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어떤 곳인가

[요한계시록 21장 1절~4절]
1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절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절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2장 1절~5절]
1절 -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절 -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절 -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절 -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절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아무런 근심도 없고 모든 것이 풍부하면 사람들은 마치 세상이 천국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들이 꿈꾸는 '천국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생각하는 중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한마디로 예수 믿고 죄사함 받으면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이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지옥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의미를 상실한 기독교는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1. 천국은 확실히 존재합니까?
물론 확실히 천국은 있습니다.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iyn)이란 사람이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3천년 된 피라미드 속에서 말라빠진 밀(Wheat)을 발견하고 한 웅큼 쥐어다가 집에서 심었습니다. 그랬더니 약 한달이 지나서 싹이 나고 잎이 나서 그 이듬해 다른 밀 종자와 같이 수확을 했습니다. 그후부터 브라이언씨는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3천년 묵은 밀 알갱이에서 새 생명을 솟아 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죽음에서 부활시킬 수 없겠느냐?'고 하면서 전도하며 다녔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가 있고 영생하는 존재로서 내세의 영원한 세계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미래를 위하여 깊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천국을 예비하시고 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도 예비해 두셨습니다.
요 14:1-3절에 보면 인간의 가장 큰 불안과 고민을 해결하시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고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마디로 창조된 우주 만물이 이렇게 아름답고 광대하거늘 주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천국의 맨션(처소)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후 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고전 15: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옳습니다. 만약 천국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있으니 세상에서는 고생을 하고 죽임을 당해도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예수 안믿다가 지옥 갈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사는 것 같아도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성경의 가장 큰 교훈과 핵심은 죄로 멸망할 인간을 구원하여 영생을 얻게 하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한절만 기록되도 틀림없이 이루어 지는데 천국에 대한 말씀은 수백번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반드시 있습니다.

2. 천국 어떤 곳일까요?
시바 여왕이 솔로몬(Solomon) 왕을 찾아와 보고 말하기를 '사람들이 당신의 나라와 지혜에 대해서 말할 때 믿지 아니했더니 와서 보니 그들의 말은 절반도 못됩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천국의 아름답고 화려함은 인간의 말로는 백만불의 일도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눈먼 소녀에게 어머니가 산천 초목과 아름다운 꽃들과 해와 달과 별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곤 했는데 다행히 수술을 받고 눈을 떠보고 하는 말이 '엄마 왜 저렇게 아름다운 것을 말해주지 않았어?' 하더랍니다. 천국의 아름다움과 좋은 점을 다 설명한다면 거기에 매혹되어서 이 세상을 너무 무가치하게 여기고 누구나 빨리 천국으로 가고만 싶어할 것입니다.
첫째, 천국에 없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우선 밤이 없습니다. 밤은 어두운 것으로 흑암은 죄악과 공포의 상징입니다. 미국의 LA나 뉴욕(New York), 시카고(Chicago) 등의 대도시는 해가 떨어지면 혼자 다니지도 못합니다. 대부부의 범죄가 밤에 저질러 집니다. 그런데 천국에는 밤이 없습니다. 계 22:5절에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리로다"라고 한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화로운 빛이 구석 구석마다 비취기 때문에 전기불이나 등불이 필요없습니다.
질병과 고통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무서운 질병과 고통이 있습니다. 의술로도 해결 못하는 각종 불치의 질병과 고통이 많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이러한 질병이 없습니다.
죽음과 슬픔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죽음과 슬픔이 가득합니다. 병으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지진으로 죽고 죽음이 많습니다. 따라서 슬픔도 많습니다. 거리에서 만나면 반갑게 웃어주며 인사하지만 웃음 뒤에는 상처받는 마음의 슬픔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어려서 여동생이 죽었을 때, 또 부친이 병고에 시달리다가 돌아가셨을 때 몹시 슬퍼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장의사도 없고 공동묘지도 없고 병원도 없습니다.
염려와 근심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근심과 걱정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한달만 근심거리가 없어도 이상하게 생각될 만큼 근심과 걱정이 많습니다. 목사는 근심도 없는 것 같지만 교인들이 마귀의 시험거리 노릇할 때, 또 신앙 생활을 바로 하지 못할 때 밤잠도 잊고 밥맛도 없고 근심할 때가 많습니다.
어떤 가정은 집도 크고 돈도 많고 온 가족이 건강하여 걱정이 없을 것 같은데 탁 털어놓고 말하는 것을 보면 역시 걱정거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 나라'라는 찬송가의 가사와 같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천국에는 우리를 괴롭히는 근심과 염려가 없습니다. 계 21:4절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유혹과 죄가 없습니다. 사단이 우리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고 범죄케 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문명하고 잘 사는 나라도 죄가 없고 유혹이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날 때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나서 죄악 중에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죄악의 씨는 갓난 아기 속에도 있어서 독이 있는 꽃처럼 점점 죄악에 함께 자랍니다. 모든 사람은 죄의 유혹을 순간순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유혹을 받았으나 유혹에 넘어간 일은 없습니다.
세상과 마귀는 항상 우리를 대적하고 유혹합니다. 죄의 쾌락을 즐기도록 유혹하지만 그 후에는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더 이상 죄의 유혹이나 범죄함이 없습니다. 모든 마귀는 볼못에 던져지고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히 자유롭게 됩니다.
천국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이아가라(Niagara) 폭포도 해마다 조금씩 침식해 들어가며 변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 애굽도, 바벨론 제국도, 로마의 대도시들도 폐허만 남고 다 없어졌습니다. 세상에서 변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언젠가는 뉴욕도, 모스크바도, 동경도, 서울도 다 변하여 없어질 때가 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히 변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둘째, 천국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있는 것들을 다 열거할 수도 없고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몇 가지만 열거한다면,
먼저 아름다운 도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도시는 악함과 해함과 위험이 있지만 천국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해함도 악함도 위험도 없습니다. 끔찍한 교통사고도 없고 마약 사범도 강도의 위험도 없는 아름다운 성입니다. 그 곳에는 술집도 형무소도 없는 아름다운 성입니다. 거리는 순금으로 포장되어 있으며 12진주 문이 있고 아름다운 고급 저택(Mansion)이 있어서 모두 거룩하고 행복합니다. 신부가 신랑을 위해 곱게 단장한 것같이 아름다운 도성입니다.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천국에는 슬픔과 근심이 없고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노래가 들여오고 생명수 강이 흐르고 만가지 아름다운 꽃과 열매가 시절을 쫓아 피고 맺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이 없고 질투와 증오와 악독이 없습니다. 오직 기쁨과 행복만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제일 즐거웠던 일에 천배를 더한다해도 천국의 기쁨을 다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집이 있습니다. 내 집, 내 가정이 제일 아름다운 곳입니다. 아무리 좋은 나라를 다 여행해도, 아무리 좋은 호텔에 묵어봐도 제일 좋은 곳은 내 집, 내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완전히 안식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완전히 안식할 수 있는 집이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거할 처소'는 황금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민 집입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천국에는 순금의 거리가 있고 12진주 문이 있고 아름다운 집이 있고 찬란한 면류관이 있는 등 별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안계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는 가장 귀하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영원히 그분과 함께 살게 됩니다.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 쎈데디(Billy Sunday) 목사님은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 만나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그 분을 만나보면 나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나를 구원해 주시고 사용해 주심에 대해 감사드리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영원히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또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구인 페퍼 마틴(Pepper Martin)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게 가장 큰 야망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으니까 '나의 가장 큰 야망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My highest ambition is to get the heanen)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신앙입니까?

3.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요 14:6)고 했습니다.
우리의 선행이 많다고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세례 받고 집사됐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 이름만 등록됐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해야 됩니다.
계 7:14절에 보면 사도 요한이 천국에 흰 옷을 입은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 어디서 온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씻음을 받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죄인도 예수 믿고 죄사함 받으면 다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생명되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못들어 갑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나 강도나 창녀, 도독놈이라도 회개하며 구원해 달라고 할 때 거절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호텔에 들어가려면 미리 예약해야 들어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쫓겨나기 일쑤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예약이 되고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이 됩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한사람도 못 들어갑니다.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 중에 한사람도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는 분이 없이 다 천국에 들어가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금 믿으면 여러분의 구세주가 되시지만 안믿으면 죄를 심판하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할렐루야!
- 아 멘 -

요한계시록 ②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님이자 역사의 주인으로 선포한다. 용(옛 뱀, 마귀, 사탄)은 패배해 하늘에서 쫓겨난다. 그가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부 된 교회를 괴롭히려 하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아름다운 혼인 예식을 위해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를 지켜 내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으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성도의 기도와 나팔 심판 (8~9장)

8장에서는 일곱 번째 인과 네 번째까지의 나팔 심판이 등장한다. 그 사이에는 반 시간쯤 동안의 고요함이 있다. '또 다른 천사'(8:3)가 성도의 기도를 보좌 앞 금 제단에 올려 드리고, 그 기도가 부어지자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일어난다. 다섯 번째 나팔 심판으로 이러지는 9장의 결론은 '회개치 아니하더라'(9:21)라는 말로 요약된다. 다섯 번째부터 시작되는 재앙은 더 강력하고 심각한 재앙이다. 재앙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커서 사람들이 죽길 원하나,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극심한 고통이 다섯 달 동안이나 지속된다. 무저갱의 열쇠를 받은 별에 의해 시작된 고통이라는 점에서 이 고통은 악(惡)이다. 악의 영향력 아래에서 사람들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이 고통에도 제한은 있다.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9:4) 해하는 고통이며,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는'(9:5) 고통이고, '다섯 달 동안만 사람들을 해하는 권세'(9:5)를 가진다. 하나님은 고통의 대상, 고통의 힘, 고통의 기간까지도 모두 정해 두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완벽하게 이뤄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다. 주변 환경의 변화와 위기, 사람들의 아픔과 사망을 통해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회개의 기회는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비다.


나팔 재앙

심판의 대상

심판의 범위

첫 번째 나팔

땅, 수목

자연 세계의 심판

두 번째 나팔

바다, 바다 생물

세 번째 나팔

물 (강, 샘)

네 번째 나팔

해, 달, 별

다섯 번째 나팔

사람을 괴롭힘

사람이 점진적으로 사망함

여섯 번째 나팔

사람을 죽임

일곱 번째 나팔

하나님의 비밀이 이뤄짐

세계의 마지막


성도의 기도

일곱째 인이 떨어지며 시작된 고요는 마치 폭풍의 전야와 같다. 일곱째 인이 첫 번째 나팔로 이어지는 그 순간, 하나님은 끊임없이 드려지는 모든 기도를 받으신다. 위기의 매 순간에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도, 다른 이들을 위해 드리는 기도를 찾고 계신다. 다윗은 인구 계수 문제로 인해 순식간에 70,000명이나 되는 백성을 잃었다. 그러나 그가 회개의 기도를 드리자 하나님이 진노를 멈추셨다(대상 21장).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려할 때 그분의 뜻을 돌이키는 기도를 드렸다(출 32:7~14). 성도의 기도는 이처럼 능력이 있다. 성도가 가장 위대하신 왕의 뜻을 따라 기도할 때, 하나님은 천사를 준비시켜 우리 기도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 기도와 함께 일하신다.


증인 된 교회 (10~11장)

여섯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분 이후로도 수많은 악이 이 땅에서 자행되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악을 회개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을 통해 이 세상에 대해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회개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 예언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에게 전해야 할 내용은 무엇인가? 해함을 받지 않았던 성도들은 자신의 안정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땅, 그 땅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또 다시 세상으로 들어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쓴 마음으로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하게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의 비밀이 이뤄질 때까지 회개를 선포하며 구원 사역을 감당해야만 한다. 11장은 증인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 낸다. 그 증인들을 해할 자가 없으며, 오히려 더 큰 권능으로 사역하게 된다. 그 사역 이후 일곱 번째 나팔이 울려 퍼진다. 이로써 하나님 나라의 단면이 보인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찬양하자 24장로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린다. 그들의 경배 후에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하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쏟아진다. 그 권능에 대한 묘사는 구약성경 선지자들의 삶과 권능에 대한 모티프로 연결된다.


교회에 대한 구약성경의 모티프

본문

내용

구약성경의 모티프

본문

11:5

(증인을)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창 12:3

11:6a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왕상 17:1

11:6b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내가 내 손의 지팡이로 하수를 치면 그것이 피로 변하고

출 7:17b

11:8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소돔)

창 19:25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애굽)

출 14:30b

교회가 말세를 힘겹게 지나는 듯하지만, 사실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엘리야, 모세 등을 통해 일하신 것처럼 교회를 통해 일하신다. 구약의 앞선 선지자들은 모두 힘겨운 시대를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힘겨움이 선지자들의 능력을 없애지는 못했다. 오히려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더 큰 위력, 곧 하나님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만들었다. 말세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용의 세력과 교회의 전투 (12~13장)

두 증인의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준비된 때에 하늘에서 큰 붉은 용이 해산하는 여자(교회)를 삼킬 준비를 한다. 그 용은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까지 쓴 강력한 존재다. 누가 일곱 왕관을 쓴 용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여자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한다. 그곳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12:6)이다. 여자가 피한 후에 하늘에서는 전쟁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전쟁의 결과 역시 분명하다. 큰 용과 그의 사자들 모두 땅으로 내쫓길 수밖에 없다. 땅으로 내쫓긴 용은 다시 땅에 있는 교회를 해하기 위해 준비한다. 최후의 발악인 셈이다. 그러나 용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쫓겨난 패배자일 뿐이다. 여자는 독수리의 두 날개로 보호받고 있고, 용의 물(홍수) 공격을 받지만 땅이 입을 벌려 그 물을 모두 삼켜 버린다. 결국 12장은 하늘과 땅에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거두는 전적인 승리를 한 편의 드라마로 보여 주고 있다.


12장에 나오는 두 전쟁

본   문

전쟁의 장소

전쟁의 과정

전쟁의 결과

12:7~9

하늘

  · 용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함

  · 용과 그의 사자들이 땅으로 내쫓김

그리스도의 승리

12:13~17


  · 여자가 독수리의 보호를 받음

  · 땅이 용의 물 공격을 막음 (애굽)

교회의 승리


12장에 나오는 '여인과 용' 환상에 대한 구약적 배경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여자는 예수님의 혈통적 조상이 되는 유대 민족을, 용(뱀)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을 가리킨다.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에서 언급된 '여자와 뱀'에 대한 이야기는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 '여자와 용'의 환상으로 다시 나온다.

환상

구약의 배경

여자를 핍박하는 용의 모습

계 12:13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시험해 넘어뜨리려던 뱀의 모습

창 3:1~6

메시아를 낳는 여자의 모습

계 12:2

해산의 고통을 겪는 여자로 묘사된 시온

사 66:7~9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분

계 12:5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시 2:9

한 때, 두 때, 반 때

계 12:14

한 때, 두 때, 반 때

단 7:25

여자가 피신한 광야

계 12:14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피신해 거했던 광야

출 13:17~22

여자가 독수리의 두 날개의 도움으로 광야로 피신함

계 12:14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 인도하심

출 19:4

미가엘이 사탄과 싸우는 모습

계 12:7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해 이방과 싸우는 미가엘의 모습

단 10:13


어린양께 속한 자들의 노래 (14~15장)

어린양의 도우심으로 땅에서도 승리한 교회는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른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15:3~4)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에 대한 찬송이다. 그 노래들의 끝에 마지막 재앙 시리즈인 일곱 금 대접이 준비된다. 이 재앙이 마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다.


사람들을 향한 직접적인 심판 (16장)

다른 재앙들이 자연환경으로부터 사람에게로 이른 재앙이었다면, 일곱 대접 재앙은 직접적으로 사람을 타격한다. 독한 종기가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사람들이 불타기도 하며, 우박 재앙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 하늘의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방하게 된다. 게다가 앞선 두 일곱 재앙시리즈(일곱 인, 일곱 나팔)는 각 시리즈마다 삽입된 다른 내용이 있었지만, 일곱 대접 재앙에는 삽입된 구절조차 없다. 첫 번째부터 일곱 번째 재앙까지 신속하고 강력하게 이뤄진다. 마지막 진노는 이처럼 크고 급한 재앙이다.


일곱 재앙 시리즈 비교

재앙

본문

삽입된 본문

삽입된 내용

일곱 인 재앙

6:1~8:1

7:1~17

인 침을 받은 자들의 경배

일곱 나팔 재앙

 8:2~11:19

10:1~11:14

증인에 관한 비유들

일곱 대접 재앙

16: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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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멸망 (17~18장)

어린양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바벨론 곧 땅의 음녀들은 일곱 대접 재앙 이후로 완전히 몰락한다. 그들의 정체는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18:2)으로 판명이 났다. 그리고 그들의 몰락은 아주 급격하게 같은 시간에 이뤄졌다. 그리고 그 몰락은 완전한 몰락이어서 그들을 결코 다시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의 아름다운 것은 이처럼 급격하고 완벽하게 몰락하고 만다. 성도들은 세상의 가치에 매료되어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그 어떤 선(善)도 없으며 더러운 영들만 가득할 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바벨론에서의 삶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으며 둬서도 안 된다.


새 하늘과 새 땅 (19~21장)

모든 심판이 끝이 나면 하늘에서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열린다. 세마포 옷을 입은 교회는 신랑이신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들어가 아름다운 혼인 예식을 치른다. 신랑이신 그리스도는 충신과 진실로 불리며 하나님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도 불린다. 그 혼인 예식 가운데 하나님은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영광으로 가득한 새 예루살렘을 소개해 주신다. 그곳은 어둠이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광명도 필요 없다. 이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생명의 나라가 온전히 서게 되었음을 선포한다. 그 가운데 20장에는 옛 뱀이 잠깐 놓일 것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천 년 동안 옥에 갇혔던 사탄이 잠깐 놓이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놓임이 성도들의 혼인 잔치를 방해할 수는 없다. 결국 20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천국에서는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땅에서는 사탄의 심판이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교

태초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창조하셨다(창 1:1). 그러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에 죄악으로 더럽혀졌고(창 6:5), 그 후 모든 피조물은 탄식하며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만을 고대하게 되었다(롬 8:19~23). 피조물들의 간절한 기다림에 대한 온전한 성취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다(계 21~22장). 요한계시록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뤄져(계 21:1)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잃어버렸던 에덴이 완전히 회복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계 21:1~8; 22:1~5).


창세기에 나타난 처음 세상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

에덴동산 : 처음 하늘과 처음 땅

창 1:1

하나님 나라 :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

생명나무 : 타락 후 금지된 나무

창 3:22~24

생명나무 : 허락된 생명나무

계 22:2

첫 사망

창 2:17

사망이 없음

계 21:4

첫 아담의 통치

창 1:26~28

둘째 아담의 통치

계 21:5

바벨탑

창 11:1~9

바벨론의 멸망

계 18장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함

창 3:4~5

말씀을 가감하는 자에 대한 심판

계 22:18~19

만물의 시작

창 1:1

만물의 종말 (재림)

계 22:20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장)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은 그 자신이 극심한 위협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위대한 묵시를 받았다. 그의 고난은 교회의 고난이기 때문에 그의 묵시는 교회의 묵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가 소망하는 것은 곧 교회의 소망이기도 하다. 요한은 계시록을 마무리하면서 아름다운 천국의 삶을 보여 준다. 첫째, 그곳은 영원한 나라다. 그래서 요한은 '세세토록',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둘째, 그곳은 저주가 없는 나라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수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는 그 어떤 고통도 성도들을 괴롭힐 수 없다. 혼인 예식을 기다리는 신부가 자신을 성결하게 지킬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이 고통만 지나면, 천 년의 시간이 순식간처럼 지나가면, 아름다운 혼인 예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말씀하시고, 요한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오늘날 예수님과 우리의 아름다운 고백이다.



요한계시록 ①

신랑과 신부의 기다림의 노래
요한계시록에는 수많은 비유와 상징이 나온다. 그러나 결국 신부인 교회와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신부는 신랑을 기다리고, 신랑은 신부를 위해 위대한 전쟁을 치른다. 전쟁의 한가운데 있는 신부는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을 통해 오히려 순전하게 다듬어진다. 신랑은 그런 신부를 위해 아름다운 처소를 준비하고 신부를 맞으러 온다.

요한계시록 한눈에 보기

본문

1~3장

4~5장

6~7장

8~11장

12~14장

15~16장

17~18장

19~22장

요점

일곱 교회에 대한 권면

하늘의 예배

일곱인

일곱 나팔

짐승과 천사

일곱 대접

심판

새 하늘

새 땅

주제

교회와 우주의 주인 되신

그리스도

일곱 재앙 시리즈

심판과 완성되는 하늘나라

저자

사도 요한

기록시기

AD 95~96년경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박해로 밧모 섬에 유배된 때)

장르

묵시문학적 서신서

문체

찬송과 예언을 그림 언어로 표현함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
로마에서 시작된 박해는 점점 심해져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라는 명령까지 내려졌다. 게다가 '다시오겠다'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는 승천하신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다시 오시지 않는 상황이어서 교회는 그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해야만 했다. 요한계시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경배의 대상이시며,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명확히 한다. 그리고 박해의 시기도 끝이 있음과 영원한 주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임을 그 나라를 마치 눈으로 보듯이 묘사해 끊임없이 보여 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계시 (1장)
요한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는 의도로 기록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곧 다시 오실 것을 명확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그분의 재림은 박해받는 교회의 유일한 소망이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두 교회만 칭찬받았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칭찬을 받았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만이 책망을 받지 않았을 뿐이다. 이 땅의 교회들은 여전히 악과 전투해야만 하기에 실수도 많고, 실패도 많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가 보여 준 성숙한 모습을 따라가야 한다. 이러한 격려는 반드시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기대로 이어진다.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 (2장)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았지만, 처음 사랑을 저버린 점에 대해서는 책망을 받았다. 서머나 교회는 아름다운 항구도시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런 지역적 특성 때문에 황제 티베라우스를 기념하는 신전이 세워졌다. 그런 만큼 황제숭배도 강요되었고 이로 인해 교회는 큰 어려움을 겪어 많은 성도가 순교를 당했다. 이런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라'라는 권면과 함께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해 주셨다. 버가모 교회 역시 황제숭배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주님은 이단이 교회 안까지 들어오도록 용납한 것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셨다. 두아디라 교회는 신비주의에 빠져 바알의 아내 아세벨처럼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을 용납한 일로 인해 책망받았다.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 (3장)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다. 사데 지역은 대지진이 일어나 파괴되는 어려움을 당했는데, 사데 교회의 영적 상태 역시 대지진을 겪은 것처럼 온전한 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유대주의자들(복음과 할례가 모두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분파)로 인해 구원의 교리가 흔들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복음을 굳게 붙잡은 일에 대해 칭찬을 받았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의 말씀은 없고 뜨겁지도 차지도 않은 신앙에 대해 책망을 받았다.


하늘 보좌 환상 (4장)

성도들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보좌 위에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다. 그분은 세상의 권력자인 로마 황제에게 지배당하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그분은 오히려 세세토록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받으실 분이다.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묵상은 고난 당하는 성도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두루마리를 펼치기 합당하신 어린양 (5장)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두루마리가 있다.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은 세상 나라들과 마귀에 대한 심판 기록일 것이다. 그런데 그 두루마리를 펼 사람이 없기에 요한은 울었다. 그때 장로 중 한 사람으로부터 위로의 말이 임한다. '다윗의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두루마리를 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일곱 봉인 (6장)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시면서 일곱 재앙 시리즈(일곱 봉인 - 일곱 나팔 - 일곱 대접)가 시작된다. 전쟁으로부터 시작해서 흉년과 온 하늘까지도 재앙을 당한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쉴 곳은 없다. 분명 재앙이지만, 동시에 거룩하게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주님께 탄원을 드린다. 재앙이 임하나 그 재앙은 완성될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통로다. 그 재앙의 인을 떼신 분이 어린양이시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인은 나팔과 연결되고, 재앙은 또 다른 재앙으로 연결된다. 일곱 인이 재앙의 내용이라면, 일곱 나팔은 재앙의 범위와 연결된다. 주권자의 심판은 이처럼 철저하고 완벽하시다. 그분은 창조 사역에서 완벽하셨던 것처럼, 심판 사역에서도 완벽하시다.


인 치심을 받은 자들 (7장)

하나님은 144,000이라는 숫자를 통해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뜻을 분명히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종들을 해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이미에 인을 치라고 천사들에게 명하신다. 144,000이라는 숫자에 대한 해석은 많지만, 분명한 것은 구약의 유대인만을 의미하거나 특정 이단 종파에 속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곳곳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아시고 그들을 반드시 구원하신다.


제목 : 하늘문이 열린 사람 (피종진 목사님)

[요한계시록 3장 7절~8절]
7절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절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할렐루야!
지금 이 시간 예배에 임하는 성도 여러분, 또 전 세계 각처서에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 뜻대로 살려고 기도하며 애쓰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6년도는 우리 앞에 과거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다시 여러분을 출발하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인생은 한 치의 앞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주권자가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시므로 우리는 양 된 위치에서 주님의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사탄의 올무와 죄악의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되며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귀한 하나님 은혜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열어주신 사건입니다. 우리의 삶에 취업, 결혼, 사업의 문이 열리고 미래의 성공의 문이 열려도 우리는 기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늘 문이 열려야 합니다. 하늘 문이 열린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고 미래를 보장해주시며 천국까지 이끌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시는지 말씀을 통해 상고하면서 은혜받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첫째, 기도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열어주십니다.
사도 요한이 왜 밧모섬에 있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 정배되었습니다. 그는 홀로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기도하므로 하늘 문이 열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지역으로 시야를 넓히고 견문(見聞)을 넓히며 지경을 넓히는 일에 노력합니다. 그러나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은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외롭고 억울하여 탄식하고 통곡하는 사건들이 쓰나미 태풍처럼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생각을 하면 사탄의 함정에 말려 들어갑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시기를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렘 29:13)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이 어느 정도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하고 또 하나님은 그에게 기도의 중요성, 기도의 가치를 나타냈는지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계 8:3) 아멘. 이는 하나님께서 밧모섬에서 기도하는 사도 요한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계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로부터 요한이 받은 계시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놀라운 역사는 사도 요한이 기도로 시작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의 기도는 천사가 향유에 담아 하나님 보좌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므로 큰 뇌성과 지진과 우박이 내리는 역사 곧 기도의 위력이 나타납니다. 누가 땅을 진동시키고 누가 땅에 큰 지진을 일으키고 또 우박을 내리고 진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지만 성도들의 기도로는 이루어집니다.
종교개혁시대에 영국에서 메리여왕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고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존낙스는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했습니다. 결국 메리여왕은 중병에 걸리게 되고 핍박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메리여왕이 중병으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존 낙스의 기도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더 두렵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천만 민족보다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러의 어머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매일 기도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가 여러 가지 문제로 혼란과 대립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 핵무기의 힘보다 더 강하고 귀한 것은 한 사람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만큼 세계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기도는 금 대접에 담아 하나님의 보좌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7년도에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승리하고 기도하는 나라가 승리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하늘 문을 열어주시기 때문입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 2:2~4) 아멘.

둘째,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에게 하늘 문이 열립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9)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과 예수를 증언’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언제 하늘 문이 열렸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때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예수를 자랑하고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의 구원의 소식을 알게 해 주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단 12: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과 많은 무리를 주께 돌아오게 하는 여러분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많이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딤후 4:2)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약속하셨습니다. (막 16:15~17)
초대교회 첫 순교자 스데반집사는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때도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 (행 6:55,56)
우리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길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됩니다.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켜 순종하고 행했다(계 3:8)고 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쁜 소식인 복음을 온 세상에 많이 전할수록 축복이 임하고 주님의 선한 길로 열어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선교사이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선교지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쁜 주의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역사의 지배를 받는 자에게 하늘 문이 열립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13)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들으라’는 것은 청각으로만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 그대로 듣고 행하고 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즉 우리가 성령의 역사 지배를 받을 때 하늘 문이 열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육신의 감정이 있고 정이 있고 이성의 판단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롬 8:6)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면 성령 안에서 모두 이루어집니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성령님과 동행하고 사역하며 성령님을 앞세워 전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슥 4:6)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신 사람은 ① 성령의 전이 됩니다. (고전 6:19), ②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고전 12:3), ③ 인치심을 받게 됩니다. (엡 1:13) 초대교회가 부흥되고 하늘 문이 열린 것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는 사람은 백 번 넘어져도 일어날 수가 있고 항상 백절불굴의 신앙으로 믿은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할 때 말 한 대로 되고 계획한 대로 하나님의 역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행 8:31) 아멘.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행 11:24)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7년 새해에는 세초부터 우리 모두에게 하늘 문이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을 증거할 때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뜻을 준행하고 행할 때 하늘 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이후로부터 하늘 문이 열리는 여러분의 생애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미지근한 태도

[요한계시록 3장 14절~22절]
14절 -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절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절 -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절 -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절 -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절 -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절 -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절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상태가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아니하여 주님께서 토하여 내치겠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성경 주석가들 중에는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예수님 당시부터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일곱 시대의 교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세 교회의 특징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 즉, 말세 교회가 책망 받은 죄는 한마디로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책망했습니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 중에 어떤 교회는 칭찬과 책망도 했고, 어떤 교회는 칭찬만 했으나, 이 말세 교회의 모형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칭찬은 없이 책망만 했습니다. 그 책망이 바로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아 미지근하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의 입에서 토하여 내치겠다는 말씀입니다. 계 3:19절에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이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의 뜻은 '국민의 권리'(Right of the people)라는 뜻인데 그들은 자기들의 권리만 주장했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리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쩌면 오늘날 말세 교회의 상태와 너무도 비슷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권운동'이니 '민주화 운동'이니 하니까 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주님의 주권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영적으로는 미지근하게 식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는 구역질나는 교회가 되고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역질나게 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나 특출한 게으른 사람들입니다. 교역자들의 시간과 힘을 제일 많이 소모시키는 사람도 물론 미지근한 교인, 무관심한 교인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의 즐거움을 잃게 되고, 성경 말씀의 맛을 잃게 되고, 죄에 대한 승리를 잃게 됩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미지근한 태도가 우리에게 죄가 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죄에 대하여 미지근한 태도입니다.
현대 교회는 옛날에는 틀렸다고 했던 일들을 오늘날에는 웃으면서 받아들입니다. 그 이유는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며 성경 말씀도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지금도 진리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말씀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하는 말씀도 지금까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이 시대는 죄에 대하여 충격을 받기는 커녕 환영을 받고, 옛날에는 숨어서 짓던 죄를 이제는 버젓이 드러내 놓고 짓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결혼식 주례를 하고 났더니 식탁에 삼페인을 가져 오더랍니다. 그래서 거절했더니, 다른 목사님은 안그러는데 당신은 왜 별나게 그러느냐고 의아해 하더랍니다. 술, 고스톱 등은 보통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죄를 미워하되 뱀처럼 미워하는 불타는 마음을 가진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만 알면 안됩니다. 죄를 얼마나 미워하셨으면 그것을 청산하기 위하여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게 했겠습니까?
오늘날 한국도 소돔, 고모라성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죄를 미워하며 성별된 생활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죄에 대하여 미지근한 태도를 가져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죄를 철저히 미워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를 철저히 사랑하십니다.

2. 영혼 구원에 미지근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다니면서도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미지근한 태도를 갖고 있는 이가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하면 '나중에 믿지요, 천천히 교회에 나가지요'하고 미지근한 태도를 갖고 살다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지옥 불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될 문제가 당신의 영혼 구원의 문제입니다. 믿는 사람들 중에도 영혼 구원에 대해서 무관심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영혼 구원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면 결국은 당신도 안믿는 자들과 똑같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해 미지근한 태도를 갖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3. 말씀 순종에 미지근한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뿐 아니라 우리 생활의 주인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고 어떤 것을 해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미지근한 태도를 취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이것은 주님의 말씀이요, 우리는 여기에 순종해야 됩니다'라고 말해야 됩니다.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을 증축한 후 다함께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서 성경 말씀을 들을 때 책을 펴는 순간 '모든 백성이 일어섰고'(느 8:5),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매 모든 백성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면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말씀을 들을 때 어긋난 생활을 통회 자복하며 잘못된 생활을 다 뜯어 고쳤습니다. 백성들이 하도 죄를 통회하며 슬피우니까 느헤미야가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한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교회는 주님의 피로 사신 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다른 어떤 기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교회에 우리가 충성합니까? 성경에 십일조는 하나님의 성전에 바쳐야 할 분명한 의무라고 했는데 그대로 잘 하고 있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과연 그런 생활을 하십니까? 이런 일에 복종하지 않고 미지근한 태도를 갖는 것은 크게 책망받을 죄입니다.
성경 읽는데 열심과 정성을 기울이십니까? 가수의 이름이나 탤런트의 이름은 수 십명 엮어 대면서 성경책 이름도 다 모르고, 12제자의 이름도 다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면 예수님의 구토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를 배워서 그대로 복종하며 살도록 힘써야 됩니다.

4. 기도에 미지근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기도의 위력을 믿고 기도를 꼭 해야 된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막상 기도 생활에 미지근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약속을 알고, 기도의 능력도 알고, 기도의 응답도 체험했으면서도 기도 생활에 미지근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도에 게을러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매일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는 장소와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기도는 능력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세상 일을 기도보다 앞세우고, 아플 때 주님보다 의사를 더 의지하고, 어려운 일 당할 때 기도하기보다 자기 지혜를 앞세울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절망에 부딪쳐서 어쩔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잃어버린 기도의 은밀한 장소를 다시 찾기를 원하시며 그것을 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5. 봉사와 사명에 미지근한 태도입니다.
모든 교회는 충성되고 헌신적인 신자를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다가 어느 때가 되면 그만 두고 봉사와 사명에 미지근해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어떤 때, 정말 부흥회 나가기가 싫어서 얼굴을 찌푸리고 불쾌한 마음을 가질 때가 있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나가면 그 때마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나타나서 그 교회와 또 많은 사람들이 꼭 필요한 은혜를 받고, 구원받는 것을 보고 뉘우칠 때가 있습니다.
저는 또 목회하면서 자기가 맡은 직분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돈을 좀더 벌어보려고 하다가, 혹은 좀더 편하게 신앙 생활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 징계받아 무섭게 매를 맞고 후회하는 것도 보아왔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이 그런 일에까지 세밀하게 간섭하시려고 하나'하는 의구심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저에게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목사의 사명을 받은 사람이 그 사명을 저버리고 다른 사업하는 것만이 무서운 죄가 아니라 평신도가 하나님의 교회에서 맡은 사명과 직분을 저버리는 것도 다 똑같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세시고,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려 가는 것도 간섭하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목사나 전도사의 사명만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가 맡은 봉사의 직분이나 기관의 책임과 사명도 똑같이 귀중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저는 믿는 자들 중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때는 다른 일이 다 잘 되고 식구들도 건강했는데 그 사명을 우습게 보고 저버릴 때 사업이 망하고 건강을 잃고 엄청난 물질의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사명은 생명보다 귀한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려 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적은 것 가지고도 교회에 봉사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 테네시주 낙스빌(Knoxville)에 벙어리이고 귀머거리 신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도 할 수 없고 전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집에서 7마일 떨어진 곳에 일하러 다녔는데 늘 전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그는 전차를 탈 때마다 차장에게 친절하게 웃으면서 차비를 내고 차장 바로 뒷자리에 앉곤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펴고 읽었습니다. 7년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차장이 그 벙어리요 귀머거리 신자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는데 그 편지에는 '선생님,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7년 동안 당신을 살펴보아 오는 중 당신은 내가 갖지 못한 그 무엇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이 편지를 보시고 뒷면에 저와 만날 장소와 시간을 정해 주시고 나오실 때 통역하실 분을 데리고 오십시오. 나도 구원받기를 원합니다'라고 썼더랍니다. 물론 그 차장은 전도도 받고 구원도 받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벙어리는 말 한마디 못했으나 그의 생활을 통하여 남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남들이 볼 때 우리의 생활 속에서 참된 종교가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목사나 전도사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직분에 충성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께 죽도록 충성합시다. 결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아 미지근함의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합시다.
-아 멘-

제목 : 면류관을 뺏기지 맙시다 (공재영 목사님)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7절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절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절 -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절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절 -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절 -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래 전에 모 일간 신문에 이런 글귀가 실렸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까? 그 내용은 “65세 된 의지할 데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100원에 팝니다.”라는 글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비웃으며 하는 말이 내 부모 모시기도 힘든데 돈 100원까지 주며 사라니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조실부모한 젊은 부부가 사러 왔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어르신들이 억대 재산을 가진 부자인데 자신들의 재산을 물려줄 대상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남의 부모를 100원 주고 사러 온다면 자기 재산을 맡기고 남은 생을 함께 살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고통과 시련이 많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약속이 열린 문을 두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나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없는 오직 그 교회에게만 허락된 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원망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 좋은 일 곧 면류관이 있음을 믿을 때에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가 복되게 열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자신에게 주어진 면류관을 빼앗긴 사람이 있습니다. 에서라는 사람은 동생 야곱에게 자신의 축복권 곧 장자권을 뺏긴 후 눈물을 흘리며 찾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자신의 왕권을 다윗에게 뺏겼으며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축복의 사도권을 이름 없는 맛디아에게 뺏겼던 것입니다. 모든 성도에게는 축복된 약속이 있으며 그것을 뺏으려고 유혹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뺏기지 맙시다.

1.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8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리에서 남에게 추하게 보이지 않고 함께할 수 있도록 세워지는 사람을 일컬어 보기에 좋아 보인다고 말합니다. 이 자리는 많은 재산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만족하면서 웃을 수가 있고, 여유는 많지 않지만 자신의 몫을 기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그것은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 사회가 어느 때부터 작은 것에 대하여 우습게 여기는 풍토가 많이 조성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보여주는 현상이 땀 흘리며 얻어지는 보상을 크게 보려고 하지 않고 남보다 잘 되는 것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리가 얼마나 무지한 자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을 모르고 죽어 있는 세상 곧 자기 계산에만 맞추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세상은 반드시 움직이는 세상이라는 것이며 나 자신이 어디에 있을지라도 세상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굽어진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이 굽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극히 공정한 자리에서 열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불법과 불의를 행한 자가 더 잘 사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게 되고 원망하며 자신의 자리를 닫아버리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언젠가는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역사적 심판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그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에게 증거하시기를「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고 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본문에서 자신의 면류관을 뺏기지 않는 삶을 가르쳐 주시기를「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것이란 누구에게나 열려지는 일상의 자리에서 소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1초 1분의 나의 시간, 나 자신이 무시하고 싶은 나의 자리가 작은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 때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이 귀한 사람이며 면류관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자신을 세우는 복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9절).
세상이 살아있다는 것은 그 세상은 세우는 사람으로 살 때에만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원망과 불평으로 살아가면 결코 자신을 웃을 수 있게 하는 세상은 열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을 세우는 자신의 복을 닫아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에 자신을 세우는 복을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좋을 때보다 나쁜 일이 생겼을 때이며 가진 것이 있을 때보다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때, 더 중요한 것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되어질 때보다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고 싶을 때에 자신을 세우는 복을 열어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이 있음으로 더 좋게 보여지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가질 때에 자신을 세우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성도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성도의 삶을 무너뜨리는 악한 환경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을 세우는 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혜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눈에 보이는 현상만을 보지 말고 이 세상을 누가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복된 자리가 있기에 예수님은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보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가 성도가 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리이며 세상을 살아갈 때에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서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시50:4)」고 했고,「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1)」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이 자신의 삶에 중심이 되는 삶 곧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모습에서 행해지는 자리를 복되게 세울 때에 면류관을 뺏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이기는 삶을 끊임없이 열어가야 합니다(12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실 때에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찬송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이었고 세상에는 분쟁과 소요가 끊임없이 소용돌이 쳤기 때문입니다. 그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찾게 했으며 이 땅에 평화를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증거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14:27)」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의 자리는 어떤 것입니까?「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이기는 자리를 열어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셨습니다. 이 역사를 위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내 마음에 모실 때에 성령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잡아 주시면서 세워주신다고 성경은 크게 증거하고 있습니다.「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기는 것은 어떤 자리입니까? 이 자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세워주신 자리입니다. 그것은「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을 열어가는 지혜가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자리입니다. 좋게 보이는 것과 나쁘게 보이는 것, 밝은 모습과 어두운 모습, 감사하는 생활과 불평과 원망하는 생활, 사는 복을 붙잡는 것과 사는 복을 포기하는 것 중에서 나를 세우는 것을 알 때 이것이 이기는 삶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성령님이 좋은 것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족하는 삶인 것입니다. 여기에 면류관이 보이게 됩니다. 그 면류관을 보게 하신 예수님이 본문에서「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 곧 천국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기는 성도의 삶을 열어갑시다.

결론을 맺습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예비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딤후4:7,8) . 단 하나님이 열어놓은 경기장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면류관을 뺏기지 않기 위해 첫째 작은 것에도 충실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자신을 세우는 복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이기는 삶을 끊임없이 열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행복을 고백하며 세상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죽도록 충성하라

[요한계시록 2장 10절]
10절 -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요한계시록 20장 4절~5절]
4절 -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절 -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자기 나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는 것도 숭고한 일이지만, 우리 성도들에게는 하늘 본향,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죽도록 충성하는 일이 진정 숭고하고 더욱 필요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도 성도들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난과 궁핍에 직면한 서머나 교회의 성도들을 향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중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책망받을 일이 없는 교회였으며,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인내하고 극복한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죽음 앞에서까지라도 충성할 것이 요구되고 있으며 그렇듯 충성했을 때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약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로 굳게 서라', '죽음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충성하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수고를 하지 아니한 사람에게 칭찬하신 일이 없으시며, 하나님의 일을 맡아 충성스럽게 잘 감당한 자들에게 칭찬을 하지 아니하신 경우 또한 없으십니다. 이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성도들은 과연 어떤 일에 죽도록 충성해야 하겠습니까?

1.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에 충성한다는 말을 할 때에 착각하기가 쉬운 것은 그 충성하는 일이 대단한 일만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충성'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단지 '맡은 바 본분을 다한다'는 뜻이지, 거기에 크고 위대한 일에 대한 열심만을 말하는 것이라는 뜻은 없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니이체(Nietzsche)는 충성이라는 말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를 '내 집 뜰을 깨끗이 쓰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작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올바르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고로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성도들은 가장 우선적으로는 작은 일에서부터 충성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도 눅 16: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느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생활의 작은 부분들에 있어서까지,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에 있어서도 오직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말하며,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하고 그분께 영광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 열심을 내는 자야말로 진정 충성된 자이며, 그러한 자를 주님께서는 진정 기뻐하십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일에서조차 죽도록 충성할 줄 아는 자야말로 일의 크고 작음보다 그 마음과 정성을 보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는 참된 신앙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일에 있어서는 작고 큰 일이 없이 모두 귀하고 소중한 일임을 깨달아 모든 사람들이 소홀히 여기는 작은 일에서부터 관심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합시다.

2.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 4:2절에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했듯이 우리 성도들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 일이 비록 내 뜻과 맞지않고 하기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주 안에서 맡겨진 일이라고 한다면 죽도록 충성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은 모두 창조자요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의 종들이며, 그분의 거룩한 나라의 선한 일꾼들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에 온전한 순종과 최선의 열심으로 충성함이 마땅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어떤 왕이나 주인들보다도 선하시고 지혜로우시며 사랑이 풍성하시므로 그 종들에게 일을 맡기심에 있어 선하고 복된 일들을, 감당할 정도만큼 부여하시기에, 그 분의 종된 우리 성도들은 어떤 불평이나 변명함 없이 오직 충성해야 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만약 맡은 일에 충성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눅 19:11-26절에 나오는 악한 종과 같이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없으며, 영광된 면류관을 얻어 쓸 수 없을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맡겨진 선행과 봉사의 일들에 죽도록 충성하는 선한 청지기들이 되도록 합시다.

3. 숨은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 PR시대라 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합니다. 은밀하고 숨겨지는 일보다는 나타나는 일에 관심을 갖고, 매스컴에 이름이 나는 일에는 줄을 서면서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 일에는 참여하기를 꺼려합니다. 이에 마 6:3절에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오늘날 허공을 울리는 말이 되고 있으며, 신앙인들 중에도 숨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를 만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모든 일을 감찰하시고 은밀한 중에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깨닫는 성도라고 한다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은밀하고 숨은 일들에 죽도록 충성할 줄 압니다. 또한 숨겨진 선행과 봉사와 헌신을 기쁘게 보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고 한다면 오히려 남 앞에 드러나는 일보다는 뒷전에 숨겨져서 다른 이들이 관심 갖지 않는 일들에 더욱 큰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충성할 것입니다.
남 앞에 드러나는 일에는 놀랄 정도의 충성을 보이면서도 숨겨진 일들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나태한 자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식하는 자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나타내려는 목적으로 헌신하는 지극히 가증한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극히 작은 일에도,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모든 일에, 그것이 비록 남 앞에 드러나지 않는 숨은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주님의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죽기까지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이 세상의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작은 것이 가장 귀할 수도 있으며 은밀한 것이 커다란 상급을 가져오고, 위대한 업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된 마음과 정성, 순종이 더 크고 위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에서는 크고 위대한 일에나 목숨을 다해 충성할 가치가 있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온전히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고 꾸준하게 충성하는 모든 일이 가치있고 귀한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작다고 가볍게 여기거나 맡겨진 일들에 소홀히 한다거나 숨은 일이라 하여 외면하지 말고 오직 주님을 위하는 일이라 한다면 그 어떤 일에도 죽도록 충성하는 성실한 주의 일꾼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주님이 주시는 영광된 칭찬과 생명의 면류관이 바로 여러분 앞에 있게 될 것입니다.

공해와 새 하늘, 새 땅

[요한계시록 21장 1절~8절]
1절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절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절 -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절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절 -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절 -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절 -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절 -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오늘날,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가공할 파멸로 위협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공해입니다. 공해문제는 핵무기 못지 않게 인간을 파멸의 웅덩이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C. H. 패터슨(C. H. Patterson)이라는 사람이 인간을 파멸의 위기로 몰아가는 것 네 가지를 말했는데, 모두 P자로 시작되는 것입니다(4P crisis). 그 첫째가 인구 문제(population)요, 둘째가 기근 문제(poverty)요, 셋째가 공해 문제(pollution)요, 넷째가 대인 관계(personal relationship)라고 했습니다.
그 분의 말이 맞습니다. 1900년에는 세계 인구가 약 20억 밖에 안되었는데, 90년이 지난 지금은 56억이나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1945년 8.15 해방 때 이승만 박사가 연설하면서 '2,000만 동포 여러분'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남북한 합해서 1,00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이 추세대로 나간다면, 2,000년대가 되면 세계 인구가 70억 내지 80억이나 된다고 합니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니 자연히 성경대로 기근(poverty)이 올 것 아닙니까? 지금도 지구상에 6억이나 되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땅에 인구가 많아지고 기술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지구는 공해문제가 심각한 위기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1. 공해와 지구의 종말
지구는 지금 대기 오염(air pollution)과 수질 오염(water pollution), 그리고 토양 오염 등으로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자연은 파괴될 대로 파괴되고, 지구는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고, 매연가스로 말미암아 하늘의 대기권은 비닐 봉지를 씌워 놓은 것처럼 되어서, 홍수도 나기 쉽고, 이상 기온이 생기기도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 오염의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수질오염-일본 구주지방에 미나마따라는 곳이 있는데, 50년 전에는 시인이 '바닷가의 정원'이라고 부를만한 아름다운 곳이었는데, 지금은 묘지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1953년부터 그곳 주민들에게 원인 모를 병이 발생해서 걸음이 이상해지고, 손발이 마비되고, 심지어 눈과 귀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었습니다. 1956년에는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해서, 그 병이 난 사람을 찾아 알아보니까 대부분 물고기나 조개류를 많이 먹은 다음에 그 병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 메칠 수은에 중독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신일본 질소공장(화학비료, 화공약품, 합성섬유 등을 만드는 공장)에서 흘러 나온 폐수를 물고기와 조개가 먹고 그것을 사람들이 잡아먹은데서 생긴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1968년에 공해병으로 인정되었는데, 1982년까지 2,453명의 환자가 생겼고, 555명이 사망했습니다. 1965년에는 똑같은 유기수은 중독으로 제 2의 미나마따병이 신사훈, 아하야에서 발생했는데 669명이 중독증상을 일으키고, 55명이 사망했습니다.
우리나라 울산 공업단지는 기준치가 0.05ppm인데, 오염농도는 2.87ppm이라고 합니다. 그로 인해서 곡창 지대로 알려졌던 71만평의 삼산평야는 거의 폐농화되다시피 되었다는 것입니다(ppm이란 parts per million 즉 100만 분의 1이라는 뜻).
호남정유가 있는 여천 공업단지에 인접한 광양만은 각양 물고기가 잘 사는 양식업의 최적지였으나, 이제는 어업이 휴.폐업 되었다는 것입니다. 에텔가용 물질이 10-40ppm이라는 것입니다. 강물오염의 허용 기준치는 8ppm인데 중랑천이 160ppm, 금호강이 166ppm, 전주천이 48ppm, 만경강이 123ppm, 부산 수영천이 175ppm으로 공장폐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곳곳에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기형어가 나오고, 어쩌다 고기를 끓이면 석유 냄새, 흙탕 냄새가 납니다. 미국에서는 우리나라 남해안은 오염이 심하므로, 접근하지도 말라고 경고를 내렸다고 합니다.

둘째, 농약오염-선진국은 농약 사용이 감소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해마다 농약 사용이 증가하여, 1967년에는 1,577톤이었는데 1981년에는 16,032톤으로 10배가 넘게 사용했습니다. 농약 사용시 82%가 중독되는데, 1982년 1월부터 7월까지 반 년 동안 47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이런 농약으로 만든 곡식이나 채소를 수십 년 먹으면 체내에 쌓여서 병이 발생하거나, 불구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과나 배 같은 과일은 반드시 껍질을 벗겨 먹어야 합니다.

셋째, 대기오염-공장의 배기 가스나, 빌딩, 가정의 난방으로 생긴 가스 및 자동차 매연 때문에, 대기가 오염되어서 몇 십 년 후에는 공기를 마시기만 해도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1952년 2월 5일부터 9일까지 5일간 영국 런던에 안개가 짙게 깔려 있는 동안에, 4,000여 명이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했고, 1953년 2월 8,00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살인 스모그 사건이라고 합니다. 벨기에의 공업지대인 메즈 지방에는 1930년도에 바람이 불지 않아 4일간 63명이 죽고, 수백 명의 환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많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기 오염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아황산가스, 산화질소, 카드뮴 같은 중금속의 농도가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이상 인용은 김용준 교수의 논문, 한국 공해 문제 연구소에서 발표한 것임)

넷째, 원자력 오염-원자력 발전소 같은데서 잘못하여 방사능이 유출되면 인체에 큰 해독을 줍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에는 4.5kg의 플루토늄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에 1/10g만 마셔도 폐암에 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973년에 원자력 발전소가 36개였으나, 1977년에는 4개로 감소되었다는 것입니다. 구미 각국에서는 1/3로 감소시켰다는 것입니다. 원자로는 30-40년 후엔 폐기되는데, 폐기된 후에도 수만 년 동안 방사능이 유출된다고 합니다.
미국은 일본에 투하했던 원자탄의 50만 배가 넘는 폭발력을 지닌 핵탄두 5만 여 개를 보유했고(1970년대에) 1980년대에 와서는 더 강한 핵탄두 17,000여 개를 더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과 소련이 지구를 10번 이상 다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의 핵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무기를 만들어 놓고 써보지 않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지구는 어떻게 될까요?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2.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의 재림과 지구의 종말에 대해서 예언한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했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계 21:5절 이하에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사 65:17절 이하에도 예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고 이사야가 B. C. 750여 년전에 예언했습니다. 벧후 3:10-13절에서는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베드로도 예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염으로 더러워지고, 낡아지고 못 쓰게 된 옛 하늘과 옛 땅은 치워버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주님과 더불어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하늘과 땅이 아주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곳에는 해와 달이 쓸 데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죽음도 없고, 질병도 없고, 아픈 것이나, 곡하는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합니다. 대기 오염이나 수질 오염도 없습니다. 인구의 포화 상태나 오염 포화 상태를 보아도 지구의 종말, 예수님의 재림이 결코 멀지 않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의 말씀대로, 세상이 뜨거운 불에 타버릴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불을 새롭게 내리지 않더라도, 인간이 만든 핵무기가 터지면, 삽시간에 지구는 잿더미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먼저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셔서 성도들은 휴거되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새 생명으로 부활하여 함께 휴거된 뒤에 이 땅에 적그리스도가 지배하는 가운데 무서운 환란이 오고, 핵무기가 터지는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7년 대환난이 다 지난 후엔, 예수님께서 지상에 성도들과 더불어 재림하셔서 천년 왕국 시대를 건설하시고, 천년 왕국 시대가 끝날 무렵, 무저갱의 마귀를 잠깐 풀어 놓았다가, 영원히 불과 유황에 타는 못에 던져 놓고, 예수 그리스도 믿기를 거절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마귀만 따라가던 자들을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게 합니다.
계 21:8절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구원의 기회가 다 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기회가 지나가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아서 구원받아야 합니다. 우리 각 개인의 생명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지고, 불타버리는 세상, 물질과 쾌락에 속아 살지 말고, 주님 오실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생활을 해야 됩니다. 우리 주위에 아직도 멸망으로 지옥으로 달음질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배가 항해하는 도중에 심한 풍랑을 만나 파선이 되어 몇 사람이 표류하고 있을 때 무인도를 발견하고 거기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남은 양식 중에서 종자를 심어 농사를 짓기 위해서 땅을 파다보니 금덩이가 나와 종자 심을 것을 잊은 채 땅 속의 금덩이를 파면서 종자마저 삶아 먹었습니다. 종자를 다 삶아 먹은 뒤에 금덩이로 가득찬 무인도에서 모두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이 세상에서 값진 보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잠깐 있다가 사라질 이 세상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 사업을 위해 쓰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준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되돌리는 신앙

[요한계시록 4장 1절~11절]
1절 -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이 이르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일어날 일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2절 - 내가 곧 성령에 감동되었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3절 -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4절 -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5절 -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 보좌 앞에 켠 등불 일곱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6절 -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7절 -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8절 -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절 -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절 -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절 -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해마다 제 생일이 되면, 저희 집 아이들이 용돈을 모았다가 선물을 사오곤 했는데, 작년에는 제 생일이 지난지 두 주일이 지나도록 이 애들이 선물을 사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며칠을 기다려도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선물이래야 아빠가 준 용돈을 얼마씩 거두어서 손수건이나 양말, 아니면 설교노트 몇 권인데 물론 그것들이 별것도 아니고, 부흥회 다니는 곳마다 손수건이나 양말을 선물하기 때문에 흔한 것이긴 하지만 어린 자식들이 용돈을 쓰지 않고 정성을 보인다는 것이 기특해서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생일 차린다고 할 때는 송구스럽고 미안해서 기쁘기보다는 어디로 잠시 피했다가 오고 싶은 심정이지만, 자식들은 교육상 그게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큰아이는 이제 대학에 들어갈 나이까지 되었는데 아빠 생일을 잊고 지내다니... 그래서 드디어 아이들 넷을 다 불러다 무릎을 꿇게 한 후에 '너희 아빠한테 뭐 잘못한 것 없느냐'라고 했더니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책 한 권씩 두 손으로 치켜들고 무릎 꿇고 앉아서 생각날 때까지 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5분도 못되어 한 아이가 '알았어요! 아빠. 생일 선물 안해 드려서 그렇지요' 하길래 '그렇다. 이 녀석들아! 해마다 가져오더니 이번에는 왜 꿩꿔 먹은 소식이냐'라고 했더니, 아빠가 부흥회를 계속 나가시기 때문에 의논만 하고 사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장 나가서들 사오라고 해서 손수건과 노트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나한테 타 쓰는 용돈이지만, 그 일부를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되돌려 줄 때 마음이 기쁘고 흐믓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으로 보너스 용돈이란 명목으로 또 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주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 일부를 되돌려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 몫으로 주신 것이지만 어느 부분은 마땅히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섭섭해하시고, 나아가서는 괘씸하게 보시기까지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야 할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영광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밧모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사도 요한이 영계에서 하늘 문이 열리며 펼쳐진 천성 세계를 들여다 본 장면이 나오는데, 먼저 하나님의 보좌가 보이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같고 홍보석 같고 녹보석 같은 무지개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흰옷 입은 24장로가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여기 24장로는 구약과 신약의 성도들을 표하는 분들입니다. 또 네 생물이 나오는데 이것은 일반 천사들과는 구별되는 스랍, 혹은 그룹 천사들로서 하나님을 근위 시종들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웠고 둘로는 발을 가리웠고 둘로는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면서 창화하고 있었습니다. 날개 둘로 얼굴을 가리웠다는 벗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날개 둘로 발을 가리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며, 나머지 날개 둘로 날아다닌다는 것은 하나님께 신속히 순종하며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도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하고, 하나님 앞에 항상 겸손해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신속히 순종하고 봉사해야 될 것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이 네 생물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찬송했는데, 여기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렇게 세번 창화하는 것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온전한 찬양을 드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세세토록 영원하신 하나님께 돌리는데, 24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자기들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면서 이르기를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하고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즉 우리 성도들을 상징하는 24장로가 수고했다고 상급으로 받은 금면류관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면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24장로들이 수고의 대가로 하나님께 받은 금 면류관을 자기들이 쓰고 기뻐하지 않고 영광과 존귀와 능력은 하나님이 받으셔야 한다고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듯이,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때, 내가 잘나서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즉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되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할렐루야!'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로서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3:5절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위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뜻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전 15:9, 10절에서는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벧전 4:11절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영광과 찬양을 받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 되돌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욱 높여 주시고, 더 큰 영광을 주시고,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큰 능력과 은사를 받았던 하나님의 종들 중에는 이 비결을 망각하고 교만하게 되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타락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영광의 면류관을 항상 하나님께 되돌려 보내는 신앙을 소유합시다.


2. 자유 의지를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는 놀라운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결코 로보트처럼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기계와 같이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반역할 수도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특권이라고 그것을 내 멋대로 쓰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제 멋대로 하다가 범죄하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인 예수님은 항상 자기의 뜻대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요 6:38절에서도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도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했지만, 곧이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하고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한 마디라도 내 뜻대로 하는 것은 실패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모든 것이 성공입니다.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하기가 지옥불을 보는것 만큼이나 무서워져야 신령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처분대로 인도해 달라고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억지로 빼앗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원하여 되돌려 드려야 하나님이 맡아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나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 내 뜻대로 하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이지만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며 순간 순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맡겨진 축복을 되돌려 드려야 합니다.

24장로가 자기 몫으로, 자기 것으로 받은 금면류관이지만 하나님께 다시 주고 다시 되돌려 드리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내 몫으로 맡겨진 어떤 소유라도 그것을 다 내 멋대로 쓰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부패해지고 타락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더 큰 축복은 받지 못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쓰라고 준 돈이지만, 그것을 또다시 아빠한테 쓸 때는 써야 기특하고 예뻐서 더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다고 홀딱 내가 다 집어 먹어버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영국 신사가 크리마스 전날 과자가게 앞을 지나노라니까 거지 같이 불쌍해 보이는 소년이 가게 유리창 안을 들여다 보면서 몹시 먹고 싶어해서, 이 신사는 소년을 데리고 들어가 먹고 싶은 과자를 한 봉지 사서 안겨 주었습니다. 어서 먹으라고 해 놓고 '그 과자 맛있니 어디 나 하나 먹어볼까'하고 손을 내밀으니까 안색이 변하면서 '싫어요'하고 도망을 가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가 이렇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맡겨주셨지만 그것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보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더 큰 것을 주시려고 우리 마음을 시험해 보시느라고 좀 내 놓으라고 하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아무리 많이 드린들 우리에게 손해가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정적으로 되돌려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으로는 일주일의 하루, 주님의 날을 구별해 바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을 인정하는 태도로 십일조를 온전히 구별해 바치라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십일조를 구별해 바치면 더욱 차고 넘치게 채워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우리 성도들 중에는 앞에서 언급한 그 과자 받아든 소년이 도망하듯이 하나님의 것을 떼어 먹는 사람들이 많고, 아니면 속임수 십일조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릴 것은 마땅히 되돌려 드려야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사실 우리의 시간도, 물질도, 일도, 권세도, 우리의 자식도, 우리의 생명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사용하면 영원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내 뜻대로 내 만족을 위해서만 사용하면 그것들은 모두 허무하게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영광의 면류관도,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도, 모든 축복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 아 멘 -




성전의 기둥이 되려면

[요한계시록 3장 7절~13절]
7절 -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절 -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절 -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절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절 -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절 -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절 -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오늘 봉독해 드린 본문의 내용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어 가 있으면서 당시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향하여 칭찬과 책망을 한 말씀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를 비롯하여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렇게 일곱 교회들에게 책망과 칭찬의 말을 하던 중에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만 책망함이 없이 칭찬과 축복을 해주었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축복과 권면의 말씀을 하시던 중에 12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두 기둥이 서 있었습니다. 이 두 기둥은 이름이 각각 있었는데 하나는 '야긴'이라고 하고 다른 한 기둥은 '보아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기둥의 이름은 다 뜻이 있습니다. '야긴'이라는 말은 저가 세운다 혹은 견고하다는 뜻이요, '보아스'라는 말은 능력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또 왜 이 기둥을 세웠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옛날에 애굽을 탈출하여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광야를 지날 때에 낮에는 구름 기둥이 밤에는 불 기둥이 나타나서 저들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호의 상징이었으며 광야 여정 중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그것의 상징으로도 세웠던 것입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한다는 말씀은 하늘 나라에서나 세상의 교회에서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요긴한 삶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를 하나님의 교회에 기둥이 되고 정말로 중요한 위치에서 요긴한 인물이 되게 하신다는 말씀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또 성전에 기둥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을 떠나지 아니하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에게 하나님께서 늘 동행해 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기둥들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요긴하게 사용되고 하나님과 늘 동행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큰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전의 기둥이 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튼튼한 기초 위에 서야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만세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하여 세워진 신앙과 인격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물질이나 지식이나 명예에 기초를 둔 기둥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의 일꾼은 무엇보다 그 믿음의 기초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을 교회의 기둥으로 세워 놓으면 무너지고 맙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고 천하의 만가지 재주가 있어도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날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혜사 성령으로 내 속에 내주하고 있고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튼튼한 신앙의 기초, 즉 그리스도 위에 세움받는 기둥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되는 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 아무쪼록 우리 모든 성도들은 바른 기초 위에 곧고 견고하며 요동함이 없는 신앙을 굳게 지켜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기둥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곧아야 합니다.

집을 짓는데 있어서 꾸불꾸불하게 비틀어진 나무는 재목으로 쓰지 못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기둥이 되기 위해서는 곧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빌라델비아교회에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가리켜 거룩하고 진실하신 이라고 했는데, 이러한 주님의 마음에 맞아 성전의 기둥이 될 만한 자도 역시 거룩하고 진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거룩하고 진실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욕심에 끌리고 세상 죄에 빠져서 의와 진리에서 어긋난 비뚤어진 삶을 산다면 그는 성전의 기둥이 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말하기를 '거짓이 많은 국민으로 망하지 않은 국민이 어디 있으며, 거짓이 많은데 부흥된 국민이 어디 있느냐'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모른다는 것은 별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닌 동시에 또 해로운 것도 아니다. 무엇이나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일을 아는척 하는 것, 이것이 두려워 해야 될 일이고, 해로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 진실을 가장한 거짓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쪼록 언제나 진리에 입각한 바르고 의로운 삶과 정직과 진실을 지켜 나가시기 바랍니다. 시편 84: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래된 전래 동화 중 어느 나뭇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그만 도끼가 연못에 빠져 들어간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가난한 나뭇꾼이 연못가에 앉아서 울고 있노라니까 그 산의 신령이 나타나서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이 나뭇꾼은 사정을 다 이야기 했습니다. 그랬더니 신령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후에 금도끼를 가지고 나와서는 주면서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뭇꾼은 자기 것이 아니라고 받지를 아니했습니다. 이 신령은 또 다시 들어가더니 이번에는 은도끼 하나를 들고 나와서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뭇꾼은 그것도 자기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신령은 다시 들어가더니 이제는 무쇠로 만든 헌 도끼를 갖고 나와서 주었는데 그제서야 이 나뭇꾼은 좋아서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산신령은 너무나 이 나뭇꾼이 정직하고 진실하기 때문에 먼저 건져온 금도끼와 은도끼를 다 주고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는 진정으로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 가운데도 이 정직과 진실을 잃고 사는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성전에서 중요하게 쓰임받는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3. 견고해야 합니다.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 기둥으로 쓰는 것은 곧기도 해야하지만 또 견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워진 기둥 가운데 '야긴'이라는 기둥은 그 의미가 견고하다는 뜻입니다. 밭에 심은 옥수수나 참대나무가 아무리 굵고 곧아도 기둥으로는 쓰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견고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욥 27:5절 이하에 보면 "나는 단정코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8절 하반절에 보면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했고 10절에도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26:3절에 보면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고 했습니다.

제가 북한에 있으면서 중학교에 다니다가 1.4후퇴 때에 남한에 내려 왔습니다만, 저희 중학교에는 처음에 예수 믿는 학생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공산당들이 악랄하게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을 가해오니까 그렇게 많던 사람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끝까지 남은 사람은 세 사람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운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주일에 교회만 갔다오면 언제 벌써 알았는지 월요일에 학교에 가서는 매를 맞고 자아비판을 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남은 저와 친구 둘은 죽어도 예수 믿겠다고 했는데, 그후에 남한에 내려온 후 소식을 들으니 다른 친구들은 인민군으로 나가 죽고 공산당이 되어 죽었으나 우리 세 사람은 현재까지 살아서 한사람은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장로가 되었고 한 친구는 사업가가 되었고 부족한 이 사람도 주의 종이 되어 말씀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을 지켜 나가려면 굳센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견고한 신앙의 사람이 하나님 성전의 기둥으로 쓰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와도 굳센 의지로 신앙을 지켜 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 10:22절에 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렘 1:18, 19절에도 보면 "보라 내가 오늘날 너로 그 온 땅과 유다 땅들과 그 족장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성도들은 이 나라에 이 교회에 쇠기둥처럼 견고한 기둥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4. 요동함이 없어야 합니다.

다른 것들은 움직여도 일단 세워진 기둥은 움직여서는 안됩니다. 기둥은 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한 신앙을 갖고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려면 움직임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도 보면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우리 앞에 이단사설이 나돌고 우리를 미혹케 하는 것이 많아도 움직이지 않는 신앙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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