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건강해 질 수 있는 일곱 단계는(약 4:7-10)?

하나님께 순복하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손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성결케 하라,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주 앞에서 낮추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약 4:8)?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를 높이고 나아가 그를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함.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상과의 잘못된 관계를 단절해야 하며 오직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의 삶의 자세는(약 4:13-17)?

세속적이며 현세적인 유익을 좇지 않고 이세상 속에서 주의 뜻을 좇아 행하는 것임.
모든 인간들에게 허락된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지극히 짧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때 불신자처럼 자신만의 안일과 자랑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선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어리석은 행위는(약 4:13-16)?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의 지식과 경험대로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대로 행하는 행위를 말함.
이러한 사고와 행위는 신본주의보다는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삶을 이끄시고 책임을 져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갓피플

우리에게 ‘선생이 되지 말라’권고한 이유는(약 3:1)?

선생된 자가 더 죄가 클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임.
선생들은 자신의 실수로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고 쉽게 죄에 빠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선생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 사명감으로 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생들은 말의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으로, 신앙 인격이 미성숙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분란을 미연에 방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지혜에 관해 묘사된 여러가지 행위들은(약 3:13-18)?

선행으로 인해 지혜의 온유함을 동반한 행위.
마음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서 자랑하거나 진리를 거스려 거짓 증거하지 않는 행위.
시기와 다툼이 있고 요란과 악한 일이 있는 곳에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과 선한 열매를 거두는 행위.
화평을 심는 행위를 통하여 의의 열매를 거두는 행위.


성경에서 말하는 ‘온유’의 의미는(약 3:13)?

헬라어 원문은 강한 자의 절제나 현명한 사람의 겸손을 의미함.
인간 내부로부터 충만해진 겸손이나 온화함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어떤 극기나 훈련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배우고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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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성도들끼리 차별해서는 안되는 이유는(약 2:1-5)?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믿음을 소유한 형제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약속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형제 차별을 금하고 형제 사랑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믿음은(약 2:14-26)?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
이러한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약의 선조들이 믿음의 위인들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위로써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즉 참된 믿음은 진리에 대한 실천적인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과 야고보의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비교하면(약 2:21, 22)?

바울 - 율법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하심으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야고보 -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의롭게 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완성된 의로써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순종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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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에서 경고한 위험들은(약 1:1)?

구원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히2:1-4).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한 마음(히3:7).
배교자가 되는 것(히 5:11; 6:1-2).
깨달음을 위반하는 것(히10:19).
쓴 뿌리 역할을 하는 것(히12:15).

야고보서에 담겨진 의미는(약 1:1)?

야고보서에는 인간 삶의 영역을 번개처럼 비추어 주는 짧은 격언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본 서는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기독교 신앙의 잘못된 점과 사랑 안에 믿음이 실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혀를 제어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말씀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함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당할때 우리가 취할 자세는(약 1:2)?

온전히 기쁘게 여김.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만들어내며 이 시련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시련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떤 시련이라 할지라도 이겨야 합니다.


기도자의 필수적인 자세는(약 1:6)?

무엇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야 함.
하나님이 응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꾸준하게 간구하며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면류관’은 누구에게 주어지나(약 1:12)?

어려움과 환란과 시험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견디는 성도에게 주어짐.
이 면류관은 생명을 재료로 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선물입니다. 또한 장차 하나님 안에서 누릴 영원한 세계의 왕적인 영광을 의미합니다.


장애와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성숙한 자세는(약 1:19-27)?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는 자세.
성내기도 더디하는 자세.
더러운 것과 악을 버리는 자세.
도를 행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세.
스스로 경건한 체하지 않고 자기 혀를 조심하는 자세.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않게 돌아보는 자세.


신앙 생활에 있어 기초가 되는 말씀 안에 거하는 생활은(약 1:19-27)?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
말씀의 올바른 실천에 의해서만 성숙한 신앙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란(약 1:25)?

하나님의 법은 ‘자유의 율법’이라는 의미.
하나님의 영이 신자들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준비와 능력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자유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자유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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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대교와 유대인

1) 유대교
이는 단순히 어떤 교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신앙과 생활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은 공동체의 생활양식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예수 당시에 유대인들의 생활양식과 규율들을 종파와 정당에 따라 다양한 성격을 띠었다. 대표적으로 사두개파, 엣센파, 바리새파 및 열심당이 있었는데, 이들 각 당파는 자기 고유한 신앙적 신념에 따라 생활양식이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적응하는 방식도 판이하게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유일하신 야훼 하나님 한분만을 참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율법 자체를 철저히 준수하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2) 유대인
처음 B.C.8세기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남유다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시작되었으나 차츰 변하여서 혈통적인 측면을 떠나서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대인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역사에서 볼때 이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유대교를 개종한 이방인을 유대인들과 구분해서 말할때는 혈통적인 측면이 강하게 담겨있으며, 반대로 신약성경에서는 혈통보다는 유대교와의 관계 여부에 따라 유대인이라고 불렸다. 오늘날은 더욱 혼용되어서 유대교와 상관없이 유대인의 혈통을 떠나서 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을 모두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현재 유대인들은 약 1,200만 명에 달한다고 하며,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이라고 할수 있다.

2. 산상수훈

1) 역사적 배경
산상수훈은 당시 유대 사회의 종교적인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가난한 자'라고 하는 개념에서 비추어 볼때 종교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당시 물질적으로도 가난함을 추구했던 쿰란 종파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을 예수는 철저히 거부하는데, 이 가르침은 당시 철저한 율법의 준수를 목표로 하던 쿰란 공동체의 지침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산상수훈은 랍비적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유대교의 미드라쉬나 미쉬나의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을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세기둥이 토라와 예배와 사랑의 실천인데, 산상수훈의 구조도 이 세기둥의 흔적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2) 교훈과 가르침
산상수훈은 크게 여섯부분을 나눌수 있다. ① 하늘나라의 축복에 관한 설교에서는 물질적으로 또 영적으로 가난하고 의에 주리고 애통하고 핍박받는 자들에게 참된 축복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갈5:1-12). ② 예수를 따르는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 이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요구하면서, 또 율법뿐만 아니라 보다 더 큰 의를 이룰 것을 말하고 있다(갈5:13-16). ③ 율법의 완성을 위한 여섯가지 반제에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해질 것을 선포한다(갈5:17-48). ④ 구제와 금시에 대한 교훈은 위선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경건과 사랑의 실천을 가르쳐 준다(갈6:1-18). ⑤ 이웃에 대한 태도를 나타내는 부분에서는 참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밝히고 있으며(갈6:19-7:12), ⑥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절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갈7:13-27).

3. 잠언

1) 저자
전통적으로 솔로몬이 저자로 여겨져 왔고, 본 서의 내용 중에 아굴(갈30:1)과 르무엘(갈31:1)이 언급되어 있다. 솔로몬이 잠언 전체의 저자라는 주장과 솔로몬은 잠언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는 주장은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이며, 대부분이 솔로몬의 작품이고 여기에 다른 저자의 작품이 일부 첨가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 목적
잠언은 실제적인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본 서는 인간의 도덕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생활 속에서의 유용한 지혜를 거듭 반복하여 설명하고 있다. 잠언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

3) 신학적 가르침
잠언은 생활의 지혜를 강조할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을 나타내며,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도덕적인 질서 조차도 창조하신다. 무엇보다도 야훼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고 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행함이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야고보는 가르치고 있다. 즉 입에 대하여, 세상과의 관계에 대하여, 욕심에 대하여, 산상수훈의 실천에 대하여, 잠언의 가르침에 대하여, 부에 대하여 그리고 교회 생활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즉 실천적인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약3장)
교사는 지혜있고 총명해야 하는데 우선적인 첫째 조건으로는 입을 잘다스려야 한다. 이런 자가 행함을 갖춘 믿음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면 교사는 입을 잘 다스려야 하나? 입이 가진 힘은 무엇인가? 그리고 교사의 참된 지혜와 악한 지혜는 어떻게 다른가?

1) 지혜의 열매
초대 기독교는 아직 유대교 전통에 있었고 유대교 전통에서 교사(랍비)는 매우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불충직한 목자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였다(렘23:2). 예수님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심판 날에 심문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마12:36). 그러므로 지도자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입의 능력은 배의 키와 큰 불을 일으키는 작은 불씨와 같다. 한입에서 악독과 경건이 나오지 않도록 야고보는 경고하고 있다(약3:9-12). 또 참된 지혜에는 선행, 온유, 성결, 화평, 관용, 양순 등의 선한 열매가 있으며, 화평으로 의의 열매가 있고, 편벽과 거짓이 없으나 악한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어 이를 세상적이고 마귀적이라 한다. 선한 지혜와 악한 지혜는 서로 섞이지 않기 때문에 그 입의 열매로 구별할 수 있다.

2) 경건의 지혜
거리에서 표시를 한 차가 자주 눈에 뜨인다. 그러나 교통 사고가 났을 경우 또는 교통 혼잡시에 표시차 운전자에게서 거침없이 상소리가 나오는 것을 흔히 볼수 있다. 한입에서 경건과 악독이 동시에 나오는 경우이다. 이외에도 상소리로 남의 인격을 파괴시키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런때 입을 조심하라고 가르치며 경건의 참된 지혜를 가질 것을 명하는 야고보의 가르침을 음미해야 할 것이다.

2. 행치 아니하는 죄(악4장)
이 부분은 산상수훈과 잠언을 읽은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부분이 산상수훈과 잠언과 맥을 같이 하는가? 행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한다는 의미인가? 약4:5에 "성령이 시기하기까지"라는 구절은 구약에 없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1) 행함이 없는 믿음
다툼의 원인은 욕심이라 하였다. 즉 욕심은 세상 것과 연결되어 있다. 잘못된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리 없다(약4:3). 이런 믿음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두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하였다(마6:24). 약4:4에 간음하는 여인들은 약4:5과 연결해 볼때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자라는 의미이다. 성령님은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신다. 이에 대한 문자적 구절이 구약에는 없지만 약4:5이 구약 전체의 내용을 함축한 구절이라 할수 있다. 구약을 읽다보면 우리에 대한 사랑의 질투로 가득함을 알수 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란 마음을 슬퍼하며 남을 비판하지 않고 내일 일을 주께 맡기는 등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다.

2)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
흔히들 산상수훈의 내용은 지키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구약과 예수님의 윤리적인 가르침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또한 산상수훈은 톨스토이의 정신적 기반이었고, 인도의 간디는 톨스토이에 영향을 받았다. 비기독교인조차도 산상수훈의 위대함을 알고 실천하는데 기독교인이 행하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믿음의 참본질을 저버리는 것이다. 비기독교인이 조롱하기전에 신자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할 것이다.

3. 길이 참으라(약5장)
행함이 있는 믿음의 실천적인 부분을 야고보는 재차 강조한다. 본문에서는 부(富)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데 부가 단순히 죄악된 것인가? 모든 부가 다 죄악된 것인가? 모든 부가 다 죄악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야고보는 어떤면을 부의 죄악된 면이라고 한 것인가? 그리고 이는 주의 재림 사상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이런 종말론적인 시대에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늘나라에 쌓는 복
야고보는 부 자체를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부를 쌓는 방법과 재물로 인한 욕심과 재물의 사용법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약5:4에서는 노동력 착취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 약5:5에서는 물질을 올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정욕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즉 부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라 부로 인한 탐욕과 착취가 죄악된 것이다. 우리는 진정 부를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 사악한 부에 대해서도 심판이 곧 임하기 때문이다. 또 주님께서 곧 오시기 때문에 부를 올바로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종말의 때 교회에서는 기도와 찬양과 신유, 회심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약5:13-20). 이것이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2) 올바른 물질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경제가 부요해지고 향락이 증가하고 있음을 누구나 느낀다. 또 빗나간 재림 운동으로 기독교인조차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잊으려하고 회피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목적과 수단없이 부를 쌓아가는 것에 대하여 성경이 경고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건전하게 쌓아올린 부와 부의 올바른 사용은 종말의 때에 결코 부끄럽지 아니할 것이다.

신앙은 매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에 물든 사람들과 생활에 있어 다를 바가 없다면 복음에 능력이 있을수 없다. 이 실천의 중요성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기 때문에 더욱 강조된다. 행여 우리가 안일하고 나태한 생활을 함으로써 형이상학적인 공허한 믿음을 갖지 않도록 야고보는 행함을 강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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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고보서

1) 저자
야고보서의 서두에는 "하나님과 주 예수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저자라고 밝혀져 있다(약1:1). 전통적으로 교회에서는 이 야고보를 예수의 친동생으로서 예수가 승천한 후에 예루살렘의 감독이 되어 초대교회를 이끌어 갔던 것으로 믿고 있다. 베드로가 감옥에서 풀려난 후에 이 소식을 야고보에게 보고했으며(행12:17), 예루살렘의 사도회의에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 것도 이 야고보였다(행15:6-29).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의로운 야고보'로 불리웠으며,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으로서 대단히 엄격하고 금욕적이며 유대의 모든 율례에 철저했던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다. 모든 유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이 야고보를 불의한 방법으로 돌로쳐 죽인 대제사장 아나누스(Ananus)는 정직한 유대인들의 항거를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만에 쫓겨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은 당시 유대 사회 전체에서 야고보가 얼마나 높은 지위와 평판을 얻고 있었는지를 잘보여 준다.

2) 목적
야고보가 의롭다는 것은 도덕적 원동력이 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구원하는 힘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그는 말로만의 의로움만을 주장하면서 편파적이면서 진실을 가린채 허위만을 드러내고 있고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있는 교회와 거짓된 지도자들의 올바른 양심을 자극하려 했다.

3) 오늘을 향한 교훈
첫째는 입으로만 거룩을 말하면서 위선적인 자들과 사랑을 말하면서 형제와 다투는 자들을 향해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해야 함을 가르친다. 나아가서 참된 신앙은 삶을 바꾸어서 삶 속에서 행해져야 함을 말한다. 둘째로 구약에서 예언자들이 사회의 개혁자들이었듯이 야고보서는 이 사회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과 사랑의 실천으로 바꿀 것을 주장하는 신약의 예언서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드리는 것뿐만아니라 자신의 현재적인 삶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거되고 보여져야만 하는 것이다.

2. 율법

1) 바울의 율법
바울은 일반적으로 '율법'이라는 단어를 모세의 십계명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율법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바울은 율법아래서의 삶과 그리스도의 복음 아래서의 삶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면서 율법의 불완전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율법은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참뜻의 부정적인 모습을 표현한 금지령으로써, 다만 죄를 드러낼 뿐이다.(롬7:7) 율법은 실제로 죄를 자극하며 (롬4:15 ; 롬5:20 ; 갈3:19),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전15:56), 바울은 율법 자체를 죄와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죄와 율법을 밀접하게 연관시켰다(롬3:20). 바울에게 율법은 상대적인 것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이 율법에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상대적이며, 일시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이 율법에 나타난 것이 아니므로 상대적이며,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근거한 계약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완성과 성취의 중간에 위치하기 때문에 일시적이다. 이 율법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사람들에게는 율법은 더이상 아무 효력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율법의 모든 것이 마침이 되는 것이다.

2) 야고보의 율법
야고보가 사용한 율법은 '자유의 완전한 율법'이며, 이는 약1:21-23에 표현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의 요약된 표현이다. 말씀은 복종을 요구하지만 자유이다. 자유의 율법은 최고의 법(약2:8)이며, 고정된 율법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롬14:4). 그리스도의 구속과 사랑 안에서 스스로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바울처럼 잘못된 율법 이해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은 관심 밖이었으며, 약2:14-26에서 바울의 율법에 대한 설명을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공격하면서, 참된 신앙은 자유와 사랑의 율법에 의해서 스스로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3) 루터의 율법
루터의 율법에 대한 설명은 철저히 바울을 따르고 있다. 이는 루터의 '율법과 복음'이라는 설명과 '이신칭의' 교리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죄와 사망에 이르게하는 율법에 매여있는 인간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구원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루터는 야고보의 율법관이 마치 율법이 우리의 '칭의'에 기여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야고보서를 지푸라기라고 했다. 그러나 야고보의 율법은 구원받은 자의 율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이점에서 칼빈의 '제3의 율법', 즉 구원받은 이후의 율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점은 바울과 야고보의 두가지의 율법 이해를 모두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믿음과 율법(행함)의 관계는 오랫동안 교회의 논쟁거리 였다. 구원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에 더욱 논쟁이 치열하였고 결국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이 모순된 책인가?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모순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야고보의 신학은 오히려 바울과 보완적으로 조화를 이룬다.

1. 도를 행하는 자(약1:19-27)
야고보는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이는 루터의 이신득의 사상과 대치되는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화시키고 행해야 하는가? 특히 말하고 듣는 행동을 어떻게 하며, 행함이 있는 경건이란 무엇인가?

1) 온전한 경건
이 부분은 루터가 거부한 부분 중의 한부분이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클레이(Barclay)는 그리스도교 안에도 윤리적인 요구가 있다고 밝힌다. 이러한 윤리적인 요구를 강조하는 야고보서를 통해 참된 자유를 발견케 한다. 종교개혁을 한 위대한 신학자의 견해라고 해서 모두 옳지만은 않다. 야고보서를 평가한 루터의 견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 이후의 종교개혁자들 모두 야고보서의 정경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 부분에서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와 성내기는 더디하라고 명한다. 이는 잠13:31에서 뿐만아니라 동서고금의 삶의 교훈이다. 그리고 외적 경건과 더불어 내적 경건에 힘써야 한다(약1:27)

2) 경건의 삶
현대를 PR 시대라고 부른다. 자기 주장을 소리높여 외치지 않으면 손해보는 시대며, 법정에서도 말 잘하는 변호사가 이기게 되어있다. 그리고 종교를 장식물로 생각하는 자들과 이신득의 사상을 잘못 받아들여 죄짓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자들도 많다. 이러한때 야고보는 현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율법을 온전히지켜 외적 경건과 내적 경건을 지키라고 명하고 있다.

2.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2:1-13)
오늘날에도 실제적으로 교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를 교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가? 이런 일은 어떻게 율법에 어긋나는가?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동등한 인격
초대교회의 교인들의 대부분은 비천한 자들과 노예들이었다. 그래서 어쩌다가 부자나 고위층의 사람이 회개하고 교회에 나오게되면 이는 귀한 전리품을 다루듯이 하여 자연적으로 교회내에서도 신분에 따른 차별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는 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바리새인들이 흠을 잡을수 없었던 부분은 예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은데 있다.
또 예수님도 온전한 율법을 이웃 사랑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이에 대해서는 심판이 있게 된다(약2:13). 그러므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신앙인은 좇아가야 한다. 즉 온전한 율법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2) 교회 안에서의 평등
최근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선택하는 가장 큰 기준은 그 교회의 구성원의 사회적 지위라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성원 중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게되면 이는 교회의 자랑이 되고 부흥의 원인이 된다. 즉 교회가 사회의 계층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이때에 일부 교회에서 건축등의 이유로 경제력이 어려울때일수록 어느 부자든 교회에 등록하여 헌금을 많이 내기를 목회자들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교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약2:14-26)
바울이 이신득의 교리를 가르칠때 사용한 구약의 인용(아브라함)을 야고보도 인용하면서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고 있다. 야고보와 바울의 가르침이 서로 다른 것인가? 아니면 서로 조화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1) 행함의 중요성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인 프란쯔 무쓰너(Franz Musner)는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다고 보았다. 유대 정통에 있는 야고보와 헬라 정통의 문화권에 있는 바울이 서로를 공박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주석 학자인 영국의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두 서신은 모순된 것이 아니라 조화를 지녔다고 하였다. 즉 바울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맹목적인 순종을 공격한 것이나 야고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을 강조한 것이므로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행함으로 인한 의를 부르짖었으나 야고보는 사람 앞에서 행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약2:18). 바울과 야고보 모두 복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고 서로 접근방법이 다를뿐이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도 바울의 교리가 야고보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행함없는 믿음이란 이신득의와 모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갖춘 자가 당연히 행해야할 바를 행치 않을때 그것은 믿음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2) 온전한 그리스도인
오늘날 믿음이 남용되고 있음을 누구나 인식한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은혜를 남용하고 있다. 이를 두고 본 회퍼(Bon hoeffer)는 '값싼 은혜'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싸구려로 취급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복음에의 순종과 행함의 믿음이 필요하다.

야고보는 바울의 신학(이신득의)을 남용하고 있는 이들에게 행함의 중요성을 보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 행함은 복음에 대한 순종적인 행함이다. 이신득의를 남용하여 행함이 없는 이들에게 야고보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가르친다. 참된 믿음이란 자연적으로 행함이 뒤따르게 된다고 루터(Luther)도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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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고보서에서 반대의 대상

① 야고보는 바울을 반대하였는가? 얼핏 보기에는 야고보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을때 그는 롬3:28, 롬9:32, 갈2:16의 중심적인 바울의 진술들에 반대하는 변증을 하고있는 듯이 보인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2:24). 바울이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인용하였던 아브라함의 믿음에 관한 말씀인 창15:6의 주석에 비추어 야고보가 2:21 이하에서 자신의 명제를 변증적으로 전개하고 있음을 볼때 이러한 인상은 더욱 밑받침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속이는 것이다. 롬3:28에 표현된 원리는 야고보에 의해 다루어진 표어와는 다른 말로 표현되었다. 롬3:28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없는 믿음을 통한 칭의를 선포하였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변증은 바울의 명제가 아니라 그로부터 파생된 표어를 향한 것이었다.
② 야고보는 이단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인 태도, 즉 하나님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형이상학적 이론이 되어버린 기독교에 직면해 있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론을 너무도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것들은 더이상 행실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지성주의를 통해 질식사하는 생명없는 정통과 신앙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세상에 연합하여 살아가면서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리는 자유주의일 수도 있다. 야고보서의 저작 당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 볼때 그것은 두번째 세대의 전형적인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항한 야고보의 변증은 신약에서 눅6:46에 나오는 말씀의 편집을 통해 마7:21과 같은 진술로 확대 해석한 마태와 가장 유사하다고 하였다

2. 야고보와 바울

① 야고보는 해이해지고 습관적이 되어버린 기독교인을 향하여 행위의 실천적인면을 강조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유대인들의 특권과 갈라디어서 3장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주장하는 유대주의화된 그들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즉 바울은 율법이라는 기독교 이전의 길을 고수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복음의 참진리를 피력하였다. 반면 야고보는 해이해진 기독교적 신앙을 향하여 살아 움직이는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하였다.
② 야고보가 자주 사용한 단어는 믿음으로, 이 믿음은 유대교적 바탕 위에 기독교적 행함이 있어야 된다고 말하였다. 반면 바울의 행함은 어떤 문맥과도 적합하지만 믿음과 관련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 더 낫다. 바울에게는 믿음은 그 내용의 기능이었다. 사람은 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 의하여 결정되도록 스스로를 허용하는 정도만큼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믿음은 말씀의 창조였다(고후4:4,6). 믿음은 그 내용의 힘에 의해 사랑을 통해 역사하였다(갈5:6).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롬1:5)으로써만 존재하였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행함'이라고 부른 것을 바울은 의의 열매 또는 성령의 열매(빌1:11 ; 갈5:22)라 불렀다. 때때로 바울은 이 열매를 행위라 지칭하기도 하였다(골1:10). 그러나 일반적으로 바울은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모세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의 행위에 대하여 행위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야고보에게 믿음은 랍비신학에서처럼 다른 행위들과 나란히 있는 행위가 아니라 순전히 현상적이고 경험적인 유형의 태도, 믿는 행위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유형의 태도가 그에 걸맞는 행실, 즉 행함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그토록 애써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행위'라는 용어의 서로 다른 용법과 관련하여 바울에게 '행위'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야고보는 바울이 성령의 열매라 부른 것을 '행위'라는 용어로 이해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는 '행위'를 모세 율법의 의미로 말한 적이 결코 없었다.
③ 이러한 용어 사용의 차이를 알면 우리는 야고보와 바울간의 내용적이고 신학적 관계를 규명하는데에 방향을 잡을수 있게 된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야고보가 행위에 관하여 말하였던 것을 바울이 의의 열매로 말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은 부정적인 방식으로 야고보에게 동의했을 것이다. 그에 걸맞는 행위를 통해 드러내 보여지지 않는 믿음은 의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고전6:9 ; 고전10:5-13). 물론 바울은 이 순종의 결여를 행함없는 믿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순종이 없는 곳에 과연 믿음이 존재하는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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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여러시험이 있다. 멸망에 이르게 하는 유혹적인 시험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더욱 완숙하게 하는 목적적인 시험이 있다. 이런 시험들을 잘 이겨내어 생명의 면류관을 얻도록 야고보는 권면하고 있다.

1. 믿음의 시련(약1:1-4)
서신 서두에서 수신인과 발신인을 밝히고 있다. 서두에서 밝힌 발신인 야고보는 누구이며, 그의 호칭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수신인인 12지파는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 여러가지 시험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믿음의 시련을 이겨낸 인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 시험의 목적
이 서신의 저자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자신을 형의 종(노예)이라고 한 표현은 그가 예수님을 육체의 형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철저히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서신의 수신인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이다. 마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의미하는듯 하지만 이 당시에도 이미 12지파는 역사속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메시야 시대에 회복되리라 예언된 이스라엘 12지파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에서 발견한 것이다(렘3:18). 약1:2의 시험은 멸망케하는 유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목적이 있는 시험이다. 이 시험의 목적은 성장시켜 주고 단련하게 한다. 이 시험의 결과는 인내이며 이는 인간을 온전케 한다.

2) 시험을 통한 교훈
이 서신은 어느 특정한 교회에 쓰여지지 않았다. 즉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란 오늘날에도 적용이 되어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오늘 우리에게 행한 주님의 서신인 것이다. 또 우리가 시험을 만났을 때일수록 원망, 불평할 것이 아니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는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지혜를 구하라(약1:5-11)
시험을 당한 자에게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라고 한다. 그러면 어떤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지혜를 하나님은 어떻게 주시는가? 그리고 어떻게 지혜를 구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야고보는 낮은 자와 부한 자에게 각기 다른 메시지를 전하는가?

1) 고난 속의 지혜
메튜 헨리는 고난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을 올바르게 감당할 수 있도록 지혜를 간구해야 한다고 하였다. 고난 속에 지혜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이 지혜는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적인 지혜도 아니며 배부름을 위한 어리석은 지혜도 아닐 것이다. 이런 지혜를 하나님은 아주 단순하게 주신다(약1:5). 그러나 조건은 있다.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약1:6,8). '두 마음을 품는다'는 의미는 두주인을 섬기는 불충직한 하인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마6:24)에서 알수 있다. 야고보는 가난한 자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부한 자에게는 겸손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사회적으로 미천한 자라 하더라도 예수님이 피로 산 귀한 존재이다. 부한 자는 아라비아 사막으로부터 팔레스틴에 불어오는 열풍에 금방 시들어 버리는 꽃의 화려함을 깨달아 삶을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2)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고난에 처할수록 기도를 올바르게해야 한다. 무조건 고난을 피해가려는 습성은 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지혜롭게 이겨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어려움을 피해다니고 순간 순간 잘 되려는 심정은 무속 신앙의 기복과 다를바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이세상 것을 자랑하지 않을 겸비함을 갖추어야 한다.

3. 승리의 면류관(약1:12-18)
시험에 관련한 내용이 두번 반복되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시험 받는 자가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 내부의 근본적인 죄성과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죄악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1) 욕심으로 인한 시험
시험, 시련을 이겨내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 고대 세계에 면류관은 왕권을 의미하고 승리와 명예를 뜻하였다. 그러므로 시련 그 자체는 불행이 될수 없고 오히려 영광에 이르는 길이 된다. 그러나 약1:13의 시험은 자기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시험이다. 이 내부의 욕심에서 나오는 죄성의 특징은 핑계이다. 아담과 하와가 각각 자기 죄에 대하여 핑계를 댄 것처럼 욕심에서 비롯된 죄성은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시험을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 욕심에서 비롯된 죄의 심각성은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선하시고 거룩하시다(약1:17). 시험과는 관계가 없다. 이런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2) 욕심에 대한 책임
현대 자본주의 특징 중 하나는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유발하기 위해 욕심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나은 것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이기적 욕망에 빠지기 쉽다. 이런 욕망은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채워지지 않을때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이럴때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타인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기를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는 욕심의 시험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고 한다. 이런 위기에 처할때 우리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

인간이 시험을 피해 살아갈 수 는 없다. 다만 자신에게 닥치는 시험을 지혜롭게 극복해야 한다. 이 지혜를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그러나 더욱 두려운 것은 인간 내부에서 올라오는 욕망의 유혹이다.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있는 오늘날 많은 이들이 돈, 섹스, 명예 등의 욕망을 좇아 살아가고 있다. 이 대열에 끼어들지 않으면 소외되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그리고 이런 욕망이 채워지지 않을때 부모, 국가, 하나님 등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욕심이 죄를 낳고 결국에는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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