이 없다는 평판을 받던 자요, 모든 사람에게 공정할뿐만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던 자였다. 그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공회 의원이었고 산헤드린 회원이었으며 유대 교회의 장로였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죽인 사람들과 같은 집단에 속해 있었지만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하였다(51절). 그는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반대하였을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그리스도의 친구들과 동조하였다. 즉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크게 소란을 떠는 자들보다 훨씬더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 많이 있다.

2. 그리스도를 장사지내기 위해 요셉이 한 일(52,53)

(1)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2) 이를 내려 세마포로 쌌다. 틀림없이 손수했을 것이다. 우리가 어린아기를 "배내옷"으로 싸듯이 시체를 천으로 싸는 것이 유대인의 풍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세마포를 원단으로 사서 시체를 쌀수 있도록 여러 조각으로 잘랐다.

3. 장사지낸 곳(53)

바위에 판 무덤이었는데 그곳에서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적이 없었다.

4. 장사지낸 시기(54)

이 날은 예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54절). 그들이 급하게 장사를 서두른 이유가 여기 있다. 즉 안식일이 거의 되었기 때문이다. 슬픔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때문에 지키는데도 신경을 써야만 했다.

5.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55)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니고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온 여자들이었다(55절). 그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그 옆에 있었다. 그래서 그의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았다. 호기심때문이 아니라 주 예수께 대한 사랑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6. 그의 시체를 위해 마련된 준비물(56)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예비하더라(56절). 이는 그들의 신앙이라기보다 그들의 사랑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께서 사흘만에 부활하리란 것을 기억하고 믿었더라면 그와 같은 낭비나 수고는 하지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준비를 바삐해 놓고 안식일에 쉬었다.

 

# 해설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그리스도 ( 23 )

본장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총괄하는 대단원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체포되신 그리스도께서는 불의한 무리들이 불법으로 진행하는 재판의 과정을 통해 십자가에 달리시어 이 땅에서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무리 하셨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은 악인들에게는 일시적인 승리를 주었고, 반면에 그리스도를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 심문 받으시는 그리스도

1) 빌라도에게 심문받으심

무리들이 다 일어나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끌고 갔습니다. 공회원들이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에게 간 것은 사형 선고를 얻고자해서 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죄목 세개를 들어 고소하였습니다. 이들이 고소한 내용은 정치적으로 중범죄에 속하며 당시 로마 정부가 특히 엄중하게 다스리던 것들이었습니다. 공회원들의 고소를 받게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더욱 굳세게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피할 길을 생각하던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는 헤롯에게로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a.백성을 소동케한 민란의 수동자라고 했음(눅23:5)

b.구체적으로 묻고 구체적으로 답함(요18:37)

2) 헤롯에게 심문받으심

헤롯은 예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내쫓는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 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빌라도가 예수를 자기에게 보내자 그는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헤롯이 예수를 만나서 했던 질문이 어떤 것인지 본문은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는 자신과 관계된 몇가지 문제를 질문했을 것입니다. 헤롯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아무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헤롯은 하는수 없이 빌라도에게로 도로 보내었습니다.

a.평소 보고 싶었음(눅9:9)

b.믿음 없이 표적만 바라는 것은 예수를 시험하는 것임(마16:1)

3) 사형을 언도하는 빌라도

헤롯이 예수님을 자기에게 도로 보내자 빌라도는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문에 따라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회원들과 백성들은 빌라도의 결정에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의 선동 아래서 거칠어지고 과격해진 유대인들을 앞에 놓고 정치가로서 큰 결정을 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그는 명절때 죄수 하나를 풀어주는 전례를 들어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백성들은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그들의 요구대로 예수께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a.분기가 가득함(눅6:11)

b.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함(요19:16)

 

2.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1) 십자가를 지고 가심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언도받은 예수님은 자신이 매달려야 하는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형수들은 자신이 달려 죽을 십자가나 십자가의 횡대를 처형 장소까지 지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을 너무 힘들어하자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 대신에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워 예수님을 좇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과 슬피우는 여자들의 큰 무리를 향하여 '나를 위하여 울지말고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습니다.

a.희롱을 당한후 끌려가심(마27:31)

b.갈릴리에서 함께온 무리들임(눅23:55)

2) 사람들의 희롱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못박은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무리들과 백성들은 비웃고 희롱하였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백성들은 구경하고 관원들은 비웃었습니다. 저들은 눈으로 멸시하며 입으로 조롱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모든 불의에서 떠나라고 가르치며,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같이 거룩하도록 명합니다.

a.자기 구원에 무능한 자라 했음(막15:31)

b.예언의 성취임(시69:21)

3) 함께 달린 두행악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을 누가는 행악자라고 하였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을 강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십자가처형은 특별히 민란이나 소요 사태를 일으킨 지방민들에게 관례적으로 가했던 지독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사람 중 한사람은 예수를 향해 비아냥거렸지만 또 한사람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옳다고 인정한 강도는 구원의 은총을 입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a.자기 죄를 인정함(눅15:18)

b.영생의 약속(마19:29)

 

3. 그리스도의 죽음

1) 예수께서 운명하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처절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주님은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후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삶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했으며, 죽으실때도 그 영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며 운명하실때 여러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해가 빛을 잃어 어두움이 임하였으며 성전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a.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게 함(출26:33)

b.하나님은 영이심(요4:24)

2) 백부장의 고백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모습을 지켜본 백부장은 그 모든 된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정녕 의인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이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과 말씀하시는 중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참조, 요4:14). 이 말씀은 우리가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어디에서 찾아야만 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a.두려움으로 지켜봄(마27:54)

b.하나님의 아들임을 시인함(막15:39)

3) 무덤에 장사되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자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에게 나아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시체를 십자가에서 내려 세마포로 싸고 바위에 판 무덤에 장사했습니다. 이때 니고데모도 함께했습니다(참조, 요19:39). 예수님의 장례는 예비일에 되어졌습니다. 주님은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셨으므로 다음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요셉은 예수님을 따르고, 따른 제자로서 끝까지 소신껏 주님께 충성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을 메시야로 믿고 주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기를 기다렸던 자입니다.

a.존귀한 공회원으로 하나님나라를 기다렸음(막15:43)

b.성도들은 공개적으로 예수의 제자됨을 시인해야 함(마10:32)

 

결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는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지대한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죄를 멀리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 핵심

23:1-25

당시 유대인들에 대한 사형 집행권은 로마 총독이 행사했다. 빌라도에게 심문당하신 예수님은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십자가 처형(23:21)

십자가형은 원래 유대인의 처형법이 아니라 앗수르, 바사(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에서 행하던 것이다. 반역자나 살인범, 강도 같은 중죄인이 이런 처형을 당했는데 그것도 노예나 식민지 족속에만 국한되었다. 십자가 형태는 X자나 T자, 十자 등 다양했다. 처형 방식은 먼저 죄수의 옷을 벗겨 채찍질한 다음 십자가에 묶고 팔과 다리와 발에 커다란 쇠못을 박았다. 이런 상태로 방치된 죄수는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심한 고통과 탈수 증세로 쇠진해 2,3일만에 죽는다. 그 시체는 야수나 새들에게 뜯어먹히기도 했다.

낙원(paradise, 23:43)

헬라어 ‘파라데이소스’는 바사인들이 온갖 수목과 꽃이 만발한 화려한 정원을 가리켜 ‘파이리 다에자’라고 부른데서 파생된 말이다. 70인역(LXX)에서 에덴 동산을 ‘파라데이소스’로 번역한 이래 사용된 단어로 본절외에 고후 12:4절과 계 2:7절에도 나온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천국의 모습으로써의 낙원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계 2:7), 회복된 에덴 동산을 낙원과 일치시킨다고도 볼수 있다. 우리는 성도가 죽으면 그 영혼이 바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게된다(빌 1:23; 계 6:9)고 믿는다.

 

# 묵상

빌라도의 판결 ( 23:1-4 )

빌라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무죄를 판결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무죄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강력한 항의에 직면하자 그는 선고를 번복하였습니다. 법보다 군중의 소동에 더 마음을 쓴 그는 비겁한 사람의 대명사요, 구세주를 죽인 원흉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헤롯의 죄악 ( 23:8-11 )

헤롯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지않으면서도 이적 보기를 원하는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우주적 왕권을 멸시한 반역죄를 저질렀으며,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빌라도에게 심문하도록 권한을 넘겨줌으로써 왕으로서의 태만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헤롯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일로 빌라도와 친구가 되었고 결국 사탄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멸망의 길을 자초한 것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 ( 23:26 )

일반적으로 사형수는 자신이 달려 죽을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직접 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력이 너무 쇠약해져서 십자가를 지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그 일이 맡겨졌던것 같습니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것을 보면(막15:21; 롬16:13), 그가 우연히 주님의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추측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위의 명패 ( 23:38 )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를 히브리어와 헬라어, 그리고 로마어로 붙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로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을 경멸하거나 조롱하기 위해 쓴 것이었으나,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의 진정한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온세상의 왕이며,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고난과 수욕이 하늘의 영광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두죄수 ( 23:39-43 )

한 행악자는 예수님을 비방했으나 다른 행악자는 회개와 함께 예수님께 은총을 구했습니다. 악한 행악자는 자신의 처형이 억울하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행악자는 자신의 악행을 자인하며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성소의 휘장 ( 23:45 )

예수님의 운명과 함께 어둠이 임하고 성소 휘장의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성소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쳐진 것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전 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화목의 길이 활짝 열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 주위의 사람들 ( 23:47-49 )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절규하며 영혼이 떠나시자 한백부장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라고 고백했으며, 사람들은 가슴을 쳤고, 여자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는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승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 23:50-53 )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우며 하나님나라를 기다리는 자로, 예수님을 새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지만(마27:57) 유대인들이 두려워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예수님의 죽음에 직면해 용기있게 나서서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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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22:1-6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룟 유다(3,4)

가룟 유다는 열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때 소동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Ⅱ. 유월절 만찬 22:7-20

(1)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이 이르자 그리스도와 제자들을 위한 유월절 만찬이 준비됐다(7절). 예수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셨다(9,10절). 그들은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게 된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그들을 집으로 인도할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의 인도에 의지하며 한걸음씩 그 섭리의 인도에 따르도록 그들에게 가르치셨다. 그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은 집주인에게 방을 보여달라고 해야하며(11절), 집주인은 기꺼이 방을 보여줄 것이다(12절). 제자들은 예수께서 이미 하신 말씀대로 그들을 인도할 사람과 집과 방을 찾았다(13절). 그들은 완벽하게 유월절 준비를 갖추었다(11절).

(2) 유월절을 엄숙하게 지내셨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셨다. 유다도 빠지지 않았다. 유다는 이미 공공연한 반역죄를 지은터였지만 공개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기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에 나머지 제자들과 같이 앉도록 허락하신다.

1)그리스도께서는 이 유월절을 어떻게 지키게 하셨는가? 내가 고난을 받기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15절). 예수는 이것이 자기가 받을 고난의 서곡이 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것을 원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 주신 그분을 섬기는데 주저하지 말자. 그분이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그 사랑을 보라. 예수는 그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원하셨다. 예수와 그 제자들에게는 사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예수는 이제 막 제자들을 떠나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고난을 받기전에 그들과 함께 이 유월절 음식먹기를 원하신 것이다. 마치 이로인해 자기의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도록 격려를 받으신것 같다.

2)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유월절을 폐하셨는가?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16절).

①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유월절이 완성되었다.

②유월절이 완성된 복음시대의 성례인 성만찬에서 완성되었다. 그들은 만찬을 먹었으며 그리스도도 그들과 함께 만찬을 잡수셨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었던 영적교제 때문이었다.

③그러한 자유로운 축제는 유월절 양을 먹으면서 하신 말씀을 유월절 포도주 즉 축복의 잔 또는 감사의 잔을 드시면서 반복하신다.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7절). 그 다음 성례전의 잔을 마실때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것은 그의 피로 세우신 새언약이므로 특별한 주의를 요하게 하려고 한사람 한사람에게 나누어 주신것 같다. 그러나 유월절 잔에 대해서는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18절)고 말씀하신 것으로 충분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16절). 이튿날 죽어가시면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성취하셨다.

(3) 성만찬의 제정(19,20절). 유월절과 출애굽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며 예표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단의 권세에서 틀림없이 건지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성만찬을 제정한 것이다.

1)우리를 대신해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것(breaking of christ's body)을 여기서는 떡을 떼는 것(breaking of bread)으로 기념한다. 즉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우리를 위하여 주신 이 떡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써 주신 것이다. 즉 우리의 죄를 만족시키려고 떼어주셨던 이 떡을 이제는 우리의 영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우리에게 떼어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를 행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때를 기념한다. 또한 이를 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며 그와 함께 영원한 언약에 참여하기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를 기억하는 것이다.

2)대속을 이루신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잔에 담긴 포도주로 표현하였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언약을 확보한 사실을 기념하여 그 언약의 약속을 확증한다.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기념하는 모든 의식을 통하여 그것이 우리를 위하여 붓는 것임에 주목하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그분"

 

Ⅲ.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 22:21-38

여기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가 나온다. 이 설교의 대부분은 독특한 것이며 요한복음에는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 자기를 배신할 자에 대해서 하신 말씀(21,23)

(1)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배신자가 지금 그들가운데 있으며 그들 중의 하나라고 암시하신다(21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 사건이 성만찬 이전에 나오지만 여기서는 성만찬 이후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다가 성만찬에 참석했으며 떡과 잔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한것 같다. 즉 그 엄숙한 의식이 끝난후에 그리스도께서는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음모가 성공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인자는 이미 작정된대로 거거니와(22절).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예지에 따라 원수들에게 넘겨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강제로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고난을 받으셨다.

(3) 그리스도께서는 배신자를 저주하신다. 그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23절). 하나님이 이미 그리스도께서 배신당하도록 작정하셨으며 또 그리스도 자신이 그 작정에 기꺼이 복종하신 것이지만 유다의 죄나 심판은 결코 가볍지않다.

(4) 그리스도께서 그 배신자가 그들 중의 한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제자들은 놀라서 서로 의심하게 되었다. 저희가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23절).

2. 제자들의 분쟁(24-20)

1)어떠한 이유로 다툼이 일어났는가를 보라.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난지라(24절). 앞에서 한 말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다. 앞에서는 누가 배신자가 될 것인가를 묻고있었는데 여기서는 누가 제 일인자가 되야할 것인가를 묻는다. 인간의 사악한 마음이 얼마나 모순되는가!

2)이 분쟁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보라.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날카롭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그런 다툼이 얼마나 큰 죄이며 어리석은 일인가를 부드럽게 깨우쳐주셨다.

①이런 다툼으로 인해 제자들은 이방인의 임금같은 자가 되었다(25절). 이방인의 임금들은 백성을 주관한다. 주관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보다는 이방 임금들에게 적합한 일이다. 집권자들은 은인이라는 칭함을 받는다. 집권자 자신이 그렇게 부르며 아첨하는 사람들도 또한 그렇게 불러준다. 사실은 그들이 아무리 자신을 위해 일한다하더라도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생각들을 한다. 프톨레미 왕조 중의 한사람은 "은인"이라는 성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주목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넌지시 가르치신다.

첫째, 선을 행하는 것이 큰 자처럼 보이는 것보다 훨씬 귀하다. 그들 스스로 말한바와 같이 나라의 은인이 통치자보다 훨씬 존경을 받는다.

둘째, 선을 행하는 것이 큰 자가 되는 확실한 길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가장 존귀한 일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것임을 믿게하셨다. 은인이라는 더 큰 명예를 가진다고 하면 집권자라는 하찮은 명예는 버려야한다.

②이런 다툼으로 보아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아니함을 알수 있다.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6,27절).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지않고 진리와 은혜의 능력외의 방법으로 누구를 주관하려고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주신 원리는 바로 이런 것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을지니라." 나이나 명예는 안락함을 보장하는 대신 두갑절 수고하라고 채찍질 한다.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이런 원리의 본보기를 들어주신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27절).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섬기는 자세를 취하셨도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보라.

③제자들은 세상의 영예를 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는 제자들을 위해 예비해두신 더 귀한 영예가 있는데 제자들 모두 그것을 함께 누리게될 것이기 때문이다(28-30절).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에게 충성하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28절). 너희는 내 곁에 서서 나에게 충성을 다한 자들이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있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같이 했다. 제자들이 결코 그리스도께 도움이 될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함께있었던 것을 고맙게 여기셨으며 그들의 친절을 인정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부족한 점이 많았었다. 그들에게서 많은 실수와 연약함을 발견할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선생께서는 그 모든 실수들을 다 눈감아 주신다. "너희는 나와 함께한 자들이다." 헤어지면서 이렇게 그들을 칭찬하심으로써 자기와 같이 마음이 바른 자들을 얼마나 만족해 하시는지를 보여주신다.

㉡제자들의 충성에 대한 보상을 계획하셨다. "너희에게 나라를 맡기리라."

첫째,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이해하라.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에게 사람들 중에 있는 나라 즉 복음교회를 맡기셨다. 이 나라를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복음 사역의 후계자들에게 맡기셨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예비해 놓은 영광이다.

둘째, 저 세상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나라를 주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나라에 있어 그리스도의 상에서 먹고 마시게될 것이다(16,18절). 그들은 그리스도의 수고와 고난의 대가로 얻으신 기쁨을 같이 누리게될 것이다. 최고의 영광은 "내 보좌에 함께 앉게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계 3:21).

3. 그리스도를 부인할 베드로(31-34)

1)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베드로와 나머지 사도들에 대한 마귀의 궤휼을 예고해 주신다. 시몬이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1절). 한때는 나머지 사도들을 대신해서 그리스도께 말하는 입이었던 베드로가 여기서는 나머지 사도들을 대신해서 듣는 귀가 된다. 제자들 모두에게 경고하실 말씀(나로 인하여 너희 모두가 배척을 받으리라)을 특별히 사단의 공격을 받은 베드로에게 직접하신다. 사단이 너희를 청구하였으나(31절). "그들을 시험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특히 베드로를 시험하게 해주십시요"라고 사단은 간청한다. 사단은 그들을 까불러서 그들이 밀이 아니라 겨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어 그들을 청구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사단은 그들을 시험할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말을 한 것이다. "사단은 너희가 특히 너희의 선두주자인 베드로가 위선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너희에게 도전해 왔다."

2)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특히 격려하셨다. "가장 맹렬한 공격을 받게될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노라." 참신자들의 믿음에도 실수가 많이 있지만 결정적인 실수를 범해선 안된다. 제자들의 믿음이 때로는 비참할 정도로 흔들리지만 아주 쓰러지지 않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께서 중보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기도가 그들을 붙잡고 계신다.

3)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다른 형제들을 도우라고 부탁하신다. "너는 돌이킨후에 네 형제를 굳게하라.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은 것을 알게되면 다른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힘쓰라. 함께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되거든 다른 형제들을 격려해 주어서 그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게 하라." 죄를 지은 자들이지만 분명히 죄에서 돌이킬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돌이킨 자들은 최선을 다해서 형제들을 굳게하며 넘어지지 않게해야 한다(참조 시 51:11-13).

4)베드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와 함께있겠다는 결심을 말한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33절). 이 말은 참으로 대단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때 베드로는 그것을 꼭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참제자들은 누구라도 그가 어디를 가시든지 그를 따르고 싶어하는 것이다.

5)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가 세번 자기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34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더 우리의 약한 것과 그리스도께서 은혜롭게 등장하셔야할 것을 잘 아신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

4. 제자들의 형편(35-38)

1)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형편에 대해서 물으신다(35절). 그리스도는 전에 제자들이 자기에게 매우 충성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28절). "내가 너희에게 전대없이 보내었을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는 자기가 전에 제자들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보내셨다는 것을 인정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같이 아무것도 없이 세상으로 내보내신다면 우리보다 훨씬 나은 자들도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없었나이다(35절). 가끔씩 하나님의 섭리를 뒤돌아보며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어떻게 극복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는 선하신 주인이시며 그의 보살핌에는 부족함이 없다. 때로 그의 종들은 빈 손으로 내보내신 다음 그들을 도와주신다. 우리가 아무리 간신히 먹고산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사는데 필요한만큼만 있다면 여유를 갖도록 하자.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2)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곧 상황이 바뀔 것임을 경고하신다. 그들의 주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전에 예언하신바와 같이 이제는 고난을 받으실때가 된 것이다(37절). "기록된바대로 내게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 그래서 나에 관한 일이 끝이 아니라. 그때 나는 다 이루었다고 말하게 되리라." 고난받을 것을 미리 예언함으로써 고난받으실때 위로가 된것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고난받을때도 그것은 위로가 될 것이다. 그들은 끝을 맺게될 것이며 영원한 유종의 미를 거두게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어느 정도 그들의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게된다. 그리고 주님이 가시고 없을때 그들은 주님과 같은 고통을 받게될 각오를 해야한다. 그들은 이제 친구들이 과거에 그랬던것 같이 친절을 베풀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제는 전대를 가져야 한다. 적들이 전보다 더 사나워질 것을 예상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식량뿐만 아니라 무기도 필요하다. 검이 없는 자는 검의 필요를 절감하게 될 것이며 겉옷을 팔아 검을 샀으면 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령의 검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무장해야할 무기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으신것 같이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경건히 복종함으로써 갑옷을 삼자. 그러면 겉옷을 팔아 검을 산 것보다는 더 안전하게 준비할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듣자 제자들은 그들에게 어떤 무기가 있는가 찾아본다. 그리고는 검 둘이 있는 것을 발견한다(38절). 그중 하나는 베드로의 검이었다. '족하다'고 말씀하심으로써 그 검에 의지하라는 부탁이 아니심을 시사하신다. 검보다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도움이 되시며 영광의 칼이 되어주기를 부탁해야 하는 자들에게 검 둘은 족한 것이다.

 

Ⅳ. 감람산의 고뇌 22:39-46

여기서는 그리스도가 동산에서 괴로워하시는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는 과정속으로 들어가셨으며 결국은 그것을 정복하신다.

1. 다른 복음서와 공통된 내용(39-46)

(1) 그리스도께서 나가셨을때 제자들도 따라 나갔다. 그리스도께서 시험받으실때도 아직까지 그와 함께했던 그들이므로 지금도 그를 떠나려하지 않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혼자계시기 위해 늘 가셨던 곳으로 가셨다. 그리스도께서 가끔 혼자계셨던 사실을 암시함으로써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다.

(3) 아무리 피할수 없는 시험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그것때문에 시험에 들어 범죄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제자들에게 권면하신다.

(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혼자서 기도하셨다. 그는 돌 던질만큼 떨어져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했다고 한다. 거기서 그는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하고 기도했다.

(5)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고난을 받아 죽는 것이 아버지의 뜻임을 알았기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간구한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소서 인간적인 내 생각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6)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내내 기도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었다(45절). 기도하신후 일어나셔서 제자들이 잠든 것을 보셨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일인데 여기서는 제자들이 잠든 것을 아주 선의로 해석하고 있다. 즉 슬픔으로 인하여 잠이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형제들의 약점을 덮어주도록 가르친다. 만약 더좋은 이유가 있다면 형제들의 약점을 그것으로 자비롭게 덮어주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7) 제자들을 깨우시고 나서는 그들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자느냐 일어나 기도하라(46절). 일어나 기도하라는 말씀은 시험에 들려고 할때 누구에게나 필요한 말씀이다. "주여 이 위기에 나를 도우소서"

2. 누가복음의 독특한 내용(43-46)

1)그리스도께서 괴로워하실때 하늘로부터 사자가 나타나 힘을 도왔다(43절).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면하게 된것은 아니지만 사자들로부터 그에 상당한 힘을 얻게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짐을 지우시든 불평해서는 안된다. 천사들은 고통받고 있는 주 예수님을 보살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의 군대로 자기를 구하라고 부탁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기를 도와 힘을 주도록 기도만 했다.

2)예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다(44절). 고통이 더할수록 그는 더욱 기도에 전념하셨다. 기도할 시기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민이 있을때는 특히 더 기도해야할 때이다. 고통이 크면클수록 기도를 더많이 해야한다.

3)이렇게 애쓰심으로 인해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여기서 땀을 핏방울에 비유한 것뿐이냐 아니면 피가 정말 땀속에 섞여서 피빛이 되었으며 피땀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냐는 논쟁이 비평가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 땀구멍마다 피가 맺히고 옷에는 온통 피로 얼룩졌다. 이는 영혼의 고뇌를 보여주는 것이다.

 

Ⅴ. 유다의 배반 22:47-53

1. 유다의 표시(48)

여기 많은 무리가 있으며 유다가 앞장서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잡도록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어디로 가야 예수를 찾을지 몰랐으나 유다가 그들을 데리고 예수가 있는 장소로 갔다. 그들이 거기 가서도 예수가 누구인줄 알지 못했으나 유다는 자신이 입맞추는 자가 바로 예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갔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가 유다에게 한 질문 즉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는 질문을 주목한다(48절). 이 질문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있지 않다. 제자 중의 한사람이 그를 배반해야만 하는가? 입맞춤으로 그를 배반해야 하는가? 그 사랑의 표시가 이렇게 더럽혀진 적이 있었는가?

2. 그를 보호하려는 제자들의 노력(49-51)

그 될일을 보고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49절). "우리에게 검 둘을 가지라고 하셨으니 이제 그 칼을 쓸까요?" 그러나 그들은 너무 성질이 급하고 불같아서 대답을 들을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의 머리를 겨냥했으나 빗나가서 오른편 귀를 떨어뜨렸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막았다고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사과하신 방법 : 이것까지 참으라(51절). 그는 자기를 잡으러 온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진정시켜 그 화가 제자들에게 미치지 않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정중히 말씀하시고 자기 제자 중의 한사람이 그들에게 한 잘못에 대해 소위 사과하심으로써 원수에게 까지라도 선한 말로 대하라고 가르치신다.

(2) 그리스도께서 상처를 치료하신 방법 :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61절). 그 귀를 다시 붙여주셨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증거를 보여주셨다.

①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셨다. 낫게 하실수 있는 분이라면 원할 경우 죽게할수도 있다.

②자신의 자비하심을 증명하셨다. 후에 우리를 경멸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자신의 규칙에 대해 본을 보이셨다. 악을 선으로 갚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충고(52,53)

그리스도는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52,53절). 그 말씀을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에게 하셨다고 누가는 전한다. 그들은 성직자들이었으며 이처럼 가증한 일을 하도록 채용되어 성전을 지키는 자들이었다.

1)그들의 행동을 설득하시는 방법 : 그들은 무엇때문에 한밤중에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는가? 그리스도께서 저항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강도를 잡는것 같이 나왔는가? 그리스도께서 도망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분은 매일 성전에 그들과 함께있었기 때문이다.

2)그들의 행동을 수용하시는 방법 : 앞에서는 볼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때요 어두움의 권세로다. 내게 닥친 일이 아무리 괴롭더라도 그에 따르리라. 왜냐하면 그렇게 결정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두움의 권세 즉 이 세상의 어두움을 지배하는 사단이 제멋대로 하도록 두어라."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바로 어두움의 권세이다. 어두움은 빛에 양보하며 어두움의 권세를 빛의 왕자에게 굴복하게할 것이다.

 

Ⅵ. 베드로의 부인 22:54-62

여기서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는 우울한 이야기를 보게된다. 대제사장의 집에 끌려갔다는 것 말고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대제사장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것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는다(54절). 그러나 표현 방법은 주목할만하다.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54절). 이 말로 보아 그들이 당황하고 있었던것 같다. 그들은 전에 보고들은 바로인해 두려움이 생겨서 그를 가장 먼 길로 해서 데려갔으며 마음은 조급했다.

1. 베드로의 실족(55-60)

이는 몰래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따라갔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런데 멀찍이 따라갔던 것이다. 베드로는 중용을 지키기로 하였다. 즉 양심의 가책을 받지않으려고 그리스도를 따랐다. 하지만 소문내지 않고 무사하려고 멀찍이 따라갔다. 그리고는 대제사장의 종들속에 끼었다. 종들이 뜰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다. 베드로는 그들 중의 한사람인 것처럼 그 가운데 앉았다. 그리스도와의 친분을 일체 부인(22:47-53)하고 있었던 것이 베드로의 실족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 매우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비자가 베드로를 예수와 함께있던 자라고 고발했다. 그녀는 베드로가 불가에 앉았을때 주목해서 보았다. 그리고는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베드로에게는 그 말을 인정할만한 용기도 없었고 그 말을 슬쩍 돌릴만한 재치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 말을 간단히 부인해 버렸던 것이다. 이 여자여 내가 저를 알지 못하노라(58절). 그는 이러한 실족을 계속 반복했다. 조금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가로되 너도 그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58절). 한시간쯤 있다가 또 한사람이 장담하며 말했다.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59절). 베드로는 자기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부인할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6절).

2. 베드로의 회복(61,62)

베드로가 자신을 되찾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보라.

1)닭이 울었다. 이 소리를 듣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작은 사건이 위대한 결과를 가져올수도 있다.

2)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이 장면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볼수 없으나 매우 놀라운 장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베드로에게 등을 향하신채 재판을 받고 계셨지만 베드로가 한 말을 전부 알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주목하신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부인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퍽 다행한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를 쳐다보셨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비록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했으나 베드로의 눈은 여전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만이 베드로를 바라보셨으며, 베드로만이 그 의미를 알고 있었던것 같다.

①그것은 깨닫게하는 눈빛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야 나를 모르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

②그것은 질책하시는 눈빛이었다.

③그것은 비난하는 눈빛이었다. "베드로야 어찌된 일이냐? 나를 부인한 자가 바로 너란 말이냐?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제일 먼저 고백하고 결코 나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했던 네가 그랬단 말이냐?"

④그것은 동정어린 눈빛이었다. 그는 베드로를 부드러운 눈으로 쳐다보셨다. "불쌍한 베드로야 내가 돕지 않으면 형편없이 되겠구나"

⑤그것은 무엇인가 지시하는 눈빛이었다. 그리스도는 베드로에게 물러가서 좀 생각해보라고 눈짓하셨다.

⑥그것은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베드로의 마음에 전달되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보지 않으셨다면 아무리 닭이 울더라도 베드로는 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눈빛과 함께 능력이 나와서 베드로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3)베드로에게 주의 말씀이 생각났다.

4)베드로는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다. 그리스도의 눈빛은 베드로의 마음을 녹여서 죄를 회개하는 경건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

 

Ⅶ. 그리스도의 수난 22:63-71

(1) 대제사장의 종들이 예수를 모욕한 방법 :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며 때렸다(63절). 그들은 예수를 조롱했다. 예수에게는 괴로운 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즐거운 밤이었다. 그들은 예수의 눈을 가리고 얼굴을 때리되 때린 자의 이름을 댈때까지 계속하면서(64절). 예수의 선지자직을 모욕하려 했다. 이외에도 많은 말로 욕을 했다(65절).

(2) 산헤드린 공회가 그리스도를 고발하고 판결한 방법 : 산헤드린은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이 사건을 해결하려고 아침 일찍 일어나 날이 새자마자 모여들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했다면 그렇게 일찍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네가 그리스도냐고 그들은 예수에게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서 많은 말로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67절). 그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했다면 그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를 믿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이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2)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당당히 항의하셨다(67,68절). "그러나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말하여도 믿지 아니할 것이다. 미리 결정해 놓고서 무엇때문에 소송을 여는가? 내가 제시하는 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다. 너희들은 내게 대답도 아니할 것이며 나를 풀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려면 내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근거들에 대해 답변을 해야한다. 또한 내가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너희는 나를 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너희는 둘다 하려고 안할 것이다."

3)그들에게 재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재림이야말로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완벽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69절).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물을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4)그러자 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냐"라고 물었다(70절). 그는 단 7:13,14절에 나오는 것처럼 다니엘이 본 인자의 환상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만약 인자라면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5)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신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80절).

6)이를 근거로 그들은 예수의 유죄를 판결했다.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71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친히 그 입에서 들었으니 더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그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화려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는한 그를 메시야라고는 생각할수 없었다.

 

# 해설

최후의 만찬과 고난 ( 22 )

본장에 언급된 일련의 사건들은 사복음서 전체에서 다루는 주제와 연결되는 하나의 유기적인 사건들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하는 산헤드린의 음모와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나서 최후의 만찬을 베풀고 만찬석상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후에 예수님의 기도, 그리고 적대자들에게 체포되어 고난당하시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만찬과 배반

1) 악한 무리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가까우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책을 연구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체포하고 싶었으나 그분을 정치적 해방자로 믿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유대 군중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즉 예수님을 잡고 싶어도 백성들이 그분을 선지자 중의 한사람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함부로 손을 댈수가 없었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가 자기들에게 찾아와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유다는 예수님을 제거할 방책을 의논했습니다.

a.분기가 가득하여 서로 논의함(눅6:11)

b.율법을 응하게 함임(요15:25)

2) 유월절 만찬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을 보내시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에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의 장소까지 준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통해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떡과 포도주는 성찬의 식물로,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분의 육체적 구속의 상징물로 기념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 유월절 어린양과 자신을 연결시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a.다락방을 미리 준비해 두셨음(눅22:12)

b.장차 성도의 처소를 예비하실 것임(요14:3)

3) 가룟 유다의 배반을 아심

예수님은 최후의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는 이미 작정된대로 가지만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함께한 자 중에 주님을 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제자들은 서로 그 일을 행할 자가 누굴까하며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만찬석상에서 말씀하신 것은 가룟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하여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스승을 배반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a.하나님의 정하신 뜻(행2:23)

b.인자를 파는 자는 화가 있음(막14:21)

 

2. 예수의 권면

1) 큰 자에 대한 다툼

유월절 만찬후 제자들 사이에는 자기들 중 누가 더높은 자인가 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였습니다. 큰 자에 대한 다툼을 아신 주님께서는 역설적인 섬김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즉 제자들의 논쟁은 자기 과시에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자기 겸손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주님은 역설적 섬김을 말씀하시고 난후 바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참조, 요13:4-5).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삶은 교만을 멀리한 철저한 겸손의 생활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a.랍비라 칭함을 받지말아야 함(마23:8)

b.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됨(막10:43)

2) 검을 사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를 내다보시면서도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게하기 위한 중보 기도를 드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닭 울기전에 세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제자들에게 검을 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수난과 박해가 기다리는 어두움의 때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검을 사라는 것은 핍박과 유혹에 대비하라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a.전도 여행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음(눅9:3)

b.아버지 뜻대로 행해야 함(마7:21)

3) 감람산에서 기도하심

주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나누시고 감람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바로 목전에 둔 예수님의 기도는 여느 때와는 다른 기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내용에서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앞에 놓고 인성적으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온몸과 마음으로 애써 기도하셨든지 땀방울이 피 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처럼 간절한 기도는 그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a.예루살렘과 가까운 곳(마21:1)

b.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임(히5:7)

 

3. 악인들의 소행

1) 체포되시는 주님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말씀하실때에 한무리가 유다를 따라 올라왔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그 권속들이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악한 무리들이 몽둥이와 검을 들고 나타나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검으로 내리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체포되어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우리는 최후까지도 비폭력, 무저항을 주장하시며 원수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해 인내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a.성경을 응하게 함임(요17:12)

b.악한 자를 대적지말아야 함(마5:39)

2) 주님을 부인하는 베드로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끌려가신 대제사장의 집 뜰에는 많은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아있었고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습니다. 한비자가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고 하자 베드로는 즉시 비자의 말을 부인하였습니다. 비자의 두번째 질문에도 다시 예수님을 부인했고, 또 한사람이 베드로를 알아보자 또다시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세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자 곧 닭이 울었습니다. 닭소리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베드로는 통곡하였습니다.

a.결국을 보려고(마26:57-58)

b.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함(마26:70)

3) 심문을 받으시는 주님

예수님을 잡아가두고 지키는 군병들은 주님을 채찍으로 때리고 침을 뱉으며 희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린후에 누가 때렸는가 알아맞혀 보라고 했습니다. 공회에 모인 장로들은 예수님을 향해서 '네가 그리스도냐'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a.참람한 말을 들었다고 했음(마26:65)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심문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을 본장에서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다는 그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집단으로 변한 것을 통해 우리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게 됩니다. 날마다 자신의 행위를 살펴보고 수정하고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하겠습니다.

 

# 핵심

22:1-23

예수님이 만백성을 위해 대속 죽음을 당하실 순간이 임박했음을 시사하는 가룟 유다의 배신 예고와 최후 만찬 기사이다.

검과 관련한 대조적인 말씀(22:36)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무리에게 베드로가 검을 빼들었을 때 “이것까지 참으라”(51절)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평소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며 비폭력주의를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본절의 명령은 모순되지 않는가? 이에 대해 혹자는 ‘성령의 검’을 가지라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엡 6:17). 그러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수난이후 초대 교회에 닥친 핍박(행 8:1-3)과 연관지어, 그런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여 자구책을 강구하라는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담대한 희생마저 각오하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눈 가리고 하는 놀이(22:64)

고대에는 헝겊으로 술래의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게한 후 다른 사람이 번갈아가며 그를 때리고서 술래로 하여금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맞추도록 하는 놀이가 널리 행해졌다. 지금도 이와 유사한 놀이를 볼수 있다. 예수님을 지키던 자들이 이런식으로 희롱한 것은 그분의 신성을 조롱하는 행동이었다. 즉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선지자라면 누가 자신을 때렸는지 단번에 알아맞힐 것이라며 놀렸던 것이다.

 

# 묵상

가룟 유다의 음모 가담 ( 22:1-6 )

가룟 유다의 역할은 무리가 없을때를 틈타 예수님을 대적들에게 넘겨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계획에 유다가 가담한 것은 그들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죄악이었습니다. 유다는 돈을 사랑하여(신14:25; 요2:15), 사탄의 유혹을 받아(신4:19) 세상의 권세에 아부함으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사40:26; 엡2:2) 하나님은 이런 모든 일을 섭리가운데 이끄셔서 구원 사역을 완성지으십니다.

유월절 예비 ( 22:7-13 )

유월절 준비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아시는 분임을 깨달을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와 관련된 모든 일은 영원전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성만찬 예식 ( 22:14-20 )

이는 최후의 만찬시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예식입니다. 성만찬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기다리며 살기로 결단하는 의식입니다. 이는 또한 그리스도가 재림하실때 하나님나라의 백성들과 더불어 갖게될 메시야적 잔치를 상징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하여 찢기고 흘리신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그리스도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새로운 언약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제자들의 직위 ( 22:24-30 )

유월절 식사이후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두고 계신데도 그들은 권세를 얻었을때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에서의 그들의 직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다스리는 원리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뇌의 기도 ( 22:39-46 )

이 기도에서부터 예수님의 수난은 시작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은 먼저 시험에 들지않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피할수 없는 시련으로 인하여 혹시 믿음에서 떠날까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41-44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시기에 온인류의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 죽어야하는 신적, 인적 고뇌가 절정에 달하는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잠만 자고 있었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깨어서 기도했더라면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기도 ( 22:40-44 )

시험에 들지않기 위한 기도이며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돕는 기도이고, 힘쓰고 애쓰는 간절한 기도이며 또한 솔직한 기도입니다.

가룟 유다의 범죄 ( 22:47-48 )

그는 적대자들을 데리고와서 예수님을 넘겨 주었습니다. 이는 낮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백성들때문에, 그리고 밤에는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은신해 계셨기때문에 적대자들이 예수님을 잡을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예수님의 은신처를 그들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 ( 22:54-62 )

인간은 그 본성상 누구나 다 연약한 존재이고(고전1:25), 죄를 범하지않는 인간은 한명도 없습니다(롬3:10).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할때 죄를 짓게 됩니다(마10:28). 그러나 성경은 베드로를 통해, 죄를 범하더라도 즉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요일1:9).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심히 통곡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곧 회개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로 나갈때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돌이켜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깊이 새겨 늘 기억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문 절차 ( 22:54-23:25 )

① 대제사장의 심문(22:54),

② 산헤드린 공회의 심문(22:66),

③ 빌라도의 1차 심문(23:1),

④ 헤롯의 심문(23:7),

⑤ 빌라도의 2차 심문(23:11),

⑥ 빌라도의 판결(23:24).

예수님의 죄명 ( 22:66-71 )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라는 죄명으로 재판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죄없으신 분으로 유대 지도자들의 모함과 로마 총독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 무고하게 처형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을 가장 고귀한 대속의 사건으로 삼으셨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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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가난한 과부에 대한 그리스도의 칭찬 21:1-4

이 간단한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두번이나 같은 이야기를 기록한 것은 우리들에게 교훈하기 위해서이다.

(1)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은 종교 본연의 임무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기회 있을때마다 이를 명하고 또 명하셨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어떤 것을 주는지를 살피신다.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전념하셨지만 연보궤에 어떤 헌금이 들어가는지도 보고 계셨다(1절). 주님께서는 우리가 소유를 따라 후하게 바치는지 보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치는지 마지못해 바치는지 보고 계신다. 주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되 공공연하게 갚아 주신다.

(3)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의 연보를 특별히 주목하셔서 받아주신다. 바칠 것이 없는 자들은 불쌍한 자들을 돌보고 그들을 도움으로써 많은 연보를 할수 있다. 그런데 여기 자기도 가난하면서 자기가 가진 몇푼 안되는 돈을 전부 연보궤에 넣은 여인이 있다. 그것은 별 값어치 없는 두렙돈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누구의 헌금보다도 많은 헌금으로 여기셨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3절).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경솔하다고 꾸짖지 아니하신다. 도리어 그녀의 후한 마음을 칭찬하셨다. 그것은 자기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4) 헌금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지간에 우리는 헌금을 중시하며 능력에 맞게, 아니 힘에 부치도록 하되 기쁜 마음으로 바쳐야 한다.

 

Ⅱ. 심판의 예언 21:5-19

(1) 화려하고 장엄한 겉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이 감탄해서 말했다. 그들은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다(5절). 주님께서도 분명히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성전 외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시리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우리가 성전에 대해서 말한다면 분명히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도 그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6절).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 건물은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3) 주님 주위에 있던 자들이 호기심에 가득차서 성전이 파괴될 시기에 대하여 물었다.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7절). 장래 일에 대해 알고싶어 연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때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날때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이며 또 어떻게 준비해야할 것인가에 대해 더욱 묻고 싶어한다. 그들은 '이런 일이 이루려 할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하고 물었다. 그들은 그 예언을 확증할수 있는 현재의 징조를 구한 것이 아니라 예언이 이루어질때를 말해주는 미래의 징조에 대해 물은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답변하신다.

1)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는 소리를 틀림없이 듣게될 것이다(8절). 메시야의 이름을 도용한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올 것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내가 그로다'하리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위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왕국이 재건될때가 가까웠다"고 덧붙일 것이다. 제자가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하고 진지하게 물었을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첫 대답은 미혹을 받지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지나치게 알고 싶어하는 자들은(그런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속임수에 빠질 염려가 많다. 저희를 좇지 말라.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의 교훈이 하나님의 복음임을 확신한다면, 다른 그리스도나 다른 복음에 대해 귀기울이지 말도록 하자.

2)분명히 민족간의 난리에 대한 소문을 듣게될 것이다.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10절). 즉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다.' '처처에 지진이' 그리고 기근과 온역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벌하시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복음시대에는 영적인 심판이 보편적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시적인 심판(temporal judgements)을 행하시기도 한다. 무서운 일과 하늘로써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11절). 그러나 "두려워 말라. 이것들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떨게될 것이나 너희는 떨지 마라(렘 10:2). 무서운 일들에 대하여 두려워 말라.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말라. 현재 상태에 최선을 다하는데 열중하라. 왜냐하면 아무리 두려워 한다고해도 사태를 바꿀수는 없기 때문이다. 즉 이런 일이 먼저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더한 것이 있다. 끝은 곧 되지아니할 것이며 갑자기 닥치지도 아니한다. 두려워 말라. 너희들이 벌써 용기를 잃기 시작한다면 앞으로 닥칠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겠는가?"

3)그들 자신이 이스라엘의 징조와 표적이 되리라. "이 모든일 전에 너희에게 손을 대리라. 이것은 박해받는 자들의 고통일뿐만 아니라 박해자들의 죄가 되기도 한다." 한 민족의 멸망앞에는 항상 그들의 죄악이 깔려있다.

①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받을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들은 앉아서 고난의 값을 세어야 한다. 본래가 유대인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같은 대우를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그들은 너희를 회당에 넘겨주어 거기서 너희에게 채찍질하리라." 그들은 너희를 옥에 넘겨주며 너희는 내 이름을 인하여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리라. 바로 네 친지 즉 너희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리라(16절). 너희를 "피흘려 저항하는 자"라고 하게될 것이다. 이런 것은 죽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그들은 모든 사람 즉 복음의 빛을 견딜수 없는 모든 자들에게 미움을 받았다(왜냐하면 복음의 빛으로 인해 그들의 악한 행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변화받기 싫어하는 악한 세상은 위대한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사람들을 미워한다.

②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고난을 이겨내며 그들에게 맡겨진 사역을 계속하라고 격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고통을 건지신 자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3절). 이렇게 너희들이 목표가 되며 공개적으로 주목을 받게될 것이다. 너희가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려가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너희의 혹독한 고통과 악한 사람들에게서 받는 미움으로 인해 너희가 선하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다. 너희가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용기를 가지며 즐거워함으로써 너희가 전하는 것을 너희가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를 붙드신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곁에 계시며 너희를 인정하시며 너희를 도우시리라. 또한 너희가 충분히 답변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14,15).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14절). 너희 자신의 지혜를 믿지 말라. 그때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히 너희를 도우시리라는 것을 의심치 말라. 특별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너희를 도우실 것을 약속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구재와 지혜는 하나님을 섬기거나 고난을 받을때 필수적인 요소이다. 지혜는 무슨 말을 할지 아는데 필요하며, 구재는 그 내용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아는데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위해 변론할 자들은 스스로 대답할수 있도록 구재와 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한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자신을 위해서 대적들이 능히 반박하거나 대항할수 없는 답변을 할수 있게 된다(행4,5,6장). "너희들이 어떠한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전혀 해를 당치않게 하리라."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18절). 그들 중 몇은 목숨을 잃을터인데 머리털 하나도 잃지않을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자는 생명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라.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다'(마 10:30)라고 말씀하셨다. 선한 목적을 위해서 한 투자라면 그것을 손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몸을 바친다면 망하지 않고 도리어 풍성히 받게될 것이다. "충분히 보상하리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해 무엇인가를 잃는다 할지라도 결국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잃게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거룩하고 침착한 마음을 가져서 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너희의 의무이자 관심의 대상인 것이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19절). 항상 특히 어려운 시기에는 영혼을 얻는데 주의해서 영혼이 병들거나 영혼을 얻는데 지장을 받지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행할바 의무이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할 부분인 것이다. "너희 영혼을 얻으라. 자유의 몸이 되라. 슬픔이나 두려움에 사로잡히지않도록 감정을 잘 조절하라." 우리 영혼을 얻게하는 것은 바로 인내이다. "인내의 보호를 받으라. 이성을 잃게 만드는 생각들을 모두 삼가라."

 

Ⅲ. 심판의 예언 21:20-28

그리스도는 여기서 위에서 말한 모든것 즉 예루살렘의 멸망이 마침내 다가올 것을 보여주고 계신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심판날의 예표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재림의 모형이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게될 것이며 그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말씀하신다(20절).

(2) 이런 징조가 보이면 곧 안전한데로 피신하라고 경고하신다.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그리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21절). 내버려둔 도시를 떠나라."

(3) 유대 나라에서 반드시 일어날 참상에 대하여 예언하신다(22절). 형벌의 날에 대해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예언한바 있다. 그들이 한 예언은 모두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기록된 모든 것이 마침내 이루어지리라. 집행 유예는 죄를 용서하고 있다. 이는 이 백성에게 임한 진노 즉 하나님의 진노이다. 이때 아이 밴 자들과 아이를 키우는 여자들은 특히 두려움을 느끼게될 것이다.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

(4) 유대와 로마 사이에 일어날 전쟁의 결과에 대해 말씀하신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칼날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예루살렘의 포위는 결국 군사적인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사로잡혀 가되 한나라에 사로잡혀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게 된다.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밟혔다.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들었다.

(5) 사람들이 모두 놀라게될 것을 말씀하신다. 놀라운 광경들이 일월성신에서 일어날 것이며 땅에서는 바다와 파도의 우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이로인해 땅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생겨 민족들이 혼란한 중에 곤고하게 될 것이다(25절). 사람들은 무서워서 기절할 것이다(26절). 그들은 무서워 점점 야위어가며 더한 것이 닥칠까봐 두려워 떨며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 기절할 것이다.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릴 것이며 땅의 기둥들이 흔들릴 것이다. 그 날이 믿지않는 유대인들에게는 말할수 없는 두려움과 파멸이었던 것처럼 모든 불신자들에게 더한 날이 올 것이다.

(6) 그리스도께서는 이것을 일종의 인자의 출현으로 보신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27절). 예루살렘의 멸망은 특별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이라 할수 있다. 결국 예루살렘의 멸망은 메시야의 초림의 증거였다. 그를 통치자로 모시지 않는 자들은 그를 정복자로 모시게될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메시야의 재림에 대한 보증이었다.

(7) 그리스도께서 신실한 제자들을 모두 격려하신다(28절). "이런 일이 시작하거든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일어나 하늘을 보라.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셨을때는 억눌린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하셨다. 마지막날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때에는 그리스도께 속한 만물을 고통에서 구속하실 것이다. 그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구속이 가까운 것을 알고 기쁨으로 머리를 들수 있을 것이다.

(8) 유대 나라의 멸망 이상을 나타내는 예언의 말씀이 24절에 있는데 그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기는 아주 힘들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1) 그 예언을 과거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이방인들은 계속 예루살렘을 점령할 것이며 대다수의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날까지 예루살렘은 순전히 이방인의 소유가 될 것이다.

2) 또한 미래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세상의 왕국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이 되고 모든 유대인들이 회심하는 날이 올때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의 소유가 될 것이다.

 

Ⅳ. 심판의 예언 21:29-38

(1)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무의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수 있듯이 보고 깨달을수 있는 시기의 징조를 잘 분간하라고 말씀하신다(29-31절). 자연 세계에 인과관계가 있듯이 섭리의 세계에도 사건들이 상호 관련되어 있다. 박해 세력이 급하게 몰락해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수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이 확실히 일어날 것이며 곧 일어날 것으로 알라고 말씀하신다.

1) 유대 나라의 멸망은 얼마남지 않았다(32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32절). 살아서 그것을 보게될 자들이 있다.

2) 유대 나라의 멸망은 확실하다. 유대의 운명은 다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2절).

(3)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일과 방탕에 빠지지 말라고 주의를 주신다(34,35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4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제자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방심하고 있는한은 결코 안전할수 없다. 이 말씀에 항상 유의해야 하지만 특별히 조심해야할 때가 있다.

1) 우리에게 있는 위험은 죽음과 심판의 날이 우리가 그날을 준비하지 못한 예기치 않은때에 뜻밖에 임하게 된다.

2) 우리의 할일은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둔해지지 않도록 두가지에 조심하자.

①육체의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 즉 먹고 마시는 것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해 마음이 둔하여지리라." 방탕함과 술취함은 양심을 마비시키며 마음을 무디게 만들어서 매우 감동적인 것들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만든다.

②이 세상의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진다. 이것은 부자가 되려는 사업자들이 빠지기 쉬운 덫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날에 대비하라고 권면하신다(36절).

1) 우리의 목표는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들을 피하는 것뿐 아니라 인자앞에 설수 있도록 하자. 심판자이신 그분앞에 서서 주님으로 모시고 밤낮 섬기며 늘 그의 얼굴을 뵈옵게 되도록 하자. 눅 20:35절에서 이미 말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성도들은 능히 그럴수 있다고 한다. 성도들을 향하신 은혜롭고 선하신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능해 그럴만한 자로 여기시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란 주로 무가치함을 인식하는데 있다.

2) 이런 목표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26절). 깨어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공존하는 것이 확실하다. 장차 다가올 기쁨을 확신하는 자는 반드시 깨어 기도한다.

①자신을 지키려면 "죄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으라' 그리고 해야할 일을 잊지않도록 깨어있으라. 깨어라 그리고 계속 깨어 있으라."

②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하려면 '항상 기도하라' 이 세상에서 기도의 삶을 산 자들은 저 세상에서 찬양의 삶을 살만한 자가 될 것이다.

(5) 마지막 두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영광 중에 입성하셨다가 배반당하여 붙잡히신 밤까지 삼십일 동안을 어떻게 보내셨는가를 보여준다.

1) 그리스도께서는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끈기있게 설교하셨다. 그는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설교하셨으며 자기를 해칠 기회만 엿보는 자들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설교하셨다.

2) 밤에는 나가서 감람산에 있는 친구의 집에 묵으셨다.

3) 아침 일찍 그는 다시 성전에 계셨다. 사람들은 앞에서 설교하시는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아갔다(38절). 모든 사람이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아왔다. 때로 진지하고 솔직하며 평범한 사람들이 좋은 설교를 듣고 느끼는 맛과 향취가 유식한 사람들이 내리는 평가보다 훨씬 나을 경우가 있다.

 

# 해설

종말을 예고하심 ( 21 )

본장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종말에 대한 예고를 주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본장은 내용 구성상 크게 세단락으로 구분할수 있습니다. 즉 종말에 관한 문제 제기, 종말 선포, 그리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본장의 주님의 말씀은 교육적 목적으로 주어진 교훈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1. 예수의 교훈

1) 올바른 헌금

예수님께서 하루는 사람이 연보궤에 헌금을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두렙돈 넣는 것을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제자들에게 올바른 헌금의 정신을 교훈하시면서, 이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주의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과부의 두렙돈의 헌금을 주의 깊게 보신 예수님은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더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헌금의 양을 보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헌금의 양보다는 헌신하는 마음을 헤아리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내면과 동기를 더 중요시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헌금의 자세입니다.

a.과부는 돌봄의 대상임(렘7:6-7)

b.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부함(잠15:16)

2) 성전 파멸을 예언하심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주님의 예언은 실제로 주후 70년에 로마 군인들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사람이 세운 계획은 경우에 따라서 변경되거나 취소될 수도 있고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헛된 것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획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취소될 수도 없고 변경되는 법도 없으십니다. 하나님께는 변역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a.제자 중 한명이 건물을 자랑했음(막13:1).

b.강도의 굴혈로 세속화된 성전(마21:13).

3) 두려워하지 말라

예루살렘 성전의 파멸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제자들은 어느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그때 무슨 징조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종말의 징조에 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세에 일어날 이단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마지막때가 가까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난리의 소문들이 들릴때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환난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전쟁 소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케 함(렘4:19)

b.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임(벧전3:14)

 

2. 환난과 멸망

1) 종말의 환난들

마지막날이 가까워지면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대적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진과 기근과 온역 등 자연계의 이변이 생기게 됩니다. 또한 이 모든일 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많은 성도들이 핍박받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이름때문에 받는 핍박이므로 기도하며 기뻐함으로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 것입니다.

a.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임(눅21:25)

b.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계15:1)

2) 하나님께서 보호하심

예수님께서는 환난의 때에 성도들이 받을 환난과 핍박을 말씀하시며 그것으로 인하여 미리 변명할 것을 연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구재와 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환난중에서도 우리는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므로 인간의 능력으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할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을 대적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의 손안에 있으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안에서만 되어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성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a.염려치 말라(눅12:11)

b.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짐(삼상2:10)

3)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심

주님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되는날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칼날에 죽음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후 70년에 실현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백성에게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처절하고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a.칼에 삼키움(사1:20)

b.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 것임(렘9:11)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1) 재림하시는 주님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죄를 위해 구원 사역을 성취하신 주님께서는 성경의 말씀대로 다시 오십니다. 인자가 오시는날 땅은 혼란 중에 곤고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성경은 주님의 재림이 모든 인류가 볼수 있는 모습으로 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재림하실 주님은 크신 영광과 함께 공개적으로 오십니다. 또한 천군 천사들과 성도들을 수행하시고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게 됩니다. 구름과 함께 영광 중에 인자가 올때 머리를 들어 주님을 맞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a.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오심(마16:27)

b.영원한 기업을 주심(히9:15)

2) 무화과나무의 비유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의 싹이 나면 사람들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듯이 종말의 징조가 나타나면 곧 종말이 임한다는 것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종말의 징조는 신적 권위를 가지시고 심판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음을 가리키는 동시에 온 인류에게 심판이 임했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또다른 면에 있어서는 성도들이 누릴 하나님나라의 평안도 아울러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자신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여름은 추수때로 종말을 상징함(잠10:5)

b.예수께서 천국이 가까웠음을 전파하심(마4:17)

3) 깨어 있으라

주님께서는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스스로 조심하여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육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자에게 주님의 재림은 갑자기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는 사람들이 노아의 경고에 귀기울이지 않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졌다가 파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자만이 환난을 피하고 영광의 주님앞에 설수 있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자만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게 됩니다.

a.악인은 진노의 날에 능히 서지 못함(계6:16-17)

b.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기위해(계3:11)

 

결론

우리는 본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말세지말에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은 깨어 근신하여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형태의 죄악이라도 철저히 멀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낱낱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 핵심

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통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참된 헌신이지 외식 행위가 아님을 교훈하신 부분이다.

헤롯 성전의 장식(21:5)

헤롯 성전은 거대한 대리석을 잘 다듬은 미석(美石)으로 건축되었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에는 금을 입혔다.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덮인것 같고, 너무나 눈부셨다고 한다. 게다가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성전 기둥이나 행각에는 사람 키만한 포도송이가 달린, 금으로 만든 포도나무가 조각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성전의 화려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 묵상

가난한 과부의 신앙 ( 21:1-4 )

자신이 소유한것 전부를 주님께 바치면서 타인들의 이목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자신의 마음을 전부 주께 바쳤으며, 가난해도 주를 위해서는 아낌없이 바치는 믿음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 인정받는 참신앙을 가졌던 것입니다.

종말의 징조 ( 21:7-19 )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8절), 난리와 소란의 소문이 있으며(9, 10절), 자연 재해가 있고(11절), 성도에게 박해가 있습니다(12-19절). 그러므로 성도들은 미혹을 받지않도록 주의하고, 거짓 그리스도를 좇지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미혹케하는 자가 많이 있을 것을 미리 아시고 이를 주의하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성도에 대한 핍박 ( 21:12-19 )

성도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하여 핍박을 받으면 믿지않는 자들 앞에서 복음이 증거됩니다. 즉 핍박으로 인해 도리어 복음을 증거하게될 것임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교회사를 보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순교자들을 통해 증거되고 전파되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는 핍박을 받으면 구재(口才)와 지혜를 베푸시고 머리털 하나도 상치않게 보호해 주십니다. 이는 성도들이 전혀 해를 입지않거나 무사히 핍박에서 풀려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도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아래 있으며,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해도 그 고난을 견디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예수님의 행적 ( 21:37, 38 )

예수님은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감람산에서 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밤에 예루살렘에 거하지 않으신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않았기 때문에 적대자들에게 은신처를 알리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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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그리스도의 권세에 대한 질문 20:1-8

다른 복음서의 내용보다 특별히 추가된 것은 없다.

(1) 그때 그리스도는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 구원을 획득하셨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공표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 전도자들을 영예롭게 한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일반 복음 전도자들을 영예롭게 한다. 그리스도는 백성들의 능력에 맞게 자신을 낮추어 복음을 전하셨으며 백성들을 가르치셨다.

(2) 그리스도의 대적들이 그에게 가까이 오다. 이 말씀은 여기서만 나타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암시한다.

1)그들은 이런 질문을 해서 예수를 당황하게 만들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불쑥 다가왔던 것이다.

2)그들은 이런 질문을 해서 예수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 이 말씀 안에서 알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①빛에 대항해서 눈을 감아버린 자들이 명백한 사실을 반박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는 그가 베푸신 이적을 통해서 분명히 알수 있다.

②그리스도의 권세에 대해 질문하는 자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대해 질문하는 것으로써 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답변하셨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4절). 모두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써'라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질문으로 인해 그들은 난처해지고 꼼짝 못하게되어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③이들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써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단지 백성들이 두려워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하지 못했던 것처럼, 명성과 세상의 권세에 탐닉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명백한 진리를 제한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④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묻어두는 자들은 그 이상의 지식을 소유하려 하지않는 것이다(7,8절).

 

Ⅱ. 포도원의 비유 20:9-19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권세를 인정치 않으려고 작정한 자들을 향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 이 비유에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서 볼수 있는 이상의 내용이 들어있지는 않다. 이 비유가 의도하는바는 유대 나라가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게 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은 세를 내고 경작할 포도원을 빌린 소작농과 같다. 하나님께서 계시 종교를 만드신 것이 곧 세로줄 포도원을 만드신 것과 같다(9절). 농부들에게는 해야할 '포도원 일'이 있다. 그 일은 고되고 쉴 사이 없지만 즐겁고 유익한 일이다. 또한 농부들에게는 포도원 주인에게 바칠 "포도원 소출"이 있다. 갚아야할 세가 있고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해야할 일은 교회의 특권을 누리는 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소출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을 대신한 세금 징수인들이다(10절).

3)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은 때로 하나님께 속해있는 소작인들에게 지독한 욕을 당할때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행치않으려고 마음먹은 자들은 의무를 행하라는 요청을 거두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선지자들은 '종'으로서 말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아들'로서 말씀하셨다. 아들을 보내면 그 농부들이 생각을 달리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내쫓은 자들이면 그리스도도 내쫓을 것이다.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고 그들은 말했다. 그들이 종을 죽였을때는 다시 보낼 종이 또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아들을 죽이기만 하면 우리에게 보낼 아들이 더는 없으니 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던 것이다.

5) 그리스도를 죽임으로써 유대인들의 죄악은 절정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리라는 것외에 달리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하며 지내는 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 죄악과 파멸 가운데로 뛰어들고 있는가를 모르는 자들이다.

(2) 앞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그 비유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 있다. 즉 그들은 그러한 심판에서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16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지어다 하거늘'은 그런 뜻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심판을 막을만한 일은 전혀 하지않으면서 단지 "하나님 그렇게 하지마소서"하고 비는 것만으로 심판을 면할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들이 어떠한 속임수를 가장하고 있는지 보라.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잘 살펴보라.

1) 그리스도는 그들을 바라보셨다. 누가복음에서만 이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17절). 그분은 동정어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분은 그들이 자신의 어리석음때문에 부끄러워하고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을 바라보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성경을 참조하게 하셨다.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주 예수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오르실 것이다. 즉 그로인해 파멸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미워하며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 위에 떨어져 그들을 박살낼 것이다. 즉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3)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이 비유를 듣고 몹시 화가났다고 했다(19절).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신줄 알았다. 그들은 예수에게 몹시 화가나서 즉시 잡고자하였다. 그들이 정면으로 달려들어서 목을 조르지 않은 것은 단지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막 '이는 상속자니 죽이자'고 한 예수의 말씀을 실증하려던 참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입맞추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를 죽일 것이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결국 그들은 "당장 그를 덮치고 말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심판을 면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순간 죄지을 생각을 하고있는 것이다.

 

Ⅲ.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문제 20:20-26

우리는 여기서 예수의 대적들이 세를 바치는 것에 대해 질문함으로써 예수를 잡으려고 쳐놓은 올무에서 빠져나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된다.

1. 그리스도를 해치려는 흉계(20)

그 흉계는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아래 붙이려'는 것이었다(20절). 그들의 힘으로는 예수를 법에 따라 처형할수 없었으며 "폭동"을 일으키는 것외에는 달리 그를 죽일 방법이 없었다. 총독이 예수에 대해서 분노하도록 만들수만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했다. 이렇게해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리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2. 그들이 고용한 사람들(20)

그들은 정탐이었으며 스스로 의인인체 해야했다. 스스로 의인인체 하는 일이 악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정탐은 틀림없이 변장을 한다. 이 정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판단을 존경하는 것처럼 가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3. 그들이 제시한 질문(21,22)

그들은 매우 정중하게 말을 시작한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21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예수를 부추겨 자기들에게 허물없이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렇게 겸손하신 예수를 속이려는 생각을 한 그들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예수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 도리어 그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읽으시며, 그들이 아무리 정중하게 말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속생각을 다 알고 계셨다. 예수께서 참으로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에게 가르침을 받을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예수는 아셨다. 그들은 예수의 말을 책잡으려고 왔으나 예수는 결코 그들에게 책잡히지 않았다. 그들이 한 질문은 아주 미묘한 것이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나이까(21절). 유대인들은 긍지가 있고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세금 내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세금내는 것이 합법적인가 아닌가를 종종 문제삼곤 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것이 가하다고 말씀하신다면 백성들이 화를 낼 것이고, 그들이 기대한대로 불가하다는 답을 하신다면 총독에게 고발할 명목이 생기는 것이다.

4. 올무에서 빠져나가시는 예수님(23)

예수께서는 그 간계를 아셨다(23절).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시고 자기를 속이려한 그들을 꾸짖으셨다.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24절). 그리스도는 그것이 누구의 돈이며, 거기에 누구의 도장이 새겨졌으며, 그것을 누가 만들어 냈는지를 그들에게 물으셨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그들은 인정했다. 그러자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너희는 먼저 가이사의 돈이 너희가운데 통용되는 것이나 가이사의 돈을 너희 화폐로 인정하는 것이 가한가를 물어봐야 했다.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그러나 거룩한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 한분만이 너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5. 어리둥절해진 그들(26)

올무는 벗어졌다. 그들은 백성 앞에서 예수의 말을 책잡을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의 대답을 듣고 놀랐다. 그 대답은 아주 완벽했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잠잠했다. 그들은 이제 더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않고 그들이 계속 질문했다면 예수는 분명히 그들에게 망신을 주며 그들의 죄를 폭로했을 것이다.

 

Ⅳ. 죽은 자의 부활과 그 이후의 상태에 대한 설명 20:27-38

(1) 어느 세대건 계시 종교의 근본원리를 뒤집어 놓으려고 하는 타락한 사람들이 있어왔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그 이후의 상태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그들은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지않으며 육신에서 행한데 따라 보상과 형벌이 있는 상태를 믿지 않는다. 이 원리를 제거해 버리면 종교는 다 실패하고 만다.

(2) 하나님의 진리를 흔들리게 하려는 자들이 그 진리를 혼란케 만드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이 사두개인들은 부활교리에 대한 백성들의 신앙을 약화시키고 싶어서 그리했던 것이다. 이 경우는 아마도 일곱 남편을 가진 여자에 대한 실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부활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3)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자녀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의 상황에는 큰 차이가 있다.

1)세상 사람들의 자녀는 장가를 가고 시집을 간다.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일부분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며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다. 세상에서 우리는 주로 친척과 아내와 자식에게서 기쁨을 누린다. 국가도 그런 경향이 있다. 결혼은 인생의 안락함을 위해 제정되었다.

2)오는 세상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오는 세상을 강조하기 위해 "저 세상"이라고 부른다.

①누가 저 세상의 시민이 될 것인가? 그들은 저 세상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얻은 자들일 것이다. "법적인"가치가 아니라 "복음적인" 가치에 의해서 그렇게 여겨지는 것이다. 전가된 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을뿐 아니라 우리에게 전가된 가치에 의해서 우리는 영화된다.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저 세상을 얻기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저 세상을 추구하는데는 어려움과 실패의 위험이 뒤따른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을 얻도록 계속 노력하도록 하자. 그들은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즉 축복된 부활을 얻을 것이다.

②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한 상태가 어떠할는지 우리는 표현할수도 알수도 없다(고전 2:9). 그리스도가 여기서 그것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참조하도록 하라.

첫째, 그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다. 주님과의 기쁨을 한번 경험한 자들은 거기에만 전념하게 된다. "새 예루살렘"에는 더럽힐만한 것이 전혀 들어가지 못한다.

둘째, 그들은 다시 죽을수가 없다. 이것은 그들이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시 죽는 일이 없는 곳에는 혼인의 필요가 없다. 다시 죽는 일이 없다는 것은 저 세상이 주는 안락함의 극치를 이룬다. 이 세상에는 죽음이 지배하지만 저 세상에서는 죽음은 영원히 추방된다.

셋째, 그들은 천사와 동등하다. 다른 복음서에는 '천사들과 같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사와 동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사와 동등한 자 그들에게는 거룩한 천사들에게 전혀 못지않는 영광과 행복이 있다. 성도들은 천국에 가게되면 "시민권"을 받게될 것이다. 사생아였던 그들은 모든 면에서 천국의 원주민인 천사들과 동등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넷째,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사들과 같다. 우리에게서 아들의 성품이 있기는 하지만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다섯째, 그들은 "부활의 자녀"이다. 즉 미래 상태를 향유할수 있도록 만들어진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 동시에 부활의 자녀이다.

(4) 이 세상 이후에 또하나의 삶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다(37,38절).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서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그때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그들은 수년전에 이미 이 세상에서 떠났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다(I was)"고 말하지 않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I am)"고 말씀하시는가? 그러므로 그 당시 그들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누가는 여기에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즉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진정한 신자들이라면 그들이 비록 죽었다할지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이들 족장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을때는 그 이상의 의미가 남아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복이요 기업이자 지극히 큰 상급(창 15:1)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끝난 다음에는 또하나의 세상이 분명히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완전히 이행하실 것이다.

 

Ⅴ.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데 대한 질문 20:39-47

서기관들은 율법을 연구하며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혜롭고 예의바르다는 명성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나 복음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 사두개인들에게 하신 대답을 칭찬하는 서기관들(39)

서기관 중 어떤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39절). 서기관들조차도 예수의 행위를 칭찬했으며 그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기독교인이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면에서는 매우 부족하다.

2. 그리스도의 지혜와 권세에 놀라는 서기관들(40)

저희는 아무것도 감히 더 물을수 없음이더라(40절).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제자들은 담대하게 그 이상의 질문을 하곤 했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감히 더이상 물을수가 없었다.

3. 메시야에 대한 질문을 듣고 당황하는 서기관들(41)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여러 성경구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소경조차도 이 사실을 알았다(눅 18:39). 또한 다윗이 메시야를 나의 '주'라고 부른 것도 확실하다(42,44절).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시 110:1).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면 다윗은 왜 그를 주라고 불렀을까? 어떻게 자신의 자손에 대해 '주'라고 불렀을까? 겉에 보이는 이러한 모순을 그들은 해결할수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 즉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였으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었다.

4. 요주의 인물로 묘사된 서기관들(45-47)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명하신다.

1)"그들로 인해 죄악에 빠지지않도록 주의하라. 그들이 빠져있는 마음가짐을 갖지않도록 주의하라"

2)"그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지않도록 주의하라." 앞에서도 같은 뜻으로 말한 적이 있다. 즉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리라"(마 10:7). 그러니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대단히 거만하다. 그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한다. 그들은 진심으로 시장에서 사람들의 문안받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한다. 그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다. "그들은 매우 압제적이며 종교를 자기의 범죄에 대한 은닉 수단으로 삼는다. 그들은 과부의 재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의 운명을 간단하게 선언하신다. 즉 "더 중한 심판, 곧 갑절의 저주를 받으리라." 외식적인 경건은 갑절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 해설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유대 지도자들 ( 20 )

본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관한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과 그에 관한 다각적인 답변이 주요내용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여러가지 문제를 들고 나와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시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그들로 하여금 침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심

1) 권위에 대한 시험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던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로부터 권위에 대한 도전과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성전 정화에 악감을 품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세가 신적인지, 인적인지 그 권세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질문했습니다. 이들의 질문의도는 예수님을 체포할 증거를 얻기위한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발자국, 위대한 삶의 모본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유독 악한 일생을 보낸 사람들의 뒤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a.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심(삼하3:39)

b.죄를 사하는 권세(눅5:24)

2) 진퇴양난에 빠진 무리들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간계를 아셨으므로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 요한의 세례의 출처에 관해 반문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질문을 받자 자신들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참조, 마28:18).

a.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임(요5:35)

b.오리라 한 엘리야임(마11:13-15)

3)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심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불의를 폭로하시기 위해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소작인들은 유대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종들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포도원을 맡아 관리하던 소작인들은 소출을 받으려고온 종들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까지 거역하고 죽였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소작인들의 악행에 크게 분노했습니다. 사악한 소작인으로 비유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메시야를 죽였으며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주인은 그들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는 유대인 대신 이방인들이 복음을 계승할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a.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하나님의 나라는 열매맺는 백성이 받음(마21:43)

 

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

1) 계략을 세우는 무리들

예수님께서 비유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교만과 외식을 책망하시고 그들의 행위를 진리로 공격하자 그들은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들은 정탐꾼을 보내어 위장을 하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도록 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존경해서 어려운 문제를 풀기위해 질문하는 것처럼 세를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옳지않은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는 예수님이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분을 무너뜨릴수 있는 함정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다고하면 하나님보다 가이사를 더높이는 것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가이사에게 대적하는 정치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a.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상론함(마22:15)

b.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함(마26:3-4)

2) 간계를 파악하신 주님

예수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계략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에 그들의 위장은 예수님 앞에서는 전혀 효과를 낼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그들의 질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a.마음의 의논을 아심(눅5:22)

b.저희의 생각을 아심(눅6:8)

3) 책잡지 못함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예수님께로부터 들은 정탐꾼들은 능히 책잡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의 대답을 기이히 여기고 잠잠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닌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나온 진리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더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잘 해결하고 오히려 유익한 기회로 삼게됩니다.

a.예수께서 대적자들을 설복시켰음(눅20:39-40)

b.대적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음(눅13:17)

 

3. 예수의 답변

1) 부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의 문제를 들고 나와 질문하였습니다. 즉 한여인이 형사취수의 제도로 일곱명의 남편을 가졌는데 부활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의 그릇된 내세관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현세와 내세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부활하면 천사와 같은 형체를 입게되어 다시 죽을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부활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음(막12:25)

b.항상 주와 함께 있음(살전4:17)

2)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부활 문제로 시험한 사두개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명확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는 그분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중에 하나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요, 약속에 참예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a.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고전1:24)

b.그리스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요(요7:16-17)

3) 다윗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혈통으로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민의 주가 되십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었을때 그리스도를 주라 칭했습니다(참조, 시110:1). 메시야는 하나님으로서 다윗의 주가 되시고 인간으로서는 다윗의 자손이 되십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 즉 인간으로서 해결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으로서 해결하시기 위해 만유의 주재로 약속된 메시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a.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심(롬1:3)

b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롬1:4)

 

결론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악인의 모습을 알게됩니다. 이들이 가진 악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는 없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 핵심

20:1-26

성전 청결로 인해 야기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과 악한 농부 비유, 납세 논쟁이다.

 

# 묵상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문제 ( 20:1-8 )

예수님을 처치하기로 꾀한 사람들은 주로 대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두목들입니다. 이들은 성전 체제의 옹호자들로, 그 체제에서 가장 덕을 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권위 문제로 도전해 왔을때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세례에 관한 질문으로 도리어 그들을 침묵시키셨습니다.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종교적 권위가 공회에 있으며, 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권위는 용납할수 없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권위를 무효화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권위는 하늘로부터 주어집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 ( 20:9-18 )

이 비유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을 세상이 도리어 능욕하고, 그분의 아들까지 죽임으로써 그들이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 공의회 산헤드린에서 자신을 죽일 것을 알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오류 ( 20:19-26 )

구약 경전 일부를 유대인 입장에서만 곡해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건을 오해했으며, 위선과 외식을 유발시켜 형식주의적 신앙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또한 참사랑이 결여된채 무조건 진리를 배척하는 배타주의에 빠져있었고, 내세의 영원한 구원보다는 현세의 안정을 더 갈망한 세속 지향주의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정확한 이유는 이때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25절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말씀에서 배울점은 신앙인은 무조건적인 반정부를 지향해서는 안되고, 신앙인도 국민으로서 합당한 세금을 내야하며(롬13; 눅23:2), 화평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행10:36).

부활을 부정한 사두개인들 ( 20:27-33 )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부활이 있다면 일곱 형제의 아내되었던 여자가 부활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는 계대 결혼(형이 자식없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맞이하여 형의 후사를 잇게하는 혼인 제도)을 인정하는 당시 상황에서 나온 발상이었습니다.

부활후의 상태 ( 20:34-40 )

결혼 제도가 없으며, 죽음도 없고, 천사와 같이 됩니다. 부활은 단지 육신이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영육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도의 부활관은 더이상 세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말고 새로운 하늘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 ( 20:41-44 )

다윗이 비록 혈육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조상이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자인하도록 하기위한 것입니다.

서기관들의 죄악 ( 20:45-47 )

서기관들은 속으로는 과부의 재산을 삼키면서 겉으로는 길게 기도하는 외식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들은 소수였지만 권력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온갖 특혜를 누리며, 지위를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재물을 착취하였습니다. 성도들은 은연중에 자신이 이런 죄악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잘 살펴야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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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세리장 삭개오의 회심 19:1-10

의심할것없이 복음서 안에는 비록 나타나있지는 않으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은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 삭개오의 경우처럼 특별한 무엇이 있는 사람의 회심은 기록이 되어져 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는 여리고를 지나가시고 계셨다(1절). 이 도시는 저주하에서 세워졌으나 그리스도께서는 이곳을 찾아오심으로 이곳에 명예를 주셨다. 복음은 저주를 없애주기 때문이다.

(1)삭개오는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이었는가? 그의 이름은 그가 유대인임을 나타내준다.

1) 그의 직업과 그가 맡은 직책 : 그는 세리장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의 구원하실 자를 찾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의 괴수까지도 구원하시고자 오셨으며 따라서 이 세리장조차 구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2) 세상에서 그의 환경은 매우 상당한 것이었다. 즉 그는 부자였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방금전에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러나 현재는 잃었다가 찾은바 된 한부자의 경우를 보여주고 있다.

(2) 그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도에 들어왔는가?

1) 그는 예수를 보고자하는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3절). 명성이 자자한 사람들을 보고자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최소한 우리는 나중에 우리가 이러한 대단한 사람을 보았다고 말할수 있게될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예수를 보고자, 즉 그가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힘쓸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를 보게될 것이다.

2) 그는 키가 작았고, 사람은 많았기때문에 이 일에 대한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보이시려하시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중 한사람으로 무리가운데 보이지않게 계신다. 키는 작지만 큰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영적으로 활발한 자들이 많이 있다.

3) 그는 자기의 호기심을 포기하지 않았기때문에 자신의 품위도 잊은채 앞으로 달려가 그를 보기위하여 어린아이같이 뽕나무로 올라갔다.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보고자하는 자들이라면 그를 보기위해 적합한 모든 방법을 강구할 것이다. 자신이 작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보는데까지 이르기 위해서 그들이 할수 있는 모든 방법들을 취할수 있어야 한다. 난쟁이들은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하여 선한 도우심과 함께 큰 뜻을 품음으로 절망하지 말아야 한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주목하셨다. 즉 그와의 더깊은 교제를 하시기위해서 그를 부르셨다(5절). 그리고 그 부르심은 즉시 선한 결과를 낳았다(6절).

1)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찾아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무를 올려다보셨으며 삭개오를 보셨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위해서 왔을뿐 그리스도께 환대 받으리라고는 거의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그를 좋은 복들로 인도하시며 어떻게 그의 생각을 능가시는가를 보라. 또한 매우 미미한 시작을 그가 어떻게 크게 하시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를 알고자하는 마음을 가졌던 그는 그를 알게되었다. 단지 그를 보고자 원했던 그는 그와 대화하도록까지 허락을 얻었다. 때때로 삭개오처럼 단지 호기심만을 가진채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자 오는 자들이 그들의 양심의 깨어짐을 갖게되며 그들의 마음의 변화를 갖게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삭개오야라고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그는 '속히 내려오라'고 그에게 명하셨다. 삭개오는 주저하지 말고 서둘어야 했다. 그는 내려와야 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날 그의 집에서 쉬시며 그와 함께 한두 시간 유하시려하시기 때문이었다.

2) 삭개오는 자기 집에 있게되는 그러한 영광에 대해서 '즐거워하였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절). 또한 자기 집으로 그를 영접하는 것은 자기 마음에 그를 영접하는 것의 암시이자 증거이기도 했다. 우리가 마음문을 닫고 변명할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자주 우리에게 나에게 열어보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삭개오가 주저없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할 것이다.

(4) 옹졸한 영혼을 가진 비판적인 유대인들은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라고 말하면서 수군거렸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은 죄인된 자들이 아니란 말인가? 또한 죄인된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하실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그의 집에 갔다고해서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처사였다.

1) 그가 비록 세리였고, 대다수의 세리들이 악한 자들이었으나 그렇다고해서 그들 모두가 그렇다고 할수는 없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무더기로 정죄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사람이 각기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그가 죄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도 여전히 전처럼 악하다고 단정지을수는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회개할 여지를 허락하시기 때문이다.

3) 그 당시에 그가 죄인이었다해도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가시는 것을 비난할수는 없었다. 의사가 병자에게 안가고 어디로 가겠는가?

(5) 삭개오가 이제 회개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들이 진술되고 있다(8절). 그는 자신의 선행으로 그의 믿음과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하였다. 그는 서서 말했다. 이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투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의 말이 신중하고 엄숙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그는 그리스도께 말하였다. 즉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주께 말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생활의 변화를 통하여 그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즉 그가 회개하였음을 명백히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1) 삭개오는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차 그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데 쓸것을 결심하고 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8절). 즉 삭개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내가 이제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제 나는 그것을 하겠습니다. 즉 이제 나는 그들을 구제하되 오랫동안 의무를 무시해온 만큼이나 아주 많이, 내 소유의 절반까지라도 들일 것입니다." 삭개오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재산의 절반을 주었을 것이며 그것은 그로 하여금 쓸모없는 낭비를 줄이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여기서 이것을 그의 회개의 열매로써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 삭개오는 자기의 소유 모두가 정직하고 공정하게 얻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배상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정해진 것보다 사배나 더하여 그에게 갚아 주겠습니다."

①그는 자신이 악을 행했던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참으로 회개한 자들이라면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사실을 시인할뿐 아니라 특별히 세상에서의 사업과 직업으로 인하여 아주 쉽사리 죄를 범해왔음을 뉘우치게 될 것이다.

②그는 자신이 토색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세리들은 정부로부터 후대를 받았다. 그것은 그들에게 만일 그들의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가질 경우 해를 입힐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③그는 사배나 갚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는 만일 내가 고소당하므로써 그래야 하도록 강요 받는다면 나는 보상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지않다. 반면에 어떤이들은 어쩔수 없게될 때에야 비로소 정직해 진다. 그는 자발적으로 그것을 행하려는 것이다. 나쁜 일을 행했음을 확신하는 자들은 갚아주는 것외에 달리 자신들의 회개의 신실성을 증거할 길이 없다. 그는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 소유의 절반을 주는 것으로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이 보상될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 것이 아닌 것을 주는 것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정직하게 벌지않은 것을 우리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6) 그리스도께서 삭개오의 회개를 인정하시고 받으심(9,10절).

1)삭개오는 이제 복된 사람으로 공포되고 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9절). 이제 그의 회개는 결과적으로 그의 구원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집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곳은 어디든 구원이 수반된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늘 구원이 그의 집에 있게된 것이다.

①삭개오가 회개했을때 이전보다 더욱더 그의 집에 축복이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집에 은혜와 구원의 방편을 가져온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푼 그는 그 자신의 집에 선행을 행한 것이며 복을 가져다준 것이다.

②삭개오가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아갔을때 그의 가족 역시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게 되었으며 따라서 구원이 그의 집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세리들, 즉 이방인들에게까지 있게된 아브라함의 축복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뿐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도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삭개오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출생하였으나 세리였기에 이방인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참으로 회개한 자는 마치 전에 결코 세리가 아니었던 것처럼 선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져야 한다.

2)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은 그가 세상에 오신 큰 목적과 의도에 일치하는 것이었다(10절). 그가 전에 가진 적이 있었던 똑같은 논쟁에서 그는 세리들과 교제하는 것을 정당화 하셨다(마 9:13). 거기서 그는 자신이 '죄인을 불러 회개케하기 위해서' 왔다고 변론하셨다. 여기서도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①사람들의 비참한 형편 :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온 세상의 인류는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파멸된 세상에 어울리는 자들이 된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길을 잃어 죽은 여행자와도 같고, 치료할수 없는 질병으로 말미암아 죽은 병자와도 같다고 하겠다.

②하나님의 아들의 자비로우신 목적 : 그는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오셨다. 즉 구원하기위해 하늘에서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위해서 그 대의를 맡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버린 세상을 찾아 구원하시기위해 오셨다. 그의 목적은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 목적을 수행하시는 가운데 그는 그 구원을 이룰수 있는 온갖 가능한 방법을 찾으셨으며 취하셨다. 그는 여기 삭개오처럼 그를 찾지않은 자들, 그를 요청하지 않은 자들을 찾고 계신다.

 

Ⅱ. 열므나의 비유 19:11-27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제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

1. 이때 그와 함께하던 자들에게 일어난 생각(11)

저희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러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를 기대하고 있었다(눅 17:20). 또한 그리스도의 제자들조차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선생이 현세적인 영광과 능력과 더불어 그것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그의 나라의 보좌가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고 결론내렸으며 따라서 이제 그가 곧바로 그곳에 가고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잠시후에 그가 거기서 보좌에 앉은 것을 보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선한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해서 잘못을 범하기가 쉽다.

2. 그들의 잘못된 기대가 시정됨(12-27)

그는 다음 세가지 면으로 그들의 잘못된 기대를 정정해 주신다.

(1) 그들은 그가 영광중에 지금 당장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그가 공적으로는 아직 오랫동안 그의 나라의 보좌에 앉지 않아야 됨을 말씀하신다. 그는 어떤 귀인과 같은 자로 그는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가게된다. 그는 왕국을 받아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강림하셨을때 돌아오셨다. 그때 예루살렘이 멸망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의 주된 귀환은 아직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써 마지막 심판날에 있게되는 것이다.

(2) 그들은 그의 사도들과 그를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자들이 영광과 위엄가운데 나아가리라고 즉 그들 모두가 군주, 또는 고관대작이 되어질 것이며 왕궁과 도시의 고위직과 온갖 영화를 가지게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그들에게 이러한 것 대신에 그들을 일꾼된 자들로 계획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계신다. 즉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장사하는 직 이외에 어떤 다른 높은 자리를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들로 스스로 사람들 가운데서 그와 그의 나라의 이익을 위해 섬기는 일에 종사케 하기위해서 그들의 수중에 자본을 공급해 주셨다. 모든 현대적인 영광을 신앙심 깊은 경멸로 바라볼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과 사역자들의 참된 영예로움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의 나라에서 그의 좌 우편에 앉아있는 것'을 꿈꾸었으며 그로인해 즐거워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생각을 품게하는 것들 대신에 진지한 생각을 하게하는 것들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①그들은 이제 해야할 큰 일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주인은 그들을 떠나가게 되며 떠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 각각 한므나씩을 준다. 이것은 달란트 비유와 똑같은 것을 보여준다(마 26장). 그러나 그 비유에서는 그들을 더 겸손케 하고자 하는 것이 나타나 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영예는 최고의 상인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장사꾼이라는데 있다. 그는 이러한 책임과 함께 그의 종들에게 므나를 나누어 주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부지런하라."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너희 직무를 기억하라. 그리고 그 일을 하라. 즉 열심을 가지고 그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그 일에 몰두하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할일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며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전자나 후자 모두 게으르라고 세례받거나 임명받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받은 자들에게 그들의 직무에 필요한 은사들을 공급하신다. 또한 그는 자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는 "가서 일하라 가서 장사하라"는 책임을 맡기며 므나들을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오기까지 우리의 일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②그들은 최종 결산을 하게된다. 이 종들은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하는 주인에게 부름을 받았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가운데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 장사한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많은 수고한 장사꾼들이 손해보는 자이었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장사하는 자들은 이득을 본 자들이 될 것이다. 회개한 영혼을 가진 자들은 이기는 자들이다. 참으로 회개한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명확히 이익이 된다. 사역자들은 단지 그를 위해 일하는 자들로 그들은 자신들이 복음의 그물로 잡은 고기, 즉 그들이 장사함으로 이득을 본 것을 그에게 회계해야 한다.

㉠몇몇 종들에게 있어진 선한 회계와 그들에 대한 주인의 인정 : 그 두가지가 16절과 19절에 예시되어 있다.

첫째, 그들은 모두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똑같지는 않았다. 한사람은 '열므나'를 남겼으며 다른 사람은 '다섯므나'를 남겼다. 똑같이 충성했다고해서 모두가 똑같은 성과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들 모두가 함께 충성했다 할지라도 어느 한편이 다른 사람보다 더욱 수고하고 자기 일에 더욱 열심으로 몰두했을 것이며 따라서 더좋은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둘째, 그들은 주인에 대한 자신들의 의무를 인정하였다. 즉 "주여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므나로 열므나를 남겼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가 남긴 모든 것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한다.

셋째, 그들은 모두 자신의 충성과 근면에 대해 칭찬을 들었다. 즉 17절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라고 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해선 19절에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라고 하였다. 만일 그가 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안된다.

넷째, 그들은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따라서 상급을 받았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고을 권세를 차지하라(17절). 별로 없는 가운데서 시작하는 것에 만족하는 자들은 성공할 가망이 있는 자들이다. 이러한 비유로써 사도들은 두가지 것을 약속받은 셈이 된다. 즉 그들이 많은 교회들을 세우기위해 수고했을때 그들은 큰 존대를 받게될 것이며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사랑과 존경속에서 큰 관심을 받게될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세대를 섬겼을때 그들은 내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들로서 다스릴수 있는 상급을 받은 천한 장사꾼의 경우보다 훨씬더 나은 것으로 선한 사역자나 혹은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질 것이다. 다섯므나를 남겼던 자는 다섯 등급이 있다. 즉 모든 그릇이 똑같이 쓸모있는 것이나 다 똑같이 크지는 않다. 이와같이 필요의 등급에 따라서 영광의 등급이 있게될 것이다.

㉡그들 중 한사람에게 있어진 악한 회계와 그에게 내려진 선고(22절)

첫째, 그는 자신이 맡은 므나로 장사하지 않았음을 인정하였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므나가 여기 있나이다(20절). 이는 곧 "내가 그것을 늘리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나는 그것을 줄게도 아니했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하겠다. "나는 그것을 안전하게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것은 은사를 받되 그것으로 도무지 선을 행하지않은 자들의 무관심을 나타내준다. 그리스도의 나라의 이익이 줄건 말건, 그 나라가 앞으로 나아가건 후퇴하건 그들에게는 매 한가지다. 이는 그들이 자기들의 직무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기때문이다. 세상에서 아무런 악도 행하지 않았고 아무런 선도 행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므나를 수건으로 싸두는 종들과 같은 자들이다.

둘째, 그 일을 더좋게 만들지 못하고 나쁘게 만든 것을 변명함으로 자기를 정당화시켰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21절). '엄한'이란 곧 교활함을 뜻하는 말이다. '당신은 두지않은 것을 취하고'가 이것을 나타내주는 말이다. 그는 그가 심지않은 것을 거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으로 그는 심은데서 거두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주인의 엄함을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는 단지 사기꾼에 불과한 자였다. 즉 자기의 게으름에 대해서 어리석고 근거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자였다.

셋째, 그의 변명이 그를 판단한 것이 되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22절).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반드시 심판받게 된 것이다. "만일 네가 내 이익에 대해 유의했었다면 너는 내 돈을 은행에 두어 나로 내 것뿐 아니라 그 변리까지 가지도록 했어야 했다." 설사 그가 본전을 잃을까 두려워서 장사하지 않은 것이라해도 아무 이익을 내지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 게으른 자들의 구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참된 이유는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전적인 무관심인 것이다. 그들은 단지 편히 살게되는 것외에 신앙이 터전을 얻건 말건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넷째, 그는 자기의 므나를 빼앗겼다(34절). 자기들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자들이 그것을 잃게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본문은 '그에게서 그 한므나를 빼앗아'라고 했다.

다섯째, 그것이 열므나 가진 자에게 주어지고 있다. 그가 이미 많이 가지고 있기때문에 이 지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을때(주여 저에게 이미 열므나가 있나이다(25절)) '무릇 있는 자가 받을 것이다'(26절)라고 대답되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하는 것이 공평한 처사이다. 즉 가장 부지런했던 자들이 가장 큰 격려를 받아야 한다. 또한 은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 마치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을때 그들은 그것을 빼앗기게 된다. 자기들의 가지고 있는 은혜를 더욱 증가시켜 가려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은혜를 무시하거나 은혜가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실 것이다.

(3) 그들이 기대했던 또다른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때 유대 민족이 곧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가 떠나신 후에 유대 민족이 완고하고 패역하게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그의 백성이 그의 뒤에 보낸 전언에서 그것이 나타난다(14절). 그가 자기 나라에 왕위를 받으러 갔을때 그들은 여전히 그의 대적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나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승천이후 유대인들 속에서 널리 드러난 불신앙으로써 성취되었다. 그들은 결코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믿지않는 자들의 말을 보여준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것에는 틀림없이 만족할수 있었을 것이나 그로 하여금 자기들을 다스리게는 하지않으려 할 것이다.

2)그가 돌아와 그들에게 내린 선고에서 그것이 나타난다.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27절). 그의 충성된 공복들이 상급을 받고 보상을 받을때, 그는 그의 원수들에 대해서 원한을 갚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났을때 그리스도와 그의 통치에 대해서 대적한 그 분간할수 없는 원수들에 대해서 보복이 행해졌다. 즉 그들은 '끌려와서 그 앞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앙을 고집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비참한 멸망이 틀림없이 모든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대가가 될 것이다. 그들의 어리석은 변명을 파기하고 그들의 공로에 따라 선고하기 위해 '그들을 이리로 끌어오라'고 했다. 그리스도로 자기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는 자들은 그의 원수로 여겨져 처리될 것이다.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께 복종치않은 자들로 여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잡힌바 되지않은 자는 그리스도의 진노로 반드시 멸망당할 것이다.

 

Ⅲ. 예루살렘 입성 19:28-40

우리는 여기서 전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보았던 것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일종의 승리의 입성을 하신 것에 대한 동일한 기사를 접하게 된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위해 기꺼이 앞으로 나아가셨다. 그는 거기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나아가셨다. 그것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셨다(28절). 그는 무리 중에서 제일 앞서 가셨다. 그는 이와같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기 위해서 나아가지 않으셨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우리가 그를 위해서 할수 있는 어떤 봉사를 함에 있어 주저하는 것인가?

(2) 그가 죽으시기 바로전에 예루살렘에 공개적으로 들어가신 것은 그리스도의 겸손이나 현재의 비하의 상태 모두에 합치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로써 그의 죽으심의 굴욕이 더욱 크게 나타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나귀와 그 새끼를 그 필요하신 때에 그 임자들로부터 가져오도록 하셨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신다. 그는 나귀와 그 새끼의 임자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가져오는 것을 허락하도록 영향을 미칠수가 있었다. 그들은 주께서 그것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것을 듣자마자 가져가기를 허락하였다.

(5) 그리스도의 명을 수행하는 자들은 확신하고서 나아갔다(32절). 만일 참으로 주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그들이 찾는 것을 반드시 가져올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전파자들에게 위로가 된다.

(6) 그를 위해서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가져온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자기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그것으로 그를 섬길수 있어야 한다. 그 제자들은 그를 위해서 나귀 새끼를 가져왔을뿐 아니라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올려 놓았다.'

(7) 그리스도의 개선은 그의 제자들의 찬송의 제목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오셨을때 하나님께서는 열두 제자뿐 아니라 전 제자들의 무리의 마음가운데 갑자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을 넣어주셨다(37절). 그들은 또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폈는데'(36절) 이는 평상적인 기쁨의 표현이다. 그들의 기쁨과 찬양의 이유 혹은 제목이 무엇이었는가를 주목하여 보라. 그들은 '자기들이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했으며 특별히 '나사로를 살리심'에 대해서 찬양했다(이것은 특별히 요 12:17,18절에 언급되어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기쁨과 찬양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다. 그는 또한 찬송받으실 분이시다. 그를 찬양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하늘에는 평화요. 하늘의 하나님께서 그의 행하심에 평화와 성과를 주실 것이다. 그러면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의 이 성도들의 찬양을 천사들의 찬양과 비교해 보라(눅 2:14). 이 둘은 모두 가장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일치하고 있다. 천사들은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평화'를 기뻐함같이 그들 또한 땅에 있는 평화를 기뻐하는 이러한 것은 우리가 거룩한 천사들과 교제를 갖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8) 그리스도의 개선과 그것을 찬양하는 제자들의 기쁜 찬양은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들에 대해 격분한 무리가운데 바리새인이 몇명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와같은 환호를 허락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가 '자기 제자들을 책망하시리라고' 기대하였다(39절). 그는 교만한 자의 경멸을 멸시하시듯이 겸손한 자의 찬양을 받으신다.

(9)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찬양하든 안하든 그는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받게될 것이고 또 받으셔야만 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40절). 즉 이 사람들이 잠잠하다고해서 그리스도께서 찬양을 못받게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들이 소리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을 잠잠케하려 했으나 그렇게 할수가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돌들로 능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수 있듯이 그 자손의 입으로 능히 온전히 찬양하게 하실수 있기 때문이다.

 

Ⅳ.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과 성전을 깨끗케 하심 19:41-48

하늘로부터 온 위대한 대사는 여기서 존대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절당하시고자 예루살렘에 공적으로 입성하시고 계신다. 그곳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근심을 보라.

1.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심(41-44)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의 멸망이 가까운 것을 아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41절). 아마도 그때는 그가 감람산 언덕에서 내려오실 때였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그 성을 한눈에 내려다 보셨을 것이다. 그의 눈은 그의 가슴에 감동을 주었으며 그의 가슴은 다시 그의 눈에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여기서 다음을 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얼마나 부드러운 심령을 지니신 분인가? 우리는 그가 종종 눈물을 흘리신 것을 볼수 있을지언정 그가 웃으신 것은 결코 볼수 없다.

(2)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서 기뻐하고 있었을때 눈물을 흘리심으로, 그들의 환호와 갈채가 그를 높이지 못한다는 것을 보이셨다.

(3) 그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실제로 비탄의 대상이 된 도시들이 있었으나 예루살렘보다 더 비탄의 대상이 된 도시는 없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는가? 그는 친히 우리에게 그 이유를 보여주신다.

1)예루살렘은 자신에게 주어지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였다. 그는 우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뻔 하였거니와…권고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42-44절). 말씀하시는 양식이 날카롭게 나타나고 있다. 너도…알았더라면. 어떤이들은 이 말씀을 13:9절에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의 형식으로 즉 "만일 네가 알았으면 좋겠거니와"라는 말씀으로 취하기도 한다. 그 말씀은 그들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이었던가! 그가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곧 예루살렘 자신에 있다는 것이다.

①'평화에 관한 일'이 있다. 우리는 그 일을 알고 이해하도록 모든 관심을 기울일수 있어야 한다. 평화에 관한 일은 우리의 현재와 장래의 행복과 관계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이 일을 알아야만 한다.

②평화에 관한 일이 우리에게 알려지게될 권고받는 때가 있다. 우리가 기도나 예배 등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수 있는 방법을 매우 풍성히 가짐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있게 지니게 될 그때가 권고받는 때가 되는 것이다.

③권고받는 때를 오랫동안 무시해온 자들이 혹 눈이 열림으로 그때를 깊이 숙고하게 된다면 그들 또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게될 것이다. 십일 시에 포도원에 들어온 자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거절당하지 않을 것이다.

④사람들이 자기들의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을 누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놀랄만큼 어리석은 것으로 비쳐진다.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마음을 두거나 중요시 하지않는 자들이다. 즉 그들은 평화에 관한 일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구원의 날과 영접할 시기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부주의함으로 말미암아 파멸케되고 만다. 보지않는 자의 앞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⑤복음의 은혜를 경멸하기를 고집하는 자들의 죄와 어리석음은 주 예수를 크게 슬프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마땅히 우리의 슬픔이 되어야 한다. 그는 잃어버린 영혼들, 즉 끝까지 회개치않는 자들을 눈물을 흘리시며 바라보고 계신다. 그는 그들이 자기들의 길을 계속 걸어감으로 죽게 되기보다는 돌이켜 살게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이는 한사람이라도 멸망케되는 것을 그가 바라지않으시기 때문이다.

2)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루살렘은 이제 평화에 관한 일을 볼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 사도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였다. 그러나 그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층은 불신앙에 빠져 완고하고 무지한 판단에 빠지고 말았다. 큰 구원을 무시한 대가로 그 백성은 현세적인 심판을 받게되었다. 즉 그 심판이 예루살렘에 임한 것이다.

①로마인들은 성을 포위하고 성 둘레에 토성을 쌓고 성을 둘러 예루살렘 성의 거주민들을 사면으로 가두었다.

②그들은 성을 메어쳤다. 황제 디도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도시를 파괴했으며 성 주변은 망루 세개만 남은채 폐허가 되었다. 성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포함한 시민들까지 잔인한 로마인들에 의해 땅에 메어쳐졌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권고받는 날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2. 성전을 깨끗케 하심(45,46)

(1)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을 훼손하는 무리에게서 성전을 깨끗케 하셨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며(45절). 성전의 영광은 그 물질적인 풍요보다 성결함에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상인들을 내어쫓으시는 이유를 말씀하신다(46절).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성별된 집이다. 사고 파는 자들이 그곳에서 물건을 부정한 방법으로 매매함으로 성전을 도둑들의 소굴로 만들었다. 이 일은 틀림없이 성전에 기도하러온 사람들에게 소란스러운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가장 적합한 일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47절). 이제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때 두부류의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있었다.

1) 사악한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적했는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두목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47절).

2) 백성들이 그를 어떻게 존대했는가?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백성들은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으며 열심으로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학자들은 모든 백성들이 다 일심으로 그를 청종하였으므로 그의 적들이 그리스도께 대항할 방법을 찾을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의 때가 올때까지는 백성들이 그를 보호하는 일을 하였으나 그의 때가 이르자 백성들은 대제사장들에게 그를 넘겨주었다.

 

# 해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 ( 19 )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는 본장에서부터 새로운 전환 국면을 맞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예루살렘을 향한 긴 여행이 본장에서 끝나고, 예루살렘 입성에서부터 십자가의 수난 및 부활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마지막 한주간이 시작됩니다. 본장은 내용상 크게 세단락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삭개오를 만나시는 부분(1-27 절)과 므나 비유(11-27절)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부분(28-48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구원받은 삭개오

1) 세리장인 삭개오

삭개오는 여리고 성의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여리고는 상업의 길목으로 매우 많은 통관세를 받는 고장이었습니다. 여리고 성의 세리장인 삭개오는 부자로서 별 어려움이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당시 세리는 창기와 더불어 죄인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왜냐하면 세리들은 로마 정부의 앞잡이로서 국민들에게 받는 세금으로 부정축재를 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a.종려의 성읍(신34:3)

b.세관의 책임자(눅5:27)

2) 예수님을 만나는 삭개오

삭개오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를 누렸지만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항상 죄의식을 가지고 자신이 구원을 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그분을 보고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삭개오는 많은 군중때문에 예수님을 볼수가 없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실때 구원을 갈망하는 그의 갈급한 심령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부르시며 속히 내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에 오늘 유하여야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a.죄책감을 지녔음(눅18:13)

b.두소경을 만나신 곳(마20:29-30)

3) 아브라함의 자손인 삭개오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시자 삭개오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는 즉시 뽕나무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시자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참된 회개와 전적인 자기 포기에서 우러나온 구제의 고백을 보시고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선포와 더불어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선포하셨습니다.

a.하나님은 늘 개인을 감찰하고 계심(시139:1)

b.그리스도를 즐거이 영접한 자(눅19:5-6)

 

2. 므나의 비유

1) 먼나라로 가는 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열므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갈때에 그의 종 열명을 불러 은 열므나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때까지 장사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귀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그가 종들을 신뢰했으며 또 종들의 충성 여부를 시험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을 막론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지만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a.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심(막4:34)

b.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고전4:2)

2) 귀인이 왕위를 가지고 돌아옴

귀인이 왕이 되려고 먼나라로 갔을때에 백성은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에 보내어 자신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않는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모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악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 마음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미워한 것과는 달리 귀인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습니다.

a.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충성된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함(잠25:13)

3) 상급과 형벌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한므나로 열므나와 다섯므나를 남긴 종들에게 귀인은 칭찬과 함께 열고을과 다섯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종은 주인의 엄한 것을 무서워하여 맡겨준 한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두었다가 주인에게로 도로 가져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한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한므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됨을 거절한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a.정직으로 판단하심(시9:8)

b.열매맺는 백성이 천국을 차지함(마21:43)


3.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감람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때에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시기 위해 제자 중 둘을 보내시어 나귀 새끼를 끌고오라고 명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행한 제자들은 준비된 나귀 새끼를 끌고왔습니다. 준비된 나귀 새끼는 이제까지 아무도 타지않은 나귀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나귀 새끼를 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많은 무리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a.나귀의 실질적 주인은 예수님이심(시50:10-11)

b.선지자의 말씀을 이루고자 하심(마21:4-5)

2) 멸망을 안타까워하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장차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을 아시고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정신 생활의 중심인 성전이 있는 신성한 성읍이었습니다. 이러한 도성이 하나님을 배역하고 선지자를 죽이는 일을 했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여 뉘우쳐 회개하지 않고 점점 강퍅해져 가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케될 것을 아시고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a.황폐하여 버린바 될 성읍(눅13:35)

b,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임(눅21:20)

3) 성전을 정화하심

주님은 예루살렘을 장사꾼의 소굴로 더럽힌 것과 순진한 순례자들을 착취한 이유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엄히 책망하시고 내어쫓으셨습니다.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셔서 성전이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예배의 장소인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하는 자들로 인해 본래의 의미를 잃어가고 타락된 곳을 정화하심으로써 성전을 회복하셨던 것입니다.

a.하나님의 성전은 기도하는 집임(사56:7)

b.백성이 즐겁게 들음(막12:37)

 

결론

우리는 본장에서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이를통해 오늘 이 시대의 우리들이 소속해 있는 교회의 모습을 정화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안에 바람직스럽지 못한 요소들을 철저히 제거하여 하나님의 성전의 본래 모습으로 회복시켜야 하겠습니다.

 

# 핵심

19:1-10

예수님이 세리 레위에 이어(5:27-39) 다시금 세리장 삭개오를 구원하셨다. 이는 그분의 사역이 ‘죄인 구원’을 위한 것임을 밝히 증거한다.

므나 비유의 역사적 배경(19:12-27)

헤롯이 죽었을때 그의 아들 아켈라오(마 2:22)는 왕위 계승을 인준받으러 로마에 갔다. 이때 그의 포악성을 이유로 왕위 계승을 반대한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로비를 벌였다. 그 결과 아켈라오는 유대와 사마리아, 이두매 지방의 에트나르크(‘백성들의 통치자’)로만 책봉되었다. 이에 분노한 그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서 주모자와 동조자 8,000명 가량을 잔혹하게 보복살해했다고 한다.

삭개오(19:1-10)

여리고에 살던 세리장으로서 부정으로 축재한 탓에 부유하게 지냈다. 예수님을 보기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점, 그분의 부르심에 즉각 응한 점, 회개한후 부정한 재물을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점은 그의 적극성과 과단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회개한 그가 구원받았음을 선포하셨다. 로마의 앞잡이로서 자기 배불리기에만 급급했던 삭개오가 이처럼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을 증거해준다.

 

# 묵상

삭개오의 구원 ( 19:1-10 )

삭개오는 여리고의 조세를 책임지고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며, 그 지위를 이용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이로인해 동족들로부터는 매국노, 착취자, 죄인으로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는 이러한 문제로 고민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꼭 만나고 싶어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와같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신앙은 은혜를 얻습니다. 삭개오의 구원 과정을 보면, 먼저 그는 사람들에게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7절).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4절). 예수님이 그를 보시고 그의 집에 유하셨으며(5, 7절), 삭개오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합니다(6절). 그리스도에 의해 생의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삭개오는 자신이 행하려고 결심한바를 선언합니다(8절). 이것은 자발적이며 율법의 요구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열므나의 비유 ( 19:11-24 )

귀인은 자신이 맡긴 일을 종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충성되게 이행하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열명의 종을 불러 한므나씩 주고 떠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리우셨다가 심판주로 재림하실때, 성도들에게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도록 맡겨주신 명령을 얼마나 잘 이행했는지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이익을 남긴 므나의 양이 아니라 자세입니다. 한므나로 열므나를 남긴 종이나 다섯므나를 남긴 종이 똑같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므나를 그대로 가져온 종은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교묘한 핑계로 책임을 회피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장사를 하다가 잘못되어 본전만 가지고 왔더라도 성의만 있었다면 책망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명령을 아예 처음부터 무시했던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청지기의 사명이 나오게 됩니다. 주의 청지기는 철저한 소명의식을 가지고(요15:16; 고전1:26-31), 주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며(롬12:1-2),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합니다(고전4:2). 더나아가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십니다.

예루살렘 입성 ( 19:28-40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목적은 영원한 희생 사역을 성취하시고, 부활의 첫열매가 되시고, 죽음을 가져오는 사탄을 치시며, 영광과 승리의 왕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재림때 심판의 자격을 가지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타신 짐승은 아무도 타보지않은 나귀 새끼였습니다. 이는 슥9:9절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바리새인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입성을 기뻐한 무리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깨달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의미의 메시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치 않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볼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성전 정화 ( 19:41-46 )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물리적인 파괴를 내다보신 것뿐만 아니라 현재 지도자들 사이에 팽배한 영적 형식주의로 인한 정신적, 종교적 황폐를 보시고 애통해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시자마자 먼저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굴로 만들었다고 화를 내신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은혜로운 곳이 착취와 폭리의 소굴로 전락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돌 하나도 남지 않으리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이요(막1:4; 고후7:10), 경고의 말씀이요(잠1:23; 고전14:24), 확실한 예언의 말씀입니다(민11:26; 벧후1:19).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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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끈질긴 과부의 비유 18:1-8

이 비유는 초두에 그 열쇠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1절). 그것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하는 백성이어야함을 전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정기적으로 그에게 기도해야 하며 또한 모든 위급할때에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끊임없는 일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항상 기도하여야 한다. 우리는 기도해야 하되, 그것이 영원히 찬양하는 수준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결코 기도하는 일에 물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특별히 본문에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든 혹은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것이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을 위해 계속적으로 인내하는 것을 가르치는데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이나 우리의 정욕, 그리고 우리의 부패에 대하여 강해지고자 기도해야 하며 낙망치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이는 우리가 헛되이 하나님의 면전을 찾지말아야 하기때문이다.

1. 예수께서 비유로써 끈질김의 힘을 보여주심(1-5)

그는 우리에게 불의한 재판관 앞에서 측은히 여기거나 공평한 처사로써가 아니라 끈질김의 힘으로 승소한 한 정당한 주장의 예를 제시해 주신다.

(1) 어떤 도시에 있었던 재판관의 악한 특성 :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였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나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주의도 하지않은채 자기의 의무를 행했다. 즉 그는 경건이나 존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였다. 조물주에 대한 두려움을 내팽개친 자들이 또한 피조물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곳에는 아무런 선도 기대할수 없다. 불신앙과 몰인정이 널리 횡행하게 되면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렇겠거니와 특히 재판에 있어서 더욱 악하게 된다. 재판관은 자기의 직권으로 선을 행하는 대신에 해를 행할 위험에 빠지게될 것이다.

(2) 한 가난한 과부의 비참한 처지 : 그녀는 틀림없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법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날마다 그 재판관에게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즉 내 원수에 대하여 나를 공정히 재판하소서 하고 개인적으로 간청을 드렸다. 재판관들은 특별히 과부를 압박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렘 22:3),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할(사 1:17) 책임이 있다.

(3) 그녀가 자신의 주장을 하는 가운데서 부딪힌 어려움과 낙심 : 그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지 않으려 하였다. 그는 자신의 평상시의 행위대로 그녀의 주장에 대해서 아무 주목도 하지않았다. 이는 그녀가 그에게 줄 뇌물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호소를 전혀 돌아보고자 하지않았다.

(4)계속해서 그 불의한 재판관을 성가시게 함으로 목적을 달성함 :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5절) 내가 그녀의 주장을 들어주리라. 그리고 그녀가 나를 질리게 하는 부르짖음을 더이상 하지않도록 공정히 행하리라. 이는 그녀가 그것이 해결되기까지 나를 편히 내버려두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더이상 번거롭게 만들지 않기위해서 그것을 행할 것이다. 즉 이제 처음으로 선하게 행할 것이다." 이와같이 그녀는 계속해서 간청함으로 공의를 행하게 하였다.

2.예수께서 이것을 기도하는 자에 대한 격려로 적용하심(6-13)

(1)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충분히 자비로우실 것을 역설하신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6,7절). 다음 내용을 생각하여 보자.

1)그들이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 즉 그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그들을 이 세상에서 큰 반대와 환난을 만나게 된다. 즉 많은 대적들이 있게 된다. 바라고 기대되어지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2)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그들은 '밤낮 그에게 부르짖어야' 한다. 이것이 그가 그들에게 의무로 주신 것이며 그럴때 그는 긍휼을 약속해주셨다. 우리는 이 끈질긴 과부처럼 우리의 영적인 적들에 대항하여 특별히 기도할수 있어야 한다. "주여, 이러한 패단을 극복하게 하소서. 주여, 나로 이러한 시험에 대하여 무장케 하소서." 우리는 압제받고 핍박받는 교회들을 위해서 스스로 염려할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공정히 처리하시기를 위해서 기도할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을수 있어야 하며, 밤낮 부르짖을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여야 한다'(사 62:6,7).

3)그들이 기도하는 중에 어쩌면 직면하게 될 낙심 : 그는 그들에 대해 오래 참으실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가 그 대적자들에 대한 자기 백성의 인내를 시험하시는 것이며 자기 백성의 인내를 훈련시키시는 것이다.

4)비록 자비하심이 지체되기는 하나 결국 그것이 있게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만일 이 과부가 끈질김으로 승리할수 있었다면 하나님의 선택한 자들은 더욱더 그리할수 있을 것이다.

①이 과부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들은 그가 알뿐 아니라 사랑하는 그의 택하신 자들이다.

②그녀는 단지 혼자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도하는 백성은 많다. 지상에 있는 성도들은 합치된 기도로 은혜의 보좌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③그녀는 자기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않는 재판관에게 갔었다. 반면에 우리는 우리로 담대히 그에게 오도록 명하시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④그녀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갔었다.

⑤그녀는 순전히 자기 이익을 위하여 재판관에게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간청하는 그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관계하시는 일이다.

⑥그녀는 자기를 위해서 말해줄 아무벗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계신 예언자 즉 그의 아들이 되시며 항상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시는 이를 모시고 있다.

⑦그녀는 위로 받을만한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는 약속을 가지고 있다.

⑧그녀는 단지 어떤 정해진 시간에만 그 재판관에게 접근할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밤낮, 즉 언제든지 부르짖을수 있다.

⑨그녀의 끈질김은 재판관을 성나게 했다. 그러나 우리의 끈질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효과있게 뜨거운 기도일 경우 우리는 많은 유익이 있을 것으로 바라게 되며 또 그렇게 될 것이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기다리기를 진력내기 시작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넌즈시 암시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올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 그가 오실때 과연 그는 세상에서 믿음을 보실 것인가? 이 물음은 강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천만에, 그는 보시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것을 내다보고 계신 것이다.

1)이 말씀은 믿음이 그리스도께서 바라신 가장 큰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그는 무죄가 있겠는가라고 묻지 않으시고 믿음이 있겠는가라고 물으셨다.

2)이 말씀은 만일 아무리 적을지라도 믿음이 있었다면 그는 그것을 보았을 것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3)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오실때 거의 믿음을 보시지 못할 것을 예언하는 것이다.

①대체로 그는 선한 사람들을 거의 보지 못하실 것이다. 경건의 모양과 형태를 가진 자는 많겠으나 신실하고 정직한 자, 곧 믿음을 가진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②특별한 것으로, 그는 그의 오심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를 거의 보지 못하실 것이다. 그것은 다음 경우들에 한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지체될 수도, 아니 지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즉 첫째로 악한 사람들이 그것을 무시하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의 지체하심이 그들의 악함을 더욱 굳게할 것이다. 둘째로 그의 백성들조차도 그것에 대해서 낙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한때가 오면 믿지않은 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될 것이다.

 

Ⅱ.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18:9-14

이 비유의 의도 역시 먼저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을 판결하시기 위해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들은 스스로 큰 자만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자신들이 바라는만큼 거룩한 자들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자신만만해 했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믿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에게 빚을 진 자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비록 이 이야기에는 비유로 될만한 것이 전혀없지만 이것은 비유로써 불리고 있다. 이같이 이 이야기는 실제로 일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1. 두사람이 같은 시각과 장소에서 기도의 의무를 행함(10)

두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그때는 공적인 기도의 시간이 아니었으며 그들은 개인적인 헌신을 드리고자 그곳에 갔다.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간 그 두사람은 바리새인과 세리였다. 하나님을 경배드리는 자들 가운데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섞여있는 법이다. 바리새인이 스스로에 대해 긍지가 있다고해서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 자일 수는 없었으며 세리 또한 천한 자이었으나 기도하는 은혜에서 제외되는 자일 수는 없었다. 바리새인은 성전이 공공 장소였기 때문에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갔던 것이며 따라서 그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에게서 보셨던 특성, 즉 '그들의 모든 선행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즉, 성전에서는 매일 볼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우편 손에 달린 마지막날에는 두렵게도 볼수 없는 많은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위해 성전으로 갔으나 세리는 할 일이 있어 갔다. 즉 바리새인은 그의 외모를 나타내기 위해서, 세리는 그의 간구를 위해서 성전에 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의향과 의도로 자신을 섬기고 있는가를 보신다.

2. 하나님께 향한 바리새인의 발언(11,12)

그것은 기도가 될수 없었다. 그는 따로 서서 기도하였다. 어떤이는 이것을 그는 혼자 서서 기도하였다라고 읽기도 한다(11,12절). 그는 전적으로 혼자 도취되어 있었으며 단지 자신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아무것도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말하고자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1) 그는 자신이 의롭다는 것을 스스로 믿었다. 그가 자신에 대해서 말한 많은 선행들이 사실임을 우리는 추측할수 있을 것이다. 그는 토색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또한 불의한 처사를 행하지 않았다. 즉 그는 누구에게도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간음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했다. 이와같이 그는 자기 육체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 그렇게해서 그는 세상의 재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으시지 않으셨다. 그러면 그는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는가?

1) 이상의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감사는 단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는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하지않고 잠간 슬쩍 '하나님이여 감사하나이다'라고 비껴 말했을 뿐이었다.

2) 그는 마치 성전에 온 모든 이유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기가 얼마나 선한가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기나 한것처럼 위와같은 자랑을 일삼고 있었다.

3) 그가 말한것 가운데에는 기도말이 한마디도 없다. 그는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할 일을 잊어버렸다. 그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도 은총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간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2) 그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였다.

1) 그는 자신외에 모든 사람을 경멸하였다. 즉 그는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할수도 있다. 그러나 마치 단지 우리만 선한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못한 것이다.

2) 그는 특별히 이 세리를 경멸하였다. 그는 그가 세리임을 알게되자 아주 가혹하게 그가 토색하는 자이며 불의한 자이고 아주 무가치한 자로 단정지어 버렸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그것에 관해서 논평할 무슨 권한이 있단 말인가? 그가 자기 이웃을 비난하지 않고 기도할수는 없었는가? 따라서 그는 자기 자신의 선을 기뻐한만큼 세리의 악을 기뻐한 것이 되지않는가?

3. 하나님께 드리는 세리의 고백(13)

세리의 고백은 바리새인의 것과는 정반대였다. 즉 바리새인의 기도가 교만과 허세로 가득찼던 것임에 반해 세리의 기도는 겸손과 몸둘바를 모르는 것으로 가득차 있었다. 또한 바리새인의 경우가 스스로 자만했던 것임에 반해 세리의 경우는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께 대한 바램으로 가득찼다.

(1) 그는 자신의 처신으로 자기의 회개와 겸손을 보여주었다.

1) 그는 멀리섰다. 세리는 자신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가치가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멀리에 섰던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그를 멀리서 보시리라는 것을 인정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가 가까이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신 것이 큰 은혜임을 인정하였다.

2) 그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그의 마음을 드렸으나, 부끄러워 몸둘바를 몰랐으므로 '거룩한 확신과 용기'로써 행하는 행동인 그의 눈을 드는 것은 하지 못하였다. 그의 슬픈 표정은 자신의 죄에 대한 생각으로 그의 마음이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3) 그는 '그의 가슴을 쳤다.' 죄인의 마음이 먼저 회개하는 견책으로 그를 친다. "죄인된 자여, 당신은 무엇을 했는가?" 그런후 그는 회개하는 가책으로 자기의 가슴을 친다. '오, 나는 불쌍한 자로다!'

(2) 그는 자신의 말 가운데서 그것을 나타냈다. 그의 기도는 짧았다. 한숨과 탄식이 그의 말을 삼켜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분명하였다. 즉 그것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였다. 응답받은 기도로 기록된 이러한 기도를 드릴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복된 자이겠는가?

1) 그는 자신이 본질상 죄인임을,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한다. 그러나 세리는 자신에 대하여 죄인된 것외에 다른 어떤 특질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2) 그는 하나님의 자비외에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았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의 공로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가련한 세리는 공로에 대한 어떤 생각도 가지지 않은채 자신의 피난처로 자비를 구하고 있다. "공의가 나를 심판하고 있다. 따라서 자비, 오직 자비외에는 아무것도 나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3) 그는 열심히 그 자비의 은혜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오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사람이 굶주려 죽게 되었을때 구걸하는 거지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새롭게 된 상태로 이러한 기도를 반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번이고 다음의 내용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4. 세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짐(14)

혹 바리새인을 추켜올리고 이 남의 눈을 피하여 눈물짓는 세리를 경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가련하고 회개하는 비탄에 잠긴 세리가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은 혹 자기들 중 하나가 의롭게 되어진다면 그 사람은 저 자가 아니라 틀림없이 자기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신다. "천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오히려 세리이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거절되어 내어쫓김을 당하였다. 즉 그는 의롭다 하심을 받지못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그가 자신의 눈에 너무 의로운 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리는 죄의 사유하심을 얻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그를 개처럼도 취급하지 않았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녀로 대하여 주셨다. 교만한 자들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낮아지게 될 것이다. 겸손한 자들은 스스로를 낮추는 자들로 하나님께 순복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은 높아지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한 응답으로 어떤 형벌이 있게 되는가를 보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경의를 표하는 자에게 어떤 보상이 있게 되는가를 보라.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또한 악에서 선을 낳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라. 즉 세리는 큰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큰 죄는 큰 회개를 가져다주었다. 바리새인이 토색하는 자도 불의한 자도 아니었다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마귀는 이것으로 그를 교만하게 만들어 그를 파멸케하였다.

 

Ⅲ. 어린아이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호의 18:15-17

(1) 그리스도 안에서 복되게 있는 자들은 또한 자신들의 자녀들도 그 안에서 복되게 있기를 바라야 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어린아이들을 데려왔다. 어떤이들은 그 아이들이 소아이며 매우 어려서 걸을수도 없는 젖먹이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 오지 못할만큼 아주 어린아이란 없다.

(2) 그리스도께서 따스히 어루만져 주신다면 우리의 자녀들은 행복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3)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15절).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간청하는 자들이 낙심할만한 일에 부딪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4)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16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꾸짖은 많은 사람들을 부르신다.

(5)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 오게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각이셨다.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또한 곧 그들을 방해하는 일도 결코 하지말라. 이는 그들도 다른이들처럼 환영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6)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의 자녀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 나라에 속해있다. 마치 자유인의 자녀가 자유인인 것과 같은 것이다.

(7) 어린아이의 기질을 가장 많이 지닌 자들이 그리스도께 가장 환영받는다(17절).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않는 자'란 곧 자신을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빚진 자로 고백하면서 겸손과 감사로 하나님의 은사를 받지않는 자란 말이다. 만일 사람이 이러한 자기 부정의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는 그 나라에 들어갈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가 될 것이다.

 

Ⅳ. 영생을 얻기를 원한 한관원의 물음 18:18-30

1.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관한 그리스도와 관원과의 대화(18-23)

(1) 누가는 그 사람이 관원이었다고 적고있다. 관원 중에서 그리스도를 존경했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본문에 나오는 사람은 바로 그들 중에 한사람이었다.

(2) 여기에 나오는 물음은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지는 큰 문제로써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것이었다(18절).

(3) 영생을 얻고자하는 자들은 친히 자기들의 선생이 되신, 즉 가르치시는 선생이 되실뿐 아니라 다스리시는 선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문의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외에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배우는 곳은 달리없다.

(4) 선생이 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가 신성한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계실뿐 아니라 신성한 선을 가지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절).

(5) 우리의 선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그의 오시기 전의 상태에서 변경시키시지 않으셨으며 그것을 더욱 쉽고 평이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 놓으셨다. "너는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가? 계명을 지키라."

(6) 제 5계명에서 제 10계명까지의 의무들도 성실히 지켜져야만 한다. 이 계명들을 크게 위배하지 않는 것으로써는 충분치 못하다. 우리는 이 계명들의 범위와 영적인 특질속에서 '이 계명들을 알아야' 한다.

(7) 사람들은 무지하므로 자신이 무죄하다고 생각한다. 이 관원도 그러했다.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절). 그는 일찍부터 선한 삶을 시작했으며, 이날까지 계속해서 그러해왔고 따라서 어떤 허물도 없다고 자만해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본질을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그 자신의 마음으로 행해야함을 알고 있었다면, 또한 잠시라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있었더라면 그는 분명히 그 반대로 말했을 것이다. 즉 나는 어려서부터 이 모든 것을 어겼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8)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우리 형제들에 대해서, 그리고 금세와 내세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품고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면 어떻게든 그에게 와서 그를 좇을 것이다. 그가 어디로 가든지 기꺼이 어린양을 좇고자 하지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못할 것이다. 만일 형제에 대해 참된 사랑을 가진 자라면 자기있는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만일 금세를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자라면 하나님의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자기가 가진 것을 팔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내세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라면 하늘나라에 보화를 두는것 이상의 바램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

(9) 칭찬 받을만한 것이 많이 있으면서 어떤 한가지가 부족함으로 멸망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여기 이 관원이 그러한 자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자기의 소유를 따로 구분한 이것으로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끊었던 것이다.

(10) 그리스도를 떠나기를 싫어하면서도 그를 떠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즉 그들의 타락한 본성이 마침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한쪽을 버려야할때 그들은 그들의 이득이 아닌 그들의 하나님을 버리게되는 것이다.

2. 이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24-30)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내용을 찾아보게 된다.

(1)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있어서 부는 많은 사람에게 큰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는 그 사람이 매우 근심하는 것을 보셨으며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으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24절). 어떤 사람이 큰 재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따라서 그는 자기 소유를 구제하는데 사용해야 하는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를 떠나는 편을 택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자들의 구원받기가 어려움을 매우 강조하여 역설하신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25절)고 하신 것이 그것이다.

(2) 하늘나리에 가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을 팔든지 혹은 그리스도와 관계를 끊든지 해야한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겠는가?(26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신 것에 대해 그것이 어려운 것이며 납득할수 없는 것이라고 흠을 잡고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이 이 세상에 얼마나 깊이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를 알고 있기에 항상 이러한 자리에 떨어지는 자신들에 대해 심히 낙담한 것이다.

(3) 우리가 구원받는데에는 단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외에는 결코 다른 것으로는 극복할수 없는 그러한 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무릇 사람의 할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수 있느니라(27절). 하나님의 은혜는 영혼에 역사함으로 그 영혼의 메마르고 삐뚤어진 것을 정반대의 모습으로 개조시킨다.

(4)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버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하는 경향이 있다. 베드로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28절)라고 했다. 그러한 태도를 능사로 여기게 될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 자신과 자기 형제들의 사랑, 즉 그를 따르기위해 모든 것을 '버린 것'을 무분별하게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5)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을 버렸든지 그것은 꼭 금세와 내세에 풍성한 것으로 채워질 것이다(29,30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기 소유의 좋은 것들을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을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기쁜 교제속에서 그리고 선한 양심과 여러 유익된 것들로 자기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에 대해 풍성하게 보상받을 것이다. 그리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그 관원이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원했던 것이다.

 

Ⅴ.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심 18:31-34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임박한 그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들의 영화로운 면에 대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두가지를 보게 된다.

1) 여기서 그리스도의 고난당하심이 성경의 성취로 언급되어지고 있다.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31절). 이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성경이 정확하고도 완전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었다. 이는 성경이 그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십자가에서 죽게한 죄의 원인을 만든 것이다. 이와같이 기록되었으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받는 것은 마땅한 것이었다.

2)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시는 중에 당하신 수치와 치욕이 여기에 가장 잘 강조되어 있다.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이것을 그가 조롱당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본문에는 '그가 능욕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모든 가능한 수치가 그에게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하듯이 여기서도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의 두려움과 수치를 씻어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셨다. 저는 삼일만에 살아나리라.

(2) 이 결과로 제자들은 혼동을 겪게된다. 이것은 그들이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해서 가졌던 개념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다'(34절). 그들의 선입관이 너무 강했으므로 그들은 그 사실들을 문자 그대로는 이해하지 않으려 했으며 또한 달리 이해할수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은 그것을 받을수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서 말한 예언들에 너무 정신을 판 나머지 그의 고난당하심에 대해서 말한 것들은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오류에 빠진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성경을 한쪽만 보았기 때문이며, 율법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들을 일부분만 편파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와같이 지금도 우리는 이미 성취된 선지서들을 읽는 가운데 곧 교회의 영광스러운 상태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는 슬픔에 잠기는 상태를 오래 지나가야함을 못보고 있는채로 그후에 있어질 것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Ⅵ. 소경의 눈을 고쳐주심 18:35-43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심으로 우리가 보고있는 물체들을 우리앞에 보이도록 하시기 위해서뿐 아니라 보지못하는 영혼들에게 시력을 주심으로 그 물체들을 볼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는 이제 여리고 가까이에서 예수께서 보게하신 어떤 사람에 대한 설명을 접하게 된다. 마가는 그 사람의 이름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때' 그 사람을 고치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막 10:46). 마태는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때'에 두명의 소경이 고치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다(마 20:30). 누가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때'로 말하고 있다.

(1) 이 불쌍한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35절). 그는 소경이었을뿐 아니라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세상의 인간을 적절히 상징해 주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고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앉아서 구걸하였다. 이는 그가 소경으로서 생계를 위해 일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길가에서 동냥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 우리는 못본체 지나쳐서는 안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한 비천한 거지를 향해 호의를 베푸신다.

(2)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그는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36절). 다른 복음서에는 이 대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질문은 우리에게 호기심을 갖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과 그러한 자들은 언제고 유익을 얻게되리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보지못하는 자들은 듣는 것을 보다더 유용하게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눈으로 볼수 없게 될때에 물어봄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눈을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 이 소경은 그렇게 했다. 이와같이 함으로써 그는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되었다(37절).

(3) 그는 대단한 믿음과 열심히 간구하고 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절). 그 소경은 그가 자기를 도와주고 구원해 줄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믿었다. 그러므로 그는 열심으로 그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구할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긍휼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4) 선한 열심으로 그리스도의 은총과 축복을 바라는 자들은 비록 반대와 비난에 부딪히게 된다할지라도 자신들의 추구하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앞서 갔던 자들은 주님을 성가시게 한다고, 그리고 소란하고 무례한 자라고 그를 꾸짖었으며 또한 잠잠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제재는 단지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는 둑처럼 그 외침을 더욱 크게 만들 뿐이었다.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9절).

(5) 그리스도께서 그 비천한 거지를 위로하시며, 그를 자신에게 오도록 부르신다. 예수께서…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40절).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어떤 자보다도 더욱 슬픔으로 간청하는 자에 대해 온유와 긍휼을 가지고 계신다. 그를 꾸짖은 자들은 이제 그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자신들의 손을 내어밀어야만 했다.

(6)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궁핍을 알고 계시나 그는 우리에게서 그것들을 듣고자 하신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41절). 이 사람은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영혼을 쏟아놓았다.

(7) 믿음의 기도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42절). 그리스도께서는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하셨다. 참된 믿음은 열심으로 기도하게 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낼 것이다.

(8) 그리스도의 은혜는 감사함으로 사례되어져야 한다(43절).

1) 자신의 시력을 회복한 그 비천한 거지는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리스도를 좇았다.' 그가 고쳐준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했을때 그것은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그를 높일때 그것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이 된다.

2) 그것을 본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우리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있게될때도 역시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어야 한다.

 

# 해설

기도와 영생에 관한 교훈 ( 18 )

본장의 교훈들은 이미 전장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본장도 여러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기도와 영생에 관한 교훈입니다. 1절부터 14절까지는 인내와 열정을 가지고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된다는 것과 의로운 자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수 있는 마음과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힘들다는 것과 수난의 예고와 소경을 고쳐주시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기도에 관해 말씀하심

1) 불의한 재판관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말아야 될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불의한 재판관과 한과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재판관이면서도 법과 공의를 존중하지 않고 재물과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는 특별 대우를 하며 돈없는 약한 백성들에게는 포학을 일삼는 자였습니다. 악인의 미련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a.말씀을 멸시함(대하36:16)

b.재판관은 공의로워야 함(신16:18)

2) 소원을 이룬 과부

불의한 재판관의 관할하에 있는 도시에 한과부가 있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억울한 일이 생겨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원한을 들어주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 요구는 끝까지 회피할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과부가 자신의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찾아와서 간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재물과 권력만을 알고 공의를 잊은 재판관이지만 과부의 번거로운 호소를 들어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내와 끈기만으로 승리한 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주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a.과부를 위해 변호하라고 하심(사1:17)

b.주를 찾는 자는 버림당하지 않음(시9:10)

3) 올바른 기도

예수님은 이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통해 올바른 기도에 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기도라기보다는 거의 자기 자랑과 자기 만족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따로 서서 기도하면서 자신의 의를 하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 위한 내용으로 독백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애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정 무가치한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기도는 책망하시고 세리의 기도는 올바른 기도라고 칭찬하셨습니다.

a.자기를 옳게 보이려는 자임(눅10:29)

b.세리와 창기가 먼저 하나님나라를 차지할 것임(마21:31-32).

 

2. 질문과 대답

1) 어린이를 용납하라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자녀들을 주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어린아이를 랍비에게 데리고 와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은 유대인의 관습이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고자 할때에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으며 접근을 막았습니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 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적인 경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자들의 것임을 제자들에게 교훈하시고,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a.겸손으로 옷 입으라(골3:12)

b.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어야 함(막10:15)

2) 부자 관원의 질문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관원은 자기가 어려서부터 그 계명을 다 지켰다고 자신의 의를 주장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그것을 행할수가 없어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영생의 길은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사랑해서는 갈수 없습니다.

a.구제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일임(눅12:33)

b.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딤전6:10)

3)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있음

예수님은 많은 재물때문에 영생의 길을 포기한 관원이 돌아간후에 부자는 구원받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재물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지적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못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은혜로 구원을 얻음(엡2:8).

b.하나님은 자기 뜻대로 행하심(단4:35)

 

3. 수난 예고와 소경을 치유하심

1) 수난을 예고하심

예수님은 자신에게 응할 선지자들의 기록이 성취될 날이 가까이 다가왔기때문에 수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복잡한 사정에 의해 작정되었으나 그 모든 배후에는 하나님의 엄숙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고 능욕을 받으며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할 것에 대한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을 당하게될 것과 삼일만에 살아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a.예언의 성취를 말함(눅24:46)

b.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짐(마27:1-2)

2) 눈먼 거지의 간청

예수님은 드디어 여리고에 도착하셨습니다. 여리고에서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한소경은 심상치 않은 무리의 소동을 듣고 그 연고를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호소하는 소경을 일반 군중은 꾸짖어 조용히 하라고 제지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사람들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질러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a.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음(마21:22)

b.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심(시145:8)

3) 치유받은 소경

큰소리로 호소하는 소경을 제지하던 군중과는 달리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병고침을 호소했던 소경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눈을 뜨게된 소경은 즉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며,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도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a.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심(마9:36)

b.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림(시29:2)

 

결론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나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해달라고 하는 과부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어도 응답을 받지못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간절함과 끈기가 부족했음을 알고 더욱 힘써 기도하여 응답받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8:1-17

기도의 간절함과 진실성,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사모하고 갈망하는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진한 믿음을 강조하시는 반면에,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위선을 경계하신 내용이다.

유대인들의 금식(18:12)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 규정에 따라 대속죄일에 금식함은 물론(레 16:29,31) 개인적으로도 자유롭게 금식했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유대 랍비들은 일주일에 두번 정한날(화요일과 금요일, 월요일과 화요일, 또는 월요일과 목요일)에만 금식하도록 했다. 이는 무절제한 금식이 건강을 해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규례가 그렇듯 금식 역시 ‘오직 하나님만 갈망하고 그분의 도우심에 의지하고자 하는’ 근본 정신을 망각하자 형식주의로 치우치고 말았다.

 

# 묵상

불의한 재판장 비유 ( 18:1-8 )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낙망치 말고 기도하도록 권하기 위함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기도응답이 없으면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응답이 쉬나타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됩니다. 바른 기도를 하기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하고, 쉬지말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살전5:17).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올바른 기도 ( 18:9-14 )

바리새인은 공을 자랑하는 기도를 했고, 세리는 회개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만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는 기도는 경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회개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때문에 결국 자기를 낮춘 세리는 의롭다하는 평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자랑보다는 허물이 많습니다. 세리는 이를 깨달았고 바리새인은 이를 깨닫지못한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하나님나라의 관계 ( 18:15-17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어린아이같이 받들지않으면 그곳에 들어갈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과 소망을 칭찬하시며, 어른들의 멸시하는 태도가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음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은 겸손하고 가식이 없는 신앙입니다. 또한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즉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있는그대로 자기를 나타내는 신앙인 것입니다.

약대와 바늘 ( 18:24-27 )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움을 교훈하셨습니다. 재물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을 잊게 만들기 쉽습니다. 즉 재물이 하나님나라를 얻기위해 선행되어야할 인간의 근본적인 변화를 억제한다는 점을 지적하신 말씀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성도들은 믿음자체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수난 예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 18:34 )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어도 깨닫지 못했고 고난받는 메시야상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길에서는 고난이 필수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리고 소경의 믿음 ( 18:35-43 )

여리고의 소경은 예수님을 알고, 확실한 소원과 간절하게 기도하는 순수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육신의 장애를 통해 영적인 장애를 깨닫고 예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왔으며, 철저히 주님의 긍휼과 자비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육신의 장애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구원을 얻고 많은 백성의 신앙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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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용서할 것과 종된 자의 위치를 가르치심 17:1-10

다음 내용들을 잘 주목하라.

(1) 실족케하는 것은 큰 죄이다(1,2절). 우리는 실족케하는 것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예상하지 않을수 없다. 실족케하는 것이 없을수는 없으나(1절).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대비할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있게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게된다. 즉 그의 죄과가 무거워지게 된다(2절). 그러한 사람들은 연자맷돌보다 더 무거운 죄의 짐아래서 멸망하게 된다. 이러한 형벌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있게될 화를 포함하고 있다. 그들은 첫째, 그리스도의 작은 자 중 지극히 적은 자에게라도 해를 입힌 핍박자들 둘째, 그리스도의 진리를 더럽힘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근심케한 유혹자들 셋째, 비방함으로써 봉사를 약화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슬프게하는 자들이다.

(2)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큰 의무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3절). 이것은 앞에 있는 말에 대한 언급이거나 아니면 뒤에 나오는 말에 대한 언급이다. 즉 너희는 이 소자중 하나라도 실족케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거나 너희 형제가 너희에게 범죄했을때 너희는 성내지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이다.

1)만일 우리가 그를 꾸짖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분노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억제하여야 한다. 그에게 그의 잘못을 고하여야할 것이다. 또한 간혹 우리가 아무 허물도 없는 사람을 잘못 생각함으로 오해한 것을 깨달을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를 오해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2)우리는 회개한 사람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또한 해 받은 것은 잊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혹 그 사람이 회개하지 않는다해도 그에 대해서 악한 생각을 품지말아야 하며 앙갚음을 꾀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3)어떤 사람이 되풀이해서 죄를 범하더라도 항상 용서해주어야 한다(4절). "만일 어떤 사람이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그때마다 자기 잘못에 대해 뉘우치곤 한다면 그를 계속해서 용서하라." 그리스도인은 용서하는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 또한 기꺼이 모든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대하여야 한다. 아울러서 그들은 해 받은 것에 대해 분개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해 받은 것을 용서해 줄수 있어야 한다.

(3)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굳게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은혜가 자라감에 따라 다른 모든 은혜들이 성장하기 때문이다.

1) 제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굳게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 드린 말씀(5절) : 사도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이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함을 알았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께 '우리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말씀드렸다. 우리의 믿음을 더하기위하여 우리는 그것을 진심으로 바래야한다. 그들은 해 받은 것에 대해 용서해 줄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있었던 당시에 그리스도께 이와같은 간청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들의 간청은 곧 이러한 말이라고 할수 있다. "주여, '우리의 믿음을 더 하소서' 그렇지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와 같이 어려운 의무를 시행할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자비하심 가운데서 주어진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형제를 용서하는 일에 있어 대단히 어려운 것들을 이기게해 줄 것이다.

2) 참된 믿음의 놀랄만한 능력에 대해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주신 증거(6절) :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즉 겨자씨처럼 작으나 또한 겨자씨처럼 강하게 다른 모든 은혜들을 자극시키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너희가 하기 어려운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 심지어 나무의 뿌리를 땅에서 바다에 심기우는 것까지 가능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할 것이다.

(4)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든지 매우 겸손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일을 행한 사도들조차 그것들로 인해 그를 자신들의 채무자처럼 생각해서는 안되었다.

1)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종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 시간과 전 힘을 그를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종된 자로서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시간을 의무를 행하는데 보내야할 것이다. 우리는 한가지 봉사의 끝남을 또다른 봉사의 시작으로 여겨야 한다. 종은 들에서 밭을 갈거나 가축을 먹이다가 밤중에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히 해야할 일이 있는 것이다. 즉 식사 시중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7,8절).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기로 하였으면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께 시중들수 있어야 한다.

3) 여기서 우리의 주된 관심은 반드시 우리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는데 있다. 우리의 위안은 주인에게 맡겨져있는 것이다. 어떤 종도 자기 주인이 자기에게 '곧 와 앉아서 먹으라'고 말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행할 것을 다 행한 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렇게 할때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다 마치기까지 힘쓰도록 하자. 그러면 멀지않아 보상이 있게될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섬김을 받아야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8절).

5)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섬기게 될때 '띠를 띠어야' 한다. 즉 모든 방해되는 것과 얽어매는 것에서부터 자유롭게 될수 있어야 한다. 그와같이 우리는 그에게 시중들기 위해서 우리 자신들을 띠 띠어야 한다. 이것은 종들에게 있어야 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강요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그의 제자들가운데 섬기는 자로 계셨다. 또한 그는 섬김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이를 증거한다.

6) 그리스도의 종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봉사를 하든 그의 감사를 받지 못한다. 종에게 사례하겠느냐(9절). 우리의 어떠한 선행도 하나님 편에서 볼때는 아무런 공로도 되지 못한다.

7)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엇을 행하든 그것은 우리의 행해야할 의무보다 더 큰 것이 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일지라도 우리는 이 일의 많은 부족함으로 인해서 "슬프도다!"라고 탄식하게 된다. 이는 그것이 단지 우리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는 크고 첫째되는 계명에 의해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8) 그리스도의 가장 훌륭한 종들일지라도 겸손하게 자신들이 무익한 종임을 인정할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의 섬김에 의해서 이득 보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봉사들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결코 채무자가 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봉사를 무익한 봉사로, 우리 자신들을 무익한 종들로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Ⅱ. 열 문둥병자를 고치심 17:11-19

우리는 여기서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예수께서 열 문둥병자를 치료하시는 기사를 보게된다. 문둥병은 유대인들에게 다른 어떤 질병보다도 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징표로 여겨진 질병이었다. 따라서 죄없이 하기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 길가에서 마주친 문둥병자들을 특별히 깨끗케 해주셨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셨다. 그러므로 그는 그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있는 경계, 즉 국경 지방에 계셨던 것이다.

1. 이들 문둥병자들이 그리스도께 외친 말(11-13)

그들은 열명으로 무리지어 있었다. 이는 그들이 비록 사람들의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할지라도 병에 걸린 자들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지냈기 때문이었다.

(1)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한촌에 들어가셨을때' 그를 만났다. 그들은 그가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시기까지 기다리지 않았으며 그가 지친 상태로 그 마을에 들어오셨을때 그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2) 그들은 '멀리 서있었다.' 우리가 영적으로 문둥병자라고 하는 의식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 우리를 매우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누구이길래 한없이 정결하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갈수 있겠는가?

(3) 그들의 요구는 한결같았으며 매우 끈질겼다.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절). 그리스도께 도움을 기대하려면 그를 선생님으로 여길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선생님이시라면 그는 예수, 곧 구세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들은 특별히 자신들의 문둥병을 치료해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단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에 내어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그의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이다.

2.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심(14)

이는 제사장으로 하여금 검사케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고침받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명확히 말씀하지 않으셨으며 단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하셨을 뿐이다(14절). 이것은 그들의 순종에 대한 시험이라고 하겠다. 그리스도께 은총을 얻으려면 자신들을 그의 방법에 맡길수 있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제사장에게 갔다. 의식법이 아직 유효했으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지키게 하셨던 것이다.

3. 그들이 갔을때 깨끗함을 받음(14)

이와같이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행할때 하나님께서 긍휼하심으로 우리를 만나 주시리라고 기대할수 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할수 있는 것을 행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할수 없는 것을 부족함없이 채워주실 것이다. 비록 그 방법 자체가 우리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대로 부지런히 준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치료하실 것이다.

4. 그들 중 단 한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함(15)

그 사람은 자신이 고침받은 것을 보았을때 자신을 치료해준 분께로 돌아와서 그가 그 일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랬다. 그 사람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으로 그리고 매우 감격하여 감사하고 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15절). 하나님께 긍휼하심을 입은 자들은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리스도께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하되 특별히 질병에서부터 회복시켜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할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뿐 아니라 감사하는 일에 있어서도 또한 매우 겸손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태도이다.

5.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주목하심(16)

이는 다른 모든 사람이 유대인들이었음에 반해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16절). 사마리아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일에 있어서나 경배하는 일에 있어서 유대인들처럼 잘 알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을 잊고 있었을때 하나님께 영광돌린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이셨다. 왜냐하면 다른 아홉 사람도 함께 긍휼을 입었으나 그들은 모두 그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이방인이었던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위해 돌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1)그리스도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일에 얼마나 풍성하신가? 열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1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일괄적으로 치료해 주셨다. 즉 전 병자가 한마디 말씀으로 치유받았던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은혜받는 일이란 결코 없을 것이다.

2)우리는 다시 돌아오는 일에 얼마나 인색한가? 그리스도께서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은 매우 흔히 범하여지는 죄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긍휼을 입으나 단지 적은 사람만이, 아주 소수만이 감사를 드린다.

3)가장 감사하리라고 기대되어지는 자들은 과연 감사하였는가? 사마리아 사람은 감사했으나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계심은 그들의 배은망덕의 죄를 더 무겁게 해주는 것이 되기도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큰 위로를 베풀어주셨다(19절). 다른 사람들도 치료를 받았으며 그 치료받은 것은 결코 번복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각별하게 자신의 나음을 확신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곤궁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해서 보셨던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가 이를때에 대한 가르침 17:20-37

1.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요구(20,21)

이것이 이 강화를 하게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가 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도록 가르치셨고 그래서 제자들이 하나님나라가 가까웠다고 널리 전파한 것으로 이해한듯 싶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은 그 영화로운 때가 언제 있게될 것입니까라고 묻고있는 것이다.

2. 그 요구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22-37)

예수께서는 먼저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그리고 곧 이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22절). 그가 양편에 대해 말씀하신 것, 곧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

(1) 메시야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어느때에 이를 것인가를 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묻는 것을 너희는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그것이 임할 것이로되 너희는 그것의 임함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왕국은 신문을 발전과 변혁에 관한 기사로 가득 메우는 세상 국가들과 같이 외적으로 보이는 왕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오히려 그 나라는 소리없이 임할 것이다. 즉 '볼수 있게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 시기에 대한 자신들의 궁금증이 풀어지기를 원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의 도래에 대한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왕되신 메시야께서 그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실때는 어떤 왕이 자기 영토를 방문할때 그렇듯이 '보라 여기있다, 보라 저기있다'라고 말할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과 함께 임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이는 나라가 이곳 혹은 저곳 등으로 한정짓는 자들은 '보라 여기있다, 보라 저기있다'하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들은 번영과 외적인 허식을 참된 교회의 징표로 여기는 자들이다. 그것은 영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나라의 영광은 사람들의 생각과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의 영에 영향을 준다. 또한 그 나라의 능력은 사람들의 영혼과 의식을 지배한다. 하나님나라는 사람들의 외적상태가 아닌 사람들의 마음과 삶을 변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교만하고 무익한 자들이 겸손하고 진지하며 하늘에 속한 자들이 되어질때 그 나라의 도래가 있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변화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고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가운데 있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는 그 나라가 언제 임할 것인가를 물으면서도 너희 가운데서 이미 그 나라가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비록 너희 마음안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너희 민족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 나라가 임하게 될 시기에 관하여 궁금히 여긴 많은 질문자들의 어리석음은 곧 그들이 자기들 앞에 있는것 즉 이미 자기들가운데 있는 것을 고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이다.

(2) 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수많은 반대와 방해에 부딪히게 된다(22절). 제자들은 자신들이 파죽지세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렇지않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실상 처음에 너희는 놀라운 성과를 거둘 것이다(실제로 그들은 그랬었다. 한때 하루에  수천명이 교회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그러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점차 냉담해질 것이다." 이 일은 후대에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질 일이었다. 그들은 많은 실의를 각오해야만 했다. 사역자들과 교회들은 때때로 외적 압박에 처하게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누렸던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바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자비를 적게 하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자비의 가치를 알도록 가르치신다. 때때로 그들은 내적 압박에 처하게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이 자주 겪었던 그러한 승리에 가득 넘친 날이 오기를 바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분명하지 않다고해서, 그리고 항상 널리 파급되어 가지 않는다고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대의가 유실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3)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는 이곳, 혹은 저곳 등 어느 특정한 곳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며 그의 나타나심은 즉시 모든 곳에 보편적으로 있게될 것이다(23,24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있다 보라 여기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23절).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한백성의 영광을 위해 예정된 것이 아니며 이방인들에게 빛을 비추기위해 예정된 것이다. '번개가 하늘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갑자기 가눌수 없게 '하늘아래 저편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세상에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기위한 복음은 번개같이 모든 민족에게로 날아갈 것이다. 메시야의 왕국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며 전 지상에 널리 산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 목적은 하나의 거대한 민족을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민족을, 최소한 전민족 가운데서 몇 민족이라도 선하게 만드는데 있는 것이다.

(4) 메시야는 통치하기 전에 먼저 고난을 받아야 한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25절). 그러므로 만일 그가 이와같이 대우받게될 것이라면 그의 제자들 역시 그를 위해서 고난받을 것과 버림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고통, 수치, 죽음은 곧 이 많은 고난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세대, 즉 믿는 이방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전에 이 세대 즉 믿지않는 유대인들에게 버림을 받게될 것이다.

(5) 메시야의 왕국을 세우는 일은 유대 민족의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1)옛날에는 죄인들이 어떻게 되었던가를 주목하여 보라. 악함으로 주앞에 지극히 죄인되었던 소돔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여 보라. 다음을 살펴보자.

①그들은 모두 적절한 경고를 받았었다. 노아는 옛 세상에 대한 의로운 전파자였다. 소돔 사람들에 대해서는 롯이 그러했다.

②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경고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안일하였다. 그들은 모두 매우 즐겼을 뿐이며 그 즐기는 것에 여전히 분주했을 뿐이었다. 그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기도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킨 것처럼 그렇게 했어야 할때에 계속해서 걱정없이 육식을 하면서 포도주를 마시기만 하였다.

③그들은 두려운 심판이 임할때까지 계속해서 안일함과 성욕가운데 있었다.

④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된 자들을 안전하게 돌아보셨다. 노아는 방주에 들어갔으며 그곳에 안전하게 있었다. 롯은 소돔에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갔다.

⑤그들은 자기들이 두려워하지 않았던 파멸에 대해서 놀랐다. '홍수가 났으며' 옛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멸망시켰다. 또한 '불과 유황'이 임하여 소돔의 모든 죄인들을 멸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의도하고 있는 것은 음란하고 안일한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두렵고도 놀라운 멸망이 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있다.

2)지금은 죄인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주목하여 보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30절). 그들은 지금 그리스도에 의해 경고를 받고있다. 후에 그들은 사도들에 의해 그 경고를 반복해서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소용없게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대중에게 공표된 우리 구주의 이 강화가 죄인들을 깨닫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6) 그 날에 믿지않는 유대인들과 구별되는 것, 그리고 그들을 떠나서 주어진 지시에 따라 정해진 곳으로 도피하는 것이 그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했다. 예루살렘에서부터의 그들의 이동은 반드시 신속해야 하며, 세상적인 어떤일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결코 지체되어서는 안되었다.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위에 있고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31절). 그 세상에 유의하다 믿지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멸망하는 것보다 그것을 뒤에 남겨두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롯과 그의 가족이 명령 받은대로 그들도 그와 같이 행할수 있어야할 것이다. "네 생명을 보존키위해 피하라. 이 패역한 세대에서 네 자신을 구원하라." 그들이 도피하게 될때 그들은 뒤로 돌이킬 생각을 하지말아야 한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32절).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라. 멸망의 처소를 버리는 것을 아쉬워하지 말라." 그들은 되돌아갈 유혹을 받지않도록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다. 아니, 마음속에 되돌아가는 것으로 인상지어지지 않도록, 혹은 마음이 뒤에 남아있다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그들의 생명을 구하는 다른 방법은 결코 없는 것이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33절). 자기 목숨을 과감히 내어놓고자 하는 자는 보존할 것이다. 이는 그가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모든 복된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피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은 매우 가까스로 피하게 될 것이다(34-36절). 하나님의 심판이 모든 쓸모없는 자들을 치실때 그는 자기 백성된 자들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보존하실 것이다. 즉 '두사람이 한자리에 누워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 주께서 그의 백성된 자들과 그렇지않은 자들을 아시는 것은 조만간에 반드시 나타나게될 것이다.

(8) 구별하고 분리하며 식별하는 일은 하나님의 왕국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주여, 어디오니이까(37절). 그들은 그 시기에 관해서 질문했었다. 그러나 그가 만족하게 그들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않자 그들은 그에게 또다른 질문을 시도하였다. '주여 어디오니이까'가 그것이었다. 그 답변은 속담식이었다. 주검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할수 있다.

①악한 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즉 죽은 송장이 있는 곳마다 새들은 그것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독수리가 그 먹이에게 행하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공격할 것이다.

②보존되어야할 경건한 자들이 있는 곳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즐거움 가운데서 복된 자들로 나타날 것이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마다 신자들은 마치 독수리가 본능적으로 먹이 주위에 모이듯이 그에게 모일 것이며 그를 대하게 될 것이다. '주검있는 곳에는' 즉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경건한 영혼들이 모이게 될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게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나타내신 곳에서 그는 그의 백성들을 만나실 것이며 그들에게 복주실 것이다.

 

# 해설

성도의 생활과 주의 재림 ( 17 )

본장은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1절부터 19절까지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것이고, 20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장차 주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본장은 천국 시민의 생활에 있어서 규범이 될만한 윤리관과 내세관에 관한 교훈입니다.

 

1. 올바른 믿음

1) 형제를 실족시키지 말라

예수님께서는 실족케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없을수는 없지만 있게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족이란 말은 장애물, 올가미, 미끼, 함정 등으로 유인하는 덫을 의미합니다. 실족케하는 자 즉 죄를 모르는 이에게 죄를 짓도록 유인하고 죄의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자를 실족케하는 것보다 연자 맷돌을 목에 메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낫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영혼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상황을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죄를 짓도록 유도한 그들에게 경책하시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a.행한대로 보응을 받음(사3:11)

b.말씀을 순종치 않으므로 실족함(벧전2:8)

2) 무제한으로 용서하라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의 범죄를 보고도 이를 묵과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에 대해 무관심하고 소외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범죄를 볼때는 경계하며 책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의 의무중 하나로 죄인을 권면하는 일에 속합니다. 또한 회개한 형제를 용서해주는 것도 성도들의 의무에 속합니다. 죄지은 자를 비판하고 정죄하기는 쉬우나 그 죄를 용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에 대한 무한정한 용서를 요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신 것을 기억하며 성도들은 용서의 생활을 실천해야 합니다.

a.범죄치 않도록(시39:1)

b.용서하면 천부께서도 우리의 과실을 용서하심(마6:14-15)

3) 믿음의 기적

사도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믿음을 더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뽕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을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을 비유할때 흔히 사용합니다. 겨자씨는 땅에 심으면 잠깐 피었다가 쓰러지는 잡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새들이 깃들일수 있는 큰 나무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만일 우리가 지극히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a.믿는 자에게는 능치못할 일이 없음(막9:23)

b.주를 믿는 자는 주께서 하시는 일을 저도 할수 있음(요14:12)

 

2. 천국의 참된 의미

1) 종의 자세

고대 사회의 종은 주인의 재산과 같은 신분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주인의 소유이므로 모든 것이 주인의 것이 되고 주인의 배려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주인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종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종과 같은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종에게 있어서 자기 주장은 있을수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명령이 그에게는 법이요, 이 법을 순종하지 않고 거역하면 벌을 받게 됩니다. 그가 주인에게 철저히 순종할때 주인은 그를 사랑하여 은혜를 베풀 것입니다.

a.주님은 만물의 통치자이심(롬11:35-36)

b.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음(딤전1:5)

2) 구원받은 문둥병자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위해 갈릴리와 사마리아 접경을 지날때 열명의 문둥병자를 만나셨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멀리서 소리를 높여 긍휼히 여겨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긍휼히 여겨달라는 그들의 외침속에서 그들이 예수께서 자신들을 고칠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고침을 호소하는 열명의 문둥병자들을 말씀으로 치료해 주셨습니다. 고침을 받은 열명의 문둥병자 중 사마리아인 한명만이 주께 나아와 감사드렸습니다.

a.증세가 눈같이 희게 됨(왕하5:27)

b.착한 행실로 영광을 돌림(마5:16)

3) 사람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안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눈으로 볼수 있는 세상의 나라가 아니며 영적인 나라이며, 또한 어떤 특정 지역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a.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님(요18:36)

b.의와 평강과 희락임(롬14:17)

 

3.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1) 인자의 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가장 경계해야할 태도는 그날이 언제 어디에 임하는가 하고 묻는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때와 기한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징조에 관해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미혹하는 거짓 그리스도의 출현에 대해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 것을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마치 번개의 번뜩임같이 밝게, 빠르게, 갑작스럽게 임하게 되는 것으로써 우주적이며 동시적인 것입니다.

a.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라고 자칭함(눅21:8)

b.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만 아심(마24:36)

2) 혼돈의 삶을 살아감

주께서는 재림의 주로 오심과 그 전에 고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신후 그때에 있을 세상의 심판을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날의 세상의 모습이 노아의 때와 롯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인 신앙과 불신앙적인 삶에 빠질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잊어버리고 종말을 염두에 두지않게 됩니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 모든 사람들은 진리를 밝히 알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두려워하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a.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함(마24:38-39)

b.마지막 날(요12:48)

3) 의인과 악인의 분리

이 세상은 재림의 때까지 인간 생활의 모든 분야가 계속되어지다가 심판을 맞이하게 됩니다. 구원받을 자는 그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마지막날에 들림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버림받는 자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왔기에 마지막날 멸망받게 됩니다. 그 나라에는 의인과 악인이 확연히 구분됩니다. 이러한 구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의 믿음과 그 믿음에 따른 열매를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구원 여부를 결정하십니다.

a.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눅13:24)

b.불의한 자는 형벌아래 있음(벧후2:9)

 

결론

우리는 본장을 통해 성도들이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어떠한 여건에 처하든지 다른 형제들을 실족시켜서는 안되겠습니다. 오늘날 교회안에도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남에게 거치는 자가 많은데, 우리는 철저히 각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 핵심

17:1-10

성도들이 이웃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용납하며 죄를 멀리해야 하고, 또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오직 그분만을 의뢰하는 믿음에 입각하여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

연자맷돌(17:2)

발동기가 없던 시절에 한꺼번에 많은 곡식을 찧기위해 마소의 힘을 이용해 돌리던 큰 맷돌로, 근동에서는 주로 나귀를 이용했다. 그러나 일반 가정에서 사용하던 맷돌은 사람이 한손으로 돌릴수 있을만큼 작았으므로, 사람의 목에 매단채 바다에 빠뜨릴수 있었다. 이런 처형법이 유대인 사회에서 실제로 시행된 역사적 증거는 없지만, 고대 시리아나 그리스에서는 중죄인에게 이런 형벌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 묵상

용서에 대한 교훈 ( 17:3, 4 )

형제의 잘못에 대하여 주님은 하루 일곱번이라도 죄를 짓고 다시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7은 완전수입니다. 그러므로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모두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마18:21). 이는 우리 역시 하나님께 용서받아야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표본 ( 17:5, 6 )

예수님께서 믿음의 표본으로 제시하신 것은 겨자씨 한알입니다. 겨자씨 한알은 극히 작아서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심겨져 자라면 커다란 나무가 됩니다. 작고 보잘것없다 할지라도 그 안에 생명이 있는 믿음이라면 이와같이 자라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고침받은 사마리아의 문둥병자 ( 17:11-19 )

이 사마리아인은 고침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자가 나음을 입었으나 예수님께 감사를 드린 사람은 한명의 사마리아인뿐이었고, 이로인해 그는 영혼까지도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도래 시기 ( 17:20, 21 )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는 볼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있다 저기있다고도 못하니 하나님나라는 너희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물리적인 처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말하는 것으로, 성도들가운데 주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주의 날이 도래했다는 소문에 대한 궁금증과 예수님이 그 질문에 답할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질문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천국은 눈에 보이게 도래하지 않으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림 전에 선행될 일 ( 17:22-25 )

예수님께서는 재림하시기 전에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분은 왕으로 오셔서 권세와 능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영광을 얻기전에 먼저 많은 고난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영광을 고난과 연결시켜 언급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고난은 지금은 모르지만 결국은 최고의 영광임을 알게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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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불의한 청지기 16:1-18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독교의 목적이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귀를 즐겁게하거나 하니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해이다. 복음안에서 이 양자를 밝히신 하나님의 계시의 의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할수 있는 어떤것을 필요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의무, 즉 자선을 베풀고 선행을 하는 일에 참여시키고 고무시키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의 청지기일 뿐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선하게 이용할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은 지혜있는 태도이다. 만일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고자 한다면 세상적인 사람들이 가장 순간적인 이익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투자하는 것처럼 우리의 미래와 영원한 복지를 도모하기위하여 경건과 자선의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히 우리의 재산을 사용할수 있어야 한다.

1. 청지기의 비유(1-8)

이 비유 자체에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거의 청지기로서 표현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단지 그것을 사용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 청지기의 불성실 : 본문에 나오는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 것으로 인하여 그의 주인에게 고소당하였다(1절). 우리는 모두 동일한 고소를 면할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셔서 이 세상에서 마땅히 해야할 진보를 우리는 하지 않았다. 이것때문에 우리 주님의 심판을 받지않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판단하는데 힘써야 한다.

(2) 청지기직의 박탈 : 그의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서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라고 말하였다(2절). 주인은 청지기에게 실망하게 되어 유감인 것을 말한다. 그 사실은 주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지기는 그것을 부인할수 없었고 해결책이 없었으므로, 책임을 지고 잠시후 물러나게 되었다(2절).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1)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얼마후에 청지기직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다. 죽음이 찾아와 우리를 청지기직에서 쫓아내고 다른 사람이 우리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2) 죽을때에 우리가 청지기직에서 박탈당하는 것은 틀림없으며, 또한 그것이 당연한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재산을 낭비하였기 때문이다.

3) 우리가 청지기직을 벗게될 그날에 우리 주님께 그것에 대해 보고드려야 한다.

(3) 그후 갖게된 지혜 : 그러자 그는 '내가 무엇을 할꼬'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3절). 그는 벌써부터 이점을 생각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는 늦게라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다. 그는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것인가?

1) 그는 노동으로 생계를 구한다는데 대해서는 자기에게 그럴만한 근면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그러나 땅을 파지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사실은 그의 게으름이다. 그가 할수 없다는 것은 할뜻이 없다는 말이다. 그가 땅을 팔 힘이 없다는 것은 육체적인 능력부족이 아니라 도덕적인 무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한번도 땅을 파본적이 없었기때문에 땅을 팔수 없었던 것이다.

2) 그가 구걸하여 생계를 구한다는데 대해서 그럴만한 겸손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말은 그가 앞에서 자신의 게으름을 보여준 것처럼 교만에서 나온 말이다. 이 청지기는 구걸에서 얻게될 수치보다 자기 주인을 속임으로 말미암은 수치가 더 큰 이유이었다.

3)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의 채무자들을 친구로 삼기로 결심한다.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4절). 내가 내 주인의 채무자들을 알고있고, 여러번 친하게 대해 왔었다. '이제 한번더 도움을 베풀어 그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반길수 있도록 하자. 내가 혼자서 살아나갈수 있을때까지 그들에게 숙소를 정하고 이집저집 옮겨다니며 신세질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기름 백말을 빚진 자를 불러다가 이렇게 말하였다.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6절). 이와같이 해서 그는 그 빚을 반으로 탕감하였다. "우리가 발각되거나 의심받지 않도록 빨리 앉아 고쳐써라." 그는 자기 주인에게 밀 백석을 빚진 다른 사람을 불러 그에게 십으로 고쳐쓰라고 했다(7절). 본문에서 우리의 세속적인 재산이 얼마나 불확실한가를 보라. 재물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가장 그러하다. 그들은 그 재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긴다. 그리하여 맡은 이들에게 주인인 자기도 속일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한 신뢰하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배반당하는가를 보라. 이 청지기는 부정거래한 것이 판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때문에 벌을 받지만 그 잘못을 고치는 일은 드물다.

(4) 청지기의 각성에 대한 주인의 칭찬 : 주인이 옳지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8절). 그의 주인, 즉 그 종의 주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이 자신을 위하여 기발한 생각과 계책을 세운 것을 마음에 들어했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다고 할때, 이 구절의 후반부는 우리 주님의 말씀이라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이 비유 전체가 주님이 의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청지기가 자기 주인을 속였기때문에 칭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여 지혜롭게 했기 때문에 칭찬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여기에서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하여서도 잘하였고, 채무자들과는 바른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가 채무자들에게 빡빡한 거래를 했었으므로 저들은 빚을 갚을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떠나는 마당에서 그는 이제 공정과 자비를 모두 행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행하였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 주인을 위해서만 일하였다. 그러나 이제 자기 주인의 신을 잃어버리자 채무자들의 호의를 얻기위하여 그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의 편안한 생존을 위해 행하는 이 청지기의 선견지명을 생각할때, 내세를 위해 우리는 지각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즉 빛의 아들들이 그들의 영혼과 영원에 대해 관심을 갖고있는 곳보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세상적인 이익에 관심을 가지는데 있어 더 지혜롭다는 것이다.

1) 이 세상의 일에 관한 세속적인 사람들의 지혜를 우리는 우리 영혼의 일을 할때 배울 필요가 있다. 가장 필요한 우선적인 일은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를 포착하여 이용한다는 원리이다. 이와같이 우리가 영적인 일에 지혜롭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2) 이 세상의 자녀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빛의 자녀들보다 뛰어나다. 그것은 이 세상의 자녀들이 참으로 지혜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시대에 있어서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청지기의 임기가 얼마남지 않았다는 예고를 들으면서도 장래를 위하여 예비하지 못한다면 예고를 듣고 준비할줄 아는 그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하다고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여기서 살 것처럼, 그리고 이후에는 다른 세계가 없는 것처럼 살고있다. 빛의 자녀로서 우리앞에 있는 다른 세계를 보지않을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준비하거나 최선의 결과를 이루기위해 노력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다른 세계에 최선의 애정을 쏟지도 아니한다. 그리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2. 비유의 적용과 결론(9-1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즉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절). 이 비유의 직접적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즉 이 말은 "이 세상에 비록 얼마밖에 가진 것이 없다할지라도 그 적은 것으로 어떻게 선하게 사용할 것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우리 주 예수께서 여기서 권면하시는 것은 '불의의 제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현재뿐만 아니라 이후에 자기 돈의 이익을 배당받을수 있도록 돈을 관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이후에 더나은 유익을 얻을 목적으로 소망을 갖고 그들의 자본을 투자하듯이 우리도 다른 세상에서 장차 그 유익을 얻을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우리의 돈을 이용하는 법을 그들에게서 배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경우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우리 주의 재산이지만, 우리 주의 채무자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그 재산을 사용한다면, 우리 주님께 손해를 끼치기는커녕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방편이자 주님께 대한 의무를 행한 것이 될 것이다.

1) 이 세상의 것들은 불의의 재물 또는 일시적인 재물이다. 부란 사라져가는 것이므로 그것에 기대를 거는 자들을 실망시킬 것이다.

2) 비록 이 불의의 재물이 행복을 위하여 맡겨진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행복을 추구해 나가는데 도움이 될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 무리가 그 재물에서 진정한 만족을 발견할수는 없다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으로 친구를 얻을수 있을 것이다.

3) 우리는 임종할때 모든 것을 잃게될 것이 틀림없다. 죽음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다. 상인이 파산에 이르게 될때 마지막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와같이 우리는 조만간 모든 것을 잃게될 것이 틀림없다. 즉 죽음은 상점을 폐쇄시키고 재산을 몰수해 버릴 것이다.

4) 우리가 쇠약하여 죽게될때 하늘에 있는 영원한 거처로 영접될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자기 사람들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하여 먼저 가셔서 그들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 디모데전서 6:17-19절을 보라.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있다.

(2) 그는 여러 말씀으로 이 권고를 더욱 강조하신다.

1)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선물을 옳게 사용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선물을 그에게서 기대할수 있겠는가? 그 섭리의 선물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불성실할 경우에 우리는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는데 필요한 은혜를 상실한 자로 정확히 평가될 것이다(10-14절). 이 세상의 부는 보다 적은 반면에, 은혜와 영광은 더욱 크다. 만일 우리가 적은 것에 불성실하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있어서도 불성실할 것이라고 당연히 두려워해야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받지못할 것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10절). 자기 돈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자는 더욱 고상하고 가치있는 지혜와 자비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선을 행할 것이나 이 세상의 부 한달란트를 묻어두는 사람은 영적인 부 다섯달란트를 절대로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의 부는 불의의 재물이다. 그것은 우리에게서 빨리 사라진다. 만일 우리가 그 재물을 이용하려한다면 서둘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그러하지 않는다면 유일한 참 재산인 영적인 부를 어떻게 위탁받기를 기대할수 있겠는가?(11절). 진실로 부유한 사람이란 믿음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부유한 사람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향해 부유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자. 만일 다른 부가 우리에게 추가되어 진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진정한 부를 더 확고히 잡을수 있을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더 큰 영적인 은혜를 받을 자격을 얻게될 것이다.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부를 주신다. 이 세상의 부는 다른 사람의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사람의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것들을 사용하여야 하며, 곧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그러나 영적인 영원한 부는 우리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유익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의 약속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고, 하늘나라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 부를수 있는 것들을 갖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이것들로 우리를 부요케하실 것을 어떻게 기대할수 있을 것인가?

2)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는 길은 우리에게 유용한 세상적인 우리의 모든 소유를 그를 섬기는 일에 드릴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 자신을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13절). 집 하인이 두주인을 섬길수 없나니. 만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여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고 경멸하지 않을수 없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와 연합하게 되면 그만큼 더 세상을 미워하고,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의 봉사하는 일과 그의 구원을 이루는 일에 이용할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앞에 분명해진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느니라. 그들의 관심이 나누어지므로 그들은 절대로 혼합하여 섬길수 없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의 이 말씀이 바리새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를 살펴보자.

1)바리새인들은 사악하게 그의 말을 비웃었다(14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부정할수 없었지만 비웃었다. 이것이 그들의 죄이며, 탐욕의 결과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주로 범하는 죄이었다. 종교의 위대한 스승들이나 헌신적으로 많은 실천을 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세상을 사랑한것 때문에 멸망하였다. 이 탐욕적인 바리새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욕망, 그들의 '들릴라', 즉 그들이 갖고싶어 하는 욕망을 참을수 없었다. 이것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으며, 코웃음쳤던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수 있는 극도의 경멸과 모멸의 표현이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이 세상의 견해와 방법에 반대가 되기때문에 비웃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않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그것을 경멸하는 것은 예사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죄인들의 반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롱까지도 참으셨다. 그는 보통 사람처럼 말하지 않았으므로 야유를 받고 조롱을 받으셨다. 이 사실로 충성스러운 주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설교가 부당하게 경멸당하는 것에 낙담할 필요는 없다. 비웃음을 사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있어선 수치가 아니라 비웃음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2)예수께서는 그들이 경건의 모양과 냄새로써 그들 자신을 속이기 때문에 그들을 단호히 꾸짖으셨다(15절).

①가장한 외모

첫째,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옳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이 책임져야할 어떤 잘못도 부인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고결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다. "너희는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것을 과제로 삼는 자들이며, 세상에 자신을 의로운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너희는 이런 일로 유명하다."

둘째, 그들은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는 자들이었다. 사람들이 그들을 특별 취급하여 죄를 정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선한 사람으로서만이 아니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추대하였다.

②추악한 내면 :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때의 모습이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앞에 스스로 옳다하는 것과 우리의 악한 것을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마지막날에 우리에게 충분히 증거가 되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무도 알수 없는 우리의 악한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아신다는 사실을 숙지할때 자기를 높이려는 마음을 억제하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속에 비천한 인격과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물을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세속적인 평가에 부응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사람들 사이에 귀히 여김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미워하시는 것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있는그대로 보신다. 사람들이 멸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오히려 옳다 인정하고 칭찬하시는 경우도 있다(고후 10:18).

3)예수께서는 이 욕심많고 자만에 가득찬 바리새인들보다 복음에 의해 훨씬더 감화받을수 있을 세리와 죄인들에게로 향하신다(16절).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구원이 유대인의 것이었을때의 유대 조직과는 달리 오직 개개인을 중히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실에 확신을 갖고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르치지 않도록 구원을 얻어 그 왕국에 들어갈수 있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부를 경멸한 것으로 인하여 그를 조롱하였다. 이는 그들의 생각에 율법과 선지자에게 있었던 부에 대한 많은 약속과 다른 현세적인 재물들에 대한 약속이 없었던 때문일까? "그것은 사실이다"라고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다. "과거 율법과 선지자의 때는 그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기 시작한 이제부터는 가난한 자, 슬퍼하는 자, 그리고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 복음이 전파된 이상 눈이 열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침노한다." 하늘나라로 가려는 자들은 고통을 받아야하며, 세상과 거스려 싸워야하며, 정반대의 길로 가는 무리들을 밀어내야만 한다.

4)그러나 예수께서는 율법을 무효로 만들려는 어떠한 기도에 대해서는 반대하신다(17절). 율법의 한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도덕적인 법은 확정되고 재가되어진 것이다. 이 율법이 명하는 의무는 여전히 지켜야할 본분이다. 그것이 금하는 죄는 여전히 죄로써 존재한다. 의식적인 법은 복음에서 완전하여지며, 그 그림자는 복음의 색깔로 칠해진다. 율법의 일획도 어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에서 인화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율법은 더 큰 부정을 막기위하여 묵인한 몇가지 사항들이 있었다. 복음은 그러한 허용을 남겨두지 않고 오히려 마태복음 5:32, 19:9절에서 이미 상고한바 있는 이혼의 사례에서처럼(18절), 율법을 거스리거나 경멸하지 않는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부패한 탐욕과 정열의 지독한 그 근원을 쳐서, 그것들을 죽이며 뽑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욕망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격렬해지고 완고해지기 때문에 그들이 탐욕에 빠질 정도로 허용했던 것처럼 해서는 안된다.

 

Ⅱ. 부자와 나사로 16:19-31

탕자의 비유가 우리앞에 복음의 은혜로 보여주려고 하였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장차올 진노를 나타내어 우리를 일깨우고자 의도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로 가난과 고난을 감내하게 하고, 세상과 호색에 빠질 유혹에 대항하여 우리를 무장시키고자하는 두가지 목적이 있다. 지금 이 비유는 이 두가지 큰 목적은 매우 잘 달성하고 있다. 이 비유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나 겨자씨 비유에서 처럼 영적인 일을 세상적인 사물에서 빌어와 그 유사성을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다른 비유들과는 같지않다. 그러나 본문의 영적인 일 그 자체는 현세와 내세에 있어서 선악의 다른 상태에 대한 서술이나 묘사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은 불행에서 벗어나 죽어서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 호화롭게 살면서도 가난한 자에게 냉혹과 부유한 향락주의자들은 죽어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언제나 진리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비유인가? 그러면 여기에 있는 비유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 구세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세를 알게하기 위해서 오셨는데, 그는 본문에서 그 일을 하고 계신다.

1. 서로 다른 두신분(19-21)

이 세상에는 악한 부자와 경건한 빈자라는 서로 다른 두신분이 있다. 옛날 유대인들은 번영하는 것은 선한 사람이라는 표시가운데 하나라고 여길정도 이었으므로, 가난한 자에게 어떤 호의를 베푸는 일은 거의 있을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본문에 충분히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모든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잘못을 시정해 주시고자 노력하신다.

(1) 악한 인간, 즉 행복의 절정에서 영원히 불행에 있을 사람(19절) : 한 부자가 있어. 라틴어에서는 흔히 어떤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자는 가난한 자의 이름이 주어진 것처럼 나타나있지 않다. 이제 이 부자에 대하여 살펴보자.

1)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는데, 그것이 그가 다닐때의 행장이었다. 그는 쾌락을 위하여 고운 베옷을 입었으며, 매일 세탁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한 밤에 입는 옷과 낮에 입는 옷이 있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자색 옷이 있었다. 그는 밖에 나갈때는 반드시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었다.

2)그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 그의 식탁에는 자연과 인력이 제공할수 있는 각종 진귀한 음식들로 가득 차려졌으며, 보조 식탁에는 요리 접시로 가득 쌓여있고, 비싼 정복을 입은 종들은 식탁에서 시중을 들었다. 그리고 식탁에는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그는 그것이 그 자리를 빛내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 모든 것에 무슨 악한 것이 있는가? 비록 어떤 사람이 재산이 넉넉하여 부유하고,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으며, 또한 풍성한 식탁을 먹게 된다고해도 아무런 죄가 아니다. 또한 그는 자기 재산을 사기, 압제, 또는 착취로 모았다는 말도 없다. 그리고 그가 술취했다거나 다른 사람을 술취하게 했다는 말도 없다.

①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하심으로 사람이 많은 부를 누릴수 있으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아래 영원히 놓여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시려고 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잘사는 형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물질을 주시는 것만큼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하나님이 물질을 주시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추리할수 없다.

②풍요와 쾌락은 매우 위험스럽다. 차라리 이 사람은 많은 재산과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행복하였을 것이다.

③육체의 방종, 그리고 육체의 안락과 쾌락은 많은 사람을 파멸시킨다. 좋은 고기를 먹고 좋은 의복을 입는 것이 좋은 것이긴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종종 교만과 사치의 재료와 연료가 되어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한다.

④우리 자신과 친구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면서 동시에 가난한 자의 슬픔과 고통을 잊어버린다면 하나님께 매우 진노를 살 것이며, 그 영혼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2) 여기에 불행과 고난 가운데서도 경건한 한사람이 있다(20절). 나사로라 이름한 한거지가. 이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있을수 있는 한에 있어서는 최악의 궁지에 몰려있었다.

1)그의 몸은 욥처럼 '헌데' 투성이었다. 몸이 병들고 쇠약한 것도 큰 고통이지만 헌데는 환자에게 훨씬더 큰 고통을 주며, 그의 주위 사람들에게 훨씬더 혐오감을 준다.

2) 그는 먹고 살기위해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스스로 나다닐수 없을 정도로 헌데 투성이요 절름발이였지만 몇몇 동정어린 손길과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 부자의 문간에 놓여졌다.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울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푼을 그들에게 빌려줄수 없는 자들은 수고로 그들을 도와야 한다. 돈 한푼을 그들에게 빌려줄수 없는 자들은 한손이라도 빌려주어야 한다. 고난중에 처한 나사로는 스스로 생계를 이어갈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①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에 기대를 걸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21절). 그는 마땅히 부자의 식탁에서 한 그릇의 음식이라도 대접받을수 있었으나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아니 부자의 개가 먹고 남긴 것들일지라도 고마워했던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설명한다.

첫째, 가난한 나사로의 곤경과 성품이 어떠한가를 보여준다. 그는 가난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하였다. 그는 안빈낙도하는 자였다. 그는 불평하고 울부짖으면서 부자의 문에 누워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그리고 온순하게 부스러기로 배불리려 하였다. 본문에서 진노의 자녀이며 지옥의 상속자 된 자는 집안에 앉아서 호화로이 지내고 있다. 반면에 사랑의 자녀이며 천국의 상속자 된 자는 문가에 누어서 굶주림때문에 죽어가고 있다.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그때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서 판단되어질수 있을까?

둘째,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우리는 부자가 나사로를 학대하였다는 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본문에서 그를 무시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본문은 그가 참으로 자비를 베풀어야할 대상이며, 매우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자체로 말해주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라도 나사로에게는 큰 친절이 될수 있었으나 그는 나사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두지않았고 거기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가난한 자를 압제하거나 유린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돕고 위로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님의 소유에 대하여 불충실한 청지기로 밝혀질 것이다. 가장 무서운 운명에 놓이게 되는 이유는 '내가 주릴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믿는다고 말하는 부자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궁핍과 불행에 어떻게 그렇게 무관심할수 있을까 놀라운 일이다.

②그가 개로부터 받은 대우 :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21절). 그 부자는 한떼의 사냥개, 아니면 다른 종류의 개들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개들은 충분히 배부르도록 먹을수 있었다. 그때 가난한 나사로는 연명할수 있을만큼도 먹을수 없었다. 그들의 개는 먹이고 가난한 자는 소홀히 한 사람들은 내세에 답변해야할 것이 많을 것이다. 그들의 개와 말을 배불리 먹이면서 가난한 이웃 가족들을 굶주리게 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인륜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들이 와서 불쌍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수 있다.

첫째, 그의 불행을 악화시킨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그의 헌데는 피투성이였다. 그것이 개로 하여금 그 헌데를 핥도록 유혹했다. 그 개들은 주인처럼 인간의 피덩이를 즐겨 먹으면서 호화롭게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둘째로 얼마는 그의 불행에 대해서 그를 위로해 준 것으로 이해할수 있다. 주인은 그에게 냉담하였지만 개들은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그것은 그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고통을 덜어주었다. 개들은 그 주인보다 훨씬 그에게 친절하였다.

2. 서로 다른 두상태(22-23)

죽음에 임해서와 그후의 생에 있어서 이 경건한 빈자와 악한 부자의 서로 다른 상태를 살펴보자.

(1) 그들은 모두 죽었다(22절). 그 거지가 죽어…부자도 죽어. 부자와 가난한 자,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에게 죽음은 공통의 운명이다. 거기서 그들은 함께 만난다. 성도들은 죽어서 그들의 슬픔이 끝나게 되고 기쁨에 들어갈 것이다. 죄인들은 죽어서 그들의 책임에 대해 답변하러 갈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관계된 것이다. 이는 그것이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2) 거지가 먼저 죽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는 여전히 번창하게 내버려두시면서 경건한 자를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가 종종 있다. 그는 다른 아무 피난처나 쉴곳을 찾을수 없었기때문에 무덤속에 숨은 것이다.

(3)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다. 가난한 자의 매장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없다. 사람들은 아무 곳에나 구덩이를 파고 그의 시신을 묻었다. 그러나 부자는 화려한 장례식을 가졌다. 부자가 지닌 관대한 인생 그리고 그가 베푼 좋은 식탁에 대하여 찬양하는 장례식사가 있었을 것인데, 그것은 연회에 참석했던 자들이 맡았을 것이다. 장례식은 그 사람의 행복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4)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천사에게 받들려 안식에 들어간 그의 영혼에게 주어진 영예는 얼마나 큰 것이며, 매우 거창하게 부자의 시신을 무덤으로 옮긴 영예보다 얼마나 월등한 것인가!

1) 그의 영혼은 육체와는 분리된 상태에 존재했다. 죽지는 않았으며 육체와 함께 잠들어 있다.

2) 그의 영혼은 다른 세계로 옮기웠다. 즉 그 영혼을 주신 하나님께 그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위로 올라간다.

3) 천사들이 그 영혼을 돌본다. 그것은 천사들에 의해서 옮겨졌다. 천사들은 구원의 후사들에게 봉사하는 영들인데, 그들이 살아있을 동안뿐 아니라 죽었을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영혼은 성화되지 못한 영혼처럼 이 땅에 얽매이거나 방해받지만 않는다면 그 자체에 탄성을 가지고 있어 육체를 멀리하자마자 그것에 의하여 위로 올라간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택하신 자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바라지않으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그들을 데리고올 특별한 사신을 보내시는 것이다. 성도들은 안전할뿐만 아니라 영광스럽게 집에 인도될 것이다. 부자의 장례식에 있었던 상여꾼들은 아마도 일류급 인사들이었겠지만 어떻게 나사로의 상여꾼과 비교될수 있을 것인가?

4)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아브라함은 신실한 자의 조상이다. 신실한 자의 영혼은 그에게로만 모이게 되어있다.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즉 그와 함께 잔치를 갖게 되었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앉는다. 아브라함은 위대하고 부자이었으나 하늘에서 그의 품에 가난한 나사로를 안기를 꺼리지 않았다. 부한 성도들과 가난한 성도들이 하늘에서는 다같이 만난다.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었다. 대식가인 부자는 그를 개의 무리와 함께 두기도 싫어하였던 것이다.

(5) 부자에 대해 들은 다음의 소식은 '저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었다'는 것이다(23절).

1)그의 처지가 매우 비참하다. 그는 지옥, 저 음부, 즉 분리된 영혼의 상태에 있다. 거기서 그는 불행의 극한에서 극도의 고통중에 있었다. 신실한 자의 영혼들이 육체의 짐에서 벗어나자마자 즉시 기쁨과 행복에 들어가는 것처럼 악하고 성화되지 못한 영혼들은 죽음에 의해 육체의 쾌락에서 끌려나오자마자 끝없고 무익한 치료 불가능한 고통과 불행에 머무르게 된다. 이 부자는 전적으로 감각 세계의 쾌락에 몰두하였으므로 영혼의 세계의 기쁨에 대하여는 전혀 적합치 않았다. 부자의 마음같은 속세적인 마음에 영혼 세계의 기쁨같은 것은 진실로 아무런 기쁨이 될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그것들을 대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2)그의 처지가 비참하게 된 것은 나사로가 행복한 것을 그가 알게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저가…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23절). 그는 그때 나사로가 어떻게 된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니, 그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①그는 멀리 아브라함을 보았다. 아브라함을 쳐다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멀리서 본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②그는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나사로를 보자 자신이 그에게 잔인하고 야만스럽게 행하였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행복에 젖어있는 그를 보자 자신의 불행이 훨씬 고통스러워졌다.

3. 부자와 아브라함의 대화(24-31)

(1)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그의 현재의 불행을 경감해달라는 요청(24절). 멀리있는 아브라함을 보자 부자는 그에게 울부짖었다. 큰 소리로 명령하던 그는 이제 큰 소리로 애걸한다. 술마시고 떠들며 흥얼거리던 노래가 탄식으로 완전히 바뀌어졌다. 여기서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1)그가 아브라함에게 붙인 칭호 :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지옥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를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육체적인 환락에 젖어있을때 이 부자는 오늘날 종교를 경멸하는 자들이 하듯이 아브라함과 그 이야기를 비웃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아브라함에게 존경의 칭호인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금은 악한 자들이 의인들을 업신여기지만 의인들에게 억지로 가까워지려 하고 그들과 혈연 관계가 있는양 주장할 날이 올 것이다.

2)그는 현재의 비참한 처지를 아브라함에게 표현한다. 내가 이 불꽃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24절). 그가 하소연하고 있는 것은 그의 영혼의 고통이다. 따라서 그것은 영혼에게 고통을 줄수 있는 그러한 불꽃인데, 죄를 범한 양심에 임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 즉 스스로를 고소하고 정죄하는 마음의 무서운 불꽃이다.

3)이러한 불행을 생각하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함 : 나를 긍휼히 여기사. 하나님의 자비를 업신여기던 자들이 그것을 간절히 구할 날이 이를 것이다. 나사로에게 아무런 동정도 베풀지않았던 그는 이제 나사로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나사로가 일찍이 자기보다는 훨씬 좋은 성품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간청한 특별한 은총은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는 것이었다.

①여기서 그는 특히 그의 혀의 고통을 하소연했다. 그 혀는 말하는 기관 중의 하나이며, 그 고통에 의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거스려 말했던 모든 악한 말, 즉 모든 완악하고 불결한 말들을 기억한다. 그가 말들에 의해 정죄받았으므로 혀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혀는 또한 맛보는 기관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그 고통은 그가 감각의 즐거움을 지나치게 추구했다는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②그는 자기 혀를 시원하게할 한방울의 물을 원한다. 그는 구할수 있는 하나의 작은 것으로써 한순간 그의 혀를 시원하게할 한방울의 물을 요청한다.

③그는 나사로가 그 물을 가져오기를 바란다. 부자는 나사로의 이름을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나사로를 알고있고, 나사로는 옛날에 알고 지내던 자를 위하여 이 선한 일을 자기에게 해주는데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경멸하던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서 기꺼이 친절을 얻고자 할 날이 이를 것이다.

(2) 이 요청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 그는 그 요구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부자가 얼마나 정확하게 보응을 받고 있는가를 보라. 빵 한조각을 거절하였던 그는 한방울의 물을 거절당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생각나게 한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그러나 만일 우리가 늦게 구한다면 받지못할 것이다.

1)아브라함은 부자로 하여금 생전에 나사로의 사정과 그의 사정이 어떠했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얘…기억하라. 이것은 날카로운 말이다. 그때 죄인들은 기억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기억하지 않고 기억하려고 하지않을 것이다. "아들아, 너의 창조주, 구세주를 기억하라. 너의 최후를 생각하라." 그러나 그들은 이 지난 일을 상기시키는 말에 귀를 막고 기억할수 있는 말도 잊어버리려 한다. "아들아, 너에게 주어진 많은 경고를 기억하라,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얻도록 좋은 기회를 주었으나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부자가 여기서 생각해야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너는 살았을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아브라함은 부자가 그것을 오용했다고 말하지않고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네게 얼마나 풍성한 은혜를 주셨는가를 기억하라. 따라서 너는 하나님께서 빚진 것이 있다고 할수 없다. 너는 그가 너에게 주신 것을 받았고, 그것이 전부였다. 너는 하나님의 축복을 묻어버리는 무덤이었고, 씨를 뿌려도 수확이 없는 밭이었다.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다. 그것은 네 눈으로 보아 네 몫으로 삼아 스스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것으로써, 네가 선택한 것들이었다. 너는 살았을때에 이 좋은 것을 받았고 내세에서 더좋은 날은 다 지나가 버렸으며, 그것은 지난 과거이다.

②나사로가 받은 고난 : 그가 생전에 받은 불행과 비참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너는 네 악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좋은 것을 많이 가졌고, 나사로는 그의 선에 비해 지나치게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는 그것들을 영혼의 병을 치료하기위해 주어진 약으로 받아 들였으며, 그 약은 결과가 나타났다. 악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만 좋은 것을 가지는 것처럼, 경건한 사람들도 이 세상에서만 나쁜 것을 가진다. 이제 아브라함은 그의 양심을 일깨워 그가 나사로에게 어떻게 대했었는가를 상기시킨다. 그때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았는데, 지금 나사로가 어떻게 자기를 도와주기를 바라겠는가?

2)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현재의 축복과 그의 비참함을 상기시킨다.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천국은 위로요, 지옥은 고통이다. 천국은 기쁨이고, 지옥은 통곡이요, 아픔이다. 이 세상에서 많고 큰 재앙을 거쳐가는 사람에게 천국은 진정한 천국이 될 것이다. 고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안에 잠들면 그들은 위로를 받고 그들의 모든 눈물은 씻기워질 것이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위로가 있다. 반면에 지옥은 세상의 열락과 쾌락을 즐기다가 가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지옥이 될 것이다.

3)아브라함은 부자에게, 나사로의 도움을 입어 어떤 구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있어(26절). 천국에서는 가장 친절한 성도라고 할지라도 한때 그들의 친구였던 사람을 위로하고 구원하기위해 죽어 저주받은 무리를 방문할수 없다. 여기서 너희에게로 건너가고자 하되 할수 없고. 지옥에서 가장 용감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지옥을 힘으로 벗어날수 없다.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연과 은총의 상태에 고정된 아무런 구렁이 없다. 우리는 전자에서 후자로 즉 죄에서 하나님에게로 나아갈수 있다. 그것은 시간에 제한을 받았지만 이제는 영원히 나아갈수 없게 되었다. 하나의 돌이 구렁의 문에 굴려졌는데, 그것은 다시는 굴려낼수 없는 돌인 것이다.

(3)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행한 더 큰 요청 : 아브라함에게 말할 기회를 얻자 그는 뒤에 남겨둔 자기 친척들을 위해 간청하려 한다.

1)그는 나사로를 자기 아버지 집에 보내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27절). 그는 다시 아브라함을 불러 요청한다. "당신이 이것만은 다시 거절하지 않을정도로 동정심이 많으신줄 확신합니다. 그를 나의 아버지 집에 돌려보내소서. 그는 거기에 여러번 드나들었기 때문에 그 집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사로를 알아볼 것이며, 그가 말하는 것을 존중할 것입니다. 나사로가 그들에게 증거하게 하소서. 내가 어떤 처지에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말하게 하소서. 그들이 내 전철을 밟지않고,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않도록 그들에게 경고하게 하소서"(28절). 그는 "내가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나를 그들에게 보내주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에 그가 나갈수만 있다면 형제들이 정신을 잃고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사로를 보내소서. 그의 설명은 약간 무서울 것이나 충분히 그들을 죄에서 놀라 돌이키게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지금 그들의 파멸을 막고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연적인 애정을 가지고있는 그들에 대한 배려였다.

2)아브라함은 이 간청도 거절한다. 지옥에서는 어떤 요청도 수락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것들을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에 맡겼다. 여기에 그들의 특권이 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절). 이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그들을 믿으면 이 고통의 장소에 빠지지않게 막는데 충분할 것이다.

3)그는 다시 한번 간절히 강청한다(30절).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즉 이 말은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들을 존중한다면 그럴수 있겠으나 죽은 자가 살아 그들에게 간다면 훨씬 분명한 확신을 가질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것은 새로운 일이요, 놀라운 일이기에 분명히 그들을 회개시킬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정하신 것보다 다른 방법을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4)아브라함은 그것을 계속하여 부정한다(31절).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아니하면 비록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부수고 타락하게 만드는 힘은 죽은 자로부터 들은 증거의 힘을 능가하는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므로,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 해설

재물 사용에 관한 교훈 ( 16 )

본장에는 재물 사용에 관한 세가지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자 꾀를 내어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비유와 위선적인 바리새인의 모습을 다루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욕심이 많은 어리석은 부자의 말로에 관한 비유가 언급되어 있습니다.

 

1.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 청지기 직분을 박탈 당함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주인에게 그 청지기에 관한 좋지못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허비하는 청지기를 주인은 불러 조만간 그의 청지기직을 박탈하겠다고 했습니다. 청지기는 가정 총무로서 주인의 명을 받들어 제반에 걸친 사무를 관할하는 자입니다. 성실해야할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것은 그가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든지 아니면 적어도 부주의한 사람임을 나타내줍니다. 그는 주인으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자 골똘히 생각하다가 묘안을 발견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 자신의 미래를 대비해서 빛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a.지혜가 있고 진실해야 함(눅12:42)

b.자기 행위의 열매를 먹음(잠1:30-31)

2) 재물을 잘 사용하라

옳지않은 청지기가 해고통보 이후에 지혜롭게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주인은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평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들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귄 결과 그 친구들은 빛의 아들들을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재물을 잘 사용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의 손길과 도움을 주면 그에게 많은 보상이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a.작은 일에 충성함을 의미함(마25:21)

b.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이 충성임(고전4:1-2)

3) 하나님만을 섬기라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자라야 참된 것도 맡을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불의한 재물은 이 세상의 재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는 그 사람의 성실성과 충성심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좋은 재물이 있어도 그것에 충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종이 두주인을 섬길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a.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잃게 됨(요일2:15)

b.하나님만을 섬기라(마4:10)

 

2. 바리새인들의 위선

1) 돈을 좋아함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바리새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겼으나 실상은 재물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사람보기에 옳은것 같았으나 그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위해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a.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함(마23:25)

b.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됨(딤전6:9-10)

2) 스스로 옳다고 여김

바리새인들은 사람앞에서 자기들의 행위를 내세우며 옳다고 인정받기를 원했습니다. 돈을 좋아하며 스스로 의롭게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자기 중심의 인본주의 신앙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했지만 그것은 위선이었으며, 결국은 형식적인 인간의 법에 매여 외식으로 굳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인으로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위해 사람앞에서 보이기 위한 행함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앞에서 높임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a.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함(시10:3)

b.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심(벧전5:5)

3) 율법과 복음

예수님은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인 구약시대가 세례 요한으로 마쳐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율법이 폐해졌다는 선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 곧이어 율법의 영원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율법의 한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고 하신 것은 세상이 없어지기 전에는 결코 구약의 말씀이 변치 않으리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완성에서 오는 사랑과 은혜와 용서의 결실입니다. 주께서는 율법의 영원한 효용성에 대한 실례로 결혼과 이혼을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a.하나님이 세우심(사33:22)

b.율법은 완전함(시19:7)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 대조적인 두사람의 삶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들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들이 하늘나라에서의 삶과 최후심판을 믿으면서도 신앙에 부합된 삶을 살지못하는 것을 경책하셨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지만 나사로는 병든 몸을 이끌고 부자의 대문에서 구걸하며 살았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구걸할뿐만 아니라 헌데를 앓으며 부자의 대문에 누워 있었습니다. 게다가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는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a.부자의 상은 풍성함(왕상4:27)

b.구걸하기 위하여 성전 문에 있음(행3:2)

2) 죽음 이후의 세계

이 땅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거지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부자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수 없는 공동 운명이었습니다. 나사로는 홀로 쓸쓸히 죽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땅 위에서와는 달리 죽음 이후에 지옥으로 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a.인간은 모두가 죽음(삼하14:14)

b.의인의 죽음에는 소망이 있음(잠14:32)

3) 때늦은 후회

음부에 내려간 부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낙원에 있는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주도록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음부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음부에서의 깨달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친 부자의 결국을 보면서 하나님의 권한아래 놓여있는 때와 기한에 대해 성도들은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또한 고난받다가 낙원에 간 거지 나사로를 통해 위로와 소망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a.음부는 악인이 가는 곳(시9:17)

b.하나님의 동산(계2:7)

 

결론

우리는 본장에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 이 세상에 사는동안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이 생명과 소유를 희생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6:1-18

예수님은 성도들이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선한 청지기의 삶을 살아야함을 교훈하셨다. 그러나 탐욕에 눈이 먼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비웃으며 배격했다.

사후 중간 상태(16:19-31)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사람이 죽으면 즉각적, 개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재림때 온인류를 대상으로 행해진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었을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가톨릭 교회에서 영세받은 신자는 천국으로, 불신자는 지옥으로 곧장 가며, 영세받았지만 온전치 못한 자는 연옥에서 정화된후 천국으로 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후심판 전의 사후 중간기 동안 성도의 영혼은 낙원으로 불신자의 영혼은 음부로 간다는 것이 성경적 견해이다.

 

# 묵상

불성실하지만 지혜로운 청지기 ( 16:1-8 )

불성실한 청지기는 미래를 대비했기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청지기는 실직한 후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현재의 기회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지혜롭다는 평가를 얻은 것이지 이로인해 부정직과 사기술을 인정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악한 세대에 속한 자로서 악한 지혜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할때 세상에서는 잘살지 모르나 하나님나라에는 이를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현재를 충실히 활용하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힘써야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소유물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입니다.

불의의 재물로 사귄 친구 ( 16:9-13 )

불의의 재물이란 하늘의 보화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불의한 청지기가 마음대로 사용한 세상의 재물을 의미합니다. 이는 불신자들이 세상에서 장차의 유익을 얻기위해 지혜롭게 투자하듯이 신자도 천국에서의 유익을 위해 재물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 없고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맡아 관리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비록 재물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것이지만 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관리를 맡은 청지기답게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정체 ( 16:14, 15 )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요, 사람앞에서 스스로 옳다하는 자들입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해도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를 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였고, 무엇보다도 재물욕이 강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나라와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예수님의 사역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 및 하나님나라와의 관계 ( 16:16 )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합니다. 즉,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전자는 수단이고 후자는 궁극적 목표가 됩니다.

부자와 나사로 ( 16:19-22 )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겪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겪는 일이, 그 사람이 겪는 일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을때 부자는 날마다 연락(宴樂)하였고 나사로는 극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저 세상에서는 두사람이 전혀 상반된 경우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부자의 두가지 요구 ( 16:24-31 )

처음에는 나사로를 통해 물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는 살았을때 좋은 것을 받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나사로가 위로받는 것이 마땅하다며 부자의 간구를 거절합니다. 또한 그는 나사로를 형제에게 보내어 경고하게 해달라고 했으나, 이 요구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는 심판의 불가피성과 불변성을 나타내줍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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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잃은 양과 열 드라크마의 비유 15:1-10

여기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볼수 있다.

1. 세리와 죄인들이 나아옴(1)

유대인의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눅 14:25) 했을때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승인을 받을 확신을 갖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망한 소망을 흔들 말씀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본문에 예수께 거절당하지나 않을까하는 낮고도 겸손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 넣어줄 필요성을 느끼셨다. 물론 세리들 중에는 약한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악한 자들로만 여겨졌다. 그것은 그들의 직무에 대한 유대민족의 편견 때문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창기'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마 21:32). 본문에서와 다른 곳에서는 죄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가까이 나아온 것은 어떤이들처럼 그리스도를 보고자하는 호기심 때문이거나 혹 다른이들처럼 치료를 간청하려는것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놀라운 강론을 듣고자해서 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갈때 그의 말씀을 듣고자하는 마음으로 나아갈수 있어야 한다. 즉, 그가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과 우리의 기도에 대한 그의 응답을 듣고자하는 마음으로 나아갈수 있어야 한다.

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분개함(2)

그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다(2절).

(1) 그들은 세리와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허용된 은혜의 도리를 소유하게 된것과 회개하면 용서받을수 있다는 소망에 용기를 얻은 것에 분노하였다.

(2)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부류의 사람과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과 함께먹는 것은 그의 인격의 존엄성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체면상 정죄할수 없었으므로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이것은 장로의 전통에 아주 명백히 어긋나는 것이었다)으로 그리스도를 비난했다.

3. 두가지 비유(3-10)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그들이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다면 하나님께 더욱 영광이 될것이며, 하늘에 기쁨이 더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심으로 자신의 결백을 나타내신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도 좋지만 세리와 죄인들이 그러한 삶을 살게된다면 하늘에서는 훨씬더 기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두가지 비유로써 이 사실을 설명하신다.

(1) 잃은 양의 비유 : 마태복음 18:12절에 비슷한 내용이 있는데, 거기에는 성도들을 보존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돌보심이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죄인들이 회개할때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기쁨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사악한 길로 나아가는 죄인의 경우는 잃은 양, 즉 길을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과 같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잃어버려지고, 무리에게서 잃어버려졌으며, 자신에게서 잃어버린바 되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못하고 끝없이 방황하며, 끊임없이 맹수의 위협을 받아 놀랐고 공포에 떨며,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 푸른 초장을 찾아 헤맨다. 그는 양떼로 되돌아오는 길을 스스로 찾을수 없다.

2)이 잃어버린 어린양, 즉 방황하는 불쌍한 죄인들에 대해서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극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비록 그는 일백마리의 양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한마리도 잃지 않으신다. 그는 잃어버린 한마리라도 쫓아가심으로 그 잃어버린 것을 찾고자 하시는 풍성한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는 그 잃어버린 것을 쫓아가 찾을때까지 사방을 두루찾아 헤맨다. 그들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마침내 뒤돌아올 생각을 품게될 때까지 타락한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는 납득시키는 일이 힘들고 참을수 없을 지라도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어깨에 매고' 큰 자비와 수고로 무리가운데로 이끄신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시려' 자기 아들을 보내신다(눅 19:10).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동정과 온유함을 나타내시려는 뜻으로 그의 팔로 양떼를 모아 그의 품에 그것들을 안고 가시는 것을 말씀하셨다. 본문에서 그는 '어깨에 메고' 그들을 옮긴다고 말씀하셨다. 그가 어깨에 메고온 자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3)죄인들이 돌아와 회개할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는 즐거워 어깨에 메고 오신다. 그것을 찾을 소망이 전혀 없었기때문에 그 기쁨은 더욱 크다. 그리고 그는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고 하신다. 비록 그것이 곁길로 나가 방황하던 양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나의…양'이라고 부르신 사실을 주목하라. 그는 그것을 스스로 찾으셨다.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6절). 그는 종을 보내지 않으시고 오직 자신의 아들, 즉 위대한 선한 목자를 보내셨다. 그는 자기가 찾는 자를 발견할 것이며, 그를 찾지않는 자들도 발견할수 있도록 그들에게 나타나실 것이다.

(2)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

1) 본문에서는 잃어버린 자가 여자로 되어있다. 그 여자는 은전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오직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렸다. 인간 세상의 죄악과 참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 중에 그 순전성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욕을 돌리지않는 것이 열에 아홉, 아니 바로 앞의 비유에 의하면 백에 아흔아홉이 있다.

2) 잃어버린 것은 단 은전 한 드라크마이다. 철이나 납처럼 천한 금속이 아니라 은이었다. 영혼은 그 고유의 가치와 중요성에 있어 은과 같다. 인간의 영혼은 곧 은전이다. 그 영혼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있다. 이 은을 흙속에 잃어버렸다고 하였는데, 세상에 던져진 영혼은 흙속에 섞여있는 은전과 같다고 할수 있다. 누구든지 그 은전이 그 먼지속에 있다는 것에 애석해할 것이다.

3) 그 은전을 찾는데에 많은 수고와 고통이 든다.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발견하기까지 부지런히 찾는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영혼을 자신의 집으로 이끌기위해 많은 방법과 수단을 사용하시는 것을 보여준다. 즉 그는 우리에게 이르는 자신의 길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르는 우리의 길을 비추기 위한 복음의 등불을 켜신다.

4) 본문의 큰 기쁨은 은전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9절). 그것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기뻐하기를 원한다. 은전을 찾은 놀라운 기쁨은 그녀를 당분간 일종의 황홀경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즉 "찾았노라, 찾았노라"라는 말은 기쁨을 보여주는 언어이다.

(3) 이 두비유의 설명은 동일한 목적을 갖고있다(7,10절).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 기쁨이 되며 하나님의 사자들앞에 기쁨이 됨이 회개할것 없는 많은 사람을 인함보다 더욱 크다.

1)땅위에서 죄인의 회개와 개심은 하늘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이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회개에 이를수 있다. 생명이 있는동안에는 소망이 있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라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실 것이다. 하늘에는 항상 기쁨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일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기뻐하신다. 그는 회개한 죄인들에게 선을 행하시기를 즐거워하신다. 그는 한민족의 회개뿐 아니라 한사람의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죄인의 회개까지 기뻐하신다. 선한 천사들도 그들에게 자비가 베풀어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인류의 구속은 천사들 앞에도 기쁨이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눅 2:14)하고 노래했었기 때문이다.

2)'회개할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여 얻은 기쁨이 더 크다. 즉, 찬양과 헌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생활을 하면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바리새인들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다른 유대인들로 인한 기쁨보다는 그때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복음을 들은 이방 죄인들과 세리들의 회개로 인한 기쁨이 더욱 크다.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잘못된 것을 보지못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긴 기도보다는 멸시받고 미움받는 죄인가운데 한사람의 통회하는 상한 심령을 더 기뻐하시며 칭찬하신다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항상 예절 바르고 온전하게 행동하여 비교적으로 회개할 필요가 없는 사람의 의례적인 회개로 인한 것보다는 큰 죄인 한사람의 회개로 인한 기쁨이 더 크다. 물론 곁길로 나가는 것이 좋다는 말은 아니지만,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전혀 곁길로 가지않은 사람들을 이끄는 것보다 큰 죄인들을 감소시키는 것에 더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기 전에 큰 죄인이었던 사람들이 후에 더욱 뛰어나게 열심히 선을 행하는 것을 많이 볼수 있다. 많이 용서받은 자들이 많이 사랑할 것이다. 우리들도 늘 즐기는 것을 지속함보다는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음으로, 그리고 병이 없이 건강할때 보다 병에서 나음을 입을때 더욱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그 자체에 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한 길과 죄악생활에서 급히 돌이켜 새생활을 하는 것은 더욱 놀라운 기쁨을 가져다 준다.

 

Ⅱ. 탕자의 비유 15:11-32

우리는 여기서 방탕한 아들에 대한 비유를 보게된다. 그것은 앞의 비유들과 동일한 내용을 담고있다. 그러나 이 비유의 상황은 앞의 비유보다 훨씬더 크고 풍성하게 복음의 은혜의 부요함을 설명하며, 따라서 이 비유는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은 불쌍한 죄인들에게 말할수 없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다.

1.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11,12)

이 비유는 하나님께서 전인류의 공통의 아버지가 되심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길러주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멸시한 이 세리들과 죄인들은 그들의 형제이며,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어떤 친절과 자비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을 이 비유를 통해 이 교만한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2. 서로 다른 특성의 두자녀(13-32)

이 비유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다른 성격의 소유자로 구분하고 있다. 두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었다. 두아들 중 하나는 견실하고 의젓한 청년인데, 과묵하고 검소하며 냉정한 사람이었으나 그를 대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상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람은 그가 받은 교육에 집착하며 쉽게 거기서 벗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다른 아들은 변덕스럽고 민첩하며, 구속을 참지못하고 방황하며 기꺼이 모험을 즐긴다. 그리고 한번 악한 손에 빠지게 되면 방탕아가 되기 쉽다. 여기서 후자는 세리와 죄인 그리고 이방인들을 나타내는 것이며, 전자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을 가리키나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말한다.

(1) 둘째 아들이 방탕한 아들로 나타나고 있다.

1)그는 탕아가 되자 난봉과 방황, 그리고 낭비와 불행속으로 빠지게 되었다.

①아버지에게 그가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12절).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아버지여…네게 주소서'라고 말했다. 그는 좀더 정중하게 부탁할수 있었을 것이며, "부디 나에게 주십시오." 또는 "만일 좋으시다면 저에게 주십시요"라고 말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만하게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라고 요구한다. 곧 그것은 당연히 내 몫으로써 내게 속한 것이므로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악한 것이며, 더악한 것으로의 출발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물을 빚으로써 여긴다. 이 둘째 아들은 곧 "현재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주소서 그러면 이후에는 돌아와서 절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죄인들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손에 그 분깃을 가지고 지금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이는 것들에만 관심을 갖고, 현재의 만족에만 탐닉하고 있지만 미래의 지복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싶어 했을까?

㉠그는 그의 아버지의 통치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소위 거짓된 자유를 좋아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의 어리석음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의 띠를 산산히 부셔버리고, 대신에 자기의 육욕의 줄로 자신을 묶어 매기까지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체자인 것으로 결코 생각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죄인들이 변절하는 시초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지배에 매이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스스로 신인 것처럼, 자신들이 즐기는것 이외에 다른 아무 선악을 알려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눈앞에서 피하고자 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과 그의 전능을 불신하려는 마음이 악한 자의 사악함 밑바닥에 깔려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경영을 불신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재물의 분깃을 갖고싶어 했다. 이는 그의 아버지께서 그가 현재 쓰는 비용에 제한을 두셨던 것을 그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자만하였고 충족감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만일 분깃을 받게되면 그의 아버지가 하신 것보다 더 잘 경영할수 있으며, 그것으로 더 두각을 나타낼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탐욕에 의해서보다는 교만으로 망하는 젊은이가 더 많다.

②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얼마나 친절했는가.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더니(12절). 아버지는 그 두아들 사이에 어떻게 분배해야할 것을 계산하여 둘째 아들에게 그 분깃을 주었고 맏아들의 분깃도 주었다.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가 자기의 분깃을 계속 관리하기를 바랬던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맏아들이 그로 말미암아 무엇을 얻었는지 보게된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절).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요구한 것을 그에게 주었다. 그는 자기가 기대했던대로, 아마 그이상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께서 그를 기꺼이 흡족케하시고 편안하게 해주시는 아버지의 애정을 볼수 있었다.

㉡이와같이 해서 그는 짧은 시간에 자신의 어리석음과 자신이 그렇게 지혜로운 관리인이 못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③자신의 손에 자기의 분깃을 받았을때 그는 스스로 어떻게 관리했는가. 그는 할수 있는한 그것을 소비하려고 힘썼다. 그리고 잠깐사이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그후 며칠이 못되어(13절). 둘째 아들이 결정한 것은 즉시 떠나는 것이었으며, 그 목적을 위하여 그는 재산을 다 모았다. 이 둘째 아들의 방황속에 있는 탕자의 상태는 타락한 인간의 죄악의 상태를 우리에게 나타내주고 있다.

㉠죄악의 상태는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멀리있는 상태이다. 하나님에게서의 변절이 죄이다.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 여행을 하였다. 죄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 도망을 한다. 그들은 할수 있는한 하나님에게서 피하려고 한다. 그들은 '먼나라'에서 자리를 잡는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리있다는 것, 그리고 점점더 그에게서 멀어져가고 있다는 것이 죄인들을 더 불행하게 하는 것이다. 지옥이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있는 곳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죄악의 상태는 낭비하는 상태이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13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렸고(30절). 잠시동안에 다 허비하였다(14절).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잠시동안에 그의 재산을 탕진하도록 부추기는 무리들과 어울렸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죄인들은 고의로 집안의 재산을 허비한다. 즉 그들은 자신의 지성과 영적인 모든 능력을 잘못 이용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맡겨진 재능을 묻어둘뿐만 아니라 횡령하여 다른 곳에 사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선한 일을 위하여 쓰도록한 하나님의 선물들을 그들의 욕망의 양식과 연료로 삼는다. 세상과 육신에 노예가 된 영혼은 그 재산을 '허비'하며 '허랑방탕'하게 살아간다.

㉢죄악의 상태는 궁핍한 상태이다. 다 없이한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4절). 낭비는 고의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방탕한 생활은 때가 이르면 잠간사이에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만든다. 특별히 이때 불황이 무절제한 생활의 파국을 재촉한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은혜를 내동댕이 친 죄인들의 비극을 나타낸 것이다. 그들은 감각적인 쾌락과 세상의 부를 위하여 은혜를 저버렸으며, 따라서 은혜가 없어 멸망에 이르게 된다. 죄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원한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위한 의복이 없으며, 내세를 위해 예비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죄악의 상태는 흉년이 든 땅과 같다. 죄인들은 지독하고 비참하게 가난하면서도 그것을 악화시키기를 자초한다.

㉣죄악의 상태는 수치스러운 노예의 상태이다. 이 젊은이의 방탕은 그를 가난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궁핍은 그를 노예로 만들었다. 저가 가서 그 나라 백성중 하나에게 붙여사니(15절). 전에는 방탕한 생활로 나타났던 동일한 사악한 생활이 여기에서는 노예의 생활로 나타났다. 이 젊은 신사가 종으로 고용되었을때 얼마나 자기 자신을 경멸하고 낙담하였겠는가! 주인은 그를 들로 보내어 양을 치게한 것이 아니라 돼지를 치게 하였다. 마귀의 종이 하는 일은 육신을 위해 준비하고 그 욕망을 채우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먹기를 탐하고 더러우며 시끄러운 돼지를 치는 것과 다를바 없다. 이성적이고 불멸의 영혼이 스스로 어떻게 이보다 더 수치를 당할수 있을까?

㉤죄악의 상태는 끊임없는 불만족의 상태이다. 저가 돼지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16절). 불행하게도 젊은 귀공자는 스스로 돼지의 동료가 되었다. 죄인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날때 스스로 만족을 기대한 것에서 그들은 확실히 실망할 것이다. 그들은 '배 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사 55:2). 쥐엄열매는 돼지의 양식은 되지만 사람의 양식은 못된다. 세상의 부귀와 감각적인 즐거움은 육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귀중한 영혼에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그것들은 영혼의 본성에 맞지도 않으며, 영혼의 바램을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그 필요를 공급해 주지도 못한다.

㉥죄악의 상태는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서 위안을 기대할수 없는 상태이다. 이 탕자가 수고하여 빵을 얻지못하자 구걸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은 어느 피조물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수 없다. 우리는 세상과 육체에 헛되이 호소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영혼에 해를 줄 것은 갖고 있으나 영혼의 양식이 되고 영혼을 기름지게 할것은 아무것도 가지고있지 않다.

㉦죄악의 상태는 죽음의 상태이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23,32절). 죄인은 사형 선고아래 있는 것처럼 율법에서 죽은 자일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영적 생명이 결여되어 죽은 자이다. 즉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있지 않으므로 죽은 것이다. 먼나라에 있는 탕자는 그의 아버지와 가족을 향해서 죽었고,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죄악의 상태는 잃은 상태이다. 이 내 아들은 잃었다가(24절). 그것은 좋은 모든 것이 있는 그의 아버지 집에서 잃어버린바 된 것을 말한다.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영혼은 제 길을 벗어난 여행자처럼 잃어진 자이다. 만일 무한한 자비가 보호하여 주지않는다면 돌이키지 못한채 곧 멸망될 것이다.

㉨죄악의 상태는 광기와 착란의 상태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17절). 이 말에서 위의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이 표현은 그가 정신이 나갔었다는 것을 나타내준다. 확실히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날때 그러하였으며, 그가 먼나라의 백성중 한사람에게 붙여 살때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미친 사람처럼 죄인들은 어리석은 욕망때문에 자신을 망친다. 그러나 동시에 어리석은 희망으로 자신을 속인다.

2)우리는 이제 그가 이 방탕으로부터 되돌아오는 것을 보게된다.

①그가 되돌아오고 회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고난이었다. 그가 궁핍하게 되었을때, 그는 정신이 들었다. 고난이란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거룩하게 될때, 사람들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좋은 수단으로 판명된다. 피조물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고, 우리의 가련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일체의 모든 방법은 헛될 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때,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생각하게 된다. 위로자가 쓸데 없고, 의사가 소용없는 것을 알게될때, 그리고 그리스도외에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우리에게 주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칠 것이다.

②그것을 위한 준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가 올바로 정신을 차렸을때 그는 혼잣말로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하고 중얼거렸다. 회심하는데 대한 첫단계는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생각하였다. 나는…주려 죽는구나(18절). 단지 배고프다는 말일뿐만 아니라 주려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죄의 길에서 스스로 죽게된 것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리가 이와같이 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왔다 할지라도 그는 스스로 불쾌하게 생각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가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던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실 것이다.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나 훨씬더 좋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그는 좋은 집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버지 집에는 모든 가족을 위한 양식이 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충분하며, 각 개인을 위하여서도 충분하다. 그리고 자선을 베풀기에도 충분하며 저장해 둘 정도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는 고용된 종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사람이 기뻐해하며 감사해하는 것으로 좋은 대접을 받는다. 이 생각이 하나님에게서 곁길로 나갔던 죄인들을 다시 되돌아오도록 용기를 북돋아줄 것임에 틀림없다.

③돌아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의 생각은 드디어 이 결론에 도달하였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18절). 선한 목적도 선한 일이지만 역시 선한 실행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는 해야할 일을 결정했다. 즉 일어나 아버지께 갈것을 결정했다. 그가 비록 먼나라에 있고, 그의 아버지 집에서 멀리 떨어져있다고 할지라도, 그는 되돌아가려 한다. 하나님에게서 뒷걸음질쳐 나온 모든 발걸음을 다시 되돌려 그에게로 나아가야 한다. 그의 말속에 나타나고 있는 결심을 주의해 보라.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즉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아버지께 갈 것을 결심했다." 그는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진정한 회개는 일어나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준비할 말은 무엇일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말씀 드릴때에 그분 앞에서 우리의 이유를 설명할수 있도록 우리가 말할바를 미리 스스로 심사숙고 하는 것이 좋다.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자.

첫째, 그는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고백하려 했다. 죄를 얻었사오니. 우리는 모두 죄를 범하였으므로 마땅히 죄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것은 당연하다. 죄의 고백은 평화와 용서의 필요 조건으로써 요구되고 주장된다. 만일 우리가 죄없다고 주장한다면 스스로 심판대에 서게될 것이다. 그러나 죄를 깊이 뉘우치고 참회하며 순종하는 마음으로 "죄를 얻었사오니"하고 자백한다면 죄를 자백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주시는 은혜의 약속을 받게된다.

둘째, 그는 그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않고 스스로 그 죄값을 받으려 했다. 즉 "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세상의 부모들께 불효한 자들은 이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하늘과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다. 부모님께 죄를 범한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이다. 죄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를 경멸하는데서 범해진다. 이것이 하늘에 죄를 범한 것이다. 죄가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 그것이 하늘에 대한 죄이다. 그러나 하늘에 해를 끼칠수 없기때문에 그 죄는 무력한 악의에 불과하다. 아니, 그것은 어리석은 악의이다. 왜냐하면 하늘에 침을 뱉으면 뱉은 자의 머리위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죄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경멸한 죄이다. 즉 "나는 하늘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 앞에서 죄를 범하였습니다."

셋째, 그는 스스로 가족의 모든 특권을 인정하려 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19절). 그는 관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그것이 그가 믿고있는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께서 관계를 부인해도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요구대로 자기에게 속한 재산의 몫을 받았으므로 더이상 기대할 몫이 없었다.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가치가 없는 자인 것을 인정할수 있어야 한다.

넷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비록 가족 중에서 가장 미천한 자리라고 할지라도 가족으로 승인해 주기를 간청하려 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절). 곧 "그것만으로 충분하며, 나에게 과분합니다"라는 말이다. 비록 종들과 함께 앉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거나 부과될지라도, 그는 그것에 복종할뿐만 아니라 현재의 상태와 비교하여 그것을 특혜로 생각할 것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그리하여 내가 이제까지 경홀히 여겼던만큼 내 아버지의 집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할수 있도록 해주소서."

다섯째, 위의 모든 것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로서 바라보려 하고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18절).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그것도 우리 아버지로서 본다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여 그분께 되돌아가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우리의 슬픔을 진실되게 하며,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우리의 결의를 더욱 강하게할 것이며, 우리가 용서받으리라는 소망에 용기를 줄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자와 간청하는 자들에 의해서 아버지라 불리우기를 기뻐하신다.

④그는 이 결의를 어떻게 실행했는가?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20절). 그는 그의 선한 결의를 지체없이 실행하였다. 그는 쇠뿔을 단김에 빼듯이 지체하지 않았다. 일어나서 갈 것이라고 말했었다면 즉시 일어나서 가라. 그는 절반도채 가지 못해서 피곤하여 더이상 갈수 없다고 하지않고 약하고 지쳤지만 그 어려운 일을 온전히 해내었다.

3)그는 아버지에게서 환영받고 영접받는다.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20절). 그러면 그는 환영받았는가? 그렇다. 진심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이 사실은 어리석고 불순종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좋은 교훈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만일 자녀들이 뉘우친다면 그들에 대해 무정하고 엄하게 할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지혜, 즉 온유함으로 대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비유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는 불쌍한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실 것이며, 용서하실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데 있다. 이제 다음 내용을 살펴보자.

①아버지는 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아들을 영접한다. 아직도 상거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20절). 아들이 회개를 보여주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자비를 보여주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르기도 전에 응답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마음에 원하는바를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것이 얼마나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는가를 보자.

㉠자비의 눈을 볼수가 있다. 그 눈은 재빨리 보았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았다. 마치 어떤 높은 망대의 꼭대기에서 자기 아들이 나간 길을 지켜보면서, "나의 불쌍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저기서 볼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것 같다. 이것은 죄인의 회개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과 자기에게 나아오는 죄인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분은 그에게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과 첫번째 움직임까지도 알고 계신다.

㉡자비의 마음을 볼수가 있다. 그는 자기 아들을 볼때에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다(20절). 비참한 모습은 죄인의 경우라 할지라도 동정의 대상이 된다. 비록 죄인이 마땅히 받을 것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동정하신다.

㉢자비의 발을 볼수가 있다. 이 발은 빨리 달려갔다. 달려가(20절). 탕자는 수치와 두려움의 짐에 눌려 천천히 왔지만 사랑하는 아버지는 그를 격려하는 마음으로 달려갔다.

㉣자비의 팔을 볼수가 있다. 그는 팔을 뻗어 아들을 포옹하였다. 목을 안고(20절). 정죄받고 처형을 받아 마땅하지만, 금방 돼지를 치다가 온 더럽고 추한 자식이지만 그는 그를 팔로 안아 가슴에 품었다. 이와같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께 환영을 받는다.

㉤자비의 입술을 볼수가 있다. 입을 맞추니(20절). 이 입맞춤은 아버지가 그를 환영한다는 것을 확신시켜줄뿐만 아니라 용서를 확증해 주는 것이다. 이전의 그의 어리석음을 모두 용서하고 꾸짖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않을 것이라는 표시였다.

②불쌍한 탕자는 아버지께 겸손한 참회를 하였다.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21절). 탕자가 회개를 보여주기 전에 아버지가 보여주신 자비가 훌륭한 것처럼 아버지가 그에게 많은 자비를 보여준 후에 나타난 탕자의 회개도 칭찬할만한 것이다. 탕자는 아버지가 용서를 확증해주는 입맞춤을 하자 '아버지여 내가 죄를 얻었나이다'라고 말하였다. 죄를 용서받은 자들도 마음속에 자기 죄에 대한 진지한 통회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려는 것을 보면볼수록 우리는 자신을 용서하는 일을 더욱 어려워하여야 한다.

③이 친절한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위하여 놀라운 준비를 하였다. 탕자가 말하려고 마음먹은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절)라는 말이 21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탕자가 그 말을 잊어버렸다고 생각할수는 없다.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아버지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다음과 같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아들아 그만해라. 너를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리고 비록 네가 아들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하더라도 나의 사랑하는 아들로 삼겠다."이와같이 처음부터 환대받은 탕자는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요청할 필요가 없었다. 이상한 점은 여기서 꾸짖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네가 징계를 받지않았다면 너는 결코 집에 돌아올 생각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는 이같은 말이 전혀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참으로 회개하는 죄인들을 용서하실때,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시고, 더이상 기억지 않으신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여기에는 그가 기대했고 기대할수 있었던것 이상으로 풍성하고 훌륭한 음식이 그를 위하여 준비되어 있었다. 만일 그의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고 부엌으로 가게 해서 종들과 식사를 하게했다 할지라도 그는 그것을 만족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비에 의지하는 자들을 위하여 그들이 구하고 생각할수 있는것 이상으로 풍성하게 주신다. 탕자는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용납될지도 모른다고 하는 소망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두려워했던 것보다는 그에게 훨씬더 잘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그가 바랐던 것보다도 훨씬 잘해 주었다.

㉠그는 누더기를 입고 집에 왔는데, 아버지는 그에게 옷을 입혀 주었을뿐만 아니라 단장까지 해주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22절). 아버지는 집에 있는 가장 낡은 옷을 줄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겉옷을 말하지않고 가장 좋은 옷인 예복을 가져오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어느 것인지 너희는 알지. 그 예복, 가장 훌륭한 예복 말이다. 그 옷을 이리로 가져와서 그에게 입혀라. 그는 더럽고 땀으로 절은 옷을 입고 온 자기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 옷 입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나 그 옷을 입혀라. 그리고나서 가족의 식구로 인정한다는 표시로 가문의 권력의 상징인 반지를 그 손에 끼우라". 그는 맨발로 집에 왔으며, 아마 그의 발이 여행으로 부르텄을 것이다. 그러므로 '발에 신을 신기라'고 말한다. 이와같이 참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

첫째, 그들이 입은 옷은 그리스도의 의인데, 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어야 한다. 새로운 성품은 바로 이 가장 좋은 옷인데 이 옷은 참 회개자만이 입을수 있다.

둘째, '손에 가락지를 끼운 것'은 성령의 인침을 받은 것이다. 즉 손에 가락지를 끼운 것은 그가 아버지의 사랑을 항상 기억하여 그것을 잊지않도록 한 것이다.

셋째, 우리의 '발에 신을 신기운 것'은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것이다(엡 6:15). 이것은 죄인들의 신앙생활에 들어서서 얻는 기쁨과 확신을 암시한다. 마치 맨발로 행할때보다 신을 신고 행할때 더 즐겁고 안전한 것과 같다.

㉡그가 굶주려 집에 왔을때, 아버지는 그에게 먹였을뿐만 아니라 그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23절). 그리하여 내 아들을 우리가 가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라. 조금전만 해도 할수만 있으면 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했던 탕자에게 이것은 얼마나 큰 변화인가! 피조물에게서 헛되이 만족을 찾으려 애쓰던 자들에게 새언약이 공급하는 것은 얼마나 달콤할 것인가! 이제 그는 "내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하고도 남는다"고 했던 자기의 말이 입증된 것을 깨달았다.

④그가 돌아옴으로 큰 기쁨과 즐거움이 생겼다. 살진 송아지를 가져온 것은 아들을 위한 잔치일뿐만 아니라 가족을 위한 축제로 계획되어진 것이었다. "이날은 복된 날이므로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는 이 내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 때문이다." 한 영혼이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와 회개한 것은 그 영혼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며, 잃은 것으로 여긴 그 어떤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크고 놀랍고 행복한 변화이다. 그것은 봄이 돌아올때 지면 위에 일어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변화이다. 죄인의 회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큰 기쁨이며, 그 가족에 속한 모든 사람도 함께 기뻐해야할 일이다. 하늘에서 하면 땅에서도 해야한다. 기쁨을 시작하신 분은 아버지였다. 또한 남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신 분은 아버지였다. 또한 남은 모든 사람이 즐거워하도록 부추긴 자도 아버지시다. 그 가족들은 주인의 권위에 순응하여 즐거워하였다. 하나님의 자녀와 종들은 그가 기뻐하는 일에 함께 기뻐해야 한다.

4)여기에 맏아들의 불평과 시기가 나타났다.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식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로 사건을 악화시키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의 특권이 여전히 그들에게 있음을 인정하려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저들의 잘못때문에 그들을 꾸짖었을때 오히려 부드럽게 그들에게 권유하였으며, 불쌍한 세리들에 대해 그들이 좋은 감정을 갖도록 진정시켰다. 그러나 본문의 맏아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이 정말로 선하고, 절대 그릇된 길로 가지 아니했으며, 비교적 회개할 필요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이해할수 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있으니'라고 한 말은 아무 어려움없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적용될수 있다.

(2) 이제 맏아들에 관해 살펴보자.

1)그는 자기 동생을 맞아들이는 일에 얼마나 바보스럽게 화를 내고 불쾌해 했는가! 동생이 집에 왔을때 그는 멀리 들에 나가있었고 그가 집에 돌아왔을때는 환희의 잔치가 시작되었던것 같다. 그는 '집에 가까웠을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25절), '이 무슨 일인가'(26절) 물었다. 이어 그는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환영하는 잔치를 베풀었으며, 그가 건강한 몸으로 돌아옴을 인하여 매우 기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27절). 아버지는 아들을 몸에 있어서 온전할뿐만 아니라 회개한 자, 즉 자기의 못된 성품을 고치고 바른 정신으로 돌아온 자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지않다면 그는 무사히 영접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맏아들을 극도로 성나게 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28절). 왜냐하면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동생을 못들어오게 해야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흔히 범하고 있는 실수라는 것을 보여준다.

①사람들이 가족사이에서 이런 경우가 나타난다. 항상 자신의 부모들께 위안이 되어온 사람들은 부모의 총애를 독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범죄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매섭게 대하는 경향이 있다.

②하나님의 가족에서도 이런 경우가 나타난다. 흔히 비교적 흠없는 사람들이 명백히 회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데 인색하다. 우리는 본문에서 맏아들로부터 그러한 말을 볼수 있다(29,30절).

첫째, 그는 자신과 덕과 순종을 자랑했다.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절). 자기 이웃보다 더나은 사람들은 더나은 사실을 자랑하는 일이 매우 흔했다. 이 맏아들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다"고 말한 것은 사실을 과장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의 권유에 그렇게 완강하지 말았어야 옳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기고, 큰 죄에 빠지지 않았던 사람들은 겸손히 큰 감사를 드리되 교만하게 어떤 자랑도 하지말아야 한다.

둘째, 그는 자기 아버지에 대해 불평했다.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 그는 지금 기분이 상하였다. 그렇지않으면 그는 이러한 불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할 여지도없이, 만일 그가 언제라도 그러한 것을 요청했다면 첫마디에 그것을 받았을 것이다. 살진 송아지를 잡은 사실이 그가 이같이 역정을 내게된 이유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평상시 올바른 정신을 갖고 있을때라면 하지않을 생각을, 화가나 있을때는 하기 쉽다. 그는 여러번 아버지와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졌었지만,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에 비교할때 하찮은 사랑의 표시에 불과한 염소새끼같은 것도 그에게 준적이 없었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자기 주인을 나쁘게 생각하고 그의 은혜를 대단치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생각하신 은혜에 비해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맏아들은 밖에서 자기 친구들과 즐기기 위해 염소새끼 한마리를 갖기 원했던것 같다. 그런데 살진 송아지가 밖에 있는 친구들이 아니라 집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즐기기 위해 자기 동생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은 그들의 아버지와 그 가족들과 함께하는 것이지 어떤 다른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다.

셋째, 그는 자기 동생에 대해 매우 기분이 상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비록 회개하고 개심한 사실에 대해 매우 선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들처럼 깨끗한 평판을 가지고 있지않으면 멸시하는 잘못을 범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정신이다. 이제 그러한 실례를 살펴보자.

㉠그는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과 한집에 있으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 집이 자기 아버지의 집이 아니라 자기 집인 것처럼 말이다. 비록 우리가 죄인들과 관계를 가짐으로 물들 위험이 있기때문에 그들을 피해야한다고 할지라도 회개한 죄인의 무리를 피해서는 안된다. 그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선한 것을 얻을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동생을 받아들인 것을 보고나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만일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와의 사귐 가운데로 참여케 하신 자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들을 아주 높이 평가하는 것이 된다.

㉡그는 아우를 동생이라고 부르지 않고, 자기 아버지에게 퉁명스럽고 경솔하기 짝이 없는 말로 '이 아들'이라고 하였다. 우리와 관계있는 자들에게 우리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자격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형제"라고 부르고, 순결한 자도 회개한 자에게 그렇게 불러야 한다.

㉢그는 자기 동생의 잘못을 더 무겁게하여, 가장 악한 자로 몰아부쳤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30절). 그는 아주 바보스럽게 자신의 몫을 낭비해 버렸다(창기와 함께 써버렸는지 아닌지는 앞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단지 맏아들의 질투와 악의에 찬 말일 것이다). 그러나 동생이 아버지의 전재산을 먹어버렸다는 말은 거짓이다. 아버지는 여전히 큰 소유지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우리가 모든 것을 가장 나쁘게 말하려고 하고, 완전히 먹칠하려는 경향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바가 아니며,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바라시는바가 아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에게 보여준 친절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 회개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시기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 현재 가장 악한 죄인에게 일반 섭리의 은총이 있다고하여 시기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과거에 가장 죄인이었던 자들에게 회개를 통하여 주시는 언약의 사랑의 선물을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어떤 특별한 은총을 시기해서는 안된다. 회심하기 전에 바울은 탕자이었으나, 회심한 후에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더 큰 은혜를 받았었다. 맏아들이라고 할수 있는 이 사도들은 그가 받은 환상이나 계시들을 시기하지 않고, 훨씬 크게 쓰임받는 것을 투기하지도 않고 다만 바울안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것은 이 맏아들과 반대되는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2)맏아들이 이와같이 질투함으로 불쾌해 있을때, 그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아버지는 얼마나 호의를 갖고 친절하였는가를 이제 살펴보자. 그리스도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는 앞서 방랑한 죄인이 회개하였을때 용서하여 준 것처럼 질투하는 성도들을 용서하시는 그의 자비하심과 온유하심 속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많은 결점들을 갖고 있었으며, 다른 사람들처럼 흥분하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참으셨다.

①맏아들이 들어오려 하지않자, 그의 아버지는 나가서 그가 들어오기를 원하여 좋은 말과 부드러운 말로 그에게 간청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즉 "그가 들어오지 않으려하면 밖에 그대로 두어라. 이것은 내 집이 아니냐? 따라서 내가 기뻐하는 일은 내 것이 아니냐? 살진 송아지는 내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내 집에서 내가 원하는 일을 할수 없다는 말이냐?"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않았다. 아버지는 동생을 마중 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맏아들을 마중 나가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괴팍스럽게 고집세우고 비위를 거스리는 사람들에 대해 그는 얼마나 놀라울만큼 부드럽고 매력적이셨는가. 보다 열등한 자들이 실수하고 감정적으로 그들 스스로를 정당화할때도 보다 성숙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에 대해 온유하고 너그러이 대할 것을 가르쳐준다. 이러한 경우에 처하여 있을때라도 아버지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더 분노하도록 노엽게 하지말며, 주인들은 공갈을 그치라. 그리고 모두에게 온유함을 보여주라.

②아버지가 동생에게 베푼 친절한 환대는 형에 대한 어떤 비방이거나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님을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확신시켰다(31절).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있지 않니, 네 동생을 맞아들인 것은 너를 거절한 것이 아니며, 또한 네게 돌아갈 몫이 현저히 감소되는 것도 아니다. 파기할수 없는 권리에 의해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즉 아버지가 맏아들이 그리 친구들과 함께 즐기도록 염소새끼 한마리 주지않았었다 할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아버지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을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친구들과 즐기는 것보다 하늘에서 우리 아버지와 복락을 누리는 것이 더욱 나은 것이다.

첫째,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있게될 것이라는 것은 그들의 말할수 없는 행복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니'(롬 8:17).

둘째,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해서 시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다고해서 우리의 몫이 절대로 적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참신자라면,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신자의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람들이 참신자가 된다면 하나님은 그 모든 사람들의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또한 그들의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몫이 적어지지는 않는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태양의 빛과 온기를 최대한 누린다고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③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기뻐해야할 이유를 설명하신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2절). 그는 "가족이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이 내 뜻이다"라고 말함으로 자기의 권위를 내세울수도 있었다. 그러나 매사에 권위를 주장하고, 그것에 호소하는 것은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좋지않다. 그것은 다만 권위를 값싸고 천하게 만들 뿐이다. 아버지가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주는 것이 더좋다. 즉 충성된 자식이 떠나지않고 항상 함께 있었던 것 이상으로 탕자가 돌아온 것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가 가족에게 더 큰 축복이기는 하지만 후자는 더욱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어느 가정이라도 여러아이들이 잘자라고 건강할때보다 죽은 한아이가 다시 살아났을때 훨씬더 기뻐할 것이다. 우리는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씀에 어떤 응답을 보였는지 알수 없다. 그것은 탕자인 동생에게 친밀하게 화해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이 네 동생'이라고 하여 그가 바로 그의 동생됨을 상기시켜 준다. 선한 사람은 비록 그가 잘 참도록 항상 자신을 통제하지는 못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냉정을 되찾을수 있을 것이다.

 

# 해설

회개를 기뻐하심 ( 15 )

본장에는 잃었던 양의 비유(3-7절), 잃었던 드라크마의 비유(8-10절),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세비유는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잃어버린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의 사랑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1. 잃은 양의 비유

1) 세리와 죄인들이 주께 나아옴

예수님께서는 경제적으로 부하고 정치적으로 권력을 누리던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같은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죄인이라고 멸시당하는 창기나 세리 그리고 사람들에게 부정하다고 따돌림당하던 문둥병자, 절뚝발이, 소경과 같은 사람들은 경제적, 종교적,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와같은 자들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고 그들을 회개시키고 그들의 육신의 병을 고치심으로써 그들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은 이러한 예수님을 가까이하였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a.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자들을 택하셨음(고전1:27)

2) 잃어버린 양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온 세리와 죄인들을 위해 비유를 들어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잃은 양의 비유를 설명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양 일백마리가 있었는데 그중 한마리를 잃었습니다. 목자는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을 안전한 곳에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마리 양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양을 그냥 놔두면 필경은 맹수들의 먹이가 되거나 실족해 죽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목자로서는 그 양을 찾는 노력을 포기할수가 없었습니다.

a.양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함(렘50:6)

b.주께서 친히 양의 목자가 되심(겔34:15)

3) 기뻐하는 목자

잃었던 한마리 양을 찾아나선 목자는 각고의 노력끝에 그 한마리 양을 찾았습니다. 그는 잃었던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왔습니다. 양이 지쳐있거나 다리가 상해서 걷지못할때 목자들은 그 양을 어깨에 메는 것입니다. 양을 찾은 목자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하나님 곁에 안전히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의미하고, 잃은 양은 죄악 세상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는 죄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참조, 마9:13).

a.인자의 온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위함(눅19:10)

b.함께 즐기기 위함(눅15:6)

 

2.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1) 열드라크마를 가진 여인

잃어버린 한마리 양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어서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여자에게 열드라크마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화로써 로마의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주전 300년경에 한드라크마는 양 한마리의 값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그 가치가 상당히 절감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에게 열드라크마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가난한 여인이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a.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약2:2)

b.외로운 자들을 의미함(시10:14)

2) 잃어버린 한드라크마

열드라크마를 소유한 여인은 그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잃어버린 한드라크마를 등불을 켜서 찾아나섰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가난한 서민의 집에는 창문이 없는 것이 보통이어서 작은 물건을 떨어뜨리거나 잃어버릴 경우 찾으려면 낮이라도 등불을 켜야만 했습니다. 이 여인도 잃은 드라크마를 찾기위해 한손에는 등불을 가지고 또 한손에는 비를 가지고 쓸면서 찾았을 것입니다.

a,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은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님(마18:14)

b.의롭게 하기위함(롬8:30)

3) 기뻐하는 여인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를 각고의 노력끝에 찾은 여인은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잔치를 배설하고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하였습니다. 가난한 여인에게 있어서 친구와 이웃들을 초대하여 기쁨을 같이 나눈다는 것은 커다란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의 기쁨을 억제할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비유를 통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참된 회개를 하늘나라의 모든 즐거운 노래들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a.생명을 얻는 것(행11:18)

b.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됨(눅15:10)

 

3.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

1) 자신의 분깃을 달라는 아들

예수님은 어떤 사람에게 두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자기 아비에게 자신의 분깃을 달라는 이야기로 비유를 시작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부자 아버지 슬하에서 아무런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싶은 세계를 동경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오게될 분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아들의 고집을 안 아버지는 그에게 돌아갈 재산을 주었습니다.

a.악한 자라도 자식의 청원은 거절치 못함(마7:11)

b.선민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두아들로 비유함(마21:28)

2) 후회하는 둘째 아들

아버지로부터 자기 재산을 받은 둘째 아들은 곧 먼나라로 떠나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다 탕진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돼지를 치는 종의 자리에까지 전락하였습니다. 게다가 먹을 것이 없어 심한 굶주림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배고픔으로 인해 둘째 아들은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 집의 풍족함을 회상하게 되었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바로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a.궁핍은 유리함의 결과임(히11:37)

b.예수께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음(요6:35)

3) 기뻐하는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목격하고 아직도 상거가 먼데도 저를 보고 측은히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것은 아버지의 기뻐함과 아들의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을뿐만 아니라 그 지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와 신을 주었습니다. 또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이웃 사람들과 함께 돌아온 아들로 인해 기뻐하였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도 죄인의 회개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a.모든 육체가 구원받는 것이 하니님의 뜻임(딤전2:4)

b.벗과 이웃을 초청하여 함께 즐김(눅15:6)

 

결론

우리는 세가지 비유를 통해 하나님께서 죄인의 회개를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도 얼마든지 죄를 범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을 주님앞에 내어놓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핵심

15:1-32

예수께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음을 증거하는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은 아들에 관한 비유이다.

 

# 묵상

세리와 죄인 ( 15:1, 2 )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바리새인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율법은 죄인과 어울리기만해도 부정해지므로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 취지는 죄를 근절하기 위함이었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율법을 통해 죄가 오히려 만연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회개의 기쁨 ( 15:7-10 )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합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므로 회개할것 없는 의인이란 없습니다. 누군가 이러한 의인이 있다고 주장할수도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앞에 나아가기 위해, 회개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며, 또한 죄인의 회개는 하나님의 사자들에게 기쁨이 됩니다. 죄의 회개는 개인의 구원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기쁨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회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회개는 먼저 마음을 돌이켜야 하고, 그 다음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시인해야 하며, 그 죄에 대한 값을 기꺼이 받기로 다짐하고, 마지막으로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큰아들 탕자의 죄 ( 15:25-32 )

큰아들은 집을 떠나지않고 형식상으로는 아버지를 섬겼으나 그것은 사회적인 체면이나 도덕적인 의무감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형제애가 부족한 그는 돌아온 동생에게 불쾌한 마음을 가진 물질주의자로, 돌아온 동생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불평하며 마음으로부터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형식적인 효자, 형식적인 종교인들이 바로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격렬한 말로 저주하셨습니다(눅11:39-52).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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