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유대교화 하려는 유혹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 3:1-3

 

빌립보 교회가 비록 신실하고 번창해가는 교회였다 할지라도 유대교화 하려는 교사들에 의해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행한 교훈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할' 것을 권고한다(1절). 우리가 신앙으로 위로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 신앙을 고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게 될수록 더욱더 우리는 주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달가운 것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주를 멀리하게 될 위험에서 벗어나야 한다.

(2)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거짓교사들을 조심할 것을 경계시킨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1,2절). 사역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친 것이 성도들에게 안전하고 유익된 것이라면 조금도 수고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때때로 똑같은 진리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항상 어떤 새로운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은 방종한 호기심이라고 하겠다. '개들을 삼가고'를 생각해 보자. '개들'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히 고백하는 자들에게 대해 악의를 가지며 그들을 향해 짖어대고 그들을 물어뜯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는 반대되는 선행을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할례받은 것으로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손할례당"이라 부른다.

(3) 바울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3절). 참된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육체 의식과는 반대로 영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 기독교는 신앙적인 예배의 모든 의무에 있어서 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믿음의 사역에 있어서는 마음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2)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이제 본체가 왔으므로 그림자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해야 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육체의 의식과 외적인 행위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 즉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자들이다. 우리의 자랑 뿐 아니라 우리의 신뢰 역시 그리스도 예수의 근거된 것이다.


Ⅱ.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함 3:4-8

 

바울 사도는 여기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자의 본으로써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하고 있다.

(1) 그는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새인으로서 자랑할만한 자이었음을 보여준다(4-6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도 더욱 그러하리니(4절). 바울은 어떤 유대인보다도 자랑할 것을 많이 가진 자였다. 다음 몇 가지를 들어보자.

  1) 그의 타고난 특권 : 그는 개종자가 아니었으며 순수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5절의 '이스라엘 족속이요'가 이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 즉 부모 대대로 모두가 이스라엘 사람이었으며 그의 조상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방인과 결혼한 사람이 없었다.

  2) 그는 그의 언약과의 관계로서도 자랑할 수가 있었다. 즉 그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던 것'이다.

  3) 그는 학식으로 자랑할 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양육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아들'이었다(행 23:6).

  4) 그는 흠 없는 생활을 한 자였다. 6절의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가 이것을 보여준다. 단순히 율법에 써있는 대로의 외적인 준수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는 결코 율법을 어긴 일이 없었으며 누구에게도 비난들을 만한 일을 하지 아니하였다.

  5)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가 이를 보여준다. 그는 비록 자신이 알지 못하고 열성을 내었던 것이었다 할지라도 매우 진지한 가운데서 행했던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은 그의 의를 세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다(7,8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7절). 이것은 "만일 그것들에 집착하게 됨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잃게 된다면 나는 내 자신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손실자로 여겼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어떤 것을 떠나라고 빌립보 성도들을 설득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자신이 떠나게 된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절).

  1) 바울은 후에 그가 무엇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서 곧 경험을 그리스도를 주로 알고 믿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 지식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실제적인 지식이었다. 그것은 가장 고상한 지식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는 자연에 관한 모든 지식과 진보된 인간의 모든 지혜를 능가하는 풍성하고도 탁월한 고상함이 있다.

  2) 바울은 그가 어떻게 유대인과 바리새인으로서의 그의 특권들을 포기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라는 그의 표현은 신성한 승리와 고상함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다 해로 여길뿐더러. 여기서 '무엇이든지 다'란 그가 앞서 말한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분명 자신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반문이 있을수도 있겠다. 즉 "그가 과연 계속해서 같은 마음을 지속했겠느냐"라는 질문이다. 이는 바울은 현재 시제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그는 8절의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라는 말씀이 보여주듯이 항상 그와 같이 행했음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신앙에 깊이 들어가게 된 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겪었으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특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는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겼을 뿐 아니라 배설물, 즉 개들에게 던져 주는 찌꺼기로 여겼다. 그것들은 그리스도보다 덜 가치있는 정도로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리스도와 비교 되어질때 바울에게 있어 가장 경멸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Ⅲ. 바울 자신의 선택의 문제를 서술함 3:9-16

 

바울이 붙잡은 것은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였다.

1. 그리스도를 붙잡음(9,10)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두었다.

  (1) 그는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다. 마치 상을 얻으려는 경주자처럼, 항구에 당도하려는 항해사처럼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고자 했다.

  (2) 그는 그 안에서 발견되고자 했다(9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가 없으면 망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를 위해 마련된 의가 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는 곧 "나의 외적 율법 준수와 선행이 나의 죄악들을 속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내가 가진 의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으로서 율법적인 의가 아니라 복음적인 의미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것, 즉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정하신 의다"라는 말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구원의 은혜를 가져다주기 위해 정해진 수단이다.

  (3)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10절). 여기서 그리스도를 안다함은 그를 믿는다는 말이다. 즉 이는 경험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의롭게 된 것만큼이나 자신의 성화된 것을 자랑하였다.

  (4)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했다.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죄에 대해 죽게 될 때 우리는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 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될 때 세상은 우리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2. 바울 사도는 만족함으로 자신의 마음을 하늘나라에 둠(11-16)

11절의 말씀이 이 같은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노니.

  (1) 하늘나라의 행복은 여기서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로 불리우고 있다. 즉 그는 이 부활을 얻고자 했다. 그때에는 불의한 자도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에 참예치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성도들의 기쁘고 영광스러운 부활은 권능에 의지한 부활로 불리우는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 부활은 진정한 부활이 되어질 것이지만 악한 자들의 부활은 단지 두 번째 사망으로 이어지기 위한 무덤에서 일어나는 부활일 뿐이다.

  (2) 바울 사도는 이 기쁜 부활에 대하여 크게 강조했다. 그는 마치 빌립보 성도들이 그것을 잃어버려 그것에 미치지 못하게 될 위험에 처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혹시 미치지 못하게 되지나 않나하는 거룩한 두려움은 인내하게 하는 가장 고상한 수단이다. 바울 사도는 결코 자기 자신의 공로를 통해서 그것을 얻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그것을 얻고자 했다.

   1) 그는 자신을 불로 안전한 시련의 상태 가운데 있는 것으로 여긴다. 12절의 말씀이 그것을 보여준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가노라.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은 현재 자기들의 상태가 불완전하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만일 바울이 온전함에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13절). 자기가 충분히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거의 은혜를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진실로 은혜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더 큰 은혜를 사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2) 바울 사도는 이러한 확신 가운데서 생활했다. 12절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12절). 그것은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있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으심으로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행복이 되며 구원이 된다. 또한 우리의 안전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붙잡음으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잡으심으로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는 계속해서 더욱더 많은 것을 잡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좇아갔다.

   3) 바울 사도의 목표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14절). 우리가 하늘나라에 더욱 적합한 사람으로 되어가면 되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그것을 향해 힘있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하늘나라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곧 그것은 우리가 모든 행위 가운데서 목표로 해야될 것이며 우리의 모든 수고에 대한 상급으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올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늘나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어지는 것이다. 즉 그의 손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의 길이 되신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늘나라를 우리의 집으로 얻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다음의 15절과 16절의 말씀을 권고해 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한 분으로 삼고 그 안에서 자기들의 마음을 저 세상에 두는데 일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지 해당되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같은 규례로 살며 같은 마음을 품도록 하자.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전부로 삼는다면 우리의 사는 것은 그리스도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사소한 문제에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서로서로 참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된 문제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이는 "너희는 서로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 모두가 지금 너희의 구심점이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너희의 집이 되는 하늘나라에서 곧 만나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이는 "너희가 견해를 달리하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너희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더 좋은 이해를 주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다. 이는 "너희가 이르게 된 곳에서 너희는 함께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며 또한 너희가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더나은 조명이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Ⅳ. 악한 자들에 대한 경계와 자신의 본을 따를 것을 권고함으로 글을 끝맺음 3:17-21

 

1. 악한 자들을 경계할 것을 권고함(18,19)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악한 교사들의 본을 따르지 말라고 조심시킨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18절). 이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불려지나 실상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는 그들의 고백보다 그들의 행함이 더 잘 증거해 준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경계의 말씀에 거의 유의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 말씀들을 반복해서 들을 필요가 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만일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말할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미 했던 말일지라도 다시 반복해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들인 자들의 특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그들의 신은 자기들의 배다. 그들은 육욕적인 욕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자들이다. 향락주의자들은 선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의식을 자기들의 욕망에 바친다.

   2)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에게 흠과 수치가 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긴다.

   3)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한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적하는 일을 행한다. 그들은 땅의 일을 사랑하며 그곳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것을 본받는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바울은 우리에게 그들의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4)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다. 그들의 걷는 길이 즐겁게 보일지 모르나 그들의 마침은 죽음과 지옥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길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 종국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2.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면함(17,20,21)

바울 사도는 자신과 자신의 형제들을 본으로서 제시한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17절). 바울은 20절에서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참작하여 자신을 설명한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가 이것을 보여 준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그들이 이 땅에 살고 있을 동안일지라도 그들의 시민권을 하늘에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의 집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집에 있으며 또한 그가 곧 가게 되기를 바라는 하늘나라에 있다. 그리스도와 교제를 가지는 자들과 교제를 가지며, 자신의 시민권을 하늘에 두고 있는 자들과 사귐을 갖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바울을 통해 제시된 하늘의 시민으로서의 우리의 기대는 이러하다.

  (1) 우리는 하늘로서 구원하시는 자를 기다린다. 20절 말씀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가 이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가 그곳으로부터 재림하실 것을 기대한다.

  (2)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우리는 그곳에서 복되고 영화롭게 되어질 것을 기대한다. 21절의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하시리라'가 이것을 보여준다. 한 영광이 성도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부활의 때에 받게 될 것이다. 우리의 몸은 가장 좋은 처지에 있을 때에라도 '낮은 몸' 즉 비천한 몸이다. 그러나 그 몸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21절) 되어진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능력에 의해서 부활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는 견고한 부활의 믿음을 가지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 사실을 확신케 해주는 성경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영화롭게 된 실례이듯이 우리의 부활도 또한 그렇게 되어질 것이다. 그때에는 구원자의 왕국의 모든 대적들은 완전히 정복되어질 것이다.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회고와 전진 (빌 3:13~14)  (0) 2015.01.21
빌립보서 4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2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1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4장 - study  (0) 2014.04.01

Ⅰ.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을 것2:1-11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권고한다.

1. 서로 사랑하라(1-4)

바울은 이것을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2절)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견해가 일치되건 일치되지 않건 사랑에 있어서는 하나가 될 수 있어야만 한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상호적인 사랑이어야만 한다. "사랑하라. 그러면 너희가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이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에 전원일치로 동의하는 것과 제각기 다양함 속에서도 "성령의 단일성"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1) 의무에 대해 간곡히 간청함 : 이러한 것들이 형제애를 가져다 준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1,2절).

   1)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로 : 그리스도 안에…무슨 위로가…있거든(12절). 이는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를 경험한 적이 있느냐? 그렇다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경험을 입증하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받기를 원하는가? 만일 우리가 실망하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만 한다.

   2) 사랑의 위로 : 이는 "만일 너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또한 하나님에 대한 너희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너희 형제들의 사랑 안에서 무슨 위로가 있거든, 너희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가르침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성령의 교제 : 이는 "만일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교제와 같은 것이 있다면, 그리고 성도들의 교제와 같은 것이 있다면, 너희는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말이다.

   4)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고 있는 긍휼이나 자비 : 즉 이는 "만일 너희가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구한다면 너희는 서로서로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다. 또다른 하나는 형제애가 사도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4절)가 이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사역자들의 기쁨이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로 이끌어주는 도구가 되어왔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너희에게 복음을 전파한 너희의 그 비천한 사역자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2) 형제애를 증진시키는 몇 가지 방법들

   1) 아무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3절). 그리스도는 모든 적대감을 멸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적대감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낮추시기 위해서 오셨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는 자만심이 없어야 할 것이다.

   2)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만 한다. 또한 우리 자신의 결점들에 대해서는 엄격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자비로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 가운데 있는 선보다 다른 사람들 가운데 있는 선을 더 낫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무가치성과 불완전성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3)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사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4절 말씀의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가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이기심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들과 같이 사랑하며, 그의 일을 우리 자신의 일과 같이 여길 수 있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5-1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5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으로 은혜를 입었다면 우리는 그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 그는 매우 겸손하셨는데 이러한 겸손은 특히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겸손해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과 죽음의 자리에까지 스스로를 낮추신 주 예수의 정신과 동일한 정신으로 행하여야 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 즉 신성과 인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1) 그의 신성 :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6절).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는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것에 대해 침해하고자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어떤 단순한 인간이나 혹은 단순한 피조물이 하나님과 동등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가장 파렴치한 침해 행위이다.

   2) 그의 인성 : 그는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7,8절) 나타나셨다. 그는 실제로 그리고 진실로 사람이었다. 그는 자원하여서 인성을 취하셨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였다. 우리는 우리가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 그는 인성이라고 하는 누더기로써 자신을 옷 입히기 위해 '자기를 비우셨다'. 이렇게 해서 비하와 높아짐이라고 하는 그의 두 가지 상태가 있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두 가지 상태 즉 비하와 높아짐에 대하여 살펴보자.

  1) 그의 비하 : 7절에 나타나는 '종의 형체'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사역자로 오셨고, 섬기는 자로서 그들 가운데 계셨다. 어떤 사람은 만일 주 예수께서 사람이 되시고자 하셨다면 왕자가 되셨어야만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반대로 그는 '종의 형체'로 오셨다. 그리고 추측컨대 자기 육친의 아버지와 함께 목수일을 하면서, 비천하게 성장하셨다. 그의 전 삶은 비하의 삶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낮은 비하의 단계는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 그는 고난 받으셨을 뿐 아니라 자원하여 복종하셨다. 그의 죽으심의 태도에는 하나의 강조점이 있다. 그것은 그 안에, 비천하다고 할 수 있을만한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십자가에 죽기까지'가 이것을 표현해 준다. 그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이며 자유인이 아닌 노예의 죽음이며 악인의 죽음이고 공중(公衆)의 구경거리로서의 죽음이었다.

   2) 그의 높아짐 :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9절). 그가 자신을 낮추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신 것이다. 그래서 '그를 지극히 높여'라고 했다. 하나님은 신성 뿐 아니라 인성까지 그의 전인격을 높이셨다. 그의 높아짐은 명예와 권세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9,10절). 모든 피조물은 그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 땅 아래 있는 자들'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다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의 이름에 모든 사람들이 엄숙한 경의를 표해야 한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11절). 그리스도의 왕국이 하늘과 땅, 그리고 그곳에 있는 피조물들, 또한 산 자 뿐 아니라 죽은 자에게까지 미치게 된다.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에게 어떤 경의가 드려지든 그것은 결국 아버지께 존귀를 돌려드리는 것이 된다.

 

Ⅱ. 근면할 것과 진지할 것을 권고함 2:12,13

 

(1)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행로에 있어서 근면할 것과 진지할 것을 권고한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는 말씀이 이것을 나타내 준다. 우리 영혼의 안녕을 든든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게 되든 우리는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에 눈을 돌리도록 해야겠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는 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는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고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이루라'는 말은 '철저하게 해내는 것'과 '참된 수고'를 의미한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구원에 관한 어떤 일을 행함으로써 그것을 이뤄야 할 뿐 아니라 이미 행해진 모든 것을 행함으로써, 그리고 그 안에서 끝까지 견딤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이뤄야 한다. 구원은 최고의 배려와 근면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 그것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즉 이는 매우 세심한 배려와 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를 악으로부터 매우 안전하게 보호하며 지켜주는 것이다.

(2) 바울은 그들의 구원을, 그들이 자진하여 복음에 순종하는 것으로 이루라고 촉구한다. 12절 말씀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들은 사도가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사도가 없을 때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지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13절) "너희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가 일하시니 너희도 일하라."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의 신실한 노력을 그의 은혜로 협력하시며 돕고자 하신다.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는 단순히 사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에 활기를 띠도록 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자. 이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으로 이루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그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행하시기 때문이다.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선한 것에 소원을 두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또한 그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도록 해주신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선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해서도 안 된다.

 

Ⅲ.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권고함 2:14-18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온전한 성품과 행위로써 그들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백이 돋보여지도록 할 것을 권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즐거이 복종함으로써 : 모든 일을 원망없이 하라(14절). 이는 "너희의 일을 행하되 그것으로 다툼이 없게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명령은 논쟁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복종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2) 서로 화평함과 사랑함으로써 : 모든 일을 시비가 없이 하라. 진리의 빛과 신앙의 생명은 종종 논쟁의 열기와 분위기 가운데서 상실되어진다.

(3)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흠이 없는 생활로써 :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하나님의 흠없는 자녀로 나타내며(15절). 우리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할 뿐 아니라, 그 혐의조차 조금도 받지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사람의 자녀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말이다. 흠없는. 우리는 하늘나라에 이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참된 신앙이 없는 곳에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것 밖에는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같이 생활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주의하여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빛들이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을 어느 장소에 세우시든 하나님은 그를 그곳에 빛으로 세우시는 것이다. 그들은 신실해야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빛을 발해야만 한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16절).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을 뿐 아니라 그것을 밝히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밝히되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해야하며, 또한 촛대가 촛불을 밝히듯이 해야한다. 나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함이라. 이는 "너희의 견고함 뿐 아니라 유용함을 자랑하려 함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했으며 자신의 수고도 헛되지 아니했을 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달음질은 열렬함과 강력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수고는 근면과 꾸준함을 나타낸다. 사역자들이 자기들이 '헛되이 달음질하지 아니하고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것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된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회개자들이 그들의 면류관이 될 그리스도의 날에는 그들의 기쁨일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들을 위해 기쁨으로 달렸고 수고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고난을 받았다. 17절의 말씀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는 하나님의 선택한 자들의 믿음을 돕기 위해 그들의 제단에 기꺼이 희생 제물이 되어질 수도 있었다. 바울이 교회를 섬기기 위해 자기의 피를 흘리는 것을 가치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과연 우리는 약간의 수고를 하는 것을 많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자기의 피로써 자신의 가르침을 증명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18절). 선한 그리스도인들이 넘치는 기쁨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선한 사역자들을 모시고 있는 자들은 그 사역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커다란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Ⅳ.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언급 2:19-30

 

1. 디모데에 대한 언급(19-24)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20절). 디모데는 바울이 원하는 적격자였다. 고매한 정신과 부드러운 마음에 있어서 디모데와 비교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의무가 그 방식에 있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되어질 때, 그것은 우리에게 최상이라고 하겠다. '자연스럽게'는 곧 '진실히'를 뜻하는 것으로서 외모로 하지 아니함을 말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사정을 돌보는 것과 그들의 안녕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사역자들의 의무이다. 그러한 일을 진실히 행하는 사람을 찾기란 드문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21절)라고 말하였다. 다윗이 '모든 사람은 거짓말하는 자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바울도 같은 의미로 말한 것이다. 그리고 21절의 '다'는 그것이 모두를 의미하든 대다수를 의미하던, 어쨌든 디모데와 비교했을 때 그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에서 사용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와 거룩함, 의무보다는 자신의 명성, 안일, 안전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22절). 디모데는 시험을 거친 자였으며 그에게 닥친 모든 일에 있어서 신실했던 자였다. 디모데와 교분이 있던 모든 교회들은 그의 연단을 알았다. 그는 명실상부한 선한 사람이었다.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그는 많은 곳에서 바울의 조력자였다. 그들의 동역은 디모데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존경으로, 또한 바울에게 있어서는 대단한 온유와 사랑으로 된 것이었다. 이는 동역하는 선후배 사역자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본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23절). 바울은 당시 죄수의 몸이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바울은 자신이 가기를 바랬다. 24절 말씀이 이것을 보여준다.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바울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익을 끼치기 위해서 자신이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다.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24절).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겸손히 복종하는 자세로 그들을 보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을 표현하고 있다.

2.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언급(25-30)

바울은 그를 '나의 형제와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25절)로 부른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가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그래서 바울은 기꺼이 그가 그렇게 하도록 했던 것이다.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성도들에게 가고자 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1)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26절에 보면 빌립보 교인들은 그가 병들었음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27절에는 그가 병든 것이 틀림없으며 거의 죽게까지 되었던 것을 기록해 주고 있다.

  (2) 빌립보 성도들이 그의 병든 소식을 듣고 매우 염려했기 때문이다. 빌립보 성도들은 에바브로디도를 특별히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또한 그를 사도로 택정하고 보내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3) 하나님께서 그를 회복시키시고 쉬도록 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27절에 '하나님이 저를 긍휼이 여기셨고'가 나온다. 바울 사도는 그것이 에바브로디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긍휼이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또한 그는 분명하게 근심이 크게 덜어진 것으로 여겼다. 27절의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가 이것을 보여준다. 이는 곧 '내 자신의 투옥이라는 근심에다 에바브로디도의 죽음이라는 근심을 더하지 않게 하셨느니라'를 뜻하는 것이다.

  (4)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성도들을 방문하기를 무척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병들었을 때 그를 위해 근심하였던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28절의 말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가 이것을 보여준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친구인 자신을 보게 함으로써 기꺼이 그들에게 위로의 기쁨을 주고자 했다. 29절의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는 말씀은 곧 "열심히 있고 신실한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그리고 그들에게 최상의 존경과 사랑을 베풀라"는 말씀이다. 에바브로디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에 병이 들었던것 같다. 30절의 말씀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가 이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바울 사도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빌립보 성도들이 그를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의 응답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4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3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1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4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3장 - study  (0) 2014.04.01


Ⅰ. 인사말과 축복 1:1,2

 

1. 이 서신을 기록한 사람들(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 가장 위대한 사도나 가장 탁월한 사역자들의 최고의 명예는 예수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즉 교회의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이다.

2. 이 서신을 받은 사람들(1)

  (1)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 바울은 사역자들보다 교회를 먼저 언급하고 있다. 이는 사역자들을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 사역자들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교회의 종들이기도 하다. 이 서신은 '모든 성도', 심지어는 가장 천한 사람들, 가장 가난한 사람들, 은사를 가장 적게 받은 사람들에게까지 모두에게 보내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전혀 차별을 두시지 않으신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그분 안에서 함께 만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성도'인 것이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성인들이라도 명백히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될 것이다.

  (2)감독들과 집사들. 감독들 혹은 장로들은 가르치는 일과 다스리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집사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본다거나 하나님의 집의 외적인 일을 보살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당시의 교회에 잘 알려진 직분들로서 신성하게 임명된 직분들이었다.

3. 사도의 축복(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모든 서신들에 있어서 이 인사말은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거의 같다. 우리는 형식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구태여 피해야 할 필요 또한 없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이고 선하신 뜻이며 모든 축복된 열매이자 그것의 결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나온 것이다. 은혜 없이는 평강이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내적인 평강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축복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서부터가 아니면 어떠한 은혜와 평강도 있을 수 없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은혜와 평강이란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Ⅱ. 빌립보 성도들로 인한 감사 1:3-6

 

사도는 계속해서 빌립보 성도들로 인한 감사를 말한다.

1. 바울이 그들을 기억함(3)

바울은 자주 그들을 생각하였다.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자주 그들을 생각했기에 자주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으며 그들에 관한 소식 듣기를 기뻐하였다. 다른 곳에 있는 친구의 안부를 듣는 것은 기쁜 일이다.

2. 기쁨으로 그들을 기억함(4)

바울은 빌립보에서 핍박을 받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는 기쁨으로 빌립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결코 그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자신이 고초를 겪었던 그곳에 대해 듣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의 고통을 기쁨으로 기억하였다.

3. 간구함으로 그들을 기억함(4)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항상 간구함은. 우리 친구들에 대한 최상의 기억은 은혜의 보좌에서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때를 정해 놓고 기도하였다.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에 대해 기도하는지를 다 아시지만 그래도 그는 우리가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간구하는 것을 용납하신다.

4. 그들에 대한 기쁜 기억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5,6)

감사는 기도 속에 항상 들어 있어야만 한다. 우리에게 위로가 된 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어야만 한다. 바울은 기쁨으로 간구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5절). 우리 하나님의 손에서 모든 자비로움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기도할 때 힘을 얻게 되며, 찬양할 때 마음이 넓어지게 된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3절). 바울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1)그는 그들로 인해서 가지게 된 위로 때문에 감사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5절). 복음에서의 교제는 선한 교제이다. 진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바로 그날부터 그 안에서 교제를 가진다. 중생한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진실로 중생한 사람이라면 바로 중생한 그 날부터 복음의 모든 약속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제까지, 처음에 잘 시작한 사람들이 시작할 때 얻은 것을 붙잡고 끝까지 간직할 때 그것은 사역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2)그들에 대해 가진 확신 때문에 감사했다(6절).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위로가 된다. 또한 우리는 기쁨 때문만이 아니라 소망 때문으로도 찬양을 드리게 되곤 한다. 바울은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6절). '너희 속에 착한 일'. 즉 세상에 기독교를 세우신 이가 세상 끝날까지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특정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었건 은혜의 사역의 분명한 성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은혜의 사역은 다음의 특징을 갖는다.

   ①은혜의 사역은 착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며, 하나님의 기쁨에 합당케 해준다.

   ②이 착한 일이 어디서 시작되었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이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므로 우리 스스로 그 일을 시작할 수 없다. 도대체 죽은 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생명을 일으키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③은혜의 사역은 오직 이생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생에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④만일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그 하나님께서 그 일을 수행하시거나 완성시키지 않으셨다면 그 일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은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⑤우리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신 사역을 완성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만 한다.

   ⑥은혜의 사역은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 이르를 때에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그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오실 때, 이 일은 완성되어질 것이다.

 

Ⅲ. 바울의 큰 사랑 1:7,8

 

다음의 사실에서 볼 때 바울이 그들에 대해서 뜨거운 사랑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7절).

(1)그의 마음에 그들이 있었던 이유는 이러하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즉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전해주었던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한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사역자들을 존경하게 만들어 준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된 것은 그들의 사역자들의 도움에 의하여서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것으로 "너희가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로서 나와 함께 수고와 고난에 동참하였다"를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동정과 관심을 가지고,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를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의 고난에 참예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그 짐을 함께 나누어진 그들은 상급에도 함께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가 매인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를 따랐으며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있어서도 그를 따랐기에 바울은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들은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복음을 변명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입장을 명백히 하고자 했다. 함께 고난을 받으면 서로 사랑하게 된다.

(2)그들이 그의 마음에 있었음은 다음의 사실에서 입증된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이 말씀에 의해서 그들이 그의 마음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는 그가 그들에 대해 좋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가장 좋게 생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일이다.

(3)바울은 이 사실의 진실됨을 하나님을 들어 증거하고 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8절). 사도는 자신의 마음에 그들이 있었기에 그들을 사모하였다. 그는 '그들로 인해 기뻐하였다(4절).' 이는 그가 그들에 대해서 보고 들은 선한 일들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재능있는 부유한 자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천하고 가난한 자들에까지 '그들 모두를 사모하였다.' 사모하되 '지극히 사모했다.' 또한 그들을 사모함에 있어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가지고 계셔서 귀한 영혼들에게 보이셨던 그 부드러운 관심을 쏟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리했다. 바울은 무슨 일에서나 그리스도의 추종자였다. 그러므로 모든 선한 사역자들도 그렇게 사랑하시고 동정하신 영혼들을 우리도 사랑하고 동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일에 대해 바울은 하나님을 들어 증거한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즉 "너희가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심령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Ⅳ.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기도 1:9-11

 

바울은 그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그는 종종 그의 친구들로 하여금 그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했는지를 알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스스로 간구해야 할 바를 알게 되었으며 바울이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소망으로 더욱 격려받을 수 있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기도를 드렸다.

(1)그들이 풍성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했다. 너희 사랑을…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9절). 은혜가 아주 풍성한 자들 일지라도 계속해서 점점 더 풍성해질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가장 성숙된 상태에 있을지라도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2)그들이 지식과 총명의 사람들이 되어지도록 기도했다.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지식과 확고한 판단이 없는 강한 열정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온전히 서지 못하게 할 것이며 때로는 유익보다는 해를 더 입게 할 것이다.

(3) 그들이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되어지도록 기도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10절) (혹은 난외주에 있는 것처럼 '같지 아니한 것을 시험하며'). 즉 지극히 선한 것을 시험을 통해 입증하며 다른 것들로부터 그것의 차이점을 분별해낸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진리들과 율법들은 지극히 선한 것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4) 그들이 정직하여 곧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도록 기도했다. 진실하여. 진실함은 우리의 복음의 완성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나타낼 때 우리는 진실할 수 있는 것이다.

(5)그들이 허물없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했다.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여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너희가 범죄할 성향을 지니지 말기를, 또한 하나님에게나 형제들에게 범죄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하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지막 날까지 계속 허물이 없어야 하겠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날에 그렇게 나타나게 될 것이다.

(6)그들이 유익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도록 기도했다(11절).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우리의 열매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열매를 위해서는 하나님께 간구해야만 한다. '가득하여'라는 말을 생각하여 보자. 의의 열매들을 맺음으로 너 자신이 비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 말라. 왜냐하면 그 열매들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열매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들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풍성한 열매로서 우리 자신의 영광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선한 일들로 풍성하게 될 때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많은 영광을 받으신다.

 

Ⅴ. 바울의 고난 당함이 그들을 실족케 하지 않도록 염려함 1:12-20

 

바울은 당시 로마에 수감 중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울의 사역에 의해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자기들도 그와 동일한 어려움에 처하게 되지나 않을까하여 이 가르침 받은 것을 겁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바울은 십자가로 인한 그들의 실족케 됨을 제거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겪은 어렵고 암담한 고난의 상황을 설명해 간다.

1. 복음의 대적자들에게 고난받음(12-14)

그는 복음을 대적하기로 서원한 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복음을 막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선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난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12절). 사도가 구속이라고 하는 아주 큰 악에서부터 복음의 진보라고 하는 아주 큰 선을 끌어낸 이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라고 하겠다.

  (1) 그것은 복음 밖에 있던 자들에게 복음을 알게 해주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13절). 바울의 고난은 그를 궁정에까지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일이 궁정에 있는 사람들 중 몇 사람으로 하여금, 바울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 그 복음이 무엇인가를 묻게 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결코 복음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매임이 시위대 안에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도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2) 그것은 복음 안에 있던 자들을 담대하게 해주었다. 그의 대적들은 그의 고난으로 놀랐으나 그의 친구들은 그의 고난으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14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울이 투옥된 것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에 기가 꺽이기는 커녕 그 일로 인해 더욱더 담대하게 되었다. 말일 강단에서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기꺼이 그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그들은 아주 좋은 동역자와 함께 있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바울이 고난 중에 가졌던 위로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란 자신들을 견디게 해줄 뿐 아니라 지지해주는 훌륭한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신뢰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낙담케 하고자 했던 적들의 의도는 오히려 전도되었고 그들은 담대함으로 나아갔다.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그들은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기에 오히려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2. 거짓 친구들로부터 고난받음(15-17)

바울은 대적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거짓 친구들로부터도 고난을 받았다(15,17절).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15절). 교회들 가운데 바울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를 모함으로 축출코자 했던 자들이 있었다.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줄로 생각하여(17절). 그러나 바울의 고난으로 인해서 더욱더 활기있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또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15,16절). 이와 같이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해주었다.

3. 고난 중에서 평안(18-20)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바울은 매우 평안하게 되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인간들의 행동 원리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 밖이다. 바울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한 자들을 시기하기는커녕 참으로가 아니라 외모로라도 복음을 전파한 자들의 그 복음 전파를 기뻐하였다.

  (1) 복음 전파는 인간 영원의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고로(19절).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실 수 있다. 투기와 분쟁과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 자들, 그렇게 해서 신실한 사역자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고자 한 자들의 받을 상급은 어떤 것일까? 또 참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 아니하고 외모로 한 자들은? 이러한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울은 그 안에서 또한 그의 구원에 이르렀다고 기뻐한 것이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19절). 사람들의 간구는 그들의 사역자들에게 성령의 도우심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전할 때 뿐만 아니라 고통 가운데 있을 때에도 그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2)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커다란 바램은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자기들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기를" 바란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혼의 능력 뿐 아니라 자기들 몸의 모든 지체를 가지고 기꺼이 그의 계획에 봉사코자 한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온전히 담대하여…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그리스도인들의 담대함은 그리스도의 존귀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자기들의 바램으로 삼는 자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기대와 소망으로 삼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진실로 추구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의 몸에서 존귀히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살든지 죽든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가운데 그를 존귀케하든, 아니면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 당하다가 죽게 됨으로 그를 존귀케 하든 어느 것으로든 그것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유용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Ⅵ.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바울의 자청 1:21-26

 

우리는 여기서 축복받은 바울의 생사관을 보게 된다. 그의 사는 것은 그리스도였다. 그래서 그는 죽는 것도 유익하게 여겼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특징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 삶의 종국이 되어져야만 한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고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죽는 것도 유익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세상적인 속세의 사람에게 있어서 커다란 손실로 간주된다. 그러나 선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유익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의 모든 악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최고의 선을 소유케 해준다. 어떤 사람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1절)는 이 바울의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를 온전히 알게 되는 것 외에는 얼마나 살지 혹은 언제 죽을지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다."

1. 두 선한 것 사이에 끼임(22-24)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22절). 즉 이것이 '그리스도일진대'라는 말이다. 바울은 만일 자신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진보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었다면 자신이 잘 수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한 그리스도인과 선한 사역자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한 그들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22,23절). 그것은 두 악한 것 사이에 끼인 것이 아니라 두 선한 것 사이에 끼인 것으로서 축복된 곤경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느냐 아니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느냐 하는 두 축복들 사이에서 곤경을 겪고 있었다.

  (1) 바울은 죽음을 동경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죽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그는 동경했던 것이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23절)이 이러한 사실을 잘 나타내 준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는 사실은 선한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을 바라게 만든다. 만일 죽음 없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리스도와 하늘의 가치를 아는 자들은 자신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있는 것이 더욱 좋다는 사실을 당연히 인정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된다면 죄와 유혹, 그리고 슬픔과 사망과는 영원히 작별하게 될 것이다.

  (2) 바울은 교회의 봉사를 위하여 이 세상에 다시 더 살기를 선택했다(24절). 다음 구절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바울의 갈등은 단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느냐 아니면 하늘에서 낙을 누리느냐 하는 사이에 있었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그는 오히려 반대와 역경이 많은 이 세상에 머물기를 택했다. 그리고 자신의 상급으로 인해 있게 될 만족은 잠시 덮어 두었다.

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25절).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를 매우 크게 확신했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최선의 것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무엇이든 최선의 것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을 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신해야만 한다. 사역자들은 무엇을 위해서 계속 있는 것인가. 이는 '우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 즉 우리 거룩함과 위로의 더 큰 진보와 위안을 위해서라고 하겠다. 우리의 '믿음과 믿음의 기쁨'을 증진시키는 것은 하늘로 가는 우리의 길을 대단히 크게 진보시켜준다. 믿음이 클수록 기쁨도 크다. 그리고 믿음과 기쁨이 클수록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로 또한 더욱 크게 진보되어 가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기쁨(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26절). 빌립보 성도들은 그를 보게 될 소망과 자기들 가운데서 그가 더욱 수고해 줄 것을 인하여 기뻐하였다. 우리의 모든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선한 사역자들로 인한 우리의 기쁨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기쁨이어야만 한다.

 

Ⅶ. 절도있는 생활과 변함없는 생활 1:27-30

 

1. 절도있는 생활을 권고함(27)

바울은 그들에게 절도있는 생활을 권고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절). 그리스도인은 모든 면에 있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는 자답게 살아야 한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할 때 우리의 신앙고백은 더욱 돋보여지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를 가보나 떠나 있으나 나는 너희의 일을 듣고자 한다." 우리의 신앙이 결코 우리의 사역자들의 손에 매여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역자들이 있으나 없으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가까이 계신다. 바울은 그들이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고 있는 것'을 듣고자 한다. 복음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것을 위하여 힘쓰게 된다. 복음에 대항하는 많은 반대자가 있다. 그래서 분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잠자다가 지옥에 가기도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에 갈 사람은 자기 주위를 살펴보고 부지런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통일과 의견의 일치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즉 제각기 힘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일심과 한 뜻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또한 확고부동한 태도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다.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신앙을 고백한 자가 마음의 정함이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물과 같이 불안정하게 요동한다면 이는 곧 신앙에 대한 모욕이다.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힘쓰는 자들은 그것에 견고히 서야만 한다.

2. 고난 중에서의 용기와 변치말 것을 권고함(28-30)

바울은 그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 것과 불변할 것을 권고한다.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28절). 우리는 어떤 반대에 직면하게 되든지 그것들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핍박은 '멸망의 빙거(憑據)'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은 멸망의 운명으로 정해진 자들이다. 그러나 핍박받는 것은 구원의 증표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분명한 증표인 것은 아니다. 많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고난을 받았던 것이 그 예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29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도 가치있는 선물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욕을 당하고 손해를 입되, 항상 순수한 순교자의 정신으로 그러한 것들에 임한다면 그것들은 우리에게 큰 선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즉 "내가 고난받는 것을 너희가 보았으며 또 내게서 이제 듣는 바와 같이 너희도 같은 태도로 고난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고난받는 것이 아니라 명분이 있는 것이며, 명분 뿐 아니라 정신이 담긴 것으로서 그 정신은 순교자를 만드는 것이다.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3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2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4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3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2장 - study  (0) 2014.02.19

# study
(1~9절)
결론적 충고 - 지금까지 빌립보 교회의 일반적인 교훈과 권면을 취급하였으나 여기서는 보다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일에 대해 권면한다. 좀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빌립보 교회의 불화의 원인이 된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시 하나가 될 것을 권면하고(1~3절), 한 걸음 더 나아가 몇 가지 확고한 덕을 세우라고 권면한 후(4~7절), 마지막으로 바울에게서 배운바 모든 덕목들을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라고 권고한다(8,9절).
[1절]
본절은 전(前) 단락의 결론 부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나 내용상 본 서신 전체의 총 결론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2절]
본절에 언급된 두 여인은 바울의 총애를 받던 동역자들로서 빌립보 교회 초기부터 복음 사역에 힘썼던 것 같다. 이들의 다툼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나 추측건대 교회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3절]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므로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에 동참했으며 또 빌립보 성도들을 도우라는 바울의 부탁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이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가리킨다. 글레멘드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의 어디에도 언급이 없으므로 알 수 없다. 로마의 유명한 감독 중에 같은 이름(A.D. 30~100)을 가진 사람이 있으나 동일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다.
[4절]
당시 빌립보 교회의 상황은 바울의 투옥과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 그리고 내부의 불화 등으로 인해 대체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러한 권면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오히려 자랑으로 알고 그로 인해 기뻐한다는 역설적 신앙을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고후 12:10).
[5절]
그리스도인은 불의를 행하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야 한다(고전 6: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의 관용은 참 행복의 본질적인 요소이며 기쁨의 원인이기도 하다. 바울은 이것을 주의 재림으로부터 얻는 위안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다. 즉 모든 약속이 성취될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기 때문에 성도들은 비록 박해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온유와 관대함을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엡 2: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6절]
기도와 간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요 의무이며, 인생의 당면한 문제들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이다(살전 517). 이 기도에는 감사가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 감사는 기도의 동기가 선함을 입증해 주며 동시에, 더 큰 축복을 받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해준다.
[7절]
하나님의 평강은 기도의 결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로 하나님과의 화해, 그의 은총에 참여함, 그와의 연합 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확연히 구별되는데 세상의 평화는 일시적이고 표면적이며 불안한 것인 반면 하나님의 평강은 영원하며 본질적이며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내거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8절]
믿는 자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책임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으로만 만족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책임 있는 행위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바울은 여기에서 대표적인 덕목들을 언급하고 있다. 참되며. 하나님의 공유적 속성이며(롬 3:4) 모든 믿는 자의 특징 중 하나이다. 경건하며. 바울 서신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말로(딛 2:2), 여기서는 그리스도인의 예법, 자중(自重)을 가리킨다. 옳으며. 곧고 바르다는 뜻이다. 정결하며. 도덕적으로 순결하며 죄 없는 것을 말한다. 사랑할 만하며.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며 상냥스럽다는 의미이다. 칭찬할 만하며.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흠이 없어 타인의 모범이 되는 것을 뜻한다. 덕. 타인에 대한 후덕함과 관대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성품을 가리킨다. 기림. 도덕적 영적으로 칭찬 받는 것을 의미한다.
[9절]
영적, 도덕적 교훈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만이 평강을 계속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10~23절)
사랑에 대한 감사와 문안 서신의 끝맺음에 앞서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 준 선물에 대해 심심한 감사를 표하고 있다(10~20절). 그것은 물질 그 자체보다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성도들의 지극한 사랑에 대한 감사였다. 그리고 난 후 문안과 축도(21~23절)로 본 서신을 끝맺고 있다.
[10절]
바울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온 선물에 대해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는데, 그 표현은 참으로 정중하고 고상하다.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한동안 바울에 대한 물질적 봉사가 끊어져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 대한 관심이나 돕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적절한 기회와 여건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1절]

바울은 자신이 비록 곤경 가운데 처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주된 관심사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적응하고 만족하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12절]

일체의 비결. 이것은 오로지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13절]

당시 스토아 철학은 인간의 고상한 능력을 신봉하여 철저한 극기를 통하여 스스로 만족스런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은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철저한 신앙 고백임과 동시에 강한 확신이었다.

[14절]

바울은 그들의 선물이 불필요한 것이어서 그것을 고맙게 여기지 않는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기 위하여 신중을 기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선물에 대해 감사하고 그 선물의 배후에 있는 고상한 정신을 더욱 귀중히 여기고 칭찬했다.

[15~16절]

바울은 초기에 보여 주었던 그들의 사랑을 상기하고 있다. 그가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 빌립보 교회 외에는 아무 교회도 선교비를 보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나머지 비용을 보충하기 위하여 노동을 하였던 것이다(살전 2:9; 살후 3:7, 8).

[17절]

바울에게 있어서 일차적인 관심은 빌립보 성도들의 선물이 아니라 그 선물 속에 나타나는 영적 열매였다(잠 11:25).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준다. 선물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유익에만 관심을 두지 말고 선물을 마련한 사람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감사하며 그를 위해 축복을 빌어 줄 수 있어야 한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자기의 주는 행위가 외식적인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며 또 자기의 주는 행위를 자랑의 도구로 삼아서도 안 된다<막 7:1~23, 외식에 대하여>.

[18절]

바울 사도는 선물을 보내 준 자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감사의 태도로 경의를 표하고 있다. 향기로운 제물 아벨(4:4)과 노아(창 8:21)의 경우처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꺼운 마음으로 받으시는 것을 말한다(히 13:16).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주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는 관점(마 25:40)에서 볼 때 바울의 이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19절]

본절은 빌립보 교인들이 풍족한 가운데서가 아니라 부족한 형편 가운데서도 바울의 사역을 물질로 도왔음을 암시해 준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막 12:41~44).

[22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가이사 집 사람이란 로마 제국의 각종 관공서에 고용된 관리들이나 노예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왜 특별히 언급되었는지 그 이유를 전혀 알 길이 없다. 다만 추측건대 이들은 본 서신 서두(1:13)에 언급된 바 있는 시위대에 속한 자들 중 개종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해설

결론적 충고 (1~9절)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3장의 분위기는 가시고, 다시 바울의 사랑과 기쁨의 대상인 빌립보 교인에게 그 초점이 모아지는 4장 전체의 주제는 2, 3장에 이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는 충고(1~3절), 기도와 감사 생활의 촉구(4~7절), 그리스도인의 대표적인 덕목 제시(8, 9절)등으로 대별된다. 이 결론적 충고의 가치는 비교적 논리성을 중요시하지 않은 이 짧은 서신의 결론부라는 사실을 넘어서 죽음이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 생의 마지막 충고라는 생각으로 이 말씀을 전달했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특히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해서도 4절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한 신앙의 위대성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롬 8:2~8).

감사와 문안 (10~23절)                                                                                             

본서의 종결부인 이 단락은 빌립보 성도들의 물질적 후원에 대한 감사(10~19절)와 문안 및 축도(21~23절)로 나누어진다. 특히 11~13절 사이에 언급된 바울의 물질과 관련된 생활 철학과 빌립보 교회의 원조에 대하여 단순한 감사를 넘어 이를 칭찬하고 축복한 사실에서 사도적 권위를 느낄 수 있다.

 

# 핵심

1~23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내부적 갈등을 해소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늘 관용과 평강을 잃지 말고 자신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실천하라고 권한다. 이어서 물질적으로 후원해 준 데 대한 감사와 문안 인사로 본서신을 마감한다.

 

# 묵상

믿는 자의 위로 (3절)

믿는 자는, 이미 믿음의 선조들이 하나님께 알려졌고, 그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 선포에 동참한 성도들은 자신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믿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에 동참해야 합니다.

성도들의 생활관(4~8절)

성도들은 주 안에서 기뻐하며,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며 감사함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이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켜 주십니다.

자족의 비결 (13절)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이는 모든 일에 있어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의 다른 명칭 (21~22절)

성경에서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마5:1), 그리스도의 형제(요 20:17), 하나님의 자녀 (요 1:12, 13), 하나님의 후사 (롬 8:17), 그리스도의 몸(엡 1:23), 그리스도의 신부(엡 5:23), 그리스도의 종(고전 7:22),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거룩한 나라(벧전 2:9)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2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1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3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2장 - study  (0) 2014.02.19
빌립보서 1장 - study  (0) 2013.12.30

# study
(1~21절)
이단에 대한 경고 - 지금까지 바울은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본서를 기술하여 왔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어조가 바뀌어 본서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따라서 혹자는 본서가 바울의 서로 다른 두 편지의 편집물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내용상의 일관성이 있기 때문에 그 견해는 신빙성이 없다.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도덕 폐기론자(쾌락주의)들을 경계하는 동시에 자신의 간증을 서술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부활의 산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권면한다. 한편 본문은 율법의 근본 정신은 사랑이며 이 정신을 외면한 채 율법의 외형적 준수에만 그치는 것은 은혜의 복음을 헛되게 하는 것이며(1~9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은혜에 준하는 윤리적 성결의 책임이 따른다는 점을 교훈해 준다(17~21절)<고후 서론, 은혜란 무엇인가?>.
[1절]
같은 말. 전에도 여러 번 언급한 이단에 대한 경고를 여기에 다시 언급한다는 말이다<요일 41~6, 이단의 정체>. 인간 본성의 완악함과 연약함을 생각할 때, 성도는 동일한 교훈일지라도 날마다 거듭 상기함으로써 말씀의 생활화를 도모해야 마땅할 것이다.
[2절]
개. 보통 경멸, 책망, 공포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신 23:18; 삼상 17:43; 삼상 24:14; 잠 26:11). 행악하는 자들.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순수한 교훈을 왜곡하려는 자들의 열정과 노력을 가르킨다. 손할례당. 할례의 근본 정신을 망각한 채 율법의 외형적 준행만이 구원의 절대 조건임을 고집하는 자들을 말한다.
[3절]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할례는 내적인 것으로 사실상 거듭남,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중생을 의미한다. 외적으로 할례 받은 유대인이든 그렇지 않은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오직 성령에 의하여 내적으로 변화받은 자만이 참 할례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4~6절]
바울의 배경-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을 반대하는 이유가 그들을 시기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은 그들이 유대인의 혈통과 관습을 자랑한다면 그 역시 똑같은 자격과 신분을 지니고 있음을 알림으로써 그가 이 특권을 소유하지 못해서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을 배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사실 율법적으로 드러난 바울의 외적인 조건과 신분은 조금도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갈 서론, 이신득의 이해>을 그는 이미 체험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유대적 우월 의식과 외형적 율법 준수로부터 과감하게 탈피할 수 있었다(갈 2:16; 갈 3:11).
[7~8절]
중생은 모든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환언하면 그리스도 중심의 가치 체계가 새로이 형성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거듭나기 전에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고 신뢰하던 세상적인 것들이 무가치하고 해로운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 체험을 하였다. 나아가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필수적으로 겪는 공통된 경험이다.
[9절]
본 구절은 '이신 칭의'에 관한 언급이다. 즉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의(義)는 율법의 준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롬 3:20~22). 다만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준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사의 결과요 열매이다<약 서론, 행함과 믿음>.
[10절]
바울은 부활의 권능을 체험을 통하여 알기를 원했다. 이 체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믿는 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신의 옛 삶을 죽이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연합함을 뜻한다(롬 6:4~11). 이 체험의 연속이 끊임없이 성장하는 성화(聖化)의 과정이다(21절; 롬 8:29; 고후 3:18).
[11절]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이는 의인과 죄인 모두 부활하는 둘째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믿는 자들만이 부활하는 첫째 부활을 의미한다(계 20:4~15).
[12절]
구원에는 소명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가 있으므로 회심(回心)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모두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특별히 이 부분을 언급하게 된 것은 아마도 빌립보 교인들 가운데 행위와 의식을 주장하는 유대주의에 반발하여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극단적인 완전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구원해 주신 목적을 계속 추구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자각시키고 있다.
[13절]
잊어버리고. 과거의 기억을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미래와 구원에 대한 관심을 빼앗아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14절]

푯대. 최종의 목표 지점을 의미한다. 특히 영적 경주에 있어서 이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구원의 완성을 말한다. 이 푯대와 상은 의미상 거의 동일하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자는 인간의 노력의 대상으로,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의 선물로 본 것이다.

[15절]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 완전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성숙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좇아가는 자이다. 만일 무슨 일에...나타내시리라. 설혹 성도들 중에 바울과 견해를 달리하는 자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을 열어 진리를 깨닫게 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시 25:14; 마 7:7; 눅 19:26).

[16절]

성도들의 신앙 수준은 다 같을 수 없으므로 자신의 신앙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든지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최선을 다해 영적 성장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히 6:11, 12).

[17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권면한 적이 있다. 이러한 권면은 자기를 추켜 세우는 교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의 생활과 신앙 자세를 본받으라는 말이다 이러한 신령한 자부심은 뭇성도들을 영적 진보로 매진케 하는 강한 지도력을 발휘케 한다.

[18절]

십자가의 원수. 이들이 누구를 의미하는지 바울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십자가의 은총을 무시한 유대주의자보다 뒤에 언급된 도덕 폐기론자로 보는 것이 좀더 바람직하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도덕 폐기론적 사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율법이 폐기되었으니 성도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는 모든 죄와 허물을 덮기에 충분하다며 죄를 합리화시키는 두 가지 사상이다.

[19절]

저희의 신은 배요. 이것은 육신적인 욕망에 빠져 절제하지 못하는 쾌락주의자들을 언급하는 말이다(롬 16:18; 고전 6:13; 유 1:11).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죄악 된 생활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기고 자랑하는 것은 도덕 폐기론자들의 특징이다(엡 5:12).

[20~21절]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땅은 나그네 길이요 잠깐 스쳐지나가는 노정에 불과하다(히 11:13; 벧전 2:11). 그러기 때문에 성도의 소망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가 세상에 미련과 소망을 두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추구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가 아니다(요일 2:15~17). 낮은 몸. 이것은 죄 짓기 쉬운 욕망, 죽음, 질병, 고난 등에 대해 무방비한 상태로 있는 육체를 말한다. 영광의 몸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때 부활할 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썩지 아니할 몸'이며 '신령한 몸'이다(고전 15:42~44).

 

# 해설

거짓 교훈에 대한 경고 (1~16절)

앞서 2장이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윤리적 자세를 강조했다면, 3장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지적, 영적, 사상적 재무장을 강조하고 있다. '종말로'라는 위기 의식을 담은 서두가 암시하듯 본장은 그 분위기가 이전과는(1, 2장) 달리 경직되어 있는바,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위협하는 두 사상, 즉 유대주의와 도덕 폐기론주의에 대해 자신의 간증을 들어 그 허구성과 무가치성을 폭로하는 한편, 푯대를 향하여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히 3:14) 잡고 신앙으로 계속 정진할 것을 촉구한다. 한편, 바울은 거짓된 가르침을 좇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사욕 때문임을 지적한다(딤후 4:3, 4).

두 인생의 종국(終局) (17~21절)

3장 전반부 내용(1~16절)의 결론 부분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와 거짓 교훈을 따르는 자들의 비교 대조를 위하여 바울은 땅과 하늘, 멸망과 영광 등을 대조시킨다. 여기의 다른 두 인생의 지위는 단순히 이 땅에서의 순간적 차이가 아니라 새 세상에서의 영원한 차이를 초래하는 엄청난 것이다.

 

# 핵심

1~21절

율법적 형식에 치중하는 율법주의자들과 육신의 쾌락을 좇는 도덕 폐기론자들을 경계하며, 위대한 천상의 소망을 가지고서 일로 매진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이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6절)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는데, 바울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다거나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는 당시의 랍비들에 의해 해석된 것과 같은 율법을 누구보다도 철저히 준수했음을 언급했을 뿐이다.

 

# 묵상

'이식득의' 진리 배경 (1~11절)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강하게 주장했던 이유는, 당시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유대의 율법주의자들, 즉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과거 율법주의자로 살았던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고백하여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고난과 부활에 동참해야 함을 알렸습니다.

바울의 이력 (4~6절)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자요,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의 교육을 받은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 교회를 핍박한 자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바울의 신앙 고백 (7~21절)

바울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 해로운 것으로,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다른 것들보다 가장 고상하며(고전 1:18~25),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신앙은 예수님을 직적 체험한 신앙이요, 위엣 것을 찾는 신앙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 (18~19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란 도덕 폐기론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율법의 멍에를 벗어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참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이요, 믿음으로 구속함을 얻는다는 은혜의 원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육체의 정욕대로 살고 부끄러워해야 할 짓을 서슴없이 행하며, 하늘의 일에는 관심이 없고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생은 결국 멸망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21절)

그리스도의 재림시 성도들의 몸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형체와 같이 변화됩니다. 죽은 성도는 부활을 통해서, 살아있는 성도는 들림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으로 변화를 입게 됩니다. 이 영광의 몸은 썩지 않는 신령한 몸입니다(고전 15:42~44).

 


출처 : 바이블25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1장 - 매튜헨리  (0) 2014.04.02
빌립보서 4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2장 - study  (0) 2014.02.19
빌립보서 1장 - study  (0) 2013.12.30
자족의 비결을 배우라 (빌 4:10~23)  (0) 2013.05.24

# study
(1~18절)
겸손과 성화의 삶 - 여기서 바울은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먼저 그는 성도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을 권면한다(1~4절). 이것은 빌립보 교회처럼 고난과 역경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는 더더욱 필요한 권면이다. 또한 그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내세워 성도들로 하여금 겸손히 섬기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을 권면한다(5~11절). 마지막으로 그는 모든 성도들이 자기 구원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을 권면하였다(12~18절).
[1절]
권면과 위로와 교제 그리고 긍휼과 자비는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에 적용되는 중요한 요소이며 원리들이다.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교회의 온전한 연합은 기대할 수 없다. 한편 여기서 '자비'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약한 자의 슬픔이나 아픔에 대해 동정하는 사랑을 말한다.
[3절]
<렘 43:2, 겸손과 교만>.
[4절]
자신의 권리와 의도와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기 중심주의는 동료들의 이익을 함께 생각하는 보다 넓은 사고 방식으로 바뀌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소홀해서는 안 된다(딤전 5:8). 여기서 바울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 속에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포용할 수 있는 관심과 사랑의 정신이다.
[5절]
본 구절을 문자 그대로 번역한다면 '너희 안에 이것을 품으라 이것(마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역시 있었던 것이다'가 된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며, 그분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관과 인생관을 정립시켜야 하며,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이 되어야 하고,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5~11절)
그리스도의 겸손 - 이 부분에 기록된 바울의 기독론은 '케노시스'(자기를 비우심)론이라고 일컬어지는바, 기독론이 그 중심 내용으로 되어 있는 골로새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논리가 정연하다(골 1:15~29).
[6절]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이것은 성육신하기 전 예수 그리스도의 본래 모습을 정의하는 말이다. 그는 태초부터 존재하고 계신 분(출 3:14; 요 1:1, 14)이다. 이는 본절의 '근본'이라는 원어가 '본래부터 생존하고 있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7절]
자기를 비어. 이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모든 신성을 버리거나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신성의 모습을 감추셨다는 뜻이다.
[9절]
그리스도의 승귀는 자기 비하의 열매요 결실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최상의 주권을 나타내는 '주'(2:11)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또한 이는 성도가 진정으로 존귀함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철저히 낮아져야 한다는 진리를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다.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더욱 낮아지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권위로만 성도들을 다스리면 결코 존경 받을 수 없다<겔 33:6, 종교 지도자의 책임>.

[10절]

하늘(천사들), 땅(현존하는 삶, 고전 15:40), 땅 아래(사탄의 무리 또는 죽은 자)의 세 부류는 창조된 인격체로서의 모든 피조물을 가리킨다(롬 8:18~25; 계 5:13).

[12절]

이것은 성화의 생활에 대한 권면이다.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사람이 스스로 이룰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자신의 영적 성장에 힘쓰고, 생활의 열매를 맺으며, 구원을 개인적으로 적용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약 서론, 행함과 믿음>.

[13절]

인간이 성화의 생활을 위해 애쓰고 또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가 되어 주시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성도는 구원뿐만 아니라 세세한 범사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15절]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이는 바울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까지 사탄의 세력은 끊임없이 활동할 것이기 때문이다(마 13:25이하). 따라서 성도는 죄악이 날뛰는 현실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다만 최선을 다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일에 주력해야 한다(마 5:13~16).

[17절]

제물과 봉사. '희생적 봉사'라는 의미이다. 관제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인데(민 15:1~10), 여기에는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바울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19~30절)

충성된 일꾼의 추천 - 바울은 자신의 장기간의 옥중 생활로 말미암아 빌립보 성도들이 영적 방황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자기 주위에 있던 동역자들에게 빌립보 방문을 요청했음이 틀림 없다. 그러나 본 구절이 암시하듯이 어느 누구도 그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이 누구인지 여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추측건대 이미 앞에서 언급한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한 자들(1:15, 17)이었을 것이다.

[22절]

디모데의 연단.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초기부터 10여 년 간 그의 동역자로 헌신해 오는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을 위해 당한 숱한 고난과 역경들을 가리킨다. 기독교 복음이 위대한 결실을 맺게 된 곳에는 으레 디모데와 같은 봉사자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 알 수 있다<행 8:1, 초대교회가 당한 박해>.

[23~24절]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파송하는 일을 연기하는 사유가 언급되고 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재판이 조만간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재판 결과에 대한 정확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하여 디모데의 파송을 연기하였다. 아울러 자신의 석방도 조만간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다.

[25절]

에바브로디도. 빌립보 태생으로 빌립보 교회의 존경 받는 지도자 중 하나였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헌금을 바울에게 전하였고(4:18), 로마에 머물면서 그를 섬기도록 위촉받은 자였다(2:30).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바울과 함께 수고한 동역자였으며, 고난도 함께 받은 충성된 자였다.

[27절]

나를 긍휼히 여기사...하셨느니라. 이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간구를 들으시고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낫게 하신 것을 의미한다<마 9:2, 중보 기도의 효력과 제한성>.
[30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는 사실(4:14~18)로 비추어 보아, 여기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이라는 말은 바울을 위한 개인적 조력의 결핍을 뜻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아마도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거나 개인적으로 그가 필요한 것을 도움으로써 이러한 빌립보 교인들의 부족을 대신 보충했을 것이다.

 

# 해설

겸손의 촉구 (1~11절)

본서의 특징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라 바울과 그의 개척 교회인 빌립보 성도들 간의 사적 교제와 교훈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심 주제는 결국 그리스도를 중심한 생활인바 지금껏 로마 감옥에 투옥된 자신의 심정을 피력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던 바울은 이제 그 시각을 돌려 먼저 2장 전체를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중 이 단락은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고 있다(잠 11:2). 성도 사이에서 서로 겸손할 것을 먼저 명령한 후(1~4절) 그 근거로서 예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버리고 죄 있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기까지 스스로 낮춤으로 구원을 이루셨음을 상기시킨다(5~11절).

성화(聖化) 촉구(12~18절)

예수께서 단번에 성취시킨 구원 사역에 대한 성도의 마땅한 응답으로서 점진적 성화를 촉구하는 부분이다(딤후 2:21). 특히 13절에서 바울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써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벧전 1:2).

충성스런 일꾼의 추천 (19~30절)

잠시 주제를 바꾸어 살아 생전 다시는 자신의 개척 교회인 빌립보 교회를 방문 못할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의 사역을 대신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그들의 모범적인 삶과 함께 소개하면서 그 교회의 일꾼들에게 사역을 분담하는 바울의 팀 사역(team ministry) 실례를 엿볼 수 있다(골 4:7~17).

 

# 핵심

1~18절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받아 피차 겸손하게 섬기는 가운데 구원을 완성해 가기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아울러 바울은 자신이 그 일에 솔선하여 모범을 보일 것을 다짐한다.

 

# 묵상

성도들의 교회 생활 (1~11절)

교회 생활에 있어서의 성도의 지침은 그리스도 안에서 권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며, 성령의 역사 안에서 교제하고, 긍휼과 자비로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화된 그리스도인의 삶 (12절)

성화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적극적인 삶을 추구하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활의 열매를 맺고 구원을 위해 말씀을 적용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는 사람이 스스로 이룰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루어가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관제의 의미 (17절)

관제란 히브리어로는 '나사크'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위에 포도주를 붓는 구약 시대의 의식을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리겠다는 의미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교인들의 성장을 위해서 자신의 피를 기쁘게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행 20:24).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 (20~22절)

디모데는 성실을 다해 바울과 뜻을 같이하여 빌립보 교인들을 생각했고, 자신의 일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디모데처럼 기도하는 일에 힘쓰며, 헌신하고, 인내하며 다른 사람들과 협조하여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전달하는 자들로 살아야 합니다.

에바브로디도의 인물됨 (25절)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영적인 삶을 함께 나눈 자요,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동참한 자요, 그리스도의 군사된 자이며, 빌립보 교회의 사자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빌립보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빌립보서 4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3장 - study  (0) 2014.04.01
빌립보서 1장 - study  (0) 2013.12.30
자족의 비결을 배우라 (빌 4:10~23)  (0) 2013.05.24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빌 4:1~9)  (0) 2013.05.24

# study
(1~11절)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 겸손, 기쁨 - 빌립보 교회로부터 사랑이 넘치는 선물을 받은 바울 사도가 화답의 의미로 기록한 본 서신은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형식으로 쓰였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주제가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간의 사랑의 '교제'이고, '겸손'에 대한 권면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넘쳐나는 '기쁨'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도, 그리고 빌립보 교회가 모두 한 몸이요 한 지체라는 하나의 주제로 귀결된다. 한편, 본문은 본 서신의 서론 부분으로 바울 사도의 일상적인 인사(1, 2절)와 감사와 간구의 기도(3~11절)로 이루어져 있으며,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도리어 성도들의 평안과 영적 진보를 희구하는 참다운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1~2절]
바울은 다른 모든 서신에서는 자신의 사도직<살후 서론, 서신서의 인사말과 사도권의 주장>을 밝혔으나 본서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빌립보 교회에는 아무도 바울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자들이 없었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성격이 강한 서신이므로 굳이 공적인 직분을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직분과 관련하여 밝힌 종이라는 말은 그의 몸과 마음을 모두 그리스도께 바쳤으며 이제는 온전히 그분만을 위해 봉사하는 자라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감독들과 집사들은 신약 시대의 지역 교회에 있었던 주요 직분이었다(딤전 3:1~13)<엡 4:11~12, 교회의 직분>.
(3~11절)
감사와 기도 -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제외한 다른 모든 서신서에서 감사와 간구의 기도로 시작한다(고전 1:4; 엡 1:15~16). 본 서신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감사(3~8절)와 간구(9~11절)로써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감사가 우리 생활의 습관이 되어야 하며, 모든 일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며, 이러한 감사는 의무이기 이전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한다는 귀한 영적 교훈을 준다<룻 서론, 감사의 요소와 의무>.
[3절]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회심과 소명, 그리스도를 위한 봉사의 경험 등에 관한 바울 자신의 독특한 신앙 체험을 상기시킨다(행 9:1~9). 모든 성도들 또한 엘리야의 하나님 혹은 바울의 하나님이 곧 자신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왕하 2:14).
[5절]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 이는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전도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빌립보 성도들은 주로 물질로 바울의 사역에 동창했다. 그들은 바울의 첫 방문 때부터(행 16:15)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그때까지 지속적으로 동참하였다(4:16; 고후 11:9). 여기서 빌립보 교회의 교제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바 그들의 교제는 복음을 촉진시키는 교제였으며, 자발적인 교제였고, 세상적인 교제와는 다른 성격의 교제이며, 일시적, 즉흥적이 아닌 지속적인 교제였다.
[6절]
하나님의 구원과 성도의 견인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구절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 이 말이 신약에서는 다소 변형된 모습으로 여섯 번 언급되어 있다(1:10; 2:16; 고전 1:8; 고전 5:5; 고후 1:14). 이것은 '주의 날'(살전 5:2)이나 '여호와의 날'(암 5:18~20)과 비슷한 표현이긴 하나, 구약의 표현은 심판에 강조를 두고 있는데 비하여 이 표현은 성도의 소망과 구원에 강조점을 둔 듯한 느낌을 준다<욜 서론, 여호와의 날>.
[7절]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하는 전인격을 일컫는 표현으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얼마나 진솔하게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9절]
사랑이 교회의 필수적 요소이긴 하지만 단순히 맹목적 열정의 표출이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영적 판단력과 도덕적 분별력을 겸비해야만 한다<요일 서론,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이해>.
[11절]
의의 열매. 이것은 율법에 형식적으로 복종할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맺어질때 산출되는 성령의 열매들이다(갈 5:22~23).
(12~30절)

바울의 소신 - 본문은 본론의 서두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바울의 투옥을 염려하는 빌립보 교인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하기 위하여 옥중 생활의 경험을 간증한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최대 소원은 복음의 확장이며 이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는 소신을 피력함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에게 더욱 담대하고 철저하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권면한다. 이러한 바울의 간증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각과 목표와 소원이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데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롬 14:7, 8).

[12~13절]

당시 로마에는 천 명을 단위로 한 아홉 개의 보병대로 구성된 궁정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임무 중의 하나가 죄수들을 감시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죄수들을 감시하였는데 그 감시 방법이 독특해 죄수와 간수를 같은 사슬에 묶어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2년간의 옥중 생활 동안 많은 간수들에게 복음을 증언할 수 있었을 것이다(행 28:20; 엡 6:20).

[14절]

형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그들 역시 핍박 가운데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데 바울로 말미암아 시위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문은 그들에게 큰 용기와 담대함을 주었을 것이다.

[15~18절]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 두 종류의 전도자가 뚜렷이 대별되어 언급되고 있다. 하나는 선한 목자이며 다른 하나는 투기와 분쟁을 일삼는 순수하지 못한 삯꾼 목자이다. 이 삯꾼 목자들은 비록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복음을 전했으나 복음의 내용만큼은 변질되지 않았던 것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울이 그들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19절]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감옥으로부터의 석방과 영적인 구원인데 여기서는 23절과 25절의 내용으로 보아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동시에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절]

본절은 재판의 마지막 결과를 기다리는 바울의 늠름한 모습을 보여 준다. 특히 온전히 담대하여라는 표현은 그가 하나님께 혹은 확신감 등을 나타내 주는 말이다. 만약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이처럼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용기 있는 증언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성도들의 삶에 동행하심으로 용기와 담대함을 주시고 있음을 보여 준다.

[21절]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된.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의 행동의 동기와 삶의 목표 그리고 힘의 근원이셨다(고후 4:10; 고후 5:15; 갈 2:20; 골 3:4).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죽음은 곧 그 연합의 완성을 의미하므로 유익일 수밖에 없었다.

[22절]

사람이 극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얼마만큼 그 생활이 계속될 것인지 또한 죽음으로라야 고통이 끝날 것인지 초조해 하게 되지만 바울은 이와 정반대로 생사의 문제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어느 쪽이든 유익이었기 때문이다.

[23~24절]

바울 개인적으로 볼 때는 죽는 것이 더 좋고 성도들 편에서 볼 때는 살아 있는 것이 더 유익이었다. 이와 같은 상반되는 가치 중에서 바울은 자신보다 성도들에게 좋은 방편을 선택했다. 죽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까지 오직 형제들의 유익을 위한 편만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바울에게서, 우리는 전적 헌신의 구체적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2:17).

[25절]

바울이 어떠한 연유에서 이러한 확신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추측건대 주위의 정황과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지상 사역의 과제에 근거한 개인적인 확신일 것이다.

[27절]

일심으로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을 뜻한다고 볼 수 있으나(엡 4:3), 이어서 나오는 '한 뜻'이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볼 때 언행 심사의 일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행 4:32).

[28절]

대적하는 자. 빌립보 교회의 대적자에 대해 바울은 일체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마도 빌립보 지방에 거주하던 소수의 유대인들과(행 17:5, 13) 이교도 등의 외부의 적이었던 것 같다. 빙거(憑據)의 보다 명확한 의미는 '명백한 사실에 토대한 증명'이다(고후 8:24). 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한 의도는 성도들이 핍박과 고난을 자기 신분 확인의 기회로 삼도록 하며, 의인과 악인의 최종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바 고난은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축복임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29절]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성도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성도들만이 누리는 축복이요 특권이다(약 1:3, 4; 벧전 1:6, 7).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고난은 신앙을 연단시키는 방편이며(욥 23:10)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하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히 13:12~15).

[30절]

바울이 빌립보에서 당한 고난에 대해서 빌립보 성도들은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잘 알 뿐만 아니라 현재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소식도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1:12; 2:26). 빌립보 교인들 역시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었으며 이 고난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싸움'에 동참하고 있었다<엡 6:10~20, 성도의 영적 전쟁>.

 

# 해설

문안인사 (1~2절)

수신자을 한 개인이 아니라 빌립보 전교회로 밝히고 있는 본문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엡 1:22; 골 1:18) 세 직분, 즉 감독들, 집사들, 성도들을 두었던 신약 교회의 전형(典型)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와 성도의 애정 어린 교제 (3~11절)

빌립보 교회를 개척했던 바울의 목자적 관심을 보여 주는 본문은 현재의 감옥 생활까지 지속된 그들과의 교제에 대한 감사(3~5절), 자신의 고난 참여의 확신(6, 7절), 영성을 위한 기도(8~11절) 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본문은 본 서신의 말미(4:14~18)에 언급되었듯이 빌립보 교인들이 선교 사역을 위한 헌금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지금까지도 계속 보내 준 감동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와 노사도 바울 간의 순수한 형제 사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시금석이며, 또 사랑은 말과 혀 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서로 동참하는 실천적인 것이어야 함을 잘 보여 준다(요일 2:10; 3:16, 18; 4:20).

신앙의 관용 (12~18절)

초대 교회 내에서도 현대 교회와 마찬가지로 분쟁과 파당이 있었다. 이는 불완전한 인간이 모인 곳에는 필연적으로 있는 현상이다. 본문은 이처럼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일부 교계 인사가 그를 비방한 사실에 대한 바울의 관용적 대응이다. 그들이 오해하고 비방하면서 바울에 대한 경쟁심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실은 개인적으로 보면 바울에 대한 인격 침해로서 바울이 분노해야 마땅하나, 바울은 그런 소아적(小我的) 차원을 넘어 자기를 비우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다.

신상의 용기와 소망 (19~26절)

앞 단락이 투옥된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에 대한 반응이라면 본문은 염려하는 자들에 대한 반응이다. 이러한 그의 고백은 죽으면 영광스런 최후의 상급을 받을 순교자요, 살면 사랑하는 성도에게 유익을 줄 선교 사역을 할 수 있다는, 생사를 초월한 신앙의 용기와 소망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24~26절에서 바울은 사도로서 지속적인 사역을 희망하면서도 만약의 경우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 기회를 이용하여 성도로서의 바른 자세를 다시 한번 교훈하고 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 (27~30절)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서 복음 사역에 대한 일체적 협력(27절), 담대한 신앙 고수(28절), 적극적인 고난 수용의 태도(29, 30절)등의 교훈은 그저 입으로만 내빝는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감옥에 갇힌 노사도의 절절한 음성이기에 더욱 큰 감화력을 갖는다.

 

# 핵심

1~11절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인사와 그들의 영적 성장 및 평안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위해 협력했던 빌립보 교회에 깊은 감사를 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써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한다.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자신의 곤경을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성도들의 안녕을 희구하는 바울의 차원 높은 신앙 인격을 보여 준다.

건강과 부의 복음 (29절)

하나님께 대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는 구약적 축복(건강과 부 등)을 받기도 한다(신 28장; 마 6:33). 그러나 육체적 건강과 물질적 부를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가르침이다. 때로 병들거나 가난한 자는 믿음이 적어서 그렇다는 식으로 비판받는데, 이런 가르침을 그럴싸한 영성으로 가려진 인본주의적 물질주의일 뿐이다. 눅 12:15, 21; 딤전 6:5~11, 17, 18절 등은 이런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 묵상

그리스도 예수의 종 (1절)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란 자신의 몸과 영을 그리스도에게 바쳐 그분만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헬라어로는 '둘로스'라고 합니다. 종이라 표현한 곳은 로마서 1:1절과 디도서 1:1절인데, 이 말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절대 소유물이며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성경 안의 복음의 표현 (5절)

성경에서는 복음을 진리의 말씀(엡 1:13), 십자가의 도(고전 1:18), 하나님의 비밀(엡 3:9), 생명의 말씀(빌 2:16), 천국 복음(마 24:14), 구원의 길(행 16:17), 아름다운 소식 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사 40:9).

바울의 생사관 (20~21절)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게 한다'라는 생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서는 죽음까지도 부사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믿음의 진보를 위해 전력을 쏟겠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삶은 죽음도, 고난도 그리스도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때 이 고난은 성도에게는 구원이요, 대적에게는 멸망임을 확신하고 좌절하지 말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 (27~28절)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아는 것에 그치지 말고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한 뜻으로 신앙을 위해 협력하고, 대적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고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을 연단시키며 결국에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겠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자족의 비결을 배우라

[빌립보서 4장 10절~23절]
10절 -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절 -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절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절 -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절 -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절 -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절 -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절 -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절 -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절 -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절 -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절 -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
23절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 주제별 목록 작성 
바울이 배운 일체의 비결
11절 :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함
12절 :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앎 /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 적절히 대처하고 모든 상황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능력을 소유함
13절 : 바울에게 능력 주시는 자로 말미암은 비결임 / 그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

* 도움말
1. 자족하다(11절) : ‘만족하다, 기쁘게 여기다’라는 뜻이다.
2.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14절) : 빌립보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바울에게 선교 헌금을 보내 준 일을 일컫는 말이다. 그 돈으로는 바울의 쓸 것을 돕고 에바브로디도 자신은 몸으로써 감옥에 있는 바울을 보살폈다.

* 말씀묵상
1. Message(메시지)
바울은 모든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2. 유일한 공급자이신 하나님
바울의 능력은 그에게 모든 능력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조건에 제한되고 상황에 매이는 사람은 우리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누리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그분의 공급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상황과 조건을 극복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우실 것이며(19절), 이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18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보다 우리의 행복을 더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3. 서로 문안하라
바울은 자신의 모든 교훈을 마치고 문안 인사를 건넵니다. 문안하는 일은 서로의 육체의 필요를 돌보기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문안”이란 말은 그저 “안녕하세요?”라고 묻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안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파조마이’는 기본적으로 ‘껴안다, 입 맞추다, 손을 내밀다’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좋아하다, 경의를 표하다, 동의하다, 열중하다, 환영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마음으로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의 가치를 인정하며 그의 문제점을 포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문안이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사람의 영육간의 상황을 파악하고 돌봐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바울은 모든 상황을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이 배웠던 일체의 비결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부조에 대해 어떻게 축복하고 있습니까?(17-19절)
* 깊은 묵상
1.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드리고 있습니까?
2. 당신이 문안하고 사정을 보살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 적용 기도
삶 속에서 주의 일을 함께 감당할 동역자, 교회, 가족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문안 받기만을 바라지 않고 먼저 기도하고 평안을 전하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소서.



제공:프리셉트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빌립보서 4장 1절~9절]
1절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절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절 -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4절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절 -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절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절 -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절 -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절 -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 주제별 목록 작성
바울의 권면
1절 : 주 안에 서라
2절 : 같은 마음을 품으라
3절 : 동역자들을 도우라
4절 : 항상 기뻐하라
5절 : 관용을 베풀어라
6절 :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간구하라
8절 :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정결한 것, 사랑받을 만한 것, 칭찬받을 만한 것, 덕이 될 것들을 생각하라
9절 :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 도움말
1. 무엇에든지 참되며…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8절) : 이 말은 영어의 가정법과는 달리 현재 사실의 반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 성도들 사이에는 관심을 가질 만한 참된 것, 경건한 것, 옳은 것, 칭찬할 만한 것, 덕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점만을 들추어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버리라는 교훈이다.

* 말씀묵상
1. Message(메시지)
사도 바울은 다툼과 논쟁 속에 휩싸여 있던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라는 권면을 합니다.

2. 한마음으로 도우라
바울은 분쟁과 분열이 교회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멸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한마음을 품고 서로 돕는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1-3절). 이 교훈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평안한 심령과 평안한 인간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7절). 이를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6절). 서로 분쟁함으로 마음에 기쁨이 없고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합니다. 기도만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해 주며, 기도만이 다른 사람들과 평안한 관계를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평안한 심령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의 능력을 약속해 주셨습니다(7절).

3. 서로를 인정하고 높이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또한 서로의 장점을 인정하는 사고 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고 말합니다. 서로의 단점들을 비판하고 서로 다투었던 나쁜 기억을 안고 살면 인간 관계를 회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먼저 나부터 좋은 면들을 생각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나눌 때는 상대방의 좋은 점들과 즐겁게 이야기할 만한 덕스러운 일들을 화제로 삼아 이야기하십시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한 권면을 정리해 보십시오(주제별 목록 작성 참조).
2.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1, 3, 8절)
* 깊은 묵상
1.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하는 사고방식과 당신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2.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임을 깨닫고 자신을 성별하여 헌신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 삶은 교회를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 적용 기도
저부터 먼저 행하는 믿음이 되기로 결단합니다. 제 말과 행동, 삶을 통해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워갈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


제공:프리셉트

부르심을 따라 달려가고 있습니까?

[빌립보서 3장 10절~21절]
10절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절 -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절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5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절 -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17절 -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18절 -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절 -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절 -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절 -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 주제별 목록 작성 
그리스도
10절 : 권능으로 부활하신 분 /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분
12절 : 바울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표를 잡고 계신 분
14절 :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는 길

* 도움말
1. 온전히 이루다(12절) : 본문에 쓰인 헬라어 ‘텔레이오오’는 직설법 수동태 완료형으로 ‘성취하다, 완벽하게 되다, 준비하다, 성별하다’ 등의 의미다. 이 단어의 형용사형인 ‘텔레이오스’는 ‘성화된’이라는 의미로서, 결론적으로 바울이 자신을 완전히 성화된 존재로 이해하지 않고, 아직도 신앙을 더욱 연마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성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단어다.
2. 배(19절) : ‘위장’, ‘내장’을 의미. 식욕을 비롯한 육신의 욕망이나 물질에 대한 탐욕.

* 말씀묵상
1. Message(메시지)
바울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자신의 신앙의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빌립보 성도들 역시 더욱 열심히 복음에 착념할 것을 권면합니다.

2. 구원을 이루는 삶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12절), “앞에 있는 것”(13절), “푯대, 부름의 상”(14절) 등은 모두 상급으로 이해될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위의 표현들은 “부활의 권능”(10절) 혹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11절)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으므로 부활, 곧 구원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바울의 궁극적인 목표가 ‘상급’이 아닌 ‘구원’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온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에 침투한 할례당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할례받은 자들을 오히려 구원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와의 관계보다는 객관적인 증거에 더 의존하였습니다. 이미 구원을 확보했으므로 이제 남은 일은 구원과는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릇된 구원의 확신으로 인해 영적 태만에 빠져있던 빌립보 성도들에게 구원을 얻은 자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3. 진정한 믿음
바울은 더 강한 신앙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율법주의자들의 믿음이, 실상은 거짓된 구원의 확신을 기반으로 하여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선언하고 성도들이 따라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라 신앙의 바른 모범을 보인 바울 자신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본받을 것을 권면합니다. 올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인생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있는 시민권을 갈망하며 자신을 내어 주는 삶을 삽니다. 그것이 참 믿음입니다.

[도움질문]
* 본문 관찰
1. 바울이 본받으려는 그리스도를 본문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10, 12, 14절)
2. 빌립보 교회에 침투한 할례당은 어떤 신앙적, 윤리적인 특징을 갖고 있습니까? 그들 신앙의 거짓된 표지는 무엇입니까?(18-19절)
* 깊은 묵상
1. 바울의 특징, 곧 신앙의 참된 표지는 무엇입니까?(12-14절)
2.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까? 영적 태만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 적용 기도
일상에 젖어 나태해진 영적교만과 게으름을 회개합니다. 주를 바라보며 달려갑니다. 새 힘을 허락하소서.



제공:프리셉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