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왕의 집에 주어진 메시지 22:1-9
1. 왕에게 설교하라는 명령(1.2)
예레미야는 왕에게 가서 그앞에서 설교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유다왕이여…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2절). 유다왕은 여기에서 '다윗의 위에 앉은' 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좇은 자이었으며 유다왕은 여기에서 다윗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인하여 그위엄과 권세를 지닌 자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그는 다윗의 모범을 따라야할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들의 혜택을 누리게될 터이었다.
2. 설교 내용(3-9)
예레미야는 무엇을 설교해야할지에 대해 가르침받는다.
(1) 예레미야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바가 무엇인지를 말해야 한다(3절). 그들은 이와같이 행해야 한다.
1) 그들은 가진바 권세로 할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여야 한다. 그들은 해를 입은 자를 옹호하는 일에 있어서 공평무사하게 해야 한다.
2) 그들은 가진바 권세로써 해를 끼쳐서는 아니된다. 그들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각별한 보살피심아래 두고 계시기 때문이다(출 22:21,22).
(2) 예레미야는 그들이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면 번영을 누리게되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어야 한다(4절). 만일 그렇게만하면 그들은 '다윗의 위에 앉아' 평강을 누리고 위세를 떨치면서 살게될 것이고, 왕위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통치권의 위엄을 보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통치권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3) 예레미야는 아울러서, 만일 그들이 불의를 행하기를 계속 고수하면 그들집안이 파멸하리라는 것을 확신시켜주어야 한다(5절). 죄는 종종 아무리 장엄한 왕성이라해도 그것을 파멸시켜 버리는 용인이 되어왔다. 아무리 강력한 왕가라고해도 마찬가지였다. 죄는 비천한 사람들의 집뿐만 아니라 고관대작의 집도 파멸시킬 것이다.
(4) 예레미야는 그들의 악이 그들자신은 물론 또한 그들의 전체 왕국에까지도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 될지 알려주어야 한다. 특히 왕성인 예루살렘에 대하여 그러할 것이었다(6-9절). 유다와 예루살렘은 하나님 보시기에 소중한 것들이었다. 네가 내게 길르앗처럼 부요하고 즐거운 곳이었다. 시온은 레바논만큼이나 장엄한 성채이었다. 바로 이것을 그들은 저희 안전을 지켜주는 것으로 의뢰하였다. 그러나 지금 길르앗처럼 풍요로운 그나라는 '광야'가 될터이었다. 지금 레바논처럼 강한 도성들은 '거민이 없는 성'이 될것이었다. 그일을 능히 해치울 자들이 있게될 것이다(7절).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을 정당화하리라"는 말로 읽을수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파괴자들과 누가 겨룰수 있겠는가? 그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롭다고 기꺼이 인정하는 자들도 또한 있을 것이다(8,9절). '여러나라 사람이' 여행길에 황폐한 '이성으로 지나며' 이렇게 물을 것이다. 여호와가 이 큰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너희가 곧바로 누군가를 만나거든 물어보라. 그는 너희에게 그것은 그들이 저희 신을 바꾼 연고라고 말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먼저 그를 버리기전에는 결코 그누구도 버리지 않으신다.

Ⅱ. 살룸과 여호야김에 대한 메시지 22:10-19
1. 살룸의 운명(10-12)
여기에 살룸의 운명이 제시되고 있다.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여호아하스와 동일인이다. 왜냐하면 '요시야의 아들 곧 그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여호아하스이었기 때문이다(11절). 그는 장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추대에 의하여 왕이 되었다(왕하 23:30;대하 36:1). 아마도 백성들은 그의 형보다도 그를 더 좋아했던 듯하다. 그들은 여호아하스가 그의 형보다도 더 활동력있는 청년이며 통치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내 그들의 불공평한 처사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삼개월이 채못되어 애굽왕이 와서 그를 폐위시키고 포로로 애굽으로 끌고갔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경고하셨던 그대로였다(신 28:68). 백성들가운데 누구도 그와 함께 포로로 끌려간것 같지는 않다. 그이야기를 열왕기하 23:34절와 역대하 36:4절에서 읽어볼수 있다. 이제 본문말씀을 살펴보라. 백성들은 여호아하스의 아버지 요시야를 위해 애곡하기보다는 오히려 여호아하스, 그를 위해 울라는 지시를 받고있다.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말며. "요시야를 위하여 더이상 울지말라." 예레미야 자신도 요시야를 위하여 진심으로 애곡했었다(대하 35:25). 그렇지만 지금 그는 그들의 눈물의 대상을 다른 자에게로 돌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오로지 여호아하스를 위해 울어야 한다. 그는 애굽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것이다. 요시야는 평화로이, 명예롭게 무덤에 묻혔다. 그를 위하여 울지말고 그의 불행한 아들, 수치와 불행속에서 살다가 죽을 저비참한 포로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다. 죽어가는 성도들은 선망의 대망이 되기에 합당할 것이다. 반면에 살아있는 죄인들은 연민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 여호아하스는 그자신이나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결코 포로생활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할 터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죽을 것이었다. 그들은 이사실을 믿으려하지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이말은 되풀이하여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아버지의 훌륭한 모범을 저버리고 또한 자기 형의 권리를 가로챈 결과이었다.
2. 여호야김의 운명(13-19)
살룸의 위를 계승한 여호야김의 운명이 제시되고 있다. 그리고나서 여호아하스보다 더나은 통치를 하지는 못했으며 그최후의 운명도 더나을 것이 없었다.
(1) 그의 죄들이 질책되고 있다. 여호야김은 여기에서 우상숭배에 대해 책망받고 있지는 않다. 여기에서 질책되고 있는 죄는 교만과 사치이다. 그는 마치 왕이 해야할 전업무가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기나 한듯, 그리고 선을 행하는 일은 가장 관심밖의 일이기나 한듯 행하였다. 그는 장엄한 왕성, 곧 '광대한 집과 광활한 방'을 세웠음에 틀림없다(14절). 그는 틀림없이 가장 최신의 유행을 좇아 '창을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방들은 가장 값비싼 나무인 백향목으로 입혀지고 붉은 빛으로, 혹은 주홍색 진사(辰砂)내지 남빛쪽으로 칠해졌을 것이다. 자기 집을 크게 만들고 보다 화려하게 꾸미는 자들은 그일을 행하는 자기 영혼의 상태를 잘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허영심을 조심하여 경계해야 한다. 여호야김은 애굽왕의 허락하에 초기 삼년간을 통치하였고 나머지 전기간동안에는 바벨론왕의 허가아래 다스렸다. 일개 총독내지 태수보다 나을 것이 없는 그가 가장 강력한 군주들과 맞먹고자 성화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온통 백향목으로 둘러싸여있는 까닭에 어떠한 방해나 간섭없이 통치해야 된다고 생각하였다(15절). 혹자는 여호야김이 여기에서 책망받고 있는 것은 신성모독죄에 대해서라고 생각한다. 즉 그는 자신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장식하기위하여 하나님의 전을 약탈했다는 것이다. "그가 자기를 위하여 내 창을 잘라냈도다"(이렇게 되어있는 사본도 있다). 혹자는 그가 자기 궁전에 달기위하여 성전의 창문을 떼어냈으며 그런후 그것을 '붉은 빛으로 칠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되면 성전에서 떼어낸 창문이란 사실을 은폐할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또한 여기에서 탐람과 압박과 강포와 불의에 대하여 질책받고 있다. 그는 '불의로 그집을 세웠다.' 즉 부당하게 얻은 물질과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재물로 그집을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극히 강한 자들이 그들의 가련한 종내지 일꾼들에게 부당하게 행한 행위들을 주목하여 보신다. 그리고 고용인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공의로이 갚으실 것이다. 이모든 것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탐람이었다. 돈을 사랑함은 만악의 근원이다. 네 눈과 마음은 탐람과…강포를 행하려 할뿐이니라. 오직 탐람뿐이다. 그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견물생심이거니와 탐욕을 행함에 있어 마음은 눈을 좇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안목의 정욕'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요일 2:16;욥 31:7). 그의 모든 죄를 가중시킨 것은 그가 선한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가 따르려고만 하였다면 좋은 본보기의 역할을 했을 터이었다(15,16절).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에게 그가 아버지의 행실을 통해 자신의 의무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요시야는 '공평과 의리'를 행하였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릇된 행위를 정당화시키고자 자기권력을 남용하지 않았음은 물론 오로지 의로운 것을 지지하는 일에 권력을 사용하였다. 또한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였다.' 여호야김은 자기 아버지의 형통함을 통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는 일에 격려받았었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를 인정하셨었다.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요시야는 그위안을 받았었다. "네 아비가 자제심을 가지고 즐거이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느냐 그가 일하기에 적당한만큼 '취하려함이 아니라 기력을 보하려고 마땅한 때에'(전 10:17) 먹고 마시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께서는 많은 것으로 그에게 축복하셨으며, 요시야는 그로인해 안락한 즐거움을 누렸고 관대하고 자비한 자로 지냈다. 자기가 훌륭한 거처를 세웠다는 것이 여호야김의 자랑이었다. 반면에 선한 거처를 유지하였다는 것이 요시야에 대한 진정한 찬미이었다. 장엄한 저택에서 여호야김과 같이 살면서 지불해야 마땅한 빚을 갚지않고 남기느니 초라하게 지어진 집에서 요시야처럼 사는 것이 낫다.
(2) 여호야김의 운명이 정확하게 말해진다(18,19절). 우리는 예레미야가 여기에서 여호야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예언한 것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일이었음을 추측할수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셨으므로 그도 이같이 말하였다. 여호야김은 애곡함을 받지못하고 죽을 것이었다. 그는 압제와 강포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증오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기때문에 누구도 그를 위해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아니할 것이었다. 그의 신하들역시 저희 주군의 무덤앞에서 가서 으례히 애곡하던 것과는 달리 '그를 위하여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호야김은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할' 터이었다. 즉, 그는 전혀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의 시체는 도랑이나 쓰레기 더미위에 던져질 것이다. 그의 시체는 굴욕적으로 질질 끌려가 '예루살렘 문밖에 던지울' 것이다. 요세푸스는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에서 그를 죽여서 예루살렘 성문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곳인가에 그의 시체를 내던졌다고 말한다.

Ⅲ. 여호야긴에게 주어진 메시지 22:20-30
이예언은 고니야 또는 여호야긴의 수치스러운 치세를 언급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호야김의 아들인 그는 단지 삼개월의 재위기간을 가졌을뿐이며 그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았다(52:31).
1. 왕국의 멸망(20-23)
왕국의 멸망이 이제 일사천리로 닥쳐오고 있다(20-23절). 예루살렘과 유다는 여기에서 한사람으로 말해지고 있다. 네가 평안할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내 종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책과 권면과 교훈을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안락하게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며 생활하는 것은 흔히 볼수 있다. 네가 어려서부터 내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네가 너의 모든 사랑하는 자들이 멸망당하는 것을 볼때, 너의 우상들이 너를 도울수 없고 외국 동맹국들이 너를 실망시킨다는 것을 알게될때 도우소서, 도우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망하리이다라고 외칠 것이라. 너는 레바논과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여 두려움에 질린 비명을 내뱉을 것이라. 너는 통행로에서, 길에서 외치게될 것이라. 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나 다 허사일지라. 왜냐하면 네 안전을 도모해야할 네 목자들이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기 때문이라(22절). 싹눈과 꽃봉오리가 매서운 한풍에 지듯이, 그들은 이울고 마르게될 것이라. 너를 사랑하는 자들, 네가 애정을 품고있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스스로를 구할수 없을 것이라. 네 동맹국들로부터 아무런 원조의 손길도 보이지않을때 그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을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22절). 유다 왕국은 여기에서 '레바논에 거하는 자'로 불리우고 있다. 이는 유명한 삼림이 그들의 지경내에 있었고(23절), 온국토가 레바논의 천연적인 요새처럼 좋은 방어진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그러나 그들은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라는 말을 들을정도로 너무도 자긍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어떠한 위험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자들을 업신여겼다. 고통이 네게 임할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그때 너는 하나님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개과천선을 약속하게될 것이라." 혹자는 이말씀을 달리 해석한다. "너의 모든 호사와 부귀가 네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진데, 여인이 해산할때에 그장신구들이 무슨 위로가 되랴."
2. 왕의 치욕(24-30)
왕이 당할 치욕에 대한 예언이 나오고 있다. 그의 이름은 여고냐였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두번에 걸쳐 고니야라고 불리워진다. 여기에는 경멸이 담겨있다. 그는 포로로 잡혀갈 것이며 평생을 구속받고 지내다가 역시 속박속에서 목숨을 다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실 것이다(24절).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유다의 경건한 왕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오른손의 인장반지와 같이 그에게 가깝고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자랑으로 여기셨다. 바벨론왕이 고니야를 포획할 것이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부터 스스로 빠져나간 자들은 자기들이 어떠한 악행을 당하게될지 알지 못한다(25절). 갈대아인들은 고니야에게 악의를 품고있었으며 그의 '생명을 찾았다'(그들은 ' 너의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와 그의 가족들은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이며, 거기에서 비참한 포로로서 오랫동안 지겨운 나날들을 보내게될 것이다. '그와 그를 낳은 어미'(26절), '그와 그 자손'(28절), 즉 그와 모든 왕족들은 다른 나라로 내쫓김당할 것이다. 그나라는 그들이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 '알지못하는 땅'으로서 그곳에는 그들이 어떤 친절을 기대할만한 안면있는 자가 전혀 없다.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27절). 여호아하스는 남방의 땅 애굽으로 끌려갔으며, 여고냐는 북방의 땅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그들은 결코 다시 만나볼수 없으며, 고향땅의 대기를 마셔보지도 못할 것이다. 이경고의 한부분에는 매우 감정이입적인 어떤 것이 있다(26절). 너희가 나지아니한 다른 지방에…너희가 거기서 죽고. 이일은 그를 모든 그의 이웃들의 눈에 경멸할만한 자로 보이게할 것이었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이렇게 말할 터이었다. "이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 경멸받는 부서진 우상이냐?" 그때는 고니야가 위세를 부리고 있는때, 아니 거의 신격화되고 있는 때이었다. 그의 부왕이 얼마전 폐위되는 것을 목도했던 백성들은 왕위에 오른 고니야를 보자 거의 그를 숭배하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는 부서진 우상, 천한 깨진 그릇이 된다. 그는 자신의 명예를 계승할 자손도 남기지 못할 것이다. 온세상이 하나님께 가깝고 소중한 존재이었던 한나라와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이심판을 주목해볼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집행에 있어서 공평정대하시다고 말할 것이었다. 이제 이말씀에서 주목되는 점은 여고냐를 무자할 자로 기록하라는 것이다(30절). 즉, 계속되고 있는 말씀대로 '그 자손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을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어떤이들은 28절말씀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바벨론에서 자녀를 가졌으며 그들이 그보다 먼저 죽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역대기의 족보에서 사로잡혀간 여고냐(즉, 포로 여고냐)의 일곱 아들들에 대해서 일게된다(대상 3:17). 스알디엘이 그의 장자이었다. 혹자는 그아들들은 단지 양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라고 기록된 것(마 1:12)은 단지 자신이 가진 통치권을 스알디엘에게 물려주었다는 의미일뿐이라고 추측한다. 스알디엘은 나던 집안의 네리의 아들로 일컬어지고 있기 때문이다(눅 3:27,31). 그가 자녀를 낳았든, 아니면 단지 양자를 얻었을뿐이든지 간에 그의 자손중 유다의 왕위를 얻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 핵심
22:10-12
여호아하스왕에 대한 예언이다.

# 묵상
정치 지도자에게 선포한 말씀 ( 22:2-5 )
바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왕의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바로 정치지도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권력을 남용하여 불의를 행하지말고, 하나님의 정의대로 불쌍한 자를 돕고 의인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말씀대로 하지않으면 왕의 집은 황무해진다고 하셨는데 이는, 곧 이스라엘의 정치적 파멸을 의미합니다.
유다의 지배계층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 22:3 )
첫째, 공평과 정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말은 직책을 맡은 자로서 지녀야할 특권과 도리를 당연히 지켜야할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이방인과 고아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약자를 불쌍히 여기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죄한 자, 즉 여호야김왕이 당시의 선지자 우리야를 칼로 죽인 것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죄를 범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와 잡혀간 자 ( 22:10-12 )
본문에서 ‘죽은 자’란 요시야왕을 가리키며, ‘잡혀간 자’는 살룸, 곧 여호아하스를 말합니다. 즉 요시야왕은 의로운 왕이기에 죽었지만 하나님곁으로 갔으므로 애곡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된 여호아하스는 애굽왕에 의해 애굽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왕하23:34). 그러므로 죽은 자 대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울라는 선지자의 예언은 포로의 고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왕 중 두번째 저주의 대상 ( 22:13-19 )
유다왕 중 두번째 저주의 대상은 여호야김으로서(주전 609-598), 그는 국난을 당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달을 도모하고 하나님을 멀리했습니다. 결국 그는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도중에 죽었습니다(대하36:6).
오른손의 인장반지 ( 22:24 )
오른손은 힘과 능력을 뜻하며, 인장반지는 귀하게 여기는 소지품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말은 가장 귀하게 여기는 존재를 뜻합니다. 본문에서 고니야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므로 여호와의 오른손의 인장반지란 곧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멸망예언을 받은 고니야 ( 22:26-30 )
고니야 혹은 여호야긴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3개월간 통치하였습니다. 그도 다른왕들처럼 악을 행했으며 그의 모친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고, 포로된지 37년후에 바벨론왕 에윌므로닥이 그를 옥에서 내주었습니다(왕하25:27-30). 또한 무자하리라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 바벨론에서 죽고, 그의 삼촌 시드기야가 그를 이어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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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시드기야의 전갈과 그응답 21:1-7
1. 시드기야왕의 전갈(1,2)
시드기야왕은 곤경에 처하여 매우 겸손한 전갈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냈다. 그는 선지자의 도움을 바랄정도로 겸손해졌다. 그러나 선지자의 권고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행할정도로 겸비해진 것은 아니었다.
(1) 시드기야왕이 지금 처해있는 곤경은 느부갓네살왕이 전쟁을 일으켜 그를 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는 그땅을 침략하여 도성을 포위하고 사실상 그성을 공략하고 있었다.
(2) 그가 보낸 사신들은 바스훌과 스바냐였다. 만일 시드기야가 선지자와 직접 개인적인 회합을 원했더라면 훨씬 나았을터이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었더라면 선지자는 틀림없이 그제의를 수락했을 것이다. 이들 제사장들은 왕으로부터 그일을 위임받았을때 선지자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갈을 전해야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체면이 손상되는 일이었으며 예레미야에게는 명예로운 일이었다.
(3) 시드기야가 보낸 전갈은 이러하였다.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2절). 갈대아 군대가 저희 국경을 넘어선 지금에야 그들은 예레미야가 참된 선지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비록 그것을 인정하기 싫을지라도 어쩔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확신이 들자 그들은 예레미야가 자기들의 친구로 하나님앞에 서주기를 바랐다.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물어보라. 이제까지 우리가 취한 모든 방책들이 다 부질없게 되었으니 현재의 궁지에서 우리가 취할수 있는 방도를 물어보라." 저희의 죄를 깨끗이 청산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지시를 따르려고 하지않는 자들이 저희의 곤경에서 깨끗이 탈피하기위하여 하나님의 섭리의 지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고 있다.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절히 탄원하라. 하나님께 우리를 위한 중보자가 되어달라.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를 위해 베푸신 '그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원수가 포위를 풀고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되리라." 그들의 모든 관심은 자기들의 곤경에서 벗어나는데 있을뿐이며,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와 화해하는데 있지 않았다. 그들의 바라는바는 "원수가 우리를 떠나리라"는 것이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리라"는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바로가 이와같이 행하였었다(출 10:17). 그들의 전소망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을때, 이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성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기사를 행하셨다는데 있다(대하 32:20,21). 그러니 예레미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들 포위자들을 멸하실수 있는 이가 그분외에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시드가야왕과 그백성들은 자기들이 히스기야왕과 또 그백성들과 성격이 완전히 다름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저들은 전반적인 개혁과 경건의 나날가운데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응답(3-7)
이 전갈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보내신 응답은 매우 놀랍고도 가혹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보다도 훨씬더 그들의 심중을 잘아신다. 그러므로 그응답을 통하여 한마디의 위로의 말도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응답하신다(3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부르도록 허용하셨다는 것, 그리고 예전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기사를 행하셨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들을 위하여 크나큰 일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단지 이름으로만 이스라엘인일뿐인 현세대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못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말씀에서 예고되고 있는 사항들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하는 그들의 모든 노력을 허사로 돌아가게 하시며 무익하게 하실 것이다(4절).
(2) 포위자들은 머지않아 예루살렘의 주인이 될것이며 그모든 재물과 병력을 취하게될 것이다. "내가 지금 이성을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이성중에 모아들이리라."
(3)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대적이 되실 것이다. 그렇게되면 누가 그들의 편을 들어줄수 있겠는가. 예레미야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줄수 없다(5절).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을 행하는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저희를 대항하여 싸우실 것을 각오해야할 것이다.
(4) 자신의 안전을 꾀하여, 포위자들에게 돌격하기를 거부하고 그칼을 피해 도망한 자들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공의의 칼을 피하지못할 것이다(6절). 내가 또 이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치리니 그들이 큰염병에 죽으리라.
(5) 칼과 기근과 염병을 피해 살아남은 왕 자신과 모든 백성들은 갈대아인들의 손에 붙여질 것이다(7절). 갈대아인들은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할' 것이다.

Ⅱ. 왕과 백성에 대한 권고 21:8-14
예레미야에게 보낸 왕의 정중한 전갈로 미루어 보건대 왕과 백성들 모두가 예레미야를 존중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려주신 응답은 그들이 이제 막 그에 대해 가지기 시작한 미미한 존경심마저 부숴뜨리기에 충분하였으며 그 어느때보다도 더 예레미야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을 자극시킬 만하였다. 바로 앞절들에 나타난 예언뿐만 아니라 여기 본문말씀에 명해진 대책들도 그들을 격분시키는 것들이었다.
1. 항복의 권면(8-10)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남을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길이라고 권면한다(8-10절). 이계책은 거짓선지자들의 발린 말에 혹하여 마지막 순간까지 필사적으로 성을 고수하기로 결심한 자들, 즉 저희 성벽의 굳건함내지 저희 군사력의 용맹을 믿거나 자기들을 포위상태에서 구해줄 외국 군대의 원조를 기대한 자들을 노엽게 하는 것이었다. 선지자는 그들에게 이와같이 확증하고 있다. "이성은 바벨론왕의 손에 붙임이 될것이라. 그는 단지 성을 약탈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 왜냐하면 복을 위함이 아니라, 화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그얼굴을 이성으로 향하셨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만일 이재앙을 최선의 것으로 극소화시키고자 한다면 갈대아인들의 관대한 자비를 구하면서 항복하여 전쟁포로가 되어야 할지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맞서신 지금에 있어 그들이 취할수 있는 최선의 길이었다. 율법과 선지자들은 종종 그들앞에 생명과 사망을 제시하곤 하였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면 생명이요, 불순종을 계속 고수하면 사망이었다(신 30:19). 보라 내가 너희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8절). 이표현은 신명기의 말씀처럼 공명정대한 제안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에게 두가지 재난중 더나은 것을 택하라고 권고하는 음울한 딜레마이다. '성에 거주하는 자는' 성밖에서 칼에 죽든지, 성안에서 기근이나 염병으로 죽든지 마침내는 죽게될 것이다. 그러나 품고있던 헛된 소망을 버리고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같이 얻을' 것이다. 그는 강자로부터 노략물을 취하는 것과 같이 힘들게 자기 생명을 부지할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 선조들이 앗수르인들의 진영을 탈취하였던 것같이(사 33:23) 자기들도 갈대아 진영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일 신중한 분별력으로 투항하면 목숨은 부지할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게 약속된 노략물의 전부이었다.
2. 개혁의 권면(11,12)
그는 왕과 방백들에게 개혁을 권면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에는 '유다왕의 집'을 위한 특별한 말씀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에게 유익한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다(11,12절).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판결하기를 신중하게, 그리고 부지런히 하라. 판결을 신속히 하라. 네게 들어온 청원들에 대해 지체하지 말고 공의로이 판결하라. 너는 너를 괴롭게 하는 자들의 손에서 구함받기 바라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네게 공의로이 팽하시기를 기대하고 있도다. 그렇다면 너역시 네게 청원하는 자들에게 공의로이 행하며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내 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그리고 죄상의 방법으로 피하리라고 기대하는 너희는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최악의 지경에 처하게될 것이라." 하나님의 진노에 불을 붙이는 것은 그들의 악행이었다. 이와같이 명확하게 하나님께서는 '왕의 집'을 상대하신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기도로 덕을 보기를 바라는 자들은 선지자를 통한 경책을 감사히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다. 방백들이 먼저 솔선하여 좋은 모범을 보이고, 그리고나서 백성들이 개혁하도록 촉구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권세를 그릇된 악을 징계하는데 사용해야 마땅했으며 그렇게되면 백성들도 개혁하지 않을수 없게될 터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다윗의 집'이었음을 저희에게 상기시키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 백성에게 공평하게 판결을 집행했던 다윗의 발자취를 따라야 마땅한 것이다.
3. 불순종의 결과(13,14)
그는 그들이 개혁하지 않고 그릇된 길을 고수하는한 그들의 모든 소망이 허사임을 알려준다(13,14절). 그들은 '골짜기의 거민'이었다. 즉 예루살렘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 요새로써, 적군이 그들을 침범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예루살렘은 또한 '평원반석'이었다. 그러므로 적군이 그들을 아래쪽에서 몰래 기습하기도 곤란하였다. 이 천연의 이점을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나 약속보다도 더신뢰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의 도성이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 버렸다. 그들은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라고 자신만만해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누가 우리를 치리요?'라는 확신이 허사임을 알려주신다.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13절). 그는 도저히 항거할수 없는 심판관으로써 그들에게 나아오신다. 그는 정당한 법의 절차를 따라,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14절).

# 핵심
21:1-22:9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하는 본문은 B.C. 588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의 3차 침공이 있었던 시드기야 치세(B.C. 597-586)때를 배경으로 한다.
시드기야(21:1)
‘여호와는 정의이시다’라는 뜻의 이름. 유다 최후의 왕이며, 본명은 맛다니야였다(왕하 24:17). 예레미야의 권고를 듣지않고 바벨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27:1-11) 재위 9년(B.C. 588)에 느부갓네살의 침입을 받았다. 느부갓네살은 애굽왕 호브라의 개입으로 잠시 포위망을 풀었다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여 함락시키고(B.C. 586) 도망간 시드기야를 체포하여 눈을 뽑고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왕하 25:1-7).

# 묵상
사람들을 예레미야에게 보낸 시드기야 ( 21:1, 2 )
시드기야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침략했으므로 예레미야로하여금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케 하기위해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이처럼 시드기야는 그의 방백들과는 달리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참예언자임을 믿었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방백들의 뜻에 따르지 않을수 없는 나약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친바벨론 정책을 권유하는 예레미야의 말대신 애굽을 믿고 반바벨론 정책을 추진한 방백들의 말을 따랐습니다. 이와같이 신앙이 확고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따르지 못하는 모래위에 집을 세운 사람과 같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 21:8-14 )
하나님의 구원은 생명으로 가는 길이요, 심판은 사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길은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있는 갈대아인들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것이요, 사망의 길은 예루살렘에 거주함으로써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죽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갈대아왕 느부갓네살을 하나님의 심판시행자로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갈대아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생명과 사망의 길은 인간의 판단에 있지않고 하나님의 표준에서 판가름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서 안전한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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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스훌의 핍박과 그대가 20:1-6
1. 바스훌의 부당한 반감(1,2)
바스훌은 예레미야에게 부당한 반감을 가졌으며 그반감대로 행하였다(1,2절). 바스훌은 제사장이었다. 그러므로 역시 마찬가지로 제사장인 예레미야를 비호해야 마땅하였다. 더군다나 그는 여호와의 제사장이었으므로 여호와의 제사장들의 권익을 도모하는 것이 도리였다. 그렇지만 이 제사장은 오히려 핍박자 노릇을 하였다. 바스훌은 '임멜의 아들'이었다. 즉, 그는 제사장들중에서 열여섯째 반차에 속했다. 다윗이 이 반차들을 맨처음 정하였을때, 임멜이 그선조이었던 것이다(대상 24:14). 그러므로 여기에 나오는 이 바스훌은 21:1절에 언급되는 동명의 인물과 구분된다. 그 바스훌은 다섯째 반차에 속하는 자인 것이다. 본문말씀의 이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이었다. 아마도 그는 단지 짧은 기간동안만 유사장이었을 것이다. 즉, 자신이 대표하고 있는 반차의 봉직 기간동안에만 성전의 유사장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가 예레미야의 큰대적이었다. 바스훌이 예레미야가 예언하는 것을 듣기위해 그와 함께 도벳의 골짜기로 갔던 무리들가운데 속했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그보다 그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뜰에서 예언하는 것을 들었다고 생각된다(1절). 그가 예레미야의 이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그리고 그는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집뜰에서 유사장인 자기 허락도 없이 감히 설교했다는 사실을 참을수가 없었다. 예레미야에 대해 극도로 격분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행하였다.
(1) 그는 예레미야를 '때렸다' 손으로, 혹은 권위를 상징하는 지팡이로 그를 쳤다. 아마도 그것은 단지 예레미야를 치욕스럽게 만들고자한 일격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이일을 처리한 방법은 불법적이었다. 먼저 대제사장과 다른 제사장들이 협의하여 예레미야의 신임을 심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들은 한낱 허울뿐인 형식에 불과했다. 옳든그르든 관계없이 예레미야는 쓰러뜨려져야만 했다.
(2) 그는 예레미야를 '차꼬에 채웠다.' 그는 그렇게 하기를 밤새내내 계속하였으며 그것도 공공 장소에서 즉 '베냐민의 윗문'에서 그리하였다. 그문은 여호와의 집안에, 아니면 곁에 있었으며 아마도 예루살렘성과 성전사이를 드나드는 통용문이었을 것이다. 바스훌은 이와같은 방법으로 예레미야를 징계하여 그를 경멸받게하고자 의도하였다. 그렇게하여 예레미야가 예언할지라도 그예언이 중시되어지지 않게하려는 속셈이었다.
2. 하나님의 의로우신 노여움(3-6)
하나님께서는 바스훌에 대하여 공의로이 노여워하셨다.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놓아주매(3절). 이제 예레미야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그에게 전해준다.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차꼬에서 풀어주었을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입에 한말씀을 넣어주셨다. 만일 바스훌에게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말씀에 가책을 받을 것이었다.
(1) 바스훌은 자기 잘못을 지적해주고 백성들가운데의 자기 명성을 손상시킬것 같은 자를 잠잠케 만듦으로써 스스로의 지위를 확고히하고자 의도하였지만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1) 비록 선지자가 잠잠케되더라도 자기자신의 양심이 항상 그를 편치 못하게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확증으로 그는 한이름을 부여받을 것이다. 곧, '마골밋사빕', 다시말하여 '사방으로 두려움', 혹은 '주변에 공포'라는 뜻의 이름이다. 이는 사방이 두려움으로 싸여 절망가운데 처해있는 사람을 말하는 잠언적인 표현으로 보여진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며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도 크게 두려워한다. 바로 바스훌이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된 것이었다(4절). 보라 내가 너로 너…에게 두려움이 되게하리니. "그리고 너 자신의 상상이 너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리라." 하나님의 선지자들로부터 자기 잘못에 대해 들으려고 하지않는 자들은 양심으로부터 그것을 듣게될 것이다. 양심은 곧 저희 자신의 가슴 곳에 있는 질책자인 것이다. 내가 너로…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하리니. "너 자신이 너무도 큰공포를 풍기기때문에 너의 모든 친구들은 네 고통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할 것이라."
2) 그의 친구들이 모두 그를 실망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이던 가인같이 비참하게 살게하실 것이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일찍이 가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렇게 계속하여 놀라게될 것이며 이러한 물음의 대상이 될것이다. "무엇이 이사람을 그렇게 끊임없는 공포속에 있게하는가?" 그러면 이와같이 답해질 것이다. "그것은 예레미야를 차꼬에 채운 것에 대해 벌하시는 하나님의 손이라." 그에게 용기를 주고 격려해주어야할 그의 친구들은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의 눈이 '그것을 볼 것이다.'
3) 그는 하나님의 보응하심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될 것이다(6절). 그와 그의 모든 친구들도 일반일 것이다. 바스훌의 운명은 이와같이 암담하였다.
(2) 바스훌은 백성들을 안락하게 하고 예레미야가 예언한 파멸을 저지하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는 예레미야의 명성을 실추시킴으로써 그의 예언을 땅에 떨어지게할 심산이었다. 6절 말씀에 나타난바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 선지자로 자처하고 백성들에게 그들이 평강하리라고 말하였던 듯하다. 그는 '거짓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예레미야의 예언이 자기의 예언과 상반되는 까닭에 그를 대적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수 있었는가? 예레미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자기가 했던 예언을 고수하고 있다.
1) 나라는 파멸할 것이다(4절). 내가 온유다를 바벨론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땅은 오랫동안 하나님 자신의 땅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소유를 느부갓네살왕에게 이전하실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그나라의 주인이 되어 자기 마음내키는대로 그거민들을 처분할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서 피하여 도망할수 없을 것이다.
2) 도성역시 마찬가지로 훼파될 것이다(5절). 바벨론왕은 성안에 있는 모든 값진 것들을 바벨론으로 탈취하여 가져갈 것이다. 그는 그들이 힘으로 믿고 의지하던 모든 군수 물자들을 빼앗아 오히려 그들을 거꾸러뜨리는데 사용할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그모든 소득', 곧 그들의 모든 상품과 교역품들을 다 탈취하여 가져갈 것이고, '그모든 귀물', 즉 그들의 좋은 집들을 약탈하고 그가구들을 빼앗아갈 것이다. 그는 국고를 뒤져서 왕관의 보석들은 물론 '유다왕들의 모든 보물'을 가져갈 것이다.

Ⅱ. 예레미야의 호소와 충실성 20:7-13
선지자는 여기에서 예전같지 않게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내부적으로 동요되고 있다. 이 구절들에서 나타나는바는 예레미야가 바스훌이 큰위해를 가한 순간에 흉중에 은혜와 부패사이의 갈등을 겪고있었다는 사실이다.
(1)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가해진 부당한 일에 대해서 서글프게 하소연하고 있다.
1) 그들은 그가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조롱하였다(7,8절).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예레미야는 이같이 멸시받고 조롱받았는가? 그것은 오로지 그가 맡은바 임무를 충실하게 열심히 수행하였기 때문이었다(8절). 그들은 그의 설교외에는 그에게서 조롱할만한 것을 아무것도 찾을수 없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하여 내가…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그들이 그를 조롱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에 대해서였다.
① 그가 설교하는 태도이다. 대저 내가 말할때마다 외치며. 그는 언제나 생생한 감정으로 말하는 설교자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시작하는 까닭에 그는 항상 진지하게 말하였다. 그는 크게 외치며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생동력있는 설교자들은 부주의하며 믿지않는 청중들에게 조롱거리가 되는 것이다.
② 그가 설교하는 내용이다. 내가…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그는 그들이 서로간에 강포히 행하고 피차를 멸하는 것을 질책하였다. 그리고 징벌로써 강포와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라고 예언하였다. 전자에 대해서 그들은 그가 너무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조롱하였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그가 너무 기우에 빠져있다고 조롱하였다. 이것으로만도 그들의 악은 이미 충분하였다. 그러나 그의 하소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2) 그는 음모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의 파멸을 꾀하였다. 그는 단지 나약한 사람으로 조롱거리가 되었을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악한 사람, 정부에 대한 위험인물로 비방받고 모략당하였다(10절). 그러나 보다 간교하게 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① 그들은 그의 등뒤에서 악담을 하였다.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혹자는 "수많은 마골밋사빕"이라고 읽는다) 간접적으로 들었나이다." 거기에는 바스훌과 같은 자가 많이 있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백성들의 마음가운데 사방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경계심을 조성하는 자, 그리하여 현 정부하에서 그들로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만들어 반역을 꾀하게 충동하는 자로 규정지었다. 예레미야의 대적들이 이일을 어떻게 꾸몄는지 살펴보라.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즉 그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에 대하여 아주 나쁜 말로 고소하자. 그리하여 그로하여금 통치자의 미움을 받게 하자. 그리고 설사 그계획이 잘못될지라도 우리는 재차 그일을 시도할 것이라. 그것을 널리 퍼뜨리자. 그리고 자꾸 덧붙이자."
② 그들은 그의 면전에서는 그에게 빌붙었다. 이는 그를 고소할만한 근거를 얻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께 나아온 정탐꾼과 같이 행하였다(눅 11:53,54;20:20). "우리는 그에게 친근하게 접근하여 그가 어떤 반역적인 말을 하도록 꾀일수 있으니, 그러면 우리가 그를 이기게 되리라. 그리고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던 것에 대해 원수를 갚을수 있으리라."
(2) 여기에서 예레미야가 시련중에 받은 유혹이 언급되고 있다.
1) 그는 자기를 선지자로 세우신 하나님과 다투고자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시작한다(7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미혹하시므로(한글개역에는 '권유하시므로'-역주) 내가 미혹되었나이다"(한글개역에는 '그권유를 받았나이다'-역주). 이것은 예레미야의 어리석음과 부패를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자기보다 앞서왔던 선지자들이 어떻게 박해받았었는지, 그리고 더나은 대우를 기대할만한 하드의 이유가 없음을 익히 알고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온땅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그를 대적하여 치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었다(렘 1:18,19).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을 실족지않게 하기위하여 그들이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게될지 말씀해주셨다(요 16:1,2). 그러나 본문말씀은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권유를 받았나이다'라고 읽는 것이 옳다. 그리고 이렇게 읽을때 그다음에 계속되는 말씀과 완전히 부합된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임무를 위임받는 것을 매우 망설였었다. 그는 자기의 나이가 아직 어리며 그사명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권하시고 그가 가야만한다고 말씀하셨다(렘 1:6,7).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있는 것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이일을 맡기시고는 어찌하여 내편을 드시지 않나이까? 내가 스스로 이일을 맡았다면, 내가 조롱당하여도 당연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에게 이일을 맡기셨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하여야 하나이까?"
2) 그는 자기가 맡은 일을 그만두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다. 그부분적인 이유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 너무도 많은 역경에 부딪치게 되었기 때문이었으며, 또다른 이유는 그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교화되고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악화되고 분을 자아내게 하였기 때문이었다(9절).
(3)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맡은 일을 충실히 고수하였고 하나님을 기쁘게 의지하였다.
1)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무를 계속하도록 자기안에서 강하게 역사하심을 깨달았다. "내가 다시는 그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성급히 말하였었나이다. 내 심중에 전해야할 말이 있더라도 억눌러 내뱉지않으리라고 하였나이다. 그러나 이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침'을 알았나이다. 그것은 내부에서 타올라서 밖으로 나가야만 했나이다. 그것은 도저히 소멸될수 없었나이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내게 근심과 고통이 되었나이다. 그래서 내가 시원해지기 위해서는 말을 발해야만 했나이다"(시 39:2,3;욥 32:20). 예레미야는 설교를 금하는 일이 이내 답답하게 되었고 스스로 견딜수 없었다. 충성된 목회자들에게 있어 입이 봉해지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다. 그들의 확신은 이내 사실로 드러나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전파가 어떠한 대가를 요구한다고해도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임'이기 때문이다(고전 9:16).
2)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계심을 확신하였으며, 그것으로써 그의 대적들의 모든 궤계는 능히 물리쳐질 것을 확신했다(11절).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이기자' 하나이다. 그러나 내가 확신하오니 그들이 나를 이기지못할 것이오며 형통치못할 것이니이다. 나는 그들을 무시해 버릴수가 있나이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니이다(참조. 롬 8:31).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계셔서 나로하여금 중한 짐을 질수 있게 하시나이다. 주는 나와 함께계셔서 그들을 두려움으로 치시며 그들을 이기시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로써 우리를 위하여 싸우심을 보게될때는 제아무리 가공할만한 대적들도 초라하게 여겨진다(느 4:14). 예레미야는 이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는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그들이 나를 쫓아도 내살을 먹지 못하리이다(시 27:2). 그리하여 그들은 자기들의 무력한 악의와 허사로 돌아간 궤계로인하여 '큰수욕을 당할' 것이니이다."
3) 그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의로운 심판관이 되어주시기를 호소하며 자신의 소송에 대해 판결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한다. 의인을 심리하시는 분은 또한 마찬가지로 불의한 자도 심리하신다. 왜냐하면 그는 '그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분이기때문이며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말과 행실에 대하여 오류가 없는 판결을 내리실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12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정과 그공과를 완전하게 아시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위임한 소송을 그앞에서 펴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그러나 그는 우리로부터 그것을 아시고자 하시며, 우리가 세세히 그것을 아뢰도록 허락하시는데 이는 그가 감동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감화받게 하기 위함이다.
4)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시려고 나타나시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크게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한다(13절). 그는 기쁨에 겨워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께 그영광을 돌리도록 청한다.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여기에서 그가 이 대화를 시작한때와 비교하여 큰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구름은 걷혀졌으며 그의 불평과 하소연은 모두 잠잠해졌고 감사로 바뀌어졌다. 이복된 변화를 만든것, 그의 탄식을 찬양으로, 그의 두려움을 승리의 개가로 변화시킨 것은 바로 믿음의 역동하는 힘이었다. "그는 이전에 내가 환난중에 있을때 나를 구하셨으며, 이제는 바스훌의 손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하여 또 건지시리로다(고후 1:10). 그는 이와같이 핍박받을때에 떨어지게 되는 저 죄의 위험으로부터 내영혼을 구하실 것이라."

Ⅲ. 생일을 저주하는 예레미야 20:14-18
본문말씀이 의미하는바는 무엇인가?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가?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그토록 기쁘게 말했던(13절) 그가 이렇게 비감에 젖어 '내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라면'이라고 말할수 있는가(14절)? 본문말씀은 그가 새로운 시험에 빠졌다기보다는 믿음과 소망으로 회복하였던 저 이전의 시험, 차꼬에 채워져있었던 동안의 혼란했던 동요상태를 언급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은혜로인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었을때 그치열했던 투쟁을 기억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부끄러워할수 있으며 우리의 말대로 우리에게 행하지않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할수 있다.
(1) 시험중에 선지자는 어떠한 말을 하였는가?
1) 그는 곤고한 중에 욥이 하였던 것과 같이(욥 3:1) 자기 생일을 저주스러운 날로 낙인찍었다.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지옥에 있는 가룟유다는 그러한 원을 할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지만(마 26:24) 땅위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그런 소망을 품을 이유가 없다. 이는 어떠한 사람도 자기가 긍휼의 그릇이 될지 알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선한 사람이라면 말할나위도 없다.
2) 그는 자기 아버지에게 생남하였다는 소식을 전하여 주었던 자를 저주하였다(15절). 그는 매우 혹심한 저주를 내뱉고 있다(16절). "그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아니하신 성읍 소돔과 고모라같이 되었으면, 그사람으로 아침에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침략한 대적들이 포위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듣게하였더면, 그리고 낮에는 그들이 승리로인하여 떠드는 소리를 듣게하였더면, 그리하여 그로 끝없는 공포속에 살게 하였더면…."
3) 그는 자기가 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음을, 곧 그의 첫호흡이 마지막 호흡이 되지않았으며 이세상에 나오자마자 곧바로 질식되지 않았음을 화내고 있다(17절).
4) 그는 자기가 지금 당하고있는 재난이 이 격정에서 비롯된 소망들을 충분히 정당화시킬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18절).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곧 내가 숨겨져 있던 곳, 미움받지도 않았으며 안전하게 어떠한 악도 알지못한채 지내던 곳에서 나와서 이모든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고 학대받기를 계속하며 나의 인생을 고난으로 허비하고 날려보내는고?"
(2) 우리는 이말을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 이말은 우리가 따라서 모방하도록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유익한 교훈을 배우도록 기록되었다.
1) 인생의 허무함과 거기에 수반되는 헛수고를 주목하라.
2) 죄많은 정욕의 어리석음과 불합리함을 주목하라. 정욕을 제멋대로 행하도록 방치할때 그것은 얼마나 이치에 닿지않는 말을 하는가. 어느날을 저주하고, 또한 전한 소식으로인하여 소식 전한 자를 저주하다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마음이 뜨거울때에는 입에 자갈을 먹이도록 하라(시 39:1,2)

# 핵심
20:1-6
여호야김왕때의 제사장인 바스훌이 예루살렘 멸망을 선포하는 예레미야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내용이다.

# 묵상
바스훌 ( 20:1-6 )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박해한 대표적인 유사장입니다. 바스훌은 예레미야를 구타하고 그를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습니다. 바스훌이란 이름은 ‘형통하다’라는 뜻이고, 여호와에 의해 새로 붙여진 이름인 ‘마골밋사빕’이란 ‘사방에 두려움이 있으리라’는 뜻입니다. 그가 바벨론 포로가 되고 멸망당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그는 주전 598년경 제2차 포로때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예언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예레미야 ( 20:9 )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선포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고 그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그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불이므로 그말씀을 들은 자는 전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는 전하고 외치는 것이 자신의 해야할 사명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를 비방한 주변의 악한 무리 ( 20:10-13 )
예레미야는 박해와 조롱을 받는 자신의 처지를 견딜수 없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고 했습니다. 이말은 흠없는 예레미야에게 조그마한 흠이라도 발견되면 고소하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당시에 복음을 전하기가 힘들고 어려웠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애가 ( 20:14-18 )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일과 자신의 태어남을 알린 사람을 저주하며, 자신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쩌다가 태어나서 이고생을 하는가? 하고 자신의 인생을 불평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이같은 애가는 역설적으로 모든 인생들의 공통된 노래입니다. 우리는 역경가운데서 오히려 찬양을 할수 있습니다. 역경을 넘어선 자만이 순경(順境)의 진정한 참의미를 알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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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 19:1-9
선지자는 여기에서 이제까지 번번히 전해왔던 것과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백성들앞에 나아가도록 보내심을 받는다.
(1) 그는 교회와 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들을 데리고 가야만 했다. 이는 그들을 청중으로뿐만아니라 그가 하는말의 증인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사람'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비록 장로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를 싫어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개중에는 그를 여호와의 선지자로 본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환상에 이같이 경의를 표하고자 하였다.
(2) 그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이메시지를 선포해야 했다. 여호와의 말씀은 문에서나 도벳골짜기에서나 마찬가지로 선포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산에서도, 또한 선상에서도 설교하셨었다. 이설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선포하라고 명해지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1) 거기에서 그들이 지극히 사악한 우상숭배, 곧 자기 자녀들을 몰록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는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그장소를 봄으로써 그들은 그죄를 상기할수 있을 것이었다.
2) 거기에서 그들이 가장 혹심한 재난을 당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도성 또한 마찬가지로 몰락되는 것을 의미하기때문에 그들은 도벳의 골짜기를 보고 도성이 얼마나 참혹한 광경으로 될것인지를 보아야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로가서 거기에서 내가 너에게 이를 말을 선포하라"고 예레미야에게 명하신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종종, 그것을 받을 사람들에게 전달되기 직전까지 선지자들에게 계시되지 않았었다.
(3) 그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제 곧 닥쳐올 전반적이 파멸에 대해서 예고해야 했다(3절). 비록 그말씀이 무서운 것이라고할지라도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통치자나 통치를 받는 자나 모두 그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유다 왕들', 곧 왕과 그왕자들, 왕과 그고문관들은 만왕의 왕의 말씀을 들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하지만 그분은 그들보다 더높으시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거민' 역시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했다. 위정자들과 백성들 모두가 국가적인 범죄에 가담했으므로 국가적인 회개에도 역시 같이 참여해야 했다. 만일 그렇지않으면 그들은 국가적인 파멸에 있어서 공동의 운명을 나누어야 했다. 엘리의 집안의 멸망(삼상 3:11)이 이와같이 기술되고 있으며 예루살렘의 멸망(왕하 21:12) 역시 마찬가지이다.
(4) 그는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명백하게 말해주어야 했다(4,5절). 그들은 하나님을 배역하는 죄를 지었으며('그들이 나를 버리고'), 가시적인 지상교회의 특권을 남용했다. 그교회로써 그들은 위엄있고 당당하게 될수 있었건만 '그들이 이곳을 불결케하였다.' 그는 거짓신들에 대한 그들의 애착과 숭배를 질책하고 있다. 그신들은 그들자신들은 물론 자기 열조들도 알지못하던 신들이다. 그들은 이신들을 저희 자신의 신으로 삼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항상 새로운 것과 신기한 것을 추구하였기때문에 그들은 그이방신들을 더낫게 여겼고, 다른 세상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신앙에 있어서도 새로운 유행풍조를 더좋아하였다. 그들은 또한 살인죄를 범하였다. 더군다나 그것은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이…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만일 우상숭배와 살인을 별도로 범하기라도 한다면 저희의 악의가 충분히 충족되지 않기라도 하는듯이 그들은 그 두가지 죄를 한꺼번에 행하는 복합적인 범죄를 자행하였다. 곧, 자기자녀들을 불살라 바알에게 번제로 바쳤다(5절).
(5) 그는 임박하고 있는 황폐가 격심하리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무엇인가 느끼게끔 애써야 했다. 그는 그들에게 이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가 '살륙의 골짜기'라는 새이름을 얻게되리라고 말해야 했다(6절). 왜냐하면 무수한 사람들이 거기에서 '칼에 엎드러지게'될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그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하여, 그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될 것이었다(9절). 처음에는 그렇게 버티다가 마침내는 온도성이 황폐하게될 것이었다. 거룩함으로 온땅의 기쁨이 되었던 곳은 이제 죄로인하여 온땅의 비난을 일시에 받는 수치거리가 되었다.
(6) 그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개혁하지 않는 현생활을 지속하는한 이같은 파멸을 방지하고 피하려는 온갖 시도가 다 쓸데없는 허사임을 그들에게 확신시켜주어야 했다(7절).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를 무효케하여. 하나님의 자비에로 도피하지 않는한, 그의 공의를 피할방도는 없다.

Ⅱ. 깨진 오지병의 상징 19:10-15
본문말씀은 앞에서 주어진 메시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1. 가시적인 표적(10-13)
먼저 눈에 보이는 표적에 의해서 그메시지가 강조된다. 선지자는 '오지병'을 가지고 가야했다(1절). 그리고 메시지를 선포할때 '그오지병을 깨뜨려야' 했다(10절). 그는 앞장에서 이백성을, 만들어지는 도중에 쉽게 파상하는 토기장이의 진흙에 비유했었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이렇게 말했음직도 하다. "그런 비유는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도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져서 단단히 굳어졌노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너희가 그러하다고 치자. 토기장이의 그릇은 어느누구의 손에서나 쉽사리 부숴지고 마는 것이라. 그것은 토기장이의 손에서 부드러운 진흙이 쉽게 파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아니 이점에 있어서 이미 만들어진 그릇은 더욱 나쁘도다. 부드러운 진흙의 상태일때에는 설사 파상된다하여도 다시 만들어질수 있지만 이미 그릇으로 굳어진후에는 일단 부숴지면 결코 그부숴진 파편들로 다시 만들수 없기 때문이라." 신성한 표적들이나 상징에 의한 가르침은 옛적에 곧잘 사용되었었다.
(1) 오지병은 쉽게 깨뜨려졌으며 그것은 원상태로 복구되어질수 없었다. 그와같이 유다와 예루살렘도 갈대아 군대에 의해서 훼파되어질 것이다(11절). 그들은 자기들의 조직이 견실한 것과 용기가 굳은 것을 너무 의존하였다. 그들은 저희가 놋그릇과 같이 단단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저희의 단단함이 마치 흙으로 빚은 토기와 같을 뿐임을 보여준다. 토기는 비록 단단하다고해도 부숴지기 쉬우며 쉽게 깨뜨려지고 만다. 그들을 부숴뜨리기로 작정하신 이는 일찍이 그들을 만드셨던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내가 이백성과 이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토기장이의 그릇과 같이 산산조각 내리라." 이것은 이방인들이 당하곤 했던 운명이었다(시 2:9;계 2:27). 그러나 그것이 이제 예루살렘의 운명이 되었다(사 30:14). '토기장이의 그릇'은 일단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수 없으며' 수리할수도 없다. 예루살렘은 완전하게 훼파될 것이었다. 그것을 훼파하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떠한 손도 그것을 회복시킬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비록 그가 파하셨으나 다시 치유하실 터이었다.
(2) 이일은 도벳에서 행해졌다. 이것은 다음 두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1) 내가…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2) 내가…이성으로 도벳같게 할것이라. 그들은 저희 우상들에게 희생제물로 바치고자 사람을 살육당한 자로 온도성을 가득채우실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희생제물로써 엎드러지게 될것이다. 도벳은 시체들과 성의 오물들이 그곳으로 운반되었었고 그것들을 태우기위하여 불이 계속하여 타오르곤 하였었다. 후에, 우리 주님이 거하셨던 당시에 지옥이 그에 빗대어 게헤나(Gehenna), 곧 힌놈의 골짜기라 불리워졌을정도로 그곳은 그토록 저주스러운 곳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 조차도 '도벳 땅처럼 될'것이었다(13절). 이는 그곳에서 그들이 자행하였던 우상숭배 때문이다. 집의 평평한 지붕을 경건한 자들은 때때로 기도하기에 편리한 장소로 사용하였었다(행 10:9). 그런데 우상숭배자들도 그것을 산당으로 사용하여 그위에서 이방 신들에게, 특히 하늘의 만상들, 해, 달, 별들에게 제사 드리곤 하였다. 우리는 '지붕에서 일월성신에게 경배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읽을수 있다(습 1:5). 지붕에서 지은 이죄는 그집에 저주를 가져왔다.
2. 말씀에 대한 인준(14,15)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을 '여호와의 집뜰'에서 엄숙하게 인식시키고 인준함으로써 메시지를 강조한다(14,15절). 선지자는 도벳에서 돌아와 그골짜기의 작은 산위에 있던 성전으로 갔다. 그리고 도벳의 골짜기에서 그가 말했던 것을 그곳에서 확증하였다.
(1) 예언의 성취는 곧 여기에서 경고된 심판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고하여 그 경고는 단지 그들을 놀라게하는 것일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다고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성과 그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여호와께서는 하신 말씀을 능히 실현하실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대로 그렇게 두렵게 죄와 죄인들에게 나타나실 것이었다.
(2) 이예언에 대한 경시가 여기에서 그들에게 선고된 죄이다. 이는 그목을 곧게하여 내말을 듣지 아니함이라.

# 핵심
19:1-15
깨어진 오지병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는 유다의 파멸을 보여준다.
토기 제조법(19:1)
본문의 토기는 유약을 바르지않고 약한 불에 구워만든 점토제 용기이다. 토기를 만들때, 먼저 점토를 발로 밟아 이기고(사 41:25), 손으로 반죽하여 그점토를 발로 회전시키는 녹로위에 놓았다(18:3). 그런 다음에는 녹로를 돌리면서 손으로 원하는 모양을 만든후, 그것을 가마에 넣어 구웠다.

# 묵상
힌놈골짜기에 간 사람들 ( 19:1 )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사람이었습니다. 어른이라고 번역된 이말은 본래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앞에서 멸망에 대한 상징적 행위를 하는 것은 곧 그들의 얼굴에 숯불을 피우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는 정치, 종교계의 정통세력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깨뜨릴 오지병 ( 19:5, 6 )
하나님께서 특별히 오지병을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깨뜨리라고 명하신 이유는 그곳을 저주하기 위함입니다. 당시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는 도벳 산당이 있었으며 그곳에서 몰렉에게 제사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자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예루살렘성전 못지않게 신성한 곳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곳에서 오지병을 깨뜨리게 함으로써 그곳이 파멸될 것이요, 그곳에서 살육이 행해져 더이상 사람이 찾지않은 곳이 될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오지병을 깨뜨리는 행위 ( 19:10-12 )
옛날 애굽사람들은 반역자들의 이름을 오지병에 쓰고 그것을 거룩한 장소에서 깨뜨려 그들의 멸망을 맹세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말씀을 듣지않는 자들에게 실제행위를 통해서, 만든이의 뜻에 맞지않으면 이처럼 멸망당하고 말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여전히 악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도벳같게될 예루살렘성 ( 19:12 )
도벳은 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곧 예루살렘이 살육과 파멸의 장소로 바뀔 것임을 뜻합니다. 즉 힌놈의 골짜기에 시체가 많듯이 예루살렘성 또한 시체로 뒤덮일 것임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차있을 바벨론 침략을 염두에 두고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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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여호와의 절대적 주권 18:1-10
여기에서 선지자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심받고있다. 이는 설교하기위함이 아니라 설교를 준비하기위함, 아니 이미 준비되어진 설교를 인수하기 위함이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2절). "그리고 어떻게 토기장이가 일하는지 주목하여 보라. 내가 거기에서 은밀한 속삭임으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너는 거기에서 백성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게되리라." 그래서 선지자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갔다(3절). 그리고 어떻게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지' 관찰하였다. 거기에서 토기장이는 어떤 한형태로 만들려고 의도했던 진흙덩어리가 너무 딱딱하게 굳어있거나 그안에 돌이 들어있거나 하면, 혹은 그의 '손에서 파상하면', 즉각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어 버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의견에 선한대로' 행하였다. 이처럼 목회자들도 하나님의 일들에 대해 사람들에게 보다 자명하게, 보다 손에 잡힐듯이 말하는 방법을 배우고 성경의 비유를 해설하는 방법을 알게된다면 이 세상사나 문제들을, 사람들을 개심시키기위해 보다 적절히 선용할수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가 일하는 것을 주의깊게 관찰하는동안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파해야할 중대한 두가지 진리를 그의 심중에 두셨다.
(1) 하나님께서는 감히 더불어 다툴수 없는 권세와 항거할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그는 이 권세와 능력으로써 그자신의 목적을 이루시기에 합당한대로 열왕과 열국들을 이루고 만드신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6절). 하나님께서는 진흙에 대하여 토기장이가 가지는 것보다도 더분명한 주권을 우리에게 대하여 가지고 계시다. 왜냐하면 토기장이는 진흙에게 단지 그형태만 주는반면에,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본질과 형태 둘다를 얻고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하여 감히 다툴수 없는 주권을 가지고 계시자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이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일은 진흙이 토기장이와 더불어 싸우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불합리한 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자신이 기뻐하시는대로 우리를 만드시고 사용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매우 쉬운 일이다. 손을 한번 뒤집거나 녹로를 한번 돌림으로써 진흙의 형태는 아주 달라져서 그릇이 되기도 하고 아무런 형태를 갖지못하게 되기도 하고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와같이 우리의 운명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열국에 대해 언급되고 있다. 욥(욥 12:23)에 의해서 이비유가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 그리고 시편(시 107:33이하)기자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또한 욥기34:29절과 비교해 보라. 만일 토기장이의 그릇이 한가지 용도에 못쓰게 된다면 다른 용도로 쓰여지게될 것이다. 자비의 기념비들이 되지못한다면 공의의 유적들은 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흙으로 지으셨다(욥 33:6).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의 손안에 들어있는 진흙이다(사 64:8).
(2)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인자라는 철칙에 의거하신다. 그는 주권을 행하시는중에 은총을 베푸시며 절대로 전횡적인 권세로 징벌하시지 않으신다. 심판을 받는중에 우리는 그심판이 우리의 죄로인한 것임을 확신할수 있으며 전민족적인 회개는 심판이 더이상 계속되지않도록 중지시킬 것이다(7,8절). 만일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그나라를 지켜주는 울타리를 뽑으리라, 그나라를 풍요케해주던 과일나무들을 뽑으리라. 그 강력한 요새들을 파하리라. 그리하여 포도원이나 성읍이 훼파되듯 그나라가 멸망하게 하리라"고 하셨다 하자. 이경우에 있어 만일 그민족이 저희의 죄를 회개하고 생활방식을 혁신한다면, 그리고 각자가 자신의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그들에게로 돌아서실 것이다. 죄악에서 진실로 회개하고 개심하면 징벌의 재앙을 결과적으로 방지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여지가 없는 진리이다.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되었을때 그가 새로이 진흙그릇을 만들수 있듯이, 그처럼 수월하게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민족을 그들의 파멸에서 일으키실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비의 길로 우리에게 나오실때 만일 그것을 중단시키는 그무엇인가가 거기에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의 죄이다(9,10절). 죄는 하나님과 한민족 사이를 이간시키는 주요인이다. 죄는 하나님의 약속의 혜택을 받지못하게 하며 우리의 기도가 결실을 거두지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죄는 백성들에게 주시려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계획들을 철회시킨다(호 7:1).

Ⅱ. 유다 백성의 우매함 18:11-17
본문말씀은 이장의 앞부분에서 제시된 일반적인 진리를 유대 민족에게 적용시킨다.
(1) "그러므로 이제 너는 그들에게 가서 말하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 하노니. "섭리의 모든 작용이 확연하게 너희의 멸망을 향해 진행되고 있느니라."
(2)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개혁함으로써 자신을 만나라고 그들을 청하시며, 그렇게하여 그들에게 더해질 두려운 심판을 피하라고 권면하신다.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려고 계획하신 재앙들을 스스로 철회하실수 있게하라. 그러면 녹로위의 진흙그릇같이 너희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하던 섭리의 방향이 즉시 그형태를 달리하여 너희에게 유익한 결과를 낼것이라."
(3)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완악함과 그들의 외고집적인 거부를 예견하신다(12절).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구원받는 것조차도 포기할수 있노라.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리라'고 마음을 굳혔기 때문이라. 선지자가 더이상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라."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법이라는 구속아래서 지내지 않으리라." 그들은 구속받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지만, 사람이 자기 정욕의 노예가 되는 것은 종중에서도 최하급의 종인 셈이다.
(4)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완악함에 담겨있는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 혁신되기를 싫어하는 터무니없는 우매함을 질책하신다(13절). 너희는…열방중에 물어보라. "하나님의 계시도, 말씀도, 선지자들도, 그어떠한 혜택도 받지못했던 자들에게까지 물어보라."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니느웨 사람들도 이같은 경고를 받았을때 악한 길을 돌이켰었다. 그런데도 '처녀 이스라엘'은 회개를 무시하며 반항하고 있다. 양심과 섭리가 정반대의 것을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 이스라엘은 친히 저희와 정혼하신 하나님께 대해 순결과 정절을 지켜야 마땅하였다. 그러나 처녀 이스라엘은 스스로 그에게서 떨어져나갔으며 그에게 돌아오기를 거부하고 있다. 고의적으로 회개치않는 것은 가장 그릇된 자살행위이다. 즉, 그것은 '심히 가증한 일'이다.
(5) 하나님께서는 다음의 두가지로 그들의 우매함을 말씀하신다.
1) 죄 그자체내의 본질적인 우매함이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기위하여 하나님을 버렸다(14,15절). "목마른 길손이 어찌 눈(雪)을 버려두고 떠나겠느냐." 그눈은 녹아서 레바논의 산에서 흘러내린다. 그리고 '들의 반석'을 지나 깨끗하고 맑은 수정같은 개울로 흐른다. "목마른 길손이 이것을 지나치겠느냐? 그리고 어떤 더러운 웅덩이 물이 있었으면 더좋겠다고 생각하겠느냐? 혹은 '원방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여름 복중에 버려진바 되겠느냐." 사람이 더위와 갈증으로 시달리다가 원기를 소생시켜주는 차가운 개울을 만나면, 이를 마음껏 즐길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읽을수도 있다. "여행하는 길손이 평탄하고 평평한 나의 들을 떠나겠느냐? 그리고 거칠고 험한 바위 투성이 길을 택하며, 엄청나게 쌓여서 통과할수 없게된 레바논의 눈길을 택하겠느냐? 혹은 알지 못하는 낯선 찬물을 택하고자 흐르는 물을 버리겠느냐? 그러나 내 백성은 나를 잊고(15절), 터진 웅덩이를 취하고자 생수의 근원을 버렸도다. 저희가 외양만큼 실속이 없으며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도 못하는 우상, 곧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였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으로 정해진 '그옛길을 버렸다. 그길은 모든 성도들이 행한 길이었으며, 그러므로 저희의 여정의 목적지에 이르는 바른 길이었고 안전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한 옛길로 나아가도록 권고받았을때 단호하게 그것을 거부했었다(렘 6:16). 그들은 곁길을 선택했었다. 그길은 대로였으나 왕의 대로가 아니라 닦지 아니한 길이었다. 그것은 바로 우상숭배의 길이었다.
2) 그죄의 유해한 결과에 있어서의 우매함이다.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그들의 땅으로 치소가 되게'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저희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들의 땅으로 지나는 자마다 한마디씩 하게될 것이다. '놀라서 그머리를 흔들' 것이다. 어떤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고 어떤이들은 가련하게 여길 것이며 또다른 어떤이들은 일찍이 온땅들의 영광이었던 나라가 황폐하게된 것에 의기양양해 할것이다. 그들을 멸망시키려고 그들의 땅이 황폐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지라도 다음과 같은 경고가 계속되고 있다(17절). 내가 그들을 그 원수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것이며. 이동풍은 맹렬하고 사나운 바람이다. 그들의 불행을 극에 달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재앙을 당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웃으신다면 능히 견딜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우리에게 등을 돌리시고 노여움을 나타내신다면, 그리고 우리가 제멋대로 행하도록 내버려두신다면, 우리는 완전히 망하게 된다.

Ⅲ. 박해자의 악의와 선지자의 기도 18:18-23
선지자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교훈이 되도록 그자신의 문제들을 거론한다.
1. 박해자의 공통된 수법(18)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박해자들의 공통적인 수법은 무엇인가.
(1) 그들은 예레미야를 대적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의하기위하여 함께 머리를 맞댔다. 그리하여 그가 이미 말한바에 대하여 복수를 하고 장차 그의 입을 막고자 하였다.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이는 예레미야 자신에 대해서 뿐만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전한 말씀에 대해서도 대적하는 것이다.
(2) 여기에서 그들은 마치 교회에 대하여 굉장히 열심인 척하였다. 그들은 만일 예레미야를 이전처럼 설교하도록 내버려두면 교회가 위험에 처하게된다고 말하였다. "오라, 우리가 은밀히 그를 쳐부수자. 왜냐하면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그입에 진리의 법이 있을(말 2:6) 것이기 때문이라. 우리는 거기에서 율법을 찾으리라. 율법에 따르는 규례들의 집행도 제사장의 수중에 있다. 율법이건 규례의 집행권이건 제사장들에게서 억지로 빼앗을수 없도다." 그들이 교묘히 빗대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의 두가지 사항이었다.
1) 예레미야는 참된 선지자일수 없으며 자칭 선지자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는 제사장들에게서 위임받은 적이 없으며 다른 선지자들과 협력하여 의견을 같이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2) 그의 예언의 내용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일수 없다. 왜냐하면 그예언은 때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렘 5:31)이 백성을 속인다고(렘 14:14) 질책하였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들이 '놀랄 것이며 깜짝 놀라리라'(렘 4:9)고,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을'(렘 8:9,10) 것이라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잔뜩 취하게 되리라고(렘 13:13) 예언했었다.
(3) 그들은 예레미야의 명성에 먹칠을 하기위하여 그들이 할수 있는한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4) 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기위해 그들은 예레미야가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주목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그의 아무말에도 주의치 말자. 왜냐하면 옳건 그르건 관계없이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의 말로 간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5) 그들은 보다 효과적으로 예레미야의 입을 다물게 하고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였다(23절). "나에게 맞서는 그들의 모든 계략은 나를 죽이려는 것이니이다. 그들은 귀중한 생명을 사냥하는 자들이니이다."
2. 박해받는 자의 공통된 구원(렘 19-23)
박해받는 자의 공통된 구원은 무엇인가. 예레미야가 취한 태도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아볼수 있다. 그는 즉시 기도로써 하나님께 호소했다.
(1)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서 살피시도록 의뢰한다(19절). 그들은 예레미야가 한 말을 한마디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않았고 그의 하소연을 받아들이려고 하지않았다. 또한 그의 불만족에 어떠한 주의를 기울이려고도 하지않았다. 그러자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소서'라고 그는 말한다. "나와 더불어 다투는 자들의 소리를 들어보소서. 그들이 얼마나 시끄럽고 소란한지, 그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거짓되고 악의에 차있는지 들어보소서. 그리고 판단하사 그들로하여금 저희 자신의 입으로 심판을 받게하시며 그들의 혀가 한말이 저희 자신에게로 떨어지게 하옵소서."
(2) 예레미야는 자신에 대한 그들의 비열한 배은망덕을 하소연한다(20절).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 "그리고 그러한 것이 어찌 벌을 받지않을수 있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그들의 악에 대하여 선으로 내게 갚지 아니하시겠나이까?"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그들은 야비하고 비겁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예레미야의 생명을 취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그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다. 그웅덩이 둘레에는 울타리도 없었다(시 119:85).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큰선을 행하였는가. 내가…주의 앞에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그는 그들을 위한 중보자로서 하나님앞에 있었다. 하지만 자기 하나님을 잊은 자들이 자기들의 최상의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는 일찍이 다윗이 그같은 처지에 처했었을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비통해했다(시 35:13;109:4). '나는 사랑하나 저희는 도리어 나를 대적하나이다.' 이와같이 죄인들은 크신 중보자를 대적하고 있다. 그의 피가 하늘에서 그들을 위하여 대언하고 있는동안에 죄인들은 땅에서 그를 새로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를 적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선지자에게 위로가 된것은 그들이 자기에게 그처럼 악의로 대하였더라도 자신은 그들에게 해야할 도리를 다했다는 양심의 증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3) 예레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기를 빈다. 이것은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악함에 대한 분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21-23절).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다.
1) 그들의 가족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굶주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2) 그들이 '칼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멸절되기를 기도한다.
3) 전쟁의 공포와 파멸이 부지불식간에 그들을 습격하여 경악이 그들을 사로잡기를, 그렇게하여 그형벌이 그들의 죄에 대한 보응이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22절).
4) 그들이 그들의 죄과대로 다루어지기를 기도한다. 그들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죄이었다.
5)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곧 그들의 파멸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따라서 행하도록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였다. 그는 예언의 영의 감동하심으로인하여, 자기를 핍박하는 자들에게 확실하게 임하고있는 파멸을 앞서 예견하고 이같이 기도할수 있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를 할수가 없다. 우리 주님은 가르침을 통해서나 모범을 통해서나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셨다.

# 핵심
18:1-12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회개의 기회를 저버린 유다를 멸망시키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선포하고 있다.
우상숭배(18:15)
허망한 신이나 사람 혹은 그밖의 물체를 형상화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섬기는 행위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상숭배를 금지시키셨다(출 20:4,5). 우상은 헛되고 무가치한 것으로서, 이를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탐심도 우상숭배라고 규정한다(골 3:5).

# 묵상
토기장이와 진흙 비유 ( 18:1-12 )
본문은 토기장이와 진흙비유에 대한 기록입니다. 토기장이는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진흙은 피조물인 인간을 가리킵니다. 이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그뜻대로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토기장이와 진흙으로 비유한 것은 이사야서에서도 발견할수 있습니다(사29:16).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전적인 질적차이와 하나님의 섭리의 절대성을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레바논의 눈 ( 18:13, 14 )
레바논은 항상 눈으로 덮여있어 여행자들은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로 해갈을 합니다. 따라서 이표현은 변할수 없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자연은 변함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그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을 잊고 허무한 것에 분향하는 심히 ‘가증한 일’을 범했습니다. 여기서 ‘가증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우상숭배의 죄악성을 지적할때에 사용되는 전문용어입니다. 이스라엘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요 있을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처럼 있을수 없는 일을 행했습니다.
‘옛길’과 ‘곁길’ ( 18:15, 16 )
분문은 옛길과 곁길에 대한 상징적인 비유로서의 내용입니다. 옛길은 아브라함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여호와신앙, 즉 모세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곁길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길에서 벗어나서 이방종교의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길은 좁은 길이지만 조상들이 이미 걸어간 길이요, 닦아놓은 길입니다. 그러나 곁길은 넓은 길이나 닦지않은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옳은 길을 걸으라고 하셨습니다. 곧 옛길은 복이요 영생의 길이지만, 곁길은 저주요 멸망의 길입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 ( 18:20 )
예레미야는 주의 분노를 유다에게서 돌이키려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죄의 용서를 구했습니다. 선지자는 다만 하나님과 사람들을 중재하기위해 수고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않으면 심판을 면치못한다고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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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포로될 유다 17:1-4
백성들은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범한 죄는 무엇인지' 물었었다(렘 16:10).
(1) 기소된 내용이, 즉 사실과 죄과가 죄인들에게 완전히 입증된다. 그들은 무죄를 주장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과가 그들자신의 양심에 새겨져있기 때문이다. 그죄들은 온세상에 명백하였다(1,2절). 그것은 가장 읽기 쉽고 가장 지워질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하나님앞에 기록되어 있으며(신 32:34) '금강석끝 철필로 기록되어' 있다. 즉,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새겨져 있다. 죄인들의 죄는 사함받기전에는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판에 새겨져' 있다. 마음에 새겨진 것은 지워질수 없는 법이다. 우리는 그들의 죄과를 입증하기 위하여 '그들의 제단뿔' 이상의 다른 것을 더들먹일 필요가 없다. 단 위에는 그들이 우상에게 제사지내기 위하여 흘린 피가 뿌려져 있었다. 저희의 이웃들이 저희에 대하여 증언할 것이며 저희 자식들은 자기들이 어렸을때 부모들이 데리고 갔던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기억할' 것이다(2절). 저희 마음속의 편견은 아직도 우상들을 강하게 향하고 있으며, 그들의 우상에 대한 애정을 감소시키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채찍에 의해서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단뿔에 새겨졌다.' 그들은 자기 이름을 우상에게 내어주고, 밧줄로 동이듯 자신을 우상에게 묶었던 것이다.
(2) 기소된 내용이 이같이 증명됨으로써 판결이 확정되고 선고가 인준된다(3,4절). 그들의 재화는 강한 자의 손안에 들어갈 것이다. 예루살렘은 '들에 있는 하나님의 산'이다. 예루살렘은 평야 한가운데 있는 산위에 축성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저 부유한 도성의 '모든 보물로 노략을 당하게' 하실 것이다. "너희가 나의 산(온땅이 그의 산이었다, 시 78:54;신 11:11)을 죄로인하여 산당으로 변모시켰으며 높은 메위에서 너희 우상을 섬겼도다(2절). 그러므로 이제 그것들은 네 온지경에서 노략을 당하게될 것이라." 그들은 저희의 기업들과 결별하게 되며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가게될 것이다(4절). 죄는 우리의 위안을 훼방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부터 얻어지는 즐거움을 우리에게서 빼앗는다. 그렇지만 그들이 회개하면 소유권을 다시 회복하게될 것임이 암시되어 있다. 현재로서는 "너희가 내 노에 불을 지피었도다. 그것이 너무도 맹렬하여 마치 영영히 탈듯하도다."

Ⅱ. 세상을 의지하는 죄 17:5-11
선지자의 설교전부가 다 예언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실천적인 것에 대해서도 설교하였다.
(1) 환난에 처해있을때 피조물들을 의뢰하고 그들에게서 구원과 성공을 기대하는 자들이 반드시 만나게될 낙담과 괴로움에 대해서이다(5,6절). 그렇게하는 '그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즉, 비참하게될 것이다). 이는 그가 상한갈대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죄된 죄는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아' 그것에 계속 집착하며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팔이시다(사 33:2). 이죄에는 참으로 악한 점이 있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것이다. 인간을 의뢰하는 자들은 아마도 저희 입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있다. 물통에 담긴 물만 바라보는 것은 곧 그것을 끌어온 샘을 잊는 것이며 따라서 화를 불러 일으킨다. 인간을 신뢰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같기' 때문이다. 그는 황폐한 땅의 산물인 애처로운 떨기나무처럼 기력이 없고 쓸모없으며 무가치할 것이다. 그의 위안되던 것들이 다 엎드러질 것이며 그는 기력이 없어지고 낙심하여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짓밟혀질 것이다.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못하고' 좋은 일을 나누어 가질수도 없게 된다. 시간은 바뀌어도 그들은 변함없으며 '광야 간조한 곳에 거하게' 될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추수하여 수확을 거두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의 열매를 맺을수도,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구원에 이르는 복된 열매를 거둘수도 없다. 그들은 '건전한 땅'에 거하는 자들이다.
(2)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언제나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자, 곧 가장 불안정한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풍성한 만족에 대해서이다(7,8절). 우리에게 요구되어진 의무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곧 그의 은총을 우리가 바라는 선으로 삼고 그의 능력을 우리가 기대하는 힘으로 삼는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같은 것이다. 그는 가장 좋은 땅에 큰배려로 심기워진 선택된 나무와 같다. 그는 '그뿌리를 뻗치는' 나무와 같아서 요동치않고 서있으며 강변에 그뿌리를 뻗침으로 풍부한 수액을 빨아 올릴수가 있다. 하나님을 자기 소망으로 삼는 자들은 평안하며 계속하여 안정과 마음의 평정을 즐긴다. 이와같이 심기워지고 이와같이 물주어진 나무는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한여름의 찌는듯한 열기에도 아무런 해를 입지않을 것이다. 또한 가뭄이 와도 충분히 유지될수 있을정도로 그뿌리로부터 수분이 잘 공급된다. 그들은 항상 '그잎이 청청하며' 결코 시들지않는 나무와 같이 번성하며 융성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 기쁠뿐더러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들은 내적인 평강과 만족에 있어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비가 오지않는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무가 그 자체내에 씨앗을 가지듯, 그렇게 수분을 갖고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샘을 소유하고 있는한, 물동이가 깨질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힘과 은혜를 얻는 자들은 '결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3) 인간의 죄로 가득찬 마음과 항상 그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이다(9,10절). 인간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은 한낱 연약한 존재에 불과할뿐 아니라 거짓되고 속임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희망과 두려움이 상황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듯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그리고 거기에 있으리라고 의심조차 해본적이 없는 그러한 악이 있다. 부패하고 타락한 상태에 있는 '마음', 즉 인간의 양심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다. 그마음은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르고 만물을 거짓되이 꾸민다. 사람들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혹은 보지 아니하신다고 스스로 마음으로 다짐할때에, 이점에 있어서 그리고 이와 유사한 수많은 생각에 있어서 마음은 거짓된 것이다. 만일 다른 기능들의 잘못을 수정해주어야할 양심 그자체가 거짓을 낳는 장본인이며 미혹으로 이끄는 주모자라면 그상태는 참으로 악화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알수가 없으며 시험의 때에 무슨 일을 행할지도 알수가 없다(히스기야도 그러했으며 베드로도 그러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알수 없으므로 그들을 의뢰할수가 없다. 마음에 어떠한 악이 있든지간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10절). 그리고 그가 그마음에 대하여 이러한 심판을 내리시는 것은 '각각 그행위와 그행실대로 보응하기' 위함이다.
(4) 정당치 못하게 취득한 부에 수반되어지는 저주에 대해서이다(11절).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그가 그 부를 자기 소망으로 삼지만 결코 그기쁨을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 망령되고 거짓된 혀로 재물을 얻은 자는 자신의 성공을 기뻐하며 '나는 실로 부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부가 저희에게서 작별하게될 것이다. 은혜를 얻은 자들은 필경에 지혜로운 자들로 판명될 것이며 죽어서 그은혜의 위로를 받되 영원히 누리게될 것이다(잠 1:20). 그러나 세상적인 재물에 저희 행복을 두는 자들은 종내에는 그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되나 이미 때는 늦을 것이다. 이것은 알을 품으나 그것을 부화시키지는 못하는 자고새와 같다. 그알들은 깨어지거나(욥 39:15) 내버려질(사 10:14) 것이며 혹은 썩게될 것이다. 부자는 재산을 모으기위하여 온갖 수고를 다하며 알을 품듯이 심사숙고하지만 그것으로는 어떠한 위안이나 만족을 결코 얻을수 없다.

Ⅲ. 하나님을 의지하는 선지자 17:12-18
선지자 예레미야는 개인적인 묵상의 시간을 갖고 홀로 하나님과 있기위하여 한적한 곳으로 물러갔다.
(1) 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 곧 자기 백성가운데 계시의 종교를 두시고 거룩한 규례로써 그들을 존귀케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인정한다(12절).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특별하신 임재를 나타내셨다. 백성들은 그곳에서 주권자에게 경의를 표했고 환난중에는 그곳을 피난처로 삼아 도망해 들어갔었다. 그곳은 그들의 지성소이었다. 그곳은 거룩하신 보좌, 하나님의 보좌이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으로 불리워지는데 그왕은 이스라엘의 왕을 일컬을뿐만 아니라 온땅의 왕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곳은 세계의 왕성으로 마땅히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시부터' 그러했다. 예레미야가 여기에서 이말을 언급한 것은 다음 두가지 의미중 하나이다. 즉, 그들의 땅에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청원이거나, 아니면 그들가운데 하나님의 보좌가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렸으므로 그백성의 죄가 더중하다는 의미이다.
(2) 그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저버리고 배역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멸망당하도록 버리신 일에 의로움을 인정한다(13절). 그는 이일이 공평한 일이라고 하나님께 아뢴다. "이스라엘가운데 주께 의지하는 자들에게 소망하신이시여."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그들로 수치스럽게 하소서"라고 혹자는 읽는다. 그렇게 읽으면 선지자의 이말은 그들이 참회함으로 수치를 느끼게 해주시도록 그의 은혜를 구하는 탄원이 된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곧 내가 전파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자는 사실상 하나님을 떠나는 자이라."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선지자에게 돌아오는 자로 일컬어지는 것(렘 15:19)과 같다.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그들은 진토중에 쓰여진 글자처럼 곧 지워져버릴 것이다. 그들은 '터진 웅덩이'를 취하기위하여 '생수의 근원(즉, 샘물)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들인 것이다.
(3)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치료하시며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한다. 여호와여…나를 고치소서…나를 구원하소서(14절). 그는 갖가지 요인들로인해서 심령에 상처를 입었었다. 그는 도리를 분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해를 입었었다. 그는 이청원을 보다 강력하게 하기위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탱할수 있도록 붙들어주시면 우리는 살게될 것이다. 그가 보호해주시면 우리는 안전할 것이다.
2)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이구절은 "주는 나의 찬송이 되시리이다"라고 읽을수도 있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고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면 주는 그영광을 받으시리이다."
(4) 그는 자기가 말씀을 전파한 백성들의 불신과 불경에 대해 하소연한다. 그는 충실하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했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를 보내신 분에게 어떤 대답을 돌려드리게 되었는가?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15절;사 5:19). 그들은 선지자를 조롱했으며 그가 말한 내용이 참됨을 부인했다. "만일 네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면 그말씀이 어디있느냐?" 그말을 무시하고 그것에 도전했다. "전능하신 하나님더러 마음대로 해보시라고 여쭈어라. 그가 말한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시라고 해라. 우리는 끄떡도 하지않을 것이라. 그림으로 그려진 사자가 보기에 아무리 무서울지라도 과연 무슨 해를 끼칠수 있겠느냐."
(5) 그는 자기가 소명받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음을 하나님께 호소한다(16절). 그는 자기 일을 꾸준히 계속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되기는커녕 그는 맡은바 직분으로인하여 경멸과 위해를 받는 자리에 있게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나이다. 나는 내 일을 팽개쳐 버리지 않았나이다." 예레미야는 그런 목자였다. 어떠한 사람들이 겪었던 것보다 더많은 어려움과 좌절에 부딪쳤었건만 그는 요나처럼 도망가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심부름을 더이상 못하겠다고 그임무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는 백성들에게 애정을 가졌었다. 비록 백성들이 그를 학대했을지라도 그는 그들을 가엾게 여겼다.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그의 예언이 성취되는 날은 실로 예루살렘에게는 무서운 재앙의 날일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날이 오지않았으면 하고 바랐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죽음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목자들도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오히려 죄인들이 돌이켜 살수 있게되기를 바라야 한다. 예레미야는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켰다. 만일 그가 그처럼 혹독하게 책망하지 않았더라면 백성들의 환심을 살수도 있었건만 그는 받은바 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고자 하였다.
(6)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인정해주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소명으로 맡겨주신 그일을 기꺼이 수행할수 있게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청한다. 그는 여기에서 두가지 것을 바라고 있다.
1) 그는 자기가 위임받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였다(17절).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그는 이렇게 간청한다. "주는 나의 소망이시니이다. 그러므로 내게 두려움이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나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오니 내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2) 그는 자기가 보내어진 곳의 백성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용기를 갖고자 하였다(18절). 그를 핍박하는 그들은 마땅히 그를 환대하고 격려해야할 자들이었다.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하여금 자신들의 완악함을 부끄러이 여기게 하옵소서. 그렇지않으면 경고된 심판을 결국에 그들에게 집행하소서. 나로하여금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의무를 배반하게 하지 마옵소서."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해 그는 기도한다.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이는 그들에게 재앙이 임함으로써 저나라에 재앙이 임하는 것을 방지할수 있다는 희망에서 나온 것이다.

Ⅳ. 안식일 성수 17:19-27
본문말씀은 안식일성수에 관한 설교이다. 안식일에 관한 이메시지는 아마도 요시야왕 재위시절에 그가 착수했던 개혁사업을 촉진시키기위해 주어졌던것 같다. 이메시지는 먼저 뜰문, 곧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에서 선포되어져야 했다(19절). 맨먼저 그들에게 저희의 의무를 말해주어야 했다. 만일 안식일이 거룩히 구별되지 않는다면 유다를 다스리는 귀인들은 책망을 받아야 했다. 이는 분명히 그들이 저희의 의무를 이행치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선지자는 또한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그메시지를 선포해야 했다. 이것은 중대하고도 전체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1) 안식일은 어떻게 거룩히 구별되어져야 하며 그에 관해 율법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21,22절). 그들은 안식일에 모든 세상적인 일을 중지해야 한다. 그들은 안식일에 짐을 지고서 성안으로 들어와서도, 나가서도 아니되었다. 농부가 곡식 짐을 지고 들어와서도 아니되었으며 거름을 지고 나가서도 아니되었다. 상인들이 상품이나 물건을 지고 드나들어서도 아니되었다. 안식일에 거리나 길에 짐을 실은 말이나 수레, 마차가 있어서는 아니되었다. 그날에 짐군들은 손님들을 기다려서도 아니되었고 종들은 땔감이나 양식을 날라서도 아니되었다. 그날은 안식하는 날이었으며 꼭 필요한, 부득이한 경우이외에는 일하는 날이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즉 그날을 하나님의 존귀를 위해 성스럽게 지키고 그에 대한 봉사와 예배로 보내야하며 세상적인 일은 제쳐두어야만 한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온전함을 요구하는, 그리고 온전히 행하기에 합당한 그일에 전념할수가 있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 시간중에서 자기 몫으로 떼놓으신 그것을 그에게서 훔친다면 너희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되기 때문이니라. 영혼으로하여금 안식일 날에 이세상 근심걱정을 지게하지 말라. 이것은 너희에게 새로이 부과된 법이 아니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한' 것이니라."
(2) 안식일은 어떻게 더럽혀지고 있었는가(23절). "너희 열조들은 안식일을 성수하도록 명령받았었으나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이 그들에게 주어진 다른 명령들에 대해서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명령에 대해서도 '그목을 곧게하여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안식일이 경시되어진 곳에서는 모든 신앙이 눈에 띄게 감퇴하기 마련이다.
(3) 만일 그들이 안식일성수를 주의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시고자 어떤 축복을 예비해두고 계셨는가(24-26절). 궁정이 번성할 것이다. 대를 잇은 왕들과 '판단의 보좌'에 앉은 다른 방백들은 '예루살렘 모든 문'으로 위풍당당하게 병거와 말을 타고 입성하게될 것이다. 도성이 번창하게될 것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영원토록 사람들이 거하게될 것이다. 그리하여 경고된바와는 달리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이 끊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라는 융성해질 것이다. '유다 성읍들과 베냐민 땅'은 수많은 거민들로 가득하게될 것이며, 풍요가 넘치고 평화로이 살아가게될 것이다. 종교가 백성들중에 흥할때에야 그백성은 진정으로 번성한다고 할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와같은 것이 안식일성수의 결과이다. 신앙생활의 그런 부분이 지켜질때 다른 여러가지 범주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로 유지된다. 모든 신앙의 조류들은 안식일이라고 하는 둑을 지키며 흐르는가 아니면 무시하는가에 따라 깊이가 있거나 얕거나 하게된다.
(4) 만일 그들이 안식일에 대한 불경을 계속하여 고집한다면 어떠한 심판을 각오해야만 했는가(27절). "이일에 있어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에도 계속하여 모든 문들을 개방한다면, 그리하여 그날에 불필요한 출입들이 있게된다면, 그리고 너희가 하나님의 법으로 명한 것을 파기하고 그날을 다른 날과 똑같이 여긴다면 하나님께서 성문에 불을 놓으시리라는 것을 알라." 죄를 몰아내고 백성들을 저희의 의무를 이행하도록 불러들이는데 사용되지 않는 성문들은 불에 타 마땅할 것이다.

# 핵심
17:1-18
유다의 근본적인 죄와 부패한 마음을 지적하고, 그것과 대조되는 참구원의 길을 밝힌다.
죄의 보편성(17:9,10)
아담이 하나님과의 행위언약을 어김으로써,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부여받은 의를 상실했다(롬 3:10,23).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길보다는 이기적이고 악한 길로 나아가는 본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와같이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바꿀수 없다. 유일한 치유책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마 5:8).

# 묵상
사라질수 없는 유다의 죄 ( 17:1-4 )
유다의 죄는 금강석끝 철필로 기록되었고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뿔에 새겨져있으므로 도저히 사라질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사후에까지 영원히 남게됩니다(요5:29; 계20:12). 이죄는 예수님의 보혈에 의해서만 씻겨질수 있습니다(벧전1:18, 19). 유다의 멸망은 죄를 회개치않고 끝까지 버티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유다의 죄와 벌을 거울삼아 작은 죄도 경히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와 물가에 심기운 나무 ( 17:6-8 )
사막의 떨기나무는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권력을 삼고 그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막의 떨기나무는 광야 건조한 곳, 사람이 살지않는 곳에 살며 쉽게 불타버리고 꺾기워집니다. 그러나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더위와 가뭄에도 끄떡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사람은 쉽게 멸망당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영원히 복을 받습니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 ( 17:9 )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않으므로 사람의 눈을 속일수 있으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며 중심을 보시는 여호와의 눈은 속일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악하고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속에서 나오는 것이 악하고 더럽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를 떠나는 자가 흙에 기록되는 이유 ( 17:13 )
흙에 기록된다는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계20:15), 다만 흙에서 낳아 흙으로 돌아감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를 떠난 것은 생수의 근원으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므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그이름이 영원히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과 대조됩니다(빌4:3).
안식일 성수 ( 17:21-27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경우 유다 왕조의 왕위가 끊어지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이 번영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안식일을 준수할때에는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계속 제사지낼수 있도록 길이 열립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준수치 않을때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고 말것입니다. 그외에도 안식일을 준수할때에는 여러가지 복을 받을 것이나 그렇지 않을때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안식일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켜야만이 참된 안식을 누릴수 있으며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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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임박한 유다의 환난 16:1-9
여기에서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한표적이 되고있다. 그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들이 그가 하는 행동에는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를 시험해보아야 했다. 그는 자기 조국이 곧바로 멸망할 것을 대기하는 자로 처신해야만 했다. 그는 멸망을 예언하였으며, 그예언의 진실성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어야 했다. 그는 결혼을 금하며 죽은 자를 위한 애곡과 유쾌한 환락을 금하고 지내야 했다.
(1) 예레미야는 결혼해서는 아니되며 자녀를 가질 생각도 하지말아야 한다(2절). 유대인들은 조혼과 많은 자녀를 좋게 여겼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독신으로 지내야 했다. 그렇게하는 것은 오직 재난의 때와 '임박한 환난'의 때에만 바람직한 것으로 나타난다(고전 7:26). 그러한것 자체가 재난의 한부분인 것이다. 그러한 시기가 임박한 것을 보게될때는 누구든지, 특히 선지자들은 세상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우리에게 소중하면 소중할수록 그것은 환난의 때에는 우리에게 더욱더 많은 걱정과 두려움과 슬픔을 안겨줄 것이다. 여기에서 이같이 명해진 이유는 '자녀와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가 모두 비통하게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3,4절). 아내와 자녀들을 가진 자들은 그들이 죽음으로부터 도망칠수 없는 그러한 장애물을 지닌 셈이 되는 것이다. 모든 자녀들의 죽음과 그처지는 부모에게는 또다른 죽음일 것이다. 자녀들을 낳아서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느니보다는(호9:13,14). 곧 그들이 불행가운데서 살다가 죽는 것을 보느니보다는, 차라리 자녀가 없는 편이 더낫다. 죽은 자를 위하여 슬피 애통해하는 일이나, 그들을 매장하는 일 모두가 거절된다. '그들은 슬퍼함을 입지못할' 것이다. 마치 온세상의 혐오를 받은 자들처럼 처리되어질 것이다. 아니 그들은 '매장함을 얻지'도 못한채 내던져져 버려질 것이다. 그들은 멸시받을 만할뿐 아니라 혐오를 받을만한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다.' 일부는 칼로, 일부는 기근으로 망하여, '그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짐승의 밥이 될것이다.'
(2) 예레미야는 이웃이나 친척들중 누가 죽었다고해서 상가집에 가서는 아니되었다(5절). 죽은 사람의 일가족에게 조문하고,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며', 죽은 자를 위해 '자기 몸을 베거나' 스스로 '대머리 되게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것은 비록 율법으로는 금지되었다고하나 흔히 있던 애곡의 표현이었다(신 14:1). 때때로 슬픔이 격할때에 그들은 자신의 몸을 베기도 하였다(6,7절). 그들은 유대인들이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하였듯이 그죽은 자를 인하여 상주들을 위로하곤 하였었다. 그리고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우게 하며' 그들의 원기를 지탱해주도록 그들을 위하여 강심제를 준비하는 것은 친구로서 해야할 일이었다. 비록 부모를 잃었다고해도 그들에게는 관심을 가져주는 친구들이 남아있는 셈이었다. '상가에 들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예레미야 선지는 이런 종류의 좋은 일에 꼭 참여하고 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구들의 죽음을 애곡하지 말라고 그에게 명하신다. 그의 조국의 전반적인 파멸에 대한 그의 슬픔은 친구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그의 개인적인 슬픔을 삼켜버린다.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죽기때문에 죽음에 수반되곤 하였던 장례의식에 참석할 시간도, 여유도, 마음도 갖지 못하게될 것이다. 그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상주일 것이며 조문하는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겨우 자기 짐을 지고 견딜수 있을뿐임을 알게될 것이다. 그이유는 다음과 같다(5절). "내가 이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그들의 번영에 종지부를 찍으리라. 그들에게서 건강과 부, 평안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그리고 서로간에 위안을 얻을수 있는 모든 것을 빼앗으리라." 어떠한 평강을 우리가 누리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평강이며, 그의 선물이다. 주께서 사람에게 평강을 주실때에 누가 감히 그가 잘못하신다. 하겠는가?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의 평강을 선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능히 그것을 박탈하실수 있으시며 그리하실 것이다. 그러면 온갖 좋은 일과는 작별을 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그의 인자와 자애를 거두어 가시면 모든 것은 끝장이다.
(3) 예레미야는 상가에 들어가서는 아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잔치집에도 들어가지 말아야 했다(8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셨다. 그러므로 그때는 그들이 스스로 겸비해야할 때이었다. 사역자들은 자기 부인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으례히 해왔던대로 잔치집에서 그들을 만나려하지 않음에 대해 이상히 여겼다. 그렇지만 선지자는 그것이, 그들의 모든 잔치가 곧 종식되리라는 암시임을 그들에게 알려준다(9절). 기뻐하는 …소리를…내가 끊어지게 하리라. "너희에게는 잔치할만한 일이나, 즐거워할만한 일이 하나도 남지않게될 것이라. 오직 너희의 환락을 망쳐놓으며 마음을 언짢게할 재난들로 둘러싸이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극히 쾌활한 자라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방법을 강구하실수 있다. "이일은 이곳에서, 곧 항상 즐거워하던 성읍이었으며 그모든 즐거움이 그성의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여겨졌던 곳,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리라. 그일은 너희 목전, 너희 눈앞에서 행해질 것이며, 지금 그토록 오만하고 즐겁게 보이는 너희에게 괴로움이 될것이라." 그들은 불의와 우상숭배로 인하여 찬미의 소리를 끊어지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그들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를 끊어지게' 하셨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의 소리를 듣지 않았으므로 이제 더이상 혼례식을 장식하던 축가소리,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가 그들가운데서 들리지 않게될 것이다(참조. 렘 7:34).

Ⅱ. 환난의 이유 16:10-13
(1) 왜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심판을 내리시려고 하시는지 그이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0절).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범한 죄는 무엇이뇨. "우리가 이제까지 어떠한 죄를 범해 왔으며 그러한 선고를 받을만한 무슨 죄를 지었는가?" 그들은 스스로 겸비하여 자신을 정죄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의를 고집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 대하여 이재앙을 선포하심에 있어서 그릇되셨다는듯이 말하고 있다.
(2)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같이 진노하셨는지 그이유를 선지자에게 물었는가?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연고없이 노하시지 않는다. 그는 그들에게 특별히 무엇이 이유인지 말씀해 주신다. 그들이 겸손해질수 있기위해, 아니면 적어도 하나님께서 의로이 여김을 받으실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저희 열조의 죄악에 대하여 그들에게 보수하셨다(11절).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떨쳐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겼다.' 그예배는 보다 즐겁고 화려하였다. 다채로운 것과 진기한 것을 좋아하였기때문에 그들은 그신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절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손에게로 그죄를 갚겠다고 말씀하신바 있는 두번째 계명에서의 바로 그죄이었다. 그자손들은 열조로부터 받은 이 우상숭배의 관행을 계속 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자신의 죄악을 그들에게 셈하셨다. "너희는 너희 열조의 죄를 너희 자신의 죄로 만들었으며 열조의 때에는 연기되었던 징벌을 받고자 자초하였다.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만일 그들이 저희 열조에게 주어졌던 유예를 선용하였더라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게 되었더라면, 심판은 미연에 방지되었을 것이었고 유예 선고는 국가적인 사면으로 바뀌었을 것이었다. 그들은 범죄함에 있어서 저희 열조보다 더뻔뻔스러웠으며 완악하였다. 그들은 일부러 자신들의 정욕의 소음을 더크게 만들었는데 이는 양심의 소리를 지우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결정을 내리신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13절). "내가 너희를 이땅, 이 빛의 땅, 이 이상(vision)의 골짜기에서 쫓아내어 먼나라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를 참으로 비참하게 만들것인데 이 두가지 모두 영혼에 관련된 것이다.
1)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영혼의 행복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거기에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게될 것이라. 아마도 너희의 잔혹한 주인들에게서 그일을 강요당하리라. 너희가 억지로 우상을 섬기게 되는때에, 너희는 일찍이 너희의 경건한 왕들이 금지하였을적에 그것을 좋아했던 만큼이나 싫어하게 되리라."
2) 하나님의 인애하심에 대한 어떤 징표를 받는 것은 영혼의 행복이다. "그러나 너희는 낯선 땅으로 내쫓길 것이며 나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않을 것이라."

Ⅲ. 자비에 대한 암시 16:14-21
본문에는 자비와 심판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그 일부는 멀리 복음시대까지 전망하고 있는듯이 보여진다.
(1)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반드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포고령은 이미 내려졌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모든 죄를 다 보신다(17절). 그의 전지하심이 그죄를 기소하며 그의 공의로우심이 그들을 정죄한다. 내가…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18절). 이심판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의 두배가 아니라 그들이 받으리라 예상한 것의 두배이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다투시는 죄목은 그들이 우상숭배로 '그땅을 더럽혔다'는 것이다. 우상들은 곧 '미운 물건의 시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싫어하시며 마땅히 우리도 그래야만 한다. 그는 그의 진노의 도구들을 일으켜 모으사 그들을 그땅에서 쫓아내실 것이다. 이는 이미 언도된 판결에 따른 것이다(16절). "내가 많은 어부들과 많은 포수들을 부를 것이라." 곧 갈대아 군대는 어부의 사술과 포수의 힘으로써 그들을 함정에 빠뜨리는 방책들을 지니게될 것이다. 그들은 저희가 어디에 숨었든지, 그곳이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암혈이든지 찾아낼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종살이는 애굽에서의 노예생활보다도 더비통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주인들은 더잔혹할 것이고 그들의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이일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그들의 해방이 애굽으로부터의 해방보다 그들에게 더욱 환영받으리라는 약속(14,15절)에 암시되어 있다. 애굽에서의 그들의 종살이는 점진적으로 되어진 것이었다. 반면에 바벨론의 포로생활은 일시에, 온갖 가중되는 두려운 상황과 더불어 임하였다. 애굽에서 그들은 고센이라는 소유지를 가졌으나 바벨론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굽에서는 쓸모있는, 유익한 종으로 여겨졌으나 바벨론에서는 혐오의 대상인 포로들이었다. 이심판에는 한목소리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징계하실때, 그들을 가르치신다. 이채찍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권면하신다(20절). 인생이 어찌 신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그가 집행하시는 심판에 의해 나타내실 것이다. "바로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리리라. 얼마나 멀리까지 이르를수 있으며 얼마나 깊숙이 상처를 줄수 있는지 알리리라."
(2)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자비를 예비하고 계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낯선 땅으로 쫓아내시리라고 가혹한 어조로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거기에 즉각적으로 위로의 말씀이 뒤따른다.
1) 보라 날이 이르리니. 곧 즐거운 날들이요, 그들을 흩으셨던 바로 그손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는 때이다(14,15절). 그들은 쫓겨남을 당하지만, 완전히 버려지거나 잊혀지지는 않는다. 내가 그들을 그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그리고 그곳에 정착시키리라." 뒤이어 나오는 말씀(16절)은 약속으로 해석될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부들과 사냥꾼들, 곧 메대인과 바사인들을 부르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로하여금 뭇나라에 흩어져있는 유대인들을 찾아내어 고국으로 돌려보내게 하실 것이다.
2) 바벨론에서의 해방은 애굽에서의 해방보다 더 기념할만한 것이 될것이다. 새로운 자비는 너무도 놀랍고 반가와서 이전의 기억들을 지워버릴 정도가 될것이다. 이스라엘의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은 '힘과 능으로' 행해졌으며 바벨론에서의 구출은 만군의 여호와의 '신으로' 행해졌다(슥 4:6). 이일에 있어서 애굽에서의 종살이에서보다도 바벨론 포로생활에 있어서 사유하시는 자비가 더욱 많았음은 전자에서보다도 후자에 그들의 죄에 대한 형벌이 더많았기 때문이다.
3) 포로생활에서의 해방은 복된 개혁을 수반할 것이며 그들의 우상숭배로 향한 마음을 치료하고 돌아오게할 것이다. 그들은 그 '미운물건'으로 저희 자신의 땅을 더럽혔었다(18절). 그러나 그들이 그행위에 대하여 징계받았을때 그들은 하나님앞에 나아와 스스로를 낮출 것이다(19-21절). 그들은 이방인들의 개심으로인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일깨워질 것이다. "열방이 땅끝에서 주께 이를 것이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땅히 가야하지 않겠는가?" 선지자는 이와같은 소망으로 자신을 위로한다.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이시여. 내가 이제 편안하나이다. 주께서 나로하여금 땅끝에서 주께 이를 허다한 무리들, 유대인 참회자들과 이방인 개종자들을 미리 보게 하셨음이니이다." 그들은 조상의 죄에 대하여 비통해하고 있었다. "우리 열조의 계승한바는 허무하고 망탄하고 무익한것 뿐이니이다. 우리는 열조가 그들의 우상숭배로 기만당했음을 이제 알수 있나이다. 우상은 그것이 한약속을 이루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니 우리가 더이상 그것과 무슨 할일이 남아있겠나이까?" 그들은 저희의 우상숭배에 대하여 스스로 따져볼 것이다. 죄가 지니고있는 총체적인 불합리에 대하여 이성적으로 깨닫고 참회함으로써 비롯된 개혁은 오래 지속되어질 가능성이 높다(20절). 그들은 여기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될 것이며 그의 손에 대하여 알게된 것으로인하여 또한 그의 이름을 알게될 것이다(21절). 체험을 통하여 알게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한 손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더올바르게 알려주는 것은 없다.
4) 포로생활에서의 저희의 해방은 메시야께서 행하실 큰구원에 대한 상징과 비유가 될것이다. 그는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하실' 것이다.

# 핵심
16:1-13
행위계시를 통해 임박한 멸망을 경고하고, 그원인이 유다의 죄악에 있음을 강조한다.
슬플때 떡을 떼는 행위(16:7)
상을 당한 자의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은 부정하게 여겨졌다. 그러므로 초상집에 모인 고인의 형제와 친척들을 위해 이웃사람들이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었다(겔 24:17). 유다 백성가운데 이런 풍습이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철저한 파멸이 임할 것임을 뜻한다.

# 묵상
상징이 되는 선지자의 삶 ( 16:2-4 )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이땅에서 아내를 취하거나 자녀를 두지말라고 명하신 이유는 재앙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멸망당하며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갈 것이므로, 예루살렘에 정착하기위하여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낳는 행위는 더욱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종말의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그날에는 아이밴 자와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4:19).
상가에 들어가지 말아야하는 이유 ( 16:5 )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한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죄악으로인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므로 죽은 자를 조상하고 유족들을 위로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역시 곧 죽음에 처해질 존재이므로 타인을 위로할 처지가 못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멸망의 원인 ( 16:10-12 )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멸망당하게 된 까닭은, 열조가 다른 신을 끌어들이고 하나님의 법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여 마음의 강퍅함에 따라 행하고 하나님을 청종치 않았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긴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재앙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까닭없이 노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법을 청종치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함으로 심판을 받았듯이, 오늘 우리도 이스라엘과 같은 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바벨론 군대에 대한 비유 ( 16:16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많은 어부와 많은 포수’에 비유하셨습니다. 즉 어부가 그물로 고기를 잡듯이 유다 백성을 잡을 것을 뜻하며, 사냥꾼이 짐승을 잡듯이 유다 백성을 잡을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범죄한 유다에게 내려질 심판 ( 16:16-21 )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그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그들의 행위대로 보응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범한 죄에 대해 배나 갚으시겠다고 했으며 마지막으로는 범죄한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여호와로 알게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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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유다에 내릴 심판 15:1-9
본문말씀에 나오는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이렇게 비장하게 표현한 것은 다른 어느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선지자는 그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었으며 개중에 그와 함께하는 자들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렇지만 심판의 유예는 얻지 못하였으며, 심판을 완화시키지도 못하였다.
(1) 이 혹독한 판결이 근거를 두고있는 죄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므낫세때문이며 그가 예루살렘에서 행한 일때문이었다(4절). 그일이 무엇이며 그일로인해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것을 우리는 열왕기에서 볼수 있다(왕하24:3,4). 그것은 그의 우상숭배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음으로' 인함이니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다.' 또한 그것은 그들의 현재의 상태, 곧 회개치 않음을 참작해서였다. 그들의 죄가 묘사되고 있다(6절). 네가 나를 버렸고. "나의 일과 내게 대한 너희 의무를 버렸도다. 네가 내게서 물러갔으며 마땅히 되어져야할 상태와 정반대가 되었도다." 또한 그들의 회개치않음이 묘사되고 있다(7절). 그들이 그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의 강퍅한대로 좇아 행하는 길에서 다시 하나님의 명을 좇는 길로 돌이키지 아니하였다. 곁길로 나아간 자들이 돌이키기만 한다면 거기에는 자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역을 고수하는 자들이야 무슨 은총을 기대할수 있겠는가?
(2) 그 내려진 판결은 멸망이었다.
1)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 내 마음은 이백성을 향할수 없나니(1절).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앞에서 쫓아내치라. 내가 그들과 더이상 씨름하지 않겠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혈기가 아닌 공의로운 거룩한 분노로인한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행해지는 어떠한 중보도 용인치않으실 것이다(1절). 모세와 사무엘이 내앞에 섰다할지라도, "나를 그들과 화해시키려는 기도와 제사로 섰다할지라도 나는 그들을 은혜가운데로 받아들일수 없노라."
3) 하나님께서는 그들 모두를 멸망의 심판으로 정죄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의 목전에서 쫓아내치실때 '그들이 어디로 나아가겠는가'(2절).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나아갈지니라. 그것은 다윗이 처했었던 것과 같은 선택이다. 그는 그 선택으로인해 큰곤경에 빠졌었다(삼하 24:14). '포로됨'은 마지막에 나오고 있다. 혹자는 그이유를, 사로잡히는 것이 지속되는 불행이어서 무엇보다도 가장 혹독한 심판이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칼의 심판이 다시 반복되고 있으며(3절) 그것은 다른 네가지의 멸망시키는 것중의 첫째로 되어있다. 칼을 피하는 자들이 역병이나 기근이나 포로됨으로 멸절되듯, 칼로 엎드러지는 자들은 하나님의 보수하심으로 멸절될 것이다. 성에는 '찢는 개'가 있을 것이며 들에는 '삼켜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공의를 앞질러 달아나리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은 '세계 열방중에 흩어질' 것이다(4절). 이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었던 가인과 같은 처지이다.
4) 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엎드러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6절). 하나님께서는 한참 숙고하신뒤에 그들을 치실 것이며 매우 깊은 상처를 입히실 것이다.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6절). 그들의 패역한 고백으로 말미암아 무한한 인내심조차도 한계에 이르게된 것이다. 이제 그는 더이상 유예를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조국이 그들을 내쫓고 있으며 그들을 막 토해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땅의 여러 성문들로, 그들 주변의 열방의 성들로 몰아넣으실 것이다. 그자식을 끊어서. 그들은 다음 세대가 자기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주리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백성을 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느부갓네살왕이 여기에서 '대낮에 훼멸할 자'로 불리워지고 있다. 곧 발각될까 두려워하는 밤도둑이 아니라, 두려움없이 철저히 치고 멸절 시키는 자로 나타난다. "내가 청년, 곧 훼멸할 자를 어미에게로 데려갔노라"(혹자는 이렇게 읽는다). 이렇게 읽는 이유는 느부갓네살이 즉위 원년에 처음으로 유다를 침략하였는데 그때에는 청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는 편을 택한다. "내가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까지도 치게 하였노라." 다시말해서 수많은 청년들의 가족을 가지고 있은 어미 성 예루살렘을 치게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로하여금 그성을 덮치게 하셨다. 훼멸하는 전권이 그에게 맡겨졌다. 그러자 '졸지에 어려움'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다. "내가 순찰자(단 4:13,23)와 두려움을 그들에게(예루살렘에게) 졸지에 임하게 하겠노라" 갈대아 군사들은 순찰자(watcher, 우리 성경에는 '치는 자'라고 쓰여있음-역주)라고 불리워졌다(렘 4:16). 무서운 살육이 본문에 묘사되고 있다. 아내들은 저희의 남편들을 빼앗긴다. 과부가…바다 모래보다 더많아졌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내앞에 더많아졌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비록 남편들은 그의 공의로우신 칼로인해 멸절되었다고해도 그 가련한 과부들은 그의 자비로우신 팔안으로 모아졌다. 그는 '과부의 하나님'이시라는 그의 명예로운 칭호로 그렇게 하셨다.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을 빼앗긴다. 자식들이 살육당했을때 그어미는 '쇠약하여 기절한다.' 어미의 생명은 자식의 생명과 한데 묶여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녀의 해는 아직 대낮일때에 떨어졌다. 혹자는 이 쇠약한 어미를, 가련한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몹시 슬퍼하듯이 그렇게 애절하게 거민들의 죽음을 애곡하는 예루살렘으로 해석한다.
5) 그들은 불쌍히 여김받지 못한채 엎드러질 것이다(5절).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희 하나님께서 그목전에서 너희를 쫓아내치실때 너희 원수도 너희 친구도 너를 동정하지 않을지라. 오, 이스라엘아, 네가 스스로 멸망하였도다."

Ⅱ. 예레미야가 받을 축복 15:10-14
예레미야는 이제 공적인 사역에서 물러나 그의 휴식처로 돌아왔다. 본문말씀은 그와 하나님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이다.
(1) 선지자는 그의 사역중에 부딪쳤던 수많은 좌절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다(10절).
1) 그는 수많은 반박과 반대에 부딪쳤었다. 그는 '다툼과 침을 당할 자'이었다. 성읍 사람들이나 지방 사람들이나 모두 그를 대항하여 싸웠으며 그를 훼방하고자 저희가 할수 있는 온갖일을 다하였다. 그는 평강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툼의 사람이 되었다. 다툼을 거는 사람이 아니라 다툼을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강을 위하여 있었지만 그가 입을 열어 말했을때 사람들은 싸우려고 하였다. 그들이 그와 맞서 싸운 진정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들의 영혼에 대한 그의 신실함 때문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파멸을 가져오는 그들의 죄를 지적하였고 그파멸을 피할방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에게 격분하였다. 화평의 복음은 분쟁을 낳는다(마 10:34,35;눅 12:49,51). 그리하여 이러한 것이 예레미야를 아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라고 부르짖었다. 그는 모친이 그를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았다고 원망하고 있다. 이는 그의 처지에 대한 애절한 통곡이었다. 가장 화평한 자조차도 종종 다투는 사람이 된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이웃들과 화평하게 지낼수 없다고해도 마음의 안정을 잃고 안절부절할정도로 그렇게 동요되어서는 아니된다.
2) 그는 모욕적인 언동과 비난을 수없이 겪었다. 그들은 그를 분쟁을 일삼는 자 내지 불화를 심는 자 그리고 선동자로 낙인찍었다. 그들은 마땅히 그를 축복해야 했으며 그로인하여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를 저주했으며 그사자를 가증스러운 인물로 만들기위해 그들이 할수 있는 온갖행동을 다하였다. 그러나 혹시 예레미야가 어떤일로 그들을 도발시켰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수도 있다.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10절). 여기에서 이말은 이세상에서 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은 종종 분쟁과 다툼에 휩싸이곤 하게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선지자로 부르심받은 이래로 예레미야가 세상적인 문제들에 스스로 휩쓸리지 않았다는, 그의 신중함에 대한 한 예증이었다. 그는 세상적인 일에 있어서 어떤 이익을 꾀하려했다는 의심을 추호도 받지않고자 했다. 그는 돈을 뀌어주지 않았다. 그는 고리 대금업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돈을 꾸지도 않았다. 장사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에게는 먹여살려야할 아내도 자녀도 없었음을 보게된다(렘 16:2). 그럼에도 그는 그시대의 불의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의 반감을 사고있었다.
(2) 하나님께서 이불평에 대해 답하신다.
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가 폭풍을 뚫고 나아갈 것이며 마침내는 편안하게 되리라고 보증하신다(11절). 너로 복을 얻게할 것이며. "만일 내가 너를 보살피지 않거든 나를 결코 신실한 자로 생각지 말라. 내가 진실로 네 인생의 남은 날을 복되게 하리라. 네 여생은 이제까지 지내온 날들보다 훨씬 안락하게 되리라." 갈대아 주석은 "너의 종말이 복되리라"라고 읽는다. 예레미야는 또한 그가 미리보게된 공적인 심판의 임박함에 대해 불안해 했던 듯하다. "나의 친구들도 이같이 나를 핍박하건데 나의 원수들은 어떠할 것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음의 약속으로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신다.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곧 네 주변의 모든 것이 황폐하게 될때에 그들로 네게 탄원하게 하리라. 이약속은 느부갓네살왕이 도성을 취한후 시위대장에게 예레미야를 선대하며 그가 말하는대로 모든 것을 행하라고 명했을때에 성취되었다(렘 39:11,12). 그다음의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12절)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일찍이 예레미야를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시겠다고 했던 약속(렘 1:18)과 비교되는 것으로서, 그를 위로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으로 보여진다. 그들은 계속하여 예레미야와 충돌하였으며 쇠처럼 억세고 단단하였다. 그러나 위로부터 내려오는 권능과 용기로 무장한 예레미야는 천연적으로 강한 북방의 철과 같았으며 인위적 기술로 연단된 놋과 같았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그를 이기지못할 것이었다(참조. 겔 2:6.3:8,9).
2)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과 핍박자들이 폭풍속에서 잃어버린바 되어질 것이라고 그에게 보증하신다(13,14절).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선지자에게로부터 백성들에게로 말씀을 돌리신다. 12절 말씀은 그들에게도 또한 적용될수 있다.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그들의 용맹과 힘, 그리고 가장 굳세고 활기있는 그들의 수고라고해도, 북방의 철과 놋처럼 굽혀질수 없으며 공략될수도 없는 하나님의 계획 또는 갈대아 군대와 맞설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에게 저희의 파멸의 운명을 들려주라." 네 사경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할 것이며. 선지자는 가난하였다. 그에게는 탈취당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재산도 보물도 없었다. 그러므로 대적들은 그를 잘 대우해줄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든 땅으로든 많은 재산을 가진 자들은 저희의 소유로인하여 죽임당하게될 것이다. 이나라의 방방곡곡, 요소요소, 가장 먼곳에 있는 지역조차도 국가적인 범죄에 빠졌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들 모두가 셈해지게될 터이었다. 너로 네 대적과 함께 네가 알지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14절). "개선 용사가 된 그들이 너를 자기 땅에 끌고갈 것이며 너는 거기에서 아무런 위안도 기대할수 없으리라."

Ⅲ. 예레미야의 호소 15:15-21
(1) 선지자는 겸손히 하나님께 아뢴다.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15절). "주께서 나의 신실함을 아시나이다.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있나이다. 주께서는 나의 고통을 아시오나 사람들은 이를 경시하나이다."
1)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15절).
①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편을 살피시고 염두에 두시기를 기도한다.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나를 선히 여기소서."
②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힘과 위로를 주시기를 간구한다. 나를…권고하사.
③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도한다.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아니 나를 박해하는 자로부터 나를 변호하소서." 선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보다 지나치게 보복해주시는 것은 바라지않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의로운 사람이며 그가 섬기는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세상에 확신시키기 위한 그무엇인가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④ 하나님께서 자기를 아직 살려두시기를 간구한다.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의 오래참으심으로 인하여 나의 날을 길게하소서." 비록 격분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탄생을 탄식하긴 했었지만 선지자는 여기에서 자신의 죽음의 재촉을 원하지 않는다. 생명은 본연의 즐거움이며 유익한 사람의 생명은 은혜로운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그의 원수들과 박해자들, 그리고 중상자들에게 맞서는 자비와 구원을 하나님께 청원한다.
① 하나님의 명예가 이일에 걸려있었다.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당하는줄을 아시옵소서. "또 그일을 알리옵소서." 만일 우리가 선한행위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의를 인하여 온갖 욕을 먹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와 아울러서 우리의 명예를 변호하시리라고 소망해도 좋다. 같은 의도로 16절에서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② 이일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걸려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위임받았으며 그말씀을 자신의 심령으로 체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사뿐 아니라 은총도 받을만한 자격이 생겼다.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이 말할수 있게되었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내가 주의 말씀을 발견하였사오며 그말씀이 나에게 유익하였나이다. 내가 그것을 맛보았을뿐만 아니라 먹었나이다. 즉 그것을 완전히 받았나이다. 주의 말씀을 내가 환영했사오니, 굶주린 자가 음식을 반기듯 하였나이다." 때때로 선지자에게는 말씀의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이 주어진다(겔 2:8;계 10:9).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그 어떤것도 이보다 더 즐거울수는 없었나이다." 이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그가 전해야했던 메시지 그자체에 대해서이다. 비록 그가 자신에게 소중한 조국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다해도 그또한 조국의 파멸과 깊이 관련되지 않을수 없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본연적인 조국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의에 삼켜진바 되었으며, 이같은 진노의 메시지조차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때문에 그에게는 족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처음에 백성이 경고를 받아들여서 심판을 미연에 방지하게 되리라는 소망으로 즐거워하였다.
둘째, 이메시지를 전하도록 그가 위임받은 임무에 대해서이다. 그가 소명을 받은 일은 어떤 세속적인 유익이 수반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멸시와 박해를 받기쉬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양식은 그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요 4:34).
셋째, 그가 즐거워하는 연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도우시며 그의 일에 있어서 그를 인정하시겠다고 하셨던 약속에 대해서이다(렘 1:8).
③ 후에는 거의 만족을 느끼지 못했을지언정 그는 진지함과 자기 부인으로써 맡은바 임무에 전념하였었다(17절). 그는 많은 시간을 자기 골방에 '홀로 앉아서' 보냈다. 이는 그를 힘있게 감동시키사 그의 일을 행하게 하신 '주의 손을 인하여'서이다(겔 3:14).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언제나 나를 시름에 잠기게 하는, 이백성에 대한 진노의 메시지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그가 자기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즐거움이 거의 없었다는 바로 그것이 그의 불평이다. 그일은 처음에는 마음의 즐거움이었지만 나중에는 그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는 백성의 완악함과 그들가운데서 자기의 수고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음을 괴로워하면서 '홀로 앉아' 있었다.
④ 그는 매우 비감적으로 간언하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약속에 자신을 내어던진다(18절).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내게 임재를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대하여 속이는 시내같으시리이까? 아니, 나는 주께서 그렇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아나이다. 하나님은 거짓을 말하는 인간이 아니오며 생명의 근원이신 주께서는 자기 백성에 대해 결코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같지 않으시리이다."
(2) 하나님께서는 이간언에 대하여 은혜롭게 응답하신다.
1)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를 인정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되어야 한다.
① 그는 냉정을 되찾고 다시 자기 일을 기꺼이 수행해야 한다. 그는 돌아와야만 한다. 저 불신하는, 불만이 담긴 생각과 격정을 떨쳐버리고 그런 것들이 이끄는대로 좇아서는 안된다.
② 그는 자기 일에 있어서 충실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혀야 한다. 비록 예레미야를 불성실하다고 비난할 이유도 전혀없었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마음이 신실함을 아셨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경고를 그에게 주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셨다. "네가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해야 하느니라." 의인은 아무리 비천하고 궁핍한 자리에 있다고하더라도 귀한 자이다. 악인은 아무리 부요하고 권세있는 자리에 있다고하더라도 천한 자이다. 우리의 회중에는 이러한 자들이 함께 섞여있으며 같은 타작마당 위에 밀과 겨가 함께 널러져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이름으로써는 구별할수 없다. 그러나 성품으로써는 그들을 분별할수 있다. 그들 각자에게는 받아야될 몫이 있다. 즉 귀한 성도들은 위로를, 비천한 죄인들은 응분의 두려움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19절). 즉, 그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먹이기위하여 그의 설교에서 할수 있는한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네게서 도망친자들, 그들을 네게로 돌아오게 하라. 그리고 재차 생각하여 타협하라. 그러나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서는 안되니라. 그들을 칭찬하지 말며 그일을 나의 말이 규정한 것이상으로 그들에게 편리하게 해주려고 생각지 말라."
2)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약속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그가 이를 쾌히 입증하면 하나님께서는 이같이 해주실 것이다.
①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평정케하실 것이며 현재의 그의 심령의 동요를 가라앉히실 것이다.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네 영혼을 소생시키리라"(시 23:3).
② 하나님께서는 그로하여금 선지자의 일을 수행하게 하실 것이다. "주인에게 종이 하듯 내게서 가르침을 받도록 내가 너를 내앞에 둘것이라. 사신이 자기를 보낸 왕의 입이듯이 너는 이백성에게 나의 메시지를 전하는 나의 입이 될것이라."
③ 그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당면하는 많은 곤란을 타개해 나갈만한 힘과 용기를 지니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심령은 지금처럼 나약해지지 않게될 것이다(20절). 내가 너로 이 백성앞에 견고한 놋성벽이 되게하리니. "폭풍이 몰아치고 격심하게 때려도 네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너는 어떤 죄된 굴복으로도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 은혜로 너를 무장시켜 주는 나, 곧 너의 하나님을 경건한 결심으로 신뢰하라. 겁을 먹지말라. 내가 너를 담대하게 하리라." 예레미야는 자기가 '다툼을 당할 자'로 났다고 불평하였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렇게되는 것을 각오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너를 칠것이나 너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
④ 그는 그의 전능하신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을 모시게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있는 자들은 가장 무서운 대적도 능히 다룰만한 지혜와 능력을 지니신 구원자를 모시고 있는 것이다(21절). 겉보기에는 매우 두려운것 같으나 선한 사람에게는 조금도 해를 끼치지 못함이 입증되는 일들은 허다하게 많다.

# 핵심
15:10-21
백성들을 위해 간구한 예레미야의 중보기도를 거절하신 하나님이 좌절에 빠진 예레미야를 위로하시는 내용이다.
모세와 사무엘(15:1)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은 민족을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다는 공통점도 지닌다. 모세가 범죄한 민족을 위해 진노를 거두시도록 탄원했을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며(출 32:11-13; 민 14:13-19), 사무엘역시 백성을 위해 기도했을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사 진노를 거두셨다(삼상 7:5-9; 12:23).

# 묵상
중보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 15:1 )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사무엘이 하나님앞에 선다고할지라도 이스라엘을 용서할수 없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했을때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게 했습니다. 사무엘역시 하루도 쉬지않고 백성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삼상7:5-11; 12:12). 그런데 이처럼 유명한 중재자가 오더라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용서치 않겠다고 하신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의 죄가 돌이킬수 없을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중에 되어지는 최후의 심판은 피할수도, 변경할수도 없으며 행한대로 그심판을 받게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는 예레미야 ( 15:10 )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욥처럼 자신의 출생일을 저주했습니다(20:14; 욥3:1). 출생일은 본래 가장 복된 날이요 기쁜 날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악이 아닌 알수 없는 이유로인해서 고통을 당할때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을 저주하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악을 행하지 않았으나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것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죄로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유다 백성의 운명으로인해서 눈물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 15:18 )
팔레스틴에는 겨울에 비가와서 시내가 흐르나 여름에는 물이 말라 그시내가 없어지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있던 그시내를 기억하고 찾으려는 사람들은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자신에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같다는 예레미야의 말은, 박해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종이 외치는 애절한 한탄입니다. 선지자에게는 그의 고통이 끝없이 지속되며 도저히 치유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말라버릴 시내가 아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간구하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 세가지 ( 15:20, 21 )
놋성벽이 되게 하겠다는 것, 내가 너와 함께하며 아무사람도 너를 이기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 악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곤고한 상태에 있는 예레미야를 위로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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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가뭄으로인한 호소 14:1-9
(1) 본문에는 재난을 슬퍼하는 말이 나온다. 하늘이 놋과 같이되어 이슬 한방울 내리지않으며 땅은 쇠와 같이되어 아무런 산물도 내지않는다. 슬픔과 혼란이 만연하였고 그땅에 있는 백성들은 온통 눈물에 젖었다. 저희 죄로인하여서가 아니라, 비가 오지않음으로 인해서 '유다가 슬퍼한다'(2절). '성문의 무리가', 곧 성문으로 드나드는 모든 사람들이 '곤비하였고' 필요한 물자의 결핍과 계속될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창백하게 보였으며 갈수록 연약하게 되었다. 성문의 무리들은 이제 음울한 분위기아래 놓여있다. 거민들은 다른나라들로 양식을 구하기위해 떠나고 있다. 문에 앉아있는 자들도 곤비케 되었다. 땅에 앉아 애통하니. 그들은 상주처럼 애곡하고 거지처럼 땅바닥에 쓰러진다.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즉, 성민(성의 식량물자는 들에서 나는 것으로 충족되기때문에), 또는 전국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비를 위해 기도하고자 예루살렘에서 모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도의 부르짖음이라기보다는 고통의 절규이었다고 볼수 있다. 그땅의 고관들은 이심판을 느꼈다(3절).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보다 비천한 사람들, 그들의 종들은 물을 구해오도록 보냄받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은 없었다. 그들은 '빈그릇으로 돌아왔다.' 샘들은 그곳을 채워줄 비가 오지않아서 죄다 말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그 상전들)은 '부끄럽고 근심하였다.' 농부들은 가뭄에 가장 즉각적인 타격을 받았다(4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왜냐하면 땅들이 쟁기가 들어가지 않을정도로 메마르고 단단하게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할수 없어 놀고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농부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얼마나 직접적으로 의존하고 있는지 주목하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밭고랑에 물을 대주시지 않으면 소망을 가지고 쟁기질을 할수도 씨를 뿌릴수도 없다(시 65:10). 들짐승들의 경우조차도 참으로 불쌍하였다(5,6절). 유다와 예루살렘은 죄를 지었다. 그렇지만 암사슴과 들나귀들, 그것들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암사슴들은 특히 그새끼들에게 자애스러운 동물이다. 그런데 그본성과는 반대로 그들은 자기 새끼들을 내어버렸다. 그것도 그새끼들이 어미를 가장 필요로하는 시기에, 다른곳으로 풀을 찾으러 가기위하여 그리하였다. 풀을 찾지못하면 젖을 빨릴수 없기때문에 새끼들을 내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암사슴의 슬픔은 자신을 위한 풀이 없다기보다는 새끼에게 줄것이 없어서였다. 이사실은 당연히 가족들을 위하여 예비해두어야할 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탕진해 버리는 자들을 부끄럽게할 것이다. 들나귀들까지도 가련한 마음을 들게하였다. 황야는 이제 그들이 거하기에는 너무도 뜨거웠으며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한 가장 높은 '자산위'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의 공기가 매우 시원하였으므로 그들은 끊임없이 숨을 헐떡이는 동물인 '시랑같이' 바람을 들이마신다. 그들의 '눈이 아득하여 하며' 기운역시 아득한 것은 거기에도 풀이 없기 때문이다.
(2) 죄를 애곡하고 재난에 대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말이 나온다. 백성들은 기도를 시작하지 않지만 선지자는 여기에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저희 스스로 기도하게끔 그들을 자극하려고 한다(7-9절). 이기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죄가 겸손히 고백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혹은 불친절하게 대하고 계시다고 그와 쟁변한다면 우리의 죄악이 우리의 부당성을 증거할 것이다.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7절). "그리고 사면되기에는 너무도 극악하나이다. 이는 그것들이 당신을 거스린 죄들이기 때문이니이다."
2) 자비가 간절히 구해지고 있다.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일하소서. 참회자와 걸인이 되었을때처럼 그들은 그일을 하나님께 의뢰한다. '주의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삿10:15). "우리 자신들에게는 내세워 청원할만한 것이 전혀 없나이다. 오직 당신께 달려있나이다." 이기도에는 또다른 청원이 담겨있다(9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3)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기대가 참으로 비장하게 탄원되고 있다(8,9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분안에서 자비가 곧잘 심판에 맞서서 즐거이 부여되곤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희망을 두라고 그의 백성을 격려하셨었다. 매번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반석,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로 부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소망'이 되셨었다. 그래서 그들은 청원한다. "주는 오히려 우리중에 계시나이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임재해 계시다는 특별한 징표를 가지고 있나이다. 주의 성전, 주의 법궤, 주의 신탁이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는 자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않으실 것을 믿나이다. 우리는 주의 것이오니 우리를 구원하소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구원하시기위하여 나타나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그들을 슬프게 하고있다. "애굽인들이 무어라 하겠나이까?"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자 구원자께서 그들을 유념치 않으시도다. 그는 그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곧 낯선 타인같이 되었으며 저희의 이해와 권익에 상관치 않으시도다. 그의 성전을 일찍이 자기의 영원히 쉴곳이라고 부르셨었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아니하도다. 그곳에서 그는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행하시도다." 원수들은 한때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할 능이 없는고로 광야에서 죽게 내버려두었다고 말했었다(민14:16). 그런데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호와의 지혜와 능력이 쓸모없게 되었도다. 그는 마치 '놀라 벙벙하는 자'(비록 인간의 이성을 가졌으면서도 그이성의 한계점에 부딪친 자)같으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같도다." 이같은 말들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대한 가장 참을수 없는 모욕일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우리중에 계시다'고 확신하는 하나님께서 왜 '거류하는 자', 낯선 타인같이 되시나이까? 여전히 능력이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아직도 구원하실수 없는 것이니이까?"

Ⅱ. 미혹한 자와 미혹된 자의 파멸 14:10-16
본장에 나오는 하나님과 그의 선지자간의 언쟁은 마치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소유주와 과원지기가 벌였던 변론과 같다(눅13:7). 소유주의 공의는 그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정죄한다. 반면에 과원지기의 온후한 마음은 연기해주도록 중재한다.
(1) 하나님께서는 청원을 물리치시며 '이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신다(10절). 그는 '나의 백성에 대하여'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데, 이는 그들이 그와 맺은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죄를 범하였으며 그것을 거두지 않을수 없게끔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시켰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선지자에게 그들이 용서받기에 적합치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선지자는 그들의 '타락함이 많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돌이킨다면 아직도 희망은 남아있었다. 그러나 '이백성'은 되돌아올 기색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으며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였다.' 그들이 타락함은 그들의 즐거움이 되었으므로 이제 그들의 수치가 되어 마땅하였다. 그들이 어그러진 길로 나아간 것은 불가피한 실수때문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인해 하나님의 은총이 박탈된 것이다. 그들은 경고를 듣지않았으며 '그발을 금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지금 그들에게 논쟁하고 계시는 일이다. 그가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비내려 주시기를 거절하셨을때, 그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죄를 벌하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그로말미암아 그들의 옥토가 이처럼 염밭이 된것이다. 비록 그들이 스스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번제와 희생제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받지 아니하신다'(10절). 즉, 하나님은 거기에서 어떠한 즐거움도 취하지 않으신다(이렇게 해석할수 있다). "그들이 금식할지라도(12절, 이는 회개와 개혁의 적절한 표현이다), 그리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이는 중보자를 믿는 신앙의 표현으로 의도된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과거에라면 으례히 열납되었을 그러한 수단으로 기도드릴지라도, 그들이 겸손한 마음, 회개하여 새로워진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고 있기때문에 내가 그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그것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들 개개인도 또한 그들의 행위도 받지 아니하리라." 이백성은 선지자의 기도를 통해 받을수 있는 모든 유익도 빼앗기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에게 되풀이하여 명해진 금지의 의미이다(11절). "전에 말하였던바와 같이 너는 이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말라"(7:16;11:14). 이것은 백성들에 대해 선지자가 호의를 표현하는 것에 관한 금지가 아니었다. 백성들이 저희의 귀를 돌려 율법을 듣기를 거부하는한 그기도로 인하여 어떤 유익을 얻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금지였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씀이 뒤이어 덧붙여진다(12절). 내가…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2) 선지자는 백성들의 완악함에 대해 변명함으로 다른 청원을 제기한다. 즉, 하늘로부터 위임받았다고 자처하는 선지자들이 평화를 보장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아첨하였다는 것이다(13절). 그는 애통해하면서 그말을 하고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이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나이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당신께로부터 나온듯 말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계속하여 이곳에서 머무르게 하실 것이며 '확실한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그들은 말을 전했나이다. 하지만 상대는 많음에 비해서 나는 혼자일 뿐이니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그들을 가련히 여기시고 구하여 주옵소서. 그들의 인도자가 그들로하여금 실족하게 하고 있나이다." 이변명은 만일 백성들이 이전에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를 받지 않았었다면 어느정도 비중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이청원을 물리치실뿐만 아니라 눈먼 인도자들과 눈먼 추종자들 모두가 함께 구덩이에 빠지게되리라고 정죄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입에 발린 말을 용납하지 않으신다(14절). 선지자들이 내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예언하라는 위임을 전혀 받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저희 자신의 생각으로 맞서는 자들은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행한다. 그리고 그것은 저희의 파멸이 될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자들에게 판결을 내리신다(15절). 선지자로서 그들은 저희 스스로가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칼과 기근이 이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고 백성들에게 보증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 자신들이 칼과 기근으로인해 멸절될 것이다. 그 거짓된 예언을 받은 백성들, 기꺼이 자원하여 그예언에 속아 넘어간 백성들은 기근과 칼로인하여 죽을 것이다(16절). 저희의 시체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매장되지도 못한채 널려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을 그위에 부을'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들의 악에 대하여 징벌하실 것이다.

Ⅲ. 예레미야의 탄원 14:17-22
유다와 예루살렘이 처해있는 비참한 상황이 본문에서 선지자가 애곡하는 이유이며(17,18절) 동시에 그들을 위해 그가 기도하는 이유이다(19절). 전자와 마찬가지로 후자역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17절의 말씀, '너는 이말로 그들에게 이르라'는 말씀은 애곡을 가리킬뿐 아니라 중보도 가리키고 있다. 그리하여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선지자에게 명하셨던 이전의 지시를 철회하셨음을 뜻하는 것이다(11절).
(1) 선지자는 자기 조국의 멸망을 슬퍼한다. 예레미야는 그사실을 마음속에 생각해보아야할 뿐만아니라 그들에게 말해야만 했다. 내 눈이…눈물을 흘리니(17절). 이렇게하여 그는 자기가, 다가오고 있는 칼과 함께 또다른 기근을 미리 보았으며 그것은 그성읍의 포위가 엄중함으로인하여 그러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선지자는 여기에서 마치 갈대아인의 공격에 수반되는 불행을 눈으로 보기라도 한듯이 말하고 있다. 이는 처녀딸 내 백성이 큰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이제껏 있었던 어떤 것보다 크고 중한 파멸과 창상으로 망하리라. 들에는 '칼에 죽은' 시체들이 무수히 널려있으며 성에는 먹을 것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죽어 누운 자들이 부지기수이리라.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거짓말로 백성들에게 빌붙던 거짓 선지자들이나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하던 악한 제사장들이나 모두 추방되었도다. 그들은 포로로 혹은 도망자나 떠돌이로 땅에 두루다니며 알지못하는 낯선 땅에서 도피처를 찾을수 있을까하고 헤매리로다." 혹자는 이말씀을 남은 무리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참된 선지자들, 에스겔과 다니엘에 대한 언급으로 해석한다. 선지자의 눈은 장차될 이일을 생각하여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렇게하여 그는 백성들이 저 무서운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만일 하늘로부터 보장만 얻는다면 자신도 그들에게 기꺼이 평강의 메시지를 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혹시 깨달을까 하였다.
(2) 선지자는 백성들을 위해 중보역할을 하고자 일어선다. 그들중에는 혹간 그의 신앙에 함께 참여하려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의 기도에 '아멘'하고 인치려는 자들도 있었다.
1) 그는 저희가 처한 형편에 관하여 겸손히 하나님께 간구한다(19절).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기대는 좌절되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유다가 그의 소유임을 공언하셨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제 그가 '유다를 온전히 버리신'듯이 보였다. 그들은 시온이 사랑받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이제 그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심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에서 드려지는 예배까지도 싫어하심을 알았다. 여타의 모든 그들의 기대들과 어긋나 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을 '치시고', 그상처들이 헤아릴수 없었건만 그들을 '치료하지 아니하셨다.' 그들은 '평강을 바랐다.' 폭풍뒤에는 으례히 고요가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치료받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숨쉴 시간조차 얻을수 없이 오직 '놀람을 볼' 뿐이었다. "보소서. 평강이 오리라고 기대하던 문에서 놀람, 곧 환난을 보나이다. 이제 주께서는 노하심으로 자비를 기억지 않으시려나이까?"
2) 그는 죄에 대한 참회의 고백을 하고있다. 이는 그들 모두가 말해야만 하는 것이었지만 이말을 하는 자는 거의없었다(20절). "우리가 우리의 악, 우리 땅에 가득찬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는 그들의 죄를 그대로 따랐나이다. 우리가 주께 득죄하였음을 알며 인정하나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일에 있어서 공의로우시나이다. 하지만 우리가 죄를 자백했으므로, 우리는 죄를 용서하시는 당신의 신실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보기 원하나이다."
3) 그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사해지기를 탄원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호소하고 있다(21절). 그의 청원은 이러하다.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고난을 주실지언정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손으로 우리를 치실지언정 마음으로는 그리하지 마옵소서. 주의 마음을 우리에게서 멀리하지 마옵소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사 자기들을 미워하심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우리가 불리우며 또한 그이름으로 우리가 호소하기 때문이나이다."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을 들어 청원한다. "여호와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할까하나이다. 우리는 수치를 당해 마땅하지만 성전을 훼파하지는 마옵소서. 거기에서 섬겨지던 그이름을 비방할 기회를 이방인들에게 주게될까 함이니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땅에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수 있다. 그들은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하나님께 이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4) 선지자는 하나님께 비를 내려주시기를 간구한다(22절). 그들은 결코 이방인의 우상들에게 간구하지 않을 것이다. 열방의 허무한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자가 있나이까. 이스라엘에 큰가뭄이 들었을때, 곧 아합왕때에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기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바알은 그들을 구해줄수 없었다. 물로 응답하실수 있으셨던 이는 역시 불로써 응답하셨던 하나님뿐이었다.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수 있으리이까.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받지 않고는 비를 내릴수 없다. 왜냐하면 구름의 열쇠를 가지신 이, 하늘의 창을 여시고 자기 거하는 곳으로부터 땅을 적시는 이는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기대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주로부터 구원을 바랄수 있는데 우리가 주께 의뢰해야 하지 않겠나이까? 능히 비를 내리게 할수 있으시며, 능히 소나기를 내릴수 있으신 이가 바로 주가 아니시니이까? 왜냐하면 주께서 이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주께서 그것들을 있게 하셨고, 그러므로 주께서 그것들에 법을 주시며 그것들 모두를 주의 명령아래 두고 계시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 비를 구하리이다(슥10:1). 우리가 적시에 비를 내려주시는 주를 의뢰하리이다."

# 핵심
14:1-15:9
유다 전국을 강타할 가뭄재난을 묘사한 다음, 고통스러워하는 유다 백성을 위한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와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대화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 묵상
이 시기의 역사적 배경 ( 14:1 )
이는 여호야김 왕때의 한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의 가뭄은 전국적으로 극심해서 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당했다고 합니다. 이 가뭄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간구하는 선지자 ( 14:7 )
본문의 의미는 죄가 눈앞에 있어 사람을 죄인이라고 증거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주의 명성과 자비를 위하여 죄인을 사해주십사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결코 사함받거나 의로울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위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실때 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위해 중보기도한 것처럼(출32:11-14; 민14:13-25), 예레미야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백성을 구원해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를 하거나, 다른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합니다(고전10:31).
소용이 없게된 금식과 번제 ( 14:12 )
금식과 번제와 소제는 마음의 죄를 통회하고 용서를 구하기위하여 행해지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회개없이 행해지는 종교의식은 다만 위선이요 신성모독일 뿐입니다. 즉, 통회와 자복과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종교행위는 아무리 가혹한 고행이라 할지라도 그가치를 발하지 못합니다.
평강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 ( 14:14-18 )
예레미야가 평강하다 말하는 선지자들을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고 지칭합니다. 그이유는 그들이 거짓 환상, 곧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기원하는 말만을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의 특성은 사람들 귀에 즐거운 말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경고하는 참선지자에 비해 거짓 선지자들의 말은 백성들의 큰지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메시지였고 백성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평강하리라는 그들의 예언은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예레미야의 중보기도의 근거 ( 14:19-22 )
그근거는 바로 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과 언약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셔서 광야에서 죽게하심이 하나님 이름의 수치임을 근거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기위하여 그리고 이스라엘과 맺으신 주의 언약을 인하여 이스라엘을 사해주실 것을 간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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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썩은 허리띠의 상징 13:1-11
(1) 여기에 한 표적이 나온다. 곧 선지자가 얼마동안 매던 허리띠를 유브라데강 부근의 바위틈에 숨겨둠으로써 못쓰게 만든 표적이다. 예레미야는 얼마동안 베띠를 띠라는 지시를 받았다(1,2절). 혹자는 그가 그것을 옷아래에 메었다고 생각한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11절).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의 옷위에 맨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그것은 관리들이 착용하는 것과 같은 그러한 고운 장식띠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띠를 '물에 두지말아야' 했다. 이는 쉽게 부패되지 않도록 하기위함이었을 것이다. 세례요한과 같이 예레미야도 결코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세마포띠를 띤 그의 모습은 아주 묘하게 보였을 것이다. 이 세마포띠를 얼마동안 사용한후 그는 '가서 그것을 바위틈에 감추라'는 지시를 받았다(4절). 그곳은 물가이었기 때문에 물이 차면 젖을 것이었고 물이 빠지면 다시 마를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같이 되풀이함으로써 이내 썩게될 것이었다. 여러날후에 그는 그띠가 썩어서 너덜거려 아무쓸모도 없이 되었음을 보게되었다(7절). 예레미야 선지자가 유브라데 강까지 이르는 그러한 오랜여행을 두번에 걸쳐 하도록 보냄받았다고 상상하기란 어려울성싶다. 이러한 연유로 이 여행은 환상에 의한 것이었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진다. 그리고 이표적에 대한 설명도 백성들에게가 아니라 단지 선지자 그자신에게만 주어졌다(8절).
(2) 이표적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9-11절).
1) 두가지 점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이띠와 같은 존재였다.
①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으며 그들과 더불어 교제하셨다.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그래서 그를 두르고 있듯이 내가 이스라엘 온집과 유다 온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였노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심으로써, 선지자들을 보내심으로써, 그리고 은총을 베푸심으로써 그들을 자신에게 속하게 하셨다.
②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이 되게 하셨을때, 그것은 그들로 '그의 이름과 칭예와 영광이 되게하려' 하심이었다. 이는 마치 허리띠가 사람에게 아름다운 장식이 되며, 특히 공교히 만들어진 에봇의 띠가 대제사장에게 영화로움과 아름다움이 되었던 것과 같다.
2) 그들은 우상숭배와 그외의 범죄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하나님께 매인 것을 풀었으며 그들 자신들을 땅에, 곧 이방 땅에 매장하였다. 그들은 열방들가운데 섞이었으며 '쓸데없이' 될정도로 그렇게 부패하고 타락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였다.' 그들은 유브라데 강쪽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신들에게 빠져서 저희 자신의 하나님을 섬기기에는 너무도 부패하였다. 그들은 '이 띠', 곧 썩은 띠와 같이 되었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심판으로 그들을 그에게서 떼어내려고 하셨으며 그들을 포로되게 하려고 하셨다. 그들의 모든 아름다움을 훼손시켜 그들을 넝마가 된 허리띠, 곧 무가치한 백성같이 되게하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은 방법으로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교만을 썩게'하시고자 하셨다. 그는 '유다의 교만'(그지방 사람들은 좋은 땅을 자랑하였다)이라고 말씀하시는 반면 '예루살렘의 큰교만'이라고 강조하신다. 거기에는 성전과 왕궁이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그성 사람들이 더욱 자긍하였기 때문이다. 교만은 곧 넘어짐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 성전조차도 그것이 예루살렘의 교만이 되었을때 부서지고 재가 되었다.

Ⅱ. 포도주로 가득찬 병의 상징 13:12-21
(1) 이백성에 대하여 위협적인 심판이 경고된다(12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즉, 저희의 죄로인하여 스스로를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만든 자들은 포도주로 가득찬 병과 같이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차게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병과 같이, 새술을 담은 헌부대와 같이 깨어질 것이며 터져서 조각조각 흩어지게될 것이다(마9:17). 혹은 이렇게 해석할수 있다. 즉 그들의 머리는 병이 포도주로 가득차듯 술로 가득차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13절에서 그들이 잔뜩 취하게 될것이라고 설명되고 있기 때문이다(이사야51:17절과 비교해 보라). 그들은 선지자가 말하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를 조롱하였다.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못하리요. 아마도 그들은 선지자의 말을 자기들이 술취한 것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 탓에 이같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말씀의 의도는 부분적으로는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은 포도주병을 사랑하였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도다. 너희의 병은 포도주로 가득차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은 너희가 바라던 그러한 포도주는 아닐지니라." 그가 의미하는바는 이와같다.
1) 그들은 술취한 사람처럼 어지러워하게될 것이다. 술꾼이 꼭대기까지 찬 술통이나 술병에 비유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술이 일단 사람에게 들어가면 기지나 지혜, 미덕 등 모든 선한 것은 밖으로 몰려나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그들 모두가 '잔뜩 취하게' 되리라고 경고하신다(13절). 즉, 그들은 저희의 계획과 기도에 있어 온통 혼란으로 가득차게 될것이며 비틀거리고 흔들거리게 될것이다. 그들은 온갖 조소와 경멸의 한복판에 자기 자신들을 내놓게될 것이다. 이땅의 모든 거민과 예루살렘 거민들은 그들이 갈수 있는데까지 다갔다. 하나님께서는 멸하시려고 작정한 자들은 먼저 분별을 잃게 하신다.
2) 어찔어찔한 현기증으로,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그리고 서로간에 해를 끼치게될 것이다(14절). 그들로 피자 충돌하여 상하게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것이라. 저희의 술취한 우행뿐 아니라 저희의 취중의 난동도 또한 그들을 멸하는 일에 한몫을 할것이다. 그들에 대하여 이미 칙령이 선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의 서로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였기' 때문이다(참조. 합 2:25,16).
(2) 여기에서 만일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같은 멸망을 막을수 있는 좋은 권고가 주어진다. 그것은 간략히 말해서, 하나님의 크신 손아래서 스스로를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15절). 교만이 곧 하나님께서 그들을 대적하시게된 그 죄이었다(9절). "교만하지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실때, 우리는 자신이 선하기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1)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그영광을 너희 우상에게 돌리지 말라. 너희 죄를 자백하고 너희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16절). 신실한 회개와 개혁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렇게 할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하여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전, 그가 너희에게 심판을 행하시기전에 이일을 속히 행하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신후에는 너희가 도망갈 구멍을 찾지못하리라." 도망하려는 저희의 시도는 저희의 멸망을 재촉할 것이다. 그들이 기를 쓰고 '흑암한 산'을 넘으려고 할때, '그들의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칠' 것이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앞질러 달아나고자 생각하는 자들은 저희의 길이 통행 불가능함을 알게될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라. 좀더 나은상태에 있고자하는 그들의 소망은 좌절될 것이다. 그들이 빛과 위로와 구원을 바라는때, 그는 그빛을 '사망의 그늘로 변하게' 하실 것이며 '침침한 흑암이 되게'하실 것이다. 그것은 마치 바로가 계속하여 마음을 강퍅하게 하였을때 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있었던 저 흑암, 애굽의 흑암과 같을 것이다.
2) 그들은 스스로를 낮추어야만 한다. 왕과 왕후의 특권이 이일에서 그들을 예외로 면제시켜 주지 않을 것이다(18절).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그들을 크다고해도 참된 회개에 의하여 '스스로 낮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백성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 "너희가 포로로 끌려가게 되면 너희 주권과 그모든 휘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3) 이 권고의 말씀은 몇가지 논증이 덧붙여짐으로써 강한 어조를 띤다.
1) 그들의 교만은 선지자의 이루 말할수 없는 슬픔이 될것이다(17절).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말씀에 따르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면, 나의 눈뿐만이 아니라 나의 심령이 은근히 곡할 것이라." 회개치않은 그들의 죄를 보는 일은 그를 슬프게 만들 것이다.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너희의 자긍함과 완악함과 헛된 자신감을 인하여 곡할 것이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를 슬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찌할수 없다는 도리가 없는 것에 대해서 슬퍼해야 하며 우리가 어찌할수 없다는 그 속수무책에 대하여 슬퍼해야 한다.
2) 그들의 교만은 그들 자신의 피할수 없는 파멸이 될것이다(19-21절).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혹자는 이 '남방의 성읍'을 유다의 남쪽에 있던 애굽 땅의 성읍들로 해석한다. 즉 그들이 원군을 기대했던 성읍들이 그들을 좌절시킬 것이며 그들에게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할 것이다.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그들이 회개치 않았음으로인하여 시드기야 치세하의 마지막 포로때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대적들은 이제 막 이일을 행하려고 하고있다(20절).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 갈대아 땅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그들이 얼마나 빨리 진군해 오는지, 그들이 얼마나 사납게 보이는지를 보라." 이말씀을 그는 왕, 혹은 성읍이나 국가(본문의 대명사가 여성명사이므로)를 상대로 하고있다. "너에게 맡겨진 백성들을 이제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보호해야할 그들을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있느뇨? 어떻게 그들이 굶주린 늑대들에게서 도망할수 있겠느냐?" 자기 자녀들에게 무관심하여 그들을 좋은 교육의 결핍으로인하여 망하게 한 가장들과 자기 백성에게 소홀히 행한 사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던지시는 물음에 귀기울여야 한다. "먹이도록 네게 맡겨진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있느냐? 맡긴 그가 네게 보수하실때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21절) 너는 아무말도 할수 없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네게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정하시다는 말이외에는 아무말도 할수 없을 것이라. 너는 문앞에 당도한 환난을 어떻게 견디려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같지 않겠느냐? 태어날 아이가 없는 곳에서는 슬픔이 더욱 가증될 것이라."

Ⅲ. 회개와 겸손을 촉구함 13:22-27
(1) 앞에서와 같이 계속하여 파멸이 경고되고 있다. 즉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혀가게될 것이며 구걸과 구속의 온갖 불행속에 굴러 떨어지게될 것이고, 저희의 옷은 벗겨지게될 것이다. 그들의 치마는 덧입을 겉옷이 없어서 드러나게될 것이며 신발이 없어서 그들의 발꿈치가 상하게될 것이다(22절). 흔히 전쟁포로들은 이렇게 다루어지곤 한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갈때, '벗은 몸, 벗은 발'로 끌려갔다(사 20:4). 그들은 낯선 이방 땅으로 끌려가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이 흩어질' 것이다(24절). 그들은 모든 장신구를 빼앗길 것이며 창녀처럼 수치를 드러내게될 것이다(26절).
(2) 백성들이 이파멸의 원인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한다(22절).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자기들에게 이와같이 진노하실만한 어떤 일을 그들이 행했는지 알수 없었다.
(3)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의로우시며 그는 우리로하여금 그가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게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인들의 죄를 그들앞에 순서대로 열거하신다.
1)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이다(22절). 하나님은 사소한 잘못들로인하여 그들에게 무어라고 하시지는 않는다. 그가 지금 그들을 징벌하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대단히 악한 죄때문이다. 즉, 저희의 죄가 많았으며 온갖 종류의 범죄가 자주 반복하여 되풀이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보다 큰죄의 흉악함보다는 작은 죄들이 많은 것이 우리를 더욱 위험에 처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2) 그들이 죄를 고집했기 때문이다(23절). 구스인이 그피부를…변할수 있느뇨. 그들의 피부는 본래부터 검은 것이다. 표범이 그반점을 변할수 있느뇨. 표범의 반점은 외피자체에 짜여져 있는 것이다. 이백성들을 교화하고 개혁하는 일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악을 행하도록 가르침 받았으며 악을 행하는 견습기간을 가졌다. 그들의 선지자들은 그들로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일을 포기하였다. 죄에 오랜동안 익숙해져온 자들은 두려움과 수치심이라는 속박을 떨쳐버린 자들이다. 그들의 양심은 마비되었으며 죄의 습관이 굳어졌다. 죄는 영혼의 흑암이요, 훼손이다. 그러나 여기 구스인의 피부를 변하게 할수 있는 전능하신 은혜가 있다. 그은혜가 필요함을 느끼며 간절히 구하는 자들에게는 그은혜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3) 진리의 하나님을 떠난 그들의 패역함 때문이다(25절). "너희를 몰아내는 이것이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라. 네게 할당된 징벌은 헤아려 정해진 것이라. 그것은 네가 나를 잊어버린 연고, 내가 너희에게 베푼 은총들을 기억하지도 않았도다." 하나님을 잊는 것은 모든 죄의 원인이 된다. 이는 우리의 창조주를 기억하는 것이 거룩한 생활의 복되고 소망에 찬 출발인 것과 같다.
4) 질투의 하나님을 진노케하는 모든 죄중에서도 특히 그들의 우상숭배 때문이다. 그들은 수치스러운 재난에 드러나게 되었다(26절). 이는 그들이 수치스러운 죄를 범해왔기 때문이며 그가운데 있으면서도 여전히 수치를 모르기 때문이다(27절). "내가 너의 간음(이방 신들에 대한 과도한 애호)과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네가 '들의 작은 산위에서', 높은 산당에서 열심히 우상들을 섬기는 것을 보았노라. 바로 이것이 너에게 선고된 화의 요인이라. 예루살렘이여!"
(4) 전반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에게 애정어린 권면이 주어진다. 생명이 있는한 희망은 있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과 쟁변하사 그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려고 하신다(27절). 네가 얼마나 오랜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회개와 개심을 바라시며 그들이 온유하게 되기까지 오랜시간이 소요되리라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 곧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한 본보기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것은 마침내 하지않을수 없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차일피일 미루는 죄인들의 놀라운 어리석음에 대한 한 실례이다. 그들은 결코 정결하게 되어지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라고, 그렇지만 지금은 안된다고 말한다.

# 핵심
13:1-14
썩은 베띠와 포도주병의 비유를 통해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다.

# 묵상
유브라데 물가에 감춘 베띠 ( 13:1-5 )
여기서 나오는 띠는 에봇, 흉패, 관과 함께 거룩과 영화로움을 상징하므로, 이띠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고 제사장 나라가 된 유다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베띠를 사서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라고 명하시어 예레미야는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날후에 다시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고 명하시어 선지자가 그띠를 취하였는데, 정작 띠는 썩어서 쓸데없이 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띠는 유다의 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물속에 넣어둔 베띠가 썩음같이 그들을 멸망당하게 하시리라는 뜻입니다. 즉, 썩은 띠가 아무 쓸모없듯이 유다 역시 하나님께 있어서 아무 쓸데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즉 쓸데없이 되었다는 것은 범죄한 백성들이 더이상 하나님의 통치영역 안에 존재할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결국 유다는 유브라데 물가의 썩은 베띠처럼 유브라데의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않은 띠 ( 13:11 )
옛이스라엘은 깨끗한 띠처럼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는 장식품 같았습니다. 그리고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띠로 삼아 그에게 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띠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우상의 띠가 되어버린 더러운 이스라엘은 더이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띠가 아니었습니다.
포도주로 차게될 모든 병 ( 13:12-14 )
이는 병마다 포도주로 가득차 사람들이 모두 마시고 취한상태가 될것임을 암시합니다. 여기에서의 포도주는 하나님의 진노의 술(시75:8; 사19:14, 15; 렘25:15; 51:7; 계16:9)을 가리킵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그들은 취한 자들처럼 허둥지둥하며 서로 충돌하다가 멸망당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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