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여호와의 뜻을 물음 42:1-6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칼날을 피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를 숨기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백성들은 마침내 정책전환에 도움을 얻기위하여 예레미야를 찾아왔다. '모든 군대장관, 요하난, 그리고 작은 자로부터 큰자까지' 빠짐없이 그를 찾아왔다(1절). 그들은 지금까지 선지자를 경원하여 피해왔었다.
(1) 그들은 예레미야가 기도로써 현재의 위급한 시기에 그들이 행할바에 대한 하나님의 지시가 무엇인지를 물어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예언자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였다(2,3절). 그는 가난하고 비천하였지만 그들은 그의 협조를 간청하는 자답게 겸손한 자세로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당신께 청하오니 당신은 우리의 간구를 들으소서.' 그들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며 그가 자기들이 듣고싶은 말을 하도록 설득하려 하였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우리가 기도할줄을 모르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소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이라 부를가치도 없으며 그에게서 은혜를 바랄 염치도 없나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동정을 받아야할 자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중에서 조금만 남았사오니. "우리가 어떠한 곤경에 처해있는지 당신의 눈으로 목도하시거니와 우리가 삼킴을 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나이다. 그러니 할수 있다면 우리를 도와주소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파국을 돌아보사 우리가 '마땅히 갈길'을 보이시기를, 그리고 우리와 함께계셔서 우리의 마땅히 '해야할바' 즉 우리가 안전한 길을 택하도록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
(2) 예레미야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간구할 것을 굳게 약속한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그들에게 주시고자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든지 그는 그것을 받는대로 그들에게 전달할 것이다(4절).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무시를 당하였던 것처럼 그도 그들에게 무시를 당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앞에 결단코 범치아니하였던' 사무엘의 전례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는 그들의 신뢰가 무시되지 않았음을 깨우쳐 주기위하여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그들에게 선포하게' 된다.
(3)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대로 곧장 그뜻을 따르겠다고 약속한다(5,6절).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이는 예레미야가 그렇게 부르도록 그들을 격려했기 때문이다(4절). 내가...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고.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의 목소리에 청종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는 그들이 예레미야를 하나님께 보내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목소리가 좋고 좋지아니함은 무론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라고 명하시는대로 하겠다고 하였다. "그것이 우리에게 해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라면 좋은 것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믿겠나이다. 우리가 그것을 따지지 아니하고 그대로 하리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것이 쉽든 어렵든, 그것이 우리의 해야할 일이라면 우리가 그대로 행하리이다."

Ⅱ. 하나님의 응답 42:7-22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라고 요청한 자들에게 그가 답변한 내용이 나온다.
1. 말씀이 임함(7-9)
이말씀은 '십일후에'야 비로소 임하였다(7절). 이처럼 그들은 긴장한채로 기다려야 했다. 이는 아마도 그들의 위선에 대한 처벌이라든가 아니면 예레미야가 자기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시가 주어질때까지 기다려야 했기때문인것 같다. '묵시는 정해진때가 있나니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2. 말씀의 선포(10-22)
말씀이 임하였을때 예레미야는 그말씀을 공중에게, 곧 '군대장관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받은대로 다 성실하게 전하였다. 그가 조언한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그를 보냈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이 지금 있는곳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만일 그들이 그렇게하면 만사가 순조로우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다(10절). 그들의 형제들은 사로잡혀 그땅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그러므로 그 남은 자들은 그땅에 거하도록 허용된 것을 자비로 여겨야했으며 또한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여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현재 재난에 처해있는 것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표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내린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킴이니라(10절).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의 결정을 돌이키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나 그방법을 달리하실 준비를 하고계시며 그들로 돌아오게 하기위해서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땅에 거하지않으려는 그들의 변명에 대하여 답변하신다. '그들은 바벨론왕을 두려워하였다'(렘 41:18). 그들은 그러한 보복이 결코 미치지않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바벨론왕이 와서 그다랴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할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바벨론왕을 두려워말라(11절). "그가 이사건을 구실삼아 너희를 해할까 두려워말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신다면 누가 감히 그들을 대적할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약 그들이 이땅에 머문다면 바벨론왕으로부터도 안전할뿐만 아니라 왕중의 왕에 의하여 행복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우고 심으리니 너희가 다시 뿌리를 내릴 것이며 다른 나라를 세울 초석, 곧 마지막 남은 재에서 살아나나 불사조와 같은 왕국의 초석이 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긍휼을 보이셨다. 그는 바벨론왕이 그들을 멸할수 없게 하실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긍휼히 여기게하여' 그들이 정착하는 것을 돕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는 사실상 우리의 특권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우리의 복종은 곧 그자체의 보상이 되는 것이다.
(2) 그들은 다른 어느곳보다 애굽으로 가려는 생각을 해서는 결코 안되었다. 하나님은 그땅에서 그들의 조상들을 인도해내셨으며 또한 그들과 동맹하지 말라고 자주 경고하신바 있었다. 너희가...말하기를 우리는 이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13절).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되리라(14절). 이주장을 고집할경우 그들에게 내릴 형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되었다(15절).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희가 남은 자이기때문에 응당히 자비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구나"(2절). 칼과 기근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했는가. 보라 이와같은 심판들이 애굽까지 그들을 따라가 거기에서 그들을 멸망시킬 것이다(16,17절). "전쟁과 기근이 오랫동안 이땅을 황폐케하였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고 너희가 생각하는구나. 그렇지만 너희가 하나님을 믿으면 그가 이땅을 평화의 땅으로 만들어주실 것이라." 그러나 '칼과 기근을 면하기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가는 자들은 칼과 기근으로 애굽에서 죽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파멸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했는가. 그들이 할수 있는한 재앙을 피해보려고 했는가. 이제 그들은 애굽에서 두번째 재앙인 '하나님의 분'을 만나게될 것이다(18절). 하나님께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불신앙인들과 섞여 살며 또 그들의 비위를 맞출때 그들은 신앙의 백성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할 것이며 그것은 그들에게 치욕이 될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시를 묻는 그들의 질문속에서 그들의 위선됨을 아셨다. 그들이 예레미야에게 자기들이 취할바를 물었을때 그들은 이미 자기들의 태도를 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같이 선고된 것이다. 선지자는 그가 메시지를 성실하게 전하였다는 것을 엄숙히 확언하였다(19절). 그의 메시지의 결론은 "애굽으로 가지말라.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라. 나는 너희에게 분명히 경고하였노라.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미처 알지 못했었노라고 변명할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그에게 하나님의 지시를 알려달라고 한 탄원의 거짓됨을 책망한다(20절). 너희가...너희 마음을 속였느니라. "너희가 이것을 하리라 고백하고 엉뚱한 짓을 획책하였느니라. 너희의 약속은 실현성이 없는 말뿐의 약속이었느니라." 너희가...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줄 분명히 알지니라(22절). 하나님의 경고를 사람이 비웃을수는 있으나 인간의 불신이 그경고를 폐기하지는 못한다.

# 핵심
42:1-22
그다랴가 살해된후에,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애굽으로 도망가려고 결심한 요하난과 그일행이 자신들의 결정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했으나, 애굽으로 가지말라는 하나님의 답변이 주어진다.

# 묵상
예레미야에게 나아온 요하난 일행 ( 42:1-6 )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성이 함락되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자 이제 남은 자들도 예레미야가 참선지자임을 알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가야할 길과 해야할 일을 알기 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고난에 처하면 평온할때는 돌아보지도 않고 부르지도 않던 신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 ( 42:7-17 )
본문은 요하난과 그의 일파가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지 열흘이 지나서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해주는 내용입니다. 유다의 남은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유다 땅에 거하면 복을 주시지만 애굽으로 도망하면 화를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이 다시 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요,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베푸신 출애굽을 무효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 42:18 )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내렸던 재앙을 실례로 들어서 백성의 불순종을 경고하셨습니다. 즉, 유다 백성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다가 예루살렘이 파괴되는 수난을 당했던 것처럼, 이번에 또다시 하나님을 거역하고 애굽으로 내려갈경우 하나님의 노를받아 다시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갈경우 닥칠 재앙 ( 42:18-22 )
예레미야는 유다의 남은 자들이 유대 땅에 머물지않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애굽으로 갈경우, 그들은 가증함과 놀램과 저주와 치욕거리가 되며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거하는 곳에서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임을 당하게될 것이라고 분명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바벨론을 통해서 유다를 징계하는 것이었지 그들을 멸망시키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면 그들은 유다에 남아있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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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피살된 그다랴 41:1-10
이와같이 천박하고 야만적인 유혈극을 자행한 자들은 명예로운 집안의 출신이요 또 신앙적으로도 의로운 자들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행위는 곧 자신들의 조국과 신앙에, 그리고 아무런 반항도 하지않는 고통당하고 있는 동족에게 자행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처럼 그들은 냉혹하고 무자비하게 이모든 것을 한것이다.
(1) 이스마엘과 그의 무리는 먼저 그다랴를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바벨론왕은 그다랴를 위대한 인물로 세워 그가 정복한 땅의 총독으로 삼았다. 하나님께서 그다랴에게 착한 본성을 주셨으며 그로인하여 그의 나라가 축복되게 하셨다. 그리고 국가의 안녕을 위한 그의 노력은 죽은 자를 소생시키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었다. 이스마엘은 왕족 출신이었다(1절). 그러므로 그는 그다랴가 출세하는 것을 시기하였다. 이스마엘은 또한 왕의 후손들인 열사람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도 그와 같은 원한을 품고있었다. 이들은 그다랴에게 보호를 의탁한 사람들이었다(렘 40:8).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1절). 그다랴는 그들을 관대하게 환대하였다. 그들이 그에게 우정을 가장하였기때문에 그는 그들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함께 '떡을 나누는' 자들은 그에 대하여 '발꿈치를 들었다.' 그들은 기회만을 엿보다가 그가 홀로 있게되자 그를 살해하였다(2절).
(2) 그들은 거기에 함께있던 유대인들과 갈대아인들, 즉 그다랴가 고용한 모든 사람들을 처단하였다(3절). 포도원 원정들과 농부들은 들에서 바삐 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유혈의 참극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이일은 아주 교묘하게 은폐되었다.
(3) 몇명의 경건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폐허를 애곡하러 오다가 이스마엘에게 붙잡혀 먼저번의 남은 자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그들은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오는 자들이었다. 그곳들은 한때 번영하여 유명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쇠퇴하여 다른 곳과 다를바 없이된 장소들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집', 곧 예루살렘 전으로 가서 그폐허의 잿더미에 경의를 표하려했던 것이다(5절). 그들은 제물을 드리기위하여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왔다.' 이렇듯 그들은 비록 제단이 없어졌지만 자기들의 선한 뜻을 나타내었다. 또한 그들은 '그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왔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마엘의 악의에 가득찬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스마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이순례자들을, 그들이 띠고있는 사명때문에 증오하였다. 그는 자기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그들을 영접하러 나갔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거짓 눈물이었다. 그는 그다랴와 그의 정부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염탐하였다. 그는 그들을 성까지 유인해 들이고 그들이 그다랴에게 존경심을 품고있음을 발견하자 그들을 살해할 결심을 굳혔다. 그는 그다랴가 그들과 함께 살기를 청한 것처럼 가장하며 그들에게 '그다랴에게로 가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실상 그는 그다랴를 죽인 곳으로 그들을 유인하여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6절). 이스마엘은 그들이 '성중앙에 이르자' 덤벼들어 그들을 살해하였다(7절). 그는 이들의 시체와 그가 살해한 다른 사람들의 시체를 큰'구덩이'에 모두 매장하였다(7절). 이구덩이는 유다와 아사가 오래전에 판것으로 '이스라엘왕 바아사를 두려워하여' 그를 막으려고 미스바를 요새화할때 전방 경계소로서 판것이었다(9절). 살해당할 운명에 처해있던 남은 자들중에 목숨을 건진 열명이 있었다. 그들이 용서받은 것은 그들의 생사를 처분할 권리를 가진 자들의 탐욕으로인한 것이었다(8절). 그들은 이스마엘에게 우리가 밭에 귀한 것을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말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지방의 특산물로서 땅에서 나는 곡물인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이었다. 이것을 미끼로 사용한 것이 효과가 있었다. 이스마엘은 그들을 살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비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을 사랑해서였다.
(4) 이스마엘은 백성들을 사로잡아 압송하였다. 왕의 딸들, 가난한 사람들, 포도원 원정들, 농부들 등, 그다랴에게 보호를 의탁하였던 자들은 모두 사로잡혀 '암몬 자손'의 땅으로 끌려갔다(10절).이 사로잡힌 자들은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사로잡힘의 괴로움이 '지나갔도다'라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도 몇몇 사람은 칼로 죽임을 당하고 다른 사람들은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항구에 들어와서 난파하는 배도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하늘 이편에서는 결코 평화를 확신할수 없다.

Ⅱ. 이스마엘의 패배 41:11-18
요하난이 그다랴에게 이스마엘의 반역음모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을때 그가 그다랴와 함께있었더라면 사정은 좀 달라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군대장관들과 그들의 군대로 그다랴를 경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가장 필요로할때에 원정을 떠났었던것 같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정작 그들이 필요한때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은 '이스마엘의 행한 모든 악을 들었다'(11절). 요하난은 포로들을 구출하는 것만으로 복수를 마무리지었다. 요하난은 모을수 있는대로 군대를 모아 이스마엘과 싸우러 갔다(12절). 요하난은 이스마엘을 추격하여 '기브온 큰물가에서' 그를 만났다(삼하 2:13). 이스마엘은 요하난이 큰군대를 이끌고 나타나는 것을 보자 용기를 잃어 감히 버티고 서 있을수가 없었다. 가련한 포로들은 그들이 자기들을 구출해 주러온줄 알고 요하난과 그와 함께한 모든 군대장관들을 보고 기뻐하였다(13절). 포로들은 즉시 가던 길을 돌이켜 요하난 일행에게로 달려왔다(14절). 이스마엘은 포로들을 못가게 막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살기에 급급하여 포로들을 내버려두고 여덟사람과 함께 도망하였던 것이다(15절). 이스마엘이 고용한 자객 또는 악당이라 할수 있는 열명중 두사람은 그를 버리고 달아난것 같다. 이스마엘은 암몬 자손에게로 도망쳤다. 그후 그의 행적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요하난과 그의 군대장관들의 결정은 무모한 것이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가는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였다(17절). 그리하여 그들은 잠시동안 다윗 성인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숙영하였다. 요하난은 여기에 그의 지휘막사를 짓고 애굽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그가 애굽으로 가려한 이유는 그나라에 대한 그의 개인적인 친근함때문이었든지 또는 애굽인들에 대한 오랜 신의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용맹한 군사의' 일부는 요하난을 떠난것같이 보인다. 또한 그와 함께있던 자들과 '그가 이스마엘에게서 구출했던 여인들 및 유아들'도 이렇게 자꾸 빠져나갔던것 같다.

# 핵심
41:1-18
요하난의 경고를 무시한 그다랴는 이스마엘에게 암살당했다.
곡식 저장고(41:8)
팔레스타인의 주요곡물인 밀과 보리는 그용도에 따라 여러가지 크기의 진흙항아리에 저장되었다. 때로는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곡식 저장고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장고에 곡물을 보관할때는 내용물이 마르거나 손상되지않도록 사료나 풀을 함께 넣었으며, 석고로 만든 뚜껑으로 덮고 또 그위에다 두텁게 흙을 덮기도 했다.

# 묵상
암살당하는 그다랴 ( 41:1-3 )
그다랴는 바벨론이 세운 유다 총독이었기때문에 친바벨론파요, 민족의 반역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임을 알지못하는 다윗의 자손 이스마엘은 암몬과 공모해 그를 살해했습니다.
이스마엘의 칠십인 순례자 살해사건 ( 41:7, 8 )
80명은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 곧 북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사람들이 끌려갔다고 하는 비참한 소식을 듣고 애도하며 하나님께 속죄제를 드리기위해 하나님의 집을 향해 떠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그다랴 암살을 은폐하기위해서 조문단 70명을 죽임으로써 조문하러간 사람들이 오히려 애도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80명중 10명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때문에 이 살해사건에서 살아남았는데, 이일로 인해서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사건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을 사주한 암몬 ( 41:10 )
암몬은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할때마다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이 세운 그다랴에게 모여들어 재건사업에 착수하자 그들은 그다랴를 시기하여 반바벨론파인 이스마엘을 격동시켜 그다랴를 살해해 유다가 지도자없이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요하난 ( 41:11-18 )
요하난은 가레아의 아들로 예루살렘이 함락된후 미스바에 있는 그다랴에게 나아간 군대 장관입니다(왕하25:23). 그는 그다랴를 죽인 이스마엘을 죽여 유다의 원수는 갚았지만 예레미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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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레미야의 석방과 거처 40:1-6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느부갓네살의 충고를 따라 그다랴를 따르는 것을 보게된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왕의 방백들에 의하여 시위대 뜰에서 명예롭게 석방되었다(39:13,14). 그러나 그후에 하급관리들에게 이스라엘인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기위하여 발견하는대로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때에 예레미야도 성안의 백성들가운데 살다가 그관리들의 실수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잡혀 끌려갔다. 예레미야는 라마로 끌려가던 포로들틈에서 곧 발견되어 석방되었다.
(1) 시위대장은 그를 참예언자로 정중하게 대접하였다(2,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너를 통하여) 이곳에 이재앙을 선포하시더니(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옳은 경고를 받았으나 듣지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재앙을 내리셨도다. 그대의 입술을 통하여 그가 그말씀하신대로 행하셨도다." 그는 지금 그앞에 사슬에 묶여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이는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방백들은 결코 이사실을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나 이방의 방백은 그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보았다.
(2) 시위대장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하고 싶은대로 처신하라고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는 두번째로 그의 '사슬을 풀어주었다'(4절). 그리고 그에게 자기와 함께 친구요, 동료로서 바벨론으로 가자고 초청하였다. 그는 '내가 너를 선대하리라'고 말한다. "내가 너를 존귀히 여길 것이며 너의 쓸것을 부족하지 않게 돌보아주리라."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고싶지 않다면 자기 나라의 어느곳에서든지 원하는대로 유할수 있었다.
(3) 시위대장은 예레미야에게 그다랴에게 가서 그와 함께 거하라고 충고하였다. 이 그다랴는 '바벨론왕이 유다 성읍들의 총독으로 세운' 자로서 정직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갈대아인들에게 투항하여 이러한 큰신임을 받게된 것이다(5절).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가 아직 돌이키기전에', 즉 어떻게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는동안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다랴에게로 가라고 명하였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자유를 주고 그가 가고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락했을뿐만 아니라 그의 쓸 물건까지 주었다. 그는 '그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었다.' 즉 옷과 돈을 주어 보냈다. 예레미야는 그의 친절을 받아들였을뿐만 아니라 그의 충고도 받아들여 미스바에 있는 그다랴에게 가서 '그와 함께 거하였다'(6절). 그러나 그렇게 한것은 그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이스라엘 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는 조국을 버리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그는 방백들과 부정한 땅에 거하는 것보다 거룩한 땅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는 길을 택하였다.

Ⅱ. 총독 그다랴에 대한 반역음모 40:7-16
1. 남은 자들의 미래(7-12)
(1) 조국에 남아있는 유대인 남은 자들에게 밝은 미래가 전개된다. 그들은 여러해동안 고난과 공포속에서 지내왔으나 이제는 평화와 고요한 삶의 미래가 열린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일으키시고 격려하기위하여 그러한 기대를 갖게하신것 같다. 이러한 기대는 비참한 백성들에게 죽음에서 생명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다.
1) '바벨론왕이' 남아있는 유대인들가운데 하나인 그다랴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7절). 그는 방백들가운데 한사람으로 '사반의 손자요 아히감의 아들'이었다(9절). 그의 아버지는 백성들에 반대하여 예레미야의 편을 들었었다(26:24). 그는 지혜롭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던것 같다. 그래서 그의 통치하에서 남아있던 소수의 백성들은 매우 행복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2) 이제 흩어져 살던 모든 유대인들이 그의 통치구역으로 와서 보호를 의뢰하였다. 갈대아인들을 피해 도주했던 유력한 자들로와서 그다랴에게 순복하였다. 그중 몇사람의 이름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8절). 그들은 그들 수하의 사람들, 즉 종들과 군사들을 데리고 왔다. 바벨론왕은 그다랴를 대단히 좋게보고 있었기때문에 그들의 수효가 증가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았고 오히려 기쁘게 여겼다. 모압, 암몬, 에돔 등 인접국가로 도피하였던 가난한 사람들도 그다랴가 조국에서 통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조국에 대한 사랑때문에 곧 돌아왔다(11,12절).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풀기를 잊지 아니하셨다. 그러나 그들중 일부에게는 아직도 복종의 시련을 더겪게 하셨다.
3) 이 새로운 정부의 법령이 선포되었다. 그것은 바벨론왕과 맺은 계약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다랴는 '너희는 갈대아인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법은 그들이 이방인들과 동맹하는 것을 금하였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로하여금 바벨론왕에게 굴복하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하나님께 순응하는 것이 수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결과를 두려워하지 말라. 만일 너희가 평화롭게 살기만을 바란다면 너희는 그렇게 살수 있을 것이라. 그러니 정부에 반항하지 말라. 그러면 정부도 너희를 못살게 굴지 않을 것이라." 바벨론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유익하리라(9절). 그다랴는 바벨론왕의 지시에 근거하여 모든일에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 행동하려 한다(10절). 나는 미스바에 거하여 우리에게로 오는 갈대아인을 섬겼노라. "나는 형편에 따라 전민족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경의를 표하겠고 그들의 명령을 받으며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겠노라." 그다랴는 맹세로써 그가 그들을 보호하는 일에 온힘을 기울이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 왔기때문에 그에게 그들이 충실할 것을 맹세시키지는 않았다. 만일 맹세를 시켰다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이 갈대아인들의 것이긴 하지만 그런 조건하에서 유대인들은 땅과 그모든 소산을 자유롭게 즐길수 있게되었다(10절). 포도주와 여름실과와 기름을 모아. "너희는 그것들을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릇에 저축하여' 겨울에 쓰도록 하라. 평화롭고 희망에 찬 땅에서 사는 백성들이 하듯이 너희가 너희 손으로 수고한 것을 먹으리라." 그리고 그말대로 그들은 포도주와 여름실과를 심히 많이 모을수 있었다. 곡물추수는 예루살렘이 점령당하기 얼마전에 끝났기 때문이다. 그다랴는 아무의 소유도 아닌 소산물은 그들이 즐기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세도 요구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그렇게 한것은 자기 개인의 이익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유대의 상태(13-16)
이같이 갓피어나는 평화스러운 곳에 무서운 폭풍을 예고하는 먹구름이 몰려든다.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는 그다랴를 미워하였다. 그이유는 유대 민족에 대한 악감정에서거나 또는 그다랴에 대한 개인적인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이들은 바알리스가 암몬 자손 왕의 황태후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당시 이소수의 무리는 위대한 바벨론왕의 보호하에 있었으므로 안전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 보잘것없는 군주 또는 태후의 술책으로 멸망하고 만다. 왕중 왕을 자기 편으로 모시는 자들은 복될진저! 세상의 왕은 제아무리 위대하다할지라도 또 그 온세력을 동원한다할지라도 반역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바알리스는 그의 음모의 집행인으로서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고용하여 그다랴를 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음모를 시행할 기회를 얻기위하여 그다랴의 신하로 들어가 그에게 충성을 약속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스마엘은 왕족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된 자를 시기하였고 따라서 바알리스의 음모에 쉽게 유혹당하였다. 그다랴는 다윗 혈통이 아니었기때문에 그를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기가 더쉬웠다. 용감하고 행동적인 인물인 '요하난'이 이음모를 알아채고 그다랴에게 이사실을 알렸다. 그에게 이르되...네가 아느냐(14절). 요하난은 그다랴에게 이사실을 은밀히 알렸다(15절). 그는 음모를 방지하고자 했다. 나로 가서 사람이 모르게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을 죽이게 하라. 어찌하여 그로 네 생명을 취케하여. 그다랴는 신실한 사람이었기때문에 이스마엘의 반역음모에 대한 정보를 결코 믿지 아니하였다. 그는 '너의 이스마엘에 대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 있는 자들의 충성을 과신함으로인하여 파멸된 예를 쉽게 보곤한다.

# 핵심
40:1-16
예레미야의 석방에 관한 보충설명과 그다랴의 정책 및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음모를 수록하고 있다. 40:1-45:5절은 예루살렘 함락후에 예레미야가 겪었던 일을 기술한 내용이다. 그중 40:1-43:7절은 예레미야가 유다에서 겪은 일이다.

# 묵상
라마에서 해방된 예레미야 ( 40:6 )
그는 미스바로 가서 그의 백성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가면 온갖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릴수 있었으나 고난받는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유다 멸망후에도 예레미야가 유다에 계속 남을 것이라는 사실은 전에 그가 아나돗의 땅을 산것에서도 알수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땅에 남은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빈민이요, 불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더욱 방백들과 부정한 땅에 거하기보다는 거룩한 땅에서 빈민들과 천민들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끝까지 가난한 자, 불쌍한 자들과 함께 살면서 눈물의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바벨론이 세운 유다의 첫장관 ( 40:7-9 )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진노중에서도 긍휼을 베푸시고 사랑으로 돌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이 세운 유다의 첫장관은 그다랴로서, 그의 이름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보호한 아히감(26:24)의 아들이며 또한 경건한 서기관 사반(왕하 22장)의 손자로 요시야왕의 비서관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을 바벨론으로 끌고갔으며, 남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해 그다랴를 장관으로 임명했으나 그는 두달만에 이스마엘에게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다랴의 실수 ( 40:13-16 )
요하난은 그다랴에게 이스마엘을 아무도 모르게 죽이자고 제안했습니다. 요하난이 이렇게 제시한 이유는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죽이려하는데, 그가 죽게되면 백성들이 흩어지고 남은 자들이 멸망을 당할까 염려해서 입니다. 그러나 그다랴는 요하난을 믿지않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혜롭고 과감한 결단이 필요함을 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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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예루살렘 성의 함락 39:1-10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시위대 뜰에 머물렀더라'(렘 38:28). 그는 예언을 계속함으로써 방백들을 더이상 불안하게 하지않았고 또 방백들도 그를 더이상 박해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1) 성은 마침내 강습에 함락되었다. 느부갓네살의 군대는 '시드기야의 구년 시월'에 성앞에 당도하였다(1절). 느부갓네살은 본국으로 떠나가고 장군들은 남아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더욱 맹렬히 성을 공격하여 마침내 '십일년 사월 구일'에 입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는 기근이 쇠약해져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였다(2절). 그들의 죄로인하여 하나님은 진노하사 그의 보호를 거두시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짤린 삼손처럼 그성도 다른 성들과 같이 약해졌다.
(2) 바벨론왕의 방백들이 '중문'을 점령하였다(3절). 어떤이들은 이문이 성을 이분하는 가운데 벽에 있는 '제 이구역'(습 1:10)이라고 생각한다. 방백들은 여기서 일단 조심스럽게 멈추고 감히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들은 가능한한 생명을 아끼고자 했던 것같다. 그리하여 성내를 샅샅이 수색하라는 지시를 내려 복병의 위험이 없음이 확인될때까지 기다렸다. 거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과 관계있는 뜻을 가진 '엘리야김'과 '힐기야'가 앉아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방신들의 이름과 관계있는 뜻을 가진 '네르갈사레셀'과 '삼갈르보'가 거기에 앉아있다. '살스김'은 '랍사리스', 곧 '환관장'이다. 그리고 '네르갈사레셀'은 '박사장' 또는 막사장이다. 이제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것(렘 1:15), 즉 북쪽 왕국의 족속들이 몰려와 예루살렘의 문입구마다 버티고 앉아있으리라던 예언이 성취되었다.
(3) 시드기야는 안전을 도모할수 있는 가장 적절한 시기인 어두움을 틈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성읍을 벗어났다'(4절). 그러나 그는 '여리고 평원에서' 발각되어 추격자들의 손에 붙잡혀(5절) 립나에 포로로 잡혀갔다. 바벨론왕은 거기에서 그를 심문하였으며 또한 '그의 목전에서 그아들들을 죽였다.' 시드기야는 그때 불과 32세였다. 시드기야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어린아들들의 죽음은 그자신이 수십번 죽는 것보다 더 가슴아픈 일이었다. 특히 자기의 오만때문에 그런일이 일어났음을 생각할때 더욱 그러하였다. '네 아내들과 자녀는 갈대아인에게로 끌어냄을 입을 것이라'(렘 38:23). 바벨론왕은 '유다의 모든 귀인을 죽였다(6절). 또한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였다'(7절).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앞에서 눈을 감았던 그에게 평생 어둡게 살라는 벌이 내린 것이다. 바벨론왕은 "두개의 구리사슬로 그를 묶어"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갔다. 그리하여 그는 거기에서 남은 일생을 비참하게 보냈다.
(4) 얼마 안있어 성은 불타고, 성전과 궁전과 성벽은 무너졌다(8절).
(5) 남은 백성들은 모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9절). 그들은 짐승처럼 정복자들앞에서 수백마일을 끌려가야 했다. 정복자들은 그들의 포악한 주인이 되었고 낯선 땅에서 그들은 정복자들의 처분만 바랄수밖에 없었다. 소수의 무리가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가난한 백성들'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않은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에 남아있게된 것이다. '시위대장은 그들에게' 전에는 주인이 되리라고 꿈도 못꾸었던 '포도원과 밭을 주었다'(10절). 부자들은 거만한 압제자 노릇을 해왔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의 불의에 대한 처벌이 내려진 것이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인내로 고통을 겪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그들의 인내로인하여 후하게 보상을 받은 것이다.

Ⅱ. 예레미야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호의 39:11-18
1. 예레미야를 위한 섭리(11-14)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보살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또한 그를 정중히 대하라고 하였다(11,12절). 느부갓네살과 바벨론왕의 모든 장관들이 그를 옥에서 풀어주고 온갖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13,14절).
(1)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매우 관대히 대해 주었다. 그는 이가련한 선지자를 인정하였다. 그를 데려다가 선대하고 해하지말며 그가 네게 말하는대로 행하라(12절). 성을 점령하기도전에 왕이 이러한 명을 내린 것은, 또한 치열한 전투중에도 방백들이 이명을 준수하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렇기때문에 그것은 본받을만한 사실로서 본문에 기록되었다.
(2)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방백들은 치욕을 당하였다. 전에 그들은 예레미야를 투옥시켰었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왕과 그의 방백들이 그를 풀어주었던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주신 약속, 곧 그의 수고를 보상해주겠다는 약속을 수행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렘 15:11).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의 그의 사명에 충실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와 그에게 주신 약속에 대해서 신실하심을 나타내신다. 박해자들을 처벌하는 바로 그도구가 박해받는 자를 구하는 도구도 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왕의 손길이 닥쳐온다해도 자기의 석방에 큰장애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그는 이사건들 속에서 더욱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았다.
2. 보답받은 에벳멜렉(16-18)
에벳멜렉은 은혜로운 보답을 받게된다. 즉 그가 예레미야에게 베푼 친절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게된 것이다. 에벳멜렉은 예언자의 이름으로 예언자를 구하였으므로 예언자의 상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에벳멜렉에게 하나님께서 그토록 오랫동안 경고하셨던 파멸을 예루살렘에 닥치게 하시리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 호의를 베푼 것에 대한 만족스러운 보답으로, 에벳멜렉은 예레미야가 참된 예언자라는 많은 증거를 받게되었다(16절). 에벳멜렉은 모든 사람이 받을 재난을 피하게될 것이다. '내가 너를 구원하리니, 내가 단정코 너를 구원할 것이라'(18절).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감옥에서 구출하는데 큰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는 네가 나를 신뢰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18절). 에벳멜렉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정하시고 지지해주시리라는 사실을 믿었으므로 그의 곁에 서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사람의 얼굴을 두려워하지 않게되었다. 이 선한 사람이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최악의 재난의 시기에 그들의 소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 핵심
39:1-18
바벨론 군대의 예루살렘 함락사건과 시드기야의 처형 및 예레미야의 석방에 관한 내용.
그다랴(39:14)
‘여호와는 위대함’이라는 뜻의 이름. 사반의 손자이며 아히감의 아들이다(왕하 25:22-25).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패망시킨후 그다랴로 유다 땅에 남아있는 백성을 관할케 하였다(40:5-16).

# 묵상
예루살렘의 함락 ( 39:2 )
시드기야 11년 4월 9일, 성을 포위한지 3년만에 바벨론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왕과 방백들을 바벨론에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주전 587년경).
성 함락후의 시드기야 ( 39:4-7 )
시드기야는 밤에 성을 빠져나와 아라바로 도망했으나, 갈대아 군대가 그를 여리고 평원에서 잡아 하맛땅 립나에 있는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목전에서 죽이고 그의 눈을 빼어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와같이 시드기야는 항복하면 그자신과 백성들의 삶이 보장된다는 예레미야의 권유를 외면하고 하나님의 심판도구로 사용된 바벨론에 대항함으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바벨론의 예레미야 선대 ( 39:12 )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이며, 그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위해 시드기야에게 항복을 권유한 것을 알았기때문에 그를 선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반민족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바벨론의 침략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기때문에 그것에 따르려한 것일 뿐입니다.
구원받는 에벳멜렉 ( 39:15-18 )
에벳멜렉은 자기의 죽음을 무릅쓰고 시위대의 뜰에 갇힌 예레미야를 구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께 의로 여겨져 구원받게 됩니다(롬4:3). 즉 그는 이방인이지만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기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충성하는 자에게는 그에 대한 보호와 보상을 주십니다. 이 확실한 보증을 가지고 세상에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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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구덩이에 갇히 예레미야 38:1-13
(1) 예레미야는 자신의 분명한 가르침을 계속 고집한다(3절).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우리니. 비록 기간이 오래 걸린다해도 마침내는 함락될 것이다. 그는 이 성이 구원받지는 못하더라도 백성들만이라도 구하기위하여 그들에게 확실한 길을 제시하는 이 환영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계속하여 반복하였다(2절). "갈대아 인에게 가서 사태가 극단에 이르기전에 그들의 자비에 스스로를 맡기라. 그리하면 살리라. 그들에게 항복하는 자는 기근과 염병을 피할수 있겠지만 반면에 성안에 있는 많은 무리들은 기근과 염병으로 죽으리라."
(2) 방백들은 계속하여 예레미야에게 적의로 대한다. 그는 조국에 충성하였고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비록 지금 왕의 떡으로 생명을 잇고 있다고 하지만 입을 다물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를 핍박하는 자들은 그가 시위대의 뜰을 거닐면서 자유를 지나치게 누리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설교하기위해 성전에 갈수는 없다고하나 자기를 방문하러 오는 자들에게 개인적은 대화를 통하여 같은 이야기를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를 위험한 인물이라고 왕에게 고하며 그가 현치세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있다고 말한다(4절). 이사람이 백성의 평안을 구치아니하고 해를 구하오니. 그보다도 더 예루살렘의 유익을 구했던 자는 없었다. 그들은 그의 설교를 '손을 약하게 하는' 것으로, 즉 그들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약한 자들이 하나님의 충실한 사역자들을 저희 대적으로 간주하는 일은 흔히있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완악하게 행하면 스스로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3) 이로인해 예레미야는 왕의 허가아래 구덩이에 갇힌다. 이는 거기에서 그를 죽게하려는 것이었다. 시드기야는 비록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확신하였지만, 그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보라 그가 너희 손에 있느니라. 설령 선한 사람들에게 비밀리에 호의를 베풀지언정 필요한때에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문책당할 일을 많이 지니고있는 것이다. 왕으로부터 이에 대해 보장을 받게되자 방백들은 즉시 가련한 '예레미야를 취하여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넣었다'(6절). 그것은 깊은 구덩이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를 '줄로 달아 내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구덩이는 더러웠다. '그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목까지 '진흙중에 빠졌다'고 요세푸스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 그를 넣은 자들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를 굶주림이나 추위로 죽게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를 공개적으로 죽이면 백성들이 자기들을 향하여 분을낼까 두려워하였으므로 그렇게 비밀리에 죽이고자 하였다. 하나님의 수많은 증인들이 이와같은 방식으로 비밀리에 감옥에서 굶주려 죽어갔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는 날에야 사인이 밝혀지곤 하였다. 예레미야는 이 곤경중에 자신이 무엇을 하였는지 스스로 우리에게 말해준다(애 3:55,57).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주께서 내게 가까이하여 가라사대 두려워말라 하셨나이다.'
(4) 환관 에벳멜렉이 이렇게 불쌍히 고통받는 자를 위하여 왕에게 청원하고 있다. 에벳멜렉은 구스인으로 이스라엘 나라보다도 더 인정과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들가운데에서보다도 이방인들중에서 더깊은 믿음을 발견하셨었다. 에벳멜렉은 악한 궁정에서 살고 있었고 부패하고 타락한 시대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공평과 경건에 대한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처에 자기의 '남은 자'들을 두신다. 가이사의 집안에까지 성도들이 있었다. 왕은 탄원과 호소를 듣기위하여 '베냐민 문에 앉아' 있었다. 에벳멜렉은 즉시 그리로 갔다. 사태가 지연을 용납하지 않을정도로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예레미야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을 담대하게 증언하였으며 왕에게 그렇게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주저하고 머뭇거리지 않았으며 왕에게 충실하게 고함으로써 왕이 뜻대로 결단내리도록 도왔다. 저사람들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니이다. 하나님께서는 곤경중에 있는 그의 백성을 위하여 전혀 예기치 못하던 곳에서 조력자들을 일으키신다.
(5) 예레미야를 석방하라는 명령이 즉시 주어졌다. 그리고 에벳멜렉은 그명령이 집행되는지 주의깊게 살펴본다. 왕은 갑자기 놀라웁게도 그의 마음을 바꾸었다. 그리고 방백들에게 맞서 예레미야를 석방하고자 한다. 그는 방백들이 그일을 저지하고자 무리를 선동하지 못하게끔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구해내는데 30명이나 되는 사람을 동원한다(10절). 에벳멜렉은 목적을 이루었으며 즉시 예레미야에게 그좋은 소식을 전하였다. 그가 예레미야를 얼마나 따뜻하게 배려하였는지 특별히 주목할만하다. 그는 예레미야의 팔목에 낡아서 부드러워진 헝겊을 대게 하였는데 이는 그를 끌어올리다가 밧줄로 상하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를 달아내렸을때 밧줄이 팔목을 상하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헝겊이 진흙속에 빠지지않도록 하기위하여, 그에게 던지지않고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11,12절). 예레미야는 구덩이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전에 있었던 '시위대 뜰에 머물고' 있다(13절).

Ⅱ.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담화 38:14-28
왕은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예레미야를 그의 대적들의 손에 넘겨주려고 하였으나(5절) 이제는 그와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
(1)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품었다. 예레미야가 다시금 구덩이에서 구출되었을때 그는 하나님의 조언을 구하고자 은밀하게 사람을 보낸다. 왕은 그를 '여호와의 집 제 삼문(어떤 역본에는 '주입구'로 되어있다)에서' 만났다. 이문이 여호와의 집안에 있었는지 들어가기전의 입구에 있었는지 확실치 않다(4절). 아마도 왕은 자신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원하고 있으므로, '여호와의 집'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한일'을 물었다. 이것은 오히려 '한말씀'으로 해석해야할 것이다. "나는 예언의 한말씀, 지혜와 위로의 말씀, 곧 여호와께로서 받은 한말씀을 묻고 싶노라(37:17). 그대가 받은 말씀은 무엇이든지 일호도 내게 숨기지 말라. 최악의 것이라고해도 내게 말하라." 그는 보다 기뻐할만한 답변을 듣고 싶어한다. 마치 마음이 한결같으신 하나님을 변덕스러운 마음의 하나님으로 생각한 듯하였다.
(2) 예레미야는 왕에게 권고를 하기전에 먼저 그에게 다짐을 받고있다(15절). 내가 이일을...아시게 하여도 왕이 단정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나는 왕이 그러실까 두려우니이다. 당신이 방백들이 하자는대로 할때에 내가 무엇을 기대할수 있겠나이까?" 예레미야는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로 물들일까봐 주저한 것이 아니다. 단지 임무를 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자신을 보존할 모든 합법적인 수단들을 사용해야만 한다는점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도 역시 그러했었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유익한 권고를 주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토굴속에 가두도록 내어주어 고통스럽게 하였던 그의 무자비에 대하여 비난하지 않았다. "왕이 들으시겠나이까"라고 그는 묻고있다. "확실히 왕께서는 들어야 하나이다. 나는 당신께서 결국 이권고를 따르시는 것을 보게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있나이다. 그리고 이날에 당신의 평강을 위한 일들을 당신께서 알게된 것을 기뻐하시기 원하나이다." 반면에 어떤이들은 이구절을 절망적인 것으로 해석한다. 가령 내가 왕을 권한다할지라도 왕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 "당신께서 듣지 않으시리라고 우려할만한 까닭이 있기에 내 생각은 혼자 간직하고 있겠나이다." 시드기야는 그에게 아무런 답변도 하지않았으며 또 그의 권고를 듣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으려했다. 오직 그는 선지자의 안전에 대해서만 왕의 말로써 그에게 약속한다.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16절). 이일에 대한 시드기야의 맹세는 엄숙한 것이었다. "우리에게 '이영혼을 지으신' 분, 곧 나에게 내 생명을 주셨고 너에게 너의 생명을 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설혹 내 생명이 생명의 주이신 그에게 몰수되어질 것을 안다고하여도 너의 생명을 부당하게 취하지 아니하리라."
(3) 예레미야는 왜 왕이 그조언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면서 권고한다. 그권고는 예레미야 자신의 지혜나 정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진다.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는 반드시 왕과 그성이 '바벨론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들에게 나가서 할수 있는한 최상의 계약을 체결하도록 조언한다(17절). 이것은 그가 백성들에게 권한 것과 같은 조언이었다(2절;21:9). 즉, 하나님의 심판에 순복하라는 것이었다. 왕이 이권고를 취하도록 설득하기위하여 예레미야는 그앞에 선과 악, 생명과 죽음을 제시한다. 만일 항복한다면 그는 자기 자녀들을 칼날로부터, 예루살렘을 화염으로부터 구해내는 것이 된다. 만일 왕이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하게될 것이다.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그렇지만 그가 완고하게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그의 집과 예루살렘은 모두 황폐해질 것이다(18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한 죄인들의 처지이다. 만일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와 다스림아래 복종하면 그들은 살것이다.
(4) 시드기야는 선지자의 권고를 거부한다(19절). 만일 그가 하나님의 권세와 지혜, 선하심에 대하여 합당한 경외심을 가졌더라면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 즉시로 묵묵히 따랐을 터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권고보다도 자기 자신의 어떤 신중한 생각을 우선으로 여긴다. 그가 제시하는 것이란 이것이 전부이었다. 나는...두려워 하노라. "갈대아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니라. 그들의 방백은 명예로운 사람들이기때문에 두렵지않으나 이미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한 유대인들이 두려우니라. 자기들이 항복하는 것을 그렇게도 반대하였던 내가 저희를 뒤따른 것을 볼때 그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다. 그리고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고 말한 것이라." 설혹 항복하는 것이 그가 상상하는 최대의 실수가 된다고할지라도 그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으로, 그리고 자기 가족과 성의 보존을 위하여 결연히 그일을 감행해야 했다.
(5) 예레미야는 왕에게 권고한 것에 이어서 끈덕지게 그에게 조른다. 그는 왕에게 만일 왕이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가 두려워하는 일이 임하지 않으리라고 보증한다(20절). 그무리가 왕을 그들에게 붙이지 아니하리이다. "그들은 당신을 신분에 알맞게 대우할 것이니이다." 원하옵나니...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소서. "나의 이말이 곧 그의 음성이므로 청종하면 왕이 복을 받으리이다." 예레미야는 만일 왕이 복종치 아니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것인지 그에게 말한다. 그것은 왕자신이 '갈대아인의 손에 붙여지리라는' 것이었다. 그가 설령 도망하기를 바랄지라도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23절). 왕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될 것이었다. 네가 이 성으로 불사름을 입게하라 하셨나이다. "왜냐하면 조금만 양보하고 자신을 부정하면 저지할수 있을터인데 당신이 그리하지 않은 때문이니라." 그는 분명코 계속 고집을 부렸던 것에 대하여 마땅한 비난을 받게될 것이며, 그것도 여자들에게서 받게될 터이었다(22절). 이와같이 시드기야는 여자들에게 조롱을 당하게될 것이며, 그때에 그의 모든 아내들과 자녀들은 정복자들의 제물이 될것이었다(23절).
(6) 시드기야는 이회합을 비밀에 붙이고자 한다(24절). 너는 이말을 사람으로 알게하지 말라. 그는 예레미야의 권고에 반대할만한 이유가 아무것도 없었건만 그것을 따르려하지 않았다. 시드기야는 그일을 비밀로 하는 것에만 관심을 쏟았다. 이는 예레미야의 안전을 위함이 아니요, 자신의 신망을 생각해서이다. 예레미야는 방백들이 자기에게 물을때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시받는다. 그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자기를 돌려보내지 말도록 왕에게 간청하였다고 말하여야 했다(25,26절). 그리고 그는 방백들에게 그렇게 말하였으며(27절), 그것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 핵심
38:1-28
예레미야가 적의 손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사건과 시드기야왕이 예레미야의 마지막 권고를 무시한 사실을 드러낸다. 이사건들은 애굽 원군을 패퇴시킨 바벨론 군대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공격했던 B.C. 588년에 일어난것 같다.

# 묵상
예레미야에 대한 처형요구 ( 38:1 )
스바댜, 그다랴, 유갈, 바스훌 등이 예레미야의 처형을 요구하였습니다.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는 전에도 예레미야를 착고에 채운 자입니다(20:1-6).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애굽을 의지하여 시드기야로하여금 바벨론에 반역하도록 선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레미야에 대한 고소 ( 38:4 )
예레미야에 대한 고소내용은,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치아니하고 해를 구하며 그가 이같이 말하여 성의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악한 방백들 ( 38:6 )
방백들은 예레미야를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넣었습니다. 이웅덩이는 우기에 빗물을 받아두었다가 비가 오지않는 5월에서 10월사이에 사용하기위한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물이 없어 진흙으로 가득찬 곳에 생수의 근원이시며 진정한 샘이신 여호와를 아는 예레미야가 빠져있었습 니다. 이는 종교적 미로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을 보여줍니다.
구원받는 예레미야 ( 38:7-13 )
왕궁환관 구스인 에벳멜렉이 위기에 처한 예레미야를 구하게 됩니다. 에벳멜렉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왕의 종’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으며, 그가 예레미야를 구했기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환난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39:15-18).
시드기야의 불신 ( 38:14-23 )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비밀리에 불러서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하여 물어봅니다. 예레미야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많은 백성이 죽게 되고 성은 멸망하게될 것이라고 말하고, 항복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사람들이 두려워 항복할수 없다고 말합니다. 시드기야는 눈앞에 보이는 두려움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보지못한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두려움보다는 보이지않는 더 큰두려움임을 생각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부탁하는 시드기야 ( 38:24-26 )
시드기야는 방백들의 비난이 두려워 예레미야와 대화한 내용을 방백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드기야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로서 잘못된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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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갈대아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 37:1-10
(1) 예레미야의 설교는 무시되었다(1,2절). 시드기야는 고니야, 즉 여고냐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랐으며, 자신의 선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 받은 치명적인 결과들을 알고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받아들이려고 하지않았다. 그와 그신하와 그땅 백성이 여호와께서...하신 말씀을 듣지 아니하니라. 그말씀이 이미 성취되기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그러하였다.
(2) 이때에 예레미야의 기도가 요청되었다. 시드기야는 그에게 사신을 보내어 '너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전에도 그렇게 한적이 있었다(참조. 렘 21:1,2). 그리고 사신중의 한사람인 스바냐는 그때나 이때나 동일 인물이다. 여기서 시드기야의 이행동은 칭찬받을 만하다. 그리고 이일은 시드기야가 내면에 다소나마 선한 것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곤경에 처하였을때 우리의 교역자나 그리스도인 친구들에게 기도를 요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기도를 존중할수 있게되며 우리 형제들을 귀히 여기게 된다. 군왕들은 저희의 기도하는 백성들을 국가의 힘으로 여겨야 한다(슥 12:5,10). 그렇지만 이러한 요청은 예레미야로하여금 그의 입으로 시드기야를 정죄하는 결과밖에 되지않았다. 만일 그가 진정으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간주하였다면, 즉 예레미야의 기도가 유익하다고 생각하였다면 예레미야가 말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을까? 만일 우리가 기도를 요청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말씀을 전해주어도 우리가 듣지않는다면, 그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고 어떻게 기대할수 있겠는가? 시드기야가 선지자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부탁했을때, 차라리 그에게 자기와 함께 기도해달라고 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3) 예루살렘은 갈대아 군대의 퇴각으로인하여 의기양양해 있었으며 예레미야는 그때 자유의 몸이었다(5절). 시드기야는 바벨론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속국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굽왕 바로와 은밀히 결합하고 있었다(겔 17:15). 그리하여 바벨론왕이 이 배역에 대하여 그를 징책하기 위해 쳐들어오자 애굽왕은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하기위하여 군대를 보냈었다. 갈대아인들은 그들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정책적으로 포위망을 풀었을 것이다. 유대 군대가 그들과 결합하기전에,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과 싸우기위함이었다. 이에 대하여 유대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영원히 구함받으리라는 희망으로 스스로 용기를 얻었다.
(4) 예루살렘이 갈대아 군대의 재침을 받으리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갈대아 군대가 돌아오지 않도록 기도해주기를 바라며 사람을 보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고가 이미 내려졌으므로 평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뿐이라는 대답과 함께 그를 돌려보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속여...하지말라(9절). 사단이 비록 미혹하는 자의 우두머리라고 하나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미혹하지 않는한 우리를 어찌할수 없다. 예레미야는 어떤 애매한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자명하게 말한다.
1) 애굽인들은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7절).
2) 갈대아인들은 되돌아와 다시 포위할 것이다.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9절). 그들은 '다시와서 이성을 칠' 것이다(8절).
3) 예루살렘은 분명히 갈대아인의 수중에 떨어지게될 것이다. 갈대아인이 이성을 쳐서 취하여 사르리라(8절). "가령 너희가 그들의 군대를 쳐서 많은 수를 죽이고 부상자만 남긴다하여도 그부상자들이 다시 일어나 이성을 불사르리라"(10절).

Ⅱ. 예레미야의 투옥 37:11-21
예레미야에 관하여 계속 기록되고 있다. 그는 다른 어느선지자들보다도 말씀을 자기 자신에 관하여 많이 연관시킨 선지자이다.
(1) 기회가 생기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벗어나 시골로 도망치려고자 한다(11,12절). 바로의 군대로인하여 '갈대아인의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떠났을'때 예레미야는 시골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포위망이 풀린틈을 타서, 살 궁리를 찾아 시골로 가는 백성들틈에 끼어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려고 하였다. 왜냐하면 대단히 유명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리속에 묻혀서 오막살이에서 사는 것을 만족해 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예루살렘에서는 아무런 유익도 끼칠수 없음을 알았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그러므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2) 이를 시도하는 중에 예레미야는 탈주자로 간주되어 붙잡혀 감옥게 갇힌다(13-15절). 그는 '베냐민 문'에 이르렀다. 그때에 아마도 그문을 지키는 책임을 맡은 것처럼 보이는 '문지기의 두목'이 그를 발견하고는 체포하였다. 그문지기는 하나냐의 손자이었는데, 유대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와 논쟁을 벌였던 거짓 선지자 하나냐(렘 28:10)의 손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 젊은 문지기 두목은 그사건으로 말미암아 예레미야에게 적의를 품고 있었다고 추가로 설명되고 있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라는 죄목을 부과하였다. 이는 있을수도 없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갈대아인들은 이제 떠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사려분별과 무죄의 확신, 그리고 온유함을 지닌 예레미야는 이죄목을 부인한다. 망령되다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나는 합법적인 일신상의 문제로 가고있는 중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가 선지자이었으며 그의 말은 제사장으로서의 말이었지만 자기의 결백에 대한 그의 항의는 고려조차 되지 못하였다. 그는 사적인 방백회의에 끌려갔고, 그들은 사실을 조사해봄도 없이 문지기 두목의 비열한 거짓 증언을 근거로 그를 마구 취급하였다. 방백들은 노하여 그를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 그감옥은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있는 가장 극악한 감옥이었다. 이 감옥안에서 '토굴'속으로 예레미야는 내던져졌다. 그곳은 어둡고 추우며 습기차고 더러운 곳이었다. '옥' 곧 '음실'에서 그는 유폐되었다. 예레미야는 거기에서 여러날동안 거하였다.
(3) 시드기야가 마침내 그를 위해 사람을 보내어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아마도 갈대아 군대가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한 이후에야 그러한 듯싶다. 그들의 헛된 소망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그들은 일찍이 있었던 그 어느때보다도 더 큰혼란에 처해있었고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면 황급히 선지자를 불러오라. 내가 그와 상의하리라"고 시드기야는 말했을 것이다.
1) 왕은 그를 하나님의 사자로 생각하고 그의 말을 경청하고자 불렀다. 시드기야왕이...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17절).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부끄러이 여겼다. "위로할 말씀이 있느뇨? 갈대아인들이 다시 퇴각하리라는 어떤 희망을 우리에게 줄수 있느뇨?" 예레미야의 생명과 안위는 시드기야왕의 수중에 있었다. 그러나 왕은 지금 오히려 예레미야의 호의를 바라며 요청을 하고 있다. 이러한 좋은 기회를 가졌을때 예레미야는 "있나이다. 그러나 당신과 당신의 백성을 위한 위로의 말은 없나이다"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왕이 바벨론왕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 만일 예레미야가 육신의 요구대로 하였다면 듣기좋은 대답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 처하여 자기를 가장 최악의 상태에 빠뜨릴수도 있는 말을 해야할지, 아닐지 선택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신실하게 하시는 여호와의 자비를 얻은 자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자비를 얻기위하여 하나님께나 자신의 군주에게나 불충실하게 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시드기야에게 진실, 곧 온전한 진실을 말한다. 예레미야는 이기회를 이용하여 왕과 그의 백성들이 거짓 선지자들을 신뢰한 사실을 책망하였다. 그들은 바벨론왕이 결코 오지않을 것이라고 장담하였으며 그가 일단 퇴각하였을때도 다시 오지않으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19절). 왕의 선지자들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왕께서 평강하리라고 예언했던 자들이 어디 있나이까?"
2) 예레미야는 이기회를 가련한 죄수로서 사적인 청원을 하는 기회로 사용한다(18,20절). 그는 겸손히 왕에게 간구한다. 내가 왕에게나 왕의 신하에게나 이백성에게 무슨 죄를 범하였관대. "내가 무슨 율법을 파하였기에 나를 옥에 가두었나이까?" 그는 진지하게, 또한 매우 애절하게 간청한다(20절). "나를 저 더러운 감옥,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내가 거기서 죽을까 두려워하니이다." 내 주 왕이여 이제 청컨대 나를 들으시며 나의 탄원을 받으사. 여기에는 방백들이 자기를 부당하게 취급하였다는 한마디의 불평도 없다. 오로지 왕에게 정중하게 간청하고 있다. 하나님의 일에 관하여는 사자와 같아도 자기 자신의 일에 관하여는 양과 같아져야 한다.
① 왕은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토굴에서 죽지않도록 배려하였다. 그로 '시위대 뜰'에서 지내면서 자유로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하였다.
② 왕은 '성중에 떡이 다할때까지' 공용물자가운데서 그에게 '매일 떡한덩이씩 주게' 하였다. 시드기야왕은 예레미야를 석방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할 용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한 것도 잘한 처사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감금당하는 것들도 유익이 되게하시며 감옥의 뜰로도 푸른 초장같이 되게 하신다.

# 핵심
37:1-21
예레미야 투옥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은 B.C. 588년경 애굽 원군이 출정함에 따라 바벨론 군대가 새로운 전선을 구축하기위해 잠시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었던때를 배경으로 함.
렘 37:12절의 바른 해석
이구절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①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직전에 아나돗으로 피신하고자 했다는 견해. 이는 끝까지 민족의 운명과 함께한 예레미야의 행동과 배치된다. ② 32:1-15절에 언급된바 있는 아나돗 땅의 매입사건을 가리킨다는 견해. ③ 예레미야가 아나돗의 세습토지를 유산으로 분배받고자 했다는 해석. 두번째와 세번째의 해석이 타당성을 지닌다. 두번째 견해를 취하려면, 예레미야가 이미 사둔 땅을 보러 간 것이 아니라 그땅의 매매문제를 의논하기위해 간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 묵상
시드기야 ( 37:1-5 )
고니야 대신 느부갓네살에 의해 유다왕이 된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그는 반바벨론 정책을 폈으며 애굽과 동맹을 맺었습니다(겔17:15). 즉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 곧 애굽을 더욱더 의지했던 것입니다.
완악한 자들의 희망 ( 37:2-10 )
본문은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훈입니다. 여호야김의 아들을 대신하여 왕위에 오른 시드기야는 유다를 포위했던 갈대아인들이 물러날 것으로 생각하고 예레미야에게 기도해 줄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갈대아인들이 다시 성을 포위하여 탈취할 것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변역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변함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적인 노력과 확신으로 변경할수는 없습니다. 회개가 없는 소망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인 유다 사람들 ( 37:9, 10 )
하나님의 말씀은 유다가 갈대아 군대에 의해서 멸망받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왕과 백성들은 애굽을 의지하여 바로의 군대가 갈대아 사람들을 무찌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갈대아 군대는 애굽 군대와 싸우려고 잠시 떠났다가 다시 더많은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를 붙잡으려는 구실 ( 37:12-15 )
적대자들이 예레미야를 붙잡으려는 구실은, 예레미야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고 예루살렘을 빠져나가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단지 베냐민 땅에서 백성중 분깃을 받으려고 예루살렘을 떠나려했을 뿐입니다. 결국 예레미야는 친애굽파인 왕과 그의 방백들에게 친바벨론파로 의심받아 옥에 갇혔습니다.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비밀회담 ( 37:17-20 )
본문은 시드기야와 유다에 대한 예레미야의 멸망 선언입니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참선지자로 알려진 예레미야로부터 희망적인 소식을 듣고자했으나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레미야는 듣는 자의 신분이나 자신의 처지를 초월해 진실한 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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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바룩이 기록한 두루마리 책 36:1-8
에스겔이 예언을 시작하였을때 그는 환상중에 두루마리 책을 받았다(겔 2:9,10;3:1). 예레미야의 예언이 끝날무렵인 본문에서 그는 실제로 두루마리 책을 기록한다. 이는 백성들로하여금 거기에 담겨진 내용을 알게하기 위함이었다.
(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그의 설교의 개요를 기록하라는 명을 내리신다. 그가 처음 말씀을 전파하기 시작한 요시야 13년에서부터 여호야김 통치 4년인 '오늘까지'의 설교에 대해서이다(2,3절). 백성들이 한번 들은내용은 다시 되풀이하여 말해져야 했으며 그들은 그내용을 다시 접할수 있어야 했다. 그렇게함으로써 잊혀진 내용이 다시 상기될수 있으며 처음에는 저희 마음에 아무런 감화도 주지못하던 것이 두번째에는 그들을 사로잡을수 있게하기 위해서였다. 두루마리 책을 기록하는 이유가 주어지고 있다(3절). 유다 족속이...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 듯하니라. 즉 그들이 이말씀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 것이라는 희망에서이다. 죄인들의 회심이야말로 사역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목적인 것이다. 이점을 알지못한다면 말씀을 들어도 헛될 뿐이다. 그리하면 내가 그악과 죄를 사하리라. 이말씀은 분명히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하고 있다. 죄인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는한, 그죄를 용서받기를 기대할수 없다. 이말씀은 또한 그의 자비를 의미하고 있다. 즉 그는 언제나 죄를 용서하실 채비를 갖추고 계시며 죄인이 용서함 받을만한 자격이 구비되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다. 그러므로 그는 그가 사하실수 있도록 우리를 회개하게 하기위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하신다.
(2) 예레미야가 자신의 서기 바룩에게 한 지시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른 것이다(4절).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그러나 그는 악필이었으며 바룩처럼 빨리 아름답게 쓸수 없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그는 바룩을 자기 서기로 삼았다. 사도바울도 자신의 서신가운데 단지 몇편만을 직접 자신이 썼었다(갈 6:11;롬 16:22). 하나님께서는 갖가지 은사를 주신다. 어떤이들은 언변에 좋은 재질이 있으며 어떤이들은 기술하는데 재질을 보인다. 그러므로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너는 쓸데없다'고 말할수 없다(고전 12:21). 하나님의 영은 예레미야에게 구술하였고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구술하였다. 만일 우리가 바룩의 이름으로된 외경을 신뢰할수 있다면 그가 후에 바벨론 포로생활 시기에 선지자로 활동한 것으로 볼수 있다. 바룩은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였다. 이것은 양피지나 우피지 조각들을 함께 연결하여 긴두루마리로 만들어서 막대기에 감은 것이었던 듯하다.
(3)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그가 쓴것을 백성들에게 낭독하라고 명하였다. 예레미야는 '감금을 당하여 여호와의 집에 들어갈수 없었던' 듯하다(5절). 그를 잡기위해 관리를 보냈던 것을 볼때, 예레미야가 밀폐된 옥에 갇힌 것은 아니었으나(26절) 왕명에 의해서 성전출입은 금해져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바울도 감옥에 있음으로 직접 방문할수 없는 교회들에게 서신을 보냈었다. 하나님께서 그가 말씀하신 두루마리의 내용을 읽도록 명하셨을때, 그것은 그들이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까' 함이었다(3절).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명하면서 '그들이 여호와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듯 하니라'라고 말하였다. 하나님께 은혜로 우리를 돌이키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돌이킴을 위하여 꼭 필요한 일이다. 이 명을 좇아 바룩은 거룩한 집회가 있는 곳에서마다 '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을 낭독하였다'(8절).

Ⅱ. 공개된 두루마리 책의 내용 36:9-19
바룩은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중대한 낭독이 있기전에도 듣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주 이두루마리 책을 읽어주었던 듯하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지시가 여호야김 제 4년에 주어진 반면에 본문의 일은 제 5년에 행해진 것이기 때문이다(9절). 그러나 혹자는 이책을 기록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완성된 것은 그다음 해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1) 국가는 신앙적으로 보이게끔 하기위하여 공식적인 금식일을 선포하였다(9절). 이는 갈대아 군대의 침입으로인한 곤경이나 혹은 가뭄 때문이었다(참조. 렘 14:1). 모든 백성이...금식을 선포한지라.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못하는 자, 혹은 그것을 대적하는 자들도 이렇듯 경건의 모양에 지나지않는 것일지언정 경건과 헌신에 대한 대대적인 시위를 보여줄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가식적인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개심이 없는 금식, 죄를 돌이키지 않는 금식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키지 못한다(요 3:10).
(2) 바룩은 금식일에 여호와의 집에서 예레미야의 설교를 공개적으로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는 그마랴에게 속해있는 방에 서서 창 또는 발코니를 통하여 뜰에 있는 백성들에게 낭독하였다(10절).
(3) 바룩이 낭독하던 때에 '서기관의 방'이라고 불리워진 서기관 집무실에 있었던 방백들에게 이일이 전해졌다(12절). 비록 방백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집에 가서 금식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경청하라고 명했으면서도 자신들은 거기에 참석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바룩이 읽은 것을 미가야가 방백들에게 전하였다. 미가야의 아버지 그마랴는 바룩에게 그것을 낭독하도록 방을 빌려줄만큼 친분있는 자이었다.
(4) 바룩은 그들앞에 불려가서 방백들가운데 앉아 그 전체내용을 다시 읽으라는 명을 받는다(14,15절). 그래서 그는 기꺼이 그렇게 행하였다.
(5) 참석한 방백들은 바룩이 읽은 말씀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16절). 그들이 그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모두가 두려워하며 서로 바라만보았다. 이는 사도바울의 변론을 듣고 두려워하였던 벨릭스 총독과 같았다. 그비난은 합당한 것이었고 그예언은 이제 정당한 방법으로 수행되어질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크게 당황하였다. 본문에서는 이두루마리가 낭독되었을때 백성들이 어떤 감화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10절). 그러나 방백들은 그말씀으로 인하여 놀랐으며 '서로보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이모든 말을 왕에게 고하기로' 합의하였다. 만일 왕이 그것을 합당히 여긴다면 그들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내릴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왕의 마음을 잘알고 있었기에 바룩과 예레미야에게 몸을 피하도록 권고하였다(19절). 그리고 왕이 죄를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격분하게 될것을 예기하면서 그들에게 안전을 도모하도록 권하였다.
(6) 그들은 바룩에게 보잘것없는 사소한 질문을 던졌다. 네가...이모든 말을 어떻게 기록하였느뇨(17절). 마치 그들은 거기에 무슨 이상한 점이 있는 것으로 의심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바룩은 그들에게 명확하게 답하였다. 곧 예레미야가 구술하였고 그가 기록하였다고 대답하였다(18절).

Ⅲ. 책을 소각한 여호야김 36:20-32
(1) 두루마리에 대한 말을 듣자 왕은 그것을 가져오게 하여 자기에게 읽게하였다(20,21절). 그는 바룩이 직접와서 그것을 읽기를 바라지 않았다. 바룩이 읽었더라면 누구보다도 지혜롭게, 권위를 가지고 열의있게 낭독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왕은 두루마리를 가지고와서 기다리고 서있던 그의 시종 여후디에게 읽게하였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자들은 이 왕처럼 곧 겉으로 드러난다. 그들은 말씀을 싫어하여 그것을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길뿐만 아니라 나쁘게 생각한다.
(2) 왕은 방백들과는 달리 그것이 낭독되는 것을 끝까지 참고 듣기조차 아니하였다. 그는 '삼편 사편'까지 듣고는 격분하여 '소도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조각조각 화로 불에 던져버렸다. 그는 '온두루마리'가 다 소각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22,23절). 이것은 이메시지를 보내신 하늘의 하나님께 가장 불경한 모독이었다.
1) 이와같이 그는 비난에 대하여 참지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 바룩과 예레미야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었다. 그가 만일 이감정을 품고있는 중에 그들이 잡히기만 하였다면 조각으로 잘라 죽이려하였을 것이었다.
3)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경고를 결코 따르지않으리라는 완악한 결의를 표명하였다.
4) 그는 어리석게도 자기에게 선포된 경고를 물리치고자 하였다. 그는 이두루마리에 담겨진 사항들이 더이상 퍼져나가지 않도록 효율적으로 처리했다고 생각하였다.
(3) 왕이나 그의 방백들중 누구도 그말씀을 듣고 전혀 감화를 받지 아니하였다. 왕과 그신하들이 이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아니하였고(24절). 처음에 들었을때에는 '그모든 말씀을 듣고 놀랐던' 방백들도(16절) 이제는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처음에는 어느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왕이 그것을 경히 여김을 보고는 자기들의 관심도 떨쳐버렸다.
(4) 두루마리를 불에 태우는 것을 저지하려고한, 지각있고 은혜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던 세명의 방백들이 있었으나 허사였다(25절).
(5) 자신을 잡으려고 의도된 하나님의 경고를 이와같이 태워버린 여호야김은 이제 보복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자들인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6)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이 불태운 두루마리에 씌여졌던 말씀과 동일한 내용을 또다른 두루마리에 기록하라는 지시와 명령을 받았다(27,28절). 원수들이 우세를 떨치며 수많은 성경을 불태울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들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지 못하며 그말씀의 성취를 저지하지 못한다. 비록 율법이 기록된 판이 부숴졌을지라도 그것은 다시 만들어졌다. 마찬가지로 불태워진 두루마리 책의 재는 다른 불사조로 재생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은 영영히 있을 것이다.
(7) 유다의 왕은, 왕이기는 하지만 기록된 말씀에 대하여 행한 이불법에 대해 만왕의 왕에게 엄중히 헤아림받을 것이다. 여호야김은 '바벨론왕이 와서 이땅을 멸하리라 하는말을 이두루마리에 기록하였다'는 이유로 화를 냈었다(29절). 하나님과 선지자들이 진실을 말하였다는 이유로, 즉 그에게 임박한 멸망에 대해 말하였다는 이유로 그의 원수가 된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게 멸망을 방지할 방책을 말하였다는 것이 그들이 그의 대적이 된 이유였다. 하나님의 진노가 느부갓네살의 손을 통하여 제일 먼저 왕과 그의 가족에게 임할 것이었다. 그는 멸절된 것이요 몇주 지나지않아 그의 아들은 폐위될 것이며 그의 왕복은 죄수복으로 바뀌어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에게 다윗의 위에 앉을 자가 없게될 것이요, 그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매장되지도 못할 것이다. 혹은 도랑에 던져서 나귀와 같이 매장될 것이다. 게다가 '자손과 신하들'까지도 그와의 관계로인하여 최악의 운명을 맞게될 것이다(31절). 그들이 징벌받을 것은 왕의 죄악으로 인함이 아니요,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함이다. 이두루마리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선포된 모든 재앙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었다.
(8) 두루마리가 다시 쓰여지게 되었을때, 전에 기록된 것외에도 그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다(32절). 즉, 보다 많은 경고가 실려있다. 이처럼 그들이 하나님과 거스리는 길을 계속 고집하고 있기때문이며 이로인해 하나님께서는 풀무불을 칠배나 더뜨겁게 하실 것이다.

# 핵심
36:1-32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소명받은때로부터 여호야김 4년까지 선포한 예언을 서기관 바룩을 통해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낭독했다. 여호야김은 그두루마리에 담긴 심판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불태웠다. 이에 선지자는 새로운 두루마리를 기록하여 재앙을 선포했다.
두루마리 책(36:2)
양피지나 파피루스 따위에 기록된 고대의 문서이다(스 6:2; 겔 3:1-3). 몇장씩 서로 길게 이어서 말은 물건으로 폭은 25-30cm이고, 길이는 10여m에 달하기도 한다. 두루마리 양쪽끝에는 나무 마름대를 대어 감을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두루마리는 한쪽면에만 글을 썼는데, 양면에 다 쓰는 경우도 있었다(겔 2:10; 계 5:1).

# 묵상
두루마리 낭독이유 ( 36:5-7 )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혹시 백성들이 여호와앞에 기도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까하는 기대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이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와 분이 너무 크기때문에, 자신을 박해하고 가둔 자들일지라도 회개하여 악에서 떠나 하나님의 재앙을 피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두루마리의 낭독시기 ( 36:9 )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5년 9월(주전 605년 12월경)으로 왕은 이때 국난을 당해서 금식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금식이 아니라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낭독된 글을 듣고 놀란 방백들 ( 36:16 )
방백들은 바룩을 통해 낭독된 말씀을 듣고 두려움과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바룩을 통해 선포되었을때 미가야를 비롯한 여러 방백들은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처한 상황을 돌아보게 되었고, 이모든 말을 왕에게 알려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전령으로의 사명을 성실히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여호야김과 요시야 ( 36:20-26 )
요시야와 그의 아들 여호야김은 종교적 태도에 있어서 그차이가 많았습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을 발견한후 그내용을 듣고 곧 그의 옷을 찢고 참회했습니다(왕하22:11). 그러나 그의 아들인 여호야김은 예레미야의 글을 듣고 그것을 칼로 베어 불태우고 예레미야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당시 예레미야의 글에는 그를 탄핵하고 그가 ‘예루살렘 문밖에서 나귀같이 매장되리라’(22:19)는 예언이 실려있었을 것입니다. 즉 요시야는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백성들을 주께로 돌아오게한 다윗과 같은 길을 간 왕이었지만, 그의 아들 여호야김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처럼 백성들을 타락의 길로 이끈 사악한 왕이었습니다.
여호야김에 대한 예언 ( 36:30, 31 )
바룩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책을 불사른후,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예레미야로하여금 다른 두루마리에 모든 말을 기록하라고 명하십니다. 두번째 두루마리에는, 그의 후손중에서 왕위에 앉을 자가 없게되고 그의 시체는 버림을 입어서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사악한 행위로인해서 그에게는 더욱 강한 심판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태웠으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라지게 할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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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레갑 족속의 모범 35:1-11
이장은 '여호야김때에' 일어난 사건과 말해진 것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1절). 이것은 그의 재위의 말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벨론왕이 그의 군대를 이끌고 '이땅에 올라온' 후의 일이기 때문이다(11절). 이것은 열왕기하 24:2절에 언급되고 있는 침략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에 대한 여호야김의 반역으로 인한 것이었다. 예레미야는 반항적인 백성들에게 레갑 족속을 예로들어 말하나. 레갑 족속은 스스로를 구별하여 살아가고 있는 족속이었다. 역대상의 말씀에 나타난바에 따르면 그들은 본래 겐 족속이었다(대상 2:55). '이는 다 레갑의 집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족속이더라.' 겐 족속가운데 적어도 이스라엘 땅에 정착할 권리를 얻었던 자들은 모세의 장인 호밥의 후예였다(삿 1:16;삼 15:6;삿 4:17). 이 겐 족속가운데 한집안이 레갑으로부터 그이름을 얻었다. 레갑의 아들, 혹은 직계 후손이 지혜와 경건으로 유명했던 요나답이었다. 그는 이사건이 있기 거의 300년전인 이스라엘 예후왕시대에 크게 이름을 떨쳤었다(왕하 10:15,16).
(1) 요나답이 그의 자손들에게 부탁한 생활규범이 나오고 있다. 그의 후손은 신실하게 이를 준수하였다.
1) 그것은 두가지 두드러진 교훈으로 요약될수 있다.
① 그는 나실인의 계율에 따라 후손들에게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말도록' 금하였다. 우리는 술을 도에 지나치게 마시거나 술로인해 해를 입기 쉽다. 따라서 전혀 마시지 않든가 아니면 디모데와 같이 약으로 조금씩 마시는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다(딤전 5:23).
② 그는 후손들에게 '장막에 거처하라'고 명하였다. 집도 짓지말며 땅을 사거나 세내어 빌리거나 소유하지 말라고 하였다(7절). 이것은 엄격함과 고행의 사례이다. 장막은 빈한한 거처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겸비하는 것을 가르쳐주었을 것이었다. 그곳은 냉기가 있는 거처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단련을 가르쳐주었을 것이며 몸을 태만히 게으르게 굴지않도록 했을 것이었다. 그 곳은 또한 이동할수 있는 거처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정착을 생각하지 말고 이세상 어느곳에든 거할수 있도록 가르쳤을 것이었다. 그들은 저희 '평생에 장막에 거처'해야 했다. 이렇게하여 어려움을 견디는데 익숙해졌을 것이 틀림없다.
2) 어찌해서 요나답은 이같은 생활규범을 후손들에게 명하였는가? 그것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안녕에 대해 그가 가졌던 진정한 관심을 반영해주고 있다. 그는 어떤 서약이나 맹세에 의해 이규범을 지키도록 명하지 않았으며 단지 이규율이 교화에 유익하다고 여겨질때에 따르도록 권면하였다(11절). 그들의 조상들은 유목생활에 익숙해 있었다(출2:16). 그리고 그는 후손들로하여금 그것을 지키게하려는 것이었다. 모세는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귀화할 것을 희망하였었다(민10:32).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땅에서 우거하며 나그네로 지내며(7절) 거기에서 어떤 유업도 갖지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수고함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며 적은 수입과 어려운 생활에 적응해야만 한다. 궁벽한 곳에서 낮은 신분으로 사는 겸비와 자족이야말로 종종 사람의 가장 확실한 보호책이자 최상의 정책이다. 요나답은 그당시에 만연한 전반적인 부패들을 보았다. 에브라임 족속가운데는 술취한 자들이 많았고 그리하여 그는 자기 후손들이 그들로인해 타락하게 될까 우려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후손들에게 시골에 근거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살도록 명하였다. 그렇게함으로써 그들은 어떠한 불법적인 쾌락에 이끌려들지 않을수 있었으며 합법적인 쾌락의 수단조차도 스스로 거부하였다. 요나답은 백성들이 그토록 비참하게 타락하여 멸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환난의 한가운데에서조차 자기 가족들이 평강을 지닐수 있도록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들로하여금 그들의 소유에 매이지 않게하면, 그것을 박탈당했을때에 고통이 적은 것이었다. 그들은 법칙과 규율아래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우리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으며 우리 자녀들에게 그렇게 행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유익하다.
(2) 그의 후손들은 이규율을 얼마나 엄격하게 준수하였는가(8-10절). 그들은 대대로 '선조 요나답이 명한 모든 말을 순종하였다.'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한대로 다 준행하였노라. 그들은 포도가 풍성한 나라에 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집도 짓지 아니하고 땅을 갈지도 아니하였다. 오로지 목축을 유업으로하여 살았다. 그러나 꼭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로 행할수 있었음을 보게된다(11절). '바벨론왕이 이땅에 올라왔을때에' 그들은 그때까지는 장막에 거하고 있었지만 이제 장막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곳에 있는 집에 거하였다. 엄격한 계율의 규칙들은 지나치게 가혹하게 만들어져서는 아니된다. 필요한 경우에는 예외도 허용되어져야 한다. 이 레갑 족속들이 만일 자신의 안전을 도모할 적절한 수단을 가지지 못하였더라면 저의 집안의 법칙과 관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시험하고 그를 불신하였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성전으로 데려와 선지자의 방으로 인도하였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른 행동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레갑 족속들에게 포도주를 좀 들라고 권했을뿐만 아니라 가능한한 강하게 그들을 유혹하기위하여 그들앞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마시라 너희는 이를 마음대로 마실수 있노라. 너희는 예루살렘에 살러왔음으로 이미 규칙중의 하나를 파기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이것은 마실수 없단 말이냐. 성중에 있을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해야하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일제히 거부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노라. 그것은 우리의 법칙을 거스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였다. 선지자는 그들의 결심이 굳은 것을 알게되었다.

Ⅱ. 유대인의 불복종 35:12-19
레갑 족속의 지조에 대한 시험은 단지 한징표를 위하여 의도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것의 적용을 보게된다.
(1) 레갑 족속이 저희 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것을 준수하였다는 것과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명한 것을 불순종하였다는 것이 비교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는 유대인으로하여금 레갑 족속의 모범을 보고 부끄러워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너희가...교훈을 받지 아니하겠느냐(13절). "너희의 죄와 의무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전혀 없단 말이냐. 너희는 레갑인들이 저희 선조의 명을 얼마나 잘 준수하는지 보지 못하느냐(14절). 그러나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는구나(15절)." 레갑 족속은 저희들과 같은 한인간에게 그토록 순종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신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그들의 영의 아버지께 불순종하였다. 게다가 레갑 족속들은 그들의 선조에게 의부를 행하도록 일깨움을 받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자주 선지자들을 보내셨었다(14절). 하나님께서는 그백성들에게 좋은 땅을 주셨으며 만일 그들이 순종하였다면 계속하여 거기에 거하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감사함으로 순종해야만 했으나 그들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2) 예전에 많이 나왔듯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심판이 경고되고 있다. 레갑 족속은 심판을 받는다하더라도 흥하게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선조가 그들에게 명한 그명령을 준행하였고' 계속하여 복종하였기 때문이다(16절). "그러나 패역하고 불경을 일삼는 이백성은 나를 듣지 아니하였다. 내가 갈대아 군대를 통하여, 율법으로나 선지자들로 그들에게 대하여 선포한 모든 재앙을 내리리라. 내가 그들에게 말하였었고 그들을 불렀노라. 곧 말로 말하였고 섭리로 불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며 대답지 아니하였노라."
(3) 레갑 족속들은 저희 집안의 법을 꾸준히 준수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자비가 약속되고 있다. 그들의 지조가 시험된 것은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고는하나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태도는 찬양과 영예와 영화를 받을만한 것이었다(18,19절). 레갑 족속은 비록 남겨줄 재산은 갖지 못했을지라도 그 대를 이을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비록 그들은 제사장도 아니고 레위인도 아니었으며, 성전을 섬기는 일에 직분을 갖지도 못하였지만 정기적인 예배에 계속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길수 있게 되었다.

# 핵심
35:1-19
레갑 족속의 순종을 들어, 하나님의 거듭된 권고와 명령에 불순종하는 유다 백성의 완악함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는 내용이다.
레갑 족속(35:2)
유다 평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가문으로, 레갑의 아들인 요나답의 경건한 절제와 관련된 명령을 자손대대로 지켰다. 부패한 사회상으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히 분리하여 유목민적 생활을 고수하고 포도주를 금함으로써 순수성을 보존함과 아울러 정착 문화로인한 유약함과 사치를 과감히 배격하고자 했다. 굳건했던 그들의 삶은 무절제한 향락과 사치가 판을 치는 현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 묵상
레갑 족속 ( 35:2 )
레갑 족속은 함맛의 후손으로 겐 족속이었습니다(대상2:55). 이 겐 족속은 이스라엘안에 흡수되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후에도 장막생활을 하며 포도주를 마시지않는 등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위한 순결성을 보존하고자 했습니다. 레갑 족속의 이러한 삶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영원한 거주지인 천국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요나답이 세운 율례 ( 35:6-10 )
레갑 족속의 조상 요나답이 세운 율례에 의하면 포도주를 끝까지 마시지 말것과 집도 짓지말고 파종도 하지말며, 포도원은 재배치말고 장막에서만 거하라고 했습니다. 레갑 족속은 요나답의 이율례를 다 순종하며 지키기로 했습니다. 레갑 족속의 이러한 순종의 태도와 삶은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다 백성들에게 수치를 느끼게 했습니다. 본문의 레갑 족속의 삶은 거처할 집도 없고 포도원이나 밭이나 농지를 두지않는 삶 곧 유목민의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장막생활을 하며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삶은 본향인 하나님나라를 고대하며 나그네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전형입니다.
레갑 족속과 유다 족속 ( 35:14 )
하나님께서는 레갑 족속의 예를들어 유다의 죄를 공박하십니다. 레갑 족속은 그들의 선조 요나답의 명령에 순종하였으나 유다 족속은 예레미야의 권고를 거부했습니다. 이는 유다 족속이 그들의 선조를 지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는 선지자들을 수차례에 걸쳐 계속해서 그들에게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레갑인들의 생활지침이 그들을 정죄하는 하나의 본보기가 될것입니다.
레갑 족속이 받은 복 ( 35:18, 19 )
레갑 족속은 미디안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충성하라는 조상의 유전에 대해 충실했습니다. 온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불신앙과 불경건으로 치닫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조상들의 유전을 충실하게 따랐으며 시류에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그결과 하나님은 영영히 그앞에서 책임을 맡은 봉사자로서 살게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처럼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을 섬길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와같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제사장이 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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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시드기야의 운명에 대한 예언 34:1-7
시드기야왕에 관한 이예언이 예레미야에게 전해졌고, 따라서 예레미야는 모든 관련된 자들에게 이소식을 전하였다. 이것은 그가 감옥에 갇히기 전이었다(렘 32:4).
(1) 이메시지는 '바벨론왕이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예루살렘과 그모든 성읍을 칠때' 시드기야에게 전달되었다(1절). 바벨론왕은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아직 방어중에 있는 성읍들은 '라기스와 아세가' 둘뿐이었다(7절). 이것은 사태가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암시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시드기야는 여전히 완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2) 시드기야는 이전에도 자주 들었던 말씀, 곧 성읍들이 갈대아인들의 손에 붙여질 것이며 그들이 그'성을 불사를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2절). 그는 죄수가 되어 느부갓네살앞에 끌려갈 것이며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이었다(3절). 그렇지만 에스겔은 그가 바벨론에 끌려갈지라도 그땅을 보지못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눈이 뽑혀지기 때문이다(겔 12:13). 그는 포로로 죽을 것이다. 그러나 칼에 죽지는 아니하며 '평안히 죽을 것이다'(5절). 그가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행들을 포로된동안에 회개하였으며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와 화해하셨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평안히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록 옥중에서 죽을지라도 사람은 평안히 죽을수 있다. 그가 받은 고난은 그에게 변화를 가져왔고 그리하여 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큰손실로 여겨졌다. 궁성에서 회개하지않고 살다가 죽느니 차라리 감옥에서 회개하고 죽는 편이 더낫다. 사람이...너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슬프도다 주여 하리라. 이것은 그의 형제 여호야김은 가지지 못하였던 영예였다(렘 22:18).
(3) 예레미야는 이메시지를 충실하게 전하였다. 비록 그것이 사실로 입증될 것이 분명하고 또 그로인하여 위험에 처하리라는 것을 그가 알았을지라도, 그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해야하는 메시지였다(이 메시지로인해 그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모든 말씀을 시드기야에게 고하였다.'

Ⅱ. 반역한 백성들의 운명 34:8-22
한 특별한 사건에 대하여 예언되고 있다.
(1) 예루살렘이 갈대아 군대에 겹겹이 포위되어 있는동안에 왕과 백성들은 그들의 종에 관하여 한가지를 개혁하기로 동의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같은 동족으로서 종이된 사람들을 7년이상 부리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즉 그들이 연한을 채운후에야 자유를 얻을수 있었다. 그들이 빚을 갚기위하여 스스로 팔렸거나 아니면 범죄에 대한 징벌로 재판관에 의하여 팔렸거나 간에 마찬가지였다. 전쟁으로 잡혀오거나 돈을 주고 사온 이방인들은 영구적인 종으로 부릴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동족은 7년동안만 부릴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들과 맺으신 언약에서 규정하셨다. 그때는 저희 선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때'이었다(13,14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정하신 최초의 형법이었다(출 21:2).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땅 종 되었던 곳에서 이끌어내셨으며 이와같이 하여 그들로하여금 그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게 하려고하신 것이었다. 즉, 애굽인들이 그들의 선조에게 행한대로 따르지말고 종된 자들을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놓아주게 하셨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연민은 우리로하여금 형제들에게 연민을 품게 한다. 우리가 구속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과 그들의 열조는 이법을 파기하였다. 세상적인 유익이 하나님의 언약보다도 더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들은 종들이 7년을 마쳤을때 저희 사업이 더욱 나아진 것을 알게되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붙들어두려고 하였다. 너희 선조가 나를 듣지 아니하며(14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 선조들도 그렇게 행하였으므로 자기들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과 그들의 선조의 이 죄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종으로 만드셨고 그것은 공의로운 처사였다. 갈대아 군대에 의해 포위당하자 그들은 이일에 있어서의 저희의 잘못에 대해 말하며 즉시 개선하였다. 그리고 재앙이 임하여서야 이백성을 놓아주기로 결심했던 발로처럼, 자유를 얻을 자격이 있는 모든 종들을 풀어주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하여 그들을 깨우쳐 주었었다. 그들은 선지자들로부터 저희 히브리 동족 노예들을 '자유케해야' 한다고 들었었다(10절). 왕과 '방백들과 모든 백성이 각기 노비를 자유케하기로' 합의하였다. 백성들은 자기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했으므로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그들은 엄숙한 맹세와 언약으로 이일을 행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렇게하여 그들은 하나님과 그들간에, 또한 그들 서로간에 약속한 셈이 되었다. 이언약은 신성한 장소에서 행해졌다. 내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앞에서 언약을 세웠거늘(15절). 즉 그들은 하나님앞에서 언약하였다. 그것은 중요한 징표로 인준되었다. 그들은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두사이로 지났다'(18,19절). 그리고 "만일 우리가 지금 약속한 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우리들도 이와같이 쪼개지리라"고 무서운 재앙으로 스스로 저주하였다. 그들은 이렇게함으로써 하나님의 명령에 스스로 복종하였으며 '노비를 자유케 하였다.' 그성이 포위당하고 있었으며 그들을 놓아주면 더욱 상황을 악화시킬지도 몰랐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이와같이 그들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정당히 행하였다'(15절).
(2) 그러나 포위가 풀리고 위험이 사라지리라는 희망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선을 돌이키고 놓아준 종들에게 다시금 종살이를 강요하였다. 바벨론왕의 군대가 그들을 떠나가고 있었다(21절). 바벨론왕의 승리를 저지하기위하여 바로가 애굽 군대를 몰고오고 있었으므로 갈대아 군대는 잠시 포위망을 풀었던 것이다(37:5). 그러므로 그들의 그러한 행위는 특히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이일을 행함으로써 그들은 그의 '이름을 더럽혔다'(16절).
(3) 하나님에 대한 이패역한 행위로인하여 그들은 본문에서 혹독한 심판을 경고받고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개혁으로 하나님을 속이려고 생각한 자들은 그들자신을 치명적으로 속이게될 것이다. 그들이 저희의 종을 마음대로 가도록 자유로이 놓아주지 않았기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대로 모든 심판을 내리시는 자유를 행사하신다(17절). 너희가...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가 더이상 나를 섬기지 못하게 하겠고 나의 보호로부터 너희를 몰아내리라. 이는 너희가 그들의 충성을 저버린 연고라. 이제 너희는 칼과 염병과 기근의 심판가운데 어느것을 멸절당할 것인지 스스로 택하도록 하라." 그들이 그들의 종들을 집에 억류시켰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로하여금 종노릇하도록 '세계 열방중에 흩어지게할 것이다.' "내가 나의 언약을 범한 자들을, 그들이 둘로 쪼갠 저 송아지 같이 되게하리라. 그들이 송아지를 둘로 쪼개었듯이 나도 그들을 둘로 쪼개리라."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께 패역되이 행하였다. 그러므로 모두가 예외없이 전체적인 멸망에 포함될 것이었다(19절). 그들이 갈대아 군대가 퇴각했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을 거스려 저희 죄로 다시 돌아갔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군대를 다시 부르실 것이다. "그들은 너희에게서 떠나감으로 현재로서는 너희의 놀라움이 물러갔으나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전처럼 마주서게 하리라. 그들이 이성에 다시 돌아오며 이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르리라"(22절). 만일 우리가 목적하였던바 선을 행하는 것을 그만둔다면 하나님께서도 의도하셨던바 선을 행하시기를 그만두실 것이다.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 핵심
34:1-22
시드기야왕의 포로됨과 죽음을 선포하며, 언약을 저버린 백성의 비참한 운명을 예고함.
시드기야의 노예 해방정책(34:8)
레 25:39-55절에 의하면, 노예는 50년주기의 마지막해(희년)에 해방되어야 했다. 시드기야는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둘러싸인 국가적인 재난을 극복하기위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노예들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눈앞에 직면한 재난을 피하기위해 일시적으로 실행한 것일 뿐이었다.

# 묵상
시드기야의 미래예언 ( 34:1-5 )
이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왕의 포로가 되어 그리로 끌려가지만 칼에 죽지않고 평안히 왕답게 장사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이 예언대로 바벨론에 끌려갔고 그 두눈이 멀게 되었지만 그곳에서 제명에 죽었습니다(렘52:10, 11). 예레미야가 그의 운명을 예언한 것은 시드기야로하여금 친바벨론 정책을 취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예루살렘 심판경고 ( 34:2-5 )
하나님은 예루살렘성을 바벨론에게 붙이겠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성은 불살라질 것이며, 시드기야왕은 사로잡힐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시드기야의 죽음이후 그에게 분향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선언한 시드기야 ( 34:8 )
시드기야왕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언약하고 자유를 선언했다는 본문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일시적인 자구책으로 노예를 해방시킨 사건을 가리킵니다(왕상9: 21). 노예를 해방시킨 것은 안식년 혹은 희년에 노예를 비롯한 모든 매인 것을 풀어주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를 해방시켰던 사람들은 포위공격이 잠정적으로 풀어지자 풀어주었던 사람들을 다시 노예로 삼았습니다.
언약체결의 의식 ( 34:18 )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사이로 지나는 것은 언약을 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언약을 파기하면 둘로 쪼개어진 그짐승과 같이됨을 맹세하는 고대의 풍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언약의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때도 나타났습니다(창15:10, 17).
언약파기의 대가 ( 34:19-22 )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들을 원수의 손에 붙이고 그들의 시체를 새와 짐승의 식물이 되게하고 성읍이 불살라지며 황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맺어진 언약이며, 인간은 언약을 지켜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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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성의 재건과 죄의 용서 33:1-9
1. 이 예언의 시기(1)
이 위로의 예언이 주어진 시기는 전장의 사건의 연속으로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을때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두번째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이말씀은 두번째 임한 것이다. 이는 그의 백성을 격려해주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의무를 행하기위하여 경계에 경계를 필요로할만큼 그렇게 불복종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위안을 받기위하여 약속에 약속을 필요로할만큼 그렇게 불신으로 가득찬 자들이다. 이말씀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예레미야가 아직 갇혔을때에' 그에게 임하였다.
2. 예언의 내용(2-9)
(1) 이 위로를 그들에게 확증해주시는 분이 누구인가(2절)? 그분은 여호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이시다. 그는 천지를 만드시고 지으신 분이다. 그는 예루살렘, 곧 시온을 지으시고 형성하신 분이시다. 그가 처음 그 성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그가 다시 성을 재건하실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찬양을 받기위하여 그성을 지으셨으며, 그러므로 이제 다시 지으실 것이다. 그는 이약속을 만드시고 세우신 분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회복을 위하여 계획을 세우셨고, 약속을 하신 그가 수행하실 것이었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그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을 이루실때 그는 그이름으로 알려지신다(출 6:3). 그는 곧 온전하신 하나님이시다. 천지가 만들어졌을때, 창조주는 여호와로 불리워지고 있다(창 2:4).
(2) 이 위로는 오로지 기도에 의해서 얻어진다(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그리스도께서도 구하여야 했으며 그가 그렇게함으로써 그에게 주어졌다(시 2:8). (부분적으로는 이미 나타났을지라도) 네가 알지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제 약속들이 기도를 대신해서가 아니라 기도를 일깨우고 격려하기위해서 주어졌다(겔 36:37).
(3) 예루살렘의 상황은 이러한 위로를 받기를 필요로 한다(4,5절). '유다 왕궁'을 포함하여 '이 성읍의 가옥'들이 흉벽과 칼, 혹은 기관과 도끼 혹은 망치에 의하여 부숴진다. 가장 강한 요새일지라도 부서져 평평한 땅과 같이 된다. '갈대아인을 막아 싸우려'한 자들은 유익보다 해를 더욱 초래하였다. 대적들로하여금 더욱 흉맹하고 포악하게 공격하게끔 유발시켰으므로 예루살렘에 있는 가옥들은 '그시체로 채워졌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노와 분함으로 그들을 죽였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대적들의 칼은 곧 그의 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은 더욱 두드러지게 행악하였던 자들이었던것 같다. 바로 그사람들의 '모든 악을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얼굴을 가리워 이 성을 돌아보지 아니하셨다.'
(4) 하나님께서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하여 예비해두신 축복들이 그들의 모든 슬픔을 치료해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그병이 치명적이고 치유될수 없는듯이 여겨질지라도 치료하여 주실 것이다(렘 8:22). '온머리는 병들었고 온마음은 피곤하였다'(사 1:5). 그러나 '내가 치료하며 고쳐 낫게할' 것이다(6절). 내가 죽음을 저지하고 병을 물리치며 모든 것을 정상으로 회복시킬 것이라고 하신다(렘 30:17). 예루살렘의 죄가 그병의 원인이었다(사 1:6). 그러므로 개혁하는 것만이 회복할수 있는 길이었다. 내가...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평강은 성실한 신앙, 평강과 하나님께 대한 진실된 예배를 가리킨다고 말할수 있다. 즉, 이는 그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멀리있게 하였던 수많은 거짓과 미혹과 반대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다 일반적으로 적용할수 있다. 평강과 진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위대한 본질이다. 여기에 있는 이약속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과 진리를 나타내셨다. 진리로 우리를 지시하시며 평강으로 우리를 안식하게 하신다. 은혜와 진리의 풍성함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다. 평강과 진리는 영혼의 생명이며 우리로 그생명을 얻게하되 더욱 풍성히 얻게하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진리의 능력으로 다스리시며(요 18:37), 그것으로 '평강의 풍성함'을 주신다(시 72:7;85:10). 평강과 진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 자들 모두에게 치유와 건강을 준다. 그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종이 되었었는가? 그들의 나라가 황폐하게 되었었는가? 내가...포로를 돌아오게 하며(7절).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포로 모두를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모든 역경을 야기시킨 원인이 죄인가? 그죄는 용서받게될 것이며 정복될 것이다(8절). 의식법상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성막에서 내쫓김 당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정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으면 다시 성소에 들어가도록 허용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그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시면' 그들은 고국 땅에 들어가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그들의 죄와 고난이 하나님을 명예롭지 못하게 하였던가? 그들의 개혁과 회복이 그를 찬양하게될 것이다(9절). 인근 나라들이 유대 나라가 날로 커지는 것을 진정 두려워함으로 주목할 것이며 그들을 적으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게될 것이다. 교회가 달처럼 아름답고 해처럼 맑을때, 기치를 든 군대처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Ⅱ. 풍요와 메시야에 대한 약속 33:10-16
유다와 예루살렘이 포로생활로부터 영광스럽게 귀향한후에 누리게될 그복된 상태에 대한 예언이 계속하여 주어진다. 이예언은 마침내는 메시야의 왕국에서 영광스럽게 실현될 것이다.
(1) 오랫동안 슬픔에 잠겨있던 백성들이 다시 기쁨이 넘치게 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 나라가 영원히 멸망하였으며 유다땅에서는 짐승도 찾아볼수 없고 '예루살렘 거리에서'는 거민을 볼수 없으리라고 결론지었었다(10절). 그러나 비록 울음이 한동안 계속될지라도 기쁨이 되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그곳에는 평상시와 같은 기쁨이 있게될 것이다.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 예전과 같이 다시 혼인식이 축가를 부르며 거행될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의식의 기쁨도 누리게될 것이다. 성전의 노래, 이방땅에서는 부를수 없었던 여호와의 노래가 다시 불리워질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찬미할뿐 아니라 '선하시며 그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찬양하게될 것이다. 비록 옛노래일지라도 이 새로운 사건을 계기로 새롭게 불리워지므로, 새노래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때 문자그대로 이일이 성취됨을 본다(스 3:11). 모든 희생제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 이말씀은 겸손한 찬미와 기쁨의 감사로 드리는 영적인 제사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것이 호세아서에서는 수송아지보다 여호와를 더기쁘시게 하는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린다'고 표현되어 있다(호 14:2).
(2) 오랫동안 황폐해있던 나라가 다시 번성하게 되리라는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 베냐민 땅과...유다 성읍들에서 양무리가 다시 계수하는 자의 손아래로 지나리라(12,13절). 그나라는 저들이 귀향한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방랑인들의 거처가 되지않을 것이며 목자들과 농부들의 거처가 될것이다. 야곱의 후손들은 본래의 생업이 목자였다(창 47:3). 그리고 이제 그들은 다시 그생업을 얻을 것이다. 그 양무리를 눕게하면서 맡은 직무에 온전히 전념할 것이다(12절). 그리고 또한 양무리로하여금 자기아래로 지나가게할 것이다(13절). 혹 잃어버린 것이 없는지 그수를 계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수가 감소된 백성이 이 양무리와 같은 번성함과 평강함으로 영영히 회복되리라는 약속이 믿을수 없을 것이기때문에 여기에 이약속에 대한 일반적인 인준이 첨가되고 있다. 내가...이른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14절).
(3)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축복가운데 가장 으뜸가는 것이 여기에 있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며, 그가 실현하실 영원한 의이다(15,16절).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마지막때에 이루어질 '선한 말', 즉 가장 큰선한 말이다. 하나님께서 유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으므로 그는 이 약속대로 이루실 것이다. 이 약속가운데 그들의 포로생활로부터의 귀향과 고국땅에서의 정착이 예고되었다.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주목되는 시대중의 하나이다(마 1:17). 메시야에 대한 이약속은 앞에서도 주어진바 있다(렘 23:5,6). 거기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위에 세우실 목자들에 대한 약속을 확증하는 것으로 나타났었다. 여기에서는 목자들과 양무리들까지 포함하는 약속으로 여겨지며 비유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예고되고 있다.
1) 의로운 왕이다. 그는 찬탈자가 아니라 '의로운 가지'이다. 이는 그가 다윗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2) 의의 왕이다. 법을 정하시고 전쟁을 행하시며 심판을 하심에 있어 그는 의로우시다. 억울함을 당하는 자들을 변호하시며 잘못을 행하는 자들을 징벌하심에 있어 그는 의로우시다. 그가 이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3) 온갖 위해를 당하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왕이다. 그로 말미암아 진노와 저주로부터 '유다가 구원을 얻겠고' 그렇게 구원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안전히 거할 것이다.' 이평강의 왕을 의지함으로, 악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떠나 평화롭게 마음의 평정을 즐기게 된다.
4) 자기 백성들에 의하여 찬양을 받으실 왕이다. 16절 하반절을 "이것이 그들이 그를 부를 이름이다"라고도 읽는다(갈대아 역본, 아랍어 역본, 라틴어 역본). "그의 이 이름을 그들이 찬양할 것이며 이 이름으로 그들이 기도할 것이라." 그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 이는 그들이 저희의 의로써 여호와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해진 것이 여기에서는 메시야의 성읍, 곧 그리스도의 교회인 예루살렘의 이름이 되었다. 이성에 의를 전하신 이가 바로 그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이름을 지님으로써 예루살렘성은 온전한 의를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것은 스스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온 의이다.

Ⅲ. 하나님의 언약과 확실성 33:17-26
하나님의 언약 세가지, 곧 다윗과 그의 후손과 맺은 왕권에 대한 언약, 아론과 그의 후손과 맺은 제사장과의 언약,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과 맺은 언약들이 포로생활동안에 완전히 깨어지고 잊혀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언약들의 참된 취지와 의도가 신약시대의 축복들에서 풍성하게 응답될 것이 약속되고 있다. 이것은 포로생활에서 귀향한후 유대인들에게 베풀어진 것들에 의해 예표되었다.
(1) 왕권에 대한 언약은 다윗의 아들,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17절). 이스라엘의 왕위는 포로됨으로 말미암아 끊겨졌었다. '이스라엘 집위에 앉을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돌아온후, 다윗의 위는 다시 대를 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집위에 앉을 사람이 다윗에게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약속이 성취된 것은 메시야에게서였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만물을 다스리시는 영화로운 머리이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신한, 또한 그가 거룩한 산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왕인한, 다윗의 후계자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그와 맺은 언약은 파기되지 않는다. '주 하나님께서 그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것이요'(눅 1:32,33). 다윗과 맺은 언약은 천체의 운행만큼이나 확고부동한 것이다. 본문에서 '낮에 대한 약정과 밤에 대한 약정'이라고 일컬어지는, 자연에 대한 언약이 나오고 있다(20,25절). 이것은 자연에 대한 언약의 한 항목이다. '주야로 그때에' 있게 하리라는 약정이다. 하나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셨으며 각각에게 통치권을 세워주셨다. 태양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셨고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창 1:4,5,16). 아침과 저녁으로 정한때에 교차되게 하셨다(시 65:8). 태양으로하여금 그 떠오를 장소와 시간을 알게하셨고, 땅 그림자가 지는 시각도 이같이 운행되게 하셨다. 그리고 세계가 지속되는한 이경로는 변경되지 않을 것이며 이언약은 파기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같이 구세주, 곧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왕이었던 다윗과 맺은 구속의 언약도 확고부동할 것이다(21절). 그리스도는 세상끝날때까지 지상에 교회를 유지시키신다. 곧 시간과 날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까지 교회를 소유하신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세상은 끝날이 이르겠지만 그나라는 끝나지 아니하며 아버지되신 하나님께로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이세상에서의 교회의 상태는 낮과 밤이 서로 교차되듯이 번영과 고난이 항상 교차될 것이다. 오늘 태양이 지지만, 내일 아침 다시 떠오를 것이 확실하듯이, 우리가 살아서 그것을 볼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나 이세상에 있는 구속자의 나라가 잠시 부패와 박해로인하여 구름에 가리듯 흐려질지라도 정한때가 되면 다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다윗의 자손은 '하늘의 만상'처럼 셀수 없이 많을 것이다. 즉 메시야의 복음과 또 그안에 함께 역사하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에게서 출생하는 메시야의 영적인 자손들이 헤아릴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씨들은 다윗의 씨와는 달리 그의 후계자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며 때가 이르면 그와 함께 다스리게될 것이다(22절).
(2) 제사장직에 대한 언약은 확실히 보증될 것이며 그에 대한 약속 역시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포로생활을 하는동안에는 제사장들이 섬길 제단도, 성전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세워질 것이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즉시로 '번제를 드리려'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스 3:2,3). 똑같은 내용이 본문에서도 약속되고 있다(18절). 그러나 그제사장직은 이내 부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위의 언약이 패하여졌다(참조. 말 2:8). 그리고 로마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그제사장직은 종말을 맞게 되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아론의 직을 대체하고 있다. 아론의 직이 그림자에 불과한반면 그리스도의 직은 사실상 그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상이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항상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앞에 계신한, 레위인 제사장은 끊어지지 아니하였다고 확실히 말할수 있다(히 7:3,7). 그는 영원하신 제사장이다. 충실한 사역자들이 신앙적인 모임을 계속 주관하며 기도와 찬양이라는 한 영적인 제사들을 드리고 있는 제사장들, 레위인들은 후계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가장 훌륭한 후계자를 얻은 것이라고 할수 있다. 사도바울은 복음전하는 자들을 제단을 모시는 이들에 비교하고 있다(고전 9:13,14). 참된 성도들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다(벧전 2:5,9).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왕과 제사장들로 삼아진' 자들이다(계 1:6). 그들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영적인 제사를 드리며, 무엇보다도 그들자신이 '산 제사'이다. 레위인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지리라고한 본문의 약속은 바로 이들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22절).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이요, 영적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계 5:9;7:9,15).
(3) 선택의 언약도 마찬가지로 보증되며 그언약에 대한 약속들도 복음의 이스라엘에게서 완전히 성취되게 된다. 이언약은 포로기간동안 파기된 것으로 간주되었었다(24절). 이스라엘의 원수들, 혹은 믿지않는 이스라엘인들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였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신실하게 대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그리하였다. 그들이 내 백성을 멸시하여. "마치 그것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특권이라는듯이 내 백성이 되는 특권을 멸시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낮과 밤의 약정만큼이나 확실하게 선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자손을 버리시느니' 차라리 주야의 약정이 깨어지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육적인 야곱의 자손을 가리키는 말일수 없다. 그들은 버려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모든 약속이 거기에서 실현되고 있다. 이는 사도바울의 설교에서 그대로 드러났다(롬 11:1이하).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지배하에 지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복속은 낮과 밤이 계속되는한 계속될 것이다. '내가 그 포로된 자로 돌아오게 하고.' 그를 이끌어낸 다음에는 '긍휼히 여기리라.' 이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진 것인가는 갈라디아서6:16절에 나타나 있다. 곧 복음의 규례를 행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서 그들에게는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이다.

# 핵심
33:1-26
유다의 회복이 다윗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보증된다.
부르짖는 기도(33:3)
예레미야가 말씀을 전파하다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고 있을때, 하나님은 부르짖는 기도를 하라고 명하셨다.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했을때,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자각하고 그분의 뜻을 깨닫기위한 특별기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가정이나 교회, 조국이 위기에 직면했을때, 부르짖는 기도가 절실히 요청된다.

# 묵상
크고 비밀한 일 ( 33:3 )
본문에 언급된 ‘알지못하는 일’이란 의미의 히브리어 ‘베추로트’는 성이나 요새에 ‘도달하기 어려움’을 의미하며, 비슷한 히브리어인 ‘네추로트’는 ‘감추어진’, ‘보호된’, ‘예비로 남겨둔’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지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이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수도, 도달할수도 없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성읍 ( 33:9 )
세계 열방앞에서 하나님께 기쁜 이름이 될 성읍은 바로 새예루살렘입니다. 그때가 되면 낡은 예루살렘 곧 죄악이 만연했던 그도시는 파괴되고 새예루살렘이 건설되는데, 이 새예루살렘은 열방앞에서 찬양과 기쁨의 근원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곳이 될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상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당신 백성을 위해 행하신 그모든 일들을 듣고 부러워하고 또 두려워하게될 것입니다.
다윗에게서 날 한 의로운 가지 ( 33:15 )
다윗가문의 왕위는 바벨론 침공시 시드기야로 끝났지만 예레미야는 다윗 후손에서 새왕 곧 메시야가 나오리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가지’라는 말 ‘체마흐’는 죽은 가지에서 새로 돋아난 가지를 가리킬때 사용하는 것으로서 유대인들은 이말을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했습니다(사4:2; 슥3:8).
새성읍의 이름 ( 33:16 )
유다가 구원을 얻는 날, 예루살렘성에 세워질 새성읍의 이름은 바로 여호와 우리의 의입니다. 이는 그성에서 공평과 정의가 행해질 것임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예전에 그성에는 불의와 음란과 우상숭배가 만연했으나, 때가 이르면 그성의 이름과 똑같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나타나 모든 사람들을 평강과 공의로 통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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