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혼인 잔치에서의 첫이적의 의미는(요 2:1-11)?

믿음으로 간청할때 예수님은 결코 실망시키지 않음(요 3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때 기적을 체험케 됩니다(요 4, 9절).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듯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무미 건조한 삶이 기쁨과 희망에 불타게 되며, 환경과 생활을 모두 변화시키고 무한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고후5:17).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시게 된 동기는(요 2:12-17)?

신앙이란 미명아래 행하여지는 착취와 폭리 등의 그릇된 종교 상업주의를 척결하시기 위함(마21:13).
성전 예배의 경건성을 회복하고 유지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성전뜰에서 물가에 대한 이야기, 돈에 대한 불평, 물건에 대한 언쟁, 흥정하는 소리는 성전을 수라장으로 만들었고 경외심을 소멸시켰던 것입니다(요 16절).
성전 장터로 사용되던 곳은 이방인의 뜰로써 ‘만민의 기도하는 집’인 성전에서 이방인이 기도할수 있는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옴으로써 하나님을 찾는 자의 길을 막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성전 파괴와 재건에 대한 말씀의 의미는(요 2:19)?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임(요 21, 22절).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의 복잡한 제의적 종교가 끝나고 시공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합니다(요4:21-2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성도의 몸은 주의 영이 거하시는 재건된 성전이 되었습니다(고전4:16; 6:19; 고후6:16; 엡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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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란 무엇인가(요 1:1)?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심(요 1절; 롬9:5; 빌2:6).
말씀은 창조 이전에 계셨고 피조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요1:15,30절; 요6:62; 17:5).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구원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속죄의 은혜를 베푸십니다(요1:14,17절; 골3:13).

 
하나님의 자녀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요 1: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사람(요 12절; 갈3:11).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관계를 회복한 사람을 말합니다(롬8:15; 갈5:6).
장차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잇게될 사람으로서(약2:7; 계21:7)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요 7절; 벧후5:11).

 
세례 요한은 누구인가(요 1:15-28)?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사40:3).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왕하1:8; 마3:4).
선민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으며 회개의 표징으로 물세례를 주었습니다(마3:6-10).

 
바리새인은 누구인가(요 1:24)?

마카베오 독립 운동이후 제사장 계통의 마카베오가 에돔인과 야합하는 정치적 타락에 반대하여 율법 준수및 순결한 신앙 생활이란 기치아래 일어난 엄격한 율법주의자들임.
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의 실재는 믿었으나(행23:6-8) 행위를 중시한 결과 하나님의 사랑을 버리고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요7:32,45).

 
세례 요한의 예수님께 대한 3대 선언은(요 1:29-34)?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29절).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요 33절).
하나님의 아들(요 34절).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육적으로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친척(눅1:36)으로 육적으로는 이미 피차 잘 알았을 것이나 예수님의 영적 사명에 대해서는 몰랐었다는 뜻이며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실때 하나님의 계시로 인해 비로소 그의 영적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란 의미는(요 1:29)?

속죄 제물로써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대신 희생당하심을 뜻함(사53:4-9; 벧전1:19; 계7:14).
유월절 양으로써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하시는 증표입니다(출12:11-13).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승리자로서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며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정복자입니다(계5:12, 13; 17:14).

 
비둘기로 상징된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요 1:32)?

새사람이 되게 하시며 겸손하게 하시고 참평안을 주심.
순결을 상징하며 심령의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십니다(마10:16).
온유와 겸비를 상징하며 무례함과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십니다(마11:29).
비둘기는 홍수 심판후 평화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으로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온 평화의 상징으로 성령을 통한 참평안을 의미합니다(창8:6-12;요14:27).

 
나다나엘 전도시 빌립이 ‘와 보라’고 한 이유는(요 1:45, 46)?

신앙에 대한 변론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할수 없었기 때문임(딤전1:4; 딛3:9).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믿음을 주는 최선의 길은 예수님과 직접 부딪치는 경험을 갖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난 나다나엘은 만나자마자 즉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되었습니다(요 49절). 신앙은 이론보다 영적 체험이 분명해야 합니다(고전4:20).


나다나엘은 어떤 사람인가(요 1:45-49)?

예수님께로부터 참이스라엘 사람으로 그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찬사를 받은 사람(시32:2; 1:47).
나다나엘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메시야의 강림을 고대하며 성경 읽기와 기도에 힘썼던 사람입니다(요 48절).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체험하고 나서 자신의 편견과 자만심을 버리고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찾게 되었습니다(요 47, 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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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라도의 보고서

1) 보고서의 출처
로마 시대 법정 공문서로써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당시의 전문적인 서기관의 필체로 기록되었다. 크기는 60×130cm 가량으로 전체 50매로 되어있으며 현재 터키의 성소피아 사원에 보관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가 실제로 빌라도에 의해서 작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간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보고서가 당시의 로마 사가인 발레우스 파테르쿠르스(Valeus Patergurus)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 발레우스가 자신의 역사책에서 전하는 이 보고서의 원명은 예수의 체포, 심문과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로 되어있다.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Cornelius A.D.55-117)에 의하면 발레우스는 예수 탄생 당시 10세였으며, 가이사의 친한 친구로서 16년간 로마군의 지휘관으로 그리고 그후에는 집정관으로 지낸 인물이라고 한다.

2) 보고서의 주요 내용
이 보고서는 크게 빌라도 자신과 유대 지도자들과의 정치적 갈등 관계, 청년 예수를 처음 만났을때의 그의 인상, 예수심문 과정에 대한 자세한 소개 그리고 예수 십자가 처형과 그의 부활에 대한 빌라도의 부관'이슬람'의 보고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보고서에서 빌라도는 나사렛 청년 예수가 그렇게 선동적이거나 반항적이지 않았으며 때문에 그는 예수를 예루살렘과 유대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처음 예수를 만났을때 그는 예수의 위엄있는 모습에 압도되어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것처럼 두려움으로 사지를 떨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교훈은 단순하면서도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의 설교보다 더 힘이 있고 장엄하였다고 한다. 또한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이 얼마나 예수를 추앙하며 따랐는지를 언급하면서 로마 제국도 결국은 예수 종교를 국교(國敎)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예수를 재판할때 자신은 예수의 무죄함을 알고 그를 풀어주기 위해 무척 애를 썼으나 유대 민중들의 폭동이 예상되어 어쩔수 없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다고 말한다. 한편 이 보고서에는 빌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때문에 예수를 못박는 운명에 처하게 된것을 한탄하는 내용도 나온다. 그리고 예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부관에게 들었을때 빌라도가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되어있다.

2. 예수 십자가상의 죄패

1) 사복음서의 죄패 기록
마27:37, 막15:26, 눅23:38, 요19:19 등 네 기록에서 공통된 것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다.

2) 빌라도의 죄패 기록
십자가의 죄패는 히브리어와 라틴어 그리고 헬라어로 기록되었다(요19:20), 그런데 여기서 히브리어란 헬라어 글자로 음역된 아람어의 형태 곧 히브리어의 아람 방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처음에는 간단한 형태의 라틴어로 예수의 죄명을 썼다. 그리고 나서 팔레스틴에 있는 다른 모든 종족의 사람들이 읽을수 있도록 헬라어로 예수의 이름과 그 출산지까지 써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람어로는 '나사렛 사람' 이라는 출신을 생략하여 기록했을 것으로 보인다. 십자가 위에 붙인 죄패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라틴어 : REX IUDAEORM HIC (렉스 유대오룹 힉;이는 유대인이 왕이라).
② 헬리어 : jIhsu" oJ Nazwsai'o" oJ basileu;" ton Iousaivwn(예수스 호 나조라이 오스 호 바실류스 톤 유다이온;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③ 아람어 : ayrrtyd akl! [ywvy and(다니 예수아 멜레카 디위디;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3) 사복음서간의 기록 차이
유대인을 1차 독자로하여 기록한 마태복음은 그 복음서 자체가 아람어로 저작되었듯이 죄패도 아람어 표시를 따랐다고 볼수 있다. 그리고 로마의 성도들을 독자로하는 마가는 빌라도가 쓴 원래의 라틴어 기록에 의존한듯하며 요한은 그의 사역이 헬라어에 익숙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에 명패에서도 헬라어 표시를 의존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누가는 민족이나 신분의 구분없이 모든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이해할수 있게 가장 핵심 요소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만을 기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3. 예수의 죽음

신21:23에 의하면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로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규정하기 위해 돌로쳐 죽이지 아니하고 십자가의 형벌을 고집하였다. 이 십자가의 방법만이 당시 보편적인 호응을 받았던 예수 운동을 종결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저주로써 연관시키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도리어 율법과 전통의 굴레에 매인 그들이 하나님의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가장 악독하고 치욕스러운 처형법인 십자가형을 당하심으로 메시야적 사명을 완수하신다. 요한은 독자들이 잘 알고있는 십자가 처형의 구체적 과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마리아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이신 것은 예수의 참다운 인간성과 연민의 마음을 보여준다.

1.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요18:1-19:37)
본 서의 수난 기사는 공관복음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본 서의 특징은 무엇인가? 왜 유대인은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려고 했는가?

1) 하나님 아들과 십자가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본 서만 기록되어 있는 수난사의 내용은 세가지 특징으로 요약된다. 첫째, 요한의 기록은 매우 상세하고 비교적 역사적 사실을 보도하고자 했다. 둘째, 유대인들을 예수의 살해자로 부각시키고 있다. 셋째, 예수의 죽음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인 동시에 아들자신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은 당시 정치 권력간의 흥정의 결과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참생명을 나누어 주기위해 감당하셨던 예수의 자기 희생이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된 직접적인 원인은 예수의 기존 성전 체제의 부인에서 찾을수 있다. 예수는 유대교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메카니즘인 성전과 이를 둘러싼 성결 규정, 제도 등을 여러차례 부인하셨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은 성전을 둘러싼 자신들의 이권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제거해야만 했다.

2) 십자가 처형
유대법에 의해 예수를 돌로 처형할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 형벌을 당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구약시대 후기부터 전해지는 전승이 있었다. 그것은 참선지자가 세상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쳐죽인다면 예수가 참선지자였음을 확신케하는 기회를 제공할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통해 문자와 전통의 굴레에 매여 참된 신앙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위험을 항상 경계해야만 한다.

2. 부활하신 예수(요19:38-20:31)
본장에서는 예수의 부활과 그 영향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예수의 부활 사건이 제자들에게 미치는 파급 효과를 점차적으로 기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이 본 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까지 연결되어 있다. 부활 전승의 유형은 무엇인가? 부활에 관해 기록할때 요한이 의도 한 바는 무엇인가?

1) 예수의 부활
예수의 부활에 관한 초기 전승들에는 두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 하나는 부활 이후 예수가 여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전승들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시신이 놓여있었던 무덤이 비어있음을 발견했다는 전승들이다. 요한이 교회의 부활절 신앙에 관한 중심적인 진술로 의도하였던 것은 이 두가지 유형의 전승을 기술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부활을 통해 요한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라는 도마의 고백을 신앙의 최고 절정으로 나타내고자 한다. 사도 요한이 본 신앙의 최고 결정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일이다. 요한이 본 부활 사건은 바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셔서 이세상에서 만나게 된 예수는 아직 제자들에게 오시리라고 약속하신 올리워진 주님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그를 만지려고 하는 마리아에게 "만지지 말라"(요20:17)는 금지 명령을 한다. 예수는 "내가 아직 올라가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요한은 부활을 예수가 아버지에게로 올라가는 과정가운데 한단계로써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2) 요한의 저술 목적
요한이 독자들을 향한 직접 화법으로 자신이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20:31)라는 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데 있었다. 그는 전기적 차원에서 예수의 행적을 다루지 않았고 오직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3. 맺는말(요21장)
요한복음은 요20:30,31로 결론지어지고 21장은 나중에 추가된 부록이라는 것이 거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장이 첨가된 이유는 무엇인가? 첨가되었다면 누가 본장을 첨가하였는가? 또 디베랴 바닷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목양 명령이 주시는 교훈은 무엇인가?

1) 부록 첨가
요20:30,31은 처음에 의도한대로 이 복음서의 결론을 이룬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21장은 추가된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21장을 하단의 첨가 부분으로 볼경우 그것이 1-20장이 저자에 의해 작성된 것인가 하는 의문이 제시된다. 여기서 1-20장과 21장 사이의 뚜렷한 유사성을 검토해 볼때 21장이 다른 저자에 의해서 기록된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왜 본장이 첨가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다시 서신 그리스도는 아직도 그의 교회에 관심을 가지시며 그의 기적적인 능력과 인자하신 사랑이 식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두번째는 베드로의 명예 회복이다. 즉 예수님을 부인한후 잃어버린 그의 권위를 회복시켜 그리스도의 양무리를 감독하는 인도자로 세우신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세번째는 사도 요한에 대해 그가 예수님의 재림때까지 죽지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오해하는 헛소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요21:20-23).

2) 부활한 예수의 현시
요한은 부활의 진실성을 믿지않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진실을 확인시키기 위해 본장을 기록하지 않았다. 본 기록을 통해 저자는 베드로가 교회의 복음 전도와 목회 활동의 앞선자이며, 사랑받은 제자는 예수에 대한 복음 전승의 보증인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15-25절에서 세번 질문받은 베드로는 예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세번 확인하고나서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양떼를 돌보라는 위탁을 받는다. 주님은 저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마10:38).

요한복음이 20장으로 끝났다면 본 서의 최후의 신앙고백을 한 사람은 도마가 된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라는 도마의 고백은 요1:1의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와 일치하고 있다. 이것은 기자 요한이 복음서를 집필한 목적과도 일치하고 있다. 즉 요한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예수는 기다리던 메시야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본 서를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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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혜사

1) 용어의 정의
'보혜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paravklhto"(파라클레토스)는 문자적으로는 '누구의 곁으로 부름받은 자'라는 뜻이지만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즉 이 단어는 능동적인 측면에서 재판관 앞에서 다른 이를 변호하는 자 혹은 곁에 서서 격려하며 권고하는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아무개에게 탄원을 올리는 중재자(요14:16 ; 요16:17 ; 요일2:1)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수동적인 측면에서 앞에 서서 보조하고 원조하는 자, 친구라는 의미를 갖기도 한다.

2) 보혜사이신 그리스도
일반적으로 '보혜사'라고 하면 성령만 생각하기 쉬운데 요14:16에는 분명 예수그리스도도 우리의 보혜사이심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라고 했는데, 여기서 다른 보혜사란 성령을 가리키며 아울러 예수그리스도 자신이 한보혜사이심을 암시한다. 또한 요일2:1은 예수그리스도가 성도들의 죄용서를 위해 성부 하나님께 중재하는 대언자라고 말한다. 이는 근본 예수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자기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침으로써 죄인들이 그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수 있게 하신 그분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염두에 둔 것이다(사53:11 ; 벧전3:18). 그리고 이렇듯 하나님과 인간을 화목케하며 중재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의 대제사장직과도 일치하는 것이다(히7:25-28). 이에 보혜사이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가운데 그 사역을 수행하고 계신다(롬8:34).

3) 또다른 보혜사 성령 
성령 하나님도 성자 예수그리스도와 동일한 우리의 보혜사이시다. 그러나 보혜사 성령의 사역은 신자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알려주는 계시자로서 또 증거하는 증거자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신다. 그리고 특히 성령은 성도안에 내부하심으로써 성도들과 함께하시며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때로는 뜨거운 확신으로 때로는 위로와 권면하심으로 도우신다(롬15:13 ; 고전2:10-16).


2. 신약 원어로 본 죄의 개념

1) aJmartiva(하마르티아)
하마르티아의 원뜻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가리키며 죄, 과오, 범죄로 해석된다.

2) paravbasiv"(파라바시스)
파라바시스의 원뜻은 '건너가다'로써 선함에서 악함으로 건너가는 상태를 말한다. 범법파괴, 범죄로 해석된다.

3) paraptwvma(파라프토마)
파라프토마의 원뜻은 '미끄러져서 넘어가다'로써 부주의 과실로 인한 범죄를 가리킨다. 불법, 빗나간 타락으로 해석된다.

4) ajnomiva(아노미아)
아노미아는 올바른 법규를 알면서도 의지적으로 그것을 어기는 것을 가리키며 불법, 불의로 해석된다.

5) ojfeivlhma(오페일레마)
오페일레마는 도덕적으로 하나님께 빚지는 행위로써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 의무를 이행치 않음을 가리킨다. 빚, 실수로 해석된다.

6) ajdikiva(아디키아)
아디키아는 도덕적으로 불의한 성향을 띤 생활을 하는 상태, 나쁜 행위 등을 가리킨다. 불의, 불공평, 사악함으로 해석된다.

7) ajidivon(아이디온)
아이디온은 법적인 의미에서 범죄를 가리키며 보통 죄, 고소등으로 해석된다.

8) provskomma(프로스콤마)
프로스콤마는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그 발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써 범죄, 실수, 거침돌로 해석된다.

9) skavndalon(스칸달론)
스칸달론의 원뜻은 '함정에 빠지다, 장애물에 걸리다'라는 뜻으로써 덫, 올가미로 해석된다.

3. 성도가 누리는 영적 평안

① 그리스도가 대신 징계받음으로 누리는 평안(사53:5).
② 세상이 주는것 같지 않은 평안(요14:27).
③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없게하는 평안(요14:27).
④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안(요16:33).
⑤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받아 누리는 평안(롬5:1).
⑥ 믿음안에서 충만게 된 평안(롬15:13).
⑦둘로 하나를 만드사 연합게 하신 평안(엡2:14).
⑧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신 평안(골1:20).
⑨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주시는 평안(살후3:16).
⑩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며 구해야하는 평안(벧전3:11).
이러한 10가지 영적 평안은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누려야할 평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걱정과 근심 그리고 불안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평안이 아니라 영원한 평안임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본문에서는 유월절과 결부되어 발생하는 일들과 예수의 최후 사역의 결미를 나타내고 있다. 그동안 분주했던 예수의 사역과는 달리 매우 차분하고 질서 정연한 사건 진행을 보여주는데 특별히 예수의 고별 연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 사건을 다루고 있다.

1. 그리스도의 섬김의 도(요13:1-35)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전 제자들 사이에서는 누가 제일 큰 자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눅22:24). 따라서 예수께서 직접 행해보이신 그의 교훈은 매우 큰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보다 커다란 의미는 무엇인가? 물로 발을 씻는 행위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1) 발을 씻기신 예수님
본 사건은 체포당하시기 하루전 목요일 저녁 마가의 다락방(행12:12)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보이신 기사이다. 특이한 것은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가 담고있는 성만찬에 관한 언급을 담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문은 성만찬 제정 이야기를 대신하는 별개의 기사라기보다는 성만찬에 관한 보다 발전된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위는 당신의 피가 성도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준다고 하는(히9:14) 성례전적 암시를 보여준 것이다. 본 서가 공관복음보다 후기에 기록되었으므로 독자들이 성만찬을 이미 잘 알고 있음을 전제하고 성만찬에 대한 보다 의미있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런 의미에서 세족식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요13:1-11)와 그 해석(요13:12-20)으로 구성되는 본문은 성례전에 대한 요한의 신학적 해석이라 할수 있다.

2) 세족식의 상징적 의미
예수께서 보이신 모범적 행동은 비단 이 시점에만 행해진 일이 아니라 공생애를 포함한 예수의 전생애에 있어서 행해진 일이었다. 그의 절대적 희생의 겸손은 그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된다. 이렇듯 솔선수범하신 예수의 봉사 행위는 어느 누구의 부탁과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며 자발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에서 비롯되었을뿐만 아니라 능동적 사랑의 정신에서 출발한 행위였다.

2. 제자들의 질문(요13:36-14:31)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이 따라올수 없는 곳으로 곧 떠나신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제자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언한다. 이 모든 말씀을 통해 제자들은 슬픔과 혼란에 빠진다. 따라서 본장을 통해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확신과 평안을 주는 말씀으로 위로하신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인가?

1)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
제자들의 영적 무지는 빌립의 질문(요14:8)으로 나타난다. 가시적이고도 구체적인 증거를 요청한 빌립의 태도는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함과 동시에 그 동기에 있어 다분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현현이시다(골1:15 ; 히1:3). 예수의 모든 언행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을뿐만 아니라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을 모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즉 예수의 사역과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로써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므로 예수를 믿는 자만이 하나님을 볼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이 모든 말씀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세상적인 안목과 육신의 생각에 더많은 비중을 두었던 제자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따라서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그들에게 예수의 말씀을 깨닫고 실천할수 있도록 권면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2) 아들과 신자
예수께서는 비록 세상을 떠나시지만 보혜사 성령을 통해 자신의 사역을 계속할 것임을 예고한다(요14:18). 아버지와 아들이 연합하심같이 신자 안에서도 예수께서 내주하심으로 일체가 되어 예수의 행하신 사역을 신자도 감당할수 있음을 말한다(요14:12). 따라서 성령께서는 예수께서 신자 안에, 신자가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연합하게 하시고 신자로 하여금 늘 하나님과 교통하는 가운데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감당할수 있게 하신다.

3. 대언자의 일(요15:1-17:26)
예수는 제자들과의 이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를 포도나무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또한 앞으로 제자들에게 닥칠 환난에 대한 경고와 함께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약속을 통해 제자들을 위로한다. 여기서 포도나무는 무엇을 의미하며,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의 약속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의 기도의 특징은 무엇인가?

1) 참포도나무
예수는 포도나무의 원줄기와 가지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제자, 그리스도와 오늘날 성도들간의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오늘날 성도들간의 신비적 연합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따라 죽음과 부활을 함께하는 신비적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과 밖에 있는 자들이 그 열매로 구분된다. 여기서 포도나무에 붙어있어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어떠한 고난이라도 인내하는 것과 관련하여 이해된다(요15:13). 요16:1-4에서 임박한 박해에 대한 예고후에 요5:15에서는 보혜사 성령의 강림을 약속한다. 이는 이후 다가올 시련과 혼란에 대해 경각심을 고취시킴과 동시에 궁극적으로 승리의 삶을 경주할 것을 권면하시는 예수의 위로하심이다.

2) 예수의 기도
전장에서 마감된 고별 강화는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있는 제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주로 성령 보혜사의 임재와 그 능력에 대해 다룬다. 예수의 기도는 하나님을 대상으로 드리는 중보기도로써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요17:1-5),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17:6-19),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요17:20-26)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예수의 기도는 구체적으로 먼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한후에 우리의 이웃과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함을 교훈해 준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모든 환난과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힘이 된다. 기도의 능력은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가 바라는바는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바와 일치한다.
그러나 가지가 줄기에 의지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들의 기도도 그리스도에 대한 의존의 표시가 되어야 한다. 본 연구를 통해 요한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앞으로 닥칠 환난에 의연히 대치할수 있도록 권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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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나타난 물의 상징적 의미

1) 생명의 근원
성경에서 물은 종종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렘2:13 ; 렘17:13). 구원은 오직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께로부터 말미암는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그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사55:1-3)고 외쳤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이 브엘세바 들판에서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때(창21:14-19)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기갈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때(출15:23-25 ; 출17:6) 그들을 살린 것도 바로 하나님이 주신 물이었다. 또한 에스겔이 환상에서 본바 성전에서 흘러 나와 큰 강을 이룬 물은 생명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겔47:1-12).

2) 씻음, 정결케 됨
구약 시대의 종교 의식에 있어서 물은 곧 부정(不淨)한 것을 씻고 정결케하는 의미를 포함한다.(레11:32-36 ; 민19:9). 이러한 의미는 신약 시대의 세례 의식과 관련하여 보다더 확장되어 나타난다. 즉 세례를 통하여 성도는 죄에서 깨끗게되는 것뿐만 아니라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엡4:22-24) 중생을 경험하게 된다.

3) 성령
신·구약 전체에서 물은 삼위 하나님 중 특별히 성령 하나님을 상징하는 용어로 자주쓰였다. "내 신을 부어 주리니"(욜2:28-29),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며"(신34:9), "생수의 강"(요7:38) 등이 모두 성령을 가리킨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가지고 지상에 있는 성도들이 영생에 이르도록 이끄는 성령의 사역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2.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의 용서

1)묵과가 아닌 용서임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죄를 묵과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공의에 절대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께서 그 여인의 죄를 묵과하신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것임을 알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분명 예수께서 그 여인의 죄를 알고 계시면서도 정죄하는 대신 용서하신 것을 보여준다. 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한 여인에 대한 모세 율법을 근거로 하여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할때 예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그것은 분명 그 여인이 자기 죄로 인해 죽어 마땅함을 예수께서도 인정하신 것이다. 다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심으로써 자신의 죄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죄만 정죄하기를 좋아하는 그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신 것이다.

2) 모세 율법의 정신과 배치되지 않음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것은 결코 모세 율법과도 배치되지 않는 일이다. 모세 율법의 근본 목적은 범죄한 자들에게 형벌을 가하도록 하는데만 있지 않다. 그것은 오직 더이상 죄를 짓지않도록 방지하는데 있다. 특정 죄인에게 사형을 행하도록 규정짓고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을 죽이는것 그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경고삼아 다른 사람들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더이상 죄를 범치말라 하시고 그 여인을 용서하신 것은 모세 율법의 본래 목적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다. 더나아가 모세 율법은 단지 죄를 지적하여 깨닫게 하고 또 그것에 대해 형벌을 가하게 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써 죄를 규제하였으나, 예수께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용서를 통하여 더이상 죄를 짓지 아니하고 의를 행하도록 하셨다. 이와 유사하게 구약에서는 보복법(출21:23-25)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단지 더이상의 피흘림을 방지하기 위한 소극적인 방책으로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교훈을 하고 있으나 신약은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 사랑과 관용으로 원수까지도 선대하라고 교훈하고 있다(마5:38-41 ; 눅6:5). 여기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구약보다 우월함을 발견하게 된다.

3. 왕으로서의 예수에 대한 구약의 예언

①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신 왕이시다(삼하7:12,13 ; 룩1:32,33).
② 거룩한 산 시온에서 세움 받으신다(시2:6).
③ 영원한 권세를 가지신 왕이시다(시45:3-7).
④ 시온에서부터 권능의 홀로 다스리신다(시110:1,2).
⑤ 공의와 지혜로 통치하신다(사9:7 ; 렘23:5).
⑥ 평화의 왕으로 오신다(사52:7 ; 슥6:12,13).
⑦ 지극히 존귀하게 여김을 받을 것이다(사52:13).
⑧ 전세계를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단2:35,44).
⑨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다(미5:2,4 ; 마2:1,6).
⑩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신 왕이시다(슥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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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복음이 갈릴리 사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요한은 과감히 갈릴리 사역을 생략한채 38년된 병자고침 사건을 통해 안식일 논쟁을 야기시킴과 동시에 예수의 담화를 이끌어낸다. 예수는 메시야로서 혹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증거들을 보이며 변론을 한다.

1. 이스라엘의 불신앙(요5,6장)
본문은 예수께 대한 이스라엘의 결핍된 믿음의 원인과 그 성격에 대한 설명이다. 5장은 예루살렘에서의 유대인들 사이에 일어났던 이 불신앙의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 6장은 갈릴리의 평민들에 의한 불신앙의 표현을 언급하고 있다. 38년된 병자고침 사건에서 대두된 안식일 논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안식일 논쟁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친 사건을 계기로 형식적 율법주의에 길들여져 있던 유대인과의 논쟁은 시작된다. 요한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갈릴리의 사역을 과감히 생략하고 38년된 병자고침 사건을 통해 야기된 안식일 논쟁을 통한 예수의 담화(요5:19)를 이끌어낸다. 안식일 논쟁은 본 서 가운데 등장하는 여러 논쟁들 중 최초의 것이라는데 의의를 갖을뿐만 아니라 여기서부터 예수께 핍박과 배척이 시작됨을 주의해야 한다. 한편 지금까지 유대 교권주의자들과의 충돌을 자제해 오셨던(요4:1-3) 예수는 이제 예루살렘을 두번째 방문하신때부터 자신이 행하신 기적과 그것에 대한 유대인들의 논쟁을 통해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셨고, 스스로 증거하심으로써 그들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게되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2) 생명의 떡
오병이어의 표적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에 부응하게 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민족주의적 메시야상을 거부하신다. 예수는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고 몰려든 무리들에게 당시의 몸이 구속을 위한 희생으로 바쳐질 유일무이한 '생명의 떡'임을 주지시켜 나간다.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의 강화(요6:22-59)를 통해 오병이어의 표적은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메시야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임을 주지시킨다.

2. 하나님의 사도이신 예수님(요7:1-10:21)
예루살렘은 메시야 사역에 있어 폭풍의 중심이 된다. 성밖에서 갈릴리의 유대인과의 갈등을 간략하게 기록한후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현장을 자세히 언급한다. 여기서 생수는 무엇을 의미하며, 세상의 빛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1) 생수와 생명의 빛
요7:37-53에서 예수는 자신을 생수의 근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구약에서 생수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이러한 생수의 개념은 그대로 적용되어 예수는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계시하셨다(요4:14). 생수는 요한에 의해 미래에 주어질 '선물'로 암시되었으며, 이는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생수의 강으로 표현한다(요7:39). 유대인들은 수세기에 걸쳐 반복되는 초막절때마다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12:3)라고 노래함으로 샘물을 솟게할 메시야를 대망해 왔다. 이제 예수는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심을 선언함으로 메시야 대망을 성취시키사 모든 갈급한 영혼에게 완전한 해갈을 보장하셨다. 계속해서 예수는 요한복음 8장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극렬히 반대하는 어둠의 세력들을 향하여 구원과 동시에 심판을 선언한다. 여기서 예수 자신을 빛으로 비유하심은 광야를 향군하던 이스라엘에게 불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비추어 주신 하나님을 상기케 한다(민9:15-23).

2) 인자 예수
인자라는 예수의 자기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인격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볼수 있다. 인자는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와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다시 영광 가운데 올라가실 것이며 장차 세상 끝날에는 심판주로 오실 분임을 의미하고 있다. 인자는 들리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3.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요10:22-12:50)
예수는 수전절 유대인과의 논쟁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충격적인 고백 선언을 한다. 이제 유대인들의 살해 음모는 더욱 본격적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에서 잠시 피하신 예수께서 나사로의 죽음 소식을 접하시고 나사로를 소생시키신다. 나사로 부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루살렘 입성의 신학적 의의는 무엇인가?

1) 나사로의 부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본 서의 정점을 이루는 최대의 표적으로 예수께서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 사건은 장차있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시하는 전주곡의 성격을 지닌다. 비록 예수께서 살리신 나사로는 부활하신 예수와 같은 존재는 아니었지만 예수의 사역 대상으로써 다시 생명을 부여받음으로써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본 서의 대교훈을 나타내주는 구체적 예증이 된다. 즉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은 요5:25-29의 약속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요한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그의 공적 사역의 최종 단계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를 요한은 '이스라엘의 왕' (요12:13)이란 특별한 신학적 용어를 사용한다. 이 칭호는 오직 요한만이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요한은 의도적으로 예수의 사역이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이며,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메시야이심을 드러내는데 치중한다.

2) 최후의 경고
본 서에서 강조하는것 가운데 하나는 구원의 행위가 성립될때 생기는 어두운 면이다. 즉 구원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분리되어 자동적으로 심판이 행하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과 심판의 행위는 따로 따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번 주신 주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고 거부하면 심판을 받게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길을 온전히 비추셨다. 예수 당시의 제자들은 예수가 육체로 이땅에 거하시는 동안만 일시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주속에서 비쳐나오는 하나님의 영원한 빛과 생명을 믿은 것이다. 예수는 그의 공생애 사역을 마치면서 최후의 경고를 주신다. 우리에게 주시는 그의 경고와 명령은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결국 그의 명령은 영원한 생명 그자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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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고스의 이해

1) 헬라어에서의 로고스 개념
헬라인의 로고스(Logos) 관은 근본적으로 우주는 저절로, 자연히 존재하며 영속하는 것이라는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써 이처럼 자연 발생한 우주와 역사속에 보편적으로 배재한 법 또는 신적 정신 또는 원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로고스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이러한 로고스가 인간의 영혼의 이성에도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과 그를 반영하고 표현하는 인간의 말에도 로고스가 들어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주 만물속에 보편적으로 내재해 있는 법 또는 원리인 로고스에 의하여 세계는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또 로고스를 통하여 인간은 우주의 신적 원리 또는 정신과 교감할수 있다고 보았다. 이로 볼때 헬라어에서의 로고스는 자연 발생론적 우주관 및 범신론 사상에서 우러나온 개념임을 알수 있다.

2) 성경에서의 로고스 일반 개념
헬라인들은 자연 발생된 우주 만물들에 범신론적으로 깃든 우주의 이법 원리 등이 로고스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 초월자로서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이 조화를 이루게 경륜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에서 우러나온 계시의 말씀과 우주의 운행속에 담긴 조화로운 섭리의 원리를 로고스라 칭한다. 우주 전체에 편제한 절대적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절대 초월자이신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을 선도하는 계시 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시의 내용일 뿐이라는 것이다.

3)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
① 로고스의 주체로서의 그리스도 : 예수는 인자이신 동시에 성자 하나님이신바 절대 초월자의 한분으로서 우주와 역사를 창조하신 분이며, 또 우주와 역사의 원리를 입법하신 분이시다. 또 그에 대한 주권과 의지를 말씀으로 선포하시는 주체의 한분이시다.
② 로고스의 전달자로서의 그리스도 예수는 성육신 이전에도 여호와의 사자로서 하나님의 주요, 계시의 전달자의 사역을 하였거니와 결정적으로는 성육신하셔서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를 복음으로 제자들에게 전달하셨다.
③ 로고스 자체로서의 그리스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궁극적 메시지는 결국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의 구속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그리스도는 로고스(Logos) 그 자체이시다. 이상의 세의미에서 주님은 전우주와 구원의 원리를 세우신 로고스의 근원이시며 그 로고스의 전달자이시며 로고스 그 자체이시다.

2. 신령과 진정으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enpneuma ti kai alleqeia이다. 먼저 '엔'은 '~안에서(in)' 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그리고 '카이'는 '그리고' (and)라는 뜻의 단순 접속사이다. 한편 프튜마티의 원형은 '프뉴마'로써 이는 바람 따위가 '불다'(마7:25 ; 요3:8)라는 뜻의 '프네오'에서 유래하여 '영'(고전15:45 ; 갈4:6) 또는 '영혼'(마27:50) 및 마음의 '중심' (막2:8)이나 '귀신' (막1:6 ; 눅9:39)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나 심령 및 귀신이 보이지않기 때문에 보이지않는 바람의 속성에서 이같은 의미가 파생된 듯하다. 그러나 문맥상 '신령'의 의미가 예배자의 자세와 관련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요4:23의 '신령으로'라는 뜻은 '귀신'이라는 의미보다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것을 뜻하는 '영으로' 또는 '마음의 중심으로'라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진정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alleqeia'는 그 원형이 '알레테이아'이다. 이것은 '숨기다'(막7:24 ; 눅8:47) 또는 '알지 못하다' (행26:6) 및 '잊다' (벧후3:5,8)를 뜻하는 '란다노'에 부정적 의미를 갖는 접두모음 '아'가 합쳐져 명사화된 단어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숨김이 없는 상태' 또는 어떤 일을 '깨달아 아는 것' 및 하나님 뜻을 '잊지 않는 것'을 뜻한다. 개역 성경에서 '알레데이아'는 일반적으로 '진리'(요17:17 ; 벧전1:22) 및 '진실함'(엡5:9)으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들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는 뜻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요4:23에 나타난 '진정으로'의 정확한 의미는 '있는 모습 그대로 숨기지 않고' 혹은 '사실을 정확하게 깨달아 알며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고'라는 것이 된다. 결국 이상을 통해'신령과 진정으로'의 의미는 사람이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하는 뜻을 풀어 설명하면 예수님께서는 장차 사람들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 곧 사람의 그 마음 중심을 드리며 또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예배드리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다.

3. 요한복음에서의 예수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행하신 기적은 기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적의 의미가 중요한 것으로 나타난다. 기자 요한은 예수가 행한 모든 이적들은 하나님의 일이었음을 나타내는 표적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즉 요한은 '하나님의 일'로써의 기적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만이 그 참된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그의 기적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고백할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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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요한복음의 서론 부분과 함께 예수께서 행하신 공생애 초기사역이 중심을 이룬다. 사도 요한은 본 서신에서 로고스의 개념을 통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들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는 표적임을 보여주고 있다.

1. 서론(요1:1-1:18)
본문은 요한복음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써 간결한 문장속에 그리스도의 신성을 무게있게 묘사하며 고도의 신학성 또한 가미하고 있다. 요한은 헬라 사고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로고스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요한의 로고스 개념은 무엇인가? 성육신 개념 도입 의도는 무엇이며 또 성육신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1) 말씀과 지혜 개념
유대교의 지혜 개념 (hmqj;호크마)에서는 하나님의 현존안에서 독립적인 존재를 지니고있고 피조된 세상과도 특정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헬라인들은 로고스를 세계 가운데 내재하는 법 또는 이성으로만 인식하였다. lovgo"(로고스)에 대한 요한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말씀은 하나의 원리나 인격화된 표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사람의 빛이신 하나님이었다. 비록 그가 당시 널리 알려져있고 또 매우 다양한 배경을 이면에 가지고 있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더라도 그가 의도한 로고스의 의미는 본질상 기독론적이었던 것이다.

2) 말씀의 성육신
요한 생존 당시의 가현론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추악한 인간이 되어 자신의 신성을 더럽힐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실제로 인간이 된것이 아니라 인간인 것처럼 보이려고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황당무개한 이론을 단호하게 배척한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말은 성육신이 이세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우리 인간들속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 증거와 계시의 주간(요1:19-2:11)
요1:1-18까지가 요한복음의 서론이라면 본문은 본론의 시작이라 할수 있다. 특히 본문은 본론중 하나의 연속되는 주제인 '증거되는 하나님의 아들'(요1:19-2:11)에 속해있는 단락이다. 요한은 예수의 사역의 출발을 제자들을 부르는 일에서 시작한다. 세례 요한은 자기를 어떠한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는가? 또한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어떤 분으로 알고 있었는가? 한주간 동안 예수의 사역의 중심은 무엇이었나?

1) 세례 요한
기나긴 고난과 어두움의 역사에 찌들렸던 유대 민족의 기대감은 세례 요한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드러내여' (요1:20) 자신이 결코 메시야가 아니라고 했다. 비록 그는 '선지자보다 나은 자' (마11:9)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자였지만 자기가 그리스도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해드릴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한다(요1:27). 이렇듯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사야의 예언대로 기다리며 예비한 그 '주'(Lord)가 되며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권위가 있으신 분(요1:27), 유한적 존재가 아닌 영원속에 존재하신 분이 되시며(요1:30),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능력자(요2:33)로 이해했다.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는 무엇보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요1:34)에서 절정을 이룬다. 세례 요한은 예수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이해했다. 이렇게 요한은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다루지 못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보다 구체적으로 증거함으로써 예수께서 참된 그리스도 되심을 알리고 있다.

2) 첫주간의 사역
사도 요한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의 첫 한주간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을 통하여 예수께서 어떤한 분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본 서의 본론이 시작되고 있는 요1:19-2:11까지에서 저자는 예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 예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고 있다. 계속해서 처음 제자들에 대한 소개와 나다나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임금되신 예수를 표현하고 있으며, 가나의 혼인 잔치를 통해서 전개되는 그의 표적들은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 전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3. 새성전, 새출생, 새예배(요2:12-4:54)
저자는 예수의 공생애 초기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시고 성전 정화 소동을 행하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이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소동 사건을 그의 사역 초기에 기록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또한 니고데모를 통해 가르치신 중생의 도는 무엇인가?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1) 예루살렘 성전 소동
예루살렘 성전 소동은 공관복음서의 성전 소동(마21:12-17 ; 막11:15-19 ; 눅19:45-48)과 시간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즉 본문에서 예루살렘 성전 사건은 공생애의 초기에 발생했지만 공관복음서에는 공생애 말기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상의 차이이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공생애를 '갈릴리-예루살렘'이라는 도식으로 구성한 반면에 요한은 공관복음서와 다른 관점에서 그리고 공관복음서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하여 예수의 예루살렘 사역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는 공생애 말기뿐만 아니라 공생애 초기에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으며 성전 소동 사건도 한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예수는 많은 표적들을 행하셨고, 그 표적들을 통해 예수는 본 서의 중심 교리인 '예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상징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표적을 배경삼아 찾아온 니고데모(요3:3)를 통해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설명해 준다. 예수와 니고데모 사이에 있었던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것은 중생에 관한 일이다.

2) 우물가의 여인
앗수르에 의한 사마리아 함락이래(B.C.722년, 왕하17:6) 유대와 사마리아 두지방 간에는 오랜 세월 동안 뿌리깊은 반목이 형성되어 있었던 관계로 유대인들은 통상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고 유회하였으나 예수는 의도적으로 사마리아 땅에 들러 그것도 부정한 과거를 지닌 한여인에게 전도하심으로써 육체의 혈통이나 신분을 초월한 구원의 은총을 밝히 드러내었다. 여기서 예수는 자연스러운 일상적 대화를 통해 이른바 '생명수'에 관한 복음 메시지를 유도해 내셨으며 더불어 참예배의 본질을 가르치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는 이땅에 오셨다. 그의 기적들은 그가 하나님 아들되심을 증거하는 분명한 표적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적을 우리의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처럼 영적 무지속에 참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였다.


 

출처 : 갓피플 자료&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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