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상황 속에서

[사도행전 26장 24절~32절]
24절 -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25절 -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26절 -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27절 -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28절 -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29절 -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30절 -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31절 -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32절 -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1.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설교하자 베스도가 바울에게 무엇이라고 소리칩니까?(24절)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바울이 황제(가이사)에게 상소했기 때문에 베스도는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바울을 황제에게 보낼 만한 뚜렷한 명분을 찾지 못해 고민했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보다 유대인의 사정을 더 잘 알고 있는 아그립바 왕을 통해 바울을 황제에게 호송해 갈 만한 결점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은 오히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베스도는 이런 상황을 제지하려고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은 담대하게 자신의 설교를 마무리하면서 믿음의 결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은 어떠한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아그립바 왕의 마음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믿음의 말과 행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2. 바울은 자신의 변호를 위해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합니까?(27~28절)
아그립바 왕을 전도하는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스스로 변호하도록 주어진 시간을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던 총독과 왕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어진 기회를 활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처지와 상관없이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베스도가 그 모습을 보고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다가 허점을 드러내면 그것을 빌미로 로마로 호송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베스도는 기가 차서 “네가 미쳤도다!” 하고 소리 지른 것이었습니다. 아그립바 왕 역시 바울의 설교와 믿음을 촉구하는 말을 듣고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바울의 설교를 전도 행위로 이해했음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환경과 상관 없이 전도했고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3.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선포한 바울의 소망은 무엇입니까?(29절)
아그립바 왕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아그립바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나와 같이 되기를’이란 표현은 자신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죄에서 자유를 얻은 자유인입니다. 바울은 육적으로는 매여 있는 몸이지만 영적으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이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육체의 자유가 아니라 영적인 자유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주변 사람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이런 마음이 바로 불신자를 향한 복음 전도자의 마음입니다. 그는 자신이 누리고 알게 된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시고 그것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4. 자기 변호의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던 바울처럼, 내게 주어진 기회를 나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은 위기를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그 기회를 활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위해 기회를 활용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 활용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전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안녕보다 하나님의 비전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인생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인생에 주어지는 수많은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바울은 자신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었을까요? 주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자신이 추구하던 모든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능욕을 당하고 목숨을 위협당해도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결과입니다.

5.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소망과 꿈은 무엇입니까?
꿈을 꾸는 것은 우리이지만 비전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삶에서 소망의 문을 여는 열쇠는 주님께 있습니다. 먼 곳으로 항해하는 배가 전혀 풍파를 만나지 않고 순탄하게만은 갈 수 없을 것입니다. 비전을 향해 가는 길이 험난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이 있기에 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인생길에는 언덕도 있고 시냇물도 있고 진흙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계시기에 고난 속에서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전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의 비전은 하나님의 비전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 증거가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기에 전도했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일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이루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것은 일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삶을 통해서 배우는 교훈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비전을 이루기까지

 
[사도행전 23장 1절~11절]
1절 -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절 -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절 - 바울이 이르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심판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절 -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절 -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절 -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7절 -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8절 -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절 - 크게 떠들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니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냐 하여
10절 - 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인을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 하니라
11절 -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 바울이 공회 앞에 서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1절, 22장 참조)
바울은 이단으로 고소당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이방인 구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목격한 유대인들은 무리를 충동해서 바울을 붙들어 죽이려고 시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방인의 구원을 말하는 바울의 증언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바울과 유대인들의 소문을 들은 로마 군대의 천부장 루시아가 군사들을 이끌고 사건의 전모를 밝히려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대인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천부장은 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 바울을 때려 자백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로마 시민임을 밝히며 재판도 받지 않고 매맞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다음 날 천부장은 유대인의 제사장들과 공회를 모아 바울을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 천부장은 바울로 인해 벌어진 이 소동의 원인을 알기 위해 바울을 제사장들과 대면시켰던 것입니다.

2. 자신이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바울이 강조한 이유는 무엇입니까?(6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주장하는 동시에 공회 안에 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논쟁을 일으키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향해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간의 견해가 달랐기 때문에 바울의 발언으로 그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무리가 둘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사후의 심판, 보상, 영혼의 불멸을 믿었고 영혼이 또 다른 몸과 합일하게 된다고 믿었던 반면, 사두개인은 음부에 대한 고대의 견해를 고집하면서 바리새인의 내세에 대한 교리를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바울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라는 바울의 말에 의해 자신들의 교리 문제를 놓고 분쟁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이에 천부장은 회의장에서 일어난 두 파간의 분쟁으로 바울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병사들에게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내로 들어가라”라고 명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 했으나 로마인인 천부장은 바울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바울은 제사장들과 공회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강조함으로 바리새인들의 지지를 유도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3. 유대인들의 위협을 받은 바울에게 주님이 밤에 나타나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11절)
담대하라고 격려하시면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 바울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었습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위축되어 있는 바울에게 주님은 나타나셔서 담대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그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복음 증거가 주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순종해서 움직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복음 증거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려 주셨기에, 바울은 그 누구도 그 어떤 어려움도 복음 증거를 방해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위로는 바울이 다음 2년 동안 로마에서 겪은 온갖 고통을 극복하고 인내하며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4. 복음을 전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거나, 장벽에 부딪힌 경험이 있습니까? 그때 어떻게 위기를 모면했는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바울은 주님의 뜻대로 복음을 전하다가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방인 구원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다른 유대인들로부터 위협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환경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가다가 문제에 부딪히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실현 가능한 것인가에 주목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쉽게 포기하고 맙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현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실현 가능한 일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떤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5. 바울이 로마를 품은 것과 같은 구체적인 비전이 자신에게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주님의 새로운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국의 중심인 로마로 들어가 그곳에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에 주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에 순종하고 한 걸음씩 나아갔습니다.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비전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삶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전으로 삼고 그분의 뜻대로 인생을 움직여 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뜻을 따라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비전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의 가장 큰 과제는 교회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세상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역사를 나타낼 때, 세상이 하나님께로 이끌릴 것입니다. 바울의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과 구별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삶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나를 본받으라!

[사도행전 20장 28절~38절]
28절 -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29절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절 -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31절 -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절 -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절 -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절 -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절 -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6절 -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37절 -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38절 -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1.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첫 번째 권면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28절)
바울은 첫 번째 권면으로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
*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향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삼가라’라는 말은 ‘주의를 집중하다, 유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자기와 양 떼를 위해 주의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성령이 너희를 감독자로 세웠다’라고 말했습니다. 감독자는 ‘돌아보는 자’라는 뜻으로, ‘장로’를 지칭합니다. 장로는 권세를 부리는 자가 아니라 교회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경각심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떠난 후에 에베소교회가 외적으로는 대적자들의 박해에 시달리게 되고, 내적으로는 배교의 세력으로 어려움에 빠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뜻하며, 또한 교회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통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실 만큼 ‘고귀한’ 것임을 뜻합니다.

2. 바울은 자신이 떠나게 되면 에베소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까?(29~30절)
바울은 두 가지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견했습니다. 첫째는, 흉악한 이리가 에베소교회에 들어와서 양 떼를 해칠 것이라는 예견입니다. 둘째는, 교회 내에서 자기를 쫓아내려고 어그러진 말을 해서 성도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견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떠난 후에 닥칠 일들에 대해 미리 말해 줌으로써 그것을 주의하라고 권면합니다. 먼저 자신이 떠난 후에 그들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흉악한 이리’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 반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들은 파수꾼처럼 늘 준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며 각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부탁했습니다. 바울 자신은 비록 떠나더라도 그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그들의 곁에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든든히 세우며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분의 피로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늘 거룩한 말씀으로 점검하고 악한 세력에 의해 죄에 물들게 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날마다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에베소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지막 권면의 말은 무엇입니까?(33~35절)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자는 은이나 금이나 의복과 같은 물질적인 보답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물질 문제에 대해서 권면했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과 동료들의 쓸 것을 벌었으며, 심지어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에게 자신의 본을 따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적절한 인용입니다. 바울은 종종 그의 윤리적 권면을 예수님의 말씀과 관련시켰으며 그분이 보여 주신 모범과 관련시켰습니다. 우리는 복음 증거보다 물질 문제에 관심을 두곤 합니다. 많은 사람이 먹고 입는 것을 믿음보다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의 권면을 통해 돈과 명예와 의식주 문제를 복음 증거의 사명보다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분명한 잘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 있게 ‘나를 본받으라’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습니까?

4. 나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양 떼를 어떤 태도와 자세로 섬기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양 떼를 돌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생활과 말과 행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양 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모든 양 떼를 돌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던 것처럼 우리도 맡은 양들을 세심하게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직분자로서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목자는 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라 돌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양 떼를 맡겨 주신 것은 목양을 위해서입니다. 양 떼를 위해 삼가는 것은 양 떼에게 주의를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 떼에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서는 먼저 양 떼를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듯이 주님이 맡기신 양 떼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는 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시간을 투자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려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5.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의 자비량 선교 원칙을 현대의 모든 사역자가 따르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 바울의 자비량 선교 원칙을 통해 그가 은과 금과 의복과 같은 세상의 가치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가치를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실제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습니다. 바울의 자비량 원칙은 물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복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 있는 관심은 물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사람은 물질적인 보답을 바라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수고의 보상을 바라기도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어떤 태도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혹시 세상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너희가 성령을 받았느냐?

[사도행전 19장 1절~12절]
1절 -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2절 -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절 -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4절 -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5절 -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6절 -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7절 - 모두 열두 사람쯤 되니라
8절 -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절 -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절 -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11절 -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절 -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2절)
바울은 성령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어떤 열두 명의 제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질문에 성령이 있음을 들은 적도 없으며 요한의 세례만을 받았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같은 대답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들은 바울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자신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요한의 세례란, 세례 요한이 요단 강에서 주던 물세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한 예비적 단계입니다. 이것은 메시아의 길을 평탄케 하고 사람들에게 메시아를 증거해 그분을 받아들일 준비를 시키던 세례 요한의 사역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요한의 세례는 성령세례를 예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세례 요한이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라고 선포했던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의 사역 특징을 정확히 정의하면서 세례 요한이 증거했던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합니다. 이와 같은 설명을 들은 열두 사람은 그제야 자신들의 믿음이 반쪽짜리였음을 알고 바울로부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2. 바울이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안수하자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6절)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습니다.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과 고넬료의 집에 모인 이들에게 임하셨을 때와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특별히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으로, 성령의 은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성령의 세례를 경험한 이들은 복음의 증거자로 변했습니다. 나아가 성령세례를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교회의 핵심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며 그리스도를 위해 새롭게 태어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3. 바울이 처음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두란노 서원으로 옮겨 복음을 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8~10절)
바울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공공연하게 비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약 3개월 동안 회당에서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방해로 인해 두란노 서원으로 장소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듣는 귀를 막고 복음을 거절하는 소극적인 단계에서 공적으로 복음을 비방하는 적극적인 단계로 발전합니다. 두란노 서원은 ‘두란노’라는 이름의 철학자가 철학을 강론하는 강의장이었거나, 그 이름을 가진 지주가 여행하는 철학자들에게 빌려 주었던 장소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곳을 빌려서 2년 동안 날마다 복음을 강론했습니다. 그 결과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복음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열고, 그들을 변화시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4.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세례를 받았습니까?
바울은 요한의 세례만을 알고 있는 에베소의 성도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받은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그의 삶과 마음에 영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면서도 성령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삶 속에 성령의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요한이 전한 오실 메시아를 믿었으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 속에는 성령이 거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성령에 관한 메시지는 진리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하반절)라고 전합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는가?”라는 질문은 “너희가 믿을 때 구원을 받았는가?”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나는 성령을 받은 후 어떤 성령의 은사를 체험했습니까?
하나님은 바울의 손으로 기적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바울은 병 고치는 능력과 악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행했습니다. 바울의 능력은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갈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이적이 나타난 것은 바울이 착용한 물건 자체에 어떤 신비한 효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들인 병자들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같은 능력을 바울을 통해 나타내신 것은 마술과 미신의 본거지인 에베소의 사람들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이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능력과 살아 계심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증거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을 통한 수많은 은사와 기적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귀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도 성령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와서 우리를 도우라!

[사도행전 16장 1절~15절]
1절 -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절 -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절 -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절 -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절 -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6절 -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절 -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절 -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절 -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절 -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절 -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절 -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절 -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절 - 두아디아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절 -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 바울은 실라와 함께 2차 선교 여행을 떠납니다. 그런데 루스드라에서 누가 동역자로 합세합니까?(1~3절)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와 함께 선교 활동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중 루스드라에서 새로운 동역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라는 사람입니다. 바울과 함께한 디모데는 어떤 인물일까요? 첫째, 디모데는 제자였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제자라는 말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잘 배워서 건전한 신앙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둘째, 디모데는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이것으로 그가 신앙 교육을 통해 자라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루스드라에서만 칭찬받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밖의 지역에서도 칭찬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2차 선교 여행을 할 때 그를 택해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헬라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고려해 그에게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그 후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 전반에 걸쳐 영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2.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성령님이 바울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6~9절)
바울은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심으로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로 가서 도울 것을 계시받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사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바울은 계속해서 아시아에서 사역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복음 전도는 사역자의 의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선교는 성령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선교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바울 일행을 인도하셨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 혹은 선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이성을 좇기 쉽습니다. 선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말은 선교의 방향과 목표 등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선교 장소 또한 하나님이 각자에게 맞는 곳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과만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이루는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선교의 시작뿐 아니라 모든 과정과 결과까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3. 바울은 어떤 환상을 보았습니까?(9~10절)
바울은 밤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바울에게 청하여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요청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드로아에 도착한 바울은 한 사건을 통해 새로운 사역지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는 환상을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새로운 사역지가 어디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환상의 내용은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바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과 교회 지도자들의 관심사인 아시아 복음화보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유럽의 복음 전파 사명이 더 크고 귀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묻어 버릴 수 있을 만큼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성공을 좇아서 성령의 음성을 무시했다면 복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때로는 눈앞에 보이는 성공을 포기하면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눈앞의 성공과 결과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이 어떠한 환경으로 인도하실지라도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4. 나는 하나님의 비전을 함께 이룰 디모데와 같은 동역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비전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동역해야 합니다. 아무리 탁월해도 혼자 일할 수는 없습니다. 연합해야 합니다. 동역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지도자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일을 독점하고 자기중심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달랐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인격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데 동역자를 세우고 함께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절대 혼자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서 배우는 중요한 지도력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연합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공동체의 팀워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부르셨지만 공동체 가운데 부르셨습니다. 하나 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내가 누구인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5. 나는 세상에서의 성공을 좇으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나에게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해야 할 일은 나의 의지와 경험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바울이 성공을 좇아 아시아 선교를 고집했다면 세계 복음화는 더욱 늦어졌을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기에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개인의 성공이나 욕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명자가 갖추어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세상의 역사 가운데 사라질 개인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 전해질 제자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가슴속에 숨겨 둔다면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세상 가운데 전하고 드러낸다면 많은 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한 영혼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의 귀한 뜻에 동참하십시오. 믿는 자의 가장 큰 열매는 영혼의 열매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믿음을 지킨 바나바와 사울


[사도행전 13장 1절~12절]
1절 -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2절 -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절 -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절 -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5절 -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6절 -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7절 -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8절 - 이 마술사 엘루마는 (이 이름을 번역하면 마술사라) 그들을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

9절 -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10절 -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이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11절 -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12절 - 이에 총독이 그렇게 된 것을 보고 믿으며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기니라

 

1. 하나님은 안디옥교회 선지자들과 교사들 중에서 누구를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까?(1~2절)
하나님은 안디옥교회 선지자와 교사들이 예배하고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을 통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고,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한 뒤 두 사람을 안수하고 파송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일꾼으로 두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을 ‘따로 세우라’고 하셨는데, 이는 ‘구별’, ‘성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맡기 위해서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한 것은 그동안 예루살렘교회 중심의 사역이 안디옥교회 중심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임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이방 선교를 위해 안디옥교회을 세우셨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세워진 지 1년밖에 안 된 교회였지만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따로 세우라는 주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결단이요 희생입니다. 비록 안디옥교회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는 복음의 빛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2. 바나바와 사울이 처음 도착해서 복음을 전한 곳은 어디입니까?(4~5절)
두 사람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로 갔다가, 거기서 배를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갔습니다. 그들은 구브로 섬의 살라미에 도착해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때 바나바의 생질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습니다. 그동안 사도행전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유다로, 그리고 사마리아로 전파되는 과정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 선교에 대해 보여 줍니다. 유대인을 향한 선교에서 이방인을 향한 선교로 변화된 것입니다. 복음의 불길은 이방인들에게도 번지게 됩니다. 이 일의 중심에는 성령이 계셨습니다.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파송하고 이방인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성령에 의해 세움을 입고, 교회에 의해 확증받는 복음 전도자의 사명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3.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할 때 누가 방해했습니까?(6~8절)
거짓 선지자 ‘바예수’라는 자가 하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방해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살라미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 섬의 로마 총독이었던 서기오 바울이 이들을 불러 복음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듣고자 할 때 방해자가 있었습니다. ‘바예수’라는 박수무당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거짓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총독이 바울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바울은 이 박수무당의 공격이 바로 사탄의 공격인 것을 알고 그의 눈을 어둡게 했습니다. 그것을 본 총독은 깊은 감명을 받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바예수에 대한 심판은 바울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개인적인 감정이나 분노로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바예수에 대한 심판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영적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에게 주님은 승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4.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손해를 감수할 수 있습니까?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은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세워진 지 1년밖에 안 됐기 때문에 보호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성령의 명령에 순종했고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때론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선교는 본질적으로 이타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 증거자로 부름 받은 우리도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존 파이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후에 유명 인사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업적과 평판에 집착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제단 위에 우리의 삶을 바칠 수도 있다. 전자가 세상의 눈 때문에 생을 탕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우리의 유산을 창조주께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삶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의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5. 복음을 전하다가 사탄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 바울이 성령의 능력으로 마술사를 제압하는 것, 곧 복음이 마술을 누르고 승리하는 극적인 대결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탄은 끈질기게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거나 물러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사탄의 방해에도 주님의 복음은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이 영적 전쟁에 대해서 무지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들이 영적 전쟁을 하고 있음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깨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 있어서 우리의 궁극적인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실 때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성경 말씀을 인용해 사탄을 대적하는 것은 사탄을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환난 중에 탄생한 교회

[사도행전 11장 19절~30절]
19절 -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절 -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절 -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절 -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절 -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24절 -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25절 -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절 -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절 -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절 -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절 -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절 -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1. 스데반의 순교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합니까?(19절)
스데반의 순교 후 환난으로 사람들은 흩어졌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인해 시작된 환난은 성도들로 하여금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환난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방인 교회는 하나님의 주권, 통치, 그리고 하나님의 뜻 아래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함으로 환난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환난을 피해 각지로 흩어진 가운데서도 복음 증거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복음의 진보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인생에서 환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난을 겪으면 신앙적으로 퇴보하고 좌절합니다. 그러나 환난 중에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최선을 다해 사명을 감당하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성장합니다. 복음은 고통과 역경 속에서 전파되고 확장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고통을 통해서 성장하고 부흥합니다.

2.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의 소식을 듣고 누구를 파송합니까?(22~24절)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안디옥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기로 결정합니다. 바나바는 지금으로 말하면 평신도 선교사였습니다. 우리는 바나바를 통해서 지도자의 특징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먼저 훌륭한 성품, 훌륭한 인격을 갖추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소양은 인격과 믿음과 성령의 충만입니다. 지도자는 영적으로 탁월함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중에서 한 가지만 강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훌륭한 인격과 훌륭한 영성을 조화롭게 갖추어야 합니다. 바나바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바나바와 같이 인격과 영성을 갖춘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교회는 성장합니다.

3. 흉년에 관한 선지자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안디옥 성도들은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27~30절)
가뭄의 예언을 들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각각 자신의 형편에 맞게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교회를 돕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교회를 위해서 구제 헌금을 했는데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유대에 살고 있는 형제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의 손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성도들 간에 서로 도우면서 사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입니다. 이방 교회들도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위해 그 형편대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헌금의 기본적인 원리를 깨닫습니다. 능력에 닿지 않는 무리한 헌금이 아니라 자신의 수준에 맞는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려울 때 헌금을 했습니다. 사람은 어려운 시기를 겪을 때에 자신을 주목하고 문제를 주목합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제에서 벗어나 주변을 돌아볼 때 풍성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4. 나는 환난 중에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스데반의 순교가 복음의 확장을 이루었던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환난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환난이 축복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확신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스데반의 순교로 흩어진 성도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환난을 축복으로 바꿔 주십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어떤 어려움에도 좌절되거나 포기될 수 없습니다. 나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 가져야 할 믿음은 하나님의 비전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과 이 비전을 하나님이 이루시리라는 것입니다.

5. 나는 안디옥 성도들처럼 어려운 시기에도 주변 사람들을 돌보는 마음이 있습니까?
안디옥교회 성도들의 구제 활동을 통해 몇 가지 헌금의 법칙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구제헌금을 할 때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했습니다. 둘째, 헌금을 개별적으로 하지 않고 모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더 큰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재난이 발생했을 때 모아서 도우면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또한 헌금을 모으면 모두가 동참할 수 있습니다. 셋째,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교회의 연합입니다. 안디옥교회는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질서를 지켰습니다. 거둔 헌금을 예루살렘으로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스스로 취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질서와 권위에 순종했습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새로운 부르심

[사도행전 9장 1절~9절]
1절 -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절 -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절 -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4절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절 -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6절 -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절 -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8절 -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절 -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1.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은 무엇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았습니까?(1~2절)
사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요 바리새인으로 기독교인을 박해하고 감옥에 가두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사울은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을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다메섹까지 내려가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려 했습니다. 사울은 메시아의 오심에 관한 이스라엘의 소망이 완전히 실현되기를 고대했지만 모세를 통해 주어진 계시에만 만족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흉악한 죄인에게만 주어진 십자가형에 처해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고, 성전 모독과 국가 반역의 음모로 처형된 예수님을 좇는 무리를 이단이라고 생각해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의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열심은 그의 인생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를 전하는 그릇으로 삼기 위해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눈이 어둡고 귀가 멀어 있는 연약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진리를 보여 주십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자신의 할일과 받은 사명, 그리고 가야 할 길을 알게 됩니다.

2.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길에서 어떤 일을 경험했으며, 누구를 만났습니까?(3~7절)
대제사장의 공문을 갖고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빛과 음성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것이 거듭나는 영적 재탄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의 교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빛이 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사울은 너무 놀라 쓰러졌습니다. 사울은 빛을 보았고 음성을 들었지만, 같이 있던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소리만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말씀을 들은 사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볼 수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검이 사울의 몸과 혼과 골수와 심령을 찔러 쪼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습니다. 자신의 경험, 지식, 신앙관, 세계관 등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참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바뀌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인생의 참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더 이상 허망한 것들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인생이 변화될 것입니다.

3. 예수님을 만난 뒤, 사울에게 어떤 현상이 나타났습니까?(8~9절)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끌려 다메섹으로 왔으나 3일 동안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다메섹에서 빛을 보고 눈이 멀게 된 사울에게 예수님은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에게 몸과 마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이 밀려 왔습니다.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사울은 볼 수도 걸을 수도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현상은 3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성경에서 ‘3’이란 완전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사울에게 3일 동안 죽음과 같은 내려놓음의 과정을 갖게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처형되고 장사된 후 3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사울은 바울이 되기 전 3일 동안 완전히 낮아진 죽음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메시아로 모시며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모시고 있습니까?

4. 나에게 있어 다메섹 체험은 어떤 것입니까?
사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인생을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관과 지식은 그의 삶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하고 있다’라고 한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는지에 대해 날마다 점검해 봐야 합니다. 혹시 사울처럼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진리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인생에 있어서 참된 가치와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는 명분은 있으나, 실제 삶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좇는다면, 열심히 다메섹으로 달려가는 사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그에게 빛으로 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우리도 걸음을 멈추고 예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5. 나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어떻게 변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후의 나의 모습을 살피고, 그 변화를 이야기해 봅시다.
대제사장의 공문까지 받아 그리스도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사울은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핍박하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의 인생에도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목격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순간, 지금까지 추구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실 때 사울처럼 회심하고 주님께 인생을 온전히 위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던 그가 예수님 때문에 핍박당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혹시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예수님께 나가는 자는 인생의 참된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출처 : 생명의 삶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

[사도행전 6장 1절~15절]
1절 -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2절 -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3절 -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절 -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5절 -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절 -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7절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헏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8절 -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9절 -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10절 -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11절 -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절 -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절 -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14절 -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15절 -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1. 사도들의 활발한 전도 활동으로 교회가 부흥했지만, 교회 안에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갈등의 원인은 무엇입니까?(1절)
초대교회의 갈등은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사이의 구제 문제로 인해서 생겨났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은 본래 유대인이었으나 각처에 흩어져 살게 된 이후 이방 세계에서 출생한 재외 교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대개 헬라어를 사용하며 헬라 문화에 젖어 살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제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며, 모국어보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입니다. 한편 히브리파 유대인은 헬라파 유대인과 달리 팔레스타인에서 출생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보수적이고 전통적 성향이 강합니다. 또한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편협한 태도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이들은 한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언어와 문화가 달랐습니다. 보수적인 히브리인들은 모세의 율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고수했습니다. 반면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들은 보다 넓은 문화와 접촉했고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차이는 분열과 갈등을 유발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매일의 구제 대상에서 헬라파 과부들이 제외된다고 불평했습니다. 이제 막 세워진 교회에 구제라는 예민한 문제가 분열의 씨앗으로 뿌려진 것입니다.


2. 사도들은 어떤 이유로 일곱 집사를 세우게 됩니까?(2~4절)
말씀과 가르침에 충실해야 할 사도들이 교회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면서, 말씀과 기도에 소홀하게 되자 따로 교회 행정을 맡을 집사를 세우게 됐습니다.
교회 안에 발생한 출신 지역 간의 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자신들의 입장을 발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제와 봉사에 전념해 줄 집사를 세우도록 제안합니다. 사도들은 교회 지도자들이었지만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독단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성도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문제 해결을 모색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강압적으로 사용해 일을 처리하기보다 여러 사람과 의견을 나누고 그것을 수렴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각자가 감당해야 할 영역을 자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한 사람의 슈퍼맨이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유기적 공동체입니다.

3. 사도들은 구제 사역을 감당할 집사를 세우기로 하고, 어떤 사람들을 집사로 추천하라고 말합니까?(3절)
집사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성경에서는 집사의 자격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첫째,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곧 인격이 검증되어 좋은 소문이 들리며, 선한 증거를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사들의 성품은 증명되어야 하며 여러 면에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초대교회 집사들은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도덕적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둘째,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고 추진력과 열정이 있으며, 영적인 분별력을 지닌 사람이어야 합니다. 재능과 용기를 겸비한 자들로 진실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셋째, 지혜가 충만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용기 있으며 일을 순서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재능을 소유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혜가 충만한 사람에게는 분별력과 통찰력과 판단력이 있습니다.

4. 교회 안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야 지혜롭게 그 갈등과 분열을 해결할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 분열이 생기면 공동체는 순식간에 무너지게 됩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는 대신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모두가 만족할 수 있도록 그 일을 전담할 집사들을 세웠습니다. 위기를 통해, 교회 안에 새롭고 건강한 제도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을 배려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 행정이 잘 갖춰지면, 성도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나님께 집중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행정 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은 선발된 일곱 명의 집사 모두 헬라파 유대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소외당하고 어려운 사람 입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 일에 대한 히브리파 유대인의 양보와 관용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분열은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됩니다. 사도들과 교회는 불공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수자, 약한 자의 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약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자의 친구로 사신 것처럼, 교회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되자 교회의 분열은 사라졌습니다.

5. 교회를 위해 내가 맡은 사역, 내가 감당해야 할 사역은 어떤 것입니까? 그 사역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사도들은 자신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집사를 세워 동역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는 한 사람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인도 아래 유기적으로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원활히 수행할 때 온전하게 세워집니다. 교회 사역은 동역입니다. 뛰어난 한 사람, 탁월한 소수가 주도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공동체 모두가 소중하며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연합을 이뤄야 함을 배우게 하십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나 욕심과 유익을 포기하고 섬길 때 공동체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을 섬겨야 합니다. 모두가 선생이 될 수 없고 모두가 사도가 될 수 없듯이 각자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교회 공동체는 건강한 한 몸이 될 수 있습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오직 예수

[사도행전 4장 1절~12절]
1절 -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2절 -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3절 -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4절 -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5절 -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절 -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하여
7절 - 사도들이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8절 -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9절 -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10절 -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11절 -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12절 -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1.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1~3절)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설교하는 것을 보고 체포했습니다.
사도들을 체포한 사람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인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편협하고 이기적이어서 예수님의 이름이 전파되어 그분을 따르는 자의 수가 증가하는데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두개인들은 세속적인 신앙을 가지고 부활, 내세, 영의 존재, 천사를 부인하며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만족에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베드로가 설교 가운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이 사두개인들의 심기를 거슬렀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득을 잃지 않기 위해 진리를 배격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음모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일은 없습니다.

2.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어떤 질문을 던집니까?(7절)
공회원들은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에 대해서 먼저 무슨 권세와 이름으로 하였느냐고 심문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권세와 힘에 관해 심문합니다. 사도들에게 꼼짝할 수 없는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다른 신의 힘을 의탁해서 이적을 행했다면 유대인으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불신앙이 됩니다. 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러한 이적을 행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계명에 걸리게 됩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정죄를 피해 갈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사도들이 한 일이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대제사장들로부터 이와 유사한 질문을 받으셨으나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공회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안녕을 추구하고자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공회의 심문을 적극적인 복음 전도의 기회로 활용했습니다.

3.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심문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8~12절)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하여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담대히 전하며 그분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음을 명백히 증거합니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비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비겁하고 겁 많은 사람을 담대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열정을 가진 복음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베드로처럼 나약하고 겁 많은 사람일지라도 성령 충만하면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경험한 베드로는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고 그분 외에 다른 구원자가 없음을 명백히 증거했습니다. 완악하고 교만한 이 세대에 복음 증거를 위해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성령 충만입니다.

4. 복음을 전하다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시던 날 먼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가야바의 저택에서 “너도 예수의 제자가 아니냐?”라는 한 여종의 질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믿음을 발견한 베드로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 후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어부로서의 삶을 살려 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이 친히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를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 때문에 다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에게 성령의 놀라운 능력이 부어졌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경험한 베드로는 이제 주님을 위해 생명을 던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넘어질 수 있고,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다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5. 사도들을 체포하고 심문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처럼 하나님의 일보다는 나 자신의 이익을 따지는 이기적인 마음이 내게는 없습니까?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오직 자신들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관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곧 그들의 모든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위치와 권력, 권위와 생계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다면 절대로 자신의 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설교합니까? 그리스도와 구원입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를 바로 세우는 계기를 만들어 봅시다.

출처 : 생명의 삶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