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이삭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어린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 브엘세바에서 사흘 길을 걸어 드디어 멀리 모리아산이 바라보이는 지점에까지 왔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데리고 오던 두 사환에게 나귀에 실었던 나무를 내리게 한후 하는 말이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 오리라"(창22:5)하고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손에 들고"(창22:6)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멀리 산길을 묵묵히 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참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가장 어려운 최후의 시험이었고, 또 그 아들 어린 이삭에게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첫시험이었다. 먼저 우리는 이 시험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었던가를 우선 다음 몇가지로 생각해 보자.
1. 그 시험이 있게된 때와 환경에 대하여
창세기 22:1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하는 말로 그 시험은 시작된다. 인정 깊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을때 그는 "깊이 근심했다"는 성경 기록이 있다(창21:11).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5, 16세가 되기까지 (창17:25 및 21:8-9 참고) 저를 품에 키운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요,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근심하는 그를 위로하면서 하신 말이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3) 했다. 그리고 오직 이삭만이 약속을 이어받을 아들이 될 것임을 일러주시면서 소망을 갖게 했다(창21:12). 그러므로 이제 그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어보낸후 오직 이삭에게만 모든 애정을 기울이며 희망을 두고 살던 때였다.
"그 일 후"란 바로 그러한 때를 의미한다. 그때는 이삭도 벌써 소년 시절을 넘어 청년기에 들어선 때인줄 안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띠라 3일 길을 걸을 수가 있었고 나무를 지고 산길을 오를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아들의 결혼의 때를 기다리며(장차) 그 아들이 이삭을 통하여 "땅의 티끌 같이" 또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던 때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러한 때에 이 어찌된 청천벽력 같은 명령인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에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이것은 참으로 순종키 어려운 명령이 아닐수 없었다.
2. 그 시험의 특별한 점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시험의 특별한 점은 그 아들 이삭은 [사랑하는 독자]라는데 있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께서도 번제로 바쳐야할 이삭은 가리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임을 특별히 강조하셨다(창22:2). 사실 이삭은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이요, 그나마 유일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돌이켜 보건대 이스마엘을 내어보낸 그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고 또 더구나 아직 품에 남아있는 이삭은 큰 위로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때와 형편이 다르다. 진실로 감당키 어려운 무서운 시험이었다. 더구나 이삭은 신앙적인 면으로 볼때에도 특별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과거 이스마엘을 내어보내라고 할때는 그 이유까지 알려 주셨다. 즉 그는 약속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이삭은 약속의 아들임에도 그를 번제로 드려야 한다니 참으로 누가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당황할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저 한마디의 이유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 "번제로 드리라"(창22:2)는 이 명령을 그 누가 곧 바로 순종할수 있을까.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아주 죽여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또는 "땅의 티끌 같이" 번성할 수 있으며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시험이야말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혈육에 대한 [애정의 시험]만이 아니라 그의 언약에 대한 소망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리는 [신앙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중에 순종했었다.
3. 아브라함의 침묵과 순종
(창22:3)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하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실천함에 있어 그 마음이 참으로 긴장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하신 말씀이 떨어지자 아브라함은 곧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준비를 서둘러 떠났다. 이 얼마나 놀라운 순종인가.
그는 그처럼 아침 일찌기 일어나기 위하여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은 꼭 시편에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시119:60)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혈육과의 의논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갈1:15~16). 오직 그에게는 절대적 순종의 길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4. 이삭의 침묵과 순종
어린 아들 이삭의 순종도 그저 놀랍기만 하다. 번제의 나무를 지고 걸어가던 이삭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창22:6) 뒤에 따라오는 아버지가 의심스럽던지 입을 열어 하는 말이 "내 아버지여....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대답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하는 그말을 듣자 다시 말이 없었다. 드디어 그 두사람은 지시하신 한 장소에 갔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창22:9~10) 할때에도 이삭은 아무런 반항이 없었고 그저 침묵으로 순종했다.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연상키 어려운 놀라운 침묵이요, 순종이었다. 이삭은 벌써 성년(13세)기가 휠씬 넘어선 사람이 아닌가. 그는 사흘 길을 걸은후에도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수 있는 육체의 힘을 가졌던 청년이 아니었던가.
얼마든지 아버지를 반항하려 들면 힘이 모자란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수족이 묶이고 그 몸이 번제단 위에 칼이 번쩍이는 그 밑에 놓여지기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었던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한마디의 묻는 바도 없이 또는 반항도 없이 그저 순종만 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비유컨대 이삭의 완전한 실질적인 죽음을 의미한다(히11:19). 우리는 이삭의 이러한 순종 앞에는 그저 숙연한감을 느낄 뿐이다.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 산은 후일의 갈보리였다. 그리고 번제단을 쌓았던 그곳은 바로 후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섰던 그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묵묵히 번제단에 오른 어린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그림자였다.
어린 몸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오르던 그 모습 그대로가 곧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그림자이다.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죽여야 했던 아브라함의 그 괴로웠던 마음에서 우리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또 아버지의 뜻을 따라 묵묵히 피흘려 제물이 되려는 이삭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신앙과 순종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외쳤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기에서 그들은 과거에 체험치 못했던 놀라운 신앙의 큰 체험을 보았다. 그것은 곧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