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요한 삶을 살려면...

[누가복음 12장 13절~21절]
13절 -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절 -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절 -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절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절 -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절 -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절 -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절 -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절 -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저는 엊그제 어느 교우와 대화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변화된 물질관과 인생관에 대해서 간증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많은 재산과 다른 이들의 존경을 받는 사회적 지위와 학식에도 불구하고 늘 마음 속에는 알 수 없는 공허와 불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기를 사로잡아 행복과 만족을 모르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나서 은혜받고 구원받은 확신을 가진 후에는 당장 죽는데도 겁나지 않고, 생명이나 물질이나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이제라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시면 안개와 같이 업어지는 것 뿐이므로 기회만 있으면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고 싶을 뿐, 더 이상 좋은 집을 사고 싶지도 않고, 더 이상 좋은 가구를 사고 싶지도 않으며, 땅위에 재물을 쌓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고 하면서 마음에 평안과 만족을 가지고 감사한 생활을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불안이나 근심도 없어지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분의 말은 물질도 자식도 내 생명도 자신의 모든 소유가 이제는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참으로 은혜받고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남들이 가진 것은 자기도 다 가져야 되고, 보다 많이 가져야 행복하다고 느끼고 만일 그렇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끼며 자기 연민에도 쉽게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부요하며 행복한 삶을 살려면 '소유'에 대한 우리의 생각부터 바로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진정으로 부요를 누리는 삶의 비결에 대해서 함께 상고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주는 교훈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나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도 제일 먼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는 땅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인정이나 사정에도 얽매이지 말고, 이제부터 만복의 근원이 되시고 만유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고 따라오라는 훈련의 시작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광야에서 유랑하게 하신 것도 바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살게하려는 훈련인 것입니다. 광야 생활에는 자기 땅이나 집과 같은 부동산을 가질 수 없는 완전히 자유하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에릭프롬(Erich Fromn) 교수 같은 분은 광야를 '자유의 상징'(Symbol of liberation)이라고 했습니다. 장막도 텐트와 같은 것이므로 쉽게 세울 수도 있고 쉽게 헐어버릴 수도 있는 고정된 삶(Fixed life)이 아닌 자유 방랑의 생활입니다. 또 아침마다 만나를 내려 먹이시되 안식일 외에는 이틀 분이나 삼일 분을 미리 한꺼번에 거두면 썩어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소유욕과 탐심에서 해방시키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그나마도 거두어 들이지 못하게 만나를 내리지 않으신 것은, '네 것, 내 것' 따지는 것 없이 어떤 소유욕에 얽매이지 말고 즉, '가지는 것(Having)'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말고 오직 올바른 인간이 '되는 것(Being)'에만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인간관계, 인간과 인간관계, 인간과 자연관계만을 올바로 가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원래 선민 이스라엘이 유목민이 되게 하신 것도 어느 곳에 정착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방랑하면서 그때 그때마다 하나님만 믿고 살게하려고 하신 훈련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 방랑생활을 끝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해서 좋은 집을 짓고, 은금이 증식되고, 우양등 재산이 풍부해지게 될 때 다시 물욕과 탐욕에 사로잡혀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불신앙에 떨어질 것을 제일 염려하신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 8:12~14절에서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릴까 하노라"고 간곡히 말씀하시고 신 8:17절에도 보면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을 모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누누히 강조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주는 교훈의 하나는 소유에 집착하지 말고 그 배후에 만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모든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모든 것에 부요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도록 풍성히 채우시고 공급해 주시어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자신의 소유주로 모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재산 분배 문제로 형제가 서로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께 찾아와 공평하게 분배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형은 얼마 가지고 아우는 얼마 가지라고 하시지 않고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핀잔을 주듯 말씀하시고 나서 신중하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해결책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 말씀은 사람이 오래 살고 적게 사는 것이나, 인생의 행복과 만족이 그 소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므로 먼저 탐심,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참 자유와 행복은 도리어 탐심을 버리고 소유욕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소유에 대하여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부자'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야기인즉, 밭에 소출이 너무 많아서 곡식을 모아둘 창고가 모자라고 몇 해를 먹어도 다 못 먹을 정도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며 한 말 가운데에는 우주 만물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고 '내가(I)', '나의(my)', '내것(mine)'이란 말만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라고 했습니다. '내 영혼아' 한 것을 보면 부자는 자기 생명과 영혼의 참된 주인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물 뿐만 아니라 생명도 영혼도 제 것인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괘씸히 여기사 그를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시고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하셨습니다. 이에 주님은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흔히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며 자기 영혼의 참된 주인도 모르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불신자들 뿐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생명과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전부 맡기고 드리는 대신 제뜻과 제 맘대로 살고자 하는 성도에게도 큰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여...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재물이나 다른 소유인들 주장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참으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까지도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 결코 내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위하여 세상에 속한 것들을 소유하고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유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 부요를 누리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그것이 진정 부요한 자가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한편 마태복음 19장에 예수님을 찾아 온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신 말씀과 마 6:19절에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으로 땅에 속한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은 온전히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고 하늘에 보화를 쌓을 수도 없다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겠습니다.
소유에 대한 참된 신앙의 자세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과 자세입니다. 곧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이를테면, 우리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 시간과 재능과 건강, 사랑하는 가족, 친구, 심지어는 자기 생명과 자기 영혼까지도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진정한 소유주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다만 그분의 것을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이 소유하려 탐내려고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오직 이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며 나는 다만 잠시 맡아 관리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달아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며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 소유의 많고 적음보다 가진 것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용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려서 저 하늘에다 보화를 쌓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진정 부요한 자가 되며 부요한 삶을 사는 비결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속한 유한한 물질과 가치들보다 우리의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을 소유하며, 또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림으로 진정 부요한 삶을 사는 성도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

[누가복음 2장 1절~7절]
1절 -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절 -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절 -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절 -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절 -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절 -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절 -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사람들은 누구나 더 좋고 큰 집에서 살기를 원하고, 그래서 사는 동안 사람들은 점점 더 집을 크게 늘려 이사를 다니곤 합니다. 물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이 보다 편안하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겉모습을 중요시하는 세상 사람들은 크고 좋은 집에서 사는 것을 자랑삼고 뿌듯해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구유에서 탄생하시고 거기에 누우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무렵 로마황제 아구스도가 호구조사령을 내려서 저마다 본 고장으로 호적등록을 하러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요셉과 마리아도 역시 호적을 하러 가다가 이 베들레헴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관마다 다 대만원이어서 특별한 부자나 권세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여관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할 수 없이 어느 여관의 마구간을 빌려 그 밤을 지내다가 예수님을 낳아 말구유에 누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고대왕실 높은 집에서 탄생하시지 않고 여관집 마굿간 말밥통에서 태어나셨겠습니까?
여기에도 생각해 보면 깊은 뜻이 있습니다.

1. 인생은 나그네임을 보여줍니다.
여관은 나그네의 집입니다. 나그네들이 목적지를 향하는 도중에 잠깐 쉬기 위해 머무는 장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그네가 묵는 여관집 마굿간에 탄생하셨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영원히 거처하실 것이 아니요, 잠깐 다니러 오셨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인생은 모두 본향이 따로 있어 이 세상을 잠깐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벧전 2:11절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다녀가는 나그네의 세상입니다.
오직 우리의 본향과 시민권은 천국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정욕대로 마음대로 죄 짓고, 하고 싶은대로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천년, 만년 영원히 거할 처소인 줄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작년에 제가 미국에 가서 집회를 인도하면서 나그네 생활을 해보았는데 얼마나 집이 그리웠는지 모릅니다. 잘 사는 나라에 없는 것 없이 모든 것이 다 풍족하고 편안해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세상은 잠깐 있다가는 나그네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세상의 가치와 풍습을 좇아 세속에 깊이 파묻혀 지내거나 내 멋대로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천국 시민답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이 천년 만년 영원히 거할 처소인 줄 알고 하늘나라에 보화 쌓을 줄도 모르고, 천국에 갈 준비도 하지 아니하고, 되는대로 살다가 갑자기 죽음의 날이 이르면 극심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 허무하게 생을 끝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2. 원하는 누구나 예수님께 올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왕이나 귀인들이 사는 금전옥루(金殿玉樓)에 태어나서 비단 침구 속에 뉘어져 있었다면 목자와 같이 비천한 사람은 감히 들어갈 엄두조차도 못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짐승이 있는 마굿간에 태어나셔서 꼴을 요삼아 누워계시니 동방박사 같은 귀족도, 양치는 목자와 같은 천민도 누구나 찾아가 만날 수 있고 경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관집 자체가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집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찾아가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에는 세상의 어떤 자격과 조건의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귀족의 종교가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인생이 예수님께로 초대받았습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적은 사람도, 창녀도, 강도도,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유식한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믿음만 가지고 오면 아무라도 예수님을 만나 모셔 들이고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도리어 이 세상에 돈많고 지식많은 사람은 교만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래서 고전 1:26-29절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마 9:13절에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실제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창녀로부터 시작해서 강도, 세리, 문둥이, 종교 지도자에 이르기까지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모든 자들인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어떤 사람도 외면치 않으시고 사랑으로 맞아주십니다.
이처럼 교회는 차별대우하는 곳이 아닙니다. 어떠한 사람도 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경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구유는 짐승의 밥통입니다. 먹이를 담는 그릇에 아기 예수님이 누우셨습니다.
성경에 타락한 인간은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 1:3절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짐승은 꼴을 먹어야 하듯이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은 생명의 양식이 되신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요 6:35절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내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심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의 원뜻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떡집이라고 하는 베들레헴에 탄생하시고 짐승들의 밥그릇이 되는 말구유에 탄생하신 것도 예수님이 우리의 영의 양식이 되신다는 것을 암암리에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4. 예수님의 겸비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과 본체(本體)이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막 10: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고 대접을 받으러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하고 우리는 섬김의 본을 보이신 주님으로부터 남을 섬기는 생활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한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빌 2:3-8절에 보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를 비워 사람의 몸을 취하신 예수님의 극도의 겸손을 우리도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은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며 몇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말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은 나그네 인생을 사는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예수께로 나아올 수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친히 우리의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분으로서 지극히 겸비한 분이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이시간, 천국을 향하는 나그네로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님의 생명의 양식을 공급받고 겸손히 행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입맞춤

[누가복음 15장 18절~21절]
18절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절 -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절 -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세 가지 비유가 있습니다. 한 목자가 양 백마리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려 양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들로 산으로 떠나간다는 말씀과 또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 중에 한 드라크마를 잃어버리자 온 방안을 뒤지고 등불을 켜들고 빗자루로 쓸며 마침내 찾으니까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잃어벼렸던 아들이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 말씀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은 모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이렇게 기다리시고 심히 기뻐하시며 중요하게 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중 오늘 살펴볼 탕자의 비유는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작은 아들이 나쁜 친구의 꼬임에 빠졌는지 아버지께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졸라대서 마침내 많은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그 돈을 온갖 쾌락과 사치를 좇는데에 다 탕진해 버렸습니다. 마침내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어지자 이 집 저 집 찾아다니다 마침내 돼지를 치는 집에 찾아가서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으며 지냈습니다. 너무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우리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고 품꾼도 많은데 이제라도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겠다 마음을 먹고 염치 불구하고 발길을 돌이켜 아버지를 향하여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그는 마음 먹기를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만 써 주시옵소서 해야지' 하고 돌아오는데 거지가 되어 돌아오는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는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아버지를 멀리 떠나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더럽다고 하지 않고, 책망하여 내쫓지 않고, 도리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기서 '입을 맞추었다'고 하는 말을 원문대로 정확히 하면 '입을 많이 맞추었다'-and kissed him very much(eagerly)입니다. 아버지는 그 거지 같은 아들을 끌어 안고 많은 입맞춤을 해 주었으며 옷을 갈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찐 소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을 초월한 사랑이요, 한이 없이 주고 또 주는 사랑임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맏아들이 보기에는 자기 동생이 많은 재산을 탕진한 것과 같이, 그 탕자에게 많은 입맞춤을 해주고 옷을 갈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소를 잡아 잔치하는 아버지를 볼 때 쓸데없이 재산을 허비하는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만, 그 아버지의 사랑은 이해타산적인 생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탕자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무한히 주는 사랑이 필요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아내 고멜이 도망가면 데려오고 또 도망가면 또 데려오고 그렇게 도망가면 많은 돈을 물어주면서까지 데려왔다고 하는 것은 무한히 주고 또 주는 한없는 사랑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고 하는 말씀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죄가 많다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서 하나님 앞에 손들고 나오면 하나님은 다 반겨주시고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의 죄를 씻어주시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그 입술에 입맞춤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아버지께서 보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보시고'란 말에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를 알아보십니다. 또 참회하는 모습, 회개하는 마음도 알아보십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가 측정할 수 없는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 중심, 가슴 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또 '뛰어가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들은 어깨가 푹 쳐져서 걸어왔지만 아버지는 뛰어갔습니다. 이 빠른 아버지의 동작에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은혜주시고 축복하시기를 속히 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농촌에 한 아름다운 가정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집 주위에는 대추나무, 사과나무, 복숭아나무, 앵두나무가 둘러 있고 건너편은 멀리 기차길이 있어 하루에 몇 차례씩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집의 외아들이 나쁜 친구의 꼬임을 받아서 많은 돈을 훔쳐가지고 멀리 도망을 갔습니다. 그 부모는 돈을 잃어버린 것보다 자기의 귀한 아들이 없어진 것을 더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돈은 다 없어졌어도 내 아들이나 무사히 돌아왔으면…" 하고 날마다 날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반가운 아들의 눈물로 얼룩진 편지를 읽어보니 '아버지 어머니 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내가 많은 재산을 훔쳐가지고 와서 다 탕진해 버리고 이젠 거지꼴이 됐습니다…이 못된 자식을 용서해 주실런지요?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자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부탁드리는 것은 내가 죽기 직전에 기차를 타고 우리집 앞 동네로 지나갈텐데 만일 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면 집 앞에 흰 수건을 하나 걸어 주십시오. 만일 흰 수건이 걸려있는 것을 보면 나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으로 알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아들의 편지를 보고 너무너무 반가워서 아들이 지나간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그 날이 되자 아침부터 큰 흰 홑이불을 가져다 대추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혹시나 그것도 안보일까봐 흰 보자기와 천은 있는대로 다 내다 앵두나무에도 걸어놓고 사과나무에다가도 걸어 놓았습니다. 아들이 기차를 타고 지나갔습니다. '흰수건이 걸렸을까? 안걸렸을까?…'하고 마음을 졸이고 가는데 이윽고 동네 앞으로 지나가다 자기 집앞을 바라보니 나무마다 온통 하얗게 걸려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반가이 맞아주시고 그 아들은 깊이 회개하고 이후로는 순종하며 효도하는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 주는 본문 말씀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하는 아버지의 많은 입맞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한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앞에서도 누누히 말했듯이 아버지의 사랑은 편협한 사랑이 아니요, 없는 사랑을 있는 체하는 위선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주고 또 주는 한없는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가끔 어쩌다 사랑해 주는 간헐적인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쏟아 부어주시는 넘치는 사랑이요, 한없는 사랑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진심으로 사랑해 주시고 헤아릴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2. 완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 탕자는 아버지께 고백할 죄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누누히 고백하기 전에 이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이 입맞춤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았다고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이미 씻어 주셨으나 더 겸손히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솔직히 자복하고 회개하는 그 입술에 용서하는 입맞춤을 해 주실 것입니다.
사 44: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 43:25절에도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분명 이 아버지는 회개하는 탕자에게 이렇게 말씀했을 것입니다. '내 아들아, 나는 네 과거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3. 완전한 회복을 의미합니다.
아들은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 주소서' 하고 말할 결심을 먼 나라에서부터 하고 풀 죽은 모습으로 아버지께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의 목을 안고 입맞추어 줌으로써 사랑하는 아들로 그를 맞아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입맞춤은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증거였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사단의 자식이었던 악한 죄인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면 나의 귀한 아들이라고 입맞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4. 아버지의 한없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탕자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춰주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의 한없는 기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돌아온 것을 보고 기쁨이 넘쳐 억제할 수 없음을 입맞춤을 통해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는 춤을 추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하는 동안에도 아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쳐다보고 또 쳐다보고 자꾸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죄인이 돌아왔을 때 이렇게 기뻐하십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죄인 하나가 돌아왔을 때 하나님은 천군 천사와 더불어 기뻐하신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한 사람의 영혼이라고 구원받도록 하나님께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5. 넘치는 위로를 의미합니다.
그 아들은 오랫동안 먹지도 못하여 배고프고 먼길을 걸어오느라고 지치고 기진맥진했을 것입니다. 또 죄책감으로 풀이 죽어 돌아왔을 것이지만 아버지가 목을 안고 반갑게 입맞춰 줌으로써 이 아들은 크나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탕자는 과거를 걱정하고 추한 현재의 모습도 걱정했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 내 운명이 어떻게 될까 미래를 걱정했을 것이지만 아버지는 모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염려를 깊은 입맞춤으로 제거시켜 주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겔 11:19,20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겔 36:26절에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상하고 찢긴 마음을 가지고 회개하며 돌아올 때 그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6. 가까운 교제를 의미합니다.
입맞춤은 가장 가까운 친밀한 교제를 나타냅니다. 특별히 가족들과 교제하기 전에 아버지의 입맞춤이 있었기 때문에 이 탕자에게는 잔치도 좋았고 노래소리도 즐겁게 들렸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기 전에 아버지의 입맞춤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이웃과 친족이 초대되었을 때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더욱이 형님과 만나기 전에 아버지의 입맞춤이 없었다면 아마도 형의 불평하는 말을 듣고 심히 낙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의 사랑을 먼저 체험했기 때문에 형이 무어라 불평을 해도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아버지의 많은 입맞춤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표현입니다. 완전한 아들로서의 회복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표현입니다. 넘치는 위로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의 가까운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큰 하나님의 은혜의 입맞춤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아 멘 -

멸망으로 이끄는 무관심

[누가복음 16장 19절~31절]
19절 -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절 -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절 -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절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절 -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절 -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절 -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절 -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절 -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절 -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절 -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절 -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절 -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 본문에 나오는 한 부자는 사람을 죽였다든가 도둑질을 했다든가 하는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은 없는데 죽은 후에 그 영혼이 불꽃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한편 그 부자의 집 대문간에서 빌어 먹으며 헌데를 앓던 거지 나사로는 죽은 후 아브라함의 품(천국을 묘사)에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얼핏 보면 부자는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 가고, 거지 나사로는 가난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처럼 보입니다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부자는 좋은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잘 살면서도 꼭 관심을 가져야 할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못한 무관심의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죄에는 실제적으로 악한 일을 범하는 적극적인 죄가 있는 동시에 마땅히 해야할 선한 일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달란트를 받아서 땅에 묻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예수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과 저주를 받은 사람의 죄처럼 말입니다. 부자가 안개와 같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꼭 관심을 가졌어야 할 것에 대해 어떠했습니까?

1.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 했습니다.
자기는 좋은 집에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산해진미를 먹으며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면서도 자기 집 대문간에서 먹다 버린 쓰레기를 뒤져 먹으며 헌데를 앓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부자는 전혀 무관심 했습니다. 자기 집 대문간에서 날마다 얻어 먹는 이 거지를 자기가 돌봐줘야 했었는데도 무심하게 보아 넘겼고 그가 헌데를 앓아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으며 고통과 비참함을 당하는데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고 무관심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하나 잘 먹고 잘 살면 되었지 다른 이웃의 불행에 대해서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해 왔던 부자 청년은 돈만 알고 이웃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 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을 해 주셨건만 이 청년은 돈에만 관심이 있었지 가난한 자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들도 나 하나 편안하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내가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안될 이웃이나 그들의 일에 대해서 무관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꼭 돌봐줘야 할 고통받는 자, 병든 자에 대해서, 심지어는 부모 형제에 대해서까지 무관심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그 부자는 죽어서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을 당하고, 거지 나사로는 천사들에 받들려 천국에 가 복락을 누리게 되어 서로 입장이 뒤바뀌었습니다. 그 부자는 너무나 뜨겁고 목이 타며 고통스러워 자기집 대문간에서 얻어 먹던 거지 나사로를 우러러 바라보면서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만 찍어다가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 혀로 남을 위로해 주고 도움을 주는 말은 하지 않고 남을 멸시하고 고통을 주는 말, 교만한 말만 했을 것입니다. 또 혀로 많은 여자를 농락하고 희롱하는 죄를 짓는데만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혀로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부자는 끝내 불꽃 속에서 그 혀가 타 들어 가는데도 물 한방울 얻어 축일 수가 없는 영원히 불행한 운명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면 어떨까? 이 부자는 자기집 쓰레기통만을 뒤져 먹고 사는 거지 나사로에 대해서 그도 같은 사람인데 한 번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는 그 입장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때 그를 이해할 수도 있고 사랑을 베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실수를 하거나 범죄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미워하거나 정죄하기에 앞서서 그 사람의 환경이나 입장이 오죽했으면 그런 죄를 지었을까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듯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것이 이웃에게 관심을 가지는 첫째 단계라고 봅니다. 이해도 사랑도 여기서부터 생긴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도 입장과 형편을 그 사람과 바꾸어 생각하라는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어느 기차 안에서 아빠가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고 아기를 안고 진땀을 빼며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는 계속 울어댔습니다. 그때 한 손님이 화를 버럭 내면서 '여보슈, 그 아기 엄마한테 좀 갖다 주구려 어디 시끄러워 살겠소?'하고 말했더니 그 아빠가 침통한 목소리로 말하기를 '여보시오 손님, 미안합니다. 나도 아기 엄마한테 갖다 주고 싶소만 어제 이 아기 엄마가 갑자기 죽어서 지금 시체를 뒷칸에 싣고 가는 중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기차 안은 엄숙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잠시 후에 화를 내었던 손님이 얼른 일어나 그 아기를 받아주면서 '내가 봐 줄테니 가서 좀 쉬십시오'하고 도와 주더랍니다.
남편은 하루종일 빨래하고 애보고 밥하느라 수고한 아내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아내는 남편이 하루종일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땀흘리고 수고하고 돌아온 것을 생각해 주고, 시어머니는 철없는 며느리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고, 며느리는 기껏 아들 키워 사랑을 몽땅 빼앗긴 것 같은 심정의 시어머니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고 사장은 사원들을, 사원들은 사장의 입장을 서로 바꾸어 생각해 준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고 아름다워지겠습니까? 우리 모두 이 부자와 같이 이웃에 대해 무관심한 자가 되지 맙시다.

2. 내세에 대해서 무관심 했습니다.
이 부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고 풀잎의 이슬같은 이 세상만 알았지 영원한 사후의 세계, 내세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습니다.
성경에 인간의 생명은 아침 안개와 같다고 했고, 풀잎의 이슬과 같다고 했고, 속히 지나가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길게 살아 100년을 산다고 해도 이는 내세 영생에 비하면 바다의 물 한방울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 한알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그림자와 같은 세상만 알고 육신의 사는 것만 알았지 내세 영생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습니다. 죽으면 그만이지 죽은 후에야 내가 알게 무엇이냐 하고 날마다 썩어질 육신의 쾌락만 추구하고 살았지 영혼이 영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온 몸에 헌데를 앓으며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핥아 주는 신세였지만 하나님을 믿고 내세를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세상의 삶이 괴롭고 육신이 고통스러우니까 내세와 영생을 더 바라보고 소망을 삼고 살았겠지요.
그러다가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습니다. 죽음은 빈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법입니다. 이 부자는 장사 지낼 때 많은 조객들도 오고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명주 수의를 입혀 두터운 관에 넣어서 무덤을 작은 산만하게 만들 정도로 굉장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사후의 문제, 내세를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구덩이에 떨어져 슬피 울며 고통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말려 시체가 치워 버려지는 신세가 되고 누구하나 슬퍼하는 사람도 없이 장사 지냈겠지만, 이 나사로는 결국 천사들에게 받들려 천국에 갔습니다. 그리고 영생 복락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록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생애를 보냈으나 하나님을 믿고 내세를 위해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내세에 대해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습니까?

첫째, 영생의 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짐승이나 식물에게 없는 영생을 사모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전 3:11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능이 있으면 그 본능을 만족시킬 대상이 있는 법입니다.
사과가 먹고 싶다는 것은 사과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남녀가 이성을 그리워하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연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겨울에 앙상하게 죽은 것 같던 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콩이나 옥수수 씨앗을 심으면 다 썩어 죽는 것 같은데도 다시 살아 수 십배 열매를 맺는데, 만물의 영장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한 번 죽음으로 끝이겠습니까? 분명히 내세와 영생이 있습니다.

셋째, 경험자들이 있습니다.
며칠간 혹은 몇 시간 분명히 천국과 지옥을 보고 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다가 입신 상태에서 천국과 지옥을 본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넷째, 성경이 말씀해 줍니다.
수천 년간 변함없는 진리로 증명되어 오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이를 분명히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바로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보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영생은 병행하는 것입니다(요 1:12, 요 5:24, 요 6:47, 요 14:1-3, 6). 롬 10:10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순간에라도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영생을 얻고 천국은 당신의 것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깨달아 항상 이웃과 하나님의 나라인 내세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손에 쟁기잡은 자의 마땅한 자세

[누가복음 9장 57절~62절]
57절 -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8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9절 -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절 -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절 -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자를 가리켜 '손에 쟁기 잡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밭을 일구기 위해 이제 막 밭에 들어선 농부 같은 존재라는 말씀 아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는지를 교훈받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손에 쟁기를 잡은 농부에게서 배워봅시다.

1. 쟁기를 힘있게 잡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밭가는 농부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는 쟁기를 아주 힘있게 잡습니다. 왜요? 밭을 깊게 일구어 자양분과 산소를 많이 공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사명의 쟁기를 힘차게 잡고 있습니까?
교회학교 교사면 교사로서, 성가대원이면 성가대원으로서, 구역장이면 구역장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굳게 잡고 있느냔 말입니다.
사실 성도들 가운데는 자기의 사명과 직무를 가볍게 여기고 소홀하게 대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자기의 사명과 직무를 내던지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주님은 이런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정녕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받고 싶으십니까? 지금 쥐고 있는 여러분의 사명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을 다해 사명을 수행해 나가십시오.

2.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손에 쟁기 잡은 농부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거나 뒤돌아 보는 법이 없습니다. 왜요? 밭을 똑바로 갈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혹 누가 말을 걸더라도 농부는 결코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며 대화하는 법이 없습니다. 대화를 하더라도 오로지 앞만 쳐다보며 이랑을 똑바로 갈면서 대답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다가도 세상 친구가 유혹하면 사명과 직책 맡은 것을 외면하고 세상 친구를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러한 유혹과 흔들림이 올 때 창세기 19:26절에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뒤돌아 보았다가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린 롯의 아내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그리스도를 푯대 삼고 뒤엣 것을 잊어버리고 앞만 향해 달려간다고 말한 사도 바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빌 3:13, 14).

3. 끝까지 일을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쟁기를 잡은 농부는 언제까지 일합니까? 일을 다 마칠 때까지 합니다.
우리가 즐겨부르는 찬송가 가사와 같이 '지는 해 비낀 볕에 힘써 일하고 그 빛이 다하여서 어둡게 되어도 할 수만 있는 대로 힘써' 일합니다.
오늘 못하면 내일 일찍 일어나 일하고 내일 못하면 모레 일찍 일어나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일을 다 마치기 전까지는 결코 쉬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농부의 근면성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이와 같이 근면하고 성실하게 끝까지 여러분에게 맡겨진 일을 합니까?
혹 직책을 맡은지 채 일년도 안되어서 여러분의 자리를 떠나지는 않습니까?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순교를 눈앞에 두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부럽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장래에 죽음을 앞두었을 때 후손들 앞에서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를 결코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뒤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은 끝내 많은 소산을 거두는 복된 자들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툭하면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고 벗어나려는 우리의 못된 습성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는 이러한 습성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주님의 명령에 겸허히 순종합시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감당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입시다. 결코 한눈 팔거나 뒤돌아보는 일 없이 끝까지 우리의 달려갈 길을 갑시다. 그리할 때 우리 앞에는 하늘의 영광과 상급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 아 멘 -

화목 제물 되어 이루신 완전한 용서와 구원

[누가복음 23장 33절~46절]
33절 -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절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절 -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절 -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절 -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절 -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절 -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절 -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절 -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절 -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4절 -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45절 -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절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그리스도라면 자신을 구원하라며 비웃습니다. 주님은 그분의 나라에 임하실 때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행악자의 요청을 들어주십니다.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주님은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하신 후에 숨을 거두십니다.

1.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33~38절)
죄는 또 다른 죄를 부르고,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사람들의 죄는 예수님을 흉악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빌라도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기에 예수님을 놓아주려 했지만, 대제사장들과 백성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은 그들이 죄인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자, 백성은 비웃고 군인들은 희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똑같이 맞받아치지 않으시고 오히려 하나님께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로 옷 입은 우리는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산 자입니다(벧전 2:23~24). 이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우리가 할 일은 용서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은 사람들의 시기, 비웃음, 희롱, 학대, 무시 등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 적용 질문
소외, 배신, 억울함, 멸시 등을 겪을 때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2. 찢어진 휘장 (39~46절)
화목에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해골 골짜기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온몸이 채찍에 찢기셨고 결국 십자가에 처참하게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는 죄를 지어 십자가에 달린 두 행악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두 사람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한 명은 비방하는 행악자를 꾸짖으며 예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져 성소와 지성소가 하나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심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막고 있던 휘장도 찢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이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화목을 누릴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심으로 이루신 일들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엡 2:14~18 참조)
* 적용 질문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주위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오늘의 기도
비천하고 악한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저를 힘들게 한 이들을 용서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과 저의 화목을 세상과 저의 화목으로 확장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무엇으로 믿음을 알 수 있는가

[누가복음 8장 22절~25절]
22절 -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절 -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절 -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절 -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많은 사람들이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발소에 간 사람은 새파란 면도칼을 든 이발사를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에 얼굴을 내밀고 면도를 하게 합니다. 심지어 잠을 자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분은 모르지만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또 버스나 택시를 탈 때 그 차의 성능도 모르고 운전사도 전혀 모르지만 타게 되는 것도 믿기 때문입니다. 비행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검사해 보고 이치에 맞아서 행동하거나 합리적이어서 행동하는 경우보다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무신론자도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그것이 곧 또 하나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믿음들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사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믿는 것들은 불완전하고 유한한 것으로 진정 믿을 만한 것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너무도 쉽게 믿음을 가지면서, 실로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믿음을 갖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 중에도 그 믿음이 흔들리고 바르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과 만날 수도 없고 교제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장 칭찬하고 기뻐하신 사람들은 돈 많은 부자도 아니요, 자식 많은 사람도 아니요, 권세가도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큰 사람을 보고 기뻐하셨고 칭찬하셨습니다. 또한 히 11: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흔히들 보는 것이 믿는 것(Seeing is believing)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 듣고 만져 보아야만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는 것이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도 듣지도 만져 보지도 않고 믿는 것이 곧 참 믿음인 것입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입니다.
공기나 전파나 소리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지만 분명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라디오나 텔레비젼이 스위치를 올리고 채널을 맞춰야 들을 수 있고 볼 수가 있듯이 하나님은 영이신 고로 볼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다이알을 맞추고 믿음의 스위치를 올리게 될 때 하나님의 신령한 세계를 알 수가 있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도 할 수가 있는 것이요, 따라서 그 믿음을 통하여 매일매일 순간순간 그분과 교제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저 자신의 믿음도 심히 부족하고 체험도 부족하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은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매일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하는 사실을 간증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있는 자가 되십시오. 농담이라도 '나는 믿음이 없다'라는 불신앙의 말을 하지 말고 날로 날로 믿음이 크고 굳세어져서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 맡겨집니다. 믿음이 적으면 적은 일밖에 할 수 없고 믿음이 크면 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또 믿음이 큰지 작은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에 대하여 잠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말씀 드릴 수가 있습니다.

1. 환난과 시험의 풍파가 닥칠 때 그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의 제비는 폭풍이 불 때만 떠다닌다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있는냐 없느냐 또 믿음이 크냐 작으냐는 환난과 고통이 닥쳐 올 때에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볼 것 같으면 제자들이 평안할 때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았으나 광풍이 일어나 거센 물결이 배를 치고 배에 물이 가득 차니까 제자들은 배가 침몰해 죽을까 하여 두려워 떨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황급히 깨우면서 하는 말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급했던지 두번씩이나 주여 주여 하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 풍랑중에서도 태연히 주무시다 일어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뒤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꾸짖었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타신 배가 뒤집히겠습니까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고 태연하고 안심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은 두려워 떨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는 큰 시험이 닥쳐 보아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태평 무사할 때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큰지 작은지도 풍파가 일어나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환난, 고통, 시험이 닥쳐와야 비로소 그 믿음이 나타나게 될 뿐만 아니라 없던 믿음이 솟아나게 되기도 하고 약한 믿음이 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는 가끔 풍랑이 있는 법이고 풍랑이 있어야 기도도 열심으로 하게 되고 믿음도 점점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다 성숙하고 올바른 신자가 되려면 어린 아이들이 홍역을 치르듯이 한 고비의 시험을 겪게 됩니다. 믿음이 좀 자라는 것 같을 때에 병이 나거나 사업에 실패를 하거나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크게 낙심하여 당장 일어나는 일만 보고서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그럴까 또는 예수 믿어 보아야 별수 없다고 떨어져 나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고 간절히 찾습니다. 키에다 곡식을 넣고 까불어 보면 쭉정이는 까불수록 멀리 나가 떨어지지만 알곡은 안으로 바싹바싹 다가 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풍파가 오고 시험이 오면 더욱 잘 믿고 더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께 가까이 하라는 사랑의 신호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The end of self is the beginning of the God)'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Man's extremty is God's opportunity)'라는 말도 있습니다. 고로 믿음이 큰 사람은 풍파를 역이용하여 믿음이 자라는 기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약 1:2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고, 또 요 16:33절에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환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이 오지만 이기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약 1:12절에 보면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했을 때 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라고 했던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믿어야 합니다. 믿음 위에 굳게 선 자는 시험을 이기게 되고 그것을 통해 믿음을 하나님께 인정받아 시험이 축복으로 바뀌며 더 크고 영원한 영광에 참여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시 119:71절에서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다'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레이놀드 그린(Reynold W.Green) 목사는 말하기를 '인생에 가장 좋은 일들은 흔히 고난이나 슬픔의 보따리에 싸여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축복을 우리 인생에게 줄 때는 때때로 슬픔이나 고난의 보따리에 싸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환난과 시험이 닥칠 때마다 보다 굳건한 믿음을 하나님 앞에 내보임으로써 예비된 축복을 얻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믿음은 그 행위로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약 2:15절에서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였습니다. 이는 결국 참된 믿음이란 그 행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만약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 믿음이 됩니다. 진정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대로 행하는 실천적인 믿음의 열매가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회사 사장은 자동차로 회사까지 15분 정도 걸리는 길을 가면서 항상 옆의 빈 자리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으로 믿고 친구와 의논하듯이 주님께 회사의 모든 문제를 아뢰이고 의지하면서 출근하곤 했는데, 놀랍게도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되고 회사가 크게 발전되어 갔다고 하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Henry Ford)는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사람이지만 마차를 보고 생각하기를 말없이 가는 차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자동차 왕이 되었습니다. 그 부부가 죽은 후 디트로이트에 기념관을 세웠는데 그 안의 포드 사진 아래에는 꿈꾸는 자(The Dreamer)라고 쓰여 있고 부인의 사진에는 믿음의 사람(The Believer)이라고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큰 꿈을 가지고 굳게 믿고 의지하고 실천하는 자에게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다 이루어 진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노만 빈센트 피일(N.V. Peale) 목사의 말 중에서 제가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무엇이나 성취하고 승리하는 비결에 대하여 세 가지가 있다고 했는데, '첫째는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라 둘째는 기도하라 셋째는 현실화 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에 우선 마음 속에 그 실상을 그려 놓고 불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확신이 오면 그대로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빌 4:13절에 보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을 분명하게 믿는 자들은 그 행위와 삶 속에서 믿음대로의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끈기있고 변함없는 신앙 생활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참 믿음이나 큰 믿음이란 것은 물러설 줄 모르고 끝까지 믿고 맡기고 나가는 모습 속에서 증거됩니다. 시험삼아 좀 믿어 보다가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부정하고 마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그것은 도리어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죄인 것입니다. 병 낫는 것도 끝까지 믿고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속으로는 믿지도 않고 아무리 기도를 받아 보아야 그 병이 낫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은 분명히 내 병을 고쳐주신다. 주님은 내 죄뿐 아니라 내 질병도 담당하셨다는 확신을 가져야 나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설사 병이 낫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후에 있을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믿음을 변치 않는 것이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약 1:6절에는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했고 막 11:24절에도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느부갓네살 왕의 명령을 어기고 풀무불에 던지워졌을 때 타죽지 않게 된 것도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죽으면 죽었지 우리는 왕의 명령을 들을 수 없다고 하며 변함없는 믿음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믿을 때 믿음의 기적이 나타납니다. 히 11: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다"고 했습니다. 믿어 보다가 도중에 그만 두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이냐 아니야, 큰 믿음이냐 적은 믿음이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끈기있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하느냐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디 환난과 시험속에서, 그리고 그 행위를 통해, 또한 끈기있고 변함없는 신앙 생활로 여러분들의 보다 분명하고 큰 믿음을 확증해 보임으로써 주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낙심하지 말라

[누가복음 18장 1절~8절]
1절 -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절 -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절 -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절 -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절 -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절 -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절 -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절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갈라디아서 6장 9절]
9절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마 여러분들은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기대와 결심과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지난 삶들을 돌아볼 때 이러한 것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지고 더욱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고통들은 그 기대와 결심과 희망들을 꺽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너무도 자주 낙심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올 한해에는 부디 그러한 낙심이 여러분들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에 오늘은 낙심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서로 은혜의 말씀을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느 회사에서 사원을 모집하는데 응모자들을 아침 아홉시에 모이라고 해 놓고 12시, 1시, 2시, 3시가 되도록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하고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평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그냥 가버리는 사람 등 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오후 네시가 되니까, 거의 모두가 불평하다 가버리고 몇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제서야 사람이 나오더니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인내심을 인정하여 모두 채용하겠다고 하더랍니다.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한 사람만이 채용된 것입니다.
쉽게 낙심하기 잘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성공하기 어렵지만 특히 신앙 생활에서의 낙심은 영원한 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을 심각한 것으로서 절대 금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도, 축복을 받는 것도, 모두 끝까지 참고 낙심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 성도들은 어떤 일에서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까?

1. 예수 믿다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법 신앙 생활을 잘 하다가도, 무엇이 시험이 되어 걸려 넘어졌는지 교회에 발을 끊고 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안믿었던 것만도 못하고 이렇게 중도에 예수님을 믿다가 그만 둔 사람처럼 불쌍하고 한심스러운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씨뿌리는 비유 가운데, 네 가지 사람의 마음의 밭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일 고약한 마음은 길바닥 같은 마음으로,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해서 말씀이 전파되어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와 앉아는 있어도, 다른 사람은 다 은혜를 받는데도, 이런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없어서 말씀을 비판하고 조롱하고 배척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새가 그 씨앗을 빼앗아 가듯이, 마귀가 말씀을 모두 빼앗아 갑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성 있는 마음은 돌밭 같은 마음인데 기쁨으로 감정적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제법 잘 믿다가 그 말씀이 마음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믿음이 이내 시들어 버리고 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가시밭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제법 믿음이 잘 자라다가 세상의 재리와 탐욕, 세속적인 욕심이 너무 강해서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실로 가장 좋은 마음 밭은 옥토와 같은 마음입니다. 흙이 부드러워서 씨앗이 떨어질 때 잘 받아들이고 싹도 잘나고 뿌리도 잘 내리고 자라기도 잘 자라서 결국 많은 열매를 맺는 알곡 신자가 됩니다.
부디 여러분, 중도에 낙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알곡된 신자가 되어 천국 창고에 들어가는 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엡 6:24)라고 축복했습니다. 또 고전 15:58절에서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는 사람들 중에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보고 그만 두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가 어떻고, 아무게 장로가 어떻고, 에이! 교회에 실망했어'하면서 낙심합니다. 어떤 이는 집사나 권사가 잘못하는 것을 보고 '밖에서 보기엔 집사, 권사가 되면 천사같은 줄 알았는데..., 심지어 술, 담배하는 사람이 있지 않나, 예수 믿어야 별 볼일 없구나'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교회는 천사같은 의인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에는 환자들이 가는 것 같이, 교회에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어떤 분은 '저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못나가요'하시는데, 죄가 있으니까 교회에 나와야지 죄가 없으면 예수님 믿을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고도 그만큼 잘못이 있다면 그가 예수님까지 믿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더 악하고 더 나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대개 사람들은 아홉 가지 잘하는 것보다 한 가지 잘못하는 것을 꼬집어 흠을 잡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절대로 사람을 바라보고 비평하다가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악한 사람이 번창하고 잘 사는 것을 보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되는 일이 없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하게 사는 사람은 하는 일이 잘되어 잘 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겠느냐 예수님 믿어봤자 헛것이다'라고 낙심하며 예수님 믿는 것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도 시편 73:2, 3절에서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잘사는 것을 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되면, 선악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때가 옵니다. 역사를 보아도 무솔린이나 히틀러 같은 악한 사람이 세계를 다 지배할 것 같았지만 결국 공의의 심판을 받고 멸망했습니다. 일본이 2차 세계 대전을 발발시켜 놓고는, 그것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며 많은 사람들을 죽였지만, 때가 되니까 원자탄을 제일 먼저 맞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시 37:1~7절에 보면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잠잠하여 참고 기다리면, 의인을 정오의 빛같이 빛나게 해 주실 때가 옵니다. 세상에서 결판이 안나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히 10:35~39절에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믿다가 낙심하는 것은 이유 모를 고난과 역경에 처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선한 결과가 있기 보다 오히려 자꾸만 어렵고 힘든 상황이 몰려올 때 사람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버릴 때가 많습니다. 너무나 견디기 힘든 세상의 고난과 역경 앞에서 쓰러지고 낙심하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에게 있어 고난은 결국 더 큰 축복의 기회임을 알아 우리는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악한 세상 속에서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것일 뿐 결국 끝내 낙심치 않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는 영원한 기쁨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난 뒤에 올 축복과 영광은 그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크고 영원한 것입니다. 고로 우리 모두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욥은 까닭 모를 고난을 계속 당했으나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불신앙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루아침에 귀여운 십남매의 자식들이 죽고 그 많던 재산이 도적 맞고 불타서 없어지고 온 몸에 악창이 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피고름과 흙이 뒤범벅이 되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은 맨 몸으로 왔다가 맨 몸으로 가는 것, 하나님이 주셨다가 하나님이 가져 가시는데 찬양할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욥기 전체를 보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지 알 수 없다고 원망 비슷한 말을 하면서도 욥은 결코 회의주의에 빠지거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신앙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실패를 당해도 낙심하지 맙시다. 그러면 욥과 같이 더 큰 축복을 받는 날이 옵니다.


2.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권면하셨습니다. 어떤 분이 '천국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다'는 말을 했습니다. 즉, 기도를 응답 받을 때까지 끝까지 참고 기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보내주셨지만 받는 이가 없이 되돌아 왔다는 뜻이겠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해서도 아니고 응답하실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위해서 우리의 인내력을 시험하기 위해서, 아직 응답의 때가 되지 않아서 응답을 더디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해야 큰 응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신, 구약 성경을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 중 많은 부분이 많은 기도, 오랜 기도, 끈질긴 기도 후에 나타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응답이 더디다고 하나님께로부터 거절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에 나타난 과부는 그 불의한 재판관에게 무수히 거절을 당했으나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강청하고 매달림으로써 결국 응답 받고 말았는데, 하물며 우리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택하신 자들의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왜 안들어 주시겠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어떤 기도는 즉시 응답해 주시고, 어떤 기도는 오랜 기간 후에 더디 응답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한 대로 안되어도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응답해 주실 때도 있습니다. 고로 우리는 결코 기도하다 낙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방탕한 아들을 위해서 10년이 넘도록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니까 낙심이 되어 암브로스 감독에게 가서 상의했더니 그 감독은 '눈물의 기도를 드리는 어머니의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다'고 하면서 기도를 계속하라고 했답니다. 그후 마침내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로 인하여 신앙의 거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어떠했습니까 자식을 달라고 미친듯이 부르짖었던 한나의 기도는 사람이 보기에는 비정상적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그 끈질긴 기도로 끝내 응답을 받아내고야 말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우리 성도들은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9절에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지쳐 넘어지거나 낙심하지 않으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는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남달리 봉사도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는데 목사나 교인들이 알아 주지도 않고 칭찬도 안해 줄 때 '아무 소용없구나'하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또한 시기하고, 중상 모략하고, 헐뜯는 무리가 생기게 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세상에서는 착하고 진실한 사람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만 '에이! 모르겠다, 나도 적당히 살자'하면서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 성경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고 했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 산전을 부쳐먹고 사는 가난한 화전민 과부가 아들 둘을 데리고 사는데,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그 날부터 설교 말씀을 100% 믿고 순종했습니다.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살았지만 주일을 잘 지킬 뿐만 아니라 매일 새벽 기도까지 나오고, 믿는 그 달부터 어김없이 십일조를 드리고, 모든 농산물이나 가축의 첫 열매까지 교역자에게 가져왔습니다. 참으로 기특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성도를 위해 축복 기도도 간절히 했습니다. 그런데 일년쯤 되었는데 초가을 장미가 지면서 그 집이다 떠내려가고, 다 되어가던 논농사가 다 물에 잠기고 벼들이 떠내려갔습니다. 참으로 교역자로서 더욱이 초년병 전도사로서 저에게도 큰 시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남의 집 건너방에 있는 그 분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났더니 그분은 오히려 '생명이 산 것만도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뭐'하면서 결코 낙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 분에게 한 부자가 평지에 집터를 주고, 동네 사람들이 나와 부역을 해 주고, 산 주인이 나무를 내어 주어서 집을 크게 잘 짓고, 면에서는 수해 복구비가 나와서 돈은 돈대로 타고, 교회에서도 수해민 구호 물자를 얻어 주었고, 이곳 저곳에서 축복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 농사도 잘 되어서 몇년 후에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좋은 일, 착한 일, 복 받을 일을 하다가 금방 열매가 안나타난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공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선하고 복된 열매를 거두는 때가 반드시 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기도하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좋은 결과가 금방 나타나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핍박을 당해도 낙심하지 맙시다. 악한 사단은 우리을 낙심케하여 믿음을 약화시키고 기도를 쉬게 하고 선을 행하지 못하게 하려 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에 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끝내 낙심치 않을 때 우리는 결국 아름답고 복된 믿음과 기도와 선행의 열매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 아 멘 -

시므온과 안나처럼 주님을 기다립니다

[누가복음 2장 22절~39절]
22절 -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절 -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절 -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절 -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절 -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절 -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절 -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절 -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절 -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절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절 -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절 -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절 -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절 -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절 -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절 -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절 -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절 -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정결 예식 날에 부모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주의 구원을 보았다며 찬송합니다. 선지자 안나도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수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 가족은 나사렛에 이릅니다.

1. 말씀을 따른 요셉과 마리아 (22~24절)
요셉과 마리아는 모세의 법에 따라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이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도 중요한 일이었으며, 여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메시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할 때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대로 비밀한 일을 행하십니다.
* 묵상 질문
율법(말씀)대로 정결 의식을 행한 것은 예수님께나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 적용 질문
요즈음 순종하고 있는 말씀은 무엇이며, 순종의 결과는 어떠한가요?

2. 성령에 감동된 시므온 (25~35절)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종할 때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간 시므온은 정결 의식을 행하러 온 아기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아보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 묵상 질문
시므온이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이었음이 강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지금 성령께서 마음 가운데 세밀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요?

3. 성전을 떠나지 않은 안나 (36~39절)
성전에서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사람들, 곧 성전에서 예배하던 사람들은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오랜 시간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며 기도하던 안나 선지자도 아기 예수를 만나고 오랫동안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려 온 사람들에게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했습니다. 안나가 메시아를 만난 것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배 공동체 안에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 묵상 질문
안나는 어떤 삶을 살다가 메시아를 만났나요?
* 적용 질문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을 전할 이웃은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저를 체휼하시기에 연약하고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깊은 감사의 눈물이 솟아오릅니다. 저 역시 성령 충만한 사람, 순종하는 사람,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 구주 예수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장 1절~12절]
1절 -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절 -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절 -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절 -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절 -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절 -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절 -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절 -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절 -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절 -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절 -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절 -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니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고 예수님 시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예수님이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여인들이 돌아가 이를 알리자, 사도들은 믿지 않지만 베드로는 무덤에 달려가 살펴봅니다.

●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한 날을 향해 흘러갑니다. 이는 안식 후 첫날, 곧 부활의 날입니다. 무도한 자들이 무고한 예수님을 죽였지만, 이로써 다 끝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에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습니다(9:22).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찾은 여인들도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당황합니다. 그때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여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전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부활은 믿을 수 있는, 믿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 묵상 질문
천사들이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내가 특히 기억하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요?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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