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울의 복음

바울은 사람들 가운데 수고하는 자신의 사명의 형태와 내용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 화려한 용어를 빌어 썼다. 그가 '자신의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복음에 관한 특이한 개념을 대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유일한 복음이 자기에게 맡겨졌기 때문이었다. 바울에게 복음은 선포의 행위와 선포의 내용 양자를 의미한다. 고전9:14에는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복음은 행위의 명칭임과 동시에 구체적인 내용이기도 하다. 내용과 관련하여 그것은 두개의 속격을 사용하여 수식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 즉 하나님이 설교하도록 하였으나 그 자신이 말한 메시지였다. 이보다 더 흔히 사용되는 것으로는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즉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그의 아들에 관한 복음이었다. 예수그리스도는 복음의 중심적인 내용이다. 그는 하나님의 물상으로서가 아니라 사도의 선포를 통하여 역사하는 분이시다(고후5:20 ; 고후13:3). 그러나 이 표현은 예수그리스도를 일차적으로 이것의 적극적인 내용으로 생각하였다. 그는 복음 속에 임재해 있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동일한 것이었다(골1:25)


2. 바울 복음의 세가지 측면
바울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다른 곳에서는 일반적으로 절대적 용법으로 사용된 단어에 이중의 공식적인 수식을 채워 넣음으로써 그 단어를 교회 내에서 시사하는 바가 풍부한 핵심 용어로 변화시켜 놓았다. 그것은 그의 사고 속에서 세가지 측면으로 특정 지워졌다.

1) 복음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의 설교도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그의 설교는 약속의 성취였다. 그의 복음의 내용은 예언과 일치하였으며(고전15:3), 종말론적 기쁨의 포고자에 관한 예언의 말씀은 그의 선포를 통해 성취되었다(사52:7 ; 롬10:15).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세상의 종말 이전의 우주적 사건, 즉 묵시적 구도 속에서 이해하였다(롬15:14-33). 예수의 몇몇 말씀들(마11:5)을 제외하고는 바울과 같이 그토록 엄밀하게 복음의 선포를 종말론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것은 초기기독교의 그 어느 곳에서도 없었다(눅4:17 ; 벧전1:12)

2) 복음의 내용은 어떤 언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복음'에 반대하여 신학적으로 정열한 방식으로 구별되었다.
놀랍게도 바울은 공관복음서 전승이 구약과 일관되게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하나님 나라를 복음의 내용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 성취의 성격과 일치되게 바울은 복음의 내용을 기독론적으로 기술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특히 다음 두 구절에서 볼 수 있다.
유대적 기독교회의 부활절 케리그마를 담은 고전15:3-5과 팔레스틴의 승귀 기독록을 내포한 정형 어구를 담고 있는 롬1:3,롬10:8에서 바울은 헬레니즘적 교회의 신앙고백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이후로 그 메시지를 복음으로 지칭하고 있다. 롬1:16에 나오는 구원론적 진술들은 이러한 기독론적 기술 행위들과 일치하고 있다.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는 역사하고 있다. 따라서 복음은 다양한 정형 어구들을 통하여 요약될 수 있다. 즉 각각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은 다른 방향과 방식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를 가리키는 모든 복음 선포를 복음이라고 믿지 않았다. 사실 복음을 분명히 하여 중대한 오류를 방지하는 것이 대부분의 바울 서신들의 역사적 목표였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오류와 맞서 싸우기 위하여 복음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광신자들은 복음을 지혜론으로 오해하였기 때문에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십자가의 신학으로 해석하였다.
또한 고린도후서와 골로새서에서는 고린도전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혼합주의적 왜곡에 대한 반론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왜곡들은 복음을 그의 의도에 따라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타당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들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복음을 제시하는 시도들이었다.

3)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복음을 이렇게 내용상으로 뚜렷하게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믿음의 공동체를 탄생시켰던 것은 바울에 의해 복음 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렀다. 이 두 표현들은 이미 칠십인역(LXX)에서 히브리어 표현인 hy rbd(다바르 야훼;여호와의 말씀)를 재현하는 전문 용어들로 채택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에 의해 대변된 언약의 하나님의 구체적인 지시들이 구약의 이해에서 이표현 아래에 포괄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 두 용어를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 즉 복음으로 지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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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써 세운 빌립보 교회에 복음의 적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적들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혀 있지는 않으나 바울은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기독교인들을 유대교화 하려는 율법주의자들과, 스스로 교만하여 반역에 이르는 자들이었고 자기 욕심에 배를 채우려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거짓 가르침과 잘못된 가르침에 바울은 눈물을 흘리며 반박하며 빌립보 교회의 온전함을 위하여 애쓰고 있다.

1. 바울의 믿음(빌3:1-11)
바울은 서신을 끝맺으려 하면서도 기독교인들을 유대교화 하려는 자들에 대해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바울의 반복적인 가르침이 왜 중요한가? 죄악을 행하는 자들, 손할례당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바울의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 자랑거리를 바울은 어떻게 여기며 바울의 원하는 바는 무엇인가?

1) 주 안에서 기뻐하라
우선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며 격려하고 있다. 이 격려는 고난 받는 교회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바울은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반복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로 여겼다. 그러나 바울은 기독교인을 유태교로 개종시키려는 유대인들을 '개, 행악하는 자들, 손할례당' 이라며 3번씩이나 반복 강조하여 역으로 유대인을 공격하였다. 그는 자신에 대해 자신만만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에 비하면 배설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면 먼저 자신의 인간적인 자랑을 버려야 하며,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얻고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2) 복음만 전파하라
바울이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잇는 것은 바로 기독교의 유대교화에 대한 경고이다. 현대에는 이런 위험이 사실상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 종족, 문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 유대인 이상으로 교만함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근대 유럽의 선교사들은 복음 보다는 서구화를 제3세계에 전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또 우리도 개발이 덜 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일부 민족들에게는 민족적 우월감을 갖고 있다. 이런 민족우월주의, 개인 우월주의를 버리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다.

2. 푯대를 향하여(빌3:12-16)
이 부분은 빌립보 교회의 또 다른 문제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유대교화 하려는 자들 외에 또 다른 종류의 빌립보 교회내의 적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에 대한 변증을 바울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완전주의자인가? 그리고 바울의 푯대는 무엇인가?

1) 그리스도를 좇아라
그닐카(J.Gnika)에 따르면 빌립보 교회 내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에 도달하였다고 주장하며 도덕적으로 방종한 무리들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목표에 도달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바울 자신은 아직 도달하지도 않았고 온전히 이루지도 않았다고 역으로 반박한다. 빌2:12의 바울의 논증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께 잡힌바 되었다. 이것을 염두에 둔 바울은 그리스도를 잡기 위해 좇아간다. 이는 결코 조급함과 불안의 표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순수한 열정을 의미한다. 바울은 완전을 향해 나가 완전을 이룬 자는 아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빌2:15)을 바울은 조롱의 의미로 불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 내의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 더 과격하게 책망하지 않는다(빌2:16). 왜냐하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칫 방종으로 빠지기 쉬우므로 또 바울이 가르친대로 살아갈 것을 권유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바울의 푯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을 위해 계속 전진해 나가는 것이다.

2) 성결의 삶
간혹 교회 내에 스스로 '믿음의 도'에 이른 것처럼 행동하며 다른 이들의 믿음을 경히 여기는 무리들이 있다. 우리는 인간이 완전에 이른다는 사상이 얼마나 위험스러운가를 알고 있다. 성결을 주장한 웨슬리도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의미하였지 인간 의지에 의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말하지 않았다. 또 그 완전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이루라고 설교하고 있다.

3. 우리의 시민권(빌3:17-21)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몇가지를 더 당부하고 있다. 본받으려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또 십자가의 원수들은 누구인가? 바울은 왜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1) 하늘에 있는 시민권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는 지금과 같은 기독교인의 윤리적 규범이 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원수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에 급급하다. 즉 그들은 도덕률 페기론자들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매우 대조적인 삶과 가치 속에 사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심판 받아 멸망에 이를 자들이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이 땅의 쾌락이 아니라 저 하늘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우리의 할 일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임을 명심하자.

2) 소망이 하늘에 있음
세상을 살다보면 어렵고 힘든 일들이 많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다 보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참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소망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이후 현대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혼란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자신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자랑거리를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댓가가 하늘의 시민권이요, 하늘의 영광이라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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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는 그리스도

예수는 사단의 세력을 꺾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시어 사랑과 정의 그리고 생명으로 통치하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에게 속한 자들이기에 어느 상황에서도 겁낼 필요가 없으며, 도리어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주가 이미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 예수는 우리에게 확신과 위안의 힘을 제공하는 분이시다.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사실 빌립보서의 여건상 기뻐할 일이 별로 없다. 빌립보서의 객관적 상황을 볼때 바울은 감옥에서 사형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빌립보 교회는 핍박과 분열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바울은 '기뻐하라'고 말하면서 전제로 '주 안에'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는 우리에게 구원과 승리의 축복을 주시는 만유의 통치자이시다. 그렇기에 그는 모든 불안하고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주권을 확립하고 그의 구원을 이루어가신다. 우리는 그런 분께 붙잡혀 있다. 그분께서 당신의 품으로 우리를 품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황은 불안과 두려움을 상기시키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이 우리를 안고 있기에 우리는 기쁨과 확신을 가질 수 있다.

2. 예수의 신성을 인식

 

빌2:9-11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어 하늘의 천사들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예배할 것을 말한다. 사45:23은 야훼만이 이런 경배를 받으실 수 있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주이시며 그분만이 온 우주 만물의 경배를 받을 수 있다. 이 말은 예수의 신성, 예수의 하나님됨, 하나님의 이름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 존재의 이름은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구약에서 야훼에 관한 말들을 거리낌없이 예수의 관한 말로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구약의 맥락에서는 분명히 야훼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서 주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적용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1:10인데, 여기서 시편102:25에 나오는 우주의 창조자로서의 야훼에 관한 말씀이 예수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되어지고 있다. 곧 우주 창조에까지 참여한 분으로 예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와 하나님의 차이를 성경은 분명히 유지하고 있다(빌2:9-11). 온 우주로 하여금 예수를 주라 고백하고 예배하게 하였는데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이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자 관계로 설정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예수는 아들이라 칭하는 것이다.

3.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윤리적 상황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여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기를 서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고백은 순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윤리적 상황에서 쓰이는 칭호이다. 그래서 바울은 주라는 예수의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교회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문제와 그리스도인들의 실제적인 행동을 규제케 할때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즐겨쓰는 '주안에서'라는 말의 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빌립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거기도 문제는 있었다. 그것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중심으로 다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한마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주 안에서 한마음이 되라는 소리는 무엇인가? 이것은 그들이 예수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들로서 스스로 주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재점검하며,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자연히 한마음이 될 수 있다. 주는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결단에 최종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주권에 일치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4. 중생(衆生)

중생은 믿는 자들에게 책임있는 생활을 시작하게 해준다. 예수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함으로써 믿는 자들은 그에게 복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구원을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이 효력을 발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빌2:12). 그리고 의롭다 인정됨에는 성화의 체험적인 면이 뒤따라야만 한다. 또한 이것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확실히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중생을 통하여 이미 본질과 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바울은 본문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모습에 대하여 명령하고 있다. 복음 안에서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삶의 모범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는 겸비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나 영광을 얻으셨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관한 개인적인 관심을 적고 있다.

1. 한마음 한사랑으로(빌2:1-5)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하나될 것을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 어떤 근거에서 하나될 것을 권면하는가? 어떠한때 바울의 기쁨은 충만한가? 무엇이 하나됨을 막고 방해하는가? 다른 이들을 어떻게 대해 주어야 하는가?

1) 하나되기 위한 근거
하나되기 위한 근거는 첫째, 빌2:1에 나온대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됨은 필수이며 권면이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두번째는 사랑에 바탕을 둔 위로이며, 셋째는 성령에 바탕을 둔 교제 그리고 넷째로는 긍휼과 자비가 하나되기 위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위의 네가지를 바탕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있다. 헬라어 원문을 보면 빌2:1-4의 모든 동사 형태는 빌2:4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위의 4가지 조건이 교회의 하나됨의 근거가 되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교회가 하나 될때 바울의 기쁨이 충만케 된다. 그리고 하나되기 위해서는 방해거리를 제거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툼과 허영이다. 이 뜻을 영어 성경에서는 이기적인 야심과 헛된 자연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됨의 방해거리이다. 하나됨을 도와주는 것은 겸손한 마음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하나되며 이러할때 바울의 기쁨은 충만하여진다.

2)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요 13장). 사도 요한도 임종하기 전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유언하였다. 이렇게 서로 하나되어 사랑하라고 가르쳤다는 것은 그만큼 제자들 사이에 하나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사랑으로 하나 되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바울의 명령이요,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명령인 것이다.

2. 그리스도는 누구신가?(빌2:6-11)
바울은 낮아짐의 모범을 그리스도로 보았다. 그러나 단순히 겸손하신 그리스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서도 매우 뛰어난 기독론을 담고 있다. 어떤 기독론을 담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어떤 형태로 이 기독론에서 나타나는가? 그리스도의 지위는 어떠한가? 이 기독론의 문장 구성은 어떠한가?

1)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모두 이 기독론에 나타난다. 신성에 대해서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즉 그리스도는 스스로 겸비하여 인간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겸비와 영광을 동시에 갖추셨다. 그의 겸비함은 '종의 형체'(빌2:7)에서 나타나며, 그의 가장 겸비함은 십자가 상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그의 명령은 먼저 하나님이 그를 높인다(빌2:9). 그리고 예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을 꿇게 되고(빌2:10), 모든 입들이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빌2:11). 이 기독론의 목적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것으로써 어떤 학자들은 바울이 이 기독론적인 시를 썼다기 보다는 이미 당시에 전해 내려오는 성례전에서 사용된 찬가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바울에 의해 손질이 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2) 바울의 기독론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바울은 기독론을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모범을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이런 겸비함이 각 교회와 각 교인들에에 필요할 것이다. 이러할때 그리스도가 미천함으로 얻었던 영광을 우리 교회와 교인도 얻을 것이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기독론은 교회가 점점 양적으로 성장하고 내실을 기하기 보다는 외형과 교인 수에 집착하는 오늘날 한국의 우리들을 위함일 것이다.


3. 바울의 기쁨(빌2:12-30)
바울은 또다시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권면은 무엇인가? 여기에도 어떤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계속해서 기쁨에 대한 강조가 나오는데,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디모데에게 향한 바울의 뜻은 무엇이며, 에바브로디도는 어떤 자인가?

1) 주 안에서의 기쁨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온전히 구원에 이르도록 명하고 있다. 이는 구원을 위해 행함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중생 후에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빌2:15). 성화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될 것이다. 즉 온전한 구원을 위해서는 중생 성화의 단계가 필요하다. 또한 바울은 주 안에서의 기쁨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빌2:17에서는 비록 순교한다 하더라도 기뻐하겠다는 바울의 기쁨의 믿음을 볼 수 있다.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가 설립될 때부터 함께한 동역자로서 바울과 빌립보 교회를 연결해 주며 믿음의 본을 보여 주는 참다운 바울의 동역자요 아들이다(딤전1:2). 에바브로디도 또한 바울과 고난을 함께한 자였다.

2) 복음에 동참
한번 믿으면 구원이 저절로 주어진다는 것은 착각이다. 믿는 자에게는 성결의 삶이 뒤따르고 또 뒤따라야 한다. 이 세상에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기 위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 또 죽기를 각오하고 함께 복음의 동역자가 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아 오늘날 우리도 복음에 동참해야 하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범을 보이셨다. 그의 겸비함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모습이고 그의 영광은 우리가 받을 상급의 모습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교회는 하나 되어야 하고 삶을 통해 서로에게 모범을 보이고 분사해야 한다. 바울의 이 편지는 교회가 서로 하나 되고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성결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바울의 명령이 담긴 것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바울의 '개인적-내세적 종말사상'(빌1:20-24)

사도 바울은 종말론에 관한 초기 서신의 언급과 후기 서신의 언급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그의 초기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살전4:13-17)와 고린도전서(고전15:23,51-52)에서는 모든 죽은 자들이 마지막날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일제히 부활한다는 우주적 묵시적 종말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후기에 기록된 빌립보서(1:20-24)와 고린도후서(5:1-9)에서 바울은 개인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종말 사상을 내비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의 종말내지 부활 사상의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바울의 종말 사상속에 이 두 입장이 긴장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처음부터 공존했음을 시사할 수도 있다.

2. 감독(Bishop)

1) 의미
'감독'이란 지역 교회를 공적을 맡아 목회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용어는 주로 신약에서 사용되었다. 특히 에베소 교회와(행20:28) 빌립보교회에서(빌1:1) 감독은 교회를 다스리는 자로 인정받았던 것 같다. 1차 투옥 후에 바울도 감독의 직분을 인정하였다(딤전3:2 ; 딛1:7).

2) 신약에서의 사용
신약에서 감독과 장로는 거의 유사한 직분이었다. 그러나 A.D.2세기경부터는 그 직분이 서로 분류되었다. 감독의 임무는 설교를 포함하여 양 떼를 보살피는 일이었다(행20:28). 감독의 자격에 대한 언급은 딤전 3:1-7과 딛1:7-9에 나타나 있다. 흥미롭게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감독'이라 불렀다(벧전2:25). 장로들도 감독과 함께 목회에 참여했다(벧전5:1). 가롯 유다가 예수를 팔고 자살한 후 한명의 사도가 비게 되었는데, 이 유다가 잃어버린 정통 사도직을 가리키는 행1:20의 '직분'이란 단어는 '감독'이란 뜻의 헬라어 epivskoph(에피스코페)이다.

3. 바울의 감사(빌1:5-8)
바울은 공식적인 문안 인사를 하고 나서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감사를 피력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 서신의 일반적인 통례이다(롬1:8-10). 그러면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감사한 이유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리고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어떻게 도와주었나?

1) 신앙 안에서의 아름다운 교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이다(행16:11-40). 빌립보 교회는 항상 바울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였고 또한 기도와 물질적으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와주었다(행16:15 ; 고후11:9).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은 에바브로 디도를 로마로 파송하여 바울 곁에서 그의 손발이 되어 수종들도록 하여 주었다(빌2:25-30). 바울은 이런 빌립보 교인들의 사랑을 돌이켜 보며 빌립보 교인들의 끊임없는 사랑과 복음 사역의 동참에 감사드렸다. 실로 신앙 안에서의 아름다운 교제를 지속하였던 것이다(빌1:5-8).

2) 성도의 교제
빌립보 교인들은 환난과 극한 가난 속에서도 바울을 위해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였다. 또한 여러모로 바울에게 도움을 주었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간의 아름다운 교제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서 사라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복음 사역자를 물질적으로나 여러가지 다른 차원에서 도와주어 복음 사역의 진보를 위해 같이 힘써야 할 것이다.

4. 중보기도

1) 정의
'중보'란 둘 사이에서 어떤 일을 주선하는 행위 또는 주선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중보기도란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2) 중보기도의 근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찾아와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은밀한 개인적인 교제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개인적인 기도를 통해서만 실제적인 기도의 응답을 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중보기도를 명령하고 있다(엡6:18 ; 약5:14). 이것은 하나님의 찾아오심과 중보기도의 허용에 의해 성도들간의 중보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하여 성도들이 서로 교통하며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시기 위한 방편으로써 중보기도를 허락하신 것이다. 중보기도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것은 중보기도의 효과의 확실함을 보증해 준다.

3) 의의
중보기도는 믿음이 약한 자나 고난으로 지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함으로써 믿음을 강건하게 해준다.
또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방편이 된다. 그리고 성도간의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이 감옥에 매여 있음으로 해서 걱정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상황에 대한 설명과 격려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음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 성도의 교재(빌1:1-11)
이 서신의 서두는 전형적인 바울 서신의 서두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수신자와 발신자가 분명히 밝혀져 있고 또 감사와 기도로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디모데를 발신자에게 포함한 이유는 무엇인가? '감독'이란 의미는 카톨릭과 감리교에서 말하는 감독의 의미인가, 아니면 다른 의미인가? '종'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울의 빌립보 교인들을 위한 간구는 무엇인가? 여기에 나타난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1) 바울의 감사와 간구
바울이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부터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에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빌립보 교회와 오랜 교제를 가져온 디모데에 대한 언급은 빌립보 교회가 이 편지를 읽을때 더 친근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편지는 공동 발신임에도 불구하고 '내가'라는 일인칭 주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바울 홀로 쓴 것이다. 단지 디모데는 소식을 전한 사자에 불과하다. 종이란 노예를 의미한다. 즉 철저히 그리스도에 매인다는 것을 의미하는 충성의 표현이다. 감독이란 의미는 오늘날 가톨릭과 감리교에서 말하는 감독의 의미와는 다르다. 만약 교회 직계가 발전되어 생긴 '감독'의 의미라고 본다면 이 편지는 몇몇 학자의 주장대로 바울이 쓴 편지가 아니라 후대에 바울의 이름을 빌어 쓴 위조 편지이다. 이 편지가 바울이 쓴 편지임에 틀림없을진대, 그 때는 아직 교회의 제도가 발달되지 못하였으므로 감독이라는 직분은 집사와는 구별되나 목사, 장로의 역할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울의 감사와 간구를 보면 선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바울의 감사와 간구를 보면 선한 목자와 양과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바울은 목자가 양을 품듯이 간구하여 감사하며(빌1:3,4,8) 복음으로 인하여 함께 동고동락하며(빌1:7),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장하기를 간구하고 있다.

2) 바울의 서신 내용
그리스도인의 서신 왕래는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특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빌립보

빌립보는 마게도냐의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한 성읍이다. 빌립보의 위치를 보면, 동으로는 네스토스강, 서(西)로는 스트리몬강, 북으로는 발칸 고지대, 남으로는 심볼론 해변과 접하고 있다. 빌립보의 성은 오르벨로스의 구릉지역에 있으며, 빌립보 성읍은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빌립보 성읍은 아시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무역과 교통의 요지였다. 또한 군사 도로로도 이용되었다.
원래 이 지역의 토착민들은 타소스 섬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B.C.361년에 아테네의 웅변가 칼리스트라투스가 이곳에 도망하여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원래 이곳의 지명은 크레니데스라고 했는데 아마 이것은 샘물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게도냐의 필립2세때 이 지역을 확장하고 빌립보로 개칭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B.C.335년 트라키아로 진군할때 이곳을 지나갔다고 아리안은 진술하고 있다. 로마의 파울루스(L.Aemilius Paulus)에 의해 마게도냐를 4개의 구역으로 분할할때 빌립보는 제1구역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카이사르의 암살자인 카시우스와 부르투스를 B.C.42년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옥타비아누스가 쳐부순 곳도 이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일부 병사들을 이곳에 정착케 한 후 루푸스(.Q.Paquius Rufus)로 하여금 이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루푸스는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콜로니아 빅트릭스 필리펜시움(Colonia Victrix Philippensium)이라고 개칭하였다.
B.C.30년에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에게 추방령을 내리는 대신에 이곳에 정착하도록 허가 했다. 이후 콜로니아 율리아 필리펜시스(Colonia Julia Philippensis)로 부르다가 다시 B.C.27년 콜로니아 아우구스타율리아 필리펜시스(Colonia Augusta Julia Philippensis)라고 개칭하였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트라키아인, 칼리스트라투스인 이었으나 이후 희랍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빌립보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다보니 종교 역시 복합종교가 성행하게 되었다. 즉 이집트의 이시스, 로마의 황제 숭배, 흐가바의 아테나, 트라키아의 신 리베르 파테르 등 다양한 신을 숭배하였다.

2. 본 서의 편집 문제

19세기 이후부터 본 서의 편집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3장의 머리에 나오는 어투와 내용이 급변하는 것을 지적하여 문제를 제기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본 서가 별개의 두서신으로 편집되었다는 사실로 해명되고 있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빌3:1에 보이는 경고는 앞의 두장에 나타난 어조와 확연히 다르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러한 경고가 다른 부분의 상황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돌출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의 다른 서신 중에서도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주고있다. 즉 고전15:58, 살전2:15 이하, 롬16:17-20을 들수 있다. 빌3:1의 급격한 변화는 엄밀하게 분석하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1:28의 내용이 준비가 되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이다. 라이투푸트의 제안에 따라 바울이 본 서신서를 써내려가다가 무엇인가에 의해 방해를 받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추론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아마도 바울이 편지를 쓰고있는 동안에 다른 지역에서 적대자들에 대한 행위의 보고를 들은데서 기인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이 구절이 비평가들로 하여금 본 서의 편집설을 주장하게된 근거가 되었다.
베어(Beare)는 본 서를 세개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는 빌4:10-20은 감사에 대한 편지, 빌1:1-3:1, 빌4:2-9,21-23은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낸 편지, 빌3:2-4:1,10-20은 하나의 독립된 부분으로 보고 있다. 사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여러 편지를 보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본 서가 편집되었다는 설은 신비성이 결여된 것이다.

3. 본 서의 나타난 특별한 문제들

빌2:5-11에 관한 많은 논쟁이 제기되었다. 오늘날에는 초기 찬송가 구절 아니면 기독교 신앙 고백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학설은 로마이어, 베어, 마딘 등에 의해 주장되어 지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미리쓰여진 바울의 서신 중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또하나는 빌1:1절에 나오는 감독과 집사 문제이다. 그러나 이 서신이 쓰여지기전 이미 감독과 집사의 직분은 있었다. 그리고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4:1)에 나오는 '나'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까지도 명쾌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1. 빌립보 교회

행16:12-40에 의하면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 때 마게도냐 지방에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다. 빌립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 왕이 그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이다. 주전 42년 이후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데살로니가와 함께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로써의 역할을 하였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아 유대인의 회당도 없었고 따라서 바울의 선교에 대한 유대인의 방해도 없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빌립보 교회는 주로 이방인들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며, 특히 여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처음으로 빌립보에서 전도하여 믿게된 사람은 두아디라성 출신 루디아라는 여성과 그의 가족이었다.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이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빌4:3)이라고 부른 바울의 여성 동역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빌립보에서의 첫번째 바울의 체재 기간은 그리 길지 못하였으며, 그가 전도한 사람은 루디아의 가족 외에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에 대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빌립보서에는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클레멘트와 같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타난다. 빌립보 교회와 바울은 계속하여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빌립보 교회는 여러차례에 걸쳐 물질적으로 바울의 선교 활동을 도왔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바울은 가이사랴에 억류되었다가 로마로 호송되기 전에 빌립보 교회를 두번 내지 세번 더 방문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바울이 세운 교회 중 그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었던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으며, 그 교회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때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는 뜨거운 애정을 나타내기까지 하였다.

2. 저작 연대와 장소

일반적으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본 서는 옥중 서신이라고 불린다. 빌립보서가 감옥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어떤 감옥인지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바울은 빌립보(행16:23), 예루살렘(행21:33), 가이사랴(행23:25), 로마(행28:16)의 감옥에 투옥된 적이 있다. 그런데 빌립보와 예루살렘 감옥에서는 불과 하루내지 이틀동안 갇혀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기록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편 고후6:5, 11:23,24에 근거하여 바울이 에베소에도 감금되었으며 여기서 한두편의 서신을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적으로 빌립보서의 저작 장소에 관하여 로마 기록설, 가이사랴 기록설, 에베소 기록설로 견해가 나누어진다. 그러나 초대교회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의 전통적 입장은 로마 기록설을 따르고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빌립보서를 기록했다고 간주한다면 그 시기는 대략 주후 61년경이 된다.

3. 저작 경위와 목적

바울과 매우 친밀한 관계에 있던 빌립보 교회는 옥중에서 고통 당하는 바울을 위로하고 돕기 위하여 금품을 모아 에바브로디도를 대표로 보냈다(빌2:25 ; 빌4:14,18). 그러나 오히려 바울을 시중들려고 온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된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위로와 안심을 주기 위하여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돌려 보내게 되었다. 바울은 그를 보내면서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준 사랑과 호의에 감사의 뜻을 전하는 편지를 써 보냈다. 그 편지 가운데 바울은 그 동안 빌립보 교회로부터 들려온 문제들에 대하여 권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두여인의 다툼으로 야기된 분란을 극복하고 연합과 일치를 이룰 것을 부탁한 것이며, 또한 빌립보 교인들을 미혹하는 행악자들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에 대한 경고를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본 서의 전체적인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확신과 기쁨으로 인하여 빌립보 교인들에게 그의 사랑과 감사를 드러내고 있다. 바울은 그들에게 가고 싶어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면서 자기 대신에 가장 신뢰하는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내어 그들을 위하여 영적 사역을 감당케 하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다.

4. 기록 장소

빌립보서는 바울서신 중에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일반적으로 옥중 서신이라 불리워진다. 바울은 본 서신이 기록될 당시 투옥되어 있었으나 그 장소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결과적으로 본 서신이 기록된 장소에 대해서는 네가지의 견해가 있다.
①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전통적인 입장
② 가이사랴에서 기록되었다는 견해
③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는 설
④ 혼합된 가설로써 네서신을 두분류로 구분한다. 즉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에베소서는 가이사랴에서 기록되었으나 빌립보서는 로마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서신은 에베소에서 쓰여지고 빌립보서는 로마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네서신(옥중서신) 전체가 로마에서 기록되었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 이유는 로마와 빌립보 간의 거리는 에베소와 빌립보 간의 거리보다 더 먼 것이었다. 그리고 빌1:13에서 '시위대', 즉 로마의 황제에게 할당된 로마 군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바울이 심문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으로 보아 그는 로마에서 가이사에게 심문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빌1:20).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금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곳에서는 그 사건의 최종적인 판결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고전15:2에 근거하여 에베소를 기록 장소로 제안하기도 하나 그 구절에서 투옥되었다는 분명한 언급이 없다.

5. 본 서의 특징

바울의 개인적 신앙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 본 서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서신 전체에서 '기뻐하다'는 동사를 9번, '기쁨'이라는 명사를 5번 사용하고 있으며, 4장에서만 '기뻐하다'는 말을 6번 쓰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서 넘쳐나는 기쁨을 억제할 수 없어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도 기뻐하라고 재차 반복하여 권면한다. 빌3:12-16에서 바울은 그의 신앙 자세를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푯대로 하여 위에서 부르신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하여 전심으로 달려가는 그의 간절한 소망과 열정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삶의 경험을 통하여 어떠한 형편 가운데서도 만족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깨달았다. 즉 비천함을 당할 때나 풍부함을 누릴 때나 외적 환경에 좌우됨이 없이 그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체험을 얻었던 것이다. 본 서신은 바울의 개인적 간증을 통한 권면이라는 뚜렷한 특성을 띠고 있다.

 

출처 :갓피플 자료&지식

제목 : 복음의 진보가 된 사건 (곽선희 목사)

[빌립보서 1장 12절~18절]

12절 -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절 -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절 -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절 -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절 -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절 -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절 -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삶의 고통과 즐거움은 항상 공존하고 있다.

  - 고통이 고통뿐이였나 그 속에 기쁨이 있다.

  - 기쁨이 기쁨뿐이였나 그 속에 고통이 있다.

 

*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앞세워야 한다. (깊은 곳의 의미 창조)

  - 진실에 충실해야 한다.

  -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데 정직해야 한다.

 

* 포기와 선택에 균형을 잡아야 한다.

  - (18절) 고난 중에 기쁨을 맞이 했다. 나의 당한 일이 복음의 진보가 되고 있다. (복음 중심 주의)

  - 갈라디아서1:15~16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존재의 목적 -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기 위해)

 

* 자기 실현할 수 있는 인간

  - 신축성 : 도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 자발성 :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

  - 창조성 : 이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 내가 당한 현실, 내가 당한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사랑이 있고, 계획하신 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제목 : 하나님 나라의 상을 받을 사람 (피종진 목사)

[빌립보서 3장 13절~14절]
13절 -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절 -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 푯대를 향해가는 사람 (푯대 = 예수그리스도)
  - 자기의 어리석음, 미약함, 부족함을 깨달은 사람이 지혜롭다. 그런 사람이 전진하며 나아갈때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 (은혜)
  -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2.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사람
  -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하나님께서 큰일을 주신다.
  -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최고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이 중요하다)

 
3. 믿음을 지키는 사람
  - 선한싸움을 잘 싸우는 사람 (죄, 마귀)
  - 흔들리지 않는 사람
  - 주님을 사모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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