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악인의 형통함을 항의함 12:1-6
선지자는 하나님과 그의 영혼사이에 있었던 일을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유익하리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해준다.
(1) 하나님의 판결에 대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그와 변론하는 것은 놀라운 자유이다(1절). 그는 하나님과 쟁변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처사에서 결함을 찾고자 한것이 아니라 그의미를 알고자 한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수는 없지만 그와 더불어 변론할수는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에 대하여 거의 알지못하는 가운데 있을때에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생각을 여전히 유지하도록 마음을 다지지않으면 안되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피조물에게도 조금도 부당히 행치않으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실 것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섭리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될때에도 우리는 제 일원리가 되는 일반적인 진리들에 의거해야 하며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섭리가 아무리 명확하지 않다하더라도 '주는 의로우시다'(시 73:1).
(2)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에는 그에게 거침이 되는 것도 있었다. 악한 자들의 계획과 모의가 성공을 거두는듯이 보여졌다.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즉 저희의 악한 계획이 성취된 듯했다. 여기에서 악한 자라함은 주로 위선자(2절에서 나오듯이)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비록 선한 출발을 하였지만 거기에서 벗어나 패역되이 행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 안락하였다.'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관대하셨다고 말한다(2절). "그들은 좋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낙토에 심겨졌나이다(시 44:2;80:8)."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저희의 융성함은 확고한듯이 보여졌다. 그들이 하나님께 패역되이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셨다.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마음은 머니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에게 신실한 애정을 품지도 않았지만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 대해서 말할수 있었다. 입만의 경건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록 그들이 항상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말할 준비가 되어있고, 경건의 냄새를 풍기는 어조에 익숙하였으나 그들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지닐수는 없었다.
(3) 자신의 정직성에 관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는 중에 그가 받은 위로는 무엇인가(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미혹시키는 자도, 거짓 선지자도 아니라는 사실을 아셨다.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자들이다(고전2:8).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가에 따라 또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했는가 아닌가에 따라 선하고 악함이 구별된다.
(4)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 악한 백성에 대한 방침을 바꾸사 그들이 비록 오랫동안 번영을 누려왔으나 항상 형통하게 하지마시기를 기도한다. "심판을 내리사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이기름진 초장에서 끌어내소서. 그리하여 그들의 오랜 번영도, 죽일 날을 위하여 넓은 들에서 먹이며 예비해둔 양과 같을뿐임이 드러나게 하소서"(호4:1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교만과 사치로 그들의 불의의 그릇을 가득채워 파멸을 향해 무르익도록 형통하게 버려두셨다. 언제까지 이땅이 슬퍼하며(4절). "주여, 저들이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정도에 이르기까지 형통하게 하시겠나이까?" 온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풀들이 타버리고)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것은 요시야왕 재위말기와 여호야김왕 치세초기에 있었던 오랜가뭄의 결과였다(참조. 렘 3:3; 8:13; 9:10,12; 14장). '그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가 염밭이 되게하신' 것이 어찌된 일이었던가? 그러므로 선지자는 이악한 백성이 저희 자신의 죄로인해 죽도록,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아 전민족이 고통받지않도록 기도한다. 거민이…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결국을 보지 못하리라. 이말은 다음 두가지 의미중에 하나이다.
1) 하나님 자신이 저희의 결국을 보지못할 것이다. 그는 저희가 어떤 길을 취하였는지, 그리고 그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지못하신다는 의미이다.
2) 예레미야 선지자가 저희의 결국을 보지못하리라는 말이다. 즉 그들은 그를 거짓 선지자로 간주한 것이다.
(5) 그는 자신의 이러한 불평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을 우리에게 알려준다(5,6절). 사역자들은 가르쳐야할 교훈과 더불어 배워야할 교훈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며 또한 자신에게 설교해야 한다. 예레미야는 아나돗 사람들의 악함과 그들의 형통함에 대해 불평하였다. 본문은 그불평에 대한 응답으로 여겨진다.
1) 그에게 불평할만한 이유가 있었음이 용인되었다(6절). 네 형제(곧 아나돗의 제사장들)와 아비의 집이라도 너를 속이며(너에게 패역되이 행한다). "그들은 우애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할수 있는한 모든 악행을 너에게 행하였도다." 네 뒤에서 크게 외치나니. "그들은 네 뒤에 많은 무리를 불러모아 따르게 하였으며 너를 경멸하게 하였도다. '그들이 네게 좋은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실로 믿을수 없는 자들이라. 그들은 너의 친구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너의 원수들이라."
2) 그렇지만 그는 고향 사람들의 불친절을 너무 지나치게 마음에 새겼다는 말씀을 듣는다. 그들은 그를 피곤하게 하였다. 그곳이 그가 무사하리라고 믿던 '평안한 땅'이었기 때문이다(5절). 자기 친족들에게 이같이 미움받고 핍박받는 것은 그에게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이로인하여 그는 마음이 혼잡하여졌으며 자신의 일에 대해 낙심하게 되었다. 예언하는 일이 피곤해지기 시작했으며 그일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이것이 단지 그의 슬픔의 시작에 불과하며 그앞에는 보다 가혹한 시련들이 놓여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고통을 인내심으로 견디어냄으로써 다가올 보다큰 고난에 스스로 대비해야만함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으로인하여 바로앞에 놓여있는 일도 감당치 못하였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마로가 경주하겠느냐. "네가 이일로도 벌써 숨차하지 않느냐?" 만일 아나돗 사람들이 가한 핍박이 그에게 그처럼 큰충격을 주었다면 장차 예루살렘에 있는 방백들과 대제사장들이 저희 권세로 덮쳐올때는 무엇을 할수 있겠는가(렘 20:2; 32:2). 만일 그가 '평안한 땅' 거의 위험이 없는 곳에서 그토록 쉽게 곤비케되었다면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는가?' 그물이 둑위로 넘쳐서 사자들까지 수풀위로 올라오도록 놀라게 할때는 어떻게 하겠는가(렘 49:19). 우리가 '요단의 창일한 중에' 이르를때에는 어떻게 우리의 순전함과 평안을 유지할 것인가? 우리는 현재 당하는 작은 시련들을 잘 감당해나가야 하며, 우리 영혼을 지키고,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의 눈을 장차 받을 상급에 고정시키고 그것을 얻을수 있도록 달려가야 한다.

Ⅱ. 백성의 참상을 애곡함 12:7-13
백성들의 파멸이 여기에서 작정되고 있다.
(1) 여기에서 하나님은 두려운 말씀을 하신다(7절). 내가 내 집을 버리며. "내가 내 성전, 내 왕궁을 버렸도다." 그들이 그것을 더럽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버리시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내 산업을 내어던져. "그리고 그것을 더이상 쳐다보지 않을 것이라." 만일 그들이 스스로 합당하게, 올바르게 행하려고 했었다면 그는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허락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마음의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진노를 야기시켜 저희를 '그대적의 손에 붙이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타락하였으며,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맹수와 같이 되었다(8절). 내 산업이 삼림중의 사자같이 되어서. 그리하여 경고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소리를 발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들을 향하여 노호를 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며 그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의 공의를 무시한다. 그래서 삼림중의 사자같이 그를 향하여 소리를 발하였다. 하나님의 초장의 양떼이었던 자들이 탐욕스럽고 야만스럽게 되었으며 숲의 사자와 같이 통제할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미워하셨다. 포효하는 사자와 성난 짐승들같이 그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고민거리가 된 백성들에게서 사랑의 하나님이 무슨 기쁨을 취하실수 있겠는가? 그들은 어떠한 맹수류나 맹금류도 제사로 드려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하나님의 집에서 자리를 차지할 가치가 없는 '매'와 같이 되었다(9절). 내 산업이 내게 대하여는 무늬있는 매가 아니냐. 혹자는 '발톱달린 매'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치에 닿지않는 분쟁으로 나라를 하나의 투계장으로 만들었다. 혹은 저희 먹이의 피가 끼얹어진, 아니면 그피를 뒤집어 쓸 '무늬있는 매'로 만들었다. 매들이 그를 에워싸지 아니하느냐. 혹자는 '무늬있는 매'라는 말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규례와 이방인의 미신적인 관습을 혼합시킨 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즉, 그들은 다채롭게 꾸며진 종교를 좋아하였다.
(2) 대적들이 그들을 덮칠 것이며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혹자는 그들이 무늬있는 매에 비유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새들은 보통 기이하고 이상한 빛깔을 띤 새를 보면 둘러싸고 요란한 소리를 내기때문이다. 이세상 사람들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은 '사람들이 기이히 여기는' 자들이며 '무늬있는 매'와 같은 자들이다. 그러나 이백성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인하여 스스로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모든 새들이 그를 에워쌌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기 때문이다. 갈대아 군대가 그땅을 극도로 황폐화시킨 일이 이미 행하여진 일처럼 묘사되고 있다. 파멸이 그토록 가까이까지 임박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죄인들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그일을 전혀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1) 죄로 가득찼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사 이땅에 대하여 얼마나 온화한 애정으로 말씀하시는지를 보라. 그것은 '내 포도원'이요, '내 분깃'이요, '나의 낙토'라고 말씀하신다(10절).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에 많은 잘못이 있다고해도 그에 대해 인자와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주목하라.
2) 하나님께서 이땅의 황폐에 대하여 얼마나 따뜻한 동정심을 가지고 말씀하시는지 보라. 많은 목자가 내 포도원을 훼파하며. 이는 마치 아라비아의 목자들이 양떼를 몰고와 공동 목초지의 풀을 쉽사리 먹어치우듯, 군대를 몰고와 전국토를 수월하게 차지하고 삼켜버린 갈대아 장군들을 의미한다. 그들이 황무지로 만든 그땅은 본래 낙토였다. 그것은 전쟁의 칼로 말미암아 그렇게 변한 것이다. 훼멸하는 자들(갈대아 병사들)이 광야 모든 자산위에 이르렀고. 그들은 모든 요새와 성채를 점령하였다(12절). 칼이 땅 이끝에서 저끝까지 삼키니. 침략군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그리하여 '무릇 혈육있는 자가 평안치 못하였다.'
3) 이모든 참상이 어디로부터 오는지보라. 여호와의 칼이 삼키니(12절). 하나님의 백성이 그와 가까이 있는동안, 그들의 칼은 기드온의 칼이 증거하는듯이 여호와의 칼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을때에는 그들을 훼파하는 자들의 칼이 곧 여호와의 칼이 된다. 갈대아인의 칼이 이를 증거한다. 이는 여호와의 분노를 인함이니라(13절). 하나님을 그들의 대적으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그들의 죄였다(11절). 그황무지가 나를 향하여 슬퍼하는도다. 국토는 황폐한채로 방치되었으며 황폐한 땅은 말그대로 호소를 무수히 억수로 쏟아놓지만 거민들은 너무도 무감각하고 미련하여 그것을 '개의하는 자가 없었다.'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땅도 그들을 수치로 여기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애곡하지도 않았다.
4) '무리가 밀을 심어도', 즉 자신들의 안전을 위하여 수고하여도 그모든 것이 허사라. 이는 그들의 가시를 거두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그들에게 골치거리로 드러날 것이다. 그소산으로 인하여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전쟁을 위해 자신들이 대비한 것으로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들은 저희가 군자금을 충분히 확보했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는 그사실을 수치스러워 하게될 것이다. 저희의 은과 금은 여호와의 진노의 날에 아무런 유익도 주지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Ⅲ. 회복을 약속하심 12:14-17
여기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해를 가하였던 모든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포문이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과 쟁변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악한 이웃'이었다(14절). 즉 그들은 그의 교회에 대한 악한 이웃들이었으며, 그들이 교회에 대하여 행한 행위를 하나님은 자신에 대한 적대행위로 보셨다. 이 악한 이웃들은 곧 모압인과 암몬인과 아람인과 에돔인과 애굽인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변절하는 것을 돕고 그들을 하나님께서 끌어낸 악한 이웃들이었으며, 이제는 이스라엘을 황폐화하는 일을 도우며 갈대아인과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그들의 죄과는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쳤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에게 주어진 것을 외람되이 자신의 소유로 돌렸다. '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의 산업을 다치지 말라' 말씀하셨다.
(2)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다루려고 하시는가. 그는 그들이 자기 백성에게 행하였던 권세를 부숴뜨리실 것이다. 내가…유다 집은 그들중에서 뽑아내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만일 도망치다가 잡힐시에는 죄수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로와 죄수생활에서 '뽑아내실' 것이다. 즉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추려내신 것과 같이 자신의 신을 보내어 그들을 나오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간역자로하여금 그들을 놓아보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내리셨던 것과 똑같은 재난을 그들에게 내리실 터이었다. 내가 그들을 그땅에서 뽑아버리겠고. 심판은 하나님의 전에서 시작되었으나 거기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3) 하나님은 스스로 그와 연합하여 그의 백성이 되고자하는 자들을 위하여 어떤 자비를 준비하고 계시는가(15,16절). 그들은 그들과 함께 우상을 섬기도록 하나님의 백성을 끌어냈었다. 이제 만일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을 이끌어 살아계신 참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다. 이일은 포로에서 백성들이 귀환한후, 예전에 이스라엘의 악한 이웃이었던 많은 족속들이 유대교로 전향하였을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개종하였을때 완전한 성취를 보게되었다. "그들의 죄에 대한 정당한 심판으로써 그들을 뽑아낸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기리라."
1)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그의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산다면 그들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길만이 선한 길이다. 거룩한 길, 천국을 바라보는 길, 사랑과 화평의 길, 기도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는 길, 그리고 의식을 부지런히 참석하는 길 등 이와같은 길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것 같이', 여호와께서는 살아계시다(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자신을 그의 판단에 맡기는 것)고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극악한 자가 개심하지 않으리라고 단념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을 비뚜러지게 만들고 타락시키는 도구가 되었던 자들조차도 회개할수 있으며 그렇게 될때 자비를 얻게될 것이다. 미혹되었던 자의 개심은 오히려 미혹하였던 자의 개심을 유발하는 복된 계기가 될수 있다. 이와같이 시궁창으로 함께 굴러 떨어진 자들은 때때로 함께 구해진다.
2)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로 돌아오실 것이다(15절). 내가…각사람을 그산업으로 각사람을 그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특혜를 누릴 자격을 갖게될 것이다. 그들이 내 백성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16절). 그들은 여호와의 전에서 이제 이름과 자리를 얻게될 것이며 여호와의 백성중에 세움을 입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는 원래 이방인들을 위한 뜰이 있었다.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즉 만일 누군가가 계속하여 대항하려고 한다면 내가 반드시 그나라, 그가족, 그사람을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핵심
12:1-6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받은 예레미야가 고통을 견딜수 없어 하나님께 항변하는 대목이다.
렘 12:1,2절의 바른이해
마치 하나님이 악인을 의도적으로 형통케하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본문은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세상에서 악인이 번성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셨지만, 악인은 자신의 죄악가운데서 멸망의 심판을 받을수밖에 없다(시 1:4-6). 악인의 형통으로인해 구약의 신자들이 고민한 것은 그들이 주로 이세상에서의 보상과 처벌에 국한시켜 생각했기 때문이다(욥 12:6).

# 묵상
예레미야의 질문의 핵심 ( 12:1, 2 )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고 패역한 자가 모두 안락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왜 악인이 잘되고 의인은 고난당하느냐 하는 것으로서, 이는 욥기의 중심 내용이기도 합니다(욥21:7). 이세상은 악이 승리하고 선이 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이 승리하게 됩니다.
‘무늬있는 매’가 가리키는 것 ( 12:7-12 )
본문은 불평을 토로하는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직접적인 응답으로 유대인들의 죄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여기서 ‘무늬있는 매’란 유일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혼합주의적 종교사상을 가진 유다인들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유다인은 자기들보다 강한 이방나라에 아부하기위해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했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우상숭배의 행위로인해 그들의 종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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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언약을 상기시킴 11:1-10
선지자는 의로운 주권자의 명령을 고의로 불순종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기소장을 제기한다.
(1) 하나님께서 '이언약의 말을 유다인에게 고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명하셨다(1,2절). 원문에서는 이'말'이 복수형으로 쓰여졌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은 그의 모든 종들, 곧 선지자들에게 일찍이 주셨던 말씀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들중의 어느누구도 모세의 율법외에 다른 것은 외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율법으로 이끌어야만 했다. "이언약의 말을 들으라. 언약에 의거하여 판단을 받으라." 예레미야는 이제 이것을 유다의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거리에서 선포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들을수 있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에 관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야 그들은 스스로를 언약과 비교함으로써 현재 자기들이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이내 깨닫게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국가의 토대가 되고 또한 그것에 의거하여 그들이 특혜를 누리게된 계약서를 펴보이신다. 그들은 계약의 취지를 망각하였으며 마치 자기들이 하고싶은대로 행하여도 하나님께서 약속해주신 것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듯이 행동했다. 또는 계속하여 의식을 준행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듯이 행동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기에서 그가 요구하신 것은 '순종'이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라'고 4절에서, 그리고 다시 7절에서 말씀하신다. "나 하나님을 너희 주인으로 인정하라. 나의 명령, 곧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좇아 행하라. 특히 도덕적인 의무를 본분으로 삼고 한낱 의식에 불과한 것들을 의지하지 말라. 언약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 이것이 하나님과 그들사이에 맺은 본래의 계약이었으며 그때 그는 그들을 처음으로 한민족으로 이루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었다.(4,7절). 그는 애굽인들을 섬기는 일에서 그들을 구원해내셨다. 완전히 종노릇하던 그들을 구해내셔서 그들로 자신을 섬기게 하고자 하였는데 그것은 완전한 자유를 뜻했다(눅1:74,75). 이것은 그들과 하나님사이의 관계를 맺는 조건이 되었다.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나는 너희를 나의 소유로 인정하겠으며 너희는 나를 너희 하나님으로 부를 것이라." 이러한 조건위에서 가나안 땅이 저희 소유로 주어졌었다. 내가 또 너희 열조에게 한 맹세 곧 그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한 언약을 이루리라(5절). 단 한사람이라고해도 '이언약의 말을 좇지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인데 하물며 민족 전체가 반역하였음이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언약을 잊지않도록 시시때때로 당신의 종인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각성시키셨다. 이언약은 동의를 받았다(5절).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이것은 언약에 대한 자신의 동의를 표현하는 동시에 혜택을 얻고자하는 자신의 갈망을 표현하는 선지자의 말이다. 또는 그언약으로인한 혜택을 자기 백성이 받게되기를 바라는 선지자의 선한 뜻, 혹은 언약에 대한 그의 백성의 동의라고 볼수 있을 것이다. 즉 "그러므로 내가 백성의 이름으로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여호와여 하였노라."
(3)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언약을 위반함에 대해 질책하신다. 그들은 계약이 취소될정도로 심하게 위반하였던 것이다(8절). 내 목소리를 청종하라. "내가 명한대로 행하면 만사가 형통하리라."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각각 그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나 인간적인 관계에 있어서나 옳건 그르건,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관계없이 자신들을 이끄는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대로' 행하였다(참조.7:24). 그러니 그들이 언약의 저주아래로 떨어지는 것외에 다른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하나님에 대한 저희의 변절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그것이 일반적인 일이었으며 모두의 동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었다(9,10절). 예레미야 자신도 공공연하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지만, 여호와께서는 문제의 양상이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악하다고 말씀하신다.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중에 반역이 있도다. 곧 하나님과 신앙을 거역하려는 연합세력이 있었으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를 전복하고 거짓 신들을 세우려는 위험한 음모가 발견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뒤엎고자 계획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말고 주의하지도 말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려 하였다. 인간의 이성이 그들의 신이 되고 내적인 명철함이 그들의 신이 되었으며 오류가 없는 재판관이나 성인들, 천사들이 그들의 신이 되었다. 또한 이나라 저나라의 신이 그들의 것이 되었다. 이와같이 갖가지 구실과 핑계아래 그들은 같은 동맹을 맺고있었다. 그동맹은 여호와와 그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동맹이었다. '예루살렘 거민'들이 '유다인'들과 함께 반역하였다. 이세대 사람들은 앞세대 사람들과 공모하여 대대로 신앙을 거역하는 전쟁을 일으킨 것으로 보여진다. 유다와 이스라엘, 곧 두지파와 열지파의 왕국은 때때로 서로 적의를 품은 견원지간의 사이였지만 하나님께서 '그열조와 맺은 언약을 파하는' 일에 있어서는 피차 공모자였다. 이스라엘의 족속들이 먼저 반역을 시작하였지만 유다 족속들도 곧 뒤따라 반역에 공모하였다.

Ⅱ. 불순종의 대가 11:11-17
본문에는 하나님의 큰진노가 담겨있다. 그러므로…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11절). 곧 죄라는 해약에 대한 징벌로서의 재앙이다.
(1) 그들은 스스로 어떻게 할수 없다. '그들이 피할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즉 어떠한 회피책으로도 빠져나올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재앙이다.
(2) 그들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돕지않으실 것이다.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인즉. 하나님께서는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는' 자는 그기도조차 가증히 여김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다(8절).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그들이 행했던 것이다.
(3) 저희의 우상들이 저희를 도울수 없을 것이다(12절). 그 분향하는 신들에게 가서 부르짖을지라도 그신들이…절대로 그들을 구원치 못하리라. 필요할때 친구가 되시는 분, '환난중에 만날 큰도움'이 되어주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시다. 만일 우상들이 저희 숭배자들에게 어떤 실제적인 자비를 베풀어줄수 있었다면, 그우상들은 자기를 저희 '성읍의 수효와 같게' 만들어 세운 이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행하였을 것이다. 우상의 수효는 성읍의 수효이상이었다. 그수효는 예루살렘에서만도 저희 '거리의 수효'와 같았다.
(4) 예레미야의 기도도 그들을 도울수 없을 것이다(14절). 하나님께서는 이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어떠한 권면도 선지자들에게 주지않으실 것이다. 선지자들은 백성전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가운데 남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시적인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것이다.
(5) 그들의 신앙고백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못할 것이었다(15절). 한때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 자기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참예하였으며 본문에서 '거룩한 제육'으로 일컬어진 것, 곧 화목제의 고기를 먹었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자 그의 집의 보호아래 있는 자들에게 어떠한 해가 미칠수 있겠는가. 이 사실로인해 그들은 심지어 악을 행하면서도 기뻐하였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확신이 그들을 기만하였으며 그들은 특혜를 스스로 차버린 셈이 된것이다. 그들은 '많이 행음하였고' 많은 우상들을 섬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더이상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제단도 더이상 그들에게 만족을 주지않을 것이다.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성전이 훼파되며 너희 제사도 끝날 것이라. 그러면 너희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거룩한 제육이 어디에 있겠는가?" 거룩한 제육이 우리에게서 떠났을때는 거룩한 마음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것이다. 은혜의 내적인 원리들이 은혜의 외적인 수단들의 결핍을 메워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거룩한 제육의 떠나감이 거룩한 영, 곧 성령의 떠나감을 수반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화이다.
(6)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들에게 주셨던 은총도 그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수 없다(16,17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일컬어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셨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만드셨으며 그들을 심으셨고(17절) 그들로하여금 한백성을 이루게 하셨다. 그들을, 결실을 많이 맺는 융성하는 백성으로 만드시고자 그들이 가질수 있을만한 온갖 이점을 베푸셨다. 그리하여 저희의 법은 그토록 선했으며 저희의 땅은 그토록 기름졌었다. 그는 그들을 푸른 감람나무, 아름다운 감람나무로 심으셨다. 하지만 그들은 '돌감람나무'로 변질되었다(롬 11:17).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모두가 악을 행하고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켰다.' 즉 약속된 메시야이외에 다른 중보자들을 세움으로써 그의 진노를 야기시켰다. 그러자 이 푸른 감람나무를 심으시고 거기에서 좋은 열매를 기대하셨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열매맺지 못하는 돌감람나무에 불과함을 발견하시고는 그것을 선채로 태우기위해 '그위에 불을 피우셨다.' 왜냐하면 열매없는 나무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히고'(유 1:12) 찍혀 불에 던지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지', 곧 높이 치솟은 가지(본래의 의미가 그렇다)는 꺾여졌다. 즉, 방백들과 제사장들은 멸절당하였다. 이렇게하여 하나님을 거슬려 행하는 악은 실제로는 저희 자신의 영혼을 거슬려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Ⅲ. 예레미야를 해치려 함 11:18-23
선지자 예레미야는 기록중에 자기 자신에 관하여 상당히 언급하고 있다. 이는 그가 살았던 시대가 대단한 혼란기이었던 탓으로 보여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고향 아나돗, 곧 제사장의 성읍사람들로 말미암아 비롯된 그의 슬픔의 발단을 보게된다.
(1) 그들은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음모를 꾸몄다(19절). 즉 '그를 해하려고 꾀하였으며' 머리를 맞대고 그를 죽일방도를 궁리하였다. 그들은 예레미야에 대해 이렇게 모의하였다. 우리가 그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이것은 "그를 뿌리에서 가지끝까지 철저히 말살시키자"는 의미의 비유적인 표현이다. 아니면 이러한 뜻일수도 있다. "선지자로서의 그와 그예언을 다 말살하자. 선지자를 죽이고 그예언을 짓밟자. 그의 명성을 무너뜨리며 그의 예언의 신빙성을 훼손시키자."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은 귀중한 생명을 사냥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선지자를 죽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대부분의 원수들보다도 더오래 살았다. 그들은 그에 대한 기억을 멸하려고 했지만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으며 또한 시간이 지속되는한 기억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이음모를 그에게 알려주셨다. 그들이 너무도 교묘하게 음모를 숨겼으므로 예레미야 자신은 그사실을 전혀 알지못했었다. 그는 '끌려서 잡히러' 가면서도 평상시처럼 들판으로 가는줄로 생각하는 '순한 어린양과 같이' 해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아나돗으로 갔다. 예레미야의 생명은 풍전등화였다. 그러나 그때 꿈 혹은 환상으로, 아니면 그마음의 영감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에게 알게하셨다.' 그리하여 일찍이 엘리사의 경고를 통하여 구원받은 이스라엘의 왕처럼(왕하 6:10) 그가 스스로 구원을 받게하셨다. 이리하여 그는 그음모를 알게되었다.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들을 어떻게 돌보시는지 보라. 그는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므로 그들이 맡은바 증언을 마치기까지는 원수들의 어떠한 분노도 그들을 제거시킬수 없게 하신다.
(3) 이일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호소한다(20절). 사람들이 우리에게 부당하게 행할때에도 우리에게는 호소할 하나님이 계시다. 그는 피해 입은 무죄한 자를 위하여 변호하시며 가해자와 겨루시는 분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악한 자에게는 두려움이지만 경건한 자에게는 위안이 된다. 그는 예레미야의 마음에 있는 성실함을 아셨으며 또한 저희가 아무리 교묘하게 감추었을지라도 저희 마음속에 있는 악함을 아셨다. 이제 예레미야는 그들에 대한 심판을 기도한다. "나로하여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보게하소서. 주께서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나와 그들간에 공의를 행하소서." 혹자는 이기도에 인간의 결점을 보여주는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적어도 그리스도께서는 교훈이나 모범을 통해서 다른 교훈, 즉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교훈을 주셨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그의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뢰한다.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이일에 있어서 어떠한 다른 것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사옵니다"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때 우리에게는 그일을 위임할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께 판결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의 확정적인 판결을 받아들여 복종하겠다는 결의로써 그에게 위임해야할 것이다.
(4) 그를 핍박하던 사람, 곧 '아나돗 사람들'에게 심판이 내려진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있는 재판소에 청원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있는 제사장들은 아나돗의 제사장들 편에 설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사건을 맡으신다. 우리는 주의 판단이 참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선지자의 생명을 뺏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에게 죽음의 고통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금하였으나 그러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그를 잠잠케 만들거나, 아니면 죽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도전하여 성나게 했던 점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어진 그의 예언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항상 요구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예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들에게 있어서 입이 봉해지는 것은 숨을 쉬지 못하도록 호흡을 막는 것만큼이나 나쁘다. '선지자가 예루살렘밖에서는 죽는법이 없다'고 말해지곤 했었다. 이는 거기에 고위성직자 회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에 맞선 아나돗 사람들은 직접 그를 죽이고자 했을정도로 가혹했다. 이 죄로인하여 그들에게 판결이 내려졌다(22,23절).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들을 벌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그들이 청년 제사장들이라 할지라도 칼이 그들을 삼킬 것이며 기근이 저희 자녀들을 멸절시킬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생명을 뺏고자 모색하였으며 그를 뿌리와 가지까지 멸하고, '그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렇기때문에 그대가로 그들중에 '남는 자가 없게'될 것이다.

# 핵심
11:1-17
유다의 범죄행위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파기라는 점에서 불순종에 따른 저주(신 28:15-68)를 야기시킬수밖에 없었다. 한편 본문은 B.C. 622년경 율법책이 발견된 이후에 선포되었다. 그율법책은 요시야의 종교개혁을 촉발시켰다.
감람나무(11:16)
올리브 기름을 내는 귀중한 과목이다(출 23:11; 레 24:2). 감람나무는 10년이상이 지나서 결실을 시작하며, 열매는 소금에 절여 먹었고, 목재는 내구성이 좋아서 여러가지 공작에 사용되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기도 한다(시 52:8).

# 묵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사이의 언약 ( 11:1-5 )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으로, 이언약을 지키면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래서 열조에게 맹세한 땅을 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은 성실히 이행되었으나 이스라엘은 그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당시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 ( 11:4, 5 )
젖과 꿀이 흐르는땅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최초의 이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으로, 후에 그아들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후손들에게 계속해서 하신 언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출애굽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언약에 대한 반역 ( 11:9-13 )
본문에서 쓰여진 반역이라는 말은 원래, 숨겨진 음모에 의해 야기된 폭동을 가리킵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를 거스르는 모든 패역한 행위들에 대한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요시야의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돌아왔었던 백성들이 시간이 흘러 다시 우상숭배에 빠진 것을 하나님께 대한 반역행위로 간주한 것입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거부였으며 자신들에게 부여된 언약의무에 대한 적극적인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지 않는 것은 종교적 배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반역이라고도 할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제육 ( 11:15 )
거룩한 제육이란 성전제단에서 규칙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의 고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거룩한 제육이 떠났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백성들의 제사와 그제물들을 용납하지 않으셨음을 의미합니다. 즉 여호와를 향한 순종이 없는 제사는 제아무리 풍성할지라도 의미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이스라엘의 제사와 제물이 더이상 그들의 허물과 죄를 대속할수 없는 상황이 된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의 제사가 그들로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에 이르게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좋은 행실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 ( 11:16 )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비유적 표현으로서, 시52:8; 호14:6절 등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좋은 열매를 맺게하기 위해 그들을 싱싱한 감람나무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악한 열매를 맺었기때문에, 그나무는 꺾여지고 부러져 불쏘시개로 사용될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열매맺지 못한 모든 나무는 불살라지는 것처럼, 성령의 열매를 맺지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불의 심판을 받게됩니다.
나무와 과실 ( 11:19 )
본문에 묘사된 나무는 선지자이고 과실은 교훈과 예언입니다. 즉 나무는 예레미야이며 그과실은 그가 말하는 참예언, 즉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고 꾀하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회개를 권면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반응이 얼마나 적대적이었는지 잘 알수 있습니다.
대적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 11:21-23 )
당신의 종을 해하려는 악한 음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게 나타납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에 대해 악한 음모를 꾀한 아나돗 사람들에게 재앙의 경고를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칼에 죽고 자녀들은 기근에 죽으며 남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아나돗에 대한 심판예언은 주전 586년 예루살렘 함락당시에 실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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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포로된 자들에 대한 경고 10:1-16
선지자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이교도의 우상숭배에 대항하여 백성들을 무장시키고 있다. 이는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주고 바로잡음으로써 채찍을 맞지않게 하려는 것이다. 이말씀은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쓰여졌다.
(1) 이방인의 길을 좇지말라는 엄중한 권면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이말씀을 들어야했다. "열방의 길을 배우지말라. 그것을 인정하지도 말고 그것에 대해 심상히 여기지도 말라. 그들의 관습중 어떠한 것도 너희가운데 침투치 못하게할 것이며 그것을 너희의 신앙과 혼합시키지도 말라." 하늘의 주인들 곧 태양, 달, 별들을 섬기고 그것들에 신적인 영예를 돌리며 그것들에게서 신적인 은혜를 기대하는 것이 이방인들의 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고' 별들을 신으로 경외하며 천체의 징후로인해 놀라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온하늘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한다면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궤도를 따라가는 별들은 하나님과 화평한 어떠한 것과도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2) 이권면을 따라야하는 몇가지 합당한 이유가 제시된다.
1) 이방인의 길은 불합리하며 올바른 이성에 의해서도 정죄된다(3절). 이방인들의 법령과 규례에 자부심을 갖고있으며, 모든 이웃나라들보다 뛰어나다고 믿고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지자는 그들은 물론, 우상을 섬기고 그우상들로부터 도움을 기대하는 모든 다른 민족들은 상식을 결여한 자들임을 보여준다. 어떠한 우상이 섬겨지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삼림에서 벤나무'였으며 '공장의 손'에 의하여 잘라지고 깎여서 인형으로 새겨진(사 44:13이하) 것이었다. 그것은 결국 나무토막에 지나지않으며 차라리 문설주로 쓰여지기에나 알맞았다. 따라서 단순한 나무에 불과함을 감추기위하여 그것들은 은과 금으로 꾸며졌다. 쓰러지거나 도둑맞지않도록 '못과 장도리'로 그세워진 자리에 '든든히하여 요동치않게' 고정되었다(4절). 형상은 꼿꼿하게 세워졌다. 장인이 제 할일을 다한 덕분이다. 그것이 갈린 기둥같아서(5절). 그것은 당당하고 위엄있게 보이며 마치 금방 말이라도 하려는듯한 자세로 서있으나 그것은 '말도 못하며' 그들을 구원하기위하여 한발자국도 내디딜수 없다. 만일 그것이 옮겨질 필요가 있다면 사람이 메고가야만 한다.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또한 그것을 노엽게할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따라서 그것의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금이나 은으로 된 우상들도 나무로 만들어진 신들과 마찬가지로 섬길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8절).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가르친다. 그것은 허망한 것들의 가르침이요, 나무일뿐이다. 거기에는 온갖 기술과 많은 수고가 투입되었다. 이것을 만들기위해 고용되는 자들은 평범한 기술자가 아니다(3절). 그들은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것은 '공교한 사람의 만든 것'이다. 그것이 '장색의 손'을 거치고나면 또 조각사가 정성을 기울여 그것들을 조각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청색 자색감으로 그옷을 삼아' 왕과 같이 존중되어졌다(9절). 청색과 자색은 제왕의 의복에 사용된 빛깔이었다. 인간이 할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고해도, 그것이 만들어진 우상인이상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14절). '우상은 거짓 것이요,' 가장되어 꾸며지고 있는 그상태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람에게 호흡과 생명과 감각을 주는 신들로 섬겨지고 있지만 그것들 자체가 생명이 없고 감각이 없는 존재이다. 그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리고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어떤 신령 혹은 신성을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그것들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혼'조차 가지지 못했으며,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이다'(15절). 그것들은 미혹된 환상의 소산들이며 이러한 우상들을 섬기는 숭배자들은 '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이다(8절). 그들은 창조의 역사에 있어서의 창조주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성을 깨닫지 않을수 없으면서도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그생각이 허망해진' 사람들이다(롬 1:21,28).
2)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유일하게 살아계신 참하나님이시다. 그와 겨루어 어떤 다른 신을 세운다는 것은 그에게 행할수 있는 가장 큰모욕이다. 선지자는 이방인의 우상에 대하여 극도로 경멸하면서 이야기하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지극히 깊고 두려운 경외심으로 말머리를 돌린다(6,7절). 세상의 창조주요 사람의 영혼을 불어넣으신 분의 영광에 비하면 유익한 기술을 발명해내거나 융성하는 왕국을 세우는(이방인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인간을 신격화시키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인간의 영광은 얼마나 초라한가. '열방의 왕이신' 그분의 영광에 비하면 유대하다고 하는 이세상의 군주나 권력가의 영광이 무엇이겠는가? 선지자는 이와같이 고백한다(6절). 여호와여…주는 크시니. "주는 무한하시고 광대하시며 '주의 이름이 그권능으로인하여 크시니이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크신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섬겨야 한다. 뿐만아니라 지상의 모든 족속들도 그를 '열방의 왕'으로 경배해야할 의무가 있다. 그의 진실성은 우상의 헛됨만큼이나 자명하다(10절). 우상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이지만 진리의 하나님은 진리가운데 계시다. 그는 '사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생명 그자체이시며 자기안에 생명을 지니신 분이고,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다. 이방인들의 신들은 생명이 없는 물체에 불과하나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오 불멸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영원한 왕이시오', 영원의 왕이시다. 비록 온열방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뭉친다하여도 그를 저항할수 없음은 물론이요 '그분노하심을 능히 당치못할' 것이다. 그는 온자연의 하나님이시오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다. 자연이 지닌 모든 힘들은 그의 명령을 따른다(12,13절). 가만히 둘러보면 온세상이 제일 원인되시는 그에게 기원을 두고있음을 알게된다. 심지어 헬라인들사이에도 "딴 신으로 자처하는 자는 응당 먼저 딴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만물을 지으셨다. 땅은 그내부에 값진 보화들을 지니고 있으며 그표면에는 보다 귀한 소산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그권능으로 지으셨다.' '땅을 공간에 다신' 것은(욥 26:7) 다름 아닌 바로 그의 무한한 권능이었다. 지상에서 사람이 거주할수 있는 땅은 사용하고 일하기에 놀랄만큼 적합하다. 그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는 '명철로 하늘들을 훌륭히 펴셨으며' 천체의 운행을 아래세상에 유익하게 지시하셨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또한 우리로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이 아니라 그하늘을 만드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위를 바라보면 그의 섭리가 계속되는 창조임을 알게된다(13절).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이물은 지상으로 쏟아진다. 그는 땅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온땅은 비의 축복을 받고 땅끝에서부터 수증기, 곧 구름이 하늘로 오른다. 그리고 대기속에 있는 수분은 나라안의 화폐나 신체내의 혈액처럼 전체의 유익을 위해 끊임없이 순환한다. 어떠한 기상상태이든 우리에게 위대하신 창조주의 지혜와 권능을 입증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 하나님이 바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와 가까이 있어야 마땅하며, 우상을 섬기고자 그를 버려서도 안된다. 야곱의 분깃은 우상들과 같지 아니하기 때문이다(16절). 이스라엘의 반석은 그들의 반석과 같지 아니하며(신 2:31), 그들의 흙두둑과도 같지 아니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으로 만족해하면 그는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고 은혜로이 기뻐하실 것이다. 즉 우리를 '그의 산업의 지파'로 인정하시고 우리와 함께거하시며 우리로 말미암아 섬김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저희의 하나님이 '만물의 조성자'이시라는 사실은 여호와의 모든 백성들에게 이루 말할수 없는 위안이다.
3) 이와같이 이방인의 신들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비교함으로써 선지자는 저들 모든 우상들이 파국의 운명을 알려주며 아울러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사실을 우상숭배자들에게 알려주라고 지시하고 있다(11절).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위에서 이 하늘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와같은 신을 섬기도록 강요받았을때, "그로 세상을 만들게하라. 그러면 나의 하나님 의로 섬기리라"라고 말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자들과 셈하기위해 오실때에 그들로하여금 저희 우상들에게 염증나게 만드실 것이며 기꺼이 그것들을 내던지도록 만드실 것이다. 그것들은 '두더쥐와 박쥐에게 던져질' 것이다(사 2:20).

Ⅱ. 남은 자들에 대한 경고 10:17-25
(1)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임박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을 경고한다(17,18절). 일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뒤 자기 땅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은 매우 안심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요새로 '에워싸인 가운데 앉아' 있다고 생각했다. 즉 저희의 나라가 견고하여 공략될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의 동포를 좇아 떠날 채비를 하여야 했고 가재도구를 꾸려야 했다. 네 꾸러미를 이땅에서 수습하라. "할수 있는한 네 짐을 줄여서 조그만 보퉁이로 꾸려라. 네가 지닌 것을 흩어지지 않게하라."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언도한 판결의 집행자인 갈대아인들이 다시 덮칠 것이기 때문이다(18절). 보라 내가 이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던질 것이라. 그들은 지금까지는 한번에 조금씩 떨어져 나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투석기로 튕겨진 돌처럼 내던져질 것이며 단시간내에 먼곳으로 거칠게 내쫓겨질 것이었다. 그는 이와같이 덧붙이신다. 그들을 괴롭게하여 깨닫게하리라.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계속하여 곤혹스러운 일과 괴로움을 당할 것이며 결국에는 그들이 믿으려고 하지않았던 일을 깨닫게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가 곧 자신들의 파멸이 되리라고 들었었다. 이제 그것이 사실임을 깨닫게될 것이었다.
(2) 선지자는 백성들가운데서 그들의 재난을 슬프게 애곡하고 있다(19절). 슬프다 내 상처여. 혹자는 이것을 선지자 자신의 애곡으로 해석한다. 물론 그자신을 위한 애곡이 아닌 자기 조국의 재난과 파멸로인한 애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몸으로 간주되어 한사람처럼 말하는 백성들의 말로 해석되어질수가 있다. 선지자는 그들이 의당해야할 말들을 그들의 입에 둔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려고하든 말하지 않으려고하든, 그들에게는 그렇게 말해야할 이유가 있었다. "슬프다 내 상처여, 나는 두려움으로인해서가 아니라 아픔으로인해서 슬퍼하노라." 그것은 경상이 아니라 '중상'이다. 그것을 불평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는 참으로 나의 고난이라 내가(할수 있은한) 참아야 하리로다. 이것은 순리에 따른 인내가 아니라 어쩔수 없는 부득이한 인내이다. "이는 재앙이다. 그리고 어쩔수 없기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들이 결핍되었음을 드러낸다. 하나님께 대한 선한 생각이라함은 우리가 고난에 처해있을때조차도 항상 지녀야만 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는 그가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실수 있으며 행하실 것이라"고 말할뿐만 아니라 "기쁘신대로 행하옵소서"라고 내맡길수 있는 생각을 의미한다. 나라는 황폐해졌다(20절). 내 장막이 훼파되고. 견고한 성읍처럼 보였던 예루살렘은 이제 연약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정부는 붕괴되고 나라는 조각조각 부숴졌다. 교회는 훼파되었으며 그버팀대가 되던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교회와 국가, 도시와 지방에 걸쳐 모두 파괴되었으며 이렇게 파괴된 것을 수선할 사람도 없었다.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어떤 자녀는 도망가고 어떤 자녀는 살육당했으며 또다른 자녀는 포로로 끌려갔도다." 내 장막을 세울 자가 다시 없도다. "그일을 해줄 자녀들이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도다." 통치자들은 폐허화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어떠한 적절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는다(21절). 목자들은 우준하여. 장막, 곧 목자들의 장막이 훼파되었을때 그것을 돌보는 일은 목자들의 할일이었으나 이들은 우둔한 목자들이었다. 그들의 왕과 방백들은 공중의 안위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제사장들, 곧 하나님의 장막의 목자들은 신앙을 훼파하는 일에는 많이 이바지했으면서도 그재건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심판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형통치 못하여. 즉 백성의 안전을 위한 저희의 어떠한 시도도 성공을 거두지못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든 길에서 기도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자들은 형통하기를 기대할수 없다. 적들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은 매우 두려운 것이었다(22절). 크게 떠드는 풍성이오니. 처음에 귓속말로 전해지던 소문은 널리퍼졌으나 확인된 것은 아니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소문이 사실로 판명되었다. 그풍성은 '북방에서부터' 일어나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하리라'고 위협한다. 그들은 갈대아 군대의 탐심과 광포의 희생물이 될것을 각오해야만 하였다.
(3)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이 아무런 효과도 없음을 깨닫고 말머리를 돌려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1) 선지자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절대성과 그주권을 인정한다(23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재량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시아래 사는 것이다. 세상일은 종종 우리의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곤 한다. 혹자는 이말씀을 갈대아 군대의 길도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이상은 결코 행할수 없다는 말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은 이교만한 물결에게 한계를 정하시고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라"고 이르실수 있다는 것이다.
2)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노가 면제되어 이스라엘위에 떨어지지 않게되기를 탄원하고 있다(24절). 그는 자기만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하여 말하고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둔함을 몰아낼정도로만 하시되 그징계도 여호와의 사랑으로부터 나오게 하시고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하시며 우리로 없어지게 하지 마옵소서. 우리로 본향이신 여호와께 돌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죄의 대가대로 징계하지 마시고 여호와의 은혜로우신 계획대로 징계하옵소서." 우리는 스스로가 징계를 필요로하며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한,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만큼 경책하신다는 사실을 알고있는한, 결코 징계받지 않게 해달라고 믿음으로 기도할수 없다.
3) 그는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기를 탄원하고 있다(25절). 주를 알지못하는 열방…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이 기도는 악의나 복수의 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호소하는 것이다. 마치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호와여, 우리는 주의 진노를 야기시키는 백성이나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다른 민족들도 있지 않사오니이까? 우리는 주의 자녀인고로 아버지의 징계를 기대하나이다. 그러나 저들은 주의 대적이오니 주의 진노는 우리에게가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야하지 않겠나이까?" 열방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이방인들이며 또한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고 있다. 그들은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며 저희가운데에는 신앙이라고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않으며,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굶주린 자들과 같은 탐욕으로 '야곱을 씹었다.' 야곱을 씹어삼켜 말하고 그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땅, 혹은 그들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인 성전을 황폐케하였다.

# 핵심
10:1-16
우상숭배의 무익함과 참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인격적이신 하나님(10:10-16)
생명이 없는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되시며(행 14:15; 살전 1:9), 도덕적이고, 지적인 존재이시다(시 94:11). 하나님은 오기도 가기도 하시며, 말씀하시고 들으시며, 벌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생을 깊이 이해하시는 인격적인 존재시다(요 14:9). 이러한 하나님과 더불어 인격적 교제를 나누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다.

# 묵상
열방의 규례 ( 10:1-10 )
본문은 여호와는 참하나님이요 열방의 규례는 헛것임을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워말고 오직 참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방의 길’이라고도 하는 ‘열방의 규례’란, 열방이 하나님의 피조의 세계인 하늘을 두려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말은 우상숭배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만드신 한낱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늘과 별과 달을 신으로 알고 섬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역시 그들을 본받아 이러한 우상을 섬겼습니다. 열방의 규례는 우상 섬기는 길이요, 거짓을 숭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규례는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요, 진리와 참생명의 길이기에 우리는 오직 이길을 좇아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세상창조 ( 10:12, 13 )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권능, 지혜, 명철의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역사하는 것이므로 그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이라 그속에 생기가 없으며, 그것들은 단 한마디도 하지못하는 거짓 신입니다. 이사실을 알지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지않고 아무능력도 없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선지자가 참아야할 고통 ( 10:19 )
본문에서 예레미야의 고통스러운 역할을 볼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그로인한 파멸을 예언해야 했으며, 동시에 자신도 그운명에 함께할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탄식은 유다 백성의 탄식과 일치되는 것으로, 그의 고통은 유다 민족의 상처가 이제 치유될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라는데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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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백성의 죄로인한 슬픔 9:1-11
선지자는 멸망을 예고하고 죄를 지적하라는 임무를 위임받았다. 이 두가지에 대해 그가 말한바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이기에 누구의 마음에나 와닿았을 것이다.
(1) 그는 자기 백성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생각하며 슬픔에 잠긴다.
1) 그는 살육과 그로인해 잃어버린 생명을 애곡한다(1절).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근원이 될꼬. "어찌하면 그들을 위하여 울어야할 새로운 일이 생길때마다 계속하여 눈물의 홍수를 흘려보낼수 있을까?" 히브리어에서는 동일한 한단어가 동시에 눈과 샘(근원)이라는 말을 의미한다. 이는 마치 이슬픔의 땅에서는 우리의 눈이 보기보다는 울기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죄의 근원임을 아는한, 우리의 눈은 눈물의 근원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예레미야의 슬픔은 공적인 이유때문이다. 그는 전쟁의 칼에 의해서 쓰러진 무수한 동포들, '살륙당했다는 소식을 들을때, 우리의 마음에 마땅히 와닿는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민족이든지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며, 우리에게 생명이 귀중하듯이 그들에게 있어서도 그렇게 귀중한 많은 생명들이 잃어버려진바 되었기 때문이다.
2) 그는 나라가 황폐해짐을 애곡한다. "크고 작은 성읍들을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산들을 위하여 곡하며 (유다에 가득한 비옥한 구릉지들을 위하여 곡하며)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리라." 그곳은 양떼들과 곡식들로 뒤덮여있었으나 이제는 갈대아 군대에 의해서 불에 탔기 때문이다. '가축의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기'때문에 모든 것이 음울하게 보인다. 나라를 크게 황폐화시키는 전쟁을 모든 여린 심령들로하여금 애통해하지 않을수 없게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 상연되고 있는 무대를 망치는 그러한 비극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외로움에 빠진다. 모든 이웃들이 견고한 성읍으로 피하고 있는데(참조. 4:5,6) 그는 자기 백성의 죄를 혐오하여 어느 광야로 은둔할 궁리를 하고있다(2절). 어찌하면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의 유할 곳을 얻을꼬 그렇게되면 내 백성을 떠나가리니.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 길손을 위하여 지어진것 같은 쉴곳을 원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이 악하다고해서 우리의 때가 다하기전에 세상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 그는 많은 무리들에게 선을 행할수는 없다고해도 몇몇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저희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그들을 보는 것은 그로하여금 사는 것을 곤비케 만들었다. 하나님의 전뜰에 서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광야에 있기를 원하고 있다.
1) 예레미야는 그들이 고난에 처해있기때문에 그들을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악하기때문에 떠나고 싶어한 것이다. 그들은 부정하였다. 그들은 다 행음하는 자요. 즉 그들은 보편적으로 다 행음하였다(8절). 그들은 또한 거짓되었다. 하나님께 충실하지 못했던 자들은 저희 상호간에도 신실하지 아니했다. 교회로 가보라. 법정으로, 거래소를 가보라. 그들은 '패역한 자의 무리'이므로 악의에 차서는 계획적으로 속일 것이다. '그들은 활을 당김같이 그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기'때문이다(3절). 활이 시위에 대해 굽는 것처럼 그들의 혀는 거짓말을 하기위해 자연스럽게 굽는다. 그들이 이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저희의 그토록 능한 기술과 굳은 결의를 진실된 일에 사용하려고 하기만한다면 좋은 봉사를 할수 있을 터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하려고 하지않을 것이다. 진실에 충실하려는 자들은 용감해야만 하며 그에 맞선다고해서 기세가 꺾여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느날엔가는 진실에 대항했던 우리의 적의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실을 옹호하지 못했던 우리의 비겁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들은 자신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다. 형제마다 온전히 속이며(원래의 의미는 밀어낸다는 뜻이다-역주). 야곱은 일찍이 속임수로 형을 밀어내고 대신 들어앉음으로써 그의 이름을 얻었다. 여기에서 사용된 것은 바로 그단어이다. 무리가운데 가보라. 저희가운데서 신실함이나 보편적인 정직함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감사를 나타내거나 성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니라. 그들은 이웃에게 아무리 거짓된 험구를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비방이 가는 곳에 그들도 따라갈 것이다. 그들은 비방하며 다닐 것이다. 그들은 그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수고하거늘. 그들은 죄악을 행하기에 피곤하였지만 죄 그자체에 피곤해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욱더 악해졌다(3절). 그들이…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곧 악의 한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간다. 아무도 한번에 악의 정상에 이르지는 못한다. 그들은 얼버무려 속여 넘김으로 시작하여 마침내는 노골적인 거짓말에까지 이르렀다.
2)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결정하신 일이 무엇인지 말한다. 하나님은 저희의 죄를 주목하셨다. 그는 저희가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선지자에게 말씀해주실수 있는 분이었기에 이렇게 말씀하신다(6절). "네 처소는 궤휼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경계를 굳게하라." 그들의 죄과는 상세히 설명된다(8절). 저희의 혀는 행악을 도모하고 쓸준비를 하는 굽은 활, 곧 당겨지는 활이었는데(3절) 이제는 시위를 떠난 쏜살이 되었다. 그것은 '죽이는 살'이다. 그들의 혀는 수없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어왔다. 그들은 입으로는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동시에 마음으로는 해를 도모하고 있다. 이는 흡사 요압이 아브넬을 죽이려한 때에 그에게 입맞추었던 것과 같다. 선한 뜻이 담겨있지 않으면 아름다운 말들도 야비한 말이 되며, 악한 뜻을 위장하고 가리고자 하였다면 그말은 가증스런 말이 된다. 죄인들은 여호와에 대한 선한 지식을 가르침 받을수도 있었으나 배우려고 하지를 않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을 기대할수 있겠는가(호 4:1)? 하나님께서 저희의 입법자이심을 알려고 하지않는 자들은 이제 그가 저희의 재판관이심을 알게될 것이다. 어떤 자들은 연단되어질 것이다(7절). 그들이 이와같이 타락하였으므로 '보라, 내가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그리고 고난의 용광로가 그들을 불순물로부터 정제시킬지, 그들이 녹으면 보다 나은 형상으로 새로이 만들어질지 여부를 알아보리라.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기전까지는 그들은 내어버린 은으로 칭하여지지 않을 것이다(참조. 렘 6:29,30). 그는 그들을 회개로 돌이킬수 있음직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먼저 시험해보시기 전에는, 버려 멸하실 마음이 없는 분처럼 말씀하신다. 남은 자들은 멸하여질 것이다(9절). 내가 이일들을 인하여…보수하지 않겠느냐. 사기와 허위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며 장차 셈하실 죄악이다. 선고가 이미 내려졌으며 명령이 떨어졌다(11절). 내가 예루살렘으로 무더기를 만들며. 예루살렘은 '사랑의 굴혈'이 되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적합치 않게될 것이다. 그리고 '유다 성읍들은 황폐케'될 것이다.

Ⅱ. 유다를 위하여 애곡함 9:12-22
본문에서 선지자는 임박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 두가지를 의도하고 있다.
첫째로, 백성들에게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한 파멸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시키는 것이다.
둘째로, 장차 닥쳐올 파멸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려줌으로써 저희의 마음을 움직여 회개와 개혁에 이를수 있도록 각성시키는 것이다.
(1) 선지자는 하나님의 처사가 가혹하게 보이나 실상은 참으로 공정하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설명하기위해 지각있는 사람을 부르고 있다(12절). "여호와의 '입이 말씀을 받아서 광포할' 지혜자, 혹은 선지자가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지혜를 자랑하며 너희가운데 선지자들이 있음을 자랑한다. 그들중 아무라도 이백성과 논쟁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이내 깨달을 것이다." 이지혜자들이 '이땅이 어찌하여 멸망하는가'라고 물어보는가?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확실한 대답을 주시고 있다.
1) 그들에 대한 기소장이 제출되었으며 이에 의하여 그들은 유죄임이 밝혀졌다(13,14절).
① 그들은 의로우신 주권자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고 반역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땅을 버리셨다. 이는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그대로 행치 아니하고.
② 그들은 강탈자의 일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단지 저희의 군주에 대한 복종심을 버리는 것에 그치지않고 그에게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저희 자신의 뜻, 즉 정욕과 세속적인 마음의 뜻을 취하였다. 그들은 '그마음의 강퍅함을 따랐다.' 하나님과 양심이 그반대의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하기 기쁜대로 행하려 하였다. 그들은 '바알들을 좇았다.' 본문의 이단어는 복수형이다. 그들은 여러 바알들을 섬겼다. 그중에는 바알브올이라든가 바알브릿이 있었고 이곳, 저곳의 바알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저희의 열조가 섬기라고 가르쳐준 주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열조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몇번이고 되풀이하여 금하셨었다. 이것이 그땅이 멸망하게된 이유였다.
2) 이 기소된 반역자들에 대한 선고는 이제 집행되어져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말하노라(15,16절). 그런데 누가 그것을 번복시킬수 있겠는가? 저희 땅에 있어 저희를 즐겁게 해주던 것들이 독이 되며 저희를 쓰라리게 만들 것이다. 내가 그들 곧 이백성에게 쑥(혹은 늑대 독이라는 독초나 해롭고 유독한 어떤 풀)을 먹이며 독한 물(혹은 독한 인진의 즙이나 어떤 독초즙)을 마시고. 그들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은 그들에게 고통이 될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저희의 복을 저주하실 것이다(말 2:2). 그들은 멸망당해 자기들의 땅밖으로 분산될 것이다(16절). 그들과 그들의 조상이 알지못하던 열국중에 그들을 헤치고. 그들은 이제 길을 잃고 헤매며 이방 열국중에서 저희의 미덕을 상실하게될 것이다. 그들은 사회와 산업의 유대관계를 결속시키는 진리를 짓밟았었다. 그러므로 가루로 부스러뜨려져서 이방 열국중에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제 우리는 어찌하여 그땅이 멸망하게 되었는지 알수 있다. 즉 이모든 파멸은 저희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보상이다.
(2) 선지자는 저희에게 이미 임한, 혹은 임하고 있는 이슬픈 재난들을 애곡하도록 '곡하는 부녀'들을 부르고 있다. 이는 이 민족으로하여금 재난을 대비하게끔 하기위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17절). 여기에서 곡장이들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진정으로 애곡하는 사람들의 부족을 메꾸기위해 장례식에 고용되곤 하였던 '지혜로운 부녀들(본래는 재주있는 부녀들이라는 뜻임)을 불러오라.' 그들로…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18절). 혹은 이말씀이 백성들의 우둔함을 암시하는 말이라고 볼수 있다. 그들은 심판을 유념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곡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이 애통해하도록 촉구하셨으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진 그의 말씀은 저희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저들을 웃으면서 저희의 파멸을 향해 달려가도록 버려두기보다는 차라리 곡장이 여자들을 불러다가 각성시키라는 말씀이다. 여기에 진정으로 애곡하는 사람들도 언급되고 있다. 이장면은 참으로 비극적이다(19절). 시온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혹자는 이것을 곡장이 여자들의 애곡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그에 대한 반향, 즉 곡장이 여자들의 애곡소리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들의 반향이라고 할수 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동안에는 시온에서 기쁨과 찬송소리가 들려오곤 하였었다. 그러나 죄는 그음조를 바꾸어 이제 그것은 '호곡하는 소리'가 되었다. 우리가 크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이는 우리가 원수들에 의해 강제로 그땅을 떠났기 때문이로다." 그들은 자신의 정욕에 빠져 여호와를 버렸기때문에 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땅에서 쫓겨났음으로 인하여 수욕을 당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저희를 쫓아내셨음으로 말마암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었음'으로 수욕을 당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이 겸비치못한 심령들은 저희가 당한 재난 그자체를 애곡할뿐이며 그재난의 원인인 저희의 죄를 애곡하지는 않고있다. 자기 땅에서 쫓겨난 자들(그땅은 선주민 가나안인들을 토해낸 것처럼 그들을 토해냈는데 이는 그들도 그선주민의 전철을 밟았기때문에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레1 8;28)은 저희가 성앞으로 몰려들어온 것을 한탄하고 있지만 잠시후면 그들은 본래 성안에 있던 자들과 함께 그성에서도 쫓겨나게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20절). 그런데 '부녀들'로하여금 듣게하라. 왜냐하면 남자들은 그말씀을 주의하지 않을 것이며 인내심있게 귀기울이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떠는 '부녀들'에게 설교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부녀들로하여금 '저희 딸들에게 애곡을 가르치게'하라.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이웃에게 애가를 가르치게'하라. 이말씀은 환난이 멀리까지 파급되며 이웃에서 이웃으로 퍼질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경고되는 심판은 무섭게 보여지고 있다. 즉 많은 무리들이 살육당할 것이다(21절). 죽음이 기세를 올리게 되며 그손아귀에서 벗어날수 있는 도피처는 전혀 없을 것이다. 죽음은 서민들의 주택을 공략할뿐만 아니라 '우리 궁실에도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살육당한 자들은 매장되지도 못한채 버려질 것이다(22절).

Ⅲ. 여호와만을 의지해야 함 9:23-26
선지자는 이백성이 하나님과 그의 심판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하려고 애썼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저희의 완악함을 변명하고자 이런저런 구실과 핑계를 의지해왔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에서 저희를 이와같은 거짓된 도피처에서 몰아내고자 한다.
(1) 심판이 불가피하다는 말씀을 들었을때 그들은 저희 자신의 정책과 힘, 그리고 아울러서 자신들의 부와 재물에 의한 방어를 주장하였다. 즉 그들은 위와같은 요인들로써 저희의 성이 공략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선지자는 저희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유지하고 있지않는한 이와같은 것들을 의지하는 일은 어리석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23,24절). 지혜로운 자는 그지혜를 자랑치말라. 곧 지혜의 도움으로 어떤 돌파구를 찾을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책략으로 실패할지라도 확실히 힘과 용맹으로 성공을 거둘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않다. 용사는 그용맹을 자랑치말라. 왜냐하면 전쟁은 항상 강한 자의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풋내기 다윗이 거인 골리앗에게 너무도 힘든 상대였음이 증명되었었다. 모든 인간적인 힘은 하나님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를 대항하는 것은 힘이 없느니만도 못하다. 그렇지만 돈은 만사의 해결책이므로 부자의 재물은 견고한 성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결코 아니다. 부자는 그부함을 자랑치말라. 다시말하여 전쟁에 관한 책략을 짜낼 지혜로운 자와 전장에 나가 싸울 용사, 그리고 전비를 담당할 부자가 저희에게 있다하더라도 저희가 갈대아 군을 물리칠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되었다. 환난을 당할때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우리가 임무를 다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알기를 싫어한'(6절) 자들은 헛되이 저희의 지혜와 재물을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들, 곧 명철하여 그가 여호와이심을 바르게 깨달은 자들은 '이것으로 자랑하게' 될것이며 그것이 환난날에 저희의 기쁨이 될것이다. 환난중에 우리의 유일한 확신은 은혜로인하여 우리가 임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온전히 풍족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있다는 사실을 자랑할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공의로우시고 자신의 모든 자녀들에게 자비로우셔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그들이 충실하게 따르는 하나님을 그들은 기꺼이 신뢰할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이백성들중 대부분이 이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2)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하나님을 진노케하였는지에 대해 들었을때도 그들은 헛되이 할례의 언약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며 그의 자녀라는 징표를 저희의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악한 백성들을 징벌하시리라고 대답한다(25,26절). 그들은 할례받지 않은 민족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졌던 특별한 혜택을 몰수당하는 것은 마땅하다. 이세상의 심판자 되시는 분은 공평하시며, 그의 재판정에서 어떤 외적인 이점으로인하여 보다 나은 대우를 받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세례받았으나 회개치않은 죄인에 대한 정죄와 세례받지 않고서 회개치않은 죄인에 대한 정죄가 다르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 '세상끝에 거하는 자들과(한글개역에는 없음) 광야에 거하는' 자들은 49:28-32절와 비교해볼때 게달 사람과 하솔 왕국인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추측된다. 혹자는 그들이 세상의 한쪽 구석에 살았기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졌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그머리털을 모지게 깍았기'때문에 세상끝에 사는 자들로 일컬어졌다고 추측한다. 어쨌거나 그들은 육신에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유대인들은 그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당하였다. 이스라엘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느니라. 그들은 징표는 지니고 있었으나 그징표가 의미하는 것은 지니지 못하였다(참조. 렘 4:4).

# 핵심
9:1-26
거듭된 회개촉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역을 일삼는 백성들의 비참한 종말을 보여준다.
곡하는 자(9:17)
일정한 삯을 받고 초상집에서 소리내어 울어주는 일을 하는 직업적인 조문객을 가리킨다(마 9:23). 이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슬픔을 표현했으며, 개개인의 감정과 슬픔을 더하게 하기위해 고인의 가족들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도 근동에서 계속되고 있다.

# 묵상
시련과 연단 ( 9:1-9 )
백성의 죄악을 한탄하는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심히 슬퍼합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그들의 죄상이 돌이킬수 없는 상태임을 선포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처히 연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시련과 연단은 구원받은 백성을 강하고 순결하게 하여 하나님나라의 흔들리지 않는 시민으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시랑의 굴혈이 될 예루살렘 ( 9:11 )
본문의 시랑은 쟈칼을 뜻하는것 같은데, 이것은 늑대나 이리 등과 같은 짐승들입니다. 예루살렘이 무더기가 되며 시랑의 굴혈이 되게하겠다는 본문은, 예루살렘이 더이상 사람이 살수 없는 폐허가 됨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장차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 예루살렘이 심한 전쟁을 겪게되어 아주 조그마한 희망도 없을 것임을 보여줍니다.
거두지못한 뭇같이 될 시체들 ( 9:22 )
뭇은 추수하면서 여기저기 흘려놓은 곡식이삭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시체가 분토같이 들에 떨어져 마치 추수때 추수꾼뒤에 떨어지고 거두지못한 뭇같이 되리라는 본문의 말씀은 전쟁으로인해 죽임을 당한 자가 살아남은 자보다 많아서 거두어줄 사람도 없이 곳곳에 시체가 널려있는 참혹한 상황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체가 무덤에 장사되지 않는 것을 가장 큰수치요,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죽음보다 더큰 부끄러움이었던 것입니다.
할례받은 자와 할례받지 못한 자 ( 9:25, 26 )
여기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이란 이스라엘을 제외한 고대 근동의 여러나라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 할례를 행했는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할례받지 못한 이방과 동일하게 간주하시고 함께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육신의 할례를 받지못한 것이나 마음의 할례를 받지못한 것이나, 하나님앞에서는 모두 할례받지 못한 자로 간주되어 멸망당하게 됩니다(롬2:25; 고전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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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임박한 심판의 참상 8:1-3
본문에는 갈대아 군대가 그땅에서 행할 무서운 파괴에 대해 좀더 설명되고 있다.
(1)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은 항상 안식되었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않을 것이다. 죽은 자의 유해가 왕들과 방백들의 뼈까지도 널리게될 것이다. 그들의 '해골이 음부문에 흩어졌다'(시 141:7). 죽은 자가 매장되지 못하리라는 경고가 앞장 마지막부분에서 나왔으나, 우리는 이제 여기에서 매장되었던 자들의 묘가 적군의 악의로인해 파헤쳐지는 것을 본다. 묘안에 있는 보물을 찾고자하는 저희의 탐욕은 '유다왕들의 뼈와 방백들의 뼈를 그묘실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의 묘소의 위용이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줄수 없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뼈역시 파헤쳐져 내던져졌다. 야만적인 민족들은 때때로 저희가 정복한 자들에게 이러한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승리를 과시하는 죄를 지었다. 묘소에서 파내어진 그들은 그들이 우상으로 섬기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아래 쬐일' 것이다(2절). 그들이 구애하였던 하늘의 이 빛들아래서 저희의 죽은 몸들은 널려지고 썩게될 것이었다.
(2) 이전에는 결코 그렇지않았으나 산자는 이제 죽음을 택하고자 하게될 것이다. 이는 죽음에 어떤 즐거운 것이 있어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너무도 지겨우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할정도로(3절) 장래에 대한 전망이 너무 암울하기 때문이다. 저세상에 행복이 있으리라는 희망때문이 아니라 이세상에서의 평안에 대한 완전한 절망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쫒겨나 각처에 살아남아 있는(그들외에는 아무도 없다) 자들로, 일부는 적국의 죄수이며 다른 일부는 이웃나라에서 구걸로 연명하는 자이고, 또다른 일부는 저희나라에서 이리저리 도망하며 방랑하는 자들이다.

Ⅱ. 회개치않는 유다를 향한 책망 8:4-12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그들의 회개치않는 어리석음에 대해 말해주도록 지시받고 있다. 그들은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저희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기위하여 취한 모든 방법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와지려고 하지않는 지각없는 백성으로 표현되고 있다.
(1) 그들은 이성의 명령에 유의하려고 하지않았다. 그들은 영혼의 일에 있어서는 다른 일에서 저희가 보여주었던 현명함으로 행하려하지 않았다.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신다(4,5절).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만일 사람이 땅바닥에 넘어지고 진흙속에 빠지면 할수 있은한 재빨리 다시 일어서려고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 바른 길에서 벗어나겠느냐? 아무리 주의 깊은 여행자라해도 길을 잘못 들어설수가 있느니라. 그렇지만 그것을 깨달으면 곧바로 돌아오지 않겠느냐? 다른 모든 일에서 사람들은 이와같이 행하는데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저희가 죄에 빠졌을때 속히 회개함으로 다시 일어서려 하지않음은 어찜이뇨? 저희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을때 저희 실수를 바로잡고 고쳐나가려고 하지않음은 어찜이뇨?" 죄는 뒷걸음질치는 것 즉 바른 길에서 물러나 곁길로 갈뿐만 아니라 정반대 방향의 길로도 들어서는 것이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에서 벗어나 멸망으로 이르는 길로 들어가는 것이다. 죄인은 끝없이 방황할뿐만 아니라 멸망으로 향하는 길로 달려나아간다. 유혹자 사단은 사람들을 죄로 이끌며 죄가운데 그들을 단단히 묶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희 스스로 죄의 포로가 되는 것을 돕는다.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저희의 죄에 대하여 그들이 하는 변명은 거짓임에도 그들은 그미혹을 벗어나려 하지않는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돌아오기를 거절한다.'
(2) 그들은 양심의 명령에도 유의하려고 하지않았다. 양심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동을 곰곰히 반성하는 우리의 이성이다(6절). 선지자는 그의 설교가 그들에게 어떠한 효과를 주었는지 알아보고자 귀를 기울였다. 죄인들의 죽음을 원치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친히 귀를 기울이셨다. 회개를 기약하는 그어떠한 것이라도 들으시면 참으로 기뻐하실 터이었다. 그러나 이기대들은 어긋났다. 즉, 그러하리라고 생각하였건만 '그들은 정직을 말하지 아니했다.' 하나님께서는 저민족적인 악을 회개하는 어떠한 사람도 찾아보실수 없었다.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면 저희의 공적인 죄의 무게를 더는데 도움이 되었을 터이었다. 그들은 회개를 향하여 한걸음도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들중에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라고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결연히 저희의 죄가운데서 행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고삐로 제어당하는 것을 멸시하는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길로 행하였다.'
(3) 그들은 섭리의 명령에도 유의하려고 하지않았으며 그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소리도 깨달으려고 하지않았다(7절). 그들은 자비의 의미도, 고난의 의미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의 선지자들을 보내셨을때 베푸신 은혜를 보람있게 이용할줄을 몰랐으며 성에서 그의 소리가 퍼질때 받은 책망을 유용하게 만들줄도 몰랐다. 인간보다 열등한 생물들에게는 슬기가 있다. '공중의 학은 그정한 시기를 안다.'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 등 다른 철새들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기온이 변함에 따랄 이들은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서 저희의 서식처를 바꾼다. 그들은 봄이 옴과 동시에 오며 겨울이 다가오면 보다 따뜻한 기후의 지방으로 날아간다.
(4) 그들은 기록된 말씀의 명령에도 유의하려고 하지않았다. 그들은 '우리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그런 말을 할수가 있는가(8절). 그들은 '저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고.' 율법서와 그것을 해석하는 자들이 있으므로 저희가 지혜롭다고 스스로 생각한다(신4:6). 그러나 이모든 자에 대한 저희의 자부심은 근거없는 것이다. 그들이 선용하지 않을바에야 율법이 없었던 편이 그들에게 더나았을 것이었다. 율법을 처음 기록하였고, 또 이제는 그율법에 대한 해석을 기록하고 있는 '서기관의 붓'은 헛되다. 그런데 그들은 저희가운데는 지혜로운 자들이 있다고 말하였던 듯하다.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오고 있다(9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이는 그들이 저희의 지혜를 선용하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황중에 잡힐 것이다.' 즉, 저희의 온갖 지혜가 저희로하여금 멸망으로 향하는 길을 걷지못하게끔 막지 못하였다. 그들은 저희의 지혜를 말한다. "그러나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도다." 지혜로운 체하는 자들,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말하는 자들은 제사장들과 거짓 선지자들이었다. 분명히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가족과 재산은 다 뿔뿔이 흩어지게될 것이다(10절). "그들이 포로로 잡힐때,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저희의 승전군들이 그들에게서 그들의 전지를 빼앗아 그차지할 자들에게 줄것이라." 그리고 모든 지혜로운체하는 것과 성결한체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다. 그들이 징벌받을때에, 그리고 그땅의 사악함이 심문에 부쳐질때에, 그들이 다른 어느누구보다도 더 그땅을 악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심판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신다(10-12절). 그들은 이세상의 부를 탐하였다. '그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쳤다(미 3:11).' '다 거짓을 행하였으며' 한쪽을 바라보면서 속셈을 단데에 두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성실이라고는 없었다. 그들은 죄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빌붙어 비위를 맞췄다. 그리고 국가의 병을 고치는 의사인체하였으나 적절한 치료를 하는 방법을 알지못했다. 그들은 '심상히 고쳐주며', "평강하다, 평강하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으니 아무런 위험도 없다"는 말로 저희의 두려움을 무마시키면서 완화책을 써서 환자를 죽게 만들었다. 그들은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다' 그럴정도로 그들은 도의심과 지조를 완전히 망각하였다.

Ⅲ. 유다가 받을 진노의 심판 8:13-22
(1) 하나님은 이 죄많은 백성의 파멸을 경고하신다. 그는 그들을 오래참으셨으나 그들은 갈수록 더 그의 진노를 야기시키고 있다. 그들은 저희에게 위안이 되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될 것이다(13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저희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될 것이다(13절). 마지막부분에서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내가 그들에게 준것이 없어지리라. 남용된 자비는 몰수되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몰수하시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내가 뱀과 독사를 너희중에 보내리니(17절). 곧 불뱀, 갈대아 군대이다. 그뱀들은 '술법으로도 제어할수 없다.' 즉 그들은 다른 본성을 지닌 뱀들인 것이다. 그들은 귀머거리와 같아서 저희 귀를 막고 술사의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2) 이와같은 재난의 압박하에 백성들은 절망에 빠진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던 자들은 이제 재난이 저희에게 닥쳤을때 소망도 없게 되었으며 그재난에 대항할 지모를 짜낼 마음도, 또한 그것을 참고 견딜 마음도 없게 되었다(14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았으랴 모일지어다 우리가 견고한 성읍들로나 들어가서. 비록 그들이 결국에는 거기에서 멸절되는 것외에는 다른 일을 기대할수가 없었지만 성밖에서 곧장 멸망당하기보다는 들어가서 거기서 가만히 있다가 멸망한다. "거기에서 아무것도 하려하지 말고 불평도 하지말라. 불평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것은 음울한 침묵이다.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노하셨음을 알았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잠잠케하시며 놀라도록 우리를 치시며, 우리에게 독한 물을 마시우심이니라. 비틀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맞서 싸우시는데 우리가 우리의 운명과 다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변명의 말한마디 할수 없게끔 그렇게 가혹하게 다루셨었다는듯이 하나님과 언쟁하려는것 같다. 마침내 그들은 재난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손을 비로소 보게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를 진노케했음을 인식하게 된것이다.
2) 그들은 자기들로서는 적들을 감당하기 벅참을 알았다(16절). 그말의 부르짖음이 단에서부터 들리고. 그 말탄 군대의 무쌍한 힘에 대한 소문이 순식간에 전국에 퍼졌으며 모든 사람들은 '그 준마들의 우는 소리에 진동하였다.' 그들이 이르러. 그들을 대항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이땅과 그소유와 성읍과 그중의 거민을 삼켰다.'
3) 그들은 구원에 대한 기대가 좌절됨으로써 절망하였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나 좋은 것이 없으며(15절). 곧 국외로부터의 좋은 소식이 오지않았다. "우리가 고치심을 입을때와 나라의 번영을 바랐지만, 그러나 보라 환란 곧 전쟁의 놀라움뿐이라." 저희의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외쳤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기대하였으나 구원은 오지않았다(20절). 추수할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즉, 많은 시간이 흘렀다. 추수기와 여름은 일년의 한 절후들이다. 그러므로 그의미는 이와같다. "한해가 지나가고 또 한해가 지나며 한 전투가 끝나고 또다른 전쟁이 계속되어도 우리의 고난은 여전하며 어떠한 구원도 이르지 않았도다." 우리는 구원을 얻지못한다. 행동하기에 적합한 시기인 여름과 추수기는 지나가버렸으며 춥고 음울한 겨울이 왔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빛앞에 가로막고 서서 스스로의 불행을 초래하고 있으며 저희 자신의 문에 빗장을 걸고있다. 그리하여 아직 구원받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있다.
4) 그들은 저희에게 평강을 보장해주리라고 믿었던 것들에게 기만을 당하였다(19절). 딸 내백성의 부르짖는 소리로다. '심히 먼땅에서' 거하는 자들, 먼나라에서 그들의 소유를 취하기위해 온 외적들때문에 큰소리로 부르짖는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왕이 그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이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의지해온 두가지 사항이었다. 즉 첫째로, 저희가운데에 하나님의 전, 그리고 하나님께서 특별히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징표가 있다는 것이며 둘째로, 저희에게는 다윗의 집안의 왕위가 있다는 것이다. "시온의 왕이 그중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리고 시온의 하나님이 시온의 왕과 그왕국을 보호해주시지 아니한가?" 그들의 이부르짖음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그는 즉시 대답하신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케하였는고.
(3) 여기에 예레미야의 애곡이 계속된다. 그는 자기 나라의 멸망을 눈으로 목도하였다.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18절). "나의 슬픔에 대해서 어떻게 위로를 얻을수 있을까 모색하지만 슬픔을 완화시키려하는 온갖 노력은 도리어 슬픔을 가중시킬 뿐이라." 때로 슬픔을 억누르면 억누를수록 도리어 더욱더 강하게 솟구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여기 이선지자와 같이 매우 선한 사람의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그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하였으며 이같이 말하고 있다(21절). 딸 내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내가 슬퍼하는 것, 조객과 같이 곡을 하는 것은 그들의 죄, 그들이 스스로 자초한 불행으로 인해서이라. 그로인해 내가 놀라움에 잡혔으며, 어느길로 가야할지를 알지못하노라." 은혜로운 심령은 공공의 안녕을 염려하는 심령이며, 부드러운 심령이며, 슬퍼하는 심령일 것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언했었다. 그리고 그의 예언이 참인지 의심받아온 터였지만 그의 예언이 참으로 증명되었다고해서 기뻐하지 않았으며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명성보다는 조국의 행복을 중시하였다. 그의 소망은 참으로 적은 것이었다(22절).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병들어 죽어가는 왕국을 치유하기에 적절한 약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약을 처방해 줄만한 충실하고 능한 손이 있지 아니한가?" 이말씀은 저희의 질병이 치료불가능한 그모든 책임이 저희 자신들에게 있다는 지적으로 이해될수 있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그렇다. 확실히 거기에는 유향과 의사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시고 치유시켜 주실수 있다. 길르앗은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바로 저희 자신의 땅안에 있었다. 저희에게는 하나님의 율법과 그의 선지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의 도움으로 저희는 회개에 이를수있었다. 그리고 저희의 파멸은 방지될수 있었다. 저희에게는 또한 방백들과 제사장들이 있었다. 그들의 일은 나라를 개혁하고 저희의 불만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저희의 건강이 회복되지 않음은 어찜인가? 확실히 그것은 유향과 의사가 없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약바르기를 용납지 않고 치료책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의사와 약제 모두가 준비되었지만 환자는 제멋대로 고집을 부렸고 규칙을 따르려하지 않았다.

# 핵심
8:4-12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유다 백성의 강퍅함과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함을 드러낸다.

# 묵상
죽는 것을 더 원하게될 남은 자 ( 8:3 )
본문이 의미하는바는 곳곳에서 살육이 자행되고 이미 죽은 자의 시체가 무덤에서 나와 내팽겨치는 등, 여호와의 심판이 아무리 극심할지라도 앞으로 있게될 남은 자들에 대한 심판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이미 죽은 자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며, 살아남은 자 역시 죽음보다 더극한 고통에 처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들이 용케 살육의 칼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살아남은 곳에서 그리고 포로로 끌려간 곳에서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이땅에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의 날이 이르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속에서 거하는 둘째 사망에 처해집니다.
유다의 멸망원인 ( 8:4-6 )
유다가 이처럼 멸망받게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그앞에서 물러갔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짓을 고집하고 정직을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그러한 상태를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개로 인도하려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마치 이성과 양심이 없는 짐승들처럼 죄악의 길로 달음질쳤던 것입니다.
새들보다도 못한 여호와의 백성 ( 8:7 )
본문의 이말은 공중의 학, 반구와 제비, 두루미 등도 그 정한시기와 올때를 알고 그것을 지킵니다. 그런데 주의 백성들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고, 이를 따르고 지켜야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행하지 못함으로인해서 동물들보다도 못하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봄이 되면 찾아오는 제비들을 보면서 반면 하나님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주의 백성들에 대해서 탄식했습니다.
백성의 상처 ( 8:11 )
이상처는 백성들의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백성들이 죄악된 삶을 살고있는데도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괜찮다’, ‘복이 임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의 악이 점점 깊어지게 했습니다. 마음의 상처인 죄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치유하시는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와야 합니다(말4:2).
치료받지 못하는 백성들 ( 8:22 )
본절에 언급된 길르앗은 요단동편에 있는 곳입니다. 그곳은 상처에 특효가 있는 유향의 명산지로, 용한 의사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향과 명의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상처는 낫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길르앗의 명의란 우상을 가리키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우상을 섬기고 그에게 복을 빌지만 사람들의 상처인 죄에서 구원받을수는 없었습니다. 죄라고 하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실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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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위선적인 신앙에 대한 경고 7:1-15
다른 설교가 여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백성들을 설득하여 회개시키고자 하는 이설교는 다음 두장에 계속하여 이어진다.
1. 선지자에게 주어진 명령(1,2)
이것은 '여호와께로서 그에게 임한 말씀'이었다(1절).
(1) 이말씀이 선포되어져야할 장소는 백성들이 성전 바깥뜰로 들어가기위해서는 통과해야만 하는 곳, 즉 여호와의 집문이었다. 그렇게하는 것은 제사장들에게 모욕감을 주고 선지자들을 격노케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을 받은 선지자는 인간의 낯을 두려워해서는 안되었다.
(2) 이말씀은 누구에게 선포되어져야 하는가.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2절). 아마도 이때는 삼대 절기중 하나로, 모든 남자들이 여호와의 집으로 나오되, 빈손으로 나와서는 아니되는 때였을 것이다.
2. 설교의 내용과 범위(3-15)
이말씀은 '만군의 여호와' 곧 세계를 다스리시면서도 자기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다.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1) 하나님의 참된 말씀은 무엇이었는가. 간략히 말해서 만일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평안을 회복시켜주시며 그들의 슬픔을 고쳐주시고 그들을 자비가운데로 되돌아오게 해주시리라는 것이다(3절). 너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하나님은 그들이 어디를 어떻게 바르게 시정하여야 하는지 알려주시며 그리하면 그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거하도록 해줄 것이며 너희를 추방시키고자 하는 위협이 중지되게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철저하게 시정되어져야만 했다. 즉 전반적이고 계속적인 인내심있는 개혁이 필요했으며 그것은 요동치않는 지속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들은 저희의 모든 처사에 있어서 정직하고 올바라야 했다. 권세를 가진 자들은 그의 이웃과 다른 사람사이에 철저히 공정하게 판결해야 했다. 또한 그들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아야'했고 압제하는 자들을 보호해주지도 말아야 했다. 그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해야 했고, 그피로 '이곳'과 그들이 거하고 있는 땅을 더럽히지 않아야 했다. 그들은 오로지 참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에만 전념해야 했다. "다른 신들을 좇지말라. 그들을 열망하지 말라. 이와같은 개혁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이성전에 거하게 하리라. 이 전은 계속하여 너희의 피난처가 될것이며 너희가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장소가 되리라.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나 너희 자식의 집에서 결코 내쫓기지 않으리라." 그들은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속에 의해서 곧 언약에 의해서 그것을 향위하게 될것이었다. 그들은 '영원무궁히' 침해받지 않을 것이었다. 죄이외에는 그 어떤것도 그들을 추방할수 없었다. 이처럼 하늘나라에 있는 가나안에서의 영원한 유업이 경건하고정직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고 있다.
(2) 그들이 의뢰해서는 안되는 저희의 심중에 있는 거짓말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경고하신다(4절). 너희는…거짓말을 믿지말라. "너희는 어떠한 길에 있을때 안전하고 행복할수 있을 지에 대해 들어왔느니라. 너희가 어떤 다른 길에서도 그러할수 있으리라고 스스로 우쭐해하지 말라. 보라 내가 이미 너희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믿고있는 것이 분명하도다. 너희는 유익하지 못할 말을 의뢰하고 있도다." 이 거짓말은 곧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하는 것이었다. "그는 여기에 거하신다. 여기서 그는 경배받으시며, 우리는 이궁전에 계신 우리의 왕이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위해 일 년에 세차례 모인다"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익히 믿을만한 보증이라고 생각했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저희가 얼마나 범죄하였는지 말했었을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성전만을 의뢰했었다. 그것은 시대를 걸쳐 사용된 유행어였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말이 저희의 입에 있었다. 경건의 외양이라고 하는 특권이 흔히 경건의 능력을 알지못하고 그것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자랑거리내지 확신이 되곤한다.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있는 자들이 교회에 가까이 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다(습3:11). 만일 그들이 여호와 전이나 성전의 여호와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아는바가 있었더면 성전을 빌어서 저희 죄를 면제받고자 하는 일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지 생각해야만 했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그를 죄의 후견인으로 만들었다(9,10절). "너희가 하나님을 거스려 할수 있는 가장 극악한 일을 하면서도 그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집에 들어와서 그의 은혜를 기대하는 청원자로서 그앞에 설정도로 그렇게 뻔뻔스럽게 굴겠느냐?" 그것은 마치 우리가 이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도록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혹자는 이말씀을 이렇게 해석한다. "너희가 희생제물과 속죄제로 하나님앞에 나아오는도다. 그리고는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우리의 죄책에서 해방되었나이다 라고 말하는도다. 이모든 것은 단지 너희가 보다 쉽게 이모든 가증한 일을 행할수 있도록 세상을 눈가림하는 것에 불과하느니라. 내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집, 하나님의 왕국의 표적이며 죄와 사단의 왕국에 대항하여 세워진 이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너희는 이집이 행악자의 도피처가 되라고 세워진줄로 아느냐?" 비록 성소가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에게 성역이 되긴 했어도, 고의적인 살인자에게는 그렇지 않았다(출 21:14;왕상 2:29).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1절). 그는 위선적인 경건을 꿰뚫고 그안에 숨겨진 부정을 보셨다. 그는 그들로하여금 이와같은 주장이 부당함을 일찍이 있었던 실로의 경우에서 보게 하신다. 확실히 실로는 그안에 하나님의 성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의 사악함으로 그성소를 모독하자 파멸당하였다(12절). 너희는 내가…내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그곳에 하나님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두었었다.' 그곳에 성막이 세워졌었으나(수 18:1) 성밖의 예배에 참석한 자들이 그누구를 막론하고 부패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악이 발생했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이 저희가운데 성막을 가지고 있었음으로인하여 보호받았던가? 하나님은 그것을 버리셨고(시 78:60) 그의 법궤를 약탈당하게 하셨으며 그곳에 거하던 엘리의 집안을 멸절시키셨던 것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 실로와 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기억하라. 그리고 법궤와 촛대는 옮겨질수 있는 것임을 알라(계 2:5;마 21:43). 예루살렘은 이제 일찍이 실로가 그랬던 것처럼 죄로 가득찼다(13절). 그들은 이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부인할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결코 마음에도 두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으나 저희는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의 부르심에 오려고 하지도 않았다. 예루살렘은 곧 일찍이 시로가 그러했던 것과 같이 비참하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같이…이집 곧…이곳에 행하겠고(14절). "그것을 멸하며 황폐케 하겠노라. 이집은 내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이기에 너희는 내가 보호할 것이라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실로의 사람들과 그렇게 스스로를 안위하였으나 다만 저희 자신을 기만했을 뿐이었느니라." 그는 다른 전례를 인용하신다(15절). 곧 열지파의 왕국의 멸망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나 저희의 우상숭배가 그들을 그땅에서 축출하였고 멸절시켰던 것이다.

Ⅱ.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7:16-20
성전과 그곳에서 드리는 예배가 경고된 심판을 피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한 선지자의 중보가 있었다. 그의 기도는 저희 자신의 청원보다 그들에게 더유익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사역자들과 백성들의 기도에 무관심한 자들은 그 지지마저 받지못하게 되었다.
(1)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금하신다(16절). "포고가 이미 발표되었으니 그런즉 너는 이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경고된 심판을 막기위해 기도하지 말라. 그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였은즉 그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단지 저희 영혼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라"(요일 5:16).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파멸을 예고하였으면서도 그들이 보전되기를 기도하였다. 우리가 죄인들을 저주로 위협할때에조차 우리는 그들이 돌이켜 생명을 얻을수 있도록 저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레미야는 그의 동족에게 핍박받고 비방당하였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기도하는 선지자들은 하늘에서 큰권익을 가지고 있다. 좋은 사역자들의 설교를 존중하려 하지않는 자들은 그들의 기도로 말미암은 유익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우리에게 말할때 들으려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그에게 말할때에 듣지않으실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이렇게 금한 이유에 대해 말씀하신다(17-20절).
1) 그들은 하나님을 거스려 계속하여 배역하기로 결심하였다(17절). "너는 그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수치도 두려움도 없이 공공연하게 행하는 일을 보지 못하느냐"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이말씀은 죄가 자명하여 죄인들이 선지자의 면전에서조차 악을 행하였음을 암시한다. 그는 그들이 행하는 일을 보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일을 계속하여 행하였고, 그것은 선지자를 위임하신 분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들의 우상에 대한 경배는 '하늘황후', 즉 그형상이든 자연 그자체이든 혹은 양쪽 다이든지 달에게 향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그것을 '아스다롯'이라는 이름으로 섬긴것 같다(렘44:17,19). 그들은 그것들을 만드신분 대신에 그 피조물들을 섬겼으며 그것들을 주신분 대신에 그 선물들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하늘황후'를 섬김과 아울러 또한 '다른 신들'을 경배하였다. 왜냐하면 참하나님을 저버린 자들은 그릇된 것들을 좇아 끝없이 방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이러한 신들에게 소제물로 과자를 바치며 '전제를 붓는다' 자식들에게 나무를 주워오라고 시켜 내보내고 아비들은 솥을 달구기위해 불을 피우며 부녀들은 손수 가루를 반죽하였다. 우리는 이나쁜 예증을 통하여서도 우리 하나님께 어떻게 예배드려야할지에 대한 교훈을 배우도록 해야한다.
①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생계에 필요한 물질을 받는 자들로, 그물질로써도 그를 영화롭게 하라.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는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먹고 마셔라.
②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수만 있다면 아무리 힘든 일도 마다하지 말아야한다. 빈손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불을 피울수는 없는 법이다.
③ 종료적인 훈련을 지속할수 있는 일에 우리 자녀들을 참여시켜라. 이 우상숭배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바는 무엇인가? 그들이 나를 격노케함이냐(19절). "저희가 그일을 행함에 있어 어떠한 다른 일을 뜻할수 없느니라. 내가 쉽게 노하기 때문이냐? 그것은 그들자신의 소행이며 오직 그들이 책임져야할 일이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것은 그에게 맞섬인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악의이지만 무익한 악의이다. 그것은 그에게 해를 가할수 없으며 저희 자신들을 해할 뿐이다.
2) 하나님은 그들에 대한 심판을 속행하기로 작정하셨으며 선지자의 기도로인해 돌이키지 않으실 것이다(20절).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나의 진노와 분한을 이곳에 부으리니.' 그진노와 분한은 애굽의 역병과 같이 '사람과 짐승'에까지 미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알과 하늘황후를 위하여 예비해둔 '들나무와 땅의 소산'까지 멸할 것이다. 그것을 멈추게 할수 있는 것은 없다. 불같이 살라지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기도와 눈물이 그때는 아무소용도 없을 것이다.

Ⅲ. 유다 백성의 불순종 7:21-28
백성들이 저희의 악으로 더럽히고 있은한 성전도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들이 불순종을 계속하는한 저희의 제사가 저희를 속죄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저희의 의식적인 예배에 대해 말씀하신다(21절). 너희 희생에 번제물을 아울러 그고기를 먹으라. "한제사에 또다른 제사를 계속하여 드려라. 너희가 고기를 먹을수 있도록 너희의 번제를 화목제로 변질시켜라. 그러나 그 제사들로인한 어떠한 유익도 기대하지 말라. 너희 제사를 너희 자신이 가지라. 너희 자신들의 식탁에나 올려라." 어쨌든 그것들은 하나님의 제단에 열납되어질수 없다.
(1) 하나님께서는 순종이야말로 그가 그들에게 요구하신 유일한 것이었음을 알게하신다(22,23절). 그는 본래의 계약을 내세우신다. 그계약에 의해서 그들은 애굽에서 구출되어 나왔을때 처음으로 한민족을 이루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신 것이지, 이방인들이 섬기던 마귀처럼 저희의 희생의 고기를 즐기려는 것이 아니었다(신 32:38).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22절). 도덕법의 계명들이 의식적인 규례에 앞서 주어졌었다. 그리고 의식규례들은 저희의 순종을 시험하기위한 것으로 나중에 나왔었다.레위기의 율법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희중에 누구든지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려거든' 이러이러하게 하도록 하라(레 1:2,2:1). 마치 그것은 제사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제사를 통제하기 위하여 작정된 법 같다.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 되는 조건은 이와같았다(출 19:5). 곧 '너희가 내 말을 잘들으면'이다. 본연적인 신앙의 의무들을 본분으로 삼고 순종의 원리로부터 나온 명확한 규례들을 준수한다.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23절). "너희의 교제를 변함없이 행하라. 나의 정한 범위안에서 행하고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이요구는 매우 타당한 것이다.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우리에게 지시해주시는 것이 마땅하며, 우리를 만드신 분이 우리에게 명하시고 우리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 또한 법을 주시는 것은 마당한 일이다.
(2)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이야말로 그가 이백성과 다투시는 유일한 것임을 알려주신다(24-28).
1)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다투어 저희 자신의 뜻을 정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율법을 '청종치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동의하고자 마음을 기울이지도 아니했다. '자기의 꾀'가 그들의 안내자이었다. '자기의 악한 마음', 저희의 성향과 정욕이 그들에게 법이 되었다.
2) 그들은 그등을 하나님께 향하였다. 그들은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되돌아갈 것을 이야기하였으며, 하나님의 인도아래 나아가려 하지않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시는대로 우리가 다행하리이다"라고 듣기좋게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길로 되돌아갔으며 예전보다 더나빠졌다.
3)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셨을때에도 여전히 그들은 불순종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잘못을 깨우쳐주기 위하여 각시대마다 그들중에 그의 종들을 두셨고 그들을 부지런히 보내셨다(13절에서 말해진바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선지자들에 대해서도 귀머거리와 같았다(26절). 그들의 행위와 성품은 여전하였다. 그들은 더욱 나빠졌으며 저희의 열조보다 나아지지 아니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들의 악함에 대하여 증거할수 있다(27절). 네가 그들에게 이모든 말을 할지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게 주의를 기울이지도 아니할 것이라. 그들은 너의 부름에 나아오지 않을 것이라." 선지자는 그들에게 가서 말해야만 했다(28절). 너는 그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아니하는 국민이라. 그들은 완악함으로 악명 높다. 그들은 여호와께 제사드렸으나 그에게 다스림받지는 아니하였다. 그들은 그의 말씀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그의 채찍의 징계도 받지않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이나 채찍의 징계도 받지않을 것이다. 그들은 말씀이나 채찍으로 교화되지도, 개선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나 다 그릇되었다.

# 핵심
7:1-8:3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행되는 범죄와 그것에 대한 형벌을 선고하는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
결혼식때의 흥겨운 소리(7:34)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예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흥겨운 잔치를 벌였다. 이때 수행자들은 아 3:6절에서 발췌한 사랑의 시가 섞여있는 전통적인 결혼 축하곡을 불렀다. 친구들과 친척들은 신랑신부가 그들앞에 있을때 성경구절이나 금언을 암송하면서 꽃을 뿌려주었다. 신랑과 신부가 신방을 차리는동안 결혼식 하객들은 춤을 추고 놀이를 하며 악기를 연주했다. 그리고 한몸이 되었다는 증거를 가지고 신방에서 나온 신랑과 신부도 7일동안 계속되는 축제에 합류하였다.

# 묵상
여호와의 집문 ( 7:2 )
‘여호와의 집문’이란 성전문을 가리키는데, 이문은 복의 문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26:10). 이 성전문은 후에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낭독한 곳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거할수 있는 조건 네가지 ( 7:5-7 )
여호와께서 유다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조건들은 첫째, 공의를 행하는 것이며 둘째,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말것과 넷째,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것 등으로써, 이러한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이것들은 당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이웃들에게 행한 죄악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악을 행한 사람들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집의 상태 ( 7:11 )
당시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마치 도적의 굴혈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사56:7), 세상에서 온갖 죄악을 짓고도 성전에 들어와 제사드리기만 하면 자신이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곧 도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온갖 악을 저지르면서 위선적인 제사를 통해서 죄가 사해졌다고 믿는 무리들, 돈벌이의 수단으로 제사를 이용하는 자들이 들끓는 성전에 대해 강도의 굴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마21:13).
금지되는 선지자의 기도 ( 7:16 )
이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격동시켜 스스로 수욕을 자취(自取)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직무중의 하나는 그백성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사이를 중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너무도 악하여 더이상의 예레미야의 중보기도가 필요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실이 끊어진 유다의 입 ( 7:28 )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는 본문의 말씀은 진실한 말과 맹세가 끊어졌다는 뜻입니다. 즉 백성들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않고 그의 훈련을 받지않으므로 그들의 삶에서 진리가 없어지고 거짓, 곧 위선적인 종교의식만이 존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돌비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힌놈의 골짜기 ( 7:30-32 )
힌놈의 골짜기는 모압신 몰렉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불살라 희생제물로 신에게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일을 금지시키셨으나, 이방신들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숭배 금지와 살인금지 명령까지를 모두 범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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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루살렘 심판에 대한 예언 6:1-8
(1)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심판이 있을 것임이 경고되고 있다. 예루살렘성은 모여들고 있는 구름을 보지못했고 모든 것은 안전하고 평화로운듯 보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곧 북방으로부터 외세의 침입을 받을 것이며, 그것은 전반적인 파멸을 야기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예언되고 있다.
1) 크고 요란한 정보가 울릴 것이다. 이말씀은 1절에 나타나있다. 예루살렘성의 일부를 점유하고 있는 베냐민 자손들은 안전을 위하여 시골로 피난하라는 전갈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성(처음에는 그들이 피난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생각되었었다. 4:5,6)은 이내 무서운 혈전을 치루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골에도 경보를 전하여 그사람들도 무엇인가 안전을 도모할수 있게끔하라는 말을 듣게된다. "예루살렘 북방 12마일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성,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라. 예루살렘과 드고아사이의 언덕받이에 위치한 포도원의 집, 벧학게렘에서 불의 기호를 들라(즉, 봉화불을 켜라)." 이말씀은 반어적으로 해석될수 있다. "너희가 너희의 최선을 다할때, 큰파멸이 있을 것이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겨루는 것이 허사이기 때문이라."
2) 그들에게 임할 공격은 가공할만한 것이다. 공격의 대상인 시온의 딸은 아름답고 묘한 딸에 비유되고 있다(2절). 곤고에 익숙해지지 않았기때문에 그녀는 적에게 대항할수도, 파멸을 견디어낼수도 없을 것이었다. 공격해올 장수들과 그군대들은 목자들과 그무리 양에 비유되고 있다(3절). 그와같은 수의 병사들이 목자들을 따르는 양무리처럼 지휘관을 따라왔다. 목자들은 일반적으로, 널려져 있는 임자없는 공지를 쉽사리 점유하여, 거기에 자기 장막을 친다. 그리고 그들의 양무리들은 재빨리 그곳을 다 먹어치운다. 그와같이 갈대아 군대도 유대 땅을 쉽사리 침입하여 그들이 원하는 곳에 자유로이 진지를 세우고 짧은 시간내에 모든 것을 삼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임하사 이렇게 파괴하게 하셨다. "너희는 그를 치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4절). 그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흉벽을 쌓으라"고 말씀하셨다(6절). 하나님께서는 "이는 하나님의 정의에 의해서 벌받을 성이라.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징벌의 때이라"고 하신다. 그들은 곧바로 신속히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4절). 비록 하루의 가장 뜨거운 때일지라도 그들은 괘념치 않는다. 그런가하면, 하루중 가장 어두운때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라. 밤으로 올라가자"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올라가자. 그리고 그전각, 궁궐들을 헐고 거기에 있는 재물들을 차지하자."
(2) 이심판의 원인은 전적으로 저희의 사악함 때문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초하였다. 그들은 그벌을 감수해야만 하며, 저희가 압제자들이었던고로, 이같이 압제를 받아야 했다. 그들은 동족이면서도 권세와 이득을 가지게 될때면, 서로를 혹독하게 취급하였었다. 그러므로 이제 적들이 와서 그들 모두를 그렇게 다룰 것이었다. 죄가 그들에게 있어 당연한 것이 되었다(7절). 그들은 샘이 그물을 풍성히, 끝없이 솟쳐냄같이 적대행위에 있어서 악을 발하였다. 그외침은 소돔의 경우처럼 하나님앞에 이르게 되었다. 질병과 창상이 내앞에 계속하느니라. 곧 육신적으로, 혹은 심령에, 재산이나 명예에 부당하게 손해를 입은 자들의 탄식이 그에게 상달되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상호간에 가하는 악행과 잘못들을 주시하시고 분노하시며, 조만간에 그것을 갚으실 것이다.
(3) 이심판을 막을수 있은 방법이 주어지고 있다. 예루살렘아 너는 훈계를 받으라(8절).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그리고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너희에게 주어진 교훈을 받으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지혜롭게 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마음이 너를 싫어하고. "너로부터 떠나리라." 이말씀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얼마나 부드러운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를 암시해주고 있다. 바로 그의 마음이 그들과 결합해 있었으며 죄이외에는 그어떠한 것도 그결합을 떼어낼수 없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노를 야기시키는 백성에게서조차 떠나기를 싫어하시며 그들이 곤경에 빠지는 것을 피할수 있도록 참된 회개와 개혁을 하기를 진정으로 바라신다.

Ⅱ. 유다의 죄와 형벌 (렘 6:9-17)
(1) 본문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의 패망이 경고되고 있다. 앞에서 갈대아 군대의 신속성을 읽을수 있었는데(4,5절) 이제 대살륙을 접하게 된다. 보물에 대한 적들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포도를 땀같이 그들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갛게 주우리라(9절).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려는 포도따는 자처럼, 보다더 많이 담기위해서 '그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릴 것이다.' 아마도 이백성은 '탐남하며'(13절) '저희 포도를 다 줍지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율법(레 19:10)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들자신이 말갛게 주움을 당할 것이었다. 자녀들은 아비의 죄때문에 초래된 재난으로 죽임당한다. 그재난은 모인 청년들과 그들의 즐거운 모임에도 미칠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멸절될 것이다.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11절). 노쇠한 늙은이들을 살려두어도 부릴수 없고 죽인다해도 저희의 안전에 별로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까지 잡을 것이다. 그들의 집과…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12절). 선지자는 이와같이 무서운 선포를 함에 있어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있다(11절).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그는 위협적인 경고를 기뻐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하지않을수 없었다. 그는 '참기 어려웠다.' 만군의 여호와의 영으로 말미암아 권능이 충만하여 말하지 않을수 없었다.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13절). 그들은 백성들에게 저희의 잘못을 지적해주지 않았으며 저희가 처해있은 위험을 경고해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백성들을 고쳐주는 의사역할을 하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하고자하는 모든 것을 허용하였으며, 위험에 처해있지 않다는 입에 발린 말로 그백성들을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14절). 그들은 죄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달래면서, 병이 골수까지 잠식하여 있는 그들을 편안하게만 해주기위해 아편을 투여하여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었다.' 그들은 평강이 없을때에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모든 일이 잘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그들 자신이 불경건한 길을 걷고있었기 때문이다. 그와같은 자들은 범죄의 길에 있는 우리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해주는 거짓 친구들(즉, 우리의 가장 나쁜, 가장 위험한 적들이다)로 간주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노를 야기시켰던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가 이멸망을 몰고왔다.
1) 그들은 한사코 저희가 처한 위험에 대한 경고를 들으려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한 경고를 그들에게 주도록 명하신다(9절). 그러나 그는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할꼬"라고 말한다. "나는 저희가 들을수 있게끔 말할수가 없도다. 왜냐하면 저희의 귀가 할례를 받지못하였기 때문이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며 책망과 경고 또한 그렇게 여기는도다." 욕으로 여김받은 책망은 확실히 무서운 것으로 변할 것이다.
2) 그들은 세상에 정착하여 그에 대한 사랑으로 넋을 잃었다(13절).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자까지 다 탐람하며, 부정한 이득을 탐내는도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강포하고 포학하게 만들었다(6,7절).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선지자들에 대하여 굳어지게 하였다.
3)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은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할정도로 그렇게 굳어졌다. 그들은 철면피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항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참회의 부끄러움을 감수하지 않으려하는 자들은 철저한 파멸을 피할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15절). 그들은 낯을 붉히지 않았기때문에 사지를 떨게될 것이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할수 없는 자들은 악한 상태에 처해있는 것이며, 그상태는 이내 더욱 나빠질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스스로 강퍅하여져서 낯을 붉히지 않으려 하였으나, 후에는 저희 힘으로 어찌할수 없을만큼 그렇게 굳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저희에게 있는 유일한 선한 특질을, 많은 악한 특질과 혼합함으로써 상실하였다. 그 선한 특질이란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수치심이다.
(3) 그들에게 종종 주어졌던 선한 권면들은 허사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길에 서서 보라"고 말씀하시곤 했었다. 그는 그들로하여금, 여행의 목적지로 인도하는 바른 길을 찾는데에 있어 신중한, 그래서 멈추어 서서 물어보곤 하는 나그네들같이 되라고 하셨었다. 사람들이 자기 영혼을 위해서 그같이 지혜로우면 얼마나 좋겠는가! "옛적 길을 알아보고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욥 8:8) 네 아비,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신 32:7). 그리하면 너는 경건의 길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축복하시는 길이었고 사람들이 그길에서 형통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옛적 길, 곧 너희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걸어갔던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라. 그리고 너희가 그들에게 주어졌던 약속들을 물려받기 원한다면, 그들의 발자취를 밟으라.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라." 그러나 또한 악인이 밟던 옛적 길도 있다(욥 22:15). 우리는 옛적 길이 어디인지 알아볼때, 오로지 선한 길을 찾아야 한다. 신앙과 경건의 길이 선한 옛적 길이며 모든 시대에 있어 모든 성도들이 행보하였던 길임을 주목하라. "네가 선한 길이 어디인지 찾아내면 그리로 행하라. 그리고 계속하여 그길을 걸으라." 혹자는 이말씀을 참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 사이의 쟁의와 관련하여 주어진 권면으로 본다. "길에 서서 보라. 그중 어느 길이 기록된 말씀과 하나님의 섭리의 일반적인 방법과 일치하는지, 어느 길이 너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지 살펴보라. 그리고 그길을 따라 행하라.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너 자신을 향유하게 될것이며 그길이 너를 참된 평강으로 인도해주리라. 네가 여행의 종착점에 이르러 풍성한 보상을 얻게되리라." 그러나 그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16절).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기질을 부정하고 그길로 행하지 않겠노라." 그들이 타당한 논증에 복종하려 하지않자, 작은 심판을 통해서 보다 큰심판을 경고해주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로하여금 저희가 처해있은 위험을 깨닫고 놀라게 하기위해 선지자들을 보내신다(17절). 내가 또 너희위에 파숫꾼을 세웠으니. 이들의 경고는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님은 그의 섭리가운데서 '나팔을 불리신다'(슥 9:14). 파숫꾼들은 그 나팔소리를 듣는다(렘 4:19). 그리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소리를 듣도록 외친다.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우리는 주의하지 않겠노라. 선지자들이 그들자신과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는 편이 좋으리라."

Ⅲ. 바벨론 침략예고 6:18-30
(1)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처사가 공평함을 온세상에 알리신다(18,19절). 너희 열방아 들으라. "특히 열방의 권세자들, 힘있는 회중아 알라. 현재의 유다와 예루살렘을 주목하라. 내가 나와 언약을 맺은 이백성에게 재앙을 내림으로 너희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뇨'라고 하며 놀라는도다. 저희에게 임한 재앙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임을 알라. 그들은 이방 나라들과 연합함으로써 스스로 강해졌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약화를 초래하였고 스스로 팔려고 내놓은바 되었느니라. 그것은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에 대한 정당한 징벌이라. 그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내 말을 듣지아니하며 내 법을 버렸기 때문이라. 그들이 그모든 것을 거부하였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처사가 그들에게 부당한 것이라고 말할수 없느니라."
(2) 하나님께서는 자신들의 예배가 저희의 죄를 속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청원을 기각하신다. 그것은 부질없는 청원이다(20절). "황금 제단위에서 향기를 내며 사르도록 유향과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너희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너희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는도다." 희생과 분향은 그들을 중보자에게로 이끌어 그를 믿는 저희의 신앙을 돕기위해 정해진 것이었다. 이러한 선한 목적으로 드려지는 제물은 열납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제물과 그것을 드리는 자를 다 존중하셨었다. 그러나 제물이 계속하여 범죄할수 있는 자격증을 사고자하는 생각으로 드려졌을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그를 노엽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3) 하나님께서는 파멸을 예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개선되기를 싫어하였기때문에 그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신다(21절). 내가 이 백성앞에 거침을 두리니. 이것은 그들을 죄에 빠지게 하는 거침이 아니라 환난에 빠지게 하는 거침이다. 하나님은 저희가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취하는 모든 방도들을 지체시키신다. 적들의 무리가 그들에게 거침돌이 되었다. 아비와 아들들이 한가지로 거기 거치며. 아버지에게 있는 지혜도, 아들에게 있는 힘도 그들을 피하게 해줄수 없다. 그는 갈대아인들을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다. 멀리 북방에 있는 바벨론과 바벨론왕에게 속한 속국들이 이일에 사용되어야 했다(22,23절). 그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큰나라이다. 그들이 말을 타고. 그러므로 그들은 아주 빨리 움직이며 전장에서는 한층 사나와진다.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그들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있다.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같은 자라 그들이…항오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하느니라.
(4) 하나님께서는 이 가공할만한 적의 침입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빠지게될 혼란을 묘사하신다(24-26절). 우리가 그소문을 들었으므로 손이 약하여졌고. "우리는 저항할 마음이 전혀없도다. 고통이 우리를 잡았으므로 우리가 해산하는 여인같도다." 죄의식은 환난이 닥쳤을때 사람들을 실심케 한다. 그들은 집안에만 틀어박히며, 싸우거나 도망침으로써 살아날 궁리를 생각하기보다는 순순히 죽으려 한다. 그들은 서로 말한다. "너희는 밭에도 나가지 말라. 길에도 행치말라. 만일 그렇게한다면 위험해지리라. 왜냐하면 대적들의 칼과 그두려움이 사방에 있음이라." 선지자는 그들에게 애통하기를 촉구한다. "딸 내 백성이여, 너희 하나님이 애곡하라고 너희를 부르시는 것을 들으라. 하루동안 굵은 베를 두르거나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에 그치지 말고, 부모가 독자를 잃음같이 재어서 구를지어다."
(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현재 심판받고 있는 이백성의 재판관으로 선임하신다. 내가 이미 너로 내 백성중에 살피는 자와 요새로 삼아. "내가 너로 망대위의 보초로 세워 그들의 길을 알고 살피게 하였노라"(27절).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당한 처사를 족히 여기게끔 말씀하시며 그로하여금 직접 목도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망대로 세우셨다. 그들의 불만에 찬 공격에 견딜수 있게끔 그에게 용기를 주시면서, 견고한 망대, 요새로 삼으셨다. 그는 이제 알게될 것이었다. 그들은 다 심히 패역한 자로 패역자중의 패역자이며(이말은 이렇게 읽을수 있다), 최악의 반역자이다. 그들은 서로를 헐뜯고다니며 비방하는 자이다. 그들은 지천한 금속, 놋과 철이다. 그들은 은과 금같은 자들이었으나 타락하였다. 그들이 다 심히 패역한 자며…다 사악한 자라(28절). 그들은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기위해 열심이다. 그들을 개선시키려고 생각한 것은 허사였다. 갖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29,30절). 그들은 광석에 비유된다. 즉, 다소 좋은 금속을 함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어 제련사가 그것을 풀무에 넣고 갖은 수고를 다했지만 한낱 폐석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된 광석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지자들과 섭리를 통하여 이백성을 정제시키고자 하셨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허사였다. 계속되는 고난에 의하여 그들은 꺼지지 않는 불가운데 있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풀무는 너무 불가까이서 맹렬이 불다가 그옆에 타버린다. 요즘에 수은이 사용되듯, 당시에 은을 정련하는데 사용되었던 납이 불에 사라져버림으로써 작업을 하지 못하게 된다.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그의 수고가 허사가 된다. 악한 자가 제하여지지 아니하나니.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킬 우려가 있는 부패한 자들을 회중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않고 있다. 파멸의 운명이 그들에게 임하였다(30절). 그들은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될 것이다. 즉 쓸모없고 무가치하게 될것이다. 그들은 마치 저희안에 다소 은이 들어있는양 번쩍거리지만 그들가운데에는 참된 신이 조금도 없다. 여호와가 그들을 버리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죽음과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는 그들을 개선시키기위한 적절한 수단들을 모두 사용하시기까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이 내어버릴 은으로 판명될때까지 그들을 쓸모없는 찌꺼기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 핵심
6:1-30
예레미야는 완악한 유다 백성에게 재앙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했으나 그들은 예레미야의 거듭된 경고를 모두 무시하였다. 이로써 심판이 불가피해졌다.
종교의식을 통한 전쟁준비(6:4)
“준비하라”(히, 카다쉬)는 어떤 종교의식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종교의식을 통해 전쟁을 준비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는 신의 힘을 빌어 승리를 거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은 성전(聖戰)에 임하는 군대를 위해 축복해 주었고(신 20:2-4), 군사들은 전쟁을 수행하기전에 금욕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방의 술사들은 전쟁의 시기와 공격장소를 알려주기위해 점을 치기도 했다(겔 21:21,22).
풀무(6:29)
금속을 용해시켜 제련하는 용광로. 고대인들은 금속물질을 정련(精鍊)할때, 풀무에 납을 함께 집어넣고 열을 가했다. 풀무가 뜨거워질때, 납은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면서 찌꺼기를 걸러준다. 그러나 금속물질이 너무 지저분하면, 불순물이 잘 제거되지 않는다. 이경우 제련과정은 무위로 끝나며, 수고한 자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못한다.

# 묵상
하나님의 말씀전달을 망설인 예레미야 ( 6:10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전달에 있어서 갈등을 느낀 이유는 백성들의 귀가 할례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고 즐겨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하는 것처럼(4:4), 그들의 귀도 할례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은 악과 더불어 자족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듣기 좋아하고 자기의 죄를 책망하는 소리는 듣기 싫어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다시한번 돌이켜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대상 ( 6:11 )
선지자 예레미야가 지적한 하나님의 분노대상은 거리의 아이들과 청년들로서, 아이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은 당시의 타락상이 아이들에게까지 미쳤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이말은 당시의 사회가 얼마나 타락된 사회였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합니다.
옛적 길 ( 6:16 )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과 교훈으로, 과거에 조상들이 걸어갔던 경건한 순종의 길을 가리킵니다. 그길을 걷는 것은 선한 길을 가는 것이나, 백성들은 그길을 가지않겠다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는 죄악을 범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율법의 길을 버리고 악의 길을 고집하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길은 좁은 길이고 험한 길이지만 영생의 문으로 들어갈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유다 북방에서 올 큰나라 ( 6:22, 23 )
바벨론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잔인하기 이를데 없으며 활과 창을 잡았고 목소리는 바다의 흉용함같은 자들입니다. 이는 바벨론의 군대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유다의 통곡 ( 6:26 )
굵은 베를 두르고 재에서 구르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달라는 회개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극심한 재난을 만났을때 나타내는 슬픔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마도 임박한 멸망의 공포로인한 애통의 표현인것 같습니다. 이제 이들은 마치 독자를 잃음같이 슬퍼하고 애통하게될 것입니다. 독자의 죽음은 곧 후손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크나큰 재앙으로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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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루살렘의 부패 5:1-9
(1) 예루살렘에 곧고 정직한 자가 한사람이라도 있는지 찾아보라고 요구되고 있다(1절). 예루살렘은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리하였던 옛세상처럼 되었다. "거리와 시장이 있는 넓은 장소들을 찾아보라. 만일 너희가 공의를 행하며 심판을 집행하는 한사람, 한집행관(이렇게 읽을수 있다)이라도 찾을수 있는지 보라."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졌다(사 59:14). 만일 소돔에 의인 열사람만 있었더라면, 만일 예루살렘에 의로운 사람이 일천중에 하나, 일만중에 하나만 있었더라면, 그들은 구함받았을 것이었다.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신앙을 고백해온 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들덕분에 예루살렘의 파멸을 막을수 있겠느냐? 아니라. 그들은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있도다"(2절). 그들은 여호와의 사심으로, 오로지 그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맹세이었다.
(2) 선지자는 이백성의 완고함에 대해 하나님께 탄식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목도하라고 호소하셨으나(1절) 여기에서 선지자는 그의 눈에 호소한다(3절). 여호와여 주의 눈이 성실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주님은 만인의 진면목을 보고 계시지 않나이까? 그들은 바위보다 더 단단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나이다. 주께서 그들을 치셨을지라도, 혹독하게 그들을 때리셨을지라도, 그들은 징계를 받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들은 징계를 통한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였나이다."
(3) 시험이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주어지며 그로인하여 그들의 악한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
1) 가난한 자들은 무지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중 많은 무리가 돌아오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그들을 변명해주고 있다(4절). 이무리는 비천하고 우준한것 뿐이라. "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지못했으며 그러므로 이제 교훈의 방법으로는 그들을 되돌아 오게할수 없나이다." 세상에 무지가 가득할때 그것은 많은 불경건과 불의를 야기시키는 통탄할만한 요인이 된다. '세상에는 악마에게 속한 가난한 자가 있는반면 하나님께 속한 가난한 자도 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저희의 가난에도 불구하고 책을 통한 배움없이도 여호와의 길을 알수가 있다. 그리하여 그길로 걸으며 저희 임무를 다할수 있다. 그러나 여기 이백성은 스스로 무지한 상태에 남아있고자 하였다.
2) 부자들은 오만하고 무례하다(5절). 내가 귀인들에게 가서.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보다 잘따르고 있는지 보리라. 그러나 비록 그들이 여호와의 길을 알고 저희 하나님의 심판을 안다할지라도, 그의 다스리심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고자세로다. 그들은 일제히 그멍에를 꺾고 결박을 끊었도다. 그들은 아무리 만물을 다스리시는 여호와라해도, 그의 징계를 받기에는 저희들이 너무도 대단한 존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도다. 가난한 자는 연약하며 부자는 자기 고집으로 가득차 있으니 아무도 저희 임무를 다하지 않도다."
(4) 몇가지 특정한 범죄들이 열거되고 있다. 그들의 허물은 매우 많았으며, 그수를 계속 증가시켜 패역이 심해졌다(6절). 그들은 영적행음을 저지름으로써 오직 하나님께만 합당한 영예를 우상들에게 돌렸다. 나를 버리고 신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7절). 그리고 스스로 그것들과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육적으로도 행음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다. 하나님의 명예를 빼앗기도록 방치되었다. 그들은 수치심이나 징벌에 대한 두려움없이 행음하였다. 그들은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서로간에 만나게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짐승같이 될정도로 저희의 욕망은 뻔뻔스러웠다(8절). 마치 살찐 수말같이 그들은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었다(8절).
(5) 하나님은 그땅의 보편적인 부패로인하여 그들에게 진노하신다. 외적이 침입하여 저희의 나라를 마치 수풀에서 나오는 사자같이, 혹은 굶주림으로 대단히 난폭하고 사나와져서 나오는 밤의 이리같이, 혹은 날래고 잔인한 표범같이 덮칠 것이다. 적들은 그들의 성읍을 엿보면서 그성의 거민들을 이 비참한 궁지에 빠뜨릴 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서에 머물러있다면 굶주려 죽을 것이요, 만일 움직인다면 찔려죽을 것이다. 그리로 나오는 자마다 찢기오리니(6절). 그리고 이모든 피비린내나는 사건은 그들의 허물이 많은 탓이다. 살육을 낳게 한것은 바로 죄이다. 내가 어찌 이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너희는 무한히 순결한 하나님께서 이러한 가증스러운 불결을 묵과하실 것이라고 생각할수 있느냐?" 내 마음이 이런 나라에 보수하지 않겠느냐(9절). 이러한 죄에 대해서 죄책을 느낀 자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는 하였지만(므낫세가 그러했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은 오직 이세상에서만 징벌되어질수 있기때문에 만일 그가 노여워하신다는 아무런 뚜렷한 징표도 없이 묵과되어지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당치 못하다.

Ⅱ. 우상숭배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 5:10-19
(1) 이백성의 죄는 그들을 파멸의 운명으로 몰아넣었다(10절). 비록 다소 상이점이 있기는 하나 이스라엘 족속과 유다 족속은 하나님께 심히 패역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그들은 그를 경배하는 일을 저버리고 외식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경고된 하나님의 심판과 그위협을 귀담아 듣지않았다(12,13절). 많은 무리들이 하나님께서 엄격하시지 않으리라고 믿음으로써 패망하였다.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아니할 것이며.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정당한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경고를 일소에 붙이고 받지않았다. "저희가 그렇게 말하기만 하는도다. 이는 그것이 저희 직업이기 때문이라. 저희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한낱 저희의 감상적인 상상의 표현일 뿐이라." 그들은 선지자들을 위협했다. 선지자들은 바람이라…그같이 그들이 당하리라. "그들이 기근에 대해 말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하는가? 그들에게 고생의 떡으로 배부르게 하라." "그들이 칼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는가. 칼로 그들을 망하게 하라"(2:30).
(2) 이백성은 저희 자신의 죄로인해 징벌받는다. 하나님은 그와같이 조롱당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하고 이백성으로 나무가 되게하리니, 죄로 말미암아 죄인들은 저희 스스로를 연료로 만들었다. 적들이 그들을 덮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일을 맡기셨다(10절). 너희는 그성벽에 올라가. "그들을 짓밟아 누르라. 거룩한 사명앞에서 돌성벽이 진흙성벽과 같이 되리라. 너희가 그 성곽을 훼파해도 좋으니라. 그리하여 둘러쌓여졌던 요새화된 성읍들을 드러나게 하라. 이는 저희의 성곽이 여호와의 것이 아님이라. 그는 그들을 지켜 주시지도 방비해 주시지도 않을 것이라." 이침략자들이 어떠한 두려운 일을 행할지 여기에 묘사되고 있다(15절). 이스라엘 족속아 보라 내가 한나라를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오게하리니. 여기에서 보면 이 갈대아인들의 나라를 멀리있는 나라라고 했다. "그나라는 원방에서 너희에게로 올것이라. 그리고 오랫동안 머무를 것이라. 그래야 병사들이 그토록 오래 행진해온 보답을 얻을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라." 그나라는 강하고 오랜 나라이다. 저희의 오랜역사에 대해 스스로 자부하고 있으므로 더욱 전제적이고 오만할 것이다. 그방언을 네가 알지못하며. 그들은 아람 방언을 한다. 언어의 차이는 평화조약을 맺는 일을 보다 어렵게할 것이다. "저희가 네 자녀들이 먹을 들판의 추수 곡물과 네 집의 양식을 저장해두지도 않고 먹을 것이라. 그들은 네 양떼와 소떼를 먹을 것인데 이는 너희가 그것들로 우상의 제물을 삼아왔기 때문이니라. 그들은 너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도 남겨두지 않을 것이라. 그들은 너희가 나라를 지켜주리라고 믿으면서 의뢰하는 성읍, 곧 그견고한 성들을 파괴할 것이라."
(3)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자비로운 동정심을 가지고 계심이 시사된다. 적들은 파괴하고 훼파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렇지만 다훼파하지는 말아야 한다(10절). "참혹한 그때에도 내가 너희를 진멸치는 아니하리라."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하지 않으신다면 적도 그렇게 하지못할 것이다.
(4) 이일을 행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들을 진멸치 않음에 있어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거의 진멸에 이르게 함에 있어 의를 나타내신다(19절). 백성들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느뇨"라고 말할 것이다. 마치 그와같이 범죄한 나라를 치는 이유가 충분히 보여지지 않았다는 태도이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어떠한 대답을 할지 지시받고 있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려 취해온 행동때문에 하나님이 이같은 일을 그들에게 행하신다고 말해주어야 한다. 그렇게해야 그들은 저희가 받는 징벌가운데서 저희가 지은 죄를 알수 있게된다. 얼마나 많이 그들이 저희 땅에서 이방 신들을 섬겼는지 잊어버렸단 말인가. 또한 그러한 행위로인해 저희를 낯선 땅에서 이방인들을 섬기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잘못이라는 것인가(신 28:47,48).

Ⅲ. 유다 백성에 대한 경고 5:20-24
그들을 책망해온 선지자는 여기에서 다른 목적으로 또다시 그들에게 보냄을 받는다. 그는 그것을 유다에 공포해야 했다. 그들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어야 했다.
(1) 그는 이백성의 수치스러운 우매함을 한탄한다. 그들은 '우준하여 지각이 없는 백성'이다. 그들은 이제껏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그의 섭리를 통하여 저희에게 참으로 자명하게 알려졌건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한다(21절).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못하는 백성이여. 그들은 지적인 능력을 가졌건만 필요할때 그것을 활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지는 완고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규례를 따르기에 적합하지 않았다(23절). 너희 백성은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이 있어서. 지각을 둔하게 만드는 것은 타락한 편견을 지닌 의지이다. 이백성의 품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되기전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있는 본연의 성격이다. 우리는 우준하고, 지각이 느리고, 배반하며 패역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선한 것에 대한 뿌리깊은 혐오감으로인하여 그에게 반역할뿐만 아니라, 악한 것에 이끌리는 강한 성향으로 말미암아 그를 배반한다.
(2) 선지자는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결핍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그들을 지각없는 자로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내앞에서 떨지 아니하겠느냐(22절). 그는 그들이 배반하고 갔음을 보고 그들의 배반의 이유를 이와같이 덧붙였다(24절). 또 너희 마음으로…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이처럼 악한 생각들이 저희 마음에 가득차게 되었다. 이는 그들이 선한 생각들을 수용하거나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3) 그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우리를 사로잡도록 몇가지 사항을 제시한다.
1)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크심을 두려워해야 한다(22절). 여기에 한 예증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다에 계한을 두셨다. 만일 조금만 더올라오면 온세상을 뒤덮을만한 조수가 하루에 두번씩 밀려오고, 또한 폭풍때에는 무서운 위력을 지닌 큰파도가 해안을 때려대지만 그것들은 현상태에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고 그대로 물러간다.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흔하지 않은 우리 눈에 기이한 것이다. 흉용한 파도를 막는데는 모래벽도 놋성벽과 같은 효력을 지닐수 있다. 이것은 과격한 말은 단단한 바위와 같아서 노를 격동시키는 반면, 유순한 대답은 노를 없애며 노도와 같은 분노를 사그러뜨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이계한은 '영원한 계한'에 의해서 정해졌다. 그것은 세상의 창조, 곧 하나님께서 바다와 육지를 나누셨던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창 1:9,10;시 104:6이하;욥 38:8이하). 그것은 영원한 법령이다. 오늘날까지 효력을 지니고 있으며 밤낮이 없어질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이유가 된다. 왜냐하면 이로써 우리는 그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2)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선하심을 경외해야 한다(호 3:5).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 즉, 그를 경배해야 한다. 이는 그가 우리에게 계속하여 선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이른비와 늦은비를 주신다. 파종직후에 이른비를 주시며, 추수직전에 늦은비를 주심으로써 이로말미암아 우리를 위하여 추수기한을 정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심을 인식해야 한다. 이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그를 경외해야할 좋은 이유가 되며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의 사랑안에 거할수 있다.

Ⅳ. 유다 백성의 불의 5:25-31
(1) 선지자는 그들의 죄로인하여 그들이 어떠한 해를 입었는지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시고자 하셨을때,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하늘을 놋과 같이, 땅을 쇠와 같이 만드는 것이 죄이다.
(2) 그는 그들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알려준다. 그들이 참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그만두었을때, 도덕적인 정직성마저 사라졌다. 내 백성중에 악인이 있어서(26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중에서 발견되었기때문에 그만큼 더악하였다. 그들은 저희의 사악한 행위의 현장에서 발견되었다(즉, 잡혔다). 사냥꾼이나 새잡이들이 사냥감을 잡으려고 올무를 놓듯이 그들은 덫을 놓아 사람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오락으로 삼았다.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에게 해를 가할 방법을 도모하였다(저희의 선함이 곧 미워하는 원인이었다). 특히, 신실하게 그들을 책망한 자들, 그들이 탐낼만한 재산을 가진 자들에게 그러하였다. 포도원을 탐내 나봇을 모함으로 죽인 이세벨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거짓되고 패역하였다(27절). 조롱에 새들이 가득함같이 너희 집들에 속임이 가득하도다. 그들의 집은 사기행각으로 말미암아 부요해졌다. 어떠한 사람과 거래를 하든지 그들은 할수 있는 한껏 속일 것이었다. 그들은 행위가 심히 악하여졌다(28절). 법과 정의의 이름을 내걸고 사기를 행하는 자들은 아마도 공공연한 힘과 폭력을 가지고 자기앞에 있는 모든 것을 쓸어가는 악인들(26절)보다 더행악하는 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악한 길로 나아가면서 번창하며, 그럼으로써 그들의 마음은 완악해진다. 저희가 세상에서 창대하였으며 거부가 되어 그것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들은 윤기있고 매끄럽다. 그들은 윤택하다. 그들은 아름답고 즐겁게 보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찬탄한다. 그리고 그들은 악한 일을 당하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즉 그들에게는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다. 그들은 우리가 악인에게 의례히 기대하기 마련인 그러한 재앙을 만나지 않는다. 그들은 권세를 손아귀에 쥐게 되었을때, 그것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다. 자기 이익을 얻으려고 송사 곧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하지 아니하며 빈민의 송사를 공평히 판결치 아니하니.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번창하며 하나님이 그불의를 보지않으신다. 그렇다면 이세상의 것들은 분명히 최상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흔히 극악한 자들이 그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용인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렇다. 비록 저희의 악행에 대한 심판이 속히 실시되지는 않는다해도 반드시 집행될 것이다. 전반적인 부패가 거기에 있었다(30,31절). 이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그토록 특혜받고 앞서갔던 백성이 타락하다니 놀라운 일이었으며, 혐오를 받게되다니 기괴한 일이었다. 지도자들은 백성을 오도했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신성한 계시를 받았다는 허울과 가식아래 자행되는 공격보다 더 종교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없다.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그들은 저희의 위세와 부, 게으름과 사치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들은 저희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사악함에 대항하여 그것을 증언해야 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좋게 여기고 있도다." 그들은 헐거운 고삐로 어거되는 것을 좋아하며 저희 욕망을 제지하지 않을 그러한 통치자들을 매우 좋아한다.
(3) 그는 이모든 것의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 될지 알려준다. 내가 이일들을 인하여 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기에서는 심판이 자비와 겨루어 일이 이렇게 되어져야 마땅함을 설득하고 있다. "내가 벌하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무한하신 지혜자께서 이 양자사이에서 문제를 조정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줄로 확신한다. 내 마음이…보수하지 않겠느냐. 그렇다. 만일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그래야 마땅하다. 그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악한 길로 나아가는 자들은 그길들이 보다더 큰죄와 철저한 파멸로 그들을 이끈다는 사실을 참작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핵심
5:1-31
유다에 임할 심판의 당위성을 지적한다.
전통(5:16)
화살을 넣고다니는 통으로, 사냥할때에나(창 27:3) 전쟁때 사용했다(사 22:6). 고대 근동의 전쟁에서는 보병뿐만 아니라 전차병도 전통을 졌다. 시 127:5절에서는 자식이 전통에 비유되었으며, 사 49:2절에서는 여호와의 선지자가 전통의 화살에 비유되었다.

# 묵상
귀인들에게 간 예레미야 ( 5:5 )
예레미야가 귀인들에게 간 이유는, 그들이 부자들이기때문에 생계의 염려가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듣고 잘지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예레미야가 생각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지키려 하지않고 여호와를 배반했습니다.
용서받을수 없는 이스라엘 ( 5:7 )
이스라엘은 은혜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그거짓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음행에 빠졌기때문에 하나님께 사함받을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행하지 않고 악을 따라사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대가를 받게 하십니다.
바람으로 일컬어진 선지자들 ( 5:13 )
신실한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을 조롱할때 썼던 말로서, 유다 백성들은 당시 진실한 선지자의 경고를 듣지않고 여호와의 실재를 부정하며 예언자들을 무능한 바람이라고 조소했습니다. 이는 곧 신실한 선지자들의 말을 사람들이 가벼이 여겼다는 뜻으로 말씀의 권위가 가볍게 취급되어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말씀에 대한 진지한 자세가 있어야할 것입니다.
열린 묘실인 전통 ( 5:16 )
대적들이 쏘는 화살에는 독이 묻어있었는데, 그화살이 빠르므로 그것을 피할 자가 없고 모두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직접적인 의미는 화살통이 마치 시체를 받아들이려고 입을 연 무덤과 같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바벨론 침략행위의 잔혹성 또는 무자비한 학살을 의미합니다.
넘지못할 하나님의 한계 ( 5:22 )
사나운 바다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한계를 넘지 못했다고 하는 이말은 하나님의 창조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연만물을 지배하시는 우주의 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모르고 그분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즉 선지자는 본문에서 생명없는 바다도 여호와께서 정해놓으신 경계를 넘는 일이 없는데, 오히려 생명과 지각이 있어 여호와의 뜻을 충분히 알만한 사람들이 여호와를 버렸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괴하고 놀라운 일 ( 5:30, 31 )
이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다는 말은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이 자기 권력으로 백성을 다스리며,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참을 예언하며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려야할 선지자와 지도자들은 거짓을 예언하고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나, 백성은 그들의 악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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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진실한 회개에 대한 촉구〔1〕 4:1,2
하나님께서 배역한 이스라엘을 돌아오라고 불렀을때(3:22) 그들은 즉시 대답하였다.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나이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대답을 주목하신다.
(1) "돌아오겠노라고 네가 말하였느냐? 그렇다면 내게로 돌아오라. 철저하게 돌아오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배로 돌아오라. 너는 모든 죄를 완전히 버려야만 하며 우상숭배의 어떠한 흔적도 남겨서는 아니될지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1절). 그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단지 자명할뿐만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그것들은 그의 목전에서 치워져야만 한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럽고 순전한 눈앞에서 그를 노엽게 만드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다시 죄로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너는 방황치 아니하며' 혹은 '방황치 아니해야 한다'로 읽는다. 그들은 하나님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한다(2절).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그의 현존하심은 너에게 가장 신성한 사실이리라."
(2) 그는 그들에게 결심을 굳게하라고 격려하신다. "만일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오려고 한다면 돌아올수 있으리라. 너희는 옛 약속대로 포로에서 풀려나 너희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신 4:29;30:2). 그들은 거짓 신들 안에서가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안에서 스스로 복을 빌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분안에서 영화로와질 것이며 그분을 저희의 영광으로 삼게될 것이다.

Ⅱ. 진실한 회개에 대한 촉구〔2〕 4:3,4
이제 선지자는 하나님을 힘입어 그의 설교를 그가 살고있던 땅의 사람들에게로 돌리고 있다. 3:12절에는 그가 북쪽을 향하여 무슨 말씀을 선포하였는지 나타난다. 곧 당시 포로로있는 자들에게 주어진 위로였다. 그러면 이제 번영을 누리고 있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는 무슨 말이 주어지는지 살펴보자. 이는 그들의 회개와 각성을 위한 설교이다. 이 두절을 통해서 선지자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개혁하도록, 그리하여 그들에게 내려지기로 예정된 파멸의 심판을 막도록 권면하고 있다.
(1) 그들이 이행해야할 임무들이 있다.
1) 그들은 어떤 좋은 것을 기대하면서 땅을 경작하듯 그렇게 자기들의 심령을 갈아야한다(3절). 너희 묵은 땅을 갈고. "너희 스스로를 경작지로 삼아 갈고(혹은, 너희의 경작지를 갈아 젖히고), 가시덤불속에 파종하지 말라. 오랫동안 너희가 해온 것과 같은 그러한 헛된 수고를 하지않도록 하라. 너희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를 받기에 합당하게 만들고 너희가 그렇게 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물리치라. 그리하면 너희는 자비를 기대할수 있으며, 너희 자신을 돕고자 하는 스스로의 노력안에서 번영을 바랄수 있게되리라." 회개하지 않은, 겸손하지 못한, 아무것도 심지않은 땅과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울타리도 없으며 아무런 결실도 내지못하는 가시덤불과 잡초가 무성한 땅이다. 그것은 바로 타락한 마음이 내놓는 자연적인 산물이다. 그리고 만일 은혜로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비와 햇빛은 그에 대해 쓸모없게될 뿐이다(히 6:7,8). 우리는 이 묵은 땅을 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가시덤불과 같이 우리의 수고를 가로막는 부패한 뿌리들을 파내야 한다.
2)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때 육신에 행했던 할례를 저희 영혼에도 해야한다(4절).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향하여 너희 마음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육신과 그정욕을 극복하라. 육체의 할례를 자랑치말라. 왜냐하면 그것은 한낱 징표에 지나지 않으며, 내용을 가지지 못하면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헌신의 표이다. 할례를 행할때 고백했던 그러한 신실함으로 행하라. 여호와께 너희 자신을 바치고 정하게 하라."
(2) 위험이 경고되고 있다. "회개하고 개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나의 분노가 불같이 발하여 사르리니. 우리에게 있어 그무엇보다도 두려워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다.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발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악행이다. 급박한 위험에 대한 경고는 우리를 각성시켜,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하도록 스스로를 깨끗케 하고,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는 것을 바라게끔 만들어야 한다.

Ⅲ. 임박한 심판에 대한 경고 4:5-18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은 때리시기전에 경고하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외부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즉시 그들에게 닥칠 전면적인 파멸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주신다. 이소식은 유다의 모든 성읍과 예루살렘의 모든 거리마다 선포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듣고, 회개하거나 핑계치 못하게 되어야 한다.
(1) 전쟁이 선포되었고 적들의 침입이 알려졌다.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수년전인 그당시의 선지자를 통해 선포되어 진다(5,6절). 나팔을 불고 기호를 세우며 함께 모여 시온을 향하도록 백성들을 소환해야 한다. 그성을 지켜야할 사람이든, 그성안에서 보호를 받아야할 사람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군대 소집령이 내리고 모든 군대는 모여져야 한다. 싸우기에 적합한 자들은 견고한 성읍들에 들어가 그것을 방어해야 하고, 연약한 자들은 지체하지 말고 도피해야 한다.
(2) 바벨론 왕과 그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급한 전갈이 왔다. 그적은 본문에서 이렇게 비유되고 있다.
1) 배가 고플때 먹이가 될 제물을 찾기위해 수풀에서 올라온 사자에 비유된다(7절).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짐승들은 공포에 질려 쉽게 먹이가 되고 만다. 느부갓네살왕은 이 울부짖는 사자이며, 열방을 멸하는 자이다. 그리고 지금 그는 유대 땅을 향하여 나아오고 있는 중이다. 이방의 열방을 멸하는 자가 또한 유대인을 멸하는 자가 될것이다. 이는 그때 그들이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저희 자신들을 이방인과 같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땅을 황폐케하려고 이미 그처소, 바벨론을 떠나 나왔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게될 것이며 들과 같이 풀로 뒤덮이게될 것이다.
2) 뜨거운 바람에 비유된다(11절). 이것은 마치 북풍이 비를 일으킴같이(잠25:23) 땅의 결실들을 결단내며 그것들을 말린다. 또한 그것은 모든 것을 오싹하게 만드는 검은 바람이다. 그들이 어디로 갈지라도 그들을 에워쌀 것이다. 그것은 산의 높은 곳을 치며, 평지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가는 '광야 자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지금 그 사나운 바람이 그들을 향하여 불어올 것이다. 이는 키질하기 위함도 아니요, 정결케하려함도 아니다. 그것은 강한 바람이다(12절). 이바람은 여호와에게로, 아니 여호와를 위하여 올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가지고 올것이며, 그를 위하여 보내신 그일을 수행할 것이다.
3) 구름과 날랜 회리바람에 비유된다(13절).
갈대아 군대가 바람이 몰고온 구름같이 올라올 것이다. '말들은' 저희 먹이를 덮칠때에 '독수리보다 빠르다.'
4) 치는 자와 밭을 지키는 자에 비유된다(15-17절). '소리가' 가나안의 전성읍들 중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단에서 선포된다. 그들은 소식을 접했으며 그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였다. 그러면 그것은 무슨 소식인가? "열방에, 열지파의 성읍들에 고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저희 자신의 안전을 예비할수 있도록 하라. 그것을 예루살렘에 공포하여 그들로하여금 치는 자들이 먼땅에서부터 오고있음을 알게하라." 그들은 악을 행할 온갖 기회를 엿보던 병사들이다. 그들이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유다 성읍들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며 마치 밭을 지키는 자같이,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지키기위해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둘러 사면으로 가둔다(참조. 눅 19:43).
(3) 이심판이 있게된 통탄할만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였다. 그것은 모두 그들 탓이었다. 그가 나를 거역한 연고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7절). 갈대아인들이 그들을 침입하였으며 저희가 쳐들어오도록 틈을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의 죄였다. 네 기록 행사가 이일들을 부르게 하였나니(18절). 그죄는 우리의 모든 재난의 요인이다.
2) 하나님은 저희의 죄로인해 저희에게 진노하셨다. 갈대아인들을 이처럼 사납게 만든 것은 '여호와의 명렬한 노이다'(8절).
3) 그는 마땅한 진노로 그들에게 이형벌을 내리셨다. 이제 내가 그들에게 심판을 베풀 것이라(12절).
(4) 이 심판으로인해 비통한 결과가 나타난다. 싸워야할 백성들은 절망하여 적들에게 대항할 마음도 갖추지 못할 것이다(8절). 이를 인하여 너희는 굵은 베를 두르고 애곡하라. 칼로 무장하는 대신에 그들은 굵은 베를 두를 것이다. 적들이 아직 멀리 있을때에 그들은 항복하고, '화있도다 우리는 멸망하도다'(13절)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용자로 이름 높았었다. 그러나 죄의 결과를 보라. 그죄가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없앰으로써 그들에게 있었던 용기도 빼앗아갔다. 그날에 왕은 실심할 것이다. 즉, 그의 지혜와 용기를 잃을 것이다. 그의 방백들과 모사들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실심할 것이다. 제사장들의 할일은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것이다. 그들은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말라'고 말해야 했다(신 20:3). 그러나 이제 제사장들 자신이 놀랄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용기를 줄 엄두도 내지못할 것이다.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마지막때에 "사람들이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라"고 예시하시고 있다(눅 21:26).
(5) 선지자는 백성들이 속았다고 불평한다(10절). 그표현이 참으로 묘하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진실로 이백성과 예루살렘을 크게 속이셨나이다 이르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으리라 하시더니.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속이지 않으심을 분명히 확신한다.
1)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약속들로 그들 스스로를 속였다. 그들은 그약속들이 수행되어지는 조건들을 행하는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그약속들 위에 서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저희 자신을 속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였다고 사악하게 불평하였다.
2) 거짓 선지자들이 평화에 대한 약속으로 그들을 미혹하였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약속을 하였다(렘 23:17;27:9).
3)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이 미혹하는 것을 허용하셨으며, 백성들이 그들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들이 그미혹하는 말을 사랑하여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강한 미혹까지도 허락하셨다.
4) 이구절을 의문문으로 읽을수가 있다. "주께서 진정 이백성을 속이셨나이까? 그들이 크게 기만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나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강을 기대했으나, 반대로 칼이 생명에 미쳤기 때문이나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속이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종종 그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셨었다. 그러나 저희 자신의 선지자들이 그들을 속였으며, 하늘의 하나님께서 평강을 말해주시지 않은 자들에게 평강을 외쳤다. 사람들이 스스로 속아 자멸하고,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왔을때 스스로에게 평강을 약속하는 것을 보는 일은 서글픈 일이다.
(6) 선지자는 백성들을 속이지 않고자 노력한다.
1) 그는 그들에게 저희의 상처를 보여준다. 그들은 저희의 죄에 따른 징벌을 알아야만 했다(18절). "이는 너의 악함이라. 그러므로 그것이 고통스러울 것이니라. 그고통이 네 마음에까지 미칠 것이라. 칼이 생명에 미칠 것이라"(10절).
2) 그는 그들에게 처방책을 가르쳐 준다(14절).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루살렘이라는 말로써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거민들 각각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각기 그들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공중을 도울수 있는 것은 개인적인 회개이기 때문이다. 각 사람이 저희의 악한 길을 돌이키고, 저희 마음의 악을 씻어야 한다. 개혁은 구원에 이르기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마음에까지 미치지 아니하면 어떠한 개혁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마음의 개혁이외에는 어떠한 효과적인 개혁방식도 없을 것이다. 이절의 후반부분에서 그는 그들에게 묻고있다. 네 악한 생각이 네 속에 얼마나 오래 머물겠느냐. 죄를 짓고자하는 혹은 해를 가하고자하는 생각들은 악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악한 생각들이며, 거기에서부터 모든 다른 사악함이 나오게 된다(마 15:19). 혹자는 여기에 있는 악한 생각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의 견책과 부르심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악을 계속 고집하는 모든 어리석은 구실들로 이해하기도 한다.

Ⅳ. 예레미야의 애통함 4:19-31
선지자는 여기에서 고뇌하며 큰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와 같이 울부짖는다. 그표현들은 돌같은 마음도 녹이기에 충분할만큼 비장하다. 슬프고 아프다(난외주에는 '내 창자여 내 창자여'로 되어있음-역주) 내 마음 속이 아프고.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해도 이세상과 같이 악한 곳에서 살때에는 슬픔의 사람이 될수밖에 없다.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수 없으며, 내 심령의 격정으로인하여 나는 평안할수 없도다." 그가 이와같이 슬퍼하는 것은 그자신을 위해서도 아니요, 그의 가족가운데 있는 것은 그의 백성들의 문제이다.
(1) 그들은 심히 범죄하였으나 개혁되기를 원하지 않는다(22절). 이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비록 그들이 우둔할지라도 그들을 그의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그를 버렸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롬 11:1). 내 백성은 나를 알지못하는 우준한 자요(22절). 그들은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다. 그들은 땅의 평화를 거스려 행악을 도모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묘안을 고안하며, 그것들을 숨기는 일에 있어서는 지혜롭다. 그러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며 마음을 쏟지 아니한다.
(2) 그들은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으며, 구제되어질수 없다.
1) 예레미야는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나의 심령 네가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19절). 내가 저 기호를 보며(21절). 그는 '나의 귀, 네가 들었다'고 말하지 않고 '나의 심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선지자의 심령을 통하여 그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마치 그가 육체의 귀로 들었던 것과 같이, 그의 심령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것을 들었다. 비록 그가 이재난을 예고했을지라도, 전혀 그재앙의 날을 바라지 아니하였다. 그는 거룩한 경외심에 대해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그리고 그렇게함으로써 참된 때맞은 회개로 심판을 막고자 하였다.
2) 파멸이 예고되고 있다.
① 그파멸은 순식간에, 홀연히 있을 것이다. 패망에 패망이 연속하여(20절). 한 슬픈 재난이 다른 재난을 뒤따라 일어날 것이다. 요시야왕의 죽음이 그수문을 연다. 그가 죽은지 3개월이 채 못되어 그의 아들이며 계승자인 여호아하스는 애굽왕에게 붙잡혀갔다. 2,3년이 못되어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탈취했으며, 그후로 계속하여 유대 땅을 침략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완전히 예루살렘을 파괴하여 황폐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천막은 홀연히 파멸되며 그들의 휘장은 잠시간에 열파되었다.' 시골이 먼저 황폐해졌다. 천막에 살던 목자들과 그외 모든 사람들은 즉시 탈취당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막에 거하다가 갈대아인의 군대가 처음 쳐들어왔을때 예루살렘으로 도피한 레갑 족속의 일을 읽을수 있다(렘 35:11).
② 이전쟁은 계속되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완고하여, 바벨론왕에게 항복하려 들지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바벨론에 대항할 모든 기회를 모색하였다. 선지자는 이렇게 탄식한다. 내가 저 기호를 보며 나팔소리 듣기를 어느때까지 할꼬(21절). "영원히 칼에 삼키우기야 하겠는가?"
③ 온땅이 탈취를 당하니(20절). 처음에도 그러했으며 마침내는 완전한 혼돈의 땅이 되었다.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23절). 마치 창세때와 같았다(창 1:2). 창세때에 사용된 단어, 혼돈과 공허가 유대 땅에도 적용되어졌다.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이것은 깊음위에 있던 흑암에 빗대어진다(창 1:2).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땅뿐만이 아니다. 하늘도 그들에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고난과 더불어 흑암을 받게되었다. 왜냐하면 저희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볼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들이 불태운 그들의 집과 성읍들에서 나는 연기가 햇빛을 가렸으며, 그리하여 하늘에도 빛이 없게되었다. 혹은 이말을 비유적으로 받아들일수도 있다. 땅(즉, 일반백성)은 불모지가 되었고 혼돈하였다. 그리고 하늘(즉, 방백들과 치리자들)도 빛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어떤 지혜도 없으며 백성에게 줄 어떤 위로도 그들을 이끌 안내자도 없었다.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24절). 영원한 산들이 무너지는 것이 보였다(합 3:6).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장소였던 산들이 마치 백성들의 죄를 깨닫고 있다는듯이 떨며 진동하였다. 작은 산들도 죄지은 나라의 무거운 짐을 떨구듯 가벼이 요동하였다. "내가 성읍들을 본즉 사람이 없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던 공중의 새조차 더이상 볼수도, 들을수도 없도다." 유대 땅은 이제 소돔의 못과 같이 되었다(참조. 신 29:23).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26절). 모든 성읍도, 그문들과 벽들도 무너졌으며 평지와 같이 되었다. 2차적인 원인들만 살피는 자들은 이모든 일을 침략자들의 광포한 책략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1차적인 요인을 보는 선지자는 그일이 여호와의 앞에서 일어났다고 말한다. 나라는 완전히 황폐해질 것이다. 즉 이 온땅이 황폐할 것이며 곡물 경작지나 목초지도 모두 버려질 것이다(27절). 기병과 활쏘는 자의 훤화로인하여 모든 성읍이 도망하여. 그들이 분노에 잡힌바 되기보다는 수풀에 들어가고 바위에 기어오를 것이다. 즉 성읍들이 버림을 당할 것이다. 이는 다가오는 파멸에 대한 음울한 경고이다. 그렇지만 이모든 경고들가운데 한마디 위로의 말씀이 나온다(27절).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실 것이다. 예루살렘은 재건되고 땅에는 사람이 살게될 것이다. 이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위안을 주기위한 것이다.
④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었으며 구제할 도리가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려하지 않으시며 그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28절). 그들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2:2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후회하지 아니하실 것이며, 심판을 돌이키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들은 저희 자신을 도울수 없었다(30,31절). 그들은 어떤 조처를 취할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스스로 안위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막상 일이 닥치면 크게 당황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30절). 그들은 저희가 의지하던 동맹국들에게 무시당할 것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구애를 표하곤 하던 연인들에게서 버림받은 창부에 비유했다. 그창부는 열방들가운데서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고자 자신이 할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예루살렘은 사람들을 보내어 환심을 사려고하며 마치 부요한듯 보이기위해 붉은 옷을 입고, 저가 가진 보물이 아직도 가득한듯 금장식으로 단장하여 꾸미고 있다. 현재의 불행을 감출수 있는 가장 화려한 색으로 눈을 그려 꾸며 화장하였다. 그러나 이 화장한 것이 현재에는 얼굴을 아름답게 해주나 실상은 얼굴을 해친다. 피부를 버리게 하며 주름잡히게 하고 거칠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너의 모든 이웃들은 네가 얼마나 빈곤한 자리에 있는지 그참상을 참으로 민감하게 알아채리라. 갈대아인들이 너의 붉은 옷과 금장식을 벗겨낼 것이라." 여기에는 이세벨의 이야기가 암시되고 있는듯하다. 그녀는 자기를 아름답게 꾸밈으로써 자기 운명에 도전하려 했지만 허사였다(왕하 9:30,33). 그들은 자기들의 고난이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이 피할수 없는 것임을 알게될 것이다. 내가 소리를 들은즉…이는 딸 시온의 소리라(31절). 즉, 갈대아인의 나팔소리에 반향하는 시온의 신음소리이다. 시온은 이웃들이 그녀를 동정하기를 거절하였기때문에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이러한 의미이다) 몹시도 슬퍼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 의지할 것을 찾으면서 손을 펴고 있다.

# 핵심
4:1
가증한 것 가나안의 더러운 우상들.
4:5-31
다가올 재앙으로인해 예레미야가 탄식과 슬픔을 발하고 있다.
기호(4:6)
항오를 벌여 행진할때 소속을 나타내는 깃발이나(민 2:2), 혹은 위급한 상황을 먼지역까지 전하는 신호나 표시따위를 가리킨다(사 5:26; 18:3). 그 예로, 적군의 침입을 알릴때 사용된 봉화를 들수 있다.

# 묵상
묵은 땅을 갈라 ( 4:1-4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앞으로 돌아오려면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갈아엎으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던 옛마음, 옛습관, 옛생활, 옛성품을 버리고 주의 백성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요구한 할례 ( 4:4 )
마음의 할례로서, 할례는 언약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언약을 지키지않고 할례라는 종교의식만을 치르면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교만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그러한 위선적인 행위를 지적하면서 하나님의 언약을 마음으로부터 지키게 하는 마음의 할례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속이시는 여호와 ( 4:10 )
이는 거짓 선지자들이 ‘평강하다’고 외치게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신 것에 대한 예레미야의 탄식입니다(왕상22:1, 2). 이와같이 진리의 말씀을 듣기 원치않는 악한 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 또한 하나님의 심판의 한방법임을 여기서 알수 있습니다(롬1:28).
적군 침략에 대한 대비책 ( 4:14 )
이대비책은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는 것, 곧 회개를 의미합니다. 적군이 몰려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므로 백성들은 그들의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했습니다. 진실하게 회개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그심판을 중지하시기 때문입니다(욥3:10).
예레미야의 슬픔묘사 ( 4:19 )
본문은 창자가 끊어지는듯한 예레미야의 아픔을 묘사한 말로서, 예레미야가 이런 아픔을 느낀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황폐화될 유다와 그백성들의 고통을 예견한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 크나큰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자기 나라와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단면을 볼수 있기도 합니다.
재앙의 이유 ( 4:22 )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려지는 까닭은,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지한 자녀 같았습니다. 그들은 출애굽등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섬김으로 어리석음을 범치않아야 합니다.
황무지가 될 좋은 땅 ( 4:26 )
황무지가 될 좋은 땅이란 이스라엘의 땅이 황폐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된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진노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곧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말합니다.
헛된 붉은 옷과 금장식 ( 4:30 )
본구절에서 언급된 붉은 옷과 금장식, 눈을 그려 꾸미는 것은 창기가 사람의 눈을 끌기위해 몸단장하는 것을 묘사한 표현입니다. 또한 이렇게 단장할지라도 연인들이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는다는 말에서, 연인들이란 여러 이방나라들을 가리킵니다. 즉 유다는 그들과 우호관계를 맺었고 전쟁의 위험시에 그들의 도움을 구했으나 그들은 유다를 외면했던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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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범죄한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3:1-5
이구절들은 소망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하나님은 그가 치유하시기 위해서 상하게도 하신다.
(1) 참으로 사악하게 이백성은 하나님을 버리고 음란히 행하였다. 그들가운데 한 낯선 신을 받아들이는 것만도 충분히 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릇된 예배에 대한 저희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였다.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1절). 그들은 우상을 숭배할 기회를 모색하며 새로운 샌들을 찾고자 하였다. 네가 길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같아서(2절). 즉 그들은 고객을 유인하는 아라비아 상인들같이, 혹은 저희의 제물을 찾는 아라비아의 도적들같이 새로운 신을 모색하였다. 그들은 단지 저희 자신들을 더럽혔을뿐만 아니라 저희의 땅 또한 음란과 행악으로 더럽혔다(2절). 그것은 민족적인 죄가 되었다.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3절). 즉 "네가 철면피하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얼굴을 붉히는 것은 덕스러운 모습이며 적어도 미덕의 일면이다. 그러나 수치를 버린 자들은 소망을 버린 자들이라고 볼수 있다.
(2) 하나님은 그들의 죄에 대해 참으로 부드럽게 견책하셨다. 그는 다만 그들에게서 단비를 거두시고 늦은 비를 거두셨을 뿐이다. 다시말하여 일년중의 한시기에 대해서만 견책하셨다.
(3)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다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셔도 그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잘 알려져 있던 이혼법에 따라서 그러하다(1절). 만일 어떤 여자가 한번 쫓겨난후 다른 남자와 결합하면, 그 여자의 전남편은 절대로 다시 그여자를 아내로 취할수 없다고 법은 명하고 있다(신24:4). 만일 결혼의 유대관계가 그와같이 엄격했다가 느슨해졌다가 하면 그규정은 심히 더럽혀질 것이며 그땅도 크게 악해질 것이다.
(4)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스럽게도 자신에게로 돌아오도록 그들을 초청하신다. "너희가 비록 악할지라도, 다시 내게로 돌아오라"(1절).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앞에 세우신 인간들처럼 성급한 분개도 하지않으신다. 그는 일찍이 어떤 남편이 간음한 그의 아내에게 취했던 태도보다 훨씬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친절하셨다. 그는 참으로 자비롭게도 그들이 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알려주신다(4절).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지 아니하겠느냐? 이제 너희는 너희의 죄를 보게되었고(2절) 그죄들로인하여 벌받게 되었느니라(3절). 그러므로 그죄를 버리고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호2:7)라고 말하면서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그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세워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이다'라고 주장하기를 기대하신다. 그들은 틀림없이 하나님에 대한 저희의 불충한 행위를 용서해 주시기를 빌면서 아버지되시는 그에게로 나아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보다 보편적인 방법이 취해질수도 있다. "아버지되시는 당신은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
이다." 나이가 어릴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갈때는 우리는 그가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는 소시때에 보호자이셨음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해야 한다. 그는 이후로도 우리가 의무를 이행할때에 보호자가 되어주실 것이다.

Ⅱ. 유다의 회개치 않음 3:6-11
이설교가 행해진 것은 요시야왕 때이었다. 그때에 그는 충심으로, 복된 종교개혁의 발판을 세웠으나 백성들은 그렇게 신실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과 유다 두왕국이 여기에 비교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왕위와 예루살렘 성전에 반기를 든 열족속이었으며, 유다는 다윗의 왕위와 예루살렘 성전이 귀속되어 있는 두족속이었다.
(1) 이스라엘, 즉 열족속에 대한 간략한 언급이 있다. 이스라엘은 교회와 국가 양면에 있어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제도를 배반함으로써 세워진 왕국이기때문에 '배역한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워진다. 그가 모든 높은 산에 오르며 모든 푸른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서 행음하였도다(6절). 즉, 그들은 산당과 숲에서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은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그들을 청하고 격려하셨었다. 그가 이모든 일을 행한후에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게로 돌아오리라 하였으나(7절). 그들은 버림받아 마땅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그에게로 돌이키기 위하여, 오직 그만을 경배케 하기위하여 저희가운데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다윗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요구하셨다기보다는 아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강조하신 것이다. 위대한 개혁가 엘리야도 그들에게 다윗의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우상숭배하기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다(7,8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원수의 손에 내어주셨다(8절). "내가 거기서 그들이 행음하는 모든 행위를 보고 그들을 내어쫓고 이혼서까지 주었노라." 그는 그들의 모든 회당들과 선지자 학교들을 흩으시고,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에 대해 그들이 더이상 어떤 주장을 내세울수 없도록 언약을 폐기하심으로써 그들과 이혼하신 것이다.
(2) 두족속의 왕국, 유다의 경우가 언급되고 있다. 유다는 '패역한 자매'로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아브라함과 야곱이라는 같은 줄기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배역자의 성격을 가진 것과 같이, 유다도 패역자로 불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배역하였을때 유다는 하나님과 가까이 있겠다고 고백했다해도(유다는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왕들과 제사장들에게 귀속되어 있었다) 유다역시 패역하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포로된 것은 유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의도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유다는 자신들에게는 제사장들이 될 레위인들과 왕들이 될 다윗의 아들들이 있으므로 안전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유다는 그땅을 더럽혔고 하나님앞에서 가증되이 여김받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돌과 나무로 더불어', 즉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더러운 우상들로 더불어 행음하였기 때문이다. 므낫세와 아몬의 치세아래서, 전나라가 타락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통치아래서 선하게 되어질지 여부를 시험하셨다. 그러나 악한 성향은 여전하였다.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뿐이니라(10절). 요시야 왕은 그의 선왕들중 가장 훌륭한 자가 일찍이 하였던 것보다 훨씬더 철저히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였다(왕하 23:25). 백성들도 겉으로는 그와같이 행하도록 강요되었다(대하 34:32;35:17). 그러나 그들은 진실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앞에서 바르지 아니하였다. 이와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바로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같이 유다도 내앞에서 물리치리라"(왕하 23:27)고 말씀하셨다. 진실함이 없는 신앙이란 있을수 없음을 우리는 안다.
(3) 이 자매관계에 있는 왕국들이 서로 비교되고 있으며, 둘중에 유다가 더 사악하다고 말해진다(11절). 이 비교적인 의가 이스라엘을 더 유익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선하지 못할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유다는 두가지 측면에 있어서 이스라엘보다 더 악하였다.
1) 이스라엘에게서보다도 유다에게서 기대되는바가 더컸다. 그러나 유다는 이스라엘이 했던 것보다 더 신성한 고백을 저버려 그것을 비천하게 만들었으며, 더 엄숙한 약속을 어겨 거짓되이 만들었다.
2) 유다는 이스라엘의 파멸에 의해서 충분히 경고받을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않았다.

Ⅲ. 하나님의 격려와 약속 3:12-19
이구절에는 놀라운 복음이 담겨있다. 선지자는 '북을 향하여 이말을 선포하라'는 지시를 받고있다. 이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던 앗수르로 사로잡혀 간 열지파 곧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외침이다. 이것은 또한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저희에게 주어진 부르심에 응하지않은 유다 사람들을 책망하기 위한 말이기도 하다. 배역한 이스라엘이 패역한 유다보다 하나님의 자비를 더빨리 받아들일 것이며, 그은혜를 더빨리 입게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북쪽을 향하여 선포된 이말씀은 더나아가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죄사함을 얻게하는 회개를 알리는 것으로 보인다(눅 24:47).
(1) 여기에는 배역한 이스라엘과 배역한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반역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초청이 있다(12절).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그리고 또다시 14절에서 이렇게 말해지고 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너희가 버리고 간 선한 길로 돌아오라." 그들은 돌아오라는 격려의 말씀을 받고있다. "너희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느니라.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의 노를 너희에게 쏟지 아니하리라." 그들은 어떻게 돌아와야할지 그방법도 가르침받고 있다(13절).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너의 허물을 인정하고 너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죄와 평화의 조건이 이처럼 낮추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만일 그들이 여전히 그에게로 나아오려 하지않는다면, 죄인들에 대한 정죄는 더욱 악화되어질 것이다. "선지자가 너희를 명하여 큰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겠는가? 하물며 너희에게 이르기를 다만 너희 죄를 자복하라 함에랴"(왕하 5:13).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인해야만 한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그에게 맞서며 범죄하여 왔음이라." 우리는 우리의 죄가 많음을 자인하여야 한다. 네 길을 달려 모든 푸른나무 아래서 이방신에게 절하고. "이리저리 우상들을 쫓아다녔도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않았도다. 그것을 인정하라. 그리고 그무엇보다도 너를 더욱 낮추어 겸손하라."
(2) 만일 배역한 자녀들이 돌아오면 그들에게 주어질 귀중한 약속들이 서술되어 있다. 그약속은 부분적으로는 유대 백성이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을때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예언은 복음교회를 통하여, 그리하여 사방에 흩어졌던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모임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어진다. "돌아오라, 너희가 비록 배역하였을지라도 내 자식이며, 너희가 비록 패역한 아내일지라도 여전히 내 아내라. 이는 내가 너희와 혼인하였음이라(14절). 그관계를 부인치않을 것이라." 이와같이 하나님은 저희 열조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신다(레 26:42).
1) 그는 흩어진 각처로부터 그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요 11:52).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14절). 하나님을 배역한 많은 사람가운데서 단지 소수만이 그에게로 돌아온다. 다시말하여 '성읍중에서 하나, 그리고 나라중에서 둘'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는 그하나를 찾아내실 것이다. 세계도처에 흩어져있는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는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거룩한 산, 시온 산, 거룩한 예루살렘, 즉 복음의 교회로 인도될 것이다.
2) 하나님은 그들을 모든 복된 길로 인도할 자를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5절).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① 교회가 모였을때, 그것은 반드시 통솔되어져야 한다. "내가 그들을 시온으로 데려오리니 거기서 그들은 야생동물로서가 아니라 목자의 지시를 따르는 양으로서 훈련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목자를 즉 행정관들과 목회자들 둘다를 주리라."
②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목자들을 가진 백성은 복되다. 그목자들은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저희의 규례로 삼고 그를 위하여 다스리며, 있는 힘을 다해 그와같이 다스릴 것이다.
③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은 양떼를 훔치지 아니하며 지식과 명철로 양떼를 양육한다. 단지 목자들일뿐만 아니라 교사들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양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말씀이야말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하는 지혜가 되기 때문이다.
3) 하나님은 이제 더이상 언약궤가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신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임재의 징표이었던 그것은 이제 치워질 것이었다(16절). 그들이 이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때, 즉 메시야의 왕국이 세워질때에는 사람과 사람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전한 영적인 예배방식을 가지게 될것이고 그로써 모든 의식법은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신약성경의 말씀과 성례전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모든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모든 것을 대신하실 것이다. 복음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곧 언약궤이다. 그는 자비의 터이시다. 우리가 이제 기대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존재를 통한 하나님의 영적임재이다. 언약궤가 없어지는 것에 관해서 많은 표현이 본문말씀에 사용되었다. 즉 언약궤를 '생각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만들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참된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를 예배할 것이기 때문이다(요 4:24).
4) 하나님은 여기서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복음의 교회가 탁월한 위치에 있게될 것을 약속하신다(17절). 다음의 두가지 요소가 그것을 유명하게 만들 것이다.
① 복음의 교회에서의 하나님의 특별한 주재와 통치이다. 이것은 여호와의 보좌, 곧 그의 영광과 통치와 은혜의 보좌로 불리워질 것이다.
② 이방인들이 거기에 받아들여진다. 열방이 그곳에 세워진 여호와 보좌로 모이게될 것이다.
5) 하나님은 교회안에서 놀라운 개혁이 일어나게될 것을 약속하신다. 다시는 그들의 약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살지않고 법도에 따라, 즉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것이다. 무엇이 죄를 이끌고있는지 보라. 그것은 우리 자신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상상이다. 죄는 그마음의 생각과 기분을 따라가는 것이다. 은혜로인하여 개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태도를 버리고 신앙과 바른이성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6) 유다와 이스라엘이 아름답게 하나로 합쳐질 것이다(18절).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와 다시 가나안에 정착했다.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 복된 연합은 모든 원수들이 멸하여진뒤, 복음의 교회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때 그들은 한목자의 인도아래 같은 우리에 있게될 것이다.
(3) 모든 자비의 길로 행함에 있어 부딪치게 되는 어려움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고 하나님은 물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못해 은혜를 나타내시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가치가 전혀없으며 그러한 것을 기대할만한 자격도 없다. 그처럼 비천하고 연약한, 그처럼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그리고 그처럼 진노를 야기시키는 우리가 어떻게 자녀중에 들게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자녀로 삼으신 자들은 또한 그로부터 낙토 가나안 땅을 받게될 것이다. 그곳은 영원한 기쁨이 있는 천국의 상징이었다. 낙토를 멸시하며(시 106:24) 합당치 못하게 여기는 자가 그땅의 한부분을 차지하리라고 기대할수 있겠는가?
2) 그는 이물음에 대해 스스로 답하신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 하고 하나님은 모든 반대 요소들에 대해 친히 답하신다. 하나님은 자녀중에 돌이키는 자들을 두실 것이며, 그들에게 양자의 영을 주심으로써 그들로하여금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수 있게(갈 4:6) 하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것이라.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와서 너희 자신을 아버지인 나에게 맡길 것이며 나의 은총을 바라게 되리라." 하나님은 그들이 다시는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끝까지 인내할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에 경외심을 주실 것이다.

Ⅳ. 회개에 대한 촉구 3:20-25
(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배역하고 떠난 것에 대해 책망하신다(20절). 그들은 혼인계약을 맺음으로써 하나님과 결합되었으나 그계약을 파기하고 하나님께 패역되이 행하였다.
(2) 이죄가 사실임을 저희가 자백한다(21절). 하나님께서 그들의 배역을 질책하셨을때, 저희 자신을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앞에서 겸허하게 낮추고, '자산 위에서 애곡하며 간구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는 '그들이 저희의 길을 굽게 하였으며 저희 하나님 여호와를 잊었었기' 때문이다. 죄는 굽어진 길로 탈선하여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잊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그들은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3) 하나님은 그에게로 돌아오라고 그들을 청하신다(22절).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그는 부드럽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자식들'이라고 부르신다. 고집세고 심술궂은 자녀일지라도 그의 자식들이다. 하나님은 저희를 바로 잡으실 것이며 결코 내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녀들에 대해 참으신다. 그러므로 부모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죄를 자인하였을때(21절), 그때 그들은 돌아오도록 청함받고 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그에게로 부르신 것과 같다. 돌아오는 자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용서하시는 자비와 안정시키는 화평과 새롭게하는 은혜로써 우리의 배역함을 고치실 것이다.
(4) 그들은 이부름을 기꺼이 수락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반향이다. 마치 부서진 성벽에 부딪쳐 되돌아오는 목소리와 같이 이것은 상한 심령들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은"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은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대답이다.
1) 그들은 그들의 것이 되신 하나님께 그들 자신을 헌신하면서 나아온다.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우리가 당신을 버리고 떠났던 것은 우리의 죄요, 어리석음이었나이다."
2) 그들은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을 요청하면서 나아온다. 작은 산들과 큰산 위의 떠드는 무리에게 바라는 것은 참으로 허사라(23절). 그들은 산위에서 우상을 섬겼다(6절).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하지않을 것이다.
3) 그러므로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저희의 하나님으로 의지하면서 나아온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진실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있나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죄로부터의 큰구원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여호와의 구원, 그의 큰구원이다.
4) 그들은 저희의 곤고에 대해 하나님의 의를 인정하면서, 그리고 저희의 죄에 대해 스스로 심판하면서 나아온다(24,25절). 그들은 모든 재난들을 저희가 섬겨온 우상들 탓으로 돌린다. 부끄러운 그것이…우리 열조의 산업…을 삼켰사온즉. 진실로 회개한 자들은 죄를 수치, 부끄러움으로 부르며 죽음과 파멸로 부른다. "그것이 우리 열조가 수고하여 우리에게 물려준 모든 좋은 산업들을 다 삼켰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어렸을때로부터 우상숭배가 우리의 번영을 망쳐왔음을 알았나이다." 그들의 우상들이 삼켜온 열조의 산업가운데서, 그들은 특별히 양떼와 소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죄와 어리석음이라는 수치를 자초하였다(25절). 우리는 수치중에 눕겠고. "그로인해 견딜수 없기 때문이니이다." 우리는 수욕에 덮이울 것이니. "우리의 형벌의 수욕과 참회의 부끄러움이 우리를 덮을 것이나이다. 우리는 대대로 죄인들이나이다. 우리와 우리 열조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렸을때로부터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 비록 때때로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자 하긴 했을지라도, 오늘까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렸을때로부터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계속 죄를 지어 비록 때때로 회개하고 죄를 사함받고자 하긴 했을지라도, 오늘까지 범죄하였나이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나이다. 우리가 죄지었을때, 회개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나이다." 이모든 말들은 포로되었던 자이든, 저희 땅에 남아있던 자이든 관계없이, 열지파의 이스라엘 족속(20절)의 말로 보여진다. 선지자는 거룩한 경쟁을 하도록 유다 사람들을 자극시키고자 저희의 회개를 예로 들고있다.

# 핵심
3:1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도 유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영적간음이었다. 영적 불성실은 종종 일상생활의 부도덕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성전 음행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 묵상
단비와 늦은 비 ( 3:3 )
단비는 양력 10월에 내리는 이른비로 씨뿌릴때 오며, 늦은 비는 양력 4월에 오는 비로 곡식이 성숙할때 오는 비입니다. 본문에서 단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음은 곧 가뭄의 재앙이 임했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로인해 징벌이 임했지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이혼서 ( 3:8 )
이 이혼서는 주전 722년경 이스라엘이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에게 멸망당한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우상숭배라는 영적 간음행위 때문에 남편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내버림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보다 세상 것에 더 삶의 가치를 두고 생활한다면 이처럼 이혼서를 받고 버림당하는 신세가 될것입니다.
하나님의 성격 ( 3:12 )
하나님은 긍휼이 있으시며 노(怒)를 끝까지 품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은 배역한 북이스라엘 왕국에 소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환난이나 곤고한 중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구원의 소망을 가져야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 ( 3:15 )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란 장차 유다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귀환할때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계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일수 있는 지식과 명철, 곧 복음을 통한 통치를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 ( 3:19 )
‘이스라엘을 자녀중에 둔다’는 말은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자녀로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탕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양자가 되고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갈4:5, 6; 요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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