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예레미야의 투옥과 밭의 매매 32:1-15
갈대아 군대에 의한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점차로 임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나아오실때에 회개로 그를 맞으려고 하지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되기까지 심판을 진행하셨는데 그멸망은 시드기야 11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사건은 제 10년에 이루어진 일이다. 바벨론 군대의 왕이 예루살렘을 이미 침략하였고 강력한 기세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1) 예레미야는 도성과 궁성 모두가 바벨론왕의 수중에 떨어지게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는 이 성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이 성을 그들에게 내어주시며 아무런 보호도 하지않으시리라고 그들에게 말한다(3절). 그리고 설혹 시드기야가 도피하려고 하여도 그는 사로잡힐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손에 죄수로 넘겨지리라고 말한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왕이 자기에게 운명의 심판을 내리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크게 분노하며 자기를 내려다 보는것을 보게될 터이었다. 눈이 서로 볼것이며(3-5절). 시드기야는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며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를 권고할때까지 비참한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다. 다시말해서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자연적인 죽음을 통하여 거두어 가시기까지 계속 그곳에서 살게될 것이다. 이는 느부갓네살이 그보다 앞서 그의 눈을 뽑아 빛을 뺏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이 예언으로인하여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곳은 일반적인 감옥이 아니라 '유다왕의 궁중에 있는' 감옥이다. 그곳에서 그는 좁은 공간에는 갇히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곳에서 그는 군중들의 공격으로부터 차단될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은 감옥이었으며 시드기야는 그가 한 예언으로인하여 그를 그곳에 가둔 것이었다(2,3절). 그는 예레미야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대하 36:12) 마음을 강퍅케 하였다. 비록 그가 예전에는 '자기들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해'주기를 바라면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인정하였을지라도(렘 21:2), 이제는 예언으로인하여 그를 징책하고 있다(3절). 그는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었으며 아마도 더이상 예언하지 못하도록 제한을 가하였을 것이다.
(3) 감옥에 있으면서 예레미야는 가까운 친척으로부터 아나돗에 있는 토지를 구입한다(6,7절 이하). 전국토가 이제 황폐해지며 갈대아인들의 수중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예레미야가 토지를 구입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리고 비록 돈을 내버리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그는 그뜻에 순종하였다. 그의 친족이 그에게 와서 그땅을 사도록 제안하였다. 그것은 예레미야 자신의 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기업을 무를 권리'가 그에게 있었다(8절). 그리고 만일 예레미야가 거절한다면 그것은 친족의 임무를 행하지않는 것이 된다. 그땅은 제사장들의 성읍교외에 있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사기를 거절한다면 그같은 혼란의 틈바구니속에서 다른 지파에게 매매될 위험도 있었다. 그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가 그땅을 사는 것은 그의 친척에게도 자비로운 행동이 될것이었다. 아마도 그친척은 그때에 대단한 돈이 필요했던 듯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미리 말해주심으로써 하나멜이 자기에게 오리라는 것을 알았을때,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것을 구매하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에 대해 더이상 생각함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그밭을 샀다. 그는 돈을 지불함에 있어서 매우 정직했으며 정확하였다. 그는 '은을 저울에 달아주었다.' 그것은 '은 칠십세겔'이었다. 만일 우리가 그당시에 돈이 대단히 귀중하였고 토지는 매우 헐값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이액수가 적은 것에 그리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증서를 보전하는 일에 대단히 신중을 기하였다. 그들은 '증인의 앞'에서 기록하였으며 매매증서 한부는 '인봉하였다.' 그리고 또다른 한부는 '인봉치 아니하였다.' 매매행위는 증인들앞에서 바룩의 손에 맡겨졌으며, 바룩은 '많은 날동안 보존할'수 있도록 '토기에 담아'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는 예레미야의 후손을 위한 것이었다. 이거래의 의도는 비록 지금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해 있고, 전국토가 황폐하게 될것이었으나 기한이 되면 '이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함이었다(15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하여금 결혼하지않고 살게함으로써 예루살렘의 멸망이 임박하였다는 자기의 예언이 틀림없음을 깨닫게 하셨고, 이제는 그로하여금 토지를 사게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장래의 회복에 대한 그의 예언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셨다. 루키우스 플로루스(Lucius Florus)는 제 2차 포에니 전쟁때의 로마 시민들의 용감성에 대한 훌륭한 예증으로서 그것을 연관짓고 있다. 즉, 한니발이 로마를 포위하여 곧 로마의 주인이되리라고 생각되는 바로 그때에 그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토지의 일부를 주인이 팔려고 내어놓자 한시민이 즉시 그것을 샀다는 것이다. 그것은 로마 군대가 포위를 뚫고 일어서리라는 확신에서였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전부를 내걸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지 아니한가.

Ⅱ. 예레미야의 간구 32:16-25
하나님께서 이나라를 무너뜨시리시며 시간이 지난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로 계획하셨음을 알게되었을때 선지자는 다소 곤혹을 느끼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긴했어도 그내용을 곰곰히 생각해보고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몰라 크게 난처해 했다. 그는 이 난감함가운데 처하여 하나님앞에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쏟아놓는다.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혀있었다. 그는 고통중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섭리의 뜻에 대하여 알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창조주로서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17-19절).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의 특별한 뜻에 대하여 문제를 느낄때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선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가르침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다. 예레미야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대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1)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능력과 생명과 동력과 온전함의 근원이시다. 그는 '큰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다.'
2) 그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주에게는 능치못한 일이 없으시니이다.
3) 그는 무한한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주께서는 자비로우실뿐만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나이다. 몇몇 사람들에게, 이곳저곳의 한두사람에게가 아니라 천만인에게 베푸시는 분이니이다."
4) 그는 공평무사하시며 불변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5) 그는 우주를 지배하시며 명령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시니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6) 그는 만사를 최선의 상태로 이루신다. 그는 '모략에 크시며 행사에 능하시며,' 그의 지혜의 계획은 참으로 깊고 광대하시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모든 행위들을 돌보신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인정한다(19절). 주는...인류의 모든 길에 주목하시며. 즉, 그들이 어느곳에 있든지 악한 자와 선한 자를 주목하시며, 그들의 '모든 길'에 대하여 무관심한 방관자가 아니라 관찰하시는 심판자로서 주목하신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발견하셨듯이 그들도 하나님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3)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전에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크신 일들을 열거한다.
1) 하나님께서는 억압당하던 애굽에서 '징조와 기사로' 그들을 인도해내셨다.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매년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주변국가들이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높인 기사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이 오늘과 같이 된것이라고 말한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이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는 그것을 '그들에게 주시기로 그열조에게 맹세하셨었다.' 그리고 맹세하신대로 그것을 그자녀들에게 주셨으므로(22절) '그들이 들어가서 차지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전에 자기 교회를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이들을 자주 상기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특히 그교회를 처음에 어떻게 세우셨는지, 그경이로운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4) 예레미야는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여 반역하였음을 슬퍼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반역에 대해 내리신 심판을 애통해 한다. 그는 여기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행한 배은망덕한 행위를 슬픈어조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기로 약속하신 모든 일을 행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무릇 주께서 행하라 명하신 일을 행치 아니하였다'(23절).
1) 예레미야는 현재 예루살렘이 당하고 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경고와 비교해 본다. 그리고 '주의 말씀대로 되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일에 대하여 전에 경고하신바가 있으시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경고에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멸망은 방지되었을 터이었다.
2)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현재 당하고있는 상태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뢰한다(24절). 대적들이 이 성을 치기위하여 토산 흙은 흉벽을 쌓고 기관을 설치한 것을 보시라고 의뢰한다. 보옵소서...주께서 보시나이다. "이것이 주께서 주의 이름을 두시기위해 택하신 그성이니이까? 그것이 이와같이 버려진바 되어야 하겠나이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결코 불평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행해 주셔야할지 명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저희의 처지를 바라보시기를 바랄 따름이다. 우리가 어떠한 역경에 처해있든지 우리는 이로인하여 스스로를 위로할수 있으니, 곧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며 그 치료법을 알고계신다는 사실이다.
(5)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친척의 밭을 사도록 명하신 뜻을 좀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하는듯이 보여진다(25절). "비록 이 성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바 되었음에도, 그리하여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소유를 즐길수 없을듯이 여겨짐에도 주께서는 내게 밭을 사라 하셨나이다." 그는 그렇게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자 곧장 그대로 행했었다. 그러나 그일을 행한 그는 왜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렇게하도록 명하셨는지 좀더 알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인 복종으로 따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지만 그복종이 보다더 헤아려 깨닫는 복종이 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규례와 심판에 대해 논박할수 없다. 그러나 물어볼수는 있으며 또 물어보아야만 한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가 무슨 뜻이뇨'(신 6:20).

Ⅲ. 멸망과 구원의 메시지 32:26-44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그의 마음을 평정시키기위하여 주어진다. 여기에는 현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목적과 장차올 세대에 대한 그의 자비의 목적이 완전히 밝혀지고 있다. 예레미야는 자비와 심판이 어떻게 병행할수 있는지 알지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 두가지의 병행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다. 예레미야는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도록 명령받았을때, 하나님께서 갈대아인들로 포위를 풀게하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고 대답하신다. "언도된 판결은 집행되리라. 예루살렘은 황폐해지리라."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가 이밭을 사라는 명을 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모든 자비를 보류해 두셨으며, 그들은 귀향후에야 다시 저희의 땅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의미임을 알게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 매매는 그때에 그들에게 풍성하게 베풀어진 영적인 축복들의 상징에 불과함을 알려주신다. 그영적인 축복들은 밭이나 포도원과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더귀중한 것이었다. 예레미야에게 임하신 이 '여호와의 말씀'에서 우리는 얼핏 위협적인 경고를 보게되나, 다시보면 그것은 구약성경 다른 어느곳에서 보여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중한 약속인 것이다.
(1)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이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과 권능을 확증하신다(27절). 나는 여호와요. "나는 자존하며 스스로 충만한 자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온인류의 하나님이라."
2)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왕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키신다. 내가 이 성을...바벨론왕...의 손에 붙일 것인즉 그가 취할 것이라(28절). 갈대아인이 와서 이성읍에 불을 놓아(29절). 그성읍은 불에 탈것이며 거기에 있는 집들도 모두 불에 탈것이다. 하나님의 집도, 왕의 집도 예외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3) 이 성에 대하여 이처럼 혹독한 심판이 집행되는 이유가 설명된다. 이 성을 멸하게 만든 것은 죄이다. 그들은 철면피하게 죄를 범하고 죄에 애착을 가졌다. 그들은 '바알에게 분향하였다.' 사람들이 볼까봐 부끄러이 여기며 귀퉁이에서 분향한 것이 아니라 '집 곧 그지붕에서' 그리하였다(29절). 그들은 하나님을 '격노케하는' 일을 행하였다(29절). 이스라엘 자손은 그손으로 만든 것을 가지고 나를 격노케한 것뿐이니라(30절). 그리고 다시한번 말씀하신다. 그들이 '모든 악을 행하여 내 노를 격동하였음이니라'(32절). 그들은 그의 질투를 유발하고 감히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예루살렘 '성이 오늘까지 나의 노와 분을 격발하였다'(31절). 그들은 계속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였다. "그들은 처음에 한백성을 이룬이래로 예로부터 내 목전에 악만 행하였느니라(30절). 그들이 광야에서 행했던 불평과 반역이 이를 증거하느니라. 그리고 예루살렘성은 '거룩한 성'임에도 불구하고 건설된 날부터 오늘까지 나의 노와 분을 격발하였느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공적인 범죄에 가담하였으므로 공적이 멸망에 포함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성전으로부터 반역한 '이스라엘 자손'뿐만 아니라 성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 '유다 자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번 되풀이하여 그들을 회개하도록 부르셨으나 그들은 안하무인격으로 그에게 등을 돌렸다. "내가 그들을 부지런히 가르쳤도다. 일찍이 일어나 가르쳤으며 저희의 능력에 알맞게 가르치고자 고심하였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도다." 그들의 우상숭배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한 모독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자기들의 가증한 물건들을 세워서 그집을 더럽게 하였기' 때문이다(34절). 그들은 자기 자녀들에게 극도로 비정상적인 잔인한 죄를 지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자녀를 몰렉의 불에 지나가게 하였다'(35절). 그들은 '유다로 범죄케하였다'(35절). 온나라가 가증한 우상숭배와 예루살렘의 죄악으로 오염되었다.
(2) 유다와 예루살렘의 회복이 여기에서 약속되고 있다(36절 이하). 하나님께서는 심판중에도 자비를 기억하시기때문에 시온에게 은총을 베푸시기로 정한때가 올것이다. 이백성은 오랫동안 절망에 빠져있었다. 심판이 앞서 경고되었을때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심판이 그들을 덮친 지금, 희망이라고는 찾아볼수 없게되었다. 그들은 이 성에 관하여 말하기를(36절).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인하여 바벨론왕의 손에 붙인바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나라에 대하여 애를 태우며 이와같이 말하였다. 황폐하여 사람이나 짐승이 없으며. 어떠한 위안도 없고 치료책도 없다. 이땅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인바 되었다'(43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로운 희망을 주신다. 비록 그들은 포로생활가운데 죽을 것이지만 그들의 자손들은 이 복된 땅을 보게되며 그땅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게될 것이다. 그들은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와 이땅에 와서 다시 정착하게될 것이다(37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뿔뿔이 흩으셨으며 '모든 지방'으로 쫓아보내셨었다. 도망한 자들은 스스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적군의 수중으로 떨어진 자들은 그적군에 의하여 분산되었다. 그들이 결속하는 것을 막기위한 정책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의 손은 그 두경우 모두에서 역사하셨었다. 그러나 율법에 약속했던대로(신 30:3,4)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낼' 것이다. 개심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때문에, 안으로 저희 자신의 양심이나 밖으로 대적들이 그들에게 결코 두려움이 되지못할 것이다. 그는 '내가 정녕히 그들을 이땅에 심으리라'고 약속하신다(41절). 그들은 그곳에서 거룩한 안전과 휴식을 누릴터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뿌리박고 확고하게 심기어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새로이 계약을 맺으실 것이며, 그것은 은혜의 계약, 곧 영적인 축복의 언약이 될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영영한 언약'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40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언약에 대하여 영원히 신실하실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언약의 효과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약속은 육적인 이스라엘에 속하는 그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곧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보증된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은 그약속을 자기 자신들에게 적용할수 있으며 그언약으로 하나님께 간청할수 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안에서 역사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으로서의 특성과 기질을 부여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 "그들을 참되고 완전하게 만들기위하여, 영원히 복되게 하기위하여,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허락하신다(39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언약을 맺으신 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자기의 위엄을 경외하며 진노를 두려워하고 자기의 권위앞에 떨리는 마음으로 서서 경의를 표하고 자기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반복되고 있다(40절).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다시말해서 은혜로운 원리와 특성으로 그들가운데 역사하여 그것으로 그들의 모든 생활에 감화를 주고 다스리게 하리라는 말씀이다. 교사는 우리의 머리에 좋은 지식을 넣어줄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선한 것을 넣으실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다. 그는 우리로하여금 뜻을 품게하시고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효과적으로 그들을 은혜가운데 보전하시며 자기와 그들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지속시키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세상의 치리자들은 변덕스럽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비는 영원히 불변하시다. 하나님께서 이백성에게서 돌아서신 것으로 생각될수도 있다(사 54: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때에라도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고 계획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확고불변하심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믿지못할 것은 단지 우리 자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잠 23:17). 그는 그들의 자손에게 은혜를 허락하실 것이다. 이는 그들과 그들 '후손의 복을 위함'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하여 저희 후손에게 손해가 끼쳐졌던 것과 같이 이제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있으므로 그후손들에게 유익이 미칠 것이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예배를 확실히 자리잡게 하는 것보다 더좋은 재산을 우리는 생각할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신 것은 어쩔수 없이 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포기하겠느냐"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는 기꺼이 그들을 회복시키신다. 그는 즐거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즐거이 순종하는 종을 사랑하신다. 마지막날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인데 그때에 그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수고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보살피시기위하여 온갖 배려를 하셨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앞서 위협된 경고가 성취되었듯이 이약속들도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거룩한 공의를 따라서 '내가 이백성에게 이 큰재앙을 내린것같이 허락한 모든 복을 그들에게 내리리라.' 이는 약속을 따른 것이며 하나님의 자비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모든 것들에 대한 확실한 전조로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있는 집과 토지들이 제값에 다시 매매될 것이다(43,44절). '이땅에서 사람들이 밭을 사되' 다른 곳에 있는 땅보다도 이땅을 더사고자 할것이다. '예루살렘 사방과 유다 성읍들과' 이스라엘 성읍들, 나라의 모든 곳에서 '밭을 은으로 사고 증서를 기록할' 것이다. 매매가 다시 이루어지고 농경이 다시 일으켜질 것이다. 법도 이제 제역할을 하게된다. 왜냐하면 '증서를 기록하여 인봉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말씀은 예레미야가 새로 땅을 산 행위를 감수하도록 하기위하여 언급될 것이다. 비록 그가 토지의 한구획을 샀을뿐이고 그것을 보러갈수도 없었지만 이것은 수많은 매매에 대한 보증이었다. 그리고 하늘의 가나안에서의 소유와 어렴풋한 유사점에 대한 보증이 된다. 하늘의 가나안은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는 것이다.

# 핵심
32:1-44
예레미야는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나돗의 밭을 샀다. 예레미야의 이같은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과 회복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하고도 분명하게 실현될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전능성(32:27)
인간은 이미있는 재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든다. 그러나 전능성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수 있는 능력이며,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그의지대로 결정한 것을 다 실현하실수 있는 능력이다(창 18:14; 욥 42:2; 마 19:26; 눅 1:37). 하나님은 이같은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며, 이권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창 1:1), 만물을 통치하신다.

# 묵상
하나멜의 아나돗땅을 산 예레미야 ( 32:7 )
예레미야가 아나돗땅을 살때 예루살렘성은 포위당했고 그자신은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런상태에서도 땅을 산것은, 하나님이 유다땅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믿게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결국 유다가 바벨론에서 돌아온후 그들의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는 정상적인 매매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토기에 담아 보존할 매매증서 ( 32:14 )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시점에서 예레미야로하여금 토지 매매증서를 토기에 담아 보관하게 하신 것은,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이 유다땅을 회복시켜 주실 약속을 믿게하기 위한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속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만 구속받을수 있습니다.
바룩 ( 32:16 )
바룩이라는 이름에는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 담겨있는데, 그는 네리야의 아들이며 예레미야의 서기였습니다. 예레미야를 도운 그는 애굽에도 함께 잡혀갔습니다. 예레미야는 옥중에서 받은 계시를 바룩에게 기록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의 핵심부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애절한 기도 ( 32:16-25 )
예레미야는 이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한 위험한 상태속에서 토지를 매입하는 상징적인 행위를 하게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수 없다는 심정으로 기도합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기도의 시기와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예레미야 기도의 핵심 ( 32:20-25 )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셨으나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않으므로 갈대아인들에 의해서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즉 눈앞에 둔 멸망은 하나님께 순종치않음으로 인해서 야기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애굽에서 베푸신 징조와 기사 ( 32:20 )
주의 크신 능력과 기사를 통해서 열가지 재앙을 내리신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결코 흉내조차 낼수 없는 재앙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 32:26-35 )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예루살렘을 갈대아인의 손에 붙이셨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멸망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했기때문인데,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국토를 재건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온 자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워 그들로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버리지않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육체의 하나님 ( 32:27 )
하나님은 모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신으로 삼고 그분만을 섬겨야합니다. 종말의 날이 이르면, 모든 죽은 자들은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게 되며 산 자로서 하나님과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 32:36-44 )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의 계속으로 심판에 이어 장래의 회복에 관한 내용으로 바꾸어집니다. 하나님은 징계의 목적이 성취되었을때 징계의 막대기는 버리시고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지시고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인 동시에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다시금 유업을 얻게하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로하여금 어려움을 극복케하시고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복을 얻게하실 것입니다.
한마음과 한도 ( 32:39 )
본문에서 한마음과 한도라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계명, 즉 율법을 가리킵니다. ‘하나의 도’란 ‘하나의 길’, 또는 ‘하나의 목적’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새마음과 새영혼을 의미합니다(겔18:31; 26:20). 즉 여호와를 섬기는 것만이 인간이 가질수 있는 진정한 마음이며, 그의 계명만이 인간이 따르고 지키며 걸어야할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할수 있는 비결 ( 32:40 )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할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조차도 인간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그분이 그마음을 지켜주셔야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수 없습니다. 믿음은 스스로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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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평화와 기쁨에 대한 약속 31:1-9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보증하신다.
(1)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시 계약관계에 있으실 것을 보증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사랑하는 자녀들로 인정하실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모든 가족의 하나님이 되고(1절). 즉,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됨을 스스로 나타내리라는 의미이다. 단지 두지파의 하나님일뿐만 아니라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이다. 또한 전체로서의 국가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집안의 가족 하나하나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의 산업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아래서 은혜를 입을 것이다. 만일 우리와 우리의 집안이 여호와를 섬기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게된다(잠 3:33).
(2) 하나님께서 그들을 바벨론에서 인도해내실 것을 보증하신다. 그는 옛적에 저희 열조들을 애굽에서 구출해내셨을때와 같이 역사하실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저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해내셨을때 무슨 일을 하셨는지 저희에게 상기시켜 주신다(2절). 그들은 그때에 지금 이들과 마찬가지로 애굽의 칼날아래 목숨이 맡겨져 있었다. 즉, 태어나자마자 사내아이들을 멸절시켜 버리는 바로의 칼날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그때에 '광야에' 있었으며 잃어버려지고 잊혀진듯이 보여졌었다. 곧 지금 이들이 낯선 이방땅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앞에서 은혜를 입어, 그에게 속한바 되고 크게 영예롭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가나안에서 '안식을 얻게하려' 하셨었다. 그리고 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신 분이시다.
2)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의 열조들에게 하신 일을 하나님께 상기시키신다. 이는 자기들이 그러한 표적을 보지못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있다. 그들은 기드온이 일찍이 하였던 그물음을 묻고자 하고있다.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모든 표적이 지금 어디 있나이까?" 옛시절들은 영화로운 시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께서 현재 우리에게 모습을 감추고 계시는데, 옛적에 우리에게 나타나셨던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사 45:15).
3)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이 변함없음을 확증해 주신다.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고로. 옛적의 사랑으로서 사랑할뿐만 아니라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신다. 잠시 그위로를 보류할수는 있을지언정 결코 시들어질수는 없는 사랑이다. 아무것도 그들을 그사랑에서 떼어놓을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러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그들을 이끌어 자신과 계약관계에 있게 하시고 교제하게 하실 것이되 그의 성령으로 그들의 영혼을 감화시키심으로써 그렇게하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민족으로 이루시고 조국 땅에서 기쁘게 정가하게 하실 것임을 보증하신다(4,5절). 그들은 이제 버드나무에 걸어두었던 수금을 다시 연주하게 되며 그것을 켜기위하여 조율을 할것이다. 성읍의 즐거움은 농촌의 산물의 풍성함에 달려있는 것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약속되고 있다(5절).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사마리아는 유다왕국의 수도와 대립되는, 이스라엘왕국의 수도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은 연합하게될 터이었다(겔 37:22). 그리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하는 일에만 온전히 집중할수 있을정도로 평화와 안전이 보장될 것이다. 심는 자가 심고 그과실을 먹으리라. 그들은 자기들이 심은 것의 산물을 취하러 군대가 올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유로이 마음껏 '그과실을 먹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에 따라 예배하는 자유와 기회를 갖게되리라고 보증하신다(6절). 날이 이를 것이라. 그날은 영화로운 날이 될것이다. 적군의 침입을 경계하기위하여 파수보도록 세워진 '에브라임 산위의 파숫꾼'이 주위가 고요하며 어떠한 위험의 기식도 없으므로 교대할 시간만 기다리게될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들이 '시온에 올라가서' 공중의 안녕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점은 이것이니, 곧 '에브라임 산위의 파숫꾼'들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재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었다'(호 9:8). 그리고 시온에 올라가자고 사람들을 청하기는커녕 예루살렘을 앙모하는 자들을 비웃었었다(호 5:1).
(5) 하나님께서 찬양을 받으시며, 그복된 변화의 영예와 위로인 교회가 서게될 것이라고 보증하신다(7절). 야곱을 위하여 기뻐노래하며. "이스라엘의 모든 친구들과 우방들로하여금 이스라엘과 함께 즐거워하게 하라"(신 32:43).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롬 15:10).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찬양하라. 또한 그둘 모두를 영화롭게 하라."
(6)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고국땅에서 복된 정착을 하기위하여 포로된 땅에서부터 기쁘게 귀향하리라고 보증하신다(8,9절).
1) 비록 그들이 아무리 먼원방으로 흩어져있다고 해도, 그들은 '북편 땅에서, 곧 땅끝에서부터' 함께 모이게될 것이다.
2) 비록 그들가운데 많은 무리가 여정길에 오르기에 어려움이 많을지라도, 그장애 요소들이 그들을 가로막지는 못할 것이다. '소경과 절뚝발이'가 올것이다. 그들 모두는 그러한 선한 의지와 선한 마음으로 여행길에 오르게될 것이다. 그들의 눈먼 것이나 다리저는 것이 그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되지못할 것이다. 동무들이 그들을 도와 소경에게서는 눈이 되며 절뚝발이에게는 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이와같이 선한 그리스도인들도 하늘로 가는 여정길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욥 29:15).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실 터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는 자들은 자신이 소경이라고 탄원하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힘이 되어주시는 자들은 자신의 절름거림을 하소연하지 않을 것이다. '잉태한 여인'은 몸이 무거워 그와같은 여행길을 떠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해산하는 여인" 역시 그에 못지않게 부적합하다. 그렇지만 시온으로 향하는 귀향길에 오를때, 어떠한 장애요소도 어려움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부르실때 우리는 가지못한다는 어떠한 하소연거리도 내세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시는 바로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며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3) 그들은 포로생활로 신음하고 있을때보다도 포로생활에서 해방되는때에 죄로인한 더큰 쓰라림과 온유함으로 울게될 것이다. 기도는 항상 눈물을 닦아주는 힘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은혜로 그들을 인도해내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통과해야할 땅이 마르고 건조한 땅인가? 내가 그들로...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이것은 여름철에는 메마르곤 하는, 그러한 물가가 아니다. 그들이 지나가야 할곳이 길도 없는 광야인가? 내가 그들로...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그리하여 그들은 길을 잃지않게될 것이다. 그곳은 거칠고 바위투성이인 땅이던가? 하나님은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않게'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분명한 부르심으로 부르신 곳이며 어디로 부르셨든지 그는 그들을 위하여 길을 찾으시거나 혹은 예비하여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서 왜 그의 백성을 이모든 배려로 돌보시는지 그이유가 주어지고 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그러므로 저를 돌보실 것이다(시 103:13).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아이라고 불리울 자격도 없는 에브라임이 특별한 총애를 받을뿐 아니라 야곱의 축복을 유업으로 얻을 '장자'로 인정되어질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실때에 주어졌던 같은 이유가 바벨론에서의 그들의 해방에 대해서도 역시 주어지고 있다. 그들은 자유자로 태어났으며 그러므로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로 태어났으므로 사람들의 종이 되어서는 아니되었다(출 4:22,23).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 아들을 내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Ⅱ. 슬픔의 종식에 대한 약속 31:10-17
자기 백성에 관한 하나님의 사랑의 취지가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열방이 들어야만 하는 '여호와의 말'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역사하심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세계에 퍼지게될 소식중의 한부분일 것이었다. 예언되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흩어져있는 자들이 그흩어진 곳에서 모두 다시 돌아오게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10절). 그리고 그가 그들을 무리로 모으실때, 다시는 흩어지지않도록 '목자가 그 양무리에게 행함같이 그를 지키실' 것이다.
(2) 팔려가 따로 떨어져있는 자들이 구속되어 다시 돌아오게될 것이다(11절). 비록 대적이 저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할지라도 '그들보다 강한' 여호와께서, 즉 만유중에 가장 강하신 그가 저를 '속량하시고 구속하실' 것이다. 이는 값을 치르고 사는 것이 아니라 권능으로 하시는 것이다.
(3) 그들은 자유로이 풍요와 기쁨을 누리게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영화롭게 되실 것이다(12,13절). 그들은 고국 땅으로 돌아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할' 것이다. 그거룩한 산의 꼭대기에서 하나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기위하여 노래할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성전의 토대가 닦여졌을때 그들이 그렇게했음을 읽게된다(스 3:2). 여호와의 은사...에 모일 것이라. 즉, 여호와의 선하심, 다시말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성전에 큰무리를 이루어 양떼같이 그리고 물줄기가 흐르는듯한 큰기쁨으로 모일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인하여 찬양하고, 그선하심을 지속시켜 주실 것을 기도하기위하여 경건한 회중과 함께 모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과 어린양의 떼와 소의 떼'를 주시는 여호와의 선하심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기위하여 올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단위에 드리기위하여 제물로 가져오는 첫열매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것이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성령과 은혜라는 이슬로 흠뻑젖은 동산과도 같다. '그들이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은 참으로 귀중한 약속이다. 이는 오로지 '모든 눈물이 그눈에서 씻겨지는' 새예루살렘에서의 일이다(계 21:4). 하지만 귀향한 포로들은 그들이 예전에 가졌던 그러한 슬픔의 요인들을 더이상 갖지않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때문에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4) 사역자들과 그사역의 대상자들 모두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것에 풍성한 만족을 얻게될 것이다(14절).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하며. 즉 제단으로 생계를 의지하는 자신의 들이 안락하게 살수 있을정도로 제단에 바쳐지는 희생제물이 풍성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사장들과 그가족들은 '기름으로 흡족케'될 것이다.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하리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즐기는 영적인 축복들에도 적용된다. 그것이야말로 곡식이나 포도주나 기름보다도 궁극적으로 더귀중한 것이다.
(5) 특별히 자녀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그들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는 자들은 그자녀들이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리라고 예고된다(15-17절). 라마에서...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모두 포로로 잡혀갔던 그때에는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만이 가득하였었다. 라마의 통곡소리가 다른 곳보다 더심했던 것은 그곳이 느부사라단이 포로들을 집결시킨 집결지였던 까닭이다. 이것은 40:1절에 나타난대로인데, 거기에서 예레미야는 석방되었었다. 본문에는 '라헬이 그자식을 위하여 애곡'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지파가운데 하나인 베냐민과 열지파의 우두머리되는 에브라임은 둘다 라헬의 후손이었다. 그녀는 단지 이들 둘을 두었을뿐이며 그둘가운데 맏아들은 그부친이 슬퍼하여 '위로를 받기'를 거절한 아들이었다(창 37:35). 다른 아들도 어머니가 '베노니'라고 이름지었었는데, 이는 나의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이제 라마에 거하는 자들은 같은 방식으로, 포로로 잡혀간 '각기의 자녀를 위하여 슬퍼하고' 있었다(삼상 30:6). 마음이 모질지 못한 부모들은 위로받기조차 거절하고 있었다. 이는 자식들이 대적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자식들을 다시는 볼수가 없을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것을 복음서 기자들은 베들레헴에서 헤롯이 어린아기들을 학살함으로 일어난 큰애곡에 적용한다(마 2:17,18). 그리고 그말씀은 그때 성취되었다고 말해진다. 비록 우리가 슬프다하더라도, 속으로 속삭이듯 하지는 말아야 한다. 큰슬픔을 누르려면 종국에는 소망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고난이 끝까지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소망, 복된 결말로 끝나리라는 소망, 다시말하여 종말은 평안이라는 생각을 품어야 한다. 설혹 한세대가 광야에서 죽는다고해도 다음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다. 네 일에 갚음을 받을 것인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역경을 주신 날수만큼 기쁨을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기쁨과 슬픔사이에는 수고와 보상의 관계처럼 균형이 있다(8;18). 죽음으로인하여 떠나간 자녀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경내로 돌아오리라'는 소망이 있으니, 이는 부활로 주어지는 복된 몫이다. 곧 하나님의 성소를 경내, 하늘의 가나안 땅으로의 귀향이다.

Ⅲ. 회개와 용서에 대한 약속 31:18-26
(1) 에브라임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에브라임의 말이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 에브라임 곧 그의 백성은 회개함에 있어서 한사람인양 일심으로 단합할 것이다. 에브라임은 여기에서 죄로인하여 울고있다. 아마도 그들이 에브라임이라는 명칭을 따온 조상 에브라임은 다정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듯하다. 그는 그의 자녀를 위하여 '여러날 슬퍼하였었다'(대상 7:21,22). 그리고 죄로인한 슬픔은 독자를 잃은 슬픔에 비유되고 있다. 그는 징계받는 고통가운데서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내가 멍에아래 있사오며, 그벌을 받아 마땅하나이다. 내게는 그것이 필요하나이다. 나는 공의로이 징계받았으며 송아지같이 징벌을 받았나이다. 송아지가 멍에를 매지않으려고 처음에 반항하지 않았다면 매를 맞지 않았으리이다." 이것이 지금 그가 깨닫고 있는 자신의 죄이다(19절). 그뿐만 아니라 그는 젊은 날에 지었던 죄까지 기억한다. 곧 '어렸을때의 치욕'이다. 그는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 스스로 분개하여 화내고 있다. 그는 세리가 가슴을 쳤듯이 자신의 '볼기를 쳤다.' 그는 자신의 우매함과 완고함에 놀라기까지 하고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부끄럽고 욕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도 없음을 안다. 그는 하나님께 반역하였었으나 이제는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며, 그리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렘 17:14). 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의 복된 결과를 체험하게 되었음을 기뻐하고 있다. 내가 돌이킴을 받은후에 뉘우쳤고. 우리 심중에 있는 하나님께 향하는 모든 경건한 역사들은 우리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신 결과이다. 죄인들은 올바른 지식을 알게되었을때 비로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된다. 에브라임은 징계를 받았었으나 바람직한 결과가 나오지 아니하였었다. 그것으로 끝났을 뿐이었다.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의 교훈이 섭리하사 징벌로 바로잡는 일을 수행하셨을때 회개의 역사는 이루어졌다.
(2)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을 긍휼히 여기시며 에브라임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이 용납하심을 깨닫는다(20절). 비록 에브라임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은 불충한 자녀요 탕자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녀로 인정하신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이제 에브라임은 회개하고 돌이켰다. 내가...그를 깊이 생각하노라. "저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평강의 생각이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역경가운데 놓으실때, 그는 그들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그가 그들을 고국땅에서 내쫓을때, 그는 그들을 보지않으신바도 아니요, 잊어버리신바도 아니었다. 에브라임의 징벌을 완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연민이었다. '내 마음이 내속에서 돌아선다'(호 11:8,9). 그리고 이제 같은 연민으로 그는 에브라임의 회개를 받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게 선을 베푸시리라고 결심하신다.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3) 바벨론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국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는 은혜로우신 격려가 주어진다. 그들은 두려워 떨며 정신잃은 사람처럼 행동해서는 아니되었으며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허비해서도 아니되었다. 오로지 굳게 결심하고 전념하여 귀향길에 오를 준비를 하느라 권면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21,22절). 처녀 이스라엘아...돌아오라. "너희 하나님과 다시 정혼하게된 처녀 이스라엘아." 네 성읍들로 돌아오라. "비록 그성읍들이 황폐해지고 부서져 폐허같이 되었다고 하나, 그것은 '네 성읍들'이라.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성읍들이라. 그러므로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라." 그들은 사로잡혀왔던 그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전의 슬픔을 기억하게될 것이며 그들의 부친이 무슨 말을 해주었었는지를 회상하게 될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저희의 구속에 대하여 더욱더 감사하지 않을수 없게될 것이다. 죄의 멍에를 메고 떠나갔던 자들은 저희가 소홀히 간과하였던 임무로 돌아와야 한다. 곧 '대로에 착념해야' 한다. 바벨론에서 시온으로 가는 길, 죄의 구속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얻는 길이 곧 대로이다. 그렇지만 그'길에 착념하지' 않고는 누구도 그길을 걸을수 없을 것이다. 너를 위하여 길표를 세우며 너를 위하여 표목을 만들고.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곳마다 그러한 것을 세워두도록 하라. 그길을 가장 잘아는 자들을 먼저 앞서보내고, 뒤따라 올 자들을 위하여 그같은 표지판을 세우게 하라."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때까지 방황하겠느냐. 그들의 마음이 변덕스럽거나 불확실해서는 아니된다. 근심과 두려움으로 곁길로 나아가서는 아니되며 자신들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저희의 마음을 하나님께 흔들림없이 붙들어 매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주신 보증을 통하여 이일을 행하도록 격려받고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새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는 것이다. 여자처럼 약하고 힘이 없어 군사로 부르심받기에 부적합한(사 54:6) 하나님의 교회가 강한 남자를 포위하여 승리하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교회는 여자에 비유되고 있다(계 12:1). 그리고 '성도들의 진을 두르는'(계 20:9) 군대들에 대해 보게되거니와 이제 성도들의 진이 그군대를 두르게될 것이다. 많은 유명한 성경해석자들은 이 '새일'을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해석한다. 이에 대한 징조가 때때로 그들에게 주어지곤 했었다(사 7:14;9:6). 한여자, 곧 동정녀 마리아는 자신의 태로 '전능자'를 둘러 쌌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사용된 단어 게베르(Geber)는 전능자를 뜻하며, 하나님은 기보르(Gibbor), 곧 '능하신 하나님'(렘 32:18)으로 불리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9:6절에서 그리스도 또한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 그는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4) 그들이 고국땅에서 다시 복되게 정착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진다. 모든 이웃들이 그들에게 좋은 권면을 줄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해줄 것이다(23절). 비록 유다와 예루살렘이 오랫동안 조롱거리가 되어왔지만 '그들은 유다땅과 그성읍들에게 다시 이말을 쓰리니 곧 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들이 많이 개선되어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 그리고 이 개선된 변화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만큼 그렇게 현저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약탈자의 소굴이었던 그성읍들은 '의로운 처소'이자, 이스라엘의 산이 될것이며, 특히 시온산은 '거룩한 산'이 될것이다. 그들가운데 넘치는 풍요함이 있으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24,25절). 유다가 지금은 오랫동안 황폐해져 있지만, 옛적에 가인과 아벨의 명예로운 직책이었던 '농부와 양떼를 인도하는 자'가 유다에 함께 거하게될 것이다(참조. 창 4:2). 이는 내가 그피곤한 심령을 만족케하며 무릇 슬픈심령을 상쾌케 하였음이니라. 포로생활가운데 오랫동안 슬픔으로 지내왔던 자들이 이제는 넘치는 풍요를 누리게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진정한 회개자들을 위하여 예비해두신 영적인 축복에도 적용되어진다.
(5) 선지자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준다(26절). 내가 깨어보니. 즉 "기쁨에 넘쳐서 저절로 깨어나게 되었노라. 또 내 꿈을 곰곰 생각해보니 그러한 꿈으로 말미암아 '내 잠이' 달았노라." 그리고 깊은 수면을 취한 자들과 같이 상쾌하게 되었다.

Ⅳ. 후손의 번성과 새언약에 대한 약속 31:27-34
또다른 약속들이 여기에서 주어지고 있다.
(1) 하나님의 백성은 수가 번성할뿐만 아니라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인구와 가축 모두가 풍성하게될 것이다(27절). 이것은 복음교회가 놀랍게 증진할 것에 대한 예표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시고 심으실 것이다(28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기위하여 '경성하실' 것이다. 오랫동안 만사가 그들에게 불리하게 전행되었었고, 그것은 마치 여호와께서 '경성하여 그들을 뽑으며 훼파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그들의 이익을 복되게 강화시켜 주고 증진시켜줄 것이다.
(2) 그들은 저희 조상들의 죄로인하여 더이상 헤아림 받지않게될 것이다(29,30절).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살던 당시의 악한 유대인들이 그들의 조상의 죄로인하여 징벌받으리라고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그죄를 고집하였기 때문이다(마 23:35,36). 그러나 하나님께서 더이상 그들의 조상의 죄로인한 벌을 내리지않으시며 저희 조상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언약대로 선을 베푸시리라는 약속이 여기에 주어진다. 이제까지 불평해 왔던대로 '그들이 다시는 이르기를 아비가 신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기 죄악으로만 죽으리라.' 그는 자신을 진노케하는 사람들 개개인에게만 벌을 내리실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계약을 다시 맺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모든 축복들을 받게될 것이다. 그러나 이계약은 장차올 훗날, 즉 복음시대를 가리킨다. 사도는 이를 복음의 은총으로 이해했었다(히 8:8,9등). 히브리서에서는 이 전체구절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자들과 맺어질 은혜의 계약의 요점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계약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 곧 복음교회요, 평강이 있을 '하나님의 이스라엘'(갈 6:16)과 더불어 맺어질 것인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함은 곧 믿음의 아브라함과 기도의 야곱을 잇는 영적인 자손들을 말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분리된 두왕국을 이루고 있었으나 돌아온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로운 결합으로 하나가 될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도 복음의 교회와 언약안에서 하나가 된다. 이것은 '새언약'이며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한' 것이다. 규례와 약속은 더욱 영적이고 신성해지며, 나타나는 일들은 더욱더 분명해진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들이 소경이요 절름발이요 연약한 자이기나 하듯이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때에 한언약을 세우셨으나, 그들은 그'언약을 파하였다.' 그언약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요, 그것을 파기한 것은 백성들이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며 우리의 죄와 멸망할 것은 우리 자신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 그의 언약의 구체적인 항목 하나하나는 모두 영적인 축복들을 담고있다. "내가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고 갖가지 축복들을 허락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에게 용서와 평안과 은혜와 선한 생각과 선한 마음을 주겠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이 저희 의무를 기꺼이 수행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두며 그마음에 기록하여. 그는 그들로하여금 자신과 관계를 맺게하겠다고 하신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에게 온전히 충족하신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은 그에게 충성하며 순종하는 백성이 될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아는 자는 그를 찾고 섬기며, 그를 의뢰할 것이다(34절). 그들이 '다 나를 앎이니라.' 모든 자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초대를 받고 그를 아는 방법을 깨닫게될 것이다. 오랫동안 하나님이 유대에만 알려졌었지만 이제 하나님을 아는 길이 온땅에 알려질 것이다. 제사장들은 이따금 성전에서 비교적 적은 무리에게 말씀을 가르쳤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사람들이 빈번히 모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되거나, 알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여러 기관내지 부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들이 가르쳐질 것이다. 간략히 말하여 하나님께 속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이전보다 더욱 밝히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딤후 1:10).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러한 것들을 이전보다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엡 1:17,18). 죄는 용서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다른 축복들의 이유가 된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죄를 기억치 아니하리라. 즉 "용서하고 잊어버리라."

Ⅴ.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한 약속 31:35-40
여기에서 우리에게 보증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세상이 존속되는동안 하나님께서 이세상에 교회를 유지하시리라는 것이다. 설혹 때때로 교회가 아주 열세에 처하게 된다고할지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며 교회의 권익이 새롭게 확립될 것이다. 교회는 반석위에 세워진 연고로 음부의 권세가 그것을 이기지못할 것이다.
(1) 세상을 지으신 것과 그세상의 확고함은 자기 교회를 설립하신 하나님의 권능과 신실함에 대한 증거가 된다.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자연계라는 왕국의 지속성은 은혜의 왕국의 영광의 지속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수 있도록 우리를 격려해준다.
1) 자연의 왕국의 영광 : 여호와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었고(35절). 그는 처음에 그렇게 되도록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게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의 빛과 열, 그모든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그것을 만드신 위대한 창조주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규정하였고. 그들의 움직임이 '규정'되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는 그것이 규칙적이며 법칙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참조. 욥 38:31-33). 바다의 움직임을 주목하고 그 드센파도를 저지시키는 힘을 기억하자. 여호와께서 '바다를 격동시켜 그파도로 소리치게 하며' 그파도가 요동할때에 잠잠하게 하신다(혹자는 이렇게 이해하기도 한다). 하늘의 광대함과 그궁창의 이루 헤아릴수 없는 광범위함을 주목하자. '위로 하늘을 측량할수 있는' 자가 없다(37절). 그무한한 궁창을 하나님께서만 충만하게 채우신다. 우리의 운명이 속한 이창조의 세계의 신비를 주목하자. 이모든 것들이 불변하는 확고함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주목하자(36절).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된 연고니이다'(시 119:90,91). 하늘에는 종종 구름이 끼며 해와 달은 자주 구름에 가리우기도 한다. 땅은 흔들리기도 하고 바다는 요동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제자리를 고수하면서 움직이며, 그경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2) 은혜의 왕국의 확고부동성 : "이스라엘의 자손이 폐하지않고 영영히 나라를 이루리라"(참조. 벧전 2:9). 육에 속한 이스라엘이 더이상 나라가 되지못하면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롬 9:8). 그리고 설혹 그들이 매우 악하게 행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37절). 교회를 보전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우리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의 이름에 있으며, 그는 무엇이든지 하실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돌보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자신이 영광받으시도록 계획하셨다. 그가 영광을 받으시는 길은, 이세상 가운데 교회를 두시고 그의 이름을 찬양할 백성을 확보하시는 것외에 달리없다. 만일 창조의 질서가 태초에 확고하게 세워졌기때문에 지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리고 변경될 어떤 필요성도 없기때문에 변경되지 않고있다면, 같은이유로 은혜의 방법도 처음에 정해진대로 변치않고 지속될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보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확고함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스스로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시다.
(2) 지금 황폐한 예루살렘의 중건은 하나님께서 복음교회, 곧 하늘의 예루살렘을 위하여 행하실 위대한 역사에 대한 확실한 전조 혹은 보증이 된다(38-40). 비록 오래걸릴지는 몰라도, '날이 이를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예전과 같은 크기로 완전하게 다시 세워지는 때이다. 과연 느헤미야가 세운 성벽은 이예언을 정확하게 성취하여, 여기에서 언급된대로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느 3:1). 그리고 비록 본문에서 '모퉁이 문과 가렙산'이라고 일컬어진 곳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라고 결론내릴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언급된만큼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성전이 하나님께 봉헌되고 예배드릴수 있도록 완성되었을때(38절) 그주위와 인접한 들까지도 '여호와의 성지'가 될것이다. 이전과 같이 온성읍이 곧 성전이 되며 거룩한 곳이 된다. 새예루살렘은 이같이 성자체가 곧 성전이므로 별도로 성전이 필요없게 된다. 이성읍은 오래지속될 것이다. 옛성읍이 다윗왕때로부터 포로되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었듯이 새성읍도 그들의 귀향때로부터 이대로 마지막 멸망 때까지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약속은 복음의 교회에서 온전히 성취되어졌다. 그교회는 영적인 이스라엘이며,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멸하지 않으신다. 또한 교회는 거룩한 성이므로 인간의 모든 힘에 의해서도 '다시는 뽑히거나 전복되지 아니할' 것이다.

# 핵심
31:1-40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의 회복에 관한 약속, 그리고 메시아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언약의 시대를 계시하는 내용이다.
라헬(31:15)
‘암양’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라반의 딸이자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아내. 라헬은 오랫동안 자녀가 없어 비통에 젖었던 여인이다(창 30:1). 후에 아들 요셉을 얻은 라헬은 야곱과 함께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도중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며, 에브랏 부근에 장사되었다(창 35:16-20). 라헬은 레아와 함께 이스라엘을 세운 여성으로 언급된다(룻 4:11).
새언약의 탁월성(31:31-33)
모세언약은 애굽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돌판에 새긴 율법을 지키고 언약백성의 표로서 할례를 행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옛언약은 끊임없는 죄의 속박과 권세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하지는 못했다. 이일을 위해 하나님은 새언약을 세우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성취하셨다(히 9:12-15). 새언약은 사람안에 있는 부패한 죄성을 제거하고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 묵상
광야에서 은혜를 얻은 이스라엘 ( 31:2 )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은혜를 얻었다는 말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생활 할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을 말합니다. ‘은혜를 입는다’는 표현은 출33:12-17절에서만도 5번 나오는데, 이구절을 이사야의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곧 새출애굽의 전조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파수꾼 ( 31:6 )
파수꾼은 성벽위의 망대에서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의 침략에 대해서 알리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파수꾼은 하나님의 구원소식을 전하는 사자입니다. 그는 주권의 날이 언제 이를 것인가를 고대하며 깨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날이 이르면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외치며 백성들에게 시온에서의 참된 예배를 요청하는 자입니다.
시온으로 몰려오는 사람들 ( 31:8, 9 )
북편 땅과 땅끝에서부터 모여드는 사람들중에는 소경, 절뚝발이,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그들이 울며 올것이라는 말은 통회, 자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는 자나. 소경, 귀머거리들에게 복음이 전파될때,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될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라헬의 통곡 ( 31:15 )
라헬의 무덤은 유다가 바벨론으로 잡혀갈때 집결지였던 장소인 라마에 있었는데, 이 일때문에 라헬이 무덤에서 우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한편 그자녀를 위해 울며 위로를 거절하는 라헬은 반역하는 백성때문에 슬퍼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한편 마태복음의 기자는 라헬이 자기 자녀로인해 통곡한다는 이내용을, 예수님 탄생시에 헤롯에 의해 강제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긴 베들레헴 어머니들의 슬픔을 묘사하는데 인용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딸 ( 31:22 )
본문에서 패역한 딸이 가리키는 대상은 처녀 이스라엘로, 그는 바람난 딸이었습니다. ‘패역’이라는 말은 ‘돌아서다’라는 뜻으로, 여호와를 배신하고 우상숭배를 범한 것을 의미합니다. 탕자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려 하지않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고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새일을 이루시기까지 그 고통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합니다.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릴 날 ( 31:27 )
멸망으로인해서 인구와 짐승의 수가 감소되었으나 이제 회복의 때를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다시 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처럼 그들의 수를 많게할 것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창22:17). 즉 포로생활로인해 많은 사람과 동물들이 죽었으므로 이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회복된 나라에 이스라엘 민족이 불어나게 하실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언약 ( 31:31 )
새언약이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새출애굽 사건을 약속하시며 돌비에 새겨주셨던 하나님의 법을 그마음에 새겨서 영영히 잊지않게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세우신 새언약(고전11:25)의 예표가 됩니다.
새언약의 폐지시기와 그가능성 ( 31:36, 37 )
새언약의 폐지시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이 깨어질 때입니다. 즉 다시 세운 이 새언약은 영원히 파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늘을 측량하거나 땅의 기초를 달리할수 있을때 이스라엘이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그들을 다버리리라고 하셨는데, 이역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언약이 파기되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의 앞길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성의 재건시기 ( 31:38-40 )
예루살렘성의 재건은 에스라, 느헤미야의 시대, 곧 주전 445년경 바사왕 아닥사스 1세는 느헤미야를 유대총독으로 임명하고 물자를 지원해주어 예루살렘성을 재건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성을 재건함으로써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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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귀환에 대한 약속 30:1-9
(1)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고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깊이 숙고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그말씀을 읽을때, 보다 그것이 주의할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말씀들을 한데 모아 묶어야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많은 다른 말씀들을 거기에 더추가하실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다가올 세대, 곧 그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보게될 세대를 위하여 그말씀을 기록해야 했다. 그는 그것들을 '편지에'가 아니라 '책에' 기록해야 했다. 이는 기록보관소에 보전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또한 본문의 예언도 기록되어야만 했다. 이는 이예언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었는지 읽혀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조상들을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가 되리라는 것이 여기에 암시되고 있다(롬 11:28). 왜냐하면 그렇기때문에 하나님께서 포로들을 다시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시며, '그들을 그열조에게 준 땅으로 돌아오게할 것'이고, 그렇게하여 그들로하여금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2) 예레미야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지시받고 있다. 곧 성령께서 가르쳐주시는바로 그러한 말씀들이다(4절).
1)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현재 처하여있는 당혹함과 갈대아인들이 그들에게 행하였던 온갖 침략들을 지금도 여전히 당하고 있는듯이 기록하라는 지시를 받는다(5절). 우리가 떨리는 소리를 들으니. 즉 위험의 경고를 듣고 외치는 공포의 소리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이 평안하리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요 평안함이 아니었다.' 전쟁터에 있는 남자들까지도 조국의 재난에 어쩔줄을 몰라함으로, 해산하는 여자와 같이 보일 것이다. 즉, 고통이 그들에게 극심하게 이르렀고, 그들은 그고통을 피할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것이다(6절). 슬프다, 그날이여 비할데 없이 크니. 심판의 날이 여기에서 큰날로 일컬어지고 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욜 2:31;유 1:6). 이와같은 날이 결코 이전에는 없었을정도로 크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의 마지막 멸망은 우리 주님께서도 비할데 없이 큰사건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마 24;21). 이는 야곱의 환난의 때가 됨이로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자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더큰 곤난중에 처하게되는 슬픔의 때이다. 야곱의 환난의 때라함은 포로생활의 전시기를 말한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재난을 복된 결말로 종식시키라고 확언하셨음을 기록해야 했다.
① 야곱의 환난은 끝이날 것이다. 그가 이에서 구하여냄을 얻으리로다.
② 야곱을 곤고하게 만들던 자들이 더이상 그에게 해를 끼칠수 없게될 것이다(8절). 그날에 내가 네 목에서 그멍에를 꺾어버리며. "그토록 무겁게 짓누르고 너를 심히도 고통스럽게 하던 멍에가 꺾어지리라." 내가 네 줄을 끊으리니. "너를 다시 자유하게할 것이며 평안하게 하리라. 그들이 다시는 너희 소유나 수고로 자신들을 부요케하지 못하리라."
③ 하나님의 자비는 그들이 다시 자유로이 신앙생활을 하게됨으로써 종국적으로 성취된다(9절). 때가 이르면 그들은 환난에서 구하여냄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여호와를 섬길 마음을 주시고 아울러 심길 기회를 주심으로 그들을 준비시키고 그자격을 구비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은' 것은 하나님을 섬기게하려 함이라(눅 1:74,74). 그들은 저희 자신의 하나님을 섬길 것이며 포로생활 시절에 그러했던 것과 같이 다른 신들을 섬기자고 이끌려지지도, 강요받지도 않게될 것이다. 그들은 저희의 '왕 다윗을 섬길' 것이다. 그러한 통치자를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혈통에서 때때로 그들위에 세우실 것이다(스룹바벨처럼). 여기 이말씀에는 보다더 큰의미가 있다. 갈대아 역본은 이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읽고 있다. 즉, "그들이 메시야(혹은 그리스도), 다윗의 아들, 저희의 왕을 복종하리라." 유대인 해석가들은 그리스도에게 이말씀을 적용한다. 포로생활에서 귀환하면서 시작된 이약속은 메시야시대까지 이르를 것이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었기때문에(마 22:42) 그들의 '왕 다윗'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이름으로 부르는 자에게 응답하였다(마 20:31,32).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고 종종 말해진다(행 3:26;13:23,33). 여호와를 저희 하나님으로 섬기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스림받도록 스스로를 그에게 내맡겨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듯 아들에게도 영광을 돌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보자이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안식을 받은 자들은 또한 멍에도 져야하는 것이다.

Ⅱ. 구원과 치유에 대한 약속 30:10-17
포로생활을 하고있는 유대인들의 비참한 처지가 묘사되고 있다. 그렇지만 많은 귀중한 약속들이 그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셨다. 주께서 그들을 흩으셨던 것이다(11절). 그리고 그들에게 이모든 일을 행하셨다(15절). 이일을 행하신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을 징계하는 것과 같은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1절). 내가 공도로 너를 징책할 것이요. "판결에 따라 징계할 것이나 결코 마땅히 받아야할 벌에 비해 과중되이 징책하거나 견뎌낼수 없을만큼 심하게 벌내리지 않으리라." 하나님께서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서 죄를 발견하실때 더욱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의 수다함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며 그 '죄악의 큼'을 인하여 징책하신다(14,15절).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애종으로서 의도하신 징계를 그백성들과 다른 사람들은 적의의 행위로 해석하였다. 그들은 그를 '대적의 상하게 하는 그것으로 상하게 하며 잔학한 자의 징계하는 그것으로 징계하는' 이로 간주하였다(14절). 실로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나치게 가혹히 다루시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시는 것같이 여겨졌다. 욥도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혹히 대하시며 자신의 상처를 깊게 하셨다고 불평한바 있다.
(2) 그들의 친구들이 그들을 버렸다(13절). 만일 우리가 비난을 듣게된다면, 우리는 친구들이 변호해줄 것을 기대할 것이다. 혹 우리가 아프게 되면, 혹은 괴로운 일을 당했거나 상처를 입게되면, 우리는 친구들이 곁에서 동정을 베풀며 사정에 따라서는 치유를 받도록 도와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렇게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상처를 싸매주는 사람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대적하여 치실때에 누가 감히 그들을 도울수 있을 것인가? 그들의 처지는 절망적이고 구원의 손길이 닿지못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네 상처를 고칠수 없고 네 창상은 중하도다(12절). 네 고통이 낫지 못하리라(15절). 그들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슬픔은 치료할 약이 전혀 없으므로 경감될 징후는 조금도 보이지않고 오히려 더욱더 굳어져 가는듯이 보인다. 이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멸시의 대상이 된다(17절). "그들이 너를 쫓겨난 자, 멸망받도록 버려진 자라고 할것이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고 일컬으리라." 이제 모든 것은 황폐하게 되었다. 전에는 시온에 거했었으나 지금은 포로가 된 백성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쫓겨난 자라고 불렀다. 그들은 시온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들을 찾지않으며, 그들에 관해 물어보는 사람들도 없다.
(3) 이모든 것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정하신때에 그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실 것이다.
1)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듯이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들과 함께 계심을 확증해 주신다. 내가 너를...구원하리니(10절).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이라(11절).
2) 비록 그들이 저희의 본향에서 멀리 떨러져 있을지라도, 즉 그들이 '원방에, 포로된 땅에' 있을지라도 구원이 그들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자손들을 그곳에서부터 구하여낼 것이다(10절).
3) 비록 지금은 그들이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지만, 때가 이르면 '태평과 안락을 얻을 것'이며, 안전하고 평안하게 되어 그들을 '두럽게할 자'가 아무도 없게될 것이다(10절).
4) 비록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있는 그열방들은 멸망하게 될지라도, 그들 자신들은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다(11절). 내가 너를 흩었던 그열방은 진멸한다 할지라도 너는 진멸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교회가 때때로 매우 침체된 상태에 빠질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진멸하시지는 아니하신다(10,18절).
5) 비록 하나님께서 공의로 그들을 징책하실지라도, 그는 자비로이 그들에게로 되돌아 오실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때가 이르면, 그들의 죄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가로막지 못할 것이다.
6) 비록 그들의 대적들이 강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권세를 부숴뜨리실 것이다(16절). 무릇 너를 먹는 자는 먹히며. 그들을 먹는 자들 전부가 한사람도 빠짐없이 '다 포로가 되며 그들을 약탈하는 자가 약탈을 당하게' 될때가 올것이다.
7) 비록 그상처가 치유될수 없을듯이 여겨질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낫게하실 것이다(17절).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하리라.
(4) 그들은 지나치게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것에 대하여 주의를 받고있다. 왜냐하면 이귀중한 약속은 두려움과 슬픔, 둘다를 무마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오, 내 종 야곱아,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도 말라." 그들은 아무런 소망도 없는 자들처럼 슬퍼해서는 아니되었다(15절). 어찌하여 네 상처를 인하여 부르짖느뇨. 그것은 '네 죄를 인함이라'(14,15절). 그러므로 슬퍼한 것이 아니라, 대신 회개해야만 한다.

Ⅲ. 재건과 번영에 대한 약속 30:18-24
그들의 재난의 시기가 끝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은혜가 주어지리라는 약속이 계속되고 있다.
(1) 도성과 성전이 중건될 것이다(18절). '야곱의 장막들'과 '그 거하는 곳들'은 사람들에게 포로됨이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황폐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거처가 중건되고, 하나님께서는 '그거하는 곳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다.' 그곳은 이제까지 하나님의 공의의 본보기가 되어왔던 곳이었다. 그리고 그때, 예루살렘 성읍은 '자기 산에 중건될 것이다.' 비록 황폐해진 산에 불과하긴 하지만 그언덕에 다시 세워질 것이다. '성읍으로 무더기를 만드시는'(사 25:2) 그분은 그기쁘신 뜻대로 다시 무더기를 성읍으로 만드실수 있다. 그궁궐(성전, 곧 하나님의 궁궐)은 본래대로 거하는 곳이 될것이며. 다시말해서 그궁궐은 옛모양대로 다시 세워질 것이다.
(2) 신성한 절기들이 다시 엄숙하게 거행될 것이다(19절). 그성읍과 성전과 야곱의 모든 거처로부터 '감사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자의 목소리가 나오리라.'
(3) 백성의 수효가 많아지며 증가될 것이다. 그들은 '쇠잔치 아니하겠고 비천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히려 열방중에 탁월한 민족이 될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케하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구원받을 자들이 많이 모여드는 것은 곧 교회의 영예이다. 원로원에는 성실한 정치가들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며 성도의 회중에는 신실한 예배자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4) 그들은 선한 통치다. 아래 다스려지는 축복을 받게될 것이다(21절). 그 치리자와 판관들이 '본족에서 나올 것이다.' 즉 저희 자신의 민족 출신들일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이방인 혹은 원수들의 다스림을 받지않게될 것이다. 그통치자는 그들중에서 나올 것이며. 그는 백성들과 함께 포로생활의 고통을 나눴던 자일 것이다. 그리고 이말씀은 우리의 통치자요, 왕 다윗(9절)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운데서 나오신 분이다. 그리고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은 형체를 지니신 분이다. 내가 그를 가까이 오게하므로. 이말씀은 다음 두가지로 해석될수 있다.
1) 야곱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말씀이리라는 해석이다. "내가 그들을 내게로 가까이 이끌어 예전과 같이 성전에서 나를 섬기게 하리라. 그리고 '내 백성'(22절)으로서 나와 언약관계에 있게 하리라."
2) 통치자에 대한 말씀이리라는 해석이다. 왜냐하면 단수로 지칭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통치자가 직무를 맡도록 합당하게 부름받을 것이며 매사에 하나님과 상의하도록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질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더나아가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생각케 한다. 중보자되신 그리스도의 합당한 사역과 직무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것이다. 이는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받으시는 대제사장으로서 그는 우리의 이름과 입장을 대변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같이 중보자들로서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기름부으셨으며, 자신이 기뻐하는 자로 선포하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그리고 타락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이일을 수행하였다.
(5) 그들은 저희 열조가 맺었던 언약에 따라서, 다시금 하나님과 계약을 맺게될 것이다(22절).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그리고 우리를 그의 백성이 되게하시는 것은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그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행 15:14).
(6) 그들의 대적들은 그날수가 계수되어 멸망받을 것이다(20절). 무릇 그를 압박하는 자는 내가 다 벌하리라. 그리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를 만지는'(시 105:15) 일은 위험을 초래한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알려지게될 것이다. 23절과 24절 말씀은 앞에서도 나온바 있다(렘 23:19,20). 앞에서의 이말씀은 이스라엘중에 있는 사악한 위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이었거니와 본문말씀은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사악한 위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선포이다.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에서 항거할수 없는 회리바람으로 표현되고 있다. 보통 회리바람은 잠시동안만 나타나며 금방 그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여기 여호와의 진노는 계속되는 회리바람이다. 그리하여 그 의도하였던바 목적을 이룰 것이다. 여호와의 진노는...뜻한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그의 진노의 목적은 그의 사랑의 목적과 마찬가지로, 완벽히 성취될 것이다. 즉 그는 그 '마음의 뜻한바를 행할' 것이다.

# 핵심
30:1-24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이 성취될 것을 예언함으로써 위로와 소망을 준다.
자기 산(30:18)
히브리어 ‘텔’은 ‘흙더미’(KJV-her own heap) 혹은 ‘폐허’(NIV-her ruins)를 뜻한다. 바벨론 군대에 의해 유다의 성읍들이 파괴되어 폐허더미가 된것을 가리킨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지명에 ‘텔’이란 말이 복합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많이 볼수 있는데, 그것은 성읍의 폐허가 묻혀있는 언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 묵상
책에 기록할 하나님의 말씀 ( 30:2 )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책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구원의 말씀을 적어 70년후의 새세대에게 전하라는 뜻입니다. 70년이전의 세대들은 멸망과 재앙의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장차 유배지인 바벨론에서 태어날 세대들은 심판과 재앙가운데서 태어났으나, 그들의 미래에는 구원과 위로가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와 상처의 치유자 ( 30:10 )
아무도 인간의 죄를 제거하거나 그것으로인한 상처를 치유해줄수 없습니다. 다만 한분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라고 하는 질병을 고치실수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애쓰는 인간의 노력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죄는 스스로 해결할수 없습니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의롭게 할수 있습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 ( 30:12-17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중하고 수다함을 인하여 징계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곧 그들을 치유하여 그들의 상처를 낫게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상처를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죄가 아무리 크고 깊을지라도 하나님앞에 나와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십니다.
송사에서의 변호자 ( 30:13 )
유다의 송사를 변호해줄 자가 없다는 본문의 말씀은, 유다가 그 죄악때문에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게 되는데, 이때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만 있지 그들을 변호해줄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성도들 역시 믿는다고 하면서도 알게모르게 짓는 죄악때문에 늘 하나님앞에 피소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변호할 자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는 방법 ( 30:21 )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실때만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용납지 않으셨음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죄인일지라도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은 그의 백성을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그앞에 나아가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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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벨론의 포로들에게 쓴 편지 29:1-7
(1)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으로 편지를 쓰고 있다. 거기에는 여고니야가 항복하여 포로로 잡혀가 있었고 국모인 그의 어머니, 그리고 본문에 '환관들'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시종, 가속들과 '유다와 예루살렘 방백들' 또한 포로로 잡혀가 있었다. '목공들과 철공들'도 마찬가지로 잡혀가 있었는데 그이유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성을 요새화시키는데 필요한 기술을 박탈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이 온순하게 항복했으므로 느부갓네살왕이 누그러졌으리라고 기대되었었다. 하지만 그 오만하고 전제적인 정복자는 더 큰양보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에 만족하지 않고, 이 먼저 포로된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났을'때, 그는 다시와서 더많은 '장로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백성'을 잡아 갔다(1절). 이 포로들의 처지는 매우 암울하였다. 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람들로부터도 더 큰죄인들인양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편지를 써서 위로하고 있다. 이 예레미야의 편지는 시드기야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낸 사절단 편에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에게 보내졌다. 이사절단은 아마도 느부갓네살에게 시드기야의 공물을 바친다든지, 아니면 복종의 서약을 갱신한다든지 하는 목적을 띠고 있었을 것이다. 그와같은 사절단 편에 이메시지를 보내기로 예레미야가 마음먹은 것은 이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2) 편지의 내용이 여기에서부터 24절까지 이를정도로 길게 실려있다.
1) 예레미야는 자신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쓰고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 예레미야 자신은 단지 기록자 혹은 필경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포로생활 중에 하나님이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저희를 구원하실수 있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듣는 것은 저희에게 큰위로가 될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저희와 계약을 맺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도 또한 큰위로가 될것이다. 이것은 바벨론에서 우상숭배의 온갖 유혹과 시험에 맞서 스스로를 굳게 지키라는 권면일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편지를 보내심은 용기를 북돋아주려는 것이었다. 이는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지 않으며 징계를 가하시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들을 버리지는 않으셨으며 상속권을 박탈하지도 않으셨다는 증거가 되는 셈이었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포로됨이 자기의 주관아래 되어진 일임을 인정하신다. 내가...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한 모든 포로(4절과 7절). 설사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로잡혀 가게 하셨다고해도 그가 그들에게 그릇되이 행하거나 혹은 어떤 해를 가하고자 의도하신 것이 아님을 그들은 확신해야 했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바벨론에 정착하는 것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말도록 명하신다. 즉 그곳에서 할수 있는 최선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그들에게 명하신 것이다(5,6절).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 거하며. 그들은 자기들이 포로생활에서 속히 해방되어 되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지않아야 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할수 있는한 최선을 다하여 그생활에 적응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그곳이 저희 자신들의 고향 땅인양, '집을 짓고 전원을 만들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아야 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바벨론에서 안락하게 사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물론 그들은 때때로 시온을 기억하며 울지않을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느라고 밭을 경작하는 일이 방해받아서는 아니된다. 인생의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든지, 그 현재의 처지에서 최선의 생활을 영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이자 의무이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가지기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지 않았다고해서 현재 누릴수 있는 위로마저 내던지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에 대한 본연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다. 만일 섭리가 우리를 어떤 다른나라로 옮겨가게 한다면, 그곳에서 평안히 살고자 마음을 굳혀야 한다. 만일 온세상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이 곧 아버지의 땅임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는 결국 아버지의 땅을 떠나지 아니한 것이다. 그들은 포로생활의 견디기 힘든 역경과 고난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동요해서는 안되었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포로로있는 나라의 유익을 구하라고 지시하신다(7절). 그나라를 위하여 기도하고 그나라의 발전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그들이 바벨론왕에게 종속되어 있는동안 공공의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기도하지 않도록 금하는 것이다. 그들은 경건함과 정직함으로 그의 치하아래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저희의 멍에를 벗어나려는 음모를 꾸미지 말며, 자기들을 구원하시기로 정하신때에 하나님께서 그렇게하시도록 인내심있게 맡겨야 한다. 이는 그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이와같이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거룩한 신앙심의 성향을 따라서, 저희를 지배하고 있는 권세자들이 핍박하는 권세자들일지라도 그러하였다. 배에 승선하고 있는 모든 승객들은 그배의 안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Ⅱ. 경고와 하나님의 약속 29:8-14
(1)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릇된 기초위에 세운 건물에서 백성들을 끄집어 내신다(8,9절).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포로생활은 곧 끝날 것이므로 바벨론에 정착할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너희를 미혹하고 있도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들이 내이름으로 예언하기는하나 그들은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하고 있도다. 그러니 그들에게 혹하지 말며 그들이 너희를 미혹하도록 스스로를 내맡기지도 말라." 너희가 꾼바 꿈도 신청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꿈에도 신경쓰지 말라고 권면하신다. 여기에서 꿈이라고 한것은 백성들이 스스로 꾸고 즐거워하며 관심을 쏟는 꿈과 환상을 말할뿐 아니라 선지자들이 꾼 꿈, 즉 그들의 예언의 근거가 되는 꿈도 포함된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꿈을 꾸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그꿈을 근거로하여 선지자들은 백성들을 미혹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백성들은 선지자들이 부드러운 말만을 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사30:10). 그들이 하는 말들은 그들의 꿈이었다.
(2)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소망을 둘만한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비록 그들이 속히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나 상당 기간후에, 곧 '칠십년이 차면' 되돌아 가게 되리라고 약속하신다. 그는 그들의 포로생활을 끝맺게 하실 것이다. 설혹 그들이 일부는 이나라에, 또다른 일부는 저나라에 뿔뿔이 흩어져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쫓아보내었던 모든 곳에서 모으실' 것이며, 다시 하나로 합하실 것이다. 그들은 저희 자신의 고향땅으로, 곧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곳으로' 다시 돌아오게될 것이다(14절). 이렇게하여 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어질 것이다(10절). 내가...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이말씀이 있기때문에 그들의 포로생활에서의 귀향은 안연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이귀향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한 말씀의 성취, 은혜로운 약속의 실현이 될것이다. 이렇게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도하셨던바 목적들이 실현될 것이다(11절).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하나님의 생각은 의도하였던바 목적을 향하여 역사하며 정한때가 되면 그가 이루신다. 열매가 무르익을때까지 참고 견디며 인내하면 그들은 그열매를 얻을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장래의 소망,' 곧 목적(원래 의미로는)을 허락하시려는 것이다. 사태가 최악에 이르면 그들은 회개하고 수정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저희의 구속의 영광스러운 완성을 보여주실 것이다. 태초에 그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모든 삼라만상의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축복을 자기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도중에서, 중간쯤에서 멈추시는 일이 없으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 곧 저희가 바라던바 결국을 보게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장래의 두려워할 소망이나 저희 자신의 환상으로 말미암은 소망도 허락하지 아니하실 것이요 오직 믿음의 소망만 허락하실 것이다. 이일은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될것이다(12-14절).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구원이 다가오고 있을때 우리는 기도함으로써 그구원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한다.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으므로 우리는 그말씀을 의뢰할수 있다. '찾으라, 그리하면 얻을 것이다.' 우리가 좌우명으로 삼을 말씀이 여기에 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Ⅲ. 남은 자들의 파멸 29:15-23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자신이 전했던 계획과 위로의 말을 무시하고 거짓 선지자들을 의뢰했던 자들에 대해 말머리를 돌리고 있다. 예레미야에게서 온 이편지를 받으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왜 그렇게 자청하여 분주하게 구는가? 누가 자기더러 우리에게 충고하라고 하였는가?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지 않은가(15절)? 우리는 그 선지자들로 충분히 만족하며 그들을 의뢰할수가 있노라.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노라." 그들이 믿고있는 그선지자들은 백성들이 더이상 포로로 잡혀가지 않을 것이며, 현재 포로되어 있는 자들도 이내 돌아가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본문에서 아직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이 완전히 패망하게 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그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이 너희가 돌아갈때에 너희를 반가이 영접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것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생각일 뿐이라. 그들은 칼과 기근과 염병의 심판을 차례로 받게될 것이며, 마침내는 허다한 수가 멸절되고 남은 자들은 곤궁하고 비천하게 되어 세계 열방중에 흩어짐을 당할 것이라."(16,18절). 이렇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악한 무화과'로 만드실 아니 그렇게 취급하실 것이다. 이말씀은 우리가 24장에서 보았던 환상과 예언을 상기시켜 준다. 그리고 그에 대해 같은 이유가 주어지고 있다(19절).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듣지 아니함이니라. 즉, 그들을 불렀으나 그들이 듣기를 거부하였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라고 자랑하고 있는 포로된 모든 자녀들을 부르신다(20절). "잠잠히 서서 너희가 그처럼 좋아하는 선지자들의 운명이 어떻게될지 들으라." 여기에서 두명의 선지자의 이름이 나타나고 있으니, 곧 '아합과 시드기야'이다(21절). 그들이 질책받고 있는 죄는 불경과 부도덕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였으며(21절), 하나님께서 명하지 아니한 거짓을 그의 이름으로 말하였다(23절). 그들은 내이름으로 너희에게 거짓을 예언한 자라. 자신들의 거짓말을 하나님의 진리인척 꾸몄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더나빴다. 여기에 왜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 그들을 죄가운데 지내게 하였는지 이유가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저희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는 백성들을 질책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벨론왕이 너희가 보는앞에서 그들을 죽이리라. 그가 그들을 비참한 방법으로 죽일 것이니, 곧 불살라 죽이리라"(23절). 우리는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이렇게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것은 그들의 불경과 부도덕때문이 아니요, 공공의 안녕을 깨뜨리는 불온한 정신들을 획책하고자 기도하고 선동하며 반란과 반역을 일으키도록 백성들을 동요시켰기때문임을 추측할수 있다. 그들의 이름은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가운데서 저주거리가 될것이었다(22절). 사람들이 자기들이 싫어하는 자를 가장 나쁜 말로 저주할때, '여호와께서 너로 시드기야와 아합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나쁜 저주는 없을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Ⅳ. 거짓 선지자 스마야의 편지 29:24-32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의 내용에 크게 격분하였다. 그들중의 한사람, 스마야는 예레미야에 대하여 적의를 표하였다.
(1) 이 다망한 친구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 곧 꿈꾸는 자라고 불리우고 있다. 그가 꿈꾸는 자라는 뜻의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예언을 꿈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포로들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편지 사본, 혹은 그것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를 극도로 화나게 만들었다. 그는 그편지에 응수하려 하였다. 그는 어떻게 응수하였는가? 그는 자신의 일을 정당화함에 있어 예레미야에게 편지를 쓰지않고, 제사장들에게 썼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핍박하도록 그들을 부추겼다. 스마야는 마치 자신이 온인류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라도 된양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쓰고있다. 그러나 이편지는 주로 스바냐를 상대로하여 쓴것이었다. 스바냐는 마아세야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마아세야가 선조내지 우두머리인, 제사장 반열의 제 24번의 서열에 속해있는 자였다. 그는 대제사장이 아니었고, 대제사장에게 속한 부제사장이었거나 바스훌과 같이 성전에서 상당히 중요한 어떤 직책을 맡은 자이었던 듯하다(참조. 20:1).
1) 스마야는 스바냐와 다른 제사장들에게 그들이 맡은바 직책의 임무를 상기시킨다(26절). 여호와께서 너로 제사장 여호야다를 대신하여 제사장을 삼아. 혹자는 여기에서 이 여호야다가 요아스 시대의 위대한 개혁자이었던 저 유명한 여호야다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 이 여호야다는 스바냐의 바로 전임자이었던 다른 사람으로, 아마도 제사장들가운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사람이었던 듯하다(1절). 스바냐는 스스로 예상했던 것보다 한층 더빠르게 신망있고 권세있는 이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스마야는 스바냐에게 그가 하나님의 섭리로 선지자들을 핍박하기위해 그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설득하려고 하였다. 즉, 그렇게하여 이와같은 시기에 권력을 잡게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제사장들의 임무는 '무릇 미친 자와 자칭 선지자'를 색출해 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선지자들이 여기에서 자칭 선지자, 직무 찬탈자, 그리고 훼방꾼, 무뢰한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귀신에게 사로잡혀서 행동하는 미친 사람들내지 광포한 사람 혹은 정신착란자들로 간주되고 있음을 볼수 있다.
2) 스마야는 예레미야가 포로들에게 쓴 편지에 대하여 그들에게 말한다(28절). 거짓 선지자들은 예전에 결코 포로로 잡혀가지 않으리라고 말했었다(렘 14:13). 반면에 예레미야는 그들이 포로생활을 하게되리라고 말했었으며 현재의 상황은 예레미야가 옳았음을 이미 입증하고 있었다.
3) 스마야는 예레미야를 '미친 자'요, '자칭 선지자'로 몰면서 그에게 형벌을 내릴것을 주장한다. 그는 그들이 예레미야를 '차꼬에 채우며 칼을 메우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바벨론에 있는 포로들이 예레미야의 영향을 받지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는 스바냐를 태만하다는 이유를 들어 꾸짖기까지 하고 있다(27절). 이제 네가 어찌하여...아나돗사람 예레미야를 책망하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에 둔 자신의 말씀을 확증하셨었다. 그말씀이 그들에게 '임한'것이다(슥 1:6). 그러나 예레미야가 자기들이 바라는바 부드러운 말을 예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그를 선지자의 직무에 합당히 부르심받은 자로 보려고 하지않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을 비웃고 선지자들의 예언을 선용하지 않았기때문에 비참한 노예상태로 전락하였다. 고난이 사람들을 죄에서 돌이켜 치유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과 함께하셔서 역사하시지 않는한 그러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고난은 오히려 그멸하기로 의도되어진바 부패함을 가중시킬 뿐이다(잠 27:22). '미련한 자를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2)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주었다. 스바냐는 예레미야를 존경하고 있었다(우리는 21:1절과 37:3절에서 그가 선지자로서 예레미야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임무를 맡은 사실을 볼수 있다). 그렇기때문에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하였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이편지의 내용을 알려주었고, 그렇게함으로써 그에게 포로들중에조차 그의 대적들이 있음을 알게하려고 했다.
(3) 이같은 편지를 쓴 스마야에게 어떠한 형벌이 내려질지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응답의 전갈을 스마야에게 보내지 말고, 스마야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이기나 한양 격려하고 부추긴 '모든 포로에게' 보내라고 명하셨다(31,32절). 스마야는 그들을 우롱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평화를 약속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신 일이 없으셨다. 그는 하나님의 위임을 날조하고 백성들로하여금 '거짓을 믿게하였다.' 즉 거짓 위로를 전함으로써 그들에게서 참된 위로를 박탈하였다. 그는 또한 그들을 반역자로 만들었다. 그는 '여호와께 패역한 말을 하여' 반역을 가르쳤다. 이는 하나냐가 했던 행동과 같다(렘 28:16). 그는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될'것이다(17:11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의 이름과 가문은 세상에서 잊혀지게될 것이었다. 이 백성중에 거할 그의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 그와 그에게서 나온 후손도 '내가 내 백성에게 행하려하는 선한 일을 보지 못하리라.'

# 핵심
29:1-23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통치(B.C.597-586)초기에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는 유다백성에게 보낸 편지이다. 예레미야는 이서신을 통해 70년이 차야 회복될 것이며, 그때까지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하는 말을 경계하고 인내로 기다릴 것을 권고한다.
그마랴(29:3)
요시야왕 당시 율법책을 발견하여 요시야의 종교개혁 운동을 촉진시켰던 대제사장 힐기야(왕하 22:8-13)의 아들이다. 그는 시드기야왕이 느부갓네살에게 보낸 사신들가운데 한사람이었고, 포로지의 유다백성에게 예레미야의 편지를 전했다. 한편 사반의 아들 그마랴도 예레미야의 사역을 도왔으며(36:10), 여호야김에게 예레미야의 예언 두루마리를 불태우지 말라고 담대히 권고하기도 했다(36:25).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29:25)
스바냐 선지자와는 다른 인물. 유다 왕국의 마지막 부제사장이었다(왕하 25:18). 시드기야왕의 명령으로 예레미야를 두번 만나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간청했다(21:1; 37:3). B.C. 586년에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처형되었다(52:24-27).

# 묵상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내진 예레미야의 편지 ( 29:4-6 )
예레미야가 바벨론의 포로된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바벨론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충격적인 내용으로, 바벨론에서 정착하라는 권고를 담고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편지를 통해 70년이 지나면 그들이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간 ( 29:10 )
유다의 바벨론 포로기간은 70년으로, 이는 바벨론의 지배력이 3대동안 계속되리라는 말씀의 성취였습니다(27:7).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멸망(주전 612년)에서 바벨론 멸망까지는 73년이며 느부갓네살이 즉위하던 해(주전 605년)부터 바벨론 멸망까지는 66년입니다.
부르짖음과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 29:12 )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우리의 미래를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은 재앙이 아니요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두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의 생각은 참으로 깊고 크십니다.
전심으로 찾아야할 여호와 ( 29:13 )
전심으로 찾는 것은 단순히 감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의지와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즉, 목숨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처럼,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 찾고 찾으면 만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악하여 먹을수 없는 무화과 ( 29:17 )
악한 무화과란 상하고 짓이겨져서 먹지 못하는 부패한 무화과를 가리킵니다. 24장에 따르면, 악하여 먹을수 없는 무화과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예루살렘성에서 끝까지 바벨론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당시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포위가 3년동안 계속되자 예루살렘성에는 칼과 기근과 염병이 들끓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대상 ( 29:20 )
바벨론에 포로로 있는 유다의 백성들로서, 이들은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입니다. 그들의 수는 대략 4,600명 가량(렘52:28-30)이었습니다.
느헬람 사람 스마야 ( 29:24 )
스마야는 여호야김과 함께 제2차 포로유수때 바벨론에 끌려간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미친 자, 자칭 선지자라고 불렀으며 그를 가둘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오히려 그의 집이 멸망당했습니다.
미친 자로 비방당한 예레미야 ( 29:26 )
예언자의 황홀경상태는, 의심할 여지도없이 때때로는 억제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난폭한 광란의 상태를 야기하기도 했습니다(삼상19:20-24). 여기서는 참예언자인 예레미야를 거짓 예언자인 스마야가 비방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미친 자로 몰아 착고에 채우라고 주장했습니다.
백성에게 행하려하는 선한 일 ( 29:32 )
이는 70년후에 있을 포로귀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포로됨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장래의 소망만이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의 생각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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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하나냐의 거짓예언 28:1-9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간의 싸움이 '시드기야의 즉위한지 오래지 않은 해'에 발생하였다고 본문에 기록되어 있다. 즉, 그것은 시드기야 사년에 일어난 일이었다. 시드기야 재위 첫사년간은 아직 정상적으로 통치권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 기간동안에 그는 바벨론왕의 지배아래 있었으며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속국의 왕으로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그의 재위의 잔여기간, 즉 전반기와 구분하여 후반기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기간에는 바벨론왕에게 대항하여 반기를 들고 통치하였다. 그의 재위 사년째되는 이 해에 시드기야는 바벨론으로 몸소 갔었다(렘 51:59절에서 이에 대한 것을 읽을수 있다). 이사실은 백성들에게 어떤 희망을 품게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전쟁을 좋게 결말지으리라는 것이었으며 이는 거짓 선지자들, 특히 하나냐와 같은 자들이 그들에게 품게한 소망이었다.
(1) 하나냐는 '여호와의 집에서 제사장들과 모든 백성앞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예언하였다. 이예언을 함에 있어서 하나냐는 예레미야를 마주보면서 말하였다(1절). 하나냐는 그에게 도전할 의도로 그렇게 행하였으며, 마치 "예레미야, 너는 거짓말쟁이로다"라고 말하는 듯하였다. 이예언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미치고 있는 바벨론왕의 위세가 급속히 꺾여지리라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두해가 차기전에' 성전의 모든 기구들이 다시 반환되리라는 것이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예언하기를 바벨론왕의 멍에가 더욱 굳게 조여질 것이며 성전기구들과 포로들은 70년동안 돌아오지 못하리라고 하였었다(2-4절). 이 거짓예언과 하나님께서 참된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신 메시지들과 비교해보면, 그차이가 너무도 엄청나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하나냐의 이예언에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설교에서 으례히 보여지는 영감과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으며, 표현의 숭고함도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여기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경건의 분위기이다. 그는 백성들이 다시 번영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기도하며 그의 얼굴을 찾으라는 선한 권면을 그들에게 한마디도 주지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현세적인 자비를 약속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항상 약속하신 저 영적인 자비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24:7).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리라.'
(2) 이 거짓예언에 대한 예레미야의 답변이 나오고 있다.
1) 그는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그러한 심정은 바로 그의 조국을 위하는 마음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그와같이 진심으로 그는 자기 조국의 패망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 아멘 여호와는 이같이 하옵소서 여호와께서 네 예언대로 이루사(5,6절). 예레미야가 비록 자기 백성을 쳐서 예언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위하여 이와같이 기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마셔야할 잔이 자기를 그냥 지나쳐서는 아니됨을 아시면서도,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도 비록 자신이 그렇게 결정은 하셨지만 죄인들의 죽음을 원하지는 않으신다. 오히려 그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2) 예레미야는 사례를 들어 하나냐의 예언이 거짓임을 입증한다(7-9절).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모함하였다. 마치 아합이 미가야를 중상하였던 것과 같다. 이는 예레미야가 그들에 관하여 결코 좋게 예언하지 않고, 나쁘게 예언했기 때문이다. 옛선지자들은 '여러나라와 큰국가들'을 쳐서 예언했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메시지들을 전함에 있어서 그토록 담대하였으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처럼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예레미야 이상으로 전쟁과 기근과 염병을 거리낌없이 경고하였으며,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하나님께로 나온 메시지로 간주되었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그보다 이전의 어느시대에나 있었던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전한 것과 달리 설교한 것도 아닌데, 왜 해를 끼치는 자요, 반역의 씨를 뿌리는 선동가로 몰려야 하는가? 그러나 특히 하나냐같이 번영과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조건부의 단서를 붙이지않고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으로 평화를 선포한다. 조건부의 단서라 함은 간교한 죄로써 저희 자신의 문에 빗장을 질러 하나님의 은혜의 물줄기를 막지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선지자는 참된 선지자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됨으로써 결국 거짓 선지자로 판명되어질 것이다. 만일 예언이 이루어진다면, 그는 '여호와의 보내신 선지자'로 판명되는 것이고 만일 그렇지않으면 그는 속이는 자요, 사기꾼에 불과함이 입증되는 것이다.

Ⅱ. 미혹된 자와 미혹하는 자의 운명 28:10-17
1. 거짓 선지자의 오만 무례함(10,11)
하나냐는 의도하였던바대로 예레미야에게 모욕을 주기위하여 예레미야가 열방들이 느부갓네살의 치하에 들어가게 되리라고한 예언의 징표로써 메고다녔던 멍에를 '예레미야의 목에서 취하여 꺾었다.' 예레미야가 자기 예언의 징표로 멍에를 메었듯이, 하나냐는 자신의 예언이 성취되리라는 표시로서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이 패하였다는 표시로 그멍에를 꺾어버렸다. 여기서 이 거짓 선지자의 입에 붙은 거짓말하는 영이 진리의 성령의 언어를 흉내내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두해가 차기전에 열방의 목에서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멍에를 이같이 꺾어버리리라 하셨느니라.
2. 참선지자의 인내(11)
예레미야는 잠잠히 '자기 길을 갔다.' 이는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아직 받지못한 직접적인 답변을 기쁘신 뜻대로 자기에게 주실때까지 기꺼이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냐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시리라고 기대하였다. "나는 귀먹은 자같이 듣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들으시고 답하여 주시옵소서."
3. 하나님의 공의(12-17)
예레미야와 그를 모욕하는 대적사이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내려진다. 예레미야는 반박할 의사가 없는 사람인듯 자기 길을 갔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곧 그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에 두셨다. 그것은 예레미야 자신이, 그와같은 반대에 부딪침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한 그말이 참되다는 사실을 불신하지 않게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우리가 말한 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반박한다고해서, 그말씀을 철회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위대하며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냐는 '나무멍에'를 꺾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대신 꺾어지지 않는 '쇠멍에'를 그들이 지도록 만들어야 하였다(13절).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전보다 더무겁고 더세게 조이는 '쇠멍에로 이모든 나라의 목에 메워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을 섬기게 하리라'(14절)고 하셨기 때문이다. 앞에서 하신 말씀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내가 들짐승도 그에게 주었느니라. 여기에는 어떤 의미 심장한 뜻이 있는 듯하다. 스스로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을 멸망하는 짐승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므로 그들은 짐승들이 다스림받듯이 다스림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바로 그러한 권세로 그들을 지배할 것이다. 곧 그가 죽이고 싶으면 죽일 것이요, 살려두고자 하면 살릴 것이다. 또한 하나냐는 그것을 거스림으로 말미암아 죽을 것이라는 판결을 받는데 예레미야는 그사실을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았을때에 담대하게 하나냐의 면전에서 말하고 있다. 하나냐가 범한 죄들은 백성들을 속였다는 것과 하나님께 맞서서 그를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네가 이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네가 여호와께 패역하는 말을 하였음이라. 그에게 내려진 심판의 판결은 이와같다. 내가 너를 지면에서 제하리니...금년에 죽으리라. 이판결은 집행되었다(17절). 하나냐는 그해에 그것도 두달도 못되어서 죽었다.

# 핵심
28:1-17
거짓 선지자의 대표격인 하나냐가 예레미야와 대립하는 장면이다.
하나냐(28:1)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의 이름이다. 시드기야왕때 예레미야를 대적한 거짓 선지자이다. 성역 도시인 기브온(수 21:17-19) 출신인 것으로 보아, 제사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다가 심판을 받아 죽었다.

# 묵상
하나냐의 예언내용과 그대상 ( 28:4 )
이예언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왕의 멍에를 꺾으셨다는 내용으로, 이는 나무멍에를 메고 유다의 항복을 촉구한 예레미야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냐는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들이 2년이내에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말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예언한 것으로인해서 예언한지 2개월만에 죽었습니다. 이처럼 쉽고 가벼운 예수님의 멍에를 지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무겁고 힘든 죄의 멍에를 져야합니다(마4:29; 갈5:1).
참예언자의 구분방법 ( 28:9 )
누가 참예언자인가는 예언자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통하여 알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나무멍에와 쇠멍에 ( 28:12-16 )
나무멍에란 이스라엘이 친바벨론정책을 추진해서 포로로 이끌려가도 그날이 길지 않을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쇠멍에는 그것을 쉽게 벗어버릴수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포로기간이 매우 길것을 상징합니다. 거짓 선지자 하나냐때문에, 그리고 그의 말을 따른 왕과 지도자들때문에 이스라엘은 오랜기간을 바벨론에서 포로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냐를 질책하는 예레미야 ( 28:13-17 )
예레미야는 하나냐에게 ‘네가 나무멍에를 꺾었으나 그대신 쇠멍에를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냐가 징계의 상징인 나무멍에를 꺾어버렸다고해서 하나님의 징계선언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했던 의도는 인간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의도를 바꿀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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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지시〔1〕 27:1-11
이예언이 행해진 시기를 추측하는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라이트푸트 박사는 이렇게 해석한다. 즉, 여호야김의 치세가 시작되는때에 예레미야는 바벨론왕에 대한 유다의 복속의 징표로 줄과 멍에를 만들어 자기 목에 걸었었다. 바로 이때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줄과 멍에를 이웃나라 왕들에게 보낸 것은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 재위때였으며, 외국 사신들이 시드기야에게 찾아온 때라고 예언에 언급되고 있다.
1. 줄과 멍에의 상징(2)
예레미야는 이모든 국가들이 바벨론왕에게 항복할 것을 나타내는 징표를 준비해야 되었다(2절). 너는 줄과 멍에를 만들어. 이 줄과 멍에를 만들어 멍에를 목에 걸고 빠져나오지 않도록 목에 단단히 맸다. 모든 사람들이 의문을 가지고 물어보게끔 선지자는 자신의 목에 이렇게 매어야 했다. 예레미야의 멍에가 의미하는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28:10절에서도 그에 대하여 읽을수 있다. 여기에서 그는,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행하도록 권면하는 일은 곧 자기 스스로도 행하기로 결심한 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였다.
2. 이웃 왕들에게 예언을 전함(3-11)
예레미야는 인접한 모든 이웃나라들의 왕에게 이 징표와 함께 그에 관한 설교를 전해야 했다. 가나안땅에 인접하고 있는 나라들이 언급되고 있다(3절). 유다왕과 저들 모든 다른 왕들간에는 동맹조약이 체결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예루살렘은 조약을 맺기로 지정된 장소였다. 모든 이웃 국가의 왕들은 예루살렘으로 그들의 전권을 위임한 사신들을 보냈다. 그들은 바벨론왕의 세력이 위협적으로 커지는 것을 막기위하여 공격과 방어 협약을 체결하여 서로 뭉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이와같이 연합하여 형성한 자기들의 힘을 크게 신뢰하였다. 그러나 사절단들이 이조약의 인준서를 가지고 각기 자기들의 군주에게로 되돌아 갈때에, 예레미야는 그들 각각에게 군주에게 전하게끔 멍에들을 주었으며, 저들이 바벨론왕의 종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라고 하였다.
(1) 그 전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왕국들을 처리하는 그의 논박할 여지가 없는 권리를 단언하신다(5절).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다. 그는 처음 세상을 지으셨으며, 그것을 세우셨고 유지시키신다. '한세대는 가고 다른세대가 오지만' 그것은 여전히 한결같다. 그는 지속적인 창조를 통하여 아직도 땅에 사람과 짐승들을 지으시고 계시다. 이는 그의 '큰능과 든 팔'에 의해서이다. 그는 자비롭게 '땅을 인생에게 주셨을'뿐 아니라(시 115:16) 그땅을 각각 크게, 혹은 작게 몫을 정해 나누어 주셨다.
(2) 하나님께서는 이모든 나라들을 느부갓네살에게 주셨음을 포고하신다. '이제 여호와께서 이모든 땅을' 그모든 재물과 함께 '바벨론왕의 손에 주었음'을 관련된 모든 자들에게 선포한다. 온순한 것이든 사나운 것이든 '들짐승들'까지도 '그에게 주어서 부리게 하셨다.' 목초지와 휴양지도 모두 그의 소유로 주셨다. 느부갓네살은 오만하고 악한 자였으며 우상숭배자였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가운데서 이 방대한 땅의 통치권, 이 엄청난 소유권을 그에게 주시고 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세상의 사물들이 최상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가장 큰몫을 자기에게 반역하는 악한 자들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통치권이란 은혜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다. 느부갓네살은 악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종으로 부리셨다. 이는 그를 열방을 징계하기위한 섭리의 도구로 고용하셨기 때문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가 한동안 불가피하게 바벨론왕의 통치아래 있게될 것이라고 단언하신다(7절). 이모든 나라들과 많은 다른나라들, 곧 '열방이 그와 그아들과 손자를 섬길 것이다.' 그의 아들은 에윌므로닥이고 그의 손자는 벨사살이었다. 벨사살에 이르러 그의 왕국은 종말을 맞았다. 그때에 기한이 이르렀고, 메대인과 바사인들의 제국에 합병된 '여러나라와 큰왕'들은 이전에 그러하였듯이 '그로 자기를 섬기게 하였다'(렘 25:14).
(4) 하나님께서는 계속 버티기를 고집하며 바벨론왕에게 항복하려 들지않는 자들에게 경고하신다(8절). 그목으로 바벨론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한심판에 다른심판을 뒤따르게 하기를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할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저희의 자유를 보전하리라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그모든 소망이 허사임을 보여주신다(9,10절). 이들 국가들에도 별이나 꿈, 혹은 술법에 의하여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척 자처하는 선지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희 군주들을 기쁘게 하기위하여 그들이 '바벨론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고 장담하였다. 이렇게하여 그들은 그 군주들로하여금 활력있게 저항하도록 자극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결과 저희의 파멸이 판명되리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에 인접해있는 이나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은 다른곳에도 명시되어 있다(렘 48,49장;겔25장).
(6) 하나님께서는 조용하고 평안한 항복을 통해 저희의 멸망을 방지하는 합당한 방법을 그들에게 제시하신다(11절). "바벨론왕을 섬기는 일을 족히 여기는 자들, 그리고 칠십년동안 그에게 공물을 바치는 자들, 내가 그들을 그땅에 머물러서 밭을 갈며 거기 거하게 하리라." 어떤 자들은 이렇게 하는 것을 비굴한 마음의 증거라고 경멸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이것을 필요에 순복하는 온유한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권장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혹독한 섭리의 변화에 잠자코 복종함으로써 불행중에서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것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비천한 운명앞에 스스로를 굴복시킴으로써 파멸의 운명을 피할수 있었다. 자기 머리위에 더욱더 무거운 십자가를 얹어놓는 것보다는 자기의 가는 길에서보다 가벼운 십자가를 취하는 편이 낫다.

Ⅱ.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지시〔2〕 27:12-22
열방들에게 말해진 내용이 본문에서는 특별히 유대인들에게 부드럽게 권고되고 있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관련된 자들이었다. 현재의 상황은 이와같다. 즉, 유다와 예루살렘은 바벨론왕과 항쟁해왔으며 최악의 사태로 줄달음질치고 있었다. 많은 귀인들과 재화들이 이미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실려간후였으며 그중에는 '여호와의 집 기구'도 있었다. 이제 이싸움이 어떻게 결말될 것인지가 문제였다. 예루살렘에는 선지자 노릇을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성을 고수하면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게되리라고 말하였다. 이제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항복을 권면하기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그렇지 아니하면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기는커녕 남은 것까지도 잃게될 터이었다.
1. 유다왕을 권고함(12-15)
예레미야는 유다왕에게 겸손히 권고하며, 바벨론왕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한다. 왕의 행동은 곧 백성들의 행동이 될것이므로, 그는 백성들 모두에게 말하는듯한 어조로 왕에게 권고하고 있다(12절). 왕과 백성은 목으로 바벨론왕의 멍에를 메고 그와 그백성을 섬기소서 그리하면 살리이다. 그들이 저희 신체의 안위를 위하여 잔혹한 폭군의 무거운 쇠멍에를 지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 그러면 우리가 우리 영혼의 안위를 위하여서 의로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달콤하고 편안한 멍에를 지는 것은 훨씬더 현명한 일이 아닌가? 우리의 영혼을 회개와 믿음으로 이끌자.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하늘과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2. 제사장과 백성들의 권고함(16,17)
예레미야는 마찬가지로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권고하여(16절), '바벨론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생명을 보전하고 성이 황무지가 되는 것을 막을수 있으리라'고 설득한다(17절). "만일 너희가 성을 끝까지 고수하면 반드시 그렇게 될진대 어찌하여 이성으로 황무지가 되게 하겠느냐?"
3.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함 (14-16,18-22)
두번의 권면을 통하여 예레미야는 그들로하여금 안전을 꿈꾸게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믿지말라고 경고한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마소서(14절).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말라(16절).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보내신 일이 없느니라. 그들은 단지 너희의 선지자일 뿐이라. 왜냐하면 그들은 너희가 시킨 말만을 하며 오로지 너희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목표하고 있기 때문이라." 그선지자들이 말하는 것은 두가지였다.
(1) 바벨론왕이 그들에게 가하고있는 세력이 이제 곧 무너지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14절). "너희는 바벨론왕을 섬기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자진하여 항복할 필요가 없도다. 왜냐하면 항복을 강요받지 않게될 것이기 때문이라." 이것을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였다(15절). 마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보내신양 행동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바벨론왕이 이미 약탈하여 간 성전의 기구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들이 이제 곧 돌아오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다(16절). 그들은 이렇게 예언하는 것이, 금을 성별케하는 성전보다도 성전에 있는 금을 더사랑하는 제사장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것이 될지 잘알고 있었다. 이기구들은 여고냐가 바벨론으로 포획되어 갔을때 함께 약탈되어간 것이었다(20절). 우리는 그사건에 대해 읽을수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비감에 젖게하는 내용이다(왕하 24:13,15;대하 36:10). 성전은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그리고 그성전이 약탈당했다는 것은 참된 선지자가 말하였던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셨음을 나타냄이 너무도 자명하다. 그러므로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을 안심시키는 최상의 방도는 바벨론왕이 얼마있으면 그것들을 반환하지 않을수 없게되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여기에서 그들에게, 그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빼앗긴 기구들을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기도로써 남아있는 기구나마 보전할 방도를 강구하라고 명한다(18절). "그들이 자처하였던대로 '만일 그들이 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있을진대', 만일 그들이 하늘과 교통하고 있을진대, 그들로하여금 '산 자와 죽을 자 사이에', 포로된 자와 남은 자 사이에 서서 재앙이 멈추어지게 하라. 남아있는 기구를 약탈당하지 않도록 '만군의 여호와께 구하게' 하라. 그들로하여금 예언하는 대신에 기도하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금으로된 기구들이 약탈당한 것에 뒤이어 이제 놋으로 만든 기구들도 노략될 것이라고 단언하신다(19,20절). 느부갓네살은 다시와서 '여호와의 집'에서뿐 아니라 '왕의 집'에서도 그의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취하여 갈것이 확실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한이 이르면, 그것들이 모두 반환되리라는 자비로운 약속으로 말씀을 마치신다. 내가 이것을 돌아보는 날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 그후에 내가 그것을 옮겨 이곳에 다시 두리라(22절). 확실히 그것들은 특별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보호아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기구들은 풀무속에서 녹아지게 되었을 터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것들이 보존되어질 제2의 성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들의 반환에 대해서는 에스라 1:8절말씀에서 읽을수 있다. 설혹 교회의 번영과 융성이 우리 시대에 다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해도 우리가 낙담하지 말것은 그일이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 핵심
27:1-22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왕에게 바벨론에 굴복할 것을 권하고, 그렇게 하지않으면 멸망할 것을 경고한다. 예레미야의 이같은 권고는 반민족적인 생각이 아니라 먼장래에 유다를 멸망에서 살리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 묵상
줄과 멍에를 통한 행위예언 ( 27:2 )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를 만들어 그의 목에 얹으라고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고 그압제하에 놓여질 것임을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상징을 통해 가르쳐주심으로 유다 백성이 깨닫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큰능과 든 팔 ( 27:5 )
큰능과 든 팔이란 하나님의 크고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든 팔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위해 대적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여호와의 사역을 나타낼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바벨론을 섬기게 하신 이유 ( 27:11-15 )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주위 나라로하여금 바벨론을 섬기게 하신 이유는, 죄악으로 물든 나라들을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사용하신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넘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바벨론이 이스라엘이나 주위 다른나라보다 선하기때문에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넘겨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만한 바벨론 역시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당한 것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거짓 예언과 그결과 ( 27:16-22 )
거짓 선지자들은 이제 바벨론에서 여호와의 집 기구를 속히 돌려보내리라고 예언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참선지자이고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했다면 그들은 약탈된 것이 속히 돌려질 것이라는 거짓 예언을 하지말고, 오히려 여호와의 집과 유다왕의 집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가구마저도 예루살렘에서 옮겨가지 않도록 여호와께 구해야 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집의 기구들은 백성들이 3차에 걸쳐 바벨론에 끌려갈때에 함께 바벨론으로 옮겨졌다가 70년후 에스라때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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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레미야의 신실한 설교 26:1-6
예레미야가 행한 설교는 그로하여금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그내용이 모든 시대의 공명정대한 사람들의 판단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본문말씀에 기록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이설교가 어디에서 행해져야할지, 언제 누구에게 전해져야할지 예레미야에게 지시하셨다(2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여호와의 집뜰에서' 설교하도록 명하신다. 이곳은 예레미야의 숙적인 제사장들의 특별관할구에 속해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말씀을 가장 엄숙한 절기 주의 한때, 곧 사람들이 '유다 모든 성읍에서 여호와의 집에 와서 경배하기' 위하여 나아왔을때에 전하여야 했다. 이들 경배하는 자들은 저희 제사장들을 크게 존경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예레미야에 맞서서 저희 주먹을 흔들어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중에 그무엇도 예레미야를 좌절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이설교를 해야만 했다. 이설교가 백성들을 설득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을 격분시킬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한말도 감하지 말라'고, 곧 그가 예레미야에게 '명하여 이르게한 모든 말을 고하라'고 특별히 명하신다.
(2)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무엇을 전해야할지 지시하신다. 그가 백성들에게 확실히 선포해야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곧 만일 그들이 '각각 그악한 길에서 떠나면,' 곧 그들이 회개하면 설혹 심판이 현재 문앞에까지 이르렀다고해도 모두 중지될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더이상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시리라는 것이다(3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를 보내심에 있어 의도하신 주요한 목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기다리신다. 그는 기다리시되 우리가 마땅한 자격을 갖추기까지, 우리가 적합하게 되기까지 기다리시며 그러는 중에 갖가지 방법들을 다 시도해 보신다. 다른 한편으로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부르심을 완고히 거부하기를 계속 고집한다면 그고집은 저희 도성과 성전의 파멸로 끝을 맺게되리라고 확실히 말해야 했다(4-6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바는 저희앞에 둔 하나님의 법을 행하는 것이었다. 곧 모세의 율법들, 그규례와 계명들의 실행이었다. 그리고 그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듣는 것이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앞에 두신 것이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 자신의 종이었으며 그가 백성들에게 보내신 자들이었다. 백성들은 이제까지 율법에 대해서나 선지자들에 대해서나 꼭 귀머거리와 같았다. 나의 종 선지자들의 말을 이미 듣지 아니하였거니와. 하나님께서 지금 기대하고 계시는 것은 그들이 이제는 그가 말씀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며 그의 말씀을 저희 법칙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것을 거부할경우 이 도성과 그안에 있는 성전은, 일찍이 실로와 거기에 있던 성막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였을때 당하였던 것과 똑같은 처지가 되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결과에 대하여 그들에게 경고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참조. 렘 7:12-14).

Ⅱ. 선지자와 제사장들의 핍박 26:7-15
이설교는 그들의 회개를 각성시키는 결과를 낳는 대신에 오히려 그들의 부패한 것을 터뜨리게 하였다.
(1) 예레미야는 이러한 설교를 행한 죄로 기소되고 있으며 죄인으로 붙잡히게 되었다. 예레미야가…이말을 하매 제사장들과 (거짓)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듣더라(7절). 다음 사항만으로도 그를 기소할 충분한 근거가 될것이었다. 즉, 예레미야가 '이집이 시로같이 되리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9절). 그들이 그의 말을 얼마나 정당치 못하게 왜곡하여 표현하였는지 주목할수 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너희가 만일 다시 듣지아니하면 내가 이집을 실로 같이 되게하리라'고 말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을 떠났으며,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지 않고 저희 자신의 마음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그거룩한 곳을 모독하였다고 하면서 우리 주 예수와 스데반에게 씌웠던 그죄목을 그에게도 씌웠다. "예레미야가 이집이 실로같이 되리라고 하였도다." 기소의 근거가 매우 미약할때에, 그 선고가 부당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8절). 예레미야가 한말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성전을 열납하시면서 하신 말씀과 일치되는 것이었다(왕상 9:6-8). '만일 너희가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아니하면 이 전이라도 내앞에서 던져버리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말을 한것으로 인하여 죽게 되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격한 고함이 군중을 선동하였으며, 그리하여 '그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에게로 모여들었다.' 즉 집단적인 소요를 일으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2) 예레미야는 그 설교로인하여 기소되어 심문받게 되었다. '유다 방백들'이 그의 재판관이었다(10절). 성전에서 일어난 이소요를 들은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문제를 심리하기위하여 '왕궁에서 여호와의 집으로 올라왔다.' 그들은 '여호와의 집 새 문어귀에 앉아' 법정을 열었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예레미야의 기소자요 고발자들이었었으며 격렬하게 그를 고소하였다. 그들은 '방백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사람은 죽음이 합당하다'고 호소하였다(11절). 예레미야가 왕궁에 가서 왕가의 멸절에 대하여 예언하였을때에(렘 22:1등) 왕족들은 매우 타락하긴 했을지라도 그말을 참고 들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예레미야를 핍박하였다는 말은 찾아볼수 없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의 집'에 와서 제사장들의 부정을 지적하고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말과 아첨하는 말에 대하여 논박하였을때, 그는 '죽음이 합당한'자로 판단받고 있는 것이다(렘 5:31).
(3) 예레미야는 방백들과 백성들앞에서 스스로를 변호한다. 그는 자기가 한말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했던 말이 설혹 자기생명을 취해간다고할지라도 그말을 계속 고수할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이집과 이성을 쳐서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악의나 반감으로가 아니라 선한 권위에 의해서 이렇게 행하였다고 단언한다. 즉, 이렇게 예언하도록 '여호와께서 그를 보내셨다.' 그는 그렇게 변호를 시작하고 있다(12절). 그리고 또한 이렇게 결론 맺고있다(15절). 여호와께서 진실로 나를 보내사 이모든 말을 너희 귀에 이르게 하셨음이니라. 사역자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교훈을 고수하고 있는한, 그들은 지옥에서 온것이든 지상에서 온것이든 혹 부딪칠수 있는 어떠한 반대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는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으므로 그들이 이사자를 어떠한 방법으로 대적하든지 그를 보내신 왕에 의해서 보수받을 것이었다. 그의 설교는 돌이킬수 없는 최후의 언도가 아니라 마땅한 경고였다(13절). "내게 있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아는 것은 그리 큰문제가 아니라. 보라 나는 너희 손에 있도다. 나는 너희를 대항할 어떤 권세도 가지지 못하였으며 나자신의 목숨을 구하는 일에 별로 관심을 갖고있지도 않노라. 너희 소견에 선한대로하라." 그러나 그들에게 있어서는, 만일 그들이 그를 죽인다면 그것은 곧 저희의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정녕히 무죄한 피로 너희…에게로 돌아가게 하리라(15절).

Ⅲ. 예레미야의 석방 26:16-24
(1) 예레미야는 석방되었다. 그가 기소당했던 그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말들이 선동적이거나 반역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으므로 법정은 그가 무죄하다고 보았다.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그를 치는 판결을 내리기를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방백들과 모든 백성들은 '이사람에게 죽음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16절). 이는 '이사람이(스스로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고 우리에게 말하였기'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자기들에게 말하였다고 진정 인정하며, 그 여호와가 곧 저희 하나님이시라고 참으로 인정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왜 그들은 저희 길과 행위를 수정하지 않았던가?
(2) 예레미야를 석방함에 있어서 그정당함을 입증하기위하여 한 선례가 인용되고 있다. '그땅 장로중 몇사람' 혹은 백성중의 분별력있는 자 몇사람이 일어나 회중들에게 전례의 경우를 상기시켰다. 언급된 사례는 미가의 경우이다.
1) 예레미야가 이성과 전에 대하여 쳐서 예언한 것이 이상하게 여길만한 일인가? 예레미야보다도 앞서, 개혁의 시기인 저 히스기야의 치세때에조차 선지자 미가는 그렇게 행했었다(18절). 미가는 예레미야가 말한 것처럼 공공연하게 이렇게 말했었다.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모든 건물들은 무너질 것이라. 그무엇으로도 이것을 막지못할 것이며 파헤쳐질 것이라. 예루살렘은 폐허의 무더기가 되며 성전이 서있는,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같이 될'것이라. 그리하여 찔레와 가시가 뒤덮일 것이라(미 3:12). 이일을 통하여 미가와 같이 여호와의 참된 선지자일지라도 시온과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할수 있음이 증명된다고 그들은 말하였다.
2) 예레미야의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한 방백들의 결정이 합당한가? 그들보다 앞서 히스기야도 이와같은 경우에 그렇게 하였었다.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들이 미가를 죽게 만들었던가? 아니다. 그들은 미가가 했던 경고를 받아들였었다. 히스기야는 그의 계승자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다. 즉 그는 '여호와를 두려워하였다'(19절). 미가의 설교를 듣고 그는 무릎을 꿇었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경고된 심판을 돌이키시고 자기들과 화해하시기를 '여호와께 간구하였다.' 그리고 그간구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고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시고' 자비를 다시 베푸셨기때문에 헛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시온을 밭과 같이 갈으리라고 위협되었던 저 앗수르 군대를 치도록 천사를 보내셨었다.
(3) 예레미야처럼 예언한 것때문에 여호야김에게 죽임을 당한 다른 선지자의 예가 나오고 있다(20절 이하). 어떤이들은 이사례가 기소자들에게 의하여 주장된 것이라고 본다. 즉, 근자에 들어서는 예레미야가 한것과 같은 그러한 말은 반역죄에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박해를 가하기위해 들은 예라는 것이다. 다른이들은 이것은 예레미야를 옹호했던 장로들이 그렇게 행하면 저희 '생명을 스스로 크게 해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들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즉, 그렇게 하면 죄에 죄를 더가중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의 왕, 여호야김은 이미 한명의 선지자를 죽였다. 이제 다른 한사람을 또 죽임으로써 그한도를 채우지않도록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외에, 일부 훌륭한 해석가들은 이 이야기는 선지서를 집필한 기자, 즉 예레미야나 혹은 바룩이 삽입한 것이라고 본다. 우리야의 예언은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성과 이땅을 쳐서' 한 것이었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증거에 있어서 한결같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토록 많은 증인들의 입으로부터 나온 그말을 존중히 여겨야할 것이다. 여호야김과 그의 모든 신하들은 우리야에 대하여 격분하여 '그를 죽이려 하였다.' 왕이 자기 생명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그는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하여 갔다.' 이것은 확실히 그의 믿음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결과이었다. 따라서 그는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하나님을, 곧 자기를 보호하시며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였다. 특히 애굽으로 도망한 것은 부당한 행위이었다. 많은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용기가 거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매우 정직하기는 하면서도 대단히 소심한 겁쟁이들도 많다. 사람들은 우리야가 사라진 것으로 여호야김의 악의가 충족되었으리라고 생각할수 있겠다. 그러나 군사를 애굽으로 보내어 그를 다시 완력으로 잡아오게 했을정도로 여호야김의 보복심은 도저히 다른 것으로 대체될수 없었다. 그들이 우리야를 애굽에서 끌어내어…왕이 칼로 그를 죽이고(23절). 그는 우리야의 시체에 모욕을 가하였고 '그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지게 하였다.' 즉 마치 그가 여호와의 선지자가 아닌듯이 대우하였다. 이와같이 여호야김은 백성들간에 있는 우리야에 대한 신망을 말살시키기 원하였을뿐만 아니라, 그의 예언에 어떠한 주의도 기울이지 못하게끔 하였으며 그와같은 식으로 예언하지 못하게끔 다른 사람들을 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헤롯은 세례요한의 머리를 베었을때에 자기가 목적을 성취한양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않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게되었을때 자신이 잘못 판단하였음을 알았으며 놀라서 이 예수란 사람이 바로 세례요한이 아니냐고 말하였다.
(4) 우리야는 후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비록 도망하지 않고 계속하여 자기 입장을 고수하였을지라도 놀라웁게 그를 보전하여 주신다. 특별한 임무를 위임받은 자는 특별한 보호하심을 기대할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위하여 한친구를 세우셨다. 그는 온갖 우호적인 방법으로 예레미야를 보호하고 도왔다. 그는 요시야때에 국무대신이었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었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 열왕기서에서 읽을수 있다(왕하 22:12). 그는 방백들사이에서 큰영향을 미치던 자이었으며, 예레미야를 보호하는 일에 있어서 그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핵심
26:1
여호야김의 즉위초에 B.C. 609년경.
여호야김(26:1)
유다왕 요시야의 둘째아들이며, 본명은 엘리아김이다. 애굽의 바로느고가 유다를 정복한후 여호야김이라 불렀다(왕하 23:34). 느부갓네살이 바로느고를 쳐부수자,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섬기게 되었다(왕하 24:1-7). 그는 백성을 압제하며, 피 흘림을 서슴지않았고, 예레미야의 경고를 거부하였다. 후에 바벨론에게 반역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여 쇠사슬에 결박당한채 끌려갔다(대하 36:6).
엘라단(26:22)
여호야김왕의 고위관리들중 한사람이다(36:12). 엘라단은 예레미야의 예언에 감명을 받았고(36:16), 여호야김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두루마리를 찢어 불태울때 이를 만류한 신하였다(36:25). 여호야김의 장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왕하 24:8). 그의 아버지 악볼은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에 참여했던 인물들중 하나였다(왕하 22:12,14).

# 묵상
여호와의 집에서 외칠 하나님의 말씀 ( 26:1-6 )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뜰에 서서 외쳐야할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면 여호와의 집을 실로같이 되게하고, 예루살렘 성을 세계 열방의 저주거리가 되게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실로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13Km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엘리때 그곳에 있던 법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멸망당하자 그이름은 저주받은 자의 칭호가 되었으며(사65:15), 지나가는 사람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습니다(애2:15, 16).
예레미야의 예언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 ( 26:8, 9 )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붙잡고 백성들은 그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심판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은 항상 저주와 학대를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역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기까지 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자세 ( 26:12-15 )
예레미야는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으며 그자신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즉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도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다시 전하고 사람들에게 악에서 떠날 것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두부류 ( 26:16-24 )
본문은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예레미야를 죽이려하는 제사장과 다른 예언자들에게 방백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의 죽음의 부당함을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가운데 장로 몇사람은 예레미야를 변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임할때 그말씀을 듣고 대적하기보다는 그말씀을 듣고 회개하며 청종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아히감 ( 26:24 )
아히감은 요시야왕이 여선지 훌다에게 보낸 사자이며(삼하22:12, 14; 대하34:20), 여호야김때 예레미야를 보호하여 생명을 보존케해준 사람입니다. 그의 아들 그다랴가 예루살렘 함락후 첫총독이 된것으로(렘39:14) 미루어보아 그역시 친바벨론 정책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었던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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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경시받은 예언들 25:1-7
유다의 모든 백성들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주어진다(1절). 예레미야는 이것을 온유다 백성에게 전하였다(2절). 예레미야는 '모든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았다. 아마도 그때는 모든 백성들이 예배드리기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엄숙한 절기중의 한때이었을 것이다. 이예언이 행해진때는 여호야김 사년, 곧 느부갓네살 원년이라고 명시되고 있다. 저 호전적인 왕인 여호야김이 세계의 주인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그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선지자를 통하여 느부갓네살왕이 자신의 종임을 주지시키신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께서 그를 도구로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고자 하지않으셨다면 결코 전세계를 통치하는 군주(세계를 다스리는 전제군주)가 될수 없었을 것이다. 이메시지는 백성들을 회개하게끔 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이제까지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그들은 여기에서 상기하게 되며 그것으로써 그들을 치시는 하나님의 처사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알수 있게 된다.
(1)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23년에 걸쳐서 계속하여 설교해 왔다 "내가 이십삼년동안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필요할때마다 계속하여 메시지들을 주셨었다. 오늘까지…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그것은 너희의 효용을 위함이었느니라." 이와같이 하나님의 신은 옛세상에 대하여 그러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백성들에 대해서도 애쓰고 계셨었다(창6:3). 예레미야는 그메시지들을 전하는 일에 충실하고 부지런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선포하였었다.
(2) 예레미야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같은 일에 대하여 다른 선지자들도 그들에게 보내셨었다(4절). 결코 책으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이백성들을 각성시키는 설교를 했던 하나님의 많은 다른 종들, '그모든 종 선지자'들이 있었다.
(3) 그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저희의 잘못, 저희의 '악한 길과 악행'에 대하여 말했었다. 마치 백성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듯이 그들의 비위를 맞추며 아첨하던 자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들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선지자들은 모두 그들의 우상숭배, 그들이 '저희 손으로 만든 다른 신을 좋아하여 섬기거나 숭배한' 일에 대하여 질책하였었다. 그선지자들은 죄를 회개하고 생활태도를 혁신할 것을 백성들에게 촉구하였다. 이것은 노래의 후렴처럼 되풀이하여 반복된 가르침이었다. 개개인의 개혁, 혁신은 민족적 국가적인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강조되어야 한다. '각기 악한 길과 악행에서 돌이켜야' 한다. 사람들 각자가 자기집 문앞을 치우지않는한 거리는 깨끗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향유했던 자비는 계속 지속될 것이었다. "너희가 그땅에 거하리라.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준 그땅, 그 좋은땅에서 편안하게 평강속에서 거하게 되리라. 죄이외에는 그무엇도 너희를 그곳에서 몰아내지 못할 것이며, 만일 너희가 돌이킨다면 죄가 너희를 쫓아내지 못하리라."
(4) 그렇지만 이모든 것들이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수 있는 유일하고도 올바른 방법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예레미야는 활기와 애정이 넘치는 설교가였다. 하지만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다'(3절). 다른 선지자들도 그들에게 신실하게 행하였지만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다'(4절).

Ⅱ. 70년 포로생활에 대한 예언 25:8-14
앞에서 질책되었던 사항들에 의거한 판결이 여기서 언도되고 있다.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다른 방도를 취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노라"(8절). 죄인은 자기 죄에서 떠나든지, 아니면 그 죄중에서 멸망되든지 해야한다.
(1) 본문에서 유다땅이 바벨론 군대의 왕에 의해서 훼파되리라고 선포된다(9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모든 종 선지자'들을 보내셨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바벨론왕'을 보내실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사자들이, 일찍이 그의 자비의 사신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않았던 자들을 치도록 보내심을 받게될 것이다. 비록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못하는 자라고 할지라도 느부갓네살은 이나라를 침략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하나의 도구였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동안에도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하고 있었다. 가장 강력하고 절대적인 군주들도 하나님의 종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의 도구이었던 느부갓네살은 그의 자비의 도구이었던 고레스와 마찬가지로 진정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리하여 이땅과 모든 이웃하고 있는 주변나라들의 땅에 대한 완전한 멸망이 여기에 기술되고 있다(9-11절). 이파멸로 그들은 이웃나라들의 신망을 잃게되었다. 그것은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할' 것이었다. 내가 그들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끊쳐지게 하리니(10절). 그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이유를 갖지 못하게될 것이며 그럴 마음도 없게될 것이었다. 그들중에서…맷돌소리와…끊쳐지게 하리니. 이는 적군이 저희 창고를 약탈하였을때, 맷돌가는 소리가 낮아질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산업은 파멸하게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더이상 '등불 빛'을 볼수 없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등불을 밝히고 해야할 일거리가 이제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하게될 것이다. 이나라들은 칠십년동안 바벨론왕으로 섬기리라. 포로생활이 얼마동안 지속될지 그시기가 정확히 말해진 것은 예언의 확증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재난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고 그들의 신앙심과 기도를 북돋아 격려하기위해서도 큰도움이 된다.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세상 처음부터 그에게 알려진바 되었다. 이사실은 하나님께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셨을때 그의 행사의 일부를 자기종 선지자들에게 알리셨고 다시 그들을 통하여 자기 교회에 알리셨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2) 결국에는 바벨론도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이 여기에 예고되고 있다. 이는 이미 오래전에 이사야 선지자에 의하여 예언되었던 사실이다(12-14절). 멸하는 자들 자신들도 멸망당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이일은 '칠십년이 마치면' 성취되어질 것이었다. 그런데 이 칠십년이 시작되는 것이 언제인지가 의문거리이다. 어떤이들은 그날짜가 여호야김 사년 곧 느부갓네살 원년의 포로생활로부터 시작된다고 추정한다. 반면에 다른이들은 그 팔년후인 여호야긴의 포로된 날짜로부터 계산한다. 시온에 은총을 베푸시기로 정하신때가 이르면 바벨론왕은 보수되어져야 했으며, 그의 모든 폭정은 갚음을 당하게 되어야 했다. 그때 그나라는 '그 죄악으로인하여' 징벌받게될 것이었다. 그때 그땅은 그들이 다른 땅들에게 행하였던 그대로 '영영히 황무케'될 것이었다. 바벨론의 이멸망은 메대인과 바사인에 의하여 초래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나의 모든 말을 그땅에 임하게 하리니(13절). 갈대아인들에 의한 다른 나라들의 멸망을 예언하였던 예레미야가 또한 갈대아인들 자신들의 파멸을 예고하였다(13절).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대로 보응하리라(14절). 그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위하여 고용되었던 그때조차도 자기들의 행위로 하나님의 법을 범하였다. '여러나라와 큰왕들이' 바사왕 고레스와 동맹하여 '그들로 자기 역군을 삼을' 것이며, 스스로 그들나라의 주인들이 될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세계통치의 보좌에 오르는 발판으로 삼을 것이다.

Ⅲ. 열방의 파멸에 대한 예언 25:15-29
본문말씀에서는 이제 임박하고 있는 전체적인 파멸이 한순배씩 돌아가는 술잔의 비유를 통하여 묘사되고 있다. 환상속에서 보여지는 잔은 그멸망을 수행하는 칼이라고 할수 있다(16절).
(1) 심판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이멸망시키는 칼이 오는 곳은 '여호와의 손에서'부터이다. 악인은 하나님의 칼로 쓰여진다(시17:13). 그칼은 그의 '진노의 잔'이다. 이심판을 내보내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이다. 이것은 취하게 만드는 액체로 비유되고 있다. 이전에 사형선고를 받은 행악자들이 때때로 독약을 마시우는 형벌로 집행되어졌었던 것과 같이 그들은 이액을 마시지 않을수 없다. 악인은 '전능자의 진노를 마시게'해야 한다고 말해지고 있다(욥 21:20;계 14:10).
2) 그칼은 '열방 만국위에 세움'받은 재판관(렘 1:10)으로서 그들에게 판결을 언도하는 예레미야의 손과 그판결의 집행자인 느부갓네살의 손에 들려 그들에게 보내질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손에서 이진노의 잔을 받아가지고 그모든 나라로 마시게해야' 했다.
3) 그칼은 이스라엘과 알고 지내는 모든 나라들에 보내지게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잔을 받아서 '그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였다. 즉, 그는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나라들 각각에 관하여 그들이 이 큰파멸에 포함되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맨먼저 불리워지고 있다(18절). 왜냐하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이 시작하기' 때문이다(벧전 4:17). 즉, 성소에서 시작되어진다(겔 9:6). 그리고 예언의 이부분은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사실은 '오늘날과 같으니라'라는 부연 설명부분에 암시되고 있다. 여호야김 사년에 사태는 아주 험악한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애굽왕 바로'가 그다음에 나오고 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그 상한갈대를 의뢰하였기 때문이다(19절). 유대인의 남은 자들은 애굽으로 도망하였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곳에서 그나라의 멸망을 구체적으로 예언하였다(렘 43:10,11). 가나안 땅에 인접하고 있던 모든 다른나라들은 예루살렘과 함께 이 쓴잔을 들어야만 했다. '모든 잡족,' 아라비아인들, 노략질로 살아가던 여러 유랑민들과 에돔 나라에 인접한 '우스땅 모든 왕'도 이잔을 마셔야만 했다. 블레셋인들도 이스라엘을 성가시게 하여왔지만 이제는 그들의 성읍이 제물이 되어야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에돔, 모압, 암몬, 두로, 그리고 시돈은 이스라엘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지역들이다. '바다 저편 섬'들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베니게와 수리아의 도서들로 생각된다. 드단과 또 함께 언급되고 있는 다른나라들(23,24절)은 이두매 경계와 아라비아 사막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엘람인들은 메데와 연합하고 있는 바사인들을 가리킨다. 바벨론에 가까이 있는 '북방 원근의 모든 왕'도 느부갓네살의 승리의 칼에 의해 포획되어질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참으로 믿기 어려울만큼 맹렬히 승리를 구가하면서 세계 모든 왕국들을 자기 야심의 희생물로 만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했다고 말해지며 로마 제국도 '천하'라고 일컬어진다(눅 2:1). 혹은 그것은 땅에 있는 '모든 나라'의 운명으로 읽을수도 있다. 그들 모두가 전재의 두려운 결과를 느끼게될 것이다. 인간의 정욕이 '저희 지체중에서' 싸우기를 계속하는한(약 4:1), 세계는 거대한 싸움터이었거니와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세삭왕은 그후에 마시리라(26절). 다시말해서 자기 이웃나라들에게 이모든 환난을 주었던 장본인, 바벨론왕 자신은 결국에 그것을 자기 머리위로 돌아오게할 것이다. 세삭이 바벨론을 가리킨다는 것은 51:41절말씀을 보아 자명하다. 바벨론의 멸망은 이미 예언되었다(12,13절).
4) 이모든 나라들에 임해질 멸망은 지나치게 술을 마셨을때 발생하는 결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16절). 취하라 토하라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27절). 술취한 사람들은 종종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술에 취함은 그자체가 징벌이 되는 죄이다. 하나님께서 한나라에 칼을 보내시며 그나라를 황폐케하리라고 단언하실때에 그나라는 이내 술취한 자와 같이 되어버린다. 온통 혼란으로 가득차게 되며 그모사들은 미치고 그들의 지모는 끝에 다다르게 되며 끊임없는 걱정으로 마음이 병들어 대적앞에서 엎드러져 스스로를 도울 방도가 없게 된다.
5) 그들은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할 것이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같이 그렇게 경시해 버릴만한 사람의 예언을 믿으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임을 그들에게 말해주어야 하며 그들이 전능자와 다투는 일은 부질없는 일임을 말해야 한다.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28절).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이 이유를 말해야 했다. 지금은 보수의 때요, 셈하는 날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이미 셈을 치루도록 불림을 받았다는 것이다.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수 있느냐(29절). 만일 예루살렘이 열방에게서 우상숭배를 배웠음으로 말미암아 징벌받는다면, 그것을 전해준 열방들이 어찌 형벌받지 않겠는가?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거민을 칠것임이니라. 왜냐하면 그들은 예루살렘의 거민들을 타락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2) 이세상에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그에게 마땅히 셈해야 하고 그의 심판에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못살게 괴롭히고 그들에게 위해를 가하던 자들은 종국에는 그것에 대하여 셈하게될 것이다. 구세주의 날이 올것이며 '보수할 날, 신원하실때'가 이를 것이다. '여호와의 엄중하신 말씀'은 결국에 여호와의 엄중하신 심란이 될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미 오래전에 이들 나라들의 대다수에 대하여 예언한바 있었다(사13장 이하). 그리고 이제 그의 모든 예언들이 성취되어질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정의감이라고는 찾아볼수 없을정도로 그렇게 자기 권능에 대하여 자긍하였다. 이러한 자들은 세계를 전복시켜 놓고서도 여전히 숭배받고 찬미받기를 기대한다. 알렉산더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한낱 큰해적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하였을때에, 자기 스스로 위대한 군주라고 생각하였다.

Ⅳ. 여호와의 진노 25:30-38
바벨론왕이 자기 군대로 더불어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나라들에 행할 저 무서운 파멸에 대한 묘사가 좀더 계속되고 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이 전쟁을 일으켜 자기들을 친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치시는 것임을 그들에게 말하도록 지시받고 있다(30절). 여호와께서 높은데서 부르시며. 그는 그높은 곳으로부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밟는 자같이 외치실 것이다.' 그는 '그소혈에서' 나온 '사자같이' 소리를 발하신다(38절). 그리고 자기 먹이를 찾으러 돌아다니는 사자와 같다.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31절). 그가 그들과 더불어 다투심은 그들의 사악함으로 인함이요, 그들이 그의 권위와 자비를 경시함으로 인함이다. 여호와께서…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그들의 악행은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켰으며 그리하여 이모든 파멸을 유발하였다. '요란한 소리가 땅끝으로 이를' 것이다(31절). 이것은 나팔이나 북소리로 울려지는 경보가 아니다. 이경보는 대풍, 땅끝에 있는 해안에서 일어나는 폭풍, 혹은 태풍에 의한 것이다(32절). 갈대아 군대는 북방에서 일어나, 그앞에 거치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며 순식간에 진행하는 태풍과 같은 것이다. 이제 목자들, 곧 왕들과 방백들과 세상의 권세자들, '양떼의 인도자들'은 '외쳐 애곡하게'될 것이다. 그들은 이제껏 가장 용기있는 자들로 자처해 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간담이 서늘하게될 것이다(34절). 울부짖는 사자의 비유가 사용된 것은 아마도 목자들이 가장 황망하게 놀라는 때를 빗대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들은 자기 양떼들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사자의 울부짖음을 들었으나 도피할 길이 없음을 깨닫게되어 가장 놀라게 된다(35절). 그때 목자들은 자기의 안전을 꾀하여 '도망할수 없겠고 양떼의 인도자들은 도피할수 없다.' 우리 이웃집에 불이 났을때는 곧 우리 자신의 집을 염려해야 되는 때이다. 한나라가 전쟁에 처해있을때에 모든 이웃나라들은 귀기울이고 두려워해야만 하며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무수한 무리들이 무자비한 갈대아인들의 칼아래 쓰러져서, '여호와에게 살육을 당한 자가' 온 땅 곳곳에서 발견될 것이었다. 죄로인하여 죽임당한 자는 '여호와에게 살육을 당한 자'이다. 그들에게는 저희를 매장해줄 어떤 친구도 남아있지 않게될 것이었다. 그리고 대적들은 그들을 땅에 묻어줄만한 인정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이전쟁의 결과는 온땅이 차례차례로 황량하게 되는 것이다(38절). 그러나 여기에는 이상황을 보다 가련하게 만드는 두가지 표현이 나온다.
(1) 너희가 귀한 그릇을 떨어짐같이 될것이라(34절). 그들사이에서 '귀한 그릇'으로 간주되었던 자들, 곧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자들이 칼에 엎드러지게될 것이다. 다시말하여, "너희는 쉽사리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버리는 유리잔이나 접시가 떨어짐같이 될것이라."
(2)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37절). 항상 조용하게 지내왔던 자들, 저희 이웃을 못살게 괴롭히지 않았으며 평화롭게 살아왔고 어떠한 사람의 화도 유발시키지 않아왔던 자들, 그들조차도 피할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전쟁의 두려운 결과중의 하나이다. 모든 평강의 자녀들을 위하여 불과 칼이 미치지 못하는 '평안한 목장'을 하늘위에 마련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라.

# 핵심
25:1-14
약 70년간에 걸친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예언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하나님의 종이라 불린 느부갓네살(25:9)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섬긴 적이 없으며, 자신의 정복욕을 위해 유다를 함락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내 종”이라고 부르셨다. 이말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징계하고 연단시키기위해 일시적으로 사용된 도구임을 나타낸다.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귀환조서를 내린 고레스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불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사 45:1).

# 묵상
손으로 만든 것 ( 25:7 )
본문의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이라는 말은 금이나 은, 또는 동이나 나무, 돌로 만든 우상을 가리킵니다. 우상숭배는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는 것으로 스스로의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에 복종하며 굴복하는 일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우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하나님만 섬겨야 하겠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예언의 성취 ( 25:12 )
본문에 언급된 칠십년은 주전 606-536년을 말합니다. 주전 536년경에 바사제국이 바벨론을 정복하고 유다포로민을 본국으로 돌려보냄으로 이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단1:1, 2). 그리하여 고레스의 귀환명령에 의해 바벨론에서 70년만에 이스라엘로 돌아온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비롯한 하나님의 참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들의 삶에서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게됩니다.
진노의 잔 ( 25:15-18 )
이잔은 하나님의 진노로인한 재앙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이진노의 잔을 예레미야에게 주셔서 그로하여금 나눠주게 했는데, 이는 곧 심판을 선언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만민에게 돌아갈 이죽음의 잔을 대신 마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마26:39).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될 열방 ( 25:19-29 )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유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닙니다. 주위의 열방역시 그들의 죄로인한 심판에서 면제될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들어쓰신 바벨론역시 겸손하지 못하고 하나님앞에서 교만했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당하게 하셨습니다.
포도밟는 자같이 외치실 여호와 ( 25:30 )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거민을 향하여 포도밟는 자같이 외치신다는 본문은, 포도밟는 사람이 포도를 으깨어 즙이 나오게하는 것처럼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붉은 피를 흘리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즉 포도밟듯이 사람을 밟는다고 하는 것은 가장 잔인한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날이 되면 하나님은 더이상 은혜와 자비를 베풀지않고 악인들을 분노의 포도밟듯이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열국과 다투시는 하나님 ( 25:31 )
이는 세상나라들이 이성없는 짐승들과 같아서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악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변론하시며 그들의 죄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육체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인하여 의롭다고 인정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건짐을 받을수 있습니다.
목자들의 애곡 ( 25:34-36 )
목자들이 애곡한 이유는 심판의 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에게 먼저 경고를 주셨습니다. 이심판의 때에는 목자나 목장 그리고 모든 양떼가 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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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무화과나무의 환상과 그의미 24:1-10
이 짤막한 장은 같은 섭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다른 긴장들을 수월하게 해석하도록 도와준다. 다시말하여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재난에 처하게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유익을 가져오도록 예정되어 있으며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손안에 있는 훈계의 회초리와 같다는 것이다.
(1) 이설교가 행해진 시기는 여고냐가 포로된 얼마 뒤이었다(1절). 여고냐는 경시당하는 '천한 파기'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끌려간 사람들가운데는 에스겔과 같이 매우 귀한 자들도 있었다(겔1:12). '유다 방백들'중 많은 수가 포로로 끌려갔다. 백성들가운데서는 단지 '목공들과 철공들'만이 강제로 끌려갔었다. 이는 갈대아인들이 그러한 직종의 사람들을 필요로했기 때문이었다. 점성가들과 천문관측자들은 대단히 많았지만 철공들과 목공들은 크게 부족한 형편이었다. 그렇게 끌려간 백성들가운데에는 많은 선량한 자들이 있었다. 이것을 예레미야 선지는 마음 아파하고 있는반면에 어떤 자들은 그렇게 포로신세가 된 자들을 모욕하며 의기양양해 하였다.
(2) 예레미야는 환상을 보는데, 사로잡힌 자들에 대한 구별이 이환상을 통하여 그의 마음속에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의 전앞에 놓인 무화과 두광주리'를 보았다. 이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적인 자비를 부여해주심으로써, 아울러 계획되어 있는 현세적인 자비도 허락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7절). 그들은 일찍이 예루살렘에서 모든 계시와 규례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되었던 것보다도, 바벨론에서 그의 섭리를 통하여 그를 훨씬더 잘 알게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약속되고 있다. "나를 아는 머리가 아니라 내가 여호와인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로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되리라고 약속하시며 책임지신다. 그가 우리를 돌이키시면 우리는 돌아서게될 것이다. 이렇게하여 그들은 다시금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게될 것이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을 배역했던 자가 만일 진정으로 그에게로 돌아온다면, 그는 다른 하나님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언약의 온갖 특권과 위안을 값없이 받게된다.
(3) 나쁜 무화과의 교훈이 나온다.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과 이땅에 남아있는 자'들은 교만하며 안전을 확신하고 있었다(겔 11;3). 많은 자들이 저희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도피처를 찾아 애굽으로 피신하였는데, 그들은 그곳에서조차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 행동을 하였으면서도 스스로 현명하게 행동하였노라고 장담하였다. 이제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을 그렇게 경멸하며 바라보던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되고 있다.
① 이미 포로로 끌려간 자들은 한나라에 정착하여 서로 교제하는 낙을 누리는 반면에 이들은 뿔뿔이 '세상 모든 나라중에 흩어질' 것이다.
② 포로된 자들은 저희의 유익을 위하여 잡혀간 것인 반면에 이들은 '환난을 당하기' 위하여 모든 나라들에 흩어질 것이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그들을 완강하게 굳어지게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수 없도록 만들 것이며 오히려 더욱 멀리 떨어지게할 것이다.
③ 저들은 역경중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는 영예를 누리게될 터이나, 이들은 온인류에게 버림받는 수치를 당하게될 것이다. 그들로 내가 쫓아보낼 모든 곳에서 치욕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하며(9절).
④ 저들은 자기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반면에, 이들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될것이며 고향 땅을 결코 다시 보지못할 것이다.
⑤ 저들에게는 보다 좋은 시절이 예비되어 있었으나 이들에게는 보다 나쁜 시기가 예비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느곳으로 흩어지든지간에 '칼과 기근과 염병'이 뒤이어 보내질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로마인들에 의한 유대인들의 마지막 멸절을 상징적으로 언급하는 것인듯하다. 그때에 의뢰했던 자들은 보살핌을 받았으나, 불신으로 완강하게 버텼던 자들은 모든 나라중에 흩어져서 '조롱과 저주'를 받았다.

# 핵심
24:1-10
무화과 두광주리의 비유와 그해석에 관해 언급하는 본문은 이제까지 선포된 선지자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를 명확히 제시한다.
목공들과 철공들(24:1)
목재로 물건을 만드는 목수들과 쇠붙이로 철제 기구를 만드는 장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농기구뿐만 아니라 무기도 제조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을 포로로 잡아간 것은 무기제조를 막아 군사적인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왕하 24:16).

# 묵상
무화과 두광주리 ( 24:1-7 )
무화과는 유대민족의 상징으로, 좋은 무화과는 바벨론에 포로되어 갔지만 그곳에서 경건한 생활을 한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악한 무화과는 유다에 남아있는 자와 애굽에 도망갔다온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사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치않음으로 멸망받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재건과 회복은, 바벨론에 끌려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앞에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고 회당을 세우며 그들의 마음속에 계명을 새기기 시작한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악한 무화과 같은 사람들의 운명 ( 24:8-10 )
유다왕 시드기야와 그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들과 애굽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않아 하나님앞에서 악한 무화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 모든 나라중에 흩으셔서 환난과 치욕과 말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조롱과 저주를 받게하고, 칼과 기근과 염병을 통해서 이스라엘안에서 완전히 멸망당하게 하셨습니다. 악한 무화과의 운명이 베어져 불살라지는 것처럼 악한 무화과 같은 사람들 역시 영원히 멸망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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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유다의 회복에 대한 예언 23:1-8
(1) 양무리를 치는 일에 태만한 목자들에게 두려 운 말씀이 주어진다. 목자에게 화있으리라. 즉 이목자는 교회와 국가양측의 지도자들을 일컫는다. 그들은 백성들을 인도하고 먹이며 보호하고 보살펴야 마땅한 자들이다. 그들이 양무리의 주인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백성들을 '내 목장의 양무리'로 부르신다. 즉, 그는 그들에게 좋은 목장을 제공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라는 명을 받았고, 또한 그렇게하는 시늉을 하면서, 사실은 폭행과 압제로 양무리를 멸하여 흩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는 말씀이다. 양무리를 보살피지않은 그들은 사실상 저들을 흩어몰아낸 셈이다. 맹수가 저들을 흩었다고 하여도 목자들에게 잘못이 있음은 목자들이 저들을 한데 모아 지켰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2) 부주의한 목자들로인해 방치된 양무리에게 위로의 말씀이 주어진다. 비록 위임받은 목자들이 그들을 돌보지않는다해도 목자장께서 그들을 보살피실 것이다. 그들이 임무를 수행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신다.
1)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마침내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될 것이며 선한 통치아래 행복하게 정착할 것이다(3,4절). 비록 하나님의 양무리가운데 남은 자들이 소수에 불과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불러모으실 것이며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양떼가 '다시 그우리로 돌아오듯' 그들은 이전의 거처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생육이 번성할 것이다.' 예전에 그들은 끊임없이 동요되지 않을수 없는 일을 당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아니할 것이다. 스룹바벨이나 느헤미야같은 목자들은 여호야김이나 여고냐처럼 호사롭게 살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들은 저들처럼 백성들에게 역병이 된것이 아니라 큰축복이 되었었다.
2) 왕되신 메시야, 양무리들의 크고도 선하신 목자께서 마지막때에 그의 교회를 복되게 하기위하여 일어나시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실 것이다(5,6절). 다윗의 집은 여고냐에 대해 경고된바에 의하면 몰락될 것으로 여겨졌다(22:30). 그러나 여기에 다윗과 일찍이 맺었던 언약의 명예를 보장하는 약속이 나오고 있다. 그 언약으로인하여 다윗의 집은 오히려 예전 어느때보다도 더욱 빛을 발하며 몰락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볼수 있는바에 비하면 예레미야서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이 그리 많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단히 탁월한 예언이 있다. 첫말씀은 이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오랜세월이 소요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때가 이르리니(5절).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내가 그를 볼것이라. 그러나 지금은 아니라." 그리스도는 이말씀에서 다윗에게서 난 한가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의 출현은 보잘것없고 그의 시작은 미미하여 싹눈달린 가지와 같은 것이다. 그의 일어남은 땅에서 나오는듯이 보여지나 자라면서 많은 열매를 맺게된다. 다윗의 집안에서 난 가지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소생할 것같이 보여지지 않았다. 그는 다윗에게서 난 뿔이다(시 132:17,18). 그는 '한 의로운 가지'이다. 왜냐하면 그자신이 의로우시며 그에게 속하는 많은 자들이 모두 그를 통하여 의롭게 되기 때문이다. 대언자로서 그는 의로우신 자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말씀에서 그는 교회의 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이세상에,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고 승리할 한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그는 영원한 복음의 병거를 타고 전진하실 것이며 '이기고 또 이기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써, 일찍이 사단이 강탈했던 권세를 쳐부숴뜨리실 것이며 거룩하게 살게하는 그의 통치를 완전히 확립하실 것이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사 온세상을 의롭게 하실 것이다. 이렇게하여 그의 모든 충성스런 종들은 거룩한 보장과 마음의 평정을 얻게될 것이다. 그의 치세아래에서,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다(참조. 눅 1:74,75). 그리스도께서 우리 영혼안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때, 곧 우리 영혼의 가장 높은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는 그때에 영혼은 평안히 거하게 된다. 그는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하나님으로서 그는 여호와(즉, 하나님의 말로 표현할수 없는 칭호)이시다. 이는 그의 영원성과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성을 암시한다. 중보자로서 그는 '우리의 의'이시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킴으로써, 그는 영원한 의를 가져오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계약에 동의하면 그의가 곧 우리의 것이 되도록 은혜로운 계약안에서 그의를 우리에게 작용하게끔 하셨다. 그는 지고하시며, 충만하시며, 영원하신 의이다. 우리의 모든 의는 그에게서 나온 것이며, 그로인하여 존재한다. 그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6절).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실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알려지기도 하실 것이다. 우리의 의는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의 이름으로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죄로부터 사함받으며 은총가운데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다"는 것외에는 내세울만한 다른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를 우리 주님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3)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되돌아온후, 저희에게 임할 이위대한 구원은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보다 훨씬더 광휘로운 것이 될것이다(7,8절). 그들이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집 자손을 북방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바벨론에서 나온후, 왕되신 메시야께서는 복음의 성전을 세우셨다. 이는 바벨론에서 참으로 놀라웁게 구출된 그민족 최대의 영광이었다.

Ⅱ. 악한 선지자와 제사장 23:9-32
본문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상당히 긴 교훈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서 하나님께 하소연하였었다(14:13). 그리고 그들이 공동의 파멸에 함께 빠지리라고 번번히 예언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거짓 선지자들의 재난이 중점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위임과 영감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자들이 스스로 파멸하는 것을 보는 일, 그리고 그들의 거짓과 패역으로 백성들이 파멸하는 것을 보는 일이 자기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표현하고 있다(9절). 내 중심이 상하며…내가 취한 사람같으며. 예레미야는 어떤 일이든 마음에 깊이 새겨두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어떠한 연유든 자기 조국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그의 심령에 깊은 충격을 주곤했다. 그는 지금도 고통속에 놓여있다.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선지자들과 그들의 죄, 그들이 설교한 그릇된 교리들로 인해서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은양 자처하면서 악한생활을 영위하였다.
2) 여호와와 그의 심판으로 인해서이다. 그의 심판이 홍수와 같이 엄습할 것이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면전(이렇게 읽을수도 있다)과 그 거룩한 말씀의 진면목"으로부터 나오는 파멸과 황폐화를 생각하고는 전율하였다.
(2) 예레미야는 그땅에 가득한 가증스러운 악과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진노의 표적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에 대해 애곡한다(10절). 이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 그땅은 영적인 간음과 육체적인 간음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의 땅은 이제 기근의 심판아래 슬퍼하며, '광야의 초장', 그 아름다운 지역은 비가 내리지않음으로 마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회개의 기색은 보이지않고 있다. 그들은 크게 마음을 굳히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그릇된 길로 향해있다. 그들은 '열심내기는 하지만 좋은 뜻이 아니었다'(갈 4:17). 그들은 비록 이와같이 자기들과 다투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기는하나 그릇된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다.
(3) 그는 그모든 것에 대하여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특히 선지자들을 책망한다. 선지자와 제사장 다 사특한지라(11절).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행하는 시늉을 하지만 실은 그것을 모독하고 있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자처하면서 실은 그것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외식을 행하고 있었다(혹자는 이렇게 읽는다). 그들은 거룩함을 가장하여 지극히 사악한 계획들을 실시하고 있었다.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노라. 제사장들이 직무를 행하며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곳인 성전에서조차도, 그들은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죄를 범하였다. 두가지 사항에 대해서 그들은 질책받고 있다.
1) 그들은 스스로 백성들에게 죄를 가르치는 본보기가 되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사마리아 선지자들과 비교한다. 사마리아는 열지파 왕국의 수도로서 황폐해진지 이미 오래였다. 바알을 의탁하고(13절).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이 사마리아 선지자들의 우매함이었다. 그렇게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그릇되게 하였다. 곧 이스라엘 백성으로하여금 참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저버리고 바알을 숭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13절). 그러나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은 그러한 일을 행하지 않았었다. 그들은 참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였으며 자기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한 사마리아의 선지자들과 같지않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로 백성들을 오도하였던 것이나 조금도 다를바가 없게 부도덕한 행위들로 나라를 타락시켰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이용하여 온갖 더럽고 불순한 행위들에 탐닉했다. 그들은 진리의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여 거짓을 행하고 있었다. 이렇게하여 그들은 모든 사람들로하여금 다음과 같이 말하게함으로써 죄인들을 부추겼던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선지자들이 행하는대로 해야할 것이라. 어떻게 우리가 우리 선생보다 더 나을수가 있겠는가?" 이러한 경로로해서 유다와 예루살렘은 '소돔 사람과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하는 것외에는 달리 적절한 도리가 없는 자들로 간주하셨다.
2) 그들은 그릇된 예언들로 백성들을 범죄하도록 부추겼다. 그들은 스스로가 죄를 지어도 아무런 해도, 위험도 없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그렇게 행하였다(16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그들은 죄인들에게 설사 그들이 계속 죄를 고수하더라도 형통하리라고 말했다(17절). 자신의 쾌락을 충족시키기에 열심인 자들은 자기 하나님을 경시한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빌붙었다. 그들은 악한 길로 행하는 자에게는 평안이 없다고 계속하여 말했어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가 평안하리라…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들에게 말했다는 점이다.
(4)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선지자들이 죄가운데 있는 백성들을 달래기위해 말한 모든 것을 부인하신다(21절).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임무도 위임받은 일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달음질하였다.' 또한 매우 대담하였다. 참된 선지자들이 때때로 맞서 싸워야하는 어떠한 곤경도 없이 그들은 '예언하였다.' 그들은 죄인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리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누가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였는가'(18절)? "너희가 그메시지를 대단히 확신있게 전하는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상의한 일이 있었느냐? 너희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였으며 거기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였도다. 너희는 그메시지를 성경과 대조해보지도 않았도다.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성경이 지닌바 영원히 변함없는 대의를 주목하였더라면 그러한 메시지를 결코 저하지 않았을 것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회의에 참예'하지도 않았으며 '그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었다는 사실이 계속하여 입증되고 있다(22절). 그들이 만일 지금 자처하고 있는대로 '여호와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다음과 같이 행하였을 것이었다.
1) 그들은 성경을 저희 표준으로 삼았을 것이다.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2) 그들은 영혼을 개심시키는 일을 저희 본분으로 삼고 저희의 모든 설교에서 이를 목적으로 하였을 것이다.
3) 그들은 저희의 사역에 있어 다소의 인증이라도 가졌을 터이었다.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그들이 설교한 말들이 '내 말'이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백성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을' 것이라."
(5) 하나님께서는 이선지자들을 그악으로 인하여 징벌하시겠다고 경고하신다. 그들은 백성들이 '평안하리라'고 약속하였다. 그약속이 얼마나 우매한 것인지 보여주시기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들로 평안을 얻지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12절).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하므로 '그들의 길이 그들에게 흑암중에 미끄러운 곳과 같이'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한다고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흑암중에, 혹은 짙은 안개속에 있게될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안전을 보장한다고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디디고 설만한 어떠한 굳건한 발판도 발견할수 없게될 것이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너희를 평안케하리라"고 자처하였다. 그러나 그들 자신들이 먼저 불안하게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도망하는 중에 '밀침을 받아 그길에 엎드러질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위협되고 있는 재앙을 막겠다고 자처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벌하는 해에 그들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다. '벌하는 해'란 보응하는 해이다. 그리고 더나아가서 이와같은 경고가 주어지고 있다(15절). 내가 그들에게 쑥을 먹이며. 여기에서 이 쑥은 메스꺼울뿐만 아니라 또한 유독한 식물을 말한다. 그들에게…독한 물을 마시우리니. 이 '독한 물'은 당근에서 추출해낸 독약, 즉 헴로크의 즙이라고 말하여지기도 한다(참조. 9:15).
(6) 백성들은 여기에서 이들 거짓 선지자들을 신뢰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있다(16절).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주의하라. 그리고 너희에게 예언하는 이선지자들의 말을 듣지말라. 너희는 결국에 서는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되리라. 그들은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시는지 들어보라." 보라 나 여호와의 노가 발하여 폭풍과 회리바람처럼 악인의 머리를 칠것이라(19절). "그들은 너희에게 만사가 평안하고 조용하리라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폭풍우가 몰아치리라고, 곧 그무엇도 거기에 버티어서서 견디어 낼수 없는 여호와의 노가 발하리라고 말씀하시는도다." 이판결의 선고는 돌이킬수 없는 것이다(20절). 여호와의 노는…쉬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실 것이며 그의 진노도 돌이키지 아니하실 것이다. 언도된 판결이 집행되어지기까지, 그리고' 그마음의 뜻하는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 그러하실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지금 주목하여 깨달으려고 하지않고 있다.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깊이 숙고함으로 그것을 깨달을 것이며, 헤아리게될 것이라."
(7) 거짓 선지자들이 저희의 과오를 철회할수 있게끔 각성을 위하여 몇가지 사항이 제시되고 있다.
1) 그들이 비록 사람은 속일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지혜로우시기때문에 결코 속임당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각성해야만 한다.
①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무소부재하심과 전지전능하심을 단언하신다(23,24절). 설혹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마련되어있으며 이세상은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있는듯 보일지라도, 그는 이아랫세상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23절). 하나님의 살피시는 눈은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두루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권능은 하늘의 거민들에게 역사하시듯 마찬가지로 땅의 거민들에게도 미친다. 사물의 가깝고 먼것에 따라 우리 인간의 관찰력과 활동력은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되지만 하나님께 있어서 그것은 아무런 영향력도 미치지 못한다. 그에게는 어두운 것이나 밝은 것이나, 가까운데 있는 것이나 먼데 있는 것이나, 매 한가지이다. 인간의 사람된 품성이나 모든 계획들은 하나님의 두루 감찰하시는 눈앞에서 아무것도 감추어질수 없다(24절).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수 있겠느냐. "어느 누가 자기의 계획과 의향을 심중의 은밀한 곳에 감출수 있으랴?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랴?" 그는 모든 곳에 편재하신다. 그는 천지를 다스리실뿐만 아니라 그의 본질적인 현존에 의해서 '천지에 충만하시다'(시139:7,8이하). 그 어떠한 장소도 하나님을 안에 두거나 배제시킬수 없다.
②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거짓 선지자들에게 적용하신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장하는 뛰어난 재주를 소유하고 있었다(25,26절).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하나님의 계시라는 미명아래 이세상에 대해 온갖 부끄러운 일들을 행하였음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희로 알게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기만을 간파하여 들추어 내신다. "거짓을 예언하는 일과 그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는 일을 언제까지나 계속하는 것이 저 선지자들의 마음에 품은 생각이냐?"(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2) 그들은 백성들에게 거짓 계시를 속여 안기며 저희 자신의 망상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꾸미는 일이 곧 모든 신앙을 경시케하는 첩경이자 사람들을 무신론자내지 이단자로 만드는 첩경임을 각성해야 한다.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생각인즉…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하려 함이로다(27절). 사단이 뜻하는바 가장 큰일은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단은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을 잊게함으로써 자신을 나타내왔던 것이다. 때때로 사단은 거짓신들을 세움으로써 이목적을 이룬다(사람들로 바알을 사랑하게 만들면 그들은 이내 하나님의 이름을 잊게된다). 그리고 때로는 참된 하나님을 곡해시킴으로써 이뜻을 성취한다.
3) 그들은 자신들의 예언과 여호와의 진정한 선지자들이 전한 예언사이에 얼마나 큰차이가 있었는지에 대하여 각성해야 한다(28절).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즉 꿈을 꾼 선지자) 몽사를 말할 것이요(즉 그것을 꿈으로써 말해야할 것이요). "그선지자는 일반 사람들이 각자 자기 꿈에 대하여 이야기하는것 이상으로 자신의 꿈을 강조하지 말아야 할지라. 그러나 내 말을 받은 참된 선지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해야할 것이라. 그것을 진리로서 말해야할 것이라(혹자는 그렇게 읽는다). 그리고 자신의 교훈을 고수해야할 것이라. 그리하면 너희는 거짓 선지자들이 말하는 꿈과 참된 선지자들이 전하는 하나님의 지시사이에 있는 현격한 차를 곧 깨달을수 있게될 것이라. 단련된 영적분별력을 소유한 자들은 그것을 분간할수 있을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인간의 망상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이 가볍고 무가치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실질적인 내용을 담고있으며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영혼을 위한 양식이며 생명의 떡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29절). 그들의 말도 그러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지니고 있는 권능과 효력을 그말들도 가지고 있는가? 불은 어떤 대상이나 물질에 대해 작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효력을 지닌다. 불은 진흙을 굳게 하지만, 밀랍은 녹인다. 불순물은 태워버리지만 금은 연단하여 정금으로 나오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어떤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에 비유된다. 사람의 겸손치않은 마음은 반석과 같다. 만일 불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녹지않는다면, 방망이와 같은 그말씀에 의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스러뜨려질 것이다.
4) 그들은 그들이 이길은 계속하여 고수하는한 하나님께서 그들과 맞서 대적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각성해야 한다. 그들은 이에 대하여 세번 되풀이하여 듣고있다(30,31,32절). 그들은 여기에서 기소되고 있다. "그들은 서로 자기 이웃에게서 내 말을 도적질하는도다." 참된 선지자들의 정신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못하는 자들이 그들의 말을 흉내내고, 그들의 좋은 말들을 추려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말인양 전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수 없이 마지못하여 한 행위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일부 백성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거짓 선지자들이 그것을 그들의 심중으로부터 훔쳤다는 것이다. 이는 복음서의 비유에서 악한 자가 말씀의 좋은 씨앗을 빼앗았다고 말해진 것과 같다(마13:19). 교묘하게 스며들어감으로써 그들은 말씀의 확신아래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자들의 마음에 미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약화시켰으며, 그효력도 감소시켰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치시고자 하신다(31절).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에게 설교하면서 마음내키는대로 혀를 놀리고 있으며, 더군다나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한다. 혹자는 본문을 이렇게 해석한다. "그들은 저희의 혀를 매끄럽게 굴리도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매우 사근사근하게 비위를 맞추며, 듣기좋고 그럴듯한 것외에는 일체 아무말도 하지않는다. 그들은 또한 공중을 속인 죄로 기소되고 있다(32절). 내가 치리라. 왜냐하면 그들이 '거짓 몽사를 예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낱 저희 자신들의 생각에 불과한 것을 하나님의 영감인척하면서 예언하고 있다. 백성들이 과오를 범한것, 매사를 분별없이 과신하고 있는것, 그것은 백성들의 잘못이다. 하지만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선지자의 잘못은 훨씬더 크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로부터 어떠한 위임을 받은적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으신다.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백성에게 아무유익도 없을' 것이다.

Ⅲ. 불경한 백성들 23:33-40
백성들의 불경, 그리고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독신이 구체적인 실례를 통하여 본문에서 질책되고 있다. 사소한 문제로 여겨질지 모르나, 공중설교에서 행해지는 불경내지 독신, 그리고 한나라의 언어의 타락은 거기에 얼마나 악이 만연해있는지를 보여주는 주지할만한 증거이다.
(1) 여기에서 그들이 질책받고 있는 죄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조롱하고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희롱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라고 물었다(33,34절). 이는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여 진노케하는 말이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에 대하여 이야기할때마다 조롱하고 경멸하는 어조로 그것을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칭하였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자주 사용했던 말로, 그들은 그말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사용하곤 했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영혼에 얼마나 중요한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나타내려 함이었다. 그런데 이제 불경스러운 냉소자들은 이말을 취하여 조롱거리로 만들었다. 하나님의 사자들을 조롱한다는 것은 곧 그의 메시지를 방해하여 좌절시키는 행위이다. 어떤 이들은 '여호와의 말씀'이 '엄중한 말씀'이라고 불리워졌을때, 그것은 "책망과 위협적인 경고가 담긴 어떤 말"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위선적인 어조로 이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은 항상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며 언제나 그들을 놀라게 한다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하는 것으로 규정지었다. 이와같은 죄를 범한 자들은 바로 일부 거짓 선지자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독신적인 선지자와 제사장들로부터 하나님의 일을 우롱하는 것을 배운 일부 백성들이었다.
(2) 그들은 이 불경스러운 말투에 대하여 질책받음과 아울러, 어떻게 예로써 말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지시받는다. 우리는 이말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수 있다(슥 9:1;말 1:1;나 1:1;합 1:1).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선지자로하여금 하나님의 규칙을 지키게하려고 하신다(렘 15:19). "너는 이말을 중단치 말고 계속 사용하라. 그러나 그들로하여금 이말을 남용치말도록 중단시키라. 그들로 다시는 이같이 불경스럽고 경솔한 방식으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못하게 하라"(36절).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말해야만 하는가?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37절). "너희는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네가 하나님께 물을때에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이라 대답하셨으며 여호와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느뇨' 하라." 그리고 그들은 선지자에게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서로 이웃에게' 물을때에도 그와같이 말하여야만 했다(35절).
(3)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이말을 하지말도록 경고하셨을지라도 그들은 여전히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말할 것이었다(38절).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쓰는' 자들은 그것에 대하여 혹심하게 보응을 받게될 것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곡해하였다. 또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들을 조롱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야기시키는 행위이다(36절). 각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이 되리니. 다시말하여 이죄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참으로 무거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조롱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치루게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스갯거리로 삼기에는 너무도 중한 벌이 될것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라고 물었던가? 선지자로하여금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라. "무슨 엄중한 말씀이느냐고 네가 말하는가? 바로 이러한 말씀이니라. 그가 너희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느니라"(33절). 이것이 그들에게 지워질, 그리고 그들이 얽매이지 않을수 없는 중한짐이었다(39,40절). 내가 너희를 온전히 잊어버리며…내 앞에서 내어버려. 하나님의 말씀은 그말씀을 조롱하는 자들이 비방받고 경멸받을 만하게될때, 존귀히 여김을 받으며 영예롭게될 것이다.

# 핵심
23:1-8
유다의 회복과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메시아 왕국의 승리를 예언한다.
여호와 치드케누(23:6)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뜻을 지닌 메시아 칭호이다. 이칭호에서 알수 있듯이 메시아는 여호와 자신이시다. 이는 여호와께서 성육신(成肉身)하신 분이 메시아시며, 그분은 스스로 의로우실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을 의롭게하실 분임을 시사한다.
하나님의 편재성(23:24)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실뿐만 아니라, 어디에나 계시는 무소부재하신 분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신다(왕상 8:27; 시 139:7-10; 사 66:1).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의 눈길에서 벗어날수 없다. 한편,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내주하시지만 조금도 구애받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분의 편재성은 만물속에 신이 존재한다는 범신론과는 확연히 구별된다.

# 묵상
한 의로운 가지와 그이름 ( 23:5, 6 )
유다의 마지막왕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의’란 뜻의 이름을 가졌으나, 의롭지 못하였고 양떼를 보호하지 못하는 목자였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윗의 자손중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셔서 그의 양떼를 온전하게 하나님의 양우리에 들게하실 것입니다. 그는 바로 다윗의 자손이시요, 죄없으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이가지의 이름은 ‘치드케누’ 곧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으로, 그가 왕으로 임할때 유다는 구원을 얻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기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사역을 통해서 인류에게 진정한 공평과 정의를 가져오셨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 ( 23:7, 8 )
본문에서는 두가지 맹세가 언급됩니다. 그가운데 바벨론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는 말씀은, 바벨론에서 해방시키신 것이 애굽에서의 해방보다 더 큰구원사건이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포로로 끌려갔던 나라에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유다인이 바벨론에서 구원받은 사건은 신약시대의 구원사역을 예표하는 것인만큼 그 구원사역이 위대할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출애굽에서 구원해내신 하나님이 아니라 바벨론과 같은 죄악된 세상에서 구원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쑥과 독한 물을 먹게될 선지자 ( 23:15 )
쑥은 재난과 슬픔의 상징이며 독한 물은 가혹한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선지자들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한다는 본문말씀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임할 처벌의 고통이 쓰라리고 치명적이 될것임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종교지도자들의 부패는 곧 민족전체의 멸망을 가져오는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말일이 가리키는 때 ( 23:20 )
말일이란 여호와의 날, 주의 날 혹은 종말의 날로서 악한 자들이 멸망받는 심판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말일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구원받은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아오게 하고, 그를 믿기를 거절하는 사악한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아오게 하는 종말의 날입니다.
몽사를 얻었다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 ( 23:25 )
‘내가 몽사를 얻었다’라는 말은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백성들을 유혹할때 떠들던 말입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말을 참선지자의 말처럼 여기고 받아들였습니다. 이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거짓 영에 미혹되지 않기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위에 굳게 서있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겨와 밀의 상징 ( 23:28 )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날아가버리는 겨는 몽사를 말하는 거짓 선지자를, 키를 까불려도 그대로 남아있는 밀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참선지자를 가리킵니다. 거짓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훔치는 도적이요,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백성들을 미혹케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받은 참예언자들은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합니다.
거짓 예언자들을 치시는 하나님 ( 23:30-32 )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치시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여, 하나님이 그들을 보내지도 명하지도 않았는데도 백성들에게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돈을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양 거짓으로 꾸며 말하고, 잘못을 범하고 있는 백성들로하여금 계속 악을 행하도록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 ( 23:34, 35 )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사용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달하는 그들은 엄중한 말씀이라고 조롱하며 선포하지만, 결국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잘못 전한 것을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될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백성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않는 것과 말씀에 불순종하는것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런 엄중한 말씀을 듣지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위에 바로 서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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