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랑과 믿음 5:1-5

 

(1)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은 하나님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1절). 여기에서 믿는 형제는 첫째, 그의 믿음에 의해 드러난다. 즉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그 믿음에 따라 그리스도의 보호와 지도에 자신을 맡긴다. 둘째, 그의 출신에 의하여 존귀함을 받는다(1절). 모든 믿는 자들은, 비록 본성적으로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들이므로 마땅히 사랑받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1절).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라면 그의 자녀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2)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 중생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준다. 그 진실성의 근거는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인 것이다(2절). 그들 중생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생동적이며 신실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그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진실성을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준다(2절).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니라(3절). 계명을 지키는 자의 영혼은 그것을 지킬 때 즐거움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3절). 그것은 그의 계명이 우리에게 가볍고 즐거운 것이기 때문이다.

  3) 중생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4절). 하나님께 속하여 태어난 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난 자이며, 따라서 다른 세상을 위해 태어난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다(4절). 믿음은 승리의 근거가 된다. 믿음 안에서 또한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세상에 대항하고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3)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참된 정복자이다(5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는 이로써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셨음을 믿는다. 그러므로 그렇게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사악한 세상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해 내는 일이 구세주의 사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자신의 구원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됨을 안다. 그는 주 예수가 자기 자신을 위할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위해서 세상을 정복하셨음을 안다. 그는 이 세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며 이 세상 위에 있는 저 세상을 바라보는 영과 성향에 몰두되어 있다. 기독교의 계시는 이 세상을 정복하며, 복되고 영원한 또다른 세상을 얻기 위한 가장 위대한 수단이 된다. 구세주께서 그의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시고자 계획하신 것은 이 세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영웅은 바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외에 누가 이렇게 세상을 이겨 나갈 수 있겠는가?

 

Ⅱ. 증거하는 이 5:6-9

 

신자의 믿음은 튼튼한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하며 또한 실제로 그러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 속에서 그의 신임장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1. 그가 오신 방법(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6절).

  (1)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더렵혀져 있는 자들이다. 내적으로 우리는 우리 본성 안에 있는 죄에 오염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죄로부터 깨끗함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신령한 물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는 우리 몸에 지니고 있는 죄된 행동들에 의하여 외적으로 더럽혀져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죄의 피에 의하여 이로부터 깨끗함을 입어야 한다.

  (2) 정결하게 하는 이 두가지 방법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옛 의식법 속에 나타나 있다. 사람과 사물은 물과 피로 정결케 되어야 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한 군인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으며, 곧 그 상처로부터 물과 피가 흘렀다. 이 광경을 사랑 받았던 제자 사도 요한이 보았다. 이제 이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되었다. 그 물에 의하여 우리의 영혼은 씻김을 받고 정결케 되었다. 그 피에 의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율법은 존귀케 되었다. 그 피에 의하여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으며, 하나님께 의로운 자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물과 피는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포하는 것이다.

2. 그에 대한 증거자(6-8)

사도는 이 증거하는 자에 대한 추천을 덧붙히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 그는 진실로 진리의 영이시다. 또한 성령은 진리이며 가장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증거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그가 하늘의 증거자라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나아가기를 잠시 멈추고 7절 말씀의 진실성 여부를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고대의 헬라어 사본들에 그 말씀이 없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우리가 여기서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가 세상을 이기는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그 믿음의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고수한다는 사실을 진술할 때 그리스도에 대한 이 탁월한 증거를 빠뜨렸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9절).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본문에는 주 예수의 진실성을 옹호하는 여러 증거자들과 증거들이 훌륭하게 제시되어 있다. 또한 사도는 그리스도가 진리이심을 증거하는 성령께서 그 자신이 하늘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확신케 하심으로 그 자신이 또한 진리이심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고 말한다(7절). 이에 관하여 다음의 사실을 들 수 있다.

  (1) 여기에 하늘의 증거자들인 삼위일체가 있으며, 이들은 주 예수의 주장 속에서 그의 권위를 세상에 증거하며 보증해왔던 것이다. 순서상 제1위는 성부이시다. 그는 주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실 동안의 사명을 보증하셨다. 두번째 증거자는 그 신비한 이름인 말씀이시다. 그는 인간성, 혹은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만 한다. 세번째 증거자는 성령이시다. 거룩하신 성령께서 보증하신 자는 참되시고 미쁘신 자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하늘에 계신 증거자들로서 하늘로부터 증거를 하시며 또한 본질적으로 하나이신 것이다.

  (2) 이들과 연관이 되나 이 하늘의 세 증거자들과는 대조되는 땅 위에 세 증거자가 있다(8절). 이들 세 증거자들 중 첫째는 성령이다. 인간의 중생과 새로와지는 혁신은 구세주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므로 이 세상에서의 승리 등은 모두 이 성령의 은혜에 속해있는 것이다. 두번째 증거자는 물이다. 이것은 앞에서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듯이 여기에서는 구원자 그 자신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되고 있으며 그의 정결함과 정결케 하는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구세주를 증거하고 그의 교훈의 정결함을 입증했던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한 증거를 내포하는 것이며 이것으로써 사람들은 씻김을 받고 정결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됨의 입문식으로서 세례를 명하셨던 것이다(벧전 3:21). 세번째 증거자는 피다.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셨으며 이 피는 우리의 속죄를 위한 대가이었다. 그러므로 이 피는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를 속이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이 피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를 위하여 고난 당하고 죽어야 할 의무를 부과한다. 그 의유는 그와 그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 세 증거자는 성찬식의 제정에서 상징화되고 확증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증거가 되었다. 이들 세 증거자는 하나로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들 피차간에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다.

3. 사도의 결론(9)

여기에 한 증거가 있으니 곧 하나님이 그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홀로 그의 아들을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의 증거가 권위와 신빙성은 이러하다. 즉 하나님의 증거는 진리 그 자체이며 최상의 권위와 가장 의심할 바 없는 절대 확실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의 경우에서도 드러난다. 거짓말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아들, 곧 그 자신과 세상을 화해케 하실 그의 사랑의 아들이심을 세상에 명백히 확증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독교 신앙의 진리와 그 거룩한 원리를 증거해 보이셨으므로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확실한 길로써 정하신 것이다.

 

Ⅲ. 믿는 자의 특권(1) 5:10-13

 

1.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특권과 안전함(10)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외적인 증거에서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진리가 그의 영혼을 위하여 이루어 놓은 바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보았고 깨닫게 된 바가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가 그 진실한 그리스도인 안에 형성되면 그는 충만함과 완전함 곧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향해 자라게 된다.

2. 믿지 않는 자의 죄, 곧 불신의 죄의 심화(10)

필연적으로 그는 하나님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보내셨음을 믿지 않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불신하게 된다.

3.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모든 거룩한 증거의 내용(11,12)

이것이 복음의 요체이다.

  (1)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생을 계획하셨다. 또한 우리 모두에 대하여 그것을 마련하셨다.

  (2)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되신다. 이 사실은 다음의 결과들을 따르게 한다.

   첫째, 아들과 연합되어 있는 자는 생명에 연합되어 있는 자다(12절).

   둘째, 생명 자체이시며 생명의 길이 되시는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인 것이다.

4. 사도가 믿는 자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는 목적(13)

  (1) 그들의 기쁨과 위로를 위하여 : 이를 믿는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 이를 믿는 자들은 그들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실을 알게 되며, 그것에 대한 기대 속에서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2) 거룩한 믿음 안에서의 그들의 확신과 진보를 위하여(13절) : 믿는 자들은 인내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Ⅳ.사망에 이르는 죄 5:14-17

 

(1)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따르는 특권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에 있다(14절). 주 그리스도는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용기를 주신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간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 우리의 기도의 내용은 하나님의 공언된 뜻과 일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우리는 믿음의 기도라면 하늘에서 들으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2) 그러한 특권에 의해 우리는 다음의 유익을 얻게 된다(15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알게 된다.

(3) 사도는 여기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16절).

  1)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하여도 기도해야 한다.

  2) 사망에 이르는 죄(17절)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으며 이와는 정반대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지체들에 의해 범해지는 더욱 가식적인 죄들에 대하여 철저하고 단호하게 죽음으로 위협하지는 않지만 어떠한 복음적인 응징이 어느 정도로 가해지게 되는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선하심, 및 복음의 엄정함에 의하여 결정된다. 영적이며 복음적인 죽음에 이르는 죄들, 즉 우리의 영적인 삶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복음에서 보여주는 보다 높은 세계의 삶과도 일치하지 않는 죄들이 있는데 이러한 죄들이 곧 전혀 회개하지 않는 죄와 믿지 않는 죄들인 것이다.

(4) 사도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각각의 죄들에 합당하게 기도하라고 지시한다. 기도하는 사람은 생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라고 기대될 수 있다. 누구든지…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16절). 생명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영원한 생명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생명을 자기가 기뻐하시는 때 그 기뻐하는 자에게 주신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형제들의 죄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 가운데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의 경우에는 우리는 결코 기도를 허락받지 못한다. 아마도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라는 사도의 표현은 "그러한 경우에는 너희를 위하여 약속할 수 없다." 즉 그러한 기도에는 보장이 없다는 그의 생각을 말한 것 같다. 복음적 처벌의 제거 혹은 죽음을 피하는 것 등은 오직 조건부로 또는 잠정적으로 기도 드려질 수 있다. 우리는, 회개치 않거나 믿지 않는 죄들은 그 죄들이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에는 용서받도록 기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회개를 위해,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들이 풍성해지고 그로써 모든 다른 구원하는 긍휼을 그들이 얻을 수 있기 위해 기도할 수 있다. 사도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17절). 왜냐하면 만일 모든 불의가 사망에 이른다면 우리 모두는 명백히 죽음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나 우리가 죽음에 매여 있지 않는 이상은 분명히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 것이다. 비록 용서할 정도로 가벼운 죄는 없지만 용서받는 죄도 있다.

 

Ⅴ. 믿는 자의 특권(2) 5:18-21

 

1. 신실한 신자의 특권에 대한 개괄(18-20)

  (1) 그들은 죄로부터 안전하게 된다(18절). 즉 사망에 이르는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된다. 새로운 성품과 그것에 의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지 않도록 보호받게 된다.

  (2) 그들은 마귀의 파괴적인 도전들에 대항할 힘을 얻게 된다(18절). 또한 이 18절의 말씀은 단순히 중생한 자의 의무에 대한 서술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그들의 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3) 그들은 세상에 반대하여 하나님 편에 선다(19절). 인류는 크게 둘로 나뉘어져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며, 또하나는 악한 자에게 속해 있는 자들이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이고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자들이다. 이와 반대로 온 세상, 곧 이들 외에 단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해 있는 온 세상은 악한 자의 세력안에 처하여 있다. 하나님께서 계속적으로 악한자의 지배를 폐하시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에 이르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기원하자.

  (4) 그들은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은 자들이다(20절).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그를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참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또한 그 나타내 보이신 계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분이 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게 되었다. 참 하나님을 아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크나큰 행복 즉 영생인 것이다.

  (5)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복된 연합을 누리고 있다(20절). 아들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며 우리는 아들과 아버지 안에, 곧 두분의 사랑과 보호가운데 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합 또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 속에서, 더욱이 두분 모두와 우리와의 연합속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 곧 영원한 생명과 연합되어 있다.

2. 사도의 결론적인 권고(21)

"너희가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 거하는 이상 너희의 빛과 사랑이 너희를 지키도록 하라. 이방 세계의 거짓 신들을 피하라. 너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속하신 자요 너희 죄를 용서하시며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시다. 믿음과 사랑과 끊임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신실하라. 이로써 살아계시며 참되신 하나님께 영광과 권세가 세세토록 있을 것이다." 아멘.


Ⅰ. 영에 대한 분별 4:1-3

 

(1) 여기서 사도 요한은 신자들로 하여금 당시에 일어났던 영들에 대해 경계하며 세심한 조사를 행할 것을 명한다.

  1) 경계 :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1절). 즉 "하나님의 영을 가장하는 모든 것들을 추종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오는 참된 교제들이 있으며, 다른 것들은 그것을 가장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2) 세심한 조사 : 즉 성령에 속해 있다고 주장하는 것들을 시험하라(1절). 신자들에게는 영들을 분별하여 판단할 것이 허용된다.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시험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어졌다(1절). 실제로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나타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일찌기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러했다.

(2) 사도 요한은 이러한 거짓 영들을 시험할 수 있는 일종의 시금석을 제시한다. 즉 그들은 교리로써 판별된다(2절).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전파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렇게 한다. 계시종교의 요지는 그리스도와 그의 인격, 그의 사명에 관한 교리에서 파악된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에 관한 이러한 것들에 대항하는 조직적인 방해가 전개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적그리스도의 영은 일찌기 사도들의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반대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성취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 진리 안에서 더욱더 굳세져야 할 것이다.

 

Ⅱ.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에 대한 식별 4:4-6

 

사도는 이러한 미혹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에 대항하도록 신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는 그들 안에 보다 거룩한 원리가 있음을 그들에게 확신시키고 있다(4,6절).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6절). 사도는 그들에게 승리의 소망을 주고 있다. "너희들 안에는 강한 보호자가 계시다(4절).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고 계시며, 그 영은 사람이나 마귀들보다 더욱 권능이 크시다. 하나님의 영은 너희들이 마음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도록 인도하셨다."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5절). 그리하여 그들 자신과 같은 자들이 그들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즉 세상은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세상의 것은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6절). 하나님의 성결하심과 거룩하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는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것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와 함께 거하게 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다른 자들 사이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6절).

 

Ⅲ. 그리스도적인 사랑을 촉구함 4:7-13

 

진리의 영은 사랑으로 알게 된다(7절). 사도는 이들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랑 안에 연합시키고자 하였다.

(1) 사랑은 저 높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7절). 하나님의 영은 사랑의 영이다. 사랑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2) 사랑은 거룩한 품성에 대한 참다운 이해를 보여 준다(7,8절). 거룩한 권위의 특징은 사랑이며, 이것은 선에 관한 그의 말씀들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에 명백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런 자의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8절). 사랑은 하나님의 권위에 있어서 본성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셨다.(9절). 하나님께서 더러운 먼지와 재같이 보잘 것 없는 우리를 사랑하신다니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하나님은 비교할 수 없이 귀중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9절). 이러한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세상에 보내졌다니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신비스럽고 기적적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10절). 그분은 우리가 그에 대하여 아무런 사랑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단지 죄 안에 갇혀 있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분은 다음과 같은 사명과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그의 아들을 주셨다. 그 사명은 그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화복제로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은 우리로 하나님과 함께 살게 하기 위하여, 곧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과 축복 속에서 살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3) 그리스도 안의 형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을 촉구한다(11절). 이것은 명명백백한 논증이다. 우리가 어찌 영원하신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들을 사랑하지 않으려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의 사랑의 예찬자들이어야 하고, 그의 사랑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며, 결과적으로는 그가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시다는 보증이 된다(12절). 형제들을 거룩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전인 것이다. 이때 하나님의 주권이 특별히 그 안에 거하게 된다.

(5) 12절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그 믿음이 역사함으로써 온전케 되며, 사랑은 그 사랑이 작용함으로써 온전케 되는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형제들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비로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대한 자신의 사랑이 온전하여졌음을 천명하시는 이때 진실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간구하게 되는 것이다(13절).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성령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 안에 거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고귀하여, 죽을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결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이 상호적인 거함에 대한 온전한 의미는 축복된 세계의 계시로 이루어져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러한 상호적인 내재함을 안다고 말한다.

 

Ⅳ. 하나님의 사랑 4:14-16

 

1.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조항(14)

  (1) 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 :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다.

  (2) 주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와 사명 : 그는 세상의 구주이시다.

  (3) 그가 그렇게 되는 근거는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사실이다.

  (4) 이에 대한 사도의 확신은 그와 그의 형제들이 보았다는 사실에 의거한다. 즉 그들은 그의 인간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

  (5) 이에 대한 사도의 증거 :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2. 이 진리를 소유한 자의 특권(15)

이 진리를 마땅히 인정함으로써 주어지는 탁월한 특권이 있다(15절). 즉 그리스도와 그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게 된다.

3.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16)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휘된다(16절). 기독교의 계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우리의 외면적인 믿음의 조항들은 오직 거룩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인 것이다. 주 그리스도의 역사(歷史)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이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라(16절). 그는 본질상 한없는 사랑이시다. 그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며 그 사랑을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내 보이셨다. 그렇다면 이같이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실 때, 그 스스로가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실 일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아들을 주시는 그러한 섭리를 통하여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사랑을 입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에서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2)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거룩한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그의 마음에 넓게 드리워진 하나님의 사랑을 지니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될 것이다.

 

Ⅴ. 하나님과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 4:17-21

 

사도 요한은 우리의 사랑을 두 측면, 즉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의 두 측면에서 권면하고 있다.

1. 하나님에 대한 사랑(17-19)

  (1)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 사랑이 가장 필요하게 될 그날에 우리에게 영혼의 평강과 만족을 줄 것이다(17절). 온 인류의 심판의 날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날에 심판관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그가 그들의 친구가 되심을 앎으로 인하여 머리를 들고 그를 마주 볼 수 있는 자들은 얼마나 복될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담대함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17절). 사랑은 우리로 그리스도를 따르게 한다.

  (2) 사랑은 노예적인 두려움을 막아 준다(18절). 사랑이 넘치는 한 두려움은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 사이를 구별하여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종종 신앙의 본질로서 언급되고 명령된다. 그러한 경외는 사랑 즉, 완전한 사랑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에 대한 불안으로 비롯되는 두려움이 있으니 이는 죄책감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려움은 공포의 상태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18절).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두려움을 내어쫓고 기쁨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사랑이 자랄수록 기쁨 역시 커지게 된다. 그리하여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온전히 내어쫓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의 사랑 안에서 승리를 얻는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일반적으로 두려움은 불안케하는 고통스러운 감정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온전한 사랑은 고통 즉 형벌을 내어쫓는데, 그 이유는 온전한 사랑이 사랑하는 자의 마음에 완전한 순종을 가르침으로써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사랑이 아직 온전한 데까지 이르지 못하였음을 보여 준다.

  (3)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지도 않았으며, 사랑받을 만하지도 못하였을 때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그 선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영혼에 사랑을 인쳐 주셨다.

2.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에 대한 사랑 (20,21)

이 사랑은 다음의 이유들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다.

  (1) 우리들 그리스도인의 신앙고백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에 있어서 우리는 신앙의 근거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눈은 으례 마음에 영향을 끼치곤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은 정신에 보다 덜한 영향을 끼치며 따라서 마음에도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지체는 그 자신 안에 하나님에 대한 가시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을 미워하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체를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2) 하나님의 계명에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21절).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 다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함'은 당연하고도 합당한 의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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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우리를 양자 삼으심 3:1-3

 

(1) 사도는 이러한 놀라운 축복의 근원인 은총을 찬양하기 시작한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가(1절). 우리가 그의 아들이 또한 아들이라 불리워지는 이와 같은 일은 영원하신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 불려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며 기꺼이 우리를 아들이라 부르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수 없다.

(2) 사도는 믿는 자들의 명예가 세상의 인식을 초월하는 것임을 추론하고 있다(1절). 세상은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따르는 자들의 행복을 알지 못한다. 세상은 이 가난하고, 비천하며, 경멸받는 자들이 하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며, 머지않아 하늘에 거할 자들임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에 대해서도 세상은 알지 못했다(1절).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 땅에서의 어려움을 기꺼이 견뎌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그네의 땅에, 그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 사이에 거하고 있으며, 그들의 주님도 그들보다 앞서 그렇게 취급받으셨기 때문이다.

(3) 사도는 그들의 지위와 권위에 대한 확실한 계시를 기대하며 인내하는 제자들을 칭찬하고 있다.

  1) 현재 그들과 하나님 사이의 영광스러운 관계를 주장한다(2절). 그들은 거듭남으로 인하여 아들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2) 아들 곧 양자로 택함받은 것에 따르는 영광은 내세를 위해 보존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으로 행하여야 하며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

  3) 하나님의 아들들이 드러나게 되는 때는 결정되어 있다.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2절). 그러므로 이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의 주님과 동일한 모습을 취함으로써 알려지고 명백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4) 그들이 주님과 일한다는 사실은 그들이 그를 볼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주장된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모두가 그를 볼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그의 제자들이 보는 것처럼 그의 계신 그대로 보지는 못할 것이다. 악한 자들은 분노로 찌푸린 모습의 그를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이들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것이다. 그들의 동일함에 의해 그들은 하늘의 복된 자들이 보는 그대로의 그리스도를 보게될 것이다.

(4) 사도는 그들에게 성결함을 이룰 것을 촉구한다(3절). 하나님의 아들들은 그들의 주님이 거룩하고 깨끗하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와 함께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최고의 순결성을 입고자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의 하늘에 대한 소망은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하여 촉구할 것이다. 죄와 더러움에 빠지는 것은 그러한 소망에 전혀 어긋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성결케 되어야 한다. 소망으로 구원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또한 소망으로 순결해져야 한다.

 

Ⅱ. 하나님의 자녀의 표시 3:4-10

 

사도는 다음의 여러 사실을 제시함으로써 죄에 대하여, 그리고 어두움의 역사와의 모든 교류에 대하여 더 한층 격렬하게 논증한다.

(1)죄의 본성은 이러하다. 그것은 거룩한 율법과는 상반되는 것이다(4절). 그러므로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거부이고,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거부일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거부가 되는 것이다.

(2) 주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를 없애기 위함이다(5절). 그는 죄를 없이 하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범을 따르게 하신다.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위에 계신 그리스도와 교제하기를 기대하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최상의 정결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와 교제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3) 죄와 그리스도와는 결코 진실된 연합이 있을 수 없음을 제시한다(6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더이상 죄를 범치 않는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와의 언약 안에 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강한 빛과 그의 지식 안에 거한다. 그러므로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죄에 대한 실제적인 부인은 주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크나큰 증거가 된다.

(4) 의를 행함과 의로운 상태 사이의 관계를 제시한다. 죄를 행하는 것과 의롭게 된 상태는 결코 일치할 수 없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7절). 의를 위하여 즉 신앙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라는 마태복음 5:10절의 말씀에서도 나타나듯이 의로움은 성경 여러 곳에서 정당하게 신앙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곧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신앙의 실천은 성실과 양심의 원리없이는 유지할수 없는 것이다.

(5) 죄인과 마귀와의 관계를 언급하고 이에 대한 주 그리스도의 의도를 말한다.

  1) 죄인과 마귀와의 관계에 대하여 : 여기서 '죄를 범한다는 것'은 죄의 세력과 지배아래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렇게 살아가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 자인 것이다.

  2) 마귀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의 의도와 임무에 대하여(8절) : 그리스도는 마귀를 멸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죄를 완전히 파멸시킬 때까지 죄를 더욱더 약화시키고 해체시키실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멸하시고자 하는 것에 빠지거나 그것을 위해 봉사해서는 안된다.

(6) 중생과 죄의 폐기와의 관계를 제시하다. 하나님께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9절). 하나님께서 난다는 것은 안으로부터의 새로와짐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거룩으로 향하는, 올바른 성품의 회복인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속에 거함이요. 새롭게 하는 은혜는 하나의 영속하는 원리이다. 신앙은 하나의 기술도, 습득되어지는 기교나 기예도 아닌, 하나의 새로운 성품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게 거듭난 자는 죄를 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는 더이상 죄를 행하는 자리에 있을수도 죄를 행할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로서 났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의 마음속에는 마귀와 죄의 악의를 드러내 보이는 빛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은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은 죄악된 행위들로 나아가게 하는 세력과 성향을 억제하여 금하게 한다. 인간의 마음과 영혼의 경향과 구조가 죄악과 대항하고 있음을 설명하는 복음서 안에는 인간의 죄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종교적인 선행에 대하여는 사실상 무능하다. 반면에 중생한 사람은 범죄치 못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 사이를 식별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10절).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사실로 뱀(마귀)의 자손이 드러난다.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

  첫째, 신앙에 대한 태만으로 드러난다. 반대로 그러한 자는 마귀에게 속해 있는 자이다.

  둘째,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자들을 미워함으로 드러난다(10절).

 

Ⅲ. 형제애에 대한 권고(1) 3:11-13

 

(1) 사도 요한은 기독교적인 형제애를 권고한다(11절). 우리는 우리 주 예수를 사랑해야 하며 또한 그의 사랑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든 자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2) 사도는 이러한 사랑과는 상반되며 가인의 행위를 좇는 악행을 행치 말라고 설득하고 있다. 가인은 최초의 뱀의 자손이 되었으며 악한 자에게 속하여지게 되었다. 곧 그는 최초의 악한 자, 곧 마귀를 좇았으며 그를 닮게 되었다. 그의 악의는 결코 끝이 없었다. 그것은 마침내 살인을 범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12절). 악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들을 증오하고 원망하도록 자극한다.

(3) 사도는 여기서 선한 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해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한다(13절). 뱀의 본성은 여전히 세상에 존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뱀에 의해 지배되는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Ⅳ. 형제애에 대한 권고(2) 3:14-19

 

사랑의 사도 요한은 거룩한 사랑에 대하여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었지만 이제 이에 대하여 강조하여 상술하기에 이르렀다.

(1) 사랑은 우리가 생명의 상태로 옮겨졌다는 표시이다(14절). 우리는 이러한 변화의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증거들에 의하여 알 수 있는데 형제에 대한 거룩한 사랑이 또한 그 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1) 이 사랑은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을 전제로 한다.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첫째, 그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하나님의 탁월한 작품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놀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처럼 사랑하신 이 세상은 마땅히 우리에 의하여 사랑을 받아야 한다(요3:16). 이 사랑은 대적자들에 대한 모든 의무적인 사랑까지도 포함한다.

  2) 이 사랑은 기독교적 공동체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포함한다. 그들은 그들 자신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또한 사망에서 옮겨진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2)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은 죽어있는 상태의 한 표징인 것이다(14절). 사도는 이것을 15절에서 논증한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생명과 번영에 대한 증오이며 결국 그것의 파멸을 바라기까지 된다. 마음으로 살인하는 자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할 수 없게 된다.

(3)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 거룩한 사랑의 모범은 우리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한다(16절). 위대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 놓으셨다. 진실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들을 사랑해야 하며 또한 사랑받아야 한다.

(4) 사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기독교적 사랑이 어떻게 열매 맺어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형제들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심지어 죽기까지 고난 당하기를 즐거워할 정도로 뜨거운 것이어야 한다(16절).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살기위해 얼마나 자제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생활함으로써 얼마나 더 나은 삶을 살게 되겠는가!

  2) 그 사랑은 형제들의 궁핍에 대해 마땅히 동정적이고, 인색하지 않으며,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할 것이다(17절).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진 자들은 선하신 하나님과 그들의 선한 형제들을 사랑하여야 하며, 그들을 위하여 재물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형제에 대한 사랑은 그들 안에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에 대한 이러한 사랑이 없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께 대한 진실된 사랑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랑의 또다른 열매들이 있을 것이다(18절). 아첨이나 발림말들은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오직 거룩한 애정의 신실한 표현과 사랑의 봉사와 수고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태도인 것이다.

(5) 이러한 사랑은 신앙에 있어서 우리의 신실성을 증명하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갖게 해 줄 것이다(19절). 믿음 안에서 우리의 성실을 확신하는 것은 크나큰 축복이다. 우리의 내적 평화를 확보하는 길은 사랑의 수고를 풍성히 베푸는데 있다.

 

Ⅴ. 양심의 증거 3:20-22

 

(1) 사도는 여기서 양심의 심판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은 스스로 반성하여 판단하는 능력인데 이에 의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인식할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상태에 대해 판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양심과도 같은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재판을 소집하여 하나님 대신 재판을 수행한다. 만일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하나님은 더욱 그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양심보다 더 크신 증거자이며, 우리에 대하여 양심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보냐(20절). 만일 양심이 우리를 무죄라 하면 하나님 역시 그렇게 판단 내리실 것이다(21절).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며 심판날에 우리를 죄없다 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심에 귀를 기울여 양심의 호소에 민감해야 할 것이며,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야 할 것이다.

(2) 사도는 또한 하나님께 대해 선한 양심을 가진 자들의 특권을 말한다. 그들은 하늘에 소유권이 있다. 즉 그들의 간구는 하늘에서 받아들여진다(22절). 이렇듯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으로써 축복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간구를 들어 주시리라는 확신을 소유하게 된다.

 

Ⅵ. 계명을 지킬 것을 권고함 3:23,24

 

(1)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인가(23절).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즉 하나님의 아들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구세주라는 그 이름이 계시하는 바 그리스도가 어떠한 분인지를 인식하는 것이다.

  둘째, 판단과 양심으로 그를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그가 구속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 이유는 아들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아버지께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23절). 사람들을 위한 선한 뜻이 하늘로부터 선포되었듯이 그 사람들을 위한 선한 뜻은 하나님과 천국으로 나아가는 자들의 마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2) 이러한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축복이 있다.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귀는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가에 대한 확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영혼의 상태로써 분별된다(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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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죄를 범치말 것을 권고함 2:1-2

 

사도는 그들에게 죄를 범하지 말 것과 믿음에 견고히 설 것을 권고하고 있다.

(1) 범죄하지 말 것을 권고함 : 사도는 죄가 들어갈 여지를 조금도 허용치 않는다(1절). 이 편지의 의도하는 바는 그들을 죄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함인 것이다. 그가 권고할 때 사용하고 있는 그 친숙하고 애정이 깃든 호칭들을 보라. 진실로 복음은 사역자의 사랑이 가장 넘치는 곳에서 가장 힘있게 전파된다.

(2) 죄를 범했을 때 신자들의 옹호자가 되시며 피난처가 되시는 분이 있다. 신자들 자신은 여전히 자신들의 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실제로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고 칭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명백히 신자들에게 지지자와 변호자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1절). 그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앞에서의 대언자이시다. 우리의 대언자가 우리를 위하여 변호하고자 그앞에 서게 되는 심판자는 아버지이시다. 율법의 판정(죄인들을 심판하는 법정)에서 우리의 대심판관이 되시는 그분이 복음의 법정 곧 하늘나라 또는 은혜의 법정에서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그의 보좌와 심판석은 자비가 거하는 곳이 된다. 우리의 대언자가 우리에게 천거되시는 중요한 이유들로 다음을 들 수 있다.

  1) 그의 인격과 이름에 의해서이다. 그는 구원의 전 사역과 그 결과에 의한 중보자로서의 사역을 위하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2) 그 사역에 대한 그의 자격에 의해서이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라. 그에게 의뢰하는 자들은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죄와 법적인 정당성은 변론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그 죄인들을 위하여 호소해야 했던 것은 그 자신의 의로움인 것이다. 그는 그들을 위하여 죽기까지 의로우셨다. 이 의로움에 의지하여 그는 그 죄인들의 죄가 그들에게 부과되지 않도록 변호하시는 것이다.

  3) 그가 행하셔야 했던 변호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곧 그의 대언의 근거이며 기초인 것이다(2절). 그는 화목제물이시다. 중보의 중재자이시며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신 그가 또한 구속의 중재자이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변호는 곧 그의 화목제물 되심인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재하고 계신다.

  4) 그의 변호의 범위에 의해서이다. 그 범위는 단순히 한 나라 혹은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2절). 그의 변호는 과거에 믿었던 자들이나 현재에 믿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올 모든 자들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재자의 죽음의 목적과 범위는 모든 족속, 모든 민족, 그리고 모든 나라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Ⅱ.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과 사랑 2:3-6

 

여기에서는 우리의 빛과 사랑에 대한 시련 혹은 시험이 언급되어 있다.

(1) 우리의 빛에 대한 시험(3절) : 하나님의 빛과 지식은 마음의 아름다움과 진보를 의미한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새 빛을 과장하며 그들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기 쉽다. 또한 늙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지식을 만족스럽고 충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이 건전하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 있다. 그의 계명을 진실되고 양심에 합당하게 복종한다는 것은 이러한 계명들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영혼에 은혜롭게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반대로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는'(4절)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불순종의 삶은 거짓된 종교적 지식의 허위를 폭로하는 것이며 그 수치인 것이다.

(2) 우리의 사랑에 대한 시험(5절) : 하나님의 말씀 또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삶의 모든 행동과 감정에 있어서 엄숙하게 그 말씀에도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즉 그렇게 행하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 주고 있다. 또한 이 사랑은 15절과 3:17절 말씀에서도 나타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그에게 속해있으며, 이러한 복종을 하도록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에 의하여 그와 연합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그와 더불어 연합해 있음을 인정한다면 우리에게 강권하는 그 다음의 6절의 말씀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16절). 그의 편에 서서 그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자들은 그와 함께 행하며, 그의 모범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Ⅲ. 형제 사랑에 대한 새 교훈 2:7-11

 

사도는 형제애의 교훈을 추천하고 있다.

(1) 옛 계명으로써 추천하고 있다(7절). 사랑의 교훈은 인간의 본성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옛 계명인 것이다.

(2) 새 계명으로써 추천하고 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8절). "이 법은 어느 정도 너희 마음에 기록되어 있다. 즉 너희는 서로 사랑하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배운다. 왜냐하면 어두움이 지나가고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무지가 지나가고 이제는 참 빛이 비치고 있기(8절)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었던 이 은혜가 우린 안에서도 역시 참됨을 알게 된다. 우리의 어두움이 지나갈수록 또한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비칠수록 우리는 옛 것이든 새 것이든 간에 우리 주님의 계명에 더욱더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 그리스도인의 빛에 대한 또하나의 시험이 있게 된다. 앞에서 그 시험은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인정함을 받았다. 여기에서 이 시험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로써 다음 세가지 사실이 나타나게 된다.

  1) 그러한 사랑이 없는 자들은 헛되이 빛 가운데 있는 체할 뿐이다(9절). 이들은 그 형제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동받지 못했으므로 계속 어두운 가운데 있는 것이다.

  2) 그러한 사랑으로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의 빛이 선하고 진실됨을 증명한다(10절). 그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자들을 우리도 사랑해야 함이 얼마나 올바른 것인가를 안다. 그러므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10절)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우리에게 형제의 영혼을 매우 귀중히 여겨야 하며 그의 순결함과 평화에 해가 될 모든 것을 두려워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3) 미움은 영적 어두움의 표징이다(11절).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자에 대하여 악의를 품는 자는 영적인 빛이 결코 없는 자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다음과 같이 된다.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곳을 알지 못하나니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11절). 주 예수는 위대한 사랑의 주이시다. 그의 제자들은 사랑의 제자들이며 그의 가족은 분명히 사랑의 가족인 것이다.

 

Ⅳ. 세상적인 사랑에 대한 경고 2:12-17

 

(1)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지위나 능력 면에서 동일하지 않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도 있고 장성한 어른과 노년층도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는 공통적인 가르침이 주어지며 그에 상응하는 복종이 요구되는데 특히 그들이 서로 사랑할 것과 세상을 버리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사도는 각각의 계층에 따라 다음의 권고를 하고 있다.

  1) 그리스도 신앙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는 자들에게(12절) : 여기에서 이들은 믿음의 초보자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녀들인 것이다. 사도요한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린아이의 단계에 있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 편지를 썼다.

   첫째, '그들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12절).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어리고 진실한 제자는 용서를 받는다. 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자들은 단호히 이 세상을 버려야 한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식 때문이다(13절). 우리는 "자기 아버지를 아는 자녀라야 지혜로운 자녀이다"라고 말한다. 이와같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어린아이의 단계에 있는 자들도 그들의 아버지를 알아야 한다. 아버지를 아는 자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과 연장자들에게 (13,14절) : 사도 요한은 교회 안에서의 가장 낮은 자들로부터 곧바로 가장 높은 자에게로 연결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모임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자들일수록 보다 많은 권고와 교훈이 필요하다. 나이가 많다고해서 배울수 없는 경우란 결코 없다. 사도는 그들이 아는 것에 근거하여 그들에게 쓰고 있다(13, 14절). 태초부터 계신 분을 아는 자들은 그 지식으로 인하여 당연히 이 세상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3) 그리스도 안에서의 중년층들에게(13, 14절) :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장성한 성년들이 있다. 사도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근거하여 그들을 격려한다.

   첫째, 그들의 공훈에 근거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진영에서 노련한 병사들이다(13절). 그리스도의 도장에서 잘 교육받은 자들은 그들의 무기를 활용하여 악한 자를 정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악한 자를 섬멸할수 있는 자들은 세상 또한 정복하도록 부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그들의 승리에서 나타나는 그들의 능력에 근거한다(14절). 일반적으로 젊은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영광을 취하곤 한다. 마귀를 정복하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 될 것이며 그들의 힘을 연단시킬 것이다. 마귀를 정복하는데 이용되었던 그 힘은 세상을 정복하는데에도 역시 발휘되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속에 거하시는 것에 근거한다(14절).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는 자들은 세상 정복을 위하여 잘 무장되어 있는 자들이다.

(2) 여기에서 사도는 이러한 생명력있고 실제적인 신앙에 대해 중요한 주의를 주고 있다(15절).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박혀라. 너희의 사랑은 하나님을 위하여 보존되어야 한다. 그 사랑을 세상에 내던지지 말아라." 이러한 권고와 주의를 주는 이유는 이러하다.

  1) 이 세상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15절). 인간의 마음은 좁으므로, 이 두가지 사랑 모두를 지닐 수는 없다.

  2) 세상적인 사랑 혹은 욕망에 대한 금지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다(16절). 즉 이러한 사랑이나 욕망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침입해 들어온 것이다. 세상의 것들은 타락된 본성의 세가지 지배적인 성향에 따라 세부류로 나뉘어진다.

   첫째, 육신의 정욕. 이 정욕은 일반적으로 향락이라고 일컬어진다.

   둘째, 안목의 정욕. 이것은 탐욕의 정욕이다.

   셋째, 이생의 자랑. 이것은 공명심이다. 이러한 욕구들의 대상은 버려야 하며 거절해야 한다(16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욕망이나 욕구들은 억제되고 또한 근절되어야 한다.

  3) 세상적인 것들은 무익하고 사라져 보이기 때문이다(17절). 세상 것들은 속히 사라지며 죽어간다.

  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영원히 살게 되기 때문이다(17절). 없어질 세상과는 반대로 그의 사랑의 대상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또한 사랑은 결코 쇠하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자신은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Ⅴ. 미혹자에 대한 경고 2:18-19

 

(1) 종말이 오고 있다(18절). 그러므로 제자들이 서둘러야 할 것과 때의 종말에 대하여 경고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 이 마지막 때의 징조(18절)는 많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그러한 적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고해서 성도들에게 굉장한 위협이나 손실이 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첫째, 거대한 적그리스도의 도래는 이미 예언된 바이기 때문이다(18절).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곧 은밀한 죄악은 이미 자행되어 왔다.

  둘째, 또한 이 적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때의 징조로써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이다(18절).

(3) 이 미혹자들 또는 적그리스도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19절). 즉 우리의 공동체와 친교로부터 나갔음을 뜻한다. 아무리 순수한 교회들일지라도 배교자들이 있게 된다.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19절). 만일 거룩한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뿌리박혀 있었다면 그 진리는 그들과 우리를 하나로 있게 하였을 것이다. 신앙으로부터 떠난 자들은 이전에 자신들의 신앙이 위선적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여기에서 이러한 위선자들은 명백히 드러나게 되며, 특히 진리 앞에서 그들 자신의 수치와 장점이 드러나게 된다.

 

Ⅵ.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안정함 2:20-27

 

(1) 여기에서 사도 요한은 이러한 미혹자들의 시대에 처해 있는 제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그 격려의 내용은 다음의 사실들이다.

  1) 그들이 부요하게 되는 축복이 있다. 너희는 기름부음을 받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이며 그들의 이름에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들은 은혜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2) 이러한 축복은 거룩하신 자로부터 오는 것이다. 주 그리스도는 거룩한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며, 제자들이 그 자신과 같아지도록 그들에게 기름부어 주신다.

  3) 기름 부음의 결과 :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20절). 즉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에 관한 이 모든 것들을 알게 되는 것이다.

(2) 사도는 그가 그들에게 본서를 쓴 의도와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부정적인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진리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그가 의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21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다. 즉 신앙인들에 대한 정당한 신뢰를 보임으로써 그들이 더욱 신실해지도록 도우며 격려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단정을 내리는 방법으로 나타내고 있다.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어떤 면에서건 진리를 아는 자들은 그로써 진리와 반대되는 것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거짓은 자연종교나 계시 종교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즉 거짓은 진리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기와 협잡은 진리를 보존하고 전파하는데 가장 부적절한 수단들인 것이다.

(3) 사도 요한은 이러한 미혹자들을 더욱 강경하게 고발한다.

  1)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22절). 세상에서 그렇게 거룩하며, 완전하게 증명된 진리가 결코 없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반대하며 부인할 것이다.

  2) 그들은 주 그리스도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도 명백한 대적자들인 것이다(22절).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는 아버지의 증거와 증언을 부인한다. 이 점을 사도는 다음과 같이 탁월하게 추론하고 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23절).

(4) 사도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처음에 받았던 옛 교훈들을 계속 지키라고 권고하고 있다(24절). 진리는 거짓보다 더 오래된 것이다. 즉 성도들에게 처음으로 전해졌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는 새로운 것들로 인해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이므로 주장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권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

  1) 처음부터 들은 진리와 믿음을 고수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참된 유익

   첫째, 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더불어 거룩한 연합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24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함은 우리로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게 하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영생의 약속을 얻게될 것이다(25절).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한 신자들에게 하신 약속은 위대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줄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2) 사도가 본서를 쓴 목적 : 본 서신은 그들로 당시의 미혹케하는 자들에 대항하여 강하게 하고자 쓴 것이다(26절). 그러므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것에 거하지 않는다면, 나의 쓴 것과 수고한 것은 헛된 것이 될 것이다."

  3)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유익한 축복(27절) :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받아들였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내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의 심령속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기름부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가능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거룩한 기름부음이 다음의 이유들을 근거로 추천되고 있다.

   ① 기름부음은 지속적이며 영원한 것이다(27절). 그러므로 그 신적 조명 역시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유혹과 올무와 미혹들은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기름부음이 반드시 거하여야 한다.

   ② 기름부음은 인간의 교훈보다 우월하다(27절). "너희는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 우리들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나 이제 우리들의 가르침은 기름부음에 비교될 수 없다."

   ③ 기름부음은 진리의 확실한 증거이다.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성령은 진리의 영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거짓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④ 기름부음은 유혹자들과 유혹에 대항하여 기름부음이 거하는 자들을 보존시킨다(27절). "그것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가르친다. 또한 너희를 가르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너희를 안전하게 지켜준다."

 

Ⅶ. 그리스도 안에 거할 것을 권고함 2:28-29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28절). 사도는 사랑으로 권하고 있으며, 이성으로뿐만 아니라 애정으로도 설복시키려 하고 있다. 주 예수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와 함께 거할 의무가 있다. 이 인내와 절제의 의무는 다음의 두가지 사실을 고려함으로써 촉구된다.

(1) 대 심판날에 주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이다(28절). 여기서 주 예수의 다시 오심은 당연한 사실로 되어있다. 이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그 진리의 한 부분이다. 모든 시험 중에도 그와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봄으로써 확신과 기쁨을 갖게 된다. 반대로 그를 버렸던 자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권고를 함에 있어서 사도는 권고받는 자들 안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다. 즉"너희가 너희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할뿐만 아니라 우리로 너희에 대하여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라."

(2) 그리스도를 끝까지 고수하는 자들에게는 위엄과 권위가 주어진다는 사실이다(29절).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또다른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한 자는 반드시 그에게서 난 자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또한 그리스도의 형상을 좇아서 새롭게 된다. 시련의 시기에 있어서 신앙을 실천하는데에 부단히 노력하는 자는 그가 위에 계신 주 그리스도로부터 난 자라는 좋은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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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그리스도와 그의 탁월성 1:1-4

 

1. 중보자에 대한 설명(1,2)

(1) 생명의 말씀(1절). 그는 단순하고 공허한 소리로써의 말씀이 아닌 살아있는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이시다.

(2) 영원한 생명(2절). 그는 태초로부터 계셨다. 또한 그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영원한 말씀이시다.

(3)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2절). 그는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 영원한 생명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위하여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시고 그것을 그들에게 베푸신 것은 진실로 그의 사랑 때문이었다.


2. 중보자가 이 세상에 계셨음(1-3)

'생명', '생명의 말씀', '영원한 말씀'과 같은 이러한 것들은 보이지도 않으며 느낄 수도 없다. 그러나 나타내신 바 된 말씀은 볼 수도 느낄 수도 있었으므로 이들은 실제로 그를 보고 느꼈던 것이다.

(1) 그들의 귀로(1, 3절) : 이 생명은 입과 혀를 취하여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다. 거룩한 말씀은 귀를 사용하고자 하시므로 귀는 생명의 말씀을 듣는 데에 온전히 사용되어야 한다.

(2) 그들의 눈으로(1-3절) : 그들은 또한 말씀을 보았다. 눈으로 본 바요. 즉 말씀을 들었을 뿐 아니라 눈으로써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본 바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사도들은 귀로 들은 그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본 증인이기도 하다.

(3) 그들의 내적인 감각, 즉 심령의 눈으로 : 주목하고, 말씀은 눈으로 직접 본 대상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이 본 바로부터 이성적으로 추리한 대상으로써 인식되고 있다. 그러므로 감각들은 마음의 정보자가 되는 것이다.

(4) 그들의 손과 촉감으로 :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보이지 않는 생명과 말씀되신 분은 결코 감각에 의한 증거를 무시하지는 않으셨다. 감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식을 위하여 마련해 주신 하나의 수단이다. 우리 주님은 사도들이 세상에서 보다 진정한 주님의 증거자들이 될수 있도록 그들의 모든 감각을 통하여 세심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사도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다양하게 훈련된 감각을 그릇 이해했을 리가 없다. 감각은 분별하고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분별력과 판단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3. 사도들이 이 증거를 제시한 목적(2,3)

사도들은 우리가 만족할 수 있도록 그들이 확신한 것들을 밝힌다. 사도들은 자기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증거들을 성도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합당했다. 성도들은 자신들이 받아들인 교리의 진실성을 충분히 확신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거룩한 신앙의 증거들을 알아야 했다.


4. 사도가 거룩한 믿음에 대해 이러한 요지를 밝히는 이유(3,4)

(1) 이를 믿는 자들이 그들과 함께 (사도들 자신과 함께) 동일한 복락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3절). 그것은 하늘나라와의 교통으로 그곳으로부터 오며 그곳으로 나아가는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사도로부터 가장 이름 없는 신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도들에게 속해 있는 친교(혹은 특권과 존엄성에 대한 공동의 참여)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친교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3절). 복음의 계시가 의도하는 바가 곧, 우리로 하여금 죄와 세상으로부터 멀리 떠나 하나님과 그 아들과 함께 복된 친교를 나누도록 하려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영원한 생명이 육신이 되신 목적은 그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신과의 친교속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2) 신자들에게 거룩한 기쁨이 증대되고 깊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독교 신앙의 신비는(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사람들의 기쁨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 계시의 능력과 목적에 이르지 못한 채 사는 사람들은 신령한 기쁨으로 충만케 되지 못한다.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거룩한 믿음을 확신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으로 충만케 될 것인가!

 

Ⅱ. 빛 가운데 행함으로 얻는 유익 1:5-7

 

(1) 여기에서 우리는 주 예수로부터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5절). 사도들은 주 예수의 사자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는 것은 그들의 영광이었다. 인성을 지니신 그는 흙으로 지어진 질그릇들을 영화롭게 하신다. 사도들의 소망은 자신들이 받았던 메시지를 신실하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서의 저자인 사도요한은 이렇게 선언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5절). 우리에게 있어서 그는 빛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움과 완전함이 되신다. 그에게는 결함이나 불완전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이 어두운 세상에 대하여 위대한 하나님이 순수하고 완전한 빛으로서 나타나게 되시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느니라'는 말보다 하나님에 대해 보다 함축된 표현이 과연 있겠는가?

(2) 이 메시지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사실이 있다.

  1)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전혀 없는 신앙고백자들을 깨닫게 한다. 만일 우리가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6절). 어두운 가운데 행한다는 말은 우리의 거룩한 신앙과 반대되는 무지와 그릇된 행위를 좇아서 살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렇게 사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고백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비신앙적이고 비도덕적이고 또한 불순하다. 사도는 그러한 자들의 말이 거짓임을 두려움없이 주장하였다.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고백과 겉치레가 거짓임을 보여주며 그들의 어리석음과 허위성을 증명한다.

  2)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자들을 확신케 하고 이에 따른 만족을 얻게 한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7절).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즉, 그들은 우리와 함께, 우리는 그들과 함께, 또한 우리와 그들 모두는 하나님과 함께 사귐이 있게 된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적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의 피는 우리를 위하여 거룩한 능력을 행하셨으며, 이로써 죄는 더욱더 뿌리뽑혀지고 종국에는 온전히 소멸될 것이다.

 

Ⅲ. 우리가 죄있음을 부인하는 죄악 1:8-10

 

(1) 사도는, 이러한 신성한 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아직은 죄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 8절에서 그 전제가 옳음을 진술해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부인하거나 변명함으로써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기독교는 죄인들의 종교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계속되는 회개의 생활이며, 구속자에 대한 지속적인 믿음과 감사와 사랑 속에서 영위되는 생활인 것이다. 우리의 죄를 부인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실성에 도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끊임없는 죄악에 대하여는 모든 시대에 필요하게 될 속죄물을 제공하심으로써, 또한 신자들 자신의 계속되는 범죄에 대하여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끊임없이 고백하도록 요구하시는 것으로써 그의 증거를 주셨던 것이다.

(2) 사도는 신자들의 죄에 대하여 계속적으로 용서받는 방법을 제시한다.

  1) 용서 받기 위해 우리 죄를 자백해야 할 의무가 있다(9절). 죄를 시인하고 참회하는 것은 정죄함으로부터 구원받는 수단이 된다.

  2)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된다(9절). 이 확신은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이다. 그 말씀하시는 바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 속에서 참회하는 신앙고백자들에게 용서를 약속하셨다. 그렇게 그는 자비하시며 은혜로우시므로 통회하며 고백하는 자에게는 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그를 깨끗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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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3절)
성도들의 사랑과 순종 - 믿음, 사랑, 순종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강조되어 있다. 이를 역으로 말하면 사랑과 순종을 하지 않는 자는 참 믿음을 갖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도 요한은 지금 불신자를 향해 믿고 사랑하고 순종하라고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에게 사랑과 순종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1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 '예수'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신성을 각각 나타내 준다. 영지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예수이심을, 현대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각각 부인한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아니다. 믿는 자...난 자. '믿는'의 시상은 현재이고, '난'의 시상은 현재 완료이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결과이며, 따라서 그 증거도 된다. 그에게서 난 자.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녀, 즉 성도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2절]
4:20절과 같이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의 불가 분리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나와 마찬가지로 형제도 똑같이 사랑해 주시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가 그분이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이 형제 사랑은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이며, 하나님이 불쌍한 인간인 자신을 사랑해 주었듯이 인간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쌍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속성상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절]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계명과 동시에 그것을 지킬 힘 또한 주시기 때문이며(롬 8:3, 4), 우리가 그것을 사랑으로 지기 때문이다. 사랑의 짐은 무겁지 않다. 우리는 그 실례를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자녀를 위하여 부모가 지는 짐은 실로 무거운 것이지만, 그것을 사랑으로 지는 부모들은 전혀 무거운 줄 모른다(마 11:30; 요 21:15~17). 그것을 믿음으로 지기 때문이다(4, 5절). 믿음은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으며 주님의 계명들을 넉넉히 순종할 수 있게 해준다(히 11:8).
(4~21절)
교제의 결과 - 이제껏 저자는 4단계로 나누어 교리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성도들의 마땅한 자세를 논해 왔다. 이제 이 부분에서는 그러면 교제를 나누는 자는 결과적으로 어떠한 생활을 하게 되는지를 서술함으로써 성도들에게 교제의 소망을 갖도록 촉구하고 있다. 세상에 대한 승리(4, 5절), 구원의 확신(6~13절), 기도로써 죄의 유혹을 이김(14~21절)이다. 이는 성도가 이미 구원 얻었음을 확신함으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살전 5:16~18절의 교훈과 일치하고 있다.
[4절]
세상을 이긴. 부정 과거 시제로서 과거에 단회적으로 있었던 한 사건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단번에 해방되어 영생에 참여하는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뜻한다.
(6~12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 증거
1) 물의 증거 : 세례 요한에게서 받은 그리스도의 물 세례(요 1:33)
2) 피의 증거 :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막 10:38; 롬 6:3)
3) 성령의 증거 : 성도 안에 내주하시며 계속적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해 주시는 증거(요 14:6)
[8절]
합하여 하나. 셋의 증거가 모두 일치한다는 의미이다. 한편 이스라엘에서는 증거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세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였다.
[10절]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우주 만물과 성경의 증거가 너무 분명한데도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증거를 행한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모욕을 준 것이다.
(13~17절)
성도들이 가져야 할 세 가지 확신
1) 영생에 대한 확신(13절)
2) 간구의 응답에 대한 확신(14, 15절)
3) 중보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16, 17절)
[13절]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다. 이것을 알게 해주는 것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외적 증거인 말씀이며, 다른 하나는 내적 증거인 성령님이시다. 그런데 성령님은 말씀을 통하여서도 성도에게 영생이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14절]
응답 받는 기도가 되려면 담대한 마음으로 구해야 한다. 이것은 구하는 대로 응답될 것을 믿는 마음이다. 한편 담대한 마음을 가지는데 방해되는 것들은 양심의 가책(3:21), 고백하지 않는 죄(시 66:18), 부부간의 갈등(벧전 3:7), 이웃과의 반목(마 5:23~25), 의심(약 1:6, 7) 등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한다. 아무리 담대한 마음으로 기도하더라도 주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는 기도는 응답이 없다. 만약 우리의 뜻에 따라 구하는 대로 모두 응답된다면 그야말로 비극일 것이다.
[16~17절]
범죄한 형제에 대한 중보 기도의 필요성 및 의무 - 이는 중보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 동시에 교회의 특권임을 알려 준다. 본문은 특히 범죄한 성도에 대해 끝까지 포기치 않으시며 성도들 상호간에 기도로 결속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잘 보여준다<마 9:2, 중보 기도의 효력과 제한성>. 사망에 이르는 죄. 여러 학설이 있지만 여기서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부인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는 죄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볼 때 성도도 죄를 지을 수 있으며 그것이 고의적으로 또는 예수를 부인하고 지은 죄가 아닌 이상 용서와 구원의 길이 있음을 암시한다. 지금껏 사랑과 순종의 절대적 당위성을 강조해 온 사도 요한이 서신 마지막 부분에서 이 말씀을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은 추호의 용서도 없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노력할 것을 원하시는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한 성도의 허물을 감싸 주실 것이기에 성도들도 서로간의 허물을 관대히 용서해야 할 것이다.

(18~21절)

세 주장과 하나의 권고

1) 하나님의 자녀는 범죄하지 않는다. 이것은 성도가 단번에 모든 죄로부터 분리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역설적 표현으로 성도들이 계명을 충실하게 따르게 되면 점차적으로 죄와 멀어지게 될 뿐만 아니라 한 번 구원받은 성도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근본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2) 교회는 하나님께, 세상은 마귀에게 속했다.

3) 그리스도 안에는 영생이 있고, 교회에 지각을 주시어 그것을 얻게 하셨다.

4) 마지막 권고로 우상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18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하나님께로서 나신 자. 전자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을, 후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 성도는 절대적으로 조금도 죄를 범치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습관적인 죄 또는 예수를 부인하는 근본적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9절]

여기서 '세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창조물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멸망 당할 수밖에 없는 모든 적그리스도적 세력 아래 있는 현실 세계의 영적 상태를 총칭한 상징적 표현이다. 기독교는 결코 자연적 세상을 향한 성도의 활동을 부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복음을 가지고 세상을 정복하며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봉사할 것을 요구한다<엡 서론, 성도의 사회 참여>.

[20절]

아들이 이르러. 기독교의 신앙은 역사적으로 성육신하신 주님께 그 근거를 둔다. 지각(知覺)을 주사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요 17:3). 이 지각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에 의해서만 비로소 가능케 된다(요 14:26). 참 하나님.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다(빌 2:6). 그리고 유일하신 영생의 제공자이시다(요 14:6).

[21절]

우상. 하나님 외의 무엇이든 절대화하고 숭배할 때 그것은 우상이 된다(고전 8:4; 골 3:5)<왕상 14:23, 우상론>.

 

# 해설

세상을 이기는 믿음 (1~12절)

이 단락은 본서의 교리적 결론부로서 뒤이어 나오는 윤리적 결론부와 쌍을 이루어 본서 전체를 마무리 짓고 있다. 미움과 다툼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도리어 사랑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롬 12:21)은 지금껏 저자가 강조해 온 성도의 의무이다. 그런데 이러한 승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니 저자는 다시금 성도와 하나님과의 사귐을 강조한다. 한편 하나님과의 사귐은 곧 예수의 성육신을 시인하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이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실천적 사랑으로 연결된다는 점(1~5절)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는데, 특히 여기서 저자는 예수 성육신 사건의 역사성을 거듭 천명하고 있다(6~12절).

결론, 응답의 기도와 중보 기도 (13~21절)

본서는 특히 공식적인 인사말이 없이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앞 단락의 교리적 결론부와 연결되어 최종적으로 기도를 통하여 세상에서의 신앙 생활을 이길 것을, 즉 신학적 측면에서도 승리할 것을 말함으로써 내용적으로 완벽한 결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16, 17절에서 지금껏 형제 사랑을 강조한 사도 요한답게 중보 기도를 교훈하고 있는 것이 인상 깊다. 그리고 끝으로 이단 사설이 횡행하는 당시의 현실을 감안하여 벧후 1:2절과 같이 '앎'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점에 유의하라. 건전한 지식, 즉 이론적 교리에 사상을 둔 뜨거운 사랑의 실천은 그 어느 하나도 다른 것 없이는 완전할 수 없음을 이 부분에서는 물론 전체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 핵심

1~12절

진실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는 자임을 들어 믿음과 사랑의 불가분적 관계를 증거하는 내용이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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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6절)
이단의 정체 - 지금까지 도덕적 기준으로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온 요한은 이제 다시 교리적 기준을 적용시킨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많은 이단들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이들로 인해 많은 문제가 야기되었다.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이들의 가르침과 활동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함과 아울러 이단의 정체를 분명하게 폭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단의 개념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정의 : 이단(헬, 하이레시스)이란말은 원래 '선택하다' 또는 '독자적 견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며, 초기에는 '자유로운 선택'이란 뜻으로 많이 쓰였다. 그러다가 이 말은 점차 자유로운 선택적 학파적 편당적 이단의 뜻으로 변모했다. 여기서 이단은 역사적 기독교의 보편적 진리나 교리를 거부하거나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을 부정하는 무리, 성령의 내용을 자기 마음대로 추가하거나 감하는 단체라고 규정할 수 있다.
2) 특징 : 처음 주장과 그 끝이 다르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한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의 교리와 그리스도의 유일성, 삼위 일체론을 부정한다. 자기 공로에 의한 구원을 미끼로 신도들을 착취하며 종말론을 특히 고조시킨다. 성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를 은연중에 조장한다. 인간 교주를 신격화시킨다.
[1절]
영을 다 믿지 말고...시험하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현실에 얽매인 인간이 자칫 망각하기 쉬운 평범하면서도 놀라운 영적 세계의 실존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영육이 합일된 존재이나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온전히 영적으로만 활동하는 존재들과 세계가 분명이 있다. 그 세계에는 하나님과 그에 속한 천사의 영도 있으나 사탄과 그에 속한 귀신들의 영들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실체들에 접할 때 놀래서는 안 되며 또 무조건 신봉해서도 안 된다.
[2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 이 말을 원어상 다시 정리하면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이 된다.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께서 역사적 예수의 육체 속에 오셨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곧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초대교회 당시 이단들은 주로 예수의 성육신 사건을 믿지 않았으나 현대 이단들은 주로 예수의 유일성 즉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3절]
시인하지 아니하는. 이 말은 헬, '메 호몰로게이'인데, 어떤 사본에서는 이 말 대신 '뤼에이'('풀다, '멸하다')를 사용하고 있다. 즉 예수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킨다'는 뜻으로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려는 적그리스도의 흉계이다.
[4절]
너희 안에 계신 이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인하여 성도는 하나님을 이론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알고 서로 교제하게 되는 것이다. 성도들의 승리는 오직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면서 외적 증거를 바로 파악하고 적용하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는다. 외적 증거인 성경 말씀은 교회의 전투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무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은 '성령의 검'(엡 6:17)이 될 때에 비로소 승리를 보장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이다.
[5~6절]
참된 교사와 메시지와 성도 사이의 신비스러운 일체성을 설명한다. 하나님께 속한 청중은 참 교사가 전하는 참 메시지를 듣는다. 여기엔 예외가 없다. 그래서 요한은 이 일체성을 통하여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구분해 낸다.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안 듣는 자들은 '미혹의 영'을 받은 것이라고 요한이 확신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일체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영이 하나님께 속한 그 일체성을 보장하시는 것처럼(롬 8:16), 미혹의 영도 세상에 속한 자들의 일체성을 증거한다.
(4:7~5:3절)
두 시험 기준의 네 번째 적용 - 이 부분도 앞선 세 부분과 마찬가지로 교리적 기준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굳건한 신앙과 도덕적 기준인 상호간의 사랑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의 바른 도덕은 바른 교리 위에서만 가능하고, 바른 교리는 꼭 바른 도덕 실천으로 연결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 부분은 구약의 아가서와 신약의 고전 13장 등과 함께 사랑에 대해 뛰어나게 노래한 부분으로 특히 유명하다.
(7~12절)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사랑 - 사랑이 시험 기준이 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첫 번째(2:7~11)는 참빛(2:8)과 결부시키고, 두 번째(3:10b~24)에서는 영생(3:15)에 연관시켰다. 그러나 이 세 번째에 와서는 사랑을 하나님 자신의 성품에 직접 관련시킨다(8절).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다(7, 8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9~11절).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하여지기 때문이다(12절).
[7~8절]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를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원천이심을 밝히고 성도들의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을 권면하는 동시에 그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한편 성도들은 지적(知的)인 고백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의 증거를 갖게 된다.

[9절]

본문에 언급된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역사적으로 현시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희생적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구원하시는 구체적 능력이 있다<나 서론, 하나님의 속성>.

[10절]

우리가...사랑한 것이 아니요.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다(20절). 요한은 단호히 그것을 부인하고 사랑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이 사랑의 빛 아래서만 형제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화목제. 문자 그대로 서로 갈라졌던 사이를 다시 화해시키는 제물을 말한다. 이 화목제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12절]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물리친다. 거하시고. 그러나 성도들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보는 것 이상의 증거를 가진다. 사랑은 하나님이 그 안에 내주하신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백성 안에서 완성되는데, 그의 백성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명해 보이는 자들이다.

(13~21절)

성령의 내주 - 성령의 내주(13~16절)와 사랑의 완성(17~21절)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한다.

[13~16절]

성령 내주의 특징 - 성령의 내주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객관적으로 성취되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시고자 하시는 뜻은 이미 오래 전에 성막 또는 성전을 통해 계시되었고(출 25:8; 출 40:33~35; 왕상 8:11), 그 계시가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것이다.

2) 성령의 역사를 통해 성도 각 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적용, 지속되어진다. 사도들의 객관적인 증거(15절)를 믿는 일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16절)은 내주의 자연스러운 결과로서 가장 분명한 증거인데, 이 일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믿음과 사랑을 보이는 것은 곧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며,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를 증거하는 것이다(요 14:17; 고전 6:19).

3)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내주는 불가 분리의 것이며 인격적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 안에 거하신다. 이 연합은 지극히 친밀하며, 결코 다시 나누어질 수 없는 영원한 것이다(롬 8:35~39).

(17~21절)

사랑의 완성과 그 효과 - 여기서 요한은 참된 사랑은 수직적인 관계, 즉 대신(對神) 관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신적 관계를 기반으로 대인적 관계에까지 그 영역이 확산되어 가야 하며, 추상적 논리나 생각의 영역을 뛰어넘어 구체적인 만남과 실천으로 옮아가야 함을 교훈한다.

[17절]

이로써.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의 안에 거함으로써, 성도들은 주의 심판의 날에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그러하니라.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비결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심판하실 수 없다면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18절]

두려움. 헬, '크리시스포비아'라는 이 말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란 의미이다. 사랑의 완성이 가져오는 첫 번째 효과는 심판에 담대함을 갖는 것인 반면 '두려움'은 그 효과에 대한 부정적인 의심이다. 심판과 하나님에 대하여 담대함이 없거나, 두려움이 있음은 아직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역설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질 때마다 더 깊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심판의 두려움을 기억해야할 필요가 있다.

[19절]

인간의 논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이 감동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자신을 배반하고 떠난 인간을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온갖 수치와 고통의 대명사였던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하신 예수의 삶은 그 자체가 사랑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진리의 일단을 발견한다. 그것은 내가 먼저 사랑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해 주셨기에 우리도 하나님과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구원을 받은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행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억지로 선심 쓰듯이 베푸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하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고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성도가 되기는 되었으나 사랑은 행하기 어려운 경우를 수없이 아니, 날마다 체험할 것이다(롬 7:15, 16). 그러나 육신이 약해서 행하지 못한 것과 핑계를 대고 고의적으로 사랑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약 서론, 행함과 믿음>. 지금 이 순간도 성도들은 이 구절을 거울 삼아 나는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과 빛을 반사해 내고 있는지를 다시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20~21절]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놀랍고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사랑하고 나아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게끔 만든다. 이처럼 진실한 사랑은 진실한 사랑을 낳은 기적을 이룬다<서론,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이해>.

 

# 해설

영들에 대한 시험 (1~6절)

앞의 2:18~27절에서 언급된 이단에 대한 경계와 짝을 이루는 부분으로서, 당시 교회는 성령의 폭발적 사역으로 특별한 은사를 강력히 체험하고 있었다. 이에 이단들도 각기 사탄으로부터 기인된 특이한 영적 현상을 보이면서 성도들을 미혹했던 것이다(마 24:5; 행 5:36, 37; 고후 11:13). 이단들은 그들의 극단주의적 비논리를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기이한 영적 현상으로 위장하기 마련이다. 이에 사도 요한은 인간들에게 하나님과의 교제 자체이며 또 그 과정인 성령의 사역을 객관적인 건전한 교리, 예수의 성육신과 신성, 그리고 유일성에 대한 시인 문제로 악령의 사역과 분별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사랑의 필연성 (7~21절)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가장 큰 특징인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단락이다. 이 단락은 전체 성경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직접적으로 사랑의 실천을 말하는 부분으로 유명하다. 한편 고전 13장이 사랑의 특성 자체를 말했다면, 본 단락은 성도에게 있어서 사랑은 하면 도움이 되고 안 하면 그저 조금 부족할 뿐인 덕목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성도라면 필연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성도는 곧 사랑하는 자이고, 또 반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성도가 아님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 핵심

1~6절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임을 지적하며 그들을 경계하는 내용이다.

영지주의(Gnosticism, 4:3절)

영적 세계에 관한 특별한 '지식'(헬, 그노시스), 즉 '영지'(靈智)를 소유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종교 사상이다. 헬라 철학에 동방 종교와 유대교 신앙을 가미한 영지주의는 1세기 중엽에 발흥해 2,3세기를 풍미하다가 3세기 후반에 급속히 쇠퇴해 4세기에는 마니교에 흡수되었다. 영지주의자들은 물질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에 입각하여 극단적 금욕주의를 추구하는가 하면 쾌락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신봉한 하나님은 저급한 신에 불과하다고 했으며, 그리스도의 인성(人性)도 부인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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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4~9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롭게 살아야 할 두 번째 이유 - 그것은 주님이 과거에 성육신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행위에 따르는 상급을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계 22:12, 구원의 상급 문제>.
[4절]
죄를 짓는 자마다. 2:29절의 '의를 행하는 자'와 대조되는 구절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들은 의무적이나 형식적으로가 아닌 자발적인 사랑의 행위로서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다. 이는 목욕한 자가 의무적으로 옷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히 그렇게 하는 것과 같다.
[5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완전한 인성(人性)을 지니셨지만 죄는 없으시다(고후 5:21; 히 4:15). 이것은 본서가 말하고 있는 중요한 기독론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소개된 기독론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선재하심(1:2)
2) 성육하심(1:1, 2)
3) 하나님의 아들이심(1:2; 2:22, 23)
4) 그리스도이심(2:22)
5) 구원의 유일한 근거이심(2:23)
6) 성령님을 교회에 주심(2:27)
7) 재림하실 것임(2, 3절, 2:28)
8) 대언자이심(2:1)
9) 화목 제물이심(2:2) 등이다.
[6절]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의 현재 시제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작을 의미하며, 어쩌다가 다시 실수로 범죄한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계속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습관적인 죄를 계속 범한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성육신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바로 그러한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이다(롬 8:2).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하고 감격적인 해방이다. 주님 안에서 죄를 끊어버리는 자마다 참된 구원과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
[8절]
죄를 짓는 자. 어쩌다 실수하여 범죄한 자가 아니라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는 자, 즉 삶의 존재 방식이 죄에 붙들린 자를 가리킨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죄를 짓기 때문에 마귀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범죄케 하는 것은 마귀의 속성 중 하나로 마귀는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자들을 죄와 사망으로 몰아간다. 멸하려. 이 말의 헬, '카타르게오'는 '힘을 제거하여 무력하게 만들다'란 뜻이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은 최후 심판 전까지는 멸절(annihilated)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벧전 5:8).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힘을 제거하여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현재도 (비록 완전히는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마다 넉넉히 사탄과 죄를 이길 수 있다(요 16:33; 롬 8:37).
[9절]
하나님의 씨. 열매가 씨앗을 결정짓지 않고 씨앗이 열매을 결정짓는다. '하나님의 씨'는 우리가 중생함을 받게 되는 '하나님의 성품'(벧후 1:4)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받은 성도가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10~24절)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의 판단 기준 - 본문에서 요한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를 구분할 수 있는 판단 기준을 제시한다. 즉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사랑과 증오, 생명과 사망, 자기 희생과 살인 등으로 계속 대조시켜 나간다. 그리고 그 대조적인 두 세계의 모델로 그리스도와 가인을 소개한다.
[10절]
본문에서 요한은 인류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로 양분한다. 모든 인류는 이 두 부류 중의 하나에 속하며 선도 악도 아닌 중간 지대 곧 회색 지대는 존재치 않는다(계 3:14~16).
[11절]
들은. 이 말의 헬, '에쿠사테'는 부정 과거형으로 과거에 방생한 단회적인 사건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된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인류의 구속밖에 없으며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모두 적그리스도적인 것으로 인류를 죄와 멸망 가운데 빠뜨리고 만다. 소식. 헬, '앙겔리아'란 이 말은 본서에서만 사용되는 말로 사도들이 전한 사랑에의 권면을 가리킨다. 사랑은 복음의 적용이 아니라 처음부터 확립된 복음의 목적이다. 또한 의를 행한다는 것은 다름아닌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10절).
[12절]
이곳은 본서에서 구약에 대해 직접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곳이다. 가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1) 세상의 특징은 살인이다. 여기서 '살인'은 육체적인 사망 뿐만 아니라 형제들에 대한 증오까지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이웃 관계에서의 미움과 갈등이다.
2) 살인의 1차적 원인은 세상이 마귀의 자녀이기 때문이다(요 8:44).
3) 2차적 원인은 의를 미워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웃의 의로운 행위를 본받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시기하며 그 이웃을 제거하려 한다.

(13~24절)

사랑의 실천 - 성도들의 마땅한 도덕 기준으로 사랑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본서는 가히 사랑의 신학이라 할 만하다<서론,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이해>.

[13절]

이상히 여기지 말라. 세상은 가인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교회를 미워함은 당연하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의를 행할수록 세상의 핍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마 5:10~12).

[14절]  
사랑은 율법의 일부가 아니라 그 전부이며 완성이다(롬 13:8). 사랑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랑은 생명과 사망을 가르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고전 13:13).

[15절]

주님의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마 5:21, 22). 미움과 살인은 그 나타난 모양이 다를 뿐 내적 동기는 똑같다. 주님은 행위에 앞서 그 동기를 먼저 심판하신다.

[16절]

본절은 성도들의 사랑의 근거가 그리스도이심을 밝히는 내용이다. 즉 그리스도는 '자기 희생적 사랑'을 통하여 교회를 살리셨으며 성도들에게 삶의 모범을 보이셨다. 이로써...알고.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 배워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치 못한 자는 참된 사랑을 깨달을 수 없으며 할 수도 없다.

[17절]

재물. 사랑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이며 실천적인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입으로 외치기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에게 물질이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 줌으로써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19~20절]

또 우리 마음을...하나님일까보냐. 헬라어 성경 원문에 의하면 본절들은 '호더'란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후 문맥이 진리 안에 있는 자가 사랑의 하나님 앞에서 갖는 담대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본절은 다음과 같이 재번역할 수 있다. '우리 마음이 우리 마음을 책망할 일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마다 회개함으로써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 대신 위로를 받는다(4:18).

[23절]

본문은 주의 계명을 믿음과 사랑으로 요약한다. 이 둘은 나눌 수 없는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랑의 유일한 근거이며, 형제 사랑은 그 믿음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다.

 

# 해설

사랑의 실천 (10~24절)

본서의 주제가 하나님과의 교제라면 사랑의 실천은 그 주제로부터 당연히 우러나온 지상 명령이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는 필연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교제의 기초가 되므로 수직적 교제의 근본 동기요 또 전체적 특징이기도 한 사랑은 자연히 수평 관계에서 저절로 드러나게 되고, 또 의식적으로도 강조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강조한 본서가 동시에 사랑의 실천을 강조한 책으로 유명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편 본 단락은 앞 단락에 이어 성도의 마땅한 행실을 말하고 있는 부분으로서, 앞 단락이 소극적 관점에서 성도가 불법과 세상으로부터 순결을 지킬 것을 말했다면, 본 단락은 적극적 관점에서의 실천적인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 핵심

1~12절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지만 마귀의 종노릇하는 자들은 불법을 일삼는 점에 입각해, 양자를 분별할 수 있다는 가르침.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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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절]
죄로 번역된 헬,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벗어나다'란 뜻이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모든 것이 죄다. 따라서 나라의 법이나 세상의 도덕률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면 죄가 된다. 한편 성도가 죄를 범치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아무도 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도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한 대언자와 화목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4:10).
(3~27절)
신앙의 기준의 두 번째 적용
1) 도덕적 기준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가? (3~6절), 즉 서로 사랑하는가? (7~11절)
2) 교리적 기준 :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가? (18~27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그리스도를 본받는 실천적인 삶이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수적인 핵심 요소임을 깨달을 수 있다.
[3~6절]
계명에 대한 순종.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그 계명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사귐이 없는 자이다. 이는 도덕적 순결을 무시했던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이다.
(7~11절)
사랑의 요청 - 도덕률의 완성은 사랑이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도 사귐이 없는 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도덕적 순결을 무시했던 영지주의자들에게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형제에 대한 사랑을 찾아볼 수 있을리 만무였다. 현대에 와서 기술적.학문적 지식은 높아가나 구원과 사랑의 지식에 대한 존경이 사라지는 것은 심히 경계할 일이다<서론, 성경에 나타난 사랑의 이해>.
[7~8절]
사랑하라는 계명은 옛 계명인 동시에 새 계명이다. 이 계명은 옛부터 있었다(레 19:18; 마 22:39, 40). 그러나 다음 세 가지 의미에서 이 계명은 항상 새것이 된다. 첫째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새롭고 극적인 조명을 통하여, 둘째 구약에 대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해석(마 5:17~19)을 통하여 그리스고 셋째로 성도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순간마다 새롭게 자각되고 성취되는 종말론적 성취를 통하여 사랑하라는 계명은 항상 새것이 된다.
(9~11절)
빛과 어둠 - 본문에서 요한은 빛과 어둠의 비유를 통해 사랑과 미움의 특징을 규정 짓는다.
1) 빛과 어둠의 양(量)이 서로 반비례하듯이 사랑과 미움의 양도 서로 반비례한다.
2) 빛과 어둠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듯이 사랑과 미움 사이에도 중간 지대가 없다.
3) 사랑은 경험적이며 실제적인 것이다.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구호에 불과하며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되지 앟는' 사랑으로 단장되고 채색된 집안에는 미움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9절]
빛 가운데 있다 하며. 영지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에 있어서 괴리된 면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지식'을 소유하였으며 빛 가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자랑했으며, 타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무지를 이유로 들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독선과 아집 속에서 증오와 무시를 은연중에 조장했다.
[11절]
갈 곳을 알지 못하니. 영지주의 이단자들의 결국에 대한 언급이다. 즉 그들의 미움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지식을 가졌다고 자랑했지만 이처럼 눈먼 생활을 하는 자는 결국 기술적 지식은 가졌으나 영적 지식은 갖지 못한 채 방황하는 자들로서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참 소경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적 참 지식은 불가분 사랑과 병행되고 세상의 지식은 불가분 교만과 미움으로 연결된다 하겠다<렘 43:2, 겸손과 교만>.
(12~14절)
회중의 구분 - 이제 요한은 화제를 바꾸어 지금까지의 논쟁을 잠깐 멈추고 교회들에게 구원에 대한 올바른 확신을 심어 주려고 한다. 그는 신앙의 성숙도와 성격에 따라 회중을 다음 세 종류로 분류한다.
1) 자녀들(헬, 테크니아, 12절). 14절에서는 '아이들'(헬, 파이디아)이라고 칭한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를 알고 죄 사함 받은 정도의 신앙적 초보 단계에 있는 자들이다.
2) 아비들(헬, 파테레스, 13, 14절). 이들은 그 신앙이 좀 더 성숙되어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이단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자들이다.
3) 청년들(헬, 네아니스코이, 13, 14절). 이들은 사죄 및 하나님과의 사귐을 나누는데서 지나 강력한 믿음으로 마귀와 싸워 이기는 자들이다. 이러한 승리의 비결은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14절). 교회가 추구해야 할 신앙상은 바로 이러한 청년상이다. 교회는 마귀를 대적해야 하고(벧전 5:9), 그러기 위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한다(엡 6:17).
(15~17절)
세상을 사랑치 말라 - 이어서 요한은 세상을 사랑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고 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는 세상을 사랑함과 아버지를 사랑함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15절),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영원하지만 세상의 것은 잠깐 있다 지나가 버리는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16, 17절).

[15절]

세상. 요 3:16절의 세상과는 다른 의미로, 본절에서는 사탄의 지배를 받는 악한 체제로서의 세상을 말한다(5:19; 요 12:31; 약 4:4). 사랑치 말라. 이타적인 거룩한 사랑이 아니라, 악한 정욕과 이기적 욕구를 좇고 그것을 즐기는 세상적인 것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요 3:19; 요 12:43).

[16절]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드는 세상적인 세 가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육신. 이 말의 헬, '사륵스'는 타락하여 죄로 물든 인간의 본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엡 2:3; 벧전 2:11). 안목의 정욕. 눈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것에 대한 탐욕을 말한다(창 3:1~6; 마 5:27~29). 이생의 자랑. 이 세상의 소유에 집착하는 오만스러운 자랑이나 허영을 의미한다(눅 12:19; 약 4:16).

(18~27절)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지를 시험하는 두 번째 기준으로서 교리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핵심은 예수를 누구로 믿느냐 하는 것이다(22절). 요한은 이 믿음에 관하여 이단 편에 서는 자들을 '적그리스도'로 표현하고 있으며, 성도들이 '적그리스도'를 이길 수 있는 방편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성경 말씀의 진리 위에 굳게 서며, 내적으로는 성령의 기름 부음과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가능케 된다<벧후 서론, 적그리스도>.

[18절]

마지막 때 예수님의 재림이 있기 직전, 적그리스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대적 행위가 극에 달할 때이다<마 24:23, 24; 딤후 3:1 이하)<욜 서론, 여호와의 심판>.

[19절]

교회의 사귐에서 떠나는 것은 이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이단의 교주들은 대개 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이다. 그러나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곧 '교회의 사귐 안에 참여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참 성도의 표식은 예배나 헌금, 교회의 출석 등 외적 종교 행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적 삶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랑과 윤리의 실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23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 예수님의 인성이나 신성 중 어느 것 하나를 부인해도 이단이다. 예수님은 믿지 않아도 하나님은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불신자로서 스스로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요 14:6).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오직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4절]

처음부터 들은 것. 사도들의 증거로 전달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26절]

미혹케 하는 자들. 사탄의 가장 큰 소원은 성도를 미혹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사탄이 준비한 자들이 '미혹케 하는 자들'이며 이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말씀을 혼잡게 하는'(고후 4:1, 2) 것이다. 하와를 미혹시킨 것도 바로 이 방법이었다(창 3:1~5). 사탄은 예수께도 이 방법을 써 보았으나 실패했다(마 4:1~11). '말씀을 혼잡게 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왜곡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이 이러한 이단들의 궤계를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바로 이해하고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재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내적 증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7절]

여기서의 기름 부음은 인간들의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주신 영적 기름 즉 성령을 가리킨다. 즉 기름부음은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님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요 20:23). 성령님은 성도들 안에 거하시며(고전 3:16),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며(요 15:26), 모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요 14:26). 성령님은 교회의 위대한 선생님이시다<행 9:17, 성령 충만과 성령 세례>.

(2:28~4:6)

두 시험의 기준의 세 번째 적용 - 요한은 두 가지 시험기준(도덕적, 교리적)을 함께 적용시키면서,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참 생활이며 교제인지를 논증해 나간다.

1) 도덕적 기준 : 의를 행하는가?(2:28~3:10a), 사랑하는가?(3:10b~3:24)

2) 교리적 기준 : 예수님을 누구로 믿는가?(4:1~6)

질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답함으로써 성도의 신앙과 윤리적 의무의 상호 관계성과 불가 분리성을 밝혀 준다. 한편 1:5~2:27절까지가 주로 원리적 측면에서 성도 공동체의 교제의 근거를 강조했다면, 여기 이 부분은 주로 실천적 측면에서 교제의 구체적 실천 양상을 다루고 있다.

(2:28~3:3)

하나님의 자녀가 의롭게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 - 그것은 주님이 장차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재림은 도적같이 임할 것이며(마 24:36~44; 살전 5:1, 2), 영광 중에 오실 것이며(마 24:30), 선악간에 심판하러 오시며(마 25:31~46),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러 오신다(히 9:28).

 

# 해설

성도의 삶 (3~17절) 

하나님은 빛(1:5)이라는 앞의 대전제와 관련, 이제 그러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성도들이 당연히 좇아야 할 삶의 규범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것은 곧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며(3~11절), 소극적으로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12~17절). 사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신실하게 준행하는 자가 세상 것에 탐닉할리 만무하다.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18~27절)

일견 화제가 바뀐 듯 보이나 사실은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주제와의 관련하에 하나님과 원수 되는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는 부분이다. 즉 저자는 예수의 신성과 인성 그 어느 것 하나라도 부인하는 모든 이단을 적그리스도로 간주하고 있는데(18~22절) 그들에게서 하나님과 사귐의 증표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인간에게 확연히 계시되기 때문인데(23절), 따라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하나님과의 교제 여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된다(요 14:21). 한편 저자는 이와 관련해 성도가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기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는데, 그 최상책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도들의 중언에 굳게 서는 것이다(24~27절).

의(義)의 삶 (2:28~3:9절)

본서의 내용은 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로서 주의 재림과 심판을 말하는 전반부(2:28~3:3)와 예수님의 대속 사역을 통한 성도의 소속,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동 노선을 따르는바, 성도는 그리스도께 속했으니 그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마땅함을 가르치는 후반부(3:4~9)로 나눌 수 있다.

 

# 핵심

1~17절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선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하고,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대로 행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적그리스도(Antichrist, 2:18)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단의 모든 세력을 의미한다. 즉 그분의 인성이나 신성, 성육신, 대속 죽음, 부활 승천 등을 부인하는 이단과 자칭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는 자, 거짓 선지자, 혹은 거짓 교사가 이에 해당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는 강력한 권세를 지닌 특별한 존재인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성도를 핍박하며 이적을 행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계 13:11~18). 이런 적그리스도의 예표는 다니엘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작은 뿔"(단 7:8)과 "북방 왕"(단 11장)이 그러하다.

 

출처 : 바이블25

# study
(1~4절)
본서 기록의 목적 - 전체의 서론 부분으로 인사말과 본서의 저작 목적이 언급되어 있다.
[1절]
태초는 창조가 시작되는 때(창 1:1)가 아니라 영원전(요 1:1)을 의미한다. 생명의 말씀은 곧 말씀의 주체요 내용이신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서 요한복음에서는 '인격적 말씀'(헬, 호 로고스)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본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포되고 있는 '생명' (헬, 테스조에스)에 강조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본서는 생명으로 시작하여(1:1), 생명으로 끝난다(5:13, 20). 온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다름아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사망에 대한 승리와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다(딤후 1:10). 한편 생명의 말씀의 5대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창조보다 앞서 영원 전부터 존재하며
2) 역사적으로는 예수로 성육신하시고
3) 목격자들에 의하여 권위 있게 증거, 전달되며
4) 직접적 결과는 회개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이고
5) 궁극적 결과는 성도의 영생의 기쁨이다.
우리가 여기서 '우리'는 거짓 선생에 대칭되는 의미로서 참 선생인 사도 집단을 가리킨다(3절). 들은 바요...본 바요, 주목하고...만진 바라. 사도 요한은 자신을 위시해서 주의 사도들 모두를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목격자로 지적함으로써 복음의 효용과 역사성 및 진실성을 입증한다. 특히 귀, 눈 그리고 손은 인체의 오관(五官)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세 감각 기관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는 틀림없이 역사 속에서 객관적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2절]
나타내신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말한다(요 1:14). 영원한 생명. 공관 복음서에서는 '천국'으로, 바울 서신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엡 2:7) 등으로 표현되는 말이다. 이것은 생명의 단순한 계속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신적(神的)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완전하여 영원하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보았고 영생은 비록 미래적인 것이긴 하나 그에 대한 보장은 현세에서 주어지는 것이다(요 3:16~21)<막 1:15, 하나님 나라의 개념>. 그러므로 현세에 구원함을 얻어 영생을 소유한 자는 내세에도 그것을 소유하고, 현세에 영생을 얻지 못한 자는 내세에서도 구원으로부터 제외된다(요 3:36; 요 11:25, 26). 나타내신바 된 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따라 이 땅 위에 오신 예수는 신적 본성(神的本性)을 지닌 분이며, 인간의 형상을 따라 성육신하셨다. 이처럼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정감과 신으로서의 구원의 은총을 동시에 부여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다(요 6:51~53).
[3~4절]
본 서신을 기록하는 목적을 두 가지로 말한다.
1)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다 : '사귐'으로 번역된 헬, '코이노니아'는 동반자의 의식(partnership)을 갖고 공동 생활에 함께 참여하여 교제를 나눈다는 뜻이다. 이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공동 고백에 근거하는 것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가능케 되는 것이다.
2)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다 : 이 기쁨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참된 교제에서 오는 것이다. 성도들 안에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게 되면 복음 사역자들도 이로 말미암아 기뻐하게 될 것이며 이 모든 것은 결국 사랑이신 하나님의 기쁨으로 귀착된다(요 17:13).
이처럼 참된 '복음'(헬, 앙겔리아)은 참된 '사귐'(헬, 코이노니아)을 낳고, 참된 '사귐'은 '기쁨'(헬, 카라)의 충만을 가져온다.
(1:5~2:2절)
신앙 기준의 첫 번째 적용 - 앞으로 요한은 두 가지 신앙 기준을 점차 확대, 반복 적용시켜 나가면서 이단을 반박하고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1) 도덕적 기준 : 빛 가운데 행하는가? (1:5~7)
2) 교리적 기준 : 예수를 세상의 구주로 믿는가? (1:8~2:2)
이 두 질문은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으로 그리스도인에게 당신의 삶이 진정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삶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4:16, 이단의 정체>.
[5~6절]
하나님은 빛이시라. 인간 행동은 그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추구하는 자이니 하나님의 빛 되신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믿는다 하고 또 스스로도 믿는다고 착각하나 빛에 속하지 않고 어둠에 속한 행동을 한다면 그는 결국 말씀을 알기는 알되 영원한 말씀이 아니라 일시적 세상의 어둠을 더 추구하는 자이다.
[7절]
빛 가운데 행한 결과가 언급되어 있다. 성도간에 사귐이 있다. 계속적으로 성화(sanctification) 된다. 예수의 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 범죄한 인류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가리키며, 여기서는 특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에 대한 반박의 논거이다.
[8절]
죄 없다 하면. 영지주의자들의 또 다른 잘못된 주장이다. 그들은 원죄와 자기 자신의 범죄로 말미암은 인간의 타락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요성과 공로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몬 서론, 그리스도의 직임과 속죄 사역>.

[9절]

미쁘시고 의로우사. 하나님의 신실성과 공의에 대한 언급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식언치 않으시며 약속을 지키심에 있어서 신실하실 뿐만 아니라(고전 1:9; 히 10:23) 공의로우신 분으로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의 공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으며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된다<막 10:45, 성육신의 이중 목적>.

[10절]

인간이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만(自慢)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부인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무신론과 깊은 관계가 있다.

 

# 해설

서론(1~4절)

본서 전체를 이끄는 서론으로서 본서의 저작 목적과 주제를 밝혀 주는 부분이다. 즉 본서의 대주제는 성도들과 하나님 간의 교제인데(3절) 이를 위한 전제로 그 교제의 두 주체 중 한편의 실체이시며 동시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간자 역할을 하시는 예수가 어떠한 분이신지를 밝히려는 것이 곧 본서의 저작 목적이다. 이에 사도 요한은 서론에서부터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 그 자체로 규정하고 그 생명이 실제 이 땅에서 자신과 과거에 교제를 나누었고 이제 미래에는 만인과 교제를 나누실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빛이신 하나님 (1:5~2:2절)
두 주체가 교제를 나누려면 상대방에 대해서 서로 알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따라서 사도 요한은 본론에서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규명을 시도한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빛이시며 어두움이 전혀 없으신 분'(5절)이라고 단정한다. 이는 당시 신(神) 안에 빛과 어둠이 병존한다고 주장하던 이단(영지주의)을 겨냥한 가르침인 듯한데,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과 사귄다 하면서도 계속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들의 궤변을 격파해 준다(5~7절). 그러나 저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완전한 의를 행할 수 있는 자란 없음을 동시에 밝히며(롬 3:10), 수신자들에게 죄의 고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1:8~2:2).

 

# 핵심

1~4절

문안 인사를 생략한 채, 본서를 기록한 목적이 그리스도에 대해 바르게 증거하여 성도들로 그분 안에서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게 하는데 있음을 밝히는 내용이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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