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성찰과 겸손
[역대하 28장 1절~15절]
1절 -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2절 -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3절 -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4절 -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5절 -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6절 -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7절 -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8절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9절 -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10절 -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로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11절 -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의 형제들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한지라
12절 - 에브라임 자손의 우두머리 몇 사람 곧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와 무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와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가 일어나서 전장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막으며
13절 -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들이지 못하리라 너희가 행하는 일이 우리를 여호와께 허물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우리의 허물이 이미 커서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하매
14절 - 이에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포로와 노략한 물건을 방백들과 온 회중 앞에 둔지라
15절 -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 아하스 왕의 죄악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은 무엇입니까?(1~5절)
아하스는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비롯한 온갖 우상을 숭배했고, 자녀를 불사르는 악을 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남 유다를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아하스의 부친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비교적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길을 따라 바알을 숭배했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했으며, 심지어 자녀를 불살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산당, 산 위,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하스와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시려고 아람 왕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아람은 다메섹을 수도로 하고 있던 북쪽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아람은 유다를 침략해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북 이스라엘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북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는 유다에서 하루 동안 12만 명의 용사를 죽였고,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아하스 왕의 아들과 그가 총애하던 대신들을 죽였습니다. 또 유다 백성 중 무려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많은 재물을 약탈해 사마리아로 가져갔습니다.
2. 북 이스라엘 군대가 남 유다의 포로를 끌고 사마리아에 도착했을 때, 선지자 오뎃은 그들이 승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9절)
선지자 오뎃은 북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남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북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와 군사들은 사기가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 유다가 자신들을 막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이로 인해 자신들은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고, 무려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노예로 삼거나 팔면 엄청난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늘 대립하던 남 유다를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누른 것에 대해 쾌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선지자 오뎃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그 승리는 북 이스라엘이 훌륭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남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북 이스라엘을 잠시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심판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 군사들은 믿어지지 않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기쁨에 도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승리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동족인 남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 노예를 삼고자 하는 것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3. 선지자 오뎃은 북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습니까?(10절)
오뎃은 남 유다 백성을 노예로 삼고자 하는 것을 꾸짖으면서 북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군사들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에 진노하셔서 그들을 북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지만, 그것이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보다 악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남 유다를 사랑하셔서 바로잡기를 원하셨고, 그 도구로 북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남 유다보다 의롭고 훌륭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것은 교만에서 온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들어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치실 때가 많았습니다. 바벨론을 들어 남 유다를 징벌하신 것이 그 예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악한 민족인데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를 치게 하시는지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대해 ‘과연 우리가 승리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가?’라고 성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4. 다른 이들의 허물은 살피면서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모습은 없는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선지자 오뎃을 통해 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기 성찰적 질문이었습니다. 실상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보다 악했습니다. 남 유다는 종종 의로운 왕들이 등장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나라를 세운 이후 멸망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왕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보다 먼저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볼 때 “나는 어떠한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형통할 때는 “내가 누리는 형통함은 자격이 있어서 누리는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선지자 오뎃과 같은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5. 다른 이들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겠습니까?
만약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는 눈을 가진다면 다른 이들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첫째, 다른 이들을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허물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비판하겠습니까? 둘째,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셋째,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도 허물이 있어 언제 그들과 같은 처지에 이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선지자 오뎃은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 백성을 노예로 삼기 위해 잡아간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을 유다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했습니다. 오뎃의 말에 북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 백성을 먹이고 입히고 치료해 돌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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