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대발견

[이사야 6장 1절~8절]
1절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절 -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절 -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절 -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절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절 -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절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절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구약의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라고 불리워집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사야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장 많이 그리고 정확하게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이며 대선지자인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자 나라를 근심하며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중대한 사실 몇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실로 중대한 발견으로서, 누구든지 반드시 발견해야 될 것들입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이사야가 발견한 세가지 중요한 사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도 또한 이러한 대발견이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본문 말씀중에 사 6:1-3절을 보면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며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에 살아 계신 지극히 거룩하시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세 번 말한 것은 성부, 성자, 성신 삼위의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특히 여기에서의 하나님은 스랍(천사)들이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둘로는 날면서 외칠 정도로 존귀하고 경외로우신 분이었습니다. 즉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겸손해야 합니다. 아무리 학식이 많고 재산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무한히 보잘 것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 드려야 합니다.
또한 두 날개로 발을 가렸다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조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진실되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조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로 경외로우시고 거룩하신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날개 둘로는 날았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결국 스랍천사 들이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리고 날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 분 앞에서 모든 자들이 겸손하고 조심하며 순종할 수밖에 없는 실로 존귀하시고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하나님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인도의 후랭크(Frank) 목사님과 밤을 지새며 말씀을 나누는 중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보통 영어로 목사님은 '미니스터(minister)' 또는 '패스터(pastor)'란 말도 있고 '레버런드(reverend)'란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분을 '레버런드 후랭크(reverend Frank)'라고 불렀더니 그분께서 그렇게 부르지 말고 '패스터 후랭크(pastor Frank)'라고 부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하였더니 '레버런드'란 말에는 경외한다는 뜻이 있는데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께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이런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경외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귀히 쓰셨던 하나님의 종들이나 성도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이사야도 예레미야도 모세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발견했습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도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영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건성으로 교회에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그런 신앙 생활은 필요 없는 것입니다.

2.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습니다.
본문의 5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실상 만나 뵈니까 자기는 추한 죄인이요 부정한 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스랍 천사중 하나가 제단에서 핀 숯불을 가져다가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핀 숯불은 거룩하신 여호와의 임재하심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자기가 죄인임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입술이 부정한 죄인이란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임을 깨달았을때 여호와의 임재하심으로 죄의 소멸함을 받고 악이 제하여짐을 받았습니다.

일찍이 참된 신앙인들은 다 깊이 자기가 죄인임을 발견했고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불체험을 했습니다. 우리 역시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밝고 의로운 빛을 대하게 될 때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의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빛에 가까이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렘 17: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6:8절에 보면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시 26:2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시 139:23, 24절에 보면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가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밝은 빛 아래 자신을 비추어서 우리가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폭풍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 뵙고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욥의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욥 45:5).
성경 중에 죄가 기록되지 않은 사람 다니엘이 있습니다. 그렇게 흠이 없는 사람도 하나님을 뵈고 나서는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 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고 말하였습니다(단 10:8, 9).
하박국 선지자도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몸은 처소에서 떨리는도다"라고 하박국 3:16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도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발견하고는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눅 5:8).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최고인 줄 알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뒤에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께서 영광을 가리우시고 육신을 입고 계실 때는 예수님 품에 마음대로 기대면서 지내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계시록을 받을 때에는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라고 하였습니다(계 1:16 이하).
진정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자기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눈물 흘리며 회개하는 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죄인 인것과 약한 자임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으므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힘입지 못합니다.
부디 여러분들 모두 말씀을 듣다가, 기도하다가, 찬송하다가 어느 순간에든지 하나님의 빛에 접하여 자기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자기의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실 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자원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들도 누구나 하나님을 위하여 일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전도의 사명, 기도의 사명, 성가대, 교사의 사명, 물질을 많이 벌어 바쳐야 할 사명, 구역장으로서 구역식구를 돌보는 사명 등 무슨 일로나 어떤 방면으로든지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사명이 각각 있습니다. 이러한 사명을 바르게 깨닫고 그에 순종하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분의 참된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자신의 사명을 바로 깨닫고 그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자를 하나님은 귀히 쓰시며 커다란 영광과 상급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사명을 깨닫지 못하고 사명을 감당치 않는 자들은 끝내 하나님의 책망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는 이 중대한 3대 발견을 언제 어디서 했을까요?
성전에서 했습니다. 교회에서 은혜받는 것이 가장 정상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다가 발견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간절히 부르짖고 찾으면 만나주신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9:12절 이하에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옛날에 "썬 다싱"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힌두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핍박을 받으며 신앙 생활하다가 좀 더 확실한 체험을 하기 위해 결심을 하고 골방에 들어가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신다면 나를 만나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과연 기도하던 3일 째 주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어떤 젊은이가 노인과 낚시질 갔다가 그 노인께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요?'하고 여쭈었습니다. 이때 노인은 아무말 없이 그 젊은이 머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한참동안 숨을 못 쉬게 하고 바둥댈 때 꺼내 놓더라는 것입니다. 이에 젊은이가 "왜 이러십니까?" 하니까 그 노인 말씀이 "네가 숨을 안 쉬니까 견딜 수 없었지. 바로 숨쉬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면 만날 수 있다" 하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얼마나 매달리고 부르짖으셨습니까? 우리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분명히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체험을 하여야 됩니다.
또한 이사야는 절망중에 발견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대를 강국으로 만든 뛰어난 왕인데 교만하여 문둥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별궁에 거하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웃시야 왕이 살아있을 때는 이웃 나라가 유대를 넘보지 못했으나 이제 유대 나라는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사야는 근심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절망중에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바로 발견하며 사명을 깨닫게 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야곱이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본 것도 부모를 떠나서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깊은 고독에 쌓였을 때입니다. 야곱이 환도뼈를 꺾이우고 하나님을 만난 것도 형이 400명 군사를 몰고 죽이려 달려오는 위기에 처했을 때 일인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 낙심하지 마십시오.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요,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요, 하늘 문이 열리는 기회요,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는 기회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사야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진정한 나 자신을, 그리고 여러분의 사명을 발견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

[이사야 11장 1절~9절]
1절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절 -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절 -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절 -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절 -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절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절 -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절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절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배경 이해하기]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라는 용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대리자 또는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통치자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1~39장에 ‘메시아’라는 용어는 등장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지상에 구현할 다윗 계열의 이상적인 왕이 메시아적인 존재로 9, 11, 32장에 등장합니다. 이사야 11:1~9절은 시온 산을 거점으로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메시아 왕국을 묘사합니다. 10~16절은 이 이상적인 왕에 의해 통합되고 화목을 누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들의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라는 예언은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미래상입니다. 이새의 줄기와 뿌리에서 움트는 한 가지는, 온 세상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실현하실 이상적인 왕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분은 여호와 경외함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으시고, 공의와 정직으로 행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비천한 사람들의 고통과 아픔을 돌아보시며 그들을 회복시켜 이상적인 낙원을 세우십니다. 그 나라는 맹수들이 폭력성을 버리고 어린양과 공존하는 곳입니다. 메시아의 나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고 모든 민족과 나라와 백성이 하나 됨을 이루어 온전한 평화가 실현된 나라입니다.

[인도자를 위한 본문 연구]
본문 연구 1: 메시아의 도래(1~5절)
하나님은 이새의 가문에서 ‘새로운 싹’ 즉 새로운 통치자가 태어날 것을 이사야를 통해 예언하십니다. 그 통치자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하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이신 왕을 약속하십니다. 메시아 위에는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실 것입니다. 메시아가 왕으로서 임무를 잘 완수할 수 있도록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는 것입니다(사 61:1; 눅 4:18). 여호와의 영은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는 통찰력과 이해력을 주시는 ‘지혜와 총명의 영’이시며,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전략과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모략과 재능의 영’이십니다. 또한 영적인 지식을 알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심령을 갖게 하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십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영, 곧 성령이 주시는 특별한 신적 은사를 가진 메시아는 세상을 구원하고 통치하는 왕이 되실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으로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으십니다. 진정한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며, 편협하거나 불의를 행하지 않고,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의 약자를 판단하고, 열방을 철장으로 다스리고, 모든 불의와 악인을 제거하실 것입니다. 또한 공의와 성실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실 것입니다.

본문 연구 2: 메시아 나라의 완성(6~9절)
6~9절은 메시아의 통치로 인해 이 땅 위에 어떤 나라가 건설될 것인지를 묘사합니다. 그 나라는 마치 천지 창조 직후에 세워진 에덴동산처럼 더없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아름답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분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첫째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울리는 세상입니다(6~7절). 여기에서 중요한 말은 ‘함께’입니다. ‘함께 살며’, ‘함께 누우며’, ‘함께 있어’, ‘함께 먹으며’, ‘함께 엎드리며’라는 구절이 계속 이어집니다. 둘째, 서로 해치거나 상하는 일이 없습니다(8~9절).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 물고 뜯고 해치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나라에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셋째,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9절).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의식하다’와 ‘인지하다’라는 의미를 넘어 ‘직접적인 접촉을 통한 경험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며 참구원자이심을 경험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시대가 되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하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묵상 포인트]
가장 연약해 보이는 ‘한 싹’과 ‘한 가지’로 예언된 메시아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의와 성실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어떤 해함도 상함도 없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한 완전한 평화의 나라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비천한 탄생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에게 어떤 위로와 소망을 가져다주나요? 
이사야의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몰락한 다윗 가문에 속한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탄생하셨습니다(막 6:3). 그분은 태어나서 구유에 누이셨으며(눅 2:7) 몇 명의 목자들과 동방 박사들만이 그분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그는 멸시받는 동네인 나사렛에서 성장하셨습니다(마 2:23).
모든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은 너무도 초라하고 비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특히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환난당하는 자들에게 큰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어린 싹과 같았지만 그 싹이 점점 자라고 가지를 뻗으면서 큰 나무로 성장하여 결국 많은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신 분이기에 우리를 더욱 긍휼히 여기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라고 고백하면서, 힘든 현실에 대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강함과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구세주로 믿고 섬기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함께 나누어 보세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강함이 나타날 것이라는 소망을 품습니다. 둘째,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언제나 공의롭고 성실하게 행동합니다. 셋째, 지금은 분쟁과 다툼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서로 위로하고 붙들어 주면서 모든 존재가 ‘함께’ 어울리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넷째, 세상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사실은 어리석기에(롬 1:22)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온 세상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도록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는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 뜻을 알 수 있도록 역사하십니다(고전 2:10~12). 

[기도문]  
어려운 환경에도 낙심하지 않고 성도의 참된 소망인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령의 역사를 따라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메시아가 다스리시기에 평화와 소망을 누립니다

[이사야 11장 1절~9절]
1절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2절 -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3절 -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4절 -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5절 -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6절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절 -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절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9절 -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 결실하며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할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공의로 심판하며 정직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때 거룩한 산에 해됨도 없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입니다.

1. 메시아의 사역 (1~5절)
죄로 인한 모든 고통의 유일한 해결책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기로 계획하십니다. 메시아는 육신으로는 이새의 줄기 곧 다윗의 혈통으로 오십니다(롬 1:3). 또한 여호와의 영, 즉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여호와를 아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으로 충만해 인간을 구원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분은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외하고, 가난하고 억눌린 자를 돌보실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송사를 공의로 판단하고, 겸손한 자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반면, 악한 자들은 파멸과 죽음으로 분명히 심판하실 것입니다(시 73편 참조). 메시아가 공의와 성실로 다스리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합니다.
* 묵상 질문
본문에서는 메시아의 어떤 면을 부각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적용 질문
메시아의 성품과 행위 중 내게 부족한 것은 무엇인가요?

2. 메시아의 나라 (6~9절)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소망과 평안의 근원이십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우주의 창조 질서가 회복되고 평화가 선포될 것입니다. 사나운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뒹구는 것처럼, 권세 있는 자들이 약한 자들을 섬길 것입니다.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뜯듯이 인간 내면에 있는 잔인함과 폭력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젖먹이가 독사와 장난해도 물리지 않는 것처럼 모든 재난이나 위험이 사라져 해를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에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메시아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그 나라를 지금부터 누립니다(막 1:15 참조).
* 묵상 질문
메시아가 오시면 이 세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나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이 이루신 평화를 내가 있는 자리에 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의 기도
저와 공동체가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가장 기뻐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원합니다. 주님만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오니, 평강과 공의의 통치가 제 삶과 가정, 교회에 임하게 하소서.


출처 : 생명의 삶 (큐티)

오해를 극복하는 믿음

[이사야 53장 1절~9절]
1절 -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절 -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절 -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절 -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절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절 -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절 -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절 -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여러해 전에 친구집에서 책상 머리에 써붙인 '진리는 오해를 극복한다'는 글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해를 극복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는 가운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자녀가 없는 부부가 고아원에서 아이를 하나 데려다 키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침대 밑에 넣어 두었던 과자 봉지가 없어져서 그 아이가 훔친 줄로 생각하고 '네가 과자를 훔쳐 먹었느냐?' 하고 물으니 절대로 안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부는 말하기를 '이렇게 거짓말하는 아이는 필요없다'고 하며 그 아이를 고아원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장농 뒤에서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서 살펴보았더니 쥐가 그 과자봉지를 끌고 와서 먹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이 부부는 크게 회개하고 그 어린 아이를 도로 데려다 잘 길렀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은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함부로 다른 사람을 오해하는 과오를 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오해하지 않도록 힘써야 되겠고, 또 타인으로부터 오해를 받을 때에도 너무 불안해 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면 언젠가는 정오의 햇빛과 같이 밝혀 주실 때가 올 것을 믿고 길이 참고 견디어 나가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따르는 생활, 믿음으로 사는 생활은 때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하고, 또 위험도 따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신앙 생활에 실패할 수밖에 없고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죤 밀톤(J. Milton)은 말하기를 '진리는 흔히 위험을 동반한다'고 했고, 더 나가서 '진리는 사생아처럼 자기를 낳아 준 자에게 불명예를 동반하지 않고는 태어나는 일이 없다'라고까지 말했던 것입니다. 사생아는 낳으면 그 부모에게 불명예를 끼쳐 주는 것처럼 진리라는 것은 도리어 그 진리를 따르려고 하는 사람에게 욕이 되고 고난이 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착하고 의롭게 살고 진리를 따라 산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박수갈채를 받는 것만은 아닌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으로 사는 생활은 육의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아니하고 도리어 오해를 받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한가지는 서로간에 오해를 야기시키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해시키고,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오해케 만드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잘 살고 있는데 사단이 나타나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하더냐?', '따 먹으면 죽는다 하더냐?' 하고 묻자 이때에 하와가 '그래 죽는다고 했다'고 하니, 사단이 '아니다! 그걸 따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 그래서 따 먹지 말라고 그랬다'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오해를 극복하는 믿음이 없으면 사단에게 속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성도가 믿음으로 극복해야 할 오해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사람들이 오해를 극복해야 합니다.
오늘 읽어 드린 본문 말씀인 이사야 53장은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으로 유명합니다. 거기 보면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오해를 받고, 메시야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고난과 멸시를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4절에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했고 7절에 보면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아서 억울하게 고난을 받고 곤욕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한마디도 입을 벌려 불평하거나 변명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7절 끝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은 오해를 받고 고난을 받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른 우리들도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바른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토록 선하고 의롭게만 사셨는데고 불구하고 참 영광과 존귀를 받는 대신 오해와 고난과 멸시를 많이 받으셨던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귀신 들렸다는 오해도 받으셨습니다.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칠 때 주님은 가장 비참한 패배자요, 어리석은 자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날이 이르매 이것이 온 천하에 다 드러나서 승리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진리를 따라 살고 믿음으로 살려고 할 때에 때로는 오해를 받고 억울한 핍박과 욕을 당할 때도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는 얼마나 많은 오해를 받았겠습니까? 당시의 율법대로 하면 그런 사람은 돌로 쳐죽이게 되었습니다. 신랑 요셉한테 파혼까지 당할 뻔했으나 하나님께서 꿈으로 계시하여 위기를 면하였던 것입니다.
진리를 따르는 생활은 많은 사람의 호응을 받지 못할 때가 있고,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인간적인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지혜로 사는 삶은 모든 사람에게 옳은 일을 했어도 틀렸다고 보일 때가 있는 것입니다. 고로 우리는 오해를 극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홍수 심판 전에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방주를 지을 때에 얼마나 오해를 이웃들로부터 많이 받았겠습니까? 그것도 바닷가에 지은 것이 아니라 산 꼭대기에 큰 배를 지었으니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고 미친 것같이 보였겠습니까? 말할 수 없는 오해와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매 그 말씀대로 순종한 노아의 식구만은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생활이기 때문에 남에게 오해를 받고 멸시를 받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예수를 잘 믿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핍박과 오해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후 핍박을 받고 오해를 받으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오히려 감사만 할 뿐이지,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이 많을수록 여러분은 귀한 그릇이 되고 큰 축복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옳아 보여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틀리는 수가 있는 것이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틀려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게 보이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 보기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진리대로 따라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은혜를 받고 큰 축복을 받고 하나님께 유용하게 쓰임받는 큰 그릇이 되려면 어떠한 오해와 고난도 극복하는 믿음을 소유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에게 억울하게 오해를 받고 욕을 먹을지라도 너그럽게 참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큰 믿음을 소유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오해를 극복합시다 .
마 22:29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의 뜻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조금해 보고는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실족하여 토라져 버리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시험이 왔을 때에 낙심하면 실족하고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회의가 생기고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굳게 믿는 것이 참 믿음이요, 복받을 믿음인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 대한 오해를 극복하는 믿음이 없어서 실족하여 넘어지고 낙심하게 되고 축복을 못받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큰 축복을 받고 큰 그릇이 되려면 오해를 극복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아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하여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데도 믿음으로 나가게 되면 더욱 큰 은혜와 축복이 올 줄로 믿습니다.
시 23: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떤 때는 원수에게 짓밟히고 욕 먹을 때가 있지만 때를 기다리고 참고 나가면 모든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으리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어떤 때는 자기의 믿음과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할까?'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지 않아야 진정으로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병이 낫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하고 기도했는데 더 아플 경우도 있습니다. 이럴 때 낙심하지 말고 극복해야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했는데 어찌 열이 더 나냐?'하고 의심이 생기면 아직 믿음의 높은 단계가 안된 것입니다. 십일조도 또한 그렇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했더니 손해가 더 온다고 오해하는 마음이 생길 때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꼭 축복해 주실 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은 진정 좋은 것으로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믿음에 이르는 과정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일도 많이 생기고 역경이 따르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범사에 '아멘', '감사합니다', '믿습니다'로 나가면 진정한 축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그 넓고 크신 뜻을 좁은 인간의 두뇌로 전부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지 않고 바로 깨달아 '아멘' 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의 용사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극복하는 믿음을 가지고, 또 아무리 어려운 일이 내게 닥쳐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큰 믿음 위에 서셔서 여러분이 속해 있는 가정과 사회와 나라와 또 교회 위에 큰 축복이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얻게 되는 복

[이사야 44장 3절~4절]
3절 -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절 -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시편 107편 9절]
9절 -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몇 년 전에, 춘천에 가서 연합 성회를 인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에, 서울의 모 침례교회 장로님이 춘천에 있는 아들에게 특별히 권면하는 전화를 옆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모 교회 부흥사가 가서 부흥 성회를 인도하게 되었으니, 시간마다 꼭 참석해서 은혜를 받도록 해라. 새벽기도 한 번도 빠지면 안돼!'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 다른 시간은 다 나갈 수 있지만 새벽엔 도무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안돼, 내가 새벽마다 깨워줄테니 일어나 새벽기도에 꼭 가거라'. '아버지가 서울에서 어떻게 깨우십니까?' '내가 새벽4시부터 4시30분 사이에 장거리 전화를 걸테니 그 울린 소리를 듣고 일어나라. 그러나 전화를 받으면 전화 요금이 나가니까 절대로 받지는 말고 소리만 듣고 일어나서 새벽기도에 나가거라.'
그래서 그 아들이 새벽기도 시간은 물론 낮, 밤 시간마다 은혜를 사모하면서 열심히 참석하더니 결국엔 큰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돈을 사모하게 되고, 애인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애인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은혜를 귀중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몸에 병이 들면 밥 맛이 없어지고 밥 먹고 싶은 마음까지도 없어지듯이, 우리 심령이 죽은 상태에 있거나 병들게 되면 은혜로운 말씀도 맛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배고픈 사람이 밥 먹고 싶듯이, 목 마른 사람이 냉수를 마시고 싶어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시 107:9절에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하셨고 본문 사 44:3절에는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서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에 버들 같이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성령을 사모하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사모하는 자에게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야곱은 에서보다 윤리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결점이 많은데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축복을 받은 것은, 그는 형 에서보다 몇 배나 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없이 '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는 소용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찌르는 가시를 주셔서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깨닫게 하셨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고 의지하게 만드셨으며,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왕의 핍박과 고통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부르짖게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고통을 통해서, 실패와 낭패를 통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사랑에 실패하고 세상의 믿었던 것이 무너지는 절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구원과 평안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신부된 우리 크리스천들이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신 것처럼 자기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바람난 여자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보다 세상 것을 더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은 영적으로 간음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8복 중에 첫째 복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으며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어떤 축복을 주시는가 생각해 봅시다.

1. 새 힘을 얻습니다.
사 40:30절에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모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돈이나 명예, 권세를 사모하는 사람이 다 피곤하여 넘어지고 쓰러져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 새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느 8:10절에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라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사모할 때 남이 받지 못하는 힘과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할수록 영적인 힘과 능력이 생기고, 세상 것을 사모할수록 영력은 떨어지고 내려가게 됩니다.

2.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사 49:23절에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된 성도가 그리스도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보다 세상 명예나 물질을 더 사모하면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고 창피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는 언제나 이방 민족을 들어 쳐서 수치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올 때는 그 수치와 욕을 벗겨 버리고, 다시 떳떳하게 얼굴을 들게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보란 듯이 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리워 발에 밟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믿음이 식어져 맛을 잃고 주님을 멀리 떠나면 사람들에게 밟히는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상 2:30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짓밟혀 수치와 욕을 당하지 않으려면 매일매일 순간순간 주님을 찾고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거름더미에 앉은 자라도 존귀한 자리에 앉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물 떠난 고기는 살는지 몰라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한 시간도 못 산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3. 구원을 얻습니다.
사 45:22절에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죄인, 음부, 창녀, 도둑, 부자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 그 죄를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 씻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자기의 의와 공로를 믿고, 배부른 사람이 밥상 대하듯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란 말은 아무런 공로나 가치를 따지지 않고 값없이 거저 주신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죄와 부족함과 무능함을 깨닫고 겸손한 자만이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4. 천국을 소유합니다.
예수님의 산상 수훈의 8복 가운데 첫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의 것이요'라고 했듯이, 영적으로 갈급함을 느끼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고 천국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도 산다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항복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몸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 되어 풍부하며 식구들이 다 평안하고 잘 살아도,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항상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인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5.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려면 먼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불타 올라야 합니다. 행 1:4절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성령의 세계)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사모하고 기다리며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도, 시골에서 목회할 때 '성령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이 찬송을 수십 번, 수백 번 부르며 성령에 대한 성경 말씀을 상고하며 한 달, 두 달 계속 사모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느 부흥회 때, 성령의 불 세례를 받았습니다. 관념적으로 이념적으로만 믿던 신앙이었는데 피부로 느낄 정도로 생생하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니 그 기쁨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후, 오늘날까지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저 자신이 실로 놀라운 변화도 받고, 교회도 부흥이 되고, 축복도 많이 받았습니다.
무디 선생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신앙의 열심은 있었기에, 주일 학교 어린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그런 중 어느 부인이 무디 선생에게 '저는 무디 선생님이 성령받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불쾌했지만, 그 다음부터 날마다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게 성령을 주옵소서. 안 주실 바엔 차라리 제 생명을 거둬 가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무디 선생이 뉴욕 시가지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이에 급히 친구의 집에 들어가 기도하였는데, 그때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어린아이 앞에서라도 은혜를 받으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전에 저의 모친이 철원 기도원에 들어갔는데, 어떤 자매님 둘이 밤새도록 촛불을 켜고 계속 찬송 부르며 열심히 기도하다가 새벽녘이 되어 성령받고 방언하며 굉장한 은혜를 받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새 힘을 얻습니다.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으며 천국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습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전심으로 찾고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위기를 극복하는 기도

[이사야 38장 1절~6절]
1절 -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2절 -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절 -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
4절 -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절 -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절 -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례의 위기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때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하십니까.
과거에 저는 국군 중앙 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하던 중에 그 교회의 교인인 윤항중 장군 내외분의 간증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기는 중령 진급도 못하고 옷을 벗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소령이었을 때 어느 장교가 진급을 못해서 자살을 하고 부인은 머리를 깍고 중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이유인즉, 동급 장교가 허위로 포상 받았다는 기록을 해서 꼭 진급해야 될 그사람이 진급을 못하고 자살했기 때문에, 전부 재조사를 하는 가운데 윤장군 기록 카드에 허위 표창 기록이 되어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없는데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 꼼짝 못하고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 두 분은 먼저 그동안 기도생활 잘못한 것과 십일조 생활 제대로 못한 것을 회개하고 3일 금식 기도를 하면서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랬더니 사실이 밝혀졌는데 그때 밤을 세우며 군인들이 기록하는 가운데 어느 상사가 42호 표창 받을 것을 이 윤소령 기록카드에 42호를 46호로 잘못 기록하면서 허위 기록처럼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그것도 몇년 전의 문서를 소각해 버리기 바로 직전에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간곡히 기도하면서 서원하기를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100명을 전도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기가 참 어렵더랍니다. 그래서 그 육군 대학에 1년 있는 동안 새로 입교하는 군인들 아파트에 먼저 찾아가 청소를 해놓고 짐을 날라다 주니까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할 때에 한 가지 요청이 있다고 하면서 교회에 나가자고 하니까 다 들어 주더랍니다. 그래서 100명 전도를 목표했는데 108명이나 전도해서 '전도왕'이라는 표창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응답으로 중요한 자리에 보직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직 기도 응답과 하나님의 기적으로 장군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과 더 많은 영혼 구원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장군 내외입니다.
또 그때 같은 교인이면서 제게 저녁 식사를 대접해 주신, 예비역 장군이며 국방부 기획실장이라는 중요한 위치에 계신 권영해 집사님의 간증도 들었습니다. 그분이 미군 감축 문제로 미국방부 대표 위원들과 회담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 편의 충분한 설명을 듣기 전에 저쪽 편에서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조찬 회담 때는 단 몇분 밖에 시간이 없기 때문에 그날 밤에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 '나는 국가의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에는 금식을 하기 때문에 내일 조찬 회담에는 나가지 못하겠다'고 하자, 태도가 엄숙해지더니 그날 밤 설명하는 말을 다 듣고 다음날 미국 대표들도 한국 대표가 금식 기도까지 하면서 회담에 임한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엄숙한 태도로 한국측 말을 다 들어 주면서 자기들 주장대로 하지 못하고 원만히 회담을 끝냈답니다. 집에서는 그 권장군 사모님이 그 회담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키가 커보이는 마귀들이 설치는 것을 보고 금식하면서 마귀를 물리치는 기도를 했더니 다 물러가고 마음이 편안해 지더랍니다. 그런 간증을 들으면서 한국에 믿음 좋은 고급 장교들이 많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동시에 기도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를 다시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는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을 믿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위기에서 건져 주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죤 프리벨은 말하기를 '인간의 극한 상황이 하나님께는 좋은 기회가 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곤경에 처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고 의지하게 되고 극한 상황에서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되어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해 주시고 전혀 불가능했던 일들을 해결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시편 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살지 못하리라'는 사형 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이때 히스기야 왕은 자포자기 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오직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결과 그는 15년이나 생명을 더 연장받고 당시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앗수르 군대까지 물리치게 되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기도, 믿음의 기도가 불가능한 위기의 상황을 변화시켜 축복의 기회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사가 달린 위기 상황도 극복해낸 히스기야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1.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드린 기도였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했다는 것은 오직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람에게서 얼굴을 돌이키되 그 능력 많은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를 향한 것도 아니고, 어느 의술을 바라본 것도 아니고, 아픈 부위를 바라본 것도 아니고, 어느 징후에 신경을 쓴 것도 아니라,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본 것입니다. 우리는 극한 상황에서 믿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쳐다보지 않고 사람을 바라보고 인간의 수단을 의지하고 우연히 해결되거나 저절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환경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의 자세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세도 얼굴을 벽으로 향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다가 절하며 춤추는 가증한 모습을 보시고 이 백성을 다 진멸해 버리고 모세 한 사람을 가지고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실 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다 도말해 버릴 바에는 차라리 내 이름을 하나님의 책에서 지워달라'고 하면서 간곡히 기도했습니다. 모세는 금송아지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백성의 죄와 실패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아론의 실수를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금송아지에서도, 백성의 죄에서도, 아론의 실수에서도 얼굴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만 얼굴을 향하고 간곡히 기도하여 응답을 받아내고 그 백성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했습니다. 다윗도 얼굴을 벽으로 향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이 자리를 비우고 없는 동안 시글락은 아말렉 사람들의 침략을 받아 성은 불타고 모든 부녀자들이 잡혀가는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다윗과 그와 함께 갔던 백성은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높여 울고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까지 하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다윗은 그 위급한 상황을 보지 않고 분노하여 자신을 치려는 그 백성을 보지 않고 오직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에봇을 입고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고 힘을 얻어 아멜렉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도로 찾아온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얼굴을 돌이켜야 합니다. 인간에게서 얼굴을 돌이켜야 합니다. 오직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만 얼굴을 향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어느날 그의 개혁의 동지 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을 때 방문을 했습니다. 그 상황을 보면 절망적이지만 루터는 모든 것에서 얼굴을 돌이켜 벽으로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당신은 이 기도를 꼭 들으시고 응답해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면 제가 앞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하고 참으로 담대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자 거의 죽어가던 그 동지가 살았습니다. 루터는 후에 '필립(Philip)이 건강해졌습니다. 그는 거의 죽은 것만 같았으나 나는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기적으로 살아났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루터도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찰스 피니(Charles G. Finny)는 '변론하는 기도(Argumentative prayer)는 최선의 기도 방법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3:25, 26절에 보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큰 위기 앞에서,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역경과 시련 앞에서, 더이상 손쓸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께로 얼굴을 향하여 그분을 변론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의문의 해답과 문제의 해결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기를 당할 때 벽으로 곧 하나님께로 얼굴을 돌이키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진실과 전심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히스기야가 죄가 없었다거나 허물이 없었다거나 완전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38:3절에서 히스기야가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라고 기도한 것은 자기가 완전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진실과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외식으로나 형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예레미야 29:12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우리가 간절히 찾으면 만나 주시고 전심으로 부르짖으면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만약 이같은 사실을 확실히 믿는 성도라면 위기와 상황에 직면하여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거나 기도하되 무성의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보시며 우리 기도에 귀기울이시는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전심으로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구할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하시며 그의 생명을 15년간이나 연장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한편 예수님도 육신으로 계실 때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7절에 보면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려서 응답받았거늘 우리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시시하게 기도해야 되겠습니까.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시며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2절에 예수님은 "천국은 침노를 당하노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침노하는 것과 같은 강력한 기도, 곧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의 모든 위기 상황이 물러가고 오히려 축복으로 바뀌며,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우리 삶 속 깊이 개입하시는 것을 생생히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 아 멘 -

 

제목 :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긍휼 (피종진 목사님)

[이사야 55장 6절~9절]
6절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절 -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절 -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절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할렐루야!
신흥 바벨론제국의 급부상으로 고대 근동 지역은 일대 격변을 겪고 있을 때 남유다의 죄악된 생활을 목도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라고.
이 시대의 영혼들을 책임지고 있는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고 이 땅을 고쳐달라고’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처럼 간절한 기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말씀에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조금만 잘못해도 진노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진노 중에도 멸망시키지 않고 때를 기다리면서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와 하나님의 긍휼히 임할 때가 언제인지 말씀을 통해 상고하면서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는 자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一 .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 임하는가?
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출애굽 시킬 때 사십 년 동안 광야로 인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요구하시면서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자자손손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민수기 25장에는 가나안 땅을 가는 도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지경을 지날 때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나고 악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므로 염병을 내리셨습니다. 그 염병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만사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요즘 전염병 사스, 에볼라, 메르스로 인해서 사람들은 긴장 속에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로 이만사천 명이나 죽었다면 그 당시 인구도 적고 면적도 좁은 땅에서 집집마다 통곡 소리와 시신들이 거리마다 즐비하며 장례행렬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재앙이 왜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의 신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곧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를 자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의 거룩한 의를 지키는 비느하스의 의분은 재앙을 그치게 했고 그 자손에게는 제사장 직분을 영원히 계승시키겠다는 「평화의 언약」을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진실 되게 하나님을 섬기며 인정받는 신앙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을 버린다는 것은 자기 삶을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떠난다는 것은 영적 고아가 되어 아무런 보장이 없는 외나무다리를 어린아이가 건너가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길 때 큰 허물로 인정받을 것이 없는 사람도 신앙 하나 때문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고, 믿음 하나 때문에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임하게 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신앙에 승리하면 나라도 가정도 개인도 잘되고 마음도 평안하고 기쁨과 소망이 넘치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이 넘치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 앞에 악한 일을 행할 때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신28:20) 아멘.
악을 행하면 축복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악’이란 여호와와 그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든 파멸의 기초인 것입니다. 멸망의 지름길이고, 인생의 모든 불행의 통로가 됩니다.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신 28:21,22)아멘.
여러분, 악을 피해야지 병을 피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면서 병을 피해 다니면 병이 그를 따라서 모든 재앙이 온다고 했습니다. 병이 무서워서 예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자기를 위해,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침투해 있는 악한 생각, 악한 행위와 악한 말, 모두 떨쳐 버리고 선을 추구하는 성도님 되길 축원합니다.
이 세계는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여 살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선에 대한 보상을 베풀어 주십니다.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욥 4:8,9) 아멘.
그러므로 오늘도 밝은 마음과 밝은 눈을, 밝은 생각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③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할 때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렘 48:10) 아멘.
세상일에도 맡은 일에 게으르면 파직(罷職)되거나 자격이 박탈당하는데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절대로 게으르면 안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게으름 곧 태만은 ‘악’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께 대한 불충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마 25:26)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일에 태만하지 말고 맡긴 일에 전심전력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것을 맡겨주시고, 더 위대한 열매를 맺게 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하려고 애쓰고 그 일을 본업으로 생각하고 신앙을 제일 우선순위로 여기며 사는 성도는 승리만 있습니다. 실패해도 회복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역사가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1) 아멘.

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자
① 여호와를 찾을 때
하나님의 진노 중에라도 여호와를 찾을 때는 진노 당하기 전보다 더 사랑을 받을 수 있고 회복되어 집니다.
‘긍휼’이란 말은 자비, 인자,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찾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사 55:6) 아멘.
성경에도 여호와께 찾고 매달리며 잘못했다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용서해주시고 싸매주시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4,17) 아멘.

② 지은 죄를 회개할 때
지은 죄를 회개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히 변치 않는 약속입니다. 회개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 55:7) 아멘.

③ 하나님 앞에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신령과 진정으로 제단을 쌓을 때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삼하 24:25) 아멘.
이는 다윗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인구조사를 함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로 백성이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 죽어갔을 때 다윗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므로 그 땅을 위한 예배를 받으시고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전염병을 거두셨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염병이 있다고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예배모임도 줄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열심히 모여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질병, 유행병을 막아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른 신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지 않으며,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를 찾을 때,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이 땅을 고쳐주시고 영원히 보장해 주실 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망하는 자가 받는 복

[이사야 44장 1절~5절]
1절 -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2절 -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3절 -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4절 -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5절 - 한 사람은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할 것이며 또 한 사람은 야곱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를 것이며 또 다른 사람은 자기가 여호와께 속하였음을 그의 손으로 기록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존귀히 여김을 받으리라
[마태복음 5장 3절]
3절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봉독한 말씀 이사야 44장에 있는 말씀 가운데 특별히 3절에 보면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란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말한 자에게 물을 주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그런 사람에게 성신을 부어 주고 또 하나님의 복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 가운데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첫째 복이 무엇인가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며 갈망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이삭의 쌍둥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견해로 본다면 에서가 야곱보다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에서는 대장부답게 산과 들로 다니면서 짐승을 사냥해 오고 장자권도 팥죽 한 그릇에 척척 넘겨 주고 육체의 생김새부터가 몸이 붉고 털이 많아 남자답고 마음도 넓어 보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몸에 털도 없이 매끈매끈해서 얌체같이 생긴데다 하는 짓은 또 엄마 치마자락이나 붙잡고 부엌 구석에나 따라다니고 그러다가 형이 배고플 때를 이용해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빼앗고 아버지의 눈을 속여 축복 기도를 받고 외삼촌 댁에 가서는 많은 재산을 제 것으로 만든 약삭 빠른 사람이요, 얌체같은 어떻게 보면 도적놈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야곱이 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왜 이스라엘이란 축복을 받았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야곱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꼭 받아야 한다는 사모하는 마음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에서는 버림을 받았지만 야곱은 큰 은혜와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에서는 아무리 대범하고 남자다운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꼭 받아야 되겠다고 하는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다른 것이 다 훌륭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 '나는 하나님 없이도 산다'하는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할 수도 없고 축복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시지만 갈망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싫어하시고 미워하십니다.
렘 2:13절에 보면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이신대, 그 하나님을 떠나서 의지하는 마음도 없이 스스로 노력하여 잘 살아 보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악을 행한다고 하셨습니다. 웅덩이를 아무리 파려고 해도 터진 웅덩이가 되서 다 물이 새어 나가는데, 너희들이 생수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너희들 스스로 잘 살아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은 쓸데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 4:4절에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랬습니다. 이 세상만 사랑하고 이 세상과 짝한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원수라고 하는 말입니다. 주님을 갈망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적인 면에서 간음 자입니다.
그러면 과연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 은혜를 갈망하는 자가 받을 축복은 무엇인가 살펴 보도록 합시다.

1. 새 힘을 얻습니다.
사 40:30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모하고 앙망하는 만큼 새 힘과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받을 수 없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날마다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앙망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새 힘을 주십니다. 저는 영력이 떨어지고 피곤할 때는 그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러러 하나님을 바라보고 엎드려만 있어도 하나님께 마치 전기를 통하듯이 새 힘을 주시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하나님을 갈망할수록 새 힘과 능력은 더 크게 받고, 반대로 세상을 사랑하고 사모할수록 영적인 능력은 쇠퇴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할수록 우리의 영혼은 올라가고 새 힘을 얻고, 세상을 사모하고 사랑할수록 우리의 영력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이 허락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가물어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아멘.

 

2. 수치를 당치 않습니다.

사 49:23절에 "나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곧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 사모하는 자는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식어지고 하나님을 멀리할 때는 이방 민족을 들어서 자기 백성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수치를 당하게 한 다음에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수치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탕자의 비유 말씀 가운데 작은 아들은 아버지 없이도 잘살 것 같아서 자기 몫의 재산을 가지고 멀리 떠난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옷은 다 떨어지고 먹을 것이 없어 돼지 먹이로 배를 채우며 돼지 우리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수치스러운 자리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회개하고 돌아올 때에 아버지께서는 새 옷을 입히시고 가락지를 끼우고 내 아들이라고 부르시며 다시 존귀한 자리를 주었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믿음이 식어지고 세상으로 자꾸만 나가면 하나님께서 실패와 낭패를 주셔서 수치와 욕을 당케하시는 것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버리면 발에 밟힌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예수 믿는 신자들이 믿음이 식어지면 맛을 잃어버려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힌다는 것으로 수치와 욕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삼상 2:30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순간순간 갈망하며, 마음 속에 주님을 늘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급히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때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켜주시고 수치를 당치 않게 하시며 도리어 존귀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갈망하고 사모하며 '물 떠난 고기는 살지 몰라도 나는 주님 떠나서는 못삽니다'라는 절실한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살면 하나님께서는 존귀하게 높이 들어 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나갈 때에 생각마다 주님을 사모하고, 말마다 주님을 증거하고, 걸음마다 주님과 동행하면서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과 기도하는 마음이 변치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3. 구원을 얻습니다.

사 45:22절에 보면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간절히 앙망하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죄인, 음부 탕녀, 부랑자라도 자기의 죄를 깨닫고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받게 되어 있으며, 은혜를 사모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배부른 사람이 밥상을 대하듯이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적으로 볼 때 훌륭해 보여도 구원을 못 받습니다.

 

4. 천국을 소유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팔복 가운데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가난하다'는 뜻은 무엇인가 하면 배고픈 사람이 몹시 배가 고파서 밥 한 술이라도 얻어 먹고 싶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자는 결국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은 은혜도 못 받고 천국에도 못 들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귀영화가 있고 몸이 건강하고 돈벌이가 잘 되어도 우리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늘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여호와를 앙망하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그 같은 심정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5. 성령의 충만함을 받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가지려면 이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불타 올라야 합니다. 그래서 행 1:4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성령)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사모하고 기다리고 바라볼 때에 성령을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신자들이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사모하며 기다리는 열흘동안 준비하며 기도하다가 마침내 성령의 불세례를 받고 방언이 나오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하게 체험하고 능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체험이 없이 교회에 나오면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고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하나님 만나는 체험을 가지면 그 이상 더 큰 기쁨이 없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처음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졌을 때 왠지 모르게 성령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 말씀도 많이 읽고 하다가 어느 부흥회 참석 중에 마침내 성령을 받았는데 그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만나는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 그저 줄테면 주고 말테면 마시오'하는 자는 결코 받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적 부흥사인 무디 목사님은 구두 수선공으로서 국민학교 3학년 밖에 못 나온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설교를 하고나자 어떤 부인들이 '꼭 선생님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줄께요'하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사실 목사님들은 설교하고 나서 은혜 받았다는 말을 할 때 제일 좋아합니다. 그리고 다른 말을 하면 별로 달갑지 않은 것인데 역시 무디 목사님도 자꾸 기도해 주겠다는 말에 나중엔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들은 '당신의 설교에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 다음부터 무디 목사님은 자극을 받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에게 성령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불을 나에게 주시옵소서'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어찌나 사모했던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고 할 정도로 사모하며 오래 준비 기도를 하던 중 하루는 뉴욕 거리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기도가 하고 싶어서 부랴 부랴 친구집에 찾아가 방을 빌려서 엎드려 기도하는데 기도가 잘 나오더니 마침내 강한 불이 임하였습니다. 어찌 뜨겁고 강한 능력이 나오는지 이젠 너무 뜨거워서 죽을 것만 같아 '주여 그만 주시옵소서 그만, 그만...' 할 정도로 성령의 불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무식쟁이 무디를 따라갈 전도자가 없습니다. 문법적으로 보면 그 설교는 다 틀리고 목소리는 코맹맹이 소리가 나고 키는 조그만하여 보잘 것 없는데, 그는 그런 강한 성령의 능력을 받고 세계적인 부흥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사모하고 매달리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도 못받고 왔다갔다 하면 이것은 꼭 예수 믿는 것이 호랑이 꼬리를 붙잡은 것 같아서 안 믿자니 꼭 지옥이 있는 것 같고 낮에 나와라, 밤에 나와라, 속회본다, 또 이런저런 헌금 남들 하는데 안할 수도 없고 귀찮고 신앙생활이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받고 나면 예배 시간이 기다려지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보면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른 땅과 같이 갈한 심령이 되어서 은혜를 사모할 때 성령을 받고 축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자는 비록 도적놈 같은 사람이라도, 깡패, 부랑자, 창녀라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축복을 주십니다.

 

여러분, 이렇게 갈망하는 자가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확실히 갈망하는 자에게 은혜와 축복을 주시며 갈망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마른 땅과 같이 갈급한 심령이 되어서 은혜받고 성령받고 다 축복받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

 

복된 두려움

[이사야 6장 1절~8절]
1절 -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절 -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절 -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절 -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절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절 -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절 -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절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마태복음 10장 28절~31절]
28절 -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절 -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절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절 -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두려움은 참으로 해로운 것입니다. 모든 질병의 70% 이상이 마음속의 근심과 두려움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 중에는 유익하고 복된 두려움도 있습니다.
가령 교통 사고를 두려워하지 않고 교통 신호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해지기 전에 시체가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안전을 위해 두려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큰 힘 네 가지가 있는데 즉 두려움, 소망, 믿음,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도 가장 큰 힘을 작용하는 것이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두려움을 갖느냐가 사람의 행동과 삶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두려움을 갖느냐에 따라 그것이 축복이 될 수도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성경은 모든 죄와 악의 주원인을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Prairie overcomer)라고 했습니다. 잠 1: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축복된 결과를 가져오는 몇 가지 복된 두려움에 대해 알아보면서 은혜를 받도록 하십시다.

1.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의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마 10:28절이하에 보면 "두려워하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섞여 있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이어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안된다고 하시면서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만유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하는 자는 다른 두려움은 다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시 5:9절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찌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심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삼상 2:30절에도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은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하고 물리쳤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존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받고 또 죄를 이기고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 할 때 죄를 회개할 수도 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보았던 환상 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고 주위에 스랍들이 모여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서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둘로는 날면서 서로 창화하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한 광경을 상상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이며, 하늘의 영물들도 얼마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를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경을 본 이사야는 저절로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죄를 멀리하게 되고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게도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두려움이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두려움입니다.

 

2. 말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효자라면 마땅히 부모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고 두려워하는 것같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땅히 그분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사 66:2절에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앞에 벌벌 떠는 그 사람을 보살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박태선 같은 사람이 처음에는 성령의 불을 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했는데 왜 나중에는 십자가를 떼어버리고 성경책을 찢어버리고 마귀의 종이 되어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기가 좀 올라가고 기사와 이적이 나타난다고 감히 성경 말씀을 함부로 대하여 자기가 '감람나무다'하다가 다음엔 '영모(영적 모친)'라 하고 자기의 젖을 먹어야 구원받고 천년성에 들어와야 구원받는다고 하다가 다음에는 자기가 하나님이고 예수님은 사생아라고까지 말하게 되었습니다.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은사를 많이 받고 기사와 이적을 행해도 다 허사요, 위험합니다. 오늘날도 성경을 제멋대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언제인가는 박태선 같이 되거나 아니면 이 다음 심판대 앞에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책망받을 때가 올 것입니다.

잠 13:13절에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다가 징계받은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대하 36:15, 16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멸시하다가 끝내 멸망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두려워하고 말씀 앞에 떨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복된 두려움입니다.

 

3.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죄의 값이 얼마나 크고 끔찍한가를 아는 것은 참으로 복된 두려움입니다. 잠시 잠깐의 죄악의 쾌락 때문에 일평생 후회하고 가슴을 치는 일이 있게도 됩니다. 내일 될 일, 모레 될 일 다 분명치 않지만 죄의 결과는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릅니다. 양심의 심판을 받아 고통 당하거나 육신의 질병으로 받거나, 사업의 실패로 받거나, 국법으로 받거나, 아니면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민 32:23절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아야 합니다. 잠 28:13절에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죄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내세에 영원한 고통의 지옥 형벌을 받게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떨며 두려워하고,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복된 두려움이며 누구나 꼭 가져야 할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 아 멘 -

 


 

놀랍고 놀라우신 예수님

[이사야 9장 6절~7절]
6절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절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성도 여러분, 연일 계속되는 매서운 추위와 꽃도, 나뭇잎도 다 진 겨울의 황량한 풍경은 다소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을 메마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신선한 활력소가 될 만한 사건이나 만남 등을 찾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크고 놀라운 사건과 만남을 주셨으니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과 그분을 우리가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은 '놀랍고 놀라우신 예수님'에 관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775년 어느날 볼티모어에서 가장 큰 호텔에 허름한 농부 차림의 한 손님이 들어와 방을 달라고 하니까 지배인이 거절하고 내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후 그분이 바로 미국의 부통령 토머스 제퍼슨(ThomasJefferson)임을 알고는 깜짝 놀란 지배인이 즉시 사람을 보내어 방을 드릴터이니 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제퍼슨이 '나는 이미 방을 얻었습니다. 그의 뜻은 고마우나 더러운 미국의 농부에게 줄 방이 없다면, 미합중국의 부통령이 있을 방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일러주라고 하고 돌려 보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큼 위대한 예수님은 한 작은 나라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볼품없는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세주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에 대해 주전(B.C.) 700여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 3)라고 했습니다.

한편 사 9:6절에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Wonderful Counselor) 전능하신 하나님이라(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라(Everlasting Father) 평강의 왕이시라(Prince of Peace)"고 예언했습니다. 그 중 '기묘자'란 놀라운 분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간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우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들은 이 놀라우신 예수님을 잘 증거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교회가 살고,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을 더 많이 구원할 수가 있습니다. 이에 오늘 우리는 실로 놀랍고 놀라우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그렇듯 놀라운 예수님을 보다 확실히 증거하며 사는 계기를 삼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탄생이 놀랍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수의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창 3:15절에는 "여자의 후손"이 나타나 사단의 권세를 깨뜨릴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인간의 씨로 잉태된 남자의 후손이지만 예수님만은 죄없는 인간으로 오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될 것을 창세기에서 이미 예언하신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탄생 장소를 분명하게 예언했는데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미 5:2).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리라고 했습니다(사 7:14). 그리고 700년 후에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성령으로 잉태될 것과 '예수'라는 메시야를 출산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요셉이 약혼자가 임신한 것을 알고 가만히 끊고자 할 때에 천사가 나타나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탄생 때에도 놀라운 일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상한 별빛을 하늘에 비추게 하고 그 이상한 별을 본 동방의 박사들은 그 별의 인도를 받아 예수께 찾아와 경배했고 또 허다한 천군과 천사들이 나타나 찬송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목자들도 이 광경을 보고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동방박사는 높은 계급의 인간을 대표하고 목자들은 천민 계급의 사람을 대표합니다. 즉 예수님은 높고 낮음이 없이 모든 사람의 구세주가 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로 인해 어둠의 권세가 침범을 당했고 사단이 흥분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의 목적을 방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왕을 흥분시켜 두 살 아래의 모든 어린이를 죽이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진정 역사적이고 신비하며 우주적인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2. 예수님의 생애는 놀랍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존경하는 인물을 뽑아서 그분 가까이 지내면서 살펴보면 분명 허물과 단점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는 어떤 결점이나 약점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총독도 심문한 후에 판결내리기를 '이 의로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이발사가 목사님의 머리를 깎아주면서 교인들의 약점을 들추며 그래서 교회에 안나간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발사에게 묻기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했더니 '그분은 아무 결점이나 흠이 없지요' 하더랍니다. 실로 예수님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33년간 사시면서도 죄에 조금도 물들지 않았습니다. 사단이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의 마음에 비집고 들어가려고 강하게 두드려 보았으나 허사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전 생애 동안 죄악된 것을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슬픔에 가득찬 자를 위로하시고 죽은 자까지도 살리시는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 세상에서 사셨으나 그 의로움과 능력과 권세에 있어서 인간을 초월한 신적 삶을 사셨던 예수님의 생애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3. 예수님의 메시지는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황금율이나 산상 설교나 4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 부분만이 아닙니다. 성경전체가 그분의 메시지입니다. 신구약 1169장 전체의 중심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런 메시지를 세상에 남긴 일이 없습니다. 공자나 모하멧이나 석가도 오래 전에 메시지를 준 바 있고, 또 요셉 스미스(Joseph Smith)가 몰몬경에다 설교를 남겼고,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또 크리스찬 싸이언스에서는 메리 베이커 엘디(Mary Baker Eldy)가 위대한 메시지를 가지고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모든 메시지를 예수님의 것과 비교해 볼 때 두더지가 판 모래 한줌과 태산을 비교하는 것 같습니다.

큰 진리 한가지만 살펴본다면 롬 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란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정죄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롬 5:8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우리로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합니다. 또한 완전한 용서의 피가 우리 위에 떨어짐을 발견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이전의 세상과 지금 이 세상과 오고 오는 모든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합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말씀하십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는 나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여자 성도가 몇달 동안 앓다가 목사님이 심방을 가니까 꿈꾼 사실을 간증하는데 자기가 아름다운 강가에 섰는데 강 건너편을 바라보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섰는데 아주 행복해 보였고, 빨리 강을 건너와 자기들과 함께 살자고 웃으며 손짓을 하더랍니다. 그 말을 하고나서 '사람들이 하늘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안다면 죽음을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을텐데요' 하더랍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완전한 진리이며 영원한 소망의 메시지로서 진정 놀라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이 사람처럼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일이 없다'고 했고, 또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모두 놀랐다고 했는데, 헬라어로 '놀랐다(Austonished)'는 말은 '녹 아웃(Knock Out)'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영적으로 K.O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예나 지금이나 놀랍습니다.

 

4. 예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너무 놀라워서 우리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헤아려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요 3:16절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길까요.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넓을까요. 모든 족속과 방언과 세상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할 만큼 넓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을까요. 한 심령 한 심령의 깊은 상처와 슬픔까지도 위로하시고 세밀히 치유하실만큼 깊습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높을까요. 깊고 깊은 지옥에 떨어질 죄인을 지극히 높고 영광스러운 천국으로 올려 보낼 만큼 높습니다.

 

5. 예수님의 죽음은 놀랍습니다.

갈보리 산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역사이래 이런 장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죽기 원하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사단은 아마도 하나님의 계획을 뒤엎어 놓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시켜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때 초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태양은 세 시간 동안 빛을 잃고 캄캄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뒤덮인 죄악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 갈라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인간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줄 수 있는 오직 한 사람을 주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지진이 일어나 세상을 흔들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 나라들이 흔들일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죽으시고 죽음을 맛보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모든 죄를 씻음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만 믿고 의지하면 영원히 안전한 것입니다.

 

6. 예수님의 부활은 놀랍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계속해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며 동시에 그 죽음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결국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을 깨치고 부활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을 때 그가 말씀한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의 부활때문에 우리도 어느날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어느날 공중재림 하실 때 믿음안에서 죽은 성도들은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고 살아남아 있던 성도들은 구름속으로 휴거되어 주님을 만나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묻혔다가 사망 권세를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와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되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의 부활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7. 예수님의 재림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초림하셨을 때 겸손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의 큰 영광과 능력과 권세와 아름다움을 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성도들에게 큰 축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과 믿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슬픔과 절망의 날이 될 것입니다. 실로 영원한 구세주인 동시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님은 모든 만민에게 가장 큰 놀라움을 줄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한 중국 사람이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보려는 큰 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몇 해 후에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를 믿지 않은 채 돌아가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못벌었지만 고심 끝에 중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엎드려 절하면서 '죄송합니다. 돈은 많이 가져오지 못했지만 돈보다 더 좋은 것을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 후에 예수님의 죄사함, 영생, 천국에 대해서 말씀드시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해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돌아오기를 참 잘했다'라며 기뻐했습니다. 그리고는 몇 일 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는 그 아들에게 구원에 대해서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더니 다 듣고 나서 '정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느냐 그가 그처럼 나를 사랑하셨다구' 할 때 아들은 분명히 그렇다고 확신시켜 드렸습니다. 이에 늙은 아버지는 '나는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내 온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하고 곧 주님의 품안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놀라운 구세주이십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탄생과 생애, 그의 메시지와 사랑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앞으로 있게될 그의 재림 모두가 놀랍고 위대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분명 당신의 구주가 되셨습니까. 아직 믿지 못했다면 오늘이라도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의 구주가 되십니다.

'주 예수여, 내가 믿습니다.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옵소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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