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를 위한 마음 자세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공과 승리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책을 사 보고 많은 돈을 들여서 세미나도 합니다. 그러나 성공과 승리의 참된 모범은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원 불멸의 성공자요 승리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성공과 승리의 3가지 중요한 마음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승리는 그 마음의 자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입니다.
잠 23:7절은 "대저 그 마음이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말씀하며,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난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공과 승리의 중요한 비결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립시다.
성공과 승리의 중요한 자세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붙잡히고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발전하고 승리하지 못합니다. 기억하는 것 못지 않게 잊어버리는 것이 승리의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지난 과거사에 집착하여 만족하는 사람은 결코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만을 향하여 달음질쳤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속에 사는 사람은 언제나 지난 일을 기억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부족을 느끼면서 계속 전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 과거에 잘한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님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이요 공적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과거를 기억하려 들지 않고 잊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과거에 잘한 것을 기억하고 자만하는 사람은 실패자가 됩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눅 17:10절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시인은 '고상한 행동을 하고 나서 그것을 하루종일 꿈꾸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과거의 실패한 일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아마 사도 바울만큼 잘못된 과거,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유대인 열심당원들이 크리스챤 집사를 죽일 때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죽였습니다. 이때 이들은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면서 옷을 벗겨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바울은 첫번째 순교자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가담한 살인자였습니다. 그의 손에 피가 흐르는 살인자였습니다,
행 8:3절에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바울은 집사도 죽일 뿐 아니라 기독교인들을 무섭게 핍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실패해도 그것에 좌절해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지은 죄가 없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난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고 죄가 있습니다. 연필 꼭대기에 지우개가 달린 것은 사람은 누구나 실수가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롬 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고, 요일 1: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 38:17, 18절에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수와 죄를 잊어버려야지 과거에 붙잡혀 있는 사람은 성공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셋째, 좋지 못한 감정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좋지 못한 감정이 생길 때가 있는데 그것을 털어버리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어떤 이는 자기연민(selfpity)의 감정 때문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아', '내 가족들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뭔가 세상은 다 잘못됐어' 이렇게 섭섭하고 원망스럽고 불만스런 자기연민의 감정을 털어버리지 못하여 승리자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억울하고 분한 감정에 붙잡혀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난날 실연한 것, 낙제한 것, 사업 실패한 것, 모욕을 당한 것, 돈 잃어버린 것 등 이런 나쁜 기억도, 감정도 속히 잊어버려야 그의 앞에 성공과 축복이 있습니다. 복수심이나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 증오심을 잊어버리지 못하면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성령은 앞을 바라보게 하고 마귀는 뒤를 바라보게 합니다.

2.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봅시다.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늘 미래를 바라보는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70살난 노인도 15년 내지 20년은 족히 있어야 열매 맺는 과실나무를 심는데 어느 25살난 젊은이는 1년생 토마토도 못 따먹을까봐 심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모두 미래의 푯대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어느 송년 파티에서 각자 새해에 바라는 소망과 기대를 써서 봉투에 넣어서 모아두었다가 일년 후 뜯어보기로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생애의 가장 좋은 해가 되기를' 어떤 이는 '큰 꿈이 이루어지는 해가 되기를' 하고 좋은 소원을 담아서 그대로 되는 이들이 있었는데 한 봉투 속에는 '금년은 내게 가장 큰 공포의 해이다. 왜냐하면,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전부 60전에 죽었는데 금년에 내 나이가 60살이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후 뜯어보았을 때 과연 그 사람은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자동차의 기어를 전진에다 놓으면 자동차가 앞으로 가고 후진기어를 놓으면 뒤로 갑니다.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생에 있어서 푯대와 꿈이 없는 사람은 결코 승리자가 못됩니다. 낙담과 좌절만이 그의 앞에 있게 될 뿐입니다.
미국에 유명한 오랄 로버트(Oral Roberts) 목사님은 예배시간 때마다 다같이 외우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즉 '당신 앞에 좋은 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참 좋은 인사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한번 다같이 외워 봅시다.
'우리 앞에 좋은 일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긍정적이고 좋은 미래에 대한 푯대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이 세상을 크게 변화시킨 사람들은 모두 꿈과 목표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3. 잡으려고 좇아갑시다.
우리의 생애가 성공과 승리의 생애가 되려면 첫째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 그 다음이 푯대를 바라보는 것을 말씀드렸고 이제 세 번째로 좇아가는 것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합니다.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는 것은 저항과 장애물을 뚫고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성경에는 Press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누르다, 강요하다, 밀어 제치고 나아가다의 뜻입니다. 승리와 성공의 세 번째 자세는 저항과 장애가 있어도 그것을 물리치고 혹은 밀어 제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목표에 도달한다는 것은 쉽게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저항도 있고 문제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을 밀어 제치고 나아가는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애에 결코 언제나 햇빛이 비치는 푸른 하늘과 장미와 같이 아름다운 것만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고 고난도 없는 안일한 생애를 약속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더 고난과 역경이 있는 법입니다. 성경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하였습니다. 크리스챤들이 바르게 살려고 할 때 친구들의 비판도 받게 되고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고난과 시련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르게 됩니다. 성공하고 승리하기를 원하면 모든 고난과 문제를 뚫고 나아가는 투쟁이 있어야 합니다.
온 세계가 존경하는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이 얼마나 역경과 실패와 싸웠는지 아십니까?
1831년에 사업에 실패해서 파산했고 1832년에 주의회 의원으로 출마했다가 실패했고 1848년에는 상원의원으로 출마했다가 실패했고 1856년에는 부통령으로 출마했다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1860년에는 아브라함 링컨은 계속 실패와 투쟁한 결과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그는 완전한 패배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가 올 때 그의 역사는 옳았고 성공의 문은 완전히 열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조그마한 문제에 부딪쳐도 그만 흔들리고 넘어지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굳세고 담대하게 뚫고 나가야 마침내 승리합니다.
하나 더, 앤 설리반(Ann Sullivan)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여걸 헬렌 켈러(Helen Keller)에 관해서는 잘 알지만 배후에서 그녀를 돕고 지도한 앤 설리반에 관하여는 잘 모릅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도 못하고 듣지고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마른 나무토막 같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을 전 세계를 놀라게 하는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앤 설리반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자기가 자기 된 것과 자기가 얻은 모든 지식은 다 앤 설리반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선생님인 앤 설리반은 늘 되풀이해서 한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작하고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 실패할 때마다 무엇인가 성취할 것이다. 네가 원하는 것은 성취하지 못할지라도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되리라. 시작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Keep on behinning and failing). 난관을 뚫고 좇아가는 사람만이 성공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공과 승리를 거두는 세 가지 사도 바울의 생애를 통하여 배웠습니다.
첫째는,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 것이고 둘째는,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는 것이요, 셋째는 그 푯대를 향하여 나갈 때 어떤 저항이나 문제가 있어도 밀어 제치고 싸우며 나아가는 행동입니다. 이제는 사도 바울의 생애를 배운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감으로써 항상 승리와 성공의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잊을 것은 잊고 삽시다

[빌립보서 3장 13절~16절]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절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오늘은 "잊을 것은 잊고 삽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기억력은 참 좋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수 백 명의 이름을 기억해서 대인관계를 폭넓게 가지기도 하고 수 천 개의 전화번호를 기억해서 일을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처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통달해서 성경 박사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도 '조물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했으며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리는 것도 기억하는 것 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잊어버리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들일수록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릴 줄 아는 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삶을 사는 이유 중의 하나가 지난 날에 일어난 사건들을 잊어버릴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위대한 치료자라는 말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겐 그것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을 잃어버리고, 삶을 무기력하게 하는 요인을 마음 속에 정박시켜 둡니다. 그러나 진정 그들이 마음과 정신의 평안을 원한다면 잊어버리는 방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마귀는 쓸 데 없는 일을 기억나게 하고 성령은 미래를 바라보게 합니다. 그뿐 아니라 마귀는 잊어야 할 것들을 생각나게 하고 생각해야 될 것은 잊어버리게 해서 잠을 못 이루게 하고 불안하게 만들어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이에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오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 14)고 잊어버리는 것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우리의 죄를 잊어야 합니다.
우리들 모두에게는 잊어야 할 죄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형태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으나 결코 죄 없는 사람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죄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작용하기 시작해서 일생을 사는 동안 계속 작용합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 받은 죄인이고 어떤 이는 멸망 받을 죄인입니다. 모두 똑같은 죄인이지만 어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죄를 사함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고, 어떤 이는 여전히 그 죄의 결과로 멸망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주님께서 대속해 주신 과거의 모든 죄를 잊어버려야 합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아무리 인간적으로 노력한다 할지라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유일한 길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죄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에 찾아오셔서 '너희 죄를 다 내게 맡겨라. 내가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겠노라. 나는 너희 죄를 감당할 힘이 있노라. 그 죄를 다 내게 맡기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 내 피로 너희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마. 그리고 내가 다 잊어줄 터이니 너도 잊어버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께 전폭적으로 맡긴 모든 죄를 말끔히 잊어버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회심하기 바로 직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일 영장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은 완전히 죄로 검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오쯤 되어 큰 빛이 그의 주위를 둘러 비추면서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들려오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박해자 사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그의 모든 죄를 주님께 내려놓고 그의 죄를 잊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면 더 이상 전에 지은 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모든 죄를 잊어 주시기에 우리 또한 잊어야 합니다.
사 38:17, 18절에 보면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라고 했으며, 시 103:12절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고맙고 좋으신 분입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잊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우리가 죄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면 더 이상 우리의 죄를 기억도 하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뵈올 때 우리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이미 기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우리의 실수를 잊어야 합니다.
인간은 실수 투성이의 존재입니다. 연필 꼭대기에 지우개가 달려있다는 것은 실수 투성이의 인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어디에 한 번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온 세상을 다 살필지라도 실수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완전해 보이는 사람도 같이 지내다 보면 실수가 발견되는 것입니다. '야, 저 사람은 완전한 사람이야. 나는 저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결심하고 결혼해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에게도 결점과 실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완전과는 너무나 먼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를 속히 잊어버려야지 그것을 기억해 보았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왜 실수했는가를 생각하여 그것을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지만, 실수한 것 그 자체에 연연하여 그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난 날의 실수를 가지고 아무리 속을 태워도 현재의 환경이 개선되지 않습니다.
농부가 지난 해 농사 잘못 지은 것을 금년에 후회한다고 해서 금년의 농사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거울삼아 금년의 농사를 바로 짓도록 노력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상인이 지난 해 물건 잘못 사온 것 때문에 금년에 한탄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빨리 그 생각을 털어버리고 금년에 물건을 바로 사오도록 노력하는 것이 유익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법이 우리의 전 생애를 성공으로 이끄는 최선의 정책이 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실수는 가끔 큰 성공의 전주곡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실수했을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올바른 길을 걷게 되면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됩니다. 우리는 실수를 보다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선용해야 합니다. 노력하다 실패하면 한탄하지만 말고 또 다시 시도해 보고 또 실패하면 다시 또 일어나 시도해 보아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목사가 되기 전 젊었을 때 그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지시에 따라 어느 주일 강단에서 공중 기도를 했는데 그만 자기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쩔쩔매다가 큰 창피를 당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되면 그 실수한 것을 두고 두고 부끄럽게 생각하여 다시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하며 공중 기도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 밤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다시 한 번만 나에게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 수요일에 다시 또 목사님으로부터 기도를 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때 준비를 잘했다가 기도를 은혜스럽게 잘 하고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실수했다고 낙망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그 실수한 것을 속히 잊고 실수를 극복하여 승리로 이용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언짢은 일들은 잊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감정이 있고 얼마 간의 이기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가 내게 거슬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즉시 화를 내고 내내 언짢아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슬리는 언짢은 일들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마음에 품고 있으면 그것은 나의 삶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감싸 안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들을 꼭 잊어야 합니다. 이런 사소한 일들을 마음에 담아 두게 되면 그 틈을 탄 사단의 시험을 받고 신앙적 실패를 당하게 됩니다. 고로 언짢은 일들은 곧 잊어버리고 털어버려야 합니다. 자기의 연약함을 기억하면서 남의 실수를 용서해줘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사나 어느 교인의 언짢은 말 한 마디와 행동 하나 때문에 신앙 생활을 그만 두고 교회 출석을 그만 두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사람의 잘못을 주님께 항의 하십니까? 마치 암세포 하나가 온 몸의 생명을 좀먹어 들어가듯이 우리의 잊지 못하는 악한 감정이 우리의 행복과 영력을 좀먹어 버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소한 말다툼이나 오해로 인해 언짢게 된 마음과 일들을 잊어 버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도리어 자신을 언짢게 한 자들의 실수를 덮어주고 사랑으로 감싸주어야 합니다.

4. 하나님께 바친 것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햇빛과 비를 주신 것처럼 모든 소유를 얻을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우리가 소유를 얻는 것이지 우리의 잘난 재주 가지고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것 중에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하루 아침에라도 다 거두어 가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재물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재물은 우리의 종이 되어야지 주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물은 악한 주인이 되거나 선한 종이 됩니다. 그런데 재물을 선한 종으로 다스리기 위한 최대의 방법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이는 우리의 최대 관심사이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풍자 만화를 봤더니 어떤 한 사람이 극장 앞에 가서 표를 사는데 그 극장에서 제일 비싼 자리의 표를 두 장 사면서 12불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주일날 교회에 가서는 헌금대가 자기 앞에 돌아오니까 5전 짜리 동전을 마지 못해 집어 넣으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데 쓸 때는 넉넉하게 쓰면서 하나님께 드린 것은 꼬박 계산하고 기억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아낌 없이 기쁜 마음으로 드리되, 드린 것을 다시는 기억지 말아야 합니다. 기억하며 아까와 하거나 드린 만큼 축복으로 돌려받아야 한다고 기대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이미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것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보화로 쌓여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린 것에 비교도 안 되는 복되고 영원한 상급과 축복이 이미 예비되어 있기에 우리는 드린 것에 대해 어떤 기억도 계산도 할 필요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5. 우리의 선행도 잊어야 합니다.
착한 일하는 것은 빛의 자녀들인 우리 성도들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하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제사장도 그냥 지나가고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 버렸는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돌봐주고 치료해 주고 주막에 데려다가 살려 주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다 우리의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눅 10:29-37).
사도 바울은 자기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넘치게 받아 구원받은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는 "모든 사람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6:10)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마 25:4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한 선행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자랑하고 기억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마땅히 행해야 할 선행을 했을 뿐이므로 그것을 기억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착한 일을 행한 후에는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다"(눅 17:10)라고 생각하고 곧 그 일에 대해서 잊어버려야 합니다.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 6:3)는 것은 내가 한 일을 곧 잊어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시인은 '고상한 행동을 하고나서 그것을 하루 종일 꿈꾸지 말라'고 했습니다. 칭찬들을 일을 하고나서 그것을 하루 종일 기억하고 있다든지 칭찬을 오래 기억하고 있으면 그만큼 하늘에서 받을 상과 칭찬이 줄어듭니다.

6. 우리의 슬픔도 잊어야 합니다.
'여인에게서 난 자는 모든 환난으로 가득차 있다'고 했습니다. 고해와 같은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모두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햇빛도 잠시 후면 캄캄한 어두움으로 가리우게 됩니다. 이 캄캄한 슬픔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 슬픔을 잊을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그 슬픔을 가져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슬픔을 온전히 위로해 주시고 담당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모든 슬픔과 아픔은 잊어버릴 가치 밖에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슬픔은 사랑의 주님에게 모두 털어 놓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슬프게 보이던 일들이 언젠가 큰 기쁨과 축복의 전주곡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마지막으로 사 43:18절 말씀을 기억합시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가장 좋은 이름

[빌립보서 2장 5절~11절]
5절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절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거리를 오가다 보면 추위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총총 걸음으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날씨는 차갑고 쌀쌀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마음 따뜻한 겨울을 보내도록 합시다. 오늘은 '가장 좋은 이름'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의 이름 속에는 그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그것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속성이나 지위, 하는 일 등을 함께 연상하게 됩니다. 가령 제가 한 10억원이나 100억원 짜리 수표를 끊어 준다면 은행에서 소용없는 것이라고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최고 재벌의 이름으로 수표를 준다면 은행에서는 아무 말없이 처리해 줄 것입니다. 내 수표와 그들의 수표의 차이는 바로 이름 때문입니다. 이름이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가장 좋은 이름인 예수의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서나 하늘 나라에서나 가장 중요하고 귀한 이름이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예수의 이름은 어떤 이름입니까?

1. 예수의 이름은 권세있는 이름입니다.
과거에 권세 있었던 이름들을 잠시 생각해 봅시다. 알렉산더 대왕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습니까? 그는 33살에 그가 아는 세계를 모두 다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33살에 술취하고 주색에 빠져 죽어버렸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이름도 권세를 잃고 말았습니다. 씨이저(Caesar)도 권세있는 이름이었습니다. 로마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부루터스,(Brutus)라고 하는 한 친구의 단검이 그를 죽이자 그의 이름도 권세를 잃고 말았습니다. 나폴레옹도 권세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전 유럽이 그 이름 앞에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러나 워털루(Waterloo)에서 패전하고 세인트 헬레나(St Helena)섬에 귀양가서 죽자 그의 이름은 권세를 잃고 말았습니다. 카이젤(Kaiser)이나, 히틀러(Hitler)나, 무솔리니(Mussolini)도 권세있는 이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불명예 가운데 죽어 버렸고 죽음과 동시에 그 권세도 다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그는 세계를 창조하셨고,역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으며 인류의 운명도 바꾸었습니다. 그는 죄와 죽음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의 권세는 영원히 감소되는 일이 없고, 앞으로 오늘날에는 온 세상이 그의 절대적인 권세를 깨닫는 때가 올 것입니다.
불란서는 한 때 루이 대제(Lousis the Great)의 권세를 자랑했습니다. 세계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어느날 죽음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그의 장례식때는 큰 성당에 애도하는 사람들과 저명 인사들이 가득하게 모였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경의를 표했습니다. 그 성당 안은 어두웠고 큰 촛불 하나만이 황금관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설교자인 마실론(Massilon)씨가 설교하기 위해 청중 앞에 섰습니다. 그는 천천히 다가서더니 루이 황제를 의미하는 큰 촛불을 껐습니다. 캄캄한 가운데 네 마디의 말이 들려 왔습니다.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다' (God only is great) 참으로 진리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위대함을 잠시 동안 소유하지만 죽음이 그것들을 끊어버리고 맙니다. 전능하신 그리스도 예수만이 세세토록 그 권세와 능력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사단의 손이 더 권세 있어 보입니다. 정치에서나, 실업계나, 스포츠계나, 사회의 모든 면에서 악한 자가 득세하는 것 같고 힘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어느날 최고의 권세가 되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 모든 악한 권세를 끝내실 때가 옵니다.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고 그 입으로 예수님은 주시라고 고백하며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릴 때가 옵니다. 영원히 권세있는 이름은 예수의 이름 뿐입니다.

2. 예수의 이름은 은혜로운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여러분을 위하여 천국의 모든 기쁨과 영광을 희생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늘 나라에서 영광 중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셨던 분입니다. 천사들과 천사장들이 그분의 명령에 분주히 뛰어 다녔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영광의 옷을 벗어버리고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고난 받으시고 죽어 주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령 어느 대통령이 그 높은 자리를 내어 놓고, 어느 빈민굴에 찾아와서 남은 생애를 그들을 위해 보냈다고 상상해 봅시다. 얼마나 위대한 일이며 온 세계가 놀랄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늘 영광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겸비와 희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었으나, 세상에서는 머리 둘 만한 집 한 칸도 없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잡술 만한 식탁 하나 없었습니다. 천국에서는 부요한 자 중에서도 가장 부요하신 분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자 중에 가장 가난한 분이 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높은 자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인데, 세상에서는 낮은 자 중에 가장 낮은 자가 되셨습니다. 천국에서는 위대한 분 중에 가장 위대하신 분인데 세상에서는 우리를 위해 종의 종이 되셨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나와 여러분을 사랑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이 도대체 웬 은혜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데 대해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천사들을 그 앞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인류가 다 범죄하여 멸망받을 상태에 있음을 설명하시고 누군가가 이 인간을 구원하러 세상에 내려가야 하는데, 단 한가지 조건은 죄가 없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국의 훌륭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서면서 인간을 구원하러 세상에 내려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나서면서 '아버지여, 제가 가겠습니다.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러 저를 내려보내 주십시오'라고 청원하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안된다 아브라함아! 너는 자격이 없다. 너는 세상에서 살 때 네 생활에 죄가 있었으므로 안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나섰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며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그가 말하기를 '아버지여, 저를 보내 주십시오. 세상의 죄를 위하여 내 피를 흘려 구원하겠습니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안된다. 모세야 내가 너를 천국으로 데려 왔으나 세상에서 너의 죄는 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단다. 너는 못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세상에서 많은 신령한 노래를 쓰고 불렀고, 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이 나타나서 '아버지여, 저를 보내 주십시오. 잃어버린 죄인들을 위해 제 생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청원하자, 하나님께서는 '안된다. 다윗, 너도 범죄했으므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앞에 나서서 '아버지여, 내가 세상 죄인들을 사랑합니다. 제가 세상에 내려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 생명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천국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천사들이 발칵 뒤집혀 그것을 반대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결코 가서는 안됩니다. 죄많은 인간을 위해 죽으러 가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얼굴을 응시하시고 나서 '예. 아버지, 제가 꼭 가야 합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을 줄 압니다.' 그러자 그때 하나님께서 동의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을 지나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며, 은혜입니까?
희생이란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 누구도 예수님만큼 고통받으신 분이 있습니까?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기 위해 예수님 뺨에 배은망덕의 입을 맞추었습니다. 악한 무리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더러운 침을 내뱉었습니다. 잔인 무도한 사람들이 뺨을 찰싹찰싹 때렸습니다. 채찍에 붙은 쇠붙이가 내려 칠 때마다 예수님의 등에 홈을 팠습니다. 예수님의 양 손과 발을 십자형틀에 못을 박을 때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입술이 타고 입안이 타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 만큼 희생의 고통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이 모든 고통이 바로 나와 여러분을 위함입니다. 누구도 이 만큼 우리에게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푸신 분이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실로 은혜로운 이름입니다.

3. 예수의 이름은 승리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승리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싸움에서 패배한 적이 없습니다. 사단이 세 가지 무서운 시험을 해왔을 때도 다 쳐서 물리쳤습니다. 사람들이 까다로운 문제를 가지고 말싸음을 걸어왔을 때도 언제나 이기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실 때 패배를 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구원을 완성하시고 많은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시고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승리의 이름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예수님께 굴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나 완전한 승리의 그날이 오면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끓고 모든 혀가 그가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거역한 모든 사람들도 때가 오면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질겁하여 놀라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승리의 이름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의지하고 끝까지 붙잡고 나아갈 때 우리 역시 끝내 승리하는 자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와 죽음을 이기셨기에 그 이름을 믿고 따르는 자들 역시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승리의 왕으로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 역시 승리의 대열에 설 수 있는 것입니다.

4. 예수의 이름은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마 1: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일러준대로 예수님의 이름은 인간으로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 1:12절에도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행 4:12절에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여러분의 선행을 불러 보십시오. 거기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선한 업적을 불러 보십시오. 거기에도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보십시오. 완전하며 충분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받은 구원과 영생과 천국,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받은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 감격하고 감사하여 무슨 말로 다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배를 타던 한 소년이 파선을 당하여 큰 널판지를 붙잡고 표류하다가 기절한 채 한 해변가에 밀려와 닿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아다가 병원에 눕혔습니다. 어느날 그 병원 목사님이 찾아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도리를 가르치려 하였으나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너 바다에 빠졌을 때 어떻게 되었지?' 하고 묻자 '저는 큰 널판지를 꽉 붙잡고 그것을 의지하고 있었더니 나를 그 해변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이 '바로 그거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널판지와 같아. 그 분은 네가 의지하기만 하면 영원히 구원을 주시는거야. 만일 네가 그렇게만 하면 예수께서 너를 맡아주시고 인생 항해를 안전하게 마친 다음, 마지막에 천국 항구에 데려다 주실거야'하고 설명했습니다.
20년 후에 그 목사님이 다른 병원에서 근무할 때였습니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한 선원에게 말씀 좀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 보았습니다. 그 침대에 가까이 가자 그 환자는 그 목사님을 알아보고 말하기를 '그 널판지가 나를 데려다 주지요. 목사님, 그 널판지가 데려다 주지요'해서 '그게 무슨 말이요?'라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20년 전에 한 소년이 배가 파선하여 널판지를 붙잡고 살아났을 때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라고 하시면서 바다에서 몸을 널판지에 맡기듯 하라고 하신 것 기억하십니까? 그후 20년 동안, 저는 그 널판지에 의지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생의 폭풍 가운데서도 저를 안전하게 데려다 주셨고 이제 마지막으로 천국의 항구로 데려가시려고 해요'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구원하시는 이름입니다. 그를 의지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결코 떨구시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금 그를 믿고 그 이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은 전능하셔서 당신을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당신을 맞으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실로 예수님의 이름은 권세 있는 이름, 은혜로운 이름, 승리의 이름, 구원하시는 이름입니다. 그 예수의 이름만 믿고 의지하며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나를 비우는 생활

[빌립보서 2장 5절~11절]
5절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절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절 -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절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절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절 -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절 -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예수의 마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까? 그것은 그 다음 6절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으신 분이지만 자기를 비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셔서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다는 뜻입니다.
원래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지만, 자기를 비우고 종처럼 낮아지신 그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진정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 원한다면 끊임없이 나를 비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마땅히 받을 수 있는 존경과 대접을 포기하고 날마다 나를 비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나를 비우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1. 권위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나를 비우는 생활의 첫째가, 내가 비록 권세를 가졌을지라도 마음을 비우고 권위의식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즉 권세를 가졌어도 권세를 갖지 않은 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신 가장 높은 권세를 가지신 분이지만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섬기는 생활의 본을 보이신 분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잔칫집에 가셔서 손님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시고 "너희들은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시면서 "만일에 상좌에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들어와서 주인이 자리 좀 비워달라고 해서 말석으로 내려 앉으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느냐? 그러니 차라리 너희는 말석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결론적으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도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자격을 가졌어도 그런 권위의식을 버리고 낮은 자리에 앉도록 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지만 권위의식을 버리며 자기를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거룩한 손으로 피조물인 인간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고 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사도 바울은 고전 9:18절에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리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나서 마땅히 쓸 수 있는 대접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받을 상급이 더 크다는 말씀입니다. 바울도 권세의식, 권위의식을 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의 존슨(Johnson)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기차를 타려고 줄을 서서 기차표를 사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대통령이었지만 그 권위의식을 싹 버리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기차표를 사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멋이 있는 분이다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전에 전도사 시절에 입석 캠프장에서 교역자 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느낀 것입니다. 당시 미국 유학도 하고 높이 존경받는 감독님이 점심 때가 되면 똑같이 줄을 서서 식판에다 점심을 들고 가서 전도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과연 다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음식도 같을 뿐 아니라, 타다 드린다 해도 사양하시고 굳이 당신 손으로 식판을 들어다가 잡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멋도 있고 맛도 있습니까?
반대로 어려서 시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새로 시집 온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식사가 거의 끝나 가는데도 얼른 가서 숭늉을 떠다 드리지 않는다고 화가 나서 숫갈을 집어 던지며 며느리를 구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옛날 어른들은 지나친 권위의식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며느리가 밥먹다 눈치채고 일어나더라도 '일어서지 마라. 내가 떠오마'라고 하며 일어나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이겠습니까? 권위의식을 버리고 낮게 처신하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또한 진정한 인격의 아름다움이라고 봅니다.
교회 안에서 전도사만 되도 '종, 종'하면서 '주의 종을 이렇게 대접하느냐'고 푸념한다면 진정 대접받는 교역자되기는 틀린 것입니다. 전도사가 되든 목사가 되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든 권위의식을 버리고 겸손히 섬기는 자세를 가져야 진정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막 10:44, 45)고 하셨습니다.
권위의식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비결입니다. 왕이라도 섬기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으면 훌륭한 왕이 될 수 없고, 장교라도 섬기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훌륭한 지휘관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처지에서든지 권위의식을 버리고 낮아지는 생활을 항상 힘쓰시기 바랍니다.

2. 소유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을 많이 소유했을지라도 많이 가졌다는 소유의식을 버리고, 있어도 없는 자같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과 물질의 관계는 배와 물과의 관계와 같습니다. 배는 물이 없이는 뜰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것이지만 물이 배안으로 전부 들어차게 되면 그 배는 침몰하고 맙니다.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면 즉시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퍼내버려야 합니다.
이와 같이 돈을 많이 벌고, 많이 소유하는 것은 좋지만 돈에 대한 자부심과 소유의식으로 마음이 꽉차버리면 그의 신앙과 인격은 침몰해 버리고 맙니다. 물질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이 소유의식을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물질은 사실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믿고 의지하고 소망을 두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고전 7:30, 31절에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고 했습니다. 물질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소유했다는 의식을 비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질이라는 것은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형제가 재산분배 문제로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찾아와 재산을 공평히 나누어 갖게 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핀잔을 주듯이 '이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근본 해결책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행·불이나 잘 살고 못하는 것이 물질을 많이 소유한 데에 달려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소유하느냐(to have)는 것보다 무엇이 되느냐(to be)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삶을 소유의 형태에서 존재의 형태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 청년은 그런 위대한 결단의 용기가 없어 고민하며 돌아가 결국엔 무의미한 생을 덧없이 살다가 죽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비우는 자가 참으로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재물을 많이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재물을 주셨기 때문에 소유한 것이므로 개인의 소유의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도 더욱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신 8:17, 18절에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우리는 무엇을 소유했다는 의식을 버리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3. 명예의식(선행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사람 앞에 칭찬듣는 것이 좋아서 구제할 때에는 나팔을 불며 자랑했고, 금식할 때에는 얼굴을 흉하게 하고 슬픈 기색을 띄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고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고 하시면서 '구제할 때에는 나팔도 불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것은 왼손이 모르게 하고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안하는 것처럼 하라 그래야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명예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명예 얻을 만한 일을 했어도 명예의식을 버려야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다.
벧전 4:11절에 "만일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 봉사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힘주시니까 하는 것이므로 우리 자신이 뽐낼 것도 없고 명예의식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행의식이나 명예의식은 아예 버려야 합니다.
어떤 청년이 하룻밤 철야 기도하고 나서 무디(Moody) 목사를 찾아와서 '선생님, 제 얼굴에 광채가 나지 않습니까? 지난 밤 철야 기도를 했는데요'하니까 무디 선생은 대답하기를 '모세는 40일 동안 하나님을 대면하여 금식기도를 하고 났을 때 그 얼굴에 빛이 나서 백성들이 얼굴을 가리우고 감히 쳐다보질 못했으나 모세 자신은 자기 얼굴에 광채가 나는지조차도 몰랐는데, 자네는 겨우 하룻밤 철야 기도하고 광채가 난다고 생각하는가?'하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겸손이 결핍되어 자아도취에 빠져 허황된 꿈속을 헤매다가 부끄러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선행의식, 명예의식을 버리고 겸손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사야 3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다가 하나님의 자비로 병고침을 받고 15년의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이때에 바벨론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많은 예물과 더불어 사절단을 보냈습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너무 기분이 좋고 우쭐해져서 그 사절단에게 궁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구경시키며 자랑했습니다. 금고, 무기고, 보물 창고 할 것 없이 다 들추어 내보였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은 노하셔서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보물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갈 것이라'고 선언하셨는데, 실제로 후에 그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체험이 많을수록 하나님께만 영광돌리고 자중하며 조심해야 되는데 히스기야는 그것을 못했습니다.
식물의 줄기가 무성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식물의 뿌리도 중요합니다. 줄기와 잎사귀는 햇빛을 잘 받아야 하지만 뿌리까지 뽑아서 햇빛을 보이면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숨은 뿌리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신앙생활에도 하나님만이 알고 남이 모르는 숨은 부분이 있어야 안전하고 튼튼한 법입니다. 견실한 신앙으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항상 나를 비우고 겸손해야 합니다. 권위의식을 버리고 무엇을 가졌다는 소유의식도 버리고 명예의식이나 칭찬의식도 버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중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겸손한 체하는 위선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중심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진심으로 나를 비우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더욱 사랑받는 자녀가 되도록 합시다.
할렐루야!

- 아 멘 -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 나눔과 섬김

[빌립보서 4장 14절~23절]
14절 -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절 -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절 -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절 -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절 -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절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절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절 -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절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물질적 후원으로 복음 전파에 참여했음을 칭찬하며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쓸 것을 풍성히 채우시기를 구합니다. 바울과 함께한 형제들,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의 인사를 전하고 주 예수의 은혜가 빌립보 성도의 심령에 있기를 기원합니다.

1. 헌신하는 열정 (14~20절)
성도는 어떤 모양으로든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자 그를 위해 기도하고 에바브로디도를 보내 물질로도 후원합니다. 이는 그의 고난에 참여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마게도냐 사역을 마치고 떠날 때 그를 후원한 교회는 빌립보 교회뿐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잠깐 사역하던 기간에도 그를 두 번이나 후원했습니다. 그들의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과 같았습니다. 답례로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채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물질을 드립니다.
* 묵상 질문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 사역을 어떻게 도왔나요?
* 적용 질문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 내가 드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떻게 헌신할 수 있을까요?

2. 문안 인사 (21~23절)
복음은 출신과 신분을 초월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자신과 함께 있는 형제들 및 성도들과 함께 빌립보 교회에 안부를 전합니다. 그 성도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이사의 집 사람들'이란 로마 황실과 연관된 이들을 뜻합니다. 이 서신이 기록된 당시에는 로마 황실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증거가 없기에, 이들은 로마 병사, 왕가의 일을 맡아 보던 노예 혹은 자유민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든 복음으로 인해 유대인, 이방인, 높은 사람, 비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성도로서 문안하고 있습니다. 서두에서 '은혜와 평강'을 빌었던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과 함께하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은혜로 끝납니다.
* 묵상 질문
'가이사의 집'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적용 질문
오늘 내가 안부를 물어야 할 성도,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요?

오늘의 기도
이름 없는 주님의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통해 오늘 제가 믿음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복음에 빚진 자로서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드려 헌신하게 하시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격려하고 사랑할 믿음의 지체들을 더해 주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감당할 힘을 주시기에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빌립보서 4장 8절~13절]
8절 -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절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절 -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절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절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은 무엇에든 참되고 경건하며 정결하고 사랑과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권합니다. 또 자신에게서 배우고 본 바를 행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합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고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1. 성도의 마음가짐 (8~9절)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성도는 명예롭고 덕이 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평강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첫째, 거룩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곧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받고 칭찬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슨 생각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그의 성품과 인생이 결정됩니다. 둘째, 거룩한 일을 행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것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성도를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본을 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갈 때 교회 공동체와 우리 삶에 하나님의 평강이 깃들게 됩니다. 평강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 묵상 질문
빌립보 성도가 바울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 적용 질문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기 위해 내가 버려야 할 생각과 행동은 무엇인가요?

2. 성도의 생활 태도 (10~13절)
성령 충만한 성도는 어떤 처지에 있어도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크게 기뻐합니다. 그들이 감옥에 있는 바울을 돕고자 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헌금을 보내 왔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물질적 도움을 언급한 것은 궁핍해서가 아닙니다. 그는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비천해져도 낙심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풍부할 때도 자만하지 않습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환경에서도 올바로 처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십자가를 감당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힘 주시는 주님 안에 있기만 하면 어떤 형편에 처해도 자족할 수 있습니다.
* 묵상 질문
문맥을 볼 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라는 말의 참뜻은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가난할 때와 부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의 모습은 각각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의 기도
삶의 탁월성은 지식과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서 나옴을 깨닫습니다. 말씀을 삶으로 살아 내며 모든 상황에 감사하고 자족할 때, 주님과 동행하는 참된 성도의 모습에 세상이 놀라고 감동할 것을 믿습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예수님 안에 있다면 한마음을 품으십시오

[빌립보서 4장 1절~7절]
1절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절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절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절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절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절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또 복음을 위해 함께 애쓰는 글레멘드와 동역자들을 도우라 합니다. 주께서 오실 날이 가까우니 항상 기뻐하고 관용하며,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하나님께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라 합니다.

1. 같은 마음을 품으라 (1~3절)
교회는 주권자이신 예수님 안에 굳게 서야 합니다.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는 신실한 자들의 '모임'으로, 교회는 처음부터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에게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되라고 권면합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분열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함께 힘썼던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갈등 관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같은 생각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이는 그들이 주 안에 있을 때, 주의 주권 아래 있음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또한 자신과 '멍에를 같이한' 누군가에게 그 두 여인이 화해하도록 돕고 다른 동역자들도 도우라고 말합니다. 그들 모두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어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은 그 복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 묵상 질문
바울은 성도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방법들을 제시하나요?
* 적용 질문
주변에 갈등 관계에 놓인 성도가 있나요? 그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2. 항상 기뻐하라 (4~7절)
참지도자는 성도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반응하도록 도와주면서 공동체를 세워 갑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갈등 해결을 위해 공동체에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제시합니다. 쳣째,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예수님이 마음 중심에 계시면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둘째, 서로 관용을 베풀라고 권면합니다. 주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사를 돌보심을 확신한다면, 세상일로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 묵상 질문
바울은 빌립보 성도의 영적 성장을 위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하나요?
* 적용 질문
요즘 염려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뢴 후에,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해 보세요.

오늘의 기도
다툼의 한가운데서도 관용과 기쁨의 본이 되길 원합니다.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인생의 어려움들을 주님께 기도로 내어놓습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을지라도 제 마음과 생각이 주님의 평안으로 다져지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하늘에 있는 우리의 시민권

[빌립보서 3장 12절~21절]
12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절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절 -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절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절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절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절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배경 이해하기]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소망 때문에 그는 감옥에 있으면서도 불안해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땅에 속한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고 하늘에 있는 것에 푯대를 두고 달려가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인 자랑거리와 관련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경고합니다. 먼저, 손할례당(문자적으로는 ‘절단한 자’라는 의미)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의식적인 행위만 중요시하면서 율법을 고수하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육체를 신뢰할 만한 일, 즉 출생, 신분, 학력, 율법적 완전함 등을 자랑거리로 삼아서도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도 모두 해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유익했던 것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삶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제는 매우 무가치한 것, 즉 배설물처럼 여긴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처럼 바울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지니고 살아간다고 선포합니다.

[인도자를 위한 본문 연구]
본문 연구 1: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12~16절)
3:1~11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육체를 신뢰하는 율법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그리고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가치관이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명에 대해 말합니다. 12절에 나오는 ‘디오코’(헬)라는 동사는 ‘~의 뒤를 따라간다’는 의미로, 목적지를 향해 빨리 달리는 경주자의 모습을 묘사합니다(고전 14:1; 딤전 6:11; 딤후 2:22). 이는 이제부터 바울이 자신을 사로잡으신(카텔렘프덴,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적극적으로 끊임없이 따라가는 길 위에 서게 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합니다. 그 길은 희생과 죽음의 십자가의 길인 동시에 부활과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아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지는, 즉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경주자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해 경주해야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부름의 상’을 얻기 위해 집중하고 매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푯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며(3:8~11),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약 1:12; 계 2:10).

본문 연구 2: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17~21절)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경고한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12절)라고 말하면서 반율법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경계합니다.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얻는다는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완전한 자들’이 되었으니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서 이 땅에서 좀 더 즐기고자 하는 욕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바울은 18절에서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합니다(물론 ‘율법주의자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일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하기에 이미 여러 번 경고했지만 지금 다시 ‘눈물을 흘리며’ 경고합니다. 즉, 땅의 일을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가고 있는 완전한 멸망의 길을 따라가지 말고(마 5:22; 벧후 2:4; 계 17:8, 11; 20:14; 21:8), 자신의 육욕을 신처럼 숭배하여 탐욕을 채우고 방종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갈 5:19~21),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롬 1:21~32; 엡 5:12).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하늘의 시민권’을 확신하고, 그들의 낮은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묵상 포인트]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는 성도가 바라보고 달려가야 할 삶의 푯대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시민권자인 성도는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고, 다시 오실 주 예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성화와 사명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1. 요즘 내 생각과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내 삶의 푯대가 하늘을 향했는지, 땅을 향했는지 돌아보고 함께 나누어 보세요.
지금 시대에 자주 듣는 단어들은 아마도 지식과 정보, 인터넷, 소통, 노령 사회, 재테크 등일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첨단기기’와 ‘재테크를 위한 고급 정보’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대부분의 정보들은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최신의 완벽한 정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정보일 가능성이 높고,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줄 방법이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당면하고 있는 삶의 문제에 지배당하거나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해결되지 않는 삶의 복잡한 문제 때문에 지쳐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들도 땅에 속한 것이며, 뒤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것, 뒤에 있는 것에 얽매이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내려놓고, 하늘의 상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합니다.

2. 내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확신하나요? 이 진리를 현실에서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세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늘의 시민권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시간은 짧지 않습니다. 오히려 길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보다는 이 땅에서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도 받아들이지만 이 땅에서도 여러 상황들과 타협하며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오늘 이 땅에서 즐거움을 누리고자 합니다. 많은 돈을 벌어 마음껏 쓰고, 온갖 쾌락을 즐기고, 높은 권력과 인기와 명예를 얻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살아 보지 못하고 죽으면 억울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늘의 시민권을 누리기 위해서 땅에 속한 것과 뒤에 있는 것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배설물처럼 여기라고 권면합니다. 이 권고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만이 하늘의 시민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방법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기도문]
세상에서 살되 땅의 것을 좇기보다 하늘 시민으로서 살아가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기다리는 복된 삶 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3장 12절~21절]
12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절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절 -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절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절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절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절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푯대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하며,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성도를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1. 부름의 상을 위하여 (12~16절)
믿음의 삶에 필요한 것은 바른 목표와 포기하지 않는 꾸준함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후 믿음의 경주를 시작한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쳤다고 고백합니다(딤후 4:7). 그가 승리한 비결을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이미 다 얻었다거나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계속해서 달렸습니다. 둘째, 과거에 유대인으로서 성취한 일과 교회를 핍박하며 지은 죄 등 '뒤에 있는 일'은 다 잊고, 앞서가시는 예수님만 보고 달렸습니다. 셋째, 정확한 푯대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실 상인 영생과 생명의 면류관만 바라보고 달렸습니다. 인생을 참되게 하는 일은 예수님이라는 푯대를 향해 끝까지 달리는 것입니다.
* 묵상 질문
믿음의 삶을 경주에 비유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내 삶의 푯대는 무엇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섬기는 일과 어떤 상관이 있나요?

2. 하늘에 있는 시민권 (17~21절)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땅에서의 삶이 어떠하든 천국 시민답게 살아갑니다.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자기처럼 십자가를 최우선으로 두라는 것입니다. 전통이나 세속적 가치를 복음보다 중시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사실 부끄러운 일에 불과하며, 그들은 자기 욕망을 신으로 섬기고 세상적인 것만 생각하다가 멸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자신이 하늘 시민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종말론적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재림의 주님은 세상 모든 것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썩을 몸을 그분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지만 성령을 의지하며 하늘의 적(籍)을 두고 사십시오.
* 묵상 질문
땅에 시민권을 둔 사람과 하늘에 시민권을 둔 사람의 생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 적용 질문
사람들은 내 삶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있나요? 내 믿음을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제 삶의 푯대가 과연 예수님이신지 깊이 돌아보며 인생의 방향을 재조정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속한 나라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임을 기억하며, 다시 오실 주님께 부끄럽지 않은 오늘을 살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십자가로 변화된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합니다

[빌립보서 3장 1절~11절]
1절 -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절 -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절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절 -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절 -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절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절 -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절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절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절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 -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면서, 성도는 성령으로 봉사하고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깁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참여하길 소원합니다.

1.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 (1~6절)
아무리 좋은 기독교 문화와 전통이라도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해석되고 평가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의를 자랑하게 하는 도구나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할례입니다. 일부 유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 복음보다 유대 전통인 할례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이방인들에게 강요해 복음 전도를 가로막았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단호하게 대처하며, 할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악을 행하고 몸만 상하게 하는 자들이니 그들을 조심하라고 합니다. 진정한 할례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해야 합니다(롬 2:29).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성령으로 교회에 봉사하게 되며, 오직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 자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바라봅니다.
* 묵상 질문
하나님이 유대 민족에게 할례를 명하신 원래 의도는 무엇인가요? (신 30:6 참조)
* 적용 질문
공동체의 미풍양속이라는 미명 아래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2.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7~11절)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와 부활은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후 자신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율법을 완벽히 지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은혜로 그를 '의롭다' 칭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의롭게 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얻고자 모든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깁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본받기 위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로 인해 주님과 함께 부활의 권능을 누리고자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는 복음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감당합니다.
* 묵상 질문
그리스도를 만난 후 바울이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 적용 질문
모두가 유익하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해 배설물처럼 여겨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십자가의 본질에 충실한 인생을 살도록 은혜를 부어 주소서. 배설물로 여기고 내버려야 할 것들을 분별하며 주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제 영혼을 채울 때, 모든 것을 차고 넘치게 더하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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