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성찰과 겸손

[역대하 28장 1절~15절]
1절 -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2절 -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3절 -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의 자녀들을 불사르고
4절 -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니라
5절 - 그러므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들이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 왕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쳐서 크게 살륙하였으니
6절 - 이는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7절 -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8절 -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형제 중에서 그들의 아내와 자녀를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들의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9절 - 그 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그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넘기셨거늘 너희의 노기가 충천하여 살륙하고
10절 -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로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11절 -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의 형제들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한지라
12절 - 에브라임 자손의 우두머리 몇 사람 곧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와 무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와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가 일어나서 전장에서 돌아오는 자들을 막으며
13절 -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포로를 이리로 끌어들이지 못하리라 너희가 행하는 일이 우리를 여호와께 허물이 있게 함이니 우리의 죄와 허물을 더하게 함이로다 우리의 허물이 이미 커서 진노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하매
14절 - 이에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포로와 노략한 물건을 방백들과 온 회중 앞에 둔지라
15절 - 이 위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일어나서 포로를 맞고 노략하여 온 것 중에서 옷을 가져다가 벗은 자들에게 입히며 신을 신기며 먹이고 마시게 하며 기름을 바르고 그 약한 자들은 모두 나귀에 태워 데리고 종려나무 성 여리고에 이르러 그의 형제에게 돌려준 후에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1. 아하스 왕의 죄악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징벌은 무엇입니까?(1~5절)
아하스는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비롯한 온갖 우상을 숭배했고, 자녀를 불사르는 악을 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남 유다를 아람과 북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아하스의 부친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비교적 정직하게 행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길을 따라 바알을 숭배했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했으며, 심지어 자녀를 불살라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기까지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산당, 산 위,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하스와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징벌하시려고 아람 왕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아람은 다메섹을 수도로 하고 있던 북쪽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아람은 유다를 침략해 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북 이스라엘을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북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습니다.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는 유다에서 하루 동안 12만 명의 용사를 죽였고,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아하스 왕의 아들과 그가 총애하던 대신들을 죽였습니다. 또 유다 백성 중 무려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갔고 많은 재물을 약탈해 사마리아로 가져갔습니다.

2. 북 이스라엘 군대가 남 유다의 포로를 끌고 사마리아에 도착했을 때, 선지자 오뎃은 그들이 승리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9절)
선지자 오뎃은 북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남 유다를 징계하시기 위해 북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왕 베가와 군사들은 사기가 고무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 유다가 자신들을 막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이로 인해 자신들은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고, 무려 20만 명을 포로로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노예로 삼거나 팔면 엄청난 이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늘 대립하던 남 유다를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누른 것에 대해 쾌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선지자 오뎃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그 승리는 북 이스라엘이 훌륭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남 유다 왕 아하스와 백성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북 이스라엘을 잠시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곧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심판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 군사들은 믿어지지 않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그 기쁨에 도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승리한 이유를 생각해 보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했습니다. 더구나 동족인 남 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아 노예를 삼고자 하는 것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3. 선지자 오뎃은 북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습니까?(10절)
오뎃은 남 유다 백성을 노예로 삼고자 하는 것을 꾸짖으면서 북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군사들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도취된 나머지 자신들의 상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남 유다에 진노하셔서 그들을 북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지만, 그것이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보다 악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남 유다를 사랑하셔서 바로잡기를 원하셨고, 그 도구로 북 이스라엘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남 유다보다 의롭고 훌륭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것은 교만에서 온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들어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치실 때가 많았습니다. 바벨론을 들어 남 유다를 징벌하신 것이 그 예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악한 민족인데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를 치게 하시는지 하나님께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북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거둔 승리에 대해 ‘과연 우리가 승리할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가?’라고 성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4. 다른 이들의 허물은 살피면서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모습은 없는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선지자 오뎃을 통해 북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질문은 자기 성찰적 질문이었습니다. 실상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보다 악했습니다. 남 유다는 종종 의로운 왕들이 등장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이 나라를 세운 이후 멸망할 때까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왕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남 유다보다 먼저 멸망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자신의 모습을 살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볼 때 “나는 어떠한가?”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형통할 때는 “내가 누리는 형통함은 자격이 있어서 누리는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것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선지자 오뎃과 같은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5. 다른 이들의 허물보다 자신의 허물을 먼저 생각한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게 되겠습니까?
만약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는 눈을 가진다면 다른 이들에 대한 태도는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첫째, 다른 이들을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허물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비판하겠습니까? 둘째, 다른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셋째,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도 허물이 있어 언제 그들과 같은 처지에 이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긍휼히 여기게 됩니다. 선지자 오뎃은 북 이스라엘이 남 유다 백성을 노예로 삼기 위해 잡아간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을 유다로 돌려보낼 것을 촉구했습니다. 오뎃의 말에 북 이스라엘의 일부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 백성을 먹이고 입히고 치료해 돌려보냈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바로 다른 이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기쁨으로 헌신하는 삶

[역대하 24장 1절~14절]
1절 - 요아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칠 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시비아요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2절 -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3절 - 여호야다가 그를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자녀를 낳았더라
4절 - 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보수할 뜻을 두고
5절 -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모든 이스라엘에게 해마다 너희의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 하라 하였으나 레위 사람이 빨리 하지 아니한지라
6절 -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들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성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7절 -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파괴하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들을 바알들을 위하여 사용하였음이었더라
8절 - 이에 왕이 말하여 한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게 하고
9절 - 유다와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하나님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정한 세를 여호와께 드리라 하였더니
10절 -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지니라
11절 - 레위 사람들이 언제든지 궤를 메고 왕의 관리에게 가지고 가서 돈이 많은 것을 보이면 왕의 서기관과 대제사장에게 속한 관원이 와서 그 궤를 쏟고 다시 그 곳에 가져다 두었더라 때때로 이렇게 하여 돈을 많이 거두매
12절 - 왕과 여호야다가 그 돈을 여호와의 전 감독자에게 주어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여 여호와의 전을 보수하며 또 철공과 놋쇠공을 고용하여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더니
13절 - 기술자들이 맡아서 수리하는 공사가 점점 진척되므로 하나님의 전을 이전 모양대로 견고하게 하니라
14절 - 공사를 마친 후에 그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 앞으로 가져왔으므로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곧 섬겨 제사 드리는 그릇이며 또 숟가락과 금은 그릇들이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

1. 요아스 왕이 품었던 뜻은 무엇입니까?(4절)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을 보수할 뜻을 품었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뜻을 받들어 화려하고 웅장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성전을 완공한 후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을 고향처럼 여겼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분열 왕국 이후 등장한 왕들의 신앙에 따라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홀대를 받기도 했습니다. 아달랴가 혈육을 죽이고 집권한 후 성전은 완전히 방치되었습니다. 아달랴는 북 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 사이에서 태어난 여인으로, 어려서부터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훗날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의 며느리가 된 그녀는 남편과 아들을 하나님 앞에서 실패한 왕으로 만들었으며, 혈육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요아스는 고모인 여호사브앗과 고모부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요아스는 7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습니다. 요아스는 왕이 된 후 방치되고 더럽혀진 성전을 회복할 뜻을 품었고,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모아 여러 성읍으로부터 성전을 보수할 돈을 거두도록 명령했습니다.

2. 요아스 왕은 성전을 보수할 헌금을 어떤 방식으로 모았습니까?(8~9절)
궤를 만들어 여호와의 전 문 밖에 두어 백성이 세를 궤 안에 넣도록 했습니다.
아달랴의 폭정과 우상숭배 등으로 유다 왕국은 피폐해졌습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보수할 뜻을 품었지만 혼자 힘으로는 어려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 문 밖에 궤를 만들어 모든 백성이 조금씩 성전 보수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모든 이스라엘 남자는 세(속전)를 내게 하셨습니다. 스무 살 이상 된 모든 남자는 가난하든 부하든 상관없이 똑같은 액수를 하나님께 속전으로 드려야 했습니다. 액수는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이었습니다. 이렇게 드려진 세는 회막 봉사에 사용했습니다(참조, 출 30:12~16). 그러나 아달랴 같은 간악한 여인이 다스리는 동안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고, 성전에 드려야 할 세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요아스 왕은 이 모든 것을 회복하길 원했습니다. 유다 왕국의 모든 백성이 참여한 성전 보수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의무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모두가 참여했기에 더욱 의미 있었습니다.

3.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 돈을 모으고 보수 공사를 하고 난 후, 남은 것은 어떻게 사용되었습니까?(14절)
백성과 방백들이 드린 돈을 모아 성전 보수 공사를 끝낸 후 재정을 정리해 보니 돈이 남았습니다. 남은 것으로 여호와의 전에서 쓸 그릇을 비롯한 도구들을 만들었습니다.
백성과 방백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궤에 자신들의 몫을 드렸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야 할 것을 바치지 않고 있었으나 요아스 왕의 명령을 따라 다시 의무를 지켰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은 감독자들에게 전해졌고 감독자들은 석수와 목수, 철공과 놋쇠공들을 고용해 성전을 수리했습니다. 이들의 수고로 하나님의 성전은 본래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드디어 보수 공사가 끝났습니다. 공사 후 재정을 정리해 보니 돈이 남았습니다. 남은 돈은 왕과 제사장 여호야다에게로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남은 돈을 수고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남은 돈으로는 여호와의 전에서 사용할 그릇, 숟가락, 금은 그릇 등을 만들었습니다. 백성이 모은 모든 돈은 하나님의 전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모자라는 것보다 쓰고 남는 것은 축복입니다. 이것은 백성이 성전 보수에 힘써 참여했음을 말해 줍니다. 일찍이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성막을 만들 때도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와서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했었습니다(참조, 출 36:2~7). 이처럼 하나님은 차고 넘치게 하시는 분입니다.

4. 백성과 방백들이 성전 보수 공사를 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것을 드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나눠 보십시오.
백성과 방백들은 성전 보수 공사에 참여하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모든 방백들과 백성들이 기뻐하여 마치기까지 돈을 가져다가 궤에 던지니라”(10절). 만약 성전 보수를 위해 세를 낸 일이 왕명을 따라 억지로 한 일이었다면 이처럼 기쁨으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기쁨으로 하지 못했다면 돈이 넘쳐 남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요아스 왕 당시 성전 보수 공사는 왕으로부터 제사장, 방백들, 백성 모두가 함께한 기쁨의 축제였다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하면 무엇이든 차고 넘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기쁨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쁨이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합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이 행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왔습니다. 우선 요아스 왕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달랴의 손으로부터 목숨을 건져 주셨을 뿐만 아니라 왕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우상숭배의 고리가 끊어지고 하나님 신앙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과 방백들의 입장에서 보면 간악한 여인의 손에 있던 권력이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든 일을 선하게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그 감사는 기쁨으로 힘써 성전 보수에 임하게 했습니다.

5. 나의 감사 제목은 무엇이며, 얼마나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나눠 보십시오.
이상하게도 우리의 신앙생활은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는 주실 은혜에 대한 갈망으로 채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옵소서”라는 말을 기도 중 가장 많이 사용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 더 많은 은혜와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이 받고자 하는 생각으로는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늘 부족하고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은 우리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야곱의 아내 라헬은 아름다운 여성으로서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나,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 때문에 자녀를 많이 낳은 언니 레아를 질투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었습니다. 요셉이란 이름은 감사의 이름이라기보다는 모자람에 대한 한탄으로 가득한 이름입니다. 요셉은 ‘더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녀는 아들을 낳는 즉시 다른 아들을 더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후 라헬은 베냐민을 낳았으나 난산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더해지기는 했으나 누리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받을 은혜보다 이미 받은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은 기본적인 은혜에서부터 지금까지 받은 많은 은혜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세어 보면 그분의 무한한 은혜에 감사가 절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승리를 부르는 기도

[역대하 20장 1절~12절]
1절 - 그 후에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여호사밧을 치고자 한지라
2절 - 어떤 사람이 와서 여호사밧에게 전하여 이르되 큰 무리가 바다 저쪽 아람에서 왕을 치러 오는데 이제 하사손다말 곧 엔게디에 있나이다 하니
3절 -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4절 - 유다 사람이 여호와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읍에서 모여와서 여호와께 간구하더라
5절 - 여호사밧이 여호와의 전 새 뜰 앞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중 가운데 서서
6절 -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니이까 이방 사람들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지 아니하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
7절 - 우리 하나님이시여 전에 이 땅 주민을 주의 백성 이스라엘 앞에서 쫓아내시고 그 땅을 주께서 사랑하시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지 아니하셨나이까
8절 - 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주의 이름을 위하여 한 성소를 주를 위해 건축하고 이르기를
9절 -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
10절 - 옛적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침노하기를 주께서 용납하지 아니하시므로 이에 돌이켜 그들을 떠나고 멸하지 아니하였거늘
11절 - 이제 그들이 우리에게 갚는 것을 보옵소서 그들이 와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주의 기업에서 우리를 쫓아내고자 하나이다
12절 -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1. 모압, 암몬, 마온의 연합군이 공격하자 여호사밧은 유다 백성에게 무엇을 공포합니까?(3절)
여호사밧은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다해 기도했으며,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백성은 유다의 모든 성에 함께 모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 때 모압, 암몬, 마온 족속이 동맹을 맺고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평소에 요새와 성을 튼튼하게 방비하고 군대를 육성한 여호사밧 왕이었지만, 실제로 적군이 연합해 침입해 오자 두려웠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간구하기로 결심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은혜로 두려움을 이겨 냈고 자신과 함께 기도할 동역자들을 모았습니다. 여호사밧의 금식 기도 명령을 따라 유다 모든 백성은 함께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의 파도 속으로 몰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염려가 아니라 평안이요,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한 마음입니다(딤후 1:7). 삶에 찾아오는 두려움을 물리치는 길, 마음에 평강과 은혜와 승리를 가져오는 길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간구에 온전히 응답하시고 완전한 승리, 참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마 18:19).

2. 여호와의 성전 새 뜰 앞에서 여호사밧은 어떠한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까?(7~9절)
여호사밧은 백성을 대표해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와 그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민족의 위기 앞에 유다 백성은 한자리에 모여 합심해서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했습니다. 이때 유다 왕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성전 새 뜰 가운데 일어서서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주와 맞설 사람이 없나이다”(6절).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만물의 대 주재요 영원한 왕이심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전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친히 하신 언약의 말씀을 의지해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9절). 환난을 당할 때 성전에 나아와 회개하며 주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면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시겠다고 하셨던 약속을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렸습니다. 삶의 시련 앞에 언제나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간절하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3. 여호사밧과 온 유다 백성에게 승리를 가져온 기도는 한마디로 어떤 기도였습니까?(12절)
오직 주 하나님만 의지하고 주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고백하는 기도였습니다.
여호사밧은 백성을 대표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동시에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구원을 바라며 여호사밧과 더불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12절). 기도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을 붙잡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던 생각과 마음과 경험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가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은 영역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합니까? 힘들고 어려울 때, 병들고 실패할 때만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 많은 영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더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하는 자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참된 회복과 승리가 찾아올 것입니다.

4. 오늘 내 삶에서 참된 승리의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마귀는 거짓말하는 자요 사기꾼이요 이간질하는 자입니다. 마귀는 우리 삶을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죄의 대가를 완전히 치러 주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찾아와 유혹합니다. “너는 이길 수 없어. 너는 패배한 사람이야. 너 같은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르시고 친 자녀 삼으시고 날마다 이김을 주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으로 인해 완전한 승리자요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면 패배자요 낙오자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존귀한 자요,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면 날마다 승리하는 영원한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5. 내 삶에 승리를 가져오는 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지, 그리고 나의 기도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자녀가 구하기 전에 필요한 것을 알고 그것을 이뤄 주고 싶어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알고 계시며 그 필요를 친히 채워 주길 원하십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녀에게 뱀을 주는 아버지가 없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허락하지는 않으십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위험한 칼을 사 달라고 하고 몸에 해로운 음식을 원할 때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형통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우고 허락하십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 4:2~3). 우리는 삶의 진정한 승리, 참된 형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뜻과 삶의 승리를 위한 기도의 모범 답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엄청난 부귀와 영광

[역대하 17장 1절~9절]
1절 -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되
2절 -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3절 -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4절 -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5절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6절 -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7절 - 그가 왕위에 있은 지 삼 년에 그의 방백들 벤하일과 오바댜와 스가랴와 느다넬과 미가야를 보내어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하고
8절 - 또 그들과 함께 레위 사람 스마야와 느다냐와 스바댜와 아사헬과 스미라못과 여호나단과 아도니야와 도비야와 도바도니야 등 레위 사람들을 보내고 또 저희와 함께 제사장 엘리사마와 여호람을 보내었더니
9절 -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유다에서 가르치되 그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더라

1. 여호사밧 왕에게 엄청난 부귀와 영광이 찾아온 것이 무엇 때문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까?(3~4절)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친히 함께하신 왕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마음을 가진 왕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명령 순종했기에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유다 왕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은 왕위에 오른 후 가장 먼저 북 이스라엘의 공격을 대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유다의 모든 요새와 에브라임 성읍에까지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전쟁과 난리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불안정한 상황이었지만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사밧과 함께하신 이유는 그가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며 어리석게 바알에게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들의 행위를 좇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는 북 이스라엘 왕들처럼 우상을 섬기고 죄악 가운데 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미워하고 멀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한 믿음의 사람 여호사밧에게 하나님은 부귀와 명예의 복을 부어 주셨습니다.

2. 하나님께 큰 부와 영광을 얻은 여호사밧은 어떤 마음으로 우상을 제거하고 있습니까?(6절)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큰 부와 명예를 갖게 되었습니다(5절). 그는 형통할수록 더욱 ‘여호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온 맘을 다해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화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전심으로 행했으며,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는 다윗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길 원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유다를 견고케 하시고 백성의 마음 문을 열어 주셔서 여호사밧에게 많은 예물을 바치게 하셨고, 이로써 여호사밧은 큰 부와 명예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왕 여호사밧은 부와 명예를 누리면 누릴수록 여호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고 더욱 더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마음은 온 유다 땅에 산재한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을 제거하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형통할 때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마음먹습니다. 오늘 우리도 여호사밧처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여호사밧과 같이 부와 명예와 영광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3.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여호사밧은 유다 백성을 위해 무엇을 시행하고 있습니까?(7~9절)
신하들과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을 한 조로 구성해 유다의 모든 성읍을 돌아다니며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약 2,800년 전, 위대한 종교 개혁이 유다 왕 여호사밧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는 해, 아주 특별한 일을 시행했습니다. 그는 행정 관료인 신하들과 레위인들, 제사장들을 한 팀으로 구성해 유다의 여러 성읍에 파송하고, 그들을 통해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육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 여호사밧의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라가 굳건하게 세워지고 백성이 바로 서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통해 그분의 뜻을 알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사밧은 백성의 마음에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심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나라와 민족을 새롭게 한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따라 미지의 땅으로 간 아브라함, 미디안 광야로 도피했던 모세를 비롯해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경외한 많은 사람은 하늘의 꿈을 꾼 비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마음에 말씀의 꿈을 심고, 그 말씀의 비전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4. 내 삶의 자리에서 경건의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며, 어떻게 실천할 수 있는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를 통해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될까요? 잠언 8:13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는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자신의 죄를 보고 가슴 치고 통회하는 사람, 자신의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 적은 없다. 당신의 삶에 회개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표를 떼어 버리는 것이 낫다. 회개란 단순히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회개에는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마음과 감정과 의지를 다해 죄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셋째,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며 거룩함과 경건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를 돌아보면 회개하고 고쳐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버려야 할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내 안의 죄를 버리고 회개함으로 경건의 능력과 경외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5. 내게 있는 부정적인 모습들, 불순종의 모습들을 생각해 보고, 어떻게 형통하고 복된 삶, 경건하고 경외하는 삶으로 회복될 수 있는지 나눠 보십시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연약한 부분, 자신만의 약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사랑에 굶주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마음의 허전함과 목마름을 채우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애를 씁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맘에 드는 이성에게서 사랑받고 인정받고자 노력하며, 어떤 사람은 명예와 권력을 통해 삶의 목마름을 채워 가려 합니다. 그러나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삶의 갈증은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돈과 명예, 세속적인 사랑, 권력과 힘을 통해 마음의 목마름, 인생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거짓 가르침, 가짜 목마름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은 영역에서부터 예수님으로 삶을 채워 가는 순종의 훈련을 시작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겸비함에 마음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역대하 12장 1절~8절]
1절 - 르호보암의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지매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2절 - 그들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르호보암 왕 제오년에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니
3절 - 그에게 병거가 천이백 대요 마병이 육만 명이며 애굽에서 그와 함께 온 백성 곧 리비아와 숙과 구스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4절 - 시삭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빼앗고 예루살렘에 이르니
5절 - 그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의 일로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셨다 한지라
6절 - 이에 이스라엘 방백들과 왕이 스스로 겸비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하매
7절 - 여호와께서 그들이 스스로 겸비함을 보신지라 여호와의 말씀이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8절 -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1. 유다의 르호보암 왕은 나라가 견고하고 점점 세력이 강해지자 어떠한 잘못을 범합니까?(1절)
남 유다의 왕 르호보암은 왕국이 점점 견고해지고 자신의 힘과 권력이 강해지자, 여호와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암몬 여인 나아마의 아들이었습니다. 왕이 된 르호보암은 점점 세력을 확대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국부가 증가하고 나라가 강성해지자, 그의 마음이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힘, 자신의 지식, 자신이 가진 것을 자랑하면서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떠났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무시하자 백성은 왕의 모습을 그대로 본받았습니다. 본문과 병행 구절인 열왕기상 14장을 보면, 유다 백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을 숭배하고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세우며, 심지어 남색(신전 남창)하는 자가 있었고 가나안 족속의 모든 악행을 그대로 본받아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민족과 세상의 위기는 경제적 시련이나 가난 때문이 아닙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가정의 가장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 생각과 소욕과 탐심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말씀으로 돌아가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기를 원하십니다. 지도자들이 먼저 말씀 중심으로 회복될 때 이 땅에는 형통의 문이 열릴 것입니다.

2. 애굽 왕 시삭이 유다를 침략하자 선지자 스마야의 책망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6절)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5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이스라엘 방백들과 르호보암은 죄를 뉘우치고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애굽 왕 시삭은 애굽 제22왕조를 창건한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의 옛 영광을 재건하고자 르호보암 당시 남 유다를 침공해 남부 구릉지대의 여러 성읍과 많은 곳을 파괴하고는 예루살렘까지 진격했습니다. 세상은 이 전쟁을 ‘애굽 왕의 정복욕 때문에, 한 개인의 판단 때문에 발발한 전쟁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하나님이 불순종한 유다 백성을 심판하시려는 진노의 막대기요, 사랑의 회초리였습니다. 스마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하나님의 종, 스마야의 경고와 책망을 들은 왕과 지도자들은 자신을 겸손히 낮추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도다.” 인간은 늘 범죄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즉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입니다. 성령이 나의 허물과 완악함을 책망하고 훈계하실 때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제가 범죄했습니다.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회복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3.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진노의 대접을 쏟지 않으시고 그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7절)
백성이 말씀 앞에서 겸비하고 회개함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를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왕과 백성을 보시고 다시 스마야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저들이 스스로 겸손해졌으니 내가 저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구해 줄 것이다. 저희를 조금 구원해 내 진노를 시삭을 통해 예루살렘에 쏟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시고 징벌을 감하신 이유는 백성의 낮아지고 겸손한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홍해를 건너 메마른 인생 광야를 행진할 때면 때로 교만하고 딱딱하고 굳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를 즉시 물리치지 않으면, 교만의 씨앗은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교만의 씨앗이 계속해서 자라게 되면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될 것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잠 4:23)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가난하고 낮은 마음으로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해 축복의 자리,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새 영과 새 마음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4. 깨어지는 가정, 하나 되지 못한 교회, 극심한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는 우리 사회가 회복과 치유, 하나 됨을 이루는 길이 어디 있는지 나눠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잠 18:2). 오늘날 한국 사회의 문제는 남의 이야기,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자기 생각, 자기 뜻만 고집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기인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곳곳에 분열과 다툼, 깨어짐과 갈라섬의 상처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배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정의 파괴, 사회적 갈등과 파멸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갈등을 치유하고 분열을 중단하며, 연합과 일치, 화해와 회복, 그리고 치유를 행하기 원하십니다. 갈등하는 가정과 교회와 민족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첫째, 부름 받은 사람들이 말씀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할 때 회복이 시작됩니다. 둘째, 말씀 앞에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와 악함을 깨달았다면 통회하고 돌아서야 합니다. 셋째, 날마다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과 생각을 붙잡고 지킬 때 우리 사회는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5. 힘들고 지쳐 방황하고 좌절할 때, 깊은 수렁을 헤맬 때, 나를 지켜 주고 함께한 사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나눠 보십시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서부터 무수한 사람의 도움과 격려, 지지와 응원 속에서 오늘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면 사랑의 빚을 진 사람으로서 낙심하고 절망 중에 있는 또 다른 인생을 찾아가 자비의 손을 내밀고 일으켜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일지라도 사랑하셔서 끊임없이 선지자들을 통해 회복과 치유, 은총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깨어진 가정, 죽음을 묵상하고 절망을 묵상하는 인생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사 55:1). 예수님의 사랑으로 오늘 내가 회복과 은총의 자리에 있음을 감사한다면, 고난 받는 자들과 고통 받는 자들을 찾아가기 바랍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성전은 어떤 곳이어야 하나?

[역대하 7장 11절~22절]
11절 -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12절 -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13절 -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14절 -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절 -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절 -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17절 -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18절 -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19절 -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20절 -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21절 - 이 성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그리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22절 -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1. 성전 건축을 완수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12~16절)
하나님은 솔로몬 성전을 제사 드리는 곳으로 선택하셨으며, 거룩하게 구별해 하나님의 이름을 영영히 둘 것이며,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성전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과 관심은 화려한 외관이나 제사장의 예복, 장엄한 방법이나 절차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본질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 건축에 관한 모든 것을 완수하고 잠들어 있는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하나님의 성전이 갖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백성 중에 기근이나 전염병, 자연재해가 찾아올 때,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아! 너희는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민족의 죄와 허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 가정과 교회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할 때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본질은 회복될 것입니다.

2. 솔로몬의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경고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17~20절)
다윗처럼 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지킨다면 왕위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요, 돌이켜 다른 신을 숭배하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뿌리가 뽑히고 온 세상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나아오는 인생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성전으로 나아오는가?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삼상 16:7). 하나님이 성전을 찾는 이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다윗처럼 행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약속의 말씀과 규례와 법도를 전심으로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 앞에서 행하는 자들은 솔로몬의 실패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분의 충만한 임재 안에 거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전, 즉 솔로몬 성전이 훼파되고 재앙이 찾아오게 된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21~ 22절)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를 저버리고 다른 우상들을 받아들여 거짓 신을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화려하고 웅장해 세상 사람들에게 높임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존귀하던 솔로몬 성전도 하나님이 버리시면 훼파되어 초라해지고 맙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화려하던 성전이 왜 이렇게 초라하게 되었는지, 왜 이처럼 무너지고 훼파되었는지를 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놀림거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받아들여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는 수많은 교회가 있고 하나님을 믿는 수많은 백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 조롱받고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을 사랑해 물질 만능, 기복 신앙, 자기중심적 신앙, 배타적인 믿음에 머물러 있기에, 교회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임재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4.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 잊을 수 없는 은혜를 함께 나눠 보십시오. 그 은혜를 어떻게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나눠 보십시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은 전무후무한 지혜, 최고의 지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왕이요,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성전을 완공한 솔로몬에게 하나님은 꿈으로 계시하셨습니다. “솔로몬 성전, 하나님 집의 본질은 화려한 외양이나 형식적인 예배에 있지 않다. 누군가를 위해 중보하는 성전, 기도의 자리가 바로 성전의 본질이다. 항상 하나님과 말씀 앞에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돌이킴으로 불순종에서 순종의 자리로 돌아가라. 탐심과 이기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 말고, 착하고 바르고 정직한 마음, 가난하고 낮은 마음으로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이것이 성전의 본질이요 성전이 존재하는 목적이요 이유다.” 솔로몬의 인생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온전히 순종했을 때, 그는 최고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부귀와 영화의 복을 누렸습니다. 예루살렘 거리마다 값비싼 은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형통할수록 기도의 자리, 중보의 자리를 멀리하고 이방 여인들이 들여온 우상을 숭배하며, 불순종과 탐심에 눈이 어두워져 결국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나자 곳곳에서 대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 왕국은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반 토막 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식어 가고 있다면, 문제는 본질을 상실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결코 잊을 수 없는 예배,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다시금 회복하고 싶은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나눠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자신만의 은밀한 은혜의 시간, 하나님을 일대일로 친히 대면한 잊을 수 없는 예배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해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한 예물을 바치고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한 이스라엘 회중처럼 말입니다. 누군가는 가난한 청년 시절, 마리아의 향유 옥합과 같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물질을 드렸던 예배를 기억할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학창 시절, 군복무 시절, 고난과 역경의 자리에서 겸손히 예배하던 시간을 떠올릴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과거 어느 한때 예배에 실패해 완악하고 굳은 마음으로 교회에 출석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 시절, 내가 잊어버린 예배의 소중함, 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있다면 나눠 보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다시 하나님의 집, 거룩한 성전을 사모하고 예배하는 참된 믿음의 본질로 돌아갈 수 있을지 함께 나눠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성전 건축의 이유

[역대하 6장 1절~11절]
1절 - 그 때에 솔로몬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2절 - 내가 주를 위하여 거하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3절 - 얼굴을 돌려 이스라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그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서 있더라
4절 - 왕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입으로 내 아버지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의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
5절 - 내가 내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였으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될 사람을 아무도 택하지 아니하였더니
6절 -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7절 - 내 아버지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8절 -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9절 - 그러나 너는 그 성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허리에서 나올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10절 -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셨도다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내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일어나 이스라엘 왕위에 앉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11절 - 내가 또 그 곳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넣은 궤를 두었노라 하니라

1. 하나님이 다윗에게 허락하지 않으신 성전 건축을 그의 후손에게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7 ~9절)
직접적이고 외적인 원인은 다윗이 전쟁을 통해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입니다(대상 22:8; 28:3). 또 간접적이고 내적인 원인으로 성전을 지어 봉헌하겠다는 다윗의 마음이 마치 그가 하나님을 도와드린 것처럼 여기는 위험에 빠질 수 있었기에, 성전 건축을 아들 대로 보류하셨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요청을 거절하신 것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선지자 나단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며 동의했으니 나단도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좋아 보였기 때문에 하나님도 당연히 기뻐하실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매우 확신있게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라고 단언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의외였습니다. 영적 지도자들은 그 일이 아무리 가치있는 일이라도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속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성전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시려는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다윗의 아들이 왕으로 굳건히 선다는 보증도 됩니다. 구속 역사 가운데 평화의 왕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은 장차 메시아를 통해 이뤄질 교회 설립의 모델이 됩니다.

2. 솔로몬이 다윗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점이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예표하고 있습니까?(9절, 비교 사무엘하 7:12~14)
하나님은 다윗의 몸에서 낳을 아들이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2~14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이중적 신분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다윗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삼하 7:14). 이러한 예언은 히브리어의 독특한 성격 때문에 가능합니다. 솔로몬이 다윗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요셉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벤’입니다. 영어나 한국어에서는 아들과 손자, 그리고 그 이후의 자손에 대한 이름이 각기 다르지만 히브리어에서는 1대 자손이나 100대 자손 모두를 ‘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전을 건축하는 이가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는 솔로몬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이 장차 다윗의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고 성전을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3.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4, 10절)
성전을 짓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짓기 원하였던 다윗에게 주신 말씀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성전은 인간을 위한 건축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건축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소원을 보류하시고 솔로몬을 통해 이루신 것입니다. 철저하게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짓도록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어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중심의 왕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가 우상숭배로 타락하기 이전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가장 잘 보여주는 왕이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눈에 보이는 건물에 불과합니다. 건물이 신성한 것이 아니라 건물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신성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드려지지 않으면 다른 건축물과 다를 바가 없는 건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을 때 하나님은 성전을 가차없이 무너뜨리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은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린 건물을 성스럽게 여겼을 때 일어났습니다. 오늘 우리 또한 예배당 자체를 신성시한다면 이는 잘못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건물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일 뿐입니다.

4.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우리는 예수님께 두 가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곧 나를 죄에서 건져주신 분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났어도 주님으로 만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 만나는 것은 생활 속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날마다 주권을 내어 드릴 때 가능합니다. 성도들 중에 직장 생활을 내려놓고 이제부터 하나님의 일을 해야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지만 거기에는 위험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는 이원론입니다. 올바른 신앙의 소유자는 주어진 모든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며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삶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 자신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명심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5. 하나님이 지금 나를 통해 하시는 일 때문에 장차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감을 품고 있습니까?
믿음은 현재를 너머 미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현실 너머의 꿈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떤 소원을 이루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일하기 원하시며 내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놀라운 계획을 보여주시고 그 일을 이루기 원하십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소망은 믿음에서 나옵니다. 믿음이 없으면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한 사람만을 통해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의 자녀와 후손들을 통해서도 그분이 계획하신 일을 이뤄 가실 수 있습니다. 믿음은 조급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자신을 통해 이뤄지지 않더라도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기초를 놓는 일에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리더십

[역대하 1장 7절~17절]
7절 -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8절 -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내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시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
9절 - 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10절 -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
11절 -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12절 -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13절 - 이에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 회막 앞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4절 -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사백 대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15절 -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 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 같이 많게 하였더라
16절 -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과 구에에서 사들였으니 왕의 무역상들이 떼로 값을 정하여 산 것이며
17절 - 애굽에서 사들인 병거는 한 대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백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들의 모든 왕들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 그들의 손으로 되팔기도 하였더라

1.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9~10절)
솔로몬은 하나님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루시고, 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구했습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었습니다. 대물림으로 왕이 된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로 왕이 된 것이 아니기에 나라를 잘못 다스리는 무능력한 왕인 경우가 많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버지 다윗을 통해 이루지 못하신 일들을 자신을 통해 이루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했습니다. 그것은 왕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혜와 지식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얻기 원하는 부와 장수와 명예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한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섬길 지혜를 구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일꾼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2.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부와 재물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11~12절)
솔로몬이 자신을 위해 부귀도 구하지 않고 명성도 구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백성을 어떻게 하면 잘 다스릴(재판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지혜를 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부와 재물과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더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의 필요를 넘치도록 채워 주십니다. 솔로몬의 선택은 하나님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구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의 선택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고려한 선택이었고, 하나님 백성의 안녕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선택은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내려온 것이지만, 이제 그는 책임감 있게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신앙과 지혜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해 그분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기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택하며 간구하는 지도자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십니다.

3. 솔로몬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스라엘을 다스렸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14~15절)
이스라엘은 풍요롭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말씀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국가 전체를 복되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지도자가 받는 복은 곧 공동체 전체에 복이 됩니다. 지도자의 올바른 선택은 공동체 전체를 번영과 평안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한 대로 지혜로운 마음을 주셨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번영과 축복의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왕국이 받은 복은 단순히 군사력이 강화되는 것이나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예요, 장차 예수님을 통해 이뤄질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나라도 침범할 수 없는 안전하고 견고한 나라입니다. 모든 민족이 하나가 되는 화평의 나라입니다. 영적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새로운 에덴동산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렇듯 강성한 나라를 이루게 하심으로, 장차 다윗의 아들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나라 또한 완전한 나라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게 하셨습니다.

4. 하나님이 단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신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 소원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함께 나눠 보십시오.
우리는 많은 소원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막상 단 한 가지를 선택해서 말하라고 하면 제대로 말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중요한 것이 너무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사명에 집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확신하는 한 가지 사명에 집중하는 사람은 사명을 이루기 위한 그 한 가지 강렬한 소원이 마음속에 늘 흘러넘칩니다. 솔로몬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집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실 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을 즉시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도 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실히 간구하는 것들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과 하나님이 간절히 이루기를 원하시는 뜻이 하나가 될 때 우리의 기도는 즉시 응답될 것입니다. 참된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작업입니다.

5. 주위에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지체가 있습니까? 그 지체의 일터 가운데 하나님이 어떤 복을 주셨는지 나눠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터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그분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사역은 언제나 열매를 맺고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줍니다. 인간의 지혜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며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터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일터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곳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일터를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사용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의 지혜로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풍성한 예물을 통한 섬김

[역대하 31장 1절~8절]
1절 - 이 모든 일이 끝나매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나가서 유다 여러 성읍에 이르러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들을 찍으며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온 땅에서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거하여 없애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각각 자기들의 본성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2절 - 히스기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반열을 정하고 그들의 반열에 따라 각각 그들의 직임을 행하게 하되 곧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휘장 문에서 섬기며 감사하며 찬송하게 하고
3절 - 또 왕의 재산 중에서 얼마를 정하여 여호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 곧 아침과 저녁의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절기의 번제에 쓰게 하고
4절 - 또 예루살렘에 사는 백성을 명령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몫의 음식을 주어 그들에게 여호와의 율법을 힘쓰게 하라 하니라
5절 -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6절 -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
7절 - 셋째 달에 그 더미들을 쌓기 시작하여 일곱째 달에 마친지라
8절 -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쌓인 더미들을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

말씀 포인트 : 히스기야 왕이 중심이 되어 성전을 정비하고 백성을 모아 유월절을 지켰습니다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었습니다. 단 한 번의 이벤트와 같은 축제로는 부족했습니다. 성전은 지속적으로 성결하게 유지되어야 하고, 제사도 지속적으로 드려져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필요했고, 이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부터 하나님께 물질을 드렸습니다. 온 백성도 성전에 필요한 물질을 봉헌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물질 봉헌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1) 히스기야 왕이 유다 전역에서 제거한 것들은 무엇인가요?(1절)
히스기야는 아하스 당시에 망가진 나라를 재건함에 있어 우선 우상을 제거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히스기야는 온갖 주상과 목상들을 깨뜨리고 산당과 제단들을 제거하도록 했습니다. 모든 개혁은 비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비울 때 그 자리에 새로운 것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상 제거는 유다 왕국에서 늘 반복되던 일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왕이 등장하면 우상들을 제거했지만, 악한 왕들이 등장하면 다시 우상들을 세웠습니다. 이런 영적 싸움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싸움입니다. 우상은 눈에 보이는 주상이나 목상만이 아닙니다. 그 앞에 몸을 굽혀 절하지 않더라도,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상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받드는 것들은 모두 다 우상입니다. 우선 이런 것들을 우리 마음과 삶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2) 그 후에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와 예배가 잘 진행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2절)
히스기야 왕은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아무리 온 백성을 모아 절기를 지켜도, 온 나라 안의 우상들을 제거해도 하나님의 성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없거나, 있다 해도 제 직분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이들을 모아 반열을 정했습니다. 각각 직임을 정해 주었습니다. 각자가 할 일을 정확히 나누어 맡겼습니다. 성전의 기강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이는 본래 다윗이 모두 정한 것이었는데, 백성의 신앙이 부패하면서 흐지부지되어 왔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모든 질서를 제자리로 돌려놓았습니다.

3) 히스기야 왕은 성전에 필요한 물질을 어떻게 조달했나요? 또 백성은 어떻게 호응했나요?(3, 5~7절)
성전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물질적인 문제였습니다. 즉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먹고 살 대책이 없었던 것입니다. 본래 백성이 십일조를 성전에 드리면, 그 십일조를 레위인들이 받고,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드려 제사장들에게 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이 제 구실을 못하고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면서 성전에 드리는 예물 반 세겔도 드리지 않았고, 십일조 등의 예물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성전 재정이 고갈되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부터 솔선수범하여 왕의 재산 중에서 성전에 필요한 것을 쓰게 했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십일조를 비롯한 각종 예물을 봉헌했습니다. 백성이 드린 첫 열매를 비롯한 예물들은 여러 더미로 쌓였고, 성전에서 필요한 것들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 중에서 구별하여 바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도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교회에 드리도록 힘써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끝까지 겸손하라

[역대하 26장 11절~23절]
11절 - 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12절 -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13절 -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14절 -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15절 -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16절 -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17절 -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18절 -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19절 -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20절 -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21절 -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22절 -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23절 - 웃시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말씀 포인트 : 웃시야는 통치 전반부에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한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돕는 스가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강성해진 후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고 교만해졌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고, 이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진노를 당해야 했습니다. 진정한 위기는 어려울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형통할 때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잘될수록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끝까지 겸손해야 합니다.

1) 웃시야 왕의 이름이 널리 퍼진 이유는 무엇인가요?(15절)
웃시야 왕의 이름은 애굽 변방에까지 널리 알려졌습니다(참조 8절). 그의 이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은 그의 훌륭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가르칩니다. 다윗은 성전을 지을 모든 예물들을 봉헌한 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참조 대상 29:11~12). 그러므로 우리는 형통하여 잘될 때도 잊지 말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도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2) 웃시야 왕이 여호와께 저지른 범죄는 무엇인가요? 그 범죄의 동기는 무엇이었나요?(16절)
웃시야는 강성할 때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교만은 악을 가져왔습니다. 그 악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였습니다. 왕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제사하고 분향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맡기신 일이었습니다. 왕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정해진 몫이 있습니다. 웃시야의 몫은 왕으로서 정직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분향하려 했다는 것은 그렇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요, 자신이 하나님의 일까지도 하려고 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제사장이 제지하려 하자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웃시야 왕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잘될 때 겸손해야 합니다. 다윗도 나라가 강성할 때 마음이 풀어져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왕이 아닙니다. 진정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3) 하나님은 웃시야 왕을 어떻게 벌하셨나요? 그 결과 웃시야 왕은 어떻게 되었나요?(19, 21절)
웃시야 왕이 분향하지 말도록 만류하는 제사장 아사랴에게 분노를 발하는 순간, 하나님은 가차없이 그를 치셨습니다. 웃시야의 이마에 한센병이 발생했습니다. 가장 잘 보이는 이마에 한센병이 생긴 것입니다. 이마란 존귀함의 상징입니다. 왕관이 닿는 부위입니다. 그런데 그 이마에 한센병이 발생함으로써 치욕의 왕관을 쓰게 된 것입니다. 웃시야에게 임한 한센병은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병이었습니다. 아사랴를 비롯한 제사장들은 웃시야를 성전에서 끌어냈습니다. 웃시야도 자신에게 한센병이 발생한 것을 아는 순간 성전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웃시야는 여호와의 성전에 영영 나올 수 없었습니다. 나라도 아들 요담이 대리로 다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에서 분향하려는 그를 영영 성전에 나올 수 없게 하심으로써 그의 교만을 징계하셨습니다. 우리의 몫에 만족할 줄 알고,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