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합시다

[스가랴 9장 11절~12절]
11절 -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12절 -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마태복음 26장 28절]
28절 -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경에는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 전체가 우리 인간에게 참 생명을 주시려 피흘려 돌아가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의 피란 우리 성도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는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바르게 이해하며 굳게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기본적으로 되새겨야 할 진리들을 몇 가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그리스도의 피가 있게 된 배경
아담 이후 모든 인생은 조상이 지은 죄와 자신이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하여 물없는 구덩이에 갇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우물 위에 큰 바윗돌을 덮어 놓듯이 모든 사람은 나면서부터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수 없는 죄의 경향성과 부패성에 갇혀서 참된 자유를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이 피할 수도 없고 위로받을 수도 없고 헤어날 수 없는 죄와 사망의 깊은 구렁텅이에 빠져서 죄의 종이 되고 죽음의 종이 되고 사단의 종이 되었던 것이 바로 우리네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그 암담한 구렁텅이에서 우리 인생을 건져내고 살려낼 것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피가 갖는 의미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큰 은혜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피에 의한 구원과 자유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Covenant)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확실한 약속인데 즉 누구든지 믿음의 손으로 그 약속을 붙잡기만 하면 구원하시겠다는 핸들(손잡이)과 같은 것입니다. 죄가 많거나 적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누구든지 이 언약의 핸들을 붙잡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손잡이가 무엇인가 하면 피입니다.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어떠한 죄인이라도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롬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레위기 17:11절에 보면 "피는 곧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인데, 이 죄를 사함받고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기워 구원 받으려면 생명을 대표하는 피가 없이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9: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죄와 사단의 속박에서 벗어나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생을 얻어 자유롭게 되는 길은 언약의 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도덕과 철학으로는 이 죄와 사망의 문제를 결단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이 입혀 주셨던 모든 영광의 옷이 다 벗겨져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수치가 드러났을 때 그들은 그것을 없이 해 보려는 자구책으로 숲의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 치마는 몇시간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친히 동산의 양을 잡아 그것을 희생해서 양의 가죽으로 치마를 해 입히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아담과 하와 스스로 만들었던 무화과 나뭇잎 옷은 인간의 철학이나 선행이나 도덕으로는 죄로 인한 수치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이 내어 주신 양의 가죽 치마는 양이 죽임 당하고 피를 흘림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그것으로 죄로 인한 수치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써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의롭다는 칭호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았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아벨의 제사만 열납하셨을까요? 가인의 제사에 정성이 부족한 탓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가인은 식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아벨은 피가 없이는 죄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믿음으로 양을 잡아 피를 뿌려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풀려날 때, 온 애굽 땅의 첫 번째 태어난 아들과 짐승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너희는 어린양을 취할지니 그 양을 잡고 그 피로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3). 오직 양의 피를 바른 그 집, 그 사람만이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죄에서 해방되고 죽음에서 해방되려면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의 피를 믿어야 되는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불신앙적인 말을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불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죽게 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여 불뱀에 물린 자를 살려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은 놋으로 뱀의 형상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아 그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누구든지 고침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어서 그 뱀을 쳐다본 사람은 다 나았습니다. 그러나 고집이 센 사람, 자기 지혜만 믿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요 3: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놋뱀을 든 것처럼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셔서 언약의 피를 흘려 주심으로써 우리가 죄사함 받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공로를 믿으면 죄에서 사함 받고 또 사망에서 해방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를 침공하려고 정탐꾼을 먼저 들여 보냈을 때입니다. 정탐꾼들이 그만 여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쫓기다가 어느 주막집 같은 곳에 숨었는데, 그곳은 기생 라합의 집이었습니다. 그때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습니다. 그러자 정탐꾼이 그 기생 라합에게 약속하기를 '머지 않아 우리 백성들이 이 여리고 성을 쳐들어 올 것인데, 그때 너희는 집 창문에다 빨간 줄을 드리워라 그러면 너희들이 살 것이다 만약 빨간 줄을 드리웠는데 너희들을 구원하지 못하면 내가 내 생명으로 너희들의 생명을 대신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돌아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리고를 침공하던 날 이 기생 라합은 창문에 붉은 줄을 드리우고 자기 부모 형제 친척들을 다 집안에 불러 모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줄이 드리운 그 집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붉은 줄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이것의 영적 의미는 언약의 피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창문에다 붉은 줄로 드리우면 살리라 하는 것을 그대로 믿고 순종했으므로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언약의 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구원이 된다는 것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면 구원받습니다.

3. 그리스도의 대한 믿음의 결과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 그것을 본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영생의 말씀을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보리떡 덩이 하나라도 얻으려고 예수님을 좇아다니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무리들이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요 6:53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먹는 것, 곧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몸을 깨뜨려 내 죄를 위해 언약의 피를 흘려 주신 것을 믿는 것이 곧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엡 2:8절에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참으로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참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엡 1: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히 9:14절에도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했습니다.
히 2:14,15절에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골 2:15절에 보면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죄의 종노릇하고 마귀의 종노릇 하다가 멸망받을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피흘려 주심으로 이제는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언약의 피를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고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서 자유를 얻으며 사단의 속박에서 자유를 얻고 영생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Ⅰ. 여호와의 날 14:1-7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가 이상하게도 변화무쌍하고 혼합적인 것으로 나타나있다.

(1) 때때로 조수가 그들에게 거세게 밀려오곤 하지만 곧 방향이 바뀌는 것처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도 변화무쌍한 것처럼 보인다.

1)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나타나신다. '여호와의 날이 이를'때(1절) 예루살렘은 정련시키는 불을 통과하여야할 것이다. 로마인들에 의해 '성읍이 함락될'것이며, '가옥이 약탈'되고 '부녀가 욕을 볼' 것이다.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가' 팔리거나 노예가 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그의 길을 바꾸사 이제는 예루살렘을 위하여 나타나신다. 이는 비록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 할지라도 거기서 끝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은 자들은 면하게될 것이다.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사로잡혀간 자들도 다시 돌아오게될 것이다. 유대인들중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성읍, 즉 지상 교회로부터 끊쳐짐을 면하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열국을 모아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그때에 그는 '나가사' 심판으로 '그 열국을 치실' 것이다. 로마 제국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후로는 그전처럼 그렇게 번성하지 못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그 나라를 치셨기 때문이다. 비록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모두가 들어올수 있는 교회를 이 세상에서 가지실 것이다(4,5절).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이 그곳을 황폐케 할때조차도 예루살렘을 세밀히 살피실 것이다. 그날에 그의 말이...감람산에 서실 것이요(4절;참조. 막 13:2). 정련하는 자는, 금을 풀무가운데 넣을때 옆에 서서 그것이 손상되지않도록 지켜보는 법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금인 예루살렘이 정련될때 하나님은 '감람산에 서서' 지켜보실 것이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종종 이 산에 오르심으로써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승천하셨다(행 1:12). 그곳은 우리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때에 마지막 발을 디디신 곳이었다. 이 산은 예루살렘의 멸망에 의해 한가운데가 갈라져서 '중간에 막힌 담'이 헐어짐으로써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하나로 될 것이다(엡 2:14). 큰 산, 곧 의식법이 유대인들의 개심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앞에서 평지가 되었다. 새로운 생명의 길이 새예루살렘을 향해 열려질 것이다. 갈라진 산중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향하여 그 사이에 '큰 골짜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과 이방 세상사이에 있을 교제를 위한 큰 길로, 그 길을 통해 이방인들은 자유롭게 복음의 예루살렘으로 들어올 것이며 또한 여호와의 말씀도 예루살렘으로부터 나와 이방 세계로 자유롭게 들어갈 것이다. '산 골짜기'는 곧 복음 교회로서, 구원받은 유대인들이 날마다 그곳에 더해갔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산을' 골짜기로 만들어 '길로 삼으실' 것이다(사 49:11). 이 골짜기는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있는 자들에게도 이르게될 것이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있는 백성인 유대인들과 더불어 가까이 나아오게될 것이며, 둘은 서로 연합하게 되며 또 그 연합체는 한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될 것이다(엡 2:18).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이루시기위해 영광중에 나타나실 것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가 주와 함께하리라(5절). 이것은 예루살렘을 멸하시기 위함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의 대적들을 멸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세상에 그의 왕국을 세우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라고도 할수 있는데 그것은 '인자의 임함'(마 24:37)이라고 불리우고 있다. 혹은 끝날에 있을 그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일수도 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떤이들은 5절 말씀을 다음과 같은 기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오시옵소서. 모든 거룩한 자들과 함께 오시옵소서."

(2) 하나님의 섭리는 이상하게도 뒤섞여서 나타난다.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어떤이들은 이것이 그 당시부터 메시야의 오심까지 전기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유대 교회는 완전한 평화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적으로 환난에 처하지도 아니하는, 구름이 낀날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섭리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통상적인 방법을 보다 일반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수 있다.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즉 의의 태양이 떠오른 곳에는 결코 어두운 밤이 될수 없으나 하늘이 흐림으로 청명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날이 있으리니. 이것은 그와 같이 뒤섞인 사건들속에서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의미한다. 즉 모든일 가운데는 한가지 같은 목적이 있는 것이다. 어두워 갈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즉 광명한 빛이 있을 것이며 더이상 어두움이 있지않을 것이다. 우리는 저세상에 그러한 상태가 있음을 확신하며 이세상에서도 그러하기를 소망한다. '어두워 갈때'란 곧 모든 일들의 최악의 상태가 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교회의 형편도 가장 개탄할만한 상태로 떨어진때를 말한다.

 

Ⅱ. 예루살렘에 대한 축복 14:8-15

 

(1) 예루살렘, 즉 복음적인 예루살렘과 온땅에 축복이 있을 것이 약속되었다.

1) 예루살렘은 세상에 생수를 낼 것이다. 이것은 그곳에서 사도들에게 성령이 부어짐으로써 여호와의 말씀이 열국에 전파되어졌을때 이루어졌다(8절).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사 2:3)이라는 사실은 예루살렘의 영광이었다. 생수가...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이는 마치 강물들이 바다나 기타 다른 곳으로, 혹은 동쪽으로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다. 복음은 세계도처로 뻗어나갈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각 곳으로 매일같이 전파되어갈 것이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또한 하나님의 권능이 이 생수와 함께하시므로 그것은 여름의 한재나 겨울의 찬서리에 의해서도 결코 마르지않을 것이다.

2) 사람들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왕국은 전우주적으로 통일된 왕국이 될 것이다(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모든 거짓 신들이 버려질 것이며 모든 우상숭배도 폐지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공동체의 중심이 되시듯 성경도 그 공동체의 규례가 될 것이다.

3) 유대 땅과 어머니되는 성 예루살렘은 다시 회복될 것이며 하늘의 특별한 보호를 받게될 것이다(10,11절). 어떤이들은 이것을 유대인들에 대해서만 특별한 은총을 보여주는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복음 교회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타당할것이다. 교회는 풍성한 소산을 내는 비옥한 땅처럼 될 것이다. 천연적으로 구릉 지대인 전유대 땅이 평지(한글개역에는 '아라바같이 될 것이다'라고 되어있다-역주)처럼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부드럽고 평탄한 골짜기가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능력있게 전파되면 오직 여호와만이 높임을 받을수 있게끔 하기위하여 땅이 평평하게될 것이다. 거룩한 땅이 평지가 되듯이 거룩한 성읍에는 백성들이 가득차게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비천한 상태에서 높이 들리울 것이다. 즉 멸망된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전성읍에 거민들이 있게될 것이다. 여기에 그 성읍의 경계가 언급되어 있다. 그것은 북동편의 '베냐민 문'에서부터 북서편의 '성모퉁 문'까지 그리고 남편에 있는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북편에 있는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이다. 그곳에 거하는 자는 안연히 살 것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않을 것이다.

(2) 교회의 적들, 즉 예루살렘을 대적하여 싸운 자들에게 심판이 경고되었다. 하나님의 성읍과 그의 백성을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은 자신들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것임을 알게될 것이다(12절). 그들은 고통스럽고 고달픈 질병으로 황폐하게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서로 충돌할 것이다(13절).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교회를 치려고 연합한 자들은 곧 갈라질 것이며 서로 대적하게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그들의 요란은 자체내에서 요란케됨으로 보수될 것이다. 어떤이들은 이것이 로마인들이 유대인들을 멸망시킬때 유대인들가운데 파당과 분쟁이 생겼던 것으로 성취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들의 진중에 있던 물품이나 국가의 재산을 약탈해옴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은 심히 부하게될 것이다(14절). 어떤 주석가는 이 구절을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먹으리니'라고 읽기도 한다. 백성들은 탈취물을 나누기위해서 사방에서 나아올 것이다. 죄인의 재물은 종종 의인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애굽인들의 노략물로 부하게되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육축도 주인을 멸망시킨 그 재앙을 같이 당할 것이다(15절).

 

Ⅲ. 교회에 경건함이 있을 것을 약속하심 14:16-21

 

여기에 다음 세가지 사실이 예언되어 있다.

(1)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자기들이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것이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주신 까닭임을 깨닫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경배를 드릴 것이며 경의를 표할 것이다(6절).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중에 대부분은 그의 발등상이 되었으나 나머지 적들은 그의 친구가 될 것이다. 그들은 경배하기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곳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의 모형이라 할수 있는 성전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경배가 여기서 '초막절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초막절은 세상을 경멸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두가지 큰은총이 특별한 방식으로 예시되어 있다(느 8:17). 우리는 온갖 제물을 가지고 우리의 성전되신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이는 오직 그안에서만 우리의 영적인 희생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벧전 2:5). 그들은 '해마다' 올라갈 것이다. 기독교인의 매일매일의 삶이 곧 '초막절'의 날이며 특별한 의미로는 여호와의 날이다.

(2) 복음적인 경배의 의무를 무시하는 자들은 그것으로인해 그 대가를 치르게될 것이다.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17절). 어떤이들은 이것을 비유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즉 하늘의 교훈의 비가 내리지않을 것이며 따라서 이 교훈과 함께오는 은혜의 비가 내리지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방편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축복을 내리지않는 것과 목자의 장막에서 떠난 자들에게 푸른 초장을 거절하는 것은 공의로운 일이다. 만일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이 메말라 열매를 맺지못한다면 땅도 당연히 우리에게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애굽 땅에 있는 태만한 자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그들에게 그 경고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비가 내리지않는다 할지라도 나일강이 있어서 땅을 비옥하게 하기 때문이다(18,19장). 그러나 결과적으로 마찬가지의 재앙이 있게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강의 창일함을 막으실수 있는 분이시다. 이는 구름이 끼지못하도록 하심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비없이 살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없이 살수 있다고 할수는 없는 것이다. 태만은 죄다. 정해진때에, 즉 아직 기회가 있을때에 '숭배하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은 죄와 가까와지게 된다.

(3) 성결이라는 단어의 성격이 전처럼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은 단지 대제사장의 이마에 쓰여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와 같이 특정인의 전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린바된 '산 성전'일뿐만 아니라 그를 섬기는 일에 종사하는 영적인 제사장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 전보다 더풍성하게 성결하고 거룩케하시는 성령의 부으심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자들에게까지 성결이 있게될 것이다. 말고삐나 심지어 말의 장식물조차도 하나님께 드리운바 될 것이다.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행자들은 그들의 말고삐에 그 글을 기록하여 그것으로 말을 끌고가며 또 자신들도 이 원칙에 따라 인도할 것이다. 집안의 기구들도 또한 하나님께 드리운바 될것이며 예배하는 일에 쓰이게될 것이다. 그들이 보통 사용하는 잔들은 희생 제물의 피를 받거나 혹은 전제를 드릴때에 포도주와 기름을 붓는데 사용한 '제단앞 주발'이 될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이 식탁을 위해 사용한 그릇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식사는 희생 제물처럼 보일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식탁에 배설된 것과 잔에 채워진 것을 먹고 마실 것이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그들이 고기를 삶는 솥들과 그들이 마시는 잔들이 그리될 것이라. 이 그릇들로 그들이 먹고 마신 것은 그들의 몸을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양육시킬 것이다. 또한 이것들로 그들은 후하게,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할 것을 내어줄 것이라." 그럴때 비로소 '여호와께 성결'이 된다. 그와 같이 참된 성결이 있을때 사람들은 의식적인 성결에 대해 그렇게 관심을 쏟지않게될 것이다. 즉 '제사드리는 자가 와서' 이 보통 그릇들을 취하여 그것으로 희생 제물들을 삶으므로 그것들과 '제단앞 주발'과의 구별을 없앨 것이다. 복음 시대의 진정한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이다(요 4:21). 이곳이나 저곳이나 모두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곳이 될 것이며 이 그릇이나 저 그릇이나 모두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한 그릇이 될 것이다. 그들의 성물가운데에는 그것들을 더럽힐만한 어떤 부정한 것도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어떤이들은 이것을 "다시는 장사하는 자들이 있지않을 것이다"라고 읽기도 한다. 이는 가나안 사람이 때때로 장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두번에 걸쳐 성전으로부터 사고파는 자들을 내쫓으셨을때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세상끝날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부정한 것들을 그의 나라에서 쫓아내실 것이다. 이 일은 결코 그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Ⅰ. 복음 시대와 관련된 약속들 13:1-6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1) 그는 십자가의 피로 죄악을 없애신다(1절). "그 날에 즉 복음 시대에 샘이 열리리라." 즉 참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들을 죄의 오염에서 깨끗하게 하기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그 날에' 곧 자기들의 죄를 애통케 하기위해 은혜의 성령이 부어질때에, 그들의 양심은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시는 예수의 피'로 깨끗케될 것이며 평온케될 것이다(요일 1:7). 샘이 열렸다함은 곧, 바로앞에서 언급된바 있는(슥 12:10)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찔린 것을 뜻한다. 이는 거기서 깨끗게하는 물과 피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죄는 부정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음과 양심을 더럽히며 하나님께 미움을 받게하고 스스로를 불안케 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부적절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자비와 그리스도의 공로는 너무 크셔서 어떠한 죄와 죄인이라도 용서하실수가 있다(고전 6:11). 율법 시대에는 씻을수 있는 놋대야와 놋바다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지 담는 그릇일 뿐이었으나 우리에게는 항상 넘쳐흐르는 샘이 있다. 그것은 '열린 샘'이다. '다윗의 족속'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거민'에 대해서도, 즉 크고 부한 자들에게뿐만 아니라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에게도 열려있는 것이다.

(2) 그는 은혜의 능력으로 죄의 지배를 없애신다. 씻음받은 자들은 의롭게 되었을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되었다. 그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땅에서 끊어서(2절). 이것은 포로 시대이후, 유대인들이 우상과 우상숭배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가지게 됨으로 성취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게됨으로 성취되었다. 즉 그렇게 됨으로써 그들은 의식법상의 우상을 만드는데서부터 벗어날수 있었다. 거짓 예언 또한 끝나게 될 것이다. 마귀는 '더러운 사위'이다. 마귀에게도 선지자들이 있다.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가장 가까운 친족에 의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다(3절). 하나님과 경건에 대한 거룩한 열심은 우리로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며 유혹을 두려워하게 한다. 대개 유혹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온다. 또한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게될 것이다(4절). 선지자들이 예언할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써 그들의 양심을 일깨워주심으로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하셨거나 아니면 나타난 결과로인해 그들의 예언이 거짓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여지껏 참된 선지자들이 엘리야를 모방하여 '털옷'을 입었던 것처럼 '털옷'을 입어왔으나 이제 더이상 입지않을 것이다." 사람들로하여금 외모에 맞게끔 행하도록 하고 실제의 자기보다 더 과장되게 외모를 꾸미지 않게하라. 그 거짓 선지자들은 진정으로 회개하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선지자가 아니요 나는 농부라 내가 어려서부터 사람의 종이 되었노라(5절). 즉 "나는 선지자처럼 가장했던 자로 결코 예언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노라"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다시 우리의 임무에 충실해짐으로써 우리의 회개가 참인 것을 증명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몹시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렇게 해야만 한다. "너는 이 지식을 깨닫지 않았는가? 너에게 이 지혜를 가져다준 것은 그 징계와 책망이 아니었는가?"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하다." 이는 나의 친구의 집에서 받은 상처라(6절). "그는 나를 잡아서 제정신이 들게 하였노라." 채찍질을 당함으로써 그는 지각과 정직을 갖게되었고 따라서 그를 돌이키기위해 그에게 상처를 준 자들이 참된 친구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것이 십자가에서 양손에 못박히는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부활하신 후에도 그는 이 상처의 흔적을 가지고 계셨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그들에 의해 어떻게 상처를 받았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거짓 선지자로 취급받으셨다. 이는 대제사장이 그를 사기꾼으로 불렀던 사실에서 알수 있다. 게다가 그는 자기와 친구가 되어야만 하는 유대인의 집에서 상처를 받으셨다.

 

Ⅱ. 신약 시대에 대한 예언 13:7-9

 

(1) 본문에는 찔리심으로인하여 열린 샘이 되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에언이 나타나있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7절).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이 자진해서 자신의 몸을 드려 죄를 대속했을때, 그의 공의의 칼에게 아들을 대적하여 깨어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으므로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였다'(사 53:4,10).

1) 그는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그는 하나님으로서 '내 짝된 자'이라." 즉 그는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이 강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와 아버지는 하나이시다. "그는 중보자로서 '내 목자,' 즉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버리는 목자라."

2) 하나님은 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칼아 깨어서...치라. 만일 그가 희생 제물이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피흘림, 그것도 생명있는 것의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막대기에서 그를 바로잡으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칼에게 그를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조차 아끼지 않으셨다.

(2) 그로인하여 제자들이 흩어질 것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 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우리 주 예수께서는 친히 그가 배반당하던 날밤에 모든 제자들이 그를 버렸을때 이것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셨다(마 26:31; 막 14:27). 제자들은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두었도다'(요 16:32). 어떤이들은 이것이 유대 민족의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 자신이 그를 쳤고 따라서 그들은 열방중에 흩어졌던 것이다. 작은 자들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이 말은 경고(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셨듯이 그의 제자들도 고난당하리라는)로 받아들일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흩어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다시 모아 갈릴리에서 만나게 하시리라는 약속으로 받아들일수도 있다.

(3) 믿음을 지니지 못한 유대인들이 거절당하고 멸망당할 것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있다(8절). 이 예언은 교회의 타락되고 위선된 부분이 멸망하는 것으로 성취될 것이다.

(4) 성도들가운데 선택받아 남은 자들과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그리스도 교회에 일어날 개혁에 대한 예언이 나타나있다(9절). 삼분지 일은...남으리니(8절). 예루살렘과 유대가 멸망하였을때, 그곳에 있던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신 경고대로 안전을 위하여 요단 저편의 "펠라(Pella)"라고 하는 성읍에 피신하였었다. 내가 그 삼분지 일을 불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며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이것은 '불시험,' 즉 초대 교회의 박해로 성취되었다(벧전 4:12). 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곧 승리이다. 그들이 내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의 편지를 쓰며 그로부터 평강의 답장을 받는다. 또한 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곧 승리이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즉 "나는 그들을 선택하고 사랑할뿐만 아니라 인정할 것이며 그들은 나를 충족히 여길 것이라."


Ⅰ.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12:1-8

 

1. 본장의 표제(1)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들에 대한 본장의 표제가 1절에 나타나있다. 그것은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로 곧 거룩한 예언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다. 즉 그들의 위로와 유익을 위한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칭호(1)

그는 세상의 창조주이실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저항할수 없는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하늘을 펴시며,' 차일처럼 그것을 계속 펴있게 하시고 또 세상끝날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그는 '땅의 터를 세우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비록 그 터가 바다위에 있다할지라도(시 24:1,2), 더나아가 그것이 공간에 달려있다할지라도(욥 26:7)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 자체의 축에 고정시키신다. 즉 그는 '사람위에 심령을 지으신 자'이시다. 즉 그는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자이시다(렘 38:16). 그는 첫사람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을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계신다.

3. 교회를 보호하시리라는 약속(2-8)

교회의 대적들이 교회의 성결과 화평에 대해 어떤 공격을 가해오건 결국 그들은 당황해버리고 말 것이다. 예루살렘은 안전한 가운데 있게될 것이며 그것을 치려던 자들은 위험가운데 떨어지게될 것이다. 이것은 여기서 세가지 비유로 예시되고 있다.

(1) '예루살렘'은 그것을 포위한 모든 자들에게 '혼취케 하는 잔'이 될 것이다(2절). 알렉산더 대왕은 대제사장 야두스를 만났을때 크게 놀라서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을 단념하였다. 산헤립이 '유다'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때 그는 그곳이 그의 모든 용사들을 잠에 빠뜨리는, 혼취케하는 포도주 잔임을 알았다(시 76:5,6).

(2) '예루살렘'은 그것을 제거하려고 하거나 그것을 옮기려고 하는 모든 자들에게 '무거운 돌'이 될 것이다(3절). 세상에서 저의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하는 자들은 예루살렘을, 더나아가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들의 계획에 크게 방해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방해가 되지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제거할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시한채 세상에 교회를 두실 것이다. 그것은 반석위에 세워진 것으로 '시온산'과 같다(시 125:1). 이 '돌'은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것으로, 그것이 신상을 쳤듯이(단 2:45) '무릇 그것을 드는 자들을' 부술 것이다. 우리 구주께서 자신을 거치는 돌로서 말씀하실때, 즉 자신을 기초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위에 떨어져 그들을 가루로 흩으리라고 말씀하실때(마 21:44) 이 말씀에 대해 언급하시는 듯이 보인다.

(3) '유다의 두목들'은 그들의 대적들가운데서 '나무가운데 화로같게' 되며 '곡식단 사이의 횃불같게' 될 것이다(6절). 그들과 다투는 자들은 그 다툼이, 태우는 불에 찔레와 형극으로 대적하는것 같음을 알게될 것이다(사 27:4). 그 불은 그들을 남김없이 완전히 태울 것이다. 그 대적들은 자신들이 이 불에 대해 물과 같으리라고 생각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이 불에 대해 나무같게, 아니(더 잘타는) 곡식단같게 하실 것이다. 초대 교회의 박해자들은 이것이 자기들가운데서 성취된 것을 알았으며, 배교자 줄리앙이 마침내 고백한 말인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나를 이기었도다"가 또한 이 사실을 증거한다. "만일 네가 생활에 진력이 난다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라." 이것은 한때 유행했던 당시의 속담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사들을 얼빠지게 하실 것이며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용기를 꺾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4절). 교회의 보병이 대적들의 기병에게 아주 힘겨운 상대가 될것이다. 예루살렘에 다시 사람들이 살 것이며 번성케되리라는 것이 약속되었다(6절). 그들은 같은 기초, 같은 지대위에 새예루살렘을 가지게될 것이다. 그들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후에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복음 교회는 '그 본곳'에 거한 예루살렘이라 할수 있다. 따라서 온세상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모든 곳을 '그 본곳'으로 불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예루살렘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보호아래서 자신들을 지킬수 있게되리라고 약속되었다(8절). 하나님께서 그 성읍 주위에 "불의 성곽"이 되실뿐만 아니라 "방패"와도 같은 그의 은총으로 각사람을 에워싸실 것이다. 그는 그들이 스스로 돕도록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심으로써 그와 같이 하신다. 그 날에 예루살렘의 가장 약한 거민들이 '다윗같이' 될 것이다. 즉 강하고 뛰어나게 될것이며, 다윗이 친히 그곳을 세웠을때처럼 그곳을 강하게 지킬 것이다.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같을 것이라. 스룹바벨은 이제 다윗의 집에서 첫째되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지혜와 은총을 부여받게될 것이며 천사처럼 백성들을 앞서갈 것이다(출 23:20).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히 성취될 것이었다. 이 당시 다윗의 집은 작고 초라하게 보이며 그 영광은 무색케되었으나 그리스도안에서 다윗의 집은 전보다 더욱 밝게 빛나게 되었다. 성읍과 지방사이에 매우 선한 이해관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약속되었다. 지방의 행정관들, 즉 '유다의 두목들'은 성읍민들, 즉 '예루살렘 거민'들을 명예롭게 생각할 것이다. 뛰어난 사람이 다른 뛰어난 사람을 귀하게 여길줄 알게될때 그 나라는 잘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 뛰어난 영광을 두시고 계시므로 그를 형제들의 멸시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시다.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4절). 여호와가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7절). 장막에 거하는 자들은 많은 위험에 직면하기 쉬우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거민들앞에서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궁정의 신하들과 성읍민들은 지방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즉 하나님께서 돌아보시며, 먼저 구원하시는 자들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이 약속은 더나아가서는 복음 교회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 즉 그안에서는 지위의 고하가, 부하고 가난함이, 속박과 자유함이 그리고 할례와 무할례가 차별되지 않을 것이다.

 

Ⅱ. 기도와 회개의 영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심 12:9-14

 

여기서 '그날'이라 함은 곧 예루살렘이 보호되고 구원되는 날을 말한다. 즉 영화로운 날을 뜻하는 것으로 마카비가의 시대에 유대인들이 그들의 대적과 싸워 거둔 승리에 대해 언급하는 것일수 있겠으나 더나아가 그리스도께서 어두움의 권세에 대해 승리를 거두시고 큰구원을 이루신 '복음의 날'에 대해 언급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이루실 영광스러운 사역 : 예루살렘을 치러오는 열국을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9절). "열국이 예루살렘을 치러오나 그들 모두가 멸망케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서 사망의 권세를 가진자를 멸하고자 힘쓰셨으며 또한 멸하셨다. 그러므로 재림때에 그는 그들을 완전히 파멸시키실 것이며 이때 사망 그 자체도 그 승리가운데 삼키운바 될 것이다.

(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가운데서 이루실 은혜로운 사역 : 그가 그들의 대적들을 멸하고자 힘쓰실때 그는 그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큰긍휼을 베풀고자 하실때 그가 하시는 첫번 일은 그들로 간구케하는 것이다. 이 약속은 이사야 44:3절에 있듯이 모든 선지자에게 주어질 성령의 은혜에 관계된 것이다. '내가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내리리라'는 이사야 44:3절의 말씀은 예수께서 영광을 받으셨을때(요 7:39) 성취되었다. 이 축복은 '다윗의 집'에, 즉 뛰어난 사람들위에 부어졌다. 그들이 뛰어났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보통 사람들인 '예루살렘 거민'에게도 부어졌다. 교회는 예루살렘, 곧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와 교제를 나누는 모든 참된 신자들은 이 예루살렘의 거민들이다. 그리고 이 약속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의 신을 부어주실 것이다. 그 신은 첫째, 성결케하며 은혜롭게 하는 은총의 신이며, 둘째, 우리로 기도하도록 가르치고 돕는 간구의 신이다. 내가 은총의 심령을 부어주리니. 그 은사의 한 결과는 그들이 애통하리라는 것이다. 애통은 결국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며 축복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애통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로, 영혼안에서 은총이 역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봄으로 기인된 애통이다.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이같이 그리스도께서 찔리시리라는 것이 예언되었으며 그 구절은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찔리심으로 성취되었을때 인용되어졌다(요 19:37). 우리가 그를 찌른 자라고 말해지고 있다. 원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말해진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죄인된 우리 모두에 대해서 말해진 것이다. 참으로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죄때문에 찔린 자로, 그리고 자신들에 의해서 찔린 자로 본다. 그들은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죄를 인해서 애통할 것이다. 그 사랑하는 자녀, 곧 장자를 위하여 부모가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깊은 슬픔이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한 애통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회개자의 애통이다. 그것은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은 것이다.' 그곳은 선한 왕인 요시야가 죽음으로 큰애통이 있었던 곳이다(11절). 그들은 이렇게 외쳤었다.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함을 인함이니이다'(애 5:16).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 그는 우리의 죄때문에 죽으셨다. 그때문에 우리는 슬퍼해야만 한다. 총회에서 대표들이 그 땅을 위해 애통할뿐만 아니라(사사기2:5절에서처럼, 그때 그곳은 '보김,' 즉 "애통하는 자들의 곳"이라고 불리어졌다),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할 것이며'(12절)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애통할 것이다'(14절). 네 가문이 여기에 본으로 예시되어 있다.

1) 두 가문은 왕의 가문이다. '다윗의 족속'이라 함은 곧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말하며 '나단의 족속'이라 함은 다윗의 또다른 아들의 가문을 말함이다(눅 3:27-31).

2) 두 가문은 거룩한 가문이다. '레위의 족속'은 하나님의 지파였으며 특별히 지칭된 '시므이의 족속'은 그안에 속했던 가문으로 레위 지파의 한 혈통이었다(대상 6:17). 왕족들이 치리중에 범했던 죄를 슬퍼해야 하듯이 선지자들은 거룩한 일에 대해 범했던 죄를 슬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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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유대에 있게될 파멸에 관한 예언 11:1-3

 

먼 후일에 있을 일들에 대한 성경의 예언이 대개 그러하듯이 예루살렘과 유대 교회, 그리고 유대 민족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여기에 이해하기 어렵게 비유적인 표현으로 나타나있다. 그러나 때가 가까웠을때 우리 주 예수께서는 매우 분명하고 명백하게 그것을 에언하셨다.

(1) 그 멸망을 위해 있게될 준비 : 레바논아 네 문을 열고(1절). "네가 네 왕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지않았도다. 이제 너는 네 멸망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야하리라." 어떤이들은 '레바논'을,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지어진 성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것은 로마인들에 의해 불에 탔으며 그 문은 광포한 군사들에 의해 강제로 열려졌다. 다른이들은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혹은 더나아가 온 가나안 땅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레바논은 곧 그 땅으로 들어가는 북쪽의 입구였던 것이다. 모든 것이 침략자들에게 열려질 것이며 백향목, 즉 유력자들과 지위가 높은 자들은 삼키운바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층민들은 이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수 없게된다(2절).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당당하던 백향목이 넘어졌는데 어떻게 가냘픈 잣나무가 서있을수 있겠는가? 그리고 쉽사리 상하는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혹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보호하던 '무성한 포도원'이 엎드러졌도다). 어떤이들은 "레바논에 있던 것과 같은 방풍림이 무너졌도다"라고 읽기도 한다.

(2) 그 멸망으로 인해서 있게될 애통 : 곡하는 소리가 남이여(3절). 엎드러진 자들은 슬픔과 수치로인해서 곡하며 자신들도 엎드러질 것을 아는 자들은 두려움으로인해서 곡한다. 특별히 귀인들은 극도로 당황하여 놀라게 된다. 그들은 직책상 목자로서 자신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양떼를 보호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신들이 양떼들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는 '어린 사자'였다.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가 남이여 이는 요단의 자랑이 황무하였음이로다. 요단의 자랑은 둑 위에 있는 잡목 숲들로, 그안에서 사자들은 강물이 넘쳐날지라도 아랑곳없이 안식을 누렸다. 그 사자들이 그 수풀로부터 올라와서(참조. 렘 49:19) 부르짖었던 것이다.


Ⅱ. 유대가 메시야의 손에 붙여질 것에 대한 예언 11:4-14


이사야 선지자가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스가랴 선지자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고있다. 그리고 본문의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심을 보여주는 것이다(요 9:39). 즉 그가 오실 당시 통치자들의 세속적인 마음과 위선으로 부패된 유대 교회와 유대 민족을 심판하러 오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치유하고자 하셨으나 그들은 치유받고자 하지않았다.

(1) 유대 통치자들의 폭정밑에서 유대 교회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5절). 스가랴의 시대에 우리는 귀인들과 통치자들이 '형제에게서 취리하는 것'으로인해 정당하게 책망받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느 5:7,15). 그리스도의 시대에 이신론자들이었던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재판을 더럽혔다. 미신적인 것에 완고하였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폐함으로 그들의 도덕을 더럽혔다(마 15:6). 이와같이 그들은 양떼를 잡았으며 또한 팔았다. 게다가 그들은 이 일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그를 모욕하였다. 말하기를 내가 부요케 되었은즉 여호와께 찬송하리라 하고. 마치 자기들의 악행으로 부하게 된것이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불의한 행실의 후원자가 됨으로 되어진 것인양 그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기' 때문이었다(실제로 그들은 목자가 없는 것보다 못하였다). 교회의 목회자들이 무지한 자, 어리석은 자, 사악한 자, 연약한 자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교회에 있어서 불행한 일이다.

(2) 그들의 어리석음으로인해 하나님의 진노의 선고가 그들에게 내려졌다. 그리고 그들의 목자들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했듯이 그들 역시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내가 다시는 이땅 거민을 불쌍히여기지 아니하고(6절).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자들로 하여금 순순히 자기들의 양심을 압제하도록 하는 자들은 종종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하는 권익을 압제당하는 형벌을 받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즉 그들은 무기력하게 하나님의 권리를 포기했으므로 그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기게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이웃의 손에,' 즉 압제자들의 손에 부으실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보다 자신들이 더순복하기로 선택한 '임금의 손'에 붙여지게될 것이다.

(3) 이제 한가지 시도가 행해졌다. 즉 목자되신 그리스도를 그들가운데 보냄으로써 그들의 멸망을 막고자 한 것이다(마 21:37). 많은 선지자들이 그를 '이스라엘의 목자'로 말했었다(사 40:11; 겔 34:23). 그리스도 자신도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양의 목자'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요 10:1,2,11).

1) 그가 이 양떼들에 대해서 행하도록 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명 :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4절). 유대인  

 들은 하나님의 양떼였으나 '잡힐 양떼'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대적들이 온종일 그들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2) 그가 이 사명을 수락하심(7절) : 그리스도께서는 이 잃어버린 양떼를 돌보실 것이다. 즉 그는 그들가운데 돌아다니시며 가련한 양떼인 저희를 가르치시며 치유하실 것이다. 그를 끝까지 수행했던 그의 제자들은 가련한 양떼에 속한 자들이었다. 내가 이에 막대기 둘을 취하여. 즉 목자의 막대기를 말한다. 다른 목자들은 단지 하나의 지팡이만을 가지고 있으나 그리스도는 둘을 가지셨다. 이는 그가 인간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위해 행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시 23:4), 즉 바로잡아주는 막대기와 도와주는 지팡이에 대해서 말하였다. 스가랴는 한막대기를 '은총'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성전을 나타낸다. 그리고 다른 한막대기를 '연락'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시민의 연합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복음안에서, 그리고 그가 행하신 모든 일가운데서 백성들의 유익과 거룩한 일 모두를 진전시키는데 전념하였다. 목자장께서 '양떼를 먹이셨으며'(7절) 양떼의 신임을 잃은 목자들을 쫓아내셨다(8절). 한달 동안에 내가 그 세목자를 끊었으니.

(4) 그리스도에 대해서 그들은 적개심을 가지게되었다. 그는 그의 초장의 양떼들에게로 오셨다. 그들과 그리스도 사이에 애정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아주 악하게 행했으며 따라서 그의 마음이 그들을 싫어하게 되었고 그들에 대해서 괴롭게 여기게 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게된 모든 불화는 인간편에서 시작된 것이다.

(5) 그들을 버린다는 선고가 임하였다. 내가 가로되 내가 너희를 먹이지 아니하고(9절). "이리의 먹이가 될 자들은 먹이가 되게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그들 자신의 유순한 본성을 잊고 '피차 살을 먹는대로 두라.' 즉 이 양들로 개들처럼 싸우게 하라." 그에 대한 징표가 주어졌다. 이에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취하여 잘랐으니(10절). 이 지팡이의 부러짐은 곧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과 맺은 언약을 폐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언약은 특권을 주리라는 언약으로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맺으신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에게서 취해져 다른 백성에게 주어지리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을때 그는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자르셨다(마 21:43). 비록 예루살렘과 유대 나라가 그후 사십년 이상을 지탱하였지만 우리는 그날로부터 은총이라 하는 지팡이가 부러졌다고 생각할수 있다(11절). 앞에서 '그들의 마음이 그를 미워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이에 대한 한 실례로, 그들이 그를 은삼십에 파는 것을 보게된다. 여기서 이것은 다소 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예언의 명료함이 그 성취를 막지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목자는 자기 삯으로인하여 그들에게 왔다.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 내게 주고(12절). 즉 "너희는 나를 싫어하니 내게 삯을 주고 나를 해임시키라." 그렇지 아니하거든 말라. 유다가 그리스도를 팔고자 했을때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이것을 비교하라.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즉 그들로하여금 거래를 하게 하든지 하지않게 하든지 하라"(요 13:27). 그들은 그의 값을 '은삼십'으로 매겼다. 그것은 일반 종의 값이었다(출 21:32). 그 은은 전혀 그의 진노에 대한 정당한 값이 되지못하므로 그것은 경멸과 함께 '토기장이에게 던져졌다.' "그로하여금 그것으로 진흙을 사게 하라."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는 '곧 그 은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졌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역사가운데서 이 일은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마 27:9,10). '은삼십'은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에게 팔린 바로 그 값이었다. 그리고 그 돈은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데 쓰여졌다. 연락의 지팡이를 부러뜨림으로써 그들의 배척은 극도에 다다르게 되었다(14절). 첫번 지팡이가 부러진 것은 하나님과 그들간의 언약이 파괴됨으로, 즉 그들의 은총이 파괴됨으로 그들의 교회가 파멸케됨을 보여주었으나 이번 지팡이의 부러짐은 유다와 이스라엘간의 형제애가 깨어짐으로 그들의 나라가 파멸케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여러 당파와 파당으로 조각날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황폐케될 것이다. '연락'이라 하는 막대기를 자르는 것, 곧 서로간의 형제애를 약화시키는 것만큼 한나라를 파멸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없다.


Ⅲ. 우매한 목자들의 멸망 11:15-17

 

이 백성이 선한 목자에 의해서 정당하게 버림받게 된것을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여기서는 그들이 우매한 목자에 의해 수치스럽게 혹사당하는 가운데 더욱 비참하게 될것을 보여주신다. 스가랴 선지자 자신이 이러한 거짓 목자를 가장하고 있다. 너는 또 우매한 목자의 기구들을 취할지니라(15절). 즉 우매한 목자로 보이게하는 외투, 바구니, 막대기 같은 것을 취하라는 말이다. 그러한 목자는 양떼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해를 끼치는 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다(16절). 여기에 우매한 목자에 대해 사용된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과 일치된다(마 23장). 그들은 무자비한 왕들의 폭정아래서 신음하게될 것이다. 그들은 우리 구주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미혹받을 것이다(마 24:5).

(1) 이 우매한 목자가 백성들에게 가져올 저주(16절) : 그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아니할' 것이며 '흩어진 자를 찾지아니할' 것이다. 또한 상처입은 자들을 치료하지 않음으로, 제때에 약간만 보살펴도 살릴수 있는 그들을 그 상처로인해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 것이다. 또한 그는 약한 자를 돕지않을 것이며 연약한 자를 위로하지 않을 것이다.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즉 그는 자신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양떼에게 노를 발하게 될때 그는 그들을 혹사시켜서 그 굽을 찢을 것이다.

(2) 이 우매한 목자가 자신에게 가져올 저주(17절) : 화 있을진저...못된 목자여. 즉 그는 하나님의 공의의 '칼'이 '그 팔'과 '그 우편 눈'에 임하므로 그것들을 모두 사용할수 없게될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때 성취되었다. '내가 온것은 보는 자들로 소경되게 하려함이라'(요 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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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하나님의 손을 깨닫도록 지시받음 10:1-4

 

앞장에서 이 비참하게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은혜롭고 영화로운 일들이 약속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들의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고 그들을 향해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인정하기를 바라고 계심을 그들에게 보이신다.

(1) 스가랴 선지자는 제때에 비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그들에게 지시하고 있다. 여호와께 비를 구하라. "구름이나 별에게 비를 구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 구하라." 가을에, 즉 파종시기에는 이른비가 내리며 이삭이 영그는 3월과 5월 사이의 봄에는 늦은비가 내린다. 만일 어느 한 비라도 내리지않으면 그 땅은 소산을 내지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시키는 일에 대해서도 충실하게 기도해야할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적절한때에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해야 하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일상적인 방법을 떠나 행하시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번개를 내신다.' 비록 그것이 비를 몰고오는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비의 전조가 된다. 곧 여호와께서는 비를 내리시고자 번개를 내신다.

(2) 스가랴 선지자는 우상에게 구하는 것이 어리석은 행위임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대저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치않은 것을 보고(2절). 복술자는 곧 우상들의 선지자들을 말하는 것으로 그들이 본것은 모두 사기이며 속임수였다. 거짓 꿈을 말한즉.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짓 신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했을뿐만 아니라 참되신 하나님의 은총마저 잃고말았다. 백성이 양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즉 그들은 양처럼 사로잡히게 되었으며 목자없이 흩어진 양무리처럼 고통을 겪게되었다. 이방 신들을 좇아 배회했던 그들은 이방 민족가운데서 유리하는 자들이 되었다.

(3) 스가랴 선지자는 그들에게 모든 일에 있어서, 즉 그들을 거스렸던 일이나 그들에게 잘되었던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손을 보여준다(3절). 그들이 그릇행했을때 그들에게 괴로운 길을 걷게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양떼를 먹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만함으로 주리게 한 '목자들에게 내가 노를 발하였노라.' 내가 악한 관리들과 악한 사역자들, 즉 우상을 숭배하는 목자들에게 진노하였노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된것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징표였다. 마찬가지 이유로 그는 더럽고 해를 끼치는 무리인 '수염소들을 벌하셨다.' 그들이 올바로 행하기 시작했을때 그들을 복된 자리로 돌이키신 이 역시 하나님이셨다. 하나님은 이제 은총으로 '그 무리를 권고하셨으며 그들로 전쟁의 준마와 같게하셨다.' 즉 어떤 사람이 자기의 말에 대해 하듯이 그들을 잘돌보고 상요하셨으며 또 '준마'처럼 그들을 귀하고 강하게 만드셨다.

(4) 스가랴 선지자는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퉁이 돌이 그에게로서, 말뚝이 그에게로서...나와서(4절). 대적들의 연합된 힘도 그에게로부터 나왔다. 만일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그러한 세력을 가질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그들을 위해 준비된 모든 세력들은 그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나라의 여러일을 맡아서 다스리는 관리들의 권세를 보여주는 그 건물의 '모퉁이 돌'도 그에게로부터 왔다. 나라를 견고케하는 못(사 22:23)도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스 9:8)도 그에게로부터 나온 것이다. 군대의 힘을 보여주는 '싸우는 활'도 그리고 모든 압제자들도 그에게로부터 나왔다.

 

Ⅱ. 복음 교회가 맞게될 축복 10:5-12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귀중한 약속들이 주어졌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의 상태에 대한 언급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 복은 교회와 및 모든 진실한 신자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임재를 경험하게될 것이며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게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안식의 기초이다.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한즉(5절). 내가 그들을 긍휼히 여김으로(6절). 그들의 모든 존엄성과 기쁨은 순전히 하나님의 긍휼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긍휼은 비참함을 전제하듯이 공로를 배제한다. 그들이 내게 내어버리움이 없었음같이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때에 그러한 은총을 보여주신다. 그들은 그러한 친교를 허락받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들과 함께 그러한 자유를 누리신다. 즉 그들은 결코 내어버리움을 당한 적이 없었던 자들처럼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본래의 계약, 즉 그들의 열조와 맺으신 언약에 따라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시는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의 대적들에게서 승리할 것이다. 그들은 '용사'같이 될 것이다. 즉 강한 육체와 담대한 정신을 소유한 유력한 자들이 될 것이다. 싸울때에 용사같이 거리의 진흙중에 대적을 밟을 것이라. 어떤이들은 모든 것을 하실수 있으며 또 하고자하시는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하고 계시므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가만히 앉아있어도 된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를 돕기위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가 우리가 함께하고 계시는 것이 우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돕도록 우리의 노력을 일깨워주며 활기있게 해줄뿐이다. 말탄 자들로 부끄러워하게 하리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기위해 나선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용감하게 진격하며 그들과 맞섰던 '말탄 자들'은 수치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할 것인가?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여호와안에서, 그것도 그의 능력안에 있을때 가능하다(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며, 의무를 행하도록 우리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행복을 이루신다.

(3) 흩어졌던 자들이 하나로 모이게될 것이다. 내가...그들로 돌아오게 하리니(6절). 즉 "내가 그들로 그들의 본토에 거하게 하려고 곳곳에서 그들을 돌아오게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 불어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8절). "마치 목자가 그의 소리를 아는 양들을 모으기위해 휘파람을 불듯이 내가 그들을 휘파람으로 불어 모을 것이라." 그것은 애굽이나 앗수르보다 더 악한 속박으로부터 귀한 영혼들을 모으는 가운데서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영광된 자유로 나아가게 하는 가운데서 영적으로 성취되어졌다. 길르앗과 레바논까지를 포함하여 약속의 모든 땅이 그들의 것이다. 뿔뿔히 흩어진 백성이 어떻게 모일수 있을 것인가? 그 어려움들은 극복하기 어려운듯 보이나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있었던 어려움들이 잘 극복될수 있었듯이 그것들 역시 잘 타개될 것이다. 내가 그들로 고해를 지나게 하며(11절). 마치 그 옛날 홍해를 지나던 것과도 같다. 나일의 깊은 곳이 다 마르겠고. 이는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그 선한 땅에 들어갈수 있도록 요단강이 그들에게 통로를 내어주었던 것과도 같다. '앗수르의 교만'이 그들의 구원의 길을 막아설 것인가? 거만한 바다 물결의 경계를 정하시는 분께서 그것을 꾸짖으실 것이다. '애굽의 홀'이 방해할 것인가? 그것은 '없어질 것이다.' 복음 전파를 통해서 복음교회가 모든 나라들로부터 모아지게되자 땅과 지옥의 격노한 세력으로인해 큰방해가 그앞에 있게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교회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 되어 수천명을 회개와 구원에 이르게 하였다. 그때 바다는 도망하였고 요단강 역시 주께서 임재하시자 물러갔던 것이다.

(4) 그들은 크게 수효가 늘게될 것이며 교회, 즉 새세계는 다시 번성케될 것이다. '그들이' 전에 애굽에서 '번성하던 것같이 번성할 것이다'(8절). 이제까지 하나님은 오직 유다에서만 알려졌었으며 그의 이름은 단지 이스라엘에서만 위대했었다. 즉 그는 단지 이곳에서만 그의 규례와 심판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복음시대가 되면 교회의 장막이 넓혀지게 될 것이므로 그에 비해 그곳은 너무 협소한 곳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9절). 그들의 흩어짐은 파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증가시키기 위해서 땅에 씨를 흩음같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에 경배하기위해 사방에서부터 나아온 유대인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그리고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내시처럼 그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그곳에서 복음의 빛과 불을 밝혔다. 그리고 이방의 여러 성읍들에 있는 그들 자신의 회당들은 사도들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설교 장소가 되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열방에 뿌리셨을'때, 그들이 그를 기억하도록 그리고 '원방에서도' 그의 이름을 말하도록 그들을 돌보셨다. 그들은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잘 보존하였기에 신약에 계시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더잘 받아들일수가 있었을 것이다.

(5)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의 힘이 되시며 그들의 노래가 되실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안에서 위로를 얻을 것이며 넘치는 만족을 얻게될 것이다(7절).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대적과 단호히 맞서서 이기게될 경우 우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치게될 것이다. 그리고 은혜로인하여 기쁨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 자손은 보고 기뻐하며 여호와를 인하여 마음에 즐거워하리라. 자녀들이 일찍부터 신앙의 기쁨을 알고 또 봉사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은 귀한 일이다. 이와같이 일찍부터 여호와로인한 즐거움을 배움으로써 그들은 그의 신실한 백성이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견고케 하신다면(12절) 우리는 스스로 분발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의무가운데로 '왕래'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어야 한다. 그리고 말하든지 행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행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견고케하시는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된다(시 8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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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주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예언 9:1-8

 

(1) 수리아인들은 이스라엘에 대해 악한 이웃이었다.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 '하드락 땅에,' 즉 수리아 땅에 임할 것이다. 다메섹은 그 나라의 수도로, 여기에 경고되고 있는 심판은 그 위에 임할 것이다. 이 경고가 다메섹 위에 임한 까닭은 '세상 사람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눈이 여호와를 우러러보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과 기도를 통해 그들의 대적으로부터 구원해달라고 그를 우러러보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하고 거기서 복음을 전파하며 유대인들과 논쟁하였을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곳에 임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으며 세상 사람들, 즉 이스라엘 지파 외의 사람들도 여호와를 우러러 보게 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참조. 행 9:22).

(2) 다른 예언들에서처럼 두로와 시돈이 다음으로 언급되고 있다(2-4절). 두로는 번창하고 있었으므로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였다. 그곳에는 '넓은 지혜가 있었다.' 이 말은 역설적인 말이라고 할수 있다. 즉 두로는 스스로 넓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지혜와 계획도 여호와를 거역할수는 없다. 아니, 그들의 교활함가운데서 지혜로운 자를 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예이다. 두로는 자기를 위하여 보장을 건축하며. 두로는 스스로, 결코 무너지지도 정복되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두로는 광대한 무역을 통해서 '은을 티끌같이,' 즉 모래를 쌓아놓은 것같이 흔하게 쌓았다. 그리고 '정금을 거리의 진흙같이 쌓았다.' 그러나 그곳의 지혜도, 부요함도, 그리고 강성함도 그것을 안전하게 해주지는 못할 것이다. '주께서,' 스스로를 굳건히 방비하며 거하고 있던 그 보장으로부터 '그를 쫓아내시며'(4절), 그곳을 빈한하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그의 바다 권세를 치시리니. 즉 물에 둘러있다고해서 그곳이 안전하게 보호되지 못할 것이며 '불에 삼키울 것이다.' 그리고 불에 타되 완전히 탈 것이다.

(3)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남방 접경에 큰 성읍들을 지니고있는 블레셋과 다투신다. 이제 '아스글론'은 우방국들과 동맹국들이 파멸하는 것을 보고 '무서워할' 것이다. 가사도 심히 아파할 것이며 에그론...역시 그러하리라. 그들의 이웃이 불에 타고있을때 그들의 집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스스로 파멸되고 황무케될 것이다. 가사에는 임금이 끊길 것이며 아스글론에는 거민이 없을 것이며. 외국인들이 그들의 땅을 취할 것이다. 아스돗에는 잡족이 거하리라(6절).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의 교만을 끊으실' 것이다. 블레셋과 다메섹, 그리고 두로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그후 오래지않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는 이 모든 나라들을 약탈하고 정복하였으며 식민지로 삼았다. 어떤이들은 7절 말씀을 하나님께서 이 민족들의 죄들을 제하시겠다는 약속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 피'와 '그 가증한 것'은 곧 그들의 잔인함과 우상숭배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의 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들에 속한 자들일지라도 남은 자들을 보존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자비와 은총을 기념하는 자들이 될 것이었다. 그들의 출신은 그들이 하나님께 용납되는 일에 있어 결코 장애물이 되지않을 것이다. 복음으로인해서 블레셋 사람이 유다 사람처럼 하나님께 용납될 것이며 에그론 사람이 여부스 사람, 곧 예루살렘 사람처럼 용납될 것이다.

(4) 이 모든것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긍휼을 베푸려하신다. 하나님께서 주변에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 위와 같이 다루시려는것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호의에서였다. 어떤이들은 7절을 그와같이 이해하기도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지비한 대적들이 그의 백성을 삼키려하고 먹이로 삼으려할때 그들로부터 그의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내가 블레셋 사람들의 입과 그 잇사이에서 그 피를(즉 이스라엘의 피를) 제할 것이라"(참조. 암3:12). 그러므로 '그도 남아서'(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말한다)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즉 그의 은총가운데로 들어오게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을 시인하게될 것이며 하나님은 그를 인정해주실 것이다. 그는 '유다의 한두목같이 될 것이다.' 그러나 8절의 분명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특별히 보호하실 것이며 그들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그들의 주변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시리라는 사실이다. 다음 말씀이 그 사실을 보여준다. 내가 내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시대가 위태로울때, 즉 군대가 행군을 하고 모두가 시온에 대해 악의를 품고있을때,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오가는 자들로인해 그의 교회에 대한 보호를 배가하실 것이다. 이는 정복자가 그곳을 지나가건 피정복자가 그곳을 지나가건 아무도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마카비가의 투쟁이후 얼마동안 유대가 자유롭고 번성케 되었을때 성취되었다. 혹은 알렉산더 대왕이 대제사장 야두스의 경외심에 감동받아 그 주변 국가들을 황폐케하면서도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들을 보호했을때 성취되었다고 말할수 있다.

 

Ⅱ. 메시야에 대한 예언 9:9-11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하심으로 명백하게 성취시킨 예언을 필두로 하여 메시야와 그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 주어지고 있다(마 21:6; 요 12:15).

(1)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것이 약속되었다. 이는 구약 교회에 있어서 큰기쁨이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리스도는 왕이시다.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신 주권자이시다. 그의 영적인 왕국은 복음교회에서 다스려진다. 이 왕은 오래전부터 오시는 중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라 그가 와계시도다. 그가 문가에 계시도다. 단지 몇 세대만 지나면 그분은 오실 것이라."

(2) 여기에 그의 오심을 매우 환영받을만한 것으로 여기지게 하는 그에 대한 묘사가 주어져있다.

1) 그는 의로운 통치자이시다. 그는 공의로우며(9절).

2) 그는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에게 참으로 충성하는 모든 자들에게 강력한 보호자가 되신다. 그는...구원을 베풀며. 즉 그는 그의 모든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풀 권세를 지니고 계신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며, 그의 모든 백성들을 그의 자녀로 돌보아주시는 친절한 아버지이시다. 그는...겸손하여서. 이 말은 그가 "비천한 자리에 처하여 괴로움을 겪으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자신을 비어' 사람들에게 멸시받으시고 거절당하셨다. 그는 '온유'하시다. 즉 위엄을 표시하시거나 해받음을 불쾌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낮추셨다(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그가 그 자신의 성읍으로 공개적으로 입성하실때(그것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세상의 눈에 위엄있게 보인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는 귀인들이 타는 기품있는 말이나 마차를 타지않았으며 '나귀'를, 그것도 타기에 좋은 나귀가 아니라 작고 어리석어 다루기 힘들며 탄사람에게 오히려 수치를 더줄듯 싶은 '나귀 새끼'를 타셨다. 그 나귀새끼에는 안장도 없으며 아무런 장식도 기구도 없는채 단지 제자들의 옷들이 그 위에 올려졌을 뿐이었다. 이는 그가 큰 겸비로 우리에게 찾아오셨을때 친히 아무명성도 얻고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3) 여기에 그의 왕국이 그 영광중에 설명되고 있다. 이 왕은 왕국을 가지고 계신다. 그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영적인 나라, 곧 하늘의 왕국이다. 그것은 전쟁무기에 의한 침략으로 세워지지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지않을 것이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10절). 그가 이렇게 행하는 것은 백성들에 대한 그의 사랑때문이다. 즉 그들로하여금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 두어야하는 신뢰를 자신들에게 둠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끊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인간에 대한 호의로 땅위에 화평을 선포함으로써 그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그 나라가 사람들의 마음가운데 널리퍼져 그들을 지배하게 되면 사람들을 화평케 만들 것이며 모든 적대관계를 무너뜨릴 것이다. 즉 전쟁하는 활을 꺾을 것이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이다. 복음 전파자들은 세상의 가장 구석진 곳까지도 복음에 의해 밝혀지게 되기까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복음을 전할 것이다.

(4) 메시야를 통해 인류에게 있게될 큰 유익은 곧 극한 불행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으로, 이는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얻는 것을 통해 예표되었다. 내가 너의 갇힌 자들을 물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11절). 즉 "내가 '물없는 구덩이'와 같은 곳인 바벨론에서 너의 포로된 자들을 놓았느니라." 그들이 포로된 땅에서나마 여호와를 찾는다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시리라는 것은 언약의 일부였다(레 26:42,44,45; 신 30:4). 그들이 사로잡힌 자리에서 놓임받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언약의 피'를 통해서였다. 인간과 맺은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효과를 가지게 된다. "시온의 딸아, 사로잡힌 자리에서 놓임받게 되는 것은 단지 '네 왕'에 의해서 이루어지게될 큰구원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일 뿐이라."

 

Ⅲ. 이스라엘에서 있을 큰 승리 9:12-17

 

스가랴 선지자는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자들에게 그들의 구원이 언약의 피때문이며 메시야의 약속때문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면서 이제 기쁘고 복된 정착을 전망함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약속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는 복음의 영적 축복가운데서 완전히 성취되어진다.

(1) 그들은 그들의 도피성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에게 피하도록 권고받는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12절). 포로된 자리에서 그들의 본토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소망을 품은' 혹은 기대를 품은 '갇혔던 자들'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갇힌중에 있는 그들을 '조금 소성케 하셨기' 때문이다(스 9:8,9). 아직 바벨론에 머물고있던 자들은 언젠가 다시 그들의 본토를 보게되리라는 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살았다. 이제 이 모든 자들은 그들의 눈을 메시야에게 돌리도록 지시받고 왔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그가 오시기 전까지 오랫동안 신실한 자들의 보장이 되어왔다. 그들은 다가오게될 그의 날을 보고서 기뻐하였다(눅 2:25,28). 보장으로 돌아오라는 이 초대는 복음적인 부름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할수 있다(12절). 죄인들은 갇힌 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소망을 품은 갇힌 자들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보장이 되신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보증받는다.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즉 "소망을 품은 갇혔던 너희 모든 자들에게 내가 배나 갚으리라." 이것의 증표로서 하나님께서는 때가차면 유대인들이 그들의 본토에서 승리와 부와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그러나 이는 단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누리게될 더 영화로운 승리, 부, 기쁨의 모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1) 그들은 그들의 대적들에게서 승리를 거둘 것이다. 귀환후에도 유대인들은 사방에 대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리라고 약속하고 계시다. 그들은 그들의 박해자들을 패배시키고 낙담케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될 것이다. "내가 유다로 나의 당긴 강철 활을 삼고 에브라임으로 그 활에 먹인 화살을 삼아 화살의 촉이 그 활대에 닿을정도로 팽팽하게 당기고 있노라." 그러나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활로 승리를 얻으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대로 사용되는 그의 도구일뿐, 즉 활과 화살일뿐 그들 자신들로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말이 이 사실을 보여준다. 시온아 내가 네 자식을 격동시켜 헬라 자식을 치게하며. 이것은 그들이 헬라 제국의 한 왕인 안티오커스를 쳤을때 성취되어졌다. 그때 하나님을 알고있던 백성들은 강하였으며 용맹을 발휘하였다(단 11:32). 하나님께서 모든 전투에서 대장이 되실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위에 나타나서(14절). 그들의 군대가 소집되어 전쟁으로 나가고 있는가? 군대를 모으고 명령을 내리기위해서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리실 것이다.' 전투가 어떻게 벌어지건 하나님께서는 '남방 회오리 바람을 타고' 앞서 '행하실 것이다.' 그것은 믿을수 없을정도로 빠른 것으로 그 회리 바람앞에서 헬라 자식들은 겨와 같이될 것이다. 그 군대는 실제로 임전했는가? 여호와께서...그 살을 번개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그 살을 날려 그들을 흩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내실때 행하신 일을 암시해 준다. 또한 그것은 마카비 시대에 유대인들이 쟁취한 놀랄만한 승리가운데서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사단과 모든 어두움의 세력에 대해 영화로운 승리를 쟁취하심으로써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들의 대적들은 그들을 없애고자 했는가? 그들의 대적들이 그리될 것이다.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돌을 밟을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시내의 물매돌이 대포만큼이나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2)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안에서 승리할 것이다. 그들은 위로를 얻을 것이며 그들의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것이다. 어떤이들은 15절을 이렇게 이해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얻은 것을 먹을 것이다(즉 조용히 향유할 것이다). 그들은 충만한 기쁨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위하여 많은 제물을 드릴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제물의 피와 기름으로 '동이'와 '제단 모퉁이'를 가득채울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맺고있는 관계를, 즉 그들이 '그의 백성의 양떼'이며 그는 그들의 목자이고 또 그들이 그의 '면류관의 보석'으로서 매우 귀중히 여김을 받으며 따라서 든든한 보호를 받고 있음을, 기뻐할 것이다. 그들이...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난외주에는 '높이 들리리로다'로 되어있음-역주). 즉 마치 왕의 깃발이 승리와 기쁨의 징표로 내걸려 있듯이 그들이 높이 들리게될 것이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이것은 그들이 여호와앞에서 소리높여 부를 노래의 후렴이다. 이것은 오실 시온의 왕, 메시야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수 있다. '너의 눈은 그 아름다운 왕을 보며'(사 33:17, 한글개역 성경에는 '그 영광중의 왕'으로 되어있음-역주). 그는 만인중에 가장 아름다우며 매우 사랑스러우시다. 비록 세상의 눈으로 볼때 모양이나 용모의 아름다움이 전혀없으나 믿음의 눈으로 볼때 그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크며 그의 선하심 또한 그러하다. 그는 자비가 풍성한 분이시다. 여기에 그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선하심의 일례가 나타나있다. 소년은 곡식으로 강건하며 처녀는 새포도주로 그러하리로다. 즉 하나님께서는 땅의 풍성한 소산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복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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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예루살렘이 회복될 것을 약속함 8:1-8

 

스가랴 선지자는 그들을 절망으로 몰고가고자 하지않고 회개에 이르게하고자 의도했기에 여기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해두신 큰일들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위해 나타나실 것이며 시온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다(2절). 시온을 향했던 큰진노(슥 7:12)는 이제 대적들에게로 돌려지게 된다. 내가 시온에 돌아왔은즉. "내가 아주 오랫동안 멀리 서있는 것처럼 보인후에 다시 이전처럼 '예루살렘 가운데' 거하리라." 이 사실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규례와 섭리가운데 임재하고 계심을 확신할수 있었다.

(2) 예루살렘에 놀라운 개혁이 있게될 것이며 또한 신앙이 부흥케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 대해 배신적이었던 '예루살렘'이 신실과 정직으로 유명하게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성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컬어지며' 그러한 이름으로 알려지게될 것이다. 또한 그곳의 거주민들 역시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는 자손들이라 일컬어지게될 것이다.

(3) 예루살렘에 백성의 수가 크게 증가할 것이며 깊은 평온의 징표가 있게될 것이다. 전에는 살해된 시체들로 가득했던 '예루살렘 길거리에' 이제는 불시의 죽음으로 끊쳐지지 않고 수명이 다되도록 장수하는 '늙은 지아비와 늙은 지어미'가 거할 것이다. 그들은 제철을 만난 곡식 다발처럼 명이 다 차서 무덤에 내려갈 것이다. 백발은 노인들에게뿐 아니라 그들이 사는 곳에도 영광의 면류관이 된다. 어떤 성읍에서 노인들을 많이 보게되는 것은 그 성읍에 은혜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그것은 그곳의 공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뿐만 아니라 미덕이 성행하여 악덕이 전혀없다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즉 그곳의 기후뿐 아니라 사람들 또한 온화하다는 징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예루살렘 백성들은 자라나는 새세대를 보며 크게 기뻐하게될 것이다. 그 성읍거리에 동남과 동녀가 가득하여 거기서 장난하리라(5절). 그들의 자손들은 건강하고 튼튼할뿐만 아니라 애정이 넘치고 명랑하게될 것이다. 그들의 때는 즐거이 놀때이다. 그들이 그렇게 지내는 것을 아까와하지 말자. 그것이 그들에게 많은 유익을 줄지언정 해를 주지는않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의 경보로 두려움을 당하지않고 안전하게 지내게될 것이다.

(4)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어디로 흩어졌든지, 사방으로부터 다시 모아지게될 것이다. 내가 내 백성을 동방에서부터, 서방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7절). 즉 "내가 그들을 잃어버린데서 곧 그들이 쫓겨간 바벨론 혹은 애굽 혹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구원할 것이라."

(5)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그의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8절). 이것은 모든 약속의 기초이자 면류관이며 모든 복을 담고있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셨듯이 긍휼의 길에서 그들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 또한 그들역시 하나님께 약속하였듯이 의무의 길에서 그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 약속은 포로 시대와 그리스도의 시대사이에 유대 교회가 번성하는 가운데서 성취되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복음교회 안에서 더 완성된 성취를 가지게될 것이었다. 그러나 가장 완전한 성취는 장래에 있게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의심은 다음 질문으로 잠잠케될 것이다. 이 일이 그날에 남은 백성의 눈에는 기이하려니와 내 눈에 어찌 기이하겠느냐(6절). "즉 예루살렘이 이와같이 회복되어지는 것이 너에게 믿어지지 않는다고해서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한 일이겠느냐?"

 

Ⅱ.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실 것을 말씀하심 8:9-17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위해 예비하신 긍휼을 더욱 확신케 해주신다. 본문은 크게 격려하는 내용을 담고있다.

(1) 이 격려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에 순종하여 선한 열심을 품고 성전건축에 힘쓰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고용된 자들, 오직 그들만이 하나님께서 격려해주실 것을 기대할수가 있다. 의무를 이행하고자 힘쓰는 자들은 긍휼의 약속들로 힘을 얻게될 것이다.

(2) 이제까지 그들을 낙담시켜왔던 것들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축복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다(10절). 그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못하였으며. '그날 전'이란 곧 개혁의 날이 시작되기 전을 말하는 것이다. 땅의 소산은 빈약하여 보잘것없었다. 상인들은 내다팔 상품이 전혀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삯을 줄 사람이나 짐승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들가운데는 우정이나 좋은 이웃관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내가 뭇사람으로 서로 치게 하였음이어니와. 이로써 사람들은 큰죄를 범케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쟁과 싸움은 인간의 정욕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3) "이와같이 너희는 괴롭힘과 찔림을 받아왔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너희를 다르게 대해주실 것이라(11절). 이제 너희가 너희의 의무가운데로 돌이키므로 너희는 다시 번영할 것이라." 그들은 온갖 좋은 것들로 매우 풍성하게될 것이다(12절). 하늘은 이슬을 내리리니. 그것없이는 땅은 소산을 내지못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이땅의 사람들에 대한 하늘의 하나님의 은혜와 그들이 그를 의지해야만 하는 것을 끊임없이 암시해 준다. 그들은 그들의 주변 국가들 가운데서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13절). 여호와의 축복받은 자는 곧 세상의 축복의 근원이며 또 그와같이 여김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선을 행하시기로 결정하실 것이다(14,15절).

(4) 그들은 이 약속들가운데서 위로를 얻게될 것이다. 두려워 말지니라(15절).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9,13절). 그들은 그 약속들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의무를 행하여야 한다(16,17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의 방식대로 그리고 그가 원하시는때에 너를 위해 행하시도록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되 양심껏 네 의무를 행하고 있다는 조건하에서 그리하라."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16절). "너희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말아야 할지라." 너희는 각기 이웃으로 더불어 진실을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성문에 앉아있는 재판관들은 진실과 화평을 중시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 이웃에 대해 악의를 품지말아야 한다. 맹세한 것은 크게 존중히여겨야 하며 양심으로 그것을 지켜야 한다. 여기서 금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일곱가지 가운데(잠6:16-19) 들어있는 것이다.

 

Ⅲ. 열국 백성이 나아올 것에 대해서 8:18-23

 

본문은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더욱 격려해주기 위한 것으로 두가지 중요한 약속을 담고있다.

(1) 그들의 금식의 날들이 감사의 날들로 바뀌게될 것이다(19절). 곤고한 시기가 지나간후 교회는 기쁨의 시기를 맞이할 것이다. 애통함이 하룻밤이상 계속됨으로 다음날 아침에도 기쁨이 오지않는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기쁨의 아침이 오게될 것이다. "너희 머리를 하나님의 진리아래에 복종시키며 너희 마음을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우라."

(2) 교회는 많은 이방인들의 회심으로 크게 부흥될 것이다(20-23절). 이것은 유대 교회의 후기에, 매년 예루살렘에서 경배를 드리기위해, 멀고 가까운 나라들로부터 많은 개종자들이 찾아옴으로써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한 유대 교회의 부흥은 비록 지금은 단지 그 폐허만을 엿볼수 있을뿐이다. 우리 구세주의 시대 이전까지는 예루살렘을 괄목할만한 곳으로 만들어주면서 그 성읍의 부요함과 화려함을 더하여 주었다. 그러나 교회의 부흥은 이방인들이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믿게됨으로, 그리고 머리되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들이 믿는 유대인들과 한몸으로 연합되어짐으로 더욱 완전하게 성취되어질 것이다(롬 16:26). 많은 성읍의 거민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일 것이다. 즉 '많은 백성과 강대한 나라들'(22절), 그리고 '방언이 다른 열국 백성' 중 많은 사람들이(23절) 그리할 것이다.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할 것이다'(21절), 하나님께 돌아와 교회의 구성원이 된 자들이 바로 '만군의 여호와를 찾는' 자들, 즉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이며 진실로 그의 영광에 헌신한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하도록 서로를 열심히 독려해줄 것이다(21절). 이 성읍 거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구하자 할것이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그리스도를 잘 알게된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일수 있어야 한다. 안드레는 이와같이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인도했으며 빌립은 나다나엘을 인도하였다. 참된 은혜는 독점을 거부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선한 사람들은 선한 일에 있어서 서로 태도와 정신을 강화시켜 줄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교회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안에 있는 자들로 인해서 스스로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23절). 이것은 유대인으로서, 즉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그들이 누릴 큰영예를 암시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하심을 들었나니 우리가 너희와 함께가려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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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금식에 관한 질문 7:1-7

 

(1) 여러사람이 전에부터 자기들이 행해왔던 매년 오월에 금식하는 것을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질문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 그 질문이 아직 바벨론에 머물고있는 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인지 아니면 5절에 '온땅의 백성'이라고 나타나있는 이미 귀환한 자들에 의해 제기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들은 '사레셀'과 '레겜멜렉'으로 유력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는 그들이 '종자'를 거느리고 온것으로 보아 알수 있다. 그들은 금, 은과 더불어(슥 6:10,11에 있는 자들처럼) 보냄받은것 같지는 않으며,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전으로 가게하는 다음과 같은 중대한 두가지의 용무로 보냄을 받았다.

1) 긍휼을 입고자 하나님께 탄원하기 위하여 : 그들은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고' 희생을 드리기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사로잡힌 중에서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다(다니엘 6:10절에 나타나듯이). 그러나 이제 성전이 재건되어가는 중에 있었으므로 그안에서 기도하고자 그들의 대표들을 보냈었던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었다.' 이때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서로에 대해서 질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가운데 아무런 차이도 두지않았다. 따라서 백성들은 그들가운데 아무런 차이를 두지말아야 했으며 양편 모두가 섬기고 있는 하나님께 감사하여야 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물었다. 우리가 여러해 동안에 행한대로 오월간에 울며 근신하리이까(3절). 그들은 겸비함과 기도를 위해 엄숙하게 정해져있는 금식을 지켰다. 그들은 여기서 단한번, 즉 오월의 금식만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8:19절에 보면 그들이 연례적으로 네번의 금식을 했던 것을 알수 있다. 하나는 예루살렘 성벽의 파괴(렘 52:6)를 기억하면서 4월(6월 17일)에 지켰고, 또하나는 성전이 불탄것(렘 52:12,13)을 기억하면서 5월(7월 4일)에 지켰고, 또다른 하나는 그다랴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7월(9월 3일)에 지켰고, 마지막 하나는 예루살렘이 처음 포위되던 때(왕하 25:1)를 기억하면서 10월(12월 10일)에 지켰다. 그들이 현재 궁금하게 여기고있는 것은 이러한 금식들을 계속해야할 것인가 말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질문은 단한사람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내가 울며 재계하리이까?"(한글개역에는 '우리가'로 되어있음-역주). 종교적인 금식은 '절제'함으로 뿐만아니라, 본문에 '우리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처럼, 죄에 대한 경건과 근심으로 엄숙하게 행해져야 한다. "우리가 여러해 동안에 행한대로 영혼을 곤고케하는 날들을 계속해서 가지리이까?" 그 기간이 칠십 년이나 된다고 하였다(5절). 이 금식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 주어졌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의 증표아래 놓여있었다. 따라서 환자가 자신에게 아직 이상이 있음을 알면서 치료의 과정을 중단한다는 것은 현명치못한 일이다. 그러나 또한 이 금식들을 그만두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도 주어졌다. 하나님께서 돌이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셨던 것이다. 이제 '신랑'이 돌아왔는데 왜 '혼인집 손님들'이 금식해야 하는가? 따라서 성전이 불탄 것을 기억하면서 지켜왔던 5월의 금식은 제하여져도 될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전은 이제 재건되어지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2) 비록 그 질문이 아주 그럴듯하게 보이긴했으나 그것을 제기한 자들은 그 문제에 있어서 진실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본질보다는 의식에 더많은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질문에 대해 주어진 첫번째 답변은 그들의 위선에 대한 날카로운 책망이었다.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5절). 하나님께서는 그들 자신의 양심에 호소하셨다. "그것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었느냐?"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것이 중요한 문제로서 매우 크게 강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금식하되 하나님을 위해 하지않는 금식은 그를 조롱하는 것이며 그를 격노케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마음의 기질과 우리의 생활방식을 더낫게 해주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금식을 자신을 위해 행해진 것으로 받지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금식을 함에 있어서 그들이 먹고 마실때 가지는 것과 똑같은 견지로 임하였다(6절). 그들이 행했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있었다(7절). 여호와가 이전 선지자로 외친 말을 너희가 청종할 것이 아니냐. "너희는 너희가 아직 하지않은 것을 해야하느니라. 즉 너희는 너희 죄를 회개하고 너희 삶을 개혁해야만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너희에게 요청하는 것이며 또한 이전 선지자들이 너희 열조에게 요청한 것이니라." 그는 그들로 그들의 나라가 전에 번성했던 것을 기억케한다. 지금은 황폐하고 비탄가운데 있는 예루살렘이 그때에는 '백성이 거하여 형통하였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그들의 길을 돌이키도록 외치셨다. 만일 그렇지않았다면 그들의 형통은 곧 끝이 났을 것이다. 따라서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너희는 그 사실을 주목해야 할지라. 만일 그렇게 하지않는다면 너희의 모든 금식하는 것과 우는 것은 소용이 없게 되리라."

 

Ⅱ. 지난날의 죄악들을 주의하도록 권고함 7:8-14

 

금식을 계속할 것인가를 물으면서도 여전히 죄악되게 행하는 이들 위선적인 질의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1) 스가랴 선지자는 여기서 이전 선지자들이 그들의 열조들에게 이미 말했던 것을 반복한다(9,10절). 즉 그는 금식을 계속하거나 희생을 드리라는 것이 아닌 의롭게 행하며 자비를 사랑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관리들은 공평하게 재판을 요구하여야 하며 이웃들은 피차에 온유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재난을 당했을때뿐만 아니라 연약할때에도 동정심을 가지고 돌아볼수 있어야 한다. 남을 해하려하여 심중에 도모하지 말라.

(2) 그는 그들의 열조들의 완고함과 불순종을 말한다(11,12절).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어진 말을 듣고서 처음에는 그 말에 순응하는듯이 보였으나 멍에에 익숙치않은 황소처럼 '등으로 향하여' 하나님의 계명의 쉬운 멍에와 가벼운 짐을 지려고하지 않았다. 그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즉 그들은 짐을 지기위해 어깨를 내미는듯이 보였으나 예레미야 34:10,11절에 있는 자들처럼 곧바로 다시 움츠러들었다. 그 마음을 금강석같게 하여. 이 돌은 가장 단단한 돌이다. 계속해서 버티는 죄인의 마음만큼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것은 없다. 인간이 선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그렇게되고자 생각지않으며 순응하지 않는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만일 네가 멸시한다면 너는 홀로 멸시당하게 되리라."

(3) 그는 그들의 열조들에게 가해진 치명적인 결과들을 보여준다. 큰노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않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기도를 듣지않으셨다(13절). 그들이 하나님께 약속한 충성을 저버렸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흩으셨으며 회리바람앞의 쭉정이처럼 내동댕이치셨다. 그들을 그 알지못하던 열국으로 헤치리라(14절). 그들이 자기 땅의 모든 율법을 범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 땅의 모든 영광을 거두어가셨다.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그 땅을 황무케한 자는 갈대아인들이 아니었다. 결코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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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네 병거에 대한 이상 6:1-8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이것은 그가 본 일곱번째 이상이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네 병거'는 서로 다른 색깔의 말들에 의해 이끌려지고 있었다(1-5절). 어떤이들은 '네 병거'를 네 제국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또한 5절의 '하늘의 네 바람'을 다니엘7:2절의 '하늘의 네 바람'과 연관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여기서 '홍마들'은 바벨론 제국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흑마들이 이끄는 두번째 병거는 바사 제국이다. 그 나라는 바벨론을 치기위해 북편 땅으로 나갔으며, 바벨론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할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을 포로된 자리에서 자유케함으로 '북방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다.' 헬라 제국인 '백마'는 '흑마' 뒤를 따라 북편 땅으로 갔다. 즉 그 나라는 바사를 무너뜨렸다. 헬라 제국을 정복한 로마 제국은 '어룽진 말'로 '남편 땅으로 나갔다'고 했다. 이는 남방에 있던 애굽이 로마 제국에 의해 정복된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어룽진 말들과 함께 매인 '건장한 말들'은 후에 스스로 일어선 무리들로 고트족과 반달족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이 이상은 이 낮은 세상에서의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될수 있다. 천사들은 종종 '하나님의 병거'로 불리웠다(시 68:17). 민족들과 교회들에 대한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들은 여러가지 말들의 색깔로 표시되고 있다(계 6:2,4,5,8).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는 모든 사건의 원천이며 '놋산'처럼 움직일수 없는 것이다. 그 병거들은 '두 산 사이에서 나왔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작정하신 것들을 시행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팔로 산을 안을수 없듯이 우리의 한정된 지식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할수 없으며, '놋산'을 옮길수 없듯이 하나님의 뜻하신바를 변경시킬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는 마치 병거와도 같은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안에 왕처럼 타고 계신다. 그의 섭리는 병거처럼 신속히 움직이며, 병거가 마부에 의해 조종되듯이 그의 무한한 지혜로 움직여진다. 거룩한 천사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수행하는 자들이며 하늘의 군대로서 하나님에 의해 사용되는 자들이다. 그들은 '병거' 혹은 병거를 끄는 말들로, 대단한 힘과 능을 지니고 있어서 선지자들을 하늘로 옮겨가기도 하며 또는 땅에서 보호하기도 한다. '첫째 병거'를 끄는 말들은 '홍마들'로 이는 전쟁과 피흘림을 뜻한다. '둘째 병거'를 끄는 말들은 '흑마들'로 전쟁의 음울하고 슬픈 결과들을 의미한다. '셋째 병거'를 끄는 말들은 '백마들'로, 어둡고 음울한 시대가 지나간후에 평안과 평화, 그리고 번영의 시대가 돌아올 것을 의미한다. '넷째 병거'를 끄는 말들은 혼합된 색으로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이었다. 이는 사건들이 뒤얽힘으로써 번영의 날과 재난의 날이 서로 교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늘의 바람인데. 이 바람은 사방에서 임의로 부는 듯이 보인다. 아니면 오히려 이는 '온세상의 주앞에 모셨다가 나가는', 즉 윗 세상에서는 복되게도 그의 영광을 보며, 이 낮은 세상에서는 자신들의 용무인 그의 영광을 섬기는 일을 하는 천사들이라고 할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는 경탄할만한 아름다움이 있으며 그 섭리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6절). '흑마'가 어둡고 슬픈 사건을 수반하고서 나가자 즉시 '백마'가 애통하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면서 '그 뒤를 따랐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교회들에 대해서 행하시는 것도 그와 같다. 즉 흑마가 나가면 곧 백마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환난이 넘치는 곳에 위로가 더욱 넘치게 된다. '어룽지고 건장한 말들'은 모두 '넷째 병거'에 매어있었다(3절). 그런데 그것들은 처음에는 '남편 땅'으로 나가다가 후에는 '땅을 두루다니고자 하였다'(7절). 만일 우리가 땅에 두루다닌다면 우리는 섭리의 색깔이 검지도 희지도 않으며 잿빛 혹은 회색, 즉 검은 색과 흰 색이 섞인 것임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은 그와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섭리하시는 모든 일들을 기뻐하신다(8절). 북방으로 나간 자들이 내 마음을 시원케하였느니라. 이들 특별한 심판을 나타내는 '흑마들'과 특별한 구원을 나타내는 '백마들'은 모두 '북편 땅으로 나간 자들'이다. 이들이 '북방에서 내마음을 시원케하였다.' 즉 그것은 최근들어 교회에 대해 행해진 것중 가장 두드러진 사건이었던 것이다.

 

Ⅱ.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움 6:9-15

 

하나님께서는 과거 각시대에 여러가지 방식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교회에 말씀하셨다. 본장의 앞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오직 선지자 자신만이 볼수 있는 이상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여기에 후반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는 표적 혹은 모형으로 말씀하시고 계신다. 그것은 교회의 제사장되시며 왕되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다.

(1)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라는 명령이 주어졌다(10,11절). 구약에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두사람이 나타나있는데 이들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대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군대 장관이었던 여호수아와 우리의 신앙고백의 대제사장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이다. 그들은 그들 각각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해낸 구원자이자 지도자가 되었던 자들이다. 여호수아는 결코 면류관을 쓸 야망을 가지지않은 사람이었으며, 백성들 또한 자기들 위에 면류관을 쓴 사람을 두려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마치 그가 왕이라도 되는양 그에게 면류관을 씌워주도록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스룹바벨은 경건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었기에 결코 이것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지 않았다. 바벨론으로부터 온 유대인들, 즉 사로잡힌 자중 바벨론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온 몇사람이 하나님의 전에 선물을 가지고왔다. 아마도 그들은 재정이 부족해서 성전건축이 느리게 진척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하나님의 전을 섬기고자 금과 은을 선물로 가지고왔던것 같다. 그들은 자기들의 예물을 제사장에게 가져오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세우사 그들과 그 예물을 받으셨다. 이로써 포로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표적을 볼수가 없으며 더이상 선지자도 없다"라고 자주 불평했을 그들은 큰힘을 얻게되었을 것이다. 그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서 그들을 만나야 하였는데 요시아는 아마도 성전의 보물을 맡은 자였던것 같다. 선지자 스가랴는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주어야 했다(11절). 은과 금으로 각각 두개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이들은 은 면류관은 그의 제사장적 위엄을, 금 면류관은 그의 왕적 위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태양은 힘있게 돋을때 금처럼 빛난다. 또한 우리는 밝게 비치는 달빛을 은빛이라고 부른다. 태양과 달을 숭배하던 자들은 구속주의 금 면류관, 은 면류관앞에 엎드러지게 될것이며, 태양과 달 또한 그분앞에서 부끄러워하며 당황하게될 것이다.

(2) 여호수아가 이와같이 면류관을 쓰게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스가랴 선지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말하여야 했다.

1) 때가차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같은 위대한 대제사장을 세우실 것이다. 여호수아는 단지 오실이의 표상이며 그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뿐이다(12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기서 '자기 곳'이란 곧 다윗의 성읍을 뜻한다. 비록 그 가문이 마른땅에 뿌리를 내리고있지만 봄이 돌아오면 잊혀졌던 뿌리에서 꽃이 피어나듯이, 그 가문에서 순이 돋아날 것이다.

2) 여호수아가 성전건축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듯이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은 영적인 성전인 복음교회의 유일한 건축자가 될것이다.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3)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영광이 짐이긴 하나 모든 것을 떠받치시는 이가 감당하지 못하실만큼 무거운 것은 아니다. 십자가는 그의 영광이었기에 그는 그것을 짊어지셨다. 면류관 역시 지극히 큰영광이기에 그는 그것을 취하신다. 그가 하시고자 하는 일은 참으로 이스라엘의 영광이 될 것이다. 어떤이들은 13절의 '영광도 얻고'를 "그가 영광을 높이 쳐들고"라고 읽기도 한다. 즉 그는 티끌가운데서 영광을 세우실 것이다.

4) 그는 보좌에 앉으사 그의 보좌에서 제사장과 왕이 되실 것이다. 보좌는 위엄과 통치 모두를 즉 광대한 권세와 함께 높여진 영예를 나타낸다. 제사장되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 그러나 그는 권세를 가진 자로서 그의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서 그일을 행하신다(히 8:1). 우리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리도록 정해지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율법을 주실 권위를 가지고 계시다. 만일 우리가 그가 우리를 다스리는 것을 원하지않는다면 그는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그의 보좌를 준비하셨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그것을 통해 어떤 유익을 얻고자한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가운데 그의 보좌를 마련해야할 것이다. 이 왕은 자기 보좌위에서 제사장이 되실 것이다.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능을 지니신 그는 또한 제사장의 온유함과 소박함을 가지실 것이다.

5) 두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즉 '여호와'의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사이에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있게될 평화에 관한 의논이 있을 것이다. 어떤이들은 그것이 당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 나뉘어져있는 왕과 제사장이 교회와 국가에 있어서의 평화의 번영을 유지하고자 서로 의논하는 유대 국가의 이전 정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6) 복음교회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사이에 복된 제휴가 있게될 것이며, 이로써 그들은 자기 보좌위에서 제사장이 되실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치의 중심이 되시는 그리스도안에서 만나게될 것이다. 먼데 사람이 와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니(15절).

7)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됨을 확인하게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줄을 너희가 알리라. 그 약속, 즉 먼데있는 사람들이 와서 그들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것을 도우리라는 것이 그 표적이었다. 이 일은 이제 매우 속히 성취될 것이었다(스 6:13,14). 너희가 만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할진대 이같이 되리라. "즉 너희가 만일 선한 열심을 품고 스스로 그 일을 하고자 하기만 한다면 외국인들이 성전건축하는 일을 도울 것이다."

(3) 사용되어진 면류관들은 여호수아에게 완전히 주는 것이 아니라 '기념하기 위하여 여호와의 전안에 두어야' 했다(14절). 그것들은 성전 보고에 보관되든지 혹은 유대인들의 전통대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의 증거로 모든 사람이 볼수 있도록 성전 창문에 걸어두든지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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