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벧전3:13-4:6)

1)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태도
사도 베드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벧전3:15)라고 말씀하고 있다. 인간이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산다고 하여도 한계 상황이 오면 결국엔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연약한 자임을 고백하게 된다. 그러나 흉용하던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은 모든 사건 속에서 우리를 능히 인도하시어 완전한 승리를 거둘수 있는 주권자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 중에도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우리의 주권을 그분에게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고난 중에서 우리를 지키시며 견디게 도와 주신다.

2) 증거할 것을 예비하는 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신자들은 항상 주님을 증거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여서(마10:16) 하나님의 권세와 구원을 담대히 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이같은 준비는 항상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라는 것이다. 즉 신자는 악한 불신자들이 신랄한 공격을 할때나, 육신적으로 위협을 가하는 상태에서도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쉬지 말아야 함을 나타낸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 그리고 그 소망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인내와 신뢰로 기다리는 자세이다. 소망은 가상적인 세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다. 이 소망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실적으로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신 것을 그대로 믿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을 가진 우리는 담대히 우리의 소망에 관한 것을 묻는 자들에게 대답해야 한다.

3) 선한 양심을 가지라
'양심'이라는 말은 sunevidhsi"(쉬네이데시스)로 자기 행위에 대해 마음 속에서 관사가 알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양심은 자기 행위에 대해 선과 악의 판단을 내려주는 지적 의식과 도덕적 의무감을 뜻한다.
선한 양심은 사람이 마음 속에 깨끗함을 가지고 진실된 마음의 소리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마음의 진솔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만큼 받아들여 진리에 순종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양심을 창문에 비유하기도 한다. 사람이 창문을 활짝 열면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지만, 창문을 닫아버리면 빛이 조금밖에 들어오지 못한다. 우리는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진리의 빛을 많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2. 종말을 사는 성도들의 태도(벧전4:7-11)

1) 정신을 차릴 것
"정신을 차리라"(벧전4:7)는 말은 swyronew(소프로네오)로써 '건전함'을 의미하는 sw"(소소)라는 단어와 '마음'이라는 뜻을 지닌 yrhn(프렌)이라는 두단어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건전한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가 된다. 즉 충동적으로 마음을 움직이거나 변덕스럽게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잘 판단하여 적절하게 처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종말을 대하는 성도들은 신기한 것이 있다하여 쉽게 미혹되거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을 고집하여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시대를 잘 분별하여 건전한 마음 상태를 유지하며, 그것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 자세는 수양과 기도를 통해서만이 얻어지는 신앙 태도이다.

2) 근신하여 기도할 것
근신하라는 말은 깨어있어 분별있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경솔하거나 무책임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동의 결과를 진지하게 생각하여 책임있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라는 말의 원문의 뜻은 '기도에 깨어 있으라'는 의미이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판단하면 균형을 잃기 쉽고 편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따라서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함으로 건전한 정신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처럼 종말에 처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기도하는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3) 열심히 서로 사랑할 것
사도 베드로는 사랑하되 서로 열심히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악한 자라도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를 핍박하는 자와 마음에 들지않는 모든 자를 포함한다. 이러한 사랑은 인간의 내부에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깨어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의 주권이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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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워 온다(벧전4:7). 이럴때 교회에 다가오는 핍박과 고난은 더욱 커지고 교회를 깨뜨리기 위한 마귀의 흉계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성도는 이럴때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하여 살아가야 하고 교회는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이러할때 심판의 날에 교회는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되는 것이다.

1. 열심히 선을 행하라(벧전3:13-22)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난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고난을 피하기 위하여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갈 것인가? 이러한 삶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의 논쟁에 침묵으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답변할 것인가? 또 '옥에 있는 영'(벧전3:19)은 누구이며 이들에게 전파하였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를 변증
베드로는 이 세상을 적극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명하고 있다(벧전3:13,17). 즉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고난이 무서워서 피하여 숨는 것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변증가이어야 한다. 변증이란 반대자들에게 자기가 생각한 바를 옳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우리의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를 피하지 말고 열심히 변증하여 설득해야 한다. 벧전3:19,20은 매우 해석하기가 난해한 구절로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아의 때의 사람들이 매우 악하였다는 것과 그리스도는 죽음에 대한 승리자로써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를 증거
우리가 열심히 선을 행하고 불신자에게 답변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벧전3:18-22에 기독론을 삽입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는 세상을 도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을 행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믿는 것이다.

2. 복 있는 자의 고난(벧전4장)
이 세상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을 합리화하고 우리들의 거룩한 삶을 비방하여 우리를 이유 없이 핍박한다. 이러한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단, 불법을 행하는 자의 결과는 무엇인가?

1) 고난과 복
베드로는 믿기 전의 지난간 때의 죄악을 그치라고 명령하고 있다. 즉 성결한 삶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 가운데서 다가오는 불시험과 고난에 대해 오히려 즐거워해야 하며 복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여기에 대한 보답은 구원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베드로는 선포하고 있다(벧전4:7). 악한 세상에서 성결하게 살고자 고난을 이겨낸 자에게는 심판 날에 구원을 입었으나 악한 자에게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2) 세상의 유혹
우리 주변에는 많은 유혹이 있다. 술집, 음란 비디오, 도박장뿐 아니라 철학이라는 이름하에 온갖 우상 숭배가 횡형하고 있다. 또한 아직도 조상 제례 문제는 명절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딪치는 문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만물의 때가 가까웠음을 깨닫고 심판 날에 구원의 은혜가 있음을 깨달아 끝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켜야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라며 베드로는 우리를 격려하고 있다.

3. 영광에 참예할 교회(벧전5장)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마귀는 더욱 교회를 괴롭힌다. 그러므로 영광의 면류관을 심판 날에 쓰기 위하여 교회는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그러면 지역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의 역할과 자세는 무엇이며, 젊은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마귀를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가?

1) 견고한 교회
한 마을을 지도하는 장로라는 지위는 유대 전통에서 뿐만 아니라 헬라, 로마 문화권에서도 아프리카의 부족 사회에서도 그리고 우리 나라의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개신교의 장로 제도는 칼빈의 종교개혁에 그 기원을 둔다. 베드로 자신도 장로라 하였으니 이 장로는 곧 개신교회의 목사와 같은 위치이다. 목사들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모범을 보이라 하였다. '더러운 이'에 대하여 웨슬리(John Wesley)는 더 좋은 조건과 봉급을 따라 교회를 옮겨다니는 목회자들을 경고하였다. 또 내일의 교회의 지도자들인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혈기와 정열만 믿고 권위에 도전할 것이 아니라 장로(목회자)들의 경륜에 겸손해야 할 것이다. 마귀는 교회의 질서를 깨기 위하여 성도의 삶과 가정 그리고 사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호시탐탐 우는 사자와 같이 노리고 있으므로 교회는 더욱 믿음 위에 견고히 서야 한다.

2) 깨어 있는 교회
목회자가 대접받는 좋은 직업이 된 이 시대에 목회자는 더욱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직업이 주는 안정감보다는 사명감에 불타야 할 것이며, 또 젊은 청년 집사들은 자신의 짧은 신앙에 근거하여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교회는 더욱 질서 가운데 견고해져야 한다.

1장 서두에서 흩어져 있는 교회에 이 서신을 쓰고 있음을 밝힌 베드로는 마지막 장에서 다시 교회에 대한 권면과 격려로 서신을 끝맺고 있다. 즉 만물의 마지막이 다가옴에 따라 교회는 더욱 견고해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굳게 서서 고난과 역경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할때 심판날 영광에 이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바벨론에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벧전5:13), 많은 학자들은 이 바벨론이 로마를 지칭하는 은유적 표현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즉 부도덕, 사치, 방종의 죄악이 넘치고 교회에 대한 핍박이 가장 강한 로마에서 베드로는 이 서신을 소아시아를 비롯한 모든 교회에 보내고 있다. 만물이 가까워 올수록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가운데 복음을 위하여 국가, 사회, 가정의 질서를 지키고 교회를 견고케 하여 심판 날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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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서의 종교와 정치의 관계

1) 구약의 경우
구약에서의 종교는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할 때부터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정치의 시작은 이스라엘 나라가 왕정을 시작한 시기 B.C.1050년경으로 사무엘 사역 말기에 사울 왕을 세운 시기로 볼 수 있다(삼상8:4-22).
구약의 정치 원리는 한마디로 신정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신정 정치란 하나님께서 왕을 선택하신 후 그 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상을 실현하는 위임 통치의 성격을 지닌다. 하나님이 왕을 선택하는 방법은 먼저 선지자나 예언자에게 신탁하시어 구별하셨다. 이렇게 구별된 사람은 구약의 제사장과 같이 기름부음을 받는 의식을 가졌다. 또한 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치를 해야 했고, 선지자나 예언자는 왕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자문하기도 하였다.

2) 신약의 경우
첫째, 예수님의 경우 세상 정치에 대하여 확실히 언급하신 기록이 없다. 다만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18:33-38)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피력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창조주와 동일한 분으로 이 세상의 한 나라에 얽매일 수 없는 분이시다. 또한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윤리를 인생들에게 알게 하심으로 참다운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셨다.
둘째,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국가에 대한 좀더 확실한 윤곽이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권세는 하나님이 준 것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권세에 대하여 신자들은 순복해야 한다. 이러한 국가관은 사도 베드로께도 똑같이 적용하셨다. 개인에 따라 때로는 국가의 법이 불편하고 억울할지라도 성경의 원리는 순복할 것을 명하고 있다.

2. 초대교회 당시의 노예 제도

1) 노예의 조달과 숫자
고대 세계에는 모든 사회에 거의 노예 제도가 있었다. 로마 제국은 많은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노예의 수가 매우 많아졌다. 그 수가 약 6천만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이것은 자유 시민의 약 4배에 해당하는 수이다. 고대 서적에 의하여 어떤 한지주는 만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처음 로마가 건국될 때에는 노예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가난한 사람이 부채를 못갚으면 자기 몸을 팔아 노예가 되기 시작하였고, 나중에는 전쟁의 포로들이 노예가 되었다. 로마가 주변 국가를 정복하면서 노예의 숫자는 급격히 불어났고, 이러한 노예들은 노예 시장을 통하여 새 주인에게 팔렸다. 보통 노예 한명의 값은 한국 농촌의 소 한마리의 값에 상당했다고 한다.

2) 노예에 대한 대우
노예들 중에 무식한 자들은 주로 농장이나 광산에서 육체적인 노동을 하였고, 지식이 있고 음악적인 재능이 있는 귀족들은 노예가 되어 음악 교사나 의사등의 가정 사무를 보았다. 노예들의 생활은 실로 처참한 것이었다. 이들은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가축이나 상품 정도로 취급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유익하게 하는 세가지 도구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는 말이 없는 도구로 기기류를 말하고, 둘째는 말을 할 줄 모르는 도구로 동물을 말하며, 셋째는 말할 줄 아는 도구로 노예를 들었다. 이처럼 노예는 하나의 유용한 도구였지 인격자는 아니었다.
노예는 정식으로 결혼할 수 없었고, 단지 주인이 정해주는 사람과 동거할 수 있었다. 또한 주인이 마음대로 이혼하게도 했으며, 이들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은 당연히 주인의 재산이 되었다. 만약에 노예가 주인의 말을 듣지않으면 채찍으로 다스렸으며, 그래도 말을 듣지않으면 십자가에 매달거나 맹수에게 던져 죽게 하였다. 로마시대의 어떤 원로원이 한 사람이 노예에게 피살되자 그 형벌로 노예 400명을 한꺼번에 공개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다.

3) 노예 제도에 따른 결과
첫째, 빈부의 극심한 격차가 생기게 되었다. 일부 소수 지주가 노예를 대량으로 사용함으로 인해 노임의 수준이 매우 낮아졌다. 또한 지방의 농민들은 점차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집중하는 현상이 생겼다. 여기에서 생기는 병리 현상으로 대부분의 농토들은 소수의 지주들이 소유하게 되었고, 임금이 필요없는 노예들이 경작함으로 빈부의 격차는 극에 달하는 현상이 생겼다.
둘째, 도덕적 타락이다. 소수의 부유한 지주들은 모든 노역과 사무를 노예들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매일 유흥, 사치, 쾌락 등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당한 현실로 인하여 일부 지성이 있는 노예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반역하는 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반역의 한 현상으로 살인, 강간 같은 형상들이 나타났다. 또한 남자 주인과 여종의 관계, 여자 주인과 남종의 비륜 난행은 가정에서 성장하는 자녀들에게 결정적인 패륜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처럼 노예 제도의 팽창으로 인한 자유민의 도덕저인 타락으로 인하여 로마는 병들게 되었고, 결국은 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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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은 자유자이다. 그러나 그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말고 선을 위하여 쓰라고 바울과 베드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선이란 바로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속해있는 국가, 가정, 사회의 질서 가운데서 순복하는 생활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있는 국가, 사회, 가정은 순복하기 쉬운 이상형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할 바를 베드로는 서신을 통해 명령하고 있다.

1. 모든 지도에 순복하라(벧전2:13-17)
예수님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마22:21)라고 하셨으며, 바울도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13:1) 하셨듯이 국가에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이다. 그러나 악하고 독재적인 정부에 대해서도 복종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그 복종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어떤 자세로 복종해야 하는가?

1) 복종의 이유
성경은 이에 대해 국가에 순복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벧전2:13의 왕은 분명히 로마 황제를 의미하며 그가 보낸 방백은 각 식민지의 총독이나 헤롯 왕과 같은 로마 정부가 증인한 지방의 왕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복종의 범위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한다면 일제하의 우리 선배 그리스도인들은 독립 운동도 하지말고 그저 식민지 정책을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십계명에 위배 되는 '신사 참배'만을 제외한다면 '정신대 운동'등도 적극적으로 순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범위와 복종의 이유를 "주를 위하여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라고 밝히고 있다. 즉 그 복종의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온한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기 위함이요, 주의 복음을 위하여 우리 자유를 사회적·도덕적으로 선한 일에 쓰임받기 위함이다.

2) 복종의 의미
바클레이(Barclay)는 우리가 사회 구조상 절대 권력에 복종하는 것이 아닌 참여의 의미가 중요시되는 민주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복종하는 수동적인 단계를 뛰어넘어 시민이 해야할 여러 의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 의무를 행해야 한다. 즉 각국 선거와 단체 활동에서 우리의 자유를 무관심과 냉대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

2.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벧전2:18-25)
노동 조합이 발달하고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 본문에 나타난다. 사환들이란 그 원어적 의미로 노예를 뜻하는데, 과연 오늘날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이 노예 제도를 인정해야 하는가? 그리고 악한 고용주에게 무조건 순복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성경은 결코 노예 제도를 합법화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빌레몬서에서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대할 것을 권면하였고, 구약의 노예 제도도 안식년에 '해방'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즉 성경의 문자적 해석보다 그 의미를 중요시한 예수님처럼, 성경 속에 담겨있는 인권 존중 사상으로 노예 해방을 부르짖은 링컨의 주장이 옳았다. 그러나 악한 주인이나 고용주에게 순복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가 그리하였기 때문이다(벧전21-25장). 즉 죄 없으신 그리스도도 억울하게 죽으셨으므로 우리도 애매한 고난을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2) 인내의 신앙
현대 사회에서도 억울하게 고용주에게 고난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럴때마다 다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참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할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되나 반항하고 다투면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3. 남편에게 순복하라, 아내를 귀히 여기라(벧전3:1-13)
이혼율이 급증하고 '남녀 평등'의 주장이 커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리고 불신자 남편을 둔 아내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문제에 베드로는 바울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엡5:22-33).

1) 부부간의 관계
성경에 아내에 대한 명령이 남편에 대한 명령보다 많은 이유는 그 당시도 오늘날과 같이 불신자 남편을 둔 여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신자이면 불신자인 아내가 신자가 되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여자의 권리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편과 다른 신앙을 가질 때에는 이혼 당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불신자와의 이혼을 성경이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불신자 남편의 구원을 위하여 신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정결하게 행해야 하였다. 그리고 남편들은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는 고대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회에 비추어 보아 매우 이례적인 명령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마다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수 있다. 즉 신앙인들은 아내도 동등한 영적 지위가 있음을 알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도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한다.

2) 부부간의 의무
이혼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고 남편의 머리 위에 앉는 것도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아내를 마음대로 주장하는 것 역시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은 가정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지위 가운데 남편과 아내의 질서를 강조한다. 즉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고 남편은 아내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결코 남녀 평등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하여 아내가 필요 이상으로 권리를 요구해서도 안되며 여성을 남존여비 사상으로 무시해서도 안된다. 비록 이혼율이 높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가정의 가치와 질서를 지켜야 한다.

자유자인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와 사회와 가정에서 질서와 순복의 생활이 요구된다. 그 이유는 바로 주를 위함이요, 이는 복음이 편안히 전파되기 위함이며, 불신자를 신자로 얻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바로 그리스도가 죄 없이 순복함으로 모범을 보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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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의 현재성(벧전1:3-5)

1) 거듭나게 하심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라고 기록하고 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그분의 뜻과 행동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며,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말씀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요3:5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물은 곧 말씀을 의미한다(엡5:26).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 말씀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하늘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가지게 된다.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소망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있는 그대로의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2) 기업을 잇게 하심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벧전1:4)라고 약속하셨다. 땅에 있는 기업은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쇠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하늘에 속한 기업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가나안 땅을 약속의 기업으로 주셨다. 이 땅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을 통하여 영원하도록 변함이 없을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들은 생각했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점령되었고, 남유다는 B.C.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이 처럼 땅의 기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영원한 기업을 위한 예표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에 있는 영원한 기업이 있음을 믿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전력해야 할 것이다.

3)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음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벧전1:5)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일반 은총으로 보편적인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돌보심을 베푸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사단의 세력을 멸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이루신다. 이것이 하나님 백성의 특별 은총이다.
이러한 특별 은총을 받은 자들에게 어려움, 고통, 괴로움, 슬픔 등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 세상의 문제들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평안한 삶을 구하기보다 승리하는 믿음을 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 구원의 미래성(벧전1:6-12)

1) 시험이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구원을 받았지만 현재와 미래에 시험이 있다. 이 시험은 구원과는 별개의 것으로 성도들의 성숙을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연단의 도구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불로 연단받는 금'으로 비유하고 있다. 순금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는 수십가지의 연단 과정이 필요하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도들을 세우기 위하여 시험을 주시며, 이 시험을 거치는 동안 성도들은 굳은 반석 위에 세운 신자가 된다.

2) 믿음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큰 복 중에 하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보지않고 믿는 복이다(요20:29).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 은혜이다. 이 은혜를 받고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더욱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우리는 복된 자이고, 그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받음이다(벧전1:9).

3)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하나님은 가만히 앉아서 놀고있는 자에게 특별한 예언을 주시는 분이 아니다. 미래의 사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할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감동하사 저들에게 깨닫게 해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열심히 성경을 탐구하고 연구해야 한다. 그 결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되며, 미래의 영원한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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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신약의 다른 서신의 서두들과 같이 발신자와 수신자가 언급되어 있으며, 기독교의 주요 교리가 이 서신의 서두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삼위일체론, 기독록, 구원론, 인간론에 대한 내용이 암시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주요 교리를 통하여 우리가 고난 가운데 산 소망을 갖고 구원에 이르도록 베드로는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 삼위일체 하나님과 산 소망(벧전1:1-12)
본문에서 베드로는 정확하게 삼위일체 교리를 제시하고 있다. 아직 삼위일체의 용어가 나오기 전에 이 편지에서 베드로가 나타낸 삼위일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고난 가운데 어떻게해야 산 소망을 얻을 수 있다고 했는가?

1) 산 소망이 있게 하심
이 편지의 발신자가 사도 베드로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초대교회로부터의 전승이 이를 증거하고 있고, 베드로전서의 내용과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설교에 유사점이 있으므로 예수님의 열두 사도의 수제자 베드로가 이 서신의 저자임에는 틀림없다(행2:23,10:42 ; 벧전1:20,45), 또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는 현재 터키 지역의 소아시아 지역을 의미하고 있으며, '흩어진 나그네'들은 유대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벧전1:2)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뚜렷이 나타나는 것을 볼때 베드로는 이미 삼위일체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비록 어려운 환경 가운데 거하고 있지만, 산 소망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고난을 이겨내도록 격려하고 있다. 즉 비록 불같은 시련이 있고 여러 시험이 있으나 성도는 구원을 바라고 하늘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갖고 기쁨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
이 편지의 수신자는 오늘날 우리의 기도이다. 즉 베드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삼위일체의 신앙을 갖고 이 터 위에 모든 어려움과 고난과 시험을 기쁨으로 이겨낼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러할때 우리는 부활의 산 소망을 갖고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다고 권면하며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3-25)
하나님의 자녀된 그리스도인들이 산 소망을 갖기 위해서는 거룩해야 한다. 그러면 이 거룩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리고 이 거룩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기도
사욕을 버리고 우리를 부르신 거룩한 예수그리스도처럼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피를 인하여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피로 거룩하게 된 자는 서로 사랑해야만 하는데(벧전1:22), fivlo"(필로스)는 형재애, 우정애를 의미하며, ajgavph(아가페)는 대가를 바라지않는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런 사랑으로 성도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2)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지고 서로 사랑하려면 말씀의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세세토록 영원하므로 우리는 말씀 위에 서서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해져 서로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선한 행동이나 인격을 통한 거룩된 삶은 일시적이며 타인에게 많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3. 하나님의 백성(벧전2:1-12)
거룩해지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 된다. 단,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누구신지를 다시 한번 제시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영접한 인간은 누구인가를 제시하고 있다.

1) 예수께 나옴
말씀을 사모하되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듯 사모하라고 베드로는 명령하고 있다. 이 절의 의미는 신앙의 초보자를 뜻하는 고린도전서 3장의 부정적 의미와는 다른 긍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성도는 말씀을 갈급해 하되 어린아이가 젖을 찾는 것처럼 갈급해야 한다. 이 말씀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 또 예수님은 산 돌이시다. 돌이란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산 돌이란 '죽음'과 대비되는 매우 역동적인 표현이다. 즉 그리스도는 부활의 산 돌인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마술적이고 사이비적인 의미가 없다. 단순하게 산 돌의 의미는 부활과 생명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산 돌같이 되어지고 이러할때 우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

2) 하나님의 백성됨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산 돌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여기에는 차별이 없다. 루터의 만인 사제설의 근거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제사장과 같은 역할을 해야할 뿐 아니라 서로 중보기도 해야하고 그리스도의 덕을 선전해야 한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서두에서 보면 소아시아에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서신을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 서신은 오늘날 우리에게로 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향한 것이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모든 지역과 모든 시대를 두고 이 서신을 쓴 것이다. 여기에는 중요한 삼위일체의 교리가 나오며 특히 기독론의 의미가 담겨있다. 우리의 산 소망과 구원은 오직 산 돌이신 그리스도뿐이시다.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제사장이 되어 산 소망을 갖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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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신자들의 박해

본 서는 수신자들이 지금 현재 박해를 받고 있거나 장차 받게될 박해에 대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를들어 권면하는 역할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박해에 관해서는 두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로는 벧전1:3-4:11에 묘사되어 있는 박해의 실제성과 잠재성에 관한 문제이다. 둘째는 정치적인 박해인가 아니면 사람들에 의한 박해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고려하여 본 서에 나타난 박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벧전3:13-17에 나타난 박해는 어떠한 형태인가? 여기에 묘사된 박해는 법률적이 아닌 사람들에 의한 박해임을 나타내고 있다. 즉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수는 있지만 영혼까지는 멸망케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또한 박해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시인하기를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항상 거룩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하고 있다.
둘째, 여기에 묘사된 박해는 미래지향적인 박해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벧전3:14), "하나님의 뜻일진대"(벧전3:17) 라는 가정법에서 엿볼수 있다. 그러나 수신자들은 항상 오해와 악의와 중상 모략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을 직시하며 경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벧전4:12-19에서는 박해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세상에서 당할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12절에 언급된 불시험은 모진 시련을 말하는 것으로, 이런 고난 하에 있을지라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아야 함을 권면하고 있다.
넷째, 벧전5:6-10에는 박해후에는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박해에 관해 하나님께서는 무관심하지 않다는 점과 사탄으로부터 오는 박해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이겨낼 수 있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본 서신서에 나타난 박해에 관한 기사는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인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박해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박해가 이웃들의 시기와 질투, 적개심의 발로임을 베드로는 지적하고 있다.

2. 본 서의 양식

본 서의 양식 문제는 많은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바울의 서신에서는 교리적인면 다음에 권면하는 말이 나오고 있는 반면에 베드로전서는 권면하는 말이 전 장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일부학자들은 본 서가 교훈 혹은 설교 형식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는 세례에 관한 문제이다. 저작 역시 세례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세례의 그 자체보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성례전의 세례 의식보다는 세례의 의미 부여를 더 강조하고 있다. 본 서의 양식은 인사말, 감사, 말씀, 마지막 인사말로 구성된 편지이다. 특히 마지막 인사말에서 특정 인물을 거론하고 있지 않는 것은 여러 교회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본 서는 다양한 언어력을 구사하고 있다. 특히 부사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독립 분사를 사용하여 명령형으로 묘사한 부분이 많다.
또한 긴박성과 절박성을 나타내기 위해 부정과거 시제법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본 서 양식의 특징이다.

3. 본 서의 주제

결론적으로 본 서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고난 중에 산 소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역경 중에서도 기뻐해야 한다는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한 구절은 본 서 이외에 로마서 5장과 빌립보서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은 기독교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표현법이다. 고난 중에서 중요한 것은 소망이다. 소망이 없으면 고난 중에 기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망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속에 항상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베드로는 환난 중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격려하기 위해 소망을 본 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산 소망은 모든 역경과 환난을 능히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다. 본 서의 수신자들은 현재 고난을 겪고 있으며, 또는 장차 다가올 고난에 직면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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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우리는 이제 공동 서신의 두번째 서신을 접하게 된다. 베드로의 첫 보통 서신(The First General Epistle of Peter, KJV)으로 명명된 본 서신은 공공 서신 중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내용으로 다가온다. 그리스도의 가장 밀접한 사도였던 신앙과 위로와 교훈으로 가득한 이 서신의 가치를 온전하게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 경건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귀중한 격려와 소망을 주는데 있어서 본 서만큼 가치가 있는 책은 없다고 할 것이다.

2. 저자 문제

본 서는 1세기 말엽부터 교회들이 베드로 사도의 첫편지로 인정해 왔다. 로마 교회의 교부 클레멘트, 또 유명한 폴리갑, 이레나이우스, 터툴리안 그리고 3세기의 오리겐에게 이르기까지 베드로전서가 베드로 사도의 것임을 의심치 않고 그 내용을 공공연하게 인용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비평가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의혹을 제기한다. 첫째 본 서에서 사용된 헬라어가 어부 출신의 베드로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고상하다는 것이요, 그 다음 본 서의 내용이 너무나 바울 사도의 사상과 흡사하다는 것이며 그리고 본 서에서 다루는 고난과 박해는 베드로 사도가 순교하기 전에는 본격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헬라어 문제는 본 서 5:12에서 밝혔듯이 용역자 실루아노가 대필했음이 분명하며, 그는 바울의 중요한 동반자로서(행15:40 ; 행16:19) 바울에게 깊은 신학적인 영향을 받았기에 베드로 사도의 말도 바울처럼 표현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언약과 교훈을 직접 체험한 사도로서 그분의 죽음, 고난, 부활, 승천, 재림의 언약도 직접 목도한 사도이기에 바울 서신의 교리들을 산 경험으로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도인 것이다. 또 박해와 고난 문제는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주후 62년경부터 시작되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개인적으로 위기를 느낄만큼 성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임박하는 말세적인 대박해를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박해와 고난에 대비한 신앙 무장을 강조했던 것이다.

3. 저작 시기와 장소

1) 저작 시기
대개의 학자들은 본 서가 로마 제국의 대박해 시기 중 어느 한 시기의 직전이나 초기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본 서의 분위기나 표현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수 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벧전4:7) 또는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4:17)라고 베드로는 종말적인 대환란을 예고한다.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베드로 사도는 주후 68년경 대박해 기간 중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네로 황제에 의한 기독교에 대한 로마 제국의 첫 박해는 주후 64년경부터이다. 그 당시 네로는 기독교를 불법 단체로 간주하고 온 로마 판도 각처에서 개인적으로 사회로부터 냉대와 불이익을 당했었으며 누구나 곧 대대적인 박해가 닥칠 것을 예견했고 교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될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온 주후 63-64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2) 저작 장소
본 서에는 그 저작 장소가 언급되어 있는데, 즉 바벨론에 있는 교회(벧전5:13)에서 기록하여 보낸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바벨론은 어디인가? 중세의 에라스무스, 칼빈 등은 유브라데강 유역의 유대인 정착지인 바벨론이라고 추정했다. 또 이집트 카이로 근처인 앗시리아인 정착지가 바벨론으로 불리워졌으므로 그곳에 관심을 두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바벨론은 당시 로마를 상징하는 기독교의 보편적인 은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계14:8 ; 계17:5). 구전에 의하면 베드로는 말년에 20여년간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주후 64년 늦여름 네로의 분노의 희생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본 서가 로마에서 기록된 것임에 유력하다.

4. 저작 목적과 대상

 

본 서는 임박한 대박해로 인한 삶의 시련에 대한 신앙 무장을 위해 쓰여졌다. 물론 그 대상은 로마 판도 안에 흩어져 살고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의 위대한 점은 다가올 박해를 소극적으로 맞을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박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영광스러운 것이요, 그 상급으로 영생 복락을 맞이하게 되는 축복임을 강조하므로써 성도들에게 한없는 힘과 위안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본 서는 격려의 서신 또는 소망의 서신으로 부르는 것이다.

5. 본 서의 특징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
벧전1:2은 본 서의 주제다.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한다.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신 성부, 고난과 영광에 참예케 해주신 성자 그리고 위로의 성령에 관한 내용이 본 서 전체에 흐른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관한 자세
고난은 곧 닥칠 것이나 한시적인 것이요, 그 고난으로 교회와 성도들은 더욱 견고케 될 것(벧전5:11)이며 즉, 고난으로 성도들은 더욱 성화될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위대한 고난의 증인인 베드로 사도의 빛나는 교훈은 고난에 대한 성도의 자세다. 즉, 고난으로 삶의 종말이 올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더 열심히 감당하라는 것이다. 열심히 선을 행하며, 열심히 봉사하며, 더 뜨겁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벧전4:7-11). 이와 같은 자세는 오직 고난의 주 그리스도의 그 자세를 본받음으로 이룰수 있음을 강조한다(벧전2:18-25). 그러므로 본 서는 종말때에 행할 성도의 신앙 윤리의 지침서의 가치도 지닌다.

6. 내용 개관

1. 하나님의 베푸신 은혜(1:1-12)
2. 은혜에 대한 성도의 자세(1:13-2:12)
3. 고난 중에 지녀야 할 자세들(2:13-3:12)
4. 고난 중에 행해야 할 일들(3:13-5:9)
5. 축복과 인사(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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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말씀으로의 거듭남 (조영구 목사)

 

[베드로전서 1장 23절~25절]

23절 -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절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절 -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1. 모든 육체는 들의 풀과 같다 (마른다 - 영원하지 못하다)
  - 갈라디아서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을 위해 심어야 한다)
2. 육체의 모든 영화 또한 풀의 꽃과 같다 (시들다 - 영원하지 못하다)
  - 누가복음12:15~21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세상의 풍요로운 것은 부질 없다)

 

거듭남이란....
* 오직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한다 - 예수님을 믿어야 함 (원죄해결, 살아가면서의 세상죄에서 해결)
*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
  - 맑은물

    → 에스겔36:25~27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거짓된 의식과 사상을 씻어 정결하게 됨)
    → 요한계시록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생명수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흐르는강, 생수의 근원)
    → 요한복음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생수의 강 - 천국복음)
    → 신명기32: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교훈 - 말씀)
  - 거듭남의 비결

    → 야고보서1:18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말씀으로 거듭남 - 진리의 말씀)
    → 요한복음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의 성령이 진리 가운데 인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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