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udy

Ⅰ. 찬양받으실 하나님 47:1-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대한 위대하고 선한 생각이 마음에 가득차서 찬양이라는 영광스러운 일에 자기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애쓴다.
(1) 누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요청받는가. 너희 만민들아. 즉 "너희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아." 이 말은 이방인들의 개종과 그들의 교회가입에 대한 예언으로 간주될수 있다(참조. 롬 15:11).
(2) 그들은 어떻게 하라고 요청받는가. "그렇게 하지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는듯이 손바닥을 치라. 하나님께서 들으실수 있도록 하기위해서가 아니라 너희 주위에 있는 모든 자가 들을수 있도록 여호와께 외치라. 그를, 그리고 그의 능력과 선하심을 즐거워하는 소리로 외치라.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즐거워할수 있도록 하라."
(3) 찬양할 제재로서 우리에게 무엇이 제시되는가. 지존하신 여호와는 위엄하시고 온땅에 큰임금이 되심이로다. 그는 자기 백성과 그들의 권익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 이전에도 그렇게 하셨고 앞으로도 늘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하셨다는 이 사실은 그의 백성을 가나안 땅에 심고 그들을 이때까지 그곳에 거하게 하신 사실에서 입증된다. 메시야의 왕국은 온땅을 넘겨받게 되어있으며, 그 나라는 유대국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방인들을 정복하실 것이다. 그는 '양을 우리로 인도하듯이 그들을 인도하여 들일'(단어의 의미가 이렇다) 것인데 도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존하기 위해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이다. 우리를 위하여 기업을 택하시나니.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기업으로 택하셨다. 그곳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정탐하신 땅이었다(참조. 신 32:8). 그곳에 하나님의 성소가 세워짐으로인해 그땅은 야곱의 '영광'(암 6:8)이 되었다. 이 사실을 영적으로 적용해 보라.
1) 성도들의 행복 : 하나님께서는 친히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기업을 택하시고 또한 그들을 위해 저 세상에 썩지 아니하는 기업을 준비해두셨다(벧전 1:4).
2) 성도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복종 : 은혜받은 영혼들은 모두가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나의 기업을 택하실 것이라. 하나님은 내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나 자신보다 더 잘아시는도다. 그러므로 나는 결코 내뜻대로 하지않고 그의 뜻을 따를 것이라."

Ⅱ.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권고 47:5-9
신하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왕을 찬양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찬양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필요한 한가지 규정이 추가되어 있다(7절). 지혜의 시로 찬양할지어다. "마스길로 찬양할지어다." 이 말은 첫째, "지적으로 찬양하라. 즉 너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와 찬양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알고서 찬양하라." 이것이 복음의 원리이다(고전 14:15). 둘째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름다움들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그들을 가르치기를 바라는 자들로서 교훈적으로 찬양하라."
(1) 우리는 올라가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5절).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가심이여. 이것은 다음의 사실들을 언급하는 말일수도 있다.
1) 언약궤를 시온산으로 올리우는 것이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표시로 제정된 기구이므로 그것이 정당한 이유에 의해 높은 곳으로 옮겨질때 하나님께서 '올라가신다'라고 말해질수 있다.
2) 우리 주 예수께서 지상사역을 모두 마치고서 하늘에 오르신 것(행 1:9)이다. 그때 그는 '즐거이 부르는 중에', 즉 왕의 환호, 정복자의 환호와 더불어 '올라가셨다.'
(2) 우리는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7,8절).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하나님께서는 그 보좌를 하늘에 마련하시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통치 범위를 보라. 사람은 모두가 본래부터 그에게 충성해야할 의무를 지니고 태어난다.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조차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참되신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다. 그의 통치의 공평성을 보라. 그가 앉으셔서 영장과 명령서를 발부하시고 우리가 거기에는 전혀 부정이 없다고 확신하는 판결을 내리시는 곳은 그 거룩한 보좌이다. 하나님이시며 그의 '보좌가 영구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방을 치리하신다.' 그는 섭리 왕국의 통치를 맡으셨을뿐만 아니라, 이방인 세계에서 그의 은혜왕국을 세우시고 이교사상속에서 자란 많은 무리들의 마음들도 또한 통치하실 것이다(엡 2:12,13).
(3) 우리는 '열방의 방백들'에게 시중을 받고 존경을 받으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9절). 그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었다.
1) 그들의 정착된 통치형태, 즉 '그들 땅의 방패' 노릇을 하는 사람들인 '그들 백성의 방백들'을 두게 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복이었다. 관리는 한나라의 방패이다. 또다른 의미에서 '세상의 방패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명예가 된다. 관직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을 통치하실때 그것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신다. 나라의 평화에 관한 일에 국가의 고위자들이 한결같이 뜻을 같이하는 일은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는 좋은 징조임에 틀림없다.
2) 이 말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도록 부르심을 받는 것에 적용될수 있고 또 메시야 시대에 땅의 열왕과 그들의 백성이 교회에 가입하리라는 예언으로 간주될수 있다. '세상의 방패' 즉 왕위를 나타내는 기틀이(왕상14;27,28), 성문의 열쇠가 정복자 혹은 군주에게 바쳐지듯이 그리스도께 넘겨질때, 즉 군주들이 종교의 권익의 진흥을 위하여 그들의 권한을 사용할때 그리스도는 지존하여지신다.

# 핵심
47:1-9
93,95-99편과 함께 (하나님의)‘왕권을 노래하는 시편’ 또는 왕의 즉위식에서 사용하던 ‘대관시’로 분류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실뿐 아니라 온우주의 왕이심을 증거한다.

# 묵상
본 시의 배경 ( 47:1 )
본 시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의 장막으로 모셔올때(삼하6:12-15)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시를 메시야의 부활, 승천과 왕되심을 예표하는 찬양시라고 했습니다. 곧 메시야는 법궤가 지성소에 들어가는 것처럼 부활승천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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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그의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 46:1-5
시편 기자는 자신을 예로들어 다음과 같이 우리를 가르친다.
(1)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나타나시는 새로운 어떤 경험을 하게되었을때, 하나님안에서 그리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의 임재안에 승리하도록 가르친다(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신. 고통중에 있는가? 그는 도움이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시험한 돌'이라고 불렸듯이(사 28:16) 우리가 "시험되었다"고 말할수 있는 도움이시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한다.
(2) 아무리 큰위험도 이기도록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도움이시라. 즉 우리에게 전적으로 충분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이와같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깨끗한 양심, 정직한 마음의 증거이며 또한 하나님과 그의 섭리, 그의 약속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의 증거이다. 땅이 움직여 바다가운데 빠지고 심지어 땅에서 가장 강하고 견고한 부분인 산마저도 깊이를 알수 없는 대양속에 묻혀버린다고 가정해 보라. 그리고 바다가 '산을 요동케할'만큼(3절) 흉용하고 광분한다고 생각해 보라. 나라가 혼란할지라도, 즉 나라가 전쟁에 휘말리고 폭동으로 뒤흔들릴지라도, 나라의 권세자들이 연합하여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할지라도 우리는 이 모든 고난이 결국에는 교회에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알기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애쓰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사사로운 어떤 관심사에 대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에 대한 염려이다. 우리가 염려하는바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위로와 안전을 위해 마련하신 것을 생각할때, 우리는 나쁜 소식을 듣고서 두려움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음을 알게될 것이다. 바닷물이 흉용하여 하나님의 성소를 위협할때라도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그 성소를 '기쁘게 할' 것이다. 은혜의 언약은 강이며 그 언약의 약속들은 시내이다. 은혜의 성령은 강이요(요 7:38,39) 성령의 위로는 '시내' 즉 '하나님의 성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이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5절). 교회는 세상후에도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이 파멸할때에라도 복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새벽에' 곧 동터올때 고난가운데서 도와 구출하실 것이다. 즉 그는 '만날 도움'(1절)이시기때문에 매우 신속하게 그리고 도움이 가장 요청되는 때에 매우 시기적절하게 도우실 것이다.

Ⅱ. 왕되신 하나님의 영광 46:6-11
본문은 하나님께 열국의 왕으로서 또 성도들의 왕으로서 영광을 돌린다.
(1) 열국의 왕 : 하나님은 세상에서 그와 그의 권익을 반대하는 열국의 분노를 저지하시고 그들의 권세를 깨뜨리신다(6절). '이방이' 다윗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 또 다윗의 후손의 나라가 서는 것을 보고 '훤화하였다'(참조. 2:1,2). '왕국이' 분노로 '동하였고' 위의 일을 반대하기위해 사납고 떠들썩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리를 발하시매' 즉 '그들에게 분노가운데서 말씀하시매' 그들이 또다른 의미로 동하였다. 즉 그들이 갑자기 당황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원수들의 마음이 그처럼 녹은 사실이 사사기 5:4,5절에 묘사되어 있다(참조. 눅 21:25,26). 그는 원하시기만 하면 열국을 완전히 파괴하시고 전혀 쓸모없게 만드실수 있다(8절).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 행적은 주의깊게 관찰되고(66:5) 연구되어야 한다(111:2). 전쟁은 대개는 그것이 상연되고 있는 무대를 파괴하는 비극이다. 다윗은 원수들의 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그 전쟁은 얼마나 심각한 황폐를 일으켰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심이요'(66:3)라고 말하라. 하나님이 그의 칼을 칼집에 꽂기를 기뻐하실때는 열국의 전쟁을 끝내시고 평화를 내리신다(9절). 열국이 서로 오랫동안 전쟁을 함으로써 숨이 차 헐떡이게 되었을때 '저가' 때때로 그들을 불쌍히 여겨 숨돌릴 틈을 가질수 있도록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신다.' 곡과 마곡의 완전한 파멸이 그들의 전쟁무기를 불사르는 것(겔 39:9,10)에 의해서 예언적으로 묘사되었다. 그리고 전쟁무기를 불사르는 것은 또한 교회의 완전한 안전과 지속적인 평화의 보장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랜 전쟁을 선하게 끝내시는 것이 여호와의 일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놀라움과 감사함으로 바라보지 않을수 없다.
(2) 성도들의 왕 : 우리는 그를 '그의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신' 분으로 인정해야 한다(계 15:3). 하나님의 원수들로하여금 잠잠하게 하고 더이상 위협하지 않게하며 그가 그들보다 무한히 뛰어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하라. 그들로하여금 더이상 훤화하지 않게하라. 그렇게 하는 것이 완전히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자가 저희를 비웃으신다'(시 2:4). 그는 그들의 무력한 모든 악의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회안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높아지실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며 자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시고 '사람들이 자랑하는 일에 그들보다 더 뛰어나실' 것이며 그가 그처럼 뛰어나신 분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의 백성들은 진정하고 더이상 떨지말며,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위로를 받아야한다. 우리는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때,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와같이 기도하심으로써 하늘로부터 들으신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응답에 근거하는 믿음을 발휘해야 한다. '아멘, 여호와여 그리하옵소서.' 모든 신자는 이 두가지 사실을 생각하고 승리하라.
1) 그들에게는 능력의 하나님, 곧 모든 능력을 지니신 하나님의 임재가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이 뛰어나신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행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군대가 우리를 대적할지라도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2) 그들은 언약안에서, 그들을 도우실수 있을뿐만 아니라 명예와 신실을 걸고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있다. 그는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즉 야곱이라는 한개인의 하나님이실뿐만 아니라 야곱의 백성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

# 핵심
46:1-11
48,76,84,87,122편과 더불어 ‘시온의 노래’라고 불린다. ‘시온’이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4,5절에 암시되어 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 시편을 읽고 감동을 받아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가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 묵상
담대할수 있는 이유 ( 46:1 )
시인이 천재지변과 같은 재난가운데서도 담대할수 있었던 것은, 어떠한 천재지변이 닥쳐온다할지라도 안전한 피난처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잊지않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여기에서 용기를 얻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의 삶이 절망하게 될때의 유일한 피난처는 세상의 권력과 부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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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그리스도의 영광 45:1-5
어떤사람들은 표제에 나와있는 '소산님'이 여섯줄 달린 악기를 의미한다고 본다. 다른사람들은 그것이 본래 결혼예식때 다른 꽃들과 함께 흩뿌려졌을 백합이나 장미를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시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사이에 존재하는 거룩한 사랑에 관한 '사랑의 노래'이다. 그것은 '매우 사랑받는 자들', 곧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있는 신부의 동무 처녀들의 '노래'이다(14절).
(1) 머리말(1절).
1) 주제의 존귀함 : 그것은 '좋은 말'이다. 그것은 '왕', 곧 왕이신 예수와 그의 나라 그리고 그의 통치에 대하여 지은 것이다.
2) 그 노래의 탁월함 : 이 노래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관하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신앙의 입으로 표현한 고백이었다. 내마음에서 좋은 말이 넘쳐. 우리는 마음이 감동된 상태에서 진심이 담긴 말을 할때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일들을 가장 잘 말하게 된다. 그 점은 다음의 말에서 잘 표현되었다. "나는 내가 지은 것을 말하리라." 즉 "나는 남에게서 들은 것을 말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말하는 것이므로 그보다는 "내가 직접 연구한 것을 말하겠다"는 것이다. "내 혀는 필객의 붓과 같도다. 붓이 손을 따라가듯이 모든 말이 마음의 인도를 받는다." 우리는 선지자들이 사실상 붓에 불과한 까닭에 그들은 성경의 '필자'라고 부른다. 가장 날카로운 논쟁자의 혀와 가장 능변의 연설가의 혀도 하나님이 기뻐하는바를 쓰는데 사용하시는 붓에 불과하다.
(2)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1) 아주 아름답고 호감을 주는 모습을 지닌 자로 묘사된다. 이 시편은 결혼의 노래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탁월함이 왕되신 신랑의 아름다움으로 묘사되었다(2절). '왕은 인생보다.' 인생들중 어느누구보다 '아름다우시도다.' 그는 왕에 관하여 말하려고 생각했으나(1절) 곧 자기의 말을 그리스도께로 돌린다. 그리스도에게 애정을 품으며 그를 사모하는 자들은 그에게 가서 그 사실을 말하고 싶어한다. 왕은 인생보다 아름다워.
2) 하늘의 큰은총을 받은 자로서 묘사된다. 그는 '인생보다 아름다우시다.' 그에게는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를 위해 그가 지니고 계신 것이다.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 하나님의 선의가 그의 말씀과 그의 약속, 그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짐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역사는 우리안에서 시작되고 계속된다. 은혜의 복음이 그의 입술에 부어졌다. 왜냐하면 그 복음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바'이고(히 2:3) 그에게서 우리가 그것을 받기때문이다. 갈대아역은 '예언의 영이 주의 입술에 있나이다'라고 그 구절을 번역한다. "주는 인생의 이익과 혜택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맡는 위대한 수탁자이시기때문에 하나님이 주께 영영히 복을 주시도다. 땅의 모든 족속이 주안에서 복을 받도록 주를 영원한 복으로 삼으셨나이다."
3) 그의 모든 원수를 이기시는 승리자로서 묘사된다. 왕되신 신랑은 사로잡혀있는 그의 신부를 칼의 힘에 의하여 포로상태에서 구출하여 그녀를 손아귀에 넣고 그녀를 위해 이긴 다음에 그녀와 결혼할 것이다.
① 전쟁을 위한 그의 준비(3절) : 능한 자여 칼을 허리에 차고. 하나님의 칼은 성령의 검이다. 사람들은 그 말씀의 약속들과 그 약속들안에 들어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의 충성스런 신하가 된다. 많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개심하였다.
② 그의 이 거룩한 싸움의 원정 : 그는 위대한 왕이 화려하고 장대하게, 즉 칼과 영광과 위엄을 갖추고 출전하듯이 '영화와 위엄을 입고' 나아가신다. 그는 그의 복음속에서 하나님이 그에게 내리신 명예와 위엄을 입어 가장 위대하고 탁월하고 빛나며 복받으신 자로 나타난다. 그리스도는 그의 풍채나 복음을 보아도 외형적인 영광이나 위엄이 전혀 없으며 사람으로하여금 흠모하게 할만한 것도 없고(그에게는 외모나 아름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려워하게 할만한 것도 전혀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종의 형체를 취하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전히 영적인 영광이요 영적인 위엄이었다. 위엄있게 타고(4절). "주의 나라가 오리니, 계속해서 번영하소서."
③ 그가 관여하고 있는 영광스런 이유 :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위하여. 그것들은 어떤 의미로 볼때, 사람들사이에서 쇠하게 되고 사라져버렸다. 그리스도는 그것들을 회복하고 구출하기위하여 오셨다. 복음자체가 '진리'요 '온유'요 '공의'이다. 복음은 진리와 공의의 능력으로 명령한다. 기독교는 그안에 이런 것들이 명백히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기독교는 온유하고 관대하게 장려되어야 한다(고전 4:12,13;딤후 2:25). 그리스도는 기독교에서 그의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입고 나타나신다. 이것들이 그의 영광이고 위엄이며 이것들로인해 그는 성공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진리이시므로 그를 믿게되고 그가 온유하시므로 그를 배우게 된다(마 11:29). 그리스도의 관용은 강력한 힘이다(고후 10:1). 또한 사람들은 그가 의로우시고 공평히 다스리시므로 그에게 복종하게 된다.
④ 그의 원정의 성과 : 왕의 오른손이 왕에게 두려운 일을 가르치리이다. 영혼이 그에게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두려운 일이 일어나야 한다. 마음은 찔림을 받고 양심은 놀라야 한다. 이렇게해서 여호와의 공포는 그의 위안을 위한 길을 예비해야 하는 것이다. 다음 구절은 이 두려운 일들을 묘사하고 있다(5절).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본래 원수였던 자들이 정복되고 화목케되기 위하여 이같이 상처를 입는다. 양심의 가책은 화살과 같다. 그것은 날아가서 심장에 박힘으로써 고통을 주어 사람들로하여금 그리스도아래 들어가 그의 율법과 통치에 복종하게 만든다.

Ⅱ. 그리스도의 주권과 영화로움 45:6-9
우리는 여기서 왕되신 신랑이 그의 보좌를 정의로 채우고 그의 궁정을 화려하게 꾸미시는 것을 본다.
(1) 그는 여기서 그의 보좌를 정의로 채우신다. 히브리서 1:8,9절에 나타나는 것처럼 여기서 아들에게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니이다'라고 말하시는 이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히브리서에서 이 구절은 그가 하나님이시며 '천사보다 뛰어나시다'는 것을 입증하기위해 인용된다. 그의 통치에 관해서 다음 몇가지를 살펴보라.
1) 통치의 영원함 : 그것은 '영영하다.' 그의 통치는 전시대를 거쳐 땅에 계속 시행될 것이다. 그 나라가 '아버지 하나님께 바쳐질때까지'(고전 15:24) 구속자의 보좌는 계속있을 것이다.
2) 통치의 공평함 : '주의 나라의 홀,' 즉 주의 통치의 집행은 공평하다. 즉 선과 악의 영원한 척도와 이유가 되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와 뜻에 따라 정확하게 시행된다.
3) 통치의 확정과 등용 :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중보자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위임을 받고 그와 함께 계약에 참여한 자들의 머리로서 요한복음 20:17절에서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부르셨다)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7절). "하나님이, 주께서 의의 진홍과 죄의 파괴를 위하여 행하시고 겪으신 일을 보상하시는 가운데 주에게 즐거움의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주께 지극히 높은 신분의 명예와 기쁨을 주셨나이다." '자기를 낮추시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셨다'(빌 2:8,9). 하나님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은 주께서 권세와 영광을 받아 높아지셨다는 의미이다. 그는 메시야로서의 모든 권위와 위임을 입으셨다.
(2) 그는 자신의 궁정을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미신다.
1) 그가 입고나오는 화려한 옷들은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하는 그옷의 화려함때문이 아니라 그 옷들에 뿌려진 향수의 유쾌함과 즐거움때문에 주목을 받는다(8절).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 그와 그의 의복에 뿌려진 '즐거움의 기름'이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관유의 원료들이었다(출 30:23,24). 거룩한 관유는 일상적으로 쓰기 위해서는 만들수 없는 것으로서 우리 신앙고백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성령의 기름이었다. 그리고 그때문에 그것이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것 같다.
2) 그의 왕궁은 그 당시 가장 장려한 것으로 여겨진 '상아'궁으로 일컬어졌다. 하늘에 있는 빛나는 궁전이 바로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모든 기쁨이 생기는 곳이며 그곳에서 그 기쁨이 영원히 극치를 이룰 '상아궁'이다. 왕의 귀비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9절). 참된 신자들은 모두가 위로부터 난 자들이다. 그들은 만왕의 자녀들이다. 교회는 여기서 여왕, 곧 그가 영원한 언약에 의해서 약혼한 왕비에 비유된다.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이 교회는 '신부' 즉 '어린양의 아내'이다. 신부의 행실이 곧 그녀의 장신구인데 그녀의 순결함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계 19:8)에 비유되고 여기서도 그녀의 값짐이 '오빌의 금'에 비유되었다. 이는 우리의 구속과 같이 우리의 치장도 썩어질 것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귀한 피'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Ⅲ. 교회의 영광 45:10-17
이 시편의 후반부는 왕되신 신랑의 우편에 서있는 왕후된 보좌가 영영하다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말을 교회에 하신다.
(1) 그는 교회가 지켜야할 의무들을 말한다. 그 의무들은 주 예수와 관계를 맺는 모든 자들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즉 너의 결혼조건들에 복종하고 동의할지어다."
1) 교회는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 "결혼법에 따라서 네 백성과 아비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이 말은 다음 두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① 유대주의나 이교사상에서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자들에게 전적으로 묵은 누룩을 버리고 기독교 신앙고백에 유대인들의 의식이나 이교도의 우상숭배를 들여오지 않게하는 것은 참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사마리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기독교를 혼합종교로 만들기 때문이다.
②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길때 아비와 어미, 그리고 이세상에서 우리에게 소중한 모든 것을 미워하는 것, 다시말해서 상대적으로 그들을 그리스도보다 덜 사랑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필요한 일이다. 그러하면 왕이 너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이 말은 그것이 유대적이든지 혹은 이방적이든지간에 교회가 옛의식과 관습을 신앙과 뒤섞는 것은 그의 아름다움을 더럽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교회에 있어서든 신자들 각자에게 있어서든 거룩한 아름다움은 그리스도께서 매우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2) 교회는 그 왕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복종해야 한다. 저는 너의 주시니 너는 저를 경배할지어다. 우리는 그를 하나님으로, 더욱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경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듯이 아들을 영화롭게 해야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2) 그는 교회를 위해 계획된 영광을 교회에 말한다.
1) 교회는 성대한 알현식을 받고 값진예물을 받을 것이다(12절). "부유하고 화려한 성읍인 두로의 딸, 즉 두로 왕의 딸이 예물을 드릴 것이라. 사방에 있는 모든 왕가가 네 은혜를 구하고 네게 잊은 유익을 구하기위해 전체의 대표자로서 한사신을 보낼 것이라. '백성중 부한 자도' 네가 아내로 삼은 자를 봐서 네 은혜를 구할 것이라. 그렇게해서 그들은 너를 통해 그를 친구로 삼으려고 할것이라."
2) 교회는 더할나위 없이 빛나고 모든 사람에게 높이 평가될 것이다(13절). 왕의 말이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교회의 영광은 영적인 영광이며 그것은 실로 크나큰 영광이다. 그것은 영혼의 영광이며 따라서 그것은 사람의 영광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영광이요 따라서 그것은 영원한 영광의 보증이다. 그녀는 궁중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고 있으며 그옷은 또한 금으로 수놓아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그들의 생활은 대단한 정성과 주의를 기울여서 만든 수놓아진 금과 같은 선한 행실로 가득해야 한다.
3) 교회의 혼례식은 큰 영광과 기쁨으로 축하될 것이다(14,15절). 저가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아버지께서 부르시는 자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께 오지못한다. 즉 아버지께서는 인도하는 그일을 책임지셨다. 게다가 '왕궁에 들어가는' 문제에 있어서도(15절)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자외에는 아무도 '왕께로' 가지못한다(14절).
4) 이 결혼의 결과가 빛날 것이다(16절). 왕의 아들들이 왕의 열조를 계승할 것이라. 구약교회, 즉 사라져가는 선조들처럼 낡아서 '없어져가는'(히 8:13) 섭리를 계승해서 신약교회가 생겨 동일한 감람나무에 접붙여질 것이다.
5) 이 결혼은 왕되신 신랑을 찬송하는 가운데 영원히 찬송될 것이다(17절).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케하리니. 왕의 아버지는 그에게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여기서는 모든 시대에 그의 이름을 지지할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을 계속해서 계승시킴으로써 그이름을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이렇게해서 그이름은 '영구할' 것이다(72:17).

# 핵심
45:1-17
표제에서 밝히고 있는대로 본시편은 결혼식에 사용되었던 축가이다. 아가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표제의 소산님은 ‘백합화’라는 의미를 가진 곡조명으로 짐작된다.
다윗의 결혼축가에 내포된 신학적 의미(45편)
본시는 왕가의 결혼예식에 불렸던 축복의 노래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단순히 왕가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를 넘어선다. 다윗 왕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반영하며,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왕권을 예표한다. 특히 히 1:8,9절 말씀은 본시를 그리스도의 왕적권위에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왕이신 그리스도가 신랑으로서, 택하심을 받은 교회가 그 신부로서 혼인관계를 맺는다는 신비로운 뜻이 함축되어 있다(참조, 엡 5:31,32).

# 묵상
은혜를 머금은 메시야 ( 45:2 )
메시야가 은혜를 입술에 머금었다는 것은 은혜가 넘쳐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메시야의 완전함에서 나오는 은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와 인생을 풍요롭게 합니다. 곧 메시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허락된 것입니다(엡1:3; 빌3:20).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 ( 45:8 )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품과 성령의 인치심을 상징합니다.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제사에 필요한 관유입니다. 그래서 일반에게는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서 믿는 자에게 아름다운 인격과 성령의 인치심을 허락하셨습니다.
새로운 결혼생활 ( 45:10, 11 )
왕후가 된 이방여인이 아비집을 잊는다는 것은 과거를 잊고 새로운 결혼생활에 주력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성도가 신랑되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최선을 다하며, 결코 과거의 죄된 삶에 연연하지 말라는 교훈입니다(눅9:62).
왕의 아들로 비유되는 성도 ( 45:16 )
성도를 왕의 아들로 비유한 의도는 성도가 영원한 메시야 나라를 상속할 자격을 부여받았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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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옛날의 자비를 감사함 44:1-8
본문에서 교회는 비록 지금은 짓밟히고 있을지라도 승리의 날을 상기한다. 그날은 여기서 현재의 고통을 더가중시키는 것으로서 언급된다. 승리의 면류관을 익숙하게 써왔던 자들에게 있어서 종의 멍에는 매우 무겁게 느껴질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시들은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총의 표시들에 익숙해왔던 자들에게는 아주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그날은 여기서 하나님이 그들의 사로잡힘을 다시 바꾸시리라고 소망하도록 격려하는 사실로서 언급된다. 따라서 그는 이전의 하나님의 자비로운 행사들을 기록함으로써 그것에 대해 기도하며 즐거이 기대한다.
(1) 하나님께서 이전에 그들을 위해 행하신 큰일에 대한 그들의 기념 :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1절). "우리의 열조들이 주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에게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놀라운 조화와 일치가 있어 여러바퀴가 한바퀴나 다름없고(겔 10:13) 많은 일이 한가지 일이나 다름없다. 모든 노인들은 하나님의 기사를 잘 기록해두고 그것을 다음세대에게 전달해야할 의무를 지고있다.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가 하나님의 기사에 관해 그들에게 말하는바를 잘 주의하여 들어야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에 심으셨다(2,3절). 이 일은 그들 자신의 공로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값없는 은혜때문에 된 일이었다. 그것은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로 주의 얼굴빛으로 하신' 일이었다. 그들이 그땅을 차지한 것은 비록 그들에게 많은 군사가 있었을지라도 그들의 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나안 족속들에게 격퇴되어 수치를 당하지않도록 그들을 구원한 것이 그들 자신의 팔도 아니었다. 조심스런 농부가 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하듯이 이스라엘을 그 좋은 땅에 심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이셨다. 이 사실은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상에 심으시는 것에 작용될수 있다. 이교사상은 가나안 족속들처럼 쫓겨날 것인데 한번에 모두가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그리고 인간의 어떤 방책이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약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쓰셔서 이 일을 하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의해서 쫓겨날 것이다. 이와같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성령을 의지하여 나가서 정복하시고 또 정복하려고 하신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인 압제의 멍에아래서 신음하는 자들에게 큰위로와 힘을 준다 '주께서' 여러번 '우리 대적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물러가 수치를 당케하신 사실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민족들을 친 사사들의 성공담이 그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핍박자들과 그 교회를 미워하는 자들은 종종 진리의 능력에 의해 수치를 당하였다(행 6:10).
(2) 하나님이 옛날에 그들의 열조를 위하여 행하신 큰일들에 대한 기록을 선용함 :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생각하였다(4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기를 위해 이 말을 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이다. 그러니 내가 주 말고 누구에게로 나의 탄원서를 가져가리이까? 내가 구하는 은총은 내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열조들은 곤경에 처했을때는 언제든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구원을 청했다.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권세있는 자로서 구원을 명하소서. 그러면 주의 명령이 이루어지리이다." 그들은 그들을 구원한 것이 그들의 칼이나 활이 아님을 인정하였듯이(3절) 그것들이 장차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믿지도 않았다(6절).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나는 어떠한 군사적인 준비도, 마치 그것이 하나님없이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를 지탱해 줄것처럼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주의 이름으로'(우리를 지도하는 주의 지혜와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를 위해 역사하는 주의 능력 그리고 우리에게 성공을 보장하는 주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가 '우리를 치려고 일어나는 자를 밟을' 것이고 또 밟게될 것이라." 우리가 종일 하나님으로 자랑하였나이다. "우리가 매일 그리고 종일 그를 자랑하며 자랑할것이라."

Ⅱ. 현재의 고난에 대한 탄원 44:9-16
여기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의 원수들과 압제자들의 세력이 판치는 상황아래 놓여있는 그들의 비천하고 고통스러운 처지에 대해 하나님께 하소연한다.
(1) 그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과 임재의 일상적인 표시들이 없었다(9절).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버려. "주께서 우리와 우리의 송사를 버리시어 우리로 수치를 당케하신것 같으니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버림받았을때 자칫 하나님을 버리고 단념하려는 생각을 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2) 그들은 전장에서 원수들앞에 참패를 당하였다(10절). 주께서 우리를 대적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이는 여호수아가 아이성에서 격퇴당했을때 불평했던 대로였다(수 7:8). "우리가 기가 죽었나이다. 바벨론의 멍에를 떨어버리려고 한 시도는 무력해졌고 도리어 그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패퇴하였나이다."
(3) 그들은 칼에 죽고 사로잡힐 운명이었다(11절). 주께서 우리로 먹힐 양같게 하시고.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 죽이기를 양 죽이듯이 예사로 하나이다." 자기들이 사고 팔렸다고 본 그들은 그것을 자기 죄탓으로 돌려야할때에 오히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파신다'고 하며 하나님을 비난한다. 주께서...저희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12절). 이 말은 만일 그들의 이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에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확신할수 있을때에는 그들이 이 고난을 흔쾌히 견딜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4) 그들은 멸시를 받았고 치욕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당하였다. 그들은 이 사실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인정한다. 주께서 우리로 욕을 당케하시니. 이교도들 즉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는 객이요 약속의 언약에 대해서는 외인인 자들이 그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그 치욕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15절). 나의 능욕이 종일 내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원수와 보복자가 그들에게 퍼붓는 비난은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모독하는 말이었다(16절;왕하 19:3).

Ⅲ.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함 44:17-26
큰고통과 압제를 받고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기서 두가지 점에 관해 하나님께 호소한다.
(1) 그들은 비록 이같이 어려운 일들을 당하였을지라도 하나님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무를 버리지않은 그들의 성실에 관해 호소한다(17절).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즉 "우리에게 가장 혹독한 일들이 임하였으나 주를 생각하는 것을 버리지 아니하였고 주를 예배하는 것도 단념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어리석게 행동했다는 것을 부인할수는 없을지라도 주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취할만큼 주의 언약을 배반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니이다. 비록 우상숭배자들이 우리를 정복하였을지라도 그때문에 우리가 주를 버리지는 아니하였나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빠져있었던 근심은 매우 컸다. "우리는 사랑의 처소에서, 즉 승냥이처럼 맹렬하고 사납고 잔인한 사람들가운데서 심히 상해 받았나이다."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즉 "우리가 심한 우울가운데 지내면서 거의 죽을줄 알고 염려했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죽이셨을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주를 신뢰하였나이다." 우리 마음이 퇴축지 아니하고. "우리가 은밀히 주에게서 정을 떼지도 않았고 우리에게 걷도록 명하신 주의 길에서 우리 걸음을 벗어나게 하지도 아니하였나이다(18절)." 우리가 고난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않는한 우리는 하나님안에서 얻는 위로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떠나지않는한 우리를 떠나시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셨다는 핑계아래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곤경에 처해있는 우리를 더 잘도울수 있을 자로 보여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라면 하나님이 이를 더듬어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하나님이 그 사실을 판단하시고 그점에 대해 우리를 문책하시지 않으시리이까?" 그들이 이 어려운 일들을 견뎌낼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곁을 떠나지않고 그들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22절).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되는 것은 우리가 주와 관계가 있고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으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다른 신들을 예배하려고 하지않기 때문이니이다."
(2) 그들은 현재의 고난에 관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기를 탄원한다. 주여 깨소서(23절).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우리를 구속하소서(26절). 그들은 앞에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팔았다고 불평하였다(12절). 그런데 여기서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시기를 기도한다(26절). 그들은 '주께서 우리를 버리셨다'고(9절) 불평하였으나 여기서는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23절).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들의 간언은 매우 감동적이다. 주여...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그 표현은 비유적이다(78:65절에서 처럼, '때에 주께서 자다가 깬 자 같이'). 그러나 그 구절은 그리스도에게 말씀그대로 적용되었다(마 8:24). 그가 주무실때 그의 제자들이 폭풍을 만나자 그를 깨우며 말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그들은 불쌍한 죄인의 탄원을 호소하였다. "우리 영혼은 넘치는 슬픔과 근심때문에 진토에 구푸렸나이다. 우리가 기어다니는 것, 즉 가장 비천한 짐승처럼 되었나이다."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우리가 스스로 일어설수 없나이다. 의기소침해진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킬수도 없고 비천하고 슬픈 우리의 상태에서 정신을 차릴수도 없나이다. 그래서 우리가 무례한 모든 원수에게 짓밟히게 되었나이다. 주의 인자하심을 인하여 우리를 도우소서."

# 핵심
44:1-26
국가의 구원을 간구하는 시이다. 과거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회상하며, 현재 당면한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기를 기원한다.
과거의 축복에 대한 회상(44:1-8)
과거 역사나 개인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하는데에 큰도움을 준다(참조, 77:11-15). 성경은 인류의 시작부터 초기 기독교에 이르는동안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위기에 처하거나 낙심스러운 일을 당할때 놀라거나 절망하기보다는 과거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깊이 묵상하며 앞으로도 어김없이 도움을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청된다. 환경이 변하고 시대가 변해도 하나님은 불변하시기 때문이다.

#묵상
이유없는 고난에 대한 자세 ( 44:2, 3 )
이유없는 고난에 대해 성도가 할수 있는 일은 고난에 대해 탄식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주의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중에 출애굽 역사와 가나안 정복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속역사를 회상하고 위로받았습니다. 이와같이 성도가 험한 세상에서 할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적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오히려 대적들로 수치를 당하게하실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 ( 44:9 )
고난은 여러가지 목적으로 임합니다. 이스라엘이 고난받는 원인은 이방군대의 침략과 약탈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은 항상 함께 있어왔으나 이를 받을 자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았기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들의 도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 ( 44:11, 12 )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억압받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호가 이방인에게 모독당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방인에게 받는 멸시와 수치는 곧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당하는 부끄러움과 수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힘써 성장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합니다(고전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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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믿음과 기도로써 하나님을 의지함 43:1-5
다윗은 여기서 믿음과 기도로써 하나님을 자신의 재판장, 힘, 인도자, 기쁨 그리고 소망으로 삼는다.
(1) 그의 재판장(1절) : 하나님이여 나를 판단하시되...내 송사를 변호하시며. 그를 고소한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에 대해서 피고였다. 여기에는 그가 '경건치 아니한' 혹은 무자비한 '나라'라고 부르는 죄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악한 사람이 하나있었는데 그는 아마도 속이기를 잘하고 불의한 사람으로 다윗에게 아무런 친절도 베풀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그를 아주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게 대했던 사울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말한 사람이 압살롬이었을지라도 그의 성품 역시 더나을 것이 없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죄때문에 그를 비난하신 것에 대해서 "나를 판단하지 마소서. 판단하시면 내가 정죄를 당하리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그의 원수들이 그를 비난한 것에 대해서는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이는 내가 의롭다함을 받을줄 알기 때문이니이다. 내 송사를 변호하소서. 내 편을 드시고 주의 섭리가운데서 나를 위하여 나타나소서"라고 기도한다.
(2) 그의 힘, 곧 부족함이 없는 그의 힘 : 그는 하나님을 이렇게 본다(2절).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나의 하나님은 곧 나의 힘이시라. 즉 그에게서 내 모든 힘이 나오고 그안에서 내가 강해지며 그가 종종 나를 강하게 하셨도다. 그러므로 그가 없으면 나는 물같이 약해져서 그를 위해 어떤 것도 할수 없고 견딜수도 없도다." 다윗은 이때 영적인 기쁨을 잃고 슬프게 다니고 있었으나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의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있었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안에서 스스로 위안을 얻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계속 머무를수 있으며 우리에게 영적인 기쁨이 없을때에는 영적인 지지를 받을수 있다.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다윗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들이 자신의 현재상태에 대해서 아무리 우울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결코 그들을 버리지않으시기 때문이다.
(3) 그의 신실한 인도자(3절) :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그의 마음은 가정의 안락함이나 궁정의 높은 자리 혹은 오락에 쏠려있지 않고 '주의 성산과 장막'에 기울어져 있다. 그는 당시 하나님의 장막을 몹시 보고 싶어했다. 그는 그일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내게 주의 은총의 결실로서 빛을 주시고 주의 약속의 성취로서 진리를 주소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빛과 진리를, 곧 빛과 진리의 성령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한다. 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의 결여를 보충하시어 우리를 경건의 비밀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천국에 이르는 길에서 우리를 지도하시는 영이다.
(4) 그의 큰기쁨 :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주의 장막으로 인도하시고 그에게 이전의 자유로움을 회복시켜 주신다면 그때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를 아주 잘알고 있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단에 나아가(4절). 그리고 그는 할수 있는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그것을 큰기쁨, 즉 미래의 복으로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쁨으로 알고 또 평범한 기쁨이 아니라 크나큰 기쁨, 즉 감각적이고 현세적인 모든 기쁨을 훨씬 뛰어넘은 기쁨으로 알고 나아가야 한다. 원문에서 그 구절은 매우 강조되어 있다. 즉 '나의 기쁨의 기쁨인 하나님께' 혹은 '나의 승리의 기쁨인 하나님께'라는 뜻으로 표현되어 있다.
(5) 결코 쇠하지않는 소망(5절) : 여기서도 다윗은 앞에서처럼 자기의 의기소침과 낙담에 대해 꾸짖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그리고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즐거워하는 일에 대해 ('그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시라') 자신이 품었던 신앙적인 기대속에서 자신을 진정시킨다.

# 핵심
43:1-5
42편의 후반부로서, 고난속에서도 구원을 확신하는 신앙이 잘 드러나 있다.

# 묵상
경건치 아니한 나라 ( 43:1 )
반란을 꾀한 압살롬 정부를 경건치 아니한 나라라고 한 이유는, 반란이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불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기적 목적이 아니라 주의 장막을 사모하는 거룩한 열심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호소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열심과 구원에 대한 간구 목적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열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시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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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 42:1-5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사랑이 바로 신앙의 생명이자 정수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사랑에 대한 몇가지 표현들을 대하게 된다.
1. 목말라하는 거룩한 사랑(1,2)
이 사랑은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를 바라는 거룩한 열망속에서 고양되는 사랑이다(1,2절).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1) 다윗은 하나님을 섬기는 외적인 기회들을 박탈당했을때 곧 그가 하나님의 집의 궁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요단 땅으로 추방되었을때, 하나님을 향한 그의 갈망을 이렇게 표현했다. 때때로 하나님은 자비의 손길을 거두심으로써 우리로하여금 자비에 가치를 깨닫게하시며 은혜의 수단들을 막으심으로써 그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촉구하신다는 점을 주의하라. 그는 이제 슬퍼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갈망하였다.
(2) 그의 갈망의 대상은 무엇이며 그가 그렇게 찾기에 갈급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해하며 하나님을 갈망한다. 즉 종교적 의식 그 자체를 갈구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의식의 대상인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영혼은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 어느곳에서도 안식을 취할수가 없다. 그는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뵈옵기를' 간절히 바란다. 즉 그는 자신의 순전함을 알고 계시는 분으로서 하나님께 자신을 알리기를 바라고, 주인앞에 나오는 종처럼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은 위선자에게는 두려움이 되는 것만큼 의로운 자에게는 염원이 된다.
(3) 이 갈망의 정도 : 그가 베들레헴 우물의 물을 바란 것도 이 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본래 몸이 뜨겁고 목을 말라하는 '사슴' 특별히 쫓기는 수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해 하는 것에 비교한다. 은혜를 받은 영혼은 이와같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절히 열망한다.
2.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것을 슬퍼하는 거룩한 사랑(3)
하나님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나 있는동안에 그의 눈물은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 왕이자 선지자였던 다윗도 하나님의 집의 위로가 없을때는 우는 선지자일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물은 그의 음식과 뒤섞였다. 아니, 그의 눈물이 주야로 그의 음식이 되었다. 그는 눈물을 먹었고 눈물로 잔치를 베풀었다. 그의 원수들은 그를 조롱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3절). 그가 하나님의 임재의 증표인 언약궤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그의 하나님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에게서 성경과 목사와 엄숙한 집회를 빼앗아가면 우리에게서 우리의 하나님을 빼앗아갔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잘못 생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것들에 묶어두셨을지라도 하나님 자신은 그것들에 묶이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어디에 있는지 또한 그 언약궤를 어디에서 찾을수 있는지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지 어디에서 그를 찾을수 있는지를 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간에 하늘로 난길은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기위해 즉시 나타나시지 않았기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셨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점에서도 역시 속았다. 성도들이 그들이 모든 친구들을 잃어버렸다고해서 그들의 하나님도 잃어버렸다고 결론내릴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 대한 이같이 비천한 생각때문에 고통받는 자에게 더 큰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마음먹은 바였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과 신뢰를 흔들어 버리려고 하는 것만큼 은혜받은 영혼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다윗은 '옛날'을 기억하고 '그의 마음이 상하였다.'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고 그 생각은 그의 심정을 쥐어짰다. 그는 깊이 슬픔에 빠져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은 지금 그가 쫓겨나있는 궁정에서의 즐거운 기억이나 자기 집에서 베풀었던 주연에 대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전에 그가 자유롭게 하나님의 집에 드나들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는 비록 그 당시에는 장막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의 집에 올라갔었다.' 그가 사울에게 핍박하고 있던때에 언약궤는 한개인의 집에 있었다(오류! 하이퍼링크 참조가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장소의 비천함때문에 하나님의 임재의 거룩한 상징물에 대한 그의 평가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그는 '우리와 동행하여 올라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무리의 선두에 선다고해서 자신의 위엄이 실추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아니, 그가 우리와 동행하였다는 이 사실은 그에게 기쁨을 더해주었다. 그래서 그 사실은 그가 이제 그렇게 할수 없으므로 크게 슬퍼한 점으로서 두번씩이나 언급되었다. 그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즉 내심으로 기쁨과 찬송을 발할뿐만 아니라 겉으로도 그것을 표현하며 '올라갔었다.' 그는 거룩한 날을 지키기위해서, 즉 웃음과 오락으로 헛되이 보내기위해서가 아니라 경건한 예배로 지키기위해서 올라갔다.
3. 거룩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바라봄(5)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그의 슬픔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럴지라도 그것이 마땅한 한계를 넘어서도 안되고 그의 영혼이 낙망하도록 심해져서도 안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픔을 덜기위해 자신의 마음과 이야기를 나눈다. "네가 당황과 혼란속에서 불안해하는데 어째서 그러느냐?" 많은 경우에 우리의 불안은 그 근거와 이유를 자세히 조사하게 되면 사라져버리곤 한다. "어찌하여 내가 낙망하는가? 그럴만한 이유, 실제적인 이유가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많은 이유들이 있는데도 그렇게 법석을 떨지는 않지 않은가? 동시에 우리에게는 격려받을만한 이유도 있지 않은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영혼의 의기소침과 불안을 치료하는 뛰어난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의기소침을 꾸짖을때는 하나님을 바라도록 우리 자신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때 영혼은 가라앉은 자신을 보게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붙잡는다면 그 영혼은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나는 내 영혼속에서 그와같은 변화를 경험할 것이고 그래서 찬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것이라." 우리는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그의 은총을 인하여, 즉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얻는 원조와 그 은총안에서 얻는 만족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 것이다.

Ⅱ. 불평과 위로 42:6-11
여기서는 자연의 운행에서 낮과 밤이 교차되듯이 불평과 위로가 교차되어 나온다.
(1) 그는 자기 영혼이 낙담하는 것을 불평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6절). 그의 영혼은 낙망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서 그 사실을 말씀드린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그는 종종 하나님을 기억하므로 위로받곤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도 그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박해자의 격노를 피해 때로는 '요단땅'으로 도망가기도 하고 때로는 '헤르몬땅'으로 혹은 '미살'이라고 불리는 산으로 도망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가나안땅 맨 가장자리에까지 쫓겨나게 되었다. 그는 어디로 가든지 항시 신앙을 지니고 다녔다. 그는 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으며 그와 은밀한 교제를 나누었다. 거리와 시간때문에 그가 그렇게 마음을 기울이고 있고 마음으로 가까이 느끼고 있는 것을 잊을수는 없었다.
(2) 그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노하심의 표시들을 탄식하면서도 때가 되면 그의 은총이 돌아올 것을 기대함으로써 자신을 위로한다.
1) 그는 그의 근심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오는 것임을 보았고 그로인해 낙담하였다(7절).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즉 한가지 고통뒤에는 마치 급히 따라오라고 재촉이라도 받은 것처럼 또다른 고통이 속히 뒤따랐으며 또한 주의 폭포소리는 전쟁의 신호와 소리와 경보를 발하였던 것이다. 파도와 물결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많은 시험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행하시는 바를 아시며 또 그 시험들이 이내 끝나리라는 것도 알고 계시다.
2)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오는 그의 구원을 기대하였다(8절). "그럴지라도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리라." 폭풍뒤에는 평온이 올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대가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를때 그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그가 찾는 모든 좋은 것의 원천으로 보았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을 '명령하신다'(command)라고 되어있다(한글개역에는 '베푸신다'라고 되어있다-역주). 이 말은 은총이 값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을만하다고 주장할수 없다. 그것은 다만 주권적인 방법으로 수여되는 것이다. 즉 그가 왕으로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인자함을 명령하심으로써 파도와 물결에 명령을 내리신다. 그러면 그것들은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는 이 일을 '낮에' 행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함은 아무때라도 영혼속에 낮을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함을 명령하신다면 그는 그 인자함을 열렬한 애정과 신앙으로써 환영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기뻐할 것이다.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안에 살고 거동하는 우리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위로의 장본인이시고 수여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기도로써 우리 자신을 맡겨야하는 것이다.
(3) 그는 그의 원수들의 무례함을 원망하면서도 그의 친구이신 하나님안에서 자신을 위로한다(9-11절). 그는 무례한 자처럼 갑자기 성을 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조용히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말하였다. 그리고 이점에 대해서 우리는 그를 나무랄수 없다. 진정으로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마치 조국의 원수인 것처럼 핍박받게 된다면 그로인해 슬퍼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그럴지라도 다윗은 그 사실로부터 하나님이 자기를 잊으셨고 또한 내어버리셨다고 결론지어서는 안되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우리가 하나님께 하소연할수는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 하도다(10절).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소망을 꺾고자 의도적으로 한 비난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반석이시라는, 즉 의지할수 있는 반석이며 그리고 피할수 있는 반석이시라는 사실이(9절) 그가 받은 위로이다. 그는 그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그가 말해야하는 것을 말할수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자비롭게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앞에서 한말을(5절) 반복하여 말함으로써 끝맺는다(11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그러나 여기서 마침내 그의 신앙이 승리하여 그의 원수들로하여금 전장에서 물러가도록 만들었다. 그는 앞에서 한말을 되풀이함으로써 즉 앞에서처럼 그의 의기소침과 불안에 대해 자신을 꾸짖으며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고 그의 하나님께 붙어있도록 자신을 격려함으로써 이러한 승리를 거둔다. 우리의 좋은 생각들을 되풀이하여 생각하는 것이 우리에게 크게 유익할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처음에 그러한 생각들로 효과를 얻지못한다면 아마도 두번째는 효과를 거둘수 있을 것이다.

# 핵심
42:1-11
초기의 히브리어 역본들은 42,43편을 하나로 묶었다.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는 대략 두가지 견해로 나뉜다. 첫째,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생활을 하던때로 본다. 둘째, 어느 고라 자손이 성전을 멀리 떠나있으면서 성전에서 봉사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던 때로 본다.

# 묵상
평안을 얻는 방법 ( 42:1-11 )
평안은 주를 바라봄으로(시42:5, 11),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시73:25, 26), 말씀을 준행함으로(시119:165) 얻을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련과 고통은 자칫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쉽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원수들이 조롱하고, 마음이 상하고, 절망적일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위로받고 길을 찾아야 합니다.
다윗이 받은 고통의 성격 ( 42:9, 10 )
다윗이 받은 고통은 단순한 육적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독받는 것을 참지못하는 거룩한 영적고통입니다. 다윗은 절망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을 지경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견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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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빈약한 자를 돌보는 자의 복 41:1-4
(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들을 구원하고 위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온다.
1) 다윗은 이 약속을 자신의 친구들과 자신에게 적용하여 언급한다.
① 그에게 친절히 대했던 그의 친구들에게 적용한다. 빈약한 다윗을 권고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다윗의 친구들은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성을 낼수록 그만큼 더 다윗을 사랑하였다.
② 그 자신에게 적용한다. 그는 빈약한 자를 권고하고 그들을 구제할 길을 마련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반드시 자신의 약속에 따라서 그가 병중에 있을때 그에게 힘을 주시고 그를 위로하실 것이다.
2) 우리는 이 약속을 좀더 일반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서 생각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베풀어야할 긍휼은 몸과 마음 혹은 재산에 있어서 빈약하거나 고통을 받는 자를 권고하는 것이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는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다른예의 가지나 마찬가지로 지금 그리고 항시 현세적인 축복으로 보상되는 생활에 대한 약속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완고한 마음을 지닌 자들에게서 스스로를 구별하는 자들을 따로 구별하심으로서 그들이 완고한 취급을 받지않도록 하실 것이다. 죽음의 화살이 그 둘레에 빽빽하게 날아올때도 '저는 보호를 받고 살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과 마귀들의 악한 뜻에서 충분히 우리를 구원하실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빈약한 자들을 권고하고 그들을 구제하고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기대할수 있다. '여호와께서' 몸과 마음의 '병중에 저를 붙드시고' 저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쇠약한 침상에서 그 자리를 다 고쳐펴실 것이다.' 이 말은 병든 사람을 간호하고 보살피는 사람들의 배려를, 특별히 병든 자녀들을 보살피는 어머니가 그들을 위해 침상을 편하게 해주는 배려를 암시하는 매우 정감있는 표현이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자리를 다 고쳐펴서 한군데도 불편함없게 하실 것이다. 그는 침상의 모양을 바로잡고 매우 편하게 만들기위해 그 침상을 고쳐펴실 것이다. 혹은 그는 그 쇠약한 침상을 건강의 침상으로 바꾸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코 병들지않게 하시거나 병들어도 죽지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인내로 그들의 고통을 견디고 즐거이 그 결과를 기다릴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몸이 고통을 당할때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로 편안히 거하게될 것이다.
(2) 다윗의 기도는 이 약속들에 의해 지도되고 격려된다(4절). 내가 말하기를...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죄는 영혼의 병이다. 사죄하는 자비가 그 병을 고친다. 우리는 신체의 건강을 위해서보다 이 영적치료를 위해서 더열심을 내야한다.

Ⅱ. 원수들의 악한 행위를 호소함 41:5-13
다윗은 종종 그가 병들었을때 그의 원수들이 그에게 행한 무례한 행위를 하소연하곤 한다.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5절). 그들은 이렇게해서 그의 마음을 아프게하고 그의 명성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1) 그의 원수들은 그가 죽기를 바랐다. 저가 어느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그들은 그가 얻은 명성과 명예를 시기하였고 그래서 만일 그가 죽기만 한다면 그것도 그와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성경속에 살아서 오늘날까지 이르렀고 또 앞으로 영원까지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의로운 자를 기억함이 복되고' 또 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를 비난할수 있는 정보는 모두 다 입수하였다. 나를 보러 와서는(병자를 방문한다는 것은 언제나 일종의 친절한 행위로 간주되어 왔다) 거짓을 말하고(6절). 그들은 우정을 말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아첨이요 거짓 뿐이었다. 우리는 종종 이 시대의 진실함이 부족하고 따라서 사람들사이에 참된 우정을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고 불평하곤 한다. 그러나 위의 사실을 보면 전시대도 오늘날보다 더나을 것이 없었던것 같다. 그들은 그가 한말이나 행동에 대해서는 무엇이나 악평을 하였다. 즉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모든 것을 악의로 해석하였다. 만일 그가 기도를 하거나 그들에게 좋은 충고를 하면 그들은 그것을 조롱하여 그가 위선을 행한다고 비방하였다. 만일 그가 악한자들앞에서 선한 말도 하지않고 잠잠히 있었다면 그들은 그가 아프더니 이제는 자신의 신앙을 버렸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에 대하여 수군거렸다'(7절). 즉 부끄러워서 드러내놓고 말하지도 못하고 또 드러내놓고 말했다면 오히려 자신들이 공박받을 그러한 말들을 다른 사람들의 귀에다 대고 은밀하게 말했던 것이다. 수군거리는 자와 뒤에서 헐뜯는 자는 모두 가장 악한 죄인들속에 속한다(롬 1:29,30). "그는 지금 앓고있는 병때문에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병은 그가 뉘우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제까지는 감춰왔으나 결국은 그가 마귀의 자식임을 드러낼 큰죄악에 대한 형벌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가 특별히 믿었는데 그의 원수편을 든 사람이 있었다(9절). 나의 가까운 친구. 아마도 다윗은 그의 친구이자 국무총리였으며 그가 신뢰했던 사람으로서 '그의 떡을 먹던' 자, 즉 그와 아주 친밀하게 지냈던 자인 아히도벨을 두고 말하는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이 야비하고 반역적인 친구는 그의 떡을 먹은 것을 잊고 자신의 머리를 들어준 '그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자들로부터 모욕을 당할지라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라. 다윗이 그랬고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 역시 그랬다. 우리 구주께서는 친히 이 점을 설명하시고 유다에게 빵을 주시어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하셨다(요 13:18,26). 아니,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께 대해 그와같이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게 행동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매일같이 그의 떡을 먹으면서도 그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든다.
(2) 다윗은 그에 대한 원수들의 이 심술궂고 무례한 행위를 어떻게 견디었는가? 그는 그들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않고 다만 하나님께로 향했다.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고하게 하소서. 즉 "나로 저희에게 악을 선으로 갚게하소서"(어떤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렇게하는 것이 다윗의 습성이었기 때문이다, 7:4;35:13). 그들은 그가 죽기를 바랐으나 그는 자신이 긍휼하심을 입어서 회복한 것을 알았으며 이 점이 그의 회복에 위로를 더하여 주었다. "주께서 주의 은혜로 나의 순전함가운데서 나를 지지하셨으니, 이제는 주께서 주의 영광가운데서 나를 주의 앞에 영원히 세우실줄을 내가 아나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순전함가운데서 그를 지지해 주시는 것보다 더 자신의 순전함을 유지할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우리된 것은 그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멋대로 하도록 버려진다면 우리는 넘어질뿐만 아니라 파멸해버릴 것이다. 시편 기자는 엄숙한 송영으로써 혹은 하나님을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찬양함으로써 끝을 맺는다(13절). 이 구절이 이 시편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서 끝나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편 1권의 결론으로서 덧붙여진 것인지는 잘 알수 없다(시72편, 89편, 106편의 끝 구절도 같은 경우로 볼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알파이신 하나님을 오메가로 생각하고, 모든 선한 일의 시작이신 하나님을 마지막으로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 핵심
41:1-13
약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 의인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교훈하는 내용이다. 본시편은 다윗이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압살롬의 반란에 직면했던 암담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 묵상
구제하는 자에게 약속된 복 ( 41:1-3 )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을 동정하는 자는 재앙의 날, 곧 심판의 날에 구원받게 됩니다. 또한 육체적 질병이나 원수의 훼방없이 평안한 삶을 살게됩니다. 나아가 단순한 질병치유 차원을 넘어 상한 심령까지도 위로받을수 있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통한 다윗의 깨달음 ( 41:4 )
육체의 질병을 통해 다윗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질병이 죄문제와 관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질병이 하나같이 죄와 관련되지는 않지만, 때로는 질병이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적 질병을 통해 죄문제, 곧 영혼문제를 발견할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아멘의 믿음 ( 41:10-13 )
다윗은 하나님앞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송사한후 그의 도우심을 확신하는 가운데 찬양으로 시를 마감합니다. 찬양과 감사의 예배는 기독교인만이 갖는 독특한 예배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이교도들은 이러한 즐거움속에서 의식을 행하지 않기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예배할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드리고 찬양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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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법

 

[시편 105편 1절~11절]
1절 -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2절 -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
3절 -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4절 -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5절 - 그의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가 행하신 기적과 그의 이적과 그의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6절 - (5절에 포함되어 있음)
7절 -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8절 -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9절 - 이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고 이삭에게 하신 맹세이며
10절 -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원한 언약이라
11절 -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에게 할당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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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환난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40:1-5
(1) 이때 다윗은 큰재난과 근심가운데 빠졌었다.
(2) 그는 이 구렁텅이속에서 겸손히 하나님께 나아가서 믿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1절). 그는 하나님에게서만 구원을 기대하였다. 찢으시는 손이 또한 반드시 싸매신다(호 6:1). 그렇지않고서는 찢으시는 일이나 치시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것은 그가 그 수렁에서 즉시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이것은 그가 그 수렁에서 즉시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럴지라도 그는 구원받을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고 기대하며 기도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에게 잘 들어맞는 점이다. 겟세마네 동산이나 십자가 위에서의 그의 고통은 이와같이 오래 계속되었다. 그것은 끔찍한 진흙투성이의 수렁이었다. 이때 그의 영혼은 괴로웠고 몹시 슬펐다. 그러나 그는 이때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를 굳게 붙들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하고 외치며 하나님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3) 다윗은 곤경에 처해있는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즐겁게 경험한다. 그는 이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기위해 기록한다.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신앙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상태를 벗어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매우 실감나게 느낄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끔찍한 구덩이에서 구출받았다. 하나님은 그들의 발을 반석위에 두심으로써 그 자비하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그들은 그위에서 그들의 걸음이 견고하게 된것을 알았고, 전에 그들이 지옥의 두려움과 함께 내어던져졌던만큼 이제는 하늘의 소망과 더불어 일으킴을 받았다. "그가 새노래를 내입에 두셨도다. 그가 내게 기뻐할 이유와 기뻐할 마음을 주셨도다." 그는 새세계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그의 입은 새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돌릴 찬송'이 가득하게 되었다.
(4) 다윗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격려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여기서 기록해 두었다.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며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하나님께 합당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안에서 우리의 소망의 기초가 되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있다. 그들은 극심한 곤경가운데 빠지게 될지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지 않고 오히려 경외하며 신뢰할 것이다. 즉 고통중에서 다윗이 그랬듯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실수 있고 또 도우려고 하시는 분이심을 확신할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자기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복되다고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다른 사람들을 초청한다(4절).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즉 자기 자신만을 믿는 자들처럼 해하지 않고, 또한 오만하게 다른 사람들로하여금 자신을 의지하도록 부추기는 자들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들을 의지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사실 하나님에게서 빗나가는 모든 자들이 그러하듯이 이런 자들은 거짓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신앙에 잘 들어맞는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오직 그의 의만을 의지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다윗은 이 자비를 즐겁게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에게서 받은 다른 많은 은총을 감사와 더불어 주목하게 되었다(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다시말해서 이것은 많은 기적중 하나에 불과하나이다." 하나님의 모든 기적은 우리를 향한 그의 생각의 결과이다. 그것은 영원한 지혜와 영원한 사랑에서 나온 계획(고전 2:7;렘 31:3)으로서 '재앙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렘 29:11)이다. 하나님의 행사의 금사슬 고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것은 우리에게 신비이다. 그러므로 휘장이 둘로 갈라져 하나님의 비밀이 밝히 드러날때까지는 우리는 그것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사를 아무리 잘 말한다해도 그것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 밑바닥을 헤아리기를 단념하고 다만 그 깊이를 찬미하게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예언함 40:6-10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기적에 놀란 시편 기자는 묘하게도 여기서 다른 모든 기적을 초월하며 그 모든 기적의 기초와 원천이 되는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행해지는 구속의 기적을 예언하게 되었다. 사도는 이 단락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와 그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적용하였다(히 10:5이하).
(1)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안에서 행복을 얻도록 죄를 속하기위해 율법적인 제사는 전적으로 불충분한 것임을 말한다. 주께서...제사와 예물을 기뻐아니하시며. 주께서는 구속자로부터 이런 것들을 받고자 하지 않으셨다. 그는 이런 것들이 아닌 다른 것을 드려야했다(히 8:3). 제사와 예물에 관한 율법이 전적으로 시행되었던 시기에도 하나님은 그것들을 자체로서는 바라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로는 죄책을 제거할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수도 없기때문이다. 가치에 있어서 사람의 생명보다 훨씬 못한 양의 생명이 어떻게 사람의 생명과 동등한 것으로 여겨질수 있겠는가(마 12:12).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고, 사람의 죄가 그 명예에 끼친 손상을 보상할수 있는 수단으로는 결코 간주될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이 제사와 예물은 양심을 만족시킴으로써 죄의 공포를 제거할수도 없고 본성을 거룩하게 함으로써 죄의 세력을 제거할수도 없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였다(히 9:9;10:1-4). 그러나 그것들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성때문에 생긴 귀중한 것이 있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서 그림자, 즉 장차올 좋은 것들에 대한 그림자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을 시험하는 것, 즉 율법에 대한 그들의 순종과 복음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그림자의 실체가 와야만 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에게는 은혜를 내리실 그리스도이시다.
(2) 우리 주 예수께 중보자의 직분과 사역이 위임되었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6절). 아버지 하나님은 그에게 그 일을 맡기시고(사 50:5,6) 그로하여금 그일을 끝까지 해내게하셨다. '주께서 나의 귀를 뚫으셨다.' 이 말은 종의 귀를 문설주에 대고 뚫음으로써 그 종으로 영원히 그 상전을 섬기게 하였던 율법과 관습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출 21:6).
(3) 이일에 대한 그리스도의 자발적인 동의 :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7절). "그때에, 곧 제사와 예물이 도움이 되지 못하게 되었을때에 내가 말하기를 어둠의 권세에 도전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의 권익을 향상시키기위해 내가 왔나이다 하였나이다." 그는 기꺼이 이일에 자신을 바쳤다. 그는 그 일을 행할 것을 굳게 약속하였다. "내가 오리라. 때가차면 오리라." 그는 자신이 약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였다. 그는 '내가 왔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구약의 성도들에게 내내 이말을 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그를 '오실 그 이'로써 알았던 것이다.
(4) 그가 와서 이일을 행하신 이유 :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과 지혜가 담긴 두루마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 두루마리에는 그의 귀가 뚫린 사실과 그가 '내가 왔나이다'하고 말씀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구속의 언약이 기록되어 있었다.
(5) 그가 이일에서 느낀 즐거움 : 그는 기꺼이 자신을 이일에 바쳤기때문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낙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한없이 만족하며 앞으로 나아갔다(8,9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6) '대회중에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함(9,10절) :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구속을 행하신 그가 선지자로서 먼저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그다음에는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신다.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히 2:3). 그가 선포한 것은 의(9절) 곧 하나님의 의였다. 그것은 자신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성실이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곧 자신의 말씀을 따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였다. 그것은 '회중에게'(9,10절) 선포되었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모두 전파되었다. 또한 복음은 자유롭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전파되었다. 내가 내입술을 닫지 아니할줄을(곧 내가 주의 의를 숨기지 아니할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9절).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은휘치 아니하였나이다(10절).

Ⅲ. 중재자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증거함 40:11-17
지금까지 시편 기자는 구속의 일을 묵상하고 그것을 메시야의 입장에서 말했으나 이제는 자신의 입장에서 말한다.
(1) 우리는 이 사실에 힘입어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할수 있고 그 긍휼의 보호하심에 우리를 맡길수 있다(11절). "여호와여 주는 주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나이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그 아들안에 쌓아두신 '주의 긍휼을 내게서 그치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이는 주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실리가 없기 때문이니이다"(롬 8:32).
(2) 우리는 이 사실에 힘입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와 예물로서는 할수 없었던 일인 죄책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기위해 하신 일을 생각해 볼수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죄악이 악한 것을, 아주 악한 것을 보았다. 그는 '그의 머리털보다 많은' 죄악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죄를 보자 머리를 들수 없을만큼 마음이 무거웠다. 우러러 볼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그는 마음을 지킬수도 없었다. 내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그는 거룩한 열정을 가지고 부르짖는다. 여호와여 은혜를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13절). 불멸의 영혼의 행복이 관련되어 있는 이런경우에 지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3) 우리는 이 사실에 힘입어서 우리의 영혼을 파멸시키려하는 영적 원수들에 대해 승리를 기대할수 있다(14절).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이기셨다면 우리도 그를 통해서 넉넉히 이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이렇게 기도할수 있다. '그들로 수치와 낭패를 당케하시며 물러가 욕을 당케하소서'(14절). '그들로 놀라게하소서'(15절). 하나님의 자녀가 끔찍한 죄의 구덩이에 빠지게되면 사단은 자기가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하여 '하하'하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볼때는 광분하고 '자기 수치로인하여 놀랄' 것이다.
(4) 하나님을 구하고 그의 구원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이 사실에 힘입어서 그를 기뻐하고 찬양할 것이다(16절).
(5) 재난과 고통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이 사실에 힘입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안에서 위로를 찾을 것이다(17절). 다윗 자신은 이들중의 한사람이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중보자안에서 그리고 중보자를 통해서 '나를 생각하시나이다.' 그리고 우리는 중보자에 의해서 하나님께 열납된다.

# 핵심
40:1-17
과거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을 드림과 동시에(1-10절), 다시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앙망하는(11-17절) 시편이다.

# 묵상
수렁에서 건짐받은 다윗의 노래 ( 40:2 )
본문에서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수렁에서 건짐받은 것으로 노래한 의도는 처지가 곤고하고 위급했음에 반해 구원이 확고하고 든든함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다윗 주변에는 다윗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구원을 체험적으로 확신하는 다윗은 깊은 수렁에서 건짐받은 것과 같은 기쁨을 누릴수 있었습니다.
찬양과 도우심에 대한 간구 ( 40:16, 17 )
다윗이 주께 감사찬송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 이유는 생명을 앗으려는 대적들의 위협을 여전히 받고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간구는 구원의 소망을 가진 성도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동안에 드릴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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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udy

Ⅰ. 고난 시에 행할바에 대한 묵상 39:1-6
다윗은 여기서 고통당했을때의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회고하고 기록한다.
(1) 그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였다. 우리는 죄지으려는 유혹을 받을때는 언제나 지금 막 지으려고하는 특별한 죄에 대해 전에 서약했던 엄숙한 맹세를 회상해야 한다.
1) 그는 자기가 전에 행동을 조심하겠다고 결심한 것을 기억한다(1절).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하였도다. 우리는 행동을 조심하겠다고 결심했으며 항상 그 결심을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2) 그는 자기가 혀로 범죄치 아니하겠다고 특별히 서약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으로 죄짓기 않기를 바라는만큼이나 쉽지않은 일이다. 그는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떠오르면 손으로 입을 막아 눌러서 그 생각이 더이상 입밖으로 나가지않게 하려고하였다. 내가 내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조심하는 습관은 머리에 씌우는 굴레와 같다. 행동에 있어서의 조심성은 그 굴레를 쥐고있는 손과 같다. 그는 사납고 해를 끼치는 다루기 어려운 개에게 입마개를 씌우려고 하였다. 즉 단단히 굳은 결심에 의해서 더러운 말이 입술에서 쏟아져나가는 것을 막고자했던 것이다. 그는 악한 자들과 함께 있을때는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하나님을 모독할 기회를 주는 말을 조금이라도 할까봐 주의하곤 하였다.
(2) 그는 이러한 서약에 따라서 자기 혀에 재갈을 먹이고자 매우 고심하였다(2절).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그러나 그가 '선한 말조차' 하지 아니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할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그의 약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것도 말할수 없었기때문에 아무말도 하지않으려고 했고, 그 결과 극단으로 치우치고 말았다.
(3) 그는 말을 적게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많이 또한 더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아픈 곳을 싸매어 둠으로써 고름만 더 생기게 했을 뿐이다. "나의 근심이 더 심해졌고 내마음이 내속에서 뜨거워졌도다"(2,3절). 그는 혀에 자갈을 먹일수 있었으나 열정을 억제할수는 없었다. 불평을 잘하는 사람들은 많이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불행의 원인을 곰곰히 생각하느라고 고민하는 것은 곧 불만의 불에 기름을 쳐서 더욱더 맹렬히 타오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어되지 않는 격정의 해악을 방지하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불평스러운 생각을 제거해야 한다.
(4) 그가 마침내 말하였을때 그것은 적절한 행동이었다. 내가 나의 혀로 말하니. 여기서 그가 이렇게 행한 것은 그의 좋은 취지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극단적으로 처리한 자신의 잘못을 고친 것이라고 볼수 있다. 그는 전에는 선한 말도 발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더이상 그런식으로 잠잠히 있으려고 하지않는다.
1) 그는 하나님께서 그로하여금 인생의 짧음과 불확실함, 그리고 죽음이 가까이 오고있음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기도한다(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하사. 그는 '여호와여 나로 내가 얼마나 오래살지, 그리고 언제 죽을지를 알게하소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호와여 나의 종말을 알게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여호와여 내게 종말을 생각하고(신 32:29) 그것에 관해 더욱 깊이 알수 있도록 지혜와 은혜를 주소서. 그리하여 나로 내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게 하소서"라는 뜻이다. 그것은 의인의 시련의 상태에 대한 훌륭한 종결이다. 악인들에게 그것은 모두 쾌락의 종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멀리있는 것으로 생각할때는 죽음을 맞이하기에 필요한 준비를 뒤로 미루기가 쉽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이 참으로 짧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있는 힘을 다해서 할뿐만 아니라 가능한 빨리하게 될것이다.
2) 그는 인생의 짧음과 덧없음을 묵상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이유로 내세워, 그를 인생의 짐에서 구원해주시기를 하나님께 호소하며 인생을 통해 할일을 속히 하도록 자신을 격려한다. 주께서 나의 날을 손넓이만큼 되게하시매(5절). 그것은 네 손가락의 넓이, 곧 작고 일정한 치수로서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이므로 언제나 볼수 있는 치수인 것이다. 우리는 그 수를 계산하는데 산술적인 기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우리의 손가락 끝이 곧 그 크기이며 따라서 그것은 모두 합해도 한손 넓이밖에는 안된다. 우리의 생애는 짧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곧 '우리의 날수가 저에게 있는' 것이다. 모든 시간을 합해도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우리 몫의 시간이야 더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세상에서의 사람의 일생이란 헛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나은 삶을 확보해두는 것이 지혜이다. '모든 사람은 모두 헛되다'(이렇게 해석할수도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새사람에게 관련된 것외에는 확실하고 영구적인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이 절의 끝에 주목을 요구하는 기호로서 '셀라'라는 말이 부기되었다. "모든 사람이 헛되다는 이 진리를 생각하고 적용할 시간을 갖기위해 여기서 멈추고 잠시 쉬어라"는 표시이다. 죽을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사람의 헛됨을 증명하기위해 그는 여기서 세가지 사실을 언급한다(6절).
첫째 우리의 기쁨과 명예가 헛되다는 것이다. 진실로 각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사람이 당당히 혹은 즐거이 걸어다닐때라도 헛되다).
둘째, 우리의 슬픔과 염려가 헛되다는 것이다. 헛된 일에 분요하며. 종종 우리가 근심하는 일들은 우리 자신의 공상의 산물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언제나 무익하다.
셋째, 우리의 근심과 수고가 헛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재물을 쌓기'위해 많은 수고를 하지만 그 재물은 이리저리 흩뿌려지지 않으면 아무쓸데가 없어 밭고랑속에 있는 거름더미와 같을 뿐이다.

Ⅱ.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탄원 39:7-13
시편 기자는 본문에서 눈과 마음을 하늘로 향한다. 피조물안에서 확실한 만족을 얻지못할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안에서 그리고 그와의 교제안에서 찾아야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실망을 맛봄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된다.
(1) 하나님께 대한 그의 의지(7절) : 그는 세상것에서 행복을 찾기를 단념하고 이에 대한 모든 기대를 포기한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즉 "감각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이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변함없는 건강과 번영을 기대할수 없고 어떠한 관계에서도 변함없는 즐거움을 기대할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가 이세상에서의 우리의 생존기간만큼이나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행복과 만족을 취한다.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2) 하나님과 그 거룩하신 뜻에 대한 그의 복종(9절) : 주께서 이를 행하신 연고니이다. 즉 "이 일이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의 지정을 따라 발생한 것이니이다." 우리는 모든 사건에 대해 누가 그 일의 도구로 쓰였든지간에 "이것은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곧 여호와의 행사다"라고 말할수 있다.
(3) 하나님께 대한 그의 소원과 기도.
1) 자신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수치를 당하지않게 해주시기를 바람(8절) : 그는 앞에서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라고 기도하고(10절) 여기서는 '나를 모든 죄과에서', 곧 내가 진 죄책과 내가 받아야 마땅한 형벌에서 '건지소서'라고 기도한다. 또 그는 '나로 우매한 자에게 욕을 보지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악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조롱함으로써 자신들의 지혜를 드러내 보인다고 생각할때 사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가장 현저하게 내보이는 것이다.
2) 그가 현재 지고있는 짐에서 속히 해방될수 있도록 그의 고통을 제거해주시기를 바람(10절) : 주의 징책을 나에게서 옮기소서 주의 손이 치심으로 내가 쇠망하였나이다. 그의 병은 그의 정신이 약해지고 그의 기력이 고갈되고 몸이 여윌정도로 심했다. 우리의 방책과 행동은 우리 자신에게 근심을 일으킨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막대기로 매를 맞는다. 비록 죄악의 멍에가 '하나님의 손에 묶였을'지라도(애 1:14) 그 막대기는 우리 죄악의 멍에이다. 하나님의 견책은 사람이 '영화를 좀먹음같이 소멸하게' 하신다. 어떤사람들은 좀이, 손가락에 눌려 죽는 좀처럼 쉽게 파멸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욥 4:19). 다른사람들은 좀이, 서서히 의복을 쏘아서 망치듯이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우리를 고갈시키고 소멸하는 하나님의 견책을 상징한다고 본다. 그는 고통으로인해 자신이 올바른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고통이 그에게 내려진 목적이 달성되었으므로 이제 그 고통으로인해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아주시기를 바랐다. 여호와여 내가 눈물을 흘릴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12절).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그 친자녀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신 주께서는 그들이 눈물을 흘릴때 잠잠히 계시지 않으실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인해 그는 기도하였다. 고통은 기도를 불러 일으키기위해 보내진다. 그 고통으로인해 그는 세상을 단념하고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게 되었다. 이제 그는 여기서 더욱더 그의 모든 선조들처럼 자신을 이세상에서는 집이 없고 이곳을 지나 다른 곳으로, 즉 보다나은 곳으로 여행해 가는 '거류자와 객'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국에 이를때까지는 결코 자신이 본향에 이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3) 그는 집행을 조금만 더 늦춰달라고 기도한다(13절). 나를 용서하사(즉 나를 이 병에서 일으켜 편안하게 하사), (죽음으로인해 이세상에서) 내가 떠나 없어지기전에 내가 살아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나의 몸과 마음에 기력을 되찾을수 있도록 하소서. 내가 좀더 평온하고 냉정한 정신을 차려 또다른 세상을 위해 보다 잘 준비할수 있도록 하소서."

# 핵심
39:1-13
인생의 허무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개인적인 체험을 담은 시편이다. 표제의 여두둔은 다윗이 공예배를 인도하도록 임명했던 성가대 대장가운데 한사람이다(대상 16:41; 25:1-3).
목적없는 소유의 헛됨(39:6)
우리는 물질을 가져야하는 이유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선한 일에 사용하는 청지기로서의 본분을 망각한채 단순히 재물을 쌓으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허망한 일이다. 그럴경우에는 인간이 재물의 노예로 전락할뿐 아니라 탐욕으로인한 다툼만을 일삼게 된다.

# 묵상
인간이 살아가야할 방법 ( 39:1-6 )
인간은 하나님만을 소망하며 겸손히 살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헛되고 나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땅에서 노력한 일들의 무상함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돌아와 삶을 정리하는 자세로 구원을 찬양해야 합니다.
허탄한 변론 ( 39:2 )
다윗이 악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변론하지 않은 이유는 불의한 악인에게 변호하는 것이 허탄하고 무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악인의 훼방앞에서 잠잠히 침묵하며 하나님의 돌아보심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 ( 39:6 )
하나님을 유일한 소망으로 삼아야하는 이유는, 인생은 아침안개(약4:14)처럼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곧 인생무상을 절실히 깨달은 시인은 땅에서 머리를 들어 하늘에 소망을 둔 것입니다. 이 성화된 신앙자세는 인생무상을 깨닫고도 죄악중에 머무는 생활과 대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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