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에서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위의 본문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을 때의 일이다. 복중에 있는 쌍둥이 두 아들이 싸우므로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리브가는 여호와께 어떻게 해야할 것을 물었다. 위의 본문은 그때 여호와께로 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이었다. 드디어 두 아들을 낳으매 형을 에서라 했고 동생을 야곱이라 했다. 저들이 점점 자라매 그 성격과 행동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창세기 25:27에 보면 "에서는 익숙한 사냥군인고로 들사람이 되었고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니 장막에 거하였더라"고 했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에서는 남성적이요, 야곱은 여성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두 성격의 차이에 있어서 우리는 그 어느편이 좋고 나쁜 것을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러한 성격의 차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에서는 그 성격상 늘 밖에 나가 놀기를 좋아 하였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들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집에 찾아들어오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에서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결점이 되었다. 즉 그는 그것 때문에 부모의 교육을 받을수 있는 기회를 많이 놓쳤다. 그렇게 휼륭했던 아버지 이삭과 그리고 경건한 어머니 리브가의 감화를 많이 받지못하고 자라난 사람이 되었다.

그의 결혼 사건만 보아도 그렇다. 창세기 26:34-35에 보면 "에서가 사십세에 헷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였더니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더라"고함을 본다. 에서는 단번에 이방인의 딸 둘을 아내로 얻었고, 그로인하여 그 부모에게 큰 근심을 끼친 아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달랐다. 그의 아버지의 부탁 즉 "너는 가나안 사람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라"는 그 말씀을 명심하였고 그는 꼭 그대로 순종했다(창28:6~7). 세상에서 부모를 슬프게 하고 근심케 한 아들이 잘 될 수는 없다. 잘 되기를 원하는 아들은 먼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우선 이점에 있어서 크게 달랐다.

야곱이 밖에 나가기 싫어하는 성격은 반드시 좋은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는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부모와 같이 지내는 시간을 자연히 많이 가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좋은 감화를 받을 수 있었고 부모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존귀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고 본다.


이삭의 신앙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삭은 4대 족장들 중에서 제일 장수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았고(창25:7), 야곱은 147세를 살았고(창47:28), 요셉은 110세를 살았으나(창50:26) 이삭은 180세를 살았다(창35:28). 그는 제일 장수한 사람이었으나 뜻밖에도 그에 대한 성경 기록은 가장 짧은 것이 이상하다. 창세기 50장 중에서 열두장에 걸쳐 아브라함의 기록이요, 야곱과 요셉의 기록도 거의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삭의 기록은 몇 장에 걸쳐 조금씩 나오기는 하지만 완전히 그의 기록만으로 나오기는 창세기 26장 한장뿐이다. 이것은 족장들의 생활 중에서 그의 생활이 가장 단순했고 평범했기 때문이었으리라고 생각 된다.
사실 이삭의 생활은 평범했다. 진리는 평범한 중에 있다는 말과 같이 그렇게 생활중에서 많은 신앙적 교훈을 찾아볼 수 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대로 그가 산 시대별로 그의 신앙과 인격이 어떠했음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청소년기의 그의 믿음
어린 이삭은 희생의 제물로 번제단에 오르기까지 순종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만을 순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끝까지 순종했음이 다음과 같은 성경을 보아 분명하다.
창22:7에 보면 그는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나이까" 했을때, 그의 아버지의 대답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 하는 그 말을 듣자 그는 다시 말이 없었다. 드디어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창22:9~10) 할때에 이삭은 아무런 반항이 없었다. 이것은 분명히 어린 이삭의 신앙이 얼마나 컸음을 보여 준다. 그는 아버지에게 "어린 양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했는데 그 어린 양이 어디 있기에 나를 번제로 드리려 하나이까" 이렇게 반항할 수 있었을 것이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그 말씀을 굳게 믿었음이 분명하다. 진실로 위대한 신앙이었다고 생각한다.

2. 청장년기의 그의 믿음
창24:63에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다가 눈을 들어 보매 약대들이 오더라" 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위하여 그의 배우자를 구하러 보냈던 종이 돌아올 때의 광경을 기록한 것이다. 그때의 이삭의 연령은 40이었다(창25:20). 연령이 40이라면 자기의 마음대로 적당히 배우자를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에서는 나이 40세에 가나안 여자를 둘씩이나 취한 일이 있다(창26:34). 그러나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배우자를 선택할때도 그것을 아버지에게 맡길뿐 아니라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그 모습을 위의 분문에서 우리는 넉넉히 볼 수가 있다.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하더라"(창24:63) 하는 그 말씀은 그가 어떻게 고요히 모든 일에 순종과 기도로 준비하는 사람이었던가를 잘 묘사해 준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 일을 이룬 것은 없다. 또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크게 고생한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역시 위대한 믿음의 족장이었다. 그는 오직 평범한 일상 생활에 있어서 침묵 에 순종하며 고요한 중에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던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의 모범인가.

3. 노년기의 그의 믿음
창세기 25:21에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하는 말씀이 있다. 참으로 우리로 하여금 위대한 족장의 믿음을 배우게 하는 성구인줄 안다. 이삭은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함으로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사람이었다. 얼핏 생각하면 그거야 뭐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하기 쉬우나 창세기 25장 전체를 고요히 읽어보면 그때의 그의 마음과 그의 믿음이 어떠했음을 엿볼 수 있겠다.
창세기 25:20과 25:26을 보면 이삭이 리브가와 결혼했을 때와 또 아내 리브가가 아들을 낳았을 때의 연령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즉 이삭은 40 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아들을 낳았음을 본다. 그러고 보면 이삭은 결혼후 20년 동안 아들이 없었다. 생각해 보라 그는 아브라함의 외아들이었다. 그의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년 동안 아들이 없었다. 60이 다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그것은 진실로 큰 시험이 아닐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창25:1~4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는 벌써 6형제를 낳았고 손자들과 증손자들까지 즐비하게 번성하고 있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창25:12절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의 첩의 소생인 이스마엘은 벌써 12형제를 두었고 12방백을 이루었다고 했다(창25: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아들 이삭에게는 나이 60이 되도록 아들이 없었다. 얼마나 답답한 시험이었겠는가.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 하더라"고 성경은 기록했다(창25:21). 그 기도는 진실로 20년 가까운 긴 기간의 기도였을 것이 분명하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처럼 오랫동안 아들을 주시지 않았을까. 그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며 간구하는 믿음의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 히브리서 10:36에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신 말씀이 있다. 이삭이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20년 동안 참고 기다리며 간구했어야 했다.
아브라함에게는 10년을 참지못하고 첩을 얻었던 슬픈 역사가 있었다(창16:3). 그러나 이삭은 그런 실수를 다시 범하지 않았다. 그는 20년 동안 참고 기도했다. 마침내 그는 복을 받았다. 히브리서 6:14-15에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하신 말씀과 같이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그가 남긴 신앙의 좋은 본이 있다. 그것은 그가 간데마다 우물을 판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간 곳마다 제단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나 이삭은 우물을 판 것으로 유명하다.
창세기 26장에 그는 일곱번에 걸쳐 우물을 판 역사가 있다(15,18,19, 22, 25, 32절). 그는 무엇때문에 그처럼 우물을 파야했던가. 그것은 우물을 파 샘물을 얻었을 때마다 원수들이 시기하여 싸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와도 다투려 하지 않았다. 누가 싸우려 하면 그 물을 넘겨 주고 그는 다시 옮겨 새 우물을 팠다. 그렇게 하기를 일곱번 이었다. 그가 싸울 힘이 없어 그랬던 것이 아니다.
이삭의 부대는 아비멜렉 왕보다 더욱 크게 [강성했다]고 성경은 말했다(창26:16). 그러나 그는 싸우려 하지않고 다시 자리를 옮겨서 우물을 팠던 것이다.
그는 진실로 속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벗어주었던 인물이라 하겠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셨다. 간데마다 복을 주어 새로운 샘물을 얻게 했다. 마침내 아비멜렉도 그를 시기함은 헛된 일임을 알게 됐다.
그를 괴롭게 하던 그는 드디어 그의 군대 장관과 더불어 찾아와서 무릎을 꿇게 되었다.
창26:28 이하에 보면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희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했다. 저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삭을 대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디어 알게 됐다.
마침내 무릎을 꿇고 화친을 구하러 왔다. 그러나 이삭은 그들에게 과거의 소행을 조금도 꾸짖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이 저들을 맞아 [잔치]를 베풀었다. 창26:30에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고 했음을 본다. 진실로 이삭은 악을 악으로 갚지않고 선으로 악을 갚은 사람이었다(롬12:17-18 참고).

끝으로 이삭이 우물을 팠다는 사실은 누구를 위함이었을가를 생각해 보라. 그것은 온전히 자기와 자기 가족들과 종들과 소와 양떼들을 위함이었다. 결코 하나님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자기를 위해 한 일이었지만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이다.
비록 우리가 우리와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 할찌라도 그 모든 일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믿음으로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 이삭이 진실로 그러한 인물이었다.


아브라함의 이삭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어린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 브엘세바에서 사흘 길을 걸어 드디어 멀리 모리아산이 바라보이는 지점에까지 왔다. 늙은 아버지 아브라함은 데리고 오던 두 사환에게 나귀에 실었던 나무를 내리게 한후 하는 말이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 돌아 오리라"(창22:5)하고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불과 칼을 손에 들고"(창22:6)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멀리 산길을 묵묵히 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러 가는 참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가장 어려운 최후의 시험이었고, 또 그 아들 어린 이삭에게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첫시험이었다. 먼저 우리는 이 시험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얼마나 어려운 시험이었던가를 우선 다음 몇가지로 생각해 보자.

1. 그 시험이 있게된 때와 환경에 대하여
창세기 22:1에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하는 말로 그 시험은 시작된다. 인정 깊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을 내어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을때 그는 "깊이 근심했다"는 성경 기록이 있다(창21:11). 물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5, 16세가 되기까지 (창17:25 및 21:8-9 참고) 저를 품에 키운 아버지로서는 참으로 슬픈 일이요,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근심하는 그를 위로하면서 하신 말이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21:13) 했다. 그리고 오직 이삭만이 약속을 이어받을 아들이 될 것임을 일러주시면서 소망을 갖게 했다(창21:12). 그러므로 이제 그 아버지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내어보낸후 오직 이삭에게만 모든 애정을 기울이며 희망을 두고 살던 때였다.
"그 일 후"란 바로 그러한 때를 의미한다. 그때는 이삭도 벌써 소년 시절을 넘어 청년기에 들어선 때인줄 안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를 띠라 3일 길을 걸을 수가 있었고 나무를 지고 산길을 오를수 있었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아들의 결혼의 때를 기다리며(장차) 그 아들이 이삭을 통하여 "땅의 티끌 같이" 또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던 때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러한 때에 이 어찌된 청천벽력 같은 명령인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에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이것은 참으로 순종키 어려운 명령이 아닐수 없었다.

2. 그 시험의 특별한 점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그 시험의 특별한 점은 그 아들 이삭은 [사랑하는 독자]라는데 있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하나님께서도 번제로 바쳐야할 이삭은 가리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임을 특별히 강조하셨다(창22:2). 사실 이삭은 그가 100세에 얻은 아들이요, 그나마 유일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돌이켜 보건대 이스마엘을 내어보낸 그때에는 그래도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고 또 더구나 아직 품에 남아있는 이삭은 큰 위로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그때와 형편이 다르다. 진실로 감당키 어려운 무서운 시험이었다. 더구나 이삭은 신앙적인 면으로 볼때에도 특별한 약속의 아들이 아니었던가.
과거 이스마엘을 내어보내라고 할때는 그 이유까지 알려 주셨다. 즉 그는 약속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지금 이삭은 약속의 아들임에도 그를 번제로 드려야 한다니 참으로 누가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요, 당황할수 밖에 없는 일이 아닐수 없다. 그저 한마디의 이유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곧 "번제로 드리라"(창22:2)는 이 명령을 그 누가 곧 바로 순종할수 있을까. 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아주 죽여 희생의 제물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그 씨가 "하늘의 별과 같이" 또는 "땅의 티끌 같이" 번성할 수 있으며 누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이 시험이야말로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단순한 혈육에 대한 [애정의 시험]만이 아니라 그의 언약에 대한 소망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버리는 [신앙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중에 순종했었다.

3. 아브라함의 침묵과 순종
(창22:3)에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하는 말씀이 나온다. 이 말씀은 그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실천함에 있어 그 마음이 참으로 긴장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땅으로 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하신 말씀이 떨어지자 아브라함은 곧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준비를 서둘러 떠났다. 이 얼마나 놀라운 순종인가.
그는 그처럼 아침 일찌기 일어나기 위하여 밤을 새웠을지도 모른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순종은 꼭 시편에 "내가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시119:60) 하신 말씀을 연상케 한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데 혈육과의 의논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갈1:15~16). 오직 그에게는 절대적 순종의 길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4. 이삭의 침묵과 순종

어린 아들 이삭의 순종도 그저 놀랍기만 하다. 번제의 나무를 지고 걸어가던 이삭은 "불과 칼을 손에 들고"(창22:6) 뒤에 따라오는 아버지가 의심스럽던지 입을 열어 하는 말이 "내 아버지여....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창22:7)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대답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22:8)하는 그말을 듣자 다시 말이 없었다. 드디어 그 두사람은 지시하신 한 장소에 갔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을 잡으려" (창22:9~10) 할때에도 이삭은 아무런 반항이 없었고 그저 침묵으로 순종했다. 참으로 사람으로서는 연상키 어려운 놀라운 침묵이요, 순종이었다. 이삭은 벌써 성년(13세)기가 휠씬 넘어선 사람이 아닌가. 그는 사흘 길을 걸은후에도 나무를 지고 산에 오를수 있는 육체의 힘을 가졌던 청년이 아니었던가.
얼마든지 아버지를 반항하려 들면 힘이 모자란 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수족이 묶이고 그 몸이 번제단 위에 칼이 번쩍이는 그 밑에 놓여지기까지 가만히 있을 수 있었던가.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한마디의 묻는 바도 없이 또는 반항도 없이 그저 순종만 할 수가 있었을까.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비유컨대 이삭의 완전한 실질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히11:19). 우리는 이삭의 이러한 순종 앞에는 그저 숙연한감을 느낄 뿐이다.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 산은 후일의 갈보리였다. 그리고 번제단을 쌓았던 그곳은 바로 후일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섰던 그곳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묵묵히 번제단에 오른 어린 아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그림자였다.
어린 몸이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오르던 그 모습 그대로가 곧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하여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그림자이다.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죽여야 했던 아브라함의 그 괴로웠던 마음에서 우리는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또 아버지의 뜻을 따라 묵묵히 피흘려 제물이 되려는 이삭에게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다.

그러면 이제 그러한 신앙과 순종의 결과는 어떠했던가.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외쳤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12).
여기에서 그들은 과거에 체험치 못했던 놀라운 신앙의 큰 체험을 보았다. 그것은 곧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었다
.

아브라함과 사라 (김희보 前 총샌대 신대원 교수)

위의 본문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도 늙고 사라도 늙었다. 사라는 완전히 단산하였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죽은 자와 방불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잉태하는 힘이 어디서 왔을까. 히브리의 기자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는 얼마나 큰 믿음을 가졌기에 그러한 이적이 생길수 있었을까? 사실 성경에서 보는대로 그는 그렇게 큰 믿음을 가졌던 여성이라고 생각키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우선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못하여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첩을 얻게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창세기 18:10에 보면 두사람(사실은 천사들)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했을때 그는 장막 뒤에서 숨어서 하는 말이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18:12)하며 속으로 웃었던 사람이다.

이 웃음은 불신앙의 웃음이요, 비웃음의 웃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창18:13)하며 꾸짖었음을 본다. 그는 거듭 "여호와께서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하며 그의 불신앙을 책망하였다. 그 때에 사라는 그만 두려워서 그 일을 승인치 아니하며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창 18:15)라고 했다.
그러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18:15). 이것은 천사의 말이었다. 이러한 천사와 사라의 대화에서 그의 불신앙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즉 사라는 자기가 "믿음으로 사라 자신은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히11:11) 했음은 어찌된 일인가.
이렇듯 모순된듯 보이는 거기에 사실은 깊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사라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신앙과 불신앙이 함께 있어 서로 갈등이 있고 투쟁이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믿는 마음과 믿지못하는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비웃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신앙은 승리한 것이다. 그러므로 드디어 히브리의 기자는 그의 신앙만을 찬양하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아브라함의 역사를 보아도 같다. 구약에 나타난 아브라함에게는 실수도 많았고 허물도 많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믿음의 조상으로 그의 믿음만이 크게 부각되어 있음을 본다.

롯의 경우도 같다. 그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을 슬프게한 사람이요, 소돔과 고모라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술에 취하여 불의의 두아들을 낳았던 사람이다(창19:32-35). 모압과 암몬이 바로 그런 아들들이 아니었던가(창19:37~38). 그러나 신약성경은 롯의 불미스러운 것을 기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의로운 사람이라 일컬었음을 본다. 베드로후서 2:6~8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았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하셨는데 롯은 과연 그처럼 의로왔던가. 아니다. 구약의 기록은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롯은 분명히 잘못이 많았었으나 신약은 그를 가리켜 의인이라 칭했다.

기생 라합의 경우도 같다. 그는 분명히 거짓말로써 정탐군들을 피난시킨 사람이었다(수2:45). 그 동기는 좋다하겠으나 그 방법은 반드시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의 거짓을 말하지 않았고 그의 신앙만을 높이 찬양했다. 즉 히브리 11:31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했다. 이 어찌된 일들일까. 나는 종종 구약과 신약의 이러한 차이를 놓고 생각해 본다. 즉 신약은 구약의 심판대라고--

이제 신약이 구약의 아브라함을 심판한다고 가상해 보자. [아브라함아, 너는 믿음의 큰 본을 보인 조상이었다] 이런 판단을 받았었다면 아브라함은 무엇이라고 대답 했었을까. [아니요, 저는 하나님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아 첩을 얻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그가 그의 양심대로 대답했다면 그때 신약성경은 또 무엇이라고 말했었을까. [아니야, 너는 믿음의 조상이야!] 이렇게 판결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은 롯의 경우도 같고 사라의 경우도 일반일 것이다.
비록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일찌라도 그것은 태산같은 허물을 용서받게 하고 드디어 의롭다 함을 얻게하는 신비로운 힘을 갖고 있다.

장차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될 때에도 그것은 같을 것이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 25:35-36). 우리가 장차 이러한 판결을 받았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의롭지 못함과 적은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크게 칭찬하시어 의인의 반열에 서게하실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막중한 은혜라고 할 수 밖에 없겠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사라의 믿음도 그렇다. 그것은 많은 의심의 큰 보자기에 싸인 작은 겨자씨 한 알 같은 것이었지만 마침내 그는 그것 때문에 큰 믿음의 어머니가 되었고, 죽은것 같은 그의 태에서 이삭을 잉태하는 기적이 생겼던 것이다.

믿음의 위대한 능력이여! 아들이 없어 탄식하던 그에게 이제는 큰 기쁨이 왔다. 이삭을 낳았을때 그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참으로 감사의 웃음이요, 기쁨에 넘치는 감격의 웃음이었다. 창21:6에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그는 이렇게 기뻐했다. 신앙의 승리의 기쁨이었다. 처음 불신앙의 비웃음을 웃었던 그가 마침내 감격적인 신앙의 웃음을 웃게 되었으므로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다. 히브리 말의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이삭을 낳은후 사라는 너무 기뻐서 하는 말이 "사라가 자식들을 젖 먹이겠다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말하였으리요 마는 아브라함 노경에 내가 아들을 낳았도다"(창21:7)라고 했다. 여기에 하나 이상한 것은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 먹이겠다는 말이다. 사라는 오직 한 아들 뿐이었는데 어찌하여 자식들이라 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그 지방의 풍속을 잠깐 생각하여 봄이 좋겠다.

옛날 가나안 지방의 풍속에 자녀를 생산치 못하던 여인이 어떻게 아들을 낳게되면 크게 잔치를 베풀고 이웃 동네의 여러 젊은 어머니들과 아이들을 불러 같이 즐기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순서 중의 하나가 아기들에게 젖 먹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때 그 새어머니가 동네 어린이들에게 한번씩 돌아가며 젖을 빨게함으로써 참으로 아기를 낳은 어머니란 것을 증명해 보인다고 한다. 생각컨대 자식들에게 젖을 빨리울 때마다 동네 어머니들은 박수를 치고 같이 기뻐하며 웃음의 꽃이 피어 퍼졌을 것이다.

그러기에 창세기 21:6에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는 기록이 남게 되었을 것이다.
이삭은 진실로 사라의 웃음의 아들이었다. 잉태할때에 웃었고 출생 후에 웃었고 모든 여인들이 같이 모여 웃었고....
"너희에게 겨자시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눅17:6).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아브라함의 시련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위의 본문들은 창세기 16장의 끝절과 17장 첫절이다. 16장은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게된 기록이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연령은 86세였다고 그 끝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뒤이어 곧 따라나오는 창세기 17장 첫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99세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99세때란 곧 그 아내 사라가 이삭을 잉태하는 해이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본후 다시금 이삭을 낳기까지 13년이란 긴 세월이 공백으로 뛰어 넘었음을 본다. 이스마엘을 낳은후 13년 동안의 아브라함의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진실로 침묵의 13년이다.이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교통을 끊었던 때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거두셨던 기간이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A.W.Pink). 비록 그것은 분명치 않다할찌라도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성경은 그 13년간의 긴 세월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침묵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흔히 히브리 사람들은 13의 수를 고난과 시련의 수라고 생각했다. 에스더 3:12~13에 보면 하만이 유다 민족을 전멸하기로 결정하고 왕이 조서를 내린 날이 [정월 13일]이었고, 그것을 집행하기로 결정한 날도 "십이월 곧 아달월 13일" 이었다(이밖에도 창14:4, 창47:9등도 참고). 히브리 사람들은 그러한 일들을 생각하고 13의 수를 고난의 수 또는 시련과 반역의 수라고 생각하는 풍속이 생긴 줄 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하나님의 친구라고까지 불리우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긴 13년 긴 세월이야말로 그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었으랴! 그 기간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큰 시련의 기간이요, 깊은 반성의 기간이 아닐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13년의 시련 중에도 오히려 아브라함의 믿음은 크게 자랐음을 본다.

로마서 4:19에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고 했음을 본다.
그가 85세가 되던 해에 사라의 태를 믿지못해서 첩을 얻어야 했건만 오히려 백세가 다 되어 그 믿음이 견고해졌다면 그 무엇 때문이었을까? 환난과 징계가 때로는 성도들에게 유익하다고 하는 것은 그러한 때에 오히려 믿음이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끊긴 괴로운 13년, 그러한 때에 오히려 참고 기다리며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그와 13년이나 교통을 끊으셨을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13의 수가 무슨 고난의 수가 되어서 그 수를 채우기 위하여 그런 것은 아닌줄 안다. 그러면 무엇일까. 그 대답으로 다음 두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는 아브라함이 99세가 되는 것을 기다림이요, 둘째는 이스마엘이 13세가 되기를 또한 기다리셨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창17:24~25에 "아브라함이 그 양피를 벤 때는 99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이 양피를 벤 때는 13세이었더라"고 하심을 보아서 그렇다. 여기에서 보는대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였고 이스마엘은 13세 나던 해였던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서 그의 어린 아들 이스마엘이 13세 되기를 기다리셨다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이었다고 본다. 옛날부터 이스라엘의 풍속에 남아가 나서 13세가 되면 성년의 예식을 행하는 법이 있었다. 그것을 [바르미츠바]라고 부른다. 그것은 남자로서 13세가 되면 비록 부모를 떠나 어디를 가나 살 수 있다는 뜻으로 그런 예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이제 13세가 되었다. 위에서 말한 소위 침묵의 13년이란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13세까지 키우는 시간이었다. 이스마엘은 비록 언약 밖에 있는 죄악된 혈육의 씨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년의 해가 되기까지는 이스마엘로 하여금 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라게 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창21:12)고 명령하심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그렇치 않다. 물론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도 심히 그 아들(이스마엘)을 위하여 그 일이(내어 쫓는 일) 깊이 근심이 되었더니"라고 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내어보내는 이스마엘에게 얼마나 크신 은총을 베푸셨던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창17:20에 "내가 그에게(이스마엘)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그로 크게 번성케 할찌라. 그가 열두 방백을 낳으리니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하셨다.
물론 그 약속은 그의 당대에 다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본다(창25:12-18). 또 쫓겨난 하갈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긍휼을 베푸셨던가. 그가 처음 쫓겨났을 때는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방성대곡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로하셨고(창21:18), 그의 눈을 밝혀 샘물을 보게 하셨다(창 21:19).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크고 놀랍다고 해야할 것이다.
창 21:20에도 보면 "하나님이 그 아이(이스마엘)와 함께 계시며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 거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하신 말씀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하셨다고 하여 결코 그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물론 하갈을 같이 내어쫓은 것도 이스마엘을 키우기 위하여는 부득이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은 그 어느 사람에게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가혹하게 학대하신 일은 없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반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는 것뿐이다. 언약 밖의 아들인 이스마엘까지도 성년(13세)이 되기까지 고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자라게 했고 그가 광야에 내어쫓긴 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하시며 그에게 창성하는 한량없는 복을 주셨던 것이 아닌가.

또 다음 둘째로, 소위 침묵의 13년은 아브라함이 99세 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로마서 4:19-21에 "그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했음을 본다. 99세는 100세를 바라보는 해이다. 연령이 100세이면 위의 성경 말씀과 같이 "죽은것 같음"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태가 완전히 말라 "죽은것 같이" 되었음을 누구나 인정할수 밖에 없는 그때까지를 기다리게 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로 하여금 인간의 무능함을 철저히 깨닫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믿음이 확실해지기까지를 기다려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기까지 특별히 그 마지막 이스마엘을 키우던 그 13년간은 많은 회개가 있었을 것으로 안다.

특별히 불신앙의 씨요, 죄악의 씨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스마엘을 키우면서 그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을 때의 아브라함의 심정은 과연 어떠했었을까.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그것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죄 없는 어린아이를 놓고 불쌍히 생각하는 마음과 스스로 회개하는 마음을 그는 금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회개는 마침내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깊은 신앙으로 점점 자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침묵의 13년은 결코 헛된 공백이 아니었고 시련의 그 13년은 그의 믿음이 더욱 깊어지는 회개의 기간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죄악의 씨를 슬픈 마음으로 묵묵히 키우던 그 13년은 오히려 새로운 언약에 대한 신앙을 키우는 복스러운 기간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함은 지나친 상상은 아닐 것이다.


아브라함의 실수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위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슬프게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만 실수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된 경로는 다음과 같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었다. 그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셨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 앞에 의로 여기심을 받을만큼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시혐에 그만 실패했다. 즉 그 시험이란 이렇다. 세월은 흘러 그가 가나안에 들어와 약속을 받은지도 어언 10년이 지났건만 아들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첩으로 준 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거한지 10년 후이었더라"(창16:3)
10년을 더 참지 못하여 아브라함은 아들을 얻기 위하여 첩을 얻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 아내 사래의 권면을 따른 것이었다. 창16:2에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생산을 허락치 아니하셨으니 원컨대 나의 여종과 동침하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하였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따라 하갈을 첩으로 얻었다. 이것이야말로 아브라함의 큰 실수가 아닐 수 없었다. 성경에 기록된대로 아브라함은 지난 날에도 벌써 여러 차례의 작지않은 시험들을 당했었다. 어떤 시험에도 잘 이겼으나 어떤 경우에는 넘어지기도 했다. 먼저 그가 이겨온 시험들을 보라.

1.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순종했었다. 그는 그것을 순종하므로 잘 이겼다. 이로써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2. 롯에게 슬픔을 당하는 시험이 있었다(창13:1-11). 그때에도 그는 모든 권리를 그에게 모두 양보했었다(창13:8-9).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셨다. 그에게 가나안의 기업을 주시며 후손의 창성을 약속했었다(창13:14-17).
3. 신앙의 용기가 있느냐 하는 시험도 당했었다. 그는 318명의 적은 무리를 가지고 시날왕의 연합군을 물리쳤다(창14:1-16).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오는 믿음의 힘이었던 줄 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방패가 되어주셨던 것이다(창15:1).
4. 세상의 부귀와 영화의 시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겼다. 즉 소돔왕이 제공하는 큰 재산을 그는 거절했었다(창14:21-23). 그때 하나님께서도 그를 얼마나 기뻐하셨던가. 친히 여호와께서 그의 상급이라 하셨다(창15:1).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그의 후손이 창성할 것이다. 물론 먼 훗날의 일이지만 그는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는 그 어려운 시험에도 이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넘어졌던 시험은 어떤 것이었던가.
먼저 일상 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시험에 졌다. 즉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을때 그는 약속의 땅을 계속 지켰어야 했지만 그는 가나안을 버리고 애굽으로 갔었다(창12:10).
그는 아무리 궁핍하여도 모든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겼어야 했건만 그렇지 못했다. 사실 우리가 일상생활에 있어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다. 아브라함에게는 물론 순종도 있었고, 믿음의 용기도 있었다. 겸손한 양보도 있었고 물질의 욕심도 이길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굶주림을 이기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모든 염려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을 바라보며 살아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드디어 모든 시험에 못 견디어 애굽으로 내려 갔었다. 애굽에서 그는 큰 위경에 이른때가 있었으나(창12:14-15) 하나님의 특별한 권고로 그는 거기에서 무사히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창12:17-20).

다음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네 씨(자손)로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면 그는 그것을 믿고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까지 견디고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0년 이상을 더 참을 수 없었다. 드디어 하나님의 거룩한 그 약속을 인간의 추악한 방법으로 이루려 했다.
마침내 하갈을 첩으로 얻어 아들을 보려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사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전혀 믿지못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을 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니라 인간의 악한 수단으로 이루려 하였다는 거기에 그들의 실패가 있었다고 본다.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은 하나님의 거룩한 방법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적인 방법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을 이룰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오기까지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지 못한데 그의 실패가 있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자주 느끼는 것은 약속을 바라보며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야곱의 경우에서도 그것을 본다.
창25:23에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을 받고 태어난 아들이 곧 야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를 허락하시기까지 그는 믿음으로 오래 참고 견디었어야 했었다. 그러나 그는 참지 못했다. 인간의 속임수로 장자의 기업을 빼앗으므로 그 언약을 이루려 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일생을 유리하며 고생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잘못된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히브리서 10:26에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심을 본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래 참았어야 했을 것인데 그만 10년에 지치고 말았다. 그가 첩을 얻은 결과도 물론 비참했다. 우선 가정에 불화가 생겼다. 하갈은 사라를 멸시했다(창16:4). 사라는 또 하갈을 학대하여 내어쫓아야 했다(창16:6). 그 여종 하갈의 후손과 사라의 후손 사이에는 늘 전쟁이 있어 천추의 원수가 되어버렸다.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그 결과는 참으로 비극 그것이었다. 어떤 사람들 중에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다처주의를 용납하시지 않았던가 의심하는 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철저한 일부일처주의이다. 말라기2:15에 보면 "여호와는 영이 유여할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하셨다. 이것은 일부일처이어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오직 그래야만 경건한 자녀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씨 중에는 드디어 불경건한 씨가 섞기게 되어 두고 두고 큰 불행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역사에 있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아브라함이 첩을 얻은 것은 결코 하나님의 허용이거나 묵인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것은 그의 큰 실수였다. 그러면 믿음의 조상인 그가 어떻게 그런 실수를 범하였겠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그가 아직도 옛 습관과 옛 풍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말려들어간 옛 습관이란 어떤 것인가. 아브라함 시대의 것으로 소위 하므라비 경전(Hamurabi Code)이란 것이 일찌기 발굴 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바벨론에 있어서는 아내 된 자가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경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자녀를 얻어 자기의 자녀로 삼을 수 있다는 법이 허락되어 있다. 하무라비의 경전 밖에도 그러한 법률의 흔적이 다른 고고학적 자료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두 아브라함 시대의 그의 고향이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들이다. 사라와 아브라함이 하갈을 그의 첩으로 얻게한 것은 그러한 시대의 풍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속적 불신행동이었음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제 엄숙히 사도 바울의 다음 성구를 다시 한번 묵상하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아브라함과 여호와의 상급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아브라함은 지극히 큰 상급을 받은 믿음의 조상이었다. 지극히 큰 상급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곧 그의 지극히 큰 상급이었다고 창15:1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상급만이 아니라 그의 방패가 되신다고 하셨다. 애굽왕 바로의 손에서 여호와께서는 저를 건지셨고 가정이 완전히 파탄할뻔한 그러한 위경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저의 방패가 되어 주셨던 것이다(창12:14-20).
아브라함은 시날왕 아므라벨과 그의 연합군을 쳐서 이긴후 사랑하는 자기의 조카 롯과 그 가족들만을 구원한 것이 아니다. 소돔왕과 고모라의 왕은 물론이요, 그들의 백성들과 재물들도 다시 찾았다(창14장). 그때에 소돔왕이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제의 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은 당신이 취하고 사람들만 내게 보내 주소서"(창14:21). 이에 대한 아브라함의 유명한 대답을 우리 신자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 안다. "아브라함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라함을 치부케 하였다 할까하여 네가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14:22~23).

이러한 그의 대답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는가?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 세상의 상징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를 거절한 것은 깊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부귀가 그리워 따라간 사람이라면 아브라함은 찾아드는 그것마저 거절한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거절한 이유는 그것뿐만 아니었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부자가 되었다는 추한 말을 그는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부귀는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어진 것임을 그는 세상에 선포하기를 원했었다. 그는 자기의 부귀를 통해서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크게 축복하셨다. 창15:1에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셨다. 아! 이 얼마나 놀라운 상급인가! 이때 이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던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아브라함 이후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하나의 신앙생활의 좋은 모범으로써 깊이 명심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세상의 향락과 죄악된 영화와 부귀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친히 저들의 상급이 되어지고 방패가 되어진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교훈이기도 하다.

히브리서11:24~26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하셨다. 모세도 역시 아브라함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악의 낙을 거절할때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축복하여 믿음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했을때 그는 하나님께 무슨 상급을 요구했었던가. 창15:2에 보면 "아브라함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했었다. 계속해서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4절) 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 그리웠다. "나는 무자하오니" 하면서 아들을 구했다. 본문에 나타난대로 그에게는 집에서 길리운 다메섹 소년이 있었다.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인 그는 후일에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보냄을 받아 리브가를 데려온 아브라함의 종과 동일한 인물이라고 성경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의 집의 모든 소유를 맡아 늙도록 충성한 종이었다(창24:1-2).

아브라함은 그를 자기의 상속자로 삼기로 일찌기 결심하는데 홀연히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즉 롯을 떠나보낸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 보라....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3:14-17)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계시를 받은후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어도(창14장 참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씨(아들)를 주시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나타나셔서 크신 상급을 약속하시니 그는 무슨 상급을 주시려는가 하고 묻지 않을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혈육의 아들 뿐이었다. 그는 아들이 없는 고독 때문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을 상속자가 그리웠던 것이다. "동서남북의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는 분명히 받았건만 상속자인 아들이 없어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사실 이것은 그의 신앙의 고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보라! 하나님께서는 진심으로 구하는 자에게 주시되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시었다. 육신의 상속자를 구하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상속자뿐 아니라 영적 상속자까지도 주셨다. 육신의 아들을 그리워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아들뿐만 아니라 메시야를 주셨던 것이다.

창15:3에 보면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하며 탄식하던 아브라함에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하시면서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여기 [네 자손](원문의 씨,단수)이란 말은 복수가 아니라 단수이다. 그 단수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 육신의 아들 이삭이 외아들이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일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사라가 낳은 이삭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약의 사도 바울은 이 약속을 그렇게 간단하게 보지 않았다. 갈라디아서 3:16에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했음을 본다. 그 자손이란 복수 아닌 단수 곧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와서 비로소 [그 자손](원문은 단수로 씨)을 그리스도로 이해하게 된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도 벌써 그것을 알았다. 그는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하리라" 했을때 육신의 아들만을 생각하지 않았고 그것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장차 나타날 자기의 씨(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별과 같은 많은 후손들이 영적 가나안을 상속할 것을 믿었었다(히11:13).
그러한 신앙은 진실로 성령의 지도로 생겨진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아브라함은 본래 일찍부터 하나님을 섬긴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보게 하고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는 계시를 통하여 그 자손이란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임을 믿게 되었을때 비로소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때 이후 아브라함은 육신의 가나안 보다도 하늘의 가나안을 더 사모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켜 말하기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5~16) 했었다.
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정든 산천, 부유한 고향 땅, 그리운 형제, 친척을 버리고 떠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나그네의 곤고한 생활 중에서도 세상으로부터 오는 모든 부귀와 영화를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헌신같이 버리는 순결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의 크신 상급이 되어주셨고, 땅의 가나안만 아니라 하늘의 가나안까지도 그와 그 후손들에게 영원한 기업으로 주셨다.


아브라함의 받은 약속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아브라함은 두번에 걸쳐 거듭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그처럼 거듭받은 약속의 내용은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와 그 후손에게 주시리라는 것과 또 그 후손들은 능히 셀 수 없으리만큼 번성하리라는 것이었다. 이같은 그 두번의 약속은 내용이 동일한 것이지마는 그 약속을 받을때의 환경이 달랐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약간 다른 점이 있다고 느껴진다. 이제 그것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첫번째 약속을 받을때의 환경
창세기 13:14에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란 말로써, 첫번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시작된다. 위에 기록된 본문이 바로 그것이다. 창세기 13:1-13까지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이 무엇때문에 서로 갈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는 것을 본 아브라함은 그러한 부끄럽고 비참한 꼴을 이방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창13:7).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나선 골육 형제(삼촌과 조카)가 얼마 안되는(?) 풀밭 몇평을 놓고 이방인들 앞에서 서로 다툰다는 것은 이 얼마나 창피한 일이었던가. 아브라함은 슬픈 마음으로 롯을 불렀다. 창13:8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이 롯에게 한 말이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 얼마나 처량한 말이었던가. 롯은 물이 넉넉한 기름진땅 소돔과 고모라를 택하여 떠났다. 슬픈 마음으로 롯을 떠나 보내고 쓸쓸히 돌아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푸셨다. <바로 그후에(창13:14)> 하나님께서는 온 가나안 땅을 그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다. 이러한 약속을 주신 것은 바로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창13:14)의 일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재명심 할 필요가 있다. 보이는 것을 양보했을때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주시는 하나님, 적은 것을 양보했을때에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었다.

2. 두번째 약속을 받을때의 환경
창세기 15:1에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란 말로써, 또 두번째 약속은 시작된다. 즉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이것이 두번째 약속의 말씀이었다. 첫마디의 "이 후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은 첫번째 약속을 받을때의 "롯이...떠난 후에"란 말과 잘 호응되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한 후에 크신 상급으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또 다음 어떤사건 후에 그에게 크신 상급을 약속하셨을까. 이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은 롯이 소돔땅에 가서 거할때에 시날왕 아므라벨의 연합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쳐들어 왔을때에 되어진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왕이 패하였을때 그곳의 모든 재물과 양식은 빼앗기고 롯도 포로가 되었고 그 재물과 가족들도 다 빼앗겼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집에서 기르던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원수들을 쫓아가서 그들을 치고 롯을 구원했다. 모든 "재물과 부녀와 친척들을 다 찾아왔다(창14:16). 이 때에 구원을 받은 소돔왕은 아브라함에게 사례하여 하는 말이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창14:21)고 했다. 이러한 소돔왕의 제안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그것을 깨끗이 거절했다.

창14:22~23에 보면 "천지의 주재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이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했다. 아! 이 얼마나 깨끗한 거절인가. 본래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세상의 상징이었다.
그들의 부귀와 영화는 세속적인 향약의 상징이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오는 기쁨을 원치 않았다. 그는 그것을 깨끗이 거절하였다.
거절한 이유인즉 그것을 취하여 내가 부자가 되면 소돔왕 네가 나로 부자되게 하였다는 그런 말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 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부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귀히 보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거절했을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뻐하셨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그의 상급이 되셨다고 선포하셨다. 창15:1의 [이 후에]란 바로 그러한 일들이 있어진 [후에]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이 소돔왕의 제의를 거절한 바로 그 후에 하나님의 크신 축복과 약속이 있었다.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고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은 원수들을 이긴 후에 오히려 두려워했음을 본다.

그들이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쳐들어 올 것을 무서워했던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격려했다. 두려워 말라고 했고, "나는 너의 방패"라고 하셨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캄캄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했다. 하늘의 저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하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다. 그리고 가나안을 그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던 것이다.

이처럼 위에서 본 바와 같이(창13:1-13) 아브라함이 이방 사람들 앞에서 골육이 서로 다투게 된 것을 슬프게 알고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함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첫약속을 상급으로 주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제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그리고 또 다음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악된 소돔의 부귀를 거절했음을 보았을때는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방패가 되시며 또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심을 확약하시면서 두번째의 약속을 주셨던 것이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했었고, 계속해서 가나안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삼게 하셨다.

 
그러면 그 첫번째과 두번째의 약속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먼저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창13:14)는 말과 "하늘을 우러러...보라"(창15:5)는 말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첫번째 약속의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녀에게 주리라"는 것과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으리라"는 것이 육신의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고 거기에서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리라는 약속이라면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는 말은 영적 가나안의 영적인 신령한 믿음의 자녀들이 별과 같은 창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육신의 가나안의 기업을 말하때는 그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라" 했고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그 자손도 셀 수 있으리라" 하셨는데 이것이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왕상4:20) 하늘의 셀 수 없는 별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어질 아브라함의 영적 신령한 자녀들을 가리킴이 아닐까. 창15:5에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셨는데 여기 "네 자손"이란 원어는 복수가 아닌 단수이다. 그것은 여럿을 가리킴이 아니요, 곧 한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갈라디아 3:16에 보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리킴이라고 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했음을 본다. 분명히 아브라함은 캄캄한 하늘의 뭇별을 우러러 보았을때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생겨질 영적 후손들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같은 믿음을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감사하자. 본래는 이방 백성이었던 우리가 이제는 그저 "땅의 티끌 같은 후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이라 생각할때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위에서 논술한 바와 같이 아브라함의 받은 언약 즉 "내가 네 자손을 땅의 티끌 같이 하리라..."는 것과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그러나 여기서 굳이 구별하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이 두번째 언약이 주어진 직후였다(창15:56)는 사실과 둘째는 "땅의 티끌 같으리라"는 그 첫약속은 열왕기상4:20에 보면 벌써 솔로몬 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롯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성경을 읽은 분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흉년을 만나므로 살 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 갔었다. 거기서 그는 하마터면 아내를 빼앗길뻔 하였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로 아내를 도로 찾았고 생명도 건졌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찾아 시험에 빠진 아브라함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러므로 애굽왕 바로를 통하여 그에게 많은 물질을 주셨다. 창13:1-2에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쌔...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했음을 본다. 은금만 아니었다. 많은 종들도 데리고 나왔다. 그때의 아브라함의 생활이 얼마나 풍부하였는지는 그가 318명의 식객(군인 혹은 종)을 거느리고 있있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창14:14참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물질을 주시되 풍성히 주셨다. 아! 그러나 슬프다. 아브라함에게는 또 다른 근심이 닥쳤다. 그것은 물질의 풍부로 오는 근심이었다. 창13:7에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그들의 소유가 많아서....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땅에 거하였느니라" 했는데 아브라함과 롯사이에는 그만 물질의 풍부때문에 오히려 싸움이 생겼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큰 근심이요,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 조카 롯을 얼마나 사랑하였던가.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때 자기의 아내와 더불어 오직 롯만을 데리고 떠났었다. 이 한가지만 보아서도 그가 롯을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알 수 있다. 롯도 그 삼촌을 그렇게 따랐고 순종했었다.

사실 롯의 아버지는 일찍 죽었었다. 할아버지 데라보다도 먼저 죽었다(창11:27~28). 아브라함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를 아들같이 여겼을 것은 물론이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때에 그 나이는 벌써 75세였다고 했다(창12:4). 그렇게 늙도록 아들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있어 롯은 말이 조카이지 사실은 아들과 다름이 없었을 것은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롯은 어디를 가나 기쁨과 괴로움을 같이 했었다.
그랬건만 이제 싸움이 생겼다. 더구나 이방인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이 같이있는(창13:7 하) 그 앞에서 피차에 다툼이 생겼다. 이 얼마나 창피한 비극인가. 이방 사람들의 앞에 하나님의 택한 가정의 집안 싸움이 벌어졌으니 아브라함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으랴! 사실 [은금]이란 말이 성경에 여러번 나오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은 그 맨 첫번째이다.
은금이란 말이 나올때 그곳에 싸움이란 말이 따라나왔다. 은금이 있는 곳에 싸움이 따르다니! [육축]이란 말도 창세기 1장에서 그것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한번 나온후(창1:25) 지금 비로소 나오는 말이다. 물론 [풍부]라는 말도 처음 나온다. 은금과 육축이 풍부한 그곳에 화평이 아니라 싸움이라면 물질이란 자칫하면 얼마나 추악한 것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재물이란 그 소유자들을 많은 근심으로 찌르는 것을 볼 수 있다(딤전6:10). 아브라함에게는 이제 그 재물때문에 새로운 근심이 생겼다. 롯도 아브라함과 같은 재물의 복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육축을 기르기 위한 풀밭을 놓고 저들의 사환들은 서로 다투게 됐다. 드디어 아브라함은 롯과 같이 살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롯과 작별하기 위하여 그를 불렀다. 창13:8~9에 "아브라함이 롯에게 이르되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라.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것은 아브라함의 말이었다. 이 얼마나 슬픈 선언이었던가. 그러나 이제 그에 대한 롯의 태도를 보라.
창13:10에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을 바라본즉 물이 넉넉하니....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더라" 이것은 롯이 요단뜰을 바라볼때의 흡족한 마음을 묘사한 말이다. 그는 네가 원하는 어느 곳이든지 자유로 택하라는 그 말에 그 마음은 만족했다. 여기 여호와의 동산같다는 것은 가장 아름답고 기름진 동산같다는 말이다. 본래 고대 히브리인들은 가장 훌륭한 것, 가장 큰 것,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할때는 흔히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렸다.
호렙산, 시내산, 헬몬산 같은 큰 산들을 가리켜 "여호와의 산"이라 했고, 큰 나무는 "여호와의 나무"라고도 했다(시104:16).

롯은 요단뜰을 바라볼때 마음이 흡족했다. 옛날 에덴 동산도 네 줄기의 물 근원이 있었다. 롯이 바라본 그 땅도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다고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애굽 땅과 같다"고도 했다.
이로써 롯의 마음은 아직도 애굽에 있었음을 본다. 성경에서 보는대로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돌아온후 다시는 애굽을 사모한 흔적이 없었으나 롯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옛날 출애굽에 나온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사모한 것과도 같았다(출16:3). 롯은 그 푸른 풀밭, 기름진 동산, 그러나 그속에 썩어져가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었다.
창13:13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했음을 본다.
그러나 혈육의 인간 롯은 그런 죄악에는 무관심이었다. 그렇게도 관영한 소돔의 죄악을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사람이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것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 이로써 롯은 아직도 안목의 정욕을 따라가는 세속적 신자의 그림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롯도 아브라함 같이 택함을 입고 부름을 받아 구속함을 받은 성도의 그림자임에는 틀림없다. 결코 불신자를 대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베드로전서에 보면 롯을 가리켜 이상하게도 의인이라 했다. 그 말은 곧 그도 택함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성도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혈육의 성도였다. 신령한 것에는 눈이 어두운 성도였다.

우리는 각자 자기를 반성하며 생각해 보자. 그는 먼저 푸른 요단을 바라보았다. 다음은 탐심을 따랐다. 자기를 그처럼 사랑하던 아브라함에 대한 의리도 버렸다. 결국은 소돔에 장막을 치고 아주 주저앉아 버렸다. 이것은 롯이 택한 길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다. 세상의 물질을 보고 탐심이 생길수는 있다. 그러나 곧 돌아서야 한다. 롯과 같이 거기에 앉아버리지 말아야 한다.
자, 그후 롯은 어떻게 되었던가? 곧 불의 심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징계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먼저 징계하시는 법이다. 롯에게도 먼저 징계가 있었다. 창세기 14:1이하에 보면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이 인근의 네 왕들과 연합하여 소돔과 고모라 땅을 쳐왔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은 약탈됐고 사람들은 다 포로로 잡혔다. 롯도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의 처자도, 재물도 다 빼앗겼다.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였다(창14:12).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318명의 자기의 사병을 거느리고 원수들을 쫓아갔다. 생명을 걸고 싸웠다. 자기를 버리고간 그 롯을 위하여 드디어 롯도 구원하고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부녀들과 다른 사람들도 도로 찾았다(창14:14~16). 자, 이때에 롯은 아주 소돔을 떠났어야 했었는데 무엇에 그렇게도 연연하여 거기에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는 말인가. 그 풀밭이 그렇게도 아까왔고 애굽땅 같이 기름진 그 땅이 그렇게도 좋아서 차마 버릴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내 불심판을 받게될 때에야 비로소 도망쳐 겨우 구원을 얻게 되었다. 롯의 아내는 롯보다 더 한층 세속적이었다. 그는 불타는 소돔을 떠나는 것을 그처럼 아쉬워하다가 마침내 아주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남편이 잘못 믿으면 아내라도 잘 믿었어야 할텐데 그는 그 남편보다도 더했으니 무슨 소망이 있었겠는가. 롯은 구원을 얻었으되 겨우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이었다. 말세의 성도들도 롯과 같이 구원은 얻되 불가운데서 겨우 얻는 구원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고전 3:12~15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했음을 본다.

말세에 롯과 같은 성도들이 많을 것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안목의 정욕을 따라서 세상으로만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록 잘못 갔더라도 곧 돌이켜야 할 것이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때에 놓치지 말아야 한다.
롯에게도 회개의 기회는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포로가 되는 징계로써 회개의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물질을 더 사랑하던 자의 결과가 어떠함을 롯에게서 배워야 한다.


아브라함의 소명 (김희보 前 총신대 신대원 교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창세기를 읽는 자는 누구나 그 안에서 인류의 3대 조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류의 첫조상 아담이요, 둘째는 홍수의 심판후 새 시대의 첫조상이 되는 노아요, 세째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의 첫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이다. 그런데 창세기에서 가장 세밀하게 기록된 사건들은 그 세번째 부분이다.
창세기는 전체가 50장으로 되어있는데 그 전체의 3/4은(12장-50장) 아브라함과 그 가정 즉 이삭과 야곱과 그 아들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제 그러한 아브라함에 대하여 두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먼저는 그가 어떠한 시대, 어떠한 환경에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것이요, 다음은 그가 당한 첫시험에 대해서이다.

1. 아브라함의 시대와 환경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은 것은 바벨탑이 무너진후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흩어진지 얼마되지 않아서의 일이다. 성경의 연대를 살펴보면 노아의 연대가 주전 3,000년전이요,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대가 된다. 그런데 그 뒤 중간 시대에 바벨탑을 쌓았던 기록이 있다. 이미 바벨탑 시대에 벌써 달과 별을 숭배하는 우상종교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고고학의 자료에 의하면 바벨탑이 무너진후 가는곳마다 작은 탑들을 쌓고 그 정상에는 월신(NANNA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다. 이러한 탑들을 찌그랄(Ziggrat)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거룩한(혹은 높은) 제단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들을 미루어 생각해본다 할지라도 아브라함 시대에는 벌써 우상종교가 크게 성행했던 때였을 것임을 생각할수 있다.
사실 성경 여호수아 24:2에 보면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 내어....."하신 말씀에서 보듯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그 가정들은 열심히 우상을 섬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고고학의 다른 자료에도 주전 2,000년전 아브라함 시대의 문화와 더불어 그때 벌써 우상종교가 얼마나 성행하였던가를 보여주는 것들이 남아있다. 그중의 하나는 그 당시의 집터의 유적들이다.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 벌써 높은 바벨탑을 쌓으리만큼 그 당시의 건축기술이 얼마나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거니와 아브라함 시대에도 건축기술은 상당히 발달하여 있었다.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굴된 아브라함 시대(주전 2,000년전) 집터들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그때의 집들은 벌써 구운 벽돌을 사용했었고 보통 집(가정)들은 2층이 없는데 10개 내지 20개의 크고 작은 방들이 있었다. 살림방들은 윗층에 있었고 부엌과 빨래터 같은 것들은 아래층에 있었는데 그 맨 뒷방에는 반드시 우상의 제단을 둔 골방이 있었다. 이만큼 그들은 우상숭배에 열심이었다. 또 그밖에도 당시 아이들이 배우던 학교터에서는 기하학의 도형들과 토판에 새겨진 구구법과 그들의 상형문자들이 적혀 있었다.
이 모든 자료들을 감정한 그 결론은 즉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 지방의 문화는 그 시대에 벌써 상당한 수준에 있었고 그들의 물질생활의 수준도 유복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적으로는 우상종교의 암흑시대요 크게 부패한 시대였던 것을 알게 된다. 사실 아브라함의 고향 땅의 이름 우르는 그 명칭 자체가 본래 빛 혹은 불이란 말로써 그것은 불을 숭배하는 우상종교의 의식에서 생겨진 말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떠하든간에 앞서 인용한 여호수아의 말만 보더라도 그 시대는 우상을 지극히 섬기던 타락한 시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환경에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 시대가 전혀 하나님을 모르는 시대는 아니었다. 성경 연대를 잘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어린 시절에 노아는 아직 살아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창세기 9:28에 기록된대로 노아는 홍수후에도 350년을 더 살았다고 했다. 노아 시대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기는 알았으나 그 하나님을 배반했던것 같이 아브라함 시대도 그러했다.
로마서 1:21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하신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배반한 시대였다.
그러한 환경중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었다. 죄악이 관영했던 그 시대에 노아를 불러 방주를 짓게 하시던 하나님께서는 또한 아브라함을 불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케 하셨던 것이다.

2. 아브라함의 가나안 도착과 그의 첫시험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아 하란을 떠날때의 그 나이는 75세였다(창12:4).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전에 벌써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으로 갈 생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성경에도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감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창세기 11:31에 "아브라함은 그 아버지 데라와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더불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에 가고자 하더니 도중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려했으나 도중 하란에 머물고 만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 아버지 데라 때문이었을 줄 안다.
그는 육신의 아버지 때문에 가나안 땅과 고향 땅 우르의 중간 지점인 하란에서 망서린 줄 안다. 늙은 아버지를 봉양할 것인가, 버리고 갈 것인가? 이것은 우리에게 큰 시험이 생겼을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이가? 오직 고요히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루어 주신다. 비록 더디더라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기다렸다. 드디어 때는 왔다.

사도행전 7:4에 "아브라함이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시방 거하는 이 땅(가나안)으로 옮기셨느니라" 하신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 그대로 하란에서 그 아버지 데라가 죽으므로 아브라함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때에 비로소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희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하셨다. 그런데 히브리 11:8에 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을 때에...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으며..." 했다. 여기에서 어떤 분은 의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는 분명히 하나님의 [지시하는 땅] (가나안을 가리킴)이라고 했었는데 히브리 기자는 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했을까? 그러나 이것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는 목적지가 가나안임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는 벌써 가나안으로 가려는 마음으로 하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가(창11:31 참고) 그러나 목적지가 분명하다고 해서 가는 길을 아는 것은 아니다. 그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떤 길로 가야할지 몰랐으나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믿음으로 그 길을 떠났던 것이다.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고 깊은 강(유브라데)을 건너야 했다. 그러한 길을 그는 믿음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 믿음은 이루어져서 그는 드디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그러나 슬프다! 가나안 땅이 그를 기다리지는 않았다. 사도행전 7:5에 보면, "그러나 거기에서 발 붙일만큼도 유업을 그에게 주지 아니하시고..." 했음을 본다.
낯설은 그곳에 무서운 기근이 들었다. 살 길이 막연했다. 문자 그대로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닥친 큰 시험이었다. 그는 이 시험을 어떻게 이겼어야 했었을까? 오직 믿음으로 참고 견디며 기다렸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슬프게도 창12:10에 보면 "애굽으로 떠나갔다"고 했다.
성경에 애굽이란 말이 여기에 맨 처음 나온다. 애굽은 구약 성경에 흔히 혈육의 나라 우상의 나라로 대표된다. 그러므로 이사야 31:1에 보면 "도움을 받으려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내와 롯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다. 만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아니었더라면(창12:17 참고) 그는 거기에서 아내를 잃어버렸던가 또는 자기의 생명을 잃었을뻔 했었다(창12:12-20 참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쌍히 여겨서 다시금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소유까지도 풍성케 했다(창13:16).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돌보심이 이러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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