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파도가 나를 향해 와도!

[이사야 40장 27절~31절]
27절 -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28절 -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절 -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절 -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절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1. 이사야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평한 내용은 무엇입니까?(27절)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져 있고 내 공의는 하나님이 무시하신다’라는 거절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고통을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무신하신다면서 하나님께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특별히 하나님께 두 가지를 불평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포로 생활 중에 있는 자신들의 고통을 외면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원통함을 무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는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하나님은 이를 무시하시고 관심도 갖지 않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이스라엘을 도울 만한 능력이 없다거나 이스라엘에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고 불평한 것은,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2. 이사야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이사야가 소개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28~29절)
여호와는 영원한 하나님이시고 땅 끝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치거나 피곤하시지 않으며 그분의 통찰력에 대해 아무도 탐구할 수 없고, 연약한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워 주십니다.
이사야의 선포 내용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정확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네 가지로 하나님의 속성을 소개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은 초월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초월이라는 단어는 영원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치 않는 분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분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분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어느 곳에 가든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바벨론이라는 환경이나 상황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창조주 하나님께 주권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십니다. 또 하나님은 그 능력을 무능한 자들에게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제한이 없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무한히 신뢰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직면한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했지만, 그들의 불신앙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아무도 탐구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가진 분입니다. 통찰력이란 이성과 지혜에 근거한 올바른 이해력과 분별력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도 모두 이해하시며 사람들의 살아가는 사정도 잘 파악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의심과 불평은 하나님의 이런 속성들을 놓치고 있는 데서 출발한 것입니다.

3. 하나님에 관해 소개한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어떤 소망의 메시지를 전합니까?(30~31절)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사야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처한 상황에 대해 답을 제시합니다. 곧 ‘오직 여호와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바라다’(hwq; 콰아)라는 단어는 ‘기다리다’, ‘앙망하다’, ‘기대하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끝까지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다림’은 다른 의미에서 믿음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다림은 믿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인내한다면 ‘새 힘’을 얻을 것이라고 강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얻을 때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곧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걸어도 피곤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힘의 근원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라보는 대상이 환경이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이 될 때,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그들 안에 넘쳐날 것입니다.

4.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새 힘과 용기를 얻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삶에서 접하는 많은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현실이 초라하고 절망스럽다고 해도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태초에 계시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는 그분을 의지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우리의 믿음을 확고히 해 줍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할 때, 우리 안에 참 평안이 찾아오고 기쁨과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이와 반대로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때, 고난을 이기는 힘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은 의심과 불평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할 뿐입니다.

5. 나는 삶에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습니까? 일상에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기다림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그분의 시간에 맞게 계획된 일들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잘 알 때 믿음의 눈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이해는 믿음의 정당성을 확보해 줍니다.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지식은 예배, QT, 기도, 교제를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위기를 극복하며, 그분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기도는 벽을 뚫는다

[이사야 37장 30절~38절]
30절 - 왕이여 이것이 왕에게 징조가 되리니 올해는 스스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둘째 해에는 또 거기에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 셋째 해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나무를 심고 그 열매를 먹을 것이니이다
31절 -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32절 -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33절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화살 하나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34절 -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35절 -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6절 -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37절 - 이에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8절 -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
[이사야 38장 1절~8절]
1절 -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2절 -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절 -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4절 -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절 -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절 -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절 -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8절 -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1. 앗수르의 계속되는 위협 속에서 유다의 지도자인 히스기야 왕에게 닥친 위기는 무엇입니까?(38:1)
유다에 찾아온 또 다른 위기는 지도자인 히스기야 왕이 곧 죽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어려움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남 유다 왕국에 앗수르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었는데, 게다가 히스기야마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히스기야는 중병에 걸려 있었는데, 회복하지 못한 채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조금의 가능성도 열어두시지 않은 채, 유언을 남기라는 매몰찬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유다의 대표적 성군이자 하나님 나라를 다시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히스기야와 큰 위기 속에 있는 유다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였습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행하시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히스기야에게 혹독한 시험이 닥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름대로 잘 섬기고 실제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음에도 남들이 당하는 것과 동일한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겹쳐서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를 보면서 이런 고통과 어려움이 자신에게만 닥쳐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집중해 묵상해야 할 것은 그 고난이 나에게 왜 찾아왔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면서 그 위기를 정면 돌파합니다. 우리는 위기 때에 믿음으로 정면 돌파하려면 평온할 때에 믿음의 기초 체력을 다져 놓아야 합니다.

2. 위기 속에서 히스기야가 보여 준 즉각적인 반응은 무엇입니까?(38:2~3)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진실과 전심으로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매달렸습니다.
히스기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해 선택한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의 청천벽력과 같은,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라는 사형 선고와 같은 메시지 속에서 주저앉아 낙망만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히스기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하나님께 달려가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하면서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히스기야가 벽을 보고 기도한 것은 아마 그의 형편이 꽉 막힌 벽과 같았기 때문일 것이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보지 않겠다는 신앙의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에게 하나님 외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거짓이 없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자신이 전심으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해 달라고 통곡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공로를 기억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알고 그분께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벽을 보고 기도했는데, 그 벽에서 소망의 문이 열린 것입니다. 간절한 기도는 막혀 있는 벽에도 문을 만듭니다.

3. 히스기야의 반응에 대해 하나님이 주신 응답과 징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38:5~8)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듣고 눈물을 보았다면서 그의 수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고, 앗수르의 위협에서도 보호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징표로 해시계의 해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통곡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눈물을 보셨으며, 그의 기도에 대해 풍성하게 응답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의 병을 고쳐주셨을 뿐 아니라 수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예루살렘 성을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덤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해시계의 해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는 초유의 징표도 주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믿음을 시험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은 히스기야로 하여금 오랫동안 통치하게 하시고, 유다 나라를 이끌어 가게 하시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는 아직도 히스기야가 필요했고, 유다 나라는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음의 위기에서 체념하고 원망했다면, 하나님은 그를 대신해 다른 사람을 고르셔야 했을 것입니다. 다행히 히스기야는 자신의 온전한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드렸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유다의 부흥을 이뤄 가셨습니다. 위기는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있지 않습니다. 위기를 통해 하나님의 놀랍고도 풍성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위기는 기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는 시간이 됩니다.

4. 위기를 맞이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어떠합니까? 혹시 하나님과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까?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위기가 닥친다면, 정신을 놓고 망연자실하며 원망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기를 맞이할수록 하나님께 더욱 집중해야 합니다. 성도라 해도 잠시 동안 정신을 놓을 수 있지만, 곧 하나님 밖에 해답이 없음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벽을 향해 기도한 것처럼, 나에게도 기도의 골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의 특권을 갖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하나님께만 집중하면 그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5. 위기 상황에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도한 것 외에 더 많은 것으로 응답해 주심을 믿습니까?
히스기야는 병 고침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병 고침은 물론이고 수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앗수르의 위협에서도 나라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부와 명예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려움을 주셨다고 원망만 할게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매달려 보십시오. 하나님은 색다른 방법으로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것들로 풍성하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을 의지해 전심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복

[이사야 35장 1절~10절]
1절 -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절 -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3절 -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4절 -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절 -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절 -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7절 -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8절 -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9절 -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10절 -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1.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첫 번째 변화는 ‘땅’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이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1~2, 7절)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면 광야, 메마른 땅, 사막에 아름다운 꽃이 피고 물이 솟아나며 시내가 흐를 것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모든 광야, 사막, 메마른 땅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사막은 물이 없어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물이 풍성하게 솟고, 그로 인해 꽃이 피며 풀들이 무성히 자라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하나님이 메마른 땅에 무한정으로 물을 공급하시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가 임하시기에 가능한 변화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이런 변화가 불가능한 까닭은 사람에게서 이런 무한한 능력을 찾아 볼 수 없고, 무한한 은혜를 더욱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는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은혜가 있어야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킵니다. 죄인이 구원을 얻는 것도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속에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은혜 없는 변화는 없습니다. 작은 은혜로는 안 됩니다. 사막에 물 한 바가지를 붓는다고 그 땅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엄청난 은혜의 소나기, 샘물이 솟아나야 푸른 초장으로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변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바로 나에게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증거입니다.

2.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두 번째 변화는 ‘사람’에게서 나타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5~6절)
소경의 눈이 밝아지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며, 저는 사람이 사슴같이 뛰고, 벙어리의 혀가 노래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장차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사람에게도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수많은 시각장애인, 청각장애인, 지체부자유인, 배척받던 죄인과 창녀 그리고 세리가 회복하고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음을 선포하셨고, 사람들은 많은 육체적 질병과 장애에서 회복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영적 장애를 겪고 있던 사람들도 고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고, 재물에 매여 있던 사람들이 자유로워졌으며,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떠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기도할 줄 모르던 사람이 기도하게 되고, 찬송할 줄 모르던 사람이 찬송하게 되는 변화가 하나님 나라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하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득한 하나님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지만, 세상에 대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대해 처음 만드신 것처럼 세상이 아름다워질 때까지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3.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로(大路) 곧 거룩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다닐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에게 무엇이 가득합니까?(8~10절)
거룩한 길에 구속함을 입은 사람들만 다니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슬픔과 탄식은 사라지고 오직 영원한 희락만이 있을 것입니다.
광야나 사막에 길이 없습니다. 따라서 광야나 사막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길을 잃고 헤매다가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곳에 길을 만드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길은 ‘대로’입니다. 하나님은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부르십니다. 그 길은 구속 받은 깨끗한 사람들만 다닐 수 있습니다. 그곳에 죄인은 물론이고 사나운 짐승도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그 길을 잃을 염려도, 목숨을 잃을 염려도 없습니다. 구속 받은 사람은 영원한 희락을 누리며 즐거워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로 구속 받은 사람들을 결코 잃어버리시지 않습니다. 그들 앞에 엄청난 대로를 두고 함께 걷게 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슬픔은 없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에게서 끊을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것이라고 확증한 이상,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 영원한 희락만이 넘칩니다.

4. 예수님을 믿어도 변화가 없다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그 만남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하나님 나라에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곳에는 변화된 사람이 들어갑니다. 그 변화는 일시적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만일 그 사람의 마음이나 행동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믿어지지 않던 것이 믿어지고,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며, 지겨웠던 것이 새로워지는 변화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들을 찾아보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후로 알지 못한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5. 어떤 경우에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까? 그런 의심이나 회의가 들 때 어떻게 신앙을 회복하면 좋을지에 대해 함께 나눠 봅시다.
매일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조차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그들의 특징은 구원의 근거를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혹은 자신의 행위에 따라서 구원이 유동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게 달려 있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흘리신 피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 대해 값을 치르고 구속하셨기에 내가 구원 받은 것이지, 나의 행동으로 인해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원은 유동적이지 않고 확고부동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하나님을 기다리라

[이사야 30장 15절~26절]
15절 -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16절 -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절 -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18절 -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19절 -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20절 -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21절 -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22절 - 또 너희가 너희 조각한 우상에 입힌 은과 부어 만든 우상에 올린 금을 더럽게 하여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23절 -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절 - 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25절 - 크게 살륙하는 날 망대가 무너질 때에 고산마다 준령마다 그 뒤에 개울과 시냇물이 흐를 것이며
26절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1. 구원을 얻기 위해 남 유다 백성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하지만 정작 그들은 어떻게 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15~16절)
하나님은 남 유다 백성에게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말을 타고 도망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남 유다 사람들은 앗수르에게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침공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의 몽둥이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사람들은 그 징계를 견디지 못하고 유다 땅을 벗어나 마침내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분이 주시는 징계가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이켜 안연히 처하고 잠잠히 기다리며 신뢰하는 것’만이 유일한 일이었지만, 그들은 당장 매를 맞는 게 두려워서 하나님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말을 타고 빠르게 도망하더라도 그들을 쫓는 자가 더 빠를 것입니다(16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는 유다 사람들에게 한 명이 천을 당하고, 다섯 명이 수만을 당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자 상황은 역전돼 이방 사람 하나가 꾸짖을 때 유다 사람 천이 도망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며 잠잠히 기다리는 것, 매를 맞으면서도 하나님을 붙잡는 것만이 유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일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십니까?(18절)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기 원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유다 백성을 기다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긍휼과 은혜를 베풀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시는 긍휼은 아무 의미도 없이 무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가던 길에서 돌이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또 징계를 통해 죄의 심각성을 알기 원하시며, 하나님 외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유다 백성을 징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징계를 통해 유다 백성을 은혜 받을 만한 백성으로 변화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손을 놓고 기다리시지 않고 그분의 백성을 만지고 다듬으며 기다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징계 중에도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의미 없이 고통을 주시지 않습니다.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기다리면 복이 임합니다.

3.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마지막 날은 어떤 날입니까?(26절)
구원의 날은 하나님이 그분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는 날입니다. 그날에 달빛이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다듬으시는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아픔을 어루만지시며 다시는 그 아픔을 기억나지 않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예전의 슬픔을 하나도 기억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구원의 날이 되면 힘들고 추운 기억들은 사라집니다. 모든 어둠은 물러가고 광명이 찾아옵니다. 그날에 달빛이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을 것입니다. 희미하던 것이 밝히 드러나고, 알지 못하던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고통당할 때, 그 의미를 알지 못해 힘들어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상한 마음은 치유를 받고, 오랫동안 마음을 짓눌렀던 슬픔은 다시 기억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날을 주시기 위해 기다신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 위해 오래도록 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그러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달빛이 햇빛 같고, 햇빛이 일곱 날의 빛과 같은 날이 머지않아 반드시 올 것입니다.

4.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해 실패한 적이 있습니까? 그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실패한 경험 나누기를 부끄러워하고 주저합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실패담을 나누곤 합니다. 물론 성경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를 통해서도 배워야 하겠지만,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경험들을 통해서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은 다양한 경험들을 나누면서 활용해 더 나은 신앙인이 되고, 공동체 안의 연약한 지체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스스럼없이 실패의 경험을 나누고 그것을 격려하며 함께 기도할 때 바람직한 공동체가 됩니다.

5. 하나님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습니까? 지금 내가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준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분의 방법과 때를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도망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면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 중에 순종해야 할 일, 회개해야 할 죄, 이행하지 못한 약속 등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데, 정작 내가 그것을 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말씀의 결핍이 가져온 위기

[이사야 28장 1절~13절]
1절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2절 -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절 -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4절 -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5절 -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6절 -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7절 -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절 -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절 -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절 -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절 -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절 -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절 -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1. 북 왕국 이스라엘(에브라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들을 무엇이라고 부르십니까?(1절)
하나님은 에브라임에 대해 취한 자, 교만한 면류관, 술에 빠진 자의 성, 쇠잔해 가는 꽃이라고 부르십니다.
북 왕국 에브라임 곧 사마리아의 상태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산꼭대기에 지은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무법 천지였습니다. 사람들은 흥청거리고 술에 취해 있으며 공의는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면류관을 쓰고 있었지만 곧 땅에 던져져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것입니다(2~3절). 그들은 쇠잔해 가는 꽃과 같이 볼품없이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북 왕국 에브라임 곧 사마리아 땅이 이렇게 된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교만은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었고 마침내 처참한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남 유다와 함께 택함 받은 백성의 한 축을 이뤘던 북 왕국 에브라임은 술주정뱅이처럼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번 기회를 주셨지만,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보다 술과 쾌락에 빠져 현실을 잊고 살았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더욱 깨어 있어야 하는데,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살았기 때문에 닥쳐오는 위기에 저항할 새도 없이 망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에 취해 살아야 합니다. 술에 취해 살면 위기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2. 남 왕국 유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그들에게 북 왕국 이스라엘과 다른 점이 있습니까?(7~8절)
남 왕국 유다의 형편도 북 왕국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다 사람들 역시 포도주와 독주에 취해 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방탕함과 교만함으로 멸망했습니다. 형제의 멸망을 보면서 남 왕국 유다는 교훈을 얻기는 커녕 오히려 북 왕국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하는데, 오히려 닮아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남 왕국 유다는 라이벌인 북 왕국 이스라엘이 사라지자 긴장의 끈을 놓아 버렸습니다. 가장 경건해야 할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술에 취해 살아가고, 가장 온전한 정신으로 재판해야 할 재판장들도 술 때문에 실수했습니다. 모든 상에 술로 인해 토해 놓은 토설물들이 악취를 풍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위로부터 시작된 방탕은 아래로 급속히 번졌고, 마침내 온 나라가 비틀거리게 되었습니다.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않고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움으로써 온 나라를 오염시켰습니다. 포도주와 독주로 인해 몸뿐 아니라 정신도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처럼, 남 유다도 똑같은 길을 가는 것뿐입니다.

3.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방탕함에 빠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요?(10, 13절)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지만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전해졌습니다. 그들에게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남 유다 백성이 방탕한 삶을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유다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듣는 말씀의 질이었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씩 조각난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마음속에 많은 부담감이 생겨납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순종과 헌신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의 선지자들은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결코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들 자신이 방탕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러 전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진 축복의 메시지만 들려주면서 가려운 데를 긁어 주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사람들은 스스로 잘 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자신들이 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더라면 그들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4. 내 삶에서 바뀌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만일 북 이스라엘 사람들과 남 유다 사람들이 날마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보았더라면 그토록 심각한 방탕에 빠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지적하시는 대로 생활을 조금씩 바꿔 나간다면, 실수할지언정 심각한 죄에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지적하는 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삶을 조금씩 바꿔 나가야 합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바꾸려면 상처가 남고 힘이 듭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교훈과 책망을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해 지혜롭게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5. 나는 설교를 들을 때 어떤 자세를 취합니까? 말씀에 대한 수용자입니까, 비판자입니까?
성경을 많이 알게 되고 교회에 다닌 지가 어느 정도 되면 설교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대해 ‘아멘’으로 받을 때도 있지만, 설교 내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비난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항상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때로 설교자와 불편한 관계 때문에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대로 전해졌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영적 성장의 비결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그리스도인의 직업 영성

[이사야 22장 15절~25절]
15절 -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가서 그 국고를 맡고 왕궁 맡은 자 셉나를 보고 이르기를
16절 - 네가 여기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에 누가 있기에 여기서 너를 위하여 묘실을 팠느냐 높은 곳에 자기를 위하여 묘실을 팠고 반석에 자기를 위하여 처소를 쪼아내었도다
17절 -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결박하고 장사 같이 세게 던지되
18절 - 반드시 너를 모질게 감싸서 공 같이 광막한 곳에 던질 것이라 주인의 집에 수치를 끼치는 너여 네가 그 곳에서 죽겠고 네 영광의 수레도 거기에 있으리라
19절 - 내가 너를 네 관직에서 쫓아내며 네 지위에서 낮추리니
20절 -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절 -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22절 -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23절 -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 그가 그의 아버지 집에 영광의 보좌가 될 것이요
24절 - 그의 아버지 집의 모든 영광이 그 위에 걸리리니 그 후손과 족속 되는 각 작은 그릇 곧 종지로부터 모든 항아리까지니라
25절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는 단단한 곳에 박혔던 못이 삭으리니 그 못이 부러져 떨어지므로 그 위에 걸린 물건이 부서지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 셉나라는 사람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처리하십니까?(15~19절)
셉나는 국고를 맡은 관리였는데, 그는 자신을 위한 묘실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셉나에게 진노하시고 그를 공처럼 멀리 던져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셉나는 나라의 창고를 맡은 사람인데, 그는 자신을 위해 호화로운 묘실을 팠습니다. 그 당시에 유다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현상만 유지해 나가던 어려운 처지였는데, 나라의 관리가 자신의 죽음 후를 대비해 엄청난 무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셉나의 잘못은 나라의 어려움에 아랑곳없이 자신의 안위만 보살폈던 것입니다. 공직자는 백성을 섬기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셉나는 자신의 평안만을 생각했습니다.
셉나의 또 다른 잘못은 자신의 장래를 오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영원히 거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가 죽으면 후손들이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자신의 무덤을 보살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계획을 송두리째 깨뜨려 버리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공처럼 멀리 던져 버리겠다고 하십니다(18절). 마침내 셉나는 먼 나라로 잡혀 가고, 그가 타려고 마련해 둔 ‘영광의 수레’도 다른 사람이 타게 되었습니다. 셉나는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며 세상을 호령했지만,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다가 망한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2. 셉나를 대신해 엘리아김이라는 사람이 세워집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복을 주십니까?(20~24절)
엘리아김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둬도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리니’라는 복을 받습니다. 그 복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택해 그분의 저울에 달아 보고 부족하면 그를 대해 다른 사람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셉나를 버리시고 그를 대신해 엘리아김을 선택하십니다. 엘리아김이 선택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종이었기 때문입니다(20절). 셉나와 달리 엘리아김은 정직하고 직무에 성실했습니다. 그는 공의롭게 일하며 백성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아김에게 복을 주신 것입니다. 엘리아김은 선지자나 제사장이 아니었지만 최상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복이 후손에게도 이어져 그의 가문은 대대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24절). 하나님께 거룩한 직업은 성직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엘리아김은 공무원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직업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그에 준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직업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직업을 거룩하게 여기십니다.

3. 하나님이 엘리아김에게 주신 복은 영원한 것입니까? 그 가문은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까?(25절)
하나님이 엘리아김에게 주신 복은 엄청난 것이지만, 벽에 박은 못이 삭아서 그 위에 걸린 물건들이 떨어지는 것처럼 그 복이 끝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아김의 시작은 좋았지만 마지막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엘리아김에서 시작된 가정의 영광은 못이 벽에 박히고 그 못에 많은 물건을 걸어 둘 정도로 튼튼했지만, 그 영광이 영원히 지속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 엘리아김은 겸손한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권력의 맛에 취해 초심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엘리아김의 영화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못이 삭는 것처럼, 삭은 못이 걸려 있는 물건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그의 영광도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엘리아김이 직분을 통해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 되어 칭찬받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의 직분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했을 때 세속적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심기는 자세로 일할 때, 영광은 영원할 수 있습니다.

4. 나는 사회에서 어떤 일을 맡고 있습니까? 그 일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 나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직업을 귀하게 보십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하는 일은 모두 귀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사람을 섬기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청지기의 마음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주신 직장에 대해 감사하면서 일을 시작했듯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을 해 나간다면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칭찬받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찮게 여기지 마십시오. 하찮은 일이 있는 게 아니라 하찮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5. 교회 안에서 내가 맡은 직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 일을 맡기시면서 내게 기대하신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교회의 사역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헌신과 섬김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역을 하면서 순수했던 초심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 직분을 맡아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불평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맡았든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자신을 낮추고 개인의 생각을 접은 채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한 후에 행해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확장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이사야 19장 16절~25절]
16절 - 그 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떨며 두려워할 것이며
17절 -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으로 말미암음이라 그 소문을 듣는 자마다 떨리라
18절 -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19절 -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절 -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절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절 -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23절 -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절 -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절 -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1. 애굽 사람들은 그들 위에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까? 그것을 알고 난 후 그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었습니까?(16~17절)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떨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이 망하고 남 왕국 유다마저 앗수르에 의해 어려움을 겪게 되자, 유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유민들은 점차 남하해 애굽으로 들어갔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자국 내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자 여호와의 흔드시는 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일어나는 많은 재앙이 하나님이 내리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애굽 땅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없을 때 재앙이 일어나면 그것을 우연으로 여겼던 애굽 사람들이 이제는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피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여호와의 손을 느끼고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이라는 이스라엘과 유다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애굽의 구원도 들어 있었습니다. 애굽이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앗수르가 주변국들, 특히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구원하시기 위해 앗수르, 이스라엘 및 유다의 역사를 사용하셨습니다.

2.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해 알고 나서 무엇을 행합니까? 그 후 애굽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됩니까?(21절)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나서 하나님께 제물과 예물을 드리고 경배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 서원을 지킬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땅에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우상보다 능력이 많고 뛰어난 분임을 알리셨습니다. 그 결과,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멸망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자리를 애굽 사람들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애굽 땅에서 제사와 예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도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되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 그 서원을 지키게 됩니다. 때로 하나님은 애굽을 치시기도 하지만, 다시 그들을 고치시고 돌아오게 하십니다(22절). 애굽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결코 닫혀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및 유다의 멸망과 애굽 사람들의 구원을 보면서 하나님은 혈통에만 매여 있는 분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고 그분의 백성이 되길 바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을 향해 항상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은 애굽 사람들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까?(23~25절)
애굽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가 세계에 복이 될 것입니다.
지금이야 ‘온 세계’라 하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뜻하지만, 이사야가 살던 당시에 ‘온 세계’라 하면 남쪽의 애굽에서 북쪽의 앗수르까지를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온 세계를 대로로 잇는다고 말씀하십니다(23절). 그 대로를 통해 앗수르 사람이 애굽으로 가고 애굽 사람이 앗수르로 가며, 그들이 함께 여호와께 경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 모두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을 ‘나의 백성 애굽,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실 것입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얻으며 그분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은 나라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하나님 안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종말에 모든 인종의 장벽이 무너지고 모든 국경이 사라지며 하나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입니다. 온 세계가 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힘도 세상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묶고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4. 고난 중에도 믿음을 지킴으로써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봅시다.
애굽 사람들은 피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불행과 고난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흔히 우리는 삶이 형통해야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그분의 뜻을 알리고 복음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난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고난당하는 것을 고통스럽고 부끄럽게만 여기지 말고, 자신의 모습을 통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5. 내가 땅 끝까지 직접 가지 못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있습니다.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나라도 다민족 국가가 되었습니다. 국제 결혼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해외에서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근로자도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불교나 이슬람교의 배경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주 근로자들을 만날 때 거부감을 갖고 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믿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출처 : 생명의 삶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라

[이사야 12장 1절~6절]
1절 -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절 -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절 -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절 -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절 -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절 -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1. 유다 백성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2절). 구원이 시작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1절)
유다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민인 유다 백성이 이방 사람들과 다름없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자, 그분의 진노를 숨기지 않고 앗수르를 사용해 유다를 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유다에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분의 진노가 끝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분의 긍휼은 장차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절정을 이룹니다. 이사야는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가 있으면, 진노가 그칠 때도 분명히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진노가 영원하다면 죄인들에게 한 점의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과 긍휼에 의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는 것은 그분 안에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크기에 그분의 백성을 향한 진노를 스스로 멈추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진노하시는 것으로 느껴질 때 잠잠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진노를 멈추시고 큰 사랑으로 나를 덮으실 것입니다.

2.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을 무엇에 비유하고 있습니까? 왜 그렇게 비유한다고 생각합니까?(3절)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을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이사야는 구원을 종종 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사 41:17~18; 55:1, 10). 이것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물이 귀한 까닭이며, 물이 없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우물을 파고 물을 길어 올리는 일은 큰 기쁨이자, 가족 및 마을의 구원과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우물을 파서 물을 얻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은 땅에서 물이 터져 나올 때의 기쁨과 감격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에 대해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생이 구원 받지 못하면 비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물을 얻지 못해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그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남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얻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됩니다.

3. 구원 받은 사람은 그 기쁨을 감출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4~6절)
하나님의 행하심을 만국에 선포하며, 구원의 기쁨을 온 세상에 알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사람이 그분의 사랑 안에서 구원 받았을 때, 감사와 함께 여호와의 이름을 높이며 만민에게 구원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얻은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물에서 물을 얻으려면 땅을 깊이 파는 수고를 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사람은 항상 감사하고(4절), 즐거워하며 찬송해야 합니다(5~6절). 그리고 무엇보다 구원의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원 받은 소식을 만국에 선포하고, 하나님이 행하신 지극히 아름다운 일을 온 세상에 알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소식은 너무나 큰일이기에 온 세상이 알아야 하는 위대하고 놀라운 역사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큰일을 가슴 속에 담아 두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수가 성의 여인이 물동이를 내버려 두고 마을로 달려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라고 외쳤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큰 사랑을 세상 사람들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4. 나는 언제 영적 갈증을 느낍니까? 갈급함 없이 메마른 상태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됩니다. 예배에 잘 출석하면서도 교회 생활을 습관적으로 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아무런 감동이 없습니다. 따라서 손발을 움직이게 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구원 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사라집니다. 그러다 보니 영적인 것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영적인 갈증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영적 갈증을 느껴야 하는데, 영적 갈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영적 목마름이 없다면 그 원인을 찾아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5. 나로 인해 구원 받은 사람은 몇이나 됩니까? 내가 복음을 전해 구원을 받았거나 신앙을 회복한 사람들에 대해 함께 나눠 봅시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전도에 극성인 사람들로 인식하지만, 생활 속에서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나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사람의 이름을 대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전도이고, 전도의 상급은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약 나로 인해 구원 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면 지금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하나님의 열심

[이사야 9장 1절~7절]
1절 -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절 -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절 -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절 -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절 -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절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1. 이사야는 메시아의 사역에 대해 예언했습니다. 장차 올 메시아는 어디서 활동하게 됩니까?(1~2절)
메시아는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예언했습니다. 메시아는 갈릴리에서 빛을 비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가장 북쪽에 있는 갈릴리는 예로부터 이방인들의 집단 거주지였고, 앗수르나 바벨론과 같은 북방 민족이 침공해 올 때 가장 먼저 유린 당하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유대 사람들에게조차 멸시와 천대를 받은 지역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갈릴리는 흑암의 땅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메시아의 사역이 시작되어 빛이 비취게 될 것을 이사야는 예언했습니다. 메시아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사역하실 것이라는 예언은 당시로서 충격적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셨고, 갈릴리의 소외된 백성들을 찾아가셔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으로 이동하셨을 때, 이사야 9:1~2절을 인용했습니다(마 4:14~16). 이사야의 예언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죄악으로 캄캄한 인생들 속에 찾아오셔서 생명의 빛을 비춰 주십니다. 죄에 빠져 있던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 영화롭게 되고 구원에 동참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사야의 예언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2. 이 땅에 오신 메시아는 어떤 특징과 이름을 갖습니까?(6절)
메시아로 오시는 아기는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입니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태어날 한 아기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아기로 태어나지만 어깨에 정사를 멜 것입니다. 이것은 메시아가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기묘자라는 호칭은 메시아의 신비로운 사역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메시아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가졌습니다. 모사라는 호칭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탁월한 지혜를 지닌 존재라는 뜻입니다. 또 메시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으로서, 찬양 받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아들과 상반되는 개념이기보다 메시아가 영원한 보호자로 임하실 것임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평강의 왕이라는 호칭은 메시아가 이 땅에 온전한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시는 분임을 보여 줍니다. 메시아는 분명히 아기로 오시지만 이 땅에 친히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다는 것, 연약한 아기로 오신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셨고, 이것이 하나님의 신비한 지혜입니다.

3. 메시아의 도래는 무엇 때문에 가능합니까? 그 일이 이뤄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7절)
메시아의 임하심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있습니다. 그분의 열심이 그것을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세상에 임하시는 데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있습니다. ‘열심’을 더 정확히 번역하면 ‘질투, 시기심’이 좋을 듯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원수에게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죄로 가득한 흑암의 땅에 빛을 비추시고 메시아를 아기로 보내시는 까닭은 그분의 질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질투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백성들의 노력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열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메시아는 임하셨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없는 하나님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확실히 임하고, 그 나라는 영원하고 완전한 승리를 가져 올 것입니다. 메시아는 다윗의 위에 앉으셔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십니다. 그 나라는 인간의 열심 위에 기초를 두지 않고 하나님의 열심 위에 기초를 두고 기둥을 세웁니다. 그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모든 나라가 오고 가도 그 나라는 든든히 서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질투하시면서 그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4. 이 시대에 ‘사망의 그늘진 땅’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그 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사망의 그늘진 땅’은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땅 끝이라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의외로 가까운 곳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주위에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끼리끼리 모여 있는 게 너무나 익숙해 그늘진 땅을 자주 놓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사망의 그늘진 땅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가족과 이웃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다가가 사랑으로 섬긴다면 빛이 비출 것입니다.

5. 하나님이 질투하실 만큼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적이 있습니까? 나도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히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끔찍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그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뜨겁게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만이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며 헌신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할 줄도 압니다.



출처 : 생명의 삶

하나님을 만나면 사명도 생긴다

[이사야 6장 1절~13절]
1절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절 -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절 -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절 -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절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절 -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절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절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절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절 -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절 -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절 -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절 -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1. 웃시야 왕이 죽어 온 나라가 절망에 빠졌던 그 해에 이사야가 성전 안에서 본 것은 무엇입니까?(1~4절)
이사야는 성전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분을 호위하는 천사들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존경과 사랑을 받던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1절). 웃시야는 말년에 교만하게 행해 나병에 걸리긴 했지만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유다를 흥왕케 했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의 죽음은 온 나라를 실의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가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셨고, 하나님 주위에 수많은 천사가 날아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유다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시고, 보좌에 앉아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과 그분 주위를 날아다니는 천사들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최악이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은 위로를 받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크시기에 그분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붕괴되지 않습니다.

2. 이사야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느낀 감정은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조치하셨습니까?(5~7절)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자신이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에 스랍 중에 하나가 제단의 숯불을 취해 이사야의 입에 댄 후 죄가 사해졌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사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본 후 위로를 받았지만,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화로다, 나는 이제 망하게 되었다”라고 소리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도, 유다 백성들도 입술이 부정한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것을 재앙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때 스랍 중에 하나가 단에서 취한 숯불을 가져다 이사야의 입술에 대고 이사야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포했습니다. 이사야 스스로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기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이사야의 입술을 깨끗이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죄인임을 알기만 하면 하나님은 적절한 방법으로 그들을 고치시고 용서하십니다. 죄인이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죄인임을 고백한 이사야 한 사람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죄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에게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선물을 주십니다.

3. 이사야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음성에 대해 이사야는 어떻게 반응했습니까?(8절)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에 대해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한 이사야는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음성을 들은 이사야의 마음속에 새로운 소명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즉시 응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유다 백성들이 메시지를 듣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의 보내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사명을 찾게 됩니다. 실의에 빠졌던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죄에서 해방되고 무기력과 실망에서도 해방되어 하나님의 일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구원을 위해서도, 일생을 걸어야 하는 사역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되고,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게 됩니다. 나는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까?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4.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극복한 적이 있습니까? 그 경험을 함께 나눠 보십시오.
하나님은 평안할 때만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면 사람들은 우리에게서 떠나 버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위기를 당하면 누구라도 함께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함께하시면서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위기를 극복한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위기 속에 하나님의 손길과 도우심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경험은 그리스도인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하게 만듭니다. 또 그런 경험을 나눌수록 우리의 공동체는 더욱 건강해집니다.

5.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한 이사야처럼, 지금 내가 자원하고 순종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나눠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성도이며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부를 때, 그 속에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즉시 순종하리라는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부르면서도 ‘그것은 할 수 없습니다’라는 핑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즉각적인 순종인데, 우리는 순종하기는 커녕 다른 곳으로 도망하기 바쁩니다.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곧바로 순종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순종을 크게 사용하셔서 그분의 일을 이루시고, 우리에게 한량없는 복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출처 : 생명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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