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날아가는 두루마리에 대한 이상 5:1-4

 

스가랴 선지자는 4:1절에서처럼 새삼스레 깰 필요가 없었다.

(1) 내가 다시 눈을 든즉 날아가는 두루마리가 보이더라(1절). 천사는 스가랴에게 '네가 무엇을 보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천사에게 자신이 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내가 대답하되 날아가는 두루마리를 보나이다(2절). 그는 그것을 그 '장이 이십 규빗'(즉 십 야아드)이며 '광이 십 규빗'(즉 오 야아드)인 것을 알수 있을정도로 가까이서 보았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곧 '두루마리'로, 하나님께서는 그안에 그의 율법과 복음의 큰일들을 기록하셨다. 그리스도는 그 두루마리의 주인이시다. 그것은 '날아가는' 두루마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속히 달리는' 것이다(시 147:15).

(2) 이 날아가는 두루마리는 일종의 '저주'이다. 그것은 맹세함으로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거나 도적질함으로 이웃의 소유를 침범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의 선포를 담고있다. 이 저주는 이스라엘 나라뿐 아니라 온지면에 두루행하는 저주였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수 없다. 이러한때에 우리를 위해 친히 저주가 되심으로, 그리고 요한처럼 이 두루마리를 먹이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기위해 구세주께서 오시었다는 소식이 주어진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세상은 죄로 가득차 있다. 그 당시의 유대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별히 두부류의 죄인들이 나타나 있다.

1) 도적질하는 자들 : 이들은 도적질하는 자들, 특히 하나님께 드린바 된것을 자신의 것처럼 써버리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말 3:8; 느 13:10). 말할것도 없이 성물탈취는 모든 도적질중에서 가장 사악한 도적질이다.

2) 맹세하는 자들 : 도적질한 자들이 둘째 서판에 대해 죄를 범한 자들이라면 맹세하는 자들은 첫째 서판에 대해 죄를 범한 자들이라고 말할수 있다. 망령되이 맹세하는 자들이 죄있다고 한다면 거짓 맹세하는 자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4절). 선고를 내린 자는 그것이 실행되는 것을 주목하여 볼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발하신 저주를 어느 누가 피하거나 저항할수 있겠는가? 그 결과는 매우 두려운 것이 될것이다. 무릇 도적질하는 자는 끊쳐지고. 즉 잘못을 고침받는 것이 아니라 끊쳐질 것이다. 그러한 자들은 이편에서(한글개역 성경에는 '이편 글대로'라고 되어있음-역주) 끊쳐질 것이다. 즉 이 장소, 예루살렘에서 끊쳐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가운데 있는 죄인들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며, 거룩한 성읍 역시 경건치못한 자들의 보호처가 되지않을 것이다. 도적의 집에도 들어가며...맹세하는 자의 집에도 들어가서. 하나님의 저주는 빗장이나 자물쇠로도 막을수 없다. 그 집을 그 나무와 그 돌을 아울러 사르리라. 죄는 특별히 타인의 소유에 대한 침해와 거짓 맹세의 죄는 가정과 집을 파멸케할 것이다.

 

Ⅱ. 에바에 대한 이상 5:5-11

 

앞에 나온 이상은 매우 평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해하기에 분명치 않을뿐만 아니라 어려운 것들이 있다. 어떤이들은 이 이상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그의 복음을 박해함으로써 그들의 죄악의 분량이 가득차게 되었을때 있게될 유대 민족의 마지막 멸망과 흩어짐을 예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스가랴 선지자는 시선을 돌리라는 말을 들었으며 더큰 황폐를 보리라는 말을 들었다(5절). 나오는 이것이 무엇인가 보라 하기로. 그러나 선지자는 거리가 멀어서인지 아니면 시력이 흐려서인지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수가 없었다(6절). 그래서 그 천사는 그에게 그것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해주였다.

(1) 스가랴는 곡식을 되는 '에바'를 보았다. 온땅에서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라. 그들의 모양이란 곧 유대 민족의 모양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땅'이라 함은 그들이 흩어져있는 모든 곳을 말하는 것이다. 어떤이들은 사고파는 곳에 사용되는 에바를 언급한 것은 그들가운데 가득 넘쳤던 죄가 상거래에 있어서의 사기와 착취하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2) 스가랴는 에바가운데 한 여인이 앉아있는 것을 보는데, 그 여인은 후기의 타락한 시대에서의 죄악된 유대 교회와 유대 민족을 상징한다. 저울로 산들을 달아보시는 이가 에바로 민족들과 교회들을 측량하신다. 그는 그처럼 그들을 재판하는 일에 있어 정확하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의 마당의 곡식'으로 불리운다(사 21:10). 그런데 본문에서 그가 이 곡식을 재는 그릇안에 넣고 계시는 것이다. 천사는 에바가운데 앉은 여인에 대해서 '이는 악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곧 악한 민족이라는 의미로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처럼 저버리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실로 그것은 '악' 자체만큼이나 악하였던 것이다.

(3) 스가랴는 그 여인이 에바속으로 던져지는 것과 아주 무거운 혹은 한달란트 정도의 무게가 나가는 '납 조각'이 그 에바의 '아귀' 위에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그로인해서 그녀는 에바속에 갇혀있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회개할줄 모르는 죄인들에게 진노하실경우 아무도 그 진노를 피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견딜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는 죄인에게 있어서 무겁게 내리누르는 납조각과 같은 것이다.

(4) 스가랴는 여인이 들어있는 그 에바가 어떤 먼나라로 옮겨지는 것을 보았다. 이 일을 위해 고용된 자들은 '두 여인' 이었는데 그들은 '학의 날개' 같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더욱 빨리 날수 있도록 그들의 날개에 바람이 있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유대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 원정온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 에바를 천지사이에 들었는데' 이는 그것이 양편 모두에게 무가치하며 양편 모두에 의해 버림받을 것을 의미한다. 스가랴 선지자가 그들이 그 에바를 어디로 옮겨가느냐고 천사에게 묻자(10절) 천사는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를 위하여 집을 지으려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임할 형벌이, 그들이 흩어지게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들이 먼나라들로 쫓겨가 거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준공되면 그가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그들의 재난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계속될 것이다. 그들의 죄악 역시 계속될 것이며 그로인해 그들의 마음은 강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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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순금 등대의 이상 4:1-10

 

(1) 스가랴는 이상을 받을 준비를 하였다.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1절).

(2) 그가 준비되었을때 그에게 보여진 것이 있었다. 그는 '순금 등대'를 보았다.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을 비출뿐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지속케하는 등대이다. 등불은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는 단지 등대일 뿐이다. 그 순금 등대에는 '일곱 등잔'이 뻗어나와 있었으며 초꽂이가 아주 많았고 각각 불을 밝히고 있었다. 유대 교회는 단지 하나 뿐이었으나 복음아래서는 예루살렘이나 기타 다른 곳이 아닌 그리스도가 연합체의 중심이 되신다. 이 등대는 꼭대기에 '주발'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 기름이 계속해서 떨어지며 거기서부터 '일곱 관'을 통해 일곱 등잔에 기름이 공급된다. 따라서 계속 돌아보지 않아도 각 등잔은 소모되는만큼의 속도로 기름을 계속 공급받게 된다. 그것들은 결코 기름이 모자란다거나 과잉 공급됨이 없이 항상 깨끗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주발 또한 사람없이도 계속해서 기름의 공급을 받았는데 이는 등대 양편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3절). 즉 기름은 그것으로부터 저절로 계속해서 주발로 공급되어졌으며 거기서 두개의 큰관을 통해 기름을 작은 관들로 공급하였으며 그렇게해서 기름은 등잔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등대를 보살필 사람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도움없이 교회에 대한 자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쉽게 이루실수 있음을, 그리고 종종 그렇게 하심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3) 스가랴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었다.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4절). 그는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물어야했다. 그 천사는 그에게 질문으로 대답하였다.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못하느냐. 그는 성막에 금등대가 있다는 것과 계속해서 기름을 공급해야 하는 것이 제사장의 직무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돌보는 제사장이 전혀없는데도 등대의 등잔에서 계속 불이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을때, 그는 이것의 의미가 비록 하나님께서 제사장직을 다시 세우셨다할지라도 그는 그들없이도 그의 백성들을 위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실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4) 이 이상의 일반적인 목적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비록 성전건축을 대적하는 자들이 많고 친구들은 적지만,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말미암아 이 일이 결국 복되게 마쳐지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시키려는데 있었다. 이 이상은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즉 성전건축의 일을 추진해 가고있는 그를 격려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일하고 계심을, 그리고 그 일은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영예롭게 하시는 일임을 알아야했다.

1)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내적인 영향을 미침으로 이 일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는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가 아니라 그 자신의 '신'으로 그 일을 행하실 것이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자극받고 또 활기를 띨수 있었던 것은 만군의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하였던 것이다(스 5:2). 이는 선지자들의 성령의 입이 되어 그들의 마음에 말했기 때문이었다. 다리오의 마음이 그 선한 역사에 대해 호의를 베푸는 쪽으로 기울어지게 된것도 그리고 그 일을 대적하던 자들이 얼이빠져 그 일을 방해하지 못하게 된것도 모두 같은 여호와의 신에 의해서였다. 도구들이 실패할때, 우리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선으로 친히 그 일을 행하시도록 그에게 내어맡겨야 한다.

2) 그들이 도중에 부딪치게될 온간 난관과 방해,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는 문제들은 모두 제거되어질 것이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앞에서 평지가 되리라(7절). 유대인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큰산처럼 거만하고 완고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실 역사가 있게될 그 산은 두더지가 파놓은 흙더미처럼 점차 낮아지게 된다. 믿음은 산들을 옮겨 평지로 만들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스룹바벨이시다. 그의 은혜로 이루지못할 어려운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3) 이 선한 역사를 시작한 손이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때에(7절).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9절). 여기서 그는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이시자 마치시는 분이신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그 일이 마쳐지게 될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은혜에 의해서,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우리를 위해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는 그의 선하신 역사에 의한 것임을 감사함으로 인정할수 있어야 한다.

4) 이것은 유대인의 귀환에 관해 이전에 주어진 예언들을 완전히 인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성전이 다 지어지게 될때 너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줄을 알게되리라."

5) 이것은 멸시하는 눈으로 이 일의 시작을 바라본 자들을 효과적으로 침묵시킬 것이다(10절). 하나님의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멸시해서는 안된다. 겨자씨 한알이 큰나무를 이룰수 있는 것이다.

6) 그 일이 잘 마쳐질까 절망하였던 자들이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7) 이 일은 항상 교회의 유익을 위해 역사해온 하나님의 섭리를 돋보이게 할 것이다. 스룹바벨은 자기의 일을 할뿐이나 그것은 '이 일곱,' 즉 우리가 3:9절에서 살펴본 여호와의 그 일곱 눈이 함께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가 그보다 앞서 가지않았다면, 그리고 그 일을 행함에 있어서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수 없었을 것이다. '온세상에 두루 행하는' 그 일곱 눈은 모두 스룹바벨이 그의 다림줄로 똑바로 놓고있는 '돌' 위에 있다. 자기손에 다림줄을 가지고있는 자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질수 있어야 하며 또 그의 인도하심을 의지하는 가운데 행할수 있어야 한다.

 

Ⅱ. 두 감람나무의 뜻 4:11-14

 

스가랴 자신을 격려하기에 충분한 말이,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격려할수 있기에 충분한 말이 그에게 주어졌으며 그것이 그가 본 이상의 주요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세세한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1) 그의 질문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등잔들이 달린 그 등대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고 성전이며, 또한 타오르는 등잔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구원이다. 그러나 그는 '두 감람나무'(11절), 즉 '감람나무 두가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를 원했다(12절). 그는 두 감람나무가 자라, 하나는 등대 우편에 하나는 등대 좌편에 있는 것을(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은 그처럼 가까이 준비되어 있다) 주목하였을뿐만 아니라 특별히는 등대에 넘치도록 기름을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 가지가 자신을 비어 '두 금관'을 통해 등대의 꼭대기에 있는 금주발에 금기름을 흘려보내는 것을 주목하였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채우시고자 자신을 비우셨다. 그리고 그의 보혈은 우리가 필요로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주는 '금 기름'이다.

(2) 천사는 이제 다시 그에게 알려주기전에 그로하여금 그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하였다.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13절). 즉 "만일 네가 등대가 교회라는 것을 알았다면 너는 그 등대에 기름을 공급하는 감람나무가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을 생각할수 있지 않겠느냐?"

1) 만일 우리가 그 등대를 가시적인 교회, 특별히 그 당시의 유대인들의 교회로 이해하며 그 일차적인 목적이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온세상이 주앞에 모셔섰는 자'인 '기름발리운 자 둘'은 행정직과 사역직이라고 하는 두가지 큰직임을 나타낸다고 볼수 있다. 이 두 직임은 그 당시 위대하고 선한 사람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맡겨져있었다. 왕과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로 그들은 등잔의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기위하여 자신들의 지혜, 용기, 열심을 계속적으로 금주발에 흘려보내야 했다.

2) 만일 우리가 그 등대를 진정한 의미의 교회로, 즉 참된 신자들의 교회로 이해한다면 이 '기름발리운 자 둘'은 구속자이시며 위로자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을 나타내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감람나무'인 그리스도로부터 '감람나무 가지'인 성령을 통하여 모든 은혜의 금기름이 신자들에게 전달되며 그들의 등잔을 계속 타오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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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여호수아에 대한 이상 3:1-7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처음 정주하게 되었을때 그 선두에 여호수아라 하는 지도자가 있었다. 그리고 본문에 포로 시대이후 두번째로 가나안 땅에 정주하려고함에 있어 매우 활동적인 사람으로 여호수아라고 하는 똑같은 이름의 또다른 사람이 나타나고 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곧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들 두사람은 모두 장차오실 이로 우리의 대군이시며 대제사장되신 이의 모형이다. 스가랴와 대화하던 천사는 그에게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여주었다. 아마도 스가랴는 그를 자주 보았던것 같으며 따라서 두사람 사이가 매우 가까웠던것 같다. 그러나 그는 단지 사람들앞에 비춰진 그의 모습을 보았을뿐이었다. 따라서 여호와앞에 선 그의 모습은 이상을 통해서 보아야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앞에 섰고. 이는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즉 그는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섰던 것이다. 죄와 부패는 우리가 하나님앞에 서게될때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거스리는 두가지 커다란 저해요소이다.

(1) 여호수아는 죄인으로 고소되었으나 곧 의롭게 되었다.

1) 맹렬한 방해가 그에게 있었다.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사단은 마치 기소자 혹은 증인처럼 서있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직을 다시 세우려하시자 사단은 그들가운데서 발견되는 죄를 이유로 들어 그것을 반대하였다. 사단으로하여 우리를 대적할 기회를 주는 것은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는 사단의 교활함과 악의가 우리에게 가져올 온갖 반대에 맞설 각오를 해야만 한다. 그를 대적하라. 그러면 그가 우리를 피할 것이다.

2) 승리의 방어가 취해졌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2절). 재판장되신 이가 성도들의 친구라는 것은 그들의 복이다. 여기서 사단은 권세를 가지신 이에게 책망을 받고있다. 처음의 '여호와'는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는 여호와를 말하는 것이고 두번째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에서의 '여호와'는 창조주되신 여호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효과있게 하는데 사용된다. 사단이 제사장을 대적하지만 그는 예루살렘에 대해 아무뜻도 이루지 못하게될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곳을 택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그들을 택하셨을때 그는 그들이 가장 나쁜 것임을 아셨다.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여호수아가 그러했으며 제사장직이 그러하였고 그 백성들이 또한 그러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겠기에 그들을 위하여 그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지난날 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있을 당시 비천할수밖에 없고 경멸받을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을 생각할수가 있다. 그들은 놀랍게도 불에서 꺼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가 그들을 버리시겠는가?

(2) 여호수아는 더렵혀진 자로 나타나지만 곧 정하게 되었다. 그는 모두가 부정한 자들로 여겨지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다. 그는 허름할뿐만 아니라 '더러운 옷'을 입음으로 그의 위엄있는 직무와 그의 거룩한 사역에 어울리지 않게하고 있었다(출 28:2). 여호수아의 옷은 그에게 부끄러움과 치욕을 끼쳤다. 그러나 그는 천사앞에 서있었다. 그는 직무를 수행하기위해 입을만한 깨끗한 세마포가 없었다. 이것은 제사장직이 비천하고 멸시받았을뿐만 아니라 거룩한 일에도 부정이 따라다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귀환한 유대인들은 우상숭배에서 떠났으므로 송사받을만한 어떤 부정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가운데 잘못된 많은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들과 다투어 싸우는 영적인 대적들이 있었다(스 1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앞에 서도록 허락받았다. 그를 깨끗케하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신자들안에서, 그리고 신자들을 위해 행해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이중적 역사를 나타내주는 두가지 일이 여호수아를 위하여 취해졌다.

1) 그의 더러운 옷이 벗겨졌다(4절). 이것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것 가운데 나타나있다. 권세있는 자로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실때 그는 우리의 죄과를 제하여 버리신다. 즉 그는 우리의 본성을 성결케하시며 우리로 옛사람을 벗을수 있도록 하시고 타락한 애정과 정욕의 더러운 옷을 벗어던질수 있도록 하신다.

2) 그는 새옷을 입었다. 즉 더러움의 수치가 제거되었을뿐만 아니라 벌거벗음의 수치가 가려지게 되었다.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여호수아는 그 자신의 깨끗한 세마포를 가지고있지 않았으나 전에 더럽게 보였을때와는 달리 이제 그는 사랑스럽게 보일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 영적인 제사장으로 삼으신 자들은 그의 의의 흠없는 옷을 입고 그들에게 장식이 되는 성령의 은혜와 함께 하나님앞에 서게 된다.

(3) 여호수아는 그의 직임에 다시 임명되어 세워졌다.

1) 제사장직의 면류관이 그에게 씌워졌다(5절). 이것은 스가랴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를 회복시키시거나 소생시키고자 하실때 선지자들과 백성들로하여금 그것을 위해 기도하도록 감동시키시고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서 그것을 행하신다. 스가랴는 천사들이 여호수아의 머리에 관을 씌우기를 위해서 기도했으며 그것은 즉시 이루어졌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제사장의 옷까지 입혀졌다.

2) 하나님의 '평화의 언약'으로 불리우는(민 25:12) 제사장직의 언약이 여호수아와 더불어 새롭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직무의 특권'으로 증인들앞에서 그에게 선포되어지고 전달되어지고 있다(6,7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여야 했다. 즉 백성들앞에서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가야 했으며 신중히 걸어야 했다. 그는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야 했으며 자기보다 낮은 제사장들이 각자의 의무를 다하도록 돌아보아야 했다. 그가 맡은 일을 잘 이행할때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실 것이다. 대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법을 만든다거나 다른 예배의식을 제정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집을 판단하여야 했다. 즉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들이 준수되고 있는지 돌보아야 했다.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너는 성전의 모든 뜰을 감찰할 것이며 각 곳에서 행해져야할 예배의식이 잘 지켜지도록 해야 하느니라." 내가 또 너로 여기섰는 자들중에 왕래케하리라.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자들이 곧 천사들중에 왕래하는 자들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듯이 그들 역시 그렇게 행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19:10절에서는 '형제들과 같이된 종'이라고까지 하였다.

 

Ⅱ. 순에 대한 예언 3:8-10

 

다윗에게 주어진 약속들이 종종 점차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들로 나아갔듯이, 그리고 다윗의 나라가 메시야의 나라의 모형이었듯이,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더욱 위로 올라가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또한 여호수아의 제사장직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그림자였다. 여호수아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역시 죄인들과 고통받는 자들을 위한 대제사장이시다.

(1)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주어지고 있다(8절). 여호수아야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너는 이제껏 네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느니라. 그러나 보라 너보다 더크신 이가 가까이에 계시니라. 이제 너와 네앞에서 들으려고 앉아있는 네 동료 선지자들은 그에 관해서 들을지니라." 그들은 '예표'를 위해서, 즉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상징과 모형을 위해 세워진 자들이다. 그들은 놀라는 자들이다(한글개역에는 '예표의 사람이라'고 되어있음-역주). 즉 그들은 자기들의 형편이 얼마나 복되게 바뀌었는가를 생각하고서 놀랐던 것이다.

(2) 여러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약속의 내용은 성전건축이라고 하는 큰일에 종사하고 있는 여호수아와 그의 친구들을 격려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메시야가 오시리라고 하였다. 내가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그는 순이시다. 여러 곳에서 그는 그와 같이 불리우고 계시다. '여호와의 순'(사 4:2, 한글개역에는 '싹'이라고 되어있음-역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순이 나며'(사 11:1, 한글개역에는 '싹'이라고 되어있음-역주). 그의 시작은 연한 순처럼 미약하나 때가되면 큰나무가 될 것이다(사 53:2). 그래서 그 가지에서 우리의 모든 과실을 거두게될 것이다. 그는 '여호수아앞에 세운 돌'이시다. 이는 아마도 여호수아가 참예한 가운데 아주 엄숙하게 놓여졌을 성전의 기초 혹은 주요 모퉁이 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나무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순이실뿐만 아니라 건축의 시작이라고 할수 있는 기초이시다.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성부 하나님의 눈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히 고난당하는 중에 계신 그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지켜보았다. 모든 선지자들과 구약의 성도들의 눈이 이 한돌을 응시하였다. 그리고 모든 선지자들의 눈 역시 그의 위에 있다. 그들은 그를 바라봄으로 구원을 얻게된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건축자들은 거칠고 눈에 거슬린다고해서 이 돌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잘 다듬고 매끈하게 하고 잘라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하실 것이다. 이 돌은 비록 기초로 놓여졌으나 보석이다. 새긴 돌이란 곧 대제사장의 흉패에 있는 보석들을 가리키는 듯싶다(출 28:21,22). 그에 의해서 죄가 제거될 것이다. 죄악과 죄의 권세 역시 마찬가지로 제거될 것이다. 내가...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대제사장이 자신을 장식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이름들이 새겨진 보석들을 취하였을때 그는 '성물의 죄건을 담당하도록' 지시받았다(출 28:38).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그땅의 죄악을 담당하였으나 그것을 제할수는 없었다. 그 일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하실 일이었다. 어떤이들은 "새긴다"는 말을,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때문에 그리고 우리를 낮게하도록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가해진 상처와 채찍질을 나타내시기 위해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모든 일의 효력이 나타날 것이다.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10절). 죄악이 사라지게 될때 우리는 평온한 가운데 쉴수 있게되며 악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수 있게된다. 우리는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그늘아래 앉아있으며 따라서 율법의 저주의 타는듯한 열기로부터 피할수가 있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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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척량줄에 대한 이상 2:1-5

 

이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슥 1:16)는 사실을 확신시켜주어야 했다.

(1) 그는 이상중에 한사람이 예루살렘을 척량하러 가는것을 보았다(1,2절). 내가 또 눈을 들어본즉. 1장 끝부분에서 그는 예루살렘의 대적들이 낭패를 당하고 꺾어지는 것을 보았으므로 이제는 예루살렘이 파멸되지않으리라는 것을 소망하기 시작한다. 스가랴가 본 '척량줄을 그 손에 잡고있는' 사람은 곧 그리스도 예수이시다. 그는 자기 교회를 지으시는 건축기사로 줄과 자를 사용해서 정확하게 지으신다(참조. 슥 3:3). 스가랴는 그에게 그 척량줄을 가지고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기꺼이 그에게, 예루살렘을 척랑하여 그 각각의 치수를 알고자 가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즉 그 주위의 성곽을 세우는데 필요한 치수를 산정하고 그 치수를 성안에 거주할 사람들의 수효와 비교함으로 얼마나 더 넓혀야할지를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무리가 예루살렘으로 떼지어 모여들때(사 60:4), 그때가 바로 예루살렘의 장막터를 넓힐때이다(사 54:2).

(2) 그는 이 이상이 예루살렘에 대해 좋은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가랴와 말하던 천사가 나가자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았다.' 이는 스가랴를 격려해줄 목적으로 그가 먼저 이 이상을 그에게 설명해주고자 함이었다(4절). 그것이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즉 예루살렘은 현재의 치수와는 비교도 안될만큼 넓혀질 것이다. 그곳은 마치 전혀 성곽이 없는 곳인양 한없이 넓혀질 것이며 마치 가장 강한 성곽을 가진 곳인양 안전할 것이다. 그곳에 가장 든든한 방호물이 될 수다한 사람이 거할 것이다. 그곳은 안전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면에서 불성곽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이 당시에 사방에 전혀 성곽을 가지지않았으나 하나님이 불성곽이 되실 것이다. 어떤이들은 그것이 맹수들을 쫓기위해 양무리주위에 불을 피우는 목자들이나 광야에서 장막주위에 불을 피우는 여행자들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친히 그러한 성곽이 되실 것이다. 그뿐아니라 그 불성곽은 사면에 둘러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실' 것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부분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었다. 즉 그곳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우 번창한 성읍이 되었던 것이다. 그곳이 회복되는 기간이 얼마나 길었으며 또 그 전에는 얼마나 보잘것없는 곳이었던가를 생각해 볼때 그것은 기대이상의 놀라운 변화였다.

 

Ⅱ. 고향에 돌아올 것을 촉구함 2:6-9

 

어떤 사람은 포로가 된 유대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자유를 준 고레스의 포고가 그들 모두를 돌아가게 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님께 마음에 감동을 받고간 자는 약 사만명에 불과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대로 머물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이 사로잡혀있는 땅은 자신들이 태어난 곳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본국에 대한 애착도 없었을뿐만 아니라 그곳에 가려면 견디기 어려운 많은 난관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에 대한 불신, 안일함과 세상부귀에 대한 사랑, 이스라엘의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돌아간 자들에 대한 무언의 비난이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디에 흩어져있건 모든 자유민은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의해 다시 선포되고 있다. 그들은 큰소리로 소환되었다.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6절). 예루살렘 재건의 약속에 뒤이어 적절하게 이 내용이 나온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루살렘 성읍을 세우실 것이라면 그들은 와서 그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곳에 거하여야할 것이며 바벨론에서 더이상 굽실거리지 말아야할 것이었다. 그들이 현재는 흩어져있으나 서로 협력하여 공동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일치단결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6절). "어떤이들은 세상 이끝에, 어떤이들은 저끝에 있으나 이제 너희는 서로 돕기위해 다시 함께 모일 것을 생각해야만 하느니라."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자유케된 것을 나타내 보일수 있어야 한다.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7절). 그리스도께서 포로된 자들에게 자신이 이루신 구원을 선포하셨을때 우리 각사람은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은혜아래 있게된 후부터는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못하도록 결심할 필요가 있다. "시온아 속히 네 본국으로 돌아감으로 네 자신을 구원하라. 죄로 더럽혀진 땅에 계속 거함으로 네 자신을 멸망케하지 않도록하라."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고 계시며 따라서 질투함으로 그것을 변호하실 것이다(8,9절). 스가랴와 대화하던 사자(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구원을 이루기위해서 그가 행해야할 사명에 대해 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되신 그리스도께서 "그가(즉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영광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먼저 '영광이 있는'(롬 9:4) 유대 나라와 유대 민족에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영광후에'(한글개역에는 '영광을 위하여'라고 되어있음-역주), 즉 '그들을 돌아보신 후에'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고자, 즉 복음의 능력으로 그들을 사로잡고 그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키기 위하여 그는 열국으로 보내심을 받았다. 그는 또한 그들을 노략한 나라들로 보내심을 받았는데 이는 시온에 대해 행해진 악을인해 그들에게 보수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되리라. 즉 그들이 노예로 삼았던 자들에게 노예가 될 것이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대적들에 대해 승리를 거두심으로써 성취되었다. 즉 그가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리셨으며 또 그것들을 밝히 드러내셨다(골 2:15).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위해 행하실 일은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의 증거가 될것이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그는 교회를 대적하여 행한 것을, 이중으로 보호되고 있는 가장 섬세한 부분인 그의 눈동자에 대하여 해를 가한 것으로 여기신다.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시 17:8).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잠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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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회개할 것을 촉구함 1:1-6

 

(1) 스가랴의 사역의 기초 : 여호와의 말씀이...스가랴에게 임하니라(1절). 그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라고하는 거룩한 사명을 받았다.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일로써 성령께서 증거하심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다. 여호와의 말씀이 먼저 '다리오 왕 이년'에 그에게 임하였다. 포로되기 이전에 선지자들은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통치 년수로 자신들의 저작물 연대를 밝혔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들이 속해있는 바사 왕들의 통치 년수로 연대를 밝히고 있다. 스가랴는 '다리오 왕 이년 팔월'에 처음으로 자신의 설교를 행하였다. 반면 학개는 같은해 유월에 그리하였다(학 1:1). 스가랴는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이었으며, 학개와 마찬가지로 선지자라고 불리운 사람이었다(학 1:1).

(2) 스가랴의 첫사역 : 그는 긍휼의 약속들을 선포하기전에 먼저 회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주의 길'이 먼저 예비되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율법이 먼저 전파되고나서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스가랴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열조들과 다투신 것을 기억케하였다(2절).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너희는 그 비참한 결과를 너희 눈으로 보았느니라." 우리 앞서간 자들이 겪었던 하나님의 심판은 회개케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는 우리로하여금 저주를 없애게 할뿐 아니라 그것을 복으로 바꾸어주는 것이 되기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돌이켜 하나님과 화평할 것을 그들에게 촉구하였다(3절). "패역한 자리에 있는 자들은 충성된 자리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선한 백성이 누리는 온갖 특권을 누리게될 것이다." 여기서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은 하나님이 세번이나 반복해서 '만군의 하나님'으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두번째의 '만군의 여호와'는 명령의 권세와 의무를 보여주며 마지막의 것은 약속의 효력과 가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결코 무익한 반복이 아니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열조처럼 완고함을 고집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4절). 우리는 선조들에 의해 좌우되기가 아주 쉽다. 어떤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우리 열조보다 더 현명하겠는가? 그들은 결코 선지자들에게 마음을 쓰지 않았도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들에게 마음을 써야 하는가? 그들은 선지자들을 거스리는 법을 만들었도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들에게 관대해야 하는가?"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의 열조들은 선지자들을 무시했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일로인해 그들에게 심히 진노하셨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에 관심을 쏟을수 있어야 하리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길 악한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이것은 그 선지자들이 말한 내용이었다. "이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것이라. 속히 돌이키는 것이 임박한 멸망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 "너희 열조와 그들에게 전파한 선지자들은 지금 어찌 되었는가? 그들은 모두 죽어서 이세상에 있지 않도다"(5절). 우리와 우리의 선지자들은 저세상에서 영원히 살것이다. 따라서 저세상을 준비하는 것이 이세상에서의 우리의 가장 큰관심이자 일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전파하는 자들도 죽고 듣는 자들도 죽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죽지않았다. 그것은 효력을 나타냈으며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만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그들을 회개시키지 못한다면 경고된 재난이 그들에게 임할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경고된 재난을 피할수가 없었다. 인간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결코 효력없게 하지 못한다. 만일 지시된 방법으로 그것을 막지않는다면 곧 그 경고대로 재난이 닥치게될 것이다. 그들이 돌이켜 이르기를(6절). 그들은 마음을 돌이켰다. 그러나 그들이 인정했을때는 이미 민족을 멸망에서 건져내기에는 너무 늦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우리는 그의 참되심과 공의로우심을 인정할수 있어야 한다.

 

Ⅱ. 말탄 자들의 이상 1:7-17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주의를 불러 일으키고자 이상과 계시로써 스가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방법을 택하셨다. 앞으로 계속되는 이상들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즉 포로된 자리에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고자 하는 자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처럼 보인다. 다른 모든 이상들의 서론격이라고 할수 있는 이 이상의 목적은 유대인들에게, 비록 그들이 현재는 버림받은것 같고 그들의 형편이 비참한것 같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심을 확신케하는데 있다. 이 이상은 그가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한지 삼개월 뒤인 '십일월 이십사일'에 임하였다(7절). 그 설교가 좋은 효과를 거두었으므로, 당연한 귀결로 백성들은 하나님께 돌아왔으며 하나님께서는 긍휼로 그들에게 임하셨다.

(1) 스가랴는 '골짜기속'에, 즉 두 언덕사이에 어둡게 그늘진 작은 '화석류나무' 숲을 보았다. 이것은 당시에 유대 교회가 처한 낮고 어둡고 쓸쓸하고 슬픈 형편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그늘진 화석류나무 사이에 한사람이 홍마를 타고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곧 그리스도 예수로써 그는 전에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여호수아앞에 나타나시기도 했었다(수 5:13,14). 교회가 형편없는 처지에 놓여진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나타나시는 것이다. 그는 급박한가운데 전쟁에 임하는 사람처럼 말을 타고 계셨다. 즉 자기 백성을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계셨다(신 33:26). 그는 '홍마'를 타고 계셨는데 바로 이 승승장구하는 왕은 이사야 63:1,2절에서는 '홍의'를 입고서 나타났었다. 붉은 색은 격렬한 색깔로, 이는 곧 그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14절) 그의 대적들에 대하여 격노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율법아래서 그리스도는 홍마를 타고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피를 흘리는 싸움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복음아래서 그는 승리를 얻었기때문에 '흰말'을 타고있는 것으로 나타난다(계 6:2;19:11). 그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이들은 주 예수를 수종드는 천사들로 그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교회를 받들기위해 대기하고 있는 자들이다. 그들중 어떤이들은 심판을, 또 어떤이들은 자비를, 그리고 또다른 이들은 갖가지 사건을 수행할 것이다. 스가랴는 자신을 가르치는 한 천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천사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 내 주여 아들이 무엇이니이까(9절). 그에게 다음과 같은 답변이 주어졌다. 이는 여호와께서...보내신 자들이니라(10절). 즉 그들은 여호와의 사자들이었던 것이다.

(2) 스가랴가 들은 것과 그가 받은 지시 : 그는 천사들이 보고하는 것을 들었다(11절). 그들은 사자로 파견되어 밖에 나가있다가 돌아와서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이와같은 보고를 하고있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두루다녀보니 온땅이 평온하여 정온하더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 세상이 매우 태평함을 알수가 있다. 즉 교회가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못해서' 평안치 못한 반면, '온땅은 평안하여 정온하였던' 것이다. 교회와 상관이 없는 자들이 안전한가운데 지내며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이 잘 되어가고 있었다. 비천한 유대인들이 계속해서 고통중에 있는동안 갈대아인들과 바사인들은 편안히 지내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는 교회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하고 계신 것을 들었다(12절). 천사들은 이 세상일의 형세를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제거해달라고 하는 천사들의 어떠한 기도도 찾아볼수가 없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사자'가 바로 위대하신 중보자가 되신 분이시다. 천사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그는 곧바로 하늘을 향하여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당신의 교회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라고 말하였다. 언제까지...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불쌍히 여겨야할 대상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현재 폐허가 되어있는 유다의 성읍들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에 대해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오래 계속되었기때문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잠깐 은혜를 베푸사 그들을 조금 소성케하셨으나(9:8) 그 칠십년의 포로생활의 자국은 매우 깊이 남게되었다. 그들이 점차로 포로가 되었듯이 포로된 그들의 형편또한 점차로 풀렸다. "여호와여 우리는 여전히 칠십년 동안의 무거운 진노의 짐아래 있나이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려나이까?" 그는 이 중보자에게 은혜로운 답변이 주어지는 것을 들었다(13절).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 언약의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 즉 자비와 구원의 약속으로 그리고 시작하신 일을 이루신다고 하는 약속으로 대답하셨다. 그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이것을 알려 그들을 위로하라는 사명과 함께 그 천사에게 주어진 답변이 자신에게 반복되는 것을 들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씀하셨다.' 스가랴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소리'가 되었다. 그 소리는 "외치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허물을 보여주었던 선지자들이 이제는 그들에게 큰소리로 그들의 평안을 보여주기 위해 외쳐야 한다(사 40:2,3,6). 그는 하나님의 진노가 예루살렘의 원수들에게 임박했음을 선포하여야 했다(14절). 온땅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대해 행한 온갖 악행을 조금도 후회함이 없이(15절) '평안하여 정온하였다'(11절). 하나님께서는 고통당해야할 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너무 지나치게 고통케한 자들에 대해서 공정하게 진노하셨다. 이는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참된 인간애가 곧 선한 신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쳐야만 하였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16절). "내가 진노로인해 멀리 떠나있었으나 이제 사랑으로 다시 돌아왔도다"(17절). 만군의 여호와되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비록 많은 시련에 봉착하게 되겠지만 성전이 완성될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현존하신다는 징표를 가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확신케하셨다. 예루살렘은 다시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될 것이다.'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이는 그 성읍을 정밀하고 동일한 양식으로 재건하기 위해서였다. 이 나라가 다시 부해질 것이며 중다하게될 것이다.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쇠퇴해있는 다른 것도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와같이 흥왕케된 성읍들을 자신의 성읍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에 의해 축복받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소출이 풍성하고 백성이 중다하게 되어 그 땅을 가득 채울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시온과 모든 애통하는 자들을 위하여 안위를 남겨두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해내셨을때 처음 그들을 한백성으로 세우셨듯이 바벨론에서 인도해내신 지금도 그들을 한백성으로 다시 세우실 것이다.

 

Ⅲ. 네 뿔과 네 공장에 대한 이상 1:18-21

 

스가랴 선지자가 본 이 두번째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선두에 서서 교회의 대적들의 가공할만한 힘에 대항하고 있는 것을 보게된다.

(1) 우리는 여기서 교회를 위협하고 멸절케한 원수들을 보게된다. 내가 눈을 들어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18절). 19절에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되어져 있다.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 뿔이니라. 즉 그 뿔들이 그 나라와 성읍에 있는 유대인들을 헤친 것이다. 그 뿔들은 마치 광포한 황소가 뿔로 들이받듯이 그들을 받았다.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못하게 하며(21절). 그 뿔들은 네 개였다. 즉 유대인들은 사방으로 그것들에 둘러싸였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거민들, 그리고 그들과 뜻을 같이하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건축에 착수했으나 사방에서 대적들이 그 일을 하지못하게 하였다. 르훔과 심새, 그리고 성전건축을 반대하는 다른 모든 사마리아인들이 바로 이 뿔들이었다(스 4: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로 성곽건축을 반대하였다(느 4:7).

(2) 우리는 여기서 유력하고 적극적인 교회의 후원자들을 보게된다. 스가랴는 직접 네 뿔을 보았으나 이 뿔들을 제거할수 있는 능력을 지닌 네 명의 공장들을 여호와께서 보여주셨다(20,21절). 육신의 안목으로 볼때 우리는 교회를 대적하는 자들의 세력을 보게된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가 안전함을 보게되는 것은 신앙의 안목으로 보기 때문이다. 공장들(어떤이들은 그 뿔들이 철로 되었으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은 그 뿔들을 쳐서 떨어뜨릴 기술과 능력을 지닌 자들이다. 어떤이들은 이 네 명의 공장들을,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로 이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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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랴 14장 - study  (0) 2014.07.21
스가랴 13장 - study  (0) 2014.07.19
스가랴 12장 - study  (0) 2014.07.19

# study
(1~21절)
하나님 나라의 모습 - 본장에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역사의 마지막 시점에 되어질 일들이 예언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여호와의 날이 가까울 때에 열국이 예루살렘과 싸우게 되고 함락시키지만, 여호와께서 남은 자는 구원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는 구원과 축복의 시냇물이 온 땅 위에 넘치게 될 것을 묘사함으로써 복음의 세계적 전파를 예견했다. 다시 말해서 악한 사탄의 사주를 받은 대적들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지만 그곳은 다시 회복되고, 오히려 열국 중에 남은 자들이 여호와께 돌아오며 매년 예루살렘에서 장막절을 지키게 된다. 이같은 본장은 예루살렘의 남은 자가 구원을 얻고 이방에서 남은 자가 돌아옴으로써 성취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스가랴 예언의 마지막 부분은 오랫동안 대망되어지던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그 왕국의 백성에 열국이 포함될 것을 밝힘으로써 하나님 구속의 보편성을 보여주는 묵시 문학의 정수이다<단 서론, 묵시 문학>. 따라서 본장은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기록된 요한계시록과 에스겔서 해당 구절과 병행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1절]
여호와의 날<욜 서론, 여호와의 날>.
[2절]
남은 백성은...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열국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치게 하는 것은 에스겔의 곡과 마곡의 전쟁(겔 38, 39장) 및 요한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계 16:12~16; 계 19:17~21; 계 20:7~10)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후의 전쟁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남은 백성'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치는 열국과 싸우시는 것도 결국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기 위한 것이다.
[3절]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이는 과거에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신 하나님(출 14:14, 25)이 마지막 날에도 사탄과 싸워 승리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과거에 신자들에게 베푸신 구속적 은총은 성도들의 신앙적 승리에 대한 보증이 된다.
[4~5절]
그의 발이...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그리스도 재림의 장소가 '감람산'인 것처럼 나와 있다. 성경의 다른 곳에도 유사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즉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쪽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겔 43:2)라는 말씀과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중에서부터 올라가서 성읍 동편 산에 머물고'(겔 11:23)라는 말씀 및 예수께서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고 하신 말씀이 그러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루살렘이 꼭 지역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처럼 감람산도 꼭 지리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즉 성도들이 공중에서 주를 맞이할 것이라는 표현(살전 4:17)이나 예루살렘이 교회와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 등으로 볼 때 감람산 역시 종말론적인 입장에서 성도에게는 구원을, 불신자에게 심판을 내리는 상징적 처소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성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장차 감람산을 밟으며 재림하실 것이다. 한편 매우 큰 골짜기는 감람산이 갈라져서 동에서 서로 생긴 것이며, 이곳은 '판결 골짜기'인 '여호사밧 골짜기'(욜 3:2, 12, 14)와 같은 장소로 본다. 그런데 '여호사밧 골짜기'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장소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곳 역시 주께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는 것(마 25:31~46)처럼 성도들에게는 피할 길을 제시하고 악인들에게는 심판을 베푸는 장소가 될 것이다.
(6~11절)
메시야 왕국의 수립 - 앞 부분이 그리스도 재림 전의 상황과 재림하시는 그 시점의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면 이 부분은 그 이후에 되어질 일들을 예언한 것이다. 즉 예루살렘의 영원한 번영과 평강은 여호와만이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상황과 더불어 하나님의 주권이 직접적으로 이 땅에 내리는 그때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이 부분의 묘사는 겔 40~48장 그리고 계 21:1~22:5절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의 상황과 유사하다. 이러한 놀라운 축복의 날에 대한 깊이 있은 이해는 성도들로 하여금 오늘의 고난을 참고 이기며 오히려 그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는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활력소가 된다.
[6~7절]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곧 주의 재림의 날(마 24:36)이 되면 천체에 변화가 오고 세상의 빛이 사라지게 된다(욜 3:15; 마 24:29).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양이 새로운 빛이기 때문에 더 이상 해와 달이 필요없으며 밤이 없게 될 것임을 밝혀 준다(계 21:23~25).
[8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즉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커다란 축복을 예언한다(겔 47:1~12; 욜 3:18). 이 예언은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으나 완전한 성취는 주의 재림 때에 이루어진다.
[9~11절]
그리스도의 재림 - 여호와께서 홀로 천하의 왕이 되시고, 그의 영광이 세상에 가득할 것을 의미한다(합 2:14). 하나님은 원래 창조주로서 천하를 다스릴 왕권을 갖고 계셨으나 지금까지는 그것을 거부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 이르면 이러한 사실이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날에는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고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저주가 없을 것이다. 즉 지상에서 범람했던 온갖 부정한 것들이 사라짐으로 성도들이 행복한 상태를 체험할 것을 보여 준다.

(12~15절)

열방에 대한 징계 - 앞 부분에서 예루살렘에 더 이상의 징벌과 저주가 없으며 영광 가운데 거할 것이 약속된 반면, 여기에는 대조적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한 원수들에게 주어질 다음과 같은 저주와 징계가 기록되어 있다. 살과 눈과 혀가 썩어 들어가는 재앙이 임하며(12절; 사 66:24; 계 16:10, 11) 상호간에 전쟁을 일으켜 자멸하게 되며(13절; 11:6; 삿 7:22) 재물을 빼앗기고(14절) 육축도 재앙을 받는다(15절). 이와 같은 재앙은 마귀의 사주를 받아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멸망을 상징한다(계 19:17~21; 계 20:7~10, 12~15).

[14절]

의복. 당시 유대에서는 의복의 종류가 매우 다양하였을 뿐 아니라 값도 매우 비쌌다. 그래서 의복은 큰 부를 상징하는 데 쓰였다.

(16~21절)

경배 받으실 하나님 - 이 부분에는 메시야 왕국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나온다. 특별히 이방인 중에서도 많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복을 받을 것과 돌아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주어질 것을 선언한다(16~19절).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지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땅의 모든 것이 거룩한 성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는 메시야 왕국의 완전한 성화가 기록되어 있다(20, 21절). 이와 같은 메시야 왕국의 완전한 성취는 과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당시의 자연 질서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새로운 통치가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16절]

열국 중에 남은 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남은 자가 예루살렘을 치러 온 열국 중에도 있을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아모스가 '에돔의 남은 자'(암 9:12)를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을 정복하는 방법은 진멸하는 것 뿐만 아니라 회개케 하여 돌아오게 하는 방법도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원수조차 택한 자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당신을 대적하던 사울을 택하여 당신의 사역을 수행할 종인 바울로 만드신 것에서도 볼 수 있다.

[17절]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비'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적 축복을 상징한다(호 6:3). 왜냐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10~11월에 이른 비가 내려야 씨를 뿌리고, 4~5월에 늦은 비가 와야 추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비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축복을 거두신다는 뜻이다(욜 2:23).

[18절]

애굽 족속은 이스라엘의 대적이고 종 되었던 집이기 때문에 모든 이방의 대표로 언급된 것이다(사 19:23~25).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비가 없으리라'는 뜻이다. 애굽에 비가 없다는 것은 큰 재난을 가리키는데 왜냐하면 애굽의 젖줄인 나일 강의 근원이 결국은 말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21절]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만물이 새롭게 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죄와 저주 아래 있는 '가나안 사람'(창 9:25; 레 18:24; 신 7:2; 신 9:4)은 참여치 못한다. 이것은 결국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 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계 21:27)는 말씀처럼 만물과 사람이 모두 다 정결케 되는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을 깨우쳐 준다.


# 해설

메시야 재림의 증거들 (1~8절)

그리스도의 재림과 역사의 마지막에 될 일들을 예언하는 본장은 묵시 문학의 정수에 해당한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교회에게 닥치는 환난과 대적들에게 임할 최종적 심판 및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완전한 축복을 예언한다(겔 47:1~12; 욜 3:18). 역사의 궁극적 목적은 여호와의 충만하신 임재와 통치이나 그 목적이 성취되기 전에 먼저 해산의 고통이 수반된다. 본문은 그러한 역경을 극복한 후의 이스라엘의 궁극적 승리를 드라마틱한 역전 광경으로 묘사한다.

메시야 왕국의 수립 (9~11절)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이 왕으로서 그의 백성들을 통치하신다는 본문은 앞 단락의 결론부이자 14:12~21절의 도입부이다. 즉 왕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절대 주권으로써 열국을 심판(12~15절)하시고, 열국 중에서 남은 자들에게 경배받으실 것이다(16~21절).

열방에 대한 징계 (12~15절)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예루살렘을 괴롭혔던 열방들이 참혹한 재앙과 살육을 당하고 모든 재물을 빼앗긴다고 하는 이 예언은 사탄의 미혹에 빠져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한 자들에게 주어질 영원한 멸망을 상징한다(계 19:17~21; 계 20:7~10, 12~15).

경배받으실 하나님 (16~21절)

12~15절에서 가공할 만한 재앙이 선포되었거니와 본문에서는 그 열국 백성 중 개종한 자들이 '생존자'로 남게 될 것을 예고하며 끝까지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저주의 심판이 선고된 것임을 다시 한번 보여 준다. 그리고 본서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20, 21절은 '성결'이라고 하는 메시야 왕국의 본질을 명시하고 있다. 메시야 왕국에서는 세상 만물이 통일된 질서 안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되며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누구나 성결된 모습으로 여호와를 찬양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 핵심

1~8절

역사의 마지막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예언이다.


# 묵상

그리스도의 재림의 목적 (1~8절)

세상의 심판과 통치에 위해(시 5:3; 계 11:5), 이스라엘의 구원과 택한 자들을 모으시기 위해(슥 3:14; 마 24:31), 하나님의 백성에게 상주시기 위해(마 16:27), 사탄을 멸하고 성도들을 영접하기 위해(막 1:23; 요 14:3), 성도의 몸을 변화시키고 죽은 자들을 일으키시기 위해(빌 3:21; 살전 4:13~18), 성도의 구원의 완성과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살후 1:10; 히 9:28).

이스라엘의 고난과 끝 (1~11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고난은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때에 끝나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자와 함께하시며 모든 자들의 왕이 되실 것입니다.

유대인의 여호와의 날 (8절)

이 날은 이스라엘이 대적을 짓밟는 날이지, 자신들의 죄악의 대가를 치르는 날은 아닙니다. 이 날에 거하는 자는 거룩한 자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삶의 모습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열방들에 대한 징계 (12~15절)

이스라엘을 공격한 열방들에게는 살과 눈과 혀가 썩어 들어가는 재앙이 임하고, 상호간에 전쟁을 일으켜 자멸하게 되며, 재물을 빼앗기고, 육축도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를 박해하면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날에 되어질 일 (20~21절)

지상의 모든 죄악이 제거되고, 땅의 모든 생물이 거룩한 성물이 되며, 이 성물들이 하나님께 바쳐집니다. 이는 메시야 왕국의 완전한 성화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질서 체계가 다시 회복되어 새로운 통치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다스려질 것을 말합니다.

메시야 왕국의 사람들 (20~21절)

이 왕국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성결이 으뜸입니다. 이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대로,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거짓 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계 21:27)만이 메시야 왕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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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9절)
선택받은 주의 백성 - 본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통회 자복을 통하여 예루살렘이 정화될 것을 보여 주며(1절) 예루살렘에 더 이상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이 활약하지 못하고 근절될 것을 강조한다(2~6절). 또한 메시야의 죽음에 대한 예언(7절)과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멸절되지만 1/3은 불 가운데서 연단과 시험을 받아 언약 백성이 될 것(8, 9절)에 대한 약속이 나온다<스 9:8, 남은 자 사상>. 이들은 시련을 통과한 하나님의 정병(精兵)인데, 성숙한 주의 백성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다.
[1절]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것은 사 59:20, 21절의 예언과 동일한 맥락으로 구속자가 그들에게 임하실 준비 작업이라 할 수 있으며, '온 이스라엘', 즉 성도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롬 11:26, 27)을 예고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 죄와 더러움을 씻을 수 있는 근거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뿐이기 때문에(마 26:28; 롬 5:9),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은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예수께서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가리켜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7~39)고 말씀하신 사실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일이 성령의 사역임을 생각할 때에, 본절의 예언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케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의 대열에 서게 될 것을 바라보게 한다.
[2절]
우상의 이름과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가 물러갈 것을 예언한다. '우상'과 '거짓 선지자'는 포로 이전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가장 큰 적이었다. '우상'은 포로 이후에 외형적인 모습을 감추었지만(호 3:4),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우상 숭배의 본질인 탐심으로 가득 차 있다(골 3:5). 그리고 '더러운 사귀'(the spirit of uncleanness)가 지배하는 '거짓 선지자'(계 16:13)는 교회 시대에 많이 일어났다(마 24:24; 눅 21:8; 요일 2:18. 22; 요일 4:1~6).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예언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전히 성취될 것으로 보아야 한다(살후 2:8; 계 12:9, 10; 계 20:2, 3, 10).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사탄의 권세는 이미 꺾이기 시작했다(눅 10:18~20).
[4절]
털옷. 죄를 책망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은 때로 털옷을 입었는데 이는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신의 감정을 강력하게 상징하기 위해서였다.
[7절]
칼아...내 짝 된 자를 치라. 여기에서 '내 목자'(my shephe-rd)와 '내 짝 된 자'(the man who is close to me)는 메시야를 상징하기 때문에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예언한다고 볼수 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죄를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케 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실 때에 '양'이 흩어질 것을 예언하는데, 결국 제자들과 군중들이 예수를 배반하고 떠나간 사건에서 성취되었다(마 26:31).
[8~9절]
<13:1~9>.

# 해설
선택받은 주의 백성 (1~9절)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1절)와 예루살렘의 정화(2~6절)에 대한 예언인 본문은 현실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죄악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단 9:20; 마 5:44; 계 5:8). 또한 7절은 11:4~14절에 연관되어 메시야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 명시됨과 아울러 그 사건으로 훗날 참혹한 심판을 받게 되지만(8절), 그 중에 남은 자들을 연단시켜 주의 백성으로 삼으시리란 말씀(9절)이 예언되어 있다. 이들은 시련을 통해서 더욱 성숙해진 주의 백성의 표본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련을 당할 때 더욱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신앙으로 무장해야 한다.

# 핵심
1~9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 우상과 거짓 선지자들은 사라지고 참목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

# 묵상
정결함을 이루는 능력의 시작 (1절)
정결함을 이루는 길은 더러움을 씻는 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상과 거짓 선지자였기 때문에 이 두 가지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정결함을 이루는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와 성령의 사역이 성도의 죄를 대속하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9절)
이스라엘이 환난을 이기고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은 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슥 9:8절의 남은 자 사상으로, 이들은 시련을 통과한 하나님의 군사이며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자들입니다. 또한 심판 가운데에서도 자기 백성을 온전히 멸절하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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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2:1~14:21절)
메시야가 다스리심 - 9:1절에서처럼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로 시작되는 스가랴의 두 번째 예언이다. 첫 번째 예언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백성들의 거부에 초점이 맞추어진 반면 여기에서는 성령의 강림으로 은혜의 왕국이 이루어지고, 또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 씻음과 회개를 통하여 큰 환난에서 구원을 받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메시야의 영원한 나라, 영광의 왕국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약속이 강조되고 있다. 즉 두 번째 경고는 스가랴 시대와 근접한 미래가 아니라 악의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쓰는 최후의 날 곧 종말론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14절)
이스라엘의 구원 - 스가랴의 두 번째 경고가 시작되는 본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천한 만국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지만 유다의 방백들과 예루살렘의 백성들에게 대적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한다(1~9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백성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셔서 회개하며 애통하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한다(10~14절).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 주어지는 미래의 안전에 대한 약속은 조건에 따라 변경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 선택받은 자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불변의 것이다.
[1절]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는 범죄한 후에도 마음이 강퍅하여 회개치 않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한 교훈과 훈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고를 하시는 분은 능히 인간의 강퍅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최고의 권위를 지닌 분이어야 한다. 본절은 경고를 시작하기에 앞서 하나님은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임을 먼저 밝힌다. 즉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로서 전지 전능하심을 보여 주며(창 1:1; 출 20:11)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으로서 인간의 주인이심을 보여 준다(창 1:26; 창 2:7; 신 4:32).
[2~3절]
혼취케 하는 잔과 무거운 돌은 열국을 멸망시키는 심판을 상징한다(사 51:17; 렘 25:15; 합 2:16).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치려고 모이는 천하 만국에게 패배를 가져다 주시겠다는 것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연약하고 무능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보호의 손길이 항상 주어지므로 어떠한 대적들도 침해 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4절]
유다 족속은 내가 돌아보고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집을 향하여 눈을 크게 뜨시겠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원수들에게 침략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지켜 보신다'(look to, attend to)는 뜻이다. 유다 족속을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과 보호가 엿보인다(시 32:8).
[6절]
그날(2:11) 화로, 횃불. 문자적으로는 대적을 훼멸하는 힘을 의미하나 상징적으로는 영적 전쟁에서 사탄의 모든 궤계를 능히 물리칠 수 있는 성도들의 강력한 힘을 의미한다. 또한 본 곳도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나 상징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주하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7절]
먼저 유다 장막을 구원하리니. 원래 장막은 영구적이고 견고한 거처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것은 아무런 수비책도 갖추지 못한 '일시적 처소'를 가리켰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으로 향하던 광야 여정 중에 바로 이 같은 '장막'에서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친히 이방의 칼과 활을 막아 주는 방패가 되사 장막 속에 거하는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다. 이 같은 사실을 근거로 하여 스가랴는 비록 본토에 돌아온 백성들이 아무런 수비책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다른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실 것이므로 오직 그를 신뢰하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9절]
그날은 예루살렘이 수호되는 날이며 구원의 날이다. 따라서 이날은 마카비 시대에 유대인이 그 대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날과 그리스도께서 어둠의 권세를 정복하고 승리하실 날을 가리킨다.
[10절]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이란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케 하는 '성령'의 사역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성령이 부어질 때에 사람들은 자기의 죄를 깨닫고 사죄의 은총을 간구하게 되는데, 이것은 욜 2:28, 29절의 예언과 더불어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다. 그들이 그 찌른바...통곡하듯 하리로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 찌른바 그' 곧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고'(consider), 독자의 죽음을 슬퍼하듯이(렘 6:26; 암 8:10) 그리고 출애굽 당시에 애굽인들이 장자의 죽음을 슬퍼하듯이(출 11:5, 6) 회개하고 애통할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이 예언은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오순절에 설교하면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고 외칠 때에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아 예수의 제자가 됨으로써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성취는 미래의 메시야 왕국에서 되어질 것이다(롬 11:25~27).

(10~14절)

애통해 하는 예루살렘 -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전개될 예루살렘의 회개 운동(10절)과 그러한 운동이 교회 확장과 더불어 점점 확대되어 갈 것을 보여 준다. 즉 구약 시대를 종결하고 교회 시대를 개막하는 시점에서 생길 사건이 예언되어 있다.

[12~14절]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회개는 개별적이며 대신할 수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따로라는 단어를 11번이나 반복한다(요일 1:9, 10).


# 해설

예루살렘의 승리 (1~9절)

스가랴의 첫 번째 예언(9~11장)이 메시야의 초림과 백성들의 배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두 번째 예언(12~14장)은 성령 강림으로 시작될 교회의 흥왕과 나아가 메시야의 재림으로 완성될 영원한 천국에 관한 비전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이 두 번째 예언에서는 '그날에'라는 표현을 자주 등장시켜서 종말론적 의미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 도입부인 본문에서 하나님은 천하 만국이 예루살렘을 공격하겠지만(2, 3절)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오히려 천하 만국이 멸망한다고 말씀하신다(4~9절). 이는 죄악된 세력에 둘러싸인 교회의 입장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교회는 싸우기 전에 먼저 승리를 보장 받았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와 싸우되 끝까지 싸워야 한다(히 6:11; 계 2:26).

예루살렘의 애통 (10~14절)

방금 묘사된 육체적 구원(1~9절)에서부터 영적 구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본문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서 비롯될 성도들의 회개 운동을 가리키며(행 2:14~41), 구약 시대의 종결과 교회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예언이다.


# 핵심

1~9절

유다와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열국이 멸망당할 것을 선포하는 예언이다.


# 묵상

유다 장막의 구원 (7~9절)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의 영광과 예루살렘 거민의 영광이 유다보다 더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유다 장막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으로 약한 자를 통하여 강한 자들의 교만을 꺾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자랑으로 교만해지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회개 운동 (10~14절)

꺾으신 은총과 연락의 막대기를 다시 고쳐 잡으신 주시므로 그들로 회개케 되리라는 예언을 하십니다. 성령 강림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진정으로 회개하는 은혜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 예언은 신약의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성취되었고, 이 은혜는 그리스도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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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7절)
고난받으시는 메시야 - 9, 10장엔 이스라엘의 승리와 구원이 예언되어 있는 반면 본장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됨으로써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상반되는 듯한 예언이 앞뒤에 배치된 것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진실한 백성들은 축복을 경험할 것이나 이 축복의 때를 죄 짓는 기회로 악용하는 자는 큰 형벌을 받을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스가랴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은 포로 귀환 이후 성전을 재건하는 등 당시 어지러웠던 국제 정세 속에서도 비교적 어려움을 적게 겪는 하나님의 긍휼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범죄함으로 인하여 또다시 큰 환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1~3절). 뿐만 아니라 '잡힐 양떼'와 같은 유다 족속이 장차 메시야를 '은 삼십'에 팔아 넘길 것이 예언된다(4~14절). 그리고 선한 목자를 팔아 버린 유다 족속은 우매한 목자의 지도 아래서 고난에 휘말리게 될 것과 양떼를 버린 못된 목자에게는 화가 미칠것이 경고된다(15~17절). 이러한 여러 예언들은 신약 시대에 예수께서 오셨으나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로 인정치 않고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하였으며(마 26, 27장), 이스라엘 민족이 로마 장군 디도(Titus)의 침공을 받아 수많은 희생자를 냄으로 성취되었다. 우리는 본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과 징계 사이에 내재된 미묘한 인과적 상관 관계를 목격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축복을 성화(聖化)의 기회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자의 말로에는 항상 하나님의 징계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짓 목자의 비참한 말로에서 하나님께 많은 권한을 부여받은 자가 그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할 때 받는 심판이 더욱 큼을 볼 수 있다(약 3:1)<렘 22:1~7, 지도자의 책임>.
[1~2절]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 그리고 바산의 '상수리 나무' 등은 자연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무로서 부귀와 안전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것들이 불에 타고, 넘어지고, 훼멸되고, 엎드러졌다는 것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과 제도와 그 나라의 존귀한 모든 것이 멸망되었음을 가리킨다. 즉 이 경고는 가나안 전체의 황폐와 이스라엘의 영광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는 말씀이다.
[3절]
목자의 곡하는 소리와 어린 사자의 부르짖는 소리는 유다의 땅이 황무해지고 모든 영광이 사라진 후에 유다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고통당할 것인가를 보여 준다(렘 25:34~37).
(4~14절)
선한 목자 되신 메시야의 사역 - 4절의 '너'는 문자적으로 스가랴 선지자를 가리키고, '잡힐 양떼'는 장차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은 상징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선한 목자는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사역을 예표한다(요 10:11, 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너는 잡힐 양떼를 먹이라'고 명령한 것은 결국 유다 족속이 멸망하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선한 목자'의 사명을 행하실 것을 예표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자들에게도 신실한 보살핌의 손길을 보이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함이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결국 심판을 가져오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길로 행했기 때문이다.
[5~6절]
'잡힐 양떼'와 같은 비참한 처지의 유다 족속은 이방의 원수들과 때로는 동족들의 손에 의해 사고 팔리는 상품처럼 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목자들에게 버림을 당하고, 결국 하나님에게까지 외면을 당할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산 자와 판 자 및 목자들이 누구를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산 자'와 '판 자'는 모두 원수인 이방 지배자들을 가리키고, '목자들'은 자기 양떼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산 자'와 '판 자'는 로마의 점령자들과 같은 지배자들이 아니라 유대인 지도자들이며 '목자들'도 '산 자'와 '판 자'를 가리키는 대구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동족의 손에도, 이방인의 손에도 팔렸으며, 메시야도 동족의 손에 팔려 로마인의 손에 죽었기 때문에 어느 하나만의 견해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7절]
선한 목자는 '잡힐 양떼'의 참으로 가련한 상태를 직시하고 불쌍히 여기며(마 9:36; 마 14:14; 막 6:34), '은총'(히, 노암;grace)과 '연락'(히, 호베림;union)이라 이름하는 두 막대기로 양떼를 먹인다. 여기에서 두 막대기의 이름은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통치 원리를 보여 주는 말이다.
[8~9절]
선한 목자는 한 달, 즉 지극히 짧은 기간 동안에 양떼를 잘 돌보지 못한 삯꾼 목자 셋을 제거하였다. 여기서 '세 목자'는 마카비 시대의 세 통치자 또는 세 제사장, 그리고 제사장과 왕과 선지자의 세 직분을 가리킨다는 견해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양떼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은 삯꾼 목자를 가리키는 것만은 확실하다(요 10:12, 13). 한편 양떼가 선한 목자를 미워했기 때문에 선한 목자도 양떼에게 더 이상 그들의 목자가 되지 않고 '죽는 자는 죽는 대로'(자연적 사망), '망할 자는 망하는 대로'(열방의 침략), '피차 살을 먹는 대로'(국내의 반란) 양떼들이 죽어가더라도 돌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0절]

은총의 막대기를 꺾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 세우신 당신의 언약을 깨뜨리신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연락'의 막대기마저 자른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형제의 의'가 끊어져서 민족적인 이산과 파멸을 당할 것을 가리킨다(14절). 결국 이와 같은 예언은 유다 족속이 끝내 그들의 완악함을 버리지 못하고 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하나님을 등지고 나라 없는 민족으로 2000여 년 동안 각처에서 방랑함으로써 성취되었다.

[12~13절]

여기에 나오는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룟 유다에 의하여 은 삼십에 팔리고(마 26:15),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음(마 27:3~10)으로써 그대로 성취되었다.

[15절]

우매한 목자의 기구(器具)를 취하라고 하신 것은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를 비교하기 위함이다. 한편 '목자의 기구'란 목자들이 양떼를 돌보기 위해 지니는 지팡이, 물맷돌과 주머니 등을 가리킨다(삼상 17:40, 49). 그리고 '우매한'(foolish)이란 항상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가리킨다. 즉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잠 1:7; 잠 15:5), 죄를 가볍게 여기는 자(잠 14:9), 다툼을 잘 하는 자(잠 20:3), 징계를 받아 마땅한 자(잠 16:22),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한 자(렘 4:22) 등을 가리킨다.

[16절]

한 목자는 사도 바울이 말한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 2:3, 4)처럼 적그리스도의 상징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인물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말세에 나타날 일련의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17절]

악한 권세를 가진 목자에 대한 심판은 양떼를 보호하는데 게으른 팔과 양들을 바로 보살필 통찰력이 부족한 눈을 징계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 해설

배척받는 메시야 (1~17절)

메시야의 도래와 그 통치로 말미암을 은혜와 축복을 묘사하던 내용이 또다시 급전환되어 경고의 메시지로 바뀐다. 본문은 성전 재건 후 타락하여 심판을 받게 된 이스라엘의 황폐한 정경의 묘사(1~3절)와 아울러 유다 족속이 참 목자이신 메시야를 은 삼십에 팔 것(11~14절)과 결과적으로 유다 족속이 우매한 목자를 의롭함으로 더 참혹한 고난을 받을 것을 예언한다. 이 예언은 역사상 정확히 성취되었다. 로마의 속국이었던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로 인정되지 않고 은 삽심에 팔리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고(마 26, 27장), 그 후 A.D. 66-73년에 로마 장군 디도(Titus)의 침공으로 이스라엘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 핵심

1~17절

하나님의 백성을 수탈한 지도자들에게 진노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선포이다. 아울러, 거짓 목자를 따라가는 가련한 양떼 같은 백성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세 목자 (8절)

이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①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유다의 세 분파를 이끌었던 엘르아살, 요한, 시몬. ②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바벨론, 메대-바사, 헬라 제국의 왕들. ③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선지자, 제사장, 왕. 이 중, 거짓 목자에 관해 말하는 전후 문맥상 마지막 견해가 가장 무난할 것이다.


# 묵상

참 목자의 인도를 거부한 이스라엘 (9절)

하나님은 참 목자이신 당신의 인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에게 먹이지 않으셨고, 죽는 자와 망할 자를 그대로 두셨으며, 나머지 사람도 피차 살을 먹는 대로 두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참 목자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재앙으로 징계하시고 더 이상 그들의 목자가 되지 않고 방임하심으로써 서로 다툼이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은총의 막대기를 꺾으심 (10~14절)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잘랐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기 위해 세우신 언약을 깨뜨리신다는 뜻입니다. 이 예언은 유다 족속이 그들의 완악함을 버리지 못하고 선한 목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이스라엘을 하나님 없는 나라로 2000년 동안 각처에 유리하며 방황하는 민족으로 살게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한 목자의 상징 (15, 16절)

자기 백성과 의롭게 세운 언약을 파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악한 목자가 일어나 그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 하십니다. 여기서 악한 목자는 적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는 없어진 자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흩어진 자를 찾지 아니하고, 상한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강건한 자를 먹이지 아니하고, 살진 자의 고기를 먹으며 그 굽을 찢을 것입니다.

우매한 삯꾼 목자 (17절)

이러한 목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칼을 사용하여 그 팔은 마르고 눈은 못보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삯꾼 목자들은 능력을 상실하게 되고 더 이상 악한 계획을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날의 삯꾼 목자도 직무 태만과 자기 이익만 추구하다가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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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1~12절)
메시야의 통치 - 본장은 9장의 연속이며 확대라 보아도 좋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축복된 통치로 말미암아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은혜와 축복이 전장에 이어 다시 강조되기 때문이다. 먼저 본장에서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고 우상이나 거짓 목자들을 의지하지 말 것이 촉구된다(1~3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을 강하게 하고 승리하도록 하실 때에 북쪽 이스라엘(요셉 족속; 에브라임) 역시 이 축복에 동참케 될 것을 약속한다(4~7절).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열방에 흩어 버렸던 자기 백성들을 길르앗과 레바논으로 이끌어서 여호와를 의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8~12절).
[1~2절]
이 부분은 자연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묘사한다. 즉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 제반 축복은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에게 이러한 것을 구하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위이다. 그러나 이 부분은 단순히 자연적인 축복만을 묘사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자연적인 현상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라는 것이 중요 요점이다. 봄비(욜 2:23).
[2절]
유다 족속은 여호와께 비를 달라고 간구하는 대신에 율법을 어기고, '드라빔'(창 31:19, 34, 35)과 같은 우상들과 복술자들에게 헛된 위로를 구한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곤고를 당했다. 본절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러한 길을 걷지 말 것을 깨우쳐 준다.
[3절]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거짓 지도자들을, 수염소들은 하나님의 양무리를 괴롭히는 악한 원수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벌하시는 까닭은 양무리를 구원키 위함이다. 또한 유다 족속을 '전쟁의 준마'와 같게 만들어 승리하게 하신 것은 택한 족속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이다.
[4~5절]
하나님께서는 유다 족속에게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며, 그로 하여금 그들의 대적을 멸하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을 약속한다.
[6~7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후손을 구원하실 때에는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요셉 족속;에브라임) 사이에 차별이 없을 것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앗수르에 포로 된 10지파는 끝내 귀환하지 못하고 이방에 흩어져 살았다. 따라서 유다 족속과 요셉 족속은 야곱의 혈통적 후손인 12지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없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약속은 장차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어질 신약 시대의 복음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전주족이라 할 수 있다(갈 3:28).
[8절]
휘파람. 이는 목자가 양들을 불러모으는 방법인데 여기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인간은 목자 곧 그리스도의 인도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양과 같이 연약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유일한 까닭을 보여 준다. 여기에서 '구속하다'(히, 파다)란 말은 '대속하다'(ransom), '구속하다'(redeem), 또는 값을 지불하고 '사다'(purchase)라는 복합적인 뜻이 있다.
[9절]
내가 그들을 열방에 뿌리려니와 '뿌린다'(히, 자레)는 말은 '심는다'는 말과 동일한 어근을 갖는다. 따라서 번역 성경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데, '뿌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세상에 흩어 버린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하고, '심는다'는 것은 파종하여 번성하게 된다는 축복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두 가지 일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방에 흩어 이산케 하심으로 일면으로는 그들을 징계하시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역사하셨던 것이다<마 8:11~13,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원의 관계>.
[10절]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이 종 되었던 집에 대한 상징이며, 길르앗 땅과 레바논은 돌아온 이스라엘이 거할 영적 가나안을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이스라엘의 거처에 대한 지역적 이동이 아닌 그들의 '상태의 변화', 즉 종 되었던 자리, 죄악 된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뜻한다(사 11:10, 16).
[11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며 원수들을 물리쳐 주실 것을 가리킨다.
[12절]
그들이 내 이름을 받들어 왕래하리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의 이름으로, 즉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살아갈 것과 주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는 자유와 평화를 누릴 것을 뜻한다(3:10; 미 4:5).

# 해설
메시야의 통치 (1~12절)
본문은 왕으로 오신 메시야의 통치를 보여 준다. 먼저 2, 3a절에서는 다시 우상이나 거짓 목자들을 의뢰치 말고 오로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만 의지할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택함받은 백성의 종국적 승리를 예언한다(3b~7절). 또한 열방에 흩어졌던 그의 백성들을 모아 길르앗과 레바논으로 이끄신다는 예언(8~10절)은 참 목자이신(마 2:6; 요 10:1~5, 7~18; 계 7:17)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 핵심

1~12절

1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의 통치와 택함받은 백성의 승리를 예언하는 내용이다. 참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을 드러내고 있다.


# 묵상

스가랴의 메시지 (1절)

돌아오라(1:3), 열조를 본받지 말라(1:4), 외쳐 이르라(1:17), 노래하고 기뻐하라(2:10), 주 앞에 잠잠하라(2:13), 말을 들으라(3:8), 땅에 두루 다니라(6:7), 진실을 말하라(7:9), 인애와 긍휼을 베풀라(7:9), 하나님께 구하라(10:1) 등입니다.

하나님께 구하라 (1~7절)

사람이 무엇을 구하고, 누구를 의뢰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집니다. 선지자는 본문에서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하나님께만 구하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상은 거짓되고 허망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자비로우셔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우상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백성을 통치하시는 메시야 (1~12절)

먼저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우상과 허탄한 사술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를 심판하시고, 참된 통치자이신 메시야를 보내시어, 열방 가운데 흩어져 있는 자기 백성을 귀환시키시고, 궁극적으로는 승리를 가져다 주십니다. 메시야가 통치하심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얻는 축복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도움이 되시고 산성이 되어 주십니다. 이렇게 구원의 주권자에 대한 절대적 신앙만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합니다.

구속의 하나님 (8~12절)

본문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의 구속을 받은 유다의 회복과 그 대적들의 멸망에 대하여 예언합니다. 여기서 구속이란 말은 대속 또는 값을 대신 지불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출처 : 바이블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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