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의지하고 시험을 기뻐하십시오

[야고보서 1장 1절~11절]
1절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절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절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절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5절 -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6절 -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8절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9절 -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10절 -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1절 -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하나님의 종 야고보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합니다. 성도는 시험을 당할 때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드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오직 믿음으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낮은 자는 자기의 높임을,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해야 합니다.

1.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1~4절)
인생의 시험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의 믿음이 어떤지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며 세속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음을 알고 주님께 더욱 가까이 갑니다. 그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하게 만들고, 인내할 때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시험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구원으로 초대되지만, 고난당할 때 인내하지 못해 중도에 탈락합니다. 그러나 시험이 다가와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당할 즈음에는 피할 길을 주십니다(고전 10:13).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주님이 그 자리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 묵상 질문
시험을 당해도 기쁘게 여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최근에 당한 시험은 무엇인가요? 그때 어떻게 반응했으며, 하나님은 내게 어떤 모습을 원하셨을지 생각해 보세요.

2. 하나님께 구하라 (5~11절)
시험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황과 처지를 모두 아시기에, 우리가 시험을 감당할 지혜를 구하면 부족함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후히 주십니다. 지혜란 다름 아닌 전능하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시험당할 때 하나님이 선하신 분인지,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인지 의심하며 불안해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시험을 통해 연단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낮아지기도 하고 부유해지기도 하면서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낮은 처지에 있다고 실망할 필요도, 부유하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해가 뜨면 곧 시들어 버릴 풀의 꽃과 같은 세상의 부유함 대신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붙드십시오.
* 묵상 질문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다는 것은 어떤 상태를 말하나요?
* 적용 질문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마다 후히 부어 주실 것을 신뢰하나요? 지금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믿음의 시련이 저를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깨닫고 기뻐하며 감사하게 하소서. 고난과 유혹이 삶을 흔들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인내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신유의 예수님

[야고보서 5장 13절~18절]
13절 -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14절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절 -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16절 -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17절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절 -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하고 마지막날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병든 자를 고쳐주신 사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 가운데 절반 이상이 병든 자를 고쳐주신 기사로 되어 있는 것을 통해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아 영생얻는 것을 원하시지만 또한 우리 육신의 병든 것도 고쳐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역사상 믿음의 기도로 예수님의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삼서 1:2​절에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하신 말씀대로 예수 믿고 은혜 받아 그 영혼이 바로 설 때 병이 낫고 건강의 축복을 받아 더욱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들도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질병과 사고가 많은 세상에서 사는 성도들이 늘 하나님의 신유의 은총을 믿고 의지하고 살 때에 병마를 물리치고 건강의 축복을 누리며 살 수가 있는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도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꼭 믿고 간구할 때에 육신의 병도 고쳐주시는 것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 해 전에 저희 교회에 전 미국 대통령의 여동생인 루시 카터 여사가 방문해서 설교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세 마디가 있습니다.

첫째로, 영혼의 병은 회개함으로 고칠 수 있고, 둘째로, 정서적인 병은 용서함으로 고칠 수 있고 셋째로, 육신의 병은 믿음으로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진리가 담겨진 말씀이라고 봅니다. 그렇습니다. 병에는 육신의 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병도 있고 정신적인 혹은 정서적인 병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병도 예수님은 능히 고치실 수가 있습니다.

히 11: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예수님은 옛날에만 고치신 분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계셔서 많은 병자를 고치시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음의 몇 가지를 통해 신유의 예수님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성경을 통한 신유의 근거
우리가 병고침을 구할 때 무슨 근거에 의해서 병고침을 받을 수 있는지 그 근거를 성경에서 명확히 찾아보고 알아야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보고 여러분이 기도하는데 힘을 얻고자 합니다.
베드로전서 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 죄를 담당하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채찍에 맞아 살이 찢기시고 피흘리신 것은 우리의 질병을 감당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사야 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기서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메시야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질병이 나음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 8:16,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하신 말씀처럼 예수께서 나의 연약함과 나의 병을 짊어지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고 기도해야 병마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막 16:17,18절​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내 이름으로…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예수께서 약속을 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오늘날도 손을 얹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말 4:2절에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고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서 뛰는 송아지같이 건강케 해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눅 10:19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신유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2. 신유를 구하는 기도의 자세
첫째로,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간절한 믿음의 기도라야 병고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받는 사람이나 기도해 주는 사람이나 다같이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의 야고보서 5:15절에서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고쳐주실 것을 꼭 믿고 기도할 때에 주님께서 고쳐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1:23-24절에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알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기도가 그렇듯이 주님께서 병을 고쳐 주시기를 바란다면 기도할 때 이미 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은줄로 믿어버려야 병마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 전에 부흥회하는 동안에 어느 자매님이 병 낫게 기도해 달라기에 '꼭 나을 줄로 믿습니까' 했더니 '아니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보려고 그래요' 그래서 아예 기도를 안해 준 일이 있습니다. 기도할 때 받는 이나 기도해 주는 이나 병이 다 나은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기도해야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을 줄 믿고 손을 대었더니 그 순간에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도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가는 것을 알았습니다.

둘째로, 회개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병이 죄의 값으로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런 때에는 회개해야 빨리 낫습니다.
마가복음 2:5절​에 보면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내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 병이 나았다고 아니하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을까요? 그 병의 원인이 죄였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야고보서 5:15절에도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여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기도받는 사람이나 기도하는 사람이나 다 믿음을 살펴서 회개할 바를 회개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게 하는 것입니다(이사야 59:1). 시편 66:18절에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죄가 숨어 있거나 품고 있으면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병이 나아도 자기가 잘나서 나은 줄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서 나았으니 반드시 예수의 이름에다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시편 115:1절에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하고 시편 기자는 노래했습니다. 병 고침을 위한 근본 기도하는 자세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역사가 나타나지 자기의 무엇을 나타내고 자기가 영광을 취하려고 하면 잘 낫지도 않지만 나아도 결국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처음 저도 은혜받고서는 병자를 위해 기도한 뒤에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내 체면이 무엇이 되나' 등등 안나으면 창피당할 것을 자꾸 생각해서 용기를 내지 못했으나 얼마 후에 병자가 나으면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고 안나으면 내가 수치를 당하겠나이다 하는 마음의 감동이 온 뒤에는 회피하지 않고 담대히 기도해줍니다. 사실 기도해 준다고 100% 다 낫지는 않습니다. 병자 가운데에는 하나님이 반드시 불러가실 사람도 있고, 또는 나아서 하나님이 영광받으실 환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은 죄를 깨닫고 회개해야 할텐데 완악해서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는 아무리 '믿습니다'를 되풀이 해도 병이 낫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안나으면 우리 인간편에 무엇이 잘못되었을 것이므로 주저할 것도 없고 창피할 것도 없습니다.

넷째로,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대부분의 병이 사단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물리치면 깨끗이 낫을 때가 많습니다.
사도행전 10:38절에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도 보면 마귀에게 눌려서 병들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도 사단이 치매 몸에 악창이 난 것을 알 수 있고 사도 바울도 사단의 찌르는 가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해서 예수의 이름과 예수의 보혈의 능력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며칠 전 어떤 집사님의 아들이 학교에 갔다가 갑자기 열이 펄펄 나면서 몸이 몹시 아파서 조퇴하고 왔습니다. 집사님 내외분이 당황해서 병원으로 업고 가려다 말고 전화로라도 기도해 달라고 해서 저는 집에서 기도했습니다. 아픈 아이에게 손을 얹으라고 해놓고 서재에서 전화를 통해 간절히 병마를 물리치는 기도를 해줬더니 금방 잠이 들더니 다 나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는 신유의 예수님을 굳게 믿고 기도함으로 육신의 병마와 싸워 이겨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 아 멘 -

하나님과 사귀는 자에게 약속된 보장

[야고보서 2장 23절]
23절 -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오늘은 '하나님과 사귀는 자에게 약속된 보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좋은 친구를 얻는 것은 인생의 귀중한 재산이 된다고 할 만큼 친구를 사귀는 것은 값지고 의미있는 일이지만, 하나님과 친구가 되는 것은 더욱 놀랍고 값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 시대에 아브라함(Abraham)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기고 가깝게 지냈는지 하나님은 그를 친구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 관해 '저 사람은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얼마나 그 사람이 부럽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한 그대로만 한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를 당신의 친구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도 하나님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먼저 서로 신뢰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참다운 벗은 서로 믿고 신뢰하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어릴적부터 살아오던 고향땅과 자기 집을 떠나 낯선 땅으로 가라고 지시하실 때,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또 고향을 떠나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떠났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웬만하면 '왜 가야 합니까? 고향집을 떠나면 대신 뭘 주시렵니까? 언제 다시 돌아오게 됩니까?'하고 물었을텐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무조건 순종하고 떠났습니다.
여러 해가 지나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어 마음 속에 슬픔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꼭 믿었습니다.
때가 되매 아브라함과 사라(Sarah) 사이에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기가 막히게도 하나님께서는 백세나 되어서 얻은 소중한 그 아들 이삭을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허리에서 한 국민이 나올 것이라고 약속한 바가 있었는데, 그 이삭이 죽으면 아브라함의 씨가 없어지는 난감한 처지였습니다. 이런 지경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시고 또 예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이 믿은 그대로 하나님은 그 약속을 꼭 지키셨고 아브라함이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바쳤던 아들 이삭에게서 한 민족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당신의 자녀들에게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우리 생각대로 바로 내일이나 다음 주에나 내년에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 참고 기다리고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약속이라도 말씀하신 것은 어기시는 법이 없습니다. 눈으로 보기에 틀린 것 같고 나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 같아도 끝까지 기다리며 참고 신뢰해야 합니다.
한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또한 아브라함을 신뢰하셨습니다.
창 18:19절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우리 모두에게도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의 영향은 타인과 이웃에게 치명적인 해를 주거나 혹은 큰 축복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신뢰할 수 있어야 친구의 관계가 더 돈독해지며 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인격과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신뢰하실 만한 신실한 것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늘 대화가 끊이지 않고 서로 교제해야 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은 항상 함께 걷고 함께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관영한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 성을 멸하기로 작정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 18:17)고 하시면서 그의 계획하신 바를 아브라함에게 숨김없이 다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친구가 친구에게 하듯 서로의 깊은 속을 이야기 했습니다.
대화가 없이는 절대로 우정이 시작될 수없고 두터워질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벗이 되고자 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기도가 끊이지 말아야 합니다. 차를 가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순간마다 호흡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고 의논하며 살아야 합니다. 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을 토하며 매일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살아야 깊은 영적인 교제를 하나님과 나눌 수 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벗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이의를 제기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거기에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또 하나님도 그의 독생자 예수를 아브라함과 우리 모두를 위해 희생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벗이라면 전적으로 그를 위해 봉사하며 섬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위해 섬기며 봉사한 훨씬 이상의 더 크고 좋은 것으로 보상하시며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으로 보내사 십자가에 넘기기까지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봉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장은 무엇일까요?

1. 절대 안전을 보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 15:1절에서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방패로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부자로 많은 원수들 가운데 살면서 많은 위험을 만났지마는 아브라함은 절대 안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돌봐주시고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약속을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보이지 않는 임재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어린아이들을 돌봄과 같이, 목자가 양떼를 돌봄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2. 완전한 보상을 보장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랐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번창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친구에게 결코 실망을 안겨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는 겨우 아들 하나와 손자 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400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 땅에 있을 때에는 그 수가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많아졌습니다.
아브라함은 참으로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되었고 그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과의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가축과 종들이 너무 많아서 함께 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들끼리 자주 싸우게 되니까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기를 '롯아, 우리 앞에 넓은 땅이 있지 아니하냐. 네가 마음대로 선택해 가거라. 나머지를 내가 가지마'라고 했을 때 롯은 물욕에만 눈이 어두워서 기름진 땅을 택하였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때 상황을 본다면 아브라함과 그의 가축들은 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20년 후에 아브라함은 큰 부자가 되었고 롯은 무일푼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친구로 사귀며 충성스럽게 따르는 사람은 결코 실망을 당하지 않습니다.
다윗(David)이 시 37:25절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경외하며 친근히 하는 의인의 삶을 책임지시며 필요들을 채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며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우선으로 두고 하나님과 사귀며 하나님을 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보상을 베푸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영광스런 미래를 보장하십니다.
우리는 말할 때나 걸음을 걸을 때나 생활할 때 어떤 친구를 가까이 하면 반드시 그 친구를 닮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을 친구로 사귀느냐에 따라 선한 인생과 악한 인생으로 결정되는 수가 많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걷고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과 가까이 사귀어 살면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됩니다.
요일 3:2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 아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첫 이삭이 나타나면 나중에 올라오는 이삭도 처음 이삭과 같은 것같이,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니 우리도 장차 부활하게 되며 그때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미술가의 집에 방문했는데 마침 그 미술가는 집에 없었습니다. 그 미술가의 어린 딸만 있다가 그 손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녀는 손님을 아버지의 화방에 모시고 들어가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여 주면서 '이것이 우리 아버지의 아름다운 작품들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곳에 와서는 거칠게 선만 죽죽 그은 화판을 보이면서 '이것도 아빠의 그림입니다.
아저씨는 아직 그 속에 감추인 미를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빠가 그 그림을 완성하게 되는 날에는 정말 아름답고 멋있는 그림이 됩니다. 아빠는 항상 아름다운 그림만 그리거든요'라고 설명을 하더랍니다.
우리의 인격이나 우리 삶이 지금은 아름답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죄도 많이 짓고 실수도 하며 모난 부분과 결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차 우리를 완성하시는 날, 우리는 만왕의 왕과 함께 아름답게 나타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나에게 진정한 친구 셋만 있다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겠다'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온 천하를 지으신 크신 능력의 하나님, 우리를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좋으신 하나님과 친구로 삼고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며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제를 나누며 그분을 섬겨서 하나님과의 우정을 더 돈독히 합시다.
참으로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친근히 사귀어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제목 : 성도의 시험 (여찬근 목사님)

[야고보서 1장 1절~4절]
1절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2절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절 -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4절 -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성도의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통하여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그 자체가 고난이요, 시험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시험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믿음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오늘은 ‘성도의 시험’이란 부분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성도에게는 시험이 있습니다(2절).
성경에는 시험과 연단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연단이라는 말은 대장간에서 금속을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달구고 담금질하고 망치질 하면서 더 강하게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말합니다. 성도의 시험은 이런 연단의 과정처럼 당연하고 의례적으로 찾아온다고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오히려 세상에서 미움 받고 시험받는 것이 성도의 길임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요일 3:13).
또한 본문은 성도의 시험은 한 가지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여러 가지 형태의 시험을 당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여러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돌이 떡 덩이가 되게 하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 이처럼 성도에게는 다양한 방법과 형태로 여러 가지 시험이 찾아옵니다. 경제적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건강으로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인간관계로도 시험이 올 때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시험 받고 계십니까? 시험 당하는 일을 이상히 여기지 말고 성도로서 시험받는 것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성도의 시험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3절).
성경은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인내하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즉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 시험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시험은 한 번 오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성도의 삶속에 찾아오고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험을 허락하실 때,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데, 그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히 선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임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시험과 연단은 궁극적으로 주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칭찬받고 또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합니다(벧전 1:6이하).
그런데 우리는 본능적으로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거부합니다. 따라서 믿음이 아니면 시험을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시험은 성도의 인내를 이룹니다. 연단이라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인내에 이르게 하고, 우리를 가치있는 존재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때까지 믿음으로 더 겸손해지고 더 낮아지도록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준비된 그릇으로 만들어져 가게 됩니다. 두드림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나를 손에 들고 쓰실 때까지 그 인내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 바로 이 시험의 과정입니다.
시험을 통해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온전히 기다리고 의지하는 믿음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기다리게 하는 믿음이 만들어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험 가운데서도 인내로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성도의 시험에는 최종적인 결과가 있습니다(4절).
본문에서 ‘온전하고’ 라는 말은 ‘인격적 성숙’을 의미할 때 쓰는 말입니다. ‘온전하고 구비되어졌다’는 말은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는 일에 온전하며 부족함이 없게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경제적으로, 인간관계를 통해서, 건강을 가지고 시험하시고 연단하시면, 그 때 우리 안의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시험은 우리 속에 있는 불순물을 빼내게 합니다. 더러운 욕망과 옛 성품, 이 욕망들을 빼내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하게 되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순금같이 나오도록(욥 23:10) 성도의 마음을 연단하여 신앙의 인격을 다듬어서 온전한 성도로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잠 17:3).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십시오. 나를 깎아내시고 내 속에 있는 독소를 뽑아내시고 불순물을 뽑아내시는 주님이 나를 더 깎아내고 선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순금같이 나아오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시험과 사단의 시험

[야고보서 1장 12절~15절]

12절 -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13절 -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절 -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절 -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야구선수는 공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스트라이크(Strike)인지 볼(Ball)인지를 잘 분별해서 칠 것은 치고 피할 것은 피해야 되는 것같이, 우리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과 사단으로부터 오는 시험을 잘 분별해서, 받아 넘길 것은 잘 받아 넘기고, 피할 것은 피해야 되는 것입니다.
대체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은 잘 받아서 참고 견디어야 하고, 사단으로부터 오는 것은 피하던가 철저히 대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은 엄격히 말해서 결국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시련과 연단(Test, Trial)이고, 사단이 주는 것은 우리을 넘어뜨리려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죄짓게 하거나 넘어뜨리기 위해서 유혹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우리들로 하여금 금이 용광로의 뜨거운 불을 통과하여 순금이 되듯이 우리의 명성과 인격을 성장, 발전케 하고 마침내 복을 주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지만, 사단의 시험은 우리의 영성을 무디게 하고 범죄케 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시험인지 사단이 주는 시험인지 바로 분별하고 바로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시험과 사단의 시험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1. 하나님의 시험은 영을 자극하지만, 사단은 우리의 육신을 자극합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과 시련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피폐케 하는 육성과 죄성을 벗겨버리고, 우리의 심령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로부터 독자 이삭을 잡아 바치라고 하는 어려운 시험을 받았지만, 이기고 난 후 믿음이 강해지고 더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과 시험을 통하여 우리의 영을 자극해서 항상 발전시켜 주시고 마침내 더욱 큰 그릇이 되고, 더 큰 축복을 받게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하였고, 시 119: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사단 마귀가 주는 시험은 반대로 육신을 자극해서 유혹에 빠지게 하고, 넘어지게 하고, 마침내 범죄케 만드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가롭게 늦잠 자고 지붕 위를 거닐다가 아름다운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고 육신의 자극을 받아 무서운 죄를 범해 일평생 그 죄값으로 환난과 재난이 그 가정을 떠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에서 보디발 장군의 집 머슴살이를 할 때, 뜻밖에 그 높은 상전의 아내가 유혹을 하면서 육신을 자극해 왔지만, 붙잡힌 옷을 벗어 던지면서까지 여인의 부드럽고 달콤한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사단은 아담과 이브를 시험할 때도,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임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이도록 육신을 자극해서 범죄케 했습니다. 실로 사단은 음욕, 물욕, 명예욕과 같은 육신의 욕망의 줄을 타고 들어와 자극하며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단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식욕, 명예욕, 안목의 정욕을 다 자극시키며 시험했지만, 예수님은 그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뿌리쳐 이겼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속이는 영인 사단이 육신을 자극하며 시험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단호히 쳐서 물리쳐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시험은 쓰지만, 사단의 시험은 달콤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성과 죄성을 벗겨버리기 위해 고통스럽고 쓰디쓴 연단과 시련을 주시지만, 사단은 우리를 실족케 하고 범죄케 하기 위해서 육신의 정욕을 자극하는 달콤한 것을 미끼로 쓸 때가 많습니다.
요셉은 육신적 쾌락도 누릴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고, 잘만하면 돈도 벌 수 있는 달콤한 유혹이 왔지만, 단호히 물리쳤습니다. 요사이 약삭빠른 방법으로 사는 사람한테는 요셉이 바보처럼 보이겠지만, 후에 요셉은 수천 배의 물질과 명예와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육신을 자극하는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머리가 다 깍이우고 힘 잃고 눈이 뽑혀 맷돌질하며 고통을 당하다가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습니다. 처음은 달콤했지만, 후에는 수천배 쓰디쓴 맛을 맛보았습니다. 명예도, 권력도, 물질도 다 잃고 창피를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처음에 쓰디쓴 맛을 주지만 멋 훗날 수천배, 수만배 단 맛을 줍니다. 그러나 사단의 시험은 처음엔 달콤한 맛을 주지만, 먼 훗날 수천배, 수만배 쓴 맛을 줍니다. 음란한 것, 술 마시는 것, 투전하는 것, 마약 먹는 것,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사단이 숨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들이 무엇보다 육신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고 달콤해 보이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과 휴식과 하나님의 법도와 신앙 양심이 허락하는 즐거움과 쾌락을 누려야지 수지맞는다고 아무 것이나 주워먹고 기분 좋다고 아무 짓이나 하다간 빠져나올 수 없는 사단의 덫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고로 교묘하고 달콤하게 다가오는 사단의 시험을 바로 분별하여 단호히 물리치고, 당장은 쓰지만 후에는 유익을 주는 하나님의 시험은 감사와 순종함으로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시험은 자아를 깨뜨리고, 사단은 자아를 앞세웁니다.

우리의 자아는 옛 사람으로서 육에 속한 것입니다. 이 자아는 범죄의 시초가 되는 것이며, 사단의 이용물이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마 16:24절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옛 사람에 속한 자아가 부인되고 깨어진 후에, 영에 속한 사람으로 다시 살 때 참된 내가 사는 것입니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뜨려 버리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나올 수가 없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슬픔과 실패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옛 자아를 깨뜨리는 작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은 '나'를 앞세우고 '나'를 높이고,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뜻'을 주장하게 만듭니다. 사단이 아담과 이브를 시험할 때도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도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자아를 높이고 앞세우는 일을 독려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단은 자아를 내세우게 하고, 자기 사랑, 자기 영예, 자기 유익만 생각하게 만듭니다.

 

성도 여러분, 고전 10: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어떤 시험이든지 담대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때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부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과 마귀로부터 오는 시험을 잘 분별해서 하나님의 시험은 믿음과 인내와 순종함으로 잘 통과하시고, 마귀의 시험은 피하거나 대적하여 물리치고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승리하시면 올 한해도 여러분의 신앙 수준은 한 등급씩 더올라가고 더 귀한 그릇이 되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 아 멘 -



Ⅰ.부자들에 대한 경고 (5:1-11절)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먼저 죄인들에게 경책을 하고 다음에 성도들에게 당부를 한다.

1. 죄인에게 한 말을 살펴 보자. 사도 야고보는 여기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동의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유대인 중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았고 그들 중 많은 수가 믿고 나왔으나 부자들의 대다수는 기독교를 배척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였다.
  1) 사도 야고보는 이런 부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1-3절). 그들에게 비참한 재난이 임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재난은 그들이 행복을 얻으려 했던 바로 그 일로부터 발생할 것이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1절). 그들은 먹고 마시고 혼인하자고 말하나 하나님께서는 울고 통곡하라고 하신다. 짐승처럼 사는 자는 짐승처럼 부르짖게 될 것이다. 부패와 쇠퇴와 녹슬고 파멸함이 너희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 위에 임할 것이다(2절). 현재 너희가 특별히 사랑하는 것들이 그 날에는 아무런 가치도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다(3절). 그들은 말년을 대비하여 보화를 쌓으려 하지만 슬프게도 그들은 오직 진노의 재물로 판명될 재물을 쌓고있는 것이다.
  2) 이러한 비참한 재난을 가져올 죄들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사람들이 범한 죄는 탐욕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이웃에게 선행을 하는데 필요한 세상의 재물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가 이같은 뜻을 저버리고 재물을 죄악된 방법으로 쌓는데만 혈안이 된다면 이것은 아주 큰 범죄 행위이며 이 쌓아둔 재물에 녹과 좀이 그 죄를 증거할 것이다. 또 다른 죄는 억압의 죄이다(4절). 부를 소유한 자는 권력도 소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을 탄압하는데 그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그들은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될 수 있는 한 나쁜 고용 계약을 가난한 자들과 체결하고 이 계약마저도 정당하게 이행하지 않으려 한다. 또다른 부자들의 죄는 육욕과 관능에 빠지는 죄이다(5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즐기는 것을 금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오직 그 즐거움을 취하는 것 외는 다른 일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키는 큰 죄이다. 사치스러움은 사람들을 방종하게 한다. 방종과 사치는 주체할 수 없게 많이 소유한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5절). 즉 매일 매일을 마치 제삿날이나 축제일처럼 살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것으로 즐긴다는 것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것을 자비롭고 경건한 행동을 하는데 풍성하게 사용하지 않고, 자기의 배로 하나님을 삼고 모든 것을 이 배를 채우는데만 사용하는 것이 왜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 교만과 게으름과 풍부한 양식들은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마음을 살지게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을 의미한다. 부자의 또다른 죄는 핍박하는 것이다(6절). 의인에 대한 핍박의 죄가 그들에게 가득하다. 의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핍박자들의 불의의 처벌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굴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는 영광을, 핍박하는 자에게는 치욕을 내리도록 정하실 것이다.

2. 다음에 사도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의인을 핍박하는 사악한 부자들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위로의 교훈을 주고 있다.
  1) 너희의 의무에 충실하라. 첫째, 비록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즉시 나타나지 않으셔도 '길이 참으라'(7절).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리라. 우리가 우리의 사명을 다 완수했을 때는 상을 받기까지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어떤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도덕적인 인내와 같이 단순히 필요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와 뜻 가운데서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다.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7절). 이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과제이므로 8절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다. 둘째, 마음을 굳게 하라(8절). "너희 믿음을 견고히 하고 너희 선행을 꾸준히 실행하고 어떤 고난과 시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너희 결심을 바꾸지 말도록 해야 한다." 셋째,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너희들 자신이 불안해 하거나 서로 불평함으로 서로간에 거북한 사이가 되지 않도록 하라." 사방이 공동의 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고난의 환경에 처해있는 사람들은 서로간에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에게도 원수들과 마찬가지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이다. 
  2) 길이 참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격려가 무엇인지 살펴 보자. "농부의 예를 보자 너희가 땅에 옥수수 씨를 뿌렸으면 너희는 몇 달 동안이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고 또 너희 수고의 열매를 거둘 때까지 계속 비가 내리기를 바랄 것이다. 옥수수 열매를 생각해 보라. 너희가 어찌 그 좋은 영광의 면류관을 기다리지 못하겠느냐? 만일 너희가 농부의 기다림보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참으로 더 위대하고 무한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한 너희가 기다려야 하는 그 시간이 매우 임박해 있음을 생각해 보라(8, 9절). 조급해 하지 말고 서로 싸우지 말라. 위대한 심판자께서 가까이에 계신다. 그분은 바로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실만큼 가까이 와 계신다." 또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9절). 조급함과 불만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하고 우리가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재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에게 선지자의 본을 받아서 인내할 용기를 얻으리라고 격려하고 있다(10절).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 가장 혹독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우리도 고난을 기꺼이 용납해야 한다. 또한 가장 큰 고난을 당한 사람은 인내의 가장 좋은 본이 되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11절). 그 고난받은 사람의 본보기로 욥이 제시되고 있다. 모진 고통 중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로 그는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이심을 분명히 입증하는 일들을 그에게 성취해 보이셨다. 끝날에 면류관을 받을 것을 믿었던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의 시련을 참고 견디자.

Ⅱ. 믿음의 기도 (5:12-20절)

1. 맹세하는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12절). 여기의 '무엇보다도'를 어떤 학자는 모든 것에 앞서라고 번역했다. 즉 일상의 대화에서 그들에 모든 것을 말하기 전에 맹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또한 성경은 불필요한 모든 습관적인 맹세를 매우 중한 죄로 취급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 사이에는 불경한 맹세가 성행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자들 중 신실치 못한 자들이 또한 이런 죄를 범했던 것이다.
  1)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12 절).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일에 이 말씀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고 있으며 신성모독하는 맹세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는가! 그런데 이런 행위야말로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며 하나님의 이름과 권고를 멸시하기 쉬운 죄이다. 그러나 한 번 버릇이 들면 떼어버리기가 가장 힘들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항상 경계를 해야 하는 죄이다.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그러나 그 맹세에 합당한 경외를 표하고 또 그것을 확실히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맹세까지도 다 금하라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으며 별 탈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피조물이 마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서 맹세하는 것을 보통으로 여겼던 신성모독자들은 결국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일한 위치에 놓고야만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2)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12절). 의사 표시를 확실하게 하고 또 진실되게 하여 우리가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만한 경우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사람을 맹세케 하는 동기는 거짓말에 대한 의심이다.

2.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13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해야 하는 여건은 다양하다.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환경에 순응하도록 지혜를 발휘해야 하며 번영할 때든지 고난을 당할 때든지 항상 그리스도인답게 행해야 한다. 고난을 당할 때는 기도를 해야 할 것이며 번영시에는 찬양으로 충만케 되어야만 한다.

  1) 환난의 때에는 기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일이다. 고난의 때는 기도하는 때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므로 우리는 좀더 빨리 하나님을 구하고 나서게 될 것이며 평소에 하나님께 대하여 무관심하던 사람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경각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고난을 당할 때면 저절로 불평이 나오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불평만 해야 되겠는가? 고난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단련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기도는 이러한 은혜를 얻고 키워 나갈 수 있는 약속된 방법이다.

  2) 즐겁고 번영할 때 찬양을 드리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확실히 이 때 찬송을 부르는 것은 복음적인 의식이며, 이 기쁨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거룩한 기쁨인 것이다. 이 거룩한 기쁨은 공적인 집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과 함께라든지 혹은 혼자 고요히 있을때도 맛볼 수 있다.

3. 병든 자들에게 대한 특별한 지시가 있다(14, 15절). 사역자를 청하고 그들의 도움과 기도를 바라는 것은 병든 자들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또 병든 자들의 청함을 받았을 때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은 사역자의 의무이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14절). 이런 기적의 은사가 중단된 다음에는 이 의식도 중단되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 의식은 어느 시대에나 행해져야 하고 기름을 바르는 자에게나 기름을 바름을 입은 자에게 특별한 믿음이 있을 경우에는 특별한 축복이 이들에게 내려서 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병을 낫게 하는 것은 기름을 바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에 있다는 사실이다(15절). 병든 자를 위한 기도는 살아있는 믿음에서 시작해야 하며 또 계속해서 이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이다. 또 기도를 하는 사람과 기도를 받는 사람 모두가 확실한 믿음을 견지해야 한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15절). 그러므로 우리나 혹 다른 사람이 병이 들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죄를 사하여 줄 것을 구하는 일이다. 죄는 병의 근원이며 동시에 찌르는 가시이기도 하다. 만일 죄를 사함 받으면 그 긍휼 속에서 고통이 사라지거나 혹 그 고통이 지속된다 해도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4. 죄를 서로 고하라(16절). 여기서 말하는 고백은 교인 상호간에 하는 것을 말한다. 교인 상호간에 해를 입혔을 때 서로 자기 책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서로 권고해 주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가 고백하는 일이 서로 다툰 친구와 화해하는 일에, 또 어떤 이에게 잘못한 일에 대한 배상으로 그리고 우리의 양심에 가책받은 일로부터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취하기 위하여 필요하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잘못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때로 기독교인들이 서로 자신의 연약함과 결점을 고백하는 일은 유사하다. 또한 이렇게 자신의 약점과 잘못을 서로 고백하는 자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를 해 주어야만 한다.

5. 기도의 위해한 효력과 유익이 선포되고 입증되었다(17, 18절). 기도하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또 기도 자체도 열렬하고 내용이 충실하며 정성이 깃들여진 기도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즉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며 우리 이웃에게도 유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17절)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불타고 있었고 또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그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우리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엘리야는 솔직히 기도했다. 원문에는 '간절히 기도했다'고 되어 있다. 우리도 기도할 때 단순히 무어라고 말로만 외어대는 것은 기도로서 불충분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않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셨다(17절). 이같이 기도의 능력을 기록한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라도 열심히 그리고 항상 기도해야 함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으로 응답하시지는 않을지 몰라도 풍성한 은혜로써 응답하시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6. 이 서신은 우리에게 믿지않는 사람들은 회심과 구원을 위하여 더욱 박차를 가하라는 권고함으로 끝을 맺고 있다(19, 20절). 만일 잘못을 저지른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여 그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면 그를 돌이킨 사람은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해낸 도구인 것이다. 만일 누가 잘못을 범하면 그가 아무리 지위가 높은 세도가라 할지라도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반면에 아무리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을 좀더 지혜롭고 훌륭하게 행동하도록 격려하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또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든 사고 방식에서든 진리를 떠나면 그들이 이 복음의 법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도록 우리는 우리의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판단의 착오와 생활의 실수는 항상 병행한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데 있어서 도구가 된다면, 비록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일지라도 우리가 그들을 회심시켰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를 회심시키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될 때도 우리는 그의 회심과 변화를 위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영이 그에게 임하도록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19절에 '진리를 떠났다'고 지적된 사람은 20절에서는 '미혹한 길'에 처한 사람이라고 묘사되어 있으며, 이들에 대하여 우리가 그들의 길을 수정하고 교정해 주지 않고, 단순히 그들의 생각만 좀 바꾸어 놓고 그들을 회심시켰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진리를 떠나있는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는 것 이것이 바로 회심인 것이다. 죄인을 미혹의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는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과 생명의 구원으로 인하여 허다한 죄가 덮어질 것이다. 즉 회심으로 인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죄라 할지라도 그 모든 죄가 덮어지고 용서를 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사람들로 자기의 죄를 덮힘받을 방도를 궁리케 하자. 그러나 스스로 죄를 짓지 않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고 최종적인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회심이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을 말한다고 이해하고 있다. 사실 회심한 사람들이 더이상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함을 입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며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게 될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은혜가 내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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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하나님께 순복할 것 (4:1-10절)
이 장에서는 수치스런 지경까지 분열하게 만드는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정욕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1.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이 서로 다투는 것과 그 다툼이 원인이 되고 있는 그들의 정욕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다. 그들의 싸움과 다툼은(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자기 나라를 위한 진정한 열심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들 속에 가득찬 정욕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다. 겉으로 하나님과 신앙에 열심있는체 하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자랑이 들어 있다. 그들은 내적으로는 다툼을 조장하고 외적으로는 싸움을 일으킨다. 권력과 지배에 대한 욕망 그리고 쾌락과 부에 대한 욕망 등 이 이세상의 모든 다툼과 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다툼을 근절시키기 위하여서는 그 뿌리에 도끼를 가져다 놓고, 우리 중에 분쟁을 일으키는 그 욕망들을 억제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이다. 이것이 그들에게 실망을 초래할 욕망을 없앨 것이다(2절). 터무니없는 욕심은 결국 실망을 안겨 줄 것이며 설사 그 바라는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만족과 안정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실로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욕망들은 마음에 참 만족을 주지 못하는 병적인 기질임을 알아야 한다. 죄된 욕망과 성향은 일반적으로 기도를 막는다.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2절). "너희는 너희의 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의논하지도 않고 또 너희의 길을 하나님께 의탁하지도 않으며 다만 너희 자신의 부패한 견해와 성향을 따라 행하기만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항상 실망만 맛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정욕이 우리 기도를 망친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3절). 교만, 공허함, 사치 그리고 정욕 등 이런 것들을 위하여 너희는 성공하고자 애쓰며 바로 그것들을 위하여 기도하고자 한다. 너희가 이런 야비하고 천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신실함에 먹칠을 하기 때문에 너희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너희가 너희 사업과 맡은 일의 성공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함이 아니고 결국 자기의 정욕만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가 잘못 구하였기 때문이다. 즉 정당하지 못한 목적을 위하여 구하였거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구한 것이다. 우리의 기도가 은혜의 말이 아닌 정욕의 말로 되었다면 그 기도는 응답이 없는 공허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2. 이 세상을 벗삼는 모든 죄악을 피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4절). 세상에 마음을 둔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낙인이 찍혀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좋은 것을 적당히 취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가장 높은 자리에 이 세상을 두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구조적인 반역이요 배반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4절). 그러므로 이 세상을 우상처럼 사랑하는데서 다툼과 불화가 일어난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한 무슨 평화가 깃들 수 있겠는가? (5절). 본질적으로 부패함이 주로 시기하는 행위로 나타나며 이러한 경향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명예와 쾌락을 구하며 이런 것들을 위하여 다툼과 불화에 빠지는 이런 세상의 길을 걷는 것은 세상과 벗이 된 결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투쟁을 피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멀리해야 한다. 또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대부분의 세상사람들이 사는 방법과 행동하는 대로 우리가 따르는 것 이상의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본래적으로 내재하는 영혼을 치료하고 또 교정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 이 세상의 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영을 내리신다.

3. 사도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와 겸손한 사람간에 차별을 두고 계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6 절). 그는 이런 사실을 구약의 말씀에서 인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1)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물리치심으로써 치욕을 당할 것이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신다는 사실을 듣게 하여 두려움을 갖게 만들자. 그들의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찬 것처럼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차게 될 날이 멀지 않았다.

  2)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명예와 도움을 주신다. 은혜는 명예스러운 것이며 수치와는 반대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은혜를 내리신 곳에 모든 다른 것도 더욱 풍성히 내리실 것이다. 특히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은 은혜가 필요함을 알고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며 또 얻은 후에는 감사할 줄 알기 때문이다.

4.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7절).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벗되는 것을 단념하고 오직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종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하며 두려움으로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복종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사단은 부단히 싸움을 걸어오므로 우리는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경계하고 투쟁해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7절). 만일 우리가 비열하게 유혹에 굴복하면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뒤를 쫓아올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견고히 서서 마귀를 대항하면 마귀는 우리에게서 도망할 것이다. 확고한 결심은 유혹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닫고 빗장을 지르는 것과 같다.

5.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8-10절).

  1)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8절). 거역하는 마음을 하나님 발 아래에 가져와야만 하고 하나님과 대화의 생활을 하지 못하던 영혼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맺어야 한다.

  2) 손을 깨끗이 하라.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반드시 손을 정결케 해야 한다. 손은 정결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노력도 다 헛되고 말 것이다.

  3) 두 마음을 품은 자는 반드시 성결케 되어야 한다. 마음을 정결케 한다는 것은 신실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4)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9절). 하나님께서 무슨 환난을 주시든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기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그 환난을 충분히 지각하라. 다투고 분열할 때는 애통하게 될 때이므로 다툼을 일으키는 죄에 대해서는 슬퍼해야 한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이 말씀은 슬픔에 대한 예고로 혹은 그 심각성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일이 최악에 이르기 전에 미리 계도를 받았으므로 허망한 환락과 육체적인 쾌락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슬퍼하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5) 주 앞에서 낮추라(10절). 악한 모든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치스러워하며 슬퍼하라. 또 선행을 하는데도 큰 겸손을 보이도록 하라.

6.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 큰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8-10절). 의무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큰 자비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과실은 아니다. 주께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참으로 회개하고 겸손해진다면 곧 하나님의 은총이 주는 유익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난 중에서 건져내시고 고통당하는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시고 위로해 주신다. 이 땅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에 대한 보상은 하늘나라에 있는 최고의 영광으로 주어질 것이다.

Ⅱ. 장래 일에 대한 오만 (4:11-17절)

1. 비방하는 일에 대한 경고가 나와 있다(11절).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꼭 드러내야 할 필요가 없다면 그들을 비방해서는 안된다. 그들의 잘못을 꼭 말해야 할 때에도 그 잘못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의 입술은 정의와 진리의 법에 종속되어야 한다. 피차에 비방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가 서로 형제지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형제로서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좋은 말로 대할 수 없을 때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것이 비방하는 것보다 더 낫다. 둘째, 이렇게 비방을 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지 않는 일을 위하여 자기 형제를 욕하고 비난하는 자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법칙이 아닌 것인양 생각하고 있는 자나 다름없다. 주의 율법은 온전하기 때문에 율법을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만일 누가 율법을 범하면 그들로 율법으로 심판을 받게 하자. 또 누가 율법을 범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를 판단하지 말자. 일반적으로 율법을 판단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은 대부분 율법에 순종을 하지 못하고 만다. 셋째, 율법의 입법자이신 하나님은 인간을 최종적으로 심판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이시며, 양심에 법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므로 오직 그 분만이 절대적인 복종을 받으실 수 있다. 또한 법을 제정하시는 하나님의 권리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법을 시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주시며 거역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실 수 있는 충분한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남을 심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고 있다. 우리는 형제를 욕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 모두를 다스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다른 법이 더 이상 필요없다.

2. 우리의 생명이 언제까지든지 부지되리라는 자신을 갖는 외락됨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다(13, 14절). 이런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는지 자신에 대해 살펴보고 자기 자신을 엄중히 책하라.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하리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다음 것들을 살펴 볼수 있다. 첫째, 세속적인 사람들이 자기들의 계획을 좇기 위하여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떠나는가 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들이 전부터 자기 마음속에 다짐하는 일에는 얼마나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장래 일을 위한 아름다운 환상과 청사진으로 가득차 있다. 셋째,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없이 미래에 대하여 기대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도에 무슨 일이 발생해서 못가게 될는지 혹은 다른 곳으로 빠지게 될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행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서 목숨을 잃었고 또 자기들이 목적한 도시에 도달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보라. 그들이 거기서 계속해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체류를 단축시킬 무슨 불의의 사건이라도 일어날지 모른다. 또한 그들이 거기서 무사히 장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불명확한 것이다. 또 그들이 그 도시에 가서 한 일년 동안 유하며 장사했으나 이익을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남긴 이익은 기껏해야 불확실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짧음과 무상함과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미래의 생에 대하여 주제넘는 자신감을 가지고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없나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14절). 지혜로우시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래에 대하여 알지 못하도록 하셨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장차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장래 희망도 많지만 뜻하지 않는 수많은 일이 발생해서 우리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곤 한다. 우리는 잠깐 있는 듯 하다가 곧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을 믿을 수는 없다.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3.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항상 의지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15절).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그들이 장차 되어야 할 모습과 좀 더 나은 행실을 행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너희는 항상 너희 마음속에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이것도 하고 저런 일도 하리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헬라인들은 모든 일을 시작할 때에 "신의 허락하심과 축복이 함께하기를"하고 말했다고 한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15절). 우리는 우리의 수명이 우리 뜻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심에 달려있음을 명심하고 하나님께 복종을 해야만 한다. 주의 뜻이면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15절). 즉 우리의 모든 활동과 계획은 하늘의 주관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활동을 계획하고 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해야만 한다.

4.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헛된 자랑을 버릴 것을 명하고 있다(16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채 장수와 번영과 이 세상에서 큰 일을 성취하게 될 것을 스스로 자부하며 이러한 일로 자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즉 이러한 자랑은 실로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연한을 정하시고 모든 일들을 처리하시는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 안에서 기뻐한다면 이 기쁨은 선한 것이다. 반면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헛된 자만과 주제넘은 자랑을 즐긴다면 이것은 악한 것이다.

5. 우리의 지식과 상반되지 않게 그리고 우리의 확신에 따라 행동하도록 가르쳐 주고 있다(17절).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죄'는 큰 죄일 뿐만 아니라 증언을 할 증인을 수반하는 죄이다. 즉 인간이 자기 양심을 거스리는 죄를 범할 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증인, 곧 자기 자신을 증인으로 세우는 죄가 된다. 나태함은 죄를 범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심판에 이르는 죄가 된다. 마땅히 선을 행하여야 할 줄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고 나태한 것은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범하는 것과 동일하게 죄가 되는 것이다.


Ⅰ. 혀를 다스려야 함 (3:1-12절)
2장에서는 행함이 없는 무익하고 죽은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이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기질과 말에 있어서 잘난 체하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혀를 사용하여 남을 비난하고 명령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매우 필요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배우게 된다.

1. 우리는 혀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1절). 즉 항상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언행을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또 우리 자신의 판단을 다른 모든 사람들이 기준으로 삼도록 명령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선생들 같이 되려하지 말고 오직 배우는 자의 태도로 겸손하게 말하라." 즉 남을 비난하고 고압적인 자세로 판단하는 자는 장차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엄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마 7:1, 2). 우리에게 선생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다(2절).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잘못과 범죄에 대하여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이 좀 더 줄어들게 될 것이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이다. 그들의 거만한 태도와 남을 비난하는 혀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는 그들이 비난하는 사람의 과오보다 훨씬 큰 것이 될 것이다.

2. 자기 혀를 제어함으로써 자신이 완전하고 올바른 사람임을 증명하게 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으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평가받을 뿐만 아니라 아주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혀를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덕은 또한 자기의 모든 행동도 절제 할 수 있는 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 비유들로 잘 설명되고 있다.
  1) 말의 입에 재갈을 물림으로써 그 모든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3절). 그런데 우리 마음 속에는 짐승과 같이 사납고 분방한 요소가 다분히 많다. 또한 이런 몹쓸 기질이 대부분 입을 통하여 나타나므로 우리의 혀에 재갈을 먹여야 한다. 어거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은 말이 주인을 땅에 떨어뜨려 버리듯이 어거되지 않은 혀도 그 주인에게 똑같은 결과를 안겨줄 것이다.
  2) 큰 배도 작은 키를 바로 조종함으로써 잘 운전할 수가 있다(4, 5절). 키가 배에서 아주 작은 부분이듯이 혀도 온 몸에 비하면 아주 작은 지체이다. 그러나 키를 올바르게 조종할 때 그 배가 바로 운전되어 나가듯이 혀를 바로 사용함으로 그사람 전체를 바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비록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 사용의 효과는 매우 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혀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혀는 매우 작은 지체에 지나지 않지만 대단히 큰 유익을 가져다 주거나 대단히 큰 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 길들여지지 않은 혀는 가장 지독하고 치명적인 악의 하나이다(5, 6절). 혀는 불의의 세계라고 불릴만큼 죄가 내포되어 있다. 혀는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6절). 때로는 혀로 인하여 온몸이 죄에 빠지는 수가 있다.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6절). 인류와 인류사회의 일들이 인간의 혀 때문에 혼란에 빠지는 일이 많으며 또 모든 것이 불길에 싸이기도 한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을 내느니라(6절). 지옥은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혀의 불을 내게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혀가 지옥의 불로 달구어졌을 때는 분노와 미움만을 일으키고 사단의 계획에 도움을 주는 결과만을 초래하게 된다.

4. 다음으로 우리는 혀를 다스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7, 8절). 야생 동물들이 단지 기적적으로만 인간에게 길들여 지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되어질 수 있는 경우로 야생 동물들이 사람에게 길들여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혀는 이런 야생 동물을 길들이기보다 더욱 힘들며 이런 동물들을 길들이는 기술과 능력으로는 절대로 길들일 수 없다. 그런데 사도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대단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혀를 길들이려면 지극히 경성함과 수고와 기도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말하려 함이다. 지극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때로 이 모든 수고가 너무 부족한 것이 되고 마는데 이는 혀는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혀는 모든 독을 내뿜기 쉽기 때문에 강력하고 세심한 주의와 수고가 필요하다.

5.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혀를 하나님께 봉사하고 예배하는데 사용하도록 노력할 것을 배우게 된다(9, 10절). 기도하고 찬송하는데 사용한 혀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욕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한 혀가 또한 자기의 동료들을 욕하는 말을 함으로 전혀 일관성을 상실해 버린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일인가.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0절)하는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있다면 그런 모순된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논증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야고보 사도는 동일한 원인에서 상반된 결과가 나오는 것은 터무니 없는 일이며 사실상 있을 수도 없는 일이므로 은혜와도 일치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11, 12절). 참된 경건에는 자체모순이란 있을 수 없으며 참으로 경건한 사람은 자기의 말과 행동에서 이같은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는다.

Ⅱ. 두 가지의 지혜 (3:13-18절)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스스로 지혜있는 체하는 사람과 정말로 지혜로운 사람과의 차이를 보여주며 또 아래로부터의 지혜와 위에서 내려온 지혜와의 차이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1. 참 지혜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13절).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지식을 올바르게 적용할 지혜로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단지 그가 무엇을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기를 높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식이 있다는 것과 그 지식을 적용하는 지혜를 지니고 있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은 참 지혜를 설명하기 위하여 서로 결합되어야만 한다. 또 선행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다면 그 사실은 우리의 대화의 선함 가운데 나타나야 하며 언어가 거칠거나 허탄해서는 안된다. 참 지혜는 그 행하는 일로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이란 단순히 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전인격적인 실천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선행으로 네 하는 일을 나타내라'라고 되어있다. 또 아무리 생각이 깊고 점잖은 말만 하는 사람이라도 만일 그가 선한 행동과 삶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될 수 없다. 참 지혜는 또한 온유한 정신과 기질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분노에 재갈을 먹일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성냄도 참고 견디는 성품이야말로 참 지혜가 있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가 된다. 우리의 마음이 온유하고 고요할 때 가장 잘 이치에 따를수 있으며 또 가장 합당한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지혜는 온유함을 낳고 온유함은 지혜를 더해 준다.

2. 좋은 성품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 자랑하는 것을 대하게 된다(14-16절). 시기와 다툼은 지혜의 온유함과는 정반대가 된다. 우리 마음은 이 양자 중 어떤 것도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터전이 되지만 시기와 지혜가 동시에 한 마음 속에 거할 수는 없다. 이런 시기와 다툼에도 순서가 있다. 시기심이 제일 먼저 발생하고 이것이 다툼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다툼에 이어서 헛된 자랑과 거짓말이 따른다(16절). 그리고 이 결과, 혼란과 모든 악한 일들이 뒤따른다. 한 죄악은 또 다른 죄악을 낳으며 따라서 죄악이 초래하는 악영향이 얼마나 큰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 결과는 전적으로 악행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악을 내는 지혜는 어디서 발원하는가(15절). 그것은 이 세상적인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정욕적이고 육체의 쾌락을 도모하며 또 마귀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악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마귀가 정죄를 받을 때 함께 정죄를 받게 되는 것이다.

3. 우리는 여기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풍성한 지혜의 아름다운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17, 18절). 참 지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이 지혜는 그 가치를 떨어뜨릴지도 모르는 다른 교훈이나 금언 등과 뒤섞이지 않은 순수한 것이다. 이 지혜는 마음과 생활에 오직 거룩함을 사모하도록 한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평화로운 것이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화평을 유지케 하는 일을 하므로 화평이 결코 깨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화평을 이룩함으로써 평화가 깨진 곳을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정중하고 대화에 있어서 무례하거나 오만하지 않으며 또 성질이 거칠거나 무정하지도 않다. 또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양순하다. 즉 선한 일을 권하거나 악을 떠나라는 말은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연약하고 그릇된 양순함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권고함이나 우리 동료들의 정당한 요청에 따르는 양순함은 유익하다고 비난을 받을만한 양순함이 아니라 합당하고 선한 양순함이다. 또 하늘에서 온 지혜는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고 거슬리는 사람도 용서해주는 등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차 있다. 또한 하늘에서 온 지혜는 편파적이 아니다. 이 말의 다른 뜻은 말다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을 비난하는 사람이 되려하지 않는다.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는 거짓이 없다. 이 지혜는 위장하거나 속이지 않는다. 이 지혜는 오직 신실하고 개방적이며 변함이 없고 통일되어 있으며 자체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참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데로 계속 나아감으로써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다(18절). 그리고 화평으로 심은 것은 기쁨의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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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편애를 금함 (2:1-7절) 
야고보는 사람을 대접하는 데 있어서 범하는 죄의 해독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고 있다.

 

1. 그는 일반적으로 범하는 이런 종류의 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1절). 이 말씀 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의 특성이 무엇인지 충분하게 암시되고 있다. 기독교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확신하며 마치 보배처럼 여긴다. 다음에 야고보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영광스러운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와 동등한 만큼의 존경을 받을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광스런 주의 영광을 저해하거나 감소시키게 될 정도로 사람에게 존경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것은 중죄임에 틀림없다.

2. 여기서 이러한 경우에 예를 기술하여서 경계를 삼고 있다(2, 3절). 우리는 단지 어떤 사람의 외모가 다른 사람보다 좀 낫게 보인다는 이유 만으로 오판하여 공정치 못하게 행동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층 가운데, 즉 부드럽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 중에도 그리고 남루하고 다 떨어진 옷을 입는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자기 백성을 두셨다. 믿는 일에 있어서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동등하여 부자라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그 가난 때문에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위대함과 부함을 지나치게 치켜올리는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사회에서는 특별히 경계되어야 한다. 만일 어떤 가난한 사람이 선하다면 그가 가난하다고 해서 그를 낮게 평가해서는 안되며 만일 어떤 부자가 악하면 그의 부유함 때문에 덜 책망해서도 안된다. 비록 초라한 의복을 걸쳤어도 겸손하고 선하며 하늘나라에 속해 있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초라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와 그의 믿음은 보다 옳지 못하게 평가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3. 우리에게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는 죄가 얼마나 큰가를 가르쳐주고 있다(4, 5절).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것이 아니냐. 이 말씀에 대한 원문을 직역하면 "네가 차별하지 않느냐"하는 물음이다. 즉 "그런 차별을 함에 있어서 너는 부당한 법칙으로 판단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런 판단기준을 계속 고집하고 있지 않느냐?" 사람들에 대한 이런 대접은 악하고 부당한 생각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너희는 악한 생각으로 서로 판단하는 자가 된 것이다. 즉 너희는 스스로 만들어낸 불의한 판단과 부패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또 너희는 은연중에 내적인 은혜보다 외적인 화려함을 도모하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더욱 추구하고 있다." 죄의 흉측스러움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이 드러날 때에야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야말로 큰 죄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는 전적으로 하나님과 대립관계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5, 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로 도리어 하늘나라의 후사를 삼으셨다. 이 세상의 많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적인 화려함이나 세련됨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가치에 의하여 그의 거룩한 경건이 드러나기를 바라셨다. 그래서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는 부요하다. 따라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선한 사업을 풍성히해야 할 사람은 재물을 부유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믿음이 풍성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발견되고 있다.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비록 지금은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들이다. 믿음이 풍성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 또한 풍성할 것이다. 우리는 1:12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면류관이 있음을 살펴 보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의 왕국까지도 약속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면류관이 생명의 면류관이듯이 이 왕국도 영원한 왕국인 것이다. 이렇게 살펴볼 때 이러한 죄는 실로 심각한 것이다(6절). 재산이나 외모 때문에 사람을 존경하는 것은 세속적인 부와 명성에 기인하는 해악이므로, 몹시 큰 죄악이라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행위는 우리 자신을 끌어 내리며 우리가 부름받은 값진 이름을 더럽히는 것으로 우리 죄를 훨씬 더 악하고 어리석게 드러내는 행위인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법 (2:8-13절)

1. 사도 야고보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부당한 일을 교정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지도하는 그리스도의 법을 제시하고 있다(8절). 즉 부자이건 가난한 자이건 우리의 모든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성경의 법칙을 성실히 지키면 잘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키며 나아가야 할 법칙들은 성경에 확정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것을 하나의 법으로서 제시하고 있다. 이 법은 최고의 법으로 왕 중의 왕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 법이 지닌 고유한 가치와 존엄성 자체는 매우 존경을 받을 만한 것이다. 그런데 이 최고의 법이 편파적으로 해석되어 그저 그 법을 지키는체 하는 것으로는 결코 인간을 불의한 자리에서 건져내지 못할 것이다.

2. 이 보편의 법은 다음에 나오는 특별한 법과 함께 이해되어져야 한다(9절). 이 최고의 법이 남을 외모로 판단하는 자들을 정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법은 그런 자들로 부자의 위치 뿐 아니라 가난한 자의 자리에도 처해 보도록 가르치기 때문이다.

3. 이 법의 범위 즉 어느 정도까지 순종해야 하는가가 제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하되 이것을 어떤 특정한 일부뿐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지켜야 한다(20절).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한다는 방편으로 부자만을 존경해야 할 것인가? 우리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한다면 마땅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관심과 존경을 나타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부당한 잘못으로 인하여 율법을 지켰다는 명분이 모두 소용없게 될 것이다. 이제 사도는 이상의 언급한 사실과는 다른 예를 제시함으로써 이런 논리를 더욱 구체화하고 있다(11절). 어떤 사람은 간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지만 살인의 문제는 좀 쉽게 생각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살인의 문제는 몹시 두렵게 생각하지만 간음은 별것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법을 세우신 분의 권위를 바로 아는 사람은 또한 두 가지 경우의 사람들이 똑같이 정죄받아야 하는 이유를 쉽게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율법 중 하나만 범한다 하여도 그것 역시 율법을 내신 분의 권위를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내신 율법 전체를 범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4. 사도 야보고는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법대로 처신하고 자제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21절). 여기서 복음은 하나의 율법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이 복음에는 통치자의 위안과 함께 의무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지자이며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시는 제사장임과 동시에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복음은 자유케 하는 법이다. 복음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것은 곧 온전한 자유인 것이다. 우리는 이 자유케 하는 법에 의하여 판단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이 법은 이 자유의 법에 의하여 곧 심판을 받게 될 사람처럼 언어와 행실을 조심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한다. 즉 우리는 복음적인 성품을 지녀야 하며 우리의 대화는 복음의 대화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또한 우리가 복음에 의하여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점을 심사숙고함으로써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더욱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13절). 지금 남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장차 올 마지막 심판의 날에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다. 긍휼을 베푼 사람들이 승리하게 될 때가 있을 것이며 그 긍휼을 베푼 사람이 심판을 이기고 기뻐하는 것을 보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Ⅲ. 믿음과 행함 (2:14-26절)
사도 야고보는 단순히 공허한 신앙 고백만을 하면 마치 그 고백이 자기를 구원할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잘못에 대하여 지적한다. 사람은 단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도 의롭다 함을 얻어야 한다.

1. 여기서 매우 큰 문제가 야기되는데 그것은 어떻게 바울과 야고보 사도의 의견을 조화시키느냐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 그의 서신서에서 이와는 정반대되는 듯이 보이는 의견을 개진했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누차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지 다음의 몇 가지만 살펴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바울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고 말할 때 그는 분명히 야고보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율법의 행위를 말하고 있으나 믿음에 대해서는 다른 종류의 믿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사람이 복음의 신앙을 받기 전에 모세의 율법을 복종하는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나 야고보는 복음에 복종하는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우리를 의롭게 하고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 복음의 신앙을 확장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의 행위의 힘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으며 야고보는 애써 복음을 소유했으나 복음을 얻은 자로써 아무런 행위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과 결별하기 위하여 복음을 구하는 자들이나 복음을 도외시하고 율법만을 구하는 자들이나 모두 잘못이다. 또 바울이 말하는 의는 야고보가 말하는 의와는 좀 다르다. 바울이 말하는 의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의는 사람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 믿음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네 행실로 네 믿음을 보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의 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이제 이 귀한 말씀에서 무엇을 더 배울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1)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유익하지 않은 것이며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절).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우리 영혼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가 방해가 되는가를 판단하여 우리에게 유익한 것인지 아니면 해가 되는 것인지를 규명해야 한다. 어느 사람이 "믿음이 있다"는 것과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사람들이 입으로만 자기의 믿음을 자랑할 수 있으나 이는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그들의 믿음이 실제로는 매우 빈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2) 사랑이 실제적인 원리이듯이 믿음도 실제적인 원리이다. 자선 행위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사랑을 품고 있는체 하여 사람에게 그렇게 내보이려 모색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열매도 없이 믿음이 있는체 하는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한 분별을 해야 할 것이다(15-17절). 단순히 입바른 빈말로 가득 찬 사랑으로 어떻게 우리 자신이나 가난한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사랑과 자비로움이 긍휼의 행위를 내놓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경건과 순종의 행위 없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척 할 수 있을 것이다(17절). 정말 우리는 공허한 말로만 신앙고백을 하기 쉬우며 그런 신앙고백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거짓 믿음은 거짓 사랑과 마찬가지로 가증한 것이며 이 둘은 모두 참된 경건성이 없는 죽은 상태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3) 행함이 없이 교만해진 믿음과 행함으로 증거되는 믿음을 모두 살펴봄으로써 서로 비교하여 이 비교가 우리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흑백을 분명히 가려보라(18절). "너희는 신앙고백을 하고 또 믿음이 있다고 떠벌리지만 나는 스스로 자랑하지 않아도 내 행위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나타내 준다." 바로 이 증거로써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심판의 날에 심판할 근거가 될 것이다.
  4) 귀신들의 믿음과 같은 단순한 사변적이며 지식적인 것에 불과한 믿음에 대하여 살펴보자(19절). 사도가 여기서 언급한 믿음의 실례는 모든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다. 우리가 단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 상태를 좋게 생각하면서 안심하고 있다면 우리는 비참한 생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만일 우리가 신앙개조(信仰箇條)에 입술로만 동의하고 그것의 내용에 대하여 공론을 펴는 것으로 만족해 한다면 그 정도는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또한 귀신들이 떠는 것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존경해서가 아니라 미워하고 대적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5) 행함이 없는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20절).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그런 믿음은 영적인 삶의 증거인 모든 행위가 결여됐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도 무익하기 때문이다.
  6) 다음 두 가지 실례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 믿음이 행함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① 첫 번째 예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들고 있다(21절). 아브라함의 행했던 일들이 그가 진실로 믿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21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23절). 그리고 이로써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째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는 받을 수 없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24절). 즉 순종하지 않는 믿음으로가 아니라 선행을 수반하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같은 축복을 받으려 하는 사람은 그의 믿음을 본받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해봐야 하나님의 증거로 나오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하여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육신과 혈기를 만족케 하는 일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믿음의 진리가 믿음으로 행동하도록 만들듯이 믿음의 행위는 믿음을 완전에 이르도록 성장시킨다. 이같은 믿음의 행위를 보이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벗이 될 것이다.
    ② 두번째 예는 라합의 경우이다(25절). 앞에서 말한 아브라함의 예는 일생 동안 훌륭한 믿음을 보인 사람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 라합의 경우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의 예이다. 이는 가장 강력한 믿음이나 가장 하찮은 믿음이나 어떤 믿음이라도 행함이 없이는 의로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생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자를 접대하며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의 신실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큰 죄를 사함 받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하는 위대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 라합은 죄를 사함 받고 새 생명을 얻기 위하여 먼저 전에 알고 있던 지식들을 버려야 했고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모두 포기해야 했으며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하여 자기 믿음의 표시가 되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했다.
  7) 야고보 사도는 이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6절). 아무리 훌륭한 행함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오직 믿음이 있어야 우리는 정말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그럴듯한 신앙고백도 행함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즉 믿음은 뿌리요 행함은 열매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소유해야 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 어느 한쪽만을 소유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을 줄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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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 - study  (0) 2014.05.01

Ⅰ. 문안 (1:1절)

1. 이 서신의 기명을 통하여 저자는 자신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1절)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비록 그는 복음 전도자들로부터 '우리 주의 형제'라고 불리웠지만 자신이 그리스도와 혈육임을 자랑하지 아니하고 영적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을 더욱더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통하여 우리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못한다면 그분의 아버지인 하나님께 대한 섬김도 용납을 받지 못할 것이다.

2.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1절).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로 흩어짐을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계시의 빛을 퍼뜨리시기 위하여 그들을 여러 나라에 흩으셨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흩어짐을 당했다. 이 일로 인하여 심지어는 그들 중에 있는 선한 사람까지도 그들이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해야 했다. 여기서 언급된 흩어진 유대인이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이라도 외국 각처로 흩어버린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자기 백성을 각지로 흩으실지라도 또한 그들을 돌볼 사람을 보내신다. 그러므로 이 편지 역시 한 사도가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쓴 것이지만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신 편지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외적인 재난을 당하였을 때에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을 보내시기 때문이다.

3. 야고보는 이곳에서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문안하노라. 이 사도의 간절한 바램은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위로를 받게 되는 일이었다.

Ⅱ. 시련과 시험들 (1:2-12절)

1.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의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진실된 기독교인의 다수가 고통과 시련에 처해 있음을 시사한다. 최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도 아직은 심한 고통을 견디어야 한다. 선한 사람이 당하는 이런 시험들은 자기가 스스로 만들거나 또는 죄를 지어서 스스로 끌어들인 시험이 아니다. 그들은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그냥 시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2. 시험과 고난의 상태에서도 견지해야 할 의무와 덕이 무엇인가를 일러주고 있다.
  1) 그리스도인이 시험을 당할 때도 발휘해야 하는 덕 중 하나는 기쁨이다(2절). 이런 때 우리는 풀이 죽거나 슬픔에 빠져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게 될 때 시험 때문에 무기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철학은 시련을 당할 때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라고 가르치나 기독교는 오히려 기뻐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으로 현재에는 우리의 덕이 높이 드러날 것이며 장래에는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난으로 우리 가운데 다른 여러 가지 덕들이 더욱 장성해질 것을 생각할 때 이것 또한 크게 기뻐해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2) 그 다음에 지녀야 할 덕은 믿음이다(3,6절). 시련의 때에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에 대한 건전한 믿음과 그 진리에 굳게 매달리는 믿음의 수고가 있어야만 한다.
  3) 반드시 인내를 하여야만 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하나의 덕을 단련하는 것은 또 다른 덕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바르게 단련시키기 위하여서도 우리는 인내를 발휘해야만 한다. 금욕주의자들의 절제와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금욕주의자적인 절제를 발휘함으로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 대하여 무감각해질 수가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고 오히려 승리하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가 온전하게 발휘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는 그 명령을 모두 수행하고 또 우리에게 닥친 모든 고난을 견딜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 중에서도 기뻐하게 될 때에만 비로소 인내가 온전하게 발휘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내의 역사가 완성될 때 기독교인은 완전해지며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게 된다.
  4) 고난 중에서 힘써야 하는 것으로 기도를 권고하고 있다. 특별히 기도하여야 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고난이 우리에게서 떠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고난 가운데서 지혜를 바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시험을 당할 때 지혜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한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은혜의 보좌 앞에서 빌면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즉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 하는 말씀에서 큰 용기를 얻어서 지혜를 구할 수 있다. 우리가 찾아가는 그분,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며, 또한 그분은 나누어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므로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아무리 큰 지혜를 구했다 해도 조금만 주어질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후히 주신다. 또 구하고 난 다음 자신이 어리석었지 않았나 하고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지혜를 구하고 싶거든 얼마든지 구하라.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꾸짖는 일이 없이 후대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주시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구할 때 지켜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6절). 그것은 의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께 좋은 것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5) 고난 중에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의무는 마음을 오로지하고 구하는 의도에 성실성을 갖는 것이다.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6절). 믿음으로 솟아 올랐다가 불신앙으로 곤두박치는 모습이 바다의 물결과 매우 어울리게 비유되고 있다. 바다 물결이란 바람이 부는 강도와 방향에 따라 오르락 내리락하며 불어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의 기도는 결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불신하여 요동하고 정함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요동하는 신앙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우리들과의 교제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8절). 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교제와 행동이 매우 불안정하게 될 것이다. 바다 물결같이 요동하는 사람은 결코 잘되지 못할 것이다.

3. 부자나 가난한 자나 그들이 어떤 근거에서 자기들의 기쁨과 위안을 얻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다(9-11절). 신분이 낮은 사람들도 형제로서 존경해야 할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될 수 있다(10절). 은혜와 부가 전적으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둘을 함께 누리도록 되어 있다. 어떠한 삶에 처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라면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낮은 자리에 처하고 은혜로 낮아진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존귀함을 대망하여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며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11절). 즉 뜨거운 태양열에 꽃이 시들듯이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해질 것'(10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한 자는 자기를 부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그 부한 중에서도 겸손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기뻐해야 할 것이다.

4. 시험과 시련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축복을 하였다(12절). 이 축복은 단지 고난을 당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디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고난은 우리를 비참하게 하지 못한다. 그 고난으로부터 축복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과 시험은 영원한 축복을 받는 길이 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12절).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란 이 말은 마치 금속이 불로 제련됨으로 그 우수함이 드러나듯이, 시험을 통하여 연단되고 단련됨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믿음과 덕이 참되다는 것과 참으로 지고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게 될 때를 뜻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단과 확고한 믿음의 정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이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연단과 확고한 믿음의 정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와같이 시험을 당하는 그리스도인은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며 그가 받는 면류관은 생명의 면류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잠시동안 십자가를 지지만 영원토록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 이 축복은 고난을 당하는 의로운 사람에게 이미 약속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축복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명백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원리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즉'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셨던 약속'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한 모든 사람들에게 약속되어 있는 것이다.

Ⅲ. 죄의 진행과 결과 (1:13-18절)

1. 하나님은 어떤 경우라도 사람들로 죄 범하게 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때때로 시험에 빠지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행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사람의 범죄를 책임질 하나님의 섭리는 전혀 없다(13절).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악에게 시험 당하실 수 없는 분인 것과 같이 친히 사람을 시험하시는 분도 아니시다. 죄를 범하는 것은 매우 악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며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악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우리의 덕을 함양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우리를 타락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2. 악의 진정한 원인은 어디에 있으며 따라서 그로 인한 책임은 어디로 돌려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14절). 악과 시험의 원초적인 근원은 각자의 마음 속이다. 비록 어떤 외부적인 원인에 의하여 발화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 불꽃이 더욱 거칠게 타오를 연소 물질들은 우리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다. 죄가 진행되는 방법은 어떠한가. 먼저 죄가 다가와서 유혹을 한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선한 것에서 떨어져 악한 것에 끌리도록 유혹을 받는다.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떨어져 점차 죄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구절의 '끌려'라는 단어는 '억지로 세게 잡아 끌리다'라는 뜻을 나타내며 '미혹됨이니'라고 번역된 말은 '꾀임을 당하거나 기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권세와 능력은 그 교활함과 속임수를 발휘하지 않고는 결코 번성하지 못한다. 다음은 마음의 부패에 대하여 알려주고 있다(15절). 우리 마음 속의 욕심을 고양시키는 죄는 곧 우리로 그 욕심을 승인하도록 만드므로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 '잉태한즉'이라고 표현했다. 이 죄의 최종적인 결과는 무엇인가.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절). 이 죽음은 영혼의 죽음과 육체의 죽음을 말한다.

3.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각양 좋은 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16, 1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개념 속에 잘못된 점이 없도록 특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유리하지 말라. 하나님은 어떤 악한 일도 지어내시지 않으시며 지어내실 수도 없는 분이시다. 오직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시요 원천이신 분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17절). 하나님은 불변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체 내에 어떠한 변화 할 수 있는 그림자와 같은 속성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변화나 그림자가 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변화나 그림자는 다만 우리 자신들의 속성으로부터 연유된 것이다. 빛들의 아버지이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모든 선한 것이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성의 빛을 주신다. 또한 학문의 빛도 주신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은 위에서부터 직접 내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 이외에 선한 것은 결코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생과 그것으로부터 비롯된 거룩하고 행복한 모든 결과들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18절).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된 피조물이다. 우리가 새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재주나 능력으로 인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즉 순전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뜻으로 인한 것이다. 이것으로 하여금 효력을 발생하는 도구는 진리의 말씀이며 그 말씀 이외에 그 무엇도 이처럼 참되고 영속되며 위대하고 고귀한 결실을 빛어낼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롭게 하는 은혜의 목적과 의도는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 함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첫 열매시며 그리스도인은 모든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는 것이다.

Ⅳ. 들음과 행함 (1:19-27절)

1. 우리에게 인간적인 열정이 일어나는 것을 자제해야 함이 요구된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중생했다면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19절).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귀를 기울여서 듣고 그 내용을 숙고하도록 하라. 이것은 아마 이 장의 첫 부분에서 언급되었던 고난과 시험에 적용될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면 하나님을 비난하지 말고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 하는가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듣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성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분쟁과 불화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일을 대할 때 우리는 쌍방의 이유와 진실에 귀를 기울이고 말하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 만일 말할 필요가 있을 때는 절대로 화를 내며 말해서는 안된다. 만일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리려면 먼저 자기의 감정을 다스려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하려면 성내기를 더디해야 한다.

 

2. 분노를 억제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주어진 것을 기억해야 한다(20절). 신앙의 반목을 쉽게 일으키게 하는 가장 악질적인 요소는 분노이다. 분노는 인간적인 산물이며 노여움을 발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정반대 편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인 열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 체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하나님도 그의 뜻도 알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3. 우리는 격노와 아울러 다른 여러 부패한 성향들도 억제하여야 한다(21절).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방법을 왜곡하는 모든 부패한 마음의 무질서를 경계하고 내어버리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우리에게는 항상 경계하고 또 내어버려야 할 악이 내재해 있다. 그것이 바로 넘치는 악이다. 악한 성향은 제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우리에게서 내던져지고 버려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외면적인 죄악 뿐만 아니라 모든 죄된 생각과 성향 그리고 행실과 말 등 모든 더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대한 가르침이있다.
  1)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준비하라고 당부하고 있다(21절).
  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에 대해서는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대목(臺木)이 접가지를 받아들이는 것같이 그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을 때 대목의 신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에 접붙혀진 복음의 본성에 따라서 좋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온유한 마음으로 복종해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태도이다. 또한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듣게 될 때 그것을 끈기있게 들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항상 우리의 구원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우리를 구원에 대하여 지혜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이다.
  3) 말씀을 들은 후에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22절). 말씀을 듣는 것은 행하기 위함이다. 말씀을 듣고 행함이 없다면 아무리 자주 그리고 아무리 주의깊게 말씀을 듣는다 할지라도 별로 쓸모가 없다. 우리가 들은 것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또 단순히 듣기만 하는 자들은 자기를 속이는 자들이다. 자기 기만은 결국 가장 나쁜 속임수인 것이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사용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23, 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사용하는 방법은 사람이 자기의 생긴 얼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을 사용하는 것에 비유하여서 배울 수 있다. 거울을 들여다 봄으로 우리는 우리 얼굴에 더러운 것이나 오점들이 있는가를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말씀은 우리의 죄를 비춰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교정받아야 하고 무엇을 씻어내야 하는가를 가르쳐 준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진정으로 알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을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24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복음이 거울로 자신을 비춰 본 후에 돌아서서 자신의 오점에 대하여 또한 그것의 제거책에 대해서 잊어버린다면 헛되이 말씀을 듣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듣지 않는 사람의 경우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말씀을 마땅히 사용해야 할 거울로 사용한 사람들에 대하여서도 기록하고 있다. 복음은 자유케 하는 율법이다. 제의적인 율법은 속박하는 멍에였으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유케 하는 법이다. 이것은 온전한 법이다. 말씀을 듣는 중에 우리는 이 온전한 법을 보게 된다. 우리가 말씀 안에 계속 거할 때 우리는 의당 보아야 할 그 자유케 하는 법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법안에 거하는 사람들만이 그들의 행함으로 축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축복은 그 법을 아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말함으로써가 아니라 행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5. 우리가 어떻게 헛된 경건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순수한 경건인가를 구별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1) 헛된 경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 속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 것이라(26절). 헛된 경건 속에는 과시하려는 것이 있다. 사람이 자신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보다 더 경건하게 보이려 한다면 그것이 바로 그의 경건함은 헛되다는 표시가 된다. 또 헛된 경건 속에는 타인을 비방하는 것이 들어있다. 우리는 종종 자기를 좀 더 현명하고 도덕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남을 헐뜯게 되는 일이 있는데 그렇게 험담을 하는 것이 벌써 그 자신이 헛된 경건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남을 비방하는 사람은 참다운 겸손의 덕을 지닌 사림이 될 수 없다. 자기의 혀에 재갈을 먹일 수 없는 사람은 겸손해질 능력도 힘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헛된 경건을 취하는 속에서 그는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경건이 헛된 것임이 드러날 때의 허망함을 그 무엇에 비할 수 있겠는가!
  2) 참된 경건함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27절).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게 되는 것이 경건의 영광이다. 거룩한 생활과 자비로운 마음은 진정한 경건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 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야말로 진실로 순수하고 정결한 경건이다. 진실된 경건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일을 행할 때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처럼 하도록 가르쳐 준다. 참 경건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부분은 가난한 자와 슬픔 당한 자들에 대한 동정과 사랑으로서, 그것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다.'(27절).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가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바로 깨닫게 된다. 만약 신앙에 대하여 두 항목으로 요약할 수 있다면 그 중 하나가 이것으로써 고난 당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이다. 순결한 생활은 거짓 없는 사랑과 자비를 동반해야 한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27절). 세상은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고 해치기 쉬워서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렵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더럽혀지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참된 경건을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정결하고 순수한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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