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인 기도와 성령 충만

[누가복음 11장 5절~13절]
5절 -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절 -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절 -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절 -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절 -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절 -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절 -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절 -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절 -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사도행전 1장 14절]
14절 -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께서 눅 24:48, 49절에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응답받기까지 오랫동안 머물며 지속적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낙심치 않고 계속되는 기도, 해산하는 것같이 힘쓰는 기도가 성령 충만함을 받는 중요한 비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도하면 얼른 응답받게 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주시는 것일까요?
눅 11:13절에 예수님은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면서 그 전에 강청하는 벗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밤중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음식이 없어서 부자 친구에게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문을 두드리며 부탁했으나 들은 척도 안하더니 얼마 후에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일어나 줄 수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그 벗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강청했더니 요구대로 떡을 줬다고 하시면서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인간은 악한 존재인데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는데는 끈질긴 기도, 지속적인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행 1:4, 5절에 예수께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말씀하시면서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는데, 제자들과 여자들이 그 분부의 말씀대로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행 1:14) 10일 만에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행 4:24절에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얼마동안 간절히 기도했더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고 했습니다.
또 행 9:5-11, 17절에 보면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거꾸러져서 3일간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금식 기도한 후에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서 성령의 능력을 전수받을 때에도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매어달리다가 받았습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 충만함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쉽게 낙심하거나 좌절하는 사람은 이 귀한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성령 충만함을 받으려면 왜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가 그 이유를 살핌으로써 신앙생활의 좋은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1. 지속적인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며 간곡히 기도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고 성공적인 기도의 비결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잠깐씩 밖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귀중한 성령 충만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능력을 어쩌다 받는다 해도 쉽게 쏟아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기도에 대한 다섯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첫째,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눅 18:1)
둘째, "쉬지 말고(끊임 없이) 기도하라"(살전 5:17)
셋째, "기도에 항상 힘쓰라"(롬 12:2)
넷째,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다섯째,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라" (엡 6:8)

또한 대하 7:14절에 부흥에 관한 복된 약속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기도하고 내 얼굴을 구하면'이라는 말씀은 지속적인 간절한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부흥을 가져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비오기를 위해 기도할 때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고' 7번이나 기도한 다음에야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른 것을 보았습니다(왕상 18:42, 45).

느헤미야도 '밤낮' 기도했고(느 1:6), 사무엘도 '밤새도록' 기도했으며 (삼상 15:11), 다니엘도 베옷을 입고 '탄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단 9:3). 에스더와 모르드개도 금식하며 강력한 기도를 드려 그 민족을 구원했습니다.
늘 지속적으로 힘써 기도해서 성령 충만 받는 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또한 지속적인 기도로써만이 참된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2. 지속적인 기도는 자기 희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의 징계로 임한 재앙이 그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 제사드리려고 할 때 오르난이 번제를 위하여 소를 드리고, 땔나무로는 소의 멍에와 제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고 번제 드리는 타작 마당과 소까지 상당한 값을 주고 사서 제사를 드렸습니다(삼하 24:24). 하나님께 공짜로 싸구려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즐겁게 하면서 하나님도 기쁘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귀중한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기다림과 눈물과 땀과 인내가 없이 능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33년간이나 천국을 그리워하며 종의 형체를 입고 가난과 멸시를 당하며 희생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셨고 마지막엔 피를 다 쏟아 생명을 바쳐서 우리 영혼을 구원했습니다.
희생하고 대가를 지불함이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없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데에도 그에 합당한 지속적인 기도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3. 지속적인 기도는 참된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할 때 여러번 거절을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여인이 '자녀에게 줄 떡을 개에게 줄 수 있겠느냐'고 하는 말씀을 듣고서도 물러서지 않고 '개들도 아이들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고 강청할 때, 예수님은 그 딸을 고쳐주면서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물러서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계속 간구하는 모습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에 불의한 재판관에게 낙심하지 않고 계속 매어달려 마침내 응답받은 과부의 이야기를 말씀하시고, 눅 18:8절에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야곱은 "당신이 나에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하고 환도뼈가 위골되면서까지 불퇴진의 기도를 드려 마침내 그 믿음으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도들과 120 문도들도 열흘 동안이나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믿음이란 막연한 기다림이나 감정이 아니라 어떤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신뢰의 행위인데, 약속을 붙들고 지속적으로 기다리며 기도하는 것은 가장 좋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기 원하셔서 주님은 우리에게 지속적인 기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4. 지속적인 기도는 능력을 받는 준비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귀중한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한 사람들은 다 많은 시간을 들여 지속적인 기도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거꾸러진 뒤, 3일을 밤낮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성령 충만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행 9:19).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성령 충만을 받고 떠났습니다(행 13:2, 3). 그 결과로 박수 엘루마가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것을 꾸짖어 소경이 되게 하는 기사가 일어났고 이것을 본 총독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갑절의 영감을 받고 계승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쉽게 금방 받지는 못했습니다. 왕하 2:1-15절에 보면 엘리야가 엘리사를 남겨두고 벧엘로 가려고 할 때, 엘리사는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라고 따라갔습니다. 벧엘에 두고 여리고로 가면서 남겨두고 떠나려 할 때 또 따라갔습니다. 여리고에 남겨두고 요단으로 가려고 할 때에도 맹세하면서 또 따라갔습니다.
엘리야가 겉옷을 말아 요단강을 칠 때 갈라져서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넜습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때 엘리사는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는 것을 보면 이루어지리라"(왕하 2:10)고 했습니다.
드디어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던 엘리사가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고 소리를 질렀는데 엘리야가 보이지 아니하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은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옷을 입었는데, 그에게 구한대로 성령의 능력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았던 그 누구도 기도하지 않고 거저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시간을 들여가며 지속적으로 간구하다가 큰 능력을 받았습니다.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투자하여 지속적으로 기도에 힘써서 성령 충만을 받으시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른 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의 올바른 자세

[누가복음 2장 40절~42절]
40절 -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41절 -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절 -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본문은 사복음서 중 유일하게 예수님의 성장 과정을 소개하는 부분입니다. 본문을 보면 어린 시절 예수님은 매우 건강하고 영육간에 균형있게 성장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건강하고 균형있는 성장 뒤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하심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한편으로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이러한 성장 뒤에는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영향이 전혀 없었을까요? 본문을 비롯하여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의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부모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이 점점 증대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올바른 자녀교육을 위해 부모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인지 배워봅시다.

1. 신앙에 입각해 자녀를 양육해야 합니다.
본문 41, 42절의 말씀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을 매우 철저히 준행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누가복음 2:22절 말씀을 보아도 그들은 모세의 법을 철저히 준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자연히 건강하고 균형있게 성장했다고 단순히 판단하지 맙시다. 그렇게 따진다면 우리의 자녀들도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가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다 건강하고 균형있게 자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일지라도 모친 마리아의 젖을 먹고 건강하게 자라시고, 그 부모의 신앙 교육을 통해 신앙과 지혜가 자라나셨듯이 우리의 자녀 역시 저절로 영육간에 건강하고 균형있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곧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철저히 신앙에 입각해서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딤후 3:14, 15). 그리할 때 자녀들은 진리 안에 거하게 되며 참된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먼저 마리아의 경우를 보면 그는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수태를 알렸을 때 만일 정혼한 몸으로 임신을 하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이 있음에도 (신 22:23, 24) 눅 1:38절에서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마 1:24, 25절에 보면 요셉도 꿈 속에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에 의한 잉태임을 알려 주었을 때 두말 없이 마리아를 데려와 동침치 아니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요셉과 마리아는 평범한 일상에서 뿐만 아니라 참으로 순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녀에게 신실한 신앙을 진정으로 가르치고 싶다면 이처럼 여러분 자신부터 신실한 신앙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딤후 1:5절에 보면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는 믿음이 그 자녀인 디모데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크리스찬 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에 실패하는 대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바로 입술로는 신앙을 따라 산다고 고백하면서도 실제의 생활 속에서는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입각한 바른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부모들이 먼저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모범적인 신앙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3. 훌륭한 인격을 지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녀의 바른 교육을 위해 크리스찬 부모가 지녀야 할 것은 신실한 믿음과 병행하는 훌륭한 인격입니다.
간혹 성도들 중에는 신앙과 생활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즉 믿음만 좋으면 됐지 일상의 생활이야 아무려면 어떠냐 하는 식의 생각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그런대로 열심히 하면서도 생활은 아무렇게나 해서 덕이 안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이런 부모 아래서 성장하는 자녀가 영육간에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이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는 동거하기 전에 벌써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았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이것을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관계를 조용히 끊으려고 했습니다. 사랑의 쓰라린 배신감을 감정적으로 앙갚음하지 않고 오히려 자비와 긍휼로 감싸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마 1:19절에서 그를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남을 탓하기보다는 항상 남의 아픔과 고통과 사정을 돌아보는 훌륭한 인격을 갖추고 또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인격을 전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자녀는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건강하고 균형이있게 자라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아주 건강하고 영육간에 균형 있게 성장하셨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아름답고 부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 여러분, 이것은 부러워만 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자녀를 이렇게 키울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의 자녀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역시 그렇게 키워야만 합니다. 왜요? 우리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키우라고 주신 태의 열매요 상급이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신앙에 입각해서 키웁시다. 말로만이 아니라 행실로 먼저 자녀에게 신실한 믿음의 본을 보입시다. 아울러 훌륭하고 후덕한 인격을 갖추어 자녀로 하여금 건강하고 균형 있는 인격체로 자라게 합시다. 그리할 때 여러분들의 자녀들은 바르고 아름답게 자라갈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 믿음이 나타납니까?

[누가복음 8장 22절~25절]
22절 -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23절 -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24절 -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25절 -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두려워하고 놀랍게 여겨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 하더라

본문에 보면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참된 믿음은 생활을 통해 표현되고 증거되는 것이기에 이런 질문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제일 기뻐하시고 놀라시며 감탄하여 칭찬한 사람들이 바로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실로 생활을 통해 분명한 믿음을 드러내는 자들을 기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히 11: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크면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할 수 있고 믿음이 작으면 조금밖에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로 이처럼 귀한 믿음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나타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어떻게, 무엇을 통해 믿음이 나타나겠습니까?

1. 풍랑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믿음이 나타납니다.
바다 제비는 폭풍이 일어날 때만 날아다닌다고 합니다. 사람들도 평안하고 잘 살 때는 그 사람의 진짜 믿음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고난과 환난과 풍파를 만날 때에 그 사람의 믿음이 잘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제법 믿는 체 하다가도 삶의 풍랑을 만나 어려운 시험에 부딪치게 될 때에는 무서워서 벌벌 떨고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본문에도 보면, 예수께서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시는 중에 예수님은 피곤하신지라 배안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 때 큰 풍랑이 일어나자 배에 큰 물이 들어와 가득하게 되어 심히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죽을까봐 무서워 벌벌 떨면서 예수님을 깨우며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다급해서 불렀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어 일어나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자기들 배에 함께 계시는데 배가 침몰되어 죽을까봐 허둥대며 벌벌 떤 것은 믿음이 있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풍랑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참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이 늘 잔잔할 수 만은 없습니다. 때로는 환난과 시험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야말로 성도들이 믿음을 나타내야 하고 믿음을 활용해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폭풍을 만난 그 때가 바로 그 폭풍을 인해서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더 하나님을 굳세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께 더 기도해야 될 때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요나와 같이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나 것이 내 까닭이라'고 한 것처럼 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회개해야 될 때인 줄 압니다. 폭풍을 만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와 잘못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풍랑이 자신을 더 의롭게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환난과 시험과 실패는 믿음 안에서 받아들이면 모두 은혜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시 119:71절에 보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고 고난이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시 119:67절에 보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젠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과 시험과 실패는 더욱 믿음이 바로 서고, 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바로 살게 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레이놀드(Raynold) 목사는 말하기를 '인생의 가장 좋은 일들은 흔히 슬픔이나 고난의 보자기에 싸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로 성도들이 당하는 모든 슬픔과 고난과 실패는 그 속에 반드시 하나님의 더 높은 차원의 의로운 섭리와 더 큰 축복이 들어있다는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용감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요,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 10:13절에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 같지만 절대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맡기시는 법이 없고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을 하나님이 주시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풍랑을 만나 시험과 고통을 당하더라도 믿음으로 그것을 감내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히 4:2절에 보면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고 했습니다. 잘 믿는 성도들이라고 해서 풍랑을 안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믿어도 역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풍랑을 만나되 믿음으로 그 풍랑을 역이용해서 더 큰 은혜와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라 하나님이 사랑하고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환난과 고통과 실패의 풍랑을 만날 때에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겨자씨 같은 적은 믿음이라도 활용하시고 나타내셔서 그것을 이기고 더 큰 축복의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2. 보이지 않는 것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믿음이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그의 일상 생활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는 것을 도무지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히 11:1절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말씀에 기록된 것이면 보는 것과 똑같이 행동할 때 표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다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행동하고 나갈 때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끔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기나 전파나 사람의 정신같은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은 영이신고로 눈에는 안 보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에 안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본 것과 똑같이 믿음으로 행동하고 나갈 때에 그의 믿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으나 전후좌우 상하 우리 주위 어디나 계셔서 우리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속 중심까지도 불꽃같은 눈으로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이것을 알고 그것을 의식하며 행동하는 사람이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은 안 보이는 것을 보는 눈이요,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는 손이요, 영의 양식을 기쁘고 만족스럽게 먹는 일입니다.
미국의 어느 회사 사장이 있었는데 그의 집에서 회사까지는 자동차로 가는데 15분 걸린다고 합니다. 그는 언제나 차로 그 길을 15분 동안 몰고 가면서 자기 옆에 예수님이 앉아 계신 것을 믿고 회사의 모든 문제를 말씀드리며 부탁을 드리며 간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러 해 후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실제로 믿음을 나타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불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처럼 볼 뿐만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주 안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믿는 자에게는 가능하게 보이므로 믿고 행동하게 될 때에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어떤 문제가 할 수도 있고 할 수도 없다고 하게 될 때 '할 수가 있다'는 편에 서야 합니다. 그 다음 단계는 '꼭 된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 다음엔 '다 된 줄로 믿습니다' 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3. 축복에 대한 태도를 통해 믿음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을 가장 잘 알아보기 쉬운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어진 축복에 대한 태도입니다. 특히 그 사람에게 재물이 주어졌을 때에 그 재물을 어떻게 쓰며 그 재물에 대한 태도가 어떠하느냐 하는 것을 볼 때 그 사람의 신앙 인격과 믿음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약 2:14-17절에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바로 쓸 줄 모르면 그의 믿음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물질의 정성이 없는 사람은 믿음도 그만큼 적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물질이 많고 적건 간에 그의 형편에서 물질을 얼마나 정성껏 바치느냐에 따라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 창시자 죤 웨슬리는 '그 사람이 아무리 중생하고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의 돈주머니가 끌러지지 않으면 그의 회개는 믿을 수 없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웨슬리가 한 번은 설교를 하는데 한 부유한 농부가 참석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주 돈만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웨슬리가 설교하기를 '돈을 벌 수 있는대로 힘껏 버십시오'라고 했더니 이 농부가 신이 나서 옆 사람을 팔꿈치로 쿡쿡 찌르면서 정말 멋있는 설교라고 했습니다. 다음에 '돈을 저축할 수 있는대로 힘껏 저축하십시오'라고 했더니 더욱 신이 나서 양 손을 비비며 내 생전에 이런 좋은 설교는 처음 들어본다고 하면서 의기양양 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 단계에 와서 '바칠 수 있는대로 힘껏 바치십시오'라고 했더니 그 농부는 그만 실망해서 '아, 아깝다. 모두 망쳤다' 하더라는 것입니다.
고후 9:7절에 보면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이 있는 곳에 언제나 마음이 있습니다. 아마 목숨 다음으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물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에 마 6:19절에서는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하시면서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고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물질의 욕심을 버리고 바칠 줄 알아야 영안이 밝아져서 볼 것을 바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마 6:24절에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보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큰 보배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더욱 귀히 여기고 자신의 모든 것을 즐겨 바치는 자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고 능가해야 합니다.
딤전 6:9, 10절에서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성경은 '네가 이 세대의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재물에 대한 태도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 바르게 하여 올바른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재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축복들을 내 것으로만 여겨 이기적이고 탐욕적으로 소유하지 말고,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돌려드림으로써, 영원한 하늘 나라의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믿음은 무엇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모든 생활 속에서 온전한 믿음을 나타내시는 여러분들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칭찬이 주는 해악

[누가복음 6장 26절]
26절 -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본문 말씀은 해석이 어려운 성경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남에게 칭찬들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행 6:3절에도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집사를 택하라고 했는데 '모든 사람에게 칭찬 들으면 화가 된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칭찬 자체가 나쁜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 우리 크리스찬들은 사람 앞에서 본이 되고 칭찬듣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문제는 그러한 칭찬을 받는 우리의 자세와 태도가 잘못되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이는 돈이 주는 해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지만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화가 될 수도 있고 복이 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사람의 칭찬도 그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못 받아들이고 소화할 때 자칫 화가 되기 쉬운 것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사람에게 칭찬받으면 어떤 화가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겸손한 마음을 잃게 됩니다.
교만하기 쉬운 사람은 실패했을 때보다 성공했을 때가 더 위험한 때이고, 책망이나 비방하는 말을 들을 때보다 칭찬을 많이 듣고 영광을 얻었을 때가 더 위험한 때입니다.
사람은 간사해서 자기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잘 잊고 칭찬 앞에서 쉽게 자고하며 자신을 자랑한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으로서 실로 위험한 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칭찬만 계속 듣고 겸손을 계속 유지할 장사란 없습니다. 교만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만하면 하나님도 미워하시고 버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잠 11:2절에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개 교만하기 쉬운데, 사실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낮추며 겸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약 4: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실로 모든 사람에게 늘 칭찬만 듣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을 잃기 쉽고, 그리하여 이 무서운 교만병에 걸리게 되고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 크리스찬 한 사람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싸구려 칭찬같은 것을 얼마든지 듣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을 때마다 이러한 화가 자신에게 미치지 않도록 늘 마음을 지켜 겸손히 행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을 낮추며 그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2. 위선적인 신앙 생활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그 달콤함에 취해 더욱 모든 사람에게 칭찬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보다 사람 앞에서 내보이는 신앙 생활에 힘쓰게 됨으로써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 생활에 빠지기 쉽습니다. 사람의 눈만을 의식하게 되고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만 하지 하나님은 뒷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때는 그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칭찬받기 위해 불신앙적인 일도 서슴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복받을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이 세상 생활과 대조해서 말씀하시는 중에, 하늘 나라를 위해서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주리고 우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시고,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크리스찬이라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에서 간혹 미움도 받고 욕도 먹고 악하다는 말도 듣게 되어 있는데, 모든 사람에게 즉 세상 사람들에게까지 칭찬만 받으려고 한다면 당연히 위선적이고 거짓된 신앙 생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 10:34, 35절에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와 손잡고 죄와 타협하면서까지 화평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까지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신앙을 버리면서까지 그들과 타협하고 그들에게 아첨하게 됨으로써 주님이 원치 않으시는 일을 행하게 되고 그에 따라 결국 주님의 진노를 받게 되는 화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게 되면 자칫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만 차지하려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들으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만 위해 사는 사람이 되기 쉽고, 이에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도적질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죄는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죄 중에 하나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 10:31)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목적도,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도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인데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러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핍박을 받고 내 얼굴에 먹칠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담대히 나서는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과 영광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갈 영광이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을 도리어 두려워서 떠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 115:1절에 보면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하고 시편 기자가 기도했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이 왕복을 입고 나섰을 때 백성들이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하는 소리를 듣고 으스대다가 결국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칭찬듣기를 좋아하고 인기에 영합하며 스스로 영광만 받으려는 자는 참으로 화를 당케 되므로 우리는 사람의 칭찬 앞에서 그 영광을 내가 차지하지 말고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4.하늘의 영광과 상급을 잃게 됩니다.
세상에서 다 칭찬을 받아 버리면 하늘 나라에서 받을 상급이 없어집니다. 세상에서 10만원 가치의 칭찬을 받고, 하늘 나라에서 100억원 상당의 영광의 면류관을 잃게 된다면 이 얼마나 큰 손실입니가?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영광과 상급에 대한 소망이 확실한 사람은 사람들의 칭찬받기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인정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사람에게 칭찬듣고 영광받으려고만 애쓰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고 탄식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도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옳은 줄 알면서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고 영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영광과 칭찬을 좋아해서 인기주의에 영합하고 감투만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칭찬과 영광을 잃어버리는 화를 당케 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마 6:1절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하시고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도, 금식할 때에도 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칭찬과 영광을 받아 버리면,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과 영광이 없어지고 만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겸손을 잃고 교만의 병이 들게 되기 쉬우며 위선적인 신앙 생활에 빠지기 쉽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게 되며 하늘의 영광과 상급을 잃게 되는 화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칭찬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아야 하며 사람의 칭찬 앞에서 더욱 조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기가 잘못해서 모든 사람에게 욕만 먹고 칭찬은 하나도 못 듣는 사람 또한 하나님 앞에서 심히 부끄러운 자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심히 비참한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구주가 오신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 8절~20절]
8절 -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절 -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절 -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절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절 -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절 -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절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절 -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절 -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절 -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절 -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절 -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절 -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지킬 때 주의 영광이 그들을 비추고 주의 사자가 나타나 다윗 동네에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천군 천사가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평화를 노래합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찾아가 천사의 말을 전한 후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며 돌아갑니다.

1. 천사들의 찬양 (8~14절)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직접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존재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기뻐합니다. 주의 사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천사는 두려워하는 목자들을 안심시키며 인간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건져 낼 메시아, 즉 구세주가 탄생했음을 알립니다. 또한 수많은 천사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찬송합니다. 메시아가 오심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에게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 묵상 질문
하늘의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어떻게 알렸나요?
* 적용 질문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어떻게 감사하고 찬양드릴까요?

2. 목자들의 찬양 (15~20절)
하나님은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가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비천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목자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게 멸시받던 계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양 떼 지키는 일을 밤새도록 성실히 감당하다가(8절) 천사에게 메시아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듣는 특권을 누립니다. 천사의 말을 그대로 믿은 목자들은 즉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을 찾아가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그 아기가 그리스도요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최초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듣고 본 모든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립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고, 소외당하고 멸시받던 자들을 가장 먼저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누립니다.
* 묵상 질문
목자들이 가장 먼저 구주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이 구원자요 주님이심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할까요?

오늘의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들은 것이 제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입니다! 세상 것에 욕심내지 않고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주님을 만난 것으로 만족하며, 그 은혜의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모실 수도, 잃어버릴 수도, 되찾을 수도 있는 그리스도

[누가복음 2장 41절~52절]
41절 -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절 -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절 -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절 -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절 -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절 -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절 -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절 -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절 -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절 -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절 -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사람들은 흔히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불쌍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상 가장 불쌍한 아이들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가정에서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입니다.
좋은 가정에서 좋은 음식, 좋은 의복으로 좋은 학교에 다니며, 용돈을 펑펑 쓰며 자라는 아이일지라도 그 가정에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 아이는 가장 높은 생의 가치와 특권을 박탈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가난하여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는 가정에서 자란다고 하더라도 그 가정에 그리스도를 모셨다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경건한 아버지와 기도하는 어머니 밑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자라는 아이들이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그분이야말로 참된 축복과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일에 힘쓰고 항상 모시고 살아가야 하는데, 사실 많은 사람들이 항상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다행스럽게도 다시 되찾아 살아가기도 합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그의 부모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기쁘게 예배드리고 친척, 친구들과 교제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이 집을 향해 출발할 때,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친척들과 함께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야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요셉과 마리아는 급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모실 수도, 잃어버릴 수도, 되찾을 수도 있는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과연 어느 때에, 어떻게 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도, 잃어버릴 수도, 되찾을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까?

1. 우리는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구원받을 때 예수님을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멸망치 않고 회개하기를 바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2000여년 전 십자가에 달리신 이래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내게 나오라, 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믿고 구원받음으로써 예수님을 구주로 모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나오는 자를 결코 내어쫓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한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복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매일 생활에서 예수님을 모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영원한 영광에 이르기까지 은혜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어려운 문제가 많아서 세상을 걸어갈 때, 우리 곁에 우리보다 강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 함께해 주셔야 됩니다.
예수님 없이 세상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위험한 일입니다. 태양이 빛을 잃고 별빛이 다 죽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이 함께한 것처럼 우리가 매일 매일 주님만 의지하고 그분의 뜻대로 성경말씀에 의지해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매순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로, 인생길 마지막에도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편안한 오늘은 예수님이 필요없는 것 같이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건강이 있고, 사업이 잘 되고, 가정과 식구가 편안하니 주님이 필요없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날 의사가 '소망이 없다'고 고개를 흔들 때 어찌 하시렵니까? 의사도 도울 수 없고 간호사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랑하는 가족도 도와주지 못할 때가 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나갈 때 주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속삭이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앞으로 6개월 이상 못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산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오랫동안 이 골짜기를 지키며 지내왔구나. 여러 세대가 오고 간 것을 너는 알지. 어느날 너도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너는 없어져도 나는 여전히 살게 된단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우러러 수 백만 개의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며 말하기를 '너는 수천년 동안 거기 있었지. 하나님이 너를 거기에 있게 했단다. 그러나 어느날 너도 없어질 날이 오지만 나는 영원히 살게 된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강가로 갔습니다. '오 힘찬 강물이여, 수 천년 동안 너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달려갔겠지. 그러나 어느날 너도 없어질 날이 오지만 나는 그때까지 살아 남는단다'라고 힘차게 외치고 그는 마음에 평안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음에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옳습니다. 인생의 종착지에서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끝내 소망이 있습니다.

넷째로, 우리는 영원히 그분을 모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면 우리는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그분을 더욱 가까이에서 모시며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믿고 동행하여 모시고 살 때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 이르러 영원히 그분을 모시고 사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그대로 두고 잃어버린 채 떠났듯이, 오늘날도 많은 삶들이 세상 죄악으로 물들어가면서 예수님을 뒤에 남겨두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린 예수님을 잃어버려도 예수님은 우리를 잃는 법이 없는 것을 감사합시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요 5: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요 10:28,29절에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지게 되고 우리는 그들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혹 방탕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은 있어도 결코 혈연관계를 끊을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께 와서 거듭나면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황할 때,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때가 있어도, 하늘과 땅의 어떤 권세도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사이에 맺어진 피의 관계를 끊어 놓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는 결코 구원의 은혜를 거두어 가시지 않습니다.
진정 감사한 것은 우리의 구원과 천국의 소망은 우리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잃어버려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예수님에 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가 구원하신 것을 잃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를 잃는 법이 없지만 종종 우리는 주님을 멀리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잃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생활에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잃고 살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열매도 없고 영적으로 공허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 무관심 때문에 그리스도를 잃는 때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말로는 무관심하다고 하지 않는데 생활과 행동으로 영적 무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주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는 기도 생활에 무관심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때로는 예배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고, 주님을 위한 봉사와 헌신에 대해서도 무관심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도 잃습니다.
또한 우리가 영적 의무를 게을리 할 때, 그리스도를 잃게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12살난 예수님을 돌볼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로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을 때 그리스도의 임재와 교제를 잃게 됩니다.
사람들은 엿새동안 세상에서 일하고도 교회에 나갈 시간이 없다고들 합니다.
일할 시간은 있고 놀러나갈 시간은 있어도 주님과 교회를 위한 시간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래서 항상 모시고 살아간다면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주어진 주님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주님께 드려야 할 일을 게을리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아낌없이 투자하면서도 주님의 것을 되돌려 드리는 일은 게을리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일에 너무 바쁠 때에도 그리스도를 잃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잘 나오지 못하고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할 때 '너무 바쁘다'고 합니다. 교회의 모임에 출석하라고 하면 '바빠서 못한다'고 합니다. 이렇듯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주의 일에 소홀히 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의 임재를 잃고, 그의 생활은 공허해지고 맙니다.
또한 범죄하고 용서를 빌지 못할 때, 그리스도를 잃게 됩니다.
누구를 헐뜯거나, 미워하거나, 공평치 못하고 죄악된 일을 할 때, 그리스도의 임재를 잃게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일을 하고 회개치 않으면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3. 우리는 예수님을 되찾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셨다가도 잃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은 한 번 잃었다고 거기서 영원히 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찾을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첫째, 잃어버린 장소에서 되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예수님을 잃었는지 알아서 그곳에 가면 그리스도를 다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섬기다가 그만 두었다면 거기서 찾을 수 있고, 은밀한 죄를 짓다가 잃었다면 그 죄를 내던져 벌릴 때 다시 찾을 수가 있고,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다 잃었으면 다시 그 의무를 다할 때 찾을 수가 있습니다.
헌신 봉사를 그만두다가 잃었으면 다시 하면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뒤로 하고 나를 앞세우던 생활의 부분 부분에서 다시 그를 앞세우는 생활을 하면 그리스도를 되찾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집에서 되찾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사람이 수요일 밤 예배에 빠지고, 그 다음 주일 밤 예배에 빠지고, 그 다음 주일 낮 예배까지 빠지다 보면 자연히 그리스도와는 멀어지게 됩니다.
무디 선생에게 한 청년이 와서 '꼭 교회에 나가야 합니까? 집에서 성경 읽고 믿으면 안됩니까?' 하니까 그때 무디 선생님은 빨갛게 달아오른 불덩어리를 집게로 집어서 그 청년에게 ' 저 구석에다 갖다 놓아라' 하였습니다.
이에 그 청년이 불덩어리를 구석에 갖다 놓자 얼마안가 까맣게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다시 청년에게 꺼진 덩어리를 '난로에 갖다 넣어라' 하니 난로에 넣자 얼마쯤 있다가 다시 빨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무디 선생은 '너희들이 아무리 혼자 예수를 잘 믿을 것 같아도 교회 품을 떠나서는 예수를 열심히 믿을 수 없어' 하고 말할 때 그가 회개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그리스도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 어디에서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에 힘쓸 때 예수 그리스도를 되찾기가 쉬운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에 힘쓰게 되면 되찾을 수 있습니다.
어느 군목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를 지켜보다가 '어머니한테 무슨 전할 말이 없느냐?'고 했더니 '예, 제가 구원받고 행복하게 죽었다고 전해 주세요.'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외에 또 할 말이 없느냐고 했더니 '우리 교회 학교 선생님께 내가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리스도인으로 죽었다고, 가르침을 잊을 수가 없었다고 전해 주십시오.'하고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군목이 교회 학교 선생님께 그 편지를 보냈더니 답장이 오기를 '편지 정말 고마왔습니다. 지난 달 교회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무관심한 채로 지내왔는데 편지를 받고 보니 나 같은 것도 한 소년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데 쓰여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는 끝까지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회답이 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서 그리스도를 되찾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의 어느 부분에서라도 내가 맡은 바 책임을 열심히 하는 가운데 늘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고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 그리스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계시는 분은 안계십니까? 항상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되, 어느 순간에라도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면 그 즉시 되찾아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 아 멘 -

말씀대로 이루실 주님을 믿음으로 찬양하십시오

[누가복음 1장 39절~56절]
39절 -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절 -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절 -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절 -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절 -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절 -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절 -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절 -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절 -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절 -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절 -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절 -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절 -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절 -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절 -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
54절 -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절 -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절 -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가 유대에 사는 엘리사벳을 찾아가 문안할 때, 엘리사벳의 복중 아이가 뛰놀고 그녀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마리아와 그 태중의 아이가 복이 있다 합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신 주를 기뻐하며, 큰일을 행하시고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주를 찬양합니다.

1. 엘리사벳의 기쁨 (39~45절)
신실하신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십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엘리사벳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기에 아들을 잉태하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 기쁨은 메시아를 잉태한 마리아의 방문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두 여인은 서로에게 위안과 기쁨이 됩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계시를 받아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를 잉태한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이도 마리아의 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뛰놉니다. 그 아이가 모태로부터 성령 충만함을 받으리라는 말씀 역시 이루어졌습니다(15절). 엘리사벳은 하나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은 마리아의 믿음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고 그분의 사람들을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또한 믿음과 성령의 사람들을 통해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 묵상 질문
마리아를 만난 엘리사벳이 기뻐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대로 이루실 것을 믿나요? 지금 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2. 마리아의 기쁨 (46~56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저절로 그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마리아는 보잘것없고 비천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는 축복을 받았음을 알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합니다.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은 그분을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긍휼을, 그분을 대적하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그분은 비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과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 삶에 행하신 놀라운 일을 깨닫는다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분을 전심으로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 묵상 질문
마리아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고백하나요?
* 적용 질문
요즘 내게 깊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성품은 무엇인가요? 그것을 어떻게 내 삶에서 드러낼 수 있을까요?

오늘의 기도
보잘것없는 제 삶에 형언할 수 없는 구속의 은혜로 찾아오신 주님! 거룩하고 전능하신 주님 앞에 서서 성령 충만함으로 기뻐 뛰게 하소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맛보며, 평생 찬양이 끊이지 않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태어날 아기를 위한 어머니의 자세

[누가복음 1장 24절~25절]
24절 - 이 후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이르되
25절 -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사람들 앞에서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어떻게 양육하고 지도하는가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을 양육하고 지도함에 있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임해야 합니다. 특히 이러한 부모의 자녀 양육의 문제는 자녀가 태어나기 전 수태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에 요즘은 태교가 무척 중요시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임신한 후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엘리사벳은 다섯달 동안을 숨어지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다 늙어 아기를 갖게된 데 대한 부끄러움의 표시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녀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다만 부끄러움으로 숨은 것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뒤늦게나마 아이를 주신 것을 감사하며 뱃 속의 아이를 소중히 여겨 바깥 출입을 삼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크리스찬 여성이 아기를 가졌을 때 취하여야 할 태도를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1. 자녀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는 여인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을 큰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삼상 1:6-11절에서 한나도 하나님께 자녀가 없는 그의 수치를 통곡하며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엘리사벳은 노년에 이르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사를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가 그 말씀대로 엘리사벳은 아이를 잉태하였던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이제 하나님께 제일 먼저 어떤 태도를 가졌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이 아기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분명하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나의 부끄러움을 없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어머니들이 가져야 할 중요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혹 성도들 중에 엘리사벳은 특수한 상황에서 얻은 자녀이었기에 그녀의 태도가 당연하고 우리의 경우는 그렇게까지 찬양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며(창 2:7) 하나님의 허락하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를 얻은 부모들은 그 자녀가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고 그 자녀를 소중히 여겨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자녀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자녀를 얻은 것에 대해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때, 그 입술의 열매는 자녀들에게 값진 결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 자녀로 인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 127:3절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고 태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주신 상급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귀한 상급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때 하나님의 축복은 더욱 값지고 빛나는 것입니다. 감사가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충만한 은총이 더욱 널리 임하는 것이며, 더욱이 감사함으로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시 100:4) 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이에 바울은 살전 5:18절에서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권면했습니다. 아주 평범한 일에도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자녀를 주신 사실을 우리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자녀로 인해 주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가진 신앙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생활하며 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감사하는 어머니는 감사하는 자녀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자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서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따라 행했던 엘리사벳 부부의 그 간구는 하나님께 상달되었고 드디어는 하나님으로부터 귀한 자식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의인의 간구와 기도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약 5:16).
그러나 엘리사벳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장차 태어날 아기를 위해 근신하며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또한 보여 줍니다. 이것이 신앙의 어머니가 본받아야 할 귀한 태도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아기를 갖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이치로만 여기는 분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특별히 아이를 갖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며 장차 태어날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겸손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태도야말로 값진 보석같은 신앙의 자세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은 그 마음과 태도를 귀하게 보시고 더욱 바른 신앙의 자녀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훌륭한 신앙적 태도를 가진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모세가 그 민족의 지도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듯이, 수태시부터 자녀를 위해 항상 기도하는 부모야말로 그 자녀에게 올바른 신앙을 심어 주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특별히 신앙의 어머니들이여!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심이야말로 어떤 자녀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딤후 1:5). 특별히 어머니의 신앙은 뱃 속의 태아에게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자녀를 위해 그 자녀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고백하는 태도와 항상 감사하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기도의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아서 귀하고 값진 신앙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신실한 믿음의 어머니들이 다 됩시다.

- 아 멘 -

용서합시다

[누가복음 23장 32절~38절]
32절 -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절 -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절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절 -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절 -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절 -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절 -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오늘은 '용서하라'라는 제목으로 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에 제일 첫 번으로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없는 자신을 핍박하고 조롱하며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못박는 무리를 저주하는 기도도 아니고, 자기를 고통에서 놓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도리어 저들이 알지 못하고 이런 일을 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어느 사본에는 헬라어 원어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하는 기도를 한번 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되풀이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갈보리 산에 도착했을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셨고, 못박기 위해 십자가에 눕힐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굵은 못이 살을 뚫고 들어갈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십자가 형틀을 못박은 채 일으켜 세워 찢어지는 고통을 느낄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하셨고, 무리가 예수님을 조롱하는 모습을 내려다 보시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의 옷을 놓고 제비뽑을 때에도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옵소서' 하고 여러 번 되풀이해서 기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사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에 피흘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목적도, 모두 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영원한 지옥불의 형벌을 받아야 할 인간을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마 5:43, 44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는데 예수님은 이 설교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던 두 강도 중 하나가 회개하면서 구원을 요청할 때, 예수님은 그 강도를 용서해 주시면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이란, 이처럼 한마다로 죄를 용서해 준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통이 극심한 가운데도 제일 첫 번 하신 말씀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핍박하는 무리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몇 십년 감옥살이 해야 될 죄를 뜻밖에 용서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면 일평생 감사해도 못다할 터인데,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 죄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로, 죄사함 받아 천국의 백성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값없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 받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이제 어떤 자세로 생활해야 할까요? 바로 내 죄를 용서해 주신 주님을 따라 남의 죄를 용서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가진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촌에서 그들을 돌보며 목회하던 중, 여수 u49692천 반란 사건 때 한 공산당원 청년이 손목사의 두 아들 동신 군과 동인 군을 총살시켰습니다. 그후 반란이 진압된 다음 그 공산당을 체포하여 사형시키려고 할 때, 손 목사님은 그를 죽인다고 내 죽은 아들들이 살아나느냐고 하면서 구명운동하여 석방시키고, 그를 죽은 아들 대신 양자로 삼았습니다. 손 목사님의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한 그 사랑 때문에 '사랑의 원자탄'이란 별명을 붙인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입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하는지 이제 몇 가지로 살펴 보고자 합니다. 

1. 모르고 지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은 뜻깊은 말씀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영적으로 보면 자기의 뜻이 아니라, 그 마음 속에 악한 마귀가 들어 있어서 마귀의 지배를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장차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한 채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회개치 않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영원한 지옥불에 들어가 참혹한 형벌을 받게 될 터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우리는 미워하기보다 오히려 불쌍히 여겨서 용서하며 그들이 구원을 받도록 전도하기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2. 나의 죄도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베드로가 예수님께 "내게 죄를 범하는 자를 몇 번까지 용서해줄까요? 일곱 번까지 하면 될까요?"하고 물을 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490번만 용서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 무한히 용서하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그리고 나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갚을 것이 없어 애원하기에 탕감해 주었더니, 그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나니까 당장 갚으라고 하면서 아무리 애원해도 듣지 않고 옥에 가두는 것을 보고, 그를 다시 끌어다가 옥에 가두면서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18:25절에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도 지옥 갈 죄인인데 용서함 받았으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 줘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구원받은 자가 다시 지옥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인 줄 압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헤아리는 만큼 우리 역시 헤아림을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너희가 남의 눈에 티는 보면서 자기 눈에 들보는 못보는구나"하신 말씀대로, 결국 우리도 같은 죄인이면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남을 흉볼 때 손가락질 하는데 그때 세 손가락은 자기를 가리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1946년 독일 변방에서 고트레브스키란 깡패가 한 농장에 들어가 하멜만이란 사람의 10식구를 다 죽이는 가운데, 하멜만 씨는 총 네 방을 맞으면서도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그 살인범 고트레브스키는 20년 형을 마치고 출감하게 되었으나 갈 곳이 없어 내보내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멜만은 그를 자기가 보호하겠다고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느냐고 하니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용서해 주셨으니 나도 이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3. 용서함이 나에게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수 십년 전에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옥에 갇힌 뒤 그 강도의 가족들이 밥을 굶는다는 말을 듣고, 피해자의 아들이 쌀을 한 가마 사다 주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쌀을 사다 준다고 비난하는 말을 듣고 그는, '만일 내가 그 자식들에게 원수를 갚으면 그 자식들은 우리 자식들에게 원수를 갚고, 자식의 자식이 또 원수를 갚게 되며 악순환이 계속될 것 아닙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복수가 끝나는 일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용서할 때 참으로 악한 자도 변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첫번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회심 전 사울(바울)이 거기에 찬성하고 지휘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머리가 깨지고 척추와 늑골이 다 부서져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무릎을 꿇고 큰 소리고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했습니다. 
성경 주석가들 중에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강한 빛을 받고 꺼꾸러지기 전, 이때에 순교하는 스데반의 천사같은 얼굴과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내면의 빛을 받고 변화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스데반의 기도 때문에 바울 같은 인물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죄인인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나 또한 원수에게 은혜를 베풀며 용서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원수를 용서할 때 어떤 축복이 돌아올까요? 
첫째, 남을 불쌍히 여긴 만큼 자기도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 자기도 잘못해서 막다른 골목에 처할 때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게 됩니다.
둘째, 나와 내 가정에 평안을 얻습니다 내가 아는 친구 목사 한 사람은, 미국에 유학간 사이에 아내가 실수하여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을 나중에 알게 된 그 친구는 몇 달 동안 고민하다가 '나도 하나님 앞에 잘못이 있는 사람인데 용서해 주자 더욱이 호세아는 몇 번이나 집을 나간 창녀같은 고멜도 데려야 살았는데 나도 용서해 주자'하고 용서해 주고 살았는데 후에 그 가정이 엄청나게 축복을 받고 자녀들도, 교회도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때 이혼했다면 그 아내는 폐인이 되었을 것이고, 그 자식들은 고아원에 들어가 거지같이 되었을 것이고, 자신도 목회를 못하고 아무 쓸모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기 42:9절이하에 보면 욥이 자기를 그렇게 괴롭히며 독설을 퍼붓던 친구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때, 그 전보다 갑절이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 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고 했습니다.

4. 죄의 심판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상대방이 회개도 하지 않고 극악무도한 사람이라고 할 때에도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 하거나 증오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맡겨야 합니다.

롬 12:17절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고, 19~21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증오심이나 복수심을 갖고 있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사단이 우리 마음 속에 집어 넣는 독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사마리아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그들이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본 야고보와 요한이 격분해서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어떤 소년이 '용서가 무엇이냐'고 묻는 말에 그의 어머니는 '그것은 꽃이 짓밟힐 때에도 내뿜는 향기과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옳습니다. 우리가 짓밟힘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억울함을 당해도, 독소를 내뿜지 말고 사랑의 향기를 뿜어야 합니다. 아예, 악한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모라비안(Moravian) 선교사들이 에스키모인들에게 '용서'라는 말이 없어서 길게 설명하기를 '이쑤 마기중 나이 마이너마크'(Issu magijou nai mainermik)라고 설명했는데, 그 뜻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생각할 수 없는 것'(Not able to think about it anymore)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증오심이나 복수심 자체를 갖지 않는 것이 용서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악한 생각을 품지 말아야겠습니다. 잊어버려야겠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회개하고 십자가의 피 공로를 믿을 때, 우리 죄를 깨끗이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시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3: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하셨고, 이사야 44: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 같이 도말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일 1: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의 죄를 용서하되 생각과 마음 속에 기억도 하지 않고, 잊어버리기까지 용서해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죄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 아 멘 -

제목 : 참된 승리 (여찬근 목사님)

[누가복음 19장 35절~40절]
35절 -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36절 -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37절 -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절 -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절 -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절 -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승리의 모습은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승리자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쫓아가며 참된 승리자의 모습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함께 알아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참된 승리자는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35절).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나님이 진리이심을 이 땅 가운데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베들레헴에 오신 것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새끼를 타신 것도 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 그분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과 부활하심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사40:8).
성도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그 이름을 만국 위에 높여주셨듯이 그를 높여주시고 승리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삶을 사셨던 것처럼 말씀을 이루는 삶을 통해 참된 승리자로 살아가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참된 승리자는 낮아지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35절).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9:9)처럼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심은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황제나 장군들이 대적을 물리치고 행진하는 개선장군은 승리의 상징인 백마를 타고 열광하는 백성들로부터 화려한 영접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고 높아지고 다른 사람을 정복하고 그 위에 서고, 짓밟아도 누구도 대항하지 못하는 삶을 승리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섬기는 자가 섬김을 받는 자보다 높고, 낮아지는 자가 높임을 받는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군림하고 짓밟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죽어지고 부림을 받는 사람이 높아짐을 받게 됨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승리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처럼 주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셨던 낮아짐의 모습을 기억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높은데 두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말씀되어지도록 섬기는 복된 저와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셋째. 참된 승리자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입니다(38절).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14:33).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함을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평도 평강도 화목도 깨어졌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목과 평강, 평화도 깨졌습니다. 스스로 혼자 있는 자기 자신도 스스로도 평화가 없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토브’(완전, 온전, 아름다움, 행복, 복, 좋은)의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성경의 평화(샬롬)는 토브의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채움을 받고 내적이나 외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평화를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화의 도구로 평화를 만드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어떻게 화평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의 모습은 전쟁과 싸움을 통해 이 땅에 평화를 이루러 오신 분이 아니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전쟁과 싸움으로 누군가를 굴복시키고 억압하여 화평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화평을 심어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한 성도가 참된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말씀을 이루고 낮아지는 곳으로 가고 오늘을 평화를 이루는 날로 살 때 참된 승리자 됨을 믿으시고 그 믿음 안에서 참된 승리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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