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I. 야벳의 후손 10:1-5
야벳의 후손들은 이방 섬들에 나뉘어 살았다. 유대에서는 바다저편에 있는 곳은 어디나 '섬'이라고 불렀다(렘 25:22). 이사실은 우리로하여금 '섬들이 그교훈을 앙망하리라'(사 42:4)는 약속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약속의 말씀은 곧 이방인들이 돌이켜 그리스도를 믿게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Ⅱ. 함의 후손 10:6-14
본문에서 주목할만하고 교훈을 얻을수 있는 것은 니므롯에 관한 기사이다(8-10절). 여기서 그는 그시대의 위인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고자 결심하였다. 홍수전에 있던 용사들을 자극시켰던 정신이 이제 그안에서 다시 되살아난 것이다. 천성적으로 지배하려는 야심과 야망을 가지고 태어난듯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세상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교만한 정신을 꺾어 겸손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1) 니므롯은 훌륭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최초의 사냥꾼이었고 또 이일로 인해서 속담이 생길정도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1) 어떤 사람들은 그와 그의 사냥기술을 가지고서 선한 일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곧 그의 나라에 횡행하는 야수들을 제거함으로써 국가에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2) 다른 사람들은 그가 사냥을 핑계삼아 자기 수하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스스로 군주가 되고자 하는 다른 계략을 추구하였다고 생각한다. 사실 위대한 정복자들은 위대한 사냥꾼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의 역사에서는 알렉산더나 케사르가 일반 역사에서 묘사되듯이 그런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70인역에 따르면 니므롯은 여호와를 '대적하는' 큰사냥꾼이었다.
① 그는 우상숭배를 일으켰다. 그는 새로운 정부를 세우기위해 새로운 신앙을 일으켰다. '바벨은 창기의 어머니였다.'
② 그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압제와 강포를 계속하였다.
(2) 니므롯은 막강한 통치자였다. '그의 나라는 바벨에서 시작되었다'(10절). 그는 술책과 무력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권력을 장악하였고 그렇게함으로써 군주정치의 기초를 놓았다. 만일 니므롯과 그의 주변사람들이 이것을 시작했다면 다른 민족들도 그들의 공통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 즉시 한 수뇌아래 통합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통치가 어떤식으로 시작되었든지간에 그사실이 세상에 대한 큰축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을때'의 세상의 상황이 참으로 악화일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니므롯은 뛰어난 건축자였다. 필시 그는 바벨을 세우는 일에 건축자로서 활약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자기 나라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노아의 모든 후손을 다스리려는 그의 계획이 언어의 혼란으로 좌절되었을때 그는 '그땅에서 나가 앗수르로 들어가 니느웨를 건축하였다'(11절).

Ⅲ. 가나안의 후손 10:15-20
여기서 우리는 가나안의 후손 곧 그에게서 나온 가족과 족속들 그리고 그들이 소유했던 좋은 땅에 관한 기사를 보게된다. 가나안은 셈이나 야벳보다 더나은 땅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셈과 야벳이 더나은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은 그들이 축복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다.

Ⅳ. 셈의 후손 10:21-32
우리는 여기서 '이름'이란 뜻을 지닌 '셈'이라는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를 특징지우는 두가지 호칭들을 보게된다.
(1) 그는 '에벨 온자손의 조상'이었다. 에벨은 그의 증손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아르박삿이나 셀라 온자손의 조상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에벨 온자손의 조상'이라고 불리었는가? 아마도 그이유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곧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 에벨에게서 나왔으며 또한 그로인해서 '히브리 사람들'(Ebel→Hebel→Hebrew)이라고 불렸기 때문일것이다. 14:13절을 보면 '히브리 사람 아브람'이라고 되어있다. 즉 거룩한 언어인 히브리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자 에벨의 이름을 따라 '히브리어'라고 불렸던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때 아마도 바벨의 혼란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신 특별한 표지로서 그언어를 그의 가문을 통해 보존시키셨던것 같다. 그래서 영감받은 창세기 저자는 셈에게 명예로운 칭호를 붙여주려고 할때 그를 '히브리인들의 조상'이라고 부른 것이다. 비록 함에게 많은 아들들이 있었지만 그는 '가나안의 아비'라고 불림으로써 그아들들과의 관계가 부인되었다. 마찬가지로 셈에게도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그또한 '에벨-그후손들에게 축복이 부여되었다-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받음으로 존귀를 받았던 것이다. 선함이 곧 진정한 위대함이었다.
(2) 그는 '형 야벳의 동생'이었다(한글개역에는 '야벳의 형'으로 되어있음-역주). 거룩한 역사가는 셈이 히브리인들의 조상이었다는 사실을 그의 명예로서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사실로 인해서 야벳의 후손이 교회와는 영원히 두절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하기위하여 성경기자는 여기서 출생에 있어서 뿐만아니라 축복에 있어서도 셈이 '야벳의 동생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핵심
10:1-32
노아의 후손들에 대한 계보이다. 야벳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볼때 지중해의 구브로 섬과 그건너 소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기 시작했고(2-5절), 함과 가나안의 후손들은 가나안 지역과 메소보다미아 동남부 지역, 애굽을 비롯한 아프리카 북부 지역에 걸쳐 그종족을 번성시켰다(6-20절). 마지막으로 셈의 자손들이 언급되고 있는데(21-31절), 그들의 거주지는 불명확하지만 대체적으로 아라비아 남부 지역으로 추정된다.
창 10:5,20,31절과 11:1절의 조화문제
창 10장은 대홍수이후 노아의 자손들이 땅위에 다시 번성하기 시작한후에 계속된 종족의 분화와 분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등장하기전인 B.C. 3000년경까지의 전체 과정을 포함한다. 이같은 전체적인 개요를 먼저 언급한 다음 기자는 대홍수이후 시대의 초기에 발생했던 바벨탑사건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간다(11:1-9). 당시만해도 셈과 함과 야벳을 이은 여러 족속들은 상용언어에 있어 부족간에 약간씩 차이를 보이긴 했어도 모두 같은 언어를 썼을 것이다.

# 묵상
니므롯 ( 10:8-12 )
니므롯은 세상에 태어난 최초의 영걸로서 여호와앞에서 특이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존재로 태어났으나 그특성을 하나님을 위해 쓰지않고 인간을 드높이기위해 사용하다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은사를 인간적인 욕심을 위해 전용하는 것은 결국 멸망을 자초하는 일임을 명심해야할 것입니다.
에벨 ( 10:21-25 )
에벨이라는 이름이 셈의 계보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10:21, 25), 그는 셈의 손자요, 아르박삿의 아들이며, 벨렉과 욕단을 낳았습니다. 한편 그의 이름(Eber)에서 히브리(Hebrew)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벨렉시대에 일어난 사건 ( 10:25 )
벨렉이라는 이름은 나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에 따라 퍼져나가던 사람들이 벨렉시대에 언어가 달라지면서 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벨탑사건을 가리키는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뉨을 통해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 나갔습니다.

# 해설
세상민족의 형성 ( 10 )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으로 지구의 역사는 새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세아들, 셈과 함과 야벳이 홍수후에 그들의 아들을 낳아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축복 그대로 이들은 온세상에 거하게 되었습니다(참조, 행17:26). 본장은 홍수로 말미암아 멸종위기에 놓였던 인류가 노아의 세아들로부터 다시 급속히 확산된 것과 그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지게된 원인이 밝혀져 있습니다.
1. 야벳의 후손들
1) 여러 백성으로 나뉨
심각한 죄악으로인하여 온인류는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야벳으로 말미암은 일곱 아들들의 번성을 보게됩니다. 이전에는 홍수로 심판하여 인류를 죽게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생육하고 번성토록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a.번성을 의미(창10:32)
b.민족의 나뉨(창25:23)
c.모든 민족이 한 혈통(행17:26)
2) 바닷가에 머묾
이제 온땅으로 퍼지게된 노아의 세아들들은 '온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인간들이 나뉘어져 땅도처에 분산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구약의 섬들은 보통 소아시아 지방에서 스페인까지의 유럽해안에 있는 지중해연안의 섬들을 가리켰습니다. 따라서 바닷가의 땅이란 다른 말로 이방인의 섬들을 뜻합니다. 야벳의 후손들은 여러 백성으로 나누어져서 바닷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a.섬들의 땅(사11:11)
b.해변의 나라들(습2:11)
3) 여러 방언을 함
야벳 족속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여러 종족으로 나뉘고 각자 방언과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습니다. 여러 방언으로 나뉜 것은 사람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우리는 창11장을 통해서 알수 있습니다. 여러 방언으로 나뉘어 가면서 서로 다른 문화로 정착되어 갔습니다.
a.노아의 자손이 방언으로 갈림(창10:5)
b.바벨에서의 흩어짐(창11:9)
2. 함의 후손들
1) 함의 아들
함의 아들은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등 네명입니다. 이들의 거주지는 후에 남아라비아, 에디오피아, 이집트, 가나안, 붓(참조, 렘46:9) 등이었습니다. 이지역은 오늘날 아프리카를 중심한 흑인종의 조상들이 살던 지역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자손들중 함의 자손들을 축복하셔서 온세상에 편만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들의 죄악까지도 구속하셨습니다.
a.아비의 하체를 봄(창9:22)
b.함은 가나안의 아비(창9:18)
c.많은 후손으로(대상1:8)
2) 처음 영걸 니므롯
함의 족보가운데 특이한 인물이 발견되는데 바로 니므롯입니다. 그를 가리켜 성경은 세상의 처음 영걸이라고 하였습니다. 니므롯은 '반역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이름에서 그의 성격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즉 그는 조상들이 대대로 신망하여 왔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독립을 선언한 배교자로서 거친 성격의 소유자인듯 합니다.
a.앗수르의 영토에 거주한 자들(미5:6)
b.성읍을 건설함(창10:10)
3) 함 자손의 문화
니므롯을 중심한 함 자손의 문화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때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측면의 성경역사에서 이들의 문화는 거의 가치가 없고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문화는 나아가 치욕적인 문화로 평가되고 있으며 하나님께 대항하는 문화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관계가 끊긴후에는 성경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a.저주를 받은 자(창9:25)
b.특이한 사냥꾼(창10:9)
c.애굽 땅이 함의 자손의 땅(시105:23)
3. 셈의 후손들
1) 에벨의 조상
본문 21절에 보면 셈은 에벨 온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벨은 셈의 증손자입니다.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가 특별히 에벨이라는 이름을 들어서 설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백성이 에벨을 통해 계승될 것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에벨은 '히브리'라는 말의 어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말은 경건한 사람을 지칭하는 영광스런 칭호로서 셈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a.유다의 아들과 동명(창38:2-5)
b.셈의 후손(창10:21-24)
2) 셈 후손들의 이름
셈의 아들은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등 5명입니다. 다섯 아들가운데 두아들의 자손들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르박삿의 후손들이 중점적으로 거론됩니다. 아르박삿은 북앗수르에 있는 '아라라파피티스' 주민들입니다. 룻은 소아시아의 리디아인들로 추정됩니다. 아람은 수리아와 메소보다미아의 아람인의 조상입니다.
a.엘람(사22:6)
b.앗수르(창10:11-13)
c.아르박삿(대상1:17-18)
d.룻(창10:22)
e.아람(창10:23)
3) 에벨의 두아들
에벨의 두아들은 벨렉과 욕단입니다. 장남인 벨렉의 이름은 '나눔'을 의미합니다. 차남인 욕단은 '작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형제에게서 아브라함 계통의 혈통(벨렉)과 아라비아계의 혈통(욕단)이 서로 분리되었습니다.
a.벨렉(창11:16-18)
b.욕단(대상1:20-23)
결론
창10장은 홍수라는 대심판이후에 한조상으로부터 인류가 어떻게 퍼져나갔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창10장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지리학적으로, 인종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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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하나님이 노아와 그아들들에게 복을 주심 9:1-7
하나님은 '노아와 그아들들에게 복을 주셨다'(1절). 이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들에 대한 자신의 선한 뜻과 은혜로운 의도를 확실히 알리셨다는 말이다. 우리는 앞장에서 노아가 단을 쌓고 제물을 드림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을 찬미했는지'를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이제 다시 수립되고 구체화될 이 새로운 자연왕국의 '대헌장'을 보게된다. 왜냐하면 이전 헌장은 벌로써 몰수되어 실행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 이 헌장의 하사품(2)
그것은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은혜로운 것들이었다.
(1) 광대한 토지의 수여와 사람들이 크게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향유하리라는 약속 : 처음에 사람에게 베풀어졌던 축복이 여기서 새롭게 되풀이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절).
1) 하나님은 그들앞에 온땅을 펼쳐놓으시고 그들에게 그것이 전부 그들의 것이라고, 다시말해 '땅이 있을동안에는'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그땅이 낙원이 아니라 황무지였지만 그래도 그것은 우리에게 과분한 것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그땅이 지옥이 아닌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2)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셔서 짧은 시간안에 사람이 거주할수 있을만한 모든 땅위에는 많든 적든 사람들이 살수 있게하셨다. 비록 지금도 여전히 죽음이 왕노릇을 하지만 그러나 그때처럼 땅에서 사람이 멸절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오히려 땅에 사람들이 충만하여질 것이다(행 17:24-26).
(2) 열등한 피조물들을 다스릴수 있는 능력의 수여(2절) : 무죄상태의 인간은 사랑으로 다스렸으나 이제 타락한 인간은 공포로써 다스린다. 지금도 이능력의 수여는 유효하다. 그래서 여태까지 우리는 그로부터 유익을 얻고있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은 선한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살수 있도록 하실뿐만 아니라 그의 도우심을 받는가운데 안락하게 살수 있도록 섭리하신다. 그는 단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섭리하신다.
둘째,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은 선하므로' 거절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딤전 4:4).
2. 이 헌장의 가르침과 규정조항 (3-7)
그것은 이 헌장의 하사품에 못지않게 유익하고 은혜로우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신의를 잘 반영해주는 실례들이다. 유대학자들은 노아에게나 그의 아들들에게 하신 일곱가지 가르침에 관하여 흔히 이렇게 말하곤 한다. 즉 "그가르침은 모든 민족들이 지켜야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유대학자들은 사람들이 그가르침을 잘못 이해하지않도록 한다. 이 가르침은 첫째, 우상숭배를 금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불경스런 태도를 금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것을 요구한다. 셋째, 살인을 금한다. 넷째, 근친상간과 모든 부정을 금한다. 다섯째, 도둑질과 약탈을 금한다. 여섯째, 공의의 시행을 요구한다. 일곱째, 고기를 피채먹는 것을 금한다.
(1) 사람은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먹어 자신의 생명을 손상시켜서는 안된다(4절). 사람은 음식먹는 일에 탐욕을 부리거나 조급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자기보다 열등한 피조물들에게 야만적이거나 잔인해서는 안된다. 제사법에서 피는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는'(레 17:11) 것으로서 단위에 뿌려졌다. 이말은 제물의 생명이 죄인의 생명을 대신하여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러므로 제사법이 계속되는동안 피는 예사로운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되었고, 오직 '여호와께 부어져야' 했다(삼상 23:16). 그러나 이제는 크고 참된 제사가 드려졌기때문에 그제사법을 더이상 지켜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2)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제거해서는 안된다. '내가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5절). 우리의 생명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끊어버릴수 없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3) 짐승들이 사람의 생명을 해쳐서는 안된다. 이점은 모세법에 의해서 확정되었다(출 21:28). 내가 보기에 이법은 오늘날까지도 안전하게 지켜지고 있는것 같다. 하나님은 이같이 살인죄에 대한 그의 미움을 보이심으로써 사람들로하여금 그죄를 더욱 미워하게 하시며, 그죄를 벌할뿐만 아니라 미리 예방하고자 하셨다.
(4) 고의적인 살인자들은 반드시 죽음에 처해져야 한다. 곧 이죄는 여기서 형벌의 두려움으로써 억제되도록 의도되었던 것이다.
첫째, 하나님께서 살인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 이세상에서나 혹은 저세상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보지못하는 숨은 살인자들을 밝혀내실 것이며 사람의 힘으로써는 처벌하기 힘든 공공연한 살인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
둘째, 관원들은 마땅히 살인자들을 처벌해야 한다(6절). 이러한 목적을 위한 하나님의 일꾼이 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두려움이 되고 죄없는 자들에게는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공연히 칼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된다(롬 13:4). 이것은 '여호와께서' 왕한테서도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신' 죄이다(왕하 24:3,4). 그러므로 왕은 자기 백성이 이런 죄를 지으면 용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법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이 처음에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그의 창조주를 따라 지어진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람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에 영광을 입혀주셨다. 그러므로 사람을 멸시하지 말자.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들이 남아 있기때문에 부당하게 사람을 죽이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시키는 것이며 하나님께 욕을 끼치는 것이다.

Ⅱ.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와 언약을 세우심 9:8-11
1. 하나님께서 새로운 세계에서 세우신 언약과 그언약의 범위(8-10)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언약의 방법으로써 사람과 관계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 언약안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의무와 복종을 크게 장려하신다.
둘째,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우시는 모든 언약은 하나님 자신이 제안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내가…세우리니'라고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언약은 하늘의 기둥이나 땅의 기초보다도 더 확고하게 세워지므로 결코 취소되지 않는다.
넷째, 하나님의 언약은 계약자들과 또한 그들의 후손과 더불어 세워진다. 곧 그약속은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미친다.
2. 이언약의 특별한 의도(11)
이언약은 또다른 홍수로부터 세상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계획된 것이었다. 다시는 모든 생활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그이후로 세상이 홍수에 잠긴적은 이제까지 결코 없었는데 그이유는 인간이 세상을 개선시켰기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 때문이다. 옛세상이 파멸되어 공의의 기념비가 되었듯이 이세상은 '내가 다시는 노아의 홍수로 땅위에 범람치않게 하리라'(사 54:9)는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긍휼의 기념비로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바다가 매일 두번씩 몇시간동안 밀려오듯이 단 며칠만 육지로 흘러넘친다면 세상을 얼마나 황폐시키겠는가! 그러므로 언약을 하시는가운데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해서, 약속을 이행하시는데에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Ⅲ. 언약의 증거 9:12-17
사람들은 계약을 체결할때 대개 그계약 문서에 날인을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도 '그뜻이 변치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히 6:17) 증거로써 언약을 보증하셨다. 이 자연에 대한 언약의 보증은 자연적인 것이면 충분하였다. 그것은 '무지개'였다. 이언약의 보증에 관해서 다음 몇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이 증거는 그약속의 진실성을 되풀이하여 확언하는 말에 첨가되었다. 곧 이 증거는 그언약에 대한 비준으로 의도된 것이었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속에 두었나니…무지개가 구름속에 나타나며(13.14절). 이는 그것을 보는 자들이 마음에 감동을 받고 신앙을 확증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언약의 증거(12.13절)가 될것이다. 내가 내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15절).
둘째, 무지개는 구름이 비를 막내리려 할때와 비가 다온후에 나타난다. 그러므로 비가 아주 많이 올것을 두려워하지 않을수 없을때 하나님은 이렇게 무지개로써 우리의 두려움을 제거해 주신다.
셋째, 구름이 짙으면 짙을수록 무지개는 구름속에서 더욱더 밝게 빛난다. 이와같이 고난이 우리를 위협하면 할수록 우리를 격려하는 위로는 더욱더 넘친다(고후 1:5).
넷째, 무지개는 하늘의 한쪽편이 맑을때 나타난다. 이사실은 긍휼이 진노가운데서 기억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때 구름은 마치 무지개로 둘러쌓이는 형국이 되어 하늘가득히 퍼지지 못하게 된다. 무지개는 빗방울이 채색되었거나 구름의 끝부분에 빛이 입혀진 것이다. 활은 공포감을 준다. 그러나 이 활(무지개)은 줄도 없고 살도 없고 활만 가지고서는 아무일도 못할 것이다. 이 무지개는 활이다. 그러나 그활은 땅을 향하지 않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언약의 증거는 두려움을 주기위해서가 아니라 위로를 주기위해 마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Ⅳ. 노아의 죄와 함의 불손 9:18-23
1. 노아의 가정과 직업(18,19)
노아가 열심히 종사한 일은 '농부'의 일이었다. 농부란 히브리어로 '땅의 사람'이란 뜻으로서, 땅을 취급하는 사람, 곧 손으로 땅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노아는 땅의 소산물로 장사했었다. 그는 '농업을 시작하였다.' 즉 이말은 그가 처음에는 방주를 짓는 일로 그리고 후에는 아마도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마른땅에 집을 짓는 일로 그만두었던 옛직업으로 돌아왔다는 뜻이다. 한동안 그는 목수 일을 해왔으나 이제는 다시 농부로서 일을 시작한 것이다.
2. 노아의 죄와 수치(20,21)
포도나무를 심었더니(20절). 그리고 포도를 수확했을때 아마도 그는 그날을 자기 가정의 잔치날로 정하고 그의 포도원이 커진 것뿐아니라 그의 가족이 불어난 것을 함께 기뻐하기위해 자기 아들들과 손자들을 불러모았던것 같다. 또 그는 잔치가 끝날무렵에 가서는 아들들에게 축복을 베풀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것 같다. 이 잔치날에는 '포도주를 마셨다.' 그러나 그는 너무 무절제하게 마셨기때문에 '취하고' 말았다. 그가 어떻게 이러한 과실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유의하라. 그것은 그의 죄치고는 아주 큰죄였으며 그렇게 큰구원을 받은지 얼마 안되어서 범하였다는 점에서 더욱더 악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의 마음대로 하도록 버려두셔서 그의 이같은 실수가 기록에 남게하셨으니 그것은 우리에게 다음의 사실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1) 아담의 타락이후 아무리 순전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기록이라하더라도 거기에는 오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2) 신중함과 굳은 결의를 지니고서 하나님의 은혜로 시험가운데서 자신의 순전함을 지킨 사람들도 때로는 시험의 때가 지나갔을때 안심과 부주의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함으로인해서 창졸간에 죄에 빠져들곤 한다.
(3)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것을 풍부하게 사용할수 있을때 지나치게 사용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노아의 죄지은 결과는 수치였다. 그는 금지된 열매를 먹었을때의 아담처럼 벌거벗음으로인해 수치를 당했다. 여기서 술취하는 죄가 얼마나 악한가를 살펴보자.
첫째, 술취함은 사람들로 본색을 드러내게 한다. 즉 사람들은 술취하게 되면 자신의 모든 약점을 무심코 드러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비밀들조차 쉽게 쏟아낸다.
둘째, 술취함은 사람들로 망신과 멸시를 당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술취했을때 사람들은 정신이 말짱할때는 생각하기조차 부끄러워할 일들을 말하거나 행동하기 때문이다(합 2:15,16).
3. 함의 불손과 불경건(22)
그는 '그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형제에게 고하였다'(22절).
(1) 그는 그광경을 재미있다는듯이 보았다. 어쩌면 함 자신도 때때로 술에 취한적이 있었을듯 싶다. 자신이 잘못된 길을 걷고있는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들이 잘못 발을 내디디는 것을 보기를 즐거워한다. 그러나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
(2) 그는 그의 아버지가 그의 형제들에게 천하게 보이도록 아주 비웃는 태도로 '그들에게 고하였다.' 죄를 희롱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일이다(잠 14:9). 또한 어떤 사람의 잘못을, 특별히 우리가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 부모의 잘못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4. 가엾은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우는 셈과 야벳의 경건한 행위(23)
여기 모든 사람의 허물을 덮은 사랑의 외투가 있다(벧전 4:8). 또한 부모의 허물을 덮은 존경의 의복이 있다.

Ⅴ. 아들들에 대한 노아의 축복 9:24-27
(1) 노아가 정신을 차렸다. 즉 '그가 술이 깨었다.'
(2) 임종을 앞둔 야곱처럼 예언의 영이 그에게 임하자 노아는 장차 아들들에게 일어날 일을 말한다(49:1).
1)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고한다(25절). 이렇게 가나안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 함 자신이 저주를 받은 것이다. 그에 대한 특별한 저주는 '그가 종들의 종이 되며'(즉 가장 비천하고 비열한 종이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그형제의 종이 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유의하자.
① 하나님은 종종 자식들이 아비의 악한 성향을 물려받아 아비의 악한 행실을 본받고, 저주를 상속하지 않기위해서 전혀 애쓰지 않을때 아비의 죄악을 그자식에게 물려주시곤 한다.
② 다른 사람들을 망신시키는 자들, 특별히 자기 부모를 부끄럽게 하고 슬프게하는 자들이 치욕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노아는 셈과 야벳에게 축복을 빈다.
① 노아는 셈을 축복한다. 아니 그보다는 그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한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살펴보자.
㉠ 그는 여호와를 '셈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모든 축복이 바로 이 축복안에 들어있다. 이로써 자기 아버지에 대한 셈의 효성은 충분히 보답되었다. 즉 여호와께서 친히 '그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이러한 영광을 그에게 주신 것이다.
㉡ 그는 셈이 행한 선한 행실에 대해 그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사람들의 선한 행실을 볼때 우리는 영광을 그들에게 돌리지말고 '우리' 아버지께 돌려야 한다(마 5:16).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로 하나님께 쓰인다는 것은 명예요 은총이다.
㉢ 그는 셈과 그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로인하여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사실이 온세계에 증거되리라는 것을 내다본다.
㉣ 이사실은 교회가 셈의 후손가운데에서 세워지고 지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아주 오랫동안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고백해온 백성인 유대인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② 노아는 야벳을 축복한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그의 후손들이 살게될 '이방의 섬들'을 축복한다.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27절). 어떤 사람들은 이축복을 전적으로 야벳에게 속한 것으로 보며 그것이 다음 둘중 어느 한가지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의 외적인 번영을 나타낸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의 수가 많아지고 막강해져서 셈의 장막의 주인이 되리라는 것이다.
둘째, 그리고 그예언이 셈족중의 가장 탁월한 민족인 유대 백성들이 야벳의 후손들과 헬라인과 로마인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백성이 됨으로써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아니면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교회로 들어오는 것을 나타낸다고 본다. 이때 우리는 그구절을 '하나님이 야벳을 권유하사'(실제로 이문장이 의미하는바가 이것이다)라고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가 그권유를 받아 셈의 장막에 거하게 되리라.'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의 우리안에서 함께 연합할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유의할점은, 스스로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자들을 다시 교회안으로 불러들일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것은 강압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권유함으로써 되는 일이다(시 110:3). 그들은 이성으로 권고함을 받아 신앙에 이르게 된다.

Ⅵ. 노아의 연수와 죽음 9:28-29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 사실을 보게된다.
첫째, 하나님께서 노아를 장수케하셨다. 이러한 장수는 그의 탁월한 믿음에 대한 보상이며 이세상에 대해서는 커다란 축복이었다.
둘째, 하나님은 마침내 그의 생명을 종결시키셨다. 노아는 살면서 두세계를 보았다. 그러나 죽었을때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후사가 되어 그 두세계보다 더나은 세계를 보기위해 떠나갔다.

# 핵심
9:1-17
하나님은 노아와 새롭게 언약을 세우셨다. 노아와 맺은 언약에는 살인하지 말라고하는 인류가 지켜야할 근본적인 법과 생명존중의 법칙, 그리고 인간에 대한 축복이 나타난다.
생명존중의 윤리(9:6)
하나님은 피와 생명을 상징적으로 연결하심으로써 살인을 엄격하게 금지하신다. 본절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사람에 의하여’라는 뜻으로서, 살인자는 통치자나 재판관의 엄격한 재판을 받아 처형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사형집행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야함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자 옹호자이시다(왕하 9:26; 시 9:12).

# 묵상
무지개 언약 ( 9:8-17 )
홍수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무지개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세우고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입니다. 고대 근동에 있어서 무지개는 신(神)의 무기인 ‘활’을 상징했습니다. 그무기를 공중에 걸어놓았다는 것은 이제는 그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평화의 선언인 것입니다. 이 무지개는 하나님의 보좌에 둘러있는데(계4:3), 하나님은 이 무지개를 보시면서 노아와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고 긍휼을 배푸시는 것입니다.
노아의 실수 ( 9:20, 21 )
노아는 순간의 방심과 부주의로인해 술을 마셨고 그결과 자신의 몸과 이성을 주체하지 못하여 스스로 옷을 벗어던져 알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음주행위가 노아에게서 일어난 것입니다. 의인 노아도 이처럼 허물이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며, 우리는 술에 취할 것이 아니라 성령에 취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눅11:13; 엡5:18).
함의 잘못 ( 9:22 )
함은 수치를 모르고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형제에게 고함으로써, 아비의 부끄러움을 감싸주기보다는 오히려 아비의 허물을 들추고 이를 악의적으로 즐겼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고발이 때로는 죄를 즐기고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유념해야할 것입니다.
셈과 야벳의 장점 ( 9:23-27 )
셈과 야벳은 아비의 부끄러움을 가려줌으로써 남의 허물에 대한 성도의 올바른 자세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부모에 대한 존경과 봉사는 하나님의 명령임과 동시에 인간본성의 자연스런 요구입니다. 그결과 셈과 야벳은 번영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노아의 저주와 축복 ( 9:24-27 )
잠에서 깨어난 노아는 벌어진 일에 대해 알게되자 가나안에게는 저주를,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선언합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가장 비천한 종이 되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셈에게는 하나님과 관련된 영적인 축복이 주어졌고, 야벳에게는 물질적 풍요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 해설
무지개 언약 ( 9 )
홍수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자손에게 하나님께서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먹을수 있는 음식과 먹을수 없는 것을 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아들들을 축복하시고 다시는 인류를 물로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그증표로 무지개를 구름사이에 두셨습니다. 한편 노아는 술에 취하여 그결과로 자신의 자녀를 저주하는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1. 하나님의 축복과 언약
1)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자 은혜롭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인간들에게 친절하고 은혜로우신 약속을 주신 하나님은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라는 축복을 노아와 그아들들에게 다시 갱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피조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더나아가 살아있는 모든 동물들을 인간의 식물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a.자손의 창대함은 축복(레26:9)
b.생육하고 번성해야(창48:4)
2) 피에 대한 강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자에 대해 반드시 그책임을 물으시겠다는 당신의 의지를 표현하심으로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의 피는 고귀합니다. 다시말해 인간의 생명은 고귀합니다. 인간을 살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자라고 규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형제를 살해하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a.피로 언약을 세우심(출24:8)
b.보배로운 피(벧전1:19)
c.피는 신성한 것(레17:11-14)
3) 언약을 맺음
인간과 교제하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은혜스럽게도 언약이라는 방법을 통해 그의 은총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창9장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노아와 그 자손들과 더불어 하신 것이기때문에 약속은 후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지않겠다고 하시고 그것의 증표로 구름속에 무지개를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류와 자연계 모두를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시며, 노아와 그가족들을 위로하셨습니다.
a.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함(창8:20-22)
b.화평케하는 언약(사54:10)
c.언약을 파기치 말아야(사24:5)
2. 노아의 실수
1) 술에 취함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세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죄악의 시대에 태어나서 인내로 훌륭하게 어려움을 극복해온 노아도 실수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홍수후 농사를 시작하여 자신이 경작한 포도주를 먹고 술에 취했습니다. 성경은 술에 대해서 경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참조, 롬13:13;엡5:18).
a.취하여 비틀거림(시60:3)
b.감각을 잃음(잠23:35)
c.술은 판단을 그르치게 함(잠31:4-5)
2) 수치를 드러내는 노아
포도주에 취한 노아는 그 장막안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자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조심성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의 신앙을 지켜나가던 노아도 고난과 유혹이 지나가 버리자 이내 방심하고 부주의하여 수치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a.벌거벗음은 금지된 것(출20:26)
b.범죄임(겔16:7)
c.수치를 알게된 인간들(창3:7)
3) 함의 죄악된 행동
노아가 술에 취해 장막안에서 벌거벗은 몸으로 자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의 아들가운데 하나인 함은 술에 취한 아버지의 벌거벗은 모습을 조롱거리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타락한 성품을 노출시킨 것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낼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함과는 달리 셈과 야벳은 아비의 허물을 가리워 주었습니다.
a.아비의 하체(겔22:10)
b.고자질은 금지되어 있음(레19:16)
3. 노아의 예언
1) 가나안을 저주함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자신의 수치를 보인 노아는 술이 깨자 제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술에 취했을때 일어난 일들을 알게된 것입니다. 노아는 가나안의 아비 함이 행한 일을 알고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 노아는 가나안에게 그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리라고 저주하였습니다.
a.저주는 화를 더하는 것(신29:21)
b.저주받은 자는 파멸함(신28:20)
c.가나안(창10:6)
2) 셈과 야벳을 축복함
노아는 함과는 달리 셈과 야벳을 축복하였습니다. 노아는 셈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셈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야벳에게는 하나님이 그를 창대케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a.자녀는 부모를 공경해야(히12:9)
b.셈-예수의 조상(눅3:36)
c.야벳(대상1:5)
3) 노아의 죽음
노아는 950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사실 장수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는 죄악된 세상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은 경건한 사람으로서 오고오는 세대에 신앙의 표본이 될만한 자였습니다.
a.노아(창6:9)
b.노아의 죽음(창9:29)
c.믿음의 인생을 산 인물(히11:7)
결론
우리는 창9장을 통하여 타락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크게 칭찬하신 노아와 같은 의로운 사람도 근신하지 아니하면 실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또한 타인의 허물을 가리워주고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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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물이 줄어듬 (1) 8:1-3
1.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이것은 인간적인 표현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중 어느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으며(눅 12:6), 더욱이 그의 백성중 한사람이라도 결코 잊어버리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사 49:15,16).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심은 인류에 대한 그의 긍휼의 회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류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시지 않았다. 노아 자신도 비록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자였지만 방주안에서 잊혀져 버린듯이 보였다. 필시 그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얼마나 오랫동안 갇혀있어야 하며 언제 풀려날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주 경건한 사람들도 때때로 특별히 고난이 극심하고 오래 지속될때에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잊어버림을 당했다고 생각하기 쉬운 법이다. 믿음이 돈독한 노아라도 이치를 놓고 따져볼때 홍수가 해야할 일은 다끝났다고 생각된후에도 그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자 자기를 닫아넣으신 분께서 계속해서 자기를 가두어 놓으시지 않을까하고 염려하여 이렇게 호소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느때까지 나를 잊으시겠나이까?'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셨다. 그리하여 이사실은 하나님이 그를 기억(권념)하셨다는 말로 표현되었다.
2. 바람과 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능력(2,3)
사람은 그 어느것 하나라도 제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것들을 마음대로 다루신다.
(1) 하나님께서 홍수를 물러가게 하시기위해 바람을 명하여 '오라'고 말씀하시자 바람이 왔다.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하시매. 여기서 다음 몇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께서 노아에 관해 무엇을 기억하셨는가? 그것은 그를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둘째, 하나님께서 바람을 다스리시는 것은 어떤 주권적 통치인가? 광풍조차도 그의 말씀을 좇는다(시 148:8). 이제 하나님께서 바람을, 곧 말리는 바람을 보내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앞에서 홍해를 가르실때 보내셨던 것과 같은 바람이다(출 14:21).
(2) 하나님께서 물을 명하여 '가라'고 말씀하시자 곧 물이 물러갔다.
1) 하나님께서 원인을 제거하셨다. 하나님은 여는 열쇠를 가지고 계시듯이 닫는 열쇠도 가지고 계시며 심판의 원인들을 중지시키심으로써 심판의 진행을 멈추게 하실수도 있으시다. 황폐를 가져온 그손이 또한 구원도 베푸신다. 상처를 주시는 그분만이 홀로 치료하실수 있다(참조, 욥 12:14,15).
2) 그러자 그결과가 그쳤다. 그것은 단번에 모두 그친 것이 아니라 차차 그쳤다. 보통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구원을 점진적으로 이루신다. 그러므로 평범한 날이라고 무시할수 없고 큰일을 당하는 날이라고 절망할 필요가 없다(참조, 잠 4:18; 슥 4:10).

Ⅱ. 물이 줄어듬(2) 8:4,5
여기서 우리는 물이 줄어들어 나타난 결과와 증거를 보게된다.
(1) 방주가 머물렀다. 이사실로 인해서 노아는 자기가 타고있는 집이 땅에 고정되어서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어느정도 만족을 얻었다. 그방주는 노아의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그는 방주를 조정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혜롭고 은혜로운 섭리에 의해서 지시받은 산위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좀더 신속하게 머물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어려움을 주신후에는 그들을 위하여 쉴시간과 장소를 마련해 주신다. 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알맞고 위로가 될 생활의 안정을 마련해 주시는데 있어서 흔히 그들의 계획이나 예상을 초월하여 인도하신다.
(2) 산꼭대기들이 마치 물위로 드러나 있는 작은 섬처럼 보였다. 노아와 그의 아들들은 분명히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는 일외에는 그들에게 아무런 할일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루한 항해끝에 육지보기를 갈망하는 선원들처럼 그들은 매일같이 방주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을 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의 계산대로 하자면 그들은 배가 땅에 걸렸다는 것을 느낀지 40일이상이 지나서야 땅을 보게되었다. 라이트푸트는 물이 비례적으로 감소하였다면 그때 방주는 물속에 11규빗이 잠겨 있었으리라고 추론한다.

Ⅲ. 까마귀와 비둘기를 보내어 마른 땅을 정찰함 8:6-12
여기에는 노아가 밖의 소식을 얻기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정찰로 내어보낸 기사가 있다.
(1)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홍수가 언제올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말씀하셨으나 그홍수가 어느때 어떤식으로 '물러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특별히 계시해주시지 않았다. 그이유는 다음 두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전자에 대해서는 그가 방주를 준비하는데 필요하였기때문에 알아야하는 것이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지식이 단순히 그의 호기심만 만족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므로 그의 믿음과 인내를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그것을 그에게 비밀로 하는 편이 더나았기 때문이었다.
둘째, 계시에 의하지 않고는 홍수가 언제올지 예상할수 없었을 것이나 물이 줄어드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도 알수 있었기 때문이다.
(2) 노아는 비록 자신이 풀려날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인내로 기다렸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이 너무 오래 갇혀있다고 생각한 사람처럼 그점에 관해서 몹시 알고 싶어했다. '믿는 자는' 하나님보다 앞서 달리기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만나러 가는 일에는 서두른다(사 28:16).
1) 노아가 방주창문으로 까마귀를 내보내니 까마귀가 나갔다. 히브리 표현법대로 하자면 '나갔다가 되돌아왔다.' 즉 날아다니다가 쉬기위해 방주로 돌아왔다. 필시 방주안에서 쉬지않고 방주 위에서 쉬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노아에게 별로 만족을 주지 못했다.
2) 그리하여 그는 비둘기를 내보냈다. 비둘기는 처음에는 아무런 좋은 소식도 없이 단지 털이 물에 흠뻑 젖어 더러워진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나 두번째에는 처음으로 따낸 것처럼 보이는 감람나무 잎사귀를 부리로 물어가지고 왔다. 그것은 이제 나무들이 곧 유실수들이 물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징표였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유의하자.
첫째, 노아는 처음 비둘기를 내보낸지 일주일후 두번째 비둘기를 내보냈고 또 일주일이 지난후에 세번째를 내보냈다. 그리고 아마 비둘기를 최초로 내보낸 것도 까마귀를 내보낸지 일주일이 지난 다음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일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때 노아는 방주안에서도 안식일을 경건하게 지켰던것 같다.
둘째, 비둘기는 은혜를 받은 영혼을 상징한다. 그 영혼은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안식도, 견실한 평강이나 만족도 찾지 못하므로 그의 방주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다. 육신적인 마음은 까마귀처럼 이세상에 흥미를 느끼며 거기에서 얻는 썩은 고기를 먹고 산다. 노아가 손을 내밀어 비둘기를 받아 방주안에서 들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로 날아와 안식을 찾는 자들을 은혜롭게 보존하시고 도우시며 환영하신다.
셋째, 감람나무 잎사귀는 평화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그감람나무 가지를 맹금인 까마귀나 화려하고 교만한 공작이 가져오지 않고 유순하고 인내심이 강하며 겸손한 비둘기가 가져왔다. 영혼에 안식과 기쁨을 가져오는 것은 비둘기같은 성품이다.
넷째, 어떤 사람들은 이일들을 우화적으로 해석한다. 처음에는 율법이 까마귀와 같이 보내졌으나 아무런 소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때가 차자 성령께서 주님위에 내리셨던 모양대로 비둘기와 같이 그의 복음을 보내셨다. 그리고 이복음이 우리에게 감람나무 가지를 선물한다. 즉 더나은 소망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Ⅳ. 땅이 마름 8:13,14
(1) 땅이 말랐다(13절). 즉 모든 물이 정월초하루(그날은 즐거운 새해 첫날이었다)에 걷혔다. 노아 자신이 친히 그사실을 목격하였다. 그는 방주 주변의 땅을 살피기위해 '방주뚜껑을 젖혔다.' 그리고 그는 매우 즐거운 광경을 목도하게 되었다. "보라, 보라, 놀랍게도 땅이 말랐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유의하자.
1) 우리주변의 땅을 볼수 있다는 것은 큰자비이다. 노아는 이사실을 우리보다 더민감하게 느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가 회복될때가 자비를 계속해서 누리는 경우보다 훨씬더 큰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2) 이제 지면을 새롭게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고통을 받아 근심에 쌓인 영혼의 얼굴과 박해를 받아 괴로워하는 교회의 얼굴을 새롭게 할수 있다.
(2) 노아의 가족이 충분히 거주할수 있을만큼 땅이 말랐다(14절). 하나님은 우리의 욕망보다는 우리의 유익을 고려하신다. 우리는 땅이 마르기도전에 방주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문이 닫혀있다면 금방이라도 뚜껑을 젖히고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때가 가장 적절한 시기임에 틀림없다. 그때는 긍휼이 우리를 위해 무르익고 우리는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때이다.

Ⅴ. 방주에서 나옴 8:15-19
(1) 하나님께서 노아를 방주에서 내보내셨다(15-17절).
1)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을 하시기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고 그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
2) 하나님께서는 비록 오랫동안 그를 가두어 두셨지만 마침내 그에게 해방을 주셨다.
3) 하나님께서 '방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실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들어가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나오너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나가거라'고 말씀하신다. 이말씀은 그와 함께 들어가신 하나님께서 그를 안전하게 내보낼때까지는 내내 그와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암시한다.
(2) 노아는 나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를 떠났다. 노아는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위해서 자신이 방주안에서 보존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자 자신이 오랫동안 갇혀있었던 것에 대해 불평할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서 밖으로 나왔다.

둘째,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제외하고 자기와 함께 방주에 들어갔던 모든 짐승을 데리고 나왔다. 필시 까마귀와 비둘기는 이미 밖에 나와있었으므로 짐승들이 나올때 자기 짝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노아는 자신의 책임에 대해 매우 훌륭한 보고를 드릴수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맡은 것중에서 어느것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Ⅵ. 노아의 제사와 하나님의 약속 8:20-22
1. 하나님께 대한 노아의 감사제사(20)
노아는 구원의 긍휼을 이루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신 사실에 대해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20절).
(1) 그는 '단을 쌓았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드리는 제사와 그를 바라는 찬송을 기뻐하신다. 노아는 이제 사람이라면 제일 먼저 자신을 위한 집을 짓는 일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생각할만한 춥고 황폐한 세상으로 나왔다. 그러나 보라. 그는 먼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기 시작한다. 제 1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은 가장 먼저 섬김을 받으셔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자가 시작을 잘하는 자이다.
(2) 그는 '모든 정결한 짐승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단에 드렸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그는 정결한 짐승들만 제물로 드렸다.
둘째, 비록 가축의 수가 적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죽음에서 건진 짐승들이었지만 그는 그중에서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할 것을 드리는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있는 적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그것을 더욱 많아지게 하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는 것을 헛되이 낭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
셋째,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었음을 알게된다. 새세상에서 행하여진 첫번째 일은 예배하는 일이었다(렘 6:16). 이제 우리는 번제로서가 아니라 찬미의 제사와 의의 제사로써 곧 경건한 헌신과 생활로써 우리의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2. 노아의 감사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심(21,22)
(1)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매우 기뻐하셨다(21절). 그는 '그향기를 흠향하셨다.' 혹은 히브리 원문대로 하자면 그제사에서 '안식의 향기를 흠향하셨다.' 하나님은 노아의 경건한 열심과 새로운 세계의 이러한 희망찬 출발을 매우 기뻐하셨다. 죄인들의 세상을 잠재우기위해 진노를 일으키셨던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이 소수의 남은 신자들을 쉬게하시기 위해 사랑을 일으키셨다.
(2) 이어서 하나님은 다시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시리라는 결심을 하셨다. 여기에 믿을수 있을만한 분명한 보증이 주어진다.
1) 이러한 심판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노아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머지않아 이세상은 그 사악함때문에 다시 똑같은 방법으로 파멸하고 말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세상이 고쳐져야 하는가?"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니다,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시는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는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말은 곧 "내가 더이상 이처럼 혹독한 방법은 쓰지않으리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히려 동정을 받아야하기 때문이다. 사실 심판은 사람들안에 거하는 죄의 결과였다. 그리고 이처럼 타락한 인종에게서 기대할수 있는 것은 심판뿐이었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패역한 자'라고 불린다(사 48:8). 따라서 사람이 그처럼 믿을수 없게 행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은 '사람이 육체임을 기억하신 것이다.' 또한 만일 사람이 당연한 보응에 따라 다루어진다면 그들중 하나도 남김없이 다 멸절할때까지 계속해서 홍수가 일어나야 할것이고 그렇게되면 사람은 완전히 멸망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① 외적인 심판들이 비록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조심케 할수는 있으나 그자체로써 사람을 성화시키거나 새롭게 하지는 못한다. 그렇게하려면 그러한 심판들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작용해야 한다.
②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지 우리안에 있는 어떤것에도 있지 않다.
2) 자연의 진행이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22절). 땅이 있을동안에는 "그리고 땅위에 사람이 있을동안에는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고 있었을때처럼 내내 밤만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말씀에서 이땅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히 암시된다. 땅이 존속하고 있는동안은 하나님의 섭리가 규칙적인 시간과 계절의 연속을 보존할 것이고 각자의 위치를 지키게할 것이다. 이세상이 존재하고 자연의 수레바퀴가 그궤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모두가 이 섭리의 은혜에 의해서이다. 시간이란 참으로 변화무쌍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변하지 않는가를 보라.
첫째, 자연의 과정은 언제나 변한다.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이 서로 바뀐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연의 과정은 이러한 변화속에서도 변치않는다. 태양이 계속해서 그처럼 확실하게 시간을 재고 있는한, 그리고 달이 하늘에서 그처럼 충실한 증인노릇을 하고 있는한, 계절의 변화는 결코 중단되지 않고 앞으로도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낮과 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다. 낮과 밤이 결코 쉬지아니하리라는 것은 결코 변할수 없는 은혜언약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하기위해 언급된 말씀이다(렘 33:20,21).

# 핵심
8:1-22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인간의 타락, 죄악의 심화, 심판, 선택한 백성들의 구원’이 홍수이전의 인간역사의 테마였다. 이제 인간의 역사는 노아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 새롭게 시작된다.

# 묵상
하나님께서 홍수를 멎게하신 이유 ( 8:1 )
노아와 방주에 있는 모든 생물을 기억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철저하게 심판하시는 무서운 분이심과 동시에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와중에서도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백성들을 기억하셔서 홍수를 멎게 하셨습니다.
까마귀 ( 8:7 )
노아가 방주에서 맨먼저 내어놓은 날짐승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좋아하기때문에 홍수로 죽은 짐승의 고기를 먹기위해 분주했습니다. 그는 노아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않고 제 볼일 보기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신자들중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은 얻었으나 자신만 생각할뿐 봉사나 희생이 없는 신자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비둘기의 활약 ( 8:8-12 )
노아는 비둘기가 물고온 감람 새잎사귀를 보고 지면에서 물이 감했음을 알았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달리 방주와 지면을 부지런히 왕래하며 물이 감한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비둘기가 입에 물고온 감람 새잎사귀는 심판후에 있을 새생명의 현실을 예표합니다. 성도는 비둘기처럼 새생명, 영원한 생명을 세상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알려주어야 합니다.
방주에서 나옴 ( 8:13-19 )
노아는 이미 땅에 물이 걷히고 땅이 말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방주에서 나가라고 명령하시기전에는 방주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랐던 것입니다.
노아의 번제 ( 8:20 )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맨먼저 단을 쌓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의로운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번제란 짐승제물을 전부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발적인 헌신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그제사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으로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이처럼 의인이 드리는 온전한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 해설
홍수후의 노아제단 ( 8 )
전장에서는 하나님과 피조물사이의 불화와 세상의 멸망이 언급되었으나 본장에서는 세상이 다시 하나님의 긍휼가운데 회복되고, 하나님과 인간사이에서도 화목이 이루어지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의 물이 줄어들게 하셨고, 홍수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희생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1. 홍수의 종결
1) 노아의 가족들을 권념하심
하나님께서는 방주에 있는 노아와 그가족들을 구원하시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을 잊어버리는 일이 결코 없으십니다. 항상 기억하시고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안에 있는 노아와 그식구들과 짐승들을 권념하셨다는 말은 잊었다가 다시 기억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말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늘 염두에 두실정도로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a.하나님이 사랑을 베푸심(신33:12)
b.의의 길로 인도하심(시23:3)
2) 물이 감해짐
하나님은 온세상에 가득한 물을 감하셨습니다. 땅위에 바람을 일으켜서 많은 수분을 증발시키신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비와 해일, 그리고 지하수의 역동적인 분출을 막으심으로써 지구의 물을 더빨리 격감시켰습니다. 대홍수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였던 것처럼 홍수 심판을 끝내시고 땅을 본래대로 회복시키는데도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주권적인 능력이 단독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a.하나님의 때와 세상의 때(요7:6)
b.하나님이 통제하심(시107:25)
c.바다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역(시107:24)
3) 방주의 정착
노아의 가족과 모든 육축은 방주안에 갇혀 불안속에서 지냈습니다. 홍수가 시작된지 150일이 되어 그동안 성난 물결에 정신없이 떠다니던 방주가 아라랏산에 정착했습니다. 이로써 노아의 가정구원은 온전히 완성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으므로 오직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으로 방주는 안전하게 정착했습니다.
a.하나님의 섭리는 알수 없음(전3:11)
b.노아의 방주(창7:1)
c.방주의 정착(창8:1-5)
2. 상황을 알아보는 노아
1) 까마귀를 내보냄
노아는 방주가 아라랏산에 도착한지 만113일이 지난뒤 창문을 열고 최초로 까마귀를 바깥세상에 날려 보냈습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내어보낸 것은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까마귀는 노아와 방주를 위해 아무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a.까마귀는 혼자사는 습성이 있어(사34:11)
b.가증히 여겨야될 짐승(레11:13-15)
2) 비둘기를 내보냄
까마귀는 지면에 물이 감한 사실을 알아보려는 노아의 요구에 불성실했으며 단지 실망시킬 따름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이제 비둘기를 바깥세상에 내어보냈습니다. 비둘기는 까마귀와는 달리 노아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었습니다. 비둘기에게서 얻은 정보를 통해 노아는 지면의 물이 감한 상태를 정확하게 알수 있었습니다.
a.나갔다가 돌아오는 습성의 새(사60:8)
b.사랑스러움(아2:14)
c.순종을 상징하는 새(렘8:7)
3) 바깥을 바라보는 노아
지면의 물이 감한 여부를 알려주던 비둘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지면이 말랐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리하여 노아는 방주뚜껑을 제치고 오랜만에 바깥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바깥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진정되고 땅과 나무, 모든 풀들이 물기에 젖어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는 상태였습니다.
a.새세상을 향한 용기를(삼상30:6)
b.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시42:11)
3. 노아의 신앙
1) 방주에서 나옴
노아는 지면의 물이 완전히 감한 것을 알고도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대로는 어떤 것이든지 감히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방주에 들어갔으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실때까지 방주에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방주안에 있던 노아에게 가족과 함께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노아와 그가족들은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앞에 순종하는 삶을 산 노아일가는 새세상을 개척하는 복을 누리게된 것입니다.
a.만사는 그때가 있어(고후6:2)
b.의인에게 복을(렘17:7)
2) 하나님께 제사함
방주에서 나온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노아는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 제사는 속죄를 상징하는 제사이며 화목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은 그의 신앙을 잘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a.감사로 드려야(시50:14)
b.믿음의 제사를 드려야(히11:4)
3) 하나님의 응답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릴때 하나님께서도 흠향의 응답을 하셨습니다. 이 흠향의 응답이 제일 중요한 응답이라는 사실은 두말할나위가 없습니다. 노아의 제사를 기쁘게 흠향하신 하나님은 온세상이 다시한번 완전하게 회복되어 정상적인 자연법칙아래 진행될 것과 생태계의 균형을 완전하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a.때를 따라 식물을(시145:15)
b.응답하시는 하나님(창9:16-17)
결론
창8장에서는 엄청난 대홍수의 종결과 방주안에 머물던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와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린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홍수심판은 인류와 함께 자연계까지 심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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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노아와 그의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 7:1-4
(1)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노아와 그의 가족을 안전한 곳으로 부르셨다(1절).
1) 이 부르심은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가 어두움이나 폭풍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자녀들에게 집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소리와 같이 매우 깊은 애정이 깃든 것이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들어오라'고 말씀하셨다(한글개역에는 '들어가라'고 번역됨-역주). 이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가시며 그를 방주안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안에서 그와 동행하시다가 때가되면 그를 안전하게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감옥과 같은 그방주를 그에게 피난처가 되게할뿐만 아니라 궁전이 되게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계시다는 이사실이었다. 노아를 향한 이 부르심은 불쌍한 죄인들을 향한 복음의 부름의 한예표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마련된 방주가 되시니 그안에서만 우리는 죽음과 심판이 닥칠때에 안전을 누릴수가 있는 것이다.
2) 그를 초대하는 이유를 밝히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노아의 순전함을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① 마음을 감찰하시며 사람의 외모에 속지않으시는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자들이 참으로 의로운 자들이다.
② 하나님은 자기앞에서 의로운 자들을 주목해 보시고 기뻐하신다. '여호와는 자기 백성들을 아신다.'
③ 자기 백성의 순전함의 증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그들의 순전함을 증거하실 것이다.
④ 하나님은 악한때에 선한 사람들을 특별히 기뻐하신다.
⑤ 하나님은 죄악이 관영할때에 자신을 순결하게 지키는 자들을 모두가 재난을 당하는때에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2) 방주안에서 노아의 가족과 함께 보존되어야할 짐승들에 관한 명령이 여기에서 주어진다(2,3절). 짐승들은 사람처럼 그스스로 직접 하나님의 경고나 지시를 받을 능력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들을 돌볼 책임을 맡았다. 짐승들은 사람의 지배를 받는만큼 또한 당연히 사람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것이다.
(3) 여기에 임박한 홍수에 대한 통지가 주어진다.
1) "내가 홍수를 일으키기까지는 '아직' 칠일동안의 기간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칠일이라는 집행유예 기간을 더하락하셨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사였고 이 칠일이라는 날도 다른 모든 날처럼 헛되이 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홍수가 시작되는 날까지 계속해서 안심하고 있었고 육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2) "단지 칠일동안의 기간이 있을 것이다." 노아는 얼마간의 기간을 앞두고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했지만 그들은 그경고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기때문에 회개를 미루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에게 심판이 바로 가까이 왔다고 말하도록 명령을 받는다.

Ⅱ. 노아의 순종 7:5-10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노아의 즉각적인 순종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다음 세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1) 필시 그때까지 홍수가 시작되리라는 주목할만한 징조가 없었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칠일후면 홍수가 시작되리라는 통지를 듣고 방주로 들어갔다. 그는 비록 제 2의 원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것을 보지 못했을지라도 홍수가 일어나리라는 이경고를 듣고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을 믿음으로 행했고 보이는 것에 따라 하지않았다.
(2) 그는 자기와 더불어 그의 모든 가족, 곧 자기 아내와 아들들, 그리고 자부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이렇게하여 그는 그들로 말미암아 그의 가정뿐만 아니라 인간세계가 다시 세워지도록 하였다.
(3) 짐승들도 곧 그와 함께 방주로 들어갔다.

Ⅲ. 대홍수의 날 7:11,12
1. 이 대사건의 날(1)
사건을 보다 확실하게 밝히기위해 이날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옛세상의 연수는 용사들의 치세기간으로써 계수되는 것이 아니라 족장들의 생애로써 계수되었다. 하나님은 군주들보다는 성도들을 더귀히 여기신다. 그당시 사람들의 수명으로 보더라도 이때의 노아는 매우 나이많은 노인이었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에 유의하자.
첫째, 우리가 이세상에서 오래살면 살수록 그만큼 세상의 불행과 재난들을 더 보게된다.
둘째, 때때로 하나님은 자기의 노종들을 순종하는 인내의 비상한 시련으로 시험하신다. 아무리 나이든 그리스도의 노병일지라도 죽음이 그들을 해방시키기전까지는 전투를 모면하려고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여전히 갑옷을 입고있어야 하며 마치 갑옷을 벗어버린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된다.
2. 이 대홍수를 일으키도록 협력한 제2의 원인들(11,12)
(1) 노아일행이 모두 방주에 들어간 그날에 홍수가 시작되었다. 불경건한 세상에 죽음이 닥친 그날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보라. 큰깊음의 샘들이 터지며(11절). 바다의 물이 창조때처럼(1:9)돌아와 지면을 덮었다. 하늘의 창들이 열려 궁창위에 있는 물이 세상에 쏟아졌다. 보통은 비가 소나기보다 훨씬더 억수같이 쏟아져 내릴때 흔히 "구름이 터진다"고 생각하는 인도사람들이 일컫는 것처럼 줄기로, 곧 물기둥이 되어 내렸다.
(2) 이사실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 점을 배우게 된다.
첫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로잡기 위해서'든지 '긍휼을 베풀기 위해서'든지간에 자기가 원하시는대로 그것들을 사용하신다.
둘째,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복지를 위해야 할것이 올무가 되게'(시 69:22) 하신다. 땅의 샘물이든지 하늘의 비든지간에 물만큼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때에는 그것만큼 사람들에게 해롭고 파괴적인 것이 없었다. 만물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바에 따라 우리에게 관계된다.
셋째,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죄인들을 대적하여 올때 그것을 피할도리는 없다.

IV.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이 방주에 들어감 7:13-16
앞에서 노아가 그의 가족과 보호하도록 명령을 받은 짐승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간 것에 관한 기록이 여기에 다시 반복된다.
(1) 그사실이 노아의 명예를 위해서 이처럼 다시 언급되었는데, 그속에서 노아의 믿음과 순종이 아주 밝게 빛났다.
(2) 창조의 역사에서 사용된 표현대로(1:21-25)짐승들이 '그종류대로' 방주에 들어간 사실이 여기에서 언급된다. 즉 이러한 보존은 새로운 창조와 같은 것이었다. 비상한 방법으로 보호된 생명은 새생명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3)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16절)는 말이 덧붙여졌다. 노아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순종하였듯이 하나님께서도 계속해서 노아를 돌보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목적으로 문을 닫으셨다.
첫째, 노아를 방주속에서 안전하게 보호하시기 위함이었다.
둘째, 다른 모든 사람들을 들여놓지 않으시기 위함이었다. 지금까지는 방주의 문이 열려있었다. 만일 지난 칠일동안 어느누구든지 회개하고 믿었다면 아마 환영을 받고 방주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문이 닫혔다.
(4) 노아가 방주안에 보존된 사실에서 우리는 복음의 의무의 특권을 더많이 보게된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그리스도께 대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복음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구원의 길로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중대한 의무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때 그는 자신의 집과 전토를 버렸다. 이와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의와 세상재물이 그리스도와 배치될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버려야 한다. 노아는 새로운 세계를 위한 자신의 보존을 위해 한동안 방주의 불편함과 구속을 참아야 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자 그에게 오는 자들은 고난과 봉사에 있어서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2) 방주에 들어오는 자들은 잘가르치거나 설득해서 그리고 좋은 모범을 보임으로써 할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을 함께 데리고와야 한다. 그리스도에게는 그에게 오는 모든 자가 유할 곳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3) 믿음으로 방주되신 그리스도께서 오는 자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들어가게될 것이며 요새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받을 것이다(벧전 1:5).

Ⅴ. 홍수의 범람 7:17-20
(1) 홍수가 언제까지 불어났는가? '40일'(17절)동안 불어났다. 홍수가 오리라는 것을 믿지않았던 불경한 세상 사람들은, 실제로 눈앞에 홍수가 왔을때는 그것이 곧 그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수는 온세상에 범람하였다. 하나님의 심판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종종 죄인들은 잘못 생각하여 심판이 서서히 다가옴으로인해 마음을 강퍅하게 하곤 한다.
(2) 어느정도까지 물이 불었는가? 평지가 물에 잠겼을뿐만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까지 물이 넘쳐서 아무곳으로도 도망할수 없게 되었다. '십오규빗' 즉 7.5m가량 물이 불어났다. 그리하여 헛된 피난처는 깨끗이 쓸려가 버렸다. 이세상에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에서 사람을 벗어나게 할만큼 높은 곳은 결코 없다(렘 49:16; 옵1:3,4).
(3) 물이 이처럼 불었을때 노아의 방주는 어떻게 되었는가? '방주가 땅에서 떠올라 물위에 떠다녔다'(17,18절).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첫째, 다른 모든 것을 부숴버린 물이 방주를 들어 올렸다.
둘째, 물이 불어나면 불어날수록 방주는 더욱더 높이 떠올랐다. 이와같이 성화된 고통은 영적진흥을 가져온다.

Ⅵ. 홍수로인한 모든 사람과 짐승의 죽음 7:21-24
1. 홍수로인한 모든 육체의 파멸(21,22)
(1) 모든 가축들과 새, 기는 것들이 방주안에 있는 몇쌍들을 제외하고는 다죽었다. 모든 피조물의 파멸은 타락의 굴레로부터 그것들을 구원하여 내는 것이었다. 지금도 온피조계가 그러한 구원을 갈망하며 신음하고 있다(롬 8:21,22).
(2) 세상에 있던(방주안에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 아이 할것 없이 다죽었다. 자신들이 물에 둘러싸인 것을 알았을때에 사람들이 어떤 두려움과 당혹감에 사로잡혔을 것인가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수 있다. 또한 그들이 자신들을 보존하기위하여 할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수 있다. 방주되신 그리스도안에 있지않는 자들은 반드시 파멸하고 만다. 이제 여기서 잠시 멈추어서서 이무서운 심판을 생각해 보자. 엘리바스는 이사건을 무사안일한 세상에 대한 뚜렷한 경고로 호소한다(욥 22:15, 16).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길을 지키려느냐 그들은 때가 이르기전에 끊어버리웠고 그터는 하수로인하여 함몰되었느니라."
2. 노아와 그의 가족의 특별한 보존(23)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 노아는 살아났다. 그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의의 기념비가 되었을때, 즉 그의 좌우에서 수천수만 명이 죽어갔을때 그는 긍휼의 기념비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수 있다. 오래참으시는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동안 노아는 사악한 세상에 경고를 전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게 하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그의 품으로 돌아왔고 그자신의 구원으로만 응답되었다. 이사실이 에스겔 14:14절에 명백히 언급되었다. '노아, 다니엘, 욥 이 세사람이…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2) 단지 그만이 살아남았다. 곧 살아남은 자는 오직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사실 산채로 매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밀폐된 곳에 갇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순종의 길을 걷고있으며 구원의 길을 걷고있다는 이사실로 스스로 위안을 삼고있었다.

# 핵심
7:1-24
마침내 홍수심판이 시작되고, 하나님이 노아와 그의 가족을 방주로 구원하시는 상황이다. 택한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원칙이다(마 3:12; 24:31).

# 묵상
노아의 구원 ( 7:1 )
노아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은 모두 악하여 하나님앞에 의를 드러낼 것이 없지만(롬3:10-12), 예수님의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의 의미 ( 7:1-6 )
하나님께서 태초에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3:15)에 근거하여 이 땅위에 거룩한 씨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기억하시고 당신의 구속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따라서 타락한 세대를 사는 성도는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를 의지하면서 소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방주가 예표하는 것 ( 7:23 )
구원의 방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방주에 들어간 사람과 동물들이 방주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었듯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또한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므로 구원의 방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 해설
대홍수 ( 7 )
창7장은 창6장에서 이미 예언된 홍수심판이 일백이십년 만에 성취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땅에 비를 내리게 하기전 일주일 앞서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과 모든 생물을 방주로 들어가도록 지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전무후무한 홍수심판을 행하신 것입니다.
1. 임박한 홍수
1) 하나님의 지시
하나님은 홍수가 있기 7일전 노아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셨습니다. 먼저 노아와 그의 가족을 보살피신 이유에 대해서 '이세대에 내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나서 부정한 짐승을 두쌍씩, 정결한 짐승은 일곱쌍씩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씨를 온지면에 유전케하라고 하셨습니다.
a.멸망전에 정신차려야(마25:10)
b.만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느9:6)
2) 하나님의 날짜예고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시하시고 7일만에 비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범죄한 인간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최후경고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심판의 모든 준비를 갖추시고 난후에도 다시금 죄악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회개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 것입니다(참조, 욘1:2). 이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오래참으시며, 심판을 통한 멸망보다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것을 바라시는지 알게 해줍니다.
a.당신의 비밀을 보이시는 하나님(암3:7)
b.당신의 공의를 보이시는 하나님(사45:21)
c.최후의 심판날은 아무도 모름(마24:36)
3) 노아의 순종
홍수가 있기 바로전이지만 아직 홍수가 닥칠 가시적인 징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비가 쏟아질것 같은 구름도 일지않으며 계속 화창한 날씨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정결한 짐승과 새, 부정한 짐승과 새를 모았습니다.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노아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a.하나님의 명령에 준행해야 함(렘11:6)
b.기쁨으로 준행해야 함(히13:17)
2. 홍수가 시작됨
1) 방주에 들어감
오랜기간동안 자신의 손으로 방주를 지은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자신의 가족들과 구별한 동물과 새와 함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방주에 들어간때에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에 들어간 노아와 그가족들의 행위는 그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노아의 믿음의 위대성은 순종함에 있습니다.
a.자신을 종으로 드리는 순종(롬6:16)
b.순종하는 자가 환난에서 구원받아(욥5:19)
c.방주는 구원의 상징(히11:7)
2) 홍수가 시작됨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나자 하나님께서는 땅에 비를 내리셨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노아 육백세 되던해 이월 곧 그달 십칠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은 계획된대로 정확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당시의 모습을 '큰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폭우와 함께 해일과 지하수의 범람까지 동원된 것을 암시합니다.
a.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심(민23:19)
b.일시간에 실행하심(계18:10)
c.홍수를 대비한 자들(창6:17-18)
3) 방주의 문을 닫으심
노아의 가족들이 방주에 들어가고 난다음 하나님은 거대한 심판에 착수하셨습니다. 그때 방주의 문을 닫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신 것은 그분께서 주권적으로 그방주를 통괄하시며 또한 생명들마저 자신의 주권으로 보호하시겠다는 의지를 암시합니다.
a.의인을 구원하심(시37:39)
b.모든 자연을 뜻대로 하심(암4:13)
3. 홍수의 참상
1) 계속되는 홍수
노아 육백세 되던해 이월십칠일에 시작된 홍수는 무려 밤낮 40일동안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의 비뿐만 아니라 지상의 모든 물을 동원하여 일시에 지구를 물로 채우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이며 절대적인 섭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a.능치못한 일이 없음(창18:14)
b.하나님을 찾지 아니함(사9:13-14)
2) 방주가 물위에 떠다님
엄청난 양의 홍수가 밤낮 40일동안 계속되자 구원의 도구이던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습니다. 물이 더욱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다니게 되었습니다. 홍수의 참상에 대해 성경은 천하의 높은 산이 다 물에 덮였다고 하였습니다.
a.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심(눅1:71)
b.들어간 생물들(창6:19-21)
c.방주는 세례를 상징함(벧전3:20)
3) 멸망과 구원
하나님의 심판도구로서의 물은 매우 강력하였습니다. 이세상 어느누구도 견디어 낼수 없는 위력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기로 작정하신 자는 다죽었고 살리기로 작정하신 자만 살아남았습니다. 방주안에는 구원이 있었지만 방주밖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코로 호흡하는 것은 모두 죽었습니다.
a.모든 사람을 심판하심(마25:32-33)
b.구원하심(사49:26)
c.깨닫지 못하던 자들의 멸망(마24:37-39)
결론
우리는 앞에서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성행하고 있던 죄악의 요소를 하나도 남김없이 멸망시키기 위해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친히 말씀으로 만드셨고 '보기에 좋았더라'라는 만족의 표시까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만물을 파멸시킨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서는 단호한 분이심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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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옛세상의 사악함 6:1,2
우리는 여기서 옛세상의 사악함을 야기시킨 두가지 사실을 보게된다.
1. 인류의 증가(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때에. 사람이 땅위에 번성한 것은 축복의 결과였다(1:28). 그러나 사람의 타락이 이축복을 악용하고 곡해하여 저주가 되게하였다. 죄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죄도 더많아지게 마련이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에서 전염병만큼 파괴적인 존재는 없다. 그런데 죄란 바로 전염되는 문둥병과 같은 것이다.
2. 혼합된 결혼(2)
'하나님의 아들들', 즉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사람의 딸들', 즉 하나님과 경건을 알지못하는 저속한 사람들의 딸들과 '결혼하였다.' 셋의 후손들은 그들이 마땅히 행해야할 바대로 자신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들은 파문당한 가인의 족속과 자신들을 뒤섞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대체 이들의 결혼에서 잘못된 점이 무엇이었는가?
첫째, 그들은 단지 외모만 보고 선택하였다. '그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리고 이점이 그들이 주목해서 본 전부였다.
둘째, 그들은 그들 자신의 타락한 성정이 결정하는대로 선택했다.
셋째, 그들에게 악한 결말을 가져왔던 점은 그들이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다는 것, 즉 '믿지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게 되었다'(고후 6:4)는 사실이었다.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을 개심시키는 것보다는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이 더빠를 것이다.

Ⅱ. 하나님의 싫어하심 6:3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여기신 사실이 드러난다.
(1) 그의 신으로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는 아니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심 : 성령께서는 사람들과 함께계셔서 양심의 가책과 충고로써 그들을 죄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다. 그러나 만일 성령께서 오랫동안 그렇게 애쓰신다해도 계속 저항을 받고 억제당하시며 거부당하신다면 언제까지나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호 4:17).
(2) 이러한 결심을 하시게된 이유 :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즉 그들이 돌이킬수 없을정도로 부패하고 세속적이며 육욕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령의 내주를 반대하고 헛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타락한 본성과 육신으로 향하는 영혼의 성향이다. 그러나 먼저 죄로인해 성령의 애쓰심을 상실한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성령의 내주를 잃지않을 것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행유예가 승인됨 :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년이 되리라. 여기서 주의할점은, 진노를 일으키는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관용은 때때로 오래까지 계속되나 언제나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집행유예가 곧 용서는 아니다.

Ⅲ. 옛세상의 부패 6:4,5
옛세상의 부패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1) 그들은 그들로하여금 사람들을 억압하고 폭행을 가하게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들은 '용사'였고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낙자손들(민 13:33)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졌다. 또한 그들은 앗수르왕(사 37:11)처럼 대단한 명성을 지녔다. 다른 사람들을 억압할수 있을만큼 큰힘을 지닌 사람들은 좀처럼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을만큼 자신들을 제어할 능력을 갖고있지 않다.
(2)드러난 죄과(5절) : 하나님은 무엇을 주의해 보셨는가?
1) 하나님은 사람들의 생활속에 흐르는 모든 죄악의 흐름을 보셨고 그흐름의 넓이와 깊이를 보셨다. 압제자들은 '용사였으며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때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관영함을 보셨다.' 가장 악명높은 죄인들이 사람들사이에서 유명해지는 그때가 사실 사람들의 사악함이 관영하는 때인 것이다. 죄인들의 모든 죄는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다 알려진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죄의 근원을 보셨다. 누구든지 '사람의 죄악이 관영했다'는 것을 볼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돔사람들처럼 자기들의 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깊이 내다보셨다. '하나님은 그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뿐인 것을 보셨다.'
①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이 그러했다.
② 그마음의 생각이 도모해 낸바가 그러했다. 즉 그들의 계획과 궁리가 악했다. 그들은 단순히 부주의로인해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해를 끼칠까를 궁리하면서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악을 행하였다.

IV.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그들을 멸망시키실 결심 6:6,7
1. 사람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6)
하나님은 그사실을 무관심한 방관자처럼 보시지 않고 그로인해 상심하고 모욕을 당한 자처럼 보셨다. 땅위에 사람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는 자애로운 아버지가 반항하며 불순종하는 자식의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보듯이 그점을 보셨다. 그러므로 그점은 그를 진노케 할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하는 것이었다.
(1) 이말이 하나님속에 어떤 격정이나 근심이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어떤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혼란을 야기시킬수 없다). 그보다 오히려 이말은 죄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하고 거룩한 불쾌를 표시한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죄를 미워하시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미워하지 않을수 있겠는가?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마음에 슬픔을 끼쳤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죄로인해 마음으로 슬퍼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않을수 있겠는가?
(2) 이말은 하나님의 심정의 어떤 변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방법의 변화를 표현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변절하였기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이 불쾌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보일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변한 것은 사람이지 하나님은 아니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사람을 구원하신 사실을 한탄하셨다는 것은 결코 보지 못한다.
2. 사람들의 죄악때문에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결심(7)
우리가 우리의 죄를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슬픔을 준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죄짓는 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밖에 되지않는다. 원문의 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즉 먼지나 오물이 깨끗해야 할곳에서 닦아 내어지듯이 '내가 사람을 지면에서 닦아내어 버리리라'(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자기 삶의 목적에 부응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들의 삶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헛되이 씨름하신후에 하나님께서 그들에 관해 이러한 결심을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파멸되지 않는다.

Ⅴ. 노아의 특성과 그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6:8-10
우리는 여기서 노아가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과 그에게 특별한 명예가 주어지는 것을 보게된다.
(1) 하나님께서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노하셨으나 노아에게는 은혜를 베푸셨다. 노아는 그때 세상에 남은 단 한사람의 의인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내시고 그에게 미소를 보내셨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되었다. 하나님은 그당시에 용사였고 유명한 사람들이었던 모든 네피림(장부)들보다 그를 더욱 위대하게 하셨고 영광스럽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는 자들은 크게 은혜를 받는다.
(2) 노아는 자신의 순전함을 지켰다. 노아는 의인이요(9절). 노아의 이러한 성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이유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성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신 결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안에 이러한 선한 역사를 일으킨 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이었다. 그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것이었다(고전 15:10). 이제 그의 특성 몇가지를 살펴보자.
1) 그는 의인이었다. 즉 언약의 후손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앞에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그는 '믿음을 쫓는 의의 후사'였다(히 11:7). 하나님께서 때때로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시지만 세상의 악한 것들은 결코 택하시지 않는다.
2) 그는 완전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죄없는 완전함이 아니라 진실함의 완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의로인한 은혜언약의 공로로 우리의 믿음이 이복음의 의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우리에게 다행한 일이다.
3)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았다. 하나님은 믿음의 눈으로 그를 진실하게 우러러보는 자들을 사랑의 눈으로 내려다보신다. 신앙이 유행하고 있을때 경건해 지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어느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나려 하지않을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나거나 사악한 세태의 풍조를 거슬러 천국에까지 헤엄쳐 올라가는 것은 강한 믿음과 결심의 증거가 된다.

Ⅵ. 노아 세대의 사악함 6:11,12
이당시 세대의 사악함이 여기에서 다시 언급된다.
(1) 모든 종류의 죄가 그들가운데 있었다. 온땅이 '하나님앞에 패괴하였으며'(11절), 사람들에 대한 '강포'와 불의가 '땅에 충만하였다'. 사악함이 인간본성의 수치가 되듯이 그것은 또한 인간사회를 파멸시키는 원인이 된다. 양심과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없애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짐승이 되고 서로에게 마귀가 되고말 것이다. 죄는 땅을 폭력으로 가득채워서 세상을 광야와 싸움터로 만든다.
(2) 그사실에 대한 증거는 부인할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땅을 보셨고' 그자신이 친히 세상에 가득찬 패괴함의 증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3)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전염병이 온세상에 퍼진 것이었다.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12절). 사악함이 널리 퍼지게 되면 전체적인 파멸은 멀지않은 법이다. 그러나 한 민족안에 죄악의 분량이 넘칠때 그것을 없애려고 기도하는 남은 자들이 있는한 파멸은 오랫동안 지연될수 있다.

Ⅶ. 노아의 가족과 짐승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6:13-21
노아가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실이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1) 하나님은 여기서 노아를 자신의 '의논상대'로 삼으신다. 그래서 그는 후에 소돔에 관한 자신의 결심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18:17) 이 악한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실 자신의 계획을 노아에게 알리신다. '여호와의 비밀'은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있다(암 3:7). 하나님은 계시의 영에 의해서 자신의 계획을 특별히 그들에게 알리신다. 모든 신자들은 지혜와 믿음의 영에 의해서 여호와의 비밀을 깨닫게 된다.
1) 하나님은 노아에게 세상을 멸하시리라는 것을(13절) 대략적으로 말씀하셨다. 필시 노아는 이웃들에게 그사실을 전파하면서 그들에게 경고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은 그의 그러한 노력들을 후원하신다.
2) 하나님은 노아에게 구체적으로 세상을 홍수로써 멸하시리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17절). 하나님께서 이때에 천사의 검으로써 세상을 완전히 다 멸하시지 않고 대신에 홍수를 일으키시고 노아의 가족을 남기신 이유를 우리가 다 알수는 없지만 그이유가 정당하고 지혜로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하나님은 화살통에 많은 화살을 가지고 계셔서 원하시는대로 쓰실수 있다. 하나님은 '내가 바로 내가(흠정역) 행하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심판의 확실성을 암시하신다.
(2) 하나님은 여기서 노아를 '그의 계약의 사람'으로 삼으신다. 이계약의 사람이란 히브리어에서 친구를 나타내는 완곡한 표현이다(18절). 그러나 너와는 내가 언약을 세우리니.
1) 하나님은 섭리의 언약을 세우셨다. 즉 자연의 진행은 비록 홍수로인해 잠시 중단될지라도 세상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약속은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직접 주어졌다(9:8이하). 이때 그들은 이세상의 모든 것을 맡은 자들로서 있었다.
2) 하나님은 또한 은혜의 언약을 세우셨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후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은 여기서 노아를, 사람을 아끼시는 긍휼의 기념비로 세우신다. 남다른 경건은 특별한 구원으로 보상될 것이다.
1)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짓도록' 지시하신다(14-16절). 이 방주는 커서 주체하기 어려운 거대한 배와 같았다. 그것은 바다를 항해하기에는 적합지 않았으나(그때는 항해하여 다다를 어떠한 해안도 없게될 것이므로 그렇게 날렵한 배일 필요가 없었다) 물이 줄어들기를 기다리면서 물위에 떠돌아다니기에는 적합한 배였다. 하나님은 그를 보호해줄 수단을 마련하는 일에 그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셨다. 이렇게 하신이유는 그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고, 우리에게 오직 '자기의 구원을 애써 이루는' 자들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없이 구원을 이룰수 없고 하나님은 우리없이 그일을 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이 건조물에 관해 그에게 매우 자세한 지시를 내리셨다.
① 이 방주는 '잣나무'로 만들어야 했다.
② 이 방주의 내부는 3층높이로 만들어야 했다.
③ 그내부를 칸막이로 막아 여러개의 방으로 나누어서 여러종류의 짐승들에게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주고 조금이라도 비는 곳이 없게하여야 했다.
④ 하나님께로부터 정확한 치수가 그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방법을 받아야하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지켜야 한다.
⑤ 방주의 '안팎을 역청으로 칠해야' 했다. 빗물이 새거나 물이 스며들지않도록 하기위해 밖을 칠하고, 문이 밀폐되었을때 짐승들의 악취를 제거하기위해 안을 칠해야 했다.
⑥ 빛이 들어오도록 지붕쪽으로 작은 창문을 내야했다.
⑦ 배옆면에 드나들수 있는 문을 만들어야 했다.
2) 하나님은 노아에게 그와 그의 가족이 방주안에서 목숨을 보존할 것을 약속하신다(18절). 너는 방주로 들어가고.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① 선한 부모들의 관심 :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의 구원, 특별히 그자녀들의 구원을 위해서도 염려한다.
② 경건한 부모를 가진 자녀들의 행복 : 부모들의 경건은 때때로 여기에서처럼 그자녀들에게 현세적인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만일 자녀들이 부모의 경건으로부터 오는 유익을 선용한다면 그것은 더나아가 영원한 구원에도 이르게 한다.
(4) 하나님은 여기서 노아를 세상에 주시는 커다란 축복으로 삼으신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가운데서 그를 메시야의 탁월한 예표로 삼으신다.
1) 하나님은 그를 그세대 사람들에게 외치는 전파자로 삼으셨다.
2) 하나님은 그를 그보다 못한 피조물들의 구조자로 삼으시고 그중 여러종류의 생물들을 대홍수가운데서 멸종되지 않도록 보존하게 하셨다(19-21절).
① 그는 그생물들이 물에 빠져 죽지않도록 그들을 위한 피난처를 마련해야 했다.
② 그는 그생물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그들을 먹일 양식을 준비해야 했다(21절). 이사실에서도 그는, 세상을 유지하고 만물을 존속시키며 죄로인한 파멸과 완전한 제거로부터 인류를 보전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노아는 자기가 다스려야할 자들을 구원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다(히 5:9).

Ⅷ. 노아의 순종 6:22
방주를 짓는 일에 있어서의 노아의 고심과 부지런함은 다음 몇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믿음의 결과로 생각할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의 행위로 생각할수 있다. 그의 이웃들은 그의 고지식함을 두고 그를 비웃었을 것이며 또한 그는 술꾼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방주는 '노아의 호화로운 별장'이라고 놀림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이 수많은 반대들을 믿음으로 이겨냈다. 그는 모든 일을 지시받은 그대로 행하였고, 일단 방주를 짓기 시작한후에는 완성할때까지 일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행하였으니 우리도 그와같이 행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땅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심판들가운데서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한다. 특별히 죽을때와 심판때에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하며, 반석이신 그리스도위에 집을 지어야 하고(마 7:24) 방주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야 한다.
넷째, 노아가 휘두른 도끼와 망치에서 나는 소리 하나하나는 모두 그세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소리였고 그들도 역시 방주를 예비하라는 외침이었다.

# 핵심
6:1-12
하나님이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실수밖에 없을정도로 죄악이 만연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인가?(6:2)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은 천사를 가리키거나(욥 1:6; 38:7; 시 29:1) 경건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자들을 가리킨다(신 14:1; 시 73:15; 호 1:10). 본문에서는 셋계열의 후손들인 언약의 가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것 같다. 다시말해서, 본문은 경건한 신자들과 불신자들사이의 혼합결혼과 그로 말미암은 영적, 도덕적 타락을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 묵상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 6:2 )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경건한 셋계열의 후예요, 사람의 딸들이란 불경건한 가인계열의 후예로 볼수 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결혼했다는 것은 한때 경건했던 자들이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육신의 정욕을 좇아 타락하였음을 보여주며 이러한 타락의 결과는 멸망뿐임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 6:3 )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의 성령이 더이상 그들과 함께하실수 없게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의 패역을 그대로 두고 보실수 없기 때문입니다(합1:13).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한 진노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십니다(합3:2). 인간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령은 무려 120년동안이나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에 대한 산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 ( 6:6 )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는 결코 불완전한 인간과 같은 후회나 변덕이 있을수 없습니다(민23:19). 따라서 본문의 표현은 인간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이 쉽게 이해하도록 표현한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와 교회 ( 6:13-22 )
방주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만들어진 것같이 교회도 하나님의 지시를 따를때 훌륭한 교회가 되며, 방주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서 노아가족을 구원한 것같이 교회도 성도들의 영혼을 구원합니다. 또한 방주의 문이 하나이며 그문을 통과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같이 교회도 유일한 문인 예수님을 통해서만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 해설
당세의 의인 노아 ( 6 )
창1장에서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의 창조와 천지창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온세상을 모두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개입으로 죄가 이땅에 들어왔고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사악한 세상의 많은 죄악도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본장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들이 극도로 타락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전멸당하게 되는 인류 최악의 사건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1. 노아 시대의 부패상
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함
인류역사 초기에는 인구증가가 급속히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사람들이 장수하였으며 많은 자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참조, 창5:3-32). 이러한 현상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의(참조, 창1:28) 성취이기도 합니다. 즉 초기의 인간들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막강한 생식력을 가지고 다산함으로써 땅위에 사람이 번성케된 것입니다.
a.생육하고 번성하라(창9:7)
b.인구번성은 하나님의 명령(창1:28)
2) 죄악이 극에 달함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자 사악한 세상의 많은 죄악도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인류가 땅위에 불어나면서 그들에게서 많은 딸들이 나왔습니다. 특히 가인의 후예가운데 딸들이 생겼습니다(참조, 창4:19). 사람의 딸들은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아름다움에 끌려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고 말았습니다. 한번 타락한 인간들은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급속도로 부패하여 갔으며 죄악이 극에 달하였습니다.
a.사람의 것은 헛된 것임을 알아야(시144:3-4)
b.하나님께 거역하는 인간들(창2:16-17)
c.쾌락주의와 세상(벧후2:13)
3) 하나님께서 한탄하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활속에 흐르고있는 심각한 죄악의 흐름을 감찰하셨습니다. 인간들의 죄악은 자꾸 영역을 넓혀서 선이란 조금도 찾아볼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질서와 혼돈의 세상이 된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을 보시고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는 것은 인간들의 죄악이 얼마나 극에 달하였는가를 보여줍니다.
a.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유1:16)
b.성령을 거스르는 자들(갈5:17)
c.내일을 생각지 않으려는 자들(사22:13)
2.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심
1) 심판을 작정하심
인간들의 죄악의 관영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한탄하실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창조하신 사람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심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패륜과 죄악을 미워하십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습니다(참조, 롬8:8). 하나님은 사랑하는 인간의 죄악을 도외시하지 않으시고 그죄악을 벌함으로써 새로운 질서체계와 새생명을 주시고자 심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삼라만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a.뜻하지 않은 날의 심판(계18:10)
b.하나님만이 아시는 심판의 때(막13:32)
c.행위를 따라 심판하실 것임(벧전1:17)
2) 은혜를 입은 노아
하나님께서 심판가운데서도 노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이루어진 일로 엄청난 새질서와 새로운 시작의 첫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경외하고 섬기는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엄정한 심판을 작정하신가운데 노아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된 우리에게 확실한 산소망의 증거입니다.
a.명령대로 준행하는 자(창7:5)
b.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히11:6)
3) 의인 노아
의인이란 '곧다'라는 뜻으로 흠없고 무죄하다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믿음으로써 하나님앞에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타락한 세상의 영향을 받지않고 자신의 믿음의 신념을 지킨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를 가리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a.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힘써 지켜야 함(대상28:7)
b.진리와 의(엡6:14)
c.의를 전파하는 노아(벧후2:5)
3. 심판에 대비한 준비
1) 노아에게 심판을 알려주심
노아의 의로운 삶을 보신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시겠다는 자신의 뜻을 노아에게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예고하셨고 깊은 비밀을 그사랑하는 자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의인에게는 악의 종국을 예고해주시나 악인은 그멸망을 깨닫지 못합니다.
a.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요5:24)
b.복을 받음(계22:7)
2) 방주를 짓도록 하심
노아에게 심판을 알려주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삶을 살았던 그에게 방주를 짓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를 구원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끝까지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노아의 사건을 통해서도 알수 있습니다.
a.주의 백성을 위해 예비(출15:17)
b.잣나무를 재료로 함(창6:14)
c.온전히 준행하는 노아(창6:22)
3) 순종하는 노아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노아는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노아는 보지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고 이를 믿었습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약속을 확증도 없이 믿음으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준행했습니다.
a.타락한 세상속에서(마24:38-39)
b.방주안으로 들어감(창7:1-3)
결론
우리는 창6장을 통하여 다시 한번 인간의 사악함과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상과는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노아의 경건한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로하여금 타락한 현대 사회속에서 믿음을 잃지말아야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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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아담에 관하여 5:1-5
이 장의 첫마디가 이장 전체의 제목 혹은 요지가 된다. 이 장은 곧 '아담 자손의 계보'이다. 이계보는 아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1. 그의 창조(1.2)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창조에 관한 이전의 내용이 간단히 반복되는 것을 보게된다. 여기서 다음의 몇가지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을때에(1절). 인간은 인간 자신의 창조주가 아니므로 자신의 주인이 될수 없다. 그를 지으신 자가 마땅히 그의 행동의 지도자가 되어야하고 그행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2)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날이 있었다. 사람은 영원부터 있어온 존재가 아니라 단지 얼마전부터 있기 시작한 존재이다.
(3)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을 따라 의롭고 거룩하게, 따라서 틀림없이 행복해지도록 지으셨다.
(4) 하나님은 사람들을 번성케하고 보존하시기 위해서뿐 아니라 서로에게 위로를 주도록 하시기위해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2절).
2. 그의 아들 셋의 출생(3)
여기서 셋에 관한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은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을 따라' 그를 낳았다는 점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 그러나 그가 타락하고 부패해지자 자기 모양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Ⅱ. 셋부터 야렛까지 5:6-20
우리는 여기서 성령께서 노아의 홍수이전에 살았던 족장들중 다섯명에 관한 기록을 남겨두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셨음을 알수 있다. 그들은 곧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이다. 비록 그들이 그당시에 신앙과 사려분별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지만 이들중 어느누구에 관해서도 특별히 주목할만한 기록은 전혀없다.
(1) 에녹을 제외하고 이들 각사람에 관해서 성경은 '그리고 그가 죽었더라'고 말한다. 그들 생애의 연수를 계수함에 있어서 그연수를 헤아리다 끝이나면 그들의 생애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고는 거기에 언제나 '그리고 그가 죽었더라'는 말이 반복되는데 이말씀은 죽음이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건강한 자들도 죽었다. 위대하고 부유한 자들도 역시 죽었다. 매우 사려깊고 지혜로운 자들도 죽었다. 또한 선량한 사람들이며 매우 유용한 사람들이었다해도 역시 죽었다.
(2)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만한 점은 그들이 매우 오래 살았다는 사실이다. 경건한 족장들에 있어서 장수는 축복이었고 그로인해 그들은 많은 복을 누렸다.

Ⅲ. 에녹에 관하여 5:21-24
여기서 족장들의 이름과 연수외에는 주목할만한 어떤 언급이나 변화없이 여러세대에 대한 설명이 계속된다. 그러나 드디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한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곧 아담의 칠대손인 '에녹'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도 고결하게 살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족장시대에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고 생각할수 있다. 그에 관해 기록된 내용은 극히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적은 기록으로도 그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즉 자기 이름을 딴 도성을 가진 다른 에녹의 이름보다(4:17) 훨씬더 위대하게 만들수 있었다. 그에 관해 다음 두가지 사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1. 그가 이세상에서 하나님과 나눈 영광스러운 교제(21-23)
이사실이 두번씩이나 언급된다. 므두셀라를 낳은후…하나님과 동행하며(22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24절).
(1) 그의 신앙의 특성과 교제의 의미 :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라는 말은 다음의 몇가지 점을 나타낸다.
1) 참된 신앙을 나타낸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경건이겠는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자들은 이세상에서 하나님없이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등지고 반대로 걸어간다. 그러나 경건한 자는 하나님과 동행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두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서는 동행할수 없기 때문이다(암 3:3).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언제나 우리앞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며 언제나 그의 감찰을 받고있는 사람답게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배의식이나 섭리안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준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의 계획에 동의하고 그와 함께하는 일꾼이 되는 것이다.
2) 탁월한 신앙을 나타낸다. 그는 이세상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죽었다. 그리고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따라 행할뿐만 아니라 이미 천국에 올라가있는 사람처럼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3) 다른 사람들사이에 신앙을 증진시키는 행동을 나타낸다.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행하는 것'으로 성경에서 일컬어진다(참조, 삼상 2:30;슥 3:7). 에녹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음에 틀림없다. 성령께서는 에녹이 '살았다'고 말씀하시기보다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곧 경건한 사람의 생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에녹의 삶의 관심사였고 그의 삶의 기쁨이요 지주였다.
2. 그의 더나은 세계로의 영광스러운 이동(24)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살지않았듯이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죽지않았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히브리서 기자의 설명대로 하자면 이렇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히 11:5). 선한 자가 죽을때에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그를 붙드시며, 죽음로부터 그를 빼앗으시어 자기 곁으로 불러들이신다. 히브리서 기자는 에녹에 관해 다음의 말을 덧붙인다. '저는 옮기우기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이세상에서의 생활이 진정으로 거룩한 사람들은 이세상을 떠나는 것이 참으로 큰행복임을 발견할 것이다.

Ⅳ. 므두셀라에 관하여 5:25-27
'므두셀라'란 '그는 죽는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것이다. 즉 아무리 오래사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죽게될 것이므로 그는 비록 죽음이 천천히 온다할지라도 반드시 온다는 것을 깨닫게될 것이다.

Ⅴ. 노아에 관하여 5:28-32
여기에 노아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데 이후로 그에 관한 기사가 계속된다.
1. 그의 이름(28-31)
'노아'란 '안식'을 의미한다. 그의 부모는 그가 그의 세대에 특별한 축복이 되기를 기대하여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
2. 그의 자녀들(32)
셈과 함과 야벳. 아무래도 야벳이 장남인것 같은데 셈의 이름이 앞에 나온 것은 9:26절에서 볼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언약이 주어졌기 때문인 듯하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로 일컬어진다. 아마 그에게 장자 상속권이 주어졌던것 같다. 또한 그에게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가 계승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셈'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이름'이란 뜻이다. 그가 그렇게 불린이유는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가진 자이신 그리스도가 그의 허리에서 나실때까지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후손가운데 언제나 함께 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셈의 이름을 맨앞에 놓음으로써 사실은 만물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를 제일앞에 놓게되는 것이다.

# 핵심
5:1-32
가인의 혈통과 비교되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를 잇는 셋의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계보에 속하신다.
아담의 자부들은 누구인가?(5:6)
아담은 930년에 이르는 긴 일생동안 많은 자녀를 낳았다. 따라서 사촌이나 먼 친척중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은 그다지 많은 세대를 거치지 않고서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자녀들이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서는 남매지간에 짝을 맺는 일이 불가피했다. 레 20:17절은 남매의 결혼을 금하고 있지만, 아브라함때까지만 해도 남매간의 결혼을 근친상간으로 분명히 규정하는 내용은 나타나지 않는다.

# 묵상
아담자손의 계보가 갖는 의미 ( 5:1-32 )
이계보는 구속사의 진행과정에서 필요한 인물만을 뽑아서 언급한 것으로써, 구속사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3:15절에 말씀하신대로 구원의 섭리를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맞추어 진행시키고 계십니다.
인류의 장수현상 ( 5:3-32 )
노아 대홍수가 있기전까지는 자연상태가 매우 조화로워서 장수가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목격하거나 직접 전해 들은 사람들을 장수케하여 후손들에게 이를 전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으로도 이해할수 있습니다.
아담자손 계보의 특징 ( 5:6-32 )
하나님의 구속사적 경륜에 의한 셋계열의 족보이며, 주요인물을 선택하여 이름, 후계자를 낳은 연령, 이후의 여생, 향수한 나이순으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이기록들에는 신앙인들의 고백과 삶과 신앙이 압축되어 있어 우리는 이속에서 우리의 신앙의 본보기를 찾아볼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 5:24 )
에녹은 맨처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선행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항상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실천 동행함으로써,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뜻합니다(히11:5).

# 해설
홍수이전의 인류계보 ( 5 )
본장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으로 창조하신 때부터 노아의 대홍수이전까지의 역사를 족보의 형태를 빌어 전개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사실은 1절 초두에서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족보는 하나의 연대기를 제공하려는데 그의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10명의 대표자들을 선택하여 그들이 다 죽어간 것을 기술함으로써 죽음은 피할수 없는 보편적인 것으로 사람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보이려 합니다.
1. 아담에서 야렛까지의 족보
1) 아담
인류의 시조는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실때에 흙으로 지으셨습니다(참조, 창2:7). 그후 하나님께서 여자를 지으실때에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참조, 창2:21).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여기에서의 형상은 육체적인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류할수 있는 영혼을 지닌 고매한 존재로서의 인간임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은 범죄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어 살다가 구백삼십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a.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창5:1)
b.에덴을 관리했던 아담(창2:15)
c.아담의 계보와 그리스도(마1:1)
2) 셋
아담과 하와사이에 가인과 아벨 두아들이 있었으나 하나님앞에 인정받는 제사를 드린 아벨이 가인의 손에 살해되었습니다. 그후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하여 셋이라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셋은 아담의 계보를 잇는 인간역사의 중요한 몫을 하고있는 것입니다. 셋은 인간을 위한 유일한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중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된것입니다. 셋은 105세에 에노스를 낳고 912세를 향수하고 죽었습니다.
a.그리스도의 조상이 됨(눅3:38)
b.아벨을 대신한 자(창4:25)
3) 에노스에서 야렛까지
아담이 구백삼십년동안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며 생존한후 셋 또한 구백십이년을 살았으며 그의 후손인 테노스는 구백오년을, 게난은 구백십년을, 마할랄렐은 팔백구십오년을, 야렛은 구백육십이년을 향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장수하는 셋의 후예에게서 그들의 신앙과 그신앙에 합당한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a.에노스(창4:25-26)
b.게난(창5:19-14)
c.마할랄렐(창5:12)
d.야렛(창5:15-18)
2. 에녹
1) 야렛의 아들 에녹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에녹은 야렛의 아들입니다. 야렛은 일백육십이세에 에녹을 낳았습니다. 야렛과 에녹은 셋의 후예들로서 셋의 신앙과 생활을 본받아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습니다.
a.하나님과 동행한 자(창5:24)
b.므두셀라의 아비(창5:20-21)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에녹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의 원칙적인 전제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11:6)라고 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기를 '저는 옮기우기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11:5)고 적고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a.찬송은 하나님을 기쁘게 함(대하29:30)
b.회개를 기뻐하시는 하나님(눅15:21-24)
3) 승천함
무려 삼백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했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승천하였습니다. 에녹에게는 여러 조상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장수하다 세상을 떠났고 그들의 육체는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에녹은 그들과 달리 죽지않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기워 갔습니다.
a.죽음을 보지않는 것(히11:5)
b.회리바람으로 올리워간 엘리야(왕하2:11)
c.그리스도와 승천(요6:62)
d.장차 성도들의 승천(살전4:13-18)
3. 므두셀라에서 노아까지
1) 므두셀라
므두셀라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에녹의 아들입니다. 아담에서부터 노아때까지는 에녹을 제외하고는 구백년에서 칠백년이상을 살고간 사람이 허다합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장수한 사람이 므두셀라로서 구백육십구년을 향수하였던 인물입니다.
a.에녹이 낳은 자(창5:21-24)
b.노아의 할아버지(창5:25)
2) 라멕
라멕은 므두셀라가 일백팔십칠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라멕은 창4장에 나오는 라멕과 이름은 같으나 같은 사람은 아닙니다. 창4장의 라멕은 두아내를 취하는 불륜의 사람이지만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신앙계승의 모범자입니다. 그는 일백팔십이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였으며 칠백칠십칠세에 죽었습니다.
a.므두셀라의 아들(창5:25)
b.많은 아내를 거느린 자(창4:23-24)
3) 노아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안위자'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안위를 받았을뿐만 아니라 노아라는 이름대로 안위자로서 바른신앙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는 타락하고 부패한 모습들을 지적할때에 노아의 때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가 살던 시대적 배경은 타락하고 하나님이 없는 무질서와 혼동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의롭게 살았습니다.
a.하나님과 동행함(창6:9)
b.세아들을 낳음(창10:1)
결론
우리는 앞서 아담에서부터 노아때까지의 계보를 살펴보았습니다. 창5장에 나타난 아담자손의 계보는 연대기적 자료도 아니고 또 단순한 족보도 아닙니다. 이계보는 타락한 인간사이에서 그루터기로 남아있는 거룩한 씨에 관한 기록이며,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께서 나시게된 계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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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가인과 아벨을 낳음 4:1,2
아담과 하와에게는 많은 아들 딸들이 있었다(5:4). 가인과 아벨은 그형제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두사람이었던것 같다.
1. 두아들의 이름(1,2)
(1) 가인은 "얻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이유는 하와가 그를 낳았을때 기쁨과 감사와 더불어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녀를 늘려주신다는 사실에 대해 마땅히 감사를 드려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하나님은 친히 지으시고 주신 선물을 저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을 알때 자녀들에게서 오는 우리의 위로는 갑절이 되고 신성하게 되는 것이다.
(2) 아벨은 "헛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와는 자기가 가인으로써 약속된 후손을 얻었다고 생각하였기때문에 또다른 아들은 자기에게 헛되다고 여겼다.
2. 가인과 아벨의 직업(2)
(1) 그들은 둘다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순결한 상태에 있을때조차도 직업을 주셨으며 이제 그들에게도 직업을 주셨다. 우리 모두가 이세상에서 할일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기 자녀들이 일을 할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자녀들에게 성경과 직업을 주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이다"라고 도드는 말했다.
(2) 그들의 직업이 달랐기때문에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들은 서로 물건을 거래하고 바꿀수 있었다. 국가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또한 그들은 상호간의 거래를 통해서 서로에게 더 큰호의를 가질수 있게되는 것이다.
(3) 그들의 일은 그들 아버지의 직업인 농사꾼으로서의 소명에 속해 있었다.
(4) 아벨은 비록 동생이었지만 먼저 직업을 가졌고 이 본보기가 아마도 가인으로하여금 직업을 갖게 만들었을 것이다.
(5) 아벨은 명상과 기도에 가장 유리한 직업을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명상과 기도에 유리하다는 이유때문에 목축생활은 특별히 더좋은 직업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이다.

Ⅱ. 가인과 아벨의 신앙 4:3-5
1. 가인과 아벨의 신앙(3,4)
'세월이 지난후에' 가인과 아벨은 그가족의 제사장인 아담에게 각각 '여호와께 드릴 제물'을 가져왔다. 하나님은 이렇게해서 약속에 대한 아담의 믿음과 치료책으로 주신 법에 대한 그의 복종을 시험하셨다. 하나님은 이렇게해서 다시 하늘과 땅사이에 교통이 있게하려고 하셨고 장차올 좋은 것들의 그림자를 주려고 하셨다. 여기서 다음의 네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경건한 예배란 전혀 새로운 고안물이 아니라 옛부터 있어온 제도이다. 그것은 '태초부터 있는'(요일 1:1) 것이며 '옛적의 선한 길'(렘 6:16)이다.
둘째, 자녀들이 어릴때 그들에게 경건한 예배를 잘가르치고 일찍부터 훈련시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야 그들이 장성하여 스스로 행동하게 되었을때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 우리는 가진바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한다.
넷째, 위선자들과 악을 행하는 자들도 외형적인 예배에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나타내 보일수 있다. 가인도 아벨과 함께 제물을 가져왔다. 아니, 마치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제물을 가져온 것처럼 가인의 제물이 앞에 언급되었다. 바리새인이나 세리나 모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었다(눅 18:10).
2. 그들 신앙의 각기 다른 결과(4,5)
신앙의 모든 행위가운데서 목표삼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열납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이목표를 이룬다면 참된 예배가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헛되이 경배하게 되는 셈이다(고후 5:9). 하나님은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 하셨으며' 아마도 하늘에서 불을 내리심으로써 그증거를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과 그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하셨다'.
(1) 그들사이에는 인격의 차이가 있었다. 가인은 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제물은 '헛된 제물'이었다(사 1:13). 하나님은 가인 자신을 열납하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그의 제물도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인 아벨'이라고 불린다(마 23:35). 그의 마음은 곧고 그의 생활은 경건하였다. 하나님은 그를 거룩한 사람으로서 열납하셨고 그러므로 그의 제물을 거룩한 제물로서 열납하셨다.
(2) 그들이 가져온 제물에 차이가 있었다. 성경에는 아벨의 것이 가인의 것보다 '더나은 제사'(히 11:4)라고 명백히 언급되었다. 아벨의 것은 제사의 성격에서나 제물의 질에 있어서 더나았다. 가인은 손쉽게 구할수 있는 것인 '땅의 소산'을, 곧 자기에게 필요없는 것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벨은 제물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신중했다. 아벨은 절름발이나 깡마른 것이나 찌꺼기를 제물로 선택하지 않고 '양의 첫새끼', 곧 그에게 있는것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그리고 '그기름', 곧 최고의 것들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제물을 삼았다.
(3) 무엇보다 중대한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의거한 원리자체에 차이가 있었다.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법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목표로 삼고 제물을 드렸다. 그러나 가인은 단지 교제를 위해서 하는정도로만 했다. 곧 자기 자신의 신용을 보존키위하여서만 드렸으며 믿음으로 드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것이 그에게 죄가 될수밖에 없었다. 아벨은 회개의 마음을 가진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가인은 겸손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신뢰하였다.
3.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와 자신의 제사에 차별을 두신데 대한 가인의 불만(5)
가인은 이에 대해 몹시 분을 내었고 그것이 이내 그의 얼굴에 나타났다.
첫째, 이러한 그의 분노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적대감을 나타낸다. 명백히 그는 자신의 불신앙과 위선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시지 아니한 것이라고 자신을 나무라고 통분해 해야했었다. 우리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듣는 비난들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한 마음을 가졌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둘째, 또한 그것은 자기 동생에 대한 그의 시기심을 나타낸다. 그는 자기 동생을 원수로 보고 증오심을 품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에 무가치한 자들은 흔히 하나님의 은총으로 귀하게된 자들에 대해 분을 품는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음'으로써(눅 11:52) 가인의 이러한 길을 걸었다. 시기심이란 대체로 그자체에 뼈를 썩게하는 형벌이 따르는 죄이다.

Ⅲ. 가인의 분노와 하나님의 책망 4:6,7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의 분노와 불평이 어리석고 죄된 행위임을 깨닫게 하고 그로 다시 선한 성품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이상의 악을 방지할수 있도록 그와 변론하신다. 이와같이 탕자의 아버지도 맏아들과 그들이 당면한 문제를 변론하였다(눅 15:28 이하).
(1) 하나님은 가인 스스로 자신의 불평의 동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도록 말씀하신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6절).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유의하자.
첫째,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적인 격정과 불만을 주목하고 계시다.
둘째,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자문해 보아야할 것이다. "왜 내가 분해하는가? 내가 분을 내는데 실제적이고 바르며 적당한 이유가 있는가? 내가 어찌하여 그렇게 급히 성을 내는가?"
(2) 하나님은 다시 가인의 마음을 바로잡으시기 위해 여기서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그에게 명백히 밝히셨다.
1) 그가 하나님께 화를 내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① 하나님은 가인앞에 생명과 축복을 제시하신다.
㉠ "만일 네가 네 동생이 한것처럼 선을 행했다면 너의 제물도 네 동생의 것처럼 틀림없이 열납되었을 것이다."
㉡ "이제 만일 네가 선을 행한다면 다시말해 네가 네 죄를 회개하고 네 마음과 생활을 고치며 보다 나은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열납될 것이고 너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며 너의 위로와 명예가 회복되고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이 얼마나 일찍부터 전파되었는가를 보게되고 그복음의 은혜가 죄인들중의 괴수인 한사람에게까지 제공되었음을 보게된다.
② 하나님은 가인앞에 죽음과 저주를 놓으신다. "만일 네가 선을 행하려하지 않는다면 다시말해 네가 계속해서 분을 품고 하나님앞에서 스스로 겸비해지기보다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마음이 강퍅해진다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이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 죄를 더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분이 네 마음속에 있으니 머지않아 살인을 하게되리라"는 것이다.
㉡ 죄의 형벌을 가져오리라는 뜻이다. 죄와 형벌은 아주 가까운 동계어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는 같은 어휘로 두가지 뜻을 모두 표현하고 있다. 죄가 집안에 숨어있으면 저주는 죄수를 발견하기만 하면 곧 체포할 준비가 되어있는 형사처럼 문에서 기다린다. 네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와 '죄를 위한 희생'을 모두 의미한다. 성경은 대속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문밖에 서계시다'고 말한다(계3:20). 이모든 사실을 생각해볼때 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화를 내야했지 하나님께 대하여 화를 낼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2) 그가 자기 동생에게 화를 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의 소원은 네게 달려있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너를 형으로 존중할 것이고 너는 장로로서 이전처럼 그를 다스릴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고해서 장자 상속권을 그에게로 옮겨주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렇게하려고 하지않으셨고 아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째서 가인이 그렇게 화를 내야만 했는가?

IV. 아벨이 죽임을 당함 4:8
이사실은 다음 두가지 면으로 생각해 볼수 있다.
(1) 가인의 죄를 생각해 볼수 있다. 그것은 가장 심각한 진홍빛 붉은 죄였다. 이점에서 우리는 다음 몇가지 사실들을 볼수 있다.
1)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은 아주 사소한 죄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죄로 말미암아 아주 극악한 죄가 들어오게 된것이다.
2) 이것은 여자의 후손을 대적하는 뱀의 후손이 품고있는 적의의 결과였다. 육신을 좇는 자가 '성령을 좇는 자를 핍박하는' 일은 이처럼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3) 여기서 또한 우리의 '시기와 미움과 악의 그리고 모든 무자비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된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 가득하면 그사람은 살인과 같이 두려운 죄에 빠질 위험이 있다. 많은 죄들은 가인의 죄가 악화된 결과들이었다.
① 그가 살해한 사람은 자기의 친동생 곧 그가 마땅히 보호해야할 어린 동생이었다.
② 또한 그동생은 자기에게 조그만 잘못도 결코 행한 적이 없는 착한 동생이었다.
③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이일로 말미암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야만적인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④ 그는 겉으로 우정과 친절을 보임으로써 그계획을 숨겼다. 70인역에 따르면 가인은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고 말하였다고 한다. 아람역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가인은 장차올 심판도 없고 내세도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아벨이 진리를 변호하여 말하자 그가 이것을 기회로 그를 때려 눕혔다고 한다.
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바에 의하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자기행위는 악하고 그아우의 행위는 의로왔기' 때문이었다(요일 3:12).
⑥ 아니 그는 자기 아우를 죽이는 가운데서 직접 하나님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아벨을 사랑하시기때문에 그를 미워하였다.
(2) 아벨의 고난으로 생각해 볼수 있다. 아담이 범죄한 이래로 줄곧 사망이 왕노릇 해왔으나 이제까지 누가 그사망에게 붙잡혔다는 기사가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사망에 붙잡힌 자가 나오게 된것이다.
1)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성도,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에게 열납된 자였다. 그리하여 최초로 무덤에 간 자는 천국에 갔다.
2) 최초로 죽은 자는 자신의 믿음을 위하여 죽은 순교자였다. 아벨의 죽음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면류관이 따르는 죽음이었다.

Ⅴ. 첫범죄자에 대한 공판과 정죄 4:9-12
1. 가인에 대한 심문(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 하나님은 가인이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할수 있도록 그에게 물으신다. 그이유는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으려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비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죄를 뉘우치는 자들은 그렇게 할것이다.
2. 가인의 항변(9)
그는 죄가 없다고 주장하며 살인죄에 반항의 죄를 더한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그는 계획적인 거짓말로 계획적인 살인을 감추려고 애쓴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이와같이 마귀는 처음부터 가인안에서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였다. 이상하게도 눈이 먼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게서 자신의 죄를 숨길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한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들은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해주시는 하나님에게서 자신의 죄를 감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둘째, 그는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무례하게 자신의 재판관을 어리석고 불의한 자로 비난한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내가 바로 내 아우를 죽인 자가 아닙니까"라고 자책하며 말했어야 했다. 혹자는 그가 마치 "당신이 그를 지키는 자가 아닙니까? 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지 그를 지킬 책임이 없는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나님과 그의 섭리를 비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형제들을 돌보는 일에 무관심한 자들은 그형제들의 신체나 재물 혹은 명성이, 특히 그들의 영혼이 손상되는 것을 예방해야 할때가 되면 사실상 가인과 같은 말을 한다(레 19:17; 빌 2:4).
3. 가인의 유죄선고(10)
그의 말을 반대하는 증거가 논의의 여지가 없을만큼 명백하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지식이 가인에 대하여 불리한 증거를 하기전에 마치 피자체가 증인이고 고발자인 것처럼 말씀하신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살인은 하나님께 가장 크게 울부짖는 죄이다. 인내로 고난을 받은 자들은 용서를 위하여 부르짖었지만(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의 피는 원수갚음을 위하여 부르짖는다.
둘째, 하나님은 피가 땅에서부터 호소한다고 말씀하셨다. 곧 '땅이 그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11절).
셋째, 원문에서는 그단어가 복수로 쓰여 네 아우의 '피들이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지금 죽은 자의 피뿐 아니라 그의 후손으로 태어날수 있었을뻔한 모든 사람들의 피도 또한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피가 아벨의 피보다 더나은 것을 말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히 12:24). 아벨의 피는 원수갚음을 위하여 호소하였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용서를 위하여 호소하였다.
4. 가인에게 내려진 선고(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1) 그는 저주를 받았다. 아담의 불순종에 대한 저주는 땅에 대한 것, 곧 '땅은 너로인하여 저주를 받으리라'는 것으로 한정되었다. 그러나 가인의 반역에 대한 저주는 즉시로 그자신에게 떨어졌다. '네가 저주를 받으리라'. 사실 우리 모두가 다 이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다. 신자들이 이저주에서 구원을 받고 축복을 상속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갈 3:10-13).
(2) 그는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가인은 자신이 자기 몫으로 선택하고 마음을 둔곳에서 자신의 형벌을 발견하였다. 우리는 땅에서 두가지의 것을 기대한다. 그것은 음식물과 정착이다. 그러나 이 저주로인하여 가인은 땅에서 기대할수 있는 이 두가지를 모두 박탈당했다. 그러므로 땅에서 나는 음식물이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그가 그러한 것을 누려왔고 특별히 그의 직업을 생각해 볼때 이사실은 그에게 저주였다. 네가 밭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효력을 네게 주지아니할 것이요, 또한 땅에서의 정착이 그에게 거절된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그는 이 저주로인해 사람들사이에서 끊임없이 수치와 비난을 받게되었으며 그자신의 마음속 또한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가 일게되었다. 그리하여 그자신의 범죄한 양심이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고 그로하여금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게 만들 것이다. 가슴속에 스스로 불안을 품고다니는 사람들이라면 어디로 간다고해서 어떤 안식을 얻을수 있으며 정착할 어떤 곳을 발견할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처럼 마음이 불안한 사람들은 도망자가 될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것이 가인에게 내려진 선고였다. 그리고 이선고에서조차도 그가 즉시로 제거되지 않고 회개할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점에 있어서 거기에는 자비가 뒤섞여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래참으시며 아무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Ⅵ. 이선고에 대한 가인의 불평과 하나님의 선고의 확정 4:13-15
1. 자신에게 내려진 선고에 대한 가인의 불평(13,14)
그는 이선고가 엄하고 힘들다고 불평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절망의 말을 토로했다고 여긴다. 아무리 큰죄와 죄인들이라도 용서의 하나님께로 가면 거기에서 사유함이 있다. 그러나 그 사유함을 단념하는 자들은 그것을 잃고 만다. 바로 조금전까지만 해도 가인은 자신의 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또다른 극단으로 치우쳤다. 사단은 자신의 노예들을 처음에는 뻔뻔스러움으로 다음에는 절망으로 몰아간다. 가인은 사실상 자신이 관대한 취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지옥에 던져지지 않은 것을 오히려 놀라와해야할 지금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소리높여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가인은 자신의 불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자기에게 내려진 선고를 길게 늘어놓는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가지 점을 살펴볼수 있다.
첫째, 그는 이선고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한다.
둘째, 그는 자신이 이생의 모든 위로에서 추방되어 결국은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는 '오늘 이 지면에서 쫓겨난 것'이다.
셋째, 그는 이선고로 말미암아 자신이 모든 인류의 미움과 악의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그가 어디로 돌아다니든지간에 그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것이다. 적어도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의심하는 사람처럼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쫓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당시 그의 가까운 친족들외에 달리 살아있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자기 동생에게 스스로가 그처럼 야만스럽게 행동했던 그로서는 그들조차 무서워한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는 모든 피조계가 자기를 대적하여 무장했다고 본것이다.
2. 이선고에 대한 하나님의 확정(15)
하나님은 심판하실때(모든 이의를) 이기시는 분이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가인은 본문의 선언에 의해 진노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우리는 이선언이 그당시 존재해 있던 작은 세계 전역에 공포되었다고 추측할수 있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왜냐하면 가인이 죽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가 받은 선고(그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선고)가 좌절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경우를 통해서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에서 칼을 빼앗는 자는 뻔뻔스러운 찬탈행위를 하는 자이다.
둘째, 가인에게 표를 주사. 이것은 그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하고 그가 바로 자기 동생을 죽인 사람이라는 것을 공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Ⅶ. 가인의 후손 4:16-18
여기에는 가인이 하나님께 배척을 받은후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되리라는 선고에는 순순히 복종하였다(16절). '가인이 여호와앞을 떠나 나갔다'는 말은 곧 그가 의도적으로 하나님과 신앙을 포기하고 신앙의 교훈을 받지않기 위하여 신앙의 특권들을 기꺼이 버렸다는 말이다. 가인은 이제 여호와앞을 떠나 나갔다. 그가 위로를 받기위하여 다시 여호와앞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은 성경 어느곳에서도 결코 보이지 않는다.
(2) 그러나 그는 자신이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선고에는 대항하여 맞서려고 애썼다.
1) 그는 자기 땅을 선정하였다. 그는 나가서 '에덴 동편에 거하였다.' 이곳은 아담과 그의 경건한 가족이 거주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정착하려고한 그의 시도는 헛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자신의 영혼이 끊임없는 불안속에 있었으므로 그가 거주한 땅이 그에게는 '놋땅'(the land of Nod, 즉 흔들림 혹은 떨림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다른 어느곳에서도 안식을 얻을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난후 그는 결코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내 영혼아 네 안식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안에 있는 네 안식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네가 영원히 쉬지 못하리라."
2) 그는 거주하기위해 성을 건축하였다(17절). 어떤 사람들은 이구절을 '그는 성을 쌓고있었다'고 읽는다. 즉 그는 늘 성을 쌓고있었으나 그와 그의 손의 행사에 저주가 내려졌기때문에 그일을 완성하지는 못하였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음 몇가지 점을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의 선고에 가인은 반항한다. 하나님은 그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가 회개하고 겸손해졌다면 이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되었을 것이다.
둘째, 가인이 하나님을 버린후에 무엇을 선택하였는가를 보라. 그는 이세상에 정착지를 정하여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삼았다.
셋째, 가인이 끊임없이 자기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공포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취하였는가를 보라. 그는 자신의 불행을 생각지 않기위하여, 그리고 망치와 도끼소리로 범죄한 양심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지않게 하기위하여 도성의 건축사업에 손을 대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분주한 세상사에 몰두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무마시키려고 애쓴다.
넷째, 어떻게 악한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선을 제압하며 외적인 번영에 있어서 그들을 앞서는가를 보라. 아담과 그의 복된 가족은 장막에 거하였는데 비하여 가인과 그의 저주받은 종족은 성에 거하였다.
(3) 그의 가족도 또한 늘어났다. 여기에 그의 후손에 대하여 즉 그의 가계의 상속자들이 일곱대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Ⅷ. 라멕에 관한 기사 4:19-22
여기에는 아담의 칠대손으로서 가인의 혈통을 타고난 라멕에 관한 몇가지 기사가 있다. 비록 라멕이 두아내를 취함으로써 죄를 짓기는 하였지만 그들로인해 자녀의 축복을 누렸고 그자녀들은 그들의 경건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발명의 재주때문에 당대에 유명하게 되었다. 그들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을뿐만 아니라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들이었고 발명에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적어도 무엇을 개량하거나 유익한 어떤 기술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의 자녀들에 대해 고찰해 보자.
(1) 야발은 유명한 목축업자였다.
(2) 유발은 유명한 음악가로서 특별히 퉁소를 연주하는 자였고 고상한 예술 혹은 음악에 대한 규칙을 최초로 고안한 사람이었다. 야발이 사람들로하여금 부유해지게 만들었다면 유발은 사람들로하여금 즐거워하게 만들었다. 야발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양신이었으며 유발은 아폴로신이었다.
(3) 두발가인은 유명한 대장장이로서 전쟁과 농업의 유익을 위해 동철을 다루는 기술을 크게 발전시킨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과 대장간의 신(Vulcan)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은혜를 갖지않은 사람들도 탁월하고 유익한 많은 재능들을 부여받을수 있고 그로 말미암아 당대에 유명하고 쓸모있는 존재가 될수 있다. 이와같이 일반적인 재능들은 사악한 자들에게도 주어진다. 반면에 하나님은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하는 것들을 자신만의 것으로 택하신다.

Ⅸ. 라멕의 말 4:23,24
여기에 기록되어 있고 필시 그당시에 이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을 라멕의 이말에 비추어 볼때 그는 대체로 저주받은 가인의 종족이 그러했던 것처럼 악한 사람들이었던것 같다. 그는 자신이 사납고 잔혹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자기를 방해하는 자는 마구 휘둘러치며 모두다 죽이고마는 사람이라고 공언한다. 그가 어떤 기질의 사람인가, 즉 그가 얼마나 성을 잘내는 사람인가를 아는 그의 아내들은 혹 누군가가 그를 죽일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했다.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 누가 나를 공격하든지간에 나는 개의치 않는다. 나를 공격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어른이든지 소년이든지 불문하고 죽이리라."

Ⅹ. 아담이 또다른 아들을 낳음 4:25,26
이 장에서 아담에 대한 언급이 여기에 처음 나온다. 아벨의 살해, 가인의 회개치 않음과 변절이 아담과 하와에게 큰고통을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그들자신의 사악함과 과오가 그들을 책망하고 비난하였기때문에 그사실들이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고통가운데 있는 우리의 첫조상들에게 그고통을 덜어주는 어떤 것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1) 그 슬픈사건으로 그들의 가정이 몹시 흔들리고 약화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가정을 다시 세워주셨다.
1) 그들은 그들의 후손, 곧 "아벨대신에 다른 씨'를 보았다(25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섭리가운데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온정을 보라.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서 한가지 위로를 거두어 가실때에는 그대신에 다른 위안을 그들에게 주신다. 그런데 그위로는 그들이 이전에 누렸던 위안(비록 그위안이 없으면 살수 없다고 생각했을지라도)보다 그들에게 더 큰축복이 되는 수가 종종 있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는 자들은 이러한 수단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지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들은 스스로 속고말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자기의 후손을 보실 것이다. 하나님은 돌을 가지고서도 자기를 위한 자녀들을 일으켜 세우실수 있으며 순교자들의 피를 교회의 씨앗으로 만드실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예언자적인 안목으로 이 아들을 '셋'(Seth, 즉 '고정하다' '정해진' 혹은 '놓여진'이라는 뜻이다)이라고 불렀다. 그이유는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인류가 세상끝날까지 존속할 것이며 그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배교의 우두머리인 가인은 방랑자가 된 반면에 참교회의 조상이 된 셋은 정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참된 정착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안에서만이 있을 뿐이다.
2) 그들은 그들의 후손의 후손을 보았다(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2) 하나님은 그들로하여금 자기 가정안에서 신앙이 되살아나는 것을 보게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절). 만일 선한 사람이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내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또한 자기 후손들이 진리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보지못한다면 그가 자기 자녀의 자녀를 본다는 것이 그다지 큰위로가 되지는 못한다. 이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스스로 분발해서 과거에 행했던 것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으로 살려고 애쓰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 골방과 가정에서뿐만 아니라 격식을 갖춘 공중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구별하기 시작하였다. 난외주에는 그구절이 이렇게 적혀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기 시작하였다.' 혹은 스스로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렀다.

# 핵심
4:1-9
타락으로인하여 인간사회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시기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하와(4:1)
아담의 갈빗대로 지음받은 최초의 여성. 아담이 처음 하와를 보았을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고 기뻐하며 맞았다(창 2:23). 하지만 하와는 사단의 유혹에 빠져 남편인 아담을 불순종에 끌어들였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기고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는 사단의 부추김을 따른 결과였다. 타락한후에 하와는 해산하는 고통이 더해지고 남편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형벌을 받았다.

# 묵상
아벨의 제물의 특징 ( 4:4 )
양의 첫새끼를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고 있으므로 온전한 제사이며, 목숨을 내어놓은 제사이므로(4:10)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믿음으로 드린 제물이므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습니다(히11:4).
가인의 죄의 발전과정 ( 4:5-16 )
가인은 잘못된 제사를 드렸다가 열납되지 않자 하나님께 분을 내었고, 동생 아벨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으며, 하나님께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였고 급기야는 여호와앞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죄는 한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발전하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일단 죄를 지으면 그굴레에 빠져들기전에 하나님앞에 가지고 와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용서함을 받아야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살려주신 이유 ( 4:15 )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뿐이심을 밝히기 위함이며, 죄인에게도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살려주시고 다른 사람이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의 삶이 주는 교훈 ( 4:16-24 )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나 인간만을 위한 세속적 문화를 창출하며 타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처럼 여호와에게서 떠난 자들은 노아 홍수 사건에서 보여지듯이 멸망할수밖에 없습니다.

# 해설
타락된 인류역사의 시작 ( 4 )
창3장에서는 인류의 시조가 타락하는 장면과 범죄의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본장에서는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아들들인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에 대한 이야기가 주축을 이루어 전개되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자녀와 함께 살고있는 가족을 보게 되지만 가인이 범죄한 자의 후손답게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살해하는 가장 무서운 범죄가 연출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1. 가인과 아벨의 제사
1) 가인과 아벨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는 성생활의 결과 두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두아들의 이름은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이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축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는 성경역사상 양대 직업이 되었습니다. 즉 최초의 인류가 낳은 두아들은 농경과 유목이라는 구분되는 직업을 가져 이후 전개될 인간중심의 세속문화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문화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a.아담의 첫째아들 가인(창4:1)
b.가인과 아벨의 직업(창4:2)
2) 제사를 드림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후 그들 가정에 두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범죄하여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기위하여 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가인과 아벨부터였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으므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이었으므로 양의 첫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a.제사에는 순종이 동반되어야(삼상15:22)
b.상한 심령의 제사를 드려야(시51:16-17)
c.아벨의 제물과 다른 가인의 제물(히11:4)
3) 제사의 결과
4절과 5절에 보면 가인과 아벨이 각각 드린 제사에 대한 상반된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았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가인의 제사가 믿음이 없이 드린 제사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나은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a.초태생은 가장 귀중한 것을 의미(출13:2)
b.인애가 동반된 제사를 열납하심(호6:6)
c.흠있는 제물을 열납지 않으심(말1:9-11)
2. 가인의 범죄와 형벌
1) 분노하는 가인
자신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것을 안 가인은 하나님의 처사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인에 대하여 하나님은 '네가 분하여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책망은 회개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분노하고 반항하는 가인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a.분노는 어리석음의 소치(잠12:16)
b.투기와 분노(창30:1-2)
2) 아벨을 죽이는 가인
하나님의 거듭된 책망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하나님께 열납된 제사를 드린 동생 아벨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을 죽이려는 생각까지 품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살해하기 위하여 그를 광야로 유혹해내어 거기서 살해하였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형제간의 살인은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 얼마만큼 파괴적인 역할을 할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a.의인들의 죽음(마23:35)
b.광야는 크고 두려운 장소(신1:19)
c.살인자 가인(요일3:12)
3) 가인의 형벌
가인은 아벨을 광야에서 살해했으므로 아무도 본 자가 없을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가인의 살인행위를 보셨으며 하나님의 귀는 아벨의 의로운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신 것입니다. 아벨을 살해한 가인에게 하나님은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첫째형벌은 땅에서 저주를 받아 땅이 그에게 아무런 은혜를 주지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형벌은 하나님과 사람을 피하여 숨어다녀야 하고 항상 정처없이 방황하며 유리하는 삶을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가인의 범죄는 그의 삶을 황폐한 삶으로 변하게한 것입니다.
a.형제 살인(요일3:11-12)
b.패역한 자들의 행위(유1:11)
3. 하나님의 위로
1) 아벨대신 새아들을 주심
아벨의 죽음과 가인의 추방으로 슬픔속에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아들 셋을 주심으로써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두아들을 거의 동시에 잃은 부모의 심정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은 치셨을지라도 싸매시는 분이며(참조, 욥5:18;호6:1), 택하신 자들의 한을 풀어주시는 분임을 알수 있습니다(참조, 눅18:7).
a.아담의 세번째 아들(창4:25)
b.그리스도의 조상(눅3:38)
2) 소망을 주심
가인의 제사실패와 아벨의 살해로인한 하나님의 저주는 아담의 가정에 신앙의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러한 아담의 가정에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셋을 주신 것은 아담 가정에 새로운 소망을 갖게 했으며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도록 했습니다. 아담부부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그언약에 대한 소망을 잃지않았고 더나아가 셋을 통해 새로운 신앙의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a.하나님이 주신 씨(창4:25)
b.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족속(창12:8)
c.위로자 하나님(고후1:3-4)
결론
우리는 창4장을 통해 하나님께 열납된 아벨의 제사와 관련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가인의 살인을 통해서 인간세상에 침투한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알게됩니다. 또한 인간을 끔찍히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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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I. 뱀의 유혹 3:1-5
(1) 시험하는 자는 뱀의 모양을 한 사단이었다.
1) 하와를 유혹한 자는 사단이었음이 분명하다. 마귀, 곧 사단은 옛뱀(계12:9)으로서 처음에는 빛의 천사로 창조되어 하나님의 보좌를 직접 시중들던 자였으나 죄로 말미암아 첫번째 상태에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왕권과 위엄에 반항하게 된 자이다. 사단은 자신이 인간을 멸망시킬수는 없지만 타락시킬수는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사단의 계략은 우리의 첫조상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하고 그렇게함으로써 그들과 그들의 하나님사이를 이간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단은 이계교로써 온인류의 목덜미를 움켜잡아 단번에 내리친 셈이 된 것이다.
2) 사단은 뱀의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위험스런 많은 유혹들은 매혹적인 색채로 덧입혀져서 우리에게 다가오며 마치 위로부터 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사단도 광명의 천사처럼 보일수 있는 것이다.
둘째, 뱀은 간교한 피조물이다. 뱀의 간교함을 보여주는 실례는 많이 있다. 사단에게 있어서 거룩하지 못한 간교함보다 더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에 유효하게 이용할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2) 시험받은 사람은 여자였다. 그녀는 지금 남편에게서 멀리 떨어져 홀로 금지된 나무가까이에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음 네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다.
1) 보다 연약한 그릇을 유혹하는 것이 사단의 간계였다.
2) 그녀가 홀로 있을때 그녀에게 말을 거는 것이 그의 계략이었다. 혼자있음으로 해서 큰유혹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힘과 안전을 얻을수 있는 것이다.
3) 그는 그녀가 금단의 나무곁에 있는 것을 보고는 그기회를 이용하였다. 아마도 그녀는 단지 자기 호기심에 이끌려 그 나무열매를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금지된 열매를 먹지않을 사람들은 결코 그 나무곁에 가까이 가지도 않을 것이다.
4) 사단은 하와를 유혹하였는데 이는 하와를 통해서 아담을 유혹하고자 함이었다.
(3) 시험자체와 그것의 인위적인 조작 : 마귀가 노린 것은 하와를 설득하여 금지된 열매를 따먹게 하는 것이었다. 이일을 이루기위해서 그는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그방법을 썼다. 그는 그열매를 따먹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물었다(1절). 그는 그열매를 따먹는데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하였다(4절). 그는 그열매를 따먹음으로써 많은 이득을 볼수 있다고 말했다(5절). 이런 것들이 사단이 흔히쓰는 화술이다.
1) 사단은 이열매를 따먹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를 그리고 이나무의 열매가 참으로 금지되었는지를 물었다.
① 뱀이 여자에게 물어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먹지말라 하시더냐(1절). 이 첫마디 말을 보면 이앞에 어떤 말이 있었던 것을 암시하는데 아마도 하와가 스스로에게 한말이 있었던것 같다. 그런데 사단이 그말을 포착하고서 거기에다 이질문을 던진 것이다. 여기서 다음 세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사단은 처음에 자신의 의도를 밝히지 않고 아무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을 던진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게 참말이냐? 하나님이 이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느냐?"
둘째, 그는 마치 하나님께서 이나무뿐만 아니라 동산 모든나무의 실과도 금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그릇되게 인용한다.
셋째, 그는 이말을 할때 그녀가 이나무 만지기를 꺼려하는 것에 대해 그녀를 조롱하며 나무라는듯이 이말을 하는것 같다.
넷째, 하나님의 법이 불확실하고 불합리한 것처럼 말하며 하나님의 백성들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간교함이다.
② 하와는 이질문에 대답하는 가운데 그에게 그들이 지켜야하는 법을 분명하고 완전하게 설명한다(2,3절). 여기서 다음 네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뱀과 대화를 시작한 것은 그녀의 연약함 때문이었다. 처음부터 경멸과 혐오감을 가지고 단호히 거절해야할 유혹과 상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적과의 타협을 타진해보는 수비대는 머지않아 항복하고마는 법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유를 기억한 것은 그녀의 지혜였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의 덕택으로 나무의 열매를 먹을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들은 풍성하고 다양하다."
셋째, 그녀가 그명령을 굳게 붙잡고 그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으로 충실하게 반복한 것은 그녀의 결의를 보여주는 태도였다. "이나무의 열매를 결코 먹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나무를 만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엄하게 금지되었다. 이금지의 권위는 우리에게 신성한 것이다."
넷째, 그녀는 그경고에 대해서는 약간 흔들렸던것 같다. 그러므로 그녀는 단지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는 말씀만을 뱀에게 전했던 것이다.
2) 사단은 그열매를 먹는데에 어떤 위험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비록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될지라도 형벌은 전혀 받지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절). 이말은 다음 두가지 뜻으로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너희가 죽으리라는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단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다음에는 부인하도록 가르친다. 사단은 사람들을 처음에는 회의론자로 만들고 이어서 차차 무신론자로 만든다.
둘째,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너는 분명히 죽지않을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경고를 확정할때 사용했던 단호한 말투를 그대로 본따 그것에 대한 자기의 부인을 확언한다. 그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처지로 끌어들이기위해 자신의 불행을 감추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죄인들을 속여 파멸로 이끈다. 사람들은 누구나 벌을 받지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언제나 죄를 범한다.
3) 그는 사람들에게 그열매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한다(5절). 만일 그가 그들에게 자신들을 더낫게 만들 커다란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들을 파멸시킬 위험을 무릅쓰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① 그는 그들이 이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얻을수 있는 대단한 향상을 그들에게 넌지시 비춘다. 그리고 그는 그시험을 그들이 그당시 처해있었던 순수한 상태에 적합하도록 꾸며서 그들에게 지적인 만족과 기쁨을 제안한다. 이것들은 바로 그가 자신의 갈고리를 숨기기위해 감쌌던 미끼였다.
㉠ 너희 눈이 밝아. "너희는 지금보다도 훨씬더 많은 사고의 능력과 즐거움을 얻게될 것이다. 또한 너희는 지금보다도 사물을 더깊이 꿰뚫어보게될 것이다."
㉡ 하나님과 같이, "엘로힘, 즉 전능하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전진할뿐만 아니라 전능하기도 할 것이다."
㉢ "선악을 알줄을. 즉 "알만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알게될 것이다." 그는 유혹의 이러한 면을 뒷받침하기위해 이나무에 붙여진 이름까지도 악용한다. 즉 그는 마치 이나무가 선과 악의 속성들, 종류 그리고 그기원에 대해 이론적으로 관념적인 지식을 그들에게 줄수 있는 것처럼 그이름을 곡해하여 말한다.
㉣ 그는 이모든 일이 즉시 발생할 것처럼 말한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갑작스럽게 그리고 즉시로 보다 나은상태에 이르게될 것이다." 그는 이런 모든 암시들을 통해서 첫째로 그들이 자기들의 현재상태를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도록 유도하며, 둘째로 마치 그들이 신이 되어야 마땅한 것처럼 그들로하여금 터무니없이 높은 위치를 꿈꾸도록 꾀었다.
②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열매를 먹지말도록 금하신데에는 좋지않은 의도가 있다고 그들을 선동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이 그들의 힘을 알고 자신을 대항하게 될까봐 그들에게 그나무의 열매를 먹지못하게 하신 것처럼 말한다. 이점에 대해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다.
㉠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께 대한 커다란 모욕이었다. 그것은 실로 그에게 끼쳐질수 있는 최대의 모욕이었다. 이말은 마치 그가 자기의 피조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서 그의 능력을 모욕하는 말이었다. 더군다나 이말은 마치 그가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미워하며 친히 지으신 자들을 행복하지 않게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으로서 그의 선하심을 모욕하는 말이었다.
㉡ 이말은 그들과 하나님사이를 틀어지게 만드는 것이었기때문에 우리의 첫조상들에게 극히 위험스러운 올가미였다.

Ⅱ. 유혹에 넘어가 죄를 범함 3:6-8
사단은 계략으로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마침내 자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1. 그들로 범죄하도록 유인한 요소들(6)
(1) 그녀는 이나무에서 다른나무들보다 해로운 점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나무의 열매도 다른나무의 열매처럼 먹기좋게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나무의 열매는 다른나무들과는 달리 먹지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종종 우리의 감각을 만족시키려는 과도한 욕망으로인해 함정에 빠져들곤 한다. 이나무의 열매는 금지되었기때문에 더욱 탐스럽게 보였다. 우리속에는(즉 우리의 육신속에는, 또한 타락한 우리의 본성속에는) 모순된 묘한 심리가 있다. 사람들은 금한 것일수록 더욱 하고 싶어한다.
(2) 그녀는 이나무에는 다른나무들보다 더많은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즉 이나무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지혜를 잘못 생각해서 쓸데없는 지식을 알고자하는 갈망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해롭고 파괴적인가를 보게된다.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있던 우리의 첫조상들이었지만 그들은 한가지 사실만은 알지 못하였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알아야할 것은 충분히 알고있었다는 사실만은 모르고 있었다.
2. 타락으로 치닫는 범죄의 단계들(6)
(1) 그녀는 보았다. 그녀는 허망한 것을 바라보는데에서 눈을 돌려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지된 열매를 즐거이 바라봄으로써 유혹에 빠져들어 갔다. 많은 죄가 눈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유의하라.
(2) 그녀는 땄다. 이것은 그녀 자신의 소행이었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마귀가 그열매를 따서 그녀의 입에 넣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직접 그열매를 땄다. 사단은 유혹을 할수는 있으나 강요하지는 못한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망치도록 우리를 꾈수는 있으나 직접 우리를 망치게 하지는 못한다(마 4:6).
(3) 그녀는 먹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열매를 보았을때에는 따려고 생각지 않았고 땄을때에는 먹으려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일이 이렇게 된것이다. 죄의 길은 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을 주의하라. 사람은 일단 하려고 마음먹을때는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법이다. 죄를 짓고자하는 마음은 첫번부터 눌러버려야 한다. 그러한 감정은 애초에 없애버려야 한다. "해악은 싹틀때에 잘라내야 한다."
(4) 그녀는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 주었다.' 그녀는 뱀이 자기에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논법으로써 그를 설득하며 그에게 열매를 주었다. 또한 여기에다 덧붙여 말하기를 그녀 자신이 직접 그열매를 따먹었는데, 죽기는커녕 아주 즐겁고 기쁜 일이었다고 하였다. 사람은 죄를 짓고나면 이내 유혹하는 자가 되게 마련이다.
(5) 아담도 먹었다. 자기 아내가 귀찮게 졸라대자 넘어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먹을수 있도록 허락하신 생명나무는 소홀히 하고 먹지못하도록 금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데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은총을 멸시하고 그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금지하신 것에 더욱 관심을 표명하였음을 명백히 드러내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주인이 되려고 하였다.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을 가지려고 하였고 기뻐하는바를 행하려고 하였다(롬 5:19). 인간의 본성은 우리의 첫조상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후로 그것은 죄책으로인한 권리박탈과 불명예의 오점 그리고 죄와 부패의 유전적인 질병을 안은채 그들로부터 후손에게 전하여질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볼때 아담의 죄가 별로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할수 있겠는가?
3. 범죄의 즉각적인 결과들(7,8)
(1) 처음에 부끄러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다(7절).
1) 그들의 마음속에 발생한 강한 양심의 가책 : 그들의 눈이 밝아. 이말은 육신의 눈이 떠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양심의 눈이 열리고 그들을 괴롭혔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금지된 열매를 먹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을 알았을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들은 뒤늦게서야 잃어버린 행복을 알았고 이제는 비참의 도가니속에 빠져버리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체속에 다른 한법이 있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음을 알게되었다. 성경본문은 우리에게 그들이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았다고 말한다. 이말은 다음 두가지로 생각해 볼수 있다.
① 그들은 벗었다. 즉 그들이 낙원의 상태에서 누리던 모든 명예와 기쁨을 빼앗겼다. 그들은 무장 해제를 당했다. 즉 그들을 보호해주던 모든 것이 그들에게서 사라졌다.
② 그들은 부끄러웠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늘과 땅과 자기들의 양심으로부터 멸시와 비난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우리는 첫째로 죄가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이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가를 알수 있다. 죄는 용납되는 어디에서나 해악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둘째로 우리는 사단이 얼마나 간교한 사기꾼인가를 알수 있다. 그는 우리의 첫조상들을 유혹할때 그들에게 그들이 눈이 밝아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대로 그들의 눈이 밝아지기는 하였으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 같이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부끄러움과 슬픔에 대해 눈이 밝아진 것이다.
2) 그들이 이러한 가책들을 누그러뜨리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위해 취한 딱한 임시 방편 : 그들은 최소한 서로 자기들의 부끄러운 부분을 가리기위해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혹은 꿰매어 '치마를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로 죄를 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볼수 있다. 그들은 다음의 두가지 점에서 어리석음을 드러냈다.
①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용서를 얻기보다는 사람들앞에서 자신의 체면을 차리기에 더급급했다.
②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가리우고 가볍게 하기위해서 끌어들이는 구실들은 헛되고 하잘것 없는 것들이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처럼 그들은 문제를 결코 더낫게 해결하지 못하고 더악화시키기만 하였다. 이와같이 숨겨진 부끄러움은 더욱더 수치스럽게 드러낸다.
(2) 금지된 열매를 따먹자 즉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았다(8절). 여기서 다음 두가지 점을 살펴보자.
1) 그들이 두려워한 까닭은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날이 서늘할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들이 두려워하게 된것은 재판장이 가까이 오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죄지은 양심에게만 두려움을 주는 방식으로 오신다. 그는 모든 두려움이 갑절이나 더강하게 느껴지는 밤에 오시지 않고, 날이 뜨거울때도 오시지 않고, 날이 서늘할때 오셨다. 이는 그가 타오르는 진노가운데서 오시지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의 음성을 들었다. 필시 그음성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와 물으셨던때와 같이 작고 조용한 목소리였을 것이다.
2) 그들이 두려워한 결과와 증거는 무엇이었는가? 아담과 그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은지라. 참으로 슬픈 변화가 아닐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므로 자기들끼리도 서로에게 공포가 되고 말았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의 양심이 그들을 비난하고 그들의 죄를 그들앞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그들이 만든 무화과나무잎 치마는 그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자신들의 죄를 알고나자 그들은 감히 심판대앞에 설수 없었으므로 공의로부터 도망을 쳤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세가지 점을 볼수 있다.
① 유혹자의 허위성 : 그는 그들이 틀림없이 안전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결코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할수 없었다. 그는 그들이 아는 것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어찌할줄 모르며 어디에 몸을 숨겨야 할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이 신처럼 위대하고 담대하며 용감해지리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범죄자로 드러났다.
② 죄인들의 어리석음 :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에게서 숨을수 있거나 숨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③ 죄에 따르는 두려움 : 하나님의 출현에 대한 두려움, 양심의 비난, 다가오는 걱정거리, 보다 열등한 피조물들의 공격 그리고 죽음의 엄습 등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일로서 모두가 다 죄의 결과이다.

Ⅲ. 죄인을 심문하심 3:9,10
여기서는 이 탈선자들이 의로우신 재판장앞에서 심문을 받는 것을 보게된다.
1.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 그에게 던진 깜짝 놀랄만한 질문(9)
네가 어디있느냐. 이말씀은 네가 어느곳에 있느냐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상태에 있느냐는 말이다. "네가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얻은 것이 고작 이것이냐?" 여기서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주의하자.
첫째, 아담을 찾는 이질문은 그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를 회복시키기위한 은혜로운 추적으로 간주될수 있다.
둘째, 만일 죄인들이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기만 한다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안식을 얻지못할 것이다.
2. 아담의 떨리는 답변(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였나이다.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수치와 두려움을 인정함으로써 자기 죄를 고백한 셈이 되었다.

Ⅳ. 그들의 유죄가 입증됨 3:11-13
이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의 잘못을 변명하고 가볍게 하려고 애쓴다.
(1) 그들은 얼마나 마지못한 태도로 고백을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먼저 남자에게 고백을 요구하셨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11절). "네가 어떻게해서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느냐?"는 말씀이다. 먹지말라 명한 그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우리가 여기서 유의할점은,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모든 죄를 다알고 계실지라도 그것을 우리에게서 알고자 원하시며 우리가 그죄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하시는 것은 그가 어떤사실을 아시기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하신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13절). 자기들이 한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는 것은 스스로 금지된 열매를 먹은 사람들도 함께 그것을 먹도록 부추긴 사람들에게 그들이 저지른바를 신중히 숙고해 보게 하기위하여 주어지는 질문이다.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써 우리는 위대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 그열매를 먹도록 다른 사람들을 부추기는 가운데 우리는 마귀의 일을 행하여 다른 사람들로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그들을 파멸시키는 일에 공범노릇을 하게된다.
(2) 그들이 고백하는 가운데 자기들의 죄를 얼마나 가볍게 말하였는가?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죄를 심각하게 느끼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대신 죄를 변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사실을 살펴보자.
1) 아담은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자기 아내에게 돌렸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우리는 여기서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하지못할 것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는 일은 결코 하지말아야 할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절친한 친구를 기쁘게 하기위하여 자신의 양심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거나 하나님을 노여우시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아담의 행위중 가장 악한 점은 아니었다. 그는 책임을 자기 아내에게 뒤집어 씌울뿐만 아니라 은근히 하나님 자신을 비난하기위해 그말을 한다. 그는 하나님도 자기 죄의 공범자였다고 넌지시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여자를 주셨고 그여자가 자기에게 그열매를 주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시험받은 자들은 하나님께 시험받았다고 생각하는 묘한 경향이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은사를 잘사용하지 못하였기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는 용서받을수 있는 것같이 생각한다.
2) 하와는 모든 책임을 전적으로 뱀에게 돌렸다. 뱀이 나를 꾀었으므로, 죄란 아무도 인정하려고 들지않는 더러운 것이며 수치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 점을 배워야 한다.
① 사단의 시험은 모두가 속이는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바는 모두가 거짓이며 그가 유혹의 미끼로 사용하는 것은 모두가 사기이다. 죄는 우리를 혹하게 하며 또한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를 속인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죄가 사람을 속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11; 히브리서 3:13절을 보라.
② 사단이 간교하다고해서 우리의 죄가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비록 그가 시험하는 자일지라도 죄인들은 우리이다. 사실 우리를 미끄러지게 하고 유혹하는 것은 우리자신의 정욕이다(약 1:14).

Ⅴ. 마귀에 대한 선고와 은혜언약의 수립 3:14,15
하나님은 즉시로 뱀에게 형을 선고하셨는데 그이유는 그가 이미 하나님을 반역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1) 뱀이 시험하는 자에게 내려진 판결을 받은 것은 뜻밖의 일이라고 생각할수 있다. 그러나 마귀의 도구노릇을 한자들은 마땅히 마귀가 받는 형벌을 나누어받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 점을 볼수 있다.
1) 뱀은 여기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 네가 모든 육축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14절). 성화되지 못한 교활함은 종종 사람에게 커다란 저주가 된다. 교활한 사람들이 악을 행할수록 더욱더 큰해악을 끼치게 된다.
2) 뱀은 여기서 사람들로부터 치욕과 적대감을 받게된다.
① 그는 앞으로 영원히 혐오스럽고 비열한 동물로 취급받게 되었다. 그가 저지른 죄는 하와를 유혹하여 그녀가 먹지말아야 할것을 먹게한 죄였다. 그가 받은 형벌은 그가 결코 먹고싶지 않은 것을 어쩔수 없이 먹어야하는 것이었다. 네가 흙을 먹을지니라.
② 그는 독을 지닌 유해한 동물로서 마땅히 미워하고 싫어할 대상으로 영원히 간주되게 되었다. 뱀은 사람에게 해로운 동물로서 종종 사람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데 그이유는 더높은 곳은 물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말굽을 물어뜯었다는 말씀을 기억하자(49:17). 그러나 사람은 뱀을 이기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데, 이말은 즉 모든 독사들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는 것을 뜻한다. 뱀에게 선고된 이판결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발로 누르리로다'(시 91:13)고 말씀하신 약속과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너희가 뱀을 집으리라'(막 16:18)고 말씀하신 약속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바로 조금전까지만 해도 뱀과 여자는 아주 친밀했었고 금지된 열매에 관해서도 다정스럽게 얘기했으며 그들사이에는 놀라운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사이가 틀어졌다. 죄악된 우정은 이내 극단적인 불화로 끝나게 마련이다. 악으로 연합한 사람들은 그관계를 오래지속하지 못할 것이다.
(2) 이선고는 마귀에게 내려진 것으로 간주될수 있다. 그가 뱀을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그자신이 장본인이었다.
1) 여기서 영속적인 비난이 하나님과 사람을 대적하는 큰원수에게 씌워졌다. 뱀의 탈을 쓰고 숨어 있는
① 여기서 그는 하나님에게서 저주를 받고 타락하리라는 선고를 받았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는가'(사 14;12). 하나님위에 올라서려 하고 그를 대항하여 반역의 머리를 들려고했던 자가 여기서 공정하게 모욕을 받는다. 하나님은 스스로 겸손하려고 하지않는 자들을 겸손하게 만드실 것이다.
② 그는 모든 인류에게 미움과 혐오를 받을 것이라고 선고받는다. 그는 여기서 전쟁상태와 화해할수 없는 적대의 상태에 떨어지도록 운명지워졌다.
③ 마침내 그는 위대한 구속자에 의해 파멸하고 말것이라고 선고받는다.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라는 말이 이사실을 의미한다. 그의 간교한 계략은 좌절될 것이고 그의 빼앗긴 권세는 완전히 분쇄될 것이다.
2) 여기서 사람들가운데 발생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마귀의 나라사이의 영속적인 투쟁이 시작되었다. 다음의 두가지 사실은 이러한 반목의 결과이다.
① 하나님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은혜와 타락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 있다.
② 또한 이세상에는 악한 자와 경건한 자 사이의 계속적인 투쟁이 있다.
3) 여기서 사단의 권세로부터 타락한 인류를 구출해내는 자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로운 약속이 세워졌다. 이약속은 우리의 첫조상이 듣는가운데 선언되었으므로 틀림없이 그들은 자기들앞에 열린소망의 문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시대의 동이 트기 시작했다. 상처가 생기자마자 곧 치료제가 마련되고 계시되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세가지 사실이 계시되었다.
① 그가 여인의 후손, 곧 그여인의 후손이 되리라는 것은 그의 성육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의 족보(눅 3장)는 그가 아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여자에게 그리스도를 그녀의 씨라고 부를수 있는 영광을 주셨다. 이렇게하신 이유는 마귀가 꾀었고 아담이 그책임을 전가한바로 그여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의 위엄을 더욱 높이시고자 하신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은 비록 그여자가 먼저 범죄하였을지라도 해산함으로써(어떤사람들은 이런 의미로 읽는다) 즉 그녀의 자손으로 태어날 약속된 씨를 낳음으로써 구원받게 되리라는 이사실로써 자신의 은혜를 더욱 돋보이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여자만의 곧 처녀의 씨가 되어야만 했다.
② 그의 고통과 죽음은 사단이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 즉 그의 인성을 상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사단은 광야에서 그리스도를 죄에 빠지게하려고 시험하였다. 어떤사람들은 고통가운데 있는 그리스도를 놀라게하여 절망에 빠지게 하려한 것도 사단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룟유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배반할 생각을 집어넣고, 베드로에게 그를 부인할 생각을, 대제사장들에게는 그를 박해할 생각을, 거짓증인들에게는 그를 고소할 생각을 그리고 빌라도에게는 그를 정죄할 생각을 넣어준 자도 바로 이 마귀였다. 그는 이모든 일들가운데에서 구주를 없앰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파멸시키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이하셨다(히 2:14). 그리스도의 발꿈치는 그의 발이 십자가에 못박혀 찢겨졌을때 상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도들이 그의 이름을 위하여 받는 고난속에서 계속된다. 마귀는 성도들을 시험하고 옥에 가두고 박해하며 죽인다. 그는 이렇게해서 성도들의 고통속에서 고통을 겪으시는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그러나 지상에서 발꿈치가 상할지라도 그머리는 하늘에서 안전하니 감사한 일이다.
③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으로써 승리하셨다. 사단이 여기서는 여자를 짓밟고 모욕을 주었지만 장차 때가차면 여자의 후손이 그를 이기기위해서 일어나실 것이다(골 2:15).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은 즉 그가 사단의 모든 계략과 권세를 파괴하고 그의 나라와 세력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릴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단의 시험들을 물리치셨다. 그는 죽으심으로써 마귀의 왕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셨다. 즉 이짐승의 머리에 도저히 치료할수 없는 상처를 입히신 것이다.

Ⅵ. 여자에게 내려진 선고 3:16
우리는 여기서 하와의 죄로인하여 여자에게 내려진 선고를 보게된다.
(1) 여기서 그녀는 고통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는 한가지 고통만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데 그것은 곧 아이를 낳는 일이었다. 그일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따른다. 우리는 죄가 세상에 슬픔을 가져왔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죄를 알지못했더라면 슬픔도 더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크게 더하리니. 따라서 우리에게 죄가 없을때 슬픔이 더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죽음이나 슬픔이나 모두가 헤아릴수 없는 악들이다. 이제는 아이를 낳는 고통이 크게 더해졌다. 게다가 낳은 아이들이 악하고 어리석다면 그들은 더욱더 그들을 낳은 어미에게 슬픔을 가져다줄 것이다.
(2)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라.'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의무가 형벌이 되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하와가 스스로 금지된 열매를 먹지않고 그것을 먹도록 자기 남편을 유혹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결코 자신의 복종을 불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의무가 힘들지라도 결코 그것을 한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의무를 그렇게 만든 죄에 대해서는 한탄해야 한다. 자기 남편을 무시하고 복종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주장하는 아내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법을 어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고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못하는 것이다.
(3) 이 선고가운데는 진노와 더불어 하나님의 큰자비가 뒤섞여 있다. 여자는 고통을 맛보게될 것이며 그고통은 아이를 낳는가운데 있게될 것이다. 그러나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난 기쁨을 인하여 그고통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니라'(요 16:21). 그러므로 선고는 그녀를 파멸에 이르게하는 저주가 아니라 회개에 이르게하는 징벌이었다.

Ⅶ. 아담에게 내려진 선고 3:17-19
먼저 그의 죄가 언급된 다음에 이선고가 진술되었다.
(1) 아담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다음 세가지로 나타난다.
1) 이 선고로인해 그의 거처가 저주를 받았다. 땅은 너로인하여 저주를 받고(17절). 이저주의 결과로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것이라'. 즉 땅에서 나는 모든 좋은열매는 사람이 땅에다 자기의 노력과 지혜를 들여야만이 비로소 얻을수 있게 되었다. 이 선고가운데 들어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살펴보자.
① 아담 자신은 뱀이 받은 것처럼 저주를 받지는 않았다(14절). 하나님은 그를 위해 많은 복을 쌓아두셨다.
② 그래서 그는 여전히 땅위에서 살수 있었다. 비록 땅이 본래의 아름다움과 비옥함을 많이 상실하였을지라도 입을 벌려 그를 삼키지는 않았다.
2) 그의 노동의 즐거움이 그에게 아주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① 이후부터는 일이 그에게 수고로운 것이되어 그는 계속해서 '얼굴에 땀을 흘리며' 일하게될 것이다(19절). 죄를 짓기전에는 일이 그에게 끊임없는 즐거움이었다. 그때에는 힘들여 일하지않고서도 동산을 가꿀수 있었다. 아담이 죄를 짓지만 않았다면 땀을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동은 우리가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하는 우리의 의무이다.
② 이후부터는 식물이 그에게 달가운 것이 되지못할 것이다(본래의 상태와 비교해볼때 그렇다). 그는 '수고하고'(17절), '얼굴에 땀을 흘려야'(19절) 식물을 먹을수 있게되었다. 모든 사람이, 설사 이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의 기쁨가운데에는 슬픔이 있게 마련이다. 질병과 재난, 죽음 등이 여러가지 형태로 죄와 더불어 세상에 들어왔고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휩쓸고 있다. 그러나 역시 이선고에도 긍휼이 내포되어 있는 그는 땀을 흘리기는 하지만 그의 수고는 그에게 안식을 줄것이다. 그는 슬퍼하기는 할것이지만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수고하기는 할것이지만 수고하는 가운데 마음에 힘을 돋궈줄 빵을 먹을 것이다.
3) 그의 일생이 아주 짧아졌다. 그의 일생이 얼마나 많은 근심으로 가득차 있는가를 생각해 볼때 그의 날수가 짧다는 것이 그에게는 은총이 아닐수 없다. 그럴지라도 그선고를 끝맺는 죽음이(물론 일생이 그렇게 유쾌한 것이 아닐지라도) 사람의 본성에 두려울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너희는 흙에서 취함을 입었으므로 흙으로 돌아가리라. 전체가운데서 흙에서 나온부분인 네 육신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리라. 왜냐하면 너는 흙이기 때문이다. 네 몸은 네 영혼곁을 떠나 한줌의 흙이 되어 그것에 적절한 장소인 무덤에 머물러있다가 땅의 티끌과 함께 뒤섞일 것이다.' 즉 '본 흙'(시 104:29)으로 돌아갈 것이다. 흙은 흙으로 티끌은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다음 세가지를 살펴보자.
① 사람이란 체질이 약한 보잘것 없는 피조물이다. 먼지, 곧 천칭접시에 묻어있는 작은 티끌처럼 하찮은 존재이다. 모두 합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가벼운 존재이다. 먼지처럼 무력하며 견고함이란 전혀없는 존재이다.
② 사람이란 죽을수밖에 없고 또한 죽어가고 있는 존재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커다란 먼지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때문에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③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롬 5:12).
(2) 우리의 첫조상에게 내려진 선고에 관하여 다음 두가지 사실을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1) 아담과 그의 죄악된 자손인 인류의 영혼에 떨어진 죄의 비참한 결과가 이 선고가운데에서 아주 적절하게 표현되었다. 비록 여기에는 신체에 영향을 주는 불행만이 언급되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영적인 불행들을, 즉 영혼에까지 미치는 저주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보기였다.
① 해산의 진통에 의한 여인의 고통은 죄책감을 느끼는 양심, 즉 죄를 깨달은 양심의 공포와 고통을 나타낸다.
②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하도록 격하된 것은 죄로 말미암아 비롯된 영적인 자유와 의지의 자유의 손실을 뜻하는 것이다.
③ 땅이 열매를 잘 맺지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는 저주는, 타락하고 죄지은 영혼이 선한 일을 잘 내지않고 악한 것은 풍성히 내리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잘 나타난다.
④ 수고와 땀은 사람이 육신의 연약함으로인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애써야하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2) 우리 주 예수께서 죽으심과 고난으로써 이루신 속죄는 여기 우리 첫조상에게 내려진 선고를 충분히 보상하였다.
① 해산의 고통이 죄와 더불어 왔는가?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영혼의 수고'를 읽는다(사 53:11).
② 복종이 죄와 더불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서 나셨다(갈 4:4).
③ 저주가 죄와 더불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셨으며 그죽음 역시 저주받은 죽음이었다(갈 3:13).
④ 가시덤불이 죄와 더불어 생겨났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가시면류관을 쓰셨다.
⑤ 죄때문에 우리가 땀을 흘리게 되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커다란 핏방울같은 땀을 흘리셨다.
⑥ 슬픔이 죄와 더불어 들어왔는가? 그리스도는 슬픔의 사람이었다. 그의 영혼은 고통가운데서 극도의 슬픔을 겪었다.
⑦ 죽음이 죄와 더불어 왔는가?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이와같이 치료연고가 상처만큼이나 넓게 발라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자!

Ⅷ. 아담이 자기 아내의 이름을 지음 3:20
하나님께서는 남자에게 이름을 지어주어 그를 "붉은 흙"이라는 뜻을 지닌 아담이라고 부르셨다. 이제 아담은 여자에게 하와, 곧 "생명"이란 의미를 지닌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담은 죽어가는 몸을 표시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하와는 살아있는 영혼을 표시하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 그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렇다. 그녀는 모든 산 자의 어미였기(즉 어미가 될것이었기)때문이었다. 아담이 전에는 그녀를 아내로서 이샤(ishah), 곧 여자라고 불렀는데 여기서는 그녀를 어미로서 하와, 곧 생명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 사실을 생각해 보자.
첫째, 만일 이름짓는 이일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한가지 실례이며, 그가 처음에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주셨던 축복을 취소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증해주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방금하신 언약, 곧 여자의 후손 바로 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언약을 확증하는 일이었다.
둘째, 만일 아담이 직접 이일을 하였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의 믿음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죄인들에게 그들이 모든 산 자의 부모가 되도록 자비를 베풀어주시리라는 집행유예의 축복에 대한 믿음이었다. 또한 그의 믿음은 여기에서 아담이 자기 아내를 하와, 곧 생명이라고 부르는가운데 염두에 두었던 약속된 씨의 축복에 대한 믿음이었다.

Ⅸ. 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배려 3:21
우리는 여기서 우리 첫조상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관한 하나님의 사후의 배려를 보게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순종하는 자식들을 바로잡으시는 중에도 여전히 그들과 부자간의 관계를 유지하신다. 뿐만아니라 마치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그들의 의복을 위하여 가죽옷을 마련하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식물을 주실뿐만 아니라 의복도 주신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28:20). 곡식과 포도주와 마찬가지로 양털과 삼도 하나님의 것이다(호 2:9).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을 위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지만 그들의 몸을 감싸기에 그것은 너무 좁았다(사 28:20). 우리 자신이 만든 의의 누더기는 다 그와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넓고 튼튼하고 질기며 잘어울리는 가죽옷을 만들어 주셨다. 그리스도의 의는 이와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Ⅹ. 에덴에서의 추방 3:22-24
우리는 여기서 범죄자들에게 내려진 선고가 부분적으로 그들에게 즉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된다.
(1) 그들은 그들이 한일에 대하여 신랄한 질책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거룩한 천사들앞에서 공정하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였다. "보라 이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중 하나같이 되었다. 그가 거의 신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이말씀은 그들을 깨우치고 겸손하게 만들며 자기들의 죄와 어리석음을 알고 회개하도록 하기위해 하신 것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도록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신다'(시 83:16). 하나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이같은 혼란속에 그들을 놓아두셨다.
(2) 그들은 마땅히 버림을 받아 낙원에서 쫓겨났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낙원에서 쫓아내신 이유 : 그것은 그들이 손을 뻗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다시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우쭐해져서 하나님의 선언을 무시하여 자기들이 영원히 살리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자만에 빠지지않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다.
2)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 즐거움의 동산에서 추방시키신 방법 : 하나님은 그들을 쫓아내시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①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일반 세상땅으로 내쫓으셨다. 이사실은 그들과 그들로인해 죄책을 진 모든 인류를 낙원의 축복과 영광이었던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쫓아내셨다는 사실을 의미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줄어들고 상실되었으며 따라서 그들과 그들의 창조주사이에 있어왔던 왕래도 중단되고 깨졌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신뒤에 어디로 보내셨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 밖으로 쫓아내실수도 있었으나(욥 18:18) 단지 그들을 에덴동산에만 쫓아내셨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그들의 근본된 토지를 경작하도록 보냄을 받은 것이었다. 그들은 고통의 땅이 아니라 수고의 땅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무덤이 아니라 토지로, 그리고 토굴감옥이나 교도소가 아니라 노역소로 보내졌고 쇠고랑을 끌도록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쟁기를 잡도록 하기위해서 보냄을 받았다. 토지를 가는 그들의 수고는 땅의 소산물을 먹는 것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의 근본된 토지와 씨름하는 것은 좋은 목적들을 위해, 즉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훗날 그들의 종말을 그들에게 상기시키는데 이용될수 있었다. 비록 우리의 첫조상은 순결한 상태가운데서 누리던 특권들에서는 쫓겨났을지라도 그들은 절망에 빠지도록 버려지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는 그들에게 새로운 조건위에서의 두번째 시험단계를 마련하였다.
② 하나님은 그들을 밖으로 내쫓고 다시 들어올 생각은 일체 포기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시기위해 그룹들의 분견대, 곧 저항할수 없는 무서운 능력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군대를 에덴동산 동편에 두어 사람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훔치거나 동산에 억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다. 이사실은 아담에게 다음의 세가지 점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쾌하게 여기셨다.
둘째, 천사들은 그를 대적하였다. 그가 천사들과 우리의 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한, 하늘의 군대들과의 평화란 있을수 없다.
셋째,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막혔다. 즉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들여보내셨던 흠없는 순결의 길이 막힌 것이다. 그이후로 그가 첫번째 언약에 의해서 의와 생명과 행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언약이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언약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면 우리는 다 멸망해버리고 만다. 하나님은 이사실을 아담에게 계시하셨는데 그것은 그를 절망에 빠뜨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염검을 제거할 약속된 후손안에서 생명과 행복을 기대하도록 은혜를 베풀고 격려하시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이 우리와 화해하였고 가장 거룩하신 자에게 이르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

# 핵심
3:1-7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축복과 선으로 가득하였고, 인간도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을정도로 순진무구한 결백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으로인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게 됨으로써 행위언약을 파기했다.
죄의 기원(3:5,6)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베푸신 풍성한 은혜와 축복에 만족하지 못해 감사치도 않았다. 그들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서 불만을 갖게되고 마침내 하나님의 지시에 불순종하였다. 이 불순종에서 죄가 시작되었다. 또한 죄는 피조물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수 있다. 사단이 타락한 것도 자신의 분수를 알지못하고 스스로 창조주의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교만때문이었다(참조, 유 6절).

# 묵상
범죄하였을때 취할 태도 ( 3:8-19 )
하나님을 피하여 숨거나 자기 잘못을 부인하며 핑계대지 말고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아가 애통해하며 솔직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굴절된 하나님의 창조세계 ( 3:14-19 )
선악과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대상과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뱀은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흙을 먹고 살게 되었으며, 사탄은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어 머리를 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과 남편의 다스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고, 아담은 그땅에서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을수 있고 죽으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인간의 범죄로인한 영향력은 인간뿐만 아니라 세상의 여러 피조물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미치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굴절시켰습니다.
원시복음 ( 3:15 )
복음이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좋은 소식으로서,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으로부터 고난을 받지만 마침내 사탄을 멸하고 구원을 이루시리라는 최초의 예언이므로 ‘원시복음’이라 불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을 배반한 인간에게조차 적극적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 3:24 )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슬피울며 고통과 수고의 가시밭 길을 걷는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철저히 순종해야 하며 이러한 자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축복의 자리와 영생의 자리에 이르게될 것입니다. 결국 본문은 인류최초의 죄악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 해설
인간의 타락 ( 3 )
창3장은 철저하게 순종해야할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사단의 유혹에 빠져 타락한 인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가운데 창3장의 사건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하는 생각은 모든이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이는 인류의 비극과 불행이 본장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1. 동산의 유혹자
1) 사단의 도구인 뱀
사단은 그많은 짐승중에서도 가장 간교한 뱀을 통해 인간이 범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창3:1절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뱀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교하다'라는 말은 사악하거나 음흉하다는 말이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신중하다, 슬기롭다'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뱀이 에덴동산에서 사단의 도구로 이용된후 성경에 나타난 모든 뱀은 언제나 유혹의 상징인 사단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a.들짐승중에 가장 간교한 동물(창3:1)
b.마귀와 동일한 존재(고전10:9)
c.날랜 짐승(욥26:13)
2) 시험과 유혹에 직면한 인간
에덴동산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뱀을 통하여 인간을 유혹하려는 사단의 술책은 아주 교묘했습니다. 여자가 남자보다 연약한 존재인고로 뱀은 먼저 여자인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미혹하였습니다. 뱀은 하와에게 접근할때 하와도 알고있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을 건네면서 다가갔습니다. 하와는 평범한 질문이요 대화이기때문에 자신도 자연스럽게 그질문에 대답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입니다.
a.뱀은 지혜로운 짐승(마10:16)
b.뱀의 후예가 되지말 것(눅3:7)
c.창조자의 목적에 반하는 짐승(고후11:3)
3) 인간의 타락
사단의 도구인 뱀의 미혹에 넘어간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열매를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사건을 통해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얼마나 큰것인지 알게됩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와는 대조적으로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지극히 작은 명령조차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a.금지된 실과(창2:17)
b.유혹에 약한 여자(딤전2:14)
2. 죄의 결과
1) 책임전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먼저 엄히 그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그책망은 매우 준엄했지만 깊은 사랑을 담고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 대한 아담의 답변을 보면 그는 모든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범죄에 대한 책임을 하와와 하나님께 돌린데 비해 하와는 그것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a.아담의 핑계(창3:12)
b.하와의 핑계(창3:13)
c.인간의 변명하는 습성(출32:24)
2) 죄의 오염으로인한 수치심
범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것은 수치심이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벗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범죄이전까지는 벗었지만 벗은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범죄로 말미암아 벗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큰수치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죄로인하여 오염된 인간은 바야흐로 수치라는 것을 느끼게된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없었던 하나님의 선한 창조세계에 부끄러움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a.발가벗은 인간(창3:10)
b.죄를 감추는 인간의 습성(욥31:33-34)
c.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수치를 당함(시53:5)
3) 엄습하는 두려움
다음으로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것은 범죄가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두려움은 극대화되고 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할수 없을뿐만 아니라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생활을 할수밖에 없게 됩니다. 죄로인한 두려움은 인간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왜소하게 만들어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더멀어지게 합니다.
a.피할수 없는 하나님(시139:7-10)
b.여호와의 낯을 피하려는 자(욘1:3)
c.미혹에 대한 두려움을 지녀야 함(고후11:3)
3. 징계와 구속의 은총
1) 뱀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처리는 그들을 유혹하여 범죄케한 뱀에 대하여 저주하시고 그장래 운명을 예고하심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14절과 15절에 하신 말씀은 들짐승으로서의 뱀에게 뿐만아니라 그의 주관자인 사단에 대하여 하신 말씀인 것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즉 뱀에 대한 가혹한 저주는 곧 그리스도를 대적할 사단에 대한 저주로서 장차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치명상을 입을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
a.흙으로 식물을 삼음(사65:25).
b.여자와 원수되는 저주를 받음(창3:15)
2) 인간에게 내린 저주
뱀을 저주하신 하나님은 이제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하셨습니다. 먼저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자녀를 생산하는 수고를 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사모해야 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범죄에 대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아담에게 내려졌습니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와 죽음에 대한 선고입니다. 그의 받은 저주는 고난의 인생, 종교적 파산이라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a.계명을 어긴 대가로(창2:17)
b.육신의 죽음(히9:27)
c.영적인 죽음이 있음(살후1:9)
3) 징계속에 나타난 은총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무거운 징계를 하신 하나님은 육적 죽음의 유예와 벗은 수치를 가리워줄 가죽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 범죄한 인간을 향한 당신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기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인간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참조, 히9:22).
a.죄인을 교훈하시는 하나님(시25:8)
b.의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욥33:26)
c.구속은 하나님의 사랑(롬5:8)
결론
우리는 창3장의 말씀을 통해 이땅에 죄악이 어떻게 유래되었으며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범죄를 자초한 인간의 악한 행위와는 대조적으로 그러한 죄인에게마저 또다시 구속의 은총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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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말씀에 순종하면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출애굽기 15장 22절~27절]
22절 -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절 -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절 -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절 -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절 -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절 -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수르 광야에서 3일 길을 걷는 동안 물을 얻지 못합니다. 마라에 이르러 물을 얻지만 써서 마시지 못하자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나무를 모세가 물에 던지니 쓴 물이 단물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분 말씀에 순종하면 재앙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1. 마라의 쓴 물 (22~24절)

쉽게 불평하는 것은 연약한 믿음 때문입니다. 홍해를 건넌 후 이스라엘은 광야 길로 접어듭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3일 길을 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한 데다 마라의 물조차 써서 마실 수 없자 불평합니다. 이스라엘의 이런 모습은 광야 생활 내내 습관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나일강 물과 홍해 물을 뜻대로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여러 번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마실 물이 없자 다시 불평을 해 대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신앙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당장 느껴지는 대로 반응한다는 점입니다. 인생 광야 길에서 결핍을 경험할수록 우리가 의지할 분은 문제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입니다.

* 백성은 광야에서 3일간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자 어떻게 반응했나요? 나는 어려운 현실을 불평의 눈으로 보나요, 신앙과 소망의 눈으로 보나요?

 

2. 하나님이 법도와 율례를 정하심 (25~27절)

하나님의 지시대로 모세가 한 나무를 물에 던져 넣자 쓴 물이 단 물로 변합니다. 하나님은 백성의 불평에 대해 심판하시는 대신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이것들을 잘 지키면 애굽 사람들에게 내린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율례를 주시고, 이스라엘이 잘 지킬 때 축복을 약속하신 것은 시내산 언약의 복선 역할을 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은 엘림에서 12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를 만납니다. 물이 없거나 쓴 것은 애굽, 단물로 변한 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달라질 수 있는 광야 생활, 물이 풍부한 엘림은 약속의 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킬 때 단물과 풍부한 물을 얻고, 반대의 경우 완악한 바로와 같은 존재가 된다는 점입니다.

*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신 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약속을 주셨나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여부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요?

 

오늘의 기도

은혜는 쉽게 잊고, 불평은 일상적이며, 순종에는 더딘 제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소서. 오늘도 주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인도하시는 말씀이 제 안에 충만하길 소원합니다. 주님의 음성에 귀기울여 순종함으로 몸과 마음이 더욱 건강해지며 주님을 닮아 가도록 인도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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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안식일의 제정 2:1-3
1. 자연 왕국의 정착과 하나님의 안식(1,2)
여기서 다음의 네가지 점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하늘과 땅에 지어진 모든 피조물은 훈련을 받고 명령을 받는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위치를 알고 지켜야 한다.
둘째, 하늘과 땅이 완성되었고 또 거기에 있는 모든 피조물도 완성되었다.
셋째, 최초의 엿새를 지낸후에 하나님은 모든 창조의 역사를 그만두셨다. 그러므로 그는 기적을 행하실때도 자연을 통제하셨지 결코 정해진 그진로를 바꾸시지는 않으셨다.
넷째, 영원하신 하나님이 쉬신 것은 피곤해서가 아니라 아주 만족하셨기 때문이다.
2. 은혜 왕국의 시작과 안식일의 성화(3)
여기서 다음의 다섯가지 점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레중의 한날을 거룩한 안식과 거룩한 일을 하는 날로 엄숙하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거룩한 안식일을 계시받은 자들의 필수불가결한 의무이다.
둘째, 안식일은 세계창조와 함께 시작된 아주 오래된 제도이다. 죄가 없었던 시대인 이때에 설정된 안식일이 족장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경건하게 지켜졌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셋째, 주의 안식일은 참으로 귀한 날이기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를 순종하는 태도로 그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넷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때문에 복되다. 하나님께서는 그날에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다섯째, 안식일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기때문에 거룩한 날이다.

Ⅱ. 사람의 창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 2:4-7
(1) 여기에는 우리가 이제까지 보지못한 창조주께 붙여진 이름이 있다. 그이름은 곧 '여호와'(Jehovah)이시다. 1장에서는 그가 내내 '엘로힘'(Elohim)곧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불린다. '여호와'란 말로 표현할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이름으로서 그의 자존하심과 그가 만물을 존재케 하심을 표시하는 명칭이다.
(2) 다시 한번 초목과 채소의 생산이 언급되는데 그이유는 그것들이 사람을 위하여 지어졌고 사람을 위한 식물이 되도록 정해졌기 때문이다(5,6). 여기서 다음 네가지 점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땅은 스스로 그열매를 내지못하였고 순전히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내었다. 영혼속의 은혜는 본성의 토양에서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 자신의 수고의 결과이다.
둘째, 비또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비를 내리시기' 전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흔히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 일을 하시지마는 결코 그것에 얽매이시지는 않는다.
넷째, 하나님은 어떤 방도로든지 그가 만드신 식물들에게 물을 주실수 있으셨다. 그때는 아직 비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안개를 만드셔서 그것으로 '온지면을 적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도 안개나 조용히 내리는 이슬과 같이 소리없이 교회를 적셔준다(신 32:2).
(3) 사람의 창조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이 있다(7절). 사람은 하늘과 땅, 곧 영혼과 육신으로 된 소우주이다. 이제 여기에 이 두가지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있다.
1) 사람의 몸의 기원은 비천하지만 그구조는 기묘하다.
첫째, 그재료는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재료는 이같이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무에서 세상을 지으신 그무한하신 능력으로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만드셨다. 사람은 금가루나 진주가루 혹은 다이아몬드 가루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흔해 빠진 땅의 티끌로 만들어졌다. 우리의 바탕이 흙이기때문에 우리의 몸의 형성은 질그릇을 빚어냄과 같다(욥10:9). 그렇다면 우리가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둘째, 그렇지만 그것을 만드신 분은 위대하고 그제작은 훌륭하였다.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창조되고'(created)' 만들어졌다(made)고 하였으나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형성되었다'(formed)고 말하여진다. 이말은 사람이 고도의 정확성과 정밀도를 지닌 계획에 따라 점진적으로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음을 뜻한다. 기술이 재료를 능가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리자(롬 12:1).
2) 인간의 영혼의 고귀한 기원과 놀랄만한 유용성
첫째, 영혼은 하늘의 생기로부터 기원되었다. 영혼은 몸처럼 흙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직접나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어넣으신 영혼이 하나님을 따라 숨을 쉬는 것이다.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의 영혼을 받았으니 우리의 영혼을 그에게 맡기자.
둘째, 영혼이 곧 사람이다. 영혼이 몸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지않았다면 몸은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역겨운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영혼의 기원이 그처럼 고귀하고 그특성과 능력이 그처럼 탁월하기때문에 우리는 몸을 영혼보다 귀하게 여김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멸시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잠 15:32). 또한 영혼을 지으신 분만이 그영혼을 새롭게 하실수 있다.

Ⅲ. 에덴동산의 창설과 사람을 거기에 두심 2:8-15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이루어졌는데 몸은 땅에서 나왔고 이성이 있는 불멸의 영혼은 하늘의 생기에서 나왔다. 본문에서 우리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위하여 마련된 준비를 보게된다. 만일 사람이 그가 축복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그상태를 간직할수만 있다면 사람을 지으신 분이 그들을 계속 행복하게 하실수 있었을 것이다.
1. 에덴동산의 묘사(8-14)
에덴동산은 위대한 군주의 저택과 영토로 쓰려고 마련된 곳으로 곧 이 군주의 궁전이었다. 영감받은 창세기 기자는 이역사를 기록할때 먼저는 유대인을 위하여 그다음으로는 유아기상태의 교회를 위하여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잘 이해할수 있도록 모든 사실들의 외적인 면만을 기록하였고, 그속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은 후에 더많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 깨닫도록 남겨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담의 내적인 행복보다는 외적인 상태의 행복에 대해 주로 기록했던 것이다.
(1) 아담이 거주하도록 정해진 곳은 동산이었다. 그곳은 상아로 만든 집이나 금으로 입혀진 궁전이 아니라 동산이었는데 그것도 기술자로써가 아니라 자연으로 꾸며지고 장식된 동산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사는 집의 지붕은 하늘이었다. 하지만 어느 지붕이 그처럼 기묘하게 꾸며지고 단장될수 있겠는가! 또한 땅은 그의 마루였으며 그 어떤 마루도 그처럼 훌륭하게 단장될수 없을 것이다. 나무그늘이 그의 휴식처였고 그아래가 그의 식당이며 침실이었다. 그러나 그어떤 방들도 이곳들보다 멋있게 꾸며질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솔로몬의 영광도 이모든 영광과 견주어 볼때 이것들만 못하였다. 자연은 적은 것과 가장 자연스러운 것에 만족하며 은혜는 보다 적은 것에도 만족한다. 그러나 정욕은 아무것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2) 하나님께서 친히 지혜와 능력으로 이동산을 고안하고 설비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동산을 창설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하시고 정하신 것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영혼을 만족시키거나 기쁘게 할수 없다.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곳이 아니고서는 아무데도 참된 낙원이 될수 없다.
(3) 이동산의 환경은 가장 훌륭한 것이었다. 이동산은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에덴이라는 곳에 있었다. 그장소에 대해서는 특별히 여러가지 특징과 경계로써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거처가 될 하늘의 낙원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러므로 쓸데없이 지상의 낙원을 찾는 일로 고심하지 않도록 하자.
(4) 이동산에 심겨진 나무들
1) 이동산에는 모든 가장 좋은 나무들이 있었다. 하나님은 자애로운 아버지로서 아담의 유익뿐만 아니라 그의 즐거움도 고려하셨다. 죄가 없는 곳에는 변치않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결백 그자체에 참되고 지극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2) 이동산에는 특별한 두나무가 있었다. 땅에는 그 와같은 나무들이 없었다. 그 한나무는 '동산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였다. 이나무는 아담에게 그가 무죄한 상태로 계속 순종만 하면 창조주가 베푸는 은혜로 말미암아 장수와 행복을, 더나아가서는 불멸과 영원한 축복까지 받게될 것을 보증하는 징표와 인종이 되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아담은 이나무의 열매를 먹고 또 영원히 살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나무가 되신다(계2:7;22:2). 또하나의 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였다. 나무의 이름이 이같이 불린이유는 나무속에 유용한 지식을 낳거나 증가시키는 어떤 효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이유는 첫째, 아담이 이나무에 의해 도덕적인 선과 악을 알수 있도록 이나무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고 실제적으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선인가? 이나무의 열매를 먹지않는 것이 선이다. 무엇이 악인가? 이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 악이다. 사실 다른 모든 도덕적인 선과 악의 구별은 원래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하나의 실정법에서 유래한 이러한 구별은 이나무에서 명백히 나타났다.
둘째, 결과적으로 그나무가 아담에게 선을 상실함으로써 선을 알고 악을 깨달음으로써 악을 아는 경험적인 지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은혜시대의 계약속에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약속과 함께 '믿지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듯이 무죄시대의 계약에도 생명나무에 의해 확증되고 보증된 "이것을 행하면 살리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먹으면 죽으리라"는 경고가 다른 또하나의 나무를 통해서 아담에게 동시에 주어졌다. "이나무를 손대면 멸망하리라." 그래서 하나님은 이 두나무를 통해서 아담앞에 '선과 악, 축복과 저주'를 설정해 놓으셨다(신 30:19). 곧 이 두나무는 그 두가지 상반되는 서약과 같았다.
(5) 이동산을 적시는 강이 있었다(10-14절). 이 네강(혹은 한강에서 갈라져 나온 네지류)이 동산의 쾌적함과 비옥함을 더해주었다. 하늘의 낙원에는 이것들로는 비교도 할수 없는 훨씬 좋은 강이 있다. 그강은 이것처럼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계22:1) 생명수강이며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시 46:4) 강이다. 하윌라 땅에는 금과 향료와 보석들이 있었다. 그러나 에덴에는 그보다 무한히 더좋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곧 생명나무와 하나님과의 교제였다. 우리는 아프리카나 인도지방에 대해 이렇게 말할수 있다. "거기에는 금이 있으나 우리에게는 복음이 있다. 그땅의 금이 좋기는 하나 우리의 재산은 그보다 무한히 더좋다."
2. 이 기쁨의 낙원에 사람을 두심(15)
(1)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하여금 이낙원을 차지하게 하셨다.
1) 사람은 낙원'밖에서' 만들어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으신후 그를 이동산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는 낙원의 흙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보통 진흙으로 지어졌다. 그는 이동산의 경작권을 주장할수 없는 처지였다. 그이유는 그가 그땅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받은것 외에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또한 바로 그의 축복의 장본인이셨다. 우리를 지으신 분만이 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실수 있다.
3)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큰위로를 얻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억지로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섭리가 우리에게 지시하는 것들을 따라 나아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낙원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시 47:4).
(2) 하나님께서 그로하여금 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임명하셨다. 낙원이라고해서 일할 필요가 없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서 다음 네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우리중 어느누구도 빈둥거리며 지내도록 이세상에 보냄을 받지는 않았다. 우리에게 영혼과 몸을 주신이가 또한 그것을 가지고서 일할거리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이가 또한 우리에게 그와 우리의 세대를 섬기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도록 할일을 주셨다.
둘째, 이세상에서 직업을 지닌다고해서 순결의 상태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생활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농부로서의 소명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있어온 명예로운 소명이다. 그것은 낙원에서조차 필요한 소명이었다. 그것은 사람에게 창조주를 찬미하는 기회를 주는 소명이었다. 그의 손이 나무를 매만지고 있는동안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시키시는 일에는 참된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3. 하나님께서 무죄상태의 사람에게 내리신 명령과 그와 맺으신 언약(15)
이제까지 우리는 인간의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또한 그의 후한 수혜자로서의 하나님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람의 통치자와 입법자로서 나타나신다.

Ⅳ. 하나님의 명령 2:16,17
1.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피조물로서의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16)
여호와 하나님은 이제 인류의 조상, 인류의 대표자로서 서있는 인간에 대해 그가 조금전에 자연을 선물로 받은 것처럼 그자신과 그의 모든 후손들을 위해, 이번에는 율법을 받아들이도록 명하셨다. 이성없는 피조물들은 각기 본능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은 분별없는 봉사를 할수 있도록 지어졌기때문에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뿐만 아니라 왕과 주로서의 하나님명령도 받았다.
2. 사람에게 그가 마땅히 해야할바를 규정하는 이권위의 특별한 법률(17)
(1) '동산 각종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을수 있다'는 허락의 말씀속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현재의 행복을 확정해 주셨다. 이것은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시는 말씀일뿐만 아니라 순종을 조건으로 그에게 생명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해주시는 말씀이었다. 이와같이 아담은 자신의 완전하고 영속적인 순종을 지속하기만 했더라면 자신과 그의 후손들을 위해 낙원을 영원히 확보할수도 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은 이명령을 위반하면 그의 모든 행복을 몰수한다는 조건으로 그의 순종을 시험하셨다. "아담은 이것을 알아라. 너는 지금 너의 선한 행실때문엔 현재의 상태를 누리고 있다. 너는 조건부로 낙원에 있는 것이다. 지키고 순종하라. 그러면 네가 영원히 여기에 거할 것이나 그렇지않으면 지금 네가 행복한만큼 비참하게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를 살펴보자.
1) 아담은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는 위협적인 경고를 받았다. 여기서 다음 세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순결한 상태에 있던 아담조차도 위협의 두려움을 겪었다.
둘째, 그가 위협받은 형벌은 죽음이었다.
셋째, 이것은 죄의 즉각적인 결과로서 오는 것이라고 경고되었다.
2) 아담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실정법을 통하여 시험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명령으로 그의 순종을 시험하신 것은 매우 합당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음 두가지의 이유를 들수 있다.
첫째, 이 법이 순전히 입법자의 뜻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담의 본성가운데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을 금했다는 사실때문에 악한 것이 되는 그러한 것으로 시험을 받은 것이다.
둘째, 이 법이 사람의 타락한 본성속에 있는 죄의 커다란 두근원인 육신과 마음의 소욕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이 금지는, 그의 몸이 그의 영혼에 의해 다스려지고 그의 영혼은 그의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질수 있도록 감각적인 기쁨에 대한 그의 욕망과 진기한 지식을 알고자하는 그의 야망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Ⅴ. 남자에게 돕는 배필을 지으심(2:18-20)
1. 사람에 대한 창조주의 배려와 그자상하신 관심(18)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순종을 격려하기위하여 자신이 친구로 계시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셨다.
(1)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의 독처하는 것을 동정하셨다. 그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셨고 또한 그에게 좋은 것, 즉 그가 홀로 지내는 것보다 더나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그래서 그는 "그가 계속해서 이렇게 홀로 지내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홀로 있으면 인간은 위안을 받지못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적인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철저한 고독은 낙원을 황무지로, 궁전을 지하감옥으로 전락시켜 버리고말 것이다.
둘째, 홀로 있으면 인간은 자신의 종족을 번성시키거나 유전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으로 땅을 가득채운 세상을 만드실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대의 계승을 통하여 그와 같은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런데 그러한 세대의 계승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처럼 둘로부터 곧 남자와 여자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하나는 영원히 하나일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게도 그에게 사회를 마련해주실 뜻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그에 관해 심사숙고한 끝에 이런 결심을 하셨다.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우리는 여기서 다음 네가지 점을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우리는 이세상에서 우리의 상태가 아무리 좋을지라도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둘째, 우리의 필요를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뿐이시며 또한 그만이 그모든 필요를 완전히 채우실수 있다(빌 4:19). 우리의 도움은 오직 그안에 있으며 또한 그로부터 나온다.
셋째, 잘 어울리는 아내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돕는 배필이다.
넷째, 가정이라는 사회는 마음에 들기만 한다면 고독의 불만을 충분히 해소시켜 주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선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있고 선한 마음과 교제할수 있는 좋은 아내를 두고있으면서도 대화가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자는 낙원에서도 편치못하고 만족을 누리지못할 것이다.
2. 피조물들이 사람에게 복종하고 사람이 그들을 지배함(19,20)
하나님은 이같이 사람에게 내려주신 공정한 재산에 대해서는 그점유권을 허락해주셨으며 또한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릴 지배권도 그에게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그것들을 그에게로 데려오셔서 그로하여금 그것들에 대한 이름을 짓게하셨다. 이렇게 그들의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그는 이성과 언어의 능력을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자기의 지식을 확증할수 있었다. 또한 그렇게함으로써 그는 자기의 능력을 확증할수 있었다.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권위있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낮과 밤에, 궁창과 땅에 그리고 바다에 각각 이름을 붙여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모든 것들의 최고의 주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 '별들의 각기 그이름대로 부르셨다'. 그러나 짐승과 새들의 이름은 그들의 작은 주인격인 아담으로하여금 짓게하시고자 남겨두셨다. 이렇게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 형상을 따라 지으셨으므로 또한 그에게 자기 영광의 일부도 주시고자 하기위함인 것이다.
3. 피조물들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에는 불충분함(20)
그러나 그모든 짐승들가운데에는 아담을 돕는 배필이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인간본성의 존엄성과 탁월성.
둘째, 이세상과 세상것들의 헛됨: 이세상의 모든 것들을 모아놓을지라도 거기에서 사람을 돕는 배필은 나오지않을 것이다. 그것들은 사람의 영혼의 본성에 적합하지 않고 그필요를 공급해주지도 못하며 그정당한 욕구를 채워주지도 못하고 영혼이 영원히 지속하듯이 지속하지도 못할 것이다.

Ⅵ. 결혼을 제정하심 2;21-25
1. 아담을 위한 돕는 배필이 되도록 여자를 만드심(21)
여기서 다음 네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다음에 하와가 지어졌다(딤전 2:13). 남자가 머리라면 여자는 면류관, 곧 그녀의 남편의 면류관이요 보이는 피조계의 면류관이다. 남자는 흙으로 다듬어진 존재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흙이 두번 다듬어진 존재로서 흙에서 한단계 더나아간 존재였다.
둘째, 아담은 그의 아내가 만들어지는동안에 자신과 자신의 모든 일을 자기를 지으신 자의 뜻과 지혜에 기쁘게 내어맡기고서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염려를 맡긴 자로서 잠을 잤다.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때에 그기뻐하시는 자를 위하여 준비하시게 하라.
셋째, 하나님은 아담을 잠들게 하시되 그가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리하여 옆구리를 가르는 고통을 모르게 하셨다. 이같이 그가 아직 죄를 모르는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전혀 고통을 느끼지않도록 하셨던 것이다.
넷째, 여자는 '아담에게서 취한 갈빗대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은 그녀를 그의 머리에서 취하시지 않으므로 그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의 발에서 취하시지 않으므로 그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셨으며 그의 옆구리에서 취하시므로 그와 동등하게 하시고 그의 팔아래서 취하시므로 그의 보호를 받고 그의 가슴근처에서 취하시므로 그의 사랑을 받게하셨다.
2.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결혼시키심(22,23)
결혼은 명예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손수 성사시킨 이 결혼이야말로 이제까지 있었던 어떠한 결혼보다도 명예스러운 것이었다. 결혼은 하늘이 짝지어주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으며 친히 이들을 결합시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그들을 둘로 만드셨다가 이제는 그가 정하신 의식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만드셨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볼수 있다.
첫째, 여자의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그녀를 남자의 분신으로서 또한 그의 배필로서 남자에게 데리고 오셨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지으심받고 특별한 섭리가운데 남자에게로 이끌려온 아내는 남자에게 좋은 배필이 될것이다.
둘째, 아담은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그녀를 받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을 받되 그선물들을 우리에게 적합하시게 하는 그의 지혜와 그선물들을 우리에게 주시는 그의 은총을 감사히 인정하며 받아야 한다. 아담은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표로써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은 특별한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성을 표시하는 평범한 이름이었다. 즉 '그녀를 여자라 칭하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성에 있어서만 여자가 남자와 다를뿐이며 그본질에서는 전혀 다를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3. 결혼을 법으로 제정하심(24)
안식일과 결혼은 죄가 없는 상태가운데서 제정된 두의식이었다. 전자는 교회의 보존을 위하고 후자는 인류세계의 보존을 위한 의식이다. 마태복음 19:4,5절을 보면, 여기에서 '남자는 부모를 떠나 그아내와 연합하여'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수 있다. 여기서 다음 다섯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하나님의 법의 효력은 참으로 크다. 그법의 결속력은 자연의 결속력보다 훨씬더 강하다.
둘째, 자녀들이 결혼에 있어서 부모의 동의를 얻는 일은 참으로 필요하다.
셋째, 그처럼 가깝고 오랫동안 지속될 관계를 위한 대상을 선택하는 일에 있어 신중함과 기도하는 일은 매우 필요하다.
넷째, 결혼의 결속은 여러아내를 둠으로써(말 2:15) 나뉘거나 약화되어서는 안되며 이혼으로 파괴되어서도 안된다. 이혼은 음행이나 처자 불법유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다섯째, 서로가 한몸인만큼(엡 5:28) 남편과 아내사이에는 깊은 애정이 있어야 한다.
4. 우리의 조상들이 처음 창조되었을때의 순결과 무죄의 상태에 대한 증거(25)
그들은 둘다 벌거벗었다. 그들에게는 추위나 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옷이 필요없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체면을 차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러므로 아람역에 의하면 '그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고 되어있다.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전혀 없었으므로 비록 몸에 옷을 걸치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에게는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 핵심
2:1-3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마치고 안식하셨다. 안식일 제도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출 31:17). 안식일은 성경에서 종말에 주어질 영원한 안식을 가리키는 표징으로 해석된다(히 4:3-10).
행위언약(창조 언약, 2:16,17)
본래 하나님과 인간간의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 이 언약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규례를 온전히 순종할 것을 요구하셨다. 즉 순종하는 자에게는 영생을 약속하셨지만 불순종하는 경우에는 죽으리라고 경고하셨다. 죄를 한가지만 지어도 행위언약을 범하는 것이다. 아담이 죄에 빠졌기에 하나님은 그자비하심을 좇아 은혜언약을 더하셨다. 행위언약을 지킬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뿐이셨다.

# 묵상
안식일 제도의 기원과 발전 ( 2:1-3 )
기원 - 창조사역을 마친 하나님께서 일곱째날에 안식하신 것을 기념하여 안식일이 생겨났습니다.
발전 - 후에 이제도는 7년마다 안식년으로(출23:10, 11), 7회 안식년후의 희년(레25:8-12)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안식일이 구속사역의 완성인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개념이 바뀌었으며 이모든 것은 미래에 성도가 누릴 천국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히4:8, 9). 그리고 이 영적안식을 참된안식으로 볼때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진정한 안식입니다(롬8:19-21).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진정한 안식을 위해 오셨고 그의미를 성취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교훈 ( 2:8 )
에덴은 ‘기쁨’, ‘즐거움’을 의미하는데, 범죄함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은 에덴에서의 기쁨을 더이상 누릴수 없었으나 구원받은 성도는 장차 제2의 에덴이요 완전한 낙원인 천국에서 더큰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 ( 2:16, 17 )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것은 인간에게 올무를 씌우려함이 아니라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잘알고,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할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며, 인간은 창조자도, 만물의 주인도 아니라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만물을 관리해야 하는 존재임을 잊지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한 내용 ( 2:17-3:3 )
하나님의 말씀에 ‘만지지도 말라’를 덧붙였고 ‘정녕 죽으리라’를 ‘죽을까 하노라’로 완화시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말씀을 첨가·삭제·변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죄악입니다. 따라서 선악과 금단명령은 인간이 창조주와 관계없이 살아가느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느냐를 결정하도록 촉구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여인창조의 재료인 아담의 갈빗대 ( 2:21-25 )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성차별을 합법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서 서로 한몸이며, 한몸인 부부는 서로를 아끼고 협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함을 보여줍니다.

# 해설
에덴동산의 인간 ( 2 )
본장은 1장의 창조사역에 대한 보충설명이자 3장에 대한 서론적 내용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즉, 본장에서는 인간역사의 시작이 1장보다 훨씬 세밀하게 예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엿새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제7일에 안식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안식을 주시고 에덴동산을 만들어 그곳에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도록 환경을 허락하기까지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안식
1) 창조의 완성
우리는 창1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당신의 창조원리에 따라 6일간 단계적으로 조성하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중 앞의 3일은 각각 우주의 근본틀과 생명체의 생활배경이 되는 기초 조성을, 뒤의 3일은 우주만물을 배치하시고 생명체 전체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6일동안 천지와 만물을 원래 의도하신대로 창조를 완성하셨습니다.
a.창조의 완성(창2:2-3)
b.우주(출20:11)
2) 안식하심
6일동안 온우주의 창조사역을 완성하신 하나님께서는 7일째 되는날 안식하셨습니다. 이 안식은 하나님의 능력에 이상이 있어서 취하신 휴식이 아니라 이제부터 새로운 형태의 피조물을 다시 만들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공식선언인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안식이 필요없는 전능하신 분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사역의 완성이 있었기에 7일째 되는날을 기념하고 거룩히 구분하기 위한 안식이었습니다.
a.일로부터 휴식(레23:3)
b.구분없는 휴식(출20:10)
3) 안식은 인간의 근거를 확인시킴
온우주와 그안에 있는 만물의 창조사역이 이상적인 인간창조를 전제한 것처럼 제7일째 하나님께서 안식하신 것은 인간에게 안식의 근거를 제공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안식의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이것을 실행하는 인간들이 창조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았음을 거룩히 구별된 안식일 준수와 이를 기념함으로써 되새길수 있는 것입니다.
a.영원한 언약의 표징(출31:16-17)
b.창조자를 기억해야할 인간(전11:9)
2. 인간과 생활규범
1) 사람창조를 다시 설명함
창2: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은 하등동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인격을 부여받은 영혼을 가진 생물체임을 나타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의 화신인 영혼을 소유함으로써 영적인 존재, 곧 천사와 하나님을 닮은 생령이 된 것입니다. 인간영혼의 고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a.사람의 재료(고전15:47)
b.사람은 다른 피조물보다 귀한 존재(마6:26마6:26)
2) 에덴동산
사람을 귀한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그 곳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로 에덴동산을 꾸몄습니다. 즉 사람이 살기에 풍족하고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그곳에 온갖 좋은 식물들을 자라나게 하심으로 지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동산을 만드셨으며 여기에 당신의 형상인 인간이 거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a.네 강의 발원지로서 수원이 풍부한 곳(창2:10)
b.놋땅의 서편(창4:16)
3) 선악과의 금령
동방의 에덴에 가장 이상적인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곳에 살도록 하셨으되 인간에게 동산안의 모든 과실을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아담이 그실과를 먹으면 죽게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말은 선악과 그자체가 사람을 죽게만드는 독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의 준엄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피조물과 조물주, 또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최초 행위계약이기도 합니다.
a.영생하는 나무(창3:22)
b.하나님이 금지하신 나무(창2:17)
3. 가정을 이룸
1) 인간의 독처
아담은 어느면으로 보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위하여 에덴동산을 지어 두셨고 그안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도 좋은 실과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육축들과 짐승들이 아담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짐승들은 짝이 있었고 동류가 있었는데 만물의 영장 인간은 혼자였습니다. 아담에게는 짝도, 동류도 없었던 것입니다.
a.짝을 이루어 번성하는 피조물들(창1:20)
b.성도와 독처(고전7:8-9)
c.독신이 필요한 경우(마19:10-12)
2) 여자를 만드심
사람의 독처하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아담의 잠은 자연적인 수면이 아닙니다. 즉 피곤에서 오는 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의 배필을 만드시기위해 재우신 초자연적인 잠입니다. 하나님은 깊이 잠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a.남자와 여자로(창5:1-2)
b.남자를 돕는 자(창2:18)
3) 가정을 이루게 하심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들이 합하여 한가정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 자신의 뼈요 몸인 여자와 한몸을 이루고 살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년된 자의 결혼은 곧 조화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부응하는 것입니다.
a.가정을 이루는 동반자(창2:24)
b.남자보다 약한 자(벧전3:7)
c.부부로 구성을 이루는 가정(고전7:2-5)
결론
우리는 창2장을 통해 안식일의 기원과 인간의 고귀함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본장에서 최초의 결혼제도와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신성한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또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조물주께 합당한 피조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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