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 재건 작업의 방해 공작 사건은 언제 일어났는가(스 4:1-24)?

고레스 왕 통치 기간(스 1-5절).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 할때(B.C. 486-465, 6절).
아닥사스다 1세(B.C. 465-424, 7-23절).
그러나 이러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다리오 1세때 성전이 완성됩니다(B.C. 522-486, 슥1:1-17; 4:9).

 
성전의 재건축이 중단되었던 이유는(스 4:1-5)?

사마리아인의 혼합주의적 신앙으로 인한 방해 때문.
사건은 사마리아인들이 성전 재건에 동참하기를 요청함으로써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북이스라엘 멸망후 앗수르의 민족 강제 이주 정책 및 혼합 정책에 의해 다른 지역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한 민족과 기존의 북이스라엘 자손들이 혼합된 자들이었습니다.


이민족들의 성전 건축 방해 이유는(스 4:1-5)?

히브리 민족의 최대 결속 요인인 유일신 사상을 깨뜨리기 위함.
그래서 이들은 ① 종교적 혼합주의를 제안했고, ② 뇌물을 이용해 이스라엘 백성의 영안을 혼미케 했습니다.
성도는 신앙인의 최대 맹점인 타협과 물욕은 사단의 양대 전략임을 알고 이러한 방해 공작에서 늘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대적들의 관점에서 본 예루살렘 성의 훼파는(스 4:15)?

바사 제국을 중심으로 당시의 세계사를 기술한 제국의 사기(史記)관점에서 예루살렘 성의 흥망성쇠를 보았음.
여기서는 과거부터 계속적으로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제국에 손해가 되었고 그 까닭에 성읍이 훼파되었다고 역사적 사건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역사를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불신자들의 오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악한 무리의 모함이 오늘날 성도에게 주는 교훈은(스 4:11-24)?

악한 대적들은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성도들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고 연단시키는 과정임을 깨닫고 우리는 환난을 당할수록 더욱 큰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야 합니다(말3:3).


성전 건축 방해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가(스 4:24)?

16년 동안의 불신과 회의, 두려움과 침체, 비굴과 수모, 안일과 무력에 빠졌음.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들은 참으로 끈질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외적인 성전 재건보다는 내적인 영적 성전 재건에 더 힘써야 합니다(엡2:21,22).

출처 : 갓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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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 재건 공사에 앞서 제일 먼저 한 일은(스 3:1)?

예루살렘에 모여 번제를 드렸고 초막절을 지킴.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단절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해방의 기쁨을 눈물어린 감사의 기도로 드렸습니다.
당시 귀환한 포로들의 상황은 비참한 것이었으나 그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가 먼저 취해야 할 일은(스 3:2, 6)?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 회복을 위해 수고하고,
자신의 성결함을 하나님을 통해 교훈받아야 합니다.


성전 건축에 쓰인 목재는(스 3:7)?

백향목.
이는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세 성전은,
① 솔로몬 성전(B.C. 959년, 왕상6:1-38),
② 스룹바벨 성전(B.C. 516년, 스6:15-18),
③ 헤롯 성전(B.C. 20-A.D. 63, 요2:19)입니다.


성전 기공은 몇년 만에 이루어졌는가(스 3:8)?

50여 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솔로몬 성전은 무너진지 50여년만에 재건이 이루어졌습니다(B.C. 587, 대하36:11-21).
그러나 이 성전 건축은 중간에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인해 B.C. 520년까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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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 붙잡혀 갔던 사람 중 예루살렘과 유다로 귀환한 지도자는(스 2:2)?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르엘라야, 모르드개,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
위에는 ‘나하마니’가 빠져있는데 그를 합치면 귀환한 지도자는 열두 명으로, 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함.
귀환한 사람들이 지향했던 공동체는 궁극적으로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공동체였습니다.


제 1차 귀환자들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스 2:2-67)?

귀환자들을 인도한 인도자.
귀환자들의 가계별 수효(스 3-19절).
제사장들의 동리와 성읍별 수효(스 20-35절).
귀환자들의 가계별 수효(스 36-39절).
레위인들의 가계별 수효(스 40-42절).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 신복 자손의 가계별 수효(스 43-58절).
출신 종족과 계보가 불분명한 평민들과 제사장들의 수효(스 59-63절).
포로 귀환자들의 총수(스 64-67절).
귀환자 수가 포로로 끌려갈 당시의 2배가 넘음을 볼때 하나님께서는 포로 생활 가운데서도 유다 백성을 애굽에서와 같이(출1:7) 강성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 서에서의 이스라엘 자손의 계수 방법은(스 2:2-58)?

이스라엘의 지파별이 아닌 가문과 지역을 중심으로 계수됨.
가문 계수 방법은 포로 후기 시대에 주로 행해졌으며, 사마리아인들과 이스라엘 자손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신분 증명이 되었습니다.

 
귀환자 중 솔로몬의 신복의 후손은(스 2:55-58)?

소대, 하소베렛, 브루다, 야알라, 다르곤, 깃델, 스바댜, 하딜, 보게렛하스바임, 아미의 자손.
이들은 가나안 전쟁때 잡혀온 가나안 원주민으로 솔로몬의 신하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빛을 이스라엘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믿음으로 언약의 백성 안에 들어오는 자에게도 선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재건을 위해 취한 행동은(스 2:68, 69)?

자신들의 새 생활을 위해 사용해야 할 재산을 성전 재건을 위해 아낌없이 바침.
예물을 드린 내용은 금이 61,000다릭, 은이 5,000마네, 제사장 의복이 100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때는 억지로 하지말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아 즐거운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출처 : 갓피플

에스라서의 내용은?

근동의 대제국이었던 바벨론을 정복한 바사왕 고레스가 B.C. 538년에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 허가 칙령을 내린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이 허락된 것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예언의 성취였습니다(렘29:10-14).
고레스 왕은 다른 왕, 즉 느부갓네살, 다리오, 벨사살 등과 같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가는데 사용된 도구입니다.


에스라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풍습에 젖지 말것과 하나님의 언약을 붙잡고 살때 하나님의 축복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줌.
이를 위해 에스라는 ① 율법을 가르쳤고, ② 백성들에게 죄악을 회개케 했으며, ③ 언약을 따라 살게했고, ④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지시켰습니다.


고레스 왕이 이룩한 업적은(스 1:1-4)?

이름의 뜻은 ‘태양’임.
메대와 바사를 연합하여 통합 국가를 세운 바사의 초대왕임(B.C. 559-530).
점령국의 종교를 말살하지 아니하고 장려했으며, 유대인들을 본토로 귀환시켜 성전을 건축하도록 도왔음(스1:1-4).
하나님은 고레스 왕을 쓰셔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과 바벨론에 남아있는 유대인들이 귀환하는 유대인들에게 예물을 준 까닭은(스 1:5)?

이스라엘의 귀환이 승리의 귀환이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한 결과임을 이방인도 공감했음을 의미함.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고레스 왕이 성전 기명들을 되돌려준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스 1:7-11)?

하나님께서 친히 성전을 다시 세우시고 실추되었던 유대 백성의 지위와 면모를 성민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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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예물헌납

디아스포라(Diaspora)란 바벨론에 의해 출애굽 이후 살아오던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게된 유대인을 뜻한다. 에스라 7장에 나타난 유대인들도 바벨론에 의해 바벨론 땅에 사로잡혀간 자들인데, 이들은 비록 팔레스틴 밖에 거주할지라도 조상의 나라요, 열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분산되어 사는 나라에서도 일정한 단위 지역으로 모여 회당을 만들어 거기서 예배를 드렸고, 이때 바쳐진 예물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었다. 또한 성전이 존속하는한 바쳤던 반세겔의 성전세도 예루살렘으로 헌납했다. 이처럼 팔레스틴이 아닌 다른 여러곳에 흩어져 살면서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 민족의 통일성을 유지해 왔다. 한편 이런 풍습은 유대, 로마 전쟁(A.D.66-70)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승리로 말미암아 이 풍습은 주피터(Jupiter)신전에 예물을 바치도록 강요됨에 따라 변질되고 말았다. 한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 예물을 헌납하는 것 외에 매년 세차례씩 그들의 민족적 축제일에 팔레스틴을 순례하기도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민족적 동질성을 잃지않게 된 것이다.

2. 포로귀환 시대의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

1) 이방인과의 통혼금지
성경은 근본적으로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 있다(출34:12,16; 신7:3,4). 그런데 성경에서 이렇게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 있는 이유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서이거나 배타적인 민족주의적 근성을 고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방 신들을 섬기는 자들과 통한함으로써 맺어질 유혹, 즉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유가 아닌 경우에 성경은 이방인과의 결혼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예를들면 모세도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민12:1). 그리고 기생 라합, 모압 여인 룻의 경우에도 이방 여인으로서 히브리인과 결혼한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신7:10-13에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규례까지 소개하고 있다. 즉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상태가 죄인의 상태임을 인정하고 또 정결의식을 통해 그 죄된 상태를 해결할때 그도 선민의 대열에 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모세오경에서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지하는 것은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 보존을 위한 것이지, 결코 혈통적 배타주의적 민족주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볼수 있다.

2) 포로귀환 시대의 특수성
에스라 개혁운동 당시 이방여인과 통혼한 백성들이 이방인 아내와 자식들을 내어보낸 것은 당시의 시대적 특수성에 의해 이해되어져야 한다. 즉 이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포로생활로 말미암아 여러면에서 잃어버렸던 선민의 면모를 회복해야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이방인 아내와의 이혼은 이와 같은 중차대한 종교적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 것이다. 더욱이 당시 이방인과 결혼한 자들은 대부분 제1차 포로귀환시 귀환한 자들로서 스룹바벨의 주도하에 예루살렘 성전재건 사업에 참여했던 자들이었다(B.C.516년). 그러나 성전재건 이후 곧 신앙적으로 나태해져서 앗수르의 식민지 이주 정책에 따라 대부분 이방인으로 구성된 사마리아인들과 약 60년동안 섞여 살면서 이방 종교에 상당히 물들어 있었다.

3. 세금

1) 조공
'측량하다. 수치를 재다'라는 의미의 (ddm)마다드에서 유래된 여성 명사로써 '측량줄(렘31:39), 도량형' (레19:35)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스7:24에서는 '측량된 세금' (느5:4)으로 그 의미가 확정되어 정복국이 포로나 노예나 돈 및 생산물의 형태로 피정복국에 부과하는 세금 또는 공물을 뜻한다.

2) 잡세
구약에서 스4:13,20; 스7:24에만 나타나는 단어로써 소비된 물품에 대한 세금을 가리킨다. 이것은 달리 수입 상품에 추징되는 관세로써 토관세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 경우 관세를 뜻하는 헬라어 telo"(텔로스,마17:25; 롬13:7)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3) 부세
'걷다, 외국에 가다'라는 의미의 동사 &lh(할라크)에서 유래된 명사로써 그 본래 의미는 '여행' (창24:42)이며, 이것이 함축적으로 사용될 경우에는 여행자가 여행 도중에 지불해야 하는 '도로세' 또는 '통행세'를 가리킨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교회가 역사 앞에서 한민족이나 국가를 도덕적으로 이끌지 못하고 주도하지 못할때 나라와 국가는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법과 도덕적인 신념이 없이 그대로 내버려두면 자연히 타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율법이 제대로 선포되지 못하고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등 죄악에 빠져지내게 되었다. 이때 에스라를 중심으로 바벨론에서의 2차 귀환과 개혁이 일어나게 되는데, 본 연구에서는 그 구체적인 귀환 정책과 개혁을 살펴보며 그것의 구속사적인 의미를 찾고자 한다.

1. 에스라 인도하의 제2차 귀환(스7, 8장)
6장과 7장 사이에는 최소한 58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은 대략 어느 시기인가? 그리고 에스라는 어떠한 인물인가? 에스라와 함께 2차 귀환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는 얼마이며, 이들이 귀환 중에 아하와 강에 도착하여 누구를 모집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재정관리자 10명을 세운 목적과 몇 개월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는가?

1) 하나님의 인도하심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은 대략 주전 458년의 일이다. 에스라는 율법에 정통한 학사로써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B.C.464-424년)이 이스라엘의 신앙 부흥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보낸 사람이다. 아닥사스다 왕은 포로귀환과 성전 예배의 회복과 율법 준행에 필요한 원조를 지원해 주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그리고 에스라와 함께 2차 귀환에 참여한 사람들은 약 9천명 정도가 되는데, 에스라는 그들과 함께 9일 동안 여행한 후에 아하와 강에 도착하여 성전 제사를 감당할 레위인을 모집하였다. 이는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의 성전 예배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표출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지켜주심을 바라면서 금식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앗수르 군대의 호위를 거절하고 귀환자들로만 여행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재정관리자 10인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성전 기명들과 무리들이 바친 예물을 관리하도록 하였다(스8:25-30). 2차 귀한에 참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 4개월에 걸친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하나님께 감사제사를 드렸다.

2) 매일 자신을 점검하는 신앙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배려로 풍성한 헌물과 함께 본토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는 감격에 차서 하나님을 송축하였다(스7:27,28). 찬양은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에 대해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연구하고 준행하여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다(스7:10). 우리도 에스라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럴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 될 것이다.

2. 에스라의 종교개혁(스9,10장)
제1차 귀환(B.C.537년) 이후 스룹바벨이나 예수아가 죽고난 후 이스라엘은 영적 지도자가 없이 약 58년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 나태해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과 결혼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 범죄함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리고 에스라의 첫번째 종교개혁 정책은 무엇인가? 또한 3개월간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은 모두 몇명이었는가?

1) 에스라의 회개 운동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방 지역에서 이방인의 문화, 종교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이방인과의 결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는 포로귀환자들에게 첫번째로 닥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에스라는 저녁 제사를 드리기위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모였을때 중보적인 성격을 띤 회개기도를 하였다.
이 에스라의 회개기도는 곧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의 회개운동으로 이어졌다. 스가냐가 먼저 이방인 아내를 내어보내고 이에 용기를 얻은 에스라가 총회를 소집하여 이방 여인을 내어버리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많은 비로 인해 야외에서 있지 못하고 결국 방백들로 하여금 통혼자들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개월간의 통혼자 조사를 통하여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 112명의 명단을 파악하였다.

2) 신앙의 순수성
믿지않는 자와의 결혼 문제는 에스라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제로 취급된다. 구약 시대에는 신7:1-4에 근거하여 잡혼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그 이유는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신앙의 순수성과 혈통적 단일성이 유지되지 못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통해 요셉이 애굽 여인과 결혼한 것 (창41:45)이나 모세가 구스 여인을 취한 사실(민12:1)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과의 결혼을 엄격하게 금지시킨 것은 우상 숭배나 종교적 혼합주의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에도 믿지않는 자와의 결혼 문제는 단순히 사랑이나 윤리적인 차원이 아닌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고려되어야 할 일이다.
이스라엘의 회개운동은 단순히 감정적인 입술의 회개가 아니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차원까지 나아갔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에서도 수많은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스라엘의 회개운동처럼 진정한 행동의 변화로 이어지는 참된 회개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교회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 문화나 비기독교 문화와 타협하여 세상 문화를 아무런 여과없이 수용할때 자칫 신앙을 잃어버리고 단순한 윤리나 도덕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에스라 당시에도 선민 이스라엘 백성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써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스스로 하나님 앞에 근신하며 깨어있지 못함으로써 타락하고 말았다. 이럴때 나타난 에스라의 종교개혁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시키는 사건이 되었다. 오늘날도 교회가 계속해서 개혁되지 못한다면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다시 타락하고 약해질 가능성이 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고레스의 원통형 비문

 

고레스의 유대인 포로귀환 허가 내용이 기록된 원통형 비문(Cyrus Cylinder)이 바벨론 성 발굴적업 도중(1879-1882) 고고학자 호르무르즈 라삼(Ho-rmuzd Rassam)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비문의 내용은 다음의 두부분으로 나눌수 있다.
① 전반부 : 고레스는 자신이 바벨론의 국가 신인 말둑(Mar-duk) 신의 소명을 받아 바벨론을 정복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② 후반부 : 고레스는 말둑 신의 명령에 의해 바벨론에 있는 모든 포로민을 고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자기들의 신전을 건축토록 허가했고, 또 과거 포로민의 신전에서 탈취한 모든 재산도 돌려보냄으로써 말둑 신의 명령을 완수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말둑 신에 대한 경의 표명과 함께 포로민들의 신들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하면서 그 신들의 자기에게 축복하도록 기원했다.

2. 구약 시대의 화폐 사용

구약 시대의 화폐 발전의 단계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 물물교환(物物交換) : 화폐가 사용되기 이전에 사람들은 주로 물물 교환을 통하여 자신이 필요한 일용품들을 구입했다. 이때 주로 교환된 품목은 양, 소, 나귀 등의 육축과 곡식, 기름, 포도주 등이었다. 당시의 종교적 행사에서 신에게 바치는 제물 중 육축을 가장 귀하게 여겼던 것도 육축이 물물 교환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② 금속조각 사용 : 육축이나 곡식을 교환하는 방법은 가치의 변동이 심하고 번거로웠기 때문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은 금속을 이용하여 필요한 물품들을 매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주로 사용된 것은 동(銅)이었으며, 은이나 금은 보다 큰 거래를 위해 사용되었다. 아브라함 시대부터 은이 돈으로 사용되었음을 기록(창13:2; 창24:35)하고 있는데, 이 당시에는 은으로 돈을 주조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은덩어리를 무게로 달아 가치를 정했다.
③ 주조한 화폐의 사용 : 이상의 단계보다 더 발전된 단계는 금속의 무게와 순도를 도정으로 확인해서 사용하는 단계, 즉 주화의 사용이었다.

3. 금속 주화의 사용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초로 주조 화폐를 사용한때는 아마도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인듯 하다. 즉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서 통용된 '다릭'이라는 금화의 영향을 받아 비로소 돈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이스라엘 자체 내에서 화폐를 만들어 썼던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나 그리스의 주화를 같이 통용한 것에 불과하다. 한편 유대인의 주화 사용에 영향을 준 '디릭'은 활과 창을 가지고 있는 왕의 초상이 새겨져있는 것으로 주조 화폐의 초기 국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에스라의 회계 보고서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스8:26, 27), 은이나 금이 모두 화폐로 주조되어 통용된 것이 아니라 은이나 금 자체로써 통용되었음을 알수 있다. 유대인들이 독립적으로 화폐를 만들어 쓴 것은 B. C. 138년경 마카비 시대였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는 '성전 주화'(Temple-coin)라 불리는 은화가 유대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이 은화는 성전세를 바치는데만 주로 사용되었고, 일상의 화폐는 로마의 데나리온(Denarius)이었다.

4. 고레스의 조서

바벨론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근동의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한 바사(Persia) 제국의 고레스(Cyrus) 왕은 피정복민들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쳤다. 즉 그는 앗수르나 바벨론의 왕들이 그랬던 것처럼 피정복민들의 강제 이주를 추진하기보다는 오히려 피정복민들로 하여금 각자 본토에 거주할 수 있도록 관용을 베풀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고레스의 조서에 위해 B. C. 605년 제1차 포로로 끌려간 이후 거의 70년 동안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도 팔레스틴으로 귀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에 두차례에 걸친 유대인 귀환이 있게 되는데, 고레스의 유대인 귀환조서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라는 지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고레스의 조서 내용을 효율적인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만 평가절하 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것은 확실히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에 비롯된 결과였다.
비록 고레스의 관용 정책이 유대인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사 제국의 모든 피정복민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 할지라도 앗수르 제국이나 바벨론 제국의 그 어떤 왕에게서도 진례를 찾아보기 힘든 종교적 관용 조치가 하나님의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선민 이스라엘이 영원하며, 다윗 가문이 그 위(位)를 잇게 되리라는 다윗 언약(삼하7:4-17)을 신실히 지키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지의 발현이라 할수 있다.
결국 이 고레스의 조서로 인해 유대 백성들은 B. C. 586년에 멸망했던 국가를 50년만에 재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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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이루신다. 그러나 때로는 믿지않는 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기도 한다. 에스라서에 나타난 바사왕 고레스의 포로귀환 조서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방 민족의 왕인 고레스를 통해서 예레미야의 예언(렘29:10-14)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에스라 1-6장 사이에 잘 나타난다. 또한 고레스의 조서 가운데 예루살렘 성전 재건 허락에 관한 부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잘 드러내는 증거이다. 본연구에서는 스룹바벨 인도하의 제1차 귀환과 성전 재건을 살펴보면서 거기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신앙인의 바른 모습이 무엇인가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스룹바벨 인도하의 제1차 귀환(스1, 2장)

1) 포로귀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본 단락은 역대하의 끝부분(대하36:22, 23)에 곧바로 이어지는 내용으로써 포로귀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준다. 약육강식이라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던 그 당시의 제국들이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포로귀환을 통해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토록 변함없음을 알수 있다.

2) 1차 포로귀환
자신들의 본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낙망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적과 같은 일이 눈 앞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고레스라는 한 왕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스룹바벨을 중심으로하여 약 5만명의 사람들이 첫번째 귀환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것을 통해 바로 인류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고레스는 이스라엘 백성과 원주민들에게 성전 기명에 대한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는 세속 국가도 도구로 사용하시며 또한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약속하심은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것(계3:10)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그 다음으로 귀환자들의 명단이 나오는데, 귀환자들의 주된 목표는 성전 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도 주의 일임(고전4:2)을 깨닫게 해준다.

3)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이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섭리하고 계신다. 본 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그 도구로 세상 권세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작은 일들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역사하심을 우리는 얼마나 믿고 있고 느끼고 있는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마6:26). 또한 귀환자들의 명단에는 지도자들이 있었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 계보가 불분명한 사람 등 여러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돌아와서 성전 재건을 위해 자신들의 물품을 헌납하였다. 혹시 오늘날 우리의 모습 속에 더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의 봉사와 충성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지는 않는지 살펴보고, 복음 전파와 봉사를 위하여 내 삶을 얼마나 드리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2. 성전재건(스3-6장)

1) 성전재건의 어려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의 건축과 함께 7월 15일의 초막절을 준수하였다. 그리고 이 초막절 준수를 시작으로 모든 절기들은 재확립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귀환한지 2년째 되는 해의 2월 봄이 되었을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룹바벨의 감독하에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필요한 경비는 바사왕 고레스에게서 받은 하사금에서 일부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인근의 다른 족속들이 자기들도 성전 건축에 참여하겠다는 억지 주장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주장이 이스라엘인에게 거절당하자 모든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방해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모든 장애물이 제거된 후 성전은 약 5년만에 완공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성전을 봉헌하고 이어 매년 1회의 유월절을 지켜왔다.

2) 성전재건이 주는 의미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최우선의 과제는 성전 재건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언약의 회복과 하나님과의 교제 회복을 의미하며, 이는 또한 훗날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사신 교회의 건설을 예표한다고도 할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혼합주의자들인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들의 혼합 정책을 제안하였다. 그들의 이런 혼합주의적인 성격은 결국 거절당하게 되고, 이것은 예수님 당시까지도 이어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멸시받게 된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신앙인을 파멸로 인도하는 것은 항상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나 사물인 경우가 많으며(삿3:1-3), 또한 우리의 신앙에서 환난과 시련은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다. 결국 성전은 완성되고 봉헌식과 유월절이 지켜지는데, 이것은 예배의 회복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보여주며, 아울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확인하는 의미를 지닌다.

3) 성전재건을 통한 신앙의 순수성
성전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마리아 사람들은 교묘한 혼합주의적 성격으로 그들을 돕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거절한다. 우리는 삶 속에서 불순한 동기로 우리의 사역이나 교회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또한 방해 공작으로 15년간이나 중단된 성전 재건의 역사처럼 혹시 우리 가운데도 시련이나 환난으로 인해 하나님의 일을 중단하거나 그만둔 적은 없는지 되돌아보고, 오히려 그런 환난이나 시련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방 나라인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엿볼 수 있으며, 당신의 선민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신실하심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성전 재건을 시작하지만, 대적자들의 방해로 온갖 어려움과 중단되는 위기 속에서도 결국 성전을 완공하는데, 이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신앙의 승리일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회복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결국 이 성전 재건은 죄로 인해 원수가 되었던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단번의 희생 제사로 회복시킨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결국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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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스라서의 저작 목적

에스라의 중요성은 서두에서 말하고 있는 저작 목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에스라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70년동안이나 포로로 잡혀있다가 막 해방되려는 시기를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의 고레스 왕을 세우셨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하나님께 불복종하고 사악하므로 바벨론 사람들에 의하여 벌을 받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바벨론 역시 잔악하고 사악하므로 패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렘25:11-25).
이사야도 그 사건이 일어나기 백년이상 이전에 유다가 바벨론에 의하여 사로잡혀 포로가 되고, 그 잔악하고 사악한 나라도 계속해서 패망할 것과(사13:19, 20),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고레스에 대해서(사44:28) 예언했다. 따라서 에스라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욱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민족들을 어떻게 주관하시는가를 명쾌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란 B. C. 605년에 처음 유대인들이 사로잡혀 갔던 때로부터 B. C. 538년 고레스가 칙령을 발하여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돌아온 때까지를 말한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서를 통해서도 에스라서의 연구에 도움을 얻을수 있으며, 제1진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사람들의 운명도 어느 정도 알수 있다. 그 두권은 모두 귀환 초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으며, 특히 최초의 총독인 스룹바벨 통치하에서의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다.

2. 저자와 저작 연대

에스라의 저자는 알려져있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역대기뿐만 아니라 에스라서의 저자를 제사장이자 서기관인 에스라라고 말한다. 에스라는 서기관이었을뿐만 아니라 학자였으며 모세 율법의 교사였다. 그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제2진의 귀환자들 혹은 대표관들과 함께 B. C. 457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최근 학자들 사이의 지배적인 견해는 어떤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혹은 연대기 편자가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의 3부작 내용을 참조하고 그외의 다른 많은 자료들을 모아서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 역사서의 한부분으로써 에스라서를 편집하여 썼다는 것이다.
에스라서의 일부분은 이스라엘의 동쪽과 북동쪽에 인접한 나라들에 의해 사용되던 아람어로 씌어졌는데, 고대의 중근동에서는 외교적인 언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에스라서는 주로 일반적인 기록과 공식적인 문서의 필사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것들은 연결된 역사서와 함께 아람어로 되어있다. 또한 유대 관리들이 바사 왕에게 보낸 서신이나 그 관리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왕의 답신과 칙서도 아람어로 되어있다. 여러가지의 역사적인 기록과 기자 작신이 쓴 연결된 역사서에서 취한 유다의 극적인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에스라의 나머지 부분들은 히브리어로 쓰여있다. 에스라의 특징은 역사가들이 그것은 에스라의 개인적인 전기에서 인용한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그것은 그 저자가 원본에서와 같이 1인칭 대명사인 '나'와 '우리'로 썼다는 것이다. 그 책의 나머지 부분은 주로 3인칭으로 되어있다. 에스라서는 책 속에 있는 것을 근거하여 볼때 제사장이나 서기관인 에스라가 인도한 제2진의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B. C. 457년 이후에 씌어졌음이 틀림없다. 더욱이 역대기, 에스라, 느헤미야가 하나로 연결된 역사서라고 가정할때 그 저작 시기는 더욱 늦어진다. 즉 연대기에 언급된 다리오 왕(Darius Codomannus B. C. 335-330)과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언급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 C. 336-323)의 시대만큼이나 늦게 저작되었다. 그렇지만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에 있는 역사와 관련된 주요 사건을 볼때 유대인의 역사적인 에스라서는 그 저작 시기를 약 B. C. 432년까지 거슬러 생각할 수 있다.

3. 에스라의 특징

① 역대기서, 에스라서, 느헤미야서는 서로 연결되어 이스라엘 왕정 초기부터 왕정의 몰락과 회복의 전과정을 파노라마(Panorama)식으로 개관한 책이다.
② 선민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야기된 포로 생활을 하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귀환하여 새로운 신앙 공동체로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③ 역대기가 솔로몬 성전 건축과 파괴를 줄거리로 진행된 반면, 에스라서는 스룹바벨 성전의 건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는 저자인 제사장 출신 에스라의 집필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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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과 저자

1) 제목
본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한권의 책으로 묶어서 '에즈라'로 불렀다. 그러나 에스라 2장의 내용이 느헤미아 7장에서 반복되며, 이 두책이 나름대로의 특징을 지닌다는 것을 고려해 볼때 이 두책은 별개의 것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헬라어 칠십인역에서는 본 서를 '에스라1서'라고 했으며, 라틴어 벌게이트역에서는 오늘날과 같이 '에스라'로 칭하였다. 그러므로 본 서의 제목은 본 서의 저자인 동시에 중심 인물인 제사장 에스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 저자
에스라서의 저자는 지금까지 학사인 에스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에스라서에서 저자에 관한 정확한 언급이 없고, 문장도 1인칭과 3인칭이 섞여서 나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서로 다른 몇사람에 의해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탈무드의 기록에는 본 서의 저자를 에스라로 밝히고 있다.
또한 문장의 주어가 바뀌는 경우는 저자가 한사람일때도 나타나는 것으로써 고대 바벨론 문서나 다니엘서에서도 볼수 있다. 그리고 에스라가 자신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 (스7:6)라고 부르는 것이 에스라 저작설에 대해 약간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이러한 묘사도 역사 문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써 오히려 에스라의 지식과 그 심오한 사상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본 서는 제사장적 관점에서 역대기와 비슷한 문체로 기록되었으며, 사건 묘사의 치밀성으로 보아서도 에스라의 저작인 것이 유력하다.

2. 기록 연대와 기록 목적

1) 기록 연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와 역대기는 그 시대적 배경이 연속적이어서 기록 연대상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에스라서의 기록 연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의 견해가 있다.
① 후기 연대설 : 에스라서를 느헤미야서보다 더 늦게 기록되었다고 보는 견해로써 비평주의적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모빙켈(Mowin-ckel)은 본 서의 기록 연대를 주전 200년경으로 잡았으며, 토레이(Torrey)는 주전 250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19세기와 20세기초의 비평주의자 학자들은 느12:11, 22에 나오는 얏두아가 요세푸스의 책에 나오는 알렉산더 대왕의 얏두아와 동일 인물임을 내세워 주전 3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② 전기 연대설 : 이 견해를 따르는 학자들은 느12:11, 22에 나오는 얏두아가 요세푸스의 책에 나오는 얏두아와는 동명 이인이라고 주장하며 후기 연대설을 반대한다.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의 귀국후인 주전 444년 이후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에스라서에서는 전기 연대설을 지지하며, 에스라가 느헤미야 때의 대제사장인 여호하난의 방에 들어간 기록을(스10:6) 통해 볼때, 에스라서는 에스라 생애 말기인 주전 444년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한다.

2) 기록 목적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거의 같은 시기의 포로 귀환의 역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에스라나 느헤미야의 기록 목적이 유사하다.
에스라서의 기록 목적은 첫째 포로귀환 이후에 벌어진 성전 건축의 역사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둘째 성전 건축과 같은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에스라 3장에 나오는 성전의 기초 건축을 위한 백성들의 일치 단결(1절), 방해 세력에 맞서는 용기(3절), 자발적인 예물 헌납(4-7절), 조직적인 역할 분담(8, 9절) 등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셋째 70년이라는 바벨론 포로기간과 포로귀환 그리고 성전 재건을 통해서 드러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포착될 수 없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3. 주제 및 특징과 구성

1) 주제 및 특징
본 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성전 재건이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특징으로는 먼저 포로 후기 역사서라고 할수 있는데, 느헤미야와 더불어 포로귀환 이후의 사건을 다루는 구약의 마지막 역사서이다. 또한 역대기와 느헤미야서와 유사하게 이스라엘 전통 종교의 회복을 염원하는 제사장직 문서라고 할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와 신앙의 구심점인 성전이 재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보아서도 이것을 알수 있다. 이처럼 에스라서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 관계가 강조되고 있다. 언약은 족장 시대 이래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포로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언약 백성들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돋보일뿐만 아니라 여호와 신앙의 순수성이 강조되고 있다.

2) 구성
에스라서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의 조서로부터 시작된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약 5만명에 달하는 귀환민들이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런 본 서는 크게 두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전반부(스 1-6장)와 후반부(스 7-10장)로 나눌수 있다. 전반부는 에스라 이전의 사실에 관한 내용으로 주로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일어난 제1차 귀환과 귀환자의 명단(스1:1-2:70) 그리고 성전 재건의 시작과 중단, 재개와 완성(스 3:1-6-22)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반부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성전 재건이다. 후반부는 에스라 이후의 사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는 약 58년의 공백 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여인과 혼인하는 등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해 갔다. 이런 시점에서 에스라 인도하의 제2차 귀환(스7:1-8:36)이 이루어졌고 그후 에스라의 종교개혁(스9:1-10:44)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갱신이 완성되어 갔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일대 혁신이 일어났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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