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치는 자의 소리(사40장)

사40:3-5의 내용은 신약 시대에 등장한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써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게 된다. 본문에 나타나는 '외치는 자의 소리'는 히브리 원어로 arq(카라)인데 이를 번역하면 '어떤 외치는 사람의 소리'란 뜻이 된다. 이것은 외치는 자의 모양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데에 대한 표현이다. 이것은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어디까지든 예수그리스도만 높이려 했던 세례 요한의 사역의 자세를 가리킨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은 예수께서 오실때에 그의 구원에 참여할 자들의 마음의 준비를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골짜기'같은 음흉한 생각이 없어야 하며, '산'과 같이 교만한 생각도 갖지 말아야 하고, '고르지 않은' 심리도 정리해야 된다. 음흉한 것은 거짓이며 그것은 복음과는 원수가 된다. 거짓은 마귀에게서 난 것이기 때문이다. 산과 같이 높은 교만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한다. 교만한 자는 자기 힘으로 믿을수 없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 힘으로는 주님을 믿을수 없는줄 알고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 바로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2. 야훼의 종
'종'이란 단어는 보다 적절하게는 노예를 의미한다. 그러나 종이라고 해서 반드시 그 주인에게서 경멸을 받았다고 볼 필요는 없다. 일반적으로 '종'이란 용어는 계약에 있어서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지니는 관계를 표현하였다. 그리고 종은 그의 주인에게 그의 보호와 사랑이란 용어속에 포함되어 있는것 즉 계약이 있어서 두 당사자를 연합시키는 정서적 결속을 바랄 자격을 지녔다. 어떤 신이든 그 신에 대한 예배자들 또는 신봉자들도 그 신의 종들이었다. 개개인들도 그 신의 종들이었다. 개개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백성의 계층들도 '야훼의 종'으로 불린다. 이들 가운데 탁월한 것은 예언자 계층이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특히 아히야, 에리야, 요나, 이사야가 그같이 언급된다. 야훼는 그의 종을 민족들을 위해 '공의'를 가져오기 위하여 야훼의 영을 부여받은 선택된 자로서 소개한다. 그는 조용하며 겸손하게 일할 것이며, 그가 지상에 공의를 세울 때까지 실패하거나 낙담하지 않을 것이다.

1) 누구를 가리키는가?
이 종이 누구인가에 대한 많은 답변들이 제기되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종은 이스라엘일수도 있고 또는 한 개인일수도 있다. 만일 그가 개인이라면 그는 왕인가 예언자인가? 더욱이 그가 왕 또는 예언자라면 그는 이미 역사에 등장된 개인인가? 아니면 앞으로 오게될 개인을 가리키는 것인가? 보다 넓은 맥락에서 볼때 이스라엘은 '나의 종'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어지는 맥락속에서의 종은 이스라엘에 대해 한사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병합된 한개인 또는 그룹을 가리킬수도 있다.

2)종교적 의미
종이 누구였는가라는 문제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종이 행할 것은 무엇이었는가하는 질문이다. 고난은 그것이 달게 받아들여질때 위대한 정화자가 될수 있다. 예언자는 누구나 그의 사역 과정에서 고난에 봉착할수 있다. 호세아가 그랬으며, 예레미야도 그랬다. 종은 그의 사역중에 고난에 봉착하고 수용한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국면에 이르러 고난은 그가 자신의 사역을 성취하는 수단들이 되었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을 속죄물로 삼는데 그것은 대속적인 고난이다. 그결과 우리가 감동을 받아 회개하게 되고 죄를 고백하며 행동을 바꾸게 된다. 이 종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 곧 이방들을 위하여 의를 이루기도 한다. 이와 관련하여 고난의 소명에 관해서는 더이상 언급할 것이 없다가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상속자로 자신을 드리심'으로 우리를 깨우치신다.

3. 구약에 등장하는 성령

구약 사상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문제보다는 하나님의 활동에 더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때문에 히브리 기자들은 성령과 하나님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성령은 그것이 작용할때 그 존재를 알수 있으며 이때 성령의 작용은 하나님 자신의 활동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구약에서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될수 있다는 사실이 성경 여러곳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는 물질적이며 세상의 질서에만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육체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세계에 참여하고 있는 것과 대조시키고 있다. 그는 또한 성령을 하나님과 같이 인간과 관계를 맺고있는 하나님의 인격으로 묘사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령을 야훼의 인격 혹은 마음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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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주인이다. 따라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것 위에 뛰어나시며, 어느 누구도 그분을 능가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 분이 이땅에 종의 모습으로 오신다. 왜 그분은 종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시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하여 그분의 깊은 뜻을 찾아보아야 한다.

1. 여호와의 종(사40-42장)
사40:3-5에 나타난 예비되어야할 그길은 누가 사용할 것인가? 겔10:18,19에서 보듯이 성전은 여호와의 거처였는데 여호와께서 그곳을 떠나신 때가 있었다. 이는 여호와가 그의 백성을 떠나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셨던 여호와가 다시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길을 예비하고 평탄케 함은 전형적인 동양의 방식이다. 이 길을 사용한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사42:1-4에 여호와의 종이 나타나는데 그종은 여기 길을 사용하는 자와 연관이 있는가? 그리고 그종의 모습은 어떠한가?

1) 구원자
먼저 예비되어야할 그 길을 사용할 분은 여호와 자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길은 '여호와의 길'이라 했다. 이 길로 오시는 여호와가 사42:1-4에 오실 여호와의 종과 동일 인물인가? 먼저 사42:1에 '하나님의 신'을 받은 자가 여호와의 종임을 나타낸다. 그러면 그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대표적으로 모든 이방에까지 진리로 공의를 베푸는 자의 모습이다. 이는 이방에 빛이 되며 소경의 눈을 밝히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실 모습이다. 이 모든 내용이 나사렛 회당 설교때 이루어졌음을 예수께서 선포하셨다(눅4:16-21). 결국 여호와의 종의 모습은 구원자의 모습이다. 이 구원자는 겸손하시어 나귀 새끼를 타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2) 교회의 할일
오늘날 교회가 큰 고랑에 빠졌는데 이는 개교회주의를 말한다. 자기 교회를 중심으로 단단한 울타리를 친다는 뜻이다. 그 울타리가 단단할수록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구원자 되신 예수님의 온유를 따라 개교회만을 위한 목소리를 낮추고, 주님의 사랑을 널리 전할수 있어야할 것이다.

2. 유일신 여호와(사43-45장)
이사야 43장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 전체적인 의미(회복)의 강한 표현은 '두려워 말라'에 있다. 그 두려워하지 않을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유일한 구속자이시기 때문이다(사43:1).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하나님께서는 소용없는 일로 간주하고 말씀하셨다. 어떤 근거에서 두려움이 소용없는가? 그리고 그 '구원자"라는 표현은 무슨 의미로 주어지는가?

1) 이스라엘의 창조자
사43:1은 유일신 여호와가 "두려워 말라"는 이유로 두가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너를 구속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확실하게 도움을 구할수 있는 자에 의해서 자신들의 위험이 벗겨졌다는 것이다. 즉 올무에서 해방된 새와 같은 것이다. 두번째는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고 했는데 이는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상대를 불렀다는 의미이다. 이 특수한 목적은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하나님께서 새일을 행하심은 모두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를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사43:19,20). 결국 이것을 알고 확실히 믿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자라는 표현은 '주인'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 우리 삶의 주인
이스라엘의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들(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새일(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을 성사시키실 것을 말씀하셨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실때 우리들은 새일을 얻게되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의 구원자, 여호와(사46-48장)
처음과 나중은 누구인가? 그의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하늘을 폈다. 그리고 그분은 이스라엘을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셨다. 이사야는 본문을 통해 그분께서 하신 일을 땅끝까지 반포하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가 소식을 전하는데는 두가지의 내용이 있다. 그것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다. 모든 사람이 알게하는 일에 대해서 좋은 소식은 서로에게 기쁨을 주지만 나쁜 소식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어떤 것을 반포하라는 것인가?

1) 이스라엘을 구속하신 하나님
처음과 나중되신 분은 구원자 여호와이시다. 그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세상의 역사 전부를 바퀴처럼 둘러싸신다. 그에게는 모든 만물과 역사의 처음과 마지막이 절대적으로 현재이다. 그분께서 "그 종 야곱을 구속하셨음"을 선포하라고 이사야는 명령형을 사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신약에서도 지상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는데(눅24:44-49; 막16:15; 마28:18-20) 이는 예수께서 인류의 대속물로 죽으사 그를 믿는 자들을 '구속하심'을 가리킨다. 이런 의미로 볼때 이스라엘을 구속하심과 대속제물이 되시어 그 백성을 구속하신 예수그리스도는 그 내용을 같이하고 있으며, 온땅에 전파할 한가지의 내용임을 알수 있다.

2) 선교의 사명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실 것을 엄숙하게 말씀하신다. 이는 구분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의 처지도 이스라엘과 다를바 없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원의 체험을 한 자는 이사야의 선포 명령을 따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인자하심 속으로 들어올수 있도록 나팔수의 역할을 담당해야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가 이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 함이다. 그분은 한번도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없으시다. 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곳에만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의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구속의 방법이 권위와 위엄의 모습이 아니라 천한 '종'의 모습이었다. 그분은 겸손히 마굿간에서 출생하시었고 머리둘 곳조차 없으셨다. 그분의 이러한 모습을 상기한다면 우리 인생의 모든 교만한 생각들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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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히스기야의 회개(사38장)

1) 벽면을 향함의 의미
히스기야가 얼글을 벽으로 향한 목적은 하나님께 전심전력으로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세상 의술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함으로 고침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의 기도 가운데서 "내가 주의 앞에서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하였다"고 하는 대목은 마치 바리새인들의 기도와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공로를 알아달라는 기도가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믿는데 있어서 외식함이 없이 진실과 전심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의 행위도 유다의 일반 민중처럼 불신앙으로 애굽을 의지하는것 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의 무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당면한 문제에 있어서 처신 방법을 신앙적으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한 교훈
첫째, 사망에 대한 선언을 받고도 기도할수 있게된 용기이다. 사람은 평소에 기도를 잘 하다가도 난관에 부딪히면 중단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렇지 아니하였다.
둘째, 그가 얼굴을 벽면으로 향하고 기도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세상을 단절하고 하나님께만 전심하는 태도이다.
셋째, 그의 기도에서 경건한 생활이 뒷받침되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주님의 갚아주심만 바라보고 행함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고생을 한만큼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열매와 상급을 받는 법이다. 남들에게 신세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자립하는 자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이다.
넷째, 그는 심히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참된 기독교인은 인생의 비애를 정시하기에 눈물을 흘릴줄 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의 문제를 정실할때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주기를 원하신다.

2. 히스기야의 교만(사39장)

히스기야는 바벨론에서 온 자에게 전국의 보물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히스기야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죄악을 범했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① 외국에게 잘 보아고자한 아부 행위로써의 죄악이다.
히스기야는 병들었을때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전심으로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저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신앙이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외국 열강의 호의를 사려고 애쓰는 모습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이다. 신앙인으로서 사람에게 아부하여 처세술로 내왕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에 독을 끼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데 온통 주의를 기울이며 사람의 천거를 받아서 일하려 한다. 신앙인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는(고후6:4-10)자세를 가져야할 것이다.
②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모든 국보를 보인 것은 하나님을 증거하지 아니하고 세상보물을 자랑한 죄악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고침을 받았으니 그일로 찾아온 바벨론 사신 앞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며 높였어야 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세상 보물을 자랑하였다. 이것은 히스기야의 너무도 급격한 타락이다. 그렇다면 그가 하나님을 그렇게도 속히 잊어버리고 마음을 보물에 두게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의 몸이 건강하여지고 나라도 평안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신자에게도 유익함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3. 히스기야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 유다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재위 시기는 B.C. 715-687년경이다.
히스기야는 2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29년간을 통치했다. 그의 어머니는 스가랴의 딸 아비야였다. 그의 즉위 연도는 히스기야 왕 통치 제14년째에 일어난 B.C. 701년 산헤립의 원정으로 미루어서 확정될수 있다. 그의 통치의 종료 연도는 왕하19:9에 언급되어 있는 디르하가의 즉위 이후의 시기에 속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집트의 자료는 디르하가가 B.C. 689년경에 왕이 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히스기야는 후세에 의해서 유능하고 원기 왕성한 통치를 한 경건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히스기야는 유대 역사에 있어서 위기의 시대에 왕위에 올랐다.
유다는 수리아 에브라임 전쟁과 아하스의 치세에서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으로 크게 약화되었다. 앗사리아에 매년 바치는 공물은 유다의 재정에 있어서 견딜수 없는 짐이었다. 게다가 종교적 상황은 아하스 아래서 혼란에 빠져들었다. 히스기야에 의한 종교개혁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산당을 없애고 주상을 깨뜨렸으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렸다. 히스기야의 또 다른 관심사는 유다를 정치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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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는 산헤립과 히스기야가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산헤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고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이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사단이 예수를 시험하는 사건을 연상하게 된다. 이사건은 히스기야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어떻게 주어졌으며, 진정한 승리자는 누구인가를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 하나님께 도전하는 앗수르(사36장)
앗수르왕 산헤립은 주전 722년에 북왕국 이스라엘을 함락시킨후 유다를 침입하여 거의 모든 성읍을 탈취하였다(B.C. 714년).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뿐이었다. 이때 랍사게가 사신으로 성앞에서 연설을 한다. 여기서 랍사게는 사람 이름이 아니고 관직명을 말한다. 이 사람은 이사야의 말과 히스기야의 말을 조롱하고 히스기야의 정책을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백성들의 마음을 요동시키고 있다. 그런데 이 랍사게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말을 하고 있다. 과연 어떤 내용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며 여호와를 비난하는가?

1) 북이스라엘을 보라
랍사게가 이사야와 히스기야에 관해서 여러가지로 비난하다가 하나님에게도 그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북왕국 이스라엘(사마리아)을 보라"는 것이었다. 즉 열방(하맛과 아르밧)의 신들도 구원하지 못했으니 여호와는 더욱 구원할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로 인하여 징벌을 받았을 뿐이다(왕하 18장). 결국 앗수르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인 것이며, 도구로 쓰인 입장에서 그 도구의 주인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무지는 파멸을 가져오게 된다.

2) 외로운 핍박
습2:8-10은 모압이 교만하여 여호와의 백성을 훼방함으로 심판을 받게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의 훼방은 일단 하나님 백성의 잘못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히스기야 시대의 사마리아는 하나님 앞에 범죄함으로 그들이 하나님께 당한 일을 앗수르가 비난하고 나섰다. 우리는 믿지않는 자에게 비난과 핍박을 받을때가 있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으로 받는 것은 의로운 것이 되지 못한다. 마5:11에 언급한대로 "예수를 인하여" 비난과 핍박을 받도록 해야 한다. 이는 하늘의 상이 보장된 것이다.

2. 앗수르의 패망(사37장)
앗수르의 패망하는 모습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진중에 들어가서 185,000명을 죽였다. 그리고 그왕 산헤립은 자기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37:33의 예언대로 활 한번 쏘지 못하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한채 패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패망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는가?

1) 기도
성경은 기도의 능력을 항상 기록하고 있다(삼상1:27; 막11:24; 행4:31). 오늘 히스기야는 어려움의 처지에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 이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즉시 응답하시어 "그들은 오던 길로 돌아가리라"고 하셨다. 결국 히스기야의 승리는 하나님의 승리였고, 앗수르의 패망의 원인은 히스기야의 기도와 그에 따를 응답이었다. 히스기야는 손 하나 움직이지 않고 큰 전쟁의 승리자가 되었다. 실제적으로 히스기야는 기도의 승자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난 것은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러왔을때 엘리사가 기도하여 그 사환 게하시의 영안을 열어 하나님의 군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왕하6:17). 이렇듯 기도의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는 하나님께만 감사와 찬양을 올려야할 것이다.

2) 기도하기를 쉬는 죄
삼상12:23에 사무엘은 백성에게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치 않겠다고 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아니한다. 그러나 기도를 하지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한표현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한시도 살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신의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예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열심히 기도하셨다. 우리는 모든 어려움들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로써 해결해야 한다.

3. 히스기야의 치유와 교만(사38,39장)
히스기야의 와병 기사는 욥의 그것과 비슷하다. 히스기야는 자기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런 고통스런 병을 주셨다고 깨닫게 된다. 욥 역시도 자기에게 이런 고통이 주어질수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자기를 위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풀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히스기야는 대하32:31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시험대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 즉 히스기야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1) 과시욕(교만)과 안일함
사39:4을 보면 모든 은금과 무기를 드러내 보이는 히스기야는 어떤면에서는 어리석게 보인다. 한나라의 왕이 그 나라의 1급 비밀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의 속국으로써 므로닥발라단은 앗수르에 발란을 일으키고자 히스기야의 동참을 유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공격때처럼 기도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과 안일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다.

2) 변치않는 신앙 생활
대체로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때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나 자신이 훌륭해서 이 어려움을 극복한듯이 그마음이 변한다. 그러나 온전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움과 시험을 당해도 요동하지 않고 견고한 믿음가운데 시련과 어려움을 이겨 나간다. 편안할때나 어려울때나 늘 하나님을 의지하는 변치않는 신앙 생활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산헤립과 같은 책망과 멸망을 받게 된다. 산헤립은 자신의 능력(군대의 힘)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와의 전쟁에서 참대한 패배를 당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할때 승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승리후 실수를 범하는 히스기야를 보면서 선한 줄로 생각할때 넘어질까 조심하는 깨어있는 신앙이 필요함을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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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견고한 기초(사28장) 
사28:16에는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수 있는 문제는 누가 이 견고한 기초이며, 이 기초는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리고 이 기초를 만든 분은 누구인가? 하는 것들이다.

1) 하나님의 장엄한 목적
회개하는 죄인의 소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에 대한 출발점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창조의 약속 가운데서(창3:15), 시초부터 제정된 신비한 희생 제의 가운데서(요1:29),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3:24)으로서, 모세 율법의 모든 체계 내에서, 보다 훨씬 분명하게 선포되어 있는 시편과 예언 가운데서 추적할수 있다. 여기서 여호와에 의해서 선포된 기초는 그가 인류에게 행하시고 계시한 모든것 중에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2)기초의 필요성
오늘날의 사람들은 너무나 민감하여 하나님을 향한 기초를 필요로 하는 반면 모든 사람은 각자가 다 자신의 기초를 놓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에게 어떤 배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용서될 수도 없고 죄인이 구원함을 받을수 없다고 생각한다. 적절한 기초가 어떻게 놓여질수 있을까? 적절한 배상을 어떻게 할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인간이 대답할수 있는 배상의 종류는 단 세가지이다. 즉 회개와 선한 사역 그리고 자발적인 고난이다. 그러나 이것 위에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가 우리를 감싸안지 않는 이상 우리는 완전히 회복될수 없다.

 
2. 화평


1) 화평의 때
우리는 누구나 평화와 축복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해치며 멸망시키는 일에 열중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약 공의가 세상에 펼쳐져 있다면 거기엔 화평도 퍼져있을 것이다. 참된 의와 유사한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지 또한 그 유사함의 정도에 비례해서 화평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또한 화평도 증진시킬 것이다. 의가 화평을 불러일으킨다는 말은 우리를 안심시키는것 같지만 사실 무척이나 두려워해야할 말이다. 의가 화평을 낳게 되리라고 선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와 동시에 그것외에는 그 어떤 것도 화평을 낳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의와 화평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완전한 의가 죄많은 인류에게 화평을 가져다 줄수 있을까?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헤아릴수 없는 지혜의 조언을 받아 생각해낸 방법으로써 그가 우리에게는 황송스럽게도 인간을 그의 화평을 함께 나누는 자로 만들기 위해 인간에게 그 자신의 의를 부여하시는 방법이었다.
즉 그것은 그의 아들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결코 화평만을 주시지 않는다. 그는 오직 의와 함께만 그것을 주신다. 만약 그가 의이신 주가 아니었다면 그는 평강의 왕이 될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의를 받기 거부하는 자들은 그의 화평을 받을 수가 없다. 그는 그들에게 화평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칼을 가져다 준다.

 

3. 광야

 

1) 공간적 관점
광야는 진정한 사막을 가리키는 것으로 팔레스틴 남쪽과 시나이 반도 남서쪽에 펼쳐진 사막을 가리켰다. 이 불모지는 나무 또는 어떠한 식물도 자라지 않았고 가축이나 인간도 살지 않았다. 이 광야를 모험하는 사람은 누구나 굶주림과 갈증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고, 또한 약탈자와 무법자, 야수, 뱀, 전갈 등에게 희생당할 위험을 각오하게 되었다. 이것은 광야가 아직도 원시적인 혼돈 상태 즉 창조주로부터 심판받은 곳임을 암시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2) 최근의 연구
학자들은 성서 문학에서 광야의 이해가 서로 다르거나 외관상으로 상충되는 입장들을 서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성서에는 광야와 광야 생활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충분한 본문상의 증거가 있다. 그러나 광야에 대한 가장 이상주의적 이해는 이스라엘 중간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몇가지 불분명한 주석에 기인한 것이다. 현대의 사막 연구에서 사막을 이상화한 것은 신학적 개념들로부터 그리고 영적 행복을 달성하기 위하여 사막 생활의 근본 특성을 필요 조건으로써 기꺼이 받아들인 생득론자의 개념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구약의 사상 세계에서 약속의 땅은 사막의 경계선 너머에 있었고, 이 사막은 혼돈과 불모지의 상징이었다. 이 둘 사이의 대립은 예루살렘과 시온성 그리고 시내 광야와의 대조속에서 개념화되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하나님 나라에 의로운 왕이 나타나며 그로 인하여서 엄청난 축복이 임하게 되는데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되고 있다. 과연 그 나라의 통치 방법은 어떤 것이며, 지금의 통치와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는 어떤 기쁨이 충만한지를 생각해 본다.

1. 멸망과 구원의 차이(사28-30)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사망과 언약했기 때문에 재앙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리라고 하며 거짓과 허위가 그들의 피난처라고 말한다(사28:14,15). 또한 그들은 '귀하고 견고한 기초돌'을 믿는 자들이다. 여기의 견고한 돌은 모퉁이 돌과도 연결된다. 슥10:4과 엡2:20은 모퉁이 돌이 예수그리스도이심을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견고한 기초돌은 직접적이진 않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수 있다. 그러면 과연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멸망과 구원
성경은 먼저 전자에게 '재앙이 유행한다'고 언급하며, 후자에게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전자에게는 재앙이 유행하듯 그들에게 덮쳐도 하나님께서 돌아보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이며, 후자에게 적용되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한다는 표현속에서는 그들이 급절하게 될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돌보셔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근거는 바로 견고한 기초돌을 믿는 믿음이다. 이 돌은 다윗의 주권이 아니라 다윗의 진정한 씨(자손)이다. 이것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에서 난 것이라는 바울의 말을 입증하는 듯하다(롬1:17). 여기서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인이 서야할 자리
모든 사람은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도 천국에 갈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전에 문제가 되었던 종교다원주의이다. 여기 본문의 내용도 '견고한 기초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믿어야함을 강조했고, 행4:12도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수 없나니"라고 못박고 있다. 인간사의 모든 주체가 하나님임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설 자리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좁은 문인 것이다.

2. 의로운 왕과 회복의 약속(사31-33장)
사32:1에 "장차 한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라고 언급한다. 물론 문장의 문법상 미래에 있을 내용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는 의로 통치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았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당시 통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그리고 장차 다스릴 의의 통치는 어떤 모습인가? 그 두모습은 어떤 다른 두가지의 모습을 나타낼 것인가? 그리고 장차 그 통차자는 누구인가? 이 통치자는 인간의 통치 방법이 아닌 다른 통치 방법을 보일 것이다.

1) 예수그리스도의 공의와 사랑
먼저 당시의 통치 방법(모습)은 사33:1에서 찾아볼수 있다. 학대와 속임이 그 대표적 내용을 담고 있다. 사33:1-6은 구원을 바라는 기도인데 이러한 학대와 속임에서 해방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이 학대와 속임속에서는 공의와 사랑을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장차 의로 통치하는 곳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사32:2), 사랑의 의미를 간직하신 분이 다스릴 곳이다. 그리고 "공평으로 정사할 것"(사32:1)을 약속하고 있다. 그리고 "광풍을 파는 곳"(사32:2)이라 했는데 이는 어려움을 당한 자에게 큰 사랑을 베풂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분은 예수그리스도뿐이시다. 그분은 이땅에서 공생애 기간에 이러한 통치의 모습을 보여 주셨다. 결코 불의와 타협치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않으시는 분이셨다.

2) 여호와께서 구하시는 공의
미6:8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공의를 베풀고자 정직을 행하면 오히려 그 소속 단체에서 따돌림을 받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정직히 행하고자 공무원이 뇌물을 거절하면 저만 똑똑한 척한다고 배척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한 기독교인은 온전한 하나님의 공의를 사회에 희생적으로 보여주어야할 것이다.

3. 이스라엘에게 임할 축복(사34,35장)
하나님께서 새롭게 한 왕국은 육적 중심의 모습이 아니라 영적 중심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에게 임할 이 왕국은 과연 어떤 모습이며, 그곳에서 살 백성은 어떤 자들인가? 영원한 희락과 즐거움을 얻을 이들은 무엇을 얻은 자들인가? 그리고 이들에게서 사라질 것은 무엇인가?

1) 사막의 백합화
먼저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사35:1)라고 했다. 여기서 광야가 주는 의미는 온세상을 의미한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기쁨이 넘침은 엄청난 변화를 말해주는 것이다.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고생한 이스라엘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었다면 그들의 생명은 존재할수 없었다. 그러한 고난의 장소가 광야인데 그 광야에서 기쁨이 그리고 사막이 백합화를 피운다. 이는 창조 질서의 변화를 예고한듯 싶다. 사막에는 물기가 없기에 백합화와 같은 연약한 식물은 견딜수 없다. 그러나 그곳에 백합화가 핀다. 이곳이 하나님의 새 왕국이다. 그리고 영영한 희락을 얻을 자들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을 자들이다. 여기에는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
사막의 백합화는 만물의 회복을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에 의해 그 선취함을 보았다. 그리고 오직 그분만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며 본연의 질서로 회복시키신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지는 회복의 나라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땅에서 치유의 역사로 모든 영적 병든 자들에게 희망의 빛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설 자리를 확인하라고 말씀하신다. 요셉이 결코 범죄의 편에 서지 않았듯이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편에 서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과 공의가 가득한 곳이며,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들을 온전한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곳이다. 이런 그리스도의 왕국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목소리를 더 높여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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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사야서에 등장한 이스라엘의 죄

1) 우둔함
심판하기 전의 이스라엘의 모습(사3:16-23)은 콧대가 높고, 온갖 외적인 치장을 다하고 있었으며, 짐승만큼의 상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사1:3).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깨닫지 못했다. 우둔한 자들이었다.(사28:9-13).

2) 외식함
그들은 자신의 죄를 뉘우침이 없이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역겹게 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심을 말씀하신바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했으나 마음으로는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었던 것이다(사1장; 사29:13).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예배를 바라신다. 형식적인 십일조, 예배는 기뻐하지 않으신다.

3) 열매없는 포도원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비유하기 위해 쓰여진 식물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이다.
특별히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열매없는 포도원에 비유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 포도원을 위해 기름진 산에 제일 좋은 포도나무를 심으셨으며, 땅을 파고, 돌을 고르셨고, 망대를 세우고, 인내하시면서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셨다. 그러나 포도원에서 거둘수 있었던 것은 시디신 들포도였다.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것으로 삼았으며, 술과 연회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올바로 판단하지 않았으며, 공평을 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포도원의 울타리를 헐고 더이상 포도원을 가꾸지 못하도록 하셨다.

4)거짓 선지자
사9:15,16에는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거짓 선지자의 인도를 받는 자들은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으로 피난처 삼게하고 허위와 과장 아래 숨게한 자들이었다(사28:14,15).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잘못된 가르침에 귀기울여 잘못된 길을 따라가면 그길은 멸망의 길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셈이 되는 것이므로 항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2. 심판에 대한 예언
심판에 대해서는 사2:10-22; 사6:20-21; 사13:6-13; 사24:1-13; 사34:1-10; 사42:13,14; 사51:6;사63:1-6;사66:15,16에 기록하고 있다. 환난에 대해서는 크게 땅에 대한 징조, 하늘에 대한 징조 그리고 인간들에 대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땅에 대하여
땅이 무섭게 흔들려 그 자리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떠나게 될 것이며, 황폐하여지고 뒤엎어지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불에 태워지고, 깨어지며, 살해당한 자를 가리우지 못하게 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

2) 하늘에 대하여
재앙은 땅에만 임하는 것이 아니다. 해와 달고 별이 어두워져 빛을 내지 않을 것이며,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이 두루마리 같이 말릴 것이며, 흔들릴때 나무에서 떨어지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늘의 별들이 떨어질 것을 예언하고 있다.

3)재앙에 대한 인간의 반응
이러한 재앙은 인간의 마음을 두려워 녹아지게 만들 것이다. 그들은 암혈과 토굴에 숨을 것이며, 해산하는것 같은 고통을 맛보며, 어떤 일에서도 기쁨을 누릴수 없게 된다. 이는 너무도 많은 주검들이 각지에 펼쳐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는 너무도 가혹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3. 여호와의 지키심

이사야 27장에서 이사야는 여호와께서 뱀 리워야단 곧 바다의 용(사단)을 죽이시며 포도원지기가 되어 그들을 지키겠노라고 약속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포도원은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피어 그 결실로 지면을 채울 것을 약속받은 것이다. 그리고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여호와께 경배하게 된 것을 예언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함을 용납하시지 않고 벌을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 하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단의 세력으로부터 지키시고 하나님의 성산에서 하나님께 경배할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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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미래에 대해 알수 없다. 단지 우리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뿐이다. 그분의 특별 계시인 성경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 새왕국의 도래에 대해 항상 말해오고 있다. 그런데 그 왕국이 도래하기 전에 심판이 있음도 빠뜨리지 않는다. 본연구에서는 어떤 자가 심판을 받고 어떤 자가 새왕국 백성이 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세상에 대한 심판(사24장)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사24:3)는 심판의 모습이 처참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세상을 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장)고 하셨다. 이런 세상이 어찌하여 험악하게 파괴되어야 하는가? 분명 거기에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본문은 그것을 무엇이라 하는가? 그리고 백성중에 어떤 자가 쇠약하게 된다고 했는가? 이것은 예수의 어떤 말씀과 연결되는가?

1) 파기된 언약과 율법
사24:5에 중요한 단어 세개가 나온다. 먼저 이 단어들을 보면 첫째, hrwt(토라; 율법)로 이는 교훈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본문에는 복수로 쓰여서 율법에 포함된 모든 교훈을 의미한다. 둘째, qh(호크; 율례)란 단어인데 이는 도덕과 의식의 의미를 담은 것이다. 셋째, tyrb(뻬리트; 언약)로 이는 계약을 의미한다. 즉 택한 백성에게 주어진 그 '계약'을 의미한다(출19:6; 출29:45; 레26:12).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아시기에 그들의 삶의 규범과 그들의 위치를 정하여 하나님과 약속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약속들을 파괴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까지도 특별히 주어진 언약을 파기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그리고 더욱 쇠약해질 인물들은 '높은 자'들이다. 이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23:12)고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치 말아야 함
우리에게는 중요한 언약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의 구원 진리를 믿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수 있다(요3:16). 물론 이 언약은 구약 시대부터 예시되어 왔으며 그 진정한 내용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이 십자가 언약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늘 본문의 심판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 언약을 따르지 않을 경우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원히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어야할 것이다.

2. 새왕국에 대한 찬양(사25,26장)
평강에 평강으로 지킴을 받는 자는 어떠한 자인가? 사26:3에 '심지가 견고한 자'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요동함이 없는 상태를 설명한다. 즉 심지의 견고함을 위해 필요함을 채우는 자가 평강에 평강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리고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사26:4)라고 했는데 여기서 영원한 반석은 누구를 견주어 말하는가? 그리고 이 반석과 심지가 견고한 자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1) 주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먼저 본문에 &ms(싸마크, 시118:8; 시112:8)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견고히 세웠다'는 뜻이다. 견고한 세움은 기초가 확실해야 한다. 본문에서는 이 기초를 '영원한 반석'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영원한 반석이신 여호와를 기초로 견고히 세움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평강에 평강으로 지킴을 받을 자는 바로 '주를 의지하는 자'이다. 이런 자는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자이다. 즉 모든 생각, 행동 그리고 소망의 근거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은 영원한 반석에 기초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도 의를 배우지 못하고 정직한 곳에서 불의를 행하게 된다.

2) 행함이 있는 마음
우리의 곁에 있는 많은 신앙인들의 약점은 그 믿음을 세우기 위한 행함이 적다는 것이다(약2:14). 교회안에서 정직함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사회 생활에서 그 정직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이 본문의 악인의 모습(의를 배우지 않고 정직한 곳에서 불의를 행함)과 결코 다르지 않다.

3. 새왕국의 백성들(사27장)
심판의 날에 이방의 멸망당함과 같이 그 백성을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는가? 또한 그 모든 징벌 가운데서도 여호와께 돌아와 경배할 자들은 누구인가? 과연 어떤 인물들이 여호와께 돌아오는가? 율법을 지킨 자들인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들인가?

1) 멸시받는 자
사27:13은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여호와께 경배를 드리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물론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멸망때 흩어졌던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의 모든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을 멸하실때 그들중 구원할 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스라엘)이요, 잠시 흩어져 이방에서 고통을 받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새왕국 백성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형성된 자들로 본다면 이스라엘의 멸시당함과 같이 이땅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멸시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완전한 파멸이 없음
하나님은 택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으셨듯이 이 시대의 신앙인들도 부름받은 자는 결코 하나님께서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재림때 나팔부는 그때까지 주 안에서 살아간다면 그들은 주 예수의 재림때에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사27:13)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로써는 도저히 구원을 받을 길이 없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언약을 지키는 믿음이 꼭 있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우리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새왕국의 백성이 되게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항상 신앙의 자리를 다져가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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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벨론에 대한 책망(사13:14,21)

이사야서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명확하게 예언하고 있다. 바벨론은 거짓 종교와 우상 숭배 그리고 극도의 자만에 빠져있던 곳이었다.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심지로 표현되기도할 정도로 영적인 의미를 갖고있기도 하다.
이러한 바벨론에 대해 이사야는 메대 사람들에게 멸망당할 것이며 바벨론의 강력한 군대는 사나운 개에게 놀란 노루가 쫓기듯이 각기 본향으로 도망하고 그들의 아이들은 살해당하고 아내는 능욕당할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는 이일이 실현되기 200년 전에 예언하였는데 그의 예언은 바벨론이 당시 그들의 자리에서 재건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2. 앗수르(사14:24-27)

앗수르는 당시 막강한 군사력과 잔인함으로 팔레스틴 지역을 평정해 나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산 중에서 극단적인 무례함을 가진 앗수르를 무찌르시며,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앗수르의 멍에를 거두어 주실 것임을 약속해 주셨다.

3. 블레셋(사14:28-32)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올 당시부터 계속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이다. 유다왕 아하스가 죽기 전에 블레셋을 쳐부수었는데 그가 죽자 블레셋은 기뻐하고 있었다. 그러나 블레셋은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에게 이기지 못할 것이며 앗수르의 사르곤 왕에게 평정될 것임이 예언되었다.

4. 모압(사15,16장)

모압은 이스라엘의 계속적인 적이었고 롯과 그의 딸이 낳은 족속이었다. 또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던 이스라엘에 대해 변절한 선지자 발람과 결탁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의 길로 접어들게 하였다. 모압은 하룻밤에 주요 도시가 하나님으로 인해 멸망당하여 슬픔으로 가득찬 나라가 되었고,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바쳐왔던 조공을 더이상 바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앗수르에게 침략을 당하는 심판을 선고받게 되었다.

5. 다메섹(사17장)

수리아의 수도였던 다메섹은 북이스라엘과 연합하여 유다에 대항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을 의지했다는 것을 뜻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어 급기야는 디글랏빌레셀에 의해 두연합군은 포위되어 패배하였으며 살만에셀에 의해 국외로 끌려가고 말았다.

6. 구스(사18장)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되는 이 나라는 이스라엘에 대항함으로써 하나님의 재앙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그러나 이 심판후에 구스는 예루살렘으로 귀한 선물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타나도록 되어 있다.

7. 애굽(사19,20장)

애굽은 심각한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이로 인해 애굽은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넘겨지기도 했고 이사야가 활약한 당시에는 매우 힘이 약한 군주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애굽은 자연 환경이 오염되고 여러 산업이 쇠퇴할 것과 앗수르의 침략을 받을 것이 예언되었다. 그러나 많은 환난후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자유롭게 통행하는 길목이 되었다.

8. 에돔(사21:11,12)

에돔에게는 밤과 낮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사21:12)는 구절처럼 메대가 에돔을 칠터인데 메대에게는 아침이요, 에돔에게는 치욕이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때도 이와 마찬가지로 어떤 이에게는 영광이 다른 이에게는 치욕이요, 두려움의 날이 될 것이다.

9. 아라비아(사21:13-17)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라비아는 지금의 베두인 족속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소수의 용사들만 살아남을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10. 두로(사23장)

두로는 페니키아의 도시로 각종 산업이 번창하고 발달한 도시였다. 이 도시는 그들의 부로인한 자만과 물질 만능주의에 젖어 있었다. 이로 인해 바벨론인들에게 망하기로 예언되었고, 그들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7년후 다시 재건되었지만 여전히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계속적인 타락의 길을 걸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책망이라는 것은 어떤 잘못이 드러날때에 있게되는 것으로써 책망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돌이킴이 있어야 한다. 본문에는 이방과 유다에 대한 책망이 나오는데 이 책망이 그들에게만 임한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 책망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도록 우리에게도 각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이러한 은혜에 대해 항상 감사해야할 것이다.

1. 바벨론에 대한 책망의 교훈(사13-16장)
바벨론은 일찍부터 하나님 대신 큰 우상을 경배하는 행위가 많은 곳이었다(창11:1-9). 그리고 계시록에는 대혼란 속에서도 이곳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중심 장소로 상징된다(계 17,18장). 이러한 바벨론이 이사야를 통하여 책망을 받게되는 요인은 무엇이었는가? 어떤 죄로 인하여 책망을 받게되는 것인가? 이들의 죄악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깨달음을 주고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오만과 거만
사13:6-16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의 흐름은 여호와의 날에 야기되는 큰 혼란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무분별한 파괴가 아니라 죄인들(사13:9)과 사악하고 교만한 자들(사13:11)을 구별하여 멸한다고 한다.
결국 이 메시지를 통해 볼때 바벨론의 중심적인 죄악은 바로 '교만'이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의 상징인 바벨론은 그들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2)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다고 하는 자들
인간이 헛된 자만심으로 우쭐거린다면 필연코 주님의 심판을 받을수 밖에 없다는 교훈을 배운다. 이사야가 선포한 내용의 교만속에는 인간들이 스스로 뭐나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자신의 권력이나 재물을 자랑하면서 남을 낮추어 보는 등의 행동이 포함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이러한 교만을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다.

2. 책망과 교훈(사17-20장)
북왕국 이스라엘(에브라임)은 앗수르의 공격에 대비하여 아람과 연합했다. 그런데 이들 두나라는 유다를 자기들과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시키려 한다(왕상22:31). 이런 에브라임과 아람의 성읍 다메섹에 대하여 이사야는 폐허더미가 될것을 예언하였고, 에브라임에 대하여도 견고한 성읍들이 황폐하리라고 한다(사17:9). 이러한 심판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의 죄악을 우리는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을 잊어버린 죄
먼저 에브라임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렸다고 사17:10은 지적한다. 그리고 다메섹은 이러한 에브라임과 합세하여 에브라임에게 우상의 씨앗을 심어준다(사17:10,11). 여기서 "네가 기뻐하는 식물을 심으며"는 육욕적인 구행으로 예배하는 이방인의 기질을 말한다. 암7:13을 보면 여로보암의 우매한 판단으로 이방 기질의 예배 수행을 국가 종교로써 인정해 준다. 즉 음란한 육욕적 예배 형태를 보장한 것이다. 이것의 근원은 모두가 '자기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임을 쉽게 알수 있다.

2) 영원한 하나님의 백성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확고한 신앙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선하심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을때 그 기쁨이 확고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자리잡는다면 어떤 것에도 끌리지않는 굳건한 신앙을 지킬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앙의 기쁨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자는 에브라임이 하나님을 잊어버린(망각함)것과 같은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능력의 반석'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항상 우리들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도록 성령님께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예루살렘에 대한 책망과 교훈(사21-23장)
앗수르의 군대가 예루살렘 성읍을 둘러싸고 있었을때 이 성읍은 그 군대를 대항할만한 능력이 없었다. 백성들은 적군이 이 성읍을 진격할때가 여호와의 심판의 날임을 인식하고 있었다(사22:12,14,15,25). 이런 와중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참회의 기도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원하는 바를 그들은 어떤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죄악을 범했는가?

1) 하나님의 뜻을 떠난 즐거움
예루살렘의 임박한 어려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머리털을 뜯으며 굵은 베를 띠라"(사22:12)고 하셨는데 이들은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사22:13)했다. 아마도 "내일 죽으리라"는 문구로 봐서 자기들의 처지에 자포자기하고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다가 죽자는 것이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정신을 가다듬어 자신의 신앙의 위치를 찾아야할 백성들이 오히려 자포자기로써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부인하고 있는 모습이다.

2) 웃을때와 울때
'기쁨'은 신앙인들에게 항상 있어야할 것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기쁨은 빌4:4에 언급하듯이 '주 안에서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여기 예루살렘의 기쁨은 일반적으로 '회개에서 우러나오는 슬픔'(고후7:10)에 위배되는 기쁨이다. 즉 우리 신앙인들은 웃을때와 울때의 의미를 파악할줄 알아야 한다. 나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회개할 자가 슬픔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거만하게 보일 것이다. 더욱이 오늘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슬퍼할때라고 명령함에도 그 시기를 깨닫지 못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연후에 베개가 젖도록 슬퍼함과 같이 회개의 슬픔이 신앙인들에게 필요하다. 오늘의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는 이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임하도록 기도해야할 것이다.

교만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께 가장 큰 죄악이다. 예수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을 위하여 여러가지로 강조하셨다(막10:42-45). 만약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가 있다면 그는 결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죄는 범치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만과 하나님을 망각하는 죄악은 서로의 연관성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잊지않을 것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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